팡 세

 

 

 

차 례

 

포르루아얄 판의 서문 (1670 년 )

≪팡세≫의 역사


제 1 편 정신과 문체에 관한 사상

제 2 편 신을 떠난 인간의 비참

제 3 편 내기의 필요성

제 4 편 신앙의 수단

제 5 편 정의와 현실의 이유

제 6 편 철학자들

제 7 편 도덕과 교의

제 8 편 그리스도교의 기초

제 9 편 영속성

제 10 편 표 징

제 11 편 예 언

제 12 편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

제 13 편 기 적

제 14 편 그리스도 논쟁 단편

파스칼의 생애

 

 

 

 

 

 

 

 

 

 

포르루아얄 판의 서문(1670년)

파스칼은 수학 • 물리학 등 세속적 학문의 연구에서 특이한 진보를 보였음에도 젊어서 이를 걷어치우고 서른 살 때부터 더 중대하고 고상한 문제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였다 . 그리하여 파스칼은 건강이 허락하는 한 성서 • 교부들 , 그리고 그리스도교 도덕의 연구에 전념하였다.

그가 그런 학문에 탁월했다는 것은 그의 업적이 그 방면에서 성공한 것으로 알려진 것만 보아도 명백하지만, 만약 하나님이 그가 여생을 바쳐 대성하려던 종교상의 저작을 완성하는 데 충분한 시간을 주셨다면, 그 저작이 그가 할 수 있었던 다른 어떤 업적보다 훨씬 우수한 것이 되었으리라. 이 문제에 관한 그의 견해는 다른 모든 사물에 관해서 가졌던 견해를 훨씬 뛰어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제 여기 출판된 극소량의 단장 ( 斷章 ) 만을 보아도 상술한 바를 수긍하기 어렵다는 독자는 아마도 없을 줄로 안다. 특히 그가 그것을 기술한 양식이나, 우리가 편찬한 경위를 알게 되면 더욱 그럴 것이다.

파스칼이 이 저작의 복안을 세운 것은 그가 죽기 수 년 전이었다. 그러나 그가 그처럼 오랫동안 이것에 관해서 아무것도 쓰지 않은 것은 조금도 놀랄 것은 못 된다 . 그는 갖가지 사물을 외부에 표현할 때까지, 깊이 사색하여 머릿속에서 정돈하고, 예기의 결과를 얻기 위해서는 어느 것을 먼저 하고 어느 것을 후에 할 것인가 전체를 어떠한 순서로 배열할 것인가에 관해 주의 깊이 숙고하고 음미함을 보통으로 삼았다. 그는 한번 머리에 떠오른 일은 결코 잊어버린 일이 없다고 스스로 가끔 말했던 것처럼, 이례적일 정도로 탁월한 기억력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어떤 기간 동안 하나의 문제에 관해 정신을 집중하고 있을 때도 한번 머리에 떠오른 사상이 도망쳐 버리지 않았나 하는 염려는 전혀 갖지 않았다. 그가 집필을 가끔 연기한 것은 그만한 시간이 없거나 늘 쇠약한 건강이 부지런히 일함을 허용하 지 않았던 데에도 이유가 있었지만, 주요한 이유는 위에 말한 것과 같았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의 죽음과 더불어 그가 복안에 관해 생각했던 대부분을 놓쳐 버린 셈이다. 그는 사용하고자 생각했던 주요한 논리, 그 저작을 의거시키고자 했던 기초, 또 거기서 채용하고자 했던 순서 등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남겨두지 않았다. 그런데 그런 것들은 확실히 중요한 것이다 . 그는 그런 모든 것을 게을리 했기 때문에, 정작 쓰고자 할 때는 쓸 수 없는 상태에 빠지고 만 것 같다.

그런데 그는 어떤 기회에, 즉 10 년이나 12 년 전에 이 문제에 관해 그가 머리에 그렸던 바를 저술이 아닌 육성으로 이야기하지 않으면 안 될 일이 있었다. 즉 그는 수 명의 매우 고명한 친구들의 청을 받는 대로 그들 앞에서 그것을 이야기했던 것이다. 그때 그는 자기의 저작의 원안을 짧은 말로 발표했다 . 그는 주제 및 자료가 될 것을 표시하고 그 증거와 원리를 개괄적으로 말했으며 취급하고자 하는 문제의 순서와 관련을 명백히 했다 . 이런 종류의 사물을 비판할 능력을 갖추고 있던 그 사람들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 “이처럼 훌륭하고, 강렬하고, 감동적이고, 설복적인 강연은 처음 들었다 . 완전히 매혹됐다. 미리 준비한 바도 없고 특히 고심한 바도 없이 앉은 자리에서 2~3 시간에 걸쳐 행해진 이 강연의 의도와 복안을 보더라도 , 그것이 이미 그 능력과 재능으로 세상에 알려진 그의 손에 의해 실현되고 완성된 경우에 얼마나 훌륭한 것이 될 것이냐는 상상하고도 남는다 . 그는 모든 저서를 만들어 내는데, 남의 눈에는 아무리 좋게 보여도 자기의 최초의 생각에 결코 만족하지 않고, 애초부터 남의 눈에는 좋게 보였던 문장도 가끔 8 회 내지 10 회에 걸쳐 수정하는 습관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

그는 그들을 향해 인심에 가장 강한 인상을 주고 사람을 설득하는 데 가장 알맞은 증거는 무엇인가를 밝혀 준 후,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으로 인정되는 사물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교야말로 이 세상에서 확실성과 명증성을 갖추고 있다는 것을 표시하고자 의도했다.

먼저 그는 인간 묘사에서 시작했다 . 인간의 내면이나 외면에서 정신의 가장 미묘한 움직임에 이르기까지, 인간을 아는 데 도움을 주는 것은 무엇이든 빠뜨리지 않고 이야기했다 . 다음에 그는 늘 만사 특히 자신에 관한 완전한 무지와 무관심 속에 삶을 보내온 어떤 인간이 위에 말한 묘사에 의해 스스로를 반성하고 자기가 무엇인가를 성찰했다고 가정했다. 이 사람은 거기서 자기가 그때까지 생각해 본 일도 없던 무수의 사물을 발견하고 놀란다. 그는 파스칼이 자신에게 감지시키려던 모든 것, 즉 자신의 위대함과 비천함, 자신의 장점과 단점 , 자신에게 남아 있는 근소한 광명과 거의 팔방이 막혀 있는 암흑, 그리고 최후의 본성에 있는 불가사의한 모순 등에 놀라지 않고서는 인식치 못할 것이다. 만약 그에게 다소라도 이성이 있다면, 그 후 그는 무관심한 채로 있지 못했을 것이다. 그때까지 여하히 무감각한 인간이었다 하더라도 이렇게 해서 자기가 어떤 자인가를 알게 된 이상 자기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고 싶어 할 것이다.

파스칼은 그 사람이 그렇게 중대한 의문을 품지 않고서는 못 견딜 심정을 갖게 하고 나서는 철학자들을 찾아가게 한다 . 거기서 그는 모든 학파의 대철학자들이 인간의 문제에 관해 이야기했던 바를 그에게 모두 설명해 준 후 대철학자들의 주장 속에 내포된 많은 결함 • 약점 • 모순 • 허위 등을 깨닫게 하고, 그가 믿을 것은 결코 철학자가 아니라는 것을 쉽게 알려 준다.

다음에 파스칼은 그가 전 세계와 모든 시대를 돌아보게 하고 , 거기서 만나는 무수한 종교에 주의를 돌리게 한다 . 그러나 이와 동시에 매우 강력하고 명확한 이유를 들어 , 그런 모든 종교가 허식, 우매, 오류, 미망, 부조리에 가득 차 있는 것이어서 그를 만족시킬 아무것도 갖고 있지 못함을 알려 준다.

끝으로 파스칼은 그의 눈을 유대민족에게로 돌리게 한다 . 그리고 곧 그의 주의를 끄는 매우 이상스러운 그들의 사정을 관찰하게 한다. 이 민족이 가지고 있는 모든 특이성을 표시한 후 파스칼은 어떤 독자적인 서적, 그에 의해 이 민족이 스스로를 다스리고, 그 속에 이 민족의 역사•법률•종교가 모두 포함되어 있는 서적에 주의를 돌려주기 위해 각별히 오랫동안 거기에 머무른다. 이 책을 열자마자, 그는 세계가 유일신의 창조물이고, 그와 같은 신이 인간을 자기의 생김생김에 따라 만들고, 그 상태에 알맞은 육체 및 정신적 장점의 전부를 수여해 주셨음을 이해하게 된다. 그는 아직도 이 진리를 납득하지 못할 것이나 마음으로 기쁘게 생각할 것임은 틀림없다. 그리고 신이 인간을 비롯한 우주만물의 창조주라는 가설 가운데, 인간이 자기 고유의 빛에 의해 상상한 모든 가설에 앞서는 진실한 것이 있음을 알려 주기 위해서는 이성만으로도 충분하다 . 그를 여기 머무르게 한 것은 인간을 그려놓은 그 그림에 의해 , 그가 창조주의 손을 떠날 적에는 갖고 있어야 할 이런 장점을 현재는 전혀 갖고 있지 않음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그는 오랫동안 이 의문 속에 잠겨 있지 않다. 같은 책을 그냥 읽어가는 중에, 신에 의해 더러움이 없는 상태로 만들어지고 모든 완전을 부여받은 인간은 최초의 행위로 그의 창조주에 배반하고 소여의 모든 장점을 신에 반항하기 위해 악용했다는 것을 발견하는 까닭이다.

여기에서 파스칼은 이 죄야말로 모든 죄 중에서 가장 큰 것이고, 그 형 벌은 단지 그것을 벌함으로써 타락한 최초의 인간이 순식간에 비참 • 허약 • 오류 • 맹목 속에 빠졌을 때에만 엿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 대대로 그 사람으로부터 타락을 전승해 가는 그의 모든 자손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한다.

그 다음에 파스칼은 이런 진리가 발견되는 이 책의 구석구석을 그에게 보여준다 . 그는 거기서 인간사란 약하고 혼란한 상태에 있어서만 야기된다는 것과, 모든 육체는 썩고 인간은 감성에 맡겨져 날 때부터 이미 악의 경향을 갖고 있다는 것이 가끔 언급되어 있는 것에 주의를 환기한다 . 그는 또 이 최초의 타락이야말로 인간의 본성에 있는 불가능한 일체의 원인일 뿐만 아니라 , 인간의 밖에서 일어나는 이유를 알 수 없는 무수한 현실의 원인임을 알려 준다 . 최후에 그는 이 책에 이렇게도 잘 그려진 인간이 그가 최초로 묘사한 인간상과 조금도 다름이 없음을 표시한다 .

이 사람에게는 그의 상태가 비참에 가득 차 있음을 깨닫게 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 파스칼은 이 같은 책 속에 그를 위안해 주는 것이 있음을 알려 준다 . 구원은 신의 수중에 있다는 것, 우리에게 없는 힘을 얻기 위해서는 이를 신에게서 구해야 한다는 것, 신은 스스로 자비심을 나타내서 인간을 위해 속죄를 하시고 또 인간의 무력을 보충해 주는 구세주를 보내 주시리라는 것 등이 그 속에 써 있다는 것을 알아두라고 한다.

이 민족의 책에 있는 극히 특이한 것을 많이 설명한 다음, 그는 지상의 실재에 관해 엄연히 말하고 진정한 종교의 관념을 준 것은 오직 이 책뿐이라는 것도 유의케 한다. 그는 이 책이 가르친 것에 부가해야 할 극히 현저한 특징을 이해시키고, 이 종교가 숭배의 대상인 신의 사랑 속에 예배 방식의 중심을 두고 있는 데 대해 각별한 주의를 환기 한다. 이것이야말로 완전히 독자적인 특성이고 이 종교를 다른 모든 종교와 구별하는 것이어서, 그런 본질적인 특징이 없는 다른 종교의 허위성이 드러난다고 한다.

파스칼은 부지불식중에 납득하도록 이 사람을 이끌어 놓고서는 그가 거기서 발견한 진리를 확신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별로 말을 하지 않으나, 그런 진리를 수락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누가 알려 주기만 하면 기뻐 수락할 수 있는 상태에 놓아두고, 또 그것이 그의 편안과 문제해결에 크게 공헌한다는 것을 알고 진심으로 그 진리가 견고하여 기초가 확실함을 바랄 수 있는 상태에 놓아둔다. 이것은 도리를 안 사람이 파스칼이 위에 제시한 모든 사물을 올바로 이해한 경우 당연히 취해야 할 태도이다 . 그렇게 하면 저자가 그에 관해 이야기했고, 또 그리스도교의 근본을 이루는 것으로서 납득시키고자 했던 중요한 진리의 진실성과 명백성을 확증하기 위해 계속해서 내놓고자 하는 모든 증거도 그는 쉽사리 승인하게 될 것으로 보인다.

파스칼은 여기 제시된 진리가 누구나 의심할 수 없는 확실한 책 속에 기록되어 있음을 일반적으로 제시한 후, 이런 증거의 약간을 간단히 말하기 위해 이런 진리가 특히 가득 차 있는 ≪모세의 서 ( 書 ) ≫에 주로 눈을 돌려 의심할 바 없는 여러 사정을 열거하면서 , 모세가 거짓을 써서 남겨 놓았다는 것도 불가능하고 , 만약 모세라는 인물이 교활한 인간이었다 하더라도 그가 그 책을 주었던 유대 민족이 그것에 속아 넘어간다는 것도 마찬가지로 불가능함을 명백히 한다.

그는 또 이 책 속에 기록되어 있는 위대한 기적에 관해서도 이야기한다 . 그리고 그 기적들은 거기에 교시되어 있는 종교에서 큰 가치를 갖고 있으므로, 단지 그것을 기록하고 있는 책의 권위에 의해서만이 아니라 그 기적들에 따라서 일어나 그것들을 의심할 여지가 없게 만들어 놓은 모든 사정으로 미루어 보아서도 거짓이 될 수 없음을 증명한다.

그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모세의 율법이 어떻게 표징적이었던가를, 유대민족에 일어났던 모든 일이 메시아의 내림에 의해 완성되는 진리의 표징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설명한다 . 그리고 또 이런 표징을 덮었던 막이 일단 올라간 이상 그것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인 사람들을 위해 성취하고 완성하였음을 안다는 것이 용이함을 설명한다.

다음에 그는 종교의 진리를 예언에 의해 증명하고자 한다. 이 점에 관해 그는 다른 어느 점보다도 훨씬 많이 부연한다. 그는 이 문제에 관해서는 많이 연구했고 또 자신만의 독특한 견해를 갖고 있었으므로, 설명하는 방식이 실로 명쾌하고 의의와 결과를 놀랄만한 자재성( 自在性 )을 가지고 해명하여 모두 백일하에 드러내고 그의 전 능력을 발휘시킨다.

이리하여 구약성서의 모든 글들을 통독하고 종교의 진리의 근저가 되고 증거가 되는 확실한 관찰을 한 후, 맨 나중에 신약성서에 관해 말하고 거기서 복음의 진리의 증명을 끄집어내고자 한다.

그는 먼저 예수 그리스도 이야기부터 시작한다. 그는 그리스도교를 예언과 모든 율법의 표징에 의해 항변의 여지가 없을 만큼 증명하고, 그것들이 그리스도교에서 완전한 실현을 보고 있음을 말하였음에도 불구하고 ,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그리스도의 인격 그 자체, 그의 기적, 그의 교설, 그의 생활환경 등에서 끄집어낸 많은 증거를 제공한다.

다음으로 그는 사도들에게 눈을 돌린다. 그들이 교활했다거나 잘못이었다고 가정하지 않고서 그들을 허위의 무리로 책할 수 없음을 확인한 다음, 그들이 도처에서 소리 높여 선포한 신앙의 진실성을 설명하기 위해서 어떤 가정이든 마찬가지로 불가능함을 명백히 표시한다.

요컨대 그는 복음 자체에 관해, 복음기자들의 문체와 그들의 인격에 관해, 특히 사도들과 그들의 문서에 관해, 허다한 놀라운 기적에 관해, 순교자들에 관해, 성도들에 관해, 한 마디로 그리스도교가 완전히 건설될 때까지 밟아온 모든 과정에 관해 대단히 훌륭한 지시를 내리면서, 복음의 역사의 진실성에 공헌할 수 있는 것은 어느 것 하나 빼놓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단 한 번의 강연으로는 저작에서 취급하고자 의도했던 정도로 광범위하고도 상세히 논급할 여유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상술한 바가 인간의 힘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이라는 것, 인간들 사이에 확립하게끔 스스로 도래한 종교를 항변하기 어려운 방법으로서 증명하기 위해, 서로 다른 사건과 사상을 모두 일치 • 협력시키고 그것들을 통합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신뿐임을 납득시킬 만한 것은 전부 말한 것이다.

이상이 파스칼이 그 강연에서 구상중인 대 저술의 요약으로서 청중에게 말했던 이야기의 골자이다. 나는 최근 알게 된 그 당시의 출석자 중의 한 사람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가지고 이것을 썼다.

우리는 이제 공개되는 이 단장들 속에서 그 커다란 원안의 일부를 엿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극히 근소하고 심히 불완전하고 부연도 소화도 불충분한 것이어서, 파스칼이 취급하려던 방법의 극히 막연한 개념을 주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게다가 여기에 공개되는 근소한 분량 속 재료의 배열에 한해, 그의 순서나 연락이 지켜지지 않았음을 기이하게 여길 필요는 없다. 서로 연관한 것이 거의 없었으므로 순서에 고집해 보았자 쓸 데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현존하는 것이 가장 적절하고 타당하다고 생각되는 방법에 따라 대체로 배열하는 데 만족한 셈이다 우리는 되도록 아는 사람이 저자의 원안을 일단 잘 이해하고 나서 순서의 결함을 보충하고, 이 단장들에 전개된 여러 가지 재료를 면밀히 고찰해서 그것을 써놓은 사람의 사상의 발자취를 더듬어 가면 결국 어디에 귀착하느냐는 것을 쉽게 판단하기를 희망한다.

만약 처음 강연이 전부 구술한 대로 기록되어 있었다면 이 저작의 손실도 다소 보충되었을 것이고, 설명이 불완전한 것이라 하더라도 최소한 그 소견본쯤은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신은 파스칼이 우리에게 어느 것도 남겨 줄 수 있는 여유를 주지 않았다. 그는 그 후 얼마 안 가 피로와 쇠약의 병에 거려 생애의 마지막 4 년간, 외관으로서는 그다지 심하지도 않았고 또 늘 병상에 누워 있었던 것도 아니었지만, 대단히 기분이 좋지 못해 일을 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게 되어 버렸다. 그래서 파스칼이 되도록 집필하지 않도록 하고, 조금이라도 정신을 집중시키는 것은 절대로 말하지 않게 하여 대수롭지 않거나 별로 피로를 가져오지 않는 사물만을 이야기하게 하는 것이 주위 사람들의 최대의 관심사였고 주요한 노력이었다.

사정이 이러했음에도 피곤과 병고의 4 년 동안에 그가 당시 구상 중이었던 이 저작의 현존하는 부분, 즉 우리가 공개하는 바의 일체를 만들고 쓴 것이다. 그는 마음 놓고 그 일에 전심할 수 있고 또 머릿속에서 이미 소화되고 준비된 바를 쓸 수 있는 날까지 자신의 건강이 완전히 회복됨을 기다리고 있었으나, 그래도 어떤 새로운 사상 • 견해 • 관념 • 표현방식 • 사용할 언어 등 훗날 그의 계획을 실현하는 데 도움을 줄만한 것이 머리에 떠오르면 잊어버리지 않도록 어디엔가 기록해 두곤 했다. 당시 그는 건강할 때처럼 일에 정신을 집중하거나, 떠오른 것을 머리와 기억에 길이 새겨둘 수 있는 상태에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무엇이건 손이 가 닿는 곳에 있는 종잇조각에 짧은 말로, 대부분 불완전한 말로 자기 사상을 기록했다. 그는 단지 자기 자신을 위해 그것을 쓰고 있었으므로 피곤하지 않도록 극히 간단히 기록해 놓았고, 또 그것도 머리에 떠오른 견해나 관념을 상기하는 데 필요한 것만을 쓰면 된다고 생각했다.

이 책에 있는 단장의 대부분은 이렇게 해서 써진 것이다. 그러므로 그 속에 상당히 불완전한 것이나, 너무 간단한 것이나, 설명이 충분하지 못한 것이나, 상당히 부적절하고 무취미한 말이나 표현이 있다 해도 놀랄 바 아니다. 그렇지만 파스칼이 때로는 펜을 손에 잡으면, 완전히 건강했을 때와 같은 정력과 노력을 가지고 했다고는 말할 수 없더라도, 생각하는 대로 별지장 없이 그 사상을 추진하고 다소 확장하는 일도 있었다. 다른 것들에 비해 보다 낫게 부연되고 서술된 사상이나, 보다 연락이 잘 취해진 완전한 장 ( 章 ) 이 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이로써 어떻게 ≪ 팡세≫라는 책이 쓰였는지를 밝혔다. 그리고 나는 아픈 사람이 가벼운 동기와 약한 시도로써 머리에 떠오른 사상을 놓치지 않으려고 자기 일 개인을 위해 썼고 그 후 한 번 다시 읽어 보지도 못하고 고쳐지지도 않은 초고를 보고서, 저렇게 명쾌하게 질서를 세워 사물을 처리하고 또 저렇게 특이하고도 고귀한 그리고 품위 있는 표현을 자기가 말하고자 한 내용에 부여할 수 있었던, 그가 지금까지의 어느 저작보다도 힘을 다할 결의를 하고 신이 주신 모든 정력과 재능을 기울일 작정이었고, 그것의 완성에는 몸이 건강해도 10 년이란 세월에 요한다고 가끔 말하고 있던 이 저작이 만약 건강이 완전히 회복되어 마지막 추고까지 할 수 있었 다면 어떤 것이 되었을 것인가는 누구도 상상하기 어렵지 않으리라고 본다.

파스칼이 종교에 관해 집필할 계획을 알고 있었던 우리는 그의 사후, 이 문제에 관해 기술한 것을 비상히 면밀하게 수집했다. 그런 기록은 몇몇 묶음으로 나누어져 있기는 했으나, 내가 여기에 지적한 바처럼, 그가 머리에 떠오르는 대로 종잇조각에 써 둔 그의 사상의 최초 표현에 지나지 않았으므로 순서도 없고 맥락도 없다. 그것들은 모두 극히 불완전한데다가 필적도 되는 대로 써 놓은 것이어서 판독하는 데 매우 고심했다.

우리가 최초로 한 일은, 그것들을 그 혼란한 상태대로 깨끗이 베껴 쓰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 본문보다 읽기 쉽고 심사하기 쉽게 해 보았으나 그것이 형식이 갖추어져 있지 않고 서로 연결이 없으며 대부분 설명이 불충분함을 알게 되었으므로, 여러 식견 있는 사람들이 빈번히 간청했는데도 다년간 간행할 생각이 전혀 나지 않았다 . 그도 그럴 것이 문서들을 있는 그대로의 형식으로 간행하면, 이미 평판이 나 있는 이 저작에 대해 세상 사람들이 갖고 있던 기대와 예상을 만족시킬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간행을 요구하는 사람들의 요망과 염원에 양보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게다가 이것을 읽을 만한 사람이라면 거친 스케치와 완성품을 구별하고, 비록 불완전한 견본이라도 그것을 읽어봄으로써 전체의 사업을 통찰할 만한 정도로 공정한 판단력을 충분히 갖고 있는 것으로 믿고, 일을 진척시켰다. 우리는 이렇게 이를 공표할 결의를 가졌다. 그러나 그것을 하는 데도 여러 가지 방법이 있으므로 어느 방법을 선택하느냐를 결정짓는 데는 상당한 시일을 요했다 .

제일 먼저 생각되고 확실히 가장 용이하리라고 상정한 것은, 그것들을 발견된 그대로의 형식으로 곧 인쇄에 회부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얼마 안 가 우리는 그렇게 하다간 그것들에게 기대할 수 있는 대부분의 결과를 상실케 되리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 이유는 맥락이 잘 통하고 명확히 전개된 사상이 절반 가까이 소화된 다른 사상 속에 혼입되어 있든가 흡수되어 있는 것으로 생각되는가 하면, 그것을 쓴 당사자 이외에는 누구나 거의 모를 정도의 것도 있어, 일방이 타방을 배제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불완전한 사상으로 쓸데없이 팽창한 것같이 보이는 이 책이 순서도 맥락도 없이 아무런 소용없는 혼란의 집적으로밖에 보이지 않겠는가 하고 생각되는 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기록을 공개하는 제 2 의 방법은, 거기에다 미리 가필하여 분명하지 못한 사상을 명료히 하고, 불완전한 것을 완전히 하고, 모든 단장 속에서 저자의 계획을 끄집어내서 그가 작성하려던 저작이 될 수 있도록 어느 정도 보충을 하는 것이다. 이 방법은 확실히 최선의 것이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을 훌륭히 끌어낸다는 것 역시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어쨌든 우리는 상당히 오랫동안 이 방법을 택할까 말까 했다. 그뿐만 아니라 실제로 그것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결국 이 제 2 의 방법도 제 1 의 방법과 마찬가지로 포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어떤 저자, 특히 파스칼과 같은 저자의 사상과 기획 속에 올바르게 개입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게 보였기 때문이다. 만약 그렇게 하면 파스칼의 저작이 아니라 전혀 다른 것을 간행하는 셈이 되고 만다.

이리하여 이 기록을 공개하는 두 가지 방법 중 어느 쪽에도 있는 불편을 피하기 위해 우리는 양자의 중간인 제 3 의 방법을 택해 이 모음집을 작성하기로 했다. 우리는 많은 단장 중에서 가장 명료하고 가장 완성된 것만을 취급했다. 그리고 그것들을 아무런 가필도 정정도 하지 않고 원문 그대로 간행했다. 이는 다만 연락도 관계도 없이 이곳저곳에 멋대로 흩어져 있었던 것에 약간의 질서를 부여하고, 같은 주제의 것을 같은 제목 하에 정리했을 따름이다. 기타 그다지 분명하지 않은 것이나 완전하지 않은 것은 모두 삭제했다.

그것은 삭제한 것이 별로 훌륭한 것이 아니고 또 그것을 이해하는 사람에게 좋은 견식을 줄 수 없다는 이유로 그렇게 한 것은 아니다. 다만 우리는 그것들을 명백히 하고 완성하는 노력을 하지 않기로 했으므로 있는 그대로의 형식을 가지고는 무의미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에 관해 다소의 개념을 얻을 수 있도록 여기에 그 예를 하나만 들고자 한다. 그렇게 하면 우리가 생략한 다른 것들의 대강의 윤곽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다음 구절이 그런 사상이 어떤 것인가를 밝히는 것인데 , 단장의 원형대로 인용한다.

“부에 관해 이야기하는 직공, 전쟁 • 왕위 등에 관해 이야기하는 대변인. 그러나 부자는 부에 관해 잘 이야기하고 왕은 부여된 대로의 큰 선물에 관해 냉정히 이야기하고, 신은 신에 관해 잘 이야기 한다( 단장 , 799). ”

이 단장 속에는 하나의 훌륭한 사상이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대다수의 사람들은 이해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그것은 극히 막연하고 간단하며 생략된 형식으로 불완전하게 표현되었기 때문이다. 그의 입으로부터 일상적으로 그와 같은 사상을 들어본 적이 없는 이들은 이런 혼란하고 애매한 표현으로는 그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런데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가는 대략 다음과 같다.

파스칼은 성서, 특히 복음서의 문체에 관해 극히 색다른 많은 특징을 지적하고 있었고, 그 이전에는 아마 누구도 유의하지 않을 것으로 보이는 아름다운 점을 인식하고 있었다. 그 가운데에서도 특히 그가 감탄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가장 중대하고도 가장 숭고한 사물, 예를 들면 신의 나라, 성도들이 천국에서 받는 영광, 지옥의 고뇌 등을 이야기할 적에 교부들이나 다른 사람들이 같은 문제에 관해서 이야기하는 것처럼 그것들을 과장해서 말하지 않고 소박하고도 단순하게, 다시 말하면 냉정한 태도로 말했다는 점이다 . 그리고 그는 우리에게는 대단히 위대하고 숭고한 사물도 예수 그리스도로서는 반드시 그런 것이 아니라고 하는데, 그 진정한 원인이 있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예수가 그런 것을 이야기하는 데 별로 경탄하지도 않았다 하여 놀랄 바는 아닌 것이다. 한 집단의 우두머리 된 자는 어떤 중요 진지의 포위라든가 격전에서의 승리라든가 하는 조건은 극히 간단하게 별로 흥분도 하지 않고 이야기하고, 왕 된 자는 1 천 5 백만이나 2 천만 정도의 금액이라면 냉정히 이야기하나, 일개 필부나 직공이 그것을 이야기할 때에는 매우 흥분하게 된다.

이상이 이 단장을 구성하는 근소한 몇 마디 속에 포함되고 감싸져 있는 사상이다. 그리고 도리에 부합되고 신앙을 가지고 행동하는 사람들에게 이런 생각은 그와 비슷한 다른 여러 생각과 아울러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에 관한 몇 가지 증거로서 확실히 도움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단지 이 일례만 가지고도 우리가 생략한 단장이 대체 어떤 것이었는지 판단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초고의 거의 전부가 어느 정도의 부주의와 등한하여 기록되었는지도 알 수 있을 것이다 . 내가 말한 사항 중 충분히 양해되기를 원하는 바는 , 파스칼이 그것을 쓴 것은 순전히 자신만을 위해서였기에 이런 형식으로 출간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 그러므로 나는 독자들이 수많은 결함에 부딪치더라도 용서해 주기를 희망한다.

그 단상집 속에 다소 분명하지 못한 사상이 있다 하더라도 조금만 노력하면 쉽사리 이해될 수 있는 것들이다. 또 그렇게 분명하지 못한 사상이라도 다른 것에 못지않게 훌륭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들을 분명하게 하느라고 여러 말을 보충해서 오히려 산만하고 무력한 것으로 만들어 놓아, 풍부한 내용을 근소한 말에 담아놓는 데서 생기는 특수한 미를 잃어버리는 것보다 오히려 그대로 발표하는 방법을 선택한 우리의 방법에 대해 독자들은 찬성해 줄 것으로 안다.

그 일례는 「 예언에 의한 예수 그리스도의 증명 」 중 어떤 단장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이 표현되어 있다.

“예언 중 특수한 사물에 관한 것과 메시아에 관한 것이 섞여 있는 것은, 메시아에 관한 예언이 증거를 가지지 않을 수 없고, 특수한 예언이 결실하지 않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단장 , 712). ”

그는 이 단장에서 메시아만을 보고, 그와 그에 관한 사물만은 예언해야 될 것으로 생각되는 예언자들이 어찌하여 그 이외, 또 그의 목적과는 전혀 관계없거나 무익하게 보이는 특수한 사건을 가끔 예언하였는가를 말한 것이다. 즉, 예언자들이 예언했던 특수한 사건들이 나날이 세상 사람들의 눈앞에서 실현됨으로써, 그들이 틀림없는 예언자로서 인정받게 되어 그들이 메시아에 관한 예언했던 바의 진실성과 확실성이 누구에게도 의심받지 않게끔 되기 위해서라고 말할 것이다. 그런 까닭으로 메시아에 관한 예언자들은 이 방법으로 그들의 증명과 권위를 확증되고 실현된 특수한 예언에서 몇 개 끄집어냈다. 이렇듯 특수한 예언은 메시아의 예언을 증명하고 권위를 세우는 데 유용했으니, 결코 무익하거나 헛되지는 않았다. 이상이 이 단장이 부연되고 전개된 의미이다. 그러나 이처럼 해설과 설명을 기다려 이해되기보다도, 저자의 말만 가지고 자신이 그 의미를 발견하는 것에 보다 더 많은 기쁨을 느끼지 않는 이는 아마 없을 줄로 안다.

이 책 가운데 신의 존재가 영혼의 불멸이나 기타 그리스도교적 신앙의 여러 문제의 기하학적 증명 내지 논증을 기대하고 있는 분들의 오해를 풀고, 파스칼의 목적이 그런 데 있지 않았음을 경고해 둔다는 것은 매우 시의에 알맞은 것으로 생각한다. 파스칼은 이들의 종교상 진리를 증명함에 있어 지극히 완고한 사람들의 고집도 설득할 수 있는 어떤 명백한 원리에 입각한 논증에 의하거나 정신을 납득시키지 않고, 도리어 혼란에 빠지게 하는 일이 더 많은 형이상학적 추리에도 의하지 않고, 자연의 여러 현상에서 끄집어 낸 공통한 이유에도 의하지 않으며, 오히려 정신보다도 심정에 달하는 도덕적 증명에 의하고자 했다. 말하자면 그는 정신을 설득하고 납득시키는 것보다 심정을 움직이려고 했다. 왜냐하면 심정과 의지를 부패시키는 악의 정욕과 집착은 신앙에 대해서 우리가 갖고 있는 최대의 장애이며 주요한 방해물이어서, 이 장애들을 제거할 수만 있다면 정신으로 하여금 그를 설득할 수 있는 광명과 도리를 수락하게 한다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파스칼은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 논술들을 읽다보면 상술한 모든 것이 쉽사리 수긍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파스칼은 이에 관해, 이 단상집에는 들어 있지 않지만 그의 초고에는 들어 있었던 한 단장에서 스스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나는 여기에서 자연적인 이유로 신의 존재라든가, 삼위일체라든가, 영혼의 불멸이라든가, 이런 모든 종류의 사물을 설명하고자 하지 않았다. 그것은 단지 완고한 무신론자를 설득할 수 있는 어떤 사물을 자연 속에서 발견할 만한 자신이 나에게는 없다고 생각되기 때문은 아니다. 그런 지식은 예수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무익하고 헛되기 때문이다. 가령 어떤 사람이 수의 비례는 비물질적인 영원한 진리여서, 그 본원인 소위 신이라는 어떤 근본적인 진리에 의존하고 있다는 납득을 하더라도, 나는 그 사람이 자신의 구원을 향해 많이 전진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단장 , 556 의 1 절 ). ”

또 이 단상집 중에는 비상의 잡다한 사상이 포함되어 있어 , 개중에는 파스칼이 취급하려던 제목으로부터 너무나 거리가 먼 것처럼 여겨지는 것이 있음을 보고 의심하는 이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의 의도가 세상 사람들의 상상 이상으로 큰 것이어서, 무신론자 및 그리스도교 신앙의 어떤 진리를 공격하는 사람들의 논리를 반박하는 데만 끝나는 것이 아니었음을 고려해야 한다 . 그가 종교에 대해 가지고 있던 지대한 사랑과 특수한 존경은, 단지 어떤 자가 종교를 완전히 파괴하거나 절멸하려는 것을 보고 참을 수 없게 했을 뿐만 아니라 , 극히 자세한 점에서 종교를 손상하든가 더럽히는 것도 용허하지 못하게 했을 정도이다. 이리하여 그는 진리나 신성을 공격하는 모든 사람들에 대해 선전했다. 말하자면, 이성의 거짓을 신앙 아래 종속시키는 것을 부인하고, 신앙이 가르치는 진리를 용인하지 않는 무신론자 • 불신자 • 이단자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진실한 교회의 조직체에 속해 있으면서도 우리의 모든 행위를 규율하고 또 바로잡을 표본으로서 부여된 복음의 순수한 훈계에 의해 살고자 하지 않는 그리스도교도 및 가톨릭교도에 대해서도 선전을 한 것이다.

이상이 그의 의도였는데, 이 의도는 이 단상집 속에 전개되어 있는 대부분의 사항을 포함하리만큼 광대한 것이었다. 그러나 같은 파스칼의 원고 중에 있었던 것이라도, 이를테면 「여러 가지 사상」 의 장에 기록되어 있는 대부분처럼, 그의 의도와 아무런 관계도 없고 사실 그 때문에 기술되지 않은 것도 있다 . 그러나 우리는 때마침 주어진 기회에 그것들도 다른 것과 같이 한꺼번에 취급하는 편이 타당하다고 생각했다 . 왜냐하면 우리는 이 책을 단순히 무신론자에 대해서나 종교에 관해서 쓰인 하나의 저작으로서가 아니라 , 「 종교 및 기타의 여러 문제에 관한 사상 」 의 집성으로서 출간하기 때문이다 .

이 서언을 끝냄에 제해 저작에 관해서는 이미 말하였으므로 저자에 대하여 약간 말하기로 한다 . 그것은 단지 시의를 얻은 것뿐만 아니라 , 내가 쓰고자 하는 것은 파스칼로 하여금 이 저작을 기도하게 한 , 그의 종교에 대한 존경과 감격이 어떻게 그의 가슴속에 생겨났던가를 이해시키는 데 대단히 유익하리라고 생각한다 .

≪유체균형론 ( 流體均衡論 ) ≫의 서문 가운데 우리는 그가 청춘을 어떻게 보내왔던가 , 그가 스스로 전념하려던 모든 인간적 • 세속적 과학 , 특히 기하학과 수학에서 짧은 시일 내에 얼마나 큰 진보를 이루었는가를 찾아볼 수 있다 . 불과 열 한두 살에 그것들을 배운 그의 특이하고 놀라운 방법 , 그가 가끔 발표한 짧은 저술이 항상 그와 같은 연배에 속하는 소년들의 능력과 재기를 훨씬 뛰어 넘은 그 훌륭한 성과 , 그가 겨우 열아홉인가 스무 살에 발명한 계산기에 나타난 그의 상상력과 지능의 놀라운 노력 , 또 재판소장이었던 그의 아버지가 칙임세무소장 ( 勅任稅務所長 ) 으로 루앙에 머무르고 있는 동안 파스칼이 그 거리의 유력자들 앞에서 행한 진공에 관한 훌륭한 실험 등과 같은 것들을 여기 일일이 되풀이하지 않겠다. 다만 그가 어찌 하여 그런 모든 것을 멸시했던가, 어떤 정신을 가지고 만년을 보냈던가, 이전에는 지능의 감탄할 힘과 넓이와 깊이를 나타냈던 그가 어찌하여 만년에는 그의 덕과 경건함이 위대하고 견실함을 나타냈을 따름이었던가를 간단히 이야기하기로 한다.

그는 청춘을 하나님의 특별한 기호에 의하여 여러 청년이 빠지기 쉬운 악덕을 면하면서 지냈다. 그처럼 호기심이 강한 인간으로서는 실로 드문 일이지만, 그는 호기심을 항상 자연의 사물에 돌렸을 뿐 종교에 관하여는 한 번도 자유사상에 머리를 돌렸던 일이 없었다. 그리고 그는 이 혜택을 그가 받은 다른 많은 혜택과 마찬가지로 그의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것이라고 가끔 이야기했다. 그의 아버지는 종교에 대단히 큰 존경심을 갖고 있어, 파스칼이 어렸을 적부터 감화를 주고 신앙의 대상은 결코 이성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것, 하물며 이성에 예속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가르쳐 주었기 때문이었다.

파스칼이 크나크게 존경했던 견실하고 강한 추진력을 갖춘 과학의 화신처럼 보인 아버지에 의해 여러 번 되풀이된 그 교훈은 그의 정신에 대단히 큰 감명을 주었고, 자유사상가들의 어떤 강연을 듣더라도 그는 조금도 동요되지 않았다. 그는 젊었다고는 하지만, 그런 사람들을 가리켜, 인간의 이성을 만물 위에 놓는 거짓 원리를 가진 사람들, 신앙의 본질을 이해치 못하는 사람들로 보고 있었다.

그러나 이처럼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너무도 순진해 보이는 이런 일과 심심풀이를 지나면서 청춘을 보내온 그에게 신은 드디어 영향을 주어, 그리스도교는 우리가 오직 하나님을 위해서만 살기를 강요하고, 하나님 이외 다른 대상을 가짐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것을 완전히 깨닫게 하셨다. 그리고 이 진리는, 그것을 위해서 전심전력할 수 있도록 그가 이 세상에 대해 가지고 있었던 모든 집착으로부터 서서히 해탈하고 인연을 끊으려고 결심하게끔 할 정도로 명백하고 유용하고 필요한 것으로 보였던 것이다.

이렇게 은퇴해서 좀 더 그리스도교적이고 보다 더 규율적인 생활을 하고 싶다는 소원을 일으킨 것은, 그가 아직 상당히 젊었을 때의 일이다. 그때부터 그는 세속적 과학의 연구에서 일체 손을 떼고, 자신과 남의 구원을 위해 도움을 줄 수 있는 것만 생각해 왔다 . 그러나 그를 괴롭힌 병고는 가끔 그의 의향을 다른 곳에 돌리게 하고, 서른 살이 되도록 그 실행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가 본격적으로 노력하기 시작한 것은 그 이후의 일이다. 그리고 그 뜻을 더 한층 신속히 이루고 예전의 습관을 한숨에 타파하기 위해, 그는 주거를 바꾸고 은퇴하여 시골에 잠시 머물러 있었다. 시골에서 돌아온 그는 사교계에서 떠날 의지를 극히 명백히 나타냈으므로 나중에는 사교계 편에서도 그를 돌아보지 않게 되었다. 그는 은퇴생활의 규율을 모든 쾌락과 사치를 배격한다는 두 중요한 격언 위에 세웠다. 그는 이 격언을 부단히 눈앞에 놓고, 늘 그곳을 향해 전진하고, 거기에 숙달하느라고 애썼다.

이 두 큰 격언을 끊임없이 실행함으로써 일행을 통해 거의 간격 없이 그를 괴롭혀오던 병고와 쇠약 속에서 위대한 인내심을 나타내고, 자신에게 가혹하고도 엄중한 금욕을 행하고, 자기의 감각에 알맞은 것을 모두 금했을 뿐만 아니라, 필요하다면 먹을 것이건 약품이건 불쾌한 것을 고통으로 알거나 싫어하지 않고 오히려 반갑게 섭취했으며, 옷이건 먹을 것이건 도구이건 기타 어떤 것이건 간에 절대로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것 이외에는 더욱 배척하고, 빈곤에 대해 매우 열렬한 사랑을 품고 빈곤이 항상 염두를 떠나지 않도록 또 무엇을 계획하는 데에도 빈곤을 실행할 수 있는가 없는가를 먼저 마음에 생각하기로 하고, 동시에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자비와 온정을 가지고 여유가 전혀 없을 적에도 결코 시여 ( 施輿 ) 를 거부하지 않고 가끔 상당액의 시여마저 행하며, 또 사람들이 말할 때마다 안이함을 찾음을 참고 무엇이나 고급의 것을 바라고 모든 일에 일류의 직인을 쓰고 싶어 하며 최상품이나 좋은 물건을 갖고 싶어 하고 기타 원하는 것을 하고 싶어 하는 인간의 호기적인 추구와 자의 등 사람들이 별로 나쁘다고 생각지 않아서 깊이 생각하지도 않는 모든 것에 대해 그는 결코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책망했다.

결국 앞서 말한 격훈을 실행함으로써 대단히 현저한, 비상히 그리스도교도다운 많은 행위를 했던 것이다. 그러나 나의 의도는 한편의 전기를 쓰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파스칼을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서 그의 경건과 덕에 관해 다소의 개념을 부여하는 데 있으니, 그것을 자세히 기록하려면 너무 길어질 것이므로 여기에서는 생략하기로 한다. 그러므로 그와 면식이 있고 만년의 그를 한 번이라도 찾아 갔던 일이 있는 사람에게는, 나는 이상의 것으로 아무것도 교시하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 오히려 반대로, 그런 사람은 내가 여기서 말하기를 보류한 것 속에 아직 더 할 말이 많았을 터라고 현명하게 생각해 주실 것으로 안다.

 

 

(註) 이 서문은 ≪팡세≫ 초판이 1670년 초에 간행될 때에 에티엔느 페리에가 집필한 것이다. 그때 파스칼의 친누이인 질베르트 페리에 부인이 집필한 「브레즈 파스칼의 생애」가 권두에 수록될 작정이었으나, 이는 여러 가지 이유로 초판에는 수록되지 않았다. 에티엔느 페리에는 질베르트 부인의 아들이고, 따라서 파스칼의 조카이다. 이 서문은 파스칼이 ≪팡세≫를 쓰게 된 동기와 그것을 단행본에 수록 ․ 발간하게 된 경위 및 방법을 약술하는 한편, 상기한 전기에 따라 파스칼의 생애도 약간 언급해 ≪팡세≫의 해제로는 간단하지만 가장 유익한 것으로 간주되고 있다.

 

《팡세》의 역사

 (1) ≪ 팡세≫의 초판은 1670 년 초 파스칼의 조카인 에티엔느 페리에의 서문 ( 소위 포르루아얄 판 서문 ) 과 같이 출판되었다 . 이것은 파스칼이 1662 년에 세상을 떠날 때 남긴 유고를 알로 • 니콜 • 트레빌 • 듀 보아 • 드 라 세즈 등 5 인의 , 말하자면 일종의 편찬소위원회가 정리하여 그중 애매한 것을 밝히고 교리의 견지에서 온당치 못한 점을 수정 또는 완화해서 출판한 것이다 . 그러나 이 개정에는 파스칼의 누님인 페리에 부인이 파스칼 자신의 사상만 저작에 나타나게 하고 편찬위원들의 사상이 혼입할까 두려워 시종 감시하였으므로 원저자의 의도와 매우 접근한 것이라고 한다 . 페리에 부인이 권두에 싣기 위해 썼던 「 브레즈 파스칼의 생애 」 는 여러 가지 사정으로 채용되지 않았다 .

 (2) 1776 년에 「 콩도르세 판 」 이 나왔다 . 이것은 파스칼을 좋은 논적으로 삼았던 볼테르가 파스칼을 치켜세우기도 하고 깎아내리기도 하여 , 그를 전형적인 낙천적 합리주의자로 규정짓고 심지어는 그를 미신의 희생자로 조소하는 등 매우 공격적인 주해를 붙여낸 책인데 , 당시 그의 진가를 떨어뜨리는 데 작용한 바가 적지 않다 .

 (3) 1779 년에 파스칼의 전집을 양심적으로 출판코자 했던 보슈는 ≪ 팡세≫의 신판을 간행한다 . 그것은 초판 ( 포르루아얄 판 ) 에 비해 별로 진보한 것은 아니나 , 철학적 주석의 베일을 통하지 않고 소재대로의 파스칼을 읽을 수 있게 하여 준 데 그 특색이 있다 .

 (4) 1842 년 빅토르 쿠잔은 프랑스 아카데미에서 지금까지 간행되어 세상에 유포되고 있는 ≪ 팡세≫가 왕립도서관에 보존되어 있는 파스칼의 자필에 의한 원고와 거리가 멀다는 이야기를 발표하고 , 신판을 내야 할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 이 요구에 따라 포젤이 1844 년에 신판을 냈고 , 또 1877 년에 오귀스트 노리니에가 편찬한 ≪ 팡세≫가 나왔다 . 이것들은 원문에 접근한 점에서 현저한 진보를 이룬 것이나 , 원고 중의 단장 전부를 하나도 빠짐없이 수록하지는 못한 것이었다 .

 (5) 그 후 미쇼와 브랑슈비크는 제각기의 입장에서 개정을 행하여 공히 이 결함을 보충하는 데 힘썼다 . 이와 같이 각자가 만든 것을 원작 초고와 대조한 결과를 비교하고 상의한 결과 , 그들은 결정적 본문에 대체로 가까운 곳까지 이르렀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 이리하여 미쇼 판은 1896 년에 , 브랑슈비크 판은 1897 년에 각각 간행되었다 .

 (6) 그리스도교 판으로는 아스체의 프로테스탄트 판 , 로세의 가톨릭 판이 있는데 , 이것들은 각 단장의 순서를 재편성하고 파스칼이 쓰고자 했던 그리스도교의 변증을 현대인이 읽기에 알맞도록 뜯어고친 것이다 .

 (7) 20 세기에 편찬된 것으로는 빅토르 지로 판 (1928 년 ) , 스트로프스키의 파스칼 전집 (1923~1930 년 ) 중의 ≪팡세≫ , 슈발리에의 선집 (1936 년 ) 중의 ≪팡세≫ , 트올 누울 판 (1938 년 ) 등이 주목할 만하다 .

 (8) 2 차대전 후에 편찬된 것으로는 라퓨마 판과 쿠세 판이 특색을 갖고 있다 .

 (9) 이 역서의 대본으로는 브랑슈비크 판 ( 사용본 : 1925 년 파리 가르니에 서점 발행 ) 을 주로 사용하고 , 2 차대전 후 판으로는 라퓨마 판 ( Pensees sur la Religion et quelques autres sujets -Avant propos et notes de Louis Lafuma ― 사용본 : 1947 년 파리 델마 사 발행 ) 을 부차적으로 사용했다 . 후자는 2 차세계대전후 출판으로 매우 특색 있는 것인데 , 단장의 순서를 편자 의도대로 완전히 재구성해 놓았기 때문에 읽고 이해하는 데는 편할지 모르나 원작대로의 단장 순서를 찾기 곤란하여 오히려 혼란을 자아낼 염려도 없지 않으므로 , 이 역서는 전자를 정본으로 후자를 부본으로 사용했다 .

 




제 1 편 정신과 문체에 관한 사상

 

 

 1

기하학의 정신과 섬세의 정신의 차이[1] 기하학적 정신의 여러 원리는 명백하지만 , 보통 잘 사용되지 않는다 . 그러므로 사람들은 습관화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그 방면에 대해서 머리를 쓰기 어렵다 . 그러나 조금이라도 그 방면으로 머리를 쓰게 되면 여러 원리는 환하게 보인다 . 그리고 어지간히 부정확한 사람이 아닌 한 , 거의 누구라도 쉽사리 눈에 띌 정도로 커다란 여러 원리에서 그릇된 추론을 할 수는 없을 것이다 .

그러나 섬세의 정신의 여러 원리는 일반적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모든 사람들의 눈앞에 놓여 있다 . 사람은 머리를 쓰거나 노력할 필요도 없다 . 좋은 눈을 가지는 것만이 문제인데 , 이것만은 꼭 좋아야 한다 . 왜냐하면 그 여러 원리들은 극히 미묘하고 많아서 하나도 빠짐없이 다 본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 그래서 하나의 원리라도 간과하면 오류에 빠진다 . 그렇기에 그 모든 원리를 보기 위해서는 아주 맑은 눈이 필요하고 , 다음에 이미 알고 있는 원리에서 그릇된 추론을 하지 않게 위해서는 올바른 정신이 필요하다 .

모든 기하학자는 좋은 눈을 가지고 있으면 섬세하게 될 것이다 . 그들은 자기가 알고 있는 여러 원리에서 그릇된 추론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 그리고 섬세한 사람은 익숙하지 않은 기하학의 여러 원리를 향하여 눈을 돌릴 수 있으면 기하학자가 될 것이다 . 따라서 어떤 종류의 섬세한 사람들이 기하학자가 되지 못하는 것은 그들이 기하학의 여러 원리로 향하기가 전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 기하학자가 섬세치 않은 것은 눈앞에 있는 것을 보지 않기 때문이고 , 기하학의 투명한 여러 원리에 익숙해져서 그런 원리를 잘 관찰하고 처리한 후가 아니면 추리하지 않는 것이 습관화되어 있으므로 , 그렇게 처리하게끔 되어 있지 않은 여러 원리를 가지고 있는 섬세한 사물에 대해서는 당황하고 말기 때문이다 . 사람은 좀처럼 그것을 보기 어렵고 , 본다기보다는 오히려 느낀다고 할 수 있다 . 그것들을 스스로 느끼지 못하는 자에게 느끼게 해주려면 무한한 노력이 필요하다 . 그것들은 너무도 미묘하고 많기 때문에 그것들을 느끼고 또 그 느낌에 따라 공정히 판단하기 위해서는 아주 미묘하고도 맑은 감감이 필요하다 . 그것들을 기하학에서처럼 순서에 따라 논증한다는 것은 대개 불가능하다 . 사람이 그 여러 원리를 그렇게 파악하려 하지 않고 , 그렇게 파악하려고 하는 것은 한량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 그런 사물은 한꺼번에 일목요연하게 보아야 하며 , 적어도 어느 정도까지는 추리의 진행에 따르지 않는 것이 필요하다 . 그래서 기하학자가 섬세하거나 섬세한 사람이 기하학지인 경우가 드물다는 것은 , 기하학자란 흔히 섬세한 사물을 기하학적으로 취급하려고 하여 먼저 정의부터 시작하고 다음에 원리에 미치는 것과 같은 추리의 진행방법이 아닌 일로 스스로 웃음거리가 되기 때문이다 . 정신이 이런 일을 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 다만 이런 일을 암암리에 자연히 기교 없이 해나가는 것이다 . 왜냐하면 그것을 표현하는 것은 인간의 능력으로 할 수 없는 일이고 , 그것을 느끼는 것은 극소수의 사람에 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

그러나 섬세한 사람들은 한 번만 보고 판단하는 데 익숙해졌으므로 그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명제나 극히 무미건조한 정의나 원리를 거쳐서 들어갈 수 있는 명제가 제출되면 , 그것을 세밀히 보는 데 익숙지 못하기 때문에 깜짝 놀라고 망연자실하여 염증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

그러나 부정확한 인간은 결코 섬세한 사람도 , 기하학자도 아니다 .

단순히 가하학자밖에 되지 못하는 기하학자는 만사를 정의와 원리에 의해 충분히 설명을 받기만 하면 올바른 판단자가 되지만 , 그렇지 않을 때 부정확하고 참을 수 없는 자가 된다 . 그들은 원리가 완전히 명백할 때에만 정확하기 때문이다 .

또 단순히 섬세한 인간은 사색적이고 관념적인 사물의 근본원리까지 파고들어갈 만한 인내력이 없다 . 그들은 그런 것을 세상에서 본 일이 없고 사용해 본 일도 없기 때문이다 .

 

2

올바른 판단의 여러 가지 종류   어떤 사람들은 어떤 질서의 사물에 관해서는 올바른 판단을 내리지만 다른 질서의 사물에 관해서는 그렇지 못할 때가 있다 . 거기서 그들은 불합리하게 생각한다 . 어떤 이들은 적은 원리에서 결론을 끄집어내고도 그 판단이 정확하다 . 또 어떤 이들은 많은 원리를 가지고 있는 사물에서 결론을 잘 끄집어낸다 . 예를 들면 어떤 이들은 물의 작용을 잘 이해한다 . 그 원리는 몇 개밖에 안 되지만 , 그 결론이 너무도 미묘하기 때문에 거기에 도달하려면 극도의 정확성이 있어야 한다 .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위대한 기하학자라고는 할 수 없다 . 왜냐하면 기하학은 수많은 원리를 포함하고 있는 것인데 , 어떤 종류의 정신은 몇 개 안 되는 원리의 근본까지 잘 파고 들어갈 수 있지만 , 원리를 갖지 않은 사물에는 전혀 파고 들 수가 없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 그러므로 두 가지 정신이 존재한다 . 하나는 원리에서 결론으로 활발하게 깊이 파고 들어가는 것인데 , 이것이 정확의 정신이다 . 다른 하나는 다수의 원리를 혼란시키지 않고 이해하는 것인데 이것이 기하학적 정신이다 . 전자는 정신의 힘과 정확성을 나타내고 , 후자는 정신의 넓이를 나타낸다 . 그런데 서로 상대방이 없어도 능히 존재할 수 있다 . 정신은 강하고도 좁아질 수 있고 또 넓고도 약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

 

3

직관적[2]으로 판단하는 데 습관이 된 이들은 추리적인 사물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 그들은 먼저 단번에 통찰하려 들며 원리를 탐구하는 데에는 전혀 습관화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 반대로 원리적으로 추리하는 데 습관이 된 이들은 직관적인 사물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 그들은 직관적인 사물 속에 원리를 구하고 일목요연하게 볼 수 없기 때문이다 .

 

4

기하학 , 섬세 = 참다운 웅변은 웅변을 멸시하고 , 참다운 도덕은 도덕을 멸시한다 . 즉 판단력의 도덕은 이지(理智)[3]의 도덕을 멸시한다 — 전자에는 규칙이 없다 . 여러 학문이 이지에 속해 있는 것처럼 판단력이야말로 직관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 섬세는 판단력의 분야요 , 기하학은 이지의 분야이다 .

철학을 멸시하는 것이 참으로 철학 하는 것이다 .

 

5

기준 없이 어떤 일을 평가하는 이들이 남들에게 대하는 것은 마치 시계를 가지고 있지 않은 이들이 남들을 대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 한 사람이 “벌써 두 시간 지났다”라고 말하는가 하면 , 다른 한 사람은 “ 45 분밖에 지나지 않았다”라고 말한다 . 나는 내 시계를 보면서 전자에게는 “당신은 권태에 빠졌소”라고 말하고 , 후자에게는 “당신은 시간 가는 줄을 모르고 있구려”라고 말한다 . 실제로 시간은 한 시간 반 지났기 때문이다 . 그리고 나더러 “당신에게는 시간이 잘 가질 않는구먼 . 당신은 제멋대로 시간을 재고 있는 것 같소”라고 말하는 이들을 향해서 나는 코웃음 친다 . 그들은 내가 시계를 가지고 판단하고 있음을 모르고 있는 것이다 .

 

6

이지가 나빠지는 것처럼 감정이 나빠지는 일도 있다 . 이지와 감정은 회화에 의해서 양성된다 . 그리고 이지와 감정은 회화에 의해 훼손된다 . 이렇듯 좋은 회화나 나쁜 회화는 이지와 감정을 양성하거나 훼손한다 . 그러므로 그것들을 훼손하지 않고 양성하기 위해서는 선택을 잘 할 줄 아는 것이 요긴하다 . 그런데 이지와 감정이 이미 양성되어 훼손되어 있지 않아야만 이 선택이 가능하다 . 이와 같이 이것은 하나의 순환을 이루고 있으니 , 그 속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하다 .

 

7

인간은 이지를 많이 가짐에 따라 세상에는 기이한 사람이 더욱 많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 평범한 사람은 사람들 사이에 아무런 차이도 발견하지 못한다 .

 

8

저녁 기도를 듣는 것과 같은 태도로 설교를 듣는 이들이 많다 .

 

9

남을 보람 있게 훈계하고 그의 잘못을 지적해 주려고 할 때는 그가 사물을 어느 방면에서 보고 있는가를 관찰하여야 한다 . 왜냐하면 그 사물은 보통 그 방면에서는 진실하기 때문이다 . 그리고 이 진실한 점을 그에게 시인하여 주고 그 대신 그의 잘못된 다른 방면을 가르쳐 주어야 한다 . 그러면 그는 이 일에 만족한다 . 그는 자기가 잘못한 것이 아니라 단지 모든 방면에서 보지 않았을 뿐임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 그런데 사람이란 모든 것을 보지 않았다는 점에서는 화를 내지 않지만 과오를 범했다는 것은 좋아하지 않는다 . 원래 인간이란 모든 것을 볼 수 없다는 것과 감성의 이해는 항상 진실한 것이기 때문에 사람은 자신이 보고 있는 방면에서는 자연히 과오를 범할 수 없다는 데 기인하는 것 같다 .

 

10

대개 인간이란 남의 머릿속에서 성립되어 온 이유보다 자기 자신이 발견한 이유에 더욱 잘 납득되는 법이다 .

 

11

모든 큰 오락은 그리스도교도의 생활에 위험하다 . 더구나 세상 사람들이 고안한 모든 오락 중에서 연극처럼 무서운 것도 없다. 그것은 정욕[4]의 극히 자연스럽고 미묘한 표현이기 때문에 정욕을 자극하고 우리 마음속에 정욕 , 특히 연애의 정욕을 발생시킨다 . 그 연애가 아주 순결하고 정직한 것으로 표현되는 경우에는 특히 그렇다 . 왜냐하면 연애가 순진한 마음에 순결한 것처럼 반영될수록 순진한 마음[5]의 소유자는 그것으로 인하여 감동받기 쉽기 때문이다 . 그 격렬함은 우리의 자부심을 기쁘게 해 주고 우리 눈앞에 교묘하게 표현되어 있는 것과 동일한 효과를 자신에게도 일으켜 보고 싶은 욕망을 자아내기 때문이다 . 그와 동시에 자기의 기분을 방금 눈으로 보고 있는 감정의 정당성에 입각하여 조작하게 되는데 , 그 감정은 순진한 마음의 공포를 제거하고 그렇게도 현명하게 보이는 애정을 가지고 사랑하는 것이 결코 순결을 해치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들게 한다 .

그리하여 사람들은 연애의 모든 아름다움과 즐거움이 가득 찬 마음과 자신의 순진무구함을 믿어 마지않는 혼과 정신을 안고 극장에서 나온다 . 그것은 연애의 최초 작용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 상태이다 . 아니 그보다는 연극 속에서 아주 잘 묘사된 것을 보고 그와 같은 쾌락과 희생을 받기 위해서 어떤 이의 마음속에 그런 작용을 일으켜 보려는 기회를 찾을 준비가 다 되어 있는 상태이다 .

 

12

하나의 사물밖에 생각 않는 스카라무슈[6], 하고 싶은 이야기를 다 하고서도 15 분간이나 더 이야기하였으면 하는 충동을 느끼는 학자 .

 

13

사람들은 크레오뷰린[7]의 잘못과 연애를 보기 좋아한다 . 그것은 이 여자가 그것을 모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 만일 이 여자가 잘못을 깨닫고 있었더라면 남에게 별다른 흥미를 주지 않았을 것이다 .

 

14

자연스러운 담화가 어떤 정욕이나 인상을 묘사할 때 인간은 자기가 듣고 있는 바가 진실하다는 것 , 즉 전부터 자기에게 있었던 것이지만 그런 줄을 모르고 있었던 진실함을 자각하고 그것을 느끼게 해 준 사람을 좋아하게 된다 . 그가 우리에게 자기 장점을 보여준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장점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 이 은혜는 우리가 그에게 호의를 가지게 하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와 그 사람 사이의 이 지적 공감은 필연적으로 그를 좋아하는 마음을 일으킨다 .


15

권력에 의하지 않고 감언에 의해서 또 왕처럼이 아니고 폭군처럼 설득하는 웅변.[8]

 

16[9]

웅변은 사물을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는 예술이다 . ① 상대방이 그것을 고통 없이 유쾌하게 들을 수 있게 한다 . ② 상대방이 그것에 흥미를 느끼고 자존심에서 더욱 자진하여 그것을 사색해 보도록 만든다 .

그러므로 웅변은 상대되는 사람들의 이지나 심정 , 또 우리들이 사용하는 사상이나 표현 사이에 우리가 조성하려는 교류 속에 존재한다 . 이것은 우리가 사람 마음의 모든 기미를 알기 위해서 다음에 그 기미에 맞게 하려는 담화의 올바른 비례를 발견하기 위해서 인간의 심정을 충분히 연구하는 것을 전제로 한다 . 우리의 말을 듣고자 하는 사람들의 위치에 자기 몸을 놓는 것이 필요하고 , 담화와 표현법이 잘 맞는지 또 듣는 이가 확실히 설득되고 있는지를 알기 위해서 담화에 사용하는 표현법을 자신의 마음속에 시험해 볼 필요가 있다 . 되도록 자연스러운 단순성을 떠나지 않도록 하고 , 사소한 것을 확대하거나 위대한 것을 축소하거나 해서는 안 된다 . 사물을 아름답게 이야기하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하다 . 주제에 적합하고 조금도 지나치거나 부족한 점이 없도록 하여야 한다 .

 

17

(江)[10]은 전진하는 길이요 . 사람이 가고자 하는 곳으로 날라다 주는 길이다 .

 

18

어떤 사물의 진상을 알지 못할 때 인간의 정신을 고정시키는 공통된 오류가 있는 것은 좋은 일이다 . 예를 들면 계절의 변화나 질병의 진행 이유를 달 ( 月 ) 에 갖다 붙이는 것 등이다 . 왜냐하면 인간의 주요한 병폐는 자기가 알 수 없는 사물에 대하여 불안한 호기심을 가지는 데 있기 때문이다 . 이런 무익한 호기심 속에 있는 것보다는 오류 속에 있는 편이 낫다 .

 

18   부록

부록 에픽테토스나 몽테뉴나 살로몬 드 튤티[11] 서식은 가장 많이 사용되고 가장 사람의 마음에 들고 가장 오랫동안 기억에 남고 가장 잘 인용된다 . 그런 서식은 일상 회화에서 생긴 사상으로 전부 성립되어 있기 때문이다 . 예를 들면 달이 만물의 원인이라는 식의 세상에 흔히 있는 공통한 오류에 관해서 이야기하려고 할 때 , 사람들은 어떤 사물의 진상을 모르면 공통한 오류가 존재한다는 것을 좋은 일이라고 한 살로몬 드 튤티의 말을 늘 인용할 것이다 . 앞에 말한 사상이 그것이다 .

 

19

저술할 때 사람이 느끼는 최후의 일은 무엇을 처음에 놓아야 하느냐를 아는 것이다 .

 

20

질서 = 어째서 나는 나의 덕목을 여섯이 아니라 넷으로 나누려고 하는가 ? 어째서 나는 덕을 넷으로 , 둘로 , 하나로 설정하려 하는가 ? 어째서 “자연에 순종하라”라든가 , 플라톤처럼 “자기 개인의 일을 부정 없이 행하라”라든가 , 그 외의 것을 이야기하지 않고 abstine et sustine(극기하고 인내하라)[12]고 말하는가 ? 그러나 그렇게 말한다면 만사가 한마디 속에 포함된다고 당신들은 이야기할 것이다 — 그렇다 . 그러나 그것은 해설되지 않으면 무익하다 . 그리고 사람들이 그것을 해설하려고 하여 나머지 일체를 포함하는 이 훈계를 보이자마자 , 그 나머지 일체는 이 훈계에서 벗어나와 당신들이 피하려고 원하였던 저 최초의 혼란에 다시금 빠지고 만다 . 이와 같이 그것들이 모두 일자 (monad) 속에 포함되면 마치 상자 속에 들어가 있는 것처럼 그 속에 감추어져 무의미하게 되고 그것들 본래의 혼란한 상태대로 나타날 따름이다 . 자연은 그것들 일체를 일자가 타자에 포함되지 않도록 만들어 놓은 것이다 .

 

21

자연은 그 모든 진리를 제각기 따로 놓았다 . 우리의 기술은 그들 중 일자를 타자에게 포함시키려고 한다 . 그러나 그것은 자연스럽지 않다 . 각자는 독자적인 위치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

 

22

내가 새로운 것이라고는 전혀 이야기하지 않았다고 말하지 않기를 바란다 . 재료의 배치가 새롭지 않은가 ? 사람들이 테니스를 할 때 쌍방이 사용하는 공은 같은 것이다 . 그러나 그 중 한 사람은 다른 한 사람보다 공을 더 잘 배치한다 .

나는 도리어 낡은 말을 사용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싶다 . 같은 사상이라도 배치가 달라지면 다른 체제의 논설을 형성하는 것처럼 , 같은 말이라도 배치를 달리하면 다른 사상을 형성하지 않는 일이 있을까 ?

 

23

말은 배열을 달리하면 다른 의미를 갖게 되고 의미는 배열을 달리하면 다른 효과를 가지게 된다 .

 

24

언어 정신은 피곤을 풀기 위한 것 이외의 다른 곳에 돌려서는 안 된다 . 그것도 꼭 피곤을 풀어야 할 적당한 시기에 하여야 할 것이지 그와 달리 해서는 안 된다 . 때가 아닌데 풀어 주면 권태를 느끼게 되고 , 때가 아닌데 권태를 느끼게 되면 이완하게 된다 . 그것은 사람의 마음을 완전히 옮겨 버리기 때문이다 .

인간 탐욕의 해독이란 혹심하기 때문에 남이 우리에게 쾌락을 주지 않고 우리에게서 무엇을 얻어 가려고 하면 그가 바라던 것과는 정반대의 일을 하고 싶어진다 . 쾌락이야말로 그것을 얻기 위해서는 남이 바라는 모든 것을 우리가 주고도 아까워하지 않는 통화이다 .

 

25

웅변 = 그것은 유쾌하고도 현실적이어야 한다 . 그러나 그 유쾌함은 그 자신의 진실에서 뽑아낸 것이어야 한다 .

 

26

웅변은 사상의 그림이다 . 따라서 다 그려놓은 후에 가필하는 것은 초상화 대신 상상화를 만든 것이다.[13]

 

27

잡 ( 雜 ). 언어 = 말을 무리하게 사용하여 대구를 만드는 이들은 균형 을 유지하기 위하여 필요 없는 창문을 만드는 이들과 같다 . 그들의 법칙은 올바르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바른 형태를 만드는 것이다 .

 

28

균형은 한 눈으로 볼 수 있는 것 속에 존재하고 그 외의 다른 형식은 취할 이유가 없다는 사실에 근거하며 , 인간의 용모에도 역시 근거한다 . 그래서 사람들은 균형을 넓이에서만 구하고 높이나 깊이에서는 구하지 않는다 .

 

29

사람들은 자연스러운 문체를 볼 때 깜짝 놀라고 대단히 기뻐한다 . 일개의 저자를 보려고 기대하였던 것이 일개의 인간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 이와 반대로 좋은 취미를 가지고 책을 읽고 , 일개의 인간을 발견하려고 생각했던 이들은 일개의 책자를 발견하고 대단히 놀란다 . Plus peotice quam humane loctus es ( 당신은 인간으로서보다 시인으로서 이야기했다 ) . 자연은 모든 것을 말할 수 있고 신학조차도 말할 수 있다는 것을 자연에서 배우는 사람들이야말로 , 참으로 자연을 존중하는 사람들이다 .

 

30

( 장세니스트의 「 제 2 」 , 「 제 4 」 , 「 제 5 」 의 의론을 보라 . 그것은 고상하고 성실하다 . 나는 희극이나 과장을 마찬가지로 미워한다 .) 사람은 그 어느 편도 벗으로 삼을 수 없을 것이다 . 사람은 심정이 결여한 까닭으로 귀에만 상의한다 . 기준은 도의이다 . 시인이지만 참다운 인간은 아니다 .

( 나의 「 제 8 」 이후 나는 충분히 대답하였다고 생각한다 .) 생략의 아름다움 , 판단의 아름다움 .

 

31

우리가 키케로의 글 속에서 비난하는 모든 허위의 아름다움은 그 찬미하는 사람들을 가지고 있는데 , 그들의 수도 허다하다 .

 

32

약하건 강하건 간에 있는 그대로의 우리의 성질과 우리를 즐겁게 하는 사물 사이의 어떤 관계 속에 존재하는 흥미와 미의 일정한 형태가 있다 .

이 형태에 따라 제작된 것은 모두 우리 마음에 든다 . 집 , 노래 , 담화 , 산문 , 여자 , 새 , 강 , 나무 , 방 , 옷 , 그 외의 어떠한 것이든 모두 그렇다 . 이 형에 따라 제작되어 있지 않은 것은 모두 좋은 취미를 가진 사람들에게 불쾌감을 준다 .

그리고 좋은 형에 따라 제작된 노래와 집 사이에는 하나의 완전한 관계가 있다 . 그것들은 제각기 종류를 달리하지만 이 유일의 형에 흡사하기 때문이다 . 이와 마찬가지로 나쁜 형에 따라 제작된 물건들 사이에도 하나의 완전한 관계가 있다 . 나쁜 형이 하나밖에 없다는 말은 아니다 . 나쁜 형은 무수히 있으니까 . 그러나 예를 들면 졸작의 14 행시는 아무리 그릇된 형에 따라 제작된 것이라 하더라도 같은 그릇된 형에 따라 옷차림을 하고 있는 여인과 완전히 흡사하다 .

잘못된 14 행시가 얼마나 웃음거리가 되는가를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본질과 형을 숙고하고 , 그 다음에 그런 형에 따라 ( 옷차림한 ) 여자나 ( 제작된 ) 집을 상상해 보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다 .

 

33

시적인 아름다움 = 사람은 시적인 미를 이야기하는 것처럼 기하학적인 미나 의학적인 미도 이야기하여야 할 것이다 . 그러나 그런 이야기는 하지 않는다 . 그 이유는 기하학의 목적이 무엇이라는 것과 그것이 증명에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며 , 또 의학의 목적이 무엇이라는 것과 그것이 치유에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지만 , 시의 목적인 쾌감이 어디 있는가를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 모방하여야 할 자연의 형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있다 . 이 인식이 결여되었기 때문에 몇 개의 기묘한 용어가 조작되었다 . 「 황금세기 」 , 「 현대의 경이 」 , 「 숙명적 」 등등 . 이와 같이 분명하지 않은 말을 시적 미라고 부른다 .

그러나 자세한 사물을 과대한 말로 이야기하는 데서 생겨나는 이 형에 따라 한 사람의 여인을 상상하는 이는 거울과 사슬로 온몸을 장식한 공주를 눈에 그리고 크게 웃을 것이다 . 왜냐하면 시구의 쾌감이 무엇에 존재하고 있는가보다 여인의 쾌감이 무엇에 존재하고 있는가가 더 알기 쉽기 때문이다 . 그러나 그것을 인식하지 못하는 이들은 그렇게 몸을 장식한 여인에 대해서 감복할는지 모른다 . 또 세상에는 그 여인을 여왕으로 생각하는 촌락도 많을 것이다 . 이 때문에 우리는 이 형에 따라 제작된 14 행시를 마을의 여왕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

 

34

사람이 시인이라는 간판을 내걸지 않으면 시를 알고 있는 것으로 세상에 통하지 않는다 . 수학자나 그 외도 마찬가지다 . 그러나 박식가 는 간판을 바라지 않고 시인이라는 직업과 자수가라는 직업 사이에 거의 구별을 두지 않는다 .

박식가는 시인이나 기하학자 등 그 외의 무엇이라고도 불리지 않지만 , 그들의 전부이고 , 또 그 전부의 심판자이다 . 그가 무엇인가를 판별할 수 없다 . 그는 어떤 곳에 들어갔을 때 남들이 거기서 이야기하던 것에 관해 이야기한다 . 그의 어떤 재능이 다른 재능보다 뛰어나게 보이는 것은 그것을 사용할 필요가 있을 때에 한한다 . 그때야 비로소 남들은 그렇다는 것을 상기한다 . 왜냐하면 언어가 문제가 아닐 때 그가 말을 잘 한다고 남들이 이야기하지 않고 , 언어가 문제가 될 때에야 그가 말을 잘 한다고 남들이 이야기하는 것 역시 이 특징에서 오기 때문이다 .

그러므로 어떤 이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그 본인이 들어왔을 때 , 그 사람에게 당신은 시에 능숙하다고 말하는 것은 허위의 찬사이다 . 또 어떤 시의 비판이 문제로 되어 있을 때 거기 있는 어떤 분에게 그에 관한 의견을 구하지 않는다는 것은 돼먹지 않다는 증거이다 .

 

35

“그는 수학자다”라든가 “ 설교자다”라든가 “ 웅변가다”라고 불릴 수 없고 다만 “그는 참다운 인간이다”라고 불려야 한다. 이 일반적인 자격만이 내 마음에 든다 . 만일 어떤 이를 보고 그의 저서를 상기한다면 이는 좋지 못한 징조이다. 나는 남이 나의 재능에 직면하여 그것을 사용할 기회가 올 때까지는 어떤 재능도 인정받고 싶지 않다. Ne quid nimis ( 어떤 일이든지 적당하게 하라 ). 어떤 재능이 앞서, 그것으로 명명되기를 겁내기 때문이다. 훌륭히 말하는 것이 문제가 될 때가 아니면 말을 잘 한다는 평을 듣고 싶지 않다 . 그때가 되어서 그런 평을 받으면 된다.

 

36

인간이란 욕구에 가득 차 있어 그 모든 욕구를 충족시켜 줄 수 있는 자만을 사랑한다 . “이 사람은 훌륭한 수학자이다”라고 남이 말한다 — 그러나 수학 같은 것은 나에게 아무런 소용이 없다 . 그는 나를 하나의 명제로 간주할지도 모른다 — “이 사람은 훌륭한 군인이다” — 그는 나를 하나의 포위된 요새로 간주할지도 모른다 . 그러므로 나의 모든 욕구에 전반적으로 응할 수 있는 참다운 인간이 필요하다 .

 

37

인간은 만능일 수 없고 만사에 관해 알 수 있는 일체를 안다는 것은 불가능한 만큼 만사를 조금씩 알아야 한다 . 왜냐하면 만사를 조금씩 아는 편이 한 가지 일을 완전히 아는 것보다 훨씬 낫기 때문이다 . 이런 보편성 이야말로 가장 좋은 것이다 . 만일 양자를 겸비할 수 있다면 더욱 좋은 일이지만 , 양자 중 택일하여야 한다면 전자를 택하여야 할 것이다 . 세상 사람들도 그것을 느끼고 그것을 실천하고 있다 . 세상 사람들은 대개 훌륭한 판단자이기 때문이다 .

 

38

시인이지만 참답지 못한 인간 .

 

39

만일 번개가 낮은 곳에 떨어지는 것 같은 일이 생긴다면 , 시인들을 비롯하여 이런 종류의 사물에 입각하여서만 추론할 줄 아는 사람들은 증명할 수 없을 것이다 .

 

40

어떤 사물에 증명하기 위하여 사용하는 실례 — 만일 사람이 이 실례를 증명하려면 그 어떤 사물을 그 실례로 사용할 것이다 . 사람들은 항상 증명하고자 하는 사물 속에 곤란이 있는 것으로 믿는 까닭에 , 실례라는 것은 그 논증을 도와주는 한층 더 명백한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

이리하여 사람은 일반적인 사물을 논증하려고 할 때는 어떤 경우의 특수한 기준을 그에게 부여하여야 하고 , 그와 반대로 특수한 경우를 논증하려면 ( 일반적인 ) 기준부터 시작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 왜냐하면 사람은 항상 증명하고자 하는 사물을 애매한 것으로 생각하고 , 그 증명에 사용하는 사물을 명백한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 어떤 사물을 증명하려고 의도할 때 먼저 사람들은 그 사물은 증명되어야 하기 때문에 애매하고 , 반대로 그것을 증명하게끔 되어 있는 사물은 명백하다는 상상으로 마음이 가득 차 있고 그리하여 그것을 쉽사리 이해하기 때문이다 .

 

41

마르티알리스의 풍자시 = 인간은 악의를 사랑한다 . 그러나 그것은 애꾸눈이나 불행한 자에 대해서가 아니라 오만한 행복자에 대해서다 . 그렇지 않으면 그 사람은 잘못된 것이다 .

왜냐하면 탐욕은 우리의 모든 활동의 근원이요 , 인간성의 본원이기 때문이다 .

인정미 있는 유화한 감정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친절하여야 한다 . 두 사람의 애꾸눈에 관한 저 시구는 무가치하다 . 그것은 그들에게 위안을 주지 않고 저자의 영예에 한 점을 가하여 주는 데 지나지 않으니까 . 저자를 위해서만 존재하는 것은 모두 무가치하다 . Ambitiosa recidet ornamenta ( 그는 과대한 문식을 제거하라 ) .

 

42

왕을 프린스라고 부른 것은 유쾌하다 . 그의 품위를 떨어뜨리기 때문이다 .

 

43

어떤 저자들은 자기의 저작을 이야기할 때 “나의 책 , 나의 주해 , 나의 역사 등등”이라고 한다 . 그들은 자기 집에 살면서 항상 “ 자택에서”라는 말을 입에 올리곤 하는 부르주아 근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 차라리 “우리의 책 , 우리의 주해 , 우리의 역사 등등”으로 부르는 편이 나을 것이다 .   그것들 속에는 그들 자신의 것보다도 남의 것이 더 많이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

 

44

당신은 남이 당신을 좋게 생각해 주기를 원하는가 ? ( 그렇다면 ) 그것을 입 밖에 내지 마라 .

 

45

언어는 부호이다. 이 부호에서는 문자가 문자로 대체되지 않고 말이 말로 대체된다. 그러므로 미지의 언어도 판독될 수 있는 것이다.

 

46

좋은 말을 하는 사람 , 나쁜 성격 .

 

47

이야기는 잘 하지만 글은 잘 쓰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 그것은 장소나 청중이 그들을 흥분시키고 , 이 열정이 없을 때는 발견될 수 없었던 것을 그들의 정신에서 이끌어내 주기 때문이다 .

 

48

어떤 담화 속에 반복된 말이 있어 정정하려면 그 말들이 너무 적절하기 때문에 도리어 그 담화를 훼손하게 될지도 모른 경우에는 그대로 두어야 한다 . 바로 이것이 그 말들이 적절하게 사용되고 있다는 증거이다 . 그것을 끝까지 정정하려는 것은 이 반복이 이 경우에서는 잘못이 아니라는 것을 모르는 맹목적인 소망의 소치이다 . 거기에 일반적인 규칙이란 있을 수 없는 까닭이다 .

 

49

본성에 가면을 씌우고 그것을 가장하여 본다 . 벌써 왕도 아니요 법왕도 아니요 사제도 아니다 — 그저 「 당당한 군주 」 …이다 . 파리가 아니고 — 「 왕국의 수도 」 이다 . 파리를 파리라고 불러야 할 경우가 있고 또 「 왕국의 수도 」 라고 불러야 할 경우가 있다 .

 

50

같은 의미라도 그것을 표현하는 말에 따라 변화한다 . 의미는 말에서 위엄을 받지만 그 대신 말에 위엄을 부여하지 않는다 . 그 실례를 찾아내야 할 터인데… .

 

51

피론학파을 완강한 자로 .

 

52

궁정인이 아닌 자만이 남을 궁정인이라고 말한다 . 현학자만이 현학자라고 말한다 . 시골뜨기만이 시골뜨기라고 말한다 . 그래서 프로뱅시알 ( 시골 친구에게 주는 편지 ) 에 그런 제목을 붙인 것은 인쇄인이라고 나는 보증한다 .

 

53

「 전복한 」 마차인가 「 전복된 」 마차인가는 의지의 유무에 달려 있다 . 「 흘린다 」 는 것과 「 쏟는다 」 는 것도 의지의 유무에 달려 있다 ( 강제된 수도사에 관한 루 메틀 씨의 변론 ) .

 

54

잡 ( 雜 ) = 이야기하는 방법 . “나는 그것에 전심하고 싶었는데 . ”

 

55

열쇠의 「 여는 」 효과 , 갈고리의 「 끄는 」 효과 .

 

56

간파한다 . 「 당신의 불쾌를 가져온 나의 소위 」 . 추기관 나리는 간파당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

「 나는 불안에 가득 찬 마음을 가지고 있다 . 」 나는 불안에 차 있다는 편이 낫다 .

 

57

다음과 같은 인사를 받으면 나는 불쾌해진다 . “폐 많이 끼쳤습니다” , “ 괴 로우시겠습니다” , “너무나 기다리게 해서 미안합니다 . ” 이런 인사를 하는 이는 남의 마음을 끌려고 하든가 성화를 냈든가 중의 하나다 .

 

58

“당신은 버릇이 없소 ” , “실례합니다만” 이런 변명만 없었더라면 실례한 점이 있었다는 것을 모르고 지냈을 것을 . “공손히 말씀드립니다만…” 나쁜 것은 그들의 변명뿐이다 .

 

59

「 반란의 큰 불을 끈다 . 」 너무나 화려하다 . 「 그의 천재의 고민 」 , 너무도 대담한 두 말 .

 

 

 

 

  

제 2 편 신을 떠난 인간의 비참

 

 

 60

제 1 부 신을 떠난 인간의 비참 .

제 2 부 신과 같이 있는 인간의 지복 ( 至福 ).

혹은 ,

제 1 부 인간 본성이 타락하여 있다는 것 ( 본성 그 자체에 의해 ) .

제 2 부 구세주가 존재한다는 것 ( 성서에 의해 ) .

 

61

질서 = 나는 이 논설을 다음과 같은 질서로 기술하면 좋으리라고 생각한다 . 즉 모든 종류의 신분의 공허함을 표시하기 위해 보통의 생활의 공허함을 표시하고 , 다음에는 피론학파나 스토아학파의 철학적 생활의 공허함을 표시한다 . 그러나 좀처럼 그 질서가 지켜질 것 같지 않다 . 나는 질서가 무엇인지 조금 알고 있다 . 그런데 그것을 이해하고 있는 이들은 극소수이다 . 여하한 인간적 학문이라도 그것을 지켜나갈 수 없다 . 성 토마스도 그것을 지키지 않았다 . 수학은 그것을 지키지만 그 깊은 점에 있어서 무익하다 .

  62

62

제 1 부의 서언 = 자기 자신에 관한 인식을 취급했던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할 것 . 우리를 우수에 잠기게 하고 권태를 느끼게 하는 샤론의 분류에 관해 이야기할 것 . 몽테뉴의 혼잡에 관한 이야기할 것 . 그는 ( 올바른 ) 방법의 결여를 잘 알고 있었다 . 그는 올바른 방법을 피하여 문제에서 문제로 뛰어넘고 편의한 작풍을 찾았다 .

그가 자기를 그려보려던 어리석은 기도 ! 그런데 이것은 우연이거나 그의 방침에 반해서 행해졌던 것은 아니다 . 그런 과오라면 누구나 범하는 것이다 . 그러나 그는 그의 고유한 방침에 따라 , 당초의 주요한 기도에 의해 그것을 감행했던 것이다 . 왜냐하면 우연히 또는 약한 까닭으로 어리석은 일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보통의 실책이지만 , 그것을 고의로 이야기한다는 것은 참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 더욱 저런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

 

63

몽테뉴 = 몽테뉴의 결점은 크다 . 음란한 말 . 구르네의 양의 변명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무가치하다 . 경신 , 「 눈 없는 인간 」 , 무지 , 「 곡선형 구적법 」 , 「 보다 더 큰 세계 」 , 자살이나 죽음에 관한 그의 의견 . 그는 「 겁내는 바도 없고 회오하는 바도 없이 」 구원에 대한 무관심을 고취한다 . 그의 저서는 인간을 신앙에 인도하기 위해 쓰인 것이 아니니까 그것에 구속되어 있지는 않다 . 그러나 인간을 신앙에서 이탈시키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 인생의 어떤 사건에 관한 그의 좀 방종한 향락적인 의견 (730, 331) 을 용서할 수 있다 . 그러나 죽음에 관한 그의 완전히 이교적인 의견은 용서할 수 없다 . 왜냐하면 그리스도교 신자로서 죽을 것을 최소한 원하지 않는다면 일체의 신앙을 버려야 하기 때문이다 . 그런데 그는 그 저작의 전권을 통하여 기운 없이 취약하게 죽을 것만을 생각하고 있다 .

 

64

내가 몽테뉴 속에서 읽어 보는 일체의 것은 몽테뉴가 아니라 나 자신에서 발견한다 .

 

65

몽테뉴의 장점은 용이하게 얻기 어렵다 . 그의 단점은 ( 그의 도덕 관념을 별도로 하면 ) 그가 쓸데없는 이야기를 너무나 많이 했고 자기 자신에 관해서도 너무나 말을 많이 했다는 것을 그에게 충고해 주기만 하면 즉시 개정될 수 있는 것이다 .

 

66

인간은 자기 자신을 알아야 한다 . 그것은 진리를 발견하는 데는 도움을 주지 않는다 하더라도 최소한 자기 생활을 지키는 데는 도움을 준다 . 그런데 세상에 이 이상 더 지당한 일은 없다 .

 

67

학문의 공허 = 외적 사물에 관한 학문은 고민할 때 도덕적 무지를 위안 하여 주지 않을 것이다 . 그러나 도덕에 관한 학문은 외적인 학문의 무지를 늘 위안하여 줄 것이다 .

 

68

사람들은 참다운 인간이 되는 길은 가르침을 받지 않고 그 외의 일은 전부 가르침을 받는다 . 그래서 그들은 다른 어떤 일을 아는 것보다도 참다운 인간이 되는 길을 알고 있다고 자만한다 . 그들은 자기가 배우지 않은 유일한 것을 알고 있음을 자랑삼는다 .

 

69

두 개의 무한 ․ 중 용 = 너무 빨리 읽든가 너무 천천히 읽으면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한다 .

 

70

자연은 …아니다 = 자연은 우리를 그 중심에 놓았기 때문에, 우리는 균 형의 일방을 바꾸면 다른 일방도 바꾸게 된다. Je fesons, z ô atr è kei. 이것으로 말미암아 우리 두뇌에는 한쪽에 부딪치면 다른 한쪽에도 부딪치게 되어 있는 태엽이 있는 것으로 생각해도 좋지 않나 한다.

 

71

너무도 많은 술 또 너무도 적은 술 , 그것을 전혀 주지 않으면 사람은 진리를 발견할 수가 없을 것이다 . 너무 많이 주어도 마찬가지다 .

 

72

인간의 불균형 = [ 자연적인 인식은 우리를 여기까지 인도한다 . 만일 자연적인 인식이 진실하지 않다면 , 인간 속에 진리란 없을 것이다 . 그리고 만일 자연적인 인식이 진실하다면 , 인간은 겸손하여야 할 커다란 이유를 거기서 발견하게 될 것이요 , 어떤 방식으로라도 스스로 비하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 인간이란 이 자연적인 인식을 믿지 않고서는 생존할 수 없는 것이므로 자연의 보다 더 깊은 탐구에 들어가기 전에 , 인간이 자연을 한 번 더 진실히 , 그리고 한가히 고찰하고 자기 자신도 성찰하여 주기를 나는 원한다 . 그리고 거기에 어떤 균형이 있는가도 인식하면서… .] 그러므로 인간은 전 자연을 그 높고 충만한 위용 그대로 응시하고 그 주위에 있는 낮은 사물에서 시선을 멀리 돌리게 하라 . 우주를 비춰 주는 영원한 등화처럼 놓여 있는 저 찬란한 빛을 보게 하라 . 이 천체가 그리는 관대한 주위에 비하면 지구도 한 점으로밖에 보이지 않으며 , 또 이 관대한 주위 자체도 천공 속을 회전하는 제 천체에 둘러싸인 주위에 비한다면 , 극히 미세한 일점에 불과하다는 것에 경탄하라 .

그러나 만일 우리의 시각이 거기에 그친다면 상상력이 그 이상 더 멀리 미치도록 하라 . 자연이 공급하는 데 피곤하기 전에 상상력이 사고하는 데 피곤할 것이다 . 이 보이는 세계의 전부는 자연의 광대한 품 안에서는 눈에도 띄지 않는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 어떠한 관념도 그에 접근할 수 없다 .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한의 공간의 저편 쪽으로 우리의 사고를 확대하더라도 이는 무익하다 . 우리가 산출하는 것은 사물의 현실에 비하면 단순한 원자에 지나지 않는다 . 이것은 중심이 도처에 있고 주변이 아무 데도 없는 무한의 구체이다 . 결국 이런 것을 사고하여 우리의 상상력이 망연자실하여진다는 것은 신이 전능함을 감득하게 하여 주는 표지이다 .

인간이 자기 자신에 돌아가 존재하는 것에 비해 자신이 무엇인가를 고찰하여 보시기를 . 자연을 이 자연의 변두리 한 구석에 헤매고 있는 자로 생각하고 , 자기가 살고 있는 이 조그마한 감옥 ( 나는 우주를 가리키고 있는 것이지만 ) 에서 지구나 제 왕국이나 제 도시나 자기 자신의 진가를 평가하는 것을 배우도록 하라 . 무한 속에서 인간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

그러나 인간에게 마찬가지로 놀라운 다른 경이를 표시하기 위해 가장 미소 ( 微小 ) 한 것을 음미시키고 싶다 . 한 마리의 진드기가 그 미소한 몸집 속에서 비할 나위도 없이 더 미소한 부분 , 즉 관절이 있는 다리 , 다리 속의 혈관 , 그 혈관 속의 피 , 그 피 속의 액체 , 그 액체 속의 물방울 , 그 물방울 속의 수증기를 인간에게 제시하고 , 이 최후의 것을 다시 분할하여 그의 사고력을 소모시키고 , 그가 도착할 수 있는 최후의 대상을 지금 우리의 논쟁 대상으로 하기를 바란다 . 그는 아마 이것이야말로 자연 중 극미한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 나는 그에게 그 속에서 새로운 심연을 보여주련다 . 그에게 나는 눈으로 볼 수 있는 우주뿐만 아니라 , 자연에 관해 인간이 사고할 수 있는 한의 광대한 것을 이 원자의 작은 그림 테두리 속에 그려 보여주련다 . 그는 그 속에 무한의 우주 ( 그 각자가 자신의 천공 ․ 유성 ․ 지구를 눈에 보이는 세계와 같은 비례로 가지고 있다 ) 를 보게 될 것이다 . 그 지구상의 모든 동물을 , 나중에는 진드기를 보게 될 것이다 . 진드기 속에서 그는 최초의 진드기가 가지고 있었던 모든 것을 다시 발견하게 될 것이다 . 또 그 나머지 것 속에서도 한없이 쉬지 않고 동일한 것을 발견하게 됨으로써 , 광대하기 때문에 놀라운 다른 경이와 마찬가지로 , 미소하기 때문에 놀라운 괴이함에 대해 그는 망연자실할 것이다 . 왜냐하면 이제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것의 품속에서는 그 자신 눈에도 띄지 않았던 우주 속에서 인지할 수 없었던 우리의 신체가 , 이제 와서는 인간이 도달할 수 없는 무에 비해 거대한 모습이 되고 세계가 되고 아니 만유가 된다는 것에 대해 경탄하지 않을 자가 없기 때문이다 .

이렇게 자기를 성찰하는 자는 자신에게 공포를 느낄 것이다 . 그리고 자연이 부여해 준 육체의 무한한 허무의 두 심연 사이에 걸려 있음을 생각하여 그 불가사의를 보고 전율할 것이다 . 그의 호기심은 경탄으로 변하고 , 그런 불가사의를 지나치게 탐구하려고 하기보다 침묵 속에 자세히 들여다보고 싶은 생각에 잠기게 되리라고 나는 믿는다 .

왜냐하면 결국 인간이란 자연에서 무엇인가 ? 무한에 비하면 허무 , 허무에 비하면 일체 , 무와 일체와의 중간물 , 양극을 이해하기에는 무한히 떨어져 있으므로 사물의 궁극과 시원은 그에 대해 헤아릴 수 없는 비밀 속에 어쩔 수 없는 정도로 감추어져 있다 . 그가 끌려 나온 허무도 , 그가 삼켜져 있는 무한도 다 같이 마찬가지로 볼 수가 없다 .

그렇다면 그는 사물의 시원도 궁극도 알 수 없는 영원한 절망 속에 있어서 사물의 ( 어떤 ) 중간 양상을 인지하는 외에 무엇을 할 것인가 ? 만물은 허무에서 나와 무한을 향해 움직인다 . 이 놀라운 행진에 누가 따라갈 수 있겠는가 ? 이 불가사의의 작자만이 그것을 알고 있다 . 그 외의 다른 누구도 그것을 알 수 없다 .

이런 무한을 주시하지 않았기 때문에 인간은 마치 자연과 어떤 균형이나 유지하고 있는 것처럼 대담하게도 자연의 탐구에 전심하게 되었다 . 그들이 그들의 대상과 마찬가지로 , 무한한 자부심에 의해 사물의 본원을 이해하려고 하고 , 거기서 만사를 알려고 하는 데까지 이르렀다는 것은 기묘한 일이다 . 왜냐하면 인간은 자연과 마찬가지의 무한한 자부심과 능력이 없는 한 그런 기도를 형성할 수 없다는 것은 의심할 바 없기 때문이다 .

자연은 스스로의 모습과 작자의 모 을 모든 사물에 조각해 놓았으므로 모든 사물이 거의 전부 이중의 무한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가르쳐주기만 하면 이해될 수 있는 일이다 . 그래서 우리는 모든 학문의 탐구 범위가 무한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 예를 들면 기하학이 설명하여야 할 명제를 그야말로 무수하게 가지고 있다는 것을 누가 의심할 것인가 ? 학문은 그 원리가 다양하고 미묘한 점에서도 무한하다 . 왜냐하면 궁극한 것으로 제출된 원리가 그 자신 위에 서 있지 않고 다른 원리에 의존하고 있으며 , 그 다른 원리는 그것을 지탱하여 주는 또 다른 원리를 가지고 있어 결코 궁극의 것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자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 그러나 물질계에서 성질상 무한히 분할될 수 있는 것이라도 우리의 감각으로 그 이상의 것을 인지할 수 없는 자를 불가분의 점이라고 부르는 것과 마찬가지로 , 우리 이성에 그렇게 보이는 자를 궁극자로 하고 있는 것이다 .

학문의 이 두 가지 무한 중에 위대성의 무한은 더욱 잘 감지된다 . 소수의 사람들이 만사를 안다고 주장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 “나는 만사에 관해 이야기하련다”라고 데모크리토스는 말했다 .

그러나 미소성 ( 微小性 ) 의 무한은 그보다 훨씬 알기 어렵다 . 철학자들은 누차 거기에 도달했다고 주장하였지만 모두 실패하고 말았다 . 이 때문에 「 사물의 원리 」 이라든 「 철학의 원리 」 등 기타 그와 비슷한 통속적인 책이름이 생겨난 것이다 . 그것들은 외관은 그다지 화려하지 않다 하더라도 사실은 화려한 점 , 저 De omni scibili ( 알 수 있는 모든 사물에 관하여 ) 라고 하는 사람의 눈을 현혹시키는 서책과 비슷하다 .

사물의 중심에 도달하는 것은 그 주변을 포괄하는 것보다 훨씬 쉽다고 우리는 자연히 생각한다 . 세계를 볼 수 있는 넓이는 분명히 우리의 능력보다 앞선다 . 그러나 우리는 미소한 사물보다 앞서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파악하는 것은 더욱 쉬운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 그러나 허무에 도달하려면 일체에 도달하는 것과 마찬가지의 능력이 필요하다 . 양자 어느 경우에도 무한의 능력이 필요하다 . 사물의 궁극의 원리를 이해한 이들은 무한을 인식할 수 있게 되리라고 나는 생각한다 . 이 중 하나는 다른 것에 의존하고 또 하나는 다른 것으로 인도한다 . 이 양극은 서로 접촉하고 신에 있어서 , 오직 신에 있어서만 다시 회합한다 .

그러므로 우리는 자기의 능력을 알도록 하자 . 우리는 어떤 것이지 일체는 아니다 . 우리 존재의 부분성은 허무에서 생기는 제일 원리의 인식을 우리에게서 제거한다 . 또 우리 존재의 미소성은 우리에게 무한의 전망을 감추어 준다 .

우리의 지성은 신체가 자연의 넓이 속에서 점하고 있는 것과 같은 위치를 사유적인 사물의 질서에서 차지하고 있다 .

모든 방면에서 제한받고 , 양극 사이의 중간적 위치를 유지하고 있는 이 상태는 우리의 모든 능력 속에서 발견된다 . 우리의 감각은 극단의 것을 지각하지 못한다 . 너무나 큰 소리는 우리를 귀머거리로 만든다 . 너무나 강한 빛은 눈이 부시다 . 너무나 멀든가 너무나 가까운 거리는 시력을 해친다 . 너무나 긴 혹은 너무나 짧은 이야기는 의미를 애매하게 한다 . 너무나 진실한 것은 우리를 놀라게 한다 ( 나는 제로에서 넷을 떼어 버리면 제로가 된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을 알고 있다 ) . 제일 원리는 우리에게 너무도 명백하다 . 지나친 쾌락은 불쾌하게 만든다 . 음악에서 협화음이 너무나 많으면 불쾌를 자아낸다 . 은혜를 너무 많이 입으면 우리는 초조해지고 부채보다 더 많은 것을 갚아 주고 싶다 . Beneficia eo usque laeta sunt dum videntur exsolvi posse; ubi multum anteuenere . pro gratia odium reddituv ( 은혜는 그것을 갚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한 기분 좋다 . 그것을 넘으면 감사는 혐오로 변한다 ) . 우리는 극도의 더위도 극도의 추위도 느끼지 않는다 . 과도의 성질은 우리에게 적이고 감지될 수 없다 . 우리는 그것을 느끼지 않고 방치해 둔다 . 지나치게 어리거나 지나치게 늙어도 정신의 움직임을 방해한다 . 과다 또는 과소한 교육도 그것과 마찬가지다 . 결국 극단한 자는 우리에게는 존재하지 않는 것과 마찬 가지고 , 우리도 그 자에 대해서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 극단한 자가 우 리에게서 일탈하든가 우리가 그 자에게서 일탈하든가 , 양자 중 하나다 .

여기 우리의 진상이 있다 . 우리가 확실히 알 수 없는 것도 완전히 무지 할 수 없는 것도 이 때문이다 . 우리는 황막한 중간에서 떠돌고 , 항상 불안 ․ 동요하며 한쪽 끝에서 다른 쪽 끝으로 밀려 나간다 . 어떤 경계에 우리 자신을 결부시키고 고정시키려고 생각하면 그 경계는 동요하여 우리를 떼어 버린다 . 그리고 만일 우리가 그것을 따라가면 그것은 우리 수중에서 벗어나고 미끄러져 나가고 한 번 도망치면 영원히 돌아오지 않는다 . 어떤 자도 우리를 위해 멈추지 않는다 . 이것이 우리에게 자연스러운 상태이고 , 또 우리의 성향에 가장 반대되는 것이다 . 우리는 무한까지 도달하는 탑을 쌓아 놓아야 할 견고한 밑바탕과 부동한 최후의 기반을 발견하려는 열망에 불타고 있다 . 그런데 우리의 모든 기초는 흔들리고 땅은 심연을 향해 입을 벌린다 .

그러므로 우리는 확실과 견고를 찾지 않도록 하자 . 우리의 이성은 외관의 무상에 의해 항상 기만당한다 . 어떤 자도 유한을 두 개의 무한 사이에 고정시킬 수 없다 . 그들 무한은 유한을 포함하는 동시에 유한에서 벗어나 온다 .

이것이 잘 이해되면 사람은 자연히 그를 배치한 상태에 각각 편안하게 지내리라고 나는 생각한다 . 우리가 분배받아 놓이게 된 이 중간이 양극에서 항상 떨어져 있는 한 , 어떤 이가 사물에 관한 지식을 좀 많이 가지고 있다고 하여 그것이 무슨 소용 이 있으랴 ? 만일 그것을 좀 많이 가지고 있다고 하면 조금 높은 곳에서 사물을 보고 있는 데 불과하다 . 궁극에서는 항상 무한히 떨어져 있고 또 우리의 수명을 십 년 더 연장시킨다 하더라도 영원에서는 마찬가지로 무한히 ( 떨어져 ) 있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느냐 ?

이 무한의 견지에서 유한자는 다 동등하다 . 그래서 나는 인간이 상상을 하나의 유한자보다도 다른 유한자에게 돌리려고 하는지 그 이유를 알지 못하겠다 . 자기와 유한자를 비교하기만 하여도 우리의 가슴은 아파진다 .

만약 인간이 먼저 자기를 탐구한다면 그 이상 더 나가는 것이 얼마나 불가능한가를 알게 될 것이다 .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 자가 어떻게 전체를 알 수 있을 것인가 ? 그래도 아마 그는 못 하여도 자기가 균형을 유지하고 있는 다른 제 부분을 알려고 열망하는지도 모른다 . 그러나 세계의 각 부분은 모두 상호간에 일정한 관계와 연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 다른 부분 또는 전체를 무시하고 일부를 안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

예를 들면 인간은 자기가 알고 있는 일체의 것에 관련이 있다 . 인간은 자기를 포용하여 줄 장소와 생존하여야 할 시간 , 삶을 위한 운동 , 자기를 조성하기 위한 원소 , 자기에게 자양을 주어야 할 열과 식량 , 호흡 하여야 할 공기를 필요로 한다 . 그는 빛을 보고 물체를 지각한다 . 결국 모든 것이 그와의 관련 하에 놓이게 된다 . 그러므로 인간을 알기 위해서는 그가 생존하는 데 공기를 필요로 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하는 것을 알아야 한다 . 또 공기를 알기 위해서는 공기가 인생과 그런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하는 것을 알아야 한다 . 기타도 마찬가지다 . 화염은 공기 없이는 존재하지 않는다 . 그러므로 하나를 알기 위해서는 필히 다른 것을 알아야 한다 .

이처럼 모든 사물은 서로 직접 간접으로 원인이 되고 결과가 되며 , 도움을 주고받으며 , 때문에 , 또 모든 사물은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나 가장 상이한 것도 결부시키는 자연적이고 알 수도 없고 느낄 수도 없는 유대에 의해 서로 지탱되어 있기 때문에 전체를 모르고 각부를 안다는 것은 각부를 상세히 모르고 전체를 알려는 것과 마찬가지로 불가능한 일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 그 자신으로서의 또는 신에 있어서의 사물의 영원성도 우리의 짧은 생존을 놀라게 하고야 말 것이다 . 자연의 고착하고 안정한 부동성도 우리들에게 일어나는 부단한 변화와 비교하면 틀림없이 그와 같은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

그리고 사물을 인식하는 우리의 무능력을 완성하여 주는 것은 , 사물은 그 자체에 있어서 단순한 데 대해 우리는 종류가 다르고 상반하는 두 가지 성질 , 즉 육과 영으로서 조성되어 있다는 것이다 . 왜냐하면 우리에 있어서 추리하는 부분이 정신적인 것이 아니라는 법은 있을 수 없고 또 사람이 우리를 단순히 물질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사물의 인식에서 더 한층 멀리 떨어지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 물질이 자신을 인식한다고 이야기하는 것처럼 상상하지도 못할 일은 없다 . 물질이 어떻게 자기를 인식하는가를 안다는 것은 우리에게는 불가능하다 .

이리하여 만약 우리가 단순한 물질이라고 한다면 , 우리는 전혀 아무것도 알 수 없겠고 , 또 만약 우리가 정신과 물질로서 조성되어 있다면 우리는 영적 혹은 물적인 단순한 사물을 완전히 알 수 없을 것이다 .

이로 말미암아 거의 모든 철학자들이 사물의 관념을 혼동하고 물질적인 사물을 정신적으로 , 정신적인 사물을 물질적으로 이야기하게 된다 . 왜냐하면 그들은 대담하게도 물체는 낮은 편으로 간다든가 , 그 중심으로 향한다든다 , 파괴를 피한다든가 , 진공을 두려워한다든가 , 물질은 성향이나 공감이나 반감을 가지고 있다든 가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 그런데 성향 ․ 공감 ․ 반감 등은 모두 정신에만 속하는 것이다 . 또 그들은 정신에 관해 이야기하면서 정신이 한 곳에 있는 것처럼 생각하고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에의 운동을 그것에 귀착시킨다 . 그러나 그런 것은 물질에만 속하는 것이다 .

이런 순수한 사물의 관념을 받아들이는 대신 우리는 그것들을 자기 자신의 성질을 가지고 착색하고 , 우리가 생각하는 모든 단순한 사물에 우리의 복합적인 존재의 ( 자태 ) 를 새겨 놓는다 .

우리가 모든 사물을 정신과 물질로서 조성되어 있는 것으로 보고 , 그런 혼합물이라면 우리로서 극히 이해하기 쉬우리라고 생각하지 않는 자가 있을까 ? 그러나 이것은 사람이 가장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 인간이란 그 자신에 대해 자연 중에서 가장 괴이한 존재이다 . 왜냐하면 그는 육체가 무엇인가를 모르고 정신이 무엇인가를 모르기 때문이다 . 그리고 하물며 육체와 같은 것이 어째서 정신과 결합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은 전 혀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 여기 그의 곤란의 정점이 있지만 이것이 야 말로 그의 존재 의 본질이다 . Modus quo corporibus adhaerent spirit u s comprehendi ab hominibus non potest , et hoc tamen homo est ( 정신이 육체에 결합하는 방식은 인간에 의해 이해될 수 없다 . 그런데 바로 이것이 인간이다 ).

 

73

그러나 아마 이 문제는 이성의 한계를 넘는 것 같다 . 그러므로 그 힘에 상응하는 사물에 관한 이성의 고안을 검토해 보기로 하자 . 만약 이성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이성이 가장 성실히 노력하여야 할 그 무엇이 있다 하면 , 그것은 자기 최고의 선을 탐구한다는 것이다 . 그래서 유능 총명한 사람들이 그 최고의 선을 어디다 두었는가 , 또 그들이 그에 관해 일치하였던가를 검토해 보기로 하자 .

어떤 이는 최고의 선이 덕에 있다하고 , 다른 이는 그것을 쾌락에다 둔다 . 어떤 이는 그것이 자연에 관한 학문에 있다 하고 , 다른 이는 그것이 진리에 있다고 한다 . Felix qui potuit rerum cognoscere causas ( 사물의 원인을 구명한 이는 행복하다 ) . 어떤 이는 완전한 무지에다가 , 어떤 이는 무위에다가 , 어떤 이는 외견에 반항하는데다가 , 어떤 이는 아무것도 놀라지 않는데다가 그것을 둔다 . Nihil mirari prope res una quae possit facere et sevare beatum ( 아무것에도 놀라지 않는 것은 행복을 주고 행복을 유지시킬 수 있는 유일의 길에 가깝다 ) . 또 참다운 피론학파들은 그들의 평정 ․ 회의 ․ 항구적인 판단중지에다가 최고의 선을 둔다 . 그리고 좀 더 현명한 다른 이들은 조금 더 나은 것을 발견하려고 생각한다 . 이만하면 우리에게는 충분하다 .

 

다음 제목으로 법률 다음에 옮긴다 이 훌륭한 철학이 이렇게도 오랫동안 노력하고서도 무엇 하나 확실한 것을 얻지 못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하더라도 최소한 혼이 자기 자신을 인식한다는 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이다 . 이 문제에 관한 세계의 지도적 인물들의 의견을 들어보기로 하자 . 그들은 혼의 본질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였던가 ? (394) 그들은 그것을 살리게 하여 더욱 행복하게 되었던가 ? (395) 그들은 그 발생 • 그 수명 • 그 서거에 관해 무엇을 발견하였던가 ? (399)

그러면 혼은 여전히 자기의 약한 빛에 대해 너무도 고상한 주제가 되는 것일까 ? 혼을 물질에까지 끌어내리고 혼이 생기를 주고 있는 육체 그 자체나 , 혼이 바라보거나 마음대로 움직이는 다른 부분이 무엇으로 되어 있는가를 혼이 알고 있는가 , 그 여부를 알아보기로 하자 .

저 아무것도 모르는 것이 없다고 하는 위대한 독단론자들은 이런 것에 관해 무엇을 알고 있을까 ? Harum Sententiarum ( 이와 같은 의견 중 어느 것이 진리인가 , 393) .

만약 이성이 이성답다면 틀림없이 이것으로 충분하다 . 이성은 자기가 견고한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아직 발견할 수 없다는 것을 확인할 만한 이성을 가지고 있다 . 그러나 이성은 여전히 견고한 것에 도달함을 단념하지 않고 오히려 반대로 이 탐구에 있어서 종전과 같이 열심이고 , 이 정복에 필요한 힘이 자기에게 있다고 확신하고 있다 . 그러므로 가는 데까지 가게 하여야 한다 . 그리고 그들의 결과에 나타난 이성의 힘을 음미해 본 후에 그 능력 자체를 인정하고 그것이 진리를 파악할 수 있는 어떤 힘과 어떤 자물쇠를 가지고 있느냐를 보기로 하자 .

 

74

「 인간학과 철학의 우매함에 관한 」 편지 . 이 편지를 「 심심풀이 」 의 장 ( 章 ) 앞에 놓는다 . Felix qui potuit … Nihil admirari . 몽테뉴에 있는 280 종의 최고의 선 .

 

75

Part. I, 1, 2, C. 1. Section 4.   ( 추측 . 한 걸음 더 정도를 낮추어 그것을 조롱하는 것도 곤란한 일은 아닌 것 같다 . 왜냐하면 애초부터 따진다면 ) 생명 없는 물체가 정욕이나 공포나 혐오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불합리한 일이 어디 있을 것인가 ? 무감각한 물체 , 생명도 없고 생명을 가질 가능성도 없는 물체가 정욕 , 즉 못하여도 그것을 감지할 만한 감각을 가진 혼을 예상시키는 정욕을 가지고 또 이 혐오의 대상이 진공이라는 것 같은 일이 있을 수 있을 것인가 ? 그 진공 속에 물체에 공포를 줄 그 무엇이 있을 것인가 ? 이 이상 더 천박하고 우스운 일이 어디 있을 것인가 ? 그러나 이것이 전부는 아니다 . 물체는 그 자체 속에 진공을 피하기 위한 운동의 본원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데 , 그렇다면 물체도 팔과 다리와 근육과 신경을 가지고 있다는 것인지 .

 

76

학문을 너무나 깊이 파고 들어가는 이들에 반대하여 글을 쓰는 것 . 데카르트 .

 

77

나는 데카르트를 용서할 수 없다 . 그는 그의 철학 전체에 있어서 가능하면 신 없이 지내려고 생각하였던 것 같다 . 그러나 그는 세계를 운동시키기 위해서 신으로 하여금 한 손가락을 움직이지 않을 수 없게 하였다 . 그 다름 그는 신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

 

78

무용하고 불확실한 데카르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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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카르트 = “이것은 형상과 운동으로 성립된다”라고 대체로 말하여야 할 것이다 . 왜냐하면 그것은 사실이기 때문이다 . 그러나 형상과 운동이 무엇인가를 이야기하고 기계를 만들려고 하는 것은 우스운 일이다 . 왜냐하면 그것은 무익하고 불확실하고 곤란하기 때문에 만약 그것이 진실이라면 모든 철학은 한 시간의 노력에도 해당할 가치가 없으리라고 우리는 생각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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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름발이는 우리를 자극시켜 주지 않는데 , 정신적인 절름발이가 우리를 자극시켜 주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 절름발이는 우리가 올바르게 걸어가고 있음을 인정하는데 , 정신적인 절름발이는 마치 절름거리며 다니는 것처럼 말하기 때문이다 .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그들에 대해 동정은 가질지언정 성화를 내지 않을 것이다 .

에픽테토스는 퍽 강하게 다음과 같이 질문하고 있다 . “우리는 남에게 당신은 두통이라는 말을 들어도 불쾌해지지 않는데 , 당신은 추리를 잘못한다든가 선택을 잘못한다든다 하는 말을 들으면 불쾌하여지는 것은 웬일인가 ? ” 라고 .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 우리는 머리가 아프지 않다든가 절름발이가 아니라든가 하는 것에 관해서는 충분한 확신을 가지지만 , 진실한 자의 선택에 있어서는 그렇게 확신을 가지지 못한다 . 그러므로 해서 우리는 모든 시력을 가지고 그것을 보지 않으면 확신을 가질 수가 없으니까 남이 전 시력을 가지고 그와 반대되는 것을 보게 되면 갈피를 잡지 못하고 놀란다 . 다수의 사람들이 우리의 선택을 비웃을 때는 더욱 그렇다 . 왜냐하면 우리는 다수인의 판단보다도 자기의 판단을 택하여야 하는데 , 이것은 대담하고도 곤란한 일이기 때문이다 . 절름발이에 대해 느끼는 감정에는 이런 모순이 결코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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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은 스스로 믿고 의지는 스스로 사랑한다 . 그러므로 참다운 대상이 없으면 그들은 허위의 대상과 결부하지 않을 수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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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력 = 이것은 인간이 있어서의 기만적인 부분, 오류와 허위의 여주인, 늘 교활하지는 않으므로 그만큼 더 교활한 것이다. 왜냐하면 만약 상상력이 거짓의 적확한 기준이었더라면 진리의 적확한 기준이었을 것이기 때문에. 그러나 대다수의 경우 허위이기 때문에 상상력은 진 ( 眞 ) • 위 ( 爲 ) 양자에다 같은 각인을 찍음으로써 자기의 특성을 조금도 나타내지 않는다.

나는 어리석은 자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니고 현자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현자들 사이에 있어서 상상력은 사람을 설득하는 큰 기능을 가진다. 이성은 아무리 절규하더라도 무익하다. 그것은 사물을 평가할 수가 없다.

이성의 적이요, 이성을 조종하고 지배하기를 좋아하는 이 오만한 능력은 만사에 있어서 자기가 얼마나 유력한가를 표시하기 위해 인간 속에 제 2 의 천성을 수립했다. 그것 ( 상상력 ) 은 인간을 행복하게 하고, 불행하게 하고, 건강하게 하고 부유하게 하고, 가난하게 한다 . 그것은 이성으로 하여금 믿게 하고 , 회의하게 하고 , 부정하게 한다. 그것은 감정을 정지시키고 또 움직이게 한다. 그것은 어리석은 자를 만들고 현자를 만든다. 그리고 가장 유감스러운 것은 그것이 그 주인공의 마음을 이성이 부여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충일 • 완전한 만족을 가지고 채워 주는 점이다. 교묘한 인간은 성실하고 이성적인 인간이 합리적으로 자기를 즐기는 것과는 전혀 달리, 상상력을 가지고 자기를 즐긴다. 그들은 권세를 가지고 사람을 바라본다. 대담하게 확신을 가지고 논의한다. 그러나 성실하고 이성적인 인간은 공포를 느끼고 회의하면서 논의한다. 그리고 용모의 쾌활성은 왕왕 그들 ( 교묘한 인간 ) 에게 유리한 견해를 그 듣는 이에게 부여하곤 한다. 그만큼 상상력이 풍부한 현자는 같은 성질을 가지고 있는 비판자들에게서 호의를 받는 것이다. 상상력은 어리석은 자를 현자로 만들 수는 없으나 어리석은 자를 행복하게 할 수는 있다. 이에 대해, 이성은 그 벗을 불행하게 만들어 줄 따름이다. 전자는 그 벗을 영광으로 덮어 주고, 후자는 그 벗을 치욕으로 덮어 준다.

명성을 떨어뜨리는 것은 무엇인가? 인물이나, 사업이나, 법률이나, 귀족에게 존경을 부여해 주는 것은 이 상상하는 능력 이외 무엇이 또 있을까? 지상의 모든 부도 그의 동의를 받지 않는 한 얼마나 불충분한 것인가!

여러분은 다음과 같이 말하지 않을까? 이 법관 , 그의 존경할 노령에 의해 전 인민이 두려워하고 있는 이 법관은 순수 • 고상한 이성에 의해 자신을 율하고, 또 약자의 상상력밖에 손상시키지 않는 이런 공허한 정세에 머무르지 않고 사건을 그 진상에 비추어 판결하리라고. 그가 완전히 경건한 열성을 가지고, 그의 견실한 이성을 열렬한 자애심에 의해 더욱 강인하게 설교장에 들어가는 것을 보라. 거기서 그는 모법적인 존경심을 품고 설교를 들르려고 한다. 자, 설교자가 나타났는데 그는 날 때부터 쉰 목소리를 하고 있고, 얼굴의 생김새가 기묘한데 , 이발사가 그 수염을 잘못 깎아놓은 데다가 우연히 얼굴마저 더러워졌다고 가정하자, 그가 아무리 위대한 진리를 말한다 하더라도 우리 노법관의 근엄함이 허물어질 것은 확실하다.

세계 최대의 철학자가 필요 이상으로 큰 판자 위에 섰는데, 그 밑에 단애 ( 斷崖 ) 가 있다고 가정하면 그의 이성이 자기의 안전을 아무리 보장해 주더라도 그는 상상력에 지고 말 것이다. 어떤 이들은 그것을 생각만 하여도 얼굴빛이 파래지고 진땀이 날 것이다.

나는 그 작용을 전부 말하고 싶지 않다. 고양이나 쥐가 보인다든가, 석탄 덩어리가 깨어진다든가 등등이 이성을 탈선시킨다는 것을 모르는 이가 있을까? 말의 성조는 가장 훌륭한 현자도 위압하고 연설이나 시를 억지로 바꾸는 것이다.

애정이나 증오는 재판을 정면으로 변경시킨다. 그리고 사전에 다액의 돈을 지불받은 변호사가 자신이 변호하는 사건을 얼마나 사실보다 정당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인가! 그의 대담한 거동이나 외관이 기만당한 재판관들에게 얼마나 그 사건을 실제보다 유리하게 보여주는가! 바람을 맞아 어떤 방향으로도 흔들리는 우스운 이성이여!

나는 상상력의 타격에 의해서만 움직인다 하여도 과언이 아닌 인간의 거의 전부의 행동을 구체적으로 예를 들고 싶은 정도이다. 왜냐하면 이성이란 부득이 굴복하게 되어 있고, 또 가장 현명한 이성이라 하더라도 인간의 상상력이 대담하게 도처에 도입한 것을 자기의 원리로서 채택하는 까닭이다.

[이성에만 따라가려는 사람은 보통 사람들의 판단으로 보면 어리석게 보일 것이다. 판단하려면 세상의 최대 다수의 판단에 의거해야 한다. 그것이 다수인의 마음에 드는 까닭으로 우리는 가공으로 알려진 행복을 위해 종일토록 일하여야 한다. 그리고 수면이 우리의 이성의 피로를 풀어 준 때는 곧 벌떡 일어나 환영의 뒤를 쫓고 이 세상의 여주인의 감화를 받기 위해 뛰어다녀야 한다. 여기 오류의 한 근원이 있지만 그것은 유일한 것이 아니다. 진과 위를 화해시키면 상상력이 현저히 유리하게 된다 하더라도, 인간이 양자를 결합시킨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왜 그런고 하니, 양자가 다투면 상상력은 더 한층 유리하게 될 것이요, 상상력은 왕왕 이성을 그 좌석에서 완전히 끄집어 내렸지만, 이성은 한 번도 상상력에 이겨본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의 법관들은 이 비밀을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의 붉은 법복, 털 많은 고양이처럼 그들의 몸을 둘러싸곤 하는 담비의 모피, 그들이 재판하는 법정, 백합꽃, 이런 모든 위엄 있는 외양은 극히 필요한 것이었다. 만약 의사들이 가운이나 슬리퍼를 몸에 걸치지 않고, 또 박사들이 사각모나 사방이 넓은 학사복을 몸에 걸치지 않았으면 그들은 세상 사람들을 속일 수 없었을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이런 당당한 외견에 반항할 수가 없는 것이다. 만약 법관들이 참으로 재판할 줄 알고, 의사들이 찬다운 의술을 알고 있다면 각모 같은 것은 별로 필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런 학문의 권위는 그것만으로서 충분히 존경받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가공한 학문 밖에 알고 있지 못하니까 그들은 자기들이 손을 대고 있는 상상력에 호소하기 위해 쓸데없는 도구를 사용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런 도구로 말미암아 사실상 그들은 존경을 얻는다. 군인만은 이런 몸차림을 하지 않는데, 그것은 군인의 역할이 본질적인 것이어서 실력에 의해 입신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가면에 의해 입신하기 때문이다.

그럼으로 해서 우리의 왕들도 그런 분장을 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들은 왕으로 생각되기 위해서 특출한 의상을 몸에 걸치지 않는 대신, 호위병이나 창병을 데리고 다닌다. 주군을 위해서만 팔과 힘을 사용하는 이들 무장한 군인들, 앞을 행진하는 나팔수나 고수, 그리고 왕을 둘러싼 저 군대들은 가장 기력이 강한 자들도 위축하게 한다. 그들은 의상을 가지고 있지 않을 따름이며 실력을 가지고 있다. 사만 명의 근위병에 둘러싸여 호화로운 궁전 안에 살고 있는 투르크 대제를 보통 사람으로 생각하기 위해서는 참으로 세련된 이성이 필요할 것이다.

우리는 장의를 걸치고 모자를 쓴 변호사를 보기만 하여도 그의 능력 에 대해 유리한 견해를 가지지 않을 수 없다. 상상력은 만사를 좌우한다. 그것은 미나 정의나 행복을 만든다. 나는 그 제목밖에 모르지만, 그것만으로서 많은 책에 필적하는 Della opinione regina del monds ( 세계의 여왕인 여론에 관하여 ) 라는 이탈이아 책을 몹시 보고 싶다 . 나는 그 책 을 모르지만 그에 동의한다. 그 속에 나쁜 점이 있다면 그것은 제외하고.

대체로 이상이 우리를 필연적으로 오류로 이끌어가기 위해 특별히 부여된 것처럼 보이는 이 기만적 능력의 작용이다. 우리는 그런 오류의 다른 원인도 많이 알고 있다.

낡은 인상만이 우리를 속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신기한 것의 매혹 역시 같은 힘을 가지고 있다. 어릴 때의 그릇된 인상에 따라가는가, 혹은 신기한 것을 대담하게 따라가는가에 관해 서로 논란하는 인간의 모든 논쟁이 여기서 생겨난다. 과연 누가 중용을 유지하고 있는가? 그가 나타나서 그것을 증명하여 주기를 바란다. 제아무리 자연스럽고, 또 어렸을 때부터 가지고 있는 원리라 하더라도, 교육에 의했건 감득에 의했건 간에, 그릇된 인상으로 간주되지 않았던 원리란 세상에 하나도 없다.

어떤 이는 말한다. "상자 안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때 그 상자는 비었다고, 당신은 어렸을 때부터 믿어 왔으므로 진공의 가능을 믿고 있었다. 그것은 당신의 감성의 착각이 습관에 의해 강화된 것이고 학문에 의해 정정되어야 할 것이다." 또 다른 이는 말한다. "진공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학교에서 배웠기 때문에 그런 그릇된 인상을 받기까지는 대단히 선명하게 진공을 인식하고 있었던 당신의 상식이 왜곡된 것이다. 그것은 당신의 최초의 천성에 돌아감으로써 정정되어야 한다." 과연 누가 속이고 있는가? 감성인가. 교육인가?

우리에게는 또 하나 오류의 원인이 있다. 그것은 질병이다. 질병은 우리의 판단력과 감성을 훼손한다. 그리고 중병이 현저하게 그것들을 훼손한다면 가벼운 병 역시 그 정도에 따라 그것들에게 영향을 준다는 것도 부인할 수 없다.

우리 자신의 이해라는 것도 우리의 눈을 기분 좋게 현혹시키는 경탄할 도구이다. 세계에서 가장 공평무사한 사람이라도 그 자신의 소송사건의 재판관이 되는 것은 허락되지 않는다. 이런 자기 이익에 빠지려고 하지 않다가 거꾸로 세계에서 가장 불공평하게 된 이들을 나는 알고 있다. 그들이 아주 정당한 사건에 깨끗이 패소한 것은 그것이 근친자에 의해 그들에게 의뢰되었기 때문이다.

정의와 진리는 극히 미묘한 두 개의 첨단이고 , 우리의 도구는 너무도 마멸하여 그것들을 정확히 접촉할 수 없다. 가령 우리의 도구가 그것들에 닿는다 하더라도 첨단은 부러지고 사방팔방에 뛰어나와 진 ( 眞 ) 보다도 위 ( 爲 ) 의 쪽에 가 닿을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진에 관한 올바른 원리를 전혀 가지고 있지 않고, 위에 관한 우수한 원리를 많이 가지도록 극히 행복스럽게 제작외어 있는 것이다. 이제 어째서…인가를 보기로 하자. 그러나 이런 오류의 가장 유력한 원인은 감성과 이성 사이에 벌어지는 싸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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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부터 기만적 능력의 문장을 쓰기 시작해야 하겠다 . 인간은 은총이 없으면 자연적인 , 그리고 지워 버리기 어려운 오류에 가득 찬 자에 지나지 않는다 . 어떤 자도 그에게 진리를 제시치 않는다 . 모든 것이 그를 속인다 . 진리의 두 개의 원리인 이성과 감성은 둘 다 진실성을 결여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 서로 기만을 주고받는다 . 감성은 이성을 허위의 외관에 의해 기만하고 , 또 감성이 이성에게 부여하는 이 같은 사기를 이번에는 이성이 감성에 대해서 한다 . 이성이 그것을 보복하는 것이다 . 혼의 정념은 감성을 혼란하게 하고 허위의 인상을 감성에 부여한다 . 양자는 서로 다투어 속이기 내기를 한다 .

그러나 우연히 그리고 지성이 결여하기 때문에 생기는 이런 오류 외에 그의 이질적인 능력과 아울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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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력은 환상적인 평가에 의해 조그마한 사물을 확대하여 우리의 혼을 채우게까지 만든다 . 또 거칠 것 없는 대단한 거만함에 의해 위대한 것을 축소하여 자기의 척도에 알맞게까지 만든다 . 신에 관해 이야기 할 때가 그렇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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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마음을 가장 굳세게 붙잡고 있는 일. 예를 들면 자기의 근소한 재산을 은닉하는 따위의 일은 왕왕 거의 아무것도 아니다. 이것은 무가 우리의 상상력에 의해 산으로까지 확대된 것이다. 상상력이 한 바퀴 돌면 우리는 이것을 아무 고생도 없이 발견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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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기분은 남을 책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나 숨이 가쁘게 먹는 사람을 미워한다 . 기분은 상당한 무게를 가지고 있다 . 거기서 우리는 무엇을 배우는가 ? 그 무게는 자연스러운 것이니 우리는 그것에 따라가야 한다는 것인가 ? 아니 오히려 거기에 반항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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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uasi quidquam infelicious sit homine cui sua figmenta dominantur . plin ( 인간이 그 상상에 의해 지배되는 것처럼 불행한 일이 또 어디 있을까 . 프리니우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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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더럽힌 얼굴을 겁내는 어린애 . 이것이 어린애다 . 어렸을 때 이렇게 약한 자가 , 나이 들었다고 하여 어찌 그렇게 강하게 될 구 있으랴 ! 인간은 기분만을 바꿀 수가 있다 . 점차로 완성하는 자는 모두 점차로 소멸한다 . 약했던 자는 모두 결코 절대로 강해질 수 없다 . “그는 성장했다 . 그는 변했다”라고 말하여도 아무런 소용이 없다 . 그는 여전히 마찬가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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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관은 우리의 천성이다 . 신앙에 습관화된 사람은 그것 ( 신앙 ) 을 믿고 , 벌써 지옥을 무서워하지 않을 수 없고 , 다른 사물을 믿지 않는다 . 왕을 무섭다고 여기는 데 비롯된 사람은…운운 , 그렇게 보면 우리의 혼은 수나 공간이나 운동을 보는 데 습관화되어 그것들을 믿고 그 이외의 것을 믿지 않게 되었다는 것을 누가 의심하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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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uod crebro videt non miratur , etiamsi cur fiat nescit , quod ante non viderit , id si evenerit , ostentum esse censet ( 때때로 일어나곤 하는 일에 대해서 사람은 그다지 놀라지 않는다 . 가령 그 원인을 모르더라도 . 여태까지 본적이 없는 일이 기적으로 간주된다 ) .

Nae ist magno conatu magnas nugas dixerit ( 아주 어리석은 일을 무척 애써 이야기하려는 자가 여기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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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ongia solis ( 태양의 흑점 ) . 우리는 항상 같은 경과가 생기는 것을 보면 거기서 자연의 필연성을 결론한다 . 예를 들면 “내일은 오리라 . 운운”하는 것처럼 . 그러나 자연은 왕왕 우리를 속이고 그 자신의 규칙에 복종하지 않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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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생래의 원리란 습관의 원리가 아니고 무엇일까 ? 애들에게 있어서는 마치 동물에 있어서의 수렵과 같이 , 그들 양친의 습관을 계승한 것이 아니고 무엇이랴 ?

상이한 습관은 상이한 생래의 원리를 우리에게 부여해 줄 것이다 .

이것은 경험에 비추어 명백하다 . 또 습관에 의해 없어지지 않는 생래의 원리도 있고 천성에 의해서도 제 2 의 습관에 의해서도 없어지지 않는 , 생래에 반하는 습관도 있다 . 이것은 성격에 의존하는 것이다 .

 

93

아버지는 생래의 사랑이 없어지지 않겠나 하고 염려한다 . 그러면 없어지기 쉬운 이런 천성이란 무엇인가 ? 습관은 제 2 의 천성이고 최초의 천성을 파괴한다 . 그런데 천성이란 무엇인가 ? 왜 습관은 생래적인 것이 아닌가 ? 습관이 제 2 의 천성인 것처럼 이 천성 자체가 최초의 습관에 지나지 않은가 나는 몹시 염려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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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천성은 완전히 자연스럽다 . Omne animal ( 모든 짐승 ) .

세상에는 자연스럽게 만들 수 없는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고 , 잃어버리게 할 수 없는 자연도 존재하지 않는다 .

 

95

기억과 희열은 감정이다 . 그리고 기하학의 명제조차도 감정이 된다 . 왜냐하면 이성은 감정을 자연스럽게 만들어 주고 , 자연의 감정은 이성에 의해 소명되기 때문이다 .

 

96

사람은 자연의 작용을 증명하는 데 , 나쁜 이유를 사용하는 데 습관이 되면 좋은 이유가 발견되더라도 그것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는 법이다 . 일례로서 혈액순환을 들어 말한다면 , 혈관을 묶은 후 혈관이 붙은 것은 무엇 때문이냐 하는 설명 같은 것이 그렇다 .

 

97

일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직업 선택이다 . 그런데 그것을 좌우하는 것은 우연이다 . 습관이 사람들을 석공으로 만들고 , 병사로 만들고 , 미장이로 만든다 . “저이는 훌륭한 미장이다”라고 누가 말한다 . 또 병사를 가리켜 “저자들은 바보”라고 말한다 . 어떤 이들은 이와 반대로 “세상에 전쟁처럼 위대한 것은 없다 . 병사가 아닌 자들은 무뢰한들이다”라고 말한다 . 어렸을 때 어떤 직업의 칭찬받고 다른 어떤 직업이 멸시받는 것을 누차 들은 후 사람들은 직업을 택한다 . 왜냐하면 사람은 자연히 진실을 사랑하고 우매를 싫어하는 까닭으로 그런 말이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기 때문이다 . 단지 사람들은 그 적용을 잘못할 따름이다 . 습관의 힘이라는 것은 매우 큰 것이어서 자연히 단순한 인간으로서 만들어 놓은 것에서 사람은 모든 신분의 인간을 만들어 냈다 . 왜냐하면 어떤 토지에는 석공이 많고 다른 토지에는 병사가 많은 일이 있고 하니까 틀림없이 자연이란 그렇게 균등한 것이 아니다 . 그러므로 균등하게 만들어 놓은 것은 습관이다 . 습관은 자연을 구속하니까 . 그러나 때때로 자연은 습관에 이기고 선악 모든 습관에 반해 인간을 본능 그대로 남겨둘 때도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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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류로 이끄는 편견 = 모든 인간이 수단만을 생각하고 목적을 생각하지 않는 것은 한탄할 일이다 . 각자는 제각기의 신분에 있어서 어떻게 선처할 것인가를 생각한다 . 그러나 신분이나 주소의 선택에 이르러서는 운명에 맡겨두고 있다 . 수많은 투르크인 ․ 이단자 ․ 불신자들이 각기 이것이 최선이라는 편견을 물려받았다는 이유만으로 그들의 조상들의 뒤를 따라가고 있는 것은 가련한 일이다 . 그리고 이것이 바로 각자로 하여금 대장장이 • 병사 등 제각기의 신분을 가지도록 결심시키는 것이다 .

그 때문에 야만인들은 프로방스를 아무렇게도 생각하지 않는다 .

 

99

의지와 행위와 다른 모든 행위 사이에는 보편적이고 본질적인 상위가 있다 . 의지는 신앙의 주요한 기관의 하나이다 . 의지가 신앙을 형성한다는 것이 아니다 . 사물은 사람이 보는 그 측면에 따라 참으로도 되고 거짓으로도 된다 . 의지는 어떤 측면을 다른 측면보다 좋아하기 때문에 자기가 보기를 좋아하지 않는 사물의 특질을 이지로 하여금 고려시키지 않도록 만들어 놓는다 . 이처럼 이지는 의지와 같이 전진하고 , 의지가 좋아하는 측면을 보려고 머무르곤 한다 . 그리고 거기서 본 측면에 의해 판단하는 것이다 .

 

100

자애 = 자애와 인간의 「 자아 」 의 본성은 자기만을 사랑하고 자기만을 생각하는 것이다 . 그런데 인간은 무엇을 하려는 것인가 ? 그는 그가 사랑하는 대상이 결함과 비참에 가득 차 있음을 어쩔 수 없다 . 그는 위대해지려고 하면서 자신이 미미함을 안다 . 행복해지려고 하면서 자신이 비참함을 안다 . 완전해지려고 하면서 자신이 불완전에 가득 차 있음을 안다 . 남들이 사랑과 존경의 대상이 되려고 하면서 자신의 결함이 남들의 혐오와 모멸만을 받을 값이 있다는 것을 안다 . 그가 느끼고 있는 이 당혹은 그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부정하고 가장 죄 많은 정욕을 그의 마음속에 일으킨다 . 왜냐하면 그는 자기를 책하고 자기의 결함을 자각시키는 이 진실에 대해 철저한 증오를 느끼기 때문이다 . 자애는 이 진실을 멸절하려고 바라나 , 진실 그 자체를 파괴할 수가 없으므로 자기의 의식과 남의 의식에 있어서 가능한 한 그것을 파괴한다 . 즉 자기의 결함을 남에게도 자기 자신에게도 감추는 데 전력을 다하고 , 그 결함을 남에게 지적당하는 것도 , 남에게 간취당하는 것도 참을 수 없어 한다 .

결함에 가득 차 있다는 것은 틀림없이 하나의 악이다 . 그러나 결함에 가득 차 있으면서도 그것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것은 보다 더 큰 악이다 . 그것은 고의의 착각의 결함을 그 위에다 더 가해 주기 때문이다 . 우리는 남이 우리를 기만하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 또 남이 그들에게 마땅치 않는 존경을 우리로부터 받으려고 하는 것을 정당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 그러므로 우리가 남을 속이는 것도 , 우리에게 마땅치 않는 존경을 받고자 남들에게 기대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부당하다 .

따라서 남들이 우리가 실제로 가지고 있는 결함이나 악덕을 폭로하는 경우 , 그들이 우리에게 대해 조금도 잘못하고 있지 않다는 것은 분명하다 . 왜냐하면 그런 결함이나 악덕을 일으키는 것은 그들이 아니고 오히려 그들은 우리에게 도움을 주고 있으니까 . 그들은 그런 결함을 모르고 있다는 일종의 악에서 우리를 구조해 내는 데 도움을 주고 있는 것이다 . 그들이 그런 결함을 알고 우리를 멸시한다고 하여 우리는 성을 내서는 안 된다 . 그들이 있는 그대로의 우리의 자세를 알고 , 만약 우리가 멸시를 당할만하거든 멸시를 한다는 것은 당연하기 때문이다 .

이러한 것 속에 공평과 정의에 가득 찬 마음에서 생겨날 감정이 있다 . 그런데 우리 마음에서 그와 정반대인 성향을 엿볼 수 있다면 , 그에 관해 우리는 무엇이라고 말하여야 할 것인가 ? 왜 우리가 진실을 미워하고 진실을 이야기하는 자를 미워하고 , 남들이 우리의 편을 들어 스스로를 속여 나가는 것을 좋아하여 실제로 있는 그대로의 우리와는 다른 것으로서 남들에게 평가받기를 원하는 것은 사실이 아닌가 ?

여기 나로 하여금 공포를 느끼게 하는 하나의 증거가 있다 . 가톨릭교는 우리의 죄를 누구에게도 무차별하게 참회하라고 강제하지 않는다 . 다른 사람들에게는 감추어 두는 것을 허용하지만 단 한 사람에게 대해서는 마음속을 털어놓고 있는 그대로의 자태를 보여주도록 명령한다 . 이 종교가 우리에게 각성을 명하는 것은 세상에는 그이 한 분뿐이다 . 그리고 그이에게는 굳이 비밀을 지키게 하고 그것을 알고서도 마치 그것을 모르는 것처럼 하게 한다 . 이 이상 더 자애 깊고 더 친절한 방법을 예상할 수 있을까 ?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부패는 심하고 이런 법칙조차 너무도 엄격하다고 생각한다 . 그리고 이것이 바로 유럽의 대부분으로 하여금 교회에 대해 반항하게 한 주요한 이유 중의 하나다 .

말하자면 모든 사람에 대해서 하는 것이 정당하다고 볼 수 있는 일은 한 사람에 대해서만 하라고 명령하였다고 하여 , 그것을 나쁘게 생각할 정도로 의심이란 부정하고 비합리적인 것이다 . 우리가 남을 속이는 것이 당연하기 때문인가 ?

진실에 대한 이런 혐오에는 여러 가지 정도가 있다 . 그러나 이런 혐오는 자애와 분리할 수 없는 것이니만큼 만인에게 다 어느 정도 존재한다고 말 할 수 있을 게다 . 이 나쁜 감정으로 말미암아 남을 질책하지 않으면 안 될 위치에 있는 사람들은 남의 기분에 거슬리지 않기 위해 에둘러 말하고 절제를 취하지 않으면 안 된다 . 그들은 우리의 약점을 일부러 감소하고 , 마치 그것을 변명하는 척하고 비난 속에 찬사와 애정 및 존경의 증거를 혼입해 두지 않으면 안 된다 . 이런 모든 것을 가지고서도 , 이 약은 자애심에 대해 여전히 쓴맛을 잃어버리지 않는다 . 자애심은 이 약을 될 수 있는 대로 적게 , 그리고 항상 혐오심을 가지고 또 때로는 그 약을 주는 사람들에 대해 남모르는 원한을 품고 받아들이곤 한다 .

그 때문에 만약 누가 우리에게서 사랑을 받아 어떤 이로운 점이 있다 하거든 그이는 우리에게 불쾌하리라고 생각하는 역할을 맡으려 하지 않 는다. 남은 우리가 대우를 받고 싶어 하는 대로 우리에게 대한다 . 우리가 진실을 미워하면 진실을 우리에게 감추어 둔다. 우리가 아첨받기를 원하면 우리에게 아첨한다. 우리가 속이기를 좋아하면 우리를 속이곤 한다.

그런 까닭으로 우리는 이 세상에서 입신하는 행운의 도가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점점 더 진실에서 멀리 떨러지게 된다 . 그것은 어떤 이의 호의를 받으면 대단히 유리하고 혐오감을 일으키면 지극히 위험한 것 같은 경우 , 그 사람의 기분을 손상하는 것을 사람들이 몹시 겁내기 때문이다 . 한 사람의 군주가 전 유럽의 웃음거리가 되어 있으면서도 , 본인 혼자만이 그것을 모르고 있을 때도 있으리라 . 나는 그것을 별로 의심하지 않는다 . 진실을 말한다는 것은 그 상대방에는 유리하지만 말하는 본인에게는 불리하다 . 그이는 미움을 받으니까 . 그런데 왕의 측근에 있는 사람들은 그들이 봉사하고 있는 왕의 이익보다도 그들 자신의 이익을 더 한층 사랑한다 . 그래서 그들은 자신을 해치면서까지 왕으로 하여금 이익을 얻게 하겠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

이런 불행이 제일 상류사회에 있어서 크고 더욱 일반적이라는 것은 두 말할 필요도 없다 . 그러나 하층에 속하는 사람들이라 하여 그의 예외가 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 남들의 사랑을 받게 되면 항상 어떤 이득이 있기 때문이다 . 이처럼 인생이란 부질한 착각에 지나지 않는다 . 서로 속이고 아첨을 하는 수밖에 별 도리가 없다 . 누구도 본인을 앞에 두고서는 본인이 부재하였을 때 말하는 것처럼 이야기하지 않는다 . 인간 사이의 결합이란 이런 상호적인 기만 위에 축조되어 있는 데 불과하다 . 그리고 만일 자기의 친구가 자기의 부재중 자기에 관해 이야기한 것을 자기가 알게 된다면 , 가령 그때 그가 진실히 또 사감을 떠나 말을 하였다고 하더라도 그냥 여전히 계속하는 우정이란 드물 것이다 .

그러므로 인간은 자신에 대해서나 남에 대해서나 위장 • 허위 • 위선에 지나지 않는다 . 사람은 남이 진실을 이야기하기를 좋아하지 않고 , 남에게 진실을 이야기하는 것도 피한다 . 이렇게도 공정과 도리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이런 모든 성향은 인간의 마음속에 날 때부터 뿌리박고 있는 것이다 .

 

101

만일 모든 사람이 서로 이야기한 바를 알게 된다면 , 세상에 벗이란 네 명도 없으리라는 것은 사실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 이것은 사람이 때때로 이야기한 것을 사려 없이 알려 줌으로써 생겨나는 싸움에 의해 명백해진다 ( 그뿐더러 나는 또 말한다 . 모든 사람은… ) .

 

102

악덕 중에는 다른 악덕에 의해서만 우리에게 결착되고 , 따라서 줄기를 없애면 나뭇가지처럼 제거되는 것도 있다 .

 

103

알렉산더의 정절의 모범은 그의 음주벽의 악례가 무절제한 사람들을 만들어 놓은 것처럼 , 많은 정절자를 만들어 내지 못했다 . 그만큼 유덕하지 못하다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 아닌 모양이나 , 그만큼 악덕하지 않다는 것은 변명이 되는 모양이다 . 사람들은 이런 위대한 인물들의 악덕에 자기가 빠져 있다고 생각할 때는 보통사람의 악덕에는 전혀 빠져 있지 않다고 생각한다 . 그러나 위인이라도 그런 악덕에 있어서는 보통 사람과 다름이 없다는 것을 유의하지 못한다 . 사람은 위인이 민중에 결부되어 있는 그 끝에서 위인과 결부되어 있는 것이다 . 왜냐하면 아무리 높이 솟아 있는 위인이라 하더라도 어떤 점에 있어서 최하등의 인간과 결부되어 있기 때문이다 . 그들은 우리 사회에서 완전히 떨어져 공중에 걸려 있는 것이 아니다 . 아니 , 그들이 우리보다 더 크다고 하면 그것은 그들이 두각을 나타내고 있기 때문이리라 . 그들의 발은 우리의 발과 마찬가지로 낮은 곳에 있다 . 그들은 모두 같은 평면상에 있고 같은 땅 위에 서 있다 . 그리고 이 극단에 있어서는 그들도 우리들이나 가장 비천한 사람들이나 애들이나 짐승과 마찬가지로 낮은 것이다 .

 

104

우리의 정념이 우리로 하여금 무엇을 하게 할 때 우리는 자기의 의무를 잊어버린다 . 예를 들면 독서를 좋아하는 이가 다른 일을 하여야 할 때에도 책을 읽고 있는 것처럼 . 그러나 의무를 상기하기 위해서는 무엇이건 자기가 싫어하는 일을 하도록 하여야 한다 . 그렇게 하면 따로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구실을 만들고 이 방법으로 자기의 의무를 상기한다 .

 

105

어떤 사물을 제시하여 남의 판단을 구할 때 그 제출 방식에 의해 그의 판단을 그릇되지 않게 한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 만약 우리가 “ 나는 그것이 예쁘다고 생각한다”든가 “나는 그것이 어둡다고 생각한다”든가 혹은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하면 그 의견에 상대방의 상상을 유도하든가 또는 반대의 방향으로 상대방의 상상을 이끌어가는 것이다 . 아무 말도 하지 않는 편이 낫다 . 그때야 상대방은 있는 그대로 , 다시 말하면 그 당시의 상태에 응하여 판단하고 또 우리가 만들어 낸 사정과는 전혀 다른 사정 하에서 판단한다 . 최소한 우리는 그 사물에 아무것도 첨가하여 주지는 않게 될 것이다 . 단 상대방이 우리의 침묵에 부여하려는 의미나 해석에 따라 또 상대가 인상을 보는 사람이라면 그가 표정이나 얼굴이나 목소리 등에서 추측하는 데 따라 그 침묵이 어떤 효과를 나타내는 경우는 그와 다르다 . 어떤 판단을 그 본래의 처지에서 분리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만큼 어려운 일이다 . 아니 확고부동한 판단이란 그만큼 적은 것이다 .

 

106

각자의 주관적인 정념을 알게 되면 그 사람의 마음에 들리라는 것은 확실하다 . 그러나 각자가 가지고 있는 행복에 관한 관념에 있어서조차 그 자신의 행복에 상반하는 환상을 가지고 있다 ,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어쩔 수 없는 불가사의이다 .

 

107

Lustravit lampade terras ( 그는 등불로 대지를 비쳤다 ). 날씨와 나의 기분 사이에는 별로 관련이 없다. 나는 내 자신 속에 갠 날씨와 흐린 날씨를 가지고 있다. 나의 사업의 성공과 실패조차도 그와의 관련이 거의 없다. 때때로 나는 행복에 대해 스스로 역행하려고 한다. 행복을 극복하는 영광은 나로 하여금 즐겁게 그것을 극복하게 한다. 그 대신 나는 때때로 행복에 있어서도 혐오를 느끼곤 한다.

 

108

어떤 이가 그 말하는 것에 대해 아무런 사심을 품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 그것을 가지고 그가 거짓말을 하지 않고 있다고 절대적으로 결정지어서는 안 된다 . 세상에는 단순히 거짓말을 하기 위해서 거짓말을 하는 이들이 있기 때문이다 .

 

109

사람이란 건강할 때는 병에 걸리면 어떻게 하나 하고 근심하지만 , 정작 병에 걸리면 유쾌하게 약을 마신다 . 병이 그런 결심을 하게 한다 . 심심풀이나 산책을 하겠다는 욕구나 원망도 건강할 때는 일어나지만 병환의 요구와는 일치하지 않으므로 벌써 일어나지 않게 된다 . 자연은 그때그때의 상황에 알맞은 욕구와 원망을 부여해 준다 . 우리를 혼란하게 하는 것은 자연이 우리에게 주는 우려가 아니라 ,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주는 우려에 지나지 않는다 . 왜냐하면 우려라는 것은 우리가 현재 있는 상태에다가

우리가 현재 있지 않는 상태의 욕구를 첨가하여 주기 때문이다 .

 

109   부록

자연은 항상 우리를 어떤 상태에 있어서도 불행하게 만들어 주므로 우리는 원망에 의해 행복한 상태를 그린다 . 왜냐하면 그런 원망은 우리가 현재 처해 있는 상태에다 우리가 현재 처하여 있지 않는 상태의 즐거움을 첨가하여 주기 때문이다 . 그리고 우리가 그런 즐거움에 도달한다 하더라도 그 때문에 행복하게 되지는 않을 것이다 . 우리는 그 새로운 상태에 적응하는 다른 원망을 일으키게 될 터이니까 .

이 일반 명제를 하나하나의 경우에 적용하여야 한다 .

 

110

현재 맛보고 있는 쾌락을 거짓으로 느끼고 , 아직 맛보지 안은 쾌락의 공허함을 모르기 때문에 마음의 동요가 생긴다 .

 

111

마음의 동요   사람은 보통의 오르간을 치는 격으로 인간을 대한다 . 참으로 인간은 오르간이다 . 그러나 기이하고 자의적이며 변하기 쉬운 오르간이고 ( 그 파이프는 올바른 음계로 나열되어 있지 않다 ) , 보통의 오르간 밖에 칠 줄 모르는 사람은 이 오르간을 가지고 맞는 음을 낼 수 없다 . 기본음이 어디 있느냐를 알아야 한다 .

 

112

마음의 동요   사물에는 여러 가지 성질이 있고 혼에는 가지가지의 경향이 있다 . 왜냐하면 혼에 제공되는 것 중에 단순한 것이라고는 없고 또 혼은 어떤 대상에 대해서도 단순히 자기를 제공하지 않기 때문이다 . 이로 말미암아 인간은 동일한 일을 가지고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한다 .

 

113

마음의 동요와 기괴한 일   자기의 노동만으로 생활한다는 것과 세계 최강의 국가를 통치한다는 것은 전혀 상반하는 일이다 . 이 두 가지는 투르크 대제의 인격 속에 결부되어 있다 .

 

114

다양성이란 모든 목소리 , 모든 행진 방식 , 기침소리 , 치는 방식 , 코를 푸는 방식…처럼 풍부한 것이다 . 우리는 과일 중에서 포도를 골라낸다 . 그리고 포도 중에서도 사향 포도라든가 , 콩드류라든가 , 데잘구라든가 , 무엇 무엇의 접목이라든가를 골라낸다 . 이것으로서 전부일까 ? 한 나무에 같은 두 송이가 열리는 일이 있을까 ? 한 송이에 꼭 같은 열매가 두 개 있을 수 있을까 ?

나는 동일한 사물이라 하더라도 꼭 같은 판단을 내릴 수 없다 . 자기의 일을 방금 하고 있으면서 평가할 수 없다 . 화가가 하는 것처럼 너무 멀지 않은 정도로 떨어져 있어야 한다 . 그러면 얼마나 멀리 떨어지면 되겠는가 ? 판정해 보라 .

 

115

다양성 = 신학은 하나의 학문이다 . 그란 동시에 그것은 얼마나 많은 여러 가지 학문인가 ! 한 사람의 인간은 한 개의 실체이다 . 그러나 해부하면 머리 • 심장 • 위 • 각 혈관 • 각부의 피 등으로 액체가 아닌가 ?

하나의 도시 , 하나의 촌락은 멀리서 바라보면 하나의 도시이고 하나의 촌락이다 . 그러나 가까워지는 데 따라서 그것은 가옥 • 수목 • 기와 • 나뭇잎 • 풀 • 개미 • 개미의 다리 등 무수한 것이다 . 이들 전부가 촌락의 이름 아래 포괄되어 있다 .

 

116

사상 = 모든 것은 하나이고 모든 것은 많다 . 인간의 성질에는 여하히 많은 성질이 있는 것인가 ! 얼마나 많은 직업이 있는 것인가 ! 그리고 모든 사람은 보통 어떤 직업이 상찬되는 소리를 듣고서 그것을 우연히 선택하게 되는 것인가 ! 신기 좋은 구두의 뒤축 .

 

117

단화의 뒤축 = “오 ! 참 , 이것은 잘 만든 구두이다 ! 참 숙련된 직공인데 ! 참으로 용감한 병사인데 ! ” 여기에 우리의 좋고 싫음의 근원이 있고 신분 선택의 근원이 있다 . “저 사람은 술을 잘 마시기도 하는군 ! 이 사람은 술을 못 마시기도 하는데 ! ” 이것은 사람들을 대주가나 소주가로도 만들고 병사나 비겁한 자로 만들기도 한다 .

 

118

다른 모든 재능을 규정하는 주요한 재능 .

 

119

자연은 비슷하여 간다 . 좋은 땅에 뿌린 씨는 결실하고 좋은 정신에 뿌려진 원리는 결실한다 . 수는 원래 대단히 다른 공간과 비슷하다 .

모든 것은 동일한 규격에 의해 행하여지고 인도된다 . 뿌리도 , 나뭇가지도 , 열매도 , 시작도 , 결과도 .

 

120

자연은 여러 가지로 변하고 비숫해진다 . 인공은 비슷하면서도 여러 가지로 변한다 .

 

121

자연은 항상 같은 것을 반복한다 . 연 • 일 • 시간 등 . 이와 마찬가지로 공간이나 수도 하나에서 다른 것으로 잇따라 있다 . 이리하여 일종의 무한과 영원이 생긴다 . 모든 이런 것 속에 어떤 무한이나 영원이 있다는 것은 아니다 . 다만 이들 유한한 존재가 무한히 늘어갈 따름이다 . 따라서 무한한 것은 그것들의 늘어가는 수만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

 

122

시간이 고민이나 싸움을 쾌유시켜 주는 것은 사람이 변하고 이미 이전과 같은 인간이 아니기 때문이다 . 노하게 만든 자도 노하였던 자도 벌써 이전의 그들이 아니다 . 이는 마치 과거 한 번 노하게 만들어 준 일이 있었던 국민과 두 세대를 지나고 서로 대하게 되는 것과 같다 . 이는 아직 프랑스인이지만 동일한 프랑스인은 아니다 .

 

123

그는 자기가 십 년 전에 사랑한 사람을 이미 사랑하지 않는다 . 나는 그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 그 여자는 이전과 같지 않고 그 역시 이전과 같지 않다 . 그도 젊었었고 그 여자도 젊었었다 . 그 여자가 그 당시와 마찬가지라면 아직도 사랑하는지도 모른다 .

 

124

우리는 사물을 다른 면에서 볼 뿐만 아니라 다른 눈으로 본다 . 사물을 같은 양식으로 보겠다는 생각은 전혀 없다 .

 

125

상반 ( 相反 ) = 인간은 본래 믿기 쉬우면서도 믿기 어렵고 , 겁이 많으면서도 대담하다 .

 

126

인간의 묘사 • 의존 • 독립의 원망 • 욕구 .

 

127

인간의 상태 • 마음의 동요 • 권태 • 불안 .

 

128

우리들이 열중하고 있던 일에서 떠날 때 느끼는 권태 . 한 남자가 가정 에서 유쾌하게 살고 있다 . 그가 좋아하는 여자를 만나든지 또는 5 • 6 일 유쾌하게 놀든지 한 후에 최초의 사업에 다시금 돌아간다고 하면 이 얼마나 비참한 일일까 ? 그러나 이처럼 통상적인 것은 없다 .

 

129

우리의 본성은 운동에 있다 . 완전한 휴식은 죽음이다 .

 

130

격동 = 만약 어떤 병사나 노동자가 자신의 노고에 관해 불평을 말한다면 아무것도 시키지 않고 내버려 두면 된다 .

 

131

권태 = 정념 없이 , 직무 없이 , 오락 없이 , 근면도 하지 않고 완전히 휴식하고 있는 것처럼 인간으로서 참기 어려운 일은 없을 것이다 . 그는 그때 자기의 허무 • 포기 • 부족 • 종속 • 무능 • 공허를 느낀다 . 그의 영혼의 밑바닥에서는 곧 권태 • 우울 • 비애 • 고뇌 • 원망 • 절망이 솟아나올 것이다 .

 

132

내가 보기에 , 시저가 세계 정복을 즐기기에는 너무도 연로하였던 것 같다 . 그런 즐거움은 아우구스투수나 알렉산드로스에 적합한 것이었다 . 이 두 분은 뛰는 마음을 억제하기 어려운 청년들이었으니까 . 그러나 시저는 더 한층 노숙해졌을 것이다 .

 

133

두 개의 비슷한 얼굴을 하나하나 보는 경우에는 조금도 우습지 않지만 , 둘은 아울러 같이 보게 되면 그 비슷함이 웃음을 자아낸다 .

실물에는 전혀 감복하지 않는데 , 그것이 그림이 되면 비슷하다고 하여 감복하게 되니 , 그림이란 그렇게도 공허한 것인가 !

 

134

실물에는 전혀 감복하지 않는데 , 그것이 그림이 되면 비슷하다고 하여 감복하게 되니 , 그림이란 그렇게도 공허한 것인가 !

 

135

우리가 좋아하는 것은 전쟁이지 승리는 아니다 . 사람은 동물이 싸우는 것을 보기 좋아하지만 이긴 편이 진 편을 몹시 혼내거나 하는 것은 좋아하지 않는다 . 승리를 목적으로 하는 외에 사람은 무엇을 바랄까 ? 그리고 승리를 하자마자 그것에 만족한다 . 경기에 있어서도 그렇고 진리의 탐구에 있어서도 그렇다 . 의논할 때도 의견을 가지고 서로 싸우기를 좋아 하지만 , 발견된 진리를 응시하기를 조금도 좋아하지 않는다 . 진리를 반겨 승인시키기 위해서는 그것이 의논에서 나왔다는 것을 보여주도록 하여야 한다 . 이와 마찬가지로 , 정념에 있어서 두 개 상반되는 것이 충돌하는 것을 보기는 유쾌하지만 , 일방이 지배권을 얻게 되면 벌써 잔인할 따름이다 . 우리는 사물을 추구하지 않고 사물의 탐구를 추구한다 . 그러므로 연극에 있어서도 공포를 일으키지 않는 만족할 장면은 아무런 가치도 없다 . 희망 없는 극도의 비참도 , 야성적인 사랑도 , 무정한 혹독함도 그와 꼭 같다 .

 

136

하찮은 사물이 우리를 위안하여 주는 것은 하찮은 사물이 우리를 고뇌하기 때문이다 .

 

137

모든 일을 따로따로 검토하지 않고서라도 그것들을 심심풀이라도 이름으로 포괄하면 된다 .

 

138

사람들은 자기 방 안에 있지 않는 동안에 자연히 기와공 등 여러 가지 직업인이 된다 .

 

139

심심풀이 = 인간의 가지가지의 격동 , 그들이 궁정이나 전쟁에 있어서 자기 몸을 내대는 위험이나 곤란 , 거기서 생기는 많은 투쟁이나 욕망 , 그리고 대담하고 때로는 간사한 기도 등을 때때로 생각하면 나는 인간의 모든 불행이 방에 들어앉아 아무것도 아니하고 지낼 수가 없다는 단 한 가지 일에서 일어난다는 것을 발견했다 . 생활에 곤궁하지 않을 정도의 재산을 가지고 있는 이는 자택에서 유쾌히 살 수 있으면 별로 밖에 나가 배를 탄다든가 요새의 포위전에 참가한다든가 하지 않을 것이다 . 거리에서 움직이지 않고 지내는 것이 참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지 않는다면 누구도 군인을 그렇게 비싸게 사지 않을 것이다 . 또 자택에서 유쾌하게 살 수 있으면 누구나 이야기나 승부사의 심심풀이를 요구하지 않을 것이다 . 그러나 내가 좀 더 생각을 깊이하고 우리의 모든 불행의 원인을 발견한 다음에 그 원인의 유래를 발견하고 싶다고 생각하였을 때 , 내가 발견한 것은 하나의 극히 현실적인 이유였는데 그것은 약하고 치명적이고 우리가 그것을 깊이 생각하면 아무것에 의해서도 위안을 받을 수 없을 정도로 비참한 우리 생래의 불행한 상태에 기인하는 것이다 .

어떤 신분을 상상하여 보더라도 , 우리가 소유할 수 있는 오든 이익을 모아놓는다 하더라도 , 세상에 왕위처럼 훌륭한 것은 없다 . 그러나 그 왕이 자기가 받을 수 있는 모든 만족에 둘러싸여 있다고 가정하더라도 , 만일 그가 아무런 심심풀이도 없이 단지 자기가 무엇인가를 심사숙고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면 , 이 힘없는 행복은 그에게 활기를 줄 수 없고 , 그는 자기를 위협하고 있는 재난이나 , 장차 일어날 수 있는 반역이나 , 나중에는 피치 못할 죽음이나 병환 등을 바라보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이다 . 이런 까닭으로 이른바 심심풀이라는 것이 없으면 그는 불행이고 무슨 내기를 하여 심심풀이를 하고 있는 그의 가장 미천한 신하보다 ( 더 한층 ) 불행한 것이다 .

여기서 승부사라든가 , 부인과의 담화라든가 , 전쟁 • 입신 • 출세 등이 대단히 추구되곤 한다 . 그것은 거기에 실제로 행복이 있다는 것도 아니고 참다운 복지는 도박을 통하여 얻을 수 있는 금전을 수중에 넣는 데 있다든가 , 사람이 따라가서 잡으려는 토끼에 있다고 상상하기 때문도 아니다 . 그런 것이 제공되더라도 사람들은 그것을 가지려고 탐내지도 않을 것이다 . 사람들이 추구하는 것은 결국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불행한 상태를 생각하게 하는 무사 평온한 일상생활이 아니요 , 전쟁의 위험이나 사업의 곤란도 아니요 , 그런 생각에 빠지지 않도록 우리의 마음을 돌려주고 기분을 맑게 해 주는 매우 바쁜 생활이다 .

이 때문에 인간은 요란함이나 동요를 사랑하게 되고 , 이 때문에 감옥은 대단히 무서운 형벌이 되고 , 이 때문에 고독의 쾌락은 불가해한 것이 된다 . 그리고 결국 이것이야말로 왕들의 신분이 행복하다는 최대의 이유가 되는 것인데 , 그것은 사람들이 늘 왕의 기분을 상쾌하게 해 주고 , 그들에게 모든 종류의 쾌락을 향우하게 해 주려고 애쓰는 데 있다 .

왕은 그의 기분을 심심하지 않게 해 주고 , 그로 하여금 자신을 깊이 생각하게 하지 않도록 전심하고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다 . 왜냐하면 제 아무리 왕이라 하더라도 자신을 생각하면 불행하게 되기 때문이다 .

사람들이 자신을 행복하게 만들기 위해 발명할 수 있었던 것은 대체로 이러한 것이다 . 그리고 이 점에 관해서 철학자 냄새를 피우고 , 별로 사겠다고 생각지도 않는 토끼를 잡으려고 종일 뛰어다니면서 소일한다는 것을 무의미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우리의 본성을 거의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 이 토끼는 죽음과 비참의 생각에서 우리를 벗어나지 못하게 할는지도 모른다 . 그러나 사냥은 — 우리의 마음을 그런 것에서 떠나게 하니만큼 — 그런 생각에서 벗어나게 해 준다 . 퓨로스가 받은 충언 , 그가 많은 수고에 의해 구하려던 안정을 먼저 얻으라고 한 저 충언은 다대한 곤란에 봉착하였다 .

( 어떤 이에 대해서 안정하게 살라고 말하는 것은 행복하게 살라고 말하는 것이다 . 완전히 행복스러워져 고민의 자료를 찾아볼 수가 없는 정도로 유연자약하게 생각할 수 있는 신분이 되라고 그에게 권고하는 것이다 . 그것은 … 라고 그에게 권고하는 것이다 . 그러므로 인간의 본성을 이해한 것이 아니다 . 또 자기의 상태를 그대로 느끼는 사람들은 무엇보다도 안정이라는 것을 피한다 . 그들이 하는 것은 어느 하나도 요란함을 찾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다 . 그들에게 지실한 지복 ( 至福 ) 이 무엇인가를 인식하는 본능이 결여하기 때문이 아니다 . … )

그 본능을 남에게 보여주려는 허영 • 쾌락 ( 따라서 그들을 책하는 것은 잘못이다 . 그들의 잘못은 만일 그들이 요란함을 단순한 심심풀이로서 추구하는 것이라면 그럼 추구 자체에 있는 것은 아니다 . 오히려 잘못은 , 그들은 자신들이 구하고 있는 것을 수중에 넣으면 진실로 행복스럽게 될 수 있는 것처럼 그것을 추구하는 데 있다 . 그리고 여기에 그들의 추구가 공허라고 책할 수 있는 이유가 있다 . 그러므로 이런 모든 것에 있어서 책하는 자도 , 책 받는 자도 인간의 참다운 본성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 .

그래서 그들이 다대한 열정을 가지고 추구하고 있는 것은 그들이 만족시켜 줄 수 없으리라고 하는 비난을 받을 때 , 그들이 대답하기를 — 잘 생각하면 그렇게 대답하지 않을 수 없는 것처럼 — 자기들이 그것을 통해 추구하고 있는 것은 자신을 깊게 생각하는 일에서 마음을 돌리게 하는 격렬한 임무에 지나지 않는다 . 또 그 때문에 자기들은 열광적으로 자신을 유인하여 가는 매력 있는 대상물을 찾고 있는 것이라고 말하면 , 그들은 그 상대방에게 한 마디도 하지 못하게 할 수 있다 . 그러나 그들은 자기 자신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으니까 그렇게 대답하지 않는다 . 그들은 자기들이 추구하고 있는 것이 사냥이지 사냥의 수확물이 아니라는 것을 모르고 있는 것이다 ( 댄스 , 다리를 내디디는 방법을 잘 생각해야 한다 . 귀인은 사냥이 당당한 쾌락이고 , 왕자의 쾌락이라고 성실하게 생각하고 있다 . 그러나 말이나 개를 다루는 사람은 그런 감정을 갖고 있지 않다 ) .

그들이 이 직업을 가지게 되면 후에 휴식을 즐길 수 있을 것이라고 상상한다 . 그리고 그들의 욕망의 만족할 줄 모르는 본성을 느끼지 못한다 . 그들은 안정을 성실히 구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 그러나 사실은 격동만을 구하고 있는 것이다 .

그들은 그들로 하여금 심심풀이나 외부에의 일을 구하게 하는 , 일종 비밀의 본능은 가지고 있는데 , 이는 끊임없이 비참한 의식에서 생겨나는 것이다 . 또 그들은 또 다른 하나의 비밀의 본능을 가지고 있는데 , 이것은 우리의 최초의 본성의 위대함을 남기고 있는 것이고 , 행복이란 실제로 안정 속에만 있는 것이지 요란함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그들에게 가르쳐 주는 것이다 . 그리고 이들 두 개의 상반되는 본능에서 그들 속에 하나의 혼란한 계획이 세워진다 . 그것은 그들의 혼의 밑바닥에 있어 그들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그들로 하여금 격동을 지나 안정을 향하게 만드는 것이고 , 그들이 현재 느끼고 있지 않는 만족은 그들이 당면하고 있는 몇 개의 곤란에 견뎌나서 그로 말미암아 안정에의 문을 열 수 있게 된다면 그들의 것이 되리라고 항상 상상시켜 주는 것이다 .

이리하여 전 인생이 흘러간다 . 인간은 어떤 장애와 싸우면서 안정을 구한다 . 그런데 장애를 극복하면 안정은 참기 어려운 것이 된다 . 왜냐하면 인간이란 현존하는 비참이라든가 장래의 비참을 생각하기 때문이다 . 그리고 가령 인간이 모든 방면에 있어서 안전을 십분 보증받고 있다 하더라도 권태라는 것이 그 사적 권한에서 원래 뿌리박고 있던 마음의 밑바닥에서 발생하고 그 독소를 가지고 정신을 채워 주지 않고서는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

이렇게 인간은 대단히 불행하기 때문에 권태의 원인이 전혀 없을 때도 그 기질의 본래의 상태로 말미암아 권태에 빠진다 . 또 그는 공허허기 때문에 권태에 빠질 많은 중대한 원인에 가득 차 있으면서도 당구나 공놀이 같은 극히 사소한 것에 의해 충분히 심심풀이를 하곤 한다 .

그러나 무슨 목적으로 인간은 그런 것을 하게 되는 것이냐고 당신들은 말하는 것인가 ? 그것은 다음날 친구들 사이에서 자기는 남보다도 잘 놀았다고 뽐내기 위해서이다 .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들은 여태껏 누구 한 사람 풀지 못했던 대수의 문제를 풀었다는 것을 학자들에게 보이기 위해 서재 안에서 땀을 흘린다 . 또 다른 많은 사람들은 어떤 요새를 점령하였다는 것을 후에 뽐내기 위하여 극도의 위험한 지경에 몸을 부딪친다 . 그러나 그것은 내가 보기에는 어리석은 일이다 . 끝으로 다른 이들은 좀 더 현명하게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 단지 알고 있다는 것을 표시하기 위해 모든 사물을 음미하여 스스로 생명을 단축시킨다 . 그런데 이 사람들은 그런 무리 중에서도 가장 어리석은 자들이다 . 왜냐하면 어리석은 줄 알면서도 그런 짓을 하는 것이지만 , 이에 대해 다른 사람들은 이런 인식을 가지게 되면 그런 짓을 하지 않으리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

어떤 사람은 매일 사소한 물건을 걸고 도박하여 전혀 권태를 느끼지 않고 인생을 보낸다 . 그가 매일 이겨서 벌 수 있는 정도의 금액을 다시는 도박에 사용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매일 아침 그에게 주어보곤 하라 . 그는 불행하게 될 것이다 . 그가 추구하고 있는 것은 도박의 즐거움이지 돈벌이가 아니라고 말하는 분이 있을는지 모른다 . 그렇다면 그로 하여금 아무것도 걸지 않고 도박을 시키는 편이 나을 것이다 . 그는 그것에 열중하지 아니할 뿐만 아니라 권태를 느끼고 말 것이다 . 그러므로 그가 추구하고 있는 것은 오락만이 아니다 . 맥 빠진 열없는 오락은 그를 권태롭게 할 것이다 . 그는 도박을 하지 않는다는 조건 하에서는 받고 싶지 않은 것을 도박에서 얻는 것은 유쾌하다고 생각하여 그에 열중하고 , 자신을 기만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 그것은 정욕의 대상을 스스로 만들기 위해서이고 , 그로 말미암아 마치 애들이 스스로 더럽힌 얼굴을 무서워하는 것처럼 자신이 만든 그 목적물에 대해 원망이나 분노나 공포를 일으키기 때문이다 .

몇 달 동안에 그의 외아들을 잃어버리고 , 소송이나 싸움에 압도되어 오늘 아침까지도 대단히 고민하던 사내가 이제는 그런 것을 생각하지도 않는다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 조금도 놀랄 필요는 없다 . 여섯 시간 전부터 사냥개를 시켜 맹렬히 쫓게 하고 있는 멧돼지가 어디로 가는가를 열심히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다 . 그에게는 그 외는 아무것도 필요치 않다 . 인간은 아무리 슬픔에 차 있어도 어떤 심심풀이에 마음이 끌리면 그 동안만은 행복하다 . 또 인간은 아무리 행복하다 하더라도 권태가 마음속에 자라는 것을 막기 위한 어떤 정욕이나 오락에 의해 심심풀이를 하든가 , 그 외의 일을 잊어버리곤 하지 않는다면 얼마 안 가서 우울해지고 불행하게 될 것이다 . 심심풀이가 없으면 즐거움이 없고 , 심심풀이가 있으면 서러움이 없다 . 그리고 바로 이것이 자신의 심심풀이를 해 주는 많은 사람을 갖게 되고 , 그런 상태에 자신을 놓을 수 있는 , 지위가 높은 이들이 행복한 이유이기도 하다 .

생각해 보라 . 재무장관 • 대법관 • 의장이 된다는 것은 이른 아침부터 각 방면의 사람들이 많이 밀려들어와서 하루의 단 한 시간이라도 자신을 돌 볼 여유가 부여되지 않는 지위에 취임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 그러므로 일단 불우의 몸이 되어 옛 마을에 돌아가게 되면 거기서는 재산이 모자랄 리도 없고 시금부리를 해 주는 노비가 많다 하더라도 가련하고 버림받은 상태에 놓이게 됨은 면할 수가 없다 . 왜냐하면 누구도 그 자신을 생각하는 것을 막아 주지 않기 때문이다 ( 심심풀이란 세상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없으면 맥이 빠질 정도로 필요한 것이다 . 어떤 사건이 일어나든가 , 일어날는지 모른다고 생각하든가 , 또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든가 , 서러움의 자료가 없어지곤 하면 권태가 뿌리박고 있던 마음의 밑바닥에서 발생하는 그 독소를 가지고 전 정신을 가득 채우고야 만다 ) .

 

140

처와 외아들의 죽음을 굉장히 슬퍼하고 , 중대한 계쟁사건 때문에 고민하던 사내가 이 순간 조금도 슬퍼하지 않고 고통스럽고 불안한 사고에서 완전히 해방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 조금도 놀랄 바는 아니다 . 금방 그는 상대방이 쳐 보내는 공을 맞이하였으니까 그것을 다시 쳐 보내야 한다 . 그는 지붕에서 그 공이 떨어지는 것을 받아 한 점 얻으려고 열중하고 있다 . 금방 다른 일을 하여야 할 터인데 어떻게 그의 사건을 상상할 수가 있으랴 ? 여기 이 위대한 혼을 포착하고 그 정신에서 다른 모든 생각을 제거하는 데 충분한 마음의 준비가 있다 . 그는 우주를 인식하기 위해 , 일국을 다스리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났는데 , 지금은 한 마리의 토끼를 잡기 위해 열중하고 전심이 쏠리고 있는 것이다 . 그리고 만일 그가 거기까지 자기를 비하시키지 않고 항상 긴장해 있으려고 생각 한다면 더 한층 우매하게 될 따름이리라 . 왜냐하면 그는 인류의 우매에서 벗어나려고 할 터이니까 . 그런데 결국 그는 하나의 인간에 지나지 않는다 . 즉 그는 사소한 일도 할 수 있고 많은 일도 할 수 있으며 , 만능하기도 하고 완전히 무능하기도 하다 . 그는 천사도 아니요 야수도 아니다 . 그저 인간일 따름이다 .

 

141

사람들은 공 하나 , 토끼 한 마리를 따라다니느라고 열중한다 . 그것은 왕후의 쾌락이기도 하다 .

 

142

심심풀이   왕위라는 것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위대하고 , 그 자리에 앉아 있는 자기가 무엇인가를 조금 생각해 보기만 하여도 행복해지는 것은 아닐까 ? 왕도 보통 사람들처럼 그런 생각에서 마음을 돌릴 필요가 있을 것인가 ? 사람이란 가정의 불행에서 눈을 돌리고 춤을 잘 추겠다는 생각으로 마음이 가득 차게 되면 행복해질 것은 분명하다 . 그러나 왕의 경우도 마찬가지일까 ? 왕이라 하더라도 자기의 위대함을 생각하느니보다 공허한 쾌감에 마음을 돌리는 편이 행복한 것일까 ? 그의 마음에 줄 수 있는 보다 만족스러운 대상이란 없는 것일까 ? 그로 하여금 자기를 둘러싸고 있는 위광을 생각하여 조용히 즐겁게 해 주는 대신 자기의 보조를 노래의 박자에 맞추든가 공을 알맞은 자리에 놓기 위해 마음을 쓰게 하는 것은 그의 기쁨을 멸살하는 것이 되지 않을까 ? 한 번 시도해 봄이 어떤가 ? 즉 왕을 혼자 내버려두고 감각을 만족시키는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주지 않고 마음고생을 이야기할 상대도 주지 않고 힘껏 자기 자신을 생각하도록 하여 보게 . 그렇게 되면 왕이라도 심심풀이가 없으면 불행에 찬 인간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 그러기에 신하는 그런 것을 피하게 하려하고 왕의 측근에는 주의깊이 항상 많은 인간들이 모여서 공무가 끝나면 곧 심심풀이를 권유하도록 애쓰고 , 한가할 때에는 오락이나 내기를 제공하도록 유의하여 공허를 느끼지 않도록 만들어 준다 . 즉 아무리 왕이라 해도 자기 자신을 돌보고 생각하면 비참해질 것만은 확실하므로 왕으로 하여금 자기를 성사 ( 省思 ) 시키는 상태에 놓지 않도록 세심한 주의를 하여 여기에만 진력하는 사람이 그 주위에 있는 것이다 .

이상의 문장에 있어서 나는 그리스도교 신자의 왕을 그리스도교 신도로서 이야기 하지 않고 왕으로서 이야기하고 있음을 부언하고 싶다 .

 

143

심심풀이 = 사람들은 어렸을 때부터 자신의 명예 • 재산 • 친구 , 그리고 친구들의 재산 • 명예를 배려하도록 책임 지워진다 . 그들은 직무나 국어의 습득이나 , 체육을 강요당한다 . 또 그들 자신의 건강이나 명예나 환경이나 친구들의 그것들이 양호한 상태에 놓이지 않으면 행복하지 않고 , 그중 하나만이 결여해도 불행해진다는 가르침을 받는다 . 그래서 사람들은 날이 밝자마자 심뇌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나 직무를 짊어지게 된다 — 이것이 그들을 행복하게 하는 기이한 방법이었다 ! 그들을 불행하게 하는 데 이 이상의 방법은 아마 없으리라고 당신들은 말할 것 같다 — 무엇 ! 이 이상의 방법이라고 ? 그들에게서 그런 모든 염려를 없애 버리면 되지 않을까 . 그렇게 되면 그들은 자신을 주시하고 , 자신이 무엇이고 ,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를 생각하게 될 것이다 . 그러므로 그들의 마음을 지나치게 빼앗는다든가 기분을 지나치게 돌리게 할 수는 없을 것이다 . 그런 이유로 그들은 많은 일이 부과된 뒤에 조금이라도 시간의 여유가 있으면 심심풀이를 하든가 내기를 하든가 해서 그 시간을 보내고 항상 무엇에 전심하고 있도록 남에게 권유된다 .

인간의 마음이란 얼마나 공허한고 더러움에 가득 차 있는 것인가 !

 

144

나는 수학연구에 오랜 세월을 소비했다 . 그리고 그 연구로 말미암아 사귈 수 있는 사람들이 적다는 데 대해서 염증을 느꼈다 . 인간의 연구를 시작했을 때 나는 저 추상적인 학문 ( 수학 ) 이 인간에 적합하지 않음을 알게 되었고 , 그것을 모르는 이들보다도 거기에 깊이 들어간 내가 도리어 더 한층 자기의 상태에 관해서 스스로 미몽에 빠져 있음을 알게 되었다 . 나는 다른 분들이 수학을 잘 모르는 데 대해 용서해 주었다 . 그러나 최소한 인간의 연구에는 많은 동지들이 발견되리라고 생각하고 , 이것이야말로 인간에게 적당한 참다운 연구라고 생각했다 . 그러나 나는 잘못했다 . 인간을 연구하는 이들은 기하학을 연구하는 이들보다 더 적다 . 인간이 기타의 사물을 연구하는 것은 인간이라는 것을 연구하는 방법을 모르는 데 기인한다 . 그러나 그것 역시 인간이 알아야만 할 학문이 아니고 또 행복하게 되기 위하여서는 스스로를 모르는 편이 낫기 때문이 아닐까 ?

 

145

하나의 사고만이 우리를 점유하고 , 우리는 동시에 두 가지 일을 생각할 수 없다 . 이것은 세속적으로 보아서는 우리에게 좋은 일이지만 종교적으로 보아서는 좋은 일이 아니다 .

 

146

인간이란 분명히 사고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 그것은 그의 존엄성의 전부이고 그의 가치의 전부이다 . 그의 의무의 전부는 올바르게 사고하는 데 있다 . 그리고 사고하는 순위는 자기부터 시작하고 자기의 창조주와 자기의 목적에서 시작하는 데 있다 .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가 ? 그런 것은 생각지 않고 있다 . 도리어 춤추는 것 , 류트를 치는 것 , 노래하는 것 , 시작하는 것 , 둥글게 달음박질하는 것 등등을 생각하고 , 전쟁하는 것과 왕이 되는 것을 생각하고 있다 . 그러면서도 왕이라는 것 , 인간이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는 생각하지도 않고 .

 

147

우리는 우리 자신 안에서 , 우리 자신의 존재 안에서 영위하는 생활에 만족하지 않는다 . 남의 관념 속에서 가공 ( 架空 ) 한 생활을 영위하려고 생각하고 , 또 그것을 가지고 세상에 나타나려고 노력한다 . 우리는 부단히 자기의 가공한 존재를 수식하고 , 또 유지하려고 애쓰며 , 참다운 존재를 등한시한다 . 만약 우리에게 평안이라든가 , 관용성이라든가 , 충실성이라든가 하는 것이 있으면 그런 덕성을 우리의 다른 존재와 결부시키기 위해 그런 것이 세상에 알려지는 것을 열망한다 . 그리고 그런 것을 다른 존재에 부가하기 위해서는 그런 것을 우리에게서 떼어 버리고 돌보지 않는다 . 용감하다는 평판을 얻기 위해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비겁자가 되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 가공의 자아 없는 진정한 자아에 만족하지 않고 진정한 자아와 가공의 자아를 때때로 대체하려 하는 것은 우리 자신의 존재가 허무하다는 명백한 증거가 아닌가 ? 왜냐하면 자신의 명예를 유기하지 위해 감히 죽으려 하지 않는 자는 불명예스러운 인간이 될 터이니까 .

 

148

우리는 대단히 자부신이 강하기 때문에 온 세계에 알려지고 , 우리가 죽은 뒤에 이 세상에 태어나는 사람들에게까지도 존재를 알리고 싶어 한다 .

 

149

사람은 그가 통과하는 거리에서의 평판에는 개의하지 않지만 , 잠시 체재하게 되면 그것을 염려한다 . 거기에는 시일이 얼마나 필요한가 , 우리의 공허 • 빈약한 인생에 비례하는 한 때 .

 

150

허영이란 인간의 마음속 깊이 닻을 내리고 있으므로 , 병사도 소사도 요리사도 인부도 제각기 자만하여 자기의 숭배자를 얻으려고 한다 . 철학자까지도 같은 것을 바란다 . 영예를 부정하는 논자도 잘 논했다는 영예를 얻으려고 한다 . 또 그것을 읽어보는 자도 그것을 읽어보았다는 영예를 얻고자 한다 . 그리고 이것을 쓰고 있는 나도 아마 같은 욕망을 가지고 있을는지도 모른다 . 그리고 아마 이것을 읽어보는 이도… .

 

151

영예 = 상찬은 모든 사람을 어렸을 때부터 해친다 . 참 잘도 이야기하는군 ! 참 잘도 만들어 놓았어 ! 참 재주가 있는 걸 ! 등등 .

포르루아얄의 아이들은 이런 선망이나 영예의 자극을 받지 않으니까 냉정하게 된다 .

 

152

거만함 = 호기심은 허영에 지나지 않는다 . 대다수의 경우 사람이 알고자 하는 것은 그것을 말하기 위해서이다 . 그렇지 않으면 사람들은 항해를 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 거기에 관해서 아무런 이야기도 하지 않고 그 견문을 혼자 즐길 따름이고 남에게 전한다는 희망도 없다 하거든 .

 

153

같이 있는 분들에게 상찬을 받고 싶다는 소원에 관해 = 거만함 은 비참 • 오류 등의 환경에 있어서도 극히 자연스러운 방법으로 우리를 사로잡는다 . 우리는 남의 이야기 자료만 된다면 생명까지도 기꺼이 버린다 .

 

허영   내기 • 사냥 • 방문 • 극 • 명성의 허위의 영속 .

 

154

나에게는 당신에게 도움이 될 친구가 없다 .

 

155

참다운 벗이란 가장 높은 귀인으로서도 대단히 유익한 것이다 . 친구가 그들에 관해 잘 이야기하여 주고 그들이 부재할 때도 그들을 지지하게 만들어 놓기 위해서 친구를 얻는 데 전력을 다하여야 한다 . 그러나 잘 선택하여야 한다 . 왜냐하면 어리석은 자들을 위해 전력을 다해 가지고서는 , 가령 그들이 그 귀인에 관해 아무리 말을 잘해 주더라도 전혀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 또한 어리석은 자들은 자기가 불리한 처지에 있다고 생각하면 그 귀인에 관해 좋게 이야기해 주지 않을 것이다 . 어리석은 자란 아무런 권위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 그렇게 되면 그 자들은 일단이 되어 그들 ( 귀인 ) 에 관해서 나쁘게 이야기할 것이다 .

 

156

Ferox gens nullam esse vitam sine armis rati ( 잔인한 사람들은 무기를 잃어버림과 동시에 생존까지도 상실하게 되리라 ) . 그들은 평화보다도 죽음을 좋아하고 다른 이들은 전쟁보다도 죽음을 좋아한다 .

모든 여론은 생명보다 더 사랑을 받을는지 모른다 . 여론에의 사랑은 그만큼 강하고 또 자연스러운 모양이다 .

 

157

모순 = 우리의 생존의 멸시 , 허망한 것을 위해 죽는 것 , 우리의 생존의 증오 .

 

158

직업 = 영예의 매력이란 위대한 것이어서 영예를 부여해 주는 어떤 대상이 있거든 죽음이라도 사람은 좋아한다 .

 

159

숨어 있는 아름다운 행위는 가장 존경되어야 한다 . 그런 것의 몇 가지를 역사서로 보면 [84 면에 있는 것처럼 ] 나는 매우 기쁘게 생각한다 . 그러나 그것들이 알려져 있었던 것을 보면 결국 그것들은 완전히 숨겨져 있던 셈이 아니다 . 또 그런 것을 감추기 위해 사람이 모든 수단을 다하였다 하더라도 조금이라도 누설되었다는 것은 전부를 깨뜨리고 마는 것이다 . 왜냐하면 거기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그것들을 감추려던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

 

160

재채기는 혼의 전 기능을 중절시키는 점에 있어서 일에 흡사하다 . 그러나 거기서 사람은 인간의 위대함을 반증하는 것 같은 결론을 끄집어내지 못한다 . 왜냐하면 재채기는 그 의지에 반해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 또 사람은 재채기를 자연히 한다고 하지만 , 자기의 뜻에 반해서 하는 것이다 . 그것은 하고 싶어서 하는 것이 아니고 다른 데 목적이 있다 . 그래서 그것은 인간의 취약성의 증거가 아니고 그들이 이 행위 하에 예속되어 있다는 증거도 아니다 .

인간으로서 고뇌에 진다는 것은 수치가 아니다 . 오히려 쾌락에 지는 것이야말로 수치스러운 일이다 . 이것은 고뇌는 밖에서부터 오는 것이지만 쾌락은 우리가 구하고 있다는 이유 때문이 아니다 . 왜냐하면 사람은 고뇌를 구할 수도 있고 일부러 그에 지고도 그런 열등감을 느끼지 않고도 지낼 수가 있기 때문이다 . 그러면 이성에 대해 고뇌의 압력에 지는 것은 영예이고 , 쾌락의 압력에 지는 것은 수치라고 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 그것은 우리를 유인하는 것은 고민이 아니라는 사실에 의한다 . 그것을 자진해서 선택하고 그것으로 하여금 우리를 지배하려고 욕구하는 것은 우리 자신이다 . 그러므로 우리는 그 경우의 주인이다 . 따라서 이 경우에는 인간이 자기 자신에게 지는 것이다 . 그러나 쾌락의 경우에는 인간이 쾌락에 지는 것이다 . 그런데 영예를 부여하는 것은 지배와 권력이요 , 수치를 부여하는 것은 예속이다 .

 

161

공허   이 세상이 공허하다는 것처럼 명백한 사실이 잘 알려져 있지 않고 , 권세를 구하는 것이 어리석다는 말이 기묘하고 의외로 들린다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

 

162

인간의 공허함을 충분히 알려는 자는 연애의 원인과 결과를 생각하기만 하면 된다 . 그 원인은 「 나로서는 모르는 것 」 ( 꼬르네이유 ) 이다 . 그러나 그 결과는 무서운 것이다 . 이 「 나로서는 모르는 것 」 , 사람이 인식하기도 어려울 정도로 사소한 것이 전 지구 • 왕공 ( 王公 ) • 군대 •   전 세계를 움직인다 .

클레오파트라의 코 , 그것이 조금만 더 낮았더라면 지구의 전면이 달라졌을 것이다 .

 

163 의   1

공허 = 연애의 원인과 결과 . 클레오파트라

 

163 의   2

인간의 공허함을 표시하기 위해서는 연애가 어떤 원인과 결과를 가지고 있는 것인가를 생각하는 것이 제일이다 . 왜냐하면 전 우주는 그것에 의해서 변하기 때문이다 . 클레오파트라의 코 .

 

164

이 세상이 공허함을 모르는 자는 그 사람 자신이 실로 공허하다 . 명성과 심심풀이와 장래의 예상에 마음이 쏠려 있는 청년을 제외하고 이를 모르는 자가 있을까 ? 그러나 그들에게서 심심풀이를 제거해 보라 . 그들이 권태에 못 견디는 것을 당신들은 보게 될 것이다 . 그때 그들은 자신의 허무를 인식하지 못한 채 느끼게 될 것이다 . 왜냐하면 인간이 자신을 고려하게 되고 또 전혀 심심풀이가 없는 상태에 놓이게 되자마자 참을 수 없는 우수에 빠진다는 것은 완전히 불행한 것이기 때문이다 .

 

165

사상 = In omnibus resquiem quaesivi ( 모든 것 속에 우리는 휴식을 구하지 않는다 ) . 만일 우리의 상태가 진실로 행복했더라면 , 자신을 행복하게 하기 위해 자기의 상태를 생각하는 데서 도망칠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

 

166

심심풀이 = 죽음을 생각하지 않고 그것을 당하는 편이 , 죽음의 위험 없이 그것을 생각하는 것보다 용이하다 .

 

167

인간생활의 비참이 이런 모든 것의 토대를 이루었다 . 즉 사람들은 비참함을 보았으므로 심심풀이를 구한 것이다 .

 

168

심심풀이 = 인간은 죽음과 비참과 무지를 쾌유할 수가 없었으므로 자기를 행복하게 하려고 그런 것을 전혀 생각하지 않도록 고안했다 .

 

169

이런 비참에도 불구하고 그는 행복해지기를 원하고 행복하기만을 원하여 또 그렇게 원하지 않고서는 견디어 낼 수가 없다 . 그런데 왜 그는 행복을 얻으려고 하는가 ? 행복을 얻기 위해서는 스스로가 불사신이 되어야 한다 .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므로 그는 죽음에 대한 생각을 피하기로 했다 .

 

170

심심풀이 = 만약에 인간이 행복하다면 성자나 신처럼 심심풀이를 하는 일이 적으면 적을수록 더 한층 행복스러워질 것이다 — 그렇다 . 그러나 심심풀이에 의해 유쾌하게 될 수 있다는 것은 행복이 아닐까 ? — 아니다 . 심심풀이는 다른 데서 , 외부에서 오는 것이다 . 그래서 의존적이다 . 그러므로 그것은 피하기 어려운 고뇌를 일으키는 무수한 사건에 의해 혼란되기 쉽다 .

 

171

비참 = 우리의 비참을 위안해 주는 유일한 자는 심심풀이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비참 중에서 최대의 것이다 . 왜냐하면 이것은 우리가 자기를 돌보는 것을 각별히 방해 놓고 우리를 모르는 사이에 멸망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 심심풀이가 없다면 우리는 권태를 느끼게 될 것이요 , 이 권태는 우리로 하여금 거기서 벗어나는 보다 더 견실한 방법을 탐구하게 할 것이다 . 그러나 심심풀이는 우리를 즐겁게 해 줌으로써 모르는 사이에 죽음에 이르게 한다 .

 

172

우리는 결코 현재만으로는 만족하지 않는다 . 우리는 미래가 지나치게 서서히 오는 것처럼 , 그 발걸음을 재촉하는 것처럼 미래를 바라본다 . 또 과거를 뒤돌아봄에 있어 , 너무도 빨리 떠나는 것을 붙잡는 것 같다 . 극히 사려 깊지 못해 우리는 자기의 것이 아닌 시간 속에 방황하고 우리에게 속하는 유일한 때를 생각하지 않는다 . 또 너무도 공허하여 우리는 이제 현존하지도 않는 시간을 몽상하고 실존하는 유일한 시간을 무반성하게 놓쳐 버린다 . 이것은 보통 현재가 우리를 고민하게 하기 때문이다 . 우리가 그것을 보고자 하지 않는 것은 그것이 우리를 고뇌하게 하여 주기 때문이다 . 그리고 그것이 우리에게 즐거웠을 때는 그것이 지나가는 것을 애석하게 생각한다 . 우리는 현재를 미래에 의해 지탱하려 애쓰고 , 우리가 도달 하리라는 보증이 없는 시간을 위해 우리 힘에 넘치는 일을 준비하려고 생각한다 .

각자가 제각기의 생각을 검토해 보자 . 그러면 그 생각이 전부 과거와 미래에 의해 점유되어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 우리는 거의 현재라는 것을 생각하지 않는다 . 혹시 생각하는 일이 있다 한다면 미래를 처리하기 위해 현재에서 어떤 빛을 얻으려고 하는 데 지나지 않는다 . 현재는 결코 우리의 목적이 아니다 . 과거와 현재는 우리의 수단이었고 미래만이 우리의 목적이다 . 이와 같이 우리는 결코 살고 있는 것이 아니고 살기를 원하고 있는 것이다 . 또 행복스러워지려고 항상 준비하고 있으므로 행복스러워지지 못할 것만은 불가피하다 .

 

173

그들은 일식 • 월식을 불행의 전조라고 한다 . 불행이 보통이기 때문이다 . 즉 재액이 너무도 빈번히 일어나기 때문에 그들은 그것을 때때로 예언한다 . 그와 반대로 만일 그것들을 가리켜 행복이 전조라고 하였더라면 그들은 이따금 거짓말을 한 셈이 되고 만다 . 그들은 행복을 천체의 희유한 조우에만 돌린다 . 그래서 예언이 그다지 틀리지 않는다 .

 

174

비참 = 솔로몬과 욥는 인간의 비참함을 가장 잘 알았고 또 가장 잘 말한 사람들이다 . 전자는 가장 행복한 사람 , 후자는 가장 불행한 사람 , 전자는 경험에 의해 쾌락의 공허함을 알았고 , 후자는 재앙의 현실성을 알고 있었다 .

 

175

우리는 자신을 너무나 모르고 있으므로 많은 사람들이 건강할 때에 있어서도 죽지나 않겠나 생각하고 , 죽음에 임하여서도 건강하다고 생각한다 . 열이 나도 화농이 되어가더라도 감지하지 못한다 .

 

176

크롬웰은 바야흐로 전 그리스도교 국가를 유린하려고 하였다 . 왕가는 패멸하고 그 일가는 영원히 번영해 갈 판이었다 . 만약 조그만 모래알이 그 수뇨관에 들어박히지 않았더라면 . 로마 ( 교황청 ) 까지도 그 발밑에서 떨고 있었다 . 그러나 그 조그만 결석이 거기 들어박혔기 때문에 그는 죽고 그 일가는 쇠퇴하고 세상은 평화로워지고 왕은 복위했다 .

 

177

세 사람의 부인 = 영국 왕과 폴란드 왕과 스페인 여왕의 사랑을 받던 자가 , 이 세상에 숨어 살 집도 피신할 곳도 없어질 때가 있으리라고 생각하였을까 ?

 

178

마크로비우스 . 헤롯에 의한 학살된 영아에 관해 .

 

179

헤롯이 죽인 두 살 이하의 어린애들 속에 헤롯 자신의 아이가 있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아우구스투스는 헤롯의 아이였던 것보다 그의 돼지였던 편이 나았다고 말한다 . 마크로비우스 , 사츠루나리아 .

 

180

위대한 인간도 비소한 인간도 , 같은 사고 , 같은 불만 , 같은 욕망을 가지고 있다 . 그러나 후자는 차바퀴 주변에 자리 잡고 있는 데 대해 전자는 중심 가까이에 있으므로 같은 회전에도 조금밖에 움직이지 않는다 .

 

181

우리는 매우 불행하므로 하나의 사물을 즐기는 데도 그것이 잘못되지 않았나 하는 근심을 면할 수가 없다 . 그것은 무수한 일이 항상 잘못될 수 있고 또 잘못되고 있기 때문이다 . 반대의 재액을 근심하지 않고 행복을 즐기는 비결을 발견할 이는 진정한 지혜를 터득한 사람이리라 . 그것은 영원한 운동이다 .

 

182

시끄러운 사건에 있어서 항상 좋은 희망을 가지고 행운이 오는 것을 즐기고 있는 이들이 만일 악운에도 마찬가지로 번뇌하지 않는 것이라면 , 그들은 사건의 실패 그 자체를 즐기고 있지 않나 하는 의심을 받게 된다 . 그리고 그들이 그런 희망의 구실을 발견하고 만족하고 있는 것은 사건의 실패에 흥미를 가지고 있음을 표시하는 것이고 , 또 사건의 실패를 보고 느끼는 데서 희열을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고 있는 희열에 의해 은폐하기 위해서이다 .

 

183

우리는 절벽 ( 위험 ) 이 눈에 보이지 않도록 어떤 물건으로라도 눈을 가리고 아무런 근심 없이 그 속에 뛰어 들어간다 .

 

 

 

 

 

제 3 편 내기의 필요성

 

 

 184

신을 구하게 하기 위한 편지 .

그리고 다음에는 신을 철학자 , 피론학파 , 독단론자들 중에서 구하게 한다 . 이들은 신을 그들 중에 구하는 자를 불안하게 하리라 .

 

185

만사를 지혜롭게 처리하시는 신의 행위는 종교를 이성에 의해 정신 속에 , 은총에 의해 심정 속에 끌어들이게 하는 데 있다 . 그러나 그것을 강제나 위협에 의해 정신과 심정 속에 들어가게 하려고 바라는 자는 종교를 주입하는 것이 아니고 공포를 주입하는 것이다 .

Terrorem potius quam religionem ( 종교보다도 공포를 ) .

 

186

Ne si terrentur et non docerentur , improba quasi dominatio videretur ( 교육에 의하지 않고 공포에 의해 인도되어 있다고 생각하면 지배도 압제로 보인다 . 아우구스티누스 서간 48 또는 49) — 4 권 Contra mendacium ad Consentium ( 콘센티우스에게 주는 허언을 논박하는 글 ) .

 

187

질서 = 사람들은 종교를 멸시한다. 그들은 종교를 싫어하고 그것이 진실일까 겁을 낸다. 이것을 시정사기 위해서는 먼저 종교가 이성에 모순되는 것이 아님을 표시하여야 한다. 존경하여야 할 것임을 알려 주고 , 그에 대한 경의를 환기시키고, 다음에 그것을 사랑스러운 것으로 만들고, 선인으로 하여금 그것이 진실하다는 것을 염원하게 하여야 한다. 그 다음에 그것이 진실함을 표시해야 한다.

종교는 인간을 잘 알고 있는 까닭으로 존경되어야 하며, 참다운 행복을 약속하여 주는 까닭으로 사랑스러운 것이다.

 

188

모든 대화나 담화에 있어서 기분이 불쾌해진 자에게 무엇이 기분에 맞지 않느냐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

 

189

불신자에 동정하는 것부터 시작해라 . 그들이 불행하다는 것은 그들이 불행하다는 것은 그들의 상태에 의해 십분 명백하다 . 그들을 꾸짖는 것은 그것이 유익한 경우를 제외하고 해서는 안 되는 일이다 . 그것을 해칠 따름이다 .

 

190

구하고 있는 무신론자에게 동정하라 . 왜 ? 그들은 대단히 불행한 것이 아니냐 ? 그것을 자랑삼고 있는 자들을 비웃어라 .

 

191

이 사람은 상대방을 조소하리라고요 ? 누가 과연 조소할 수 있으랴 ? 그러나 그는 상대를 조소하지 않고 오히려 연민한다 .

 

192

미톤이 마음을 움직이지 않았다고 누가 비난하랴 ? 신이 그를 비난할 터이니 .

 

193

Quid fiet homnibus qui minima contemnunt , majora non credunt ( 최소의 사물을 경멸하고 최대의 사물을 믿지 않는 자가 무엇을 할 수 있을 소냐 ) .

 

194

…종교를 공격하기 전에 최소한 자기가 공격하는 종교가 어떤 것인가를 알아주기를 바란다 . 만약 이 종교가 신에 관해 명백한 관념을 가지고 있다든가 그것을 뚜렷이 흐림 없이 파악하고 있다든가 하여 자랑삼고 있다면 , 그렇게도 명확한 신의 관념을 표시하는 것은 이 세상에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 공격의 자료가 될 것이다 . 그러나 종교는 그 반대로 사람이 암흑 속에 있어 신에서 멀리 떨어져 있으며 , 신은 그들의 인식으로부터 숨어 있으며 , 성서 속에서 자기를 부르는데 Deus absconditus ( 숨어 계시는 신 ) 이라는 이름을 사용하고 있음을 가르쳐 주고 있다 . 또 결국 종교는 이 두 가지 것 , 즉 신은 진심으로 신을 구하고 있는 자에게 자신을 알리고자 교회에다 감지할 수 있는 표징을 만들어 놓으셨다는 것 ,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심으로 신을 구하려는 자에게만 인지되도록 그 표징을 감추어 놓으셨다는 것을 다 같이 확립하려고 애쓰고 있는 것이다 . 그렇다면 진리를 구하는 데 태만하다고 공언하고 있으면서 아무도 진리를 표시하여 주지 않는다고 부르짖었댔자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으랴 ? 왜냐하면 그들이 현재 그 속에 있고 또 그것을 가지고 교회를 비난하고 있는 암흑은 교회가 주장하고 있는 두 가지 사물 중 한편은 간섭하지 않고 다른 편을 확정하여 주는 것뿐이고 , 따라서 교회의 교리를 파괴하기는커녕 도리어 그것을 건설하는 셈이 되기 때문이다 .

종교를 공격하기 위해서는 모든 노력을 다하여 진리를 도처에서 구하고 교회가 그것을 가르쳐 주기 위해 제공하고 있는 것도 구해 보았으나 아무런 만족도 얻을 수 없었다고 부르짖어야 한다 . 만일 그들이 그렇게 말하였다고 하면 사실 교회의 주장의 하나를 공격한 셈이 될 것이다 . 그러나 나는 이성 있는 인간으로서는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는 것을 여기에 명백히 하고자 생각한다 . 그 뿐더러 그렇게 말한 이는 한 사람도 없었다고 나는 감히 언명한다 . 그런 정신을 가진 사람이 어떤 행동을 하리라는 것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바이다 . 그들은 성서 중 어떤 편을 읽는데 몇 시간을 소비하고 , 신앙의 진리에 관해 어떤 성직자에게 질문이라도 하였으면 그것을 가지고 자기의 계발 ( 啓發 ) 에 절대한 노력을 다했다고 믿어 버린다 . 그리고 그들은 책이나 사람들에게 물어보았지만 이무런 소득이 없었다고 자랑삼아 이야기한다 . 그러나 실제로는 내가 이따금 말해 온 것처럼 , 그런 태만은 용서할 수 없는 것이라고 그들에게 말하고 싶다 . 문제는 그렇게 취급해도 좋은 것 같이 , 전혀 모르는 어떤 이의 사소한 이해에 관한 것이 아니다 . 그것은 우리 자신과 우리들 전부에게 관한 문제이다 .

영혼의 불멸이라는 것은 우리에게 극히 중대한 관계를 가지고 있고 , 극히 심각한 교섭을 가지고 있는 일이고 , 모든 감정을 상실하지 않는 한 그것이 무엇인가를 알기 위해 무관심하고 있을 수는 없다 . 우리가 기대할 수 있는 영원의 행복이 있는지 없는지에 의해 , 우리의 일체의 행위와 사상은 다른 길을 취하지 않으면 안 되는 까닭으로 , 우리의 궁극의 목적이 되어야 할 이 한 점을 보고 보조를 정하지 않고서는 올바른 의식과 판단을 가지고 한 걸음도 전진할 수 없는 것이다 .

이와 같이 우리의 제 1 의 관심 , 제 1 의 의무는 이 문제를 해명하는 것이고 , 우리의 모든 행동은 이에 달려 있는 것이다 . 그러기에 나는 이것을 납득하지 않는 사람들 중 전력을 다하여 그것을 배우려 애쓰고 있는 자와 , 그것을 염두에 두지도 않고 생각조차도 하지 않고 살고 있는 자 사이에 비상한 차별을 두는 것이다 .

이런 의문에 빠져 성실히 번민하고 , 그것을 극도의 불행으로 간주하고 , 거기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어떤 일도 사양하지 않고 그의 연구를 그들의 주요한 , 그리고 가장 진실한 과업으로 삼고 있는 자들에게 대해서 나는 동정 이외에 아무것도 할 줄을 모른다 .

그러나 이 인생의 궁극의 목적에 관해 아무런 생각도 없이 그날그날을 보내고 있는 사람들 자신을 납득시킬 수 있는 빛을 발견할 수 없다는 , 단지 하나만의 이유로 그 빛을 다른 곳에 구하는 것은 게을리 하고 , 이 설이 민중의 단순한 얕은 믿음 때문에 수락되어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인가 , 또는 그 자신 분명치 아니하다고는 하지만 실은 확고부동한 기초를 가지고 있는 것인가를 철저히 구멍하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에 대해서 나는 전혀 달리 생각한다 .

그들 자신에 대해 , 그들의 영원한 운명에 대해 , 그들 일체에 관한 문제에 대해 이다지도 게으르다는 것은 나로 하여금 연민의 정을 느끼게 하는 것보다도 성화를 내게 한다 . 그것은 나를 놀라게 하고 공포를 느끼게 한다 . 그것은 나에게는 기괴한 일이다 . 나는 이것을 영적인 신앙의 경건한 열성에서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 오히려 반대로 인간적인 이해의 처지나 자애의 관심에서 말하더라도 그런 느낌을 가져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 그러기 위해서는 가장 무지한 사람들이 보고 있는 바를 보기만 하면 된다 .

이 세상에 참으로 확실한 만족이란 없으며 , 우리의 모든 쾌락은 공허한 것밖에 되지 않으며 , 우리의 불행이란 무한하며 , 나중에는 우리를 시시각각으로 위협하고 있는 죽음이 멀지 않아 우리를 영원한 명망 혹은 불행이란 무서운 필연 속에 틀림없이 끌고 들어가리라는 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각별히 높은 혼을 가지지 않아도 된다 .

세상에 이처럼 현실적이고 무서운 것은 없다 . 바라는 만큼 강한 척하여 보라 . 이것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생애까지도 기다리고 있는 결말이다 . 이것을 잘 생각하시고 , 그 다음에 현세에는 내세를 바라는 이외에 행복은 없으며 , 사람이란 내세에 접근하는 데 따라서만이 행복한 것이고 , 영원에 관해 완전한 확신을 가지는 자에게 벌써 불행이란 있을 수 없는 것처럼 , 영원에 관해 아무런 빛도 가지지 않는 자에게는 행복이란 있을 수 없다는 것이 과연 의심스러운 것인가 그렇지 않은 것인가 말하여 주기 바란다 .

그러므로 이런 의혹 속에 빠져 있다는 것은 확실히 큰 불행이다 . 그러나 이런 의혹 속에 빠져 있는 경우 최소한 면할 수 없는 의무는 끝까지 추구해 보는 일이다 . 그러니까 의심하면서도 추구하려고 하지 않는 자는 비상한 불행과 비상한 부정을 겸유하고 있는 것이다 . 또 그것을 가지고 안심하고 만족하고 또 그렇다는 것을 공언하며 심지어는 자만하여 그러한 상태를 자신의 기쁨과 자랑의 자료로 삼는 사람이 있다면 이렇게도 부조리한 피조물의 형용사를 나는 모르겠다 .

어디서 이런 감정이 나오는 것인가 ? 구원할 수 없는 불행을 기다리고 있을 뿐이라는 것이 어떻게 기쁨의 씨가 될까 ? 침투할 수 없는 흑암 속에 있다는 것이 어떻게 자만의 자료가 될 것인가 ? 또한 다음과 같은 추리가 이성적인 인간의 마음속에 어떻게 일어날 수 있을까 ?

나는 누가 나를 이 세상에 낳게 하였는지 , 이 세상이 무엇인지 , 자기 자 신이 무엇인지를 모른다 . 만사에 관해 무섭게 무지하다 . 나는 자기의 신체감성 • 영혼 , 그리고 나 자신의 바로 이 부분 , 즉 내가 말하고 있는 바를 생각하고 만사와 자기 자신을 성찰하며 , 그러고 나서 다른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자기를 알지 못하고 있는 이 부분이 무엇인가를 모른다 .

나는 나를 싸고 있는 우주의 이 무서운 공간을 본다 . 그리고 자기가 이 막막한 공간의 한 구석에 연결되어 있음을 알지만 , 왜 다른 곳이 아니고 이곳에 놓여 있는가 , 왜 나에게 살기 위해 부여된 이 근소한 시간이 나보다 앞서 있었던 전 영원과 나의 뒤에 잇따른 전 영원의 어떠한 곳에도 지정되지 않고 바로 이 점에 지정되어 있는가를 모르겠다 . 내가 도처에서 보는 것은 무한뿐이고 , 그것은 나를 한 개의 미분자처럼 , 또 한순간만 계속하고 다시 돌아오지 않는 그림자처럼 둘러싸고 있다 . 내가 알고 있는 전부는 자기가 조만간에 죽어야만 할 자라는 것뿐지만 , 내가 가장 모르고 있는 것은 자기가 어떻게 해서도 피할 수 없는 이 죽음이다 .

내가 어디서 왔는지를 모르는 것처럼 내가 어디로 가게 될는지도 모른다 . 다만 나는 이 세상을 떠나면 허무 속이 아니면 성난 신의 수중에 영원히 빠지게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을 뿐이지만 , 이들 두 가지 상태 중 어느 편에 내가 영원히 관여하게 될는지 모르겠다 . 이것이 취약성과 불확실성에 가득 차 있는 나의 상태이다 . 이상 모든 것에서 나는 나의 생애의 하루하루를 나에게 무엇이 일어날 것인가를 추구하려고도 하지 않고 보내는 것이 타당하다고 결론한다 . 아마 나는 나의 의문에 관해서 어떤 빛을 발견할 수 있을는지 모르겠으나 , 나는 그것 때문에 고심을 하든가 그것을 구하기 위해 일보라도 전진하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 그리고 끝으로 그런 것을 심려하여 고생하고 있는 사람들을 멸시하면서 나는 아무런 예측도 공포도 없이 이렇게도 큰일을 감히 시도하고 자기의 미래의 영원한 상태에 관해 불확실한 채 맥없이 죽음에 몸을 맡기려고 생각한다 .

누가 이런 말투로 이야기하는 사람을 벗으로 사귀려고 할 것인가 ? 누가 자기의 용건을 전달하기 위해 많은 사람들 중에서 이런 사람을 추려낼 것인가 ? 누가 고민하고 있을 때 이런 자의 도움을 얻으려 할 것인가 ? 그리고 대체 이런 사람이 인생에 있어서 무슨 소용이 있을 수 있겠는가 ?

사실 이렇게도 부조리한 사람들을 적으로 가진다는 것은 종교를 위해 영광스러운 일이다 . 그들의 반대는 조금도 위험하지 아니할 뿐만 아니라 , 오히려 종교의 진리를 확립하기 위해 유용하다 . 왜냐하면 그리스도교의 신앙은 대체로 이 두 가지 일 , 즉 인간성의 부패와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를 확립하는 것으로 거의 끝나기 때문이다 . 그런데 그들은 그 깨끗한 품성을 가지고 속죄의 진리를 표시하는 데 도움을 주지 않을는지 모르지만 , 최소한 이렇게도 부자연스러운 감정을 가지고 인간성의 부패를 표시하는데 있어서는 훌륭한 기여를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

인간으로서 자신의 상태처럼 중대한 것은 없고 , 영원처럼 무서운 것도 없다 . 따라서 자기의 존재의 파멸이나 영원한 비참의 위험에 대하여 무관심한 사람이 있다는 것은 결코 정상적인 일은 아니다 . 그들은 다른 모든 일에 대해서는 전혀 다른 태도를 취한다 . 극히 사소한 일에까지 마음을 쓰고 , 그것들을 예측하고 감지한다 . 그리고 어떤 직책을 잃어버리든가 자신의 명예가 손실되었다고 상상하든가 하여 , 분노와 절망 속에 밤낮을 보내는 그 사람이 장차 죽음에 의해 모든 것을 잃어버릴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아무런 불안과 동요를 느끼지 않는 사람과 동일인이다 . 같은 마음속에 , 동시에 사소한 일에 대한 이런 민감함과 최대의 일에 대한 이런 이상한 무감각을 보게 된다는 것은 기이한 일이다 . 이것은 도저히 풀 수 없는 요술이요 초자연적인 거짓 현상이라 , 그것을 야기하는 자는 전능의 힘이라는 것을 표시하고 있다 .

이런 상태에 있음을 자랑으로 여기는 인간의 본성에는 기이한 전도가 있어야 할 것 같다 . 그렇지 않으면 , 단 한 사람도 그런 상태에 있을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험에 의하면 , 그런 사람들이 대단히 많다는 것을 보게 되므로 , 만일에 우리가 거기에 가담하고 있는 사람들의 대다수는 자기를 속이고 있는 것이지 기실 대수로운 것이 아니라는 것을 모른다고 한다면 완전히 놀라고 말 것이다 . 이런 사람들이란 세상의 가장 아름다운 거동은 그런 격렬한 짓을 하는 데 있다고 말하는 것을 들은 사람들이다 . 이것은 그들이 속박을 벗어났다고 칭하면서 모방하려고 시도하는 일이다 . 그러나 그러한 것으로써 존경을 얻어 보려는 것이 얼마나 그릇된 것인가를 그들에게 알려 준다는 것은 그다지 곤란하지 않다 . 그것은 세상 사람들 사이에 있어서조차 존경을 얻는 길이 아님을 말하고 싶다 . 세상 사람들은 사물을 건전하게 판단하고 , 자신을 정직하고 충실하게 또한 공평하게 보여주고 , 또 친구에게 유익한 봉사를 할 수 있는 것처럼 생각되는 것이 세상에서 성공하는 유일한 길로 알고 있다 . 왜냐하면 인간이란 본시 자신에게 유리한 것만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 그러니 어떤 이가 자기는 드디어 속박에서 벗어났다든가 , 자기의 행위를 감시하는 신이 있다고는 믿지 않는다든가 , 자기를 자기의 행동의 유일한 주인이라고 생각한다든가 , 또 자기의 생동의 책임은 자기만이 진다든가 하는 말을 우리에게 들려주었다고 하여 그것이 어느 정도의 이익을 우리레게 가져올 것인가 ?

그로 인해 그는 금후 우리가 그를 대단히 신뢰하고 생활의 모든 필요에 응해 위안이나 충언이나 구조를 그에게 기대하게 되리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 우리의 영혼이란 사소한 바람이나 연기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있다는 말을 우리에게 들려주고 , 또 그것을 자신 있고 만족스러운 어조로 들려줌으로써 , 우리를 기쁘게 하였다고나 생각하고 있는 것인가 ? 대체로 이런 일은 유쾌하게 말하여야 할 것인가 ? 오히려 반대로 , 세상에서 가장 슬픈 것으로서 슬프게 이야기하여야 할 것이 아닐까 ?

만일에 그들이 이것을 성실하게 생각한다면 그것은 너무도 그릇되고 , 양식에 어긋나고 , 성실에 어긋나고 , 또 그들이 구하고 있는 고상한 태도와 모든 면에 있어서 너무도 떨어져 있으므로 그들에게 추종하려 드는 경향이 다소 있는 사람을 왜곡시키는 것보다 오히려 교정하게 되리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 실제로 그들이 종교를 의심하고 있는 기분과 이유를 그들로 하여금 설명해 보라고 하라 . 대단히 박약하고 저급한 것을 말하기 때문에 당신들은 오히려 그 반대를 믿게 될 것이다 . 그래서 그들을 향해 어떤 날 어떤 사람이 아주 적절한 말을 했다 . “만일 당신이 계속해서 그렇게 말을 한다면 당신은 실제로 나를 종교에 끌어들이고 말 것이다”라고 . 그들은 옳은 말을 했다 . 왜냐하면 누가 이렇게도 경멸할 만한 사람들과 벗이 될 것 같은 기분이 자기에게 있음을 알면서 공포를 느끼지 않을 것인가 ?

그러므로 이런 기분을 가장하고 있는 데 불과한 사람들이 자기의 천성을 억압하고 인간 중에서도 가장 무례한 자가 되려고 하면 비상한 불행을 초래하게 될 것이다 . 만일 그들이 이미 빛을 가지지 않았다는 것을 마음속에 고민하거든 그것을 감추어서는 안 된다 . 공언했다 하여 조금도 부끄러운 것은 아니다 . 그것을 공언하지 아니하는 것이야말로 부끄러운 일이다 . 신에게 이탈한 인간의 불행이 어떤 것이냐를 모르는 것처럼 정신의 극도의 취약성을 표시하는 것은 없다 . 영원한 약속인 진리를 구하지 않는 것처럼 마음의 악질을 말하는 것은 없다 . 신에 대해 강한 척하는 것처럼 비겁한 것은 없다 . 그러니까 이런 불경은 참으로 그에 알맞은 본래의 악당에게 맡기면 된다 . 그리스도교도가 될 수 없다면 최소한 지실한 인간이 되기를 원한다 . 그리고 결국 도리에 부합하였다고 부를 수 있는 인간은 두 종류밖에 없고 , 그것은 신을 알기 때문에 전심으로 신에 봉사하는 자와 , 신을 모르기 때문에 전심으로 신을 구하고 있는 자라는 것을 인식하기를 원하다 .

그러나 신을 알지도 못하고 구하지도 않으며 살아가는 사람들에 관해서 이야기한다면 , 그들은 자신을 돌아볼 가치가 없는 것이라고 스스로 생각하고 있으니까 남들이 돌보아 줄 가치도 없는 것이다 . 그래서 그들을 그 정신착란 속에 내버려 두리만큼 멸시하지 않기 위해서는 , 그들이 멸시하고 있는 종교의 일체의 사랑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 그러나 이 종교는 그들도 이 세상에 있는 한 , 그들을 계몽할 수 있는 은총에 관여할 가능성이 있다고 항상 간주하여야 할 것을 우리에게 명하고 , 또한 그들도 잠시 동안에 우리가 현재 있는 것보다 더 한층 깊은 신앙에 채워질 수 있고 , 또 반대로 우리도 그들이 현재 빠져 있는 것과 같은 맹목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을 우리로 하여금 믿게 하여 주기 때문에 , 만일 우리가 그들의 위치에 놓여 있는 것이라면 우리 자신을 위해 이렇게도 하여 주었으면 하고 생각하고 있던 바를 그들에게 해주어야 한다 . 그리고 그들이 자신을 애처롭게 생각하고 빛을 발견할 수는 없겠느냐 생각하고 , 다만 2 ․ 3 보라도 걸어 나가도록 재촉할 필요가 있다 . 그들도 다른 일을 위해 상당히 낭비하고 있는 시간의 다만 몇 분의 일이라도 이것을 읽어보기 위해 할당해 주기를 바란다 . 그들은 거기에 다소의 반감을 느낄 것이지만 혹시 무엇에 부딪칠는지 모른다 . 여하간 큰 손해는 되지 않을 것이다 . 그러나 진리를 만나려는 완전한 성의와 진실한 염원을 가지고 이것을 읽는 사람들에 대해서 , 나는 그 사람들이 만족을 얻고 이렇게도 신성한 종교의 증거를 납득하여 주기를 희망한다 . 그런 증거를 나는 여기에 기록하고 , 대체로 다음과 같은 순서에 따라… .

 

194 의   1

   (1) 어느 편에 대해서도 동정해 주어야 한다 . 그러나 일방에 대해서는 애정에 나오는 연민을 가져야 하고 , 타방에 대해서는 경멸에 나오는 연민을 가져야 한다 .

   (2) 내가 그렇게 해석하는 것은 이론적이 아니라 인간의 마음의 구조에 따라서이고 , 신앙과 구원의 열성에 의해서가 아니라 완전히 인간적인 원리 , 즉 이해와 자애의 작용에 의해서이다 . 왜냐하면 일생의 모든 불행 중 우리를 시시각각으로 위협하고 있는 피할 수 없는 죽음이 머지않아…무서운 필연 속에…를 확신한다는 것은 우리에게 중대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는 데 족한 일이기 때문이다 .

   (3) 신을 모르고는 행복은 없다는 것 , 신에 접근하는 데 따라 사람은 행복하게 되고 최선의 행복은 신을 확실히 아는 데 있다는 것 , 신을 떠나는데 따라 사람은 불행하게 되고 , 최악의 불행은 위에 말한 반대를 확신하는 데 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

그렇다면 의심하는 것은 불행이지만 , 의심하면서도 구한다는 것은 면할 수 없는 의무이다 . 따라서 의심하면서 구하지 않는 인간은 불행과 부정을 겸유하고 있는 것이다 . 그러면서도 쾌활하고 자기도취가 강하다고 하면 나는 이렇게도 부조리한 피조물을 형용할 말을 모르겠다 .

   (4) 구원되기 어려운 불행을 기다리고 있을 따름이라는 것이 어떻게 기쁨의 자료가 될까 . 모든 위안에 절망한다는 것이 무슨 위안이 될 것인가 .

   (5) 종교의 영광에 가장 반대되는 것처럼 보이는 이런 사람들조차 그 점에 있어서는 다른 사람들에게 무용한 것이 아니다 . 우리는 그들에게서 여기에는 어떤 이상한 것이 있다는 최초의 논거를 끄집어낸다 . 왜냐하면 그러한 맹목은 심상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 또 그들의 정신착란이 그들로 하여금 참다운 행복에 완전히 배반되게 하고 있는 것이라면 , 그런 정신착란은 이다지도 통탄스러운 실례와 연민할 만한 정신착란을 무섭게 하여 줌으로써 다른 이들에게 진실한 행복을 보증하는 역할을 할 것이다 .

   (6) 그들은 자기의 마음을 움직이는 일체의 일에 관해 무감각한 것처럼 강한 것일까 ? 재산이나 명예를 상실하게 하고 그것을 테스트해 보게 , 무엇 ! 그것은 매혹… .

   (7) 그러나 인간은 그 본성을 상실했다는 것을 남몰래 기쁨의 자료로 삼고 있을 정도로 , 그 본성을 상실하고 있음이 확실하다 .

   (8) 이 종류의 사람들이란 아카데미 학파거나 추종자의 무리들이고 , 내가 알고 있는 가장 악질적인 사람들이다 .

   (9) 당세기질은 친절하지 않는 방향으로 향하고 훌륭한 신앙은 남에게 친절하게 하여 주는 방향으로 향한다 .

  (10) 다음과 같은 것은 말이 나가 자빠져 기뻐하거나 자만하는 데 꼭 알맞은 화제이다 . 「 그러니 우리는 즐길 것이 아닌가 , 공포도 불안도 없이 살고 나머지 것은 불확실하니까 죽음을 기다리도록 하세 . 사후의 일은 그때가 되어서 알면 된다 . …그 결과가 자기의 눈에 보이는 것도 아니고 . 」

  (11) 이런 일은 기뻐 이야기하여야 할 것인가 ? 그러니까 슬프게 이야기해야 할 것이다 .

  (12) 그런 것은 조금도 시대에 걸맞는 기질이 아니다 .

  (13) 당신들은 나를 종교에 이끌어 들어가게 하고야 말 것이다 .

  (14) …노하지도 않고 사랑도 하지 않는다는 것은 정신의 취약성의 결과이지 의지의 사악함의 결과는 아니다 .

  (15) 쇠약과 고민 속에서 서거하여 전능하고도 영원한 신을 경멸한다는 것이 죽어가는 사람에게 용기라고 할 것인가 ?

  (16) 이렇게 되면 그들에 대해서 이야기해야 할 것은 아무것도 없어지고 만다 . 그들을 경멸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고 그들에게 상식이 결핍하기 때문이다 . 신이 그들에게 접촉해 주셔야 한다 .

  (17) 그들을 경멸하지 않기 위해서는 그들이 경멸하는 종교 속에 확고하게 자신을 놓아둘 필요가 있다 .

  (18) 자신이 그런 상태에 있다고 해서 누가 자기의 우매를 동정해 주고 자기의 의지에 반하여서라도 호의를 가지고 자기를 구출하여 준다면 얼마나 행복스러울까 .

  (19) 어떤 장소에서 기적이 행하여지고 어떤 민족에게 신이 출현하였다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는가 ?

  194 의   2

   (1) 나는 그들에게 묻고 싶다 . “당신들은 실제로 당신들이 공격하고 있는 신앙의 기초 즉 인간의 본성이 타락하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 입증하고 있는 셈이 아닌가 ? ” 라고 .

   (2) 이거처럼 중대한 것도 없지만 , 이것처럼 사람이 등한시하고 있는 일도 없다 .

   (3) 그 보도가 허위임을 확인했을 경우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은 단지 그것뿐이다 . 그때에도 그는 기뻐할 것이 아니고 낙망하게 될 것이다 .

   (4) 이것을 가지고 이성의 한 증좌라고 해서는 안 된다 .

   (5) 세 가지 상태 .

 

195

그리스도교의 증거에 들어가기 전에 인간에 대해 이렇게도 중요하고 또 절실한 문제에 관해 그 진리를 탐구하는 데 무관심한 채 살고 있는 사람들의 부당성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

그들의 모든 미망 중에서 이것은 분명히 그들의 광기와 맹목을 가장 잘 입증하는 것이어서 , 그 속에 빠져 있는 그들을 곤혹시키는 것은 상식적인 생각에 의하여서도 자연적인 감정에 의하여서도 극히 쉽사리 할 수 있는 일이다 .

왜냐하면 이 세상의 생활은 일순간에 지나지 않고 , 죽음의 상태는 그것이 여하한 성질의 것이라도 영원하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 그리고 이 영원의 성질 여하에 따라서 우리의 일체의 행위와 사상은 다른 길을 취하지 않으면 안 되므로 , 우리의 궁극의 목적인 이 한 점의 진리에 의해 보조를 정하지 않는 한 올바른 의식과 판단을 가지고 한 발자국도 전진할 수는 없다 .

세상에 이처럼 명백한 것은 없다 . 따라서 이성의 원리에 비추어 보더라도 인간의 행동은 다른 길을 취하지 않는 한 완전히 도리에 어긋나는 것이다 . 그러므로 인생의 궁극의 목적에 관해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으면서 살고 있는 사람들 , 반성도 불안도 없이 자기의 성행과 쾌락에 몸을 맡기고 있는 사람들 , 또 영원에서 사고를 돌림으로써 영원을 소멸시킬 수 있는 것처럼 이 세상의 순간적인 행복을 찾으려고만 하는 사람들에 관해 판단해 주기를 바란다 .

여하간 이 영원은 존재한다 . 그리고 이 영원한 타개하고 그들을 부단히 위협하는 죽음은 머지않아 영원한 멸망 , 또한 영원한 불행의 무서운 필연 속에 그들이 놓이게 할 것이다 . 그런데다가 그들은 그런 불행 중 어느 것이 그들을 위해 무한히 준비되어 있는가를 모르고 있다 .

이 의문은 무서운 결과를 야기할 것이다 . 그들은 영원의 비참이라는 위험 속에 있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이 문제를 고통스러운 것이 되지 못하는 것으로 간주하고 , 그것 ( 그리스도교 ) 이 민중이 지나치게 안이한 얕은 믿음에서 받아들이고 있는 여러 의견 중의 하나인가 , 혹은 그 자신 , 분명하지 않지만 감추어져 있어도 매우 견고한 기초를 가진 제설의 하나인가를 음미하는 것을 게을리 하고 있다 . 그러므로 그들은 이 사물 속에 진리가 있는지 오류가 있는지 , 그 증거 속에 힘이 있는지 취약성이 있는지를 모른다 . 그 증거는 바로 그들 눈앞에 있는 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것을 보려고 하지 않는다 . 그리고 이런 무지 속에 있어서 그들은 불행이 있으면 그 속에 틀림없이 빠지게 될 일체의 것을 스스로 택하고 , 죽을 때 그것을 테스트해 보려고 기다리고 있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상태에 크게 만족하고 그것을 공언하고 , 한 걸음 더 나아가 뽐내곤 한다 . 이 문제의 중대성을 성실히 생각할 때 이렇게도 무모한 행동에 대해 공포를 느끼지 않고 견딜 수 있을까 ?

이런 무지 속에서 이렇게도 안식하고 있다는 것은 기괴한 일이다. 그러므로 그런 생애를 보내고 있는 사람에게 그렇다는 것을 표시해 주고, 그 무모함과 우매함을 각성시켜 주고, 그들이 자신의 광기를 돌보고 혼란하게끔 만들어 주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들이 현재와 같은 무지 속에 있으며 빛을 구하려 하지도 않고 생활하는 길을 택하는 경우 그들이 논 하는 것은 대체로 다음과 같기 때문이다. 그들은 말한다 . “나도 모른다… . ”

 

195 의   1

우리의 상상력은 현재를 부단히 생각함으로써 그것을 훌륭하게 확대하고 , 영원을 조금도 생각하지 않음으로써 그것을 비상히 축소한다 . 그 결과 우리는 영원을 무처럼 생각하고 무를 영원처럼 생각한다 . 이런 것들이 모두 우리 속에 강한 뿌리를 박고 있으므로 우리의 일체의 이성도 그것을 억제할 수는 없고 또… .

 

196

사람들은 심정을 결여하고 있다 . 그들은 벗으로 할 수는 없다 .

 

197

요긴한 일도 경멸할 정도로 무감각하고 , 우리에게 가장 요긴한 점에 대해서도 무감각하게 된다는 것은 .

 

198

작은 일에 대한 인간의 민감함과 큰일에 대한 인간의 무감각은 기괴한 전도를 표시하고 있다 .

 

199

적은 수의 사람들이 쇠사슬에 얽혀 모두 사형선고를 받고 있어 , 그 중 몇 사람씩 매일 남의 눈앞에서 학살되고 남은 자는 그 자신의 운명이 친구들의 운명과 같으리라고 생각하고 슬픔에 잠겨 희망도 없이 서로 얼굴을 쳐다보면서 자기 차례가 오는 것을 기다리고 있다고 상상하라 . 이것이 인간 상태의 그림이다 .

 

200

한 사내가 감옥에 있는데 그에 대한 선고가 떨어졌는지 그 여부를 모르고 , 그것을 알기 위해서는 이제 한 시간밖에 남지 않았는데 , 만일 선고가 떨어져 있는 것을 알고 있었더라면 그 한 시간 동안에 충분히 그것을 취소 받을 수 있는 경우 , 그 시간을 선고 여부를 확인하는 데 사용하지 않고 피케 ( 서양 가루다 놀이의 일종 ) 놀이에 소비한다고 하면 그것은 부자연스러운 일이다 . 그렇게 인간이…자연에 반하는 것이다 . 이것은 신의 손 ( 신의 벌 ) 을 무겁게 하여 주는 것이다 .

이와 같이 신을 구하고 있는 자들의 열성이 신을 증명할 뿐만 아니라 , 신을 구하지 않는 자들의 맹목도 신을 증명하는 것이다 .

 

201

저 사람들 혹은 이 사람들의 항의는 전부 그들 자신에 대한 것이기는 하지만 , 결코 종교에 대한 것은 아니다 . 불신자가 말하는 전부는… .

 

202

자기에게 신앙이 없는 것을 불만으로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 신이 그들에게 빛을 주지 않았음을 알 수가 있다 . 그러나 다른 사람들을 보면 그들을 맹목으로 만들어 놓는 신이 있음을 알 수 있다 .

 

203

Fascinatio nugacitatis ( 쓸데없는 일의 매력 ) . 정욕에 해쳐지지 않기 위해 마치 8 일간의 생명밖에 없는 것처럼 행동하자 .

 

204

만일 사람이 그 생애의 8 일간 제공하여야 하는 것이라면 백 년을 제공하여야 할 것이다 .

 

204 의   1

만일 사람이 8 일을 제공하여야 할 것이라면 전 생애를 제공하여야 할 것이다 .

 

205

나는 나의 생애의 짧은 기간이 그 전과 그 후의 영원 속에 흡수되고 , 내가 충족하고 있으며 현재 바라보고 있는 조그마한 공간이 , 내가 모르는 , 그리고 자기를 모르는 공간의 무한한 넓이 속에 가라앉아 있음을 생각할 때 나는 자기가 저기 있지 않고 여기 있는 것을 보고 무서워하고 또 놀란다 . 그 까닭은 어째서 저기 있지 않고 여기 있는가 , 그때에 있지 않고 현재에 있는가 하는 이유를 모르기 때문이다 . 누가 나를 여기 놓았는가 ? 누구의 명령과 처치에 의해 이 장소와 이 시간이 나에게 할당된 것인가 ? Memoria hospitis unius diei praetereunits ( 하루만 머물었던 나그네의 추억 ) .

 

206

이 무한한 공간의 영원한 침묵이 나를 공포에 떨게 한다 .

 

207

여하히 많은 왕국이 우리를 모르고 있는 것인가 !

 

208

어째서 나의 인식은 제한되어 있는가 ? 왜 나의 신장은 ? 왜 나의 수명은 천 년이 아니고 백 년인가 ? 무슨 이유로 자연은 나에게 이런 수명을 부여하여 주었는가 ? 무한 속에 있어서는 어떤 자가 타자보다 좋다는 일이 없는 이상 , 이것보다 저것을 선택할 이유가 없는 것인데 ,

그 무한 속에 있어서 다른 수보다도 이 수를 택한 것은 무엇 때문인가 ?

 

209

주인이 너를 사랑하고 비위를 맞추어 준다고 하여 너는 벌써 노예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있는가 ? 노예여 , 너는 참으로 행복하다 . 주인은 너의 비위를 맞추어 주고 있지만 얼마 안 가 너를 때려 주리라 .

 

210

연극의 다른 막들이 아름답다고 할지라도 최후의 막은 피비린내 난다 .

결국에는 머리에 흙을 퍼붓고 그것이 여우언한 고별이 된다 .

 

211

우리는 우리와 흡사한 자들과의 교제에 안심하고 기뻐한다 . 우리와 마찬가지로 비참하고 무능한 그들은 결코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 사람들 혼자서 죽을 것이다 . 그러므로 사람은 마치 혼자나 되는 것처럼 행동을 해야 한다 . 그때 굉장한 집을 세우는 것 같은 일을 하여야만 할 것인가 ?

서슴지 않고 진리를 탐구해야 한다 . 이를 거절하는 이가 있다면 그이는 진리의 탐구보다도 인간의 영예를 중시하고 있음을 표시하는 것이다 .

 

212

유전 = 인간이 소유하는 일체의 것이 유전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무서운 일이다 .

 

213

우리와 지옥 또 천국 사이에는 이 세상에서 가장 취약한 생명이 있을 따름이다 .

 

214

부정 = 자아도취가 비참과 결부되어 있다는 것은 참으로 부정한 일이다 .

 

215

위험이 없을 때는 죽음을 무서워하고 , 위험이 있을 때는 무서워하지 않는다 . 이것은 인간이기 때문이다 .

 

216

불의의 죽음만은 무서운 것이다 . 그래서 고해신부가 귀인의 집에 유숙하고 있다 .

 

217

어떤 상속인이 자기 집의 재산증서를 발견하였다고 하자. 이는 아마 가짜 서류일 것이라고 말하여 조사하지 않고 내버려둘 것인가?

 

218

감옥 = 사람이 코페르니쿠스의 설을 구명하지 않은 것을 나는 용서한다 . 그러나 이것은… . 혼이 죽는 것인가 , 죽지 않는 것인가를 안다는 것은 전 생애에 관한 일이다 .

 

219

혼이 혼이 죽는 것인가 , 죽지 않는 것인가 하는 것이 도덕에 근본적인 차이를 생기게 한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철학자들은 이 일과는 관계없이 그들의 도덕을 인출했다 . 그들은 시간이 지나가기를 고려하고 있는 것이다 . 그리스도교에 기우는 플라톤 .

 

220

혼의 불멸을 논하지 않았던 철학자들의 오류 , 몽테뉴에 나타난 그들의 딜레마의 오류 .

 

221

무신론자는 완전히 명백한 것을 이야기하여야 한다 . 그런데 혼이 물질적이라는 것은 완전히 명백한 것은 아니다 .

 

222

무신론자들 = 무슨 이유로 그들은 사람이 부활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인가 ? 탄생하는 것과 재생하는 것 , 전에 없었던 것이 있는 것과 전에 있었던 것이 다시 있게 되는 것 중 어느 편이 곤란한가 ? 존재하게 되는 것이 다시 존재하게 되는 것보다 더 곤란하지 않는가 ? 습관은 우리로 하여금 전자를 용이하다고 생각하게 하고 습관의 결여는 후자를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게 한다 . 얼마나 비속한 판단의 방식인가 !

왜 처녀는 애를 낳을 수 없는가 ? 암닭은 수탉이 없어도 알을 낳지 않는가 ? 누가 외관으로 그런 알을 다른 알과 구별할 수 있으랴 ? 또 암탉이 수탉과 마찬가지로 새끼를 만들 수 없다고 누가 우리에게 말했던가 ?

 

223

그들은 부활이나 처녀 분만에 반대하므로 무슨 할 말이 있었던가 ? 인간 또는 동물을 낳는 것과 그것을 재생시키는 것 중 어느 편이 곤란할까 ? 만일 우리가 어떤 종류의 동물을 보지 않았더라면 그런 동물이 서로 짝을 짓지 않고 새끼를 낳을 수 있느냐를 어떻게 추측할 수 있었을 것인가 ?

 

224

성찬이나 기타를 믿지 않는 우매를 나는 얼마나 증오하는 것인가 ? 복음이 진실하고 예수 그리스도가 신이라면 그것을 믿는 데 얼마만한 곤란이 있을 것인가 ?

 

225

무신론자는 이지 ( 理智 ) 의 힘을 표시한다 . 그러나 그것은 어느 정도까지에 지나지 않는다 .

 

226

불신자는 이성을 따른다고 공언하니 이성적으로는 이례적으로 강하여야 할 것이다 . 그런데 그들은 무엇이라고 말할까 ? “우리는 짐승이 인간과 마찬가지로 태어나고 죽으며 , 투르크인이 그리스도교와 마찬가지로 태어나고 죽는 것을 보지 않는가 ? 그들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그들의 의식 , 그들의 예언자 , 그들의 박사 , 그들의 성자 , 그들의 수도사를 가지고 있다 . 등등”이라고 그들은 말한다 . 그것이 성서에 반대된다고 말하는 것인가 ? 성서는 그런 모든 것을 기록하고 있지 않는가 ?

만약 당신들이 진리를 알려는 생각이 그리 없다면 그쯤 해서 만족하면 충분할 것이다 . 그러나 당신들이 전심을 기울여 진리를 알기를 원한다면 그것으로서는 부족하다 . 좀 더 상세히 보아야 한다 . 철학의 문제로는 그것으로서 좋을 것이나 이것은 당신들 전부에 관련한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경솔한 사고방식을 가지고 즐겨보려고 하는가 . 이 종교가 그런 불분명의 이유를 해명하는가 안 하는가 , 여하튼 알아보자 . 이 종교는 행여나 그것을 가르쳐 줄는지 모른다 .

 

227

대화에 의한 순서 = 는 어떻게 하여야 되는가 ? 나는 도처에 불분명한 것만을 본다 . 자기는 무라고 생각하여야 할 것인가 ? 자기는 신이라고 믿어야 할 것인가 ? ”

「 만물은 유전하고 계속 이어진다 ) 」 — 당신은 잘못이다 . 세상에는… .

 

228

무신론자들의 항의 , 그러나 우리에게는 아무런 비도 없다 .

 

229

이것이야말로 내가 보는 것이고 나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있는 것이다 .

나는 모든 방면을 바라보다 도처에 불분명한 것만을 본다 . 자연은 의혹과 불안의 씨가 아닌 아무것도 나에게 제공하지 않는다 . 만일 내가 거기에 신성을 표시하는 아무것도 보지 않았더라면 부정적인 결론에 도달했을 것이다 . 만일 내가 도처에 창조주의 표시를 보았다고 한다면 나는 신앙에 안주하게 되었을 것이다 . 그러나 부정하기에는 너무나 많고 확신하기에는 너무나 적은 것을 보게 되니 나는 가련한 상태에 놓이게 된다 . 그 속에 있어서 나는 만일 하나의 신이 자연을 지탱하고 있으면 , 자연이 명확히 그 신을 표시하여 주기를 , 또 자연이 주는 표시가 허위의 것이라면 자연이 그런 짓을 완전히 그만두어 주기를 , 그리고 내가 어느 편에 따라가야 하는가를 나에게 알려주기 위해 일체를 말하여 주든가 혹은 아무것도 말하여 주지 않도록 몇 백 번이나 염원했다 . 그런데 자기가 무엇인가 , 또 무엇을 하여야 하는가를 모르는 자기의 현상에 있어서 나는 자기의 상태도 자기의 의무도 알 수가 없다 . 나의 마음은 참다운 선의 소재를 알고 그에 따라가려고 전력을 다하고 있다 . 영원을 위해서 나에게는 아무것도 지나치게 고가의 것은 없다 .

신앙에 있어서 이다지도 태만하게 살고 있는 사람들 — 나로서는 전혀 다른 사용방식을 취하게 되리라고 생각하는 천부의 재능을 이렇게도 악용하는 사람을 나는 부럽게 생각한다 .

 

230

신이 있다는 것은 불가해하고 신이 없다는 것도 불가해하다 . 혼이 우리의 신체와 같이 있다는 것도 혼이 없다는 것도 불가해하다 . 세계가 창조되었다는 것도 그것이 창조되지 않았다는 것도 불가해하다 . 원죄가 있다는 것도 그것이 없다는 것도 불가해하다 .

 

231

신이 무한하고 부분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당신들은 생각하는가 ? — 좋다 — 그러면 무한하고도 불가분한 한 사물을 보여드리기로 하지 . 그것은 무한의 속도로서 도처를 움직이고 있는 하나의 점이다 . 왜냐하면 그것은 모든 위치에 있어서 하나이고 제각기의 장소에 있어서는 전체이니까 .

여태까지 당신들에게는 불가능하게 보이는 이 자연의 사실에서 당신들이 아직 알고 있지 못하는 다른 사물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인식하기를 바란다 . 당신들의 작디작은 지식에서 자기에게는 알아야만 할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다는 것 같은 결론을 내려서는 안 된다 .

오히려 알아야 할 것이 무한히 남아 있다고 생각하자 .

 

232

무한의 운동 , 모든 것을 채우는 한 점 , 양 ( 量 ) 이 없는 정지 순간 , 무한 , 불가분하고 무한 .

 

233

무한―무 = 우리의 혼은 육체 속에 투입되고 거기서 수와 시간과 차원을 발견한다 . 혼은 그 위에서 추리하고 그것을 자연이나 필연이라고 부른다 . 그리고 그 이외의 것을 믿을 수가 없다 .

무한에 하나를 기하여도 무한은 조금도 증가하지 않는다 . 무한의 길이에 한 자를 가하여도 마찬가지다 . 유한은 무한 앞에서는 소멸하고 단순한 무로 환원되고 만다 . 우리의 정신도 신 앞에서는 그와 마찬가지이고 우리의 정의도 신의 정의 앞에서는 그와 마찬가지다 . 우리의 정의와 신의 정의 사이에는 일과 무한 사이에 있는 정도의 커다란 불균형은 없다 . 신의 정의는 그 자애와 마찬가지로 거대한 것이어야 한다 . 그런데 신에게서 버림받은 자에 대한 정의는 신이 선택한 자에 대한 연민처럼 크지 않으므로 우리를 불쾌하게 하지 않을 것이다 .

우리는 무한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 본질을 모른다 . 이는 마치 수의 유한함이 오류라는 것을 알게 되면 수의 무한함이 진실하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 그러나 우리는 그 무한이 어떤 것인가를 모른다 . 그것이 짝수라고 하는 것도 잘못이고 홀수하고 하는 것도 잘못이다 . 왜냐하면 거기에 하나를 가하여 주어야 그것은 본질을 달리 하지 않기 때문이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수임에 틀림없고 , 또 모든 수는 짝수 아니면 홀수이다 ( 이것은 모든 유한수에 관한 한 진실하다 ) . 이와 같이 신이 무엇인가를 모르더라도 신이 있다는 것만은 충분히 알 수 있다 .

그렇게도 많은 참다운 사물이 진리 그 자체가 아닌 것을 보면 실제적 진리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인가? 그런데 우리는 유한의 존재와 본질을 알고 있다. 우리도 유한이고 유한자처럼 넓이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무한의 존재를 알고 있으나 그 본질을 모른다. 무한은 우리처럼 넓이를 가지고 있지만 우리처럼 한계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앙에 의해 우리는 신의 존재를 알고 영광을 통해 그 본질을 안다. 그런데 나는 어떤 사물의 본질을 몰라도 그 존재를 충분히 알 수 있다는 것을 표시하였다.

이제 나는 자연의 빛에 따라 이야기하련다 .

만일 신이 있다고 하면 , 신은 무한히 불가해한 것이다 . 왜냐하면 신은 부분도 한계도 가지고 있지 아니하므로 우리와 아무런 관련이 없기 때문이다 . 그러므로 우리는 신이 무엇이며 그가 있는지 없는지도 알 수 없다 . 그렇다면 누가 감히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나서려고 할 것인가 ? 그것은 신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우리로서는 불가능하다 .

그러면 누가 그리스도교 신자를 가리켜 그들의 신앙의 이유를 붙일 수 없다고 하여 책할 수 있을 것인가 ? 그들은 이유를 붙일 수 없는 종교를 공연히 믿고 있는 것이다 . 그들은 그 종교를 세상 사람들에게 설복함에 있어 그것은 어리석은 것 Stultitian 이라고 선언하고 있다 . 그런데도 당신은 그들이 그것을 증명하지 않는다는 것을 불만으로 생각하는가 ? 만일 그들이 그것을 증명하게 된다면 그들은 약속을 지키지 않는 셈이 된다 . 증명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그들에게 사려가 결여되어 있지 않는 증거이다 — 좋다 . 그러나 그것은 이 종교를 그러한 것으로 제공하는 사람들의 변명이 될지는 몰라도 , 또 그것을 이유 없이 선전한다는 비난을 그들에게서 제거할지는 몰라도 , 이 종교를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변명은 되지 않는다 — 그러면 이 점을 음미하여 신은 있는지 없는지를 말하기로 하자 . 그러나 우리는 어느 편에 기울어질 것인가 ? 이성은 여기에서는 아무것도 결정할 수가 없다 . 거기에는 우리로부터 떨어져 있는 무한한 혼돈이 있다 . 이 무한의 거리의 극단에서 일종의 내기가 행하여지고 , 앞면이 나오든가 뒷면이 나오든가 하게 되어 있다 . 당신은 어느 쪽에 걸려 있는가 ? 이성에 의하면 당신은 어느 쪽에도 걸 수 없다 . 이성에 의하면 두 개 중 어느 것도 지지할 수 없다 .

— 그렇다면 일방을 선택한 자를 가리켜 잘못했다고 책해서는 안 된다 . 당신은 그것에 관해 아무것도 모르니까 . 아니다 . 내가 책하는 것은 일방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선택 행위 그 자체다 . 왜냐하면 앞면을 택한 것도 윗면을 택하는 것도 잘못이고 , 쌍방이 다 거짓이다 . 전혀 내기를 하지 않는 것이 옳다 .

— 그렇다 . 그러나 내기를 하여야 한다 . 이것은 임의로 하는 것이 아니다 . 당신은 벌써 배를 타고 떠난 것이다 . 그러면 어느 쪽을 취할까 ? 보라 ! 꼭 선택하여야 한다면 어느 쪽에 이익이 적은가를 생각해 보라 . 당신이 잃은 것은 두 가지 , 즉 진과 선이고 , 내기하는 것은 두 가지 , 즉 당신의 이성과 의지 , 당신의 지식과 행복이다 . 그리고 본성이 피하는 것은 오류와 비참의 두 가지다 . 아무래도 선택하여야 하는 이상 , 한쪽을 택하고 다른 쪽을 버린다고 하여 당신의 이성은 별로 손상되지 않을 것이다 .

이것으로써 한 가지 점은 끝났다 . 그러나 당신의 행복은 ? 신이 존재한다는 앞면을 취해 가지고 득실을 계량하기로 하자 . 두 가지 경우를 상정하자 . 만일 이기면 당신은 모든 것을 얻는다 . 진다더라도 아무것도 잃지 않는다 . 그러니까 서슴지 말고 신이 존재한다는 쪽에 걸어라 . 그것은 멋들어진다 . 그렇게 내기해야겠는데 . 그러나 나는 너무도 많이 내기하는 것 같아 .

보라! 손해에도 이득에도 같은 운이 있는 이상, 만일 하나의 생명 대신 두 개의 생명을 얻을 수 있기만 하어라도 당신은 내기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만일 세 개의 생명을 얻는 것이라면 내기를 하는 것이 지극히 당연하다 ( 당신은 아무래도 내기를 하여야 하니까 ). 그리고 손해에도 이득에도 마찬가지의 운수가 있는 승부에 있어서, 싫건 좋건 내기를 하게 되어 있으면서도 세 개의 생명을 얻기 위해 한 개의 생명을 감히 걸지 않는다면 당신은 사려가 없다는 이야기를 들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영원한 생명과 행복이 있다. 그렇다면 무수의 운 중 하나만이당신의 것일 때 다신이 둘을 얻기 위해 하나를 건다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또 무수의 운 중 하나가 당신의 것이 될 수 있다는 승부에 있어서 무한히 행복스러운 무한의 생명을 얻을 수 있다면 아무래도 내기를 하여야 할 처지에서 세 개의 생명에 대해 하나의 생명을 걸기를 거절한다는 것은 도리를 어긴 행위이리라. 그러나 여기에서는 더없이 행복하고 무한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것이고, 손과 운의 유한에 대해 이득의 운은 하나이고 , 당신이 내기하는 것은 유한한 것이다.

이래서는 전혀 내기가 안 된다 . 무한자가 있는 곳 , 이득의 운이 무한한 데 대해 손해의 운이 무한하지 않는 곳에서는 우물쭈물할 필요가 없다 . 일체를 내기하여야 한다 . 이리하여 승부가 강요된 경우 무가치한 것을 잃어버릴지 모르지만 , 마찬가지로 무한한 것을 얻을지도 모르는 데 대해 감히 생명을 내걸지 않고 그것을 보전하는 것은 이치에 어긋난 행위이리라 .

왜냐하면 이길지 이기지 못할지 불확실하고 , 승부를 하는 것은 확실하다고 말했댔자 아무런 소용이 없으며 , 또 내기하는 것의 확실성과 얻을는지도 모른다는 것의 불확실성 사이의 무한한 거리는 사람이 확실히 내거는 유한의 선과 불확실한 무한의 선을 같이 만들어 준다고 말했댔자 아무런 소용이 없기 때문이다 . 사실은 결코 그렇지 않다 . 누구나 내기를 하는 자는 불확실한 것을 얻기 위해 확실한 것을 내건다 . 그런데 그가 유한을 확실히 내걸고 유한을 불확실하게 얻고자 하더라도 별로 이성에 어긋나지 않는다 . 내거는 것의 확실성과 얻는 것의 불확실성 사이에는 무한한 거리가 없다 . 그것은 잘못이다 . 사실 무한은 득의 확실과 손의 확실 사이에 있다 . 그러나 득의 불확실은 손과 득의 운의 정도에 따라 내거는 것의 확실성에 비례한다 . 그래서 쌍방에 같은 운이 있으면 승부는 대등하게 행하여지는 셈이다 . 그때에는 내거는 것의 확실성은 얻는 것의 불확실성과 같아진다 . 그들 사이에 무한의 거리가 있다는 것은 사실과 다르다 . 이리하여 손과 득에 동등의 운이 있는 승부에 있어서 유한을 내기하여 무한을 얻으려고 하는 경우 우리의 제언은 무한한 힘을 띠게 된다 . 이것은 논증할 수 있다 . 그리고 사람들이 어떤 진리를 알 수 있다면 이것이야 말로 그 진리다 .

— 나는 그것을 긍정하고 시인한다. 그러나 한 걸음 더 나아가 승부의 내막을 투시하는 방법은 없을까? — 예, 성서나 기타가 있소.

— 그렇소 . 그러나 나는 손을 묶이고 입을 다물리고 있소 . 내기를 하게끔 강요당하고 있어 자유의 몸이 아니다 . 나는 석방될 수 없고 그리고 믿을 수가 없게끔 되어 있다 . 도대체 당신은 나더러 어떻게 하라는 것인 가 ?

— 옳소 . 그러나 이성이 당신을 거기까지 이끌고 왔는데도 불구하고 아직도 믿을 수가 없다니 자기에게 믿는 힘이 없는 것 ( 오직 자기의 정념의 결함에서 생겨난다 ) 은 최소한 알아두라 . 그러니까 신에 관한 증거를 많이 늘림으로써 납득하려 하지 말고 악한 생각을 줄임으로써 그렇게 하도록 애써 보라 . 당신은 신앙에 도달하려고 생각하면서 그 방도를 모르고 있다 . 불신을 치료하고자 그 약을 구하고 있다 . 전에는 당신과 마찬가지로 속박되어 있었으나 지금은 일체의 소유물을 내걸고 있는 사람들의 본을 받으라 . 그들은 당신이 찾고자 하는 길을 알고 있고 , 당신이 치료되기를 원하는 병에서 치료된 것이다 . 그들이 하기 시작한 방식을 배우라 . 그것은 마치 이미 믿고 있었던 것처럼 만사를 행하는 것이다 . 성수를 받고 미사를 올리는 일을 행하는 것이다 . 그렇게 하면 당신은 스스로를 믿을 수 있게 되고 어리석게 될 것이다 .

— 그러나 그것이야말로 내가 겁내는 것이다 . 그것은 또 왜 ? 당신은 무슨 손해라도 입는다는 것인가 ?

그러나 거기에 도달하는 길을 당신에게 표시하여 주기 위해 말하련다. 그렇게 하면 당신의 큰 장애인 악한 생각을 줄이게 될 것이다.

 

이 의논의 결말   — 그런데 이쪽에 가담하면 당신에게 어떤 재액이 생겨날 것인가 ? 당신은 충실하고 , 정직하고 , 겸손하고 , 은혜를 잊지 않고 , 자애롭고 , 우정이 두텁고 , 성실하고 , 참답게 될 것이다 . 실제로 당신은 유해한 쾌락이나 영예나 향락에 빠지지 않게 되리라 . 오히려 당신은 다른 것을 얻게 되지 않을까 ? 나는 감히 말하지만 , 그로 말미암아 벌써 이 세상에서 이득을 얻게 되리라 . 또 이 길을 한 걸음씩 걸어 나가도록 새 이득을 얻는 확실성이 많아진다는 것을 더 잘 알게 될 것이며 , 당신이 내건 것이 무가치하다는 것을 더 잘 알게 될 것이다 . 그리고 자기는 확실한 무한자를 위해 내기를 했으며 , 또 그 때문에 아무런 손해도 보지 않았다는 것을 나중에는 시인하게 될 것이다 .

— 아 ! 이 의논은 내 마음을 끌고 가며 나를 황홀하게 한다 .

— 만일 이 의논이 당신 마음에 들고 유력하게 보인다면 그것은 그 앞뒤에 무릎을 꿇고 앉아 저 무한하고 불가분한 존재자에게 자기의 소유물 일체를 바치고 , 당신도 역시 당신의 것을 당신 자신의 행복과 무한자의 영광을 위해 바치도록 기도드리고 있는 사람에 의해 의논이 행하여졌다는 것을 알아두라 . 그리고 이와 같이 힘이 그런 겸허한 마음에 부여된다는 것을 알아두라 .

 

234

확실한 것을 위해서가 아니면 아무것도 해서는 안 된다면 종교를 위해서도 아무것도 해서는 안 된다 . 종교는 확실하지 않으니까 . 그러나 얼마나 많은 일이 불확실한 것을 위해 행해지고 있는 것인가 , 항해이건 전쟁이건 . 그러므로 나는 말한다 . 확실하지 않은 이상 아무것도 전혀 해서는 안 된다면 우리가 내일까지 산다는 것보다도 종교의 편에 확실성이 많다고 . 왜냐하면 우리가 내일까지 산다고 말하는 것은 확실하지 않지만 , 또한 우리가 내일까지 살아 있지 않을는지도 모른다는 것은 확실히 있을 수 있지만 종교에 관해서는 같은 말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 종교가 확실하다고 말하는 것은 확실하지 않다 . 그러나 종교가 확실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은 확실히 있을 수 있다고 단언할 수 있으랴 ? 그런데 내일을 위해 즉 불확실한 것을 위해 일하는 경우 , 우리는 이성적으로 행동하고 있다 . 왜냐하면 이미 논증된 운의 규칙에 따라 우리는 불확실한 것을 위해 일하게 되어 있는 자이기 때문이다 .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사람이 불확실한 것 , 즉 항해나 전쟁을 위해 일하는 것을 보았다 . 그러나 그는 사람이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음을 논증하는 운의 규칙을 모르고 있었다 . 몽테뉴는 사람이 편파적인 정신에 대해 화를 내는 것 , 습관이 만사를 지배하는 것을 보았으나 그것 사실의 원인은 몰랐다 .

이런 사람들은 모두 사실을 보았지만 원인을 보지 않았다 . 그들과 원인을 발견한 사람들을 비교하는 것은 마치 눈만 가지고 있는 사람들과 정신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비교하는 것과 같다 . 왜냐하면 사실은 감성으로 감득될 수 있지만 원인은 정신만이 볼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 그리고 이런 사실은 정신에 의해 보일 셈치고 그런 정신과 원인을 보는 정신과를 비교해 본다는 것은 육체의 감성과 정신을 비교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

 

235

Rem viderunt , causam non viderunt ( 그들은 사물은 보았으나 그 원인을 보지 못했다 ) .

 

236

운의 규칙으로 말하면 , 당신은 진리를 추구하는 데 힘써야 한다 . 왜냐하면 진의 본원 ( 신 ) 을 존경하지 않고 죽으면 당신은 멸망하여 버리기 때문이다 — 그러나 만일 신이 나에게 자기를 숭배하기를 원하신다면 그런 마음씨의 증거를 나에게 남겨 놓았을 것이라고 당신은 말한다 — 신은 아닌 게 아니라 그렇게 하셨다 . 그러나 당신은 그런 증거를 등한시하고 있는 것이다 . 그러니까 그것을 찾아내기로 해 보라 . 그것은 찾을 만한 가치가 십분 있다 .

 

237

운 = 다음의 상위하는 가정의 어느 쪽에 따르느냐에 따라 우리는 삶의 방법을 달리해야 한다 . ① 우리가 이 세상에 언제까지라도 생존할 수 있는 경우 . ② 우리가 이 세상에 길이 생존할 수 없음이 확실하고 거기에 한 신간이라도 생존할 수 있겠는가 없겠는가를 모르는 경우 , 이 후자의 가정이야말로 우리의 것이다 .

 

238

당신은 확실한 고통과 자애의 10 년간 ( 왜냐하면 10 년이란 운을 시험해 보는 것이니까 ) , 마음에 들려고 열심히 애쓰면서도 성공하지 않는다는 것 이외에 결국 나에게 무엇을 약속하려는가 ?

 

239

항의 = 자신의 구원을 원하는 사람들은 그것만으로서 행복하다. 그러나 그들은 그 대신 지옥을 두려워해야 한다.

 

회답 = 지옥을 두려워하는 이유를 보다 더 많이 가지고 있는 것은 누구일까? 지옥이 있는 지 없는지를 모르고, 만일 그것이 있으면 그 고통을 꼭 받게 되어 있는 사람인가, 혹은 지옥이 있다는 것을 다소라도 믿고 그 것이 있다면 구원되기를 원하고 있는 사람인가?

 

240

“신앙을 얻으면 곧 쾌락을 버리리라”라고 그들은 말한다 . 나로서는 당신에게 말한다 . “당신은 쾌락을 버리면 얼마 안 가 신앙을 얻게 되리라”라고 . 그러나 시작하는 것은 당신부터다 . 만일 가능하다면 신앙을 당신에게 부여해 줄 것이다 . 나로서는 그것이 불가능한 까닭으로 당신이 말하고 있는 바의 진실성을 테스트해 볼 수도 없다 . 그러나 당신은 충분히 쾌락을 포기할 수 있고 , 내가 말한 것이 진실한지 그렇지 못한지를 테스트해 볼 수도 있다 .

 

241

질서 = 나는 그리스도교를 진리라고 믿어 잘못될 것을 두려워했으나 , 그것보다는 일단 잘못했다가 그것을 진리라고 인정하는 편이 훨씬 더 무섭다.

 

 

 

 

  

제 4 편 신앙의 수단

 

 

 242

제 2 부의 서언 = 이 제목을 취급한 사람들에 관해 이야기할 것 .

나는 이 사람들이 신에 관해 이야기하고자 얼마나 대담한 기도를 하였던가에 대해 경탄한다 . 불신자에 대해 그들의 말머리를 돌리는 데 대해 그들의 제 1 장은 자연의 조화에 의해 신성을 증명하려고 한다 . 만일 그들이 그 논봉을 신자를 향해 돌린다면 나는 그들의 기도에 대해 놀라지는 않을 것이다 . 왜냐하면 마음속에 산 신앙을 가진 이들은 일체의 존재가 그들이 존경하는 신의 사업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을 곧 간취할 것이 확실하기 때문이다 . 그러나 이런 빛이 꺼져 있으므로 그것을 다시금 점화시켜 주고자 우리가 의도하고 있는 사람들 , 신앙도 은총도 없이 그들의 모든 빛을 가지고 자연 속에 볼 수 있는 일체의 것에 그들로 하여금 그런 신앙에 인도할 수 있는 자를 구하면서 애매와 암흑밖에 보지 못하는 사람들 , 이런 사람들을 향해 당신은 당신을 싸돌고 있는 극소수의 사물을 보기만 하면 된다든가 , 신을 적나라하게 볼 수 있다고 말하든가 , 이렇게도 위대하고 중요한 문제의 완전한 증명으로서 달이나 유성이 운명을 표시하든가 , 그런 논법에 의해 그 증명을 완성하였다고 자부한다든가 하는 소지를 부여하여 주는 것이다 . 그들에게 멸시의 생각을 가지게 하는 데 이 이상 더 알맞은 일이 없다는 것을 나는 이성과 경험에 의해 알고 있다 .

  신에서 출발하는 사물을 잘 알고 있는 성서는 결코 그렇게 이야기하지 않는다 . 성서는 그 반대로 신은 숨어 있는 신이라는 것 , 인간 본성의 타락 이래 신은 인간이 맹목 속에 방치하신 것 , 인간이 거기서 도피할 수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만이 예수 그리스도를 빼놓고는 신과의 일체의 교제는 제거되어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 Nemo novit patrem nisi Filius, et cui, voluerit Filius revelare ( 아버지를 아는 자는 아들 , 그리고 아들이 계시코자 하는 자이다 ) .

이것이야말로 성서가 신을 구하는 자는 신을 발견하게 되리라고 많은 곳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경우 , 우리에게 표시하고 있는 바이다 . 「 대낮의 태양처럼 」 이라고 말한 것은 이 빛을 가리킨 것이 아니다 . 대낮의 해를 구하고 바다의 물을 구하는 자는 이것을 찾아보게 되리라고는 말하지 않았다 . 그러므로 신의 증명은 자연 속의 그런 것이어서는 안 된다 . 성서는 우리에게 이렇게도 말하고 있다 . Uere tu es Deus absconditus ( 참으로 너는 숨어 있는 신이로다 ) .

 

243

성서 정전 ( 正典 ) 의 저자들이 신을 증명하는 데 자연을 사용하지 않았던 것은 놀라운 일이다 . 모든 것이 신을 믿게끔 지향된다 . 다윗 , 솔로몬 , 기타의 사람들은 “진공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 그러므로 신은 존재한다”라고 결코 말하지 않는다 . 그들은 그보다 뒤에 이 세상에 나서 같은 논법을 사용한 가장 현명한 사람들보다 더 현명하였을 것이다 . 이것은 극히 주목할 일이다 .

 

244

“무엇이냐고 ! 당신 자신으로서는 하늘이나 새들이 신을 증명하고 있다고 말하지 않는가 ? ” — 그렇다 — “그리고 당신의 종교는 그렇게 말하지 않는가 ? ” — 그렇다 . 왜냐하면 신이 이 빛을 주신 어떤 이들에게는 어느 의미에서 진실할는지 모르지만 , 그 외의 대다수 사람들에 대해서는 거짓이기 때문이다 .

 

245

신앙에는 세 가지 수단이 있다 . 이성 , 습관 , 영감이다 . 오직 혼자만이 도리에 부합하고 있는 그리스도교는 영감 없이 믿는 자를 자기의 참다운 애들이라고 인정하지 않는다 . 이것은 그리스도교가 이성과 습관을 배격한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 오히려 그 마음을 열어 증거에 향하게 하고 습관에 의해 그것을 확증하는 것은 필요하지만 , 또 겸손에 의한 영감에 몸을 맡겨야 한다 . 영감만이 참으로 유익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기 때문이다 . Ne evacuetur crux Christi (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헛되게 만들지 않기 위함이다 ) .

 

246

질서 = 「 신을 구하여야 한다 」 라는 편지 다음에 「 장애의 제거에 관해 」 라는 편지를 쓴다 . 그것은 「 기계작용 」에 관한 논술이고 기계작용을 정비하고 이성에 의해 구하는 것에 관한 것이다 .

 

247

질서 = 한 친구로 하여금 ( 신을 ) 구하게 하기 위한 권고의 편지 — 그러면 그는 대답하리라 , “ 구했댔자 무슨 소용이 있으랴 ? 아무것도 쓸데없지 않느냐”라고 — 거기서 그에게 대답한다 . “실망하지 말게” — 그러면 그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리라 . “자기는 어떤 빛을 발견할 수 있으면 다행일 것 같은데 , 이 종교 자신이 이런 신앙의 방식을 가지고서는 아무런 소용이 없으 리라고 하기에 차라리 구하지 않으려고 생각한다”라고 — 이에 대한 대답은 「 기계작용 」 .

 

248

기계작용에 의한 증거의 효용을 표시하는 편지   신앙은 증명과 다르다 . 후자는 인간적인 것이고 전자는 신의 선물이다 . Gustus ex fide uivit ( 의인은 신앙에 의해 살아야 한다 ) . 그것은 신 자신이 사람의 마음속에 넣어 주시는 이 신앙에 관한 것이고 , 증명은 때때로 그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 fides ex auditu ( 신앙은 듣는 것에 의한다 ) . 그러나 이 신앙은 마음속에 있다 . 그리고 사람으로 하여금 Scio ( 나는 안다 ) 라고 말하게 하지 않고 Credo ( 나는 믿는다 ) 라고 말하게 한다 .

 

249

의식에 희망을 거는 것은 미신이다 . 그러나 그에 복종하지 않으려는 것은 오만이다 .

 

250

신으로부터 받기 위해서는 외적인 것을 내적인 것에 결부시켜야 한다 . 즉 무릎을 꿇고 앉는다든가 입술로써 기도를 드린다든가 등등 . 그것은 신에 굴복하려고 하지 않았던 오만한 사람을 곧 피조물에 굴복시키기 위해서이다 . 그런 외적인 것에 구원을 바라는 것은 미신이지만 그것을 내적인 것과 결부시키지 않으려는 것은 오만이다 .

 

251

다른 제 종교 , 이를테면 이교 같은 것은 외적이기 때문에 보다 통속적이다 . 그러나 그것들은 지식인에게는 맞지 않는다 . 순수하게 지적인 종교는 지식인에게는 적합할 것이나 대중에게는 소용이 없다 . 오직 그리스도교만이 외적인 것과 내적인 것을 겸비하고 있으므로 , 모든 이에게 적합하다 . 그것은 대중을 내적인 것으로 끌어올리고 오만한 자를 외적인 것으로 끌어내린다 . 이들 두 가지가 없으면 완전하지 않다 . 왜냐하면 대중은 형식에서 정신을 이해하여야 하고 , 지식인은 그들의 정신을 형식에 복종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

 

252

…왜냐하면 자신을 오해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 우리는 정신적인 것과 마찬가지로 자동적인 것이다 . 그리고 여기서 사람을 설득하는 도구는 단순히 논증만이 아니라는 것이 생각난다 . 세상에 논증되는 사물이란 얼마나 적은 것인가 ! 증거는 정신을 설득할 따름이다 . 습관이야말로 가장 유력하고 가장 신뢰할 증거를 이룬다 . 정신을 모르는 사이에 유인하는 자동작용을 조종하는 것은 습관이다 . 내일이 오리라 , 우리가 죽으리라는 것을 누가 논증했을 것인가 ? 그러나 그 이상으로 믿어져 있는 일이 있을까 ? 그러므로 그런 것을 우리로 하여금 믿도록 하여 주고 있는 것은 습관이다 . 습관은 많은 그리스도교 신자를 만들고 , 많은 투르크인 ․ 이교도 ․ 직공 ․ 병사 등을 만든다 ( 세례 받을 때 신앙을 얻는다는 것은 투르크인보다도 그리스도교도 중에 더 많다 ) .

요컨대 일단 정신이 진리의 소재를 알게 되면 시시각각 도망치려는 이 신앙을 우리에게 뿌려 주고 침투시키기 위해서 습관의 원조를 받아야 한다 . 증거를 항상 눈앞에 놓는 것은 너무도 시끄럽기 때문이다 . 보다 더 용이한 신앙 , 즉 습관적인 신앙을 얻어야 한다 . 그것은 무리 없이 기교 없이 논의 없이 우리로 하여금 당해 사물을 믿게 하고 우리의 일체의 능력을 이 신앙으로 향하게 하고 이렇게 해서 우리의 혼을 자연히 거기에 낙착시킨다 . 인간이 내적 확신의 힘에 의해서만 믿었다 하더라도 자동작용이 그 반대의 사물을 믿게 하는 편에 기울인다면 그것은 충분하지 않다 . 그러므로 우리는 두 개의 부분으로 하여금 믿게 하여야 한다 . 정신으로 하여금 일생에 한 번만 보면 충분한 것 같은 이유에 의해 믿게 하고 , 자동작용으로 하여금 습관에 의해 또 반대쪽에 기울지 않도록 하여 믿게끔 하여야 한다 . Inclina Cor meum , Deus ( 신이여 , 나의 마음을 기울이게 하소서 ) .

이성은 서서히 여러 가지 견해를 가지고 많은 원리에 의거하여 움직이는 것이지만 , 그런 원리는 항상 현존하고 있어야 한다 . 왜냐하면 그런 원리가 모두 현존해 있지 않으면 이성은 항상 잠자거나 찬란하기 때문이다 . 직관은 그렇게는 움직이지 않는다 . 그것은 일순간에 움직이고 항상 움직이려고 준비하고 있다 .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을 직관 속에 놓아야 한다 . 그렇지 않으면 그는 항상 이 동요를 면하지 못하리라 .

  253

253

두 가지 도를 넘는 행위 . 이성을 배제하는 것 , 이성만을 용인하는 것 .

 

254

너무나 유순하다는 이유로 남을 책하지 않으면 안 될 경우란 드물지 않다 . 그것은 불신과 마찬가지로 자연적인 악덕이고 또 유해하다 . 미신 .

 

255

신앙과 미신은 다르다 .

신앙을 미신이 되기까지 고수하는 것은 신앙을 파괴하는 것이다 .

이단자들은 우리가 이 미신적 복종에 빠져 있다고 하여 비난한다 . 이것은 그들이… 우리를 비난하고 있는 바를 행하는 것이다 .

성찬의 공물에는 아무것도 인지할 수 없다고 하여 그것을 믿지 않는 불신 .

여러 명제를 믿는 미신 . 신앙 등등 .

 

256

참다운 그리스도교 신자는 적다고 , 신앙에 관해서조차 나는 말한다 . 믿고 있는 분들은 많지만 미신에 의해서이다 . 믿고 있지 않는 이들도 많지만 이는 자의에 의해서이다 . 양자 간에 있는 자는 적다 .

나는 참다운 습관적 경건에 살고 있는 사람들과 심정의 직관에서 믿고 있는 모든 사람들을 이 속에 포함시키지 않는다 .

 

257

세상에는 세 종류의 사람들이 있을 뿐이다 . 첫째는 신을 찾아내고 이에 봉사하고 있는 이들 . 둘째 신을 구하려고 애쓰면서 발견하지 못한 이들 , 셋째는 신을 구하지도 않고 발견하지도 않고 살고 있는 이들 . 첫째 종류의 사람들은 도리에 적합하여 행복하고 , 셋째 종류의 사람들은 도리 에 어긋나 불행하며 , 둘째 종류의 사람들은 불행하지만 도리에 부합한다 .

 

258

Unus quisque sibi Deum fingit ( 사람은 제각기의 신을 만든다 ) .

혐오 .

 

259

보통 사람들은 생각하고 싶지 않은 것을 생각하지 않고서 견디어낼 수 있는 것이다 . 「 메시아에 관한 장을 생각하지 말라 」 라고 유태인은 그 자손에게 말했다 . 우리 시대의 사람들도 때때로 같은 일을 한다 . 그렇게 함으로써 허위의 종교는 물론 참다운 종교도 많은 사람에게 유지되어 온 것이다 .

그러나 세상에는 어떻게 하여서도 사고의 방해를 받지 않는 사람들 , 오히려 금지되면 금지될수록 사고하는 사람들이 있다 . 그들은 허위의 종교를 버리고 만다 . 또 확고한 논거를 발견하지 못하는 한 참다운 종교도 버리고 만다 .

 

260

그들은 군중 속에 숨어 다수의 힘을 믿는다 . 소동 .

권위 = 어떤 사물을 남으로부터 들었다는 것을 당신의 신념의 기준으로 삼지 말고 오히려 그것을 전혀 듣지 않은 것 같은 위치에 자신을 놓지 않고서는 아무것도 믿지 않도록 되어야 한다 .

당신으로 하여금 믿게 하는 것은 , 당신 자신에 대한 당신의 동의이고 당신의 이성의 부동의 소리라야만 하며 타인의 것이어서는 안 된다 .

믿는다는 것은 이렇게도 중대한 일이다 . 백 개의 모순도 진실도 될 수 있을 것이다 .

만일 고대성 ( 古代性 ) 이 신앙의 기준이었다고 하면 고대인에게는 기준이 없었을 것인가 ? 만일 만인의 동의가 「 신앙의 기준이라면 」 인류가 멸망한 경우에는 ?

허위의 겸손 , 오만 .

막을 올려라 ! 믿든가 거부하든가 의심하든가 하여야 하는 것이라면 당신의 시도는 무의미할 것이다 . 그러면 우리는 기준을 가지고 있지 않는 것인가 ? 우리는 동물에 관해 그들이 하여야 할 것을 하고 있다고 판단한다 . 인간을 판단하는 기준이란 없을까 ?

인간으로서 거부하고 믿고 올바르게 의심하는 것은 말 ( 馬 ) 로 달음질치는 것과 마찬가지다 .

죄를 범한 사람들의 형벌 , 과오 .

 

261

진리를 사랑하지 않는 이들은 거기에 대해 이론이 있다든가 , 많은 이들이 그것을 부인한다든가 하는 것을 구실로 삼는다 . 그런데 그들의 오류는 그들이 진리 또는 자애를 좋아하지 않는 데서만 유래한다 . 따라서 그런 것은 변명이 되지 않는다 .

 

262

미신 = 그리고 사욕 .

불안 = 그리고 악한 생각 .

나쁜 공포 .

사람이 신을 믿는 데서 생기는 것이 아니고 신이 있는지 없는지를 의심하는 데서 생기는 공포 . 좋은 공포는 신앙에서 생겨나고 , 허위의 공포는 의혹에서 생긴다 . 좋은 공포는 신앙에서 생겨나는 까닭으로 또 자신이 믿는 신에다 희망을 두는 까닭으로 희망과 결부된다 . 나쁜 공포는 자기가 믿지 않는 신을 두려워하니까 절망과 결부된다 . 하나는 신을 잃어버릴까봐 두려워하고 다른 하나는 신을 발견할까봐 두려워한다 .

 

263

“기적을 보게 되면 나의 신앙은 강해질 터인데”라고 사람들은 말한다 .

사람들은 기적을 보지 않았을 때에 한해서 그렇게 말한다 . 대체 이유라는 것은 멀리서 바라보면 우리 시야의 끝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 그러나 거기에 도달하면 그 앞을 바라보려고 하게 된다 . 우리 정신의 거침없는 말을 멈출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다 . 세상에는 어떤 예외를 가지고 있지 않는 규칙은 없고 , 또 어떤 결함이 있는 측면을 가지고 있지 않는 일반적 진리도 없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 그것은 절대로 보편적이 아니라고 말하기만 하면 우리는 현재의 문제에 예외를 적용하든가 “또 그것은 항상 진리라고는 할 수 없다 . 그러니 그것이 진리가 아닌 경우도 있을 수 있다”라고 충분히 말할 수 있다 . 단지 남아 있는 것은 현재의 경우가 그 예외라는 것을 표시하는 것뿐이다 . 그리고 언젠가 그것이 발견되지 않으면 우리는 대단히 못난 , 그리고 불행한 자가 되고 말 것이다 .

 

264

사람은 매일 먹는 것이나 잠자는 것에 권태를 느끼지 않는다 . 그것은 굶주림과 졸음이 재생하기 때문이다 . 그렇지 않으면 사람은 그것들에 대해 권태를 느끼게 될 것이다 . 이와 같이 영적인 것에 대한 굶주림이 없으면 사람은 그것에 권태를 느끼게 될 것이다 . 정의에의 굶주림 , 제 8 의 지복 ( 至福 ) .



265

신앙은 확실히 감성이 말하지 않는 바를 말한다 . 그러나 감성이 보는 바와 반대의 것을 말하지 않는다 . 그것은 감성 이상이지만 감성에 반하는 것은 아니다 .

 

266

망원경은 지난날의 철학자들에게는 존재하지 않았던 별을 얼마나 많이 우리로 하여금 발견하게 하여 주었는가 . 사람은 성서에 별이 극히 많다고 기술되어 있는 것을 분명히 조소하여 “우리가 알고 있는 한 1,022 개밖에 없다”라고 말한다 .

지상에는 풀이 있다 . 우리에게는 그것이 보인다 — 달에서는 보이지 않을 것이다 — 그리고 그 풀 위에는 털이 있고 그 털 속에는 미소 동물이 있다 . 그러나 그 이상 아무것도 없다 — 아아 ! 불손한 사람들이여 ! 화합물은 원소로 구성되어 있고 , 원소는 아무것으로도 구성되어 있지 않다 . 아아 ! 불손한 사람들이여 . 그것이 미묘한 점이다 — 자기 눈에 띠지 않는 것의 존재를 운운할 바 아니다 — 그러니까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이야기해도 좋지만 그들과 같이 생각해서는 안 된다 .

 

267

이성의 최후의 일보는 이성을 초월하는 것이 무수하게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 그것을 인정하는 데까지 도달할 수 없다면 , 이성은 박약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

자연적인 사물이 이성을 초월하고 있다면 초자연적인 사물은 무엇이라 말할 것인가 .

 

268

복 종   의심하여야 할 때 의심하고 , 확신하여야 할 때 확신하고 , 복종하여야 할 때에는 복종하여야 한다 . 그렇게 하지 않는 사람은 이성의 힘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 세상에는 이들 세 개의 원리에 대해 과오를 범하는 자가 있어 논증이 무엇인가를 모르고 모든 것을 논증할 수 있다고 확신하든가 복종하여야 될 경우를 모르고 , 모든 것을 의심하든가 판단하여야 될 경우를 모르고 모든 것에 복종하곤 한다 .

 

269

이성의 복종과 행사 속에 참다운 그리스도교가 성립한다 .

 

270

성 아우구스티누스 , 이성은 자기가 복종하여야 할 경우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결코 복종하지 않을 것이다 . 그러므로 이성이 복종하여야 한다고 인정할 때 복종하는 것은 정당한 것이다 .

 

271

지혜는 우리로 하여금 어린애로 돌아가게 한다 . Nis ieffi ciamini sicut parvuli ( 어린애처럼 되지 않으면 ) .

 

272

이런 이성의 부인처럼 이성에 적합한 것은 없다 .

 

273

만일 사람이 만사를 직관에 복종시킨다면 우리의 종교에는 신비적 ․ 초자연적인 것이 없어질 것이다 . 만일 사람이 이성의 제 원리에 어긋난다면 우리의 종교는 불합리하고 우스운 것이 되고 말 것이다 .

 

274

우리의 모든 추리는 직관에 양보하고 만다 .

그러나 기분은 직관에 흡사하면서도 반대되는 것이다 . 그래서 사람은 두 가지 대립물을 식별할 수가 없다 . 어떤 자는 자기의 직관을 기분이라고 말하고 , 다른 어떤 자는 자기의 기분을 직관이라고 말한다 . 하나의 기준이 필요하다 . 이성은 스스로를 「 기준 」 으로 내놓지만 , 모든 방면으로 굴하기 쉽다 . 그래서 기준이란 없는 것이 되고 만다 .

 

275

사람들은 때때로 자기의 상상을 자기의 심정으로 간주한다 . 그리고 회개하려고 생각하자마자 회개했다고 믿는다 .

 

276

드 로아네스 씨는 말했다 . “이유는 후에 알게 되는 것이지만 , 어떤 사물이 처음에는 이유도 모르게 나를 유쾌하게 하고 또는 불쾌하게 한다 . 그런데 그것이 나를 불쾌하게 하는 것은 후에야 겨우 알게 되는 그 이유에 의해서이다 . ” 그러나 내 생각으로는 , 사람은 후에 알게 되는 그 이유에 의해 불쾌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불쾌하게 되기 때문에 그런 이유를 발견하게 되는 것 같다 .

 

277

심정은 이성이 알지 못하는 그 자신의 도리를 가지고 있다 . 사람은 많은 사물로 말미암아 그것을 알고 있다 . 심정이 자연히 보편적 존재를 사랑하든가 , 자연히 자신을 사람하든가 하는 것은 거기에 얼마나 탐닉하고 있는가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고 , 또 심정이 전자 ( 보편적 존재 ) 나 후자 ( 자기 ) 에 대해 완강해지는 것은 스스로의 선택에 의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 당신들은 전자를 버리고 후자를 택했다 . 당신들이 자기를 사랑하는 것은 이성 때문인가 ?

 

278

신을 직감하는 것은 심정이고 이성은 아니다 . 이것이 즉 신앙이다 . 이성이 아니고 심정에 직감되는 신 .

 

279

신앙은 신의 선물이다 . 신앙은 추리의 선물이라고 우리가 말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말라 . 다른 여러 종교는 그들의 신앙에 관해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 그런 종교들은 신앙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추리만으로 족하다고 말하였지만 , 추리는 결코 거기까지 인도하지는 못한다 .

 

280

신의 인식에서부터 신을 사랑하게 되는 데까지는 얼마나 먼 거리가 있는 것일까 ?

 

281

심정 • 본능 • 원리 .

 

282

우리는 이성에 의해서만이 아니라 심정에 의해서도 진리를 인식한다 . 이 후자의 길을 통해서 우리는 기본적 진리를 안다 . 그러므로 그에 관여하지 않는 추리가 그들 제 원리를 반박하려고 시도하여도 쓸데없는 일이다 . 이 반박을 유일의 목적으로 삼고 있는 피론학파들은 무익한 노력을 하고 있는 셈이다 . 우리는 꿈꾸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다 . 그것을 이성에 의해 증명한다는 것은 우리로서는 불가능하다고 하더라도 , 이 무능력은 우리의 이성의 박약을 결론할 따름이고 그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우리의 모든 인식의 불확실을 결론하는 것은 아니다 . 왜냐하면 공간 • 시간 • 운동 • 수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 같은 기본적인 원리의 인식은 추리가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어떤 인식에도 못하지 않게 견고하기 때문이다 . 그리고 이성이 의지하여야 하고 , 그 일체의 논리를 바탕삼아야 할 것은 바로 이 심정과 본능의 인식 위에서이다 ( 심정은 공간에 3 차원이 있고 수가 무한하다는 것을 직감한다 . 다음에는 이성이 한쪽이 다른 쪽의 두 곱이 되는 두 개의 평방수가 없다는 것을 논증한다 . 원리는 직감되고 명제는 결론된다 . 그리고 방법은 다르지만 모든 것이 확실히 행해지고 있다 ) .

  그러므로 이성이 심정을 향해 기본적 원리에 승리하고 싶으니 그것들을 증명해 주면 좋겠다고 요구하는 것은, 심정이 이성에 대해 후자가 논증하는 모든 명제를 수락하고 싶으니 그것들을 직관시켜 주면 좋겠다고 요구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무익하고 우스운 것이다.

  이 무능력은 만사를 판단하려는 이성을 겸손하게 하는 데 소용이 있을 따름이고 , 우리를 가르쳐 줄 수 있는 것은 이성만이 아니므로 우리의 확실성을 반박하는 데는 쓸모가 없다 . 오히려 우리가 원하고 싶은 것은 우리가 반대로 이성을 필요로 하지 않고 만사를 본능과 직관에 의해 알 수 있게 되는 것이다 . 그러나 자연은 우리에게 이 행복을 거절했다 . 자연은 반대로 이런 종류의 인식을 근소 ( 僅少 ) 하게 밖에 주지 않았다 . 그 외의 모든 것은 추리에 의하지 않으면 알 수가 없다 .

그러므로 신으로부터 심정의 직관을 통해 종교를 부여받은 사람들은 극히 행복하고 정당하게 납득되어 있는 셈이다 . 그러나 종교를 가지고 있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신이 그들에게 심정의 직관에 의해 종교를 부여하여 줄 것을 기대하면서도 , 우리의 추리에 의해서만 겨우 그것을 부여하여 줄 수 있을 따름이다 . 이 심정의 직관이 없으면 신앙은 인간적인 것밖에 되지 않을 것이고 영혼의 구원을 위해서는 무익한 것이다 .

 

283

질서 , 성서에는 질서가 없다는 비난에 대해 = 심정은 그 자신의 질서를 가지고 있다 . 정신에는 그 자신의 질서가 있고 , 그것은 원리와 논증이지만 심정에는 그것과 다른 것이 있다 . 사랑은 사랑의 이유를 순서로 나열하여 본다 하더라도 자기가 사랑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증명할 수는 없다 . 그것은 웃음거리가 되고 말 것이다 .

예수 그리스도와 성 바로로는 정신의 질서가 아니라 사랑의 질서를 가지고 있다. 그들은 따스하게 ( 포옹해 주려고 하지 ) 가르쳐 주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도 마찬가지다. 이 질서는 개개의 점에 있어서는 주로 지엽적인 것으로 성립되어 있지만, 이 지엽적인 것이 항상 목적을 표시하도록 목적에 관련되어 있는 것이다.

 

284

단순한 인간들이 추리하지 않고 신앙하는 것을 보고 놀라지 말라 . 신은 그들에게 신 자신에의 사랑과 그들 자신에의 혐오를 부여하여 주신 것이다 . 신이 그들의 마음을 신앙으로 이끌었다 . 만일 신이 마음을 ( 신앙에 ) 이끌지 않았었더라면 인간은 유효한 신뢰와 신앙을 가지고서 믿게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 또 신이 마음을 이끌어 가자마자 곧 믿게 될 것이다 . 이것은 다윗이 잘 알고 있었던 일이다 . Inclina cor meum . Deus, in ltestimonia twi ( 신이여 , 나의 마음을…에 쏠리게 하여 주소서 ) .

 

285

종교는 모든 종류의 사람들에게 적응한다. 어떤 이들은 단순히 그 조직에만 유의하지만, 종교란 그 조직만으로도 십분 그 진리성을 증명하는 데 족하다. 다른 어떤 이들은 사도들에게까지 찾아 올라간다. 가장 학식이 있는 이들은 세계의 시초에까지 찾아 올라간다. 천사들은 더욱 잘, 그리고 더 옛날부터 그것을 보고 있다.

 

286

구 • 신약성서를 읽지 않고 믿고 있는 이들은 완전히 성스러운 내적 소질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고 , 우리의 종교에 관해 그들이 듣는 바가 거기에 합치하고 있는 까닭이다 . 그들은 신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것을 직감한다 . 신만을 사랑하고자 하고 자기 자신만을 증오하고자 한다 . 그들은 자기 자신에게는 그런 힘이 없다는 것을 느낀다 . 신에 도달할 수가 없다고 생각하여 신이 자기를 찾아오지 않는 한 신과 아무런 접촉을 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 또 그들은 우리의 종교가 신만을 사랑하고 자기 자신만을 미워하게 된다는 주장과 모든 인간이 타락하여 신에 도달할 수가 없으므로 , 신 자체가 인간이 되어 우리가 화합하고자 한다는 주장을 이해한다 . 이런 소질을 마음속에 가지고 , 자기의 의무와 자기의 무능력을 이렇게도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을 설득하기 위해서는 이 이상 아무것도 필요 없는 것이다 .

 

287

예언과 증거를 알지 못하고 그리스도교가 된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은 그런 것을 알고 있는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종교를 잘 판단한다 . 후자가 이지에 의해 그것을 판단하는 것처럼 전자는 심정에 의해 그것을 판단한다 . 그들을 신앙으로 이끌어간 것은 신 자신이다 . 그러므로 그들은 극히 유효하게 납득한다 .

증거 없이 믿고 있는 이들 그리스도교도 중의 한 사람이 자기에 관해 마찬가지로 이야기하려는 불신자를 설득할 수 없으리라는 것은 나도 십분 인정한다 . 그러나 그런 신자는 자기 자신으로서 그것을 증명할 수가 없다 하더라도 , 신으로부터의 영감을 진실로 받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은 종교의 증거를 알고 있는 사람들이 별로 곤란 없이 증명할 수 있을 것이다 .

왜냐하면 신은 그 예언 ( 그것은 틀림없이 예언이다 )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치세에는 신의 영을 모든 국민에게 전파하고 교회의 아들 • 딸 • 어 린애들은 예언하게 되리라로 말씀하신 고로 , 신의 영이 그들 위에 있고 다른 사람들 위에 있지 않다는 것은 의심할 바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

 

  288

신이 스스로 몸을 감추신 것을 통탄하는 대신 , 신이 자신을 이따금 나타내는 데 대해 사의를 표해야 할 것이다 . 그리고 이렇게도 거룩하신 신을 알 만한 자격이 없는 오만한 지식인들에게 신이 자신을 나타내게 하지 않은 데 대해 사의를 표하여야 한다 .

두 종류의 인간들만이 신을 알고 있다 . 겸손한 마음을 가지고 높건 낮건 어느 정도의 이지를 가지고 있다 하더라고 , 겸손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 , 또 어떠한 방해가 있더라도 진리를 보는 데 충분한 이지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 .

 

289

증거 = ① 그리스도교 , 극히 강하고 극히 우아하고 그러면서도 완전히 자연에 반하여 제정된 그 조직 자체에 의해서 , ② 그리스도교 정신의 청정 ( 淸淨 ) ․ 고상 ․ 겸손 , ③ 성서의 기적 , ④ 특히 예수 그리스도 , ⑤ 특히 사도들 , ⑥ 특히 모세와 예언자들 , ⑦ 유대민족 , ⑧ 예언 , ⑨ 영속성 , 어떤 종교에도 영속성이 없다 , ⑩ 일체를 해명하는 교리 , ⑪ 그 율법의 신성 , ⑫ 세계의 관리에 의해 .

이상의 것을 알아두고 인생이란 무엇인가 , 이 종교란 무엇인가를 생각하고 그에 따라가고자 하는 기분이 마음에 생긴다면 , 그것을 거절할 이유가 없음이 분명하다 . 또 그것을 따라가는 사람들을 비웃을 이유가 아무데도 없다는 것 역시 확실하다 .

 

290

종교의 증거   도덕 • 교리 • 기적 • 예언 • 표징 .

 

 

 

 

 

 

제 5 편 정의와 현실의 이유

 

 

 291

「 부정에 관하여 」 라는 편지 속에서 연장자가 전부를 소유한다는 것이 얼마나 우스운 일인가에 대해 언급한다 . 『 친구여 , 당신은 산의 이편에서 탄생했다 . 그러니까 당신의 형이 전부를 소유한다는 것은 정당하다 』 , 『 어째서 당신은 나를 죽이려는가 ? 』

 

292

그는 강의 저편에 살고 있다 .

 

293

「 어째서 당신은 나를 죽이려는가 ? — 무엇이라고 ! 당신은 강의 건너편에 살고 있지 않은가 ? 친구여 , 만일 당신이 이편에 살고 있었으면 나는 살인자가 될 것이요 , 당신을 이렇게 해서 죽이는 것은 부정이 되고 말 것이다 . 그러나 당신이 저편에 살고 있으니까 나는 용사이고 내가 하는 것은 정의롭다 . 」

 

 

294

사람은 그가 통치하려는 세계의 기구를 어떤 토대 위에다 두려는 것인가 ? 각자의 자의에다 두려는 것인가 ? 얼마나 혼란스러울까 ? 정의에다 두려는 것인가 ? 인간은 그것을 모른다 .

만일 인간이 정의라는 것을 알고 있다면 확실히 그는 사람들 사이에 가장 널리 통용되고 있는 격언 , 즉 각자는 마땅히 자국의 풍습에 따라가야 한다는 격언을 만들어 내지는 않았을 것이다 . 참다운 공정의 광휘가 모든 민중을 귀순시켰을 것이요 , 입법자들은 이 불변의 정의 대신 페르시아 사람이나 , 독일인의 공상이나 자의를 표본으로 삼지 않았을 것이다 . 기후가 변화함에 따라 그 성질을 바꾸는 것 같은 정의나 부정의를 보는 대신 지상의 모든 국가와 모든 시대를 통해 불변의 정의가 수립되는 것을 보았을 것이다 . 위도가 3 도 올라가면 모든 법률이 뒤엎어지고 , 어떤 자오선이 진리를 결정하고 , 수년간 소유하고 있는 중에 근본적인 법률이 변하고 , 권리에도 그 기한이 있고 , 토성이 사자궁에 들어가면 이러이러한 범죄가 일어나는 것을 가르쳐 준다고 한다 . 강 하나에 의해 달라진다는 것은 얼마나 우스운 정의인가 ! 피레네 산의 이쪽에서는 진리인 것이 저쪽에서는 오류가 되다니 .

그들은 공언하기를 정의는 그런 습관 속에 있는 것이 아니고 , 모든 국가에서 인정되어 있는 자연법 속에 있다고 한다 . 만일 인위법의 종자를 뿌려놓은 무모한 우연이 보편적인 법률의 하나에라도 마주치게 된다면 , 그들은 확실히 그것을 강경히 주장할 수 있었을 것이다 . 그러나 우습게도 인간의 자의는 너무도 다종다양하여 그런 법률이란 하나도 존재하지 않는다 .

절도 , 불륜 , 자식 살해 , 부친 살해 등은 모두 덕행의 목록 속에 들어가 있었던 일도 있다 . 어떤 이가 강 건너편에 살고 있다고 해서 , 또 그의 영주가 나의 영주와 싸웠다고 해서 나는 별로 그와 다투지도 않았는데 그가 나를 죽일 권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처럼 우스운 일이 있을까 ?

세상에는 물론 자연법이라는 것이 있다 . 그러나 이 훌륭한 이성이 타락함과 동시에 일체의 것이 타락하고 말았다 . Nihil amplius nostrum est ; quod nostrum dicimus , artis est ( 세상에 우리의 것이라고는 없다 . 우리의 것이라는 것은 습관이 만들어 낸 것이다 ) . Ex senatus consultis et plebiscitis crimina axercentur ( 원로원의 결의와 국민투표에 의해 죄는 이루어진다 ) . Ut olim vitiis , sic numc legibus labovancus ( 옛날 우리는 악덕 때문에 고통을 받았지만 , 현재는 법률 때문에 고통을 받고 있다 ) .

이런 혼란으로 말미암아 어떤 이는 정의의 본질은 입법자의 권위라고 말하고 , 다른 어떤 이는 군주의 편의라고 말하고 , 또 다른 어떤 이는 현행의 습관이라고 말한다 . 그리고 이 최후의 것이 가장 확실하다 . 이성만을 따라가면 아무것도 그 자신으로서 올바른 것이 없다 . 모든 것이 시간과 같이 변동한다 . 습관이란 그것이 수락되어 있다는 단순히 그 이유만으로도 완전히 공정한 것이 된다 . 이것이 그 권위의 신비적 기초이다 . 누구나 습관을 그 기원까지 따져 올라가면 , 그것은 소멸하고 만다 . 과오를 교정한다는 이들 법률처럼 과오에 빠지기 쉬운 것은 없다 . 법률이 정의라는 이유로서 정의에 복종하는 사람은 자신이 상상하고 있는 정의에 복종하고 있는 것이지 , 법률의 본질에 대해 복종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 법률은 그 자신 완전한 잡다하게 모인 것이다 . 법률은 법률이지 그 이상 아무것도 아니다 . 누구나 그 유래를 검토해 보려고 하면 그것이 극히 취약하고 경솔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

그리고 만약 그 사람이 인간의 상상력의 불가사의를 생각하는 습관이 없는 사람이라면 , 그 법률이 1 세기에 걸쳐 이렇게도 커다란 위엄과 존경을 얻게 된 데 대해 놀라게 될 것이다 . 국가에 반항하고 이를 뒤집어엎는 길은 기성 습관의 군원까지 탐구하고 그것이 권위와 정의를 결여하고 있음을 지적하여 동요시키고 마는 데 있다 . 「 부정한 습관에 의해 폐지 된 국가의 근본적 • 원시적 법률에 돌아가야 한다 」 라고 사람들은 말하지만 이것은 틀림없이 모든 것을 파멸시키고 못된 말장난이다 . 그런 저울에 걸어 보아서 옳은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을 것이다 . 그런데 민중이란 그런 의논에 귀를 기울이기 좋아한다 . 그들은 속박이 있음을 알게 되는 차제로 그것을 제거한다 . 또 고위급의 사람들은 그 파괴에 의해 그리고 기성 습관의 호기심적인 검토자들의 파멸에 의해 스스로 이득을 얻는다 . 그런 까닭으로 입법자 중에서 가장 현명한 이는 말하기를 , 백성의 행복을 위해서 때때로 그들을 기만해야 한다고 했다 .

또 다른 훌륭한 정치가는 말하기를 , Cum veritatem qua liberetur igoret , expedit quod fallatur ( 그들은 자기를 구원해 주는 진리를 모르고 있으니까 기만당하는 편이 낫다 ) 고 했다 . 그들로 하여금 찬탈의 사실을 감득하게 해서는 안 된다 . 그것은 옛날에는 무리로 채용되었으나 현재는 정당한 것이 되고 말았다 . 만일 그것을 얼마 안 가서 폐지하려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그것을 진정하게 영원한 것으로 간주하고 그 기원을 감추어둘 필요가 있다 .

 

295

나의 것 , 당신의 것 = 개는 나의 것이다” , “ 저기는 내가 해를 쪼이곤 하는 곳이다”라고 이 불쌍한 애들은 말했다 . 여기 지상에 있어서의 찬탈의 기원과 상징이 있다 .

 

296

전쟁으로 많은 사람을 죽이고 허다한 스페인 사람을 사형에 처하여야 할 것인가 그렇지 않을 것인가를 판단한다는 문제가 생긴 경우 , 그것을 판단하는 것은 오직 한 사람 , 그것도 거기에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 이것은 공평한 제 3 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

 

297

Veris juris ( 진실한 법률 ) — 우리는 벌써 그것 ( 진실한 법률 ) 을 가지고 있지 않다 . 만약 가지고 있었다면 자국의 풍습에 따르는 것을 정의의 기준으로 삼지는 않았을 것이다 .

거기서 인간은 정의를 찾아볼 수가 없었고 , 힘이나 그 외의 것을 보게

되었다 .

 

298

정의 , 힘 = 올바른 자가 복종을 받는 것은 정당하고 , 가장 강한 자가 복종을 받는 것은 필연적이다 . 힘없는 정의는 무효이고 , 정의 없는 힘은 압제이다 . 힘없는 정의는 반항을 초래한다 . 왜냐하면 세상에는 항상 악인이 있기 때문이다 . 정의가 없는 힘은 공격을 받는다 . 그러므로 정의와 힘은 결부시켜 놓아야 한다 . 또 그러기 위해서는 정의로운 자를 강하게 하든가 강한 자를 정의롭게 하여야 한다 .

정의는 논쟁되기 쉽고 , 힘은 용인되기 쉬우면서도 논쟁되지 않는다 . 그래서 인간은 정의에다 힘을 부여할 수가 없었다 . 그도 그럴 것이 , 힘은 정의에 반항하여 정의는 부정이고 자기야말로 정의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 이리하여 인간은 옳은 것을 강하게 할 수가 없었으므로 강한 것을 정의로 하고 말았다 .

 

299

유일의 보편적 기준은 보통 사물에 대해서는 국법이고 , 이여의 사물에 대해서는 다수성이다 . 어디서 그런 일이 생겨나는 것인가 ? 다수성 속에 있는 힘에서이다 . 거기서 또 다른 힘을 가지고 있는 힘에서이다 . 거기서 또 다른 힘을 가지고 있는 국왕이 그 각료들의 다수성에 복종하지 않는 일도 생겨난다 .

확실히 재산의 평등이라는 것은 정의롭다 . 그러나 인간은 힘을 정의에 복종시킬 수가 없으므로 정의를 힘에 복종시켜 놓은 것이다 . 정의를 강하게 하지 못하고 힘을 정의라고 한 것이다 . 그것은 정의로운 것과 강한 것을 결부시켜 놓음으로써 최고의 선인 평화를 얻고자 하였기 때문이다 .

 

300

「 무장한 강자가 자기의 부를 가지고 있을 때 , 그가 가지고 있는 것은 안전하다 . 」

 

301

왜 사람은 다수에 복종하는 것인가 ? 다수에 더 많은 도리가 있기 때문인가 ? 아니다 더 많은 힘이 있기 때문이다 .

왜 사람은 낡은 법률이나 낡은 여론에 따라가는 것인가 ? 그것이 가장 건전하기 때문인가 ? 아니다 . 그것이 단일하고 우리로부터 다양성의 뿌리를 제거하여 주기 때문이다 .

 

302

…그것은 힘의 결과이지 습관의 결과는 아니다 . 왜냐하면 창조가 가능한 사람들은 소수이고 대다수는 추종하려고 할 따름이면서도 , 자기의 창조에 의해 영예를 추구하는 이들 창조자들에게 영예를 돌려주기를 거절하기 때문이다 . 그래서 만일 창조자들이 기어이 영예를 얻고자 창조하지 않은 사람들을 멸시하면 후자는 전자에게 조롱적인 이름을 뒤집어씌우고 전자를 지팡이로 때리려고 덤벼들지 모른다 . 그러므로 그런 재능에 대해서는 뽐내지 않든가 , 혹은 자기만이 만족을 느끼면 된다 .

 

303

이 세상의 지배자는 힘이지 여론은 아니다 — 그러나 여론은 힘을 사용하는 지배자이다 — 힘이 여론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 우리의 여론에 의하면 유약은 좋은 것으로 간주된다 . 왜 ? 줄 위에서 춤추려는 자는 한 사람뿐일 것이다 . 그러나 나는 줄 위에서 춤추는 것은 건전하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모아놓고 더욱 강한 일단을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이다 .

 

304

어떤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에 대한 존경을 이어 주는 끈은 대체로 부득이한 끈이다 . 왜냐하면 모든 사람들은 지배자가 되려고 하지만 전부가 그렇게 될 수는 없고 , 어떤 사람들만이 그렇게 되므로 세상에 여러 가지 계급이 생기기 때문이다 .

그런 계급이 발생하기 시작하는 것을 우리가 보고 있다고 가정하자 . 가장 강한 당파가 자기보다 약한 당파를 굴복시킬 때까지 싸움이 계속 되고 , 나중에 지배적인 당파가 생겨난다는 것은 확실한 일이다 . 그러나 일단 그것이 결정되면 지배자들은 투쟁의 계속을 원하지 않고 그들 수중에 있는 힘이 그들의 뜻대로 계승될 수 있는 제도를 설정한다 . 어떤 자들은 그것을 국민투표에다가 , 다른 자들은 그것을 세습이나 그 외의 것에 맡긴다 .

그리고 상상력이 그 역할을 다하기 시작하는 것은 여기부터이다 . 그때까지는 힘이 사실을 강요한다 . 그 후부터는 힘이 어떤 당파 , 예를 들면 , 프랑스에서는 귀족 , 스위스에서는 평민의 상상력에 의해서 자신을 보유한다 .

그러므로 사람이 그 존경심을 누군가에게 이어 주는 끈은 상상력의 끈이다 .

 

305

스위스 사람들은 귀족이라는 말을 들으면 기분 나쁘게 생각하고 , 중한 직위에 취임할 수 있는 자라는 판단을 받기 위해서 혈통이 평민이라는 것을 표방한다 .

 

306

공국 • 왕권 • 사법직은 ( 힘이 만사를 지배하고 있는 한 ) 현실적이고 필요한 까닭으로 어떤 시대 , 어떤 곳에도 존재한다 . 그러나 특정한 누구누구를 그것으로 만든다는 것은 자의에 지나지 않으니까 일정하지 않고 변동되기 쉽다 .

 

307

대법관은 위엄 있게 예복을 입고 있다 . 그것은 그의 지위가 실질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 왕은 그렇지 않다 . 그는 실력을 가지고 있으므로 상상력에 호소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 법관 • 의사들은 상상력에만 호소한다 .

 

308

왕은 근위병 • 악대 • 장교단 , 그 외 민중으로 하여금 스스로 존경과 경외심을 일으키게 하는 모든 것을 거느리고 있는 바를 보여주는 것이 관례가 되어 있으므로 , 그가 때때로 혼자서 그런 동반자 없이 있을 때에도 왕의 용모는 그 신하의 마음속에 존경과 경외심을 일으킨다 . 그도 그럴 것이 , 사람은 그 관념 속에서 개인으로서의 왕과 , 늘 관련되어 생각되곤 하는 종자들을 분리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 그런 관계에서 그런 결과가 생기는 것임을 모르는 세상 사람들은 , 그것이 생래의 힘에서 유래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거기서 다음과 같은 말이 생겨난 것이다 . 「 신성의 특징이 그의 용모에 각인되어 있다 . 운운 . 」

 

309

정의 = 습관은 쾌적함을 만들어 놓는 것처럼 , 또 정의도 만들어 놓는다 .

 

310

왕과 폭군 = 나도 나의 생각을 머릿속에 감추어 두리라 .

나는 여행할 때마다 조심하리라 .

제도의 위대 , 제도의 존경 .

위인의 즐거움은 백성을 행복하게 할 수 있다는 데 있다 .

부의 묘미를 탐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 . 힘의 묘미는 보호하는 데 있다 .

힘이 가면을 벗어 버릴 때 한 병사가 최고법원장의 각모를 잡아당겨 창밖으로 집어던질 때 .

 

311

여론과 상상력에 근거하는 권력은 어떤 기간 통치하는데 , 그런 권력은 온화하고 자발적이다 . 힘에 근거하는 권력은 항상 통치한다 . 그러므로 여론은 이 세상의 여왕과 같은 것이지만 , 힘은 이 세상의 폭군이다 .

 

312

정의란 기성적인 것이다 . 그러므로 우리의 확정된 법률은 모두 단순히 그것이 확정되어 있는 까닭으로 아무런 검토를 받지 않고서도 반드시 정의로 간주되어야 한다 .

 

313

건전한 민중의 의견   가장 나쁜 것은 내전이다 . 만일 사람이 논공행상을 원하면 내란이 일어날 것은 확실하다 . 왜냐하면 모든 이들이 , 자기는 논공행상을 받을 필요가 있다고 주장할 터이니까 . 기득의 권리에 의해서 세습하는 자로부터 생겨날지도 모르는 폐단은 그렇게 중대하지 않고 확실하지도 않다 .

 

314

신은 만물을 자신을 위해 창조했고 , 고통과 행복의 능력을 자신을 위해 부여하셨다 .

당신은 그것을 신에게 돌려 줄 수도 있고 자기 자신에 돌려 줄 수도 있다 . 신에 돌려주면 복음이 기준이 된다 . 자기 자신에게 돌려주면 당신이 신의 지위를 점하는 셈이 된다 . 신이 그 권능 속에 있는 사랑의 복을 신 자신에게 구하는 자애심에 가득 찬 사람들에 둘러싸여 있는 것처럼… 그러므로 당신은 자기가 사욕의 왕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인식하며 또 알고서 야욕의 길을 택하기로 한다 .

 

315

현실의 이유   비단옷을 입고 7, 8 명의 동행인을 데리고 다니는 사람을 나더러 존경하지 말라고 하는 인간이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 그렇지만 그 사람은 내가 경례를 하지 않으면 나를 채찍으로 때릴 것이다 . 그런 옷은 일종의 힘이다 . 그것은 훌륭한 마구를 달고 있는 말이 , 달지 않은 말에 대한 경우와 꼭 마찬가지다 . 몽테뉴가 거기에 어떤 상위가 있는가를 인정하지 않고 남이 상위를 인정하면 감탄해서 그 상위의 이유를 물어 보았다는 것은 우스운 일이다 . “참으로 어째서 이런 일이…”라고 그는 말했다 .

 

316

건전한 민중의 의견   성장을 한다는 것은 그다지 쓸데없는 것은 아니다 . 그것은 많은 사람들이 자기를 위해 일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까닭이다 . 그 이발을 가지고 사환이나 향료사 등을 데리고 있다는 것을 표 시하고 그 가슴장식 • 드리운 실 • 장식줄 등에 의해… . 그런데 많은 사람 을 쓰고 있다는 것은 단순한 외견이나 허식은 아니다 . 부리는 사람이 많 을수록 그는 강한 것이다 . 호사한다는 것은 자기의 힘을 나타내는 것이다 .

 

317

존경이라는 것은 부자유한 생각을 가지는 것이다 . 이것은 얼핏 보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매우 정당한 것이다 . 왜냐하면 그것은 다음과 같이 말하는 셈이니까 . “만일 필요하다면 나는 자유롭지 않게 되겠소 . 현재 그것이 아무런 소용이 없을 때도 나도 그렇게 하고 있으니까요 . ” 그 뿐더러 존경은 귀인을 식별하는 데 도움을 준다 . 만일 존경이라는 것이 안락의자에 앉아 있는 것을 의미한다면 사람은 누구나 존경할 것이요 , 따라서 식별하려 하지도 않을 것이다 . 그러나 자신이 부자유해질 생각을 하게 되므로 사람은 잘 식별하게 된다 .

 

318

저 사람은 네 사람의 종을 데리고 있다 .

 

319

사람이 내적 특질에 의해서보다 외관에 의해서 남을 식별한다는 것은 얼마나 옳은 일인가 ? 우리 두 사람 중 누가 앞에 서야 할까 ? 누가 자리를 양보해 주어야 할까 ? 능력이 모자라는 자가 그렇게 하여야 되는가 ? 그러나 만일 내가 상대방과 마찬가지로 유능하다면 그에 관해 싸움이 일어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 상대방이 네 사람의 종을 데리고 있고 , 나는 한 사람밖에 데리고 있지 않으면 사태는 일목요연하다 . 그것은 세기만하면 족하다 . 양보해야 할 것은 바로 나다 . 만일 내가 거기에 이의를 말한다면 나의 편이 바보가 된다 . 이렇게 해서 우리는 평화를 보유하고 있다 . 이것이야말로 최대의 행복이다 .

 

320

사람들은 선장으로서 승객 중에 가장 가문이 높은 이를 택하지 않는다 .

 

320 의    1

세상에 있어서 가장 불합리한 것이 인간의 무질서 때문에 가장 합리적인 것이 되었다 . 일국의 통치자로서 왕비의 장자를 택하는 것처럼 도리에 어긋나는 일이 있을까 ? 사람들은 선장으로서 승객 중에서 가장 가문이 높은 이를 택하지 않는다 .

그런 법률은 웃음거리이고 부당하다 . 그러나 인간은 원래 우습고 부당한 존재이며 또 항상 그러하므로 이런 법률이 합리적이고 정당한 것이 되고 말았다 . 왜 ? 가장 유덕 유위한 자로서 사람들은 누구를 택할 것인가 ? 우리는 곧 완력 사태에 호소하게 될 것이다 . 각자가 자기 자신이야 말로 가장 유덕 유위한 인물이라고 고집하고 있기 때문이다 . 그러므로 이 자격은 어떤 이론도 품을 수 없는 것에 돌리는 편이 나을 것이다 . 그것이 왕의 적자이다 . 그렇게 하면 모든 것이 명백하고 이론의 여지가 없다 . 이성도 이 이상 더 잘할 수는 없다 . 왜냐하면 내란이야말로 최대의 화이기 때문이다 .

 

321

아이들은 그들의 친구가 존경되는 것을 보고 놀란다 .

 

322

귀족이란 얼마나 큰 이득을 을 보고 있는 셈인가 ? 그들은 18 세만 되면 다른 자들이 50 세나 되어야 겨우 얻을 수 있는 명성과 존경을 받고 좋은 신분이 된다 . 그것은 아무런 고생도 없이 30 년을 버는 셈이다 .

 

323

「 나 」 란 무엇인가 ?

어떤 이가 창에 걸터앉아 통행인을 바라보고 있을 때 내가 거기를 지나가고 있었다면 , 그는 나를 보기 위해서 거기 서 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 아니다 . 그는 나만을 특히 생각하고 있는 것이 아닐 터이니까 . 그러나 어떤 이가 아름다워야만 사랑하게 되는 자는 , 과연 그를 사랑하고 있는 것일까 ? 아니다 . 천연두가 그 사람을 죽이진 않고 그 아름다움만을 빼앗아간다면 그는 그 사람을 사랑하지 않게 될 터이니까 .

또 만일 사람들이 나의 판단력이나 기억력 때문에 나를 사랑하고 있다면 , 그들은 과연 나를 사랑하고 있는 셈인가 ? 아니다 . 나는 나의 그런 특질을 잃어버리고서도 나 자신을 잃어버리지 않고 있을 수가 있을 터이니까 . 그러면 이 「 나 」 라는 것이 육체 속에도 정신 속에도 없는 것이라면 도대체 어디에 있는 것인가 ? 또 멸망하여야 할 것이기 때문에 나를 이루고 있지 않는 이러한 특질을 위해서가 아니고 어떻게 육체나 정신을 사랑하는 것인가 사람들은 어떤 이의 정신의 본질을 그 속에 여하한 특질이 있건 간에 추상적으로 사랑할 수가 있을 것일까 ? 그런 것은 불가능 하고 또 부당하다 . 그렇다면 사랑은 결코 인간 그 자체를 사랑하지 않고 그 특질만을 사랑하고 있는 셈이다 .

그러므로 우리는 관위나 직무 때문에 존경되는 사람들을 멸시해서는 안 된다 . 사람은 그 빌려온 물건인 특질 때문에만 남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

 

324

민중은 대단히 건전한 의견을 가지고 있다 . 예를 들면 ,

1. 시와 노래보다도 심심풀이나 사냥을 택한 것 . 어설픈 학자는 그것을 조소하고 그에 관해 세속의 어리석음을 지적하고 잘난 척한다 . 그러나 어설픈 학자들은 파악할 수 없는 이유로 말미암아 민중은 정당한 것이다 .

2. 인간을 가문이나 재산 같은 외적인 것에 의해 구별한 것 . 세상 사람들은 또 그런 것이 얼마나 불합리한가를 지적하고 자랑한다 . 그러나 그것은 극히 정당한 것이다 ( 식인종은 어린 왕을 조소한다 ) .

3. 뺨을 얻어맞고 성을 내는 것 , 또 영예를 열심히 구하는 것 , 그러나 영예는 그에 따르는 다른 중요한 이익 때문에 대단히 소망되는 것이다 . 또 뺨을 얻어맞고서도 그것을 별로 개의하지 않는 인간은 모욕과 궁핍 때문에 압도당하고 말 것이다 .

4. 불확실한 것을 위해 일하는 것 , 항해하는 것 , 판자 위를 건너가는 것 .

 

325

몽테뉴는 잘못이다 . 습관은 단지 습관이기 때문에 복종할 것이지 , 합리적이라든가 옳다든가 하는 이유로 복종할 것은 아니다 . 그러나 민중은 그것을 옳다고 생각하고 , 이 유일한 이유 때문에 그에 복종하고 있다 .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습관이라 하더라도 그에 따라가고자 하지 않을 것이다 . 왜냐하면 인간은 도리나 정의에만 복종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 습관도 그런 것을 결여하면 압제로 생각될 것이다 . 그러나 도리와 정의의 지배는 쾌락의 지배처럼 전제적이 아니다 . 그런 것들은 인간의 생래의 원리이다 .

그러므로 사람이 법률이기 때문에 법률에 복종하고 습관에 따른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 또 세상에는 새로 채용하여야 할 참된 것 • 옳은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다는 것 , 우리는 그런 것들을 전혀 모른다는 것 , 그런 까닭으로 이미 수락된 것에 복종하는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안다는 것도 좋은 일이다 . 이렇게 하면 사람은 그런 법률이나 습관을 버리지 않고서도 견디어낼 수 있다 그러나 민중은 이런 설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 그리고 진리는 존재할 수 있으며 , 그것은 법률과 습관 속에 있다고 생각하는 데서 그것들을 믿고 , 그것들이 낡았다는 것을 가지고 진리의 증거라고 생각한다 ( 진리를 떠나 그것들만의 권위의 증거로서가 아니고 ) . 그렇게 해서 그들은 그것들에 복종하고 있다 . 그러나 그것들이 복종할 만한 가치가 없다는 것이 표시되자마자 , 그들은 그것들에 대해 자칫하면 반항한다 . 이것 ( 복종할 만한 가치가 없다는 것 ) 은 어느 모로 보면 만사에 관해 말할 수 있는 일이다 .

 

326

부정 = 법률이 정의가 아니라고 민중에게 말하는 것은 위험하다 . 그도 그럴 것이 , 민중은 법률을 정의라고 믿기 때문에 복종하고 있는 것이니까 . 그런 고로 동시에 법률은 법률이기 때문에 복종해야 한다 . 마치 나이 많은 웃어른에게는 그가 옳기 때문이 아니고 , 웃어른이기 때문에 복종해야 한다고 하는 것처럼 말해야 한다 . 그리하여 만일 사람이 이것을 이해하고 또 원래 정의 ( 正義 ) 의 정의 ( 定義 ) 가 어떻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면 모든 반란은 방지할 수 있을 것이다 .

 

327

세상 사람들은 사물을 옳게 판단한다 . 그것은 세상 사람들이 인간의 참다운 발판인 타고난 무지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 지식에는 두 개의 극단이 있어 서로 접촉하고 있다 . 하나는 갓 낳은 모든 인간 속에서 발견되는 타고난 순수한 무지이다 . 다른 하나의 극단은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대체로 한번 알게 된 연후 자기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알게 되고 , 최초의 출발점인 저 같은 무지에 돌아가는 위대한 혼이 도달하는 무지이다 . 그러나 이것은 자기를 아는 현명한 무지이다 . 두 극단 사이에 있어서 생래의 무지에선 벗어났으나 아직 다른 무지에 도달할 수 없는 사람들은 자아도취적인 지식을 휘두르면서 모든 것을 다 아는 척 한다 . 이런 사람들은 세상 사람들을 현혹시키고 만사에 그릇된 판단을 내린다 . 민중 식자는 세상의 진보에 기여하지만 죽도 밥도 안 되는 중간적인 인물들은 세상을 경멸하고 또 세상으로 부터 경멸당한다 . 그들은 만사를 그릇되게 판단하고 세상은 그들을 옳게 판단한다 .

 

328

현실의 이유 = ( 正 ) 에서 반 ( 反 ) 에의 끊임없는 전환 .

이제 우리는 인간이 본질적이 아닌 사물을 존중하고 있다는 것에서 , 인간이 공허함을 표시했다 . 그리고 그런 의견은 모두 파괴되었다 . 다음 우리는 그런 의견은 모두 건전하고 , 따라서 그런 모든 공허성도 옳은 기초를 가지고 있어 민중이란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그렇게 공허하지 않다는 것을 표시했다 . 이리하여 우리는 민중의 의견을 파괴한 의견을 다시금 파괴했다 .

그러나 이제 이 최후의 명제를 파괴하여 민중의 의견이 건전하다고 하 더라도 그들의 공허는 항상 진실하다는 것을 표시해야 한다 . 왜냐하면 그 들은 진리가 ( 자기의 의견의 ) 어느 곳에 있는지 모르고 없는 곳에 그것이 있다고 하므로 그 의견이 늘 부정확하고 대단히 불건전하기 때문이다 .

 

329

현실의 이유 = 인간의 취약성은 인간이 만들어 내는 많은 미의 원인이다 . 예를 들면 류트를 교묘하게 칠 수 있는 것 같은 .

그것은 오직 우리가 취약한 까닭으로 악이 된다 .

 

330

왕의 권력은 민중의 이성과 우매 위에 , 특히 우매위에 기초를 두고 있다 . 이 세상의 가장 위대하고 중대한 사물은 취약성을 그 토대로 삼는다 . 그러면서도 이 기초는 놀랄 만큼 확실하다 . 왜냐하면 민중은 약하다고 하는 것처럼 확실한 일은 없기 때문이다 . 건전한 이성 위에 기초를 두고 있는 것은 매우 위태롭다 . 예를 들면 슬기로운 자의 평가 따위 .

 

331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라고 하면 학자답게 당당한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고밖에 우리는 상상하지 못한다 . 그들은 신사였고 보통 사람과 마찬가지로 그 친구와 담소했다 . 또 그들은 그 ≪ 법률편≫이나 ≪ 정치학≫의 저작에 흥취하고 있었을 때 그들은 반 향락삼아 그런 짓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 그것은 그들의 생애에 있어서 철학자답지 않고 또 가장 불성실한 부분이었다 . 가장 철학자다운 부분은 간소하고 조용하게 생활을 하고 있었을 때이다 . 그들이 정치학을 썼다고 하면 이는 정신병원의 규칙이나 만들고 있었던 셈이다 . 또 그들이 중대사에 대해 말하는 것 같은 태도를 취했다면 이는 그들이 이야기하는 상대방인 광인들이 스스로를 왕이나 황제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 그들은 광인들 의 광기에서 생기는 해악을 되도록 적게 하려고 그들의 방식에 따라간 것이다 .

 

332

전제는 보편적으로 자기의 범위를 넘어서 지배하려고 원하는 데 성립한다 .

강한 것 , 아름다운 것 , 현명한 것 , 믿음이 깊은 것은 각각 나름의 분야를 가지고 있어 각자가 자기의 분야만을 지배하고 외부를 지배하지 않는다 . 그런데 때때로 그들은 충돌하고 강한 자와 아름다운 자가 각기 상대방의 주인이 되려고 어리석게 다투곤 한다 . 왜냐하면 양자의 지배권은 종류를 달리하기 때문이다 . 그들은 서로 이해하지 못한다 . 그리고 그들의 오류는 모든 분야를 지배하려는 데 있다 . 그런 것은 누구의 힘으로도 할 수 없는 일이다 . 힘은 지식인의 왕국에서는 소용이 없다 . 그것은 외적 행위의 주인밖에 되지 않는다 .

전제 =   … 그래서 다음과 같은 말은 잘못이고 압제적이다 . “나는 예쁘다 . 그러니까 사람들은 나를 무서워할 터이다 . 나는 강하다 . 그러니까 사람들은 나를 사랑할 터이다 . 나는… . ”

전제는 일정한 방도에 의하지 않으면 얻을 수 없는 것을 그 외의 다른 방도에 의해서 얻으려는 것이다 . 사람은 다른 가치에 대해서는 다른 경의를 표한다 . 쾌적함에는 사람의 경의를 , 힘에는 공포의 경의를 , 지식에는 신뢰의 경의를 .

사람은 위와 같은 여러 가지 경의를 표해야 한다 . 그것들을 거부하는 것은 부당하고 그 외의 경의를 구하는 것도 부당하다 .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오류이고 전제적이다 . “그는 강하지 않다 . 그래서 나는 그를 존경하지 않는다 . 그는 유능하지 못하다 . 그해서 나는 그를 무서워하지 않는다 . ”

 

333

당신은 당신이 자기네들을 너무 중히 여기지 않는 것을 불평으로 생각하고 자기를 존경하여 주는 고위층 인간들의 예를 당신 앞에 나열하는 따위의 사람들과 만나본 적이 있는가 ? 나로서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겠다 .

“그런 분들을 감복시킨 당신의 진가를 보여주게 . 그러면 나도 마찬가지로 당신을 존경할 터이니 . ”

 

334

현실의 이유   사욕과 힘은 우리의 모든 행위의 원천이다 . 사욕은 마음으로부터의 행위를 하게하고 , 힘은 마음에도 없는 행위를 하게 한다 .

 

335

현실의 이유   그러므로 세상 일반이 착각이 빠져 있다는 것은 진실하다 . 왜냐하면 민중의 의견은 건전하다 해도 , 그들의 머릿속까지 건전하다고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 그들은 진리가 없는 곳에 진리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으니까 진리는 확실히 그들의 의견 속에 있기는 하지만 그들이 생각하고 있는 점에는 없다 . 귀족은 존경해야 한다는 것은 진실하지만 , 그것은 가문이 현실적 이득인 까닭은 아니다 .

 

336

현실의 이유   숨어 있는 생각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 그리고 민중처럼 이야기하면서도 그 숨어 있는 생각을 가지고 만사를 판단해야 한다 .

 

337

현실의 이유 = 단계 . 민중은 문벌이 좋은 집에 속한 이를 존경한다 . 어설픈 식자는 , 문벌은 개인적인 장점이 아니고 우연한 것이라고 하여 그들을 멸시한다 . 식자는 민중의 생각에서가 아니라 그 숨어 있는 생각에 의해 그들을 존경한다 . 지식보다도 열성을 많이 가지고 있는 신앙가는 식자들이 귀족을 존경하고 있는 사고방식에 반하여 그들을 멸시한다 . 왜냐하면 그들은 신앙에서 얻은 새로운 빛을 가지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 그러나 완전한 그리스도교도는 다른 또 하나의 우월한 빛을 가지고 그들을 존경한다 . 이처럼 사람이 빛을 가지는 데 따라 그 의견을 정 ( 正 ) 에서 반 ( 反 ) 으로 잇따라 전진한다 .

 

338

진실한 그리스도교도도 여전히 어리석음을 따라간다 . 그것은 어리석음을 존경하는 까닭에서가 아니다 . 인간을 벌하기 위해 그들로 하여금 그런 어리석음에 따라가게 한 신의 질서를 존경하기 때문이다 . Omnis creatura subjecta est Uanitat i ( 피조된 자는 모두 공허에 속한다 ) . Liberabitu r ( 밀망의 종 ( 從 ) 인 상태에서 해방되어 ) . 그래서 성 토마스는 야고보서 중 부자를 편애하는 조에 주석하여 말하기를 , 그들은 그것 을 신의 눈앞에서 하지 않으면 종교의 규칙에서 벗어나는 것이라고 했다 .

 

 

 

 

제 6 편 철학자들

 

 

 339

나는 손도 발도 머리도 없는 인간을 잘 상상할 수 있다 ( 왜냐하면 머리가 발보다 더 필요하다는 것을 가르쳐 주는 것은 경험뿐이므로 ) . 그러나 나는 사고하지 않는 인간을 상상할 수 없다 . 그것은 돌이 아니면 짐승일 것이다 .

 

339 의   1

우리에게 있어서 쾌락을 느끼는 부분이란 무엇인가 ? 손인가 ? 팔인가 ? 살덩어리인가 ? 피인가 ? 사람은 그것이 비물질적인 것이어야 함을 알게 되리라 .

 

340

계산기는 동물의 모든 행위보다도 더 사고에 가까운 효과를 거둘 수 있다 . 그러나 그것으로 하여금 동물처럼 의지를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게끔 하는 일이란 전혀 불가능하다 .

 

341

리앙쿠르의 꼬치고기와 개구리 이야기 . 그들은 항상 꼭 같은 짓을 한다 . 결코 다른 일을 — 다른 정신적 사물 — 하지 않는다 .

 

342

만약 어떤 동물이 본능을 가지고 하는 일을 심정을 가지고 하게 된다면 , 또 그것이 사냥을 할 때나 그 벗들에게 미끼를 발견했다든지 놓쳐버렸다든지 가르쳐 줄 때에 본능으로 이야기할 것을 심정으로 말하게 된다면 , 그 동물은 한층 감정적인 사물을 잘 말할 수 있었을 것이다 . 예를 들면 「 나를 잡아매고 있는 이 새끼줄을 물어 끊어 주게 . 나는 거기까지 입이 가 닿지 않으니 」 등 .

 

343

앵무새는 그 주둥이가 아무리 깨끗하더라도 그것을 훔치곤 한다 .

 

344

본능과 이성 , 두 개의 본능의 표징 .

 

345

이성은 주인이 명령을 내기는 것보다도 더 한층 절박하게 우리에게 명령을 내린다 . 그도 그럴 것이 주인에 복종하지 않는 인간은 불행하지만 , 이성에 복종하지 않는 인간은 바보이기 때문이다 .

 

346

사고는 인간의 위대성을 형성한다 .

 

347

인간은 한 개의 갈대밖에 되지 않는다 . 자연 중에서 가장 약한 자이다 . 그러나 그것은 생각하는 갈대이다 . 그를 분쇄하는 데는 전 우주를 무장할 필요가 없다 . 한 줄기의 증기 , 한 방울의물을 가지고도 넉넉히 그를 죽일 수 있다 . 그러나 우주가 그를 분쇄하는 경우에 있어서도 인간은 그를 죽이는 자보다 더 고귀할 것이다 . 그것은 인간은 자기가 죽는 다는 것과 우주가 자기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 우주는 그런 것을 전혀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

그러므로 우리의 모든 존엄성은 사고 속에 있는 것이다 . 그것을 가지고 우리는 자기를 높여야 한다 . 자기를 높이는 것은 우리가 채울 수 없는 공간이나 시간에 의해서가 아니다 . 그러므로 잘 사고하도록 애써 보자 . 도덕의 본원은 바로 여기 있다 .

 

348

생각하는 갈대 = 내가 나의 존엄성을 찾아내야 할 것은 공간에서가 아니라 나의 사고의 준칙에서이다 . 내가 몇 개의 세계를 소유하더라도 그 이상의 것을 가질 수 없을 것이다 . 공간에 의해 우주는 나를 포함하고 한 개의 점처럼 나를 삼키고 만다 . 사고에 의해 나는 우주를 포함한다 .

 

349

혼의 빗물질성 = 자기의 정욕을 제어한 철학자들 , 어떤 물질이 그것을 할 수 있었던가 ?

 

350

스토아학파 = 그들은 결론하기를 , 사람이 가끔 할 수 있는 일은 항상 할 수 있으며 , 명예심은 그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으로 하여금 어떤 일을 훌륭히 하게 만들어 주니까 다른 ( 명예심에 사로잡혀 있지 않는 ) 사람에게도 꼭 같은 일을 할 수 있게 만들어 줄 것이라고 한다 . 그러나 건강한 사람으로서는 흉내 낼 수 없는 열병적인 작용도 있다 .

에픽테토스는 견실한 그리스도교도가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누구나 쉽사리 그렇게 될 수 있으리라고 결론한다 .

 

351

혼이 가끔 도달하는 저 위대한 정신적 노력은 혼이 지속할 수 없는 것이다 . 혼은 거기에 단순히 뛰어오를 따름이다 . 그것도 왕좌에 앉는 것처럼 긴 기한을 두고서가 아니라 일순간뿐이다 .

 

352

인간의 덕의 힘은 그의 노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의 평상시에 의해 측정되어야 한다 .

 

353

하나의 덕 , 예를 들면 용기를 극도로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이상한 용기와 비상한 관용을 가지고 있었던 에파미논다스처럼 , 동시에 반대적인 덕을 극단으로 가지고 있지 않는다면 나는 조금도 감복하지 않는다 . 그렇지 않는 한 그것은 향상이 아니고 타락이기 때문이다 . 사람이란 하나의 극단에 도달하는 것을 가지고 그 위대함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다 . 동시에 두 극단에 도달하여 양자의 전 중간을 충만시켜야만 위대함을 나타낼 수 있는 것이다 . 그러나 이것은 아마 혼이 그런 한 극에서 다른 한 극으로 급속히 운동하는 것밖에 되지 않을는지 모른다 . 혼이란 타버린 나무 불똥처럼 , 사실은 한 점에만 있을는지도 모른다 . 그렇다면 그것으로서 가하다 . 그러나 이것은 혼의 넓이를 표시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최소한 혼의 속도를 표시하는 것이다 .

 

354

인간의 천성은 항상 전진하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 전진도 하고 후퇴도 한다 .

열병에는 그 오한과 열이 있다 . 그리고 오한은 열 그 자체와 마찬가지로 열병의 도를 표시하는 것이다 . 세기에서 세기로 인간의 발명도 마찬가지로 전진한다 . 세상 사람들의 선의와 악의도 대체로 마찬가지다 . Plerumque gratae principibus vices ( 변화는 보통 귀인을 만족시킨다 ) .

 

355

웅변도 계속하면 권태를 가져온다 . 왕후나 왕자는 때때로 유락한다 . 그들은 늘 왕좌 위에만 앉아 있지 않다 . 그들은 왕좌 위에서 권태를 느낀다 . 위대함을 깨닫기 위해서는 거기서 떠날 필요가 있다 . 연속은 만사를 불쾌하게 만든다 . 추위도 더워지려 할 적에는 기분 좋은 것이다 .

자연은 itus et reditus ( 가고 오는 ) 진보에 의해 움직인다 . 그것은 가고 또 온다 . 다음에는 더욱 멀리로 갔다가 두 배가 되어 돌아오고 그 다음에는 이전보다 한층 더 먼 곳에 가는 것처럼 .

바다의 만조도 마찬가지로 행하여지고 , 태양도 마찬가지로 움직이는 것처럼 보인다 .

 

356

신체는 식물을 조금씩 흡수한다 . 풍족한 식물과 근소한 영양분 .

 

357

덕을 어느 한쪽의 끝에까지 따라가려고 하면 악덕이 나타나고 , 그것이 무한소의 쪽으로부터 감각하지 못할 길을 통해 몰래 잠입한다 . 또 악덕이 무한대의 쪽에서 무리를 이루어 나타나면 인간은 그 악덕 속에 빠져서 망연자실하여 벌써 덕을 볼 수 없게 된다 . 인간은 완전 그 자체조차도 비난 한다 .

 

358

인간은 천사도 아니요 금수도 아니다 . 그런데 불행한 것은 천사의 흉내를 내려는 자가 금수의 흉내를 내곤 하는 것이다 .

 

359

우리가 몸가짐을 덕에 알맞게 하고 있는 것은 우리 자신의 힘에 의해서가 아니다 . 오히려 서로 역행하는 두 개의 바람 속에서 있는 것처럼 상반하는 두 개의 악덕의 균형에 의해서이다 . 그들 악덕 중 하나를 제거하여 보라 . 우리는 또 다른 악덕 속에 떨어지고 말 터이니 .

 

360

스토아학파가 제창한 바는 매우 곤란하고 공허하다 .

스토아학파는 주장한다 . 고도의 지혜에 도달하지 못한 자는 모두 우매하고 부도덕하다고 . 이는 마치 깊이 2, 3 치 되는 물속에 빠진 사람들과도 같다고 .

 

361

최고의 선 최고의 선 논의   Ut sis contentus temetipso et ex tenascentibus bonis ( 네가 네 자신과 너에게서 나온 선에 만족하기 위해 ) . 거기에 모순이 있다 . 왜냐하면 그들은 결국 자살을 권하기 때문이다 . 아아 ! 얼마나 즐거운 인생인가 , 페스트에서 도망쳐 나오는 것처럼 거기서 도망쳐 나오기에는 .

 

362

Ex senatus consulitis et plebiscitis … ( 원로원의 결의와 국민투표에 의해… ) 이와 같은 구절을 찾아낼 것 .

 

363

Ex senatus cosulitis et plebiscitis sclera exercentur ( 원로의 결의와 국민투표에 의해 죄는 성립한다 ) . 세네카 588.

Nihil tam absurde dici potest quod non dicatur ab aliquo philosophorum ( 어떤 철학자에 의해서도 말해지지 않은 것처럼 우매한 것은 없다 ) . 신성론 .

Quibusdam destinatis sententiis consecrati quae non probant coguntur defendere ( 일정한 설을 신봉하고 있는 그들은 자기가 시인하지 않는 설도 옹호하지 않을 수가 없다 ) . 키케로 .

Ut omnium rerum sic litterarum qusque intemperantia laboramus ( 우리는 여러 가지의 과잉에 고민하는 것처럼 문학의 과잉에 고민한다 ) . 세네카 .

Id maxime quemque decet , quod est cujusque suum maxime ( 각자에게 가장 흡사한 것은 각자에게 가장 자연스러운 것이다 ) . 세네카 588.

Hos natura modos primum dedit ( 자연은 그들에게 먼저 한계를 부여 했다 ) . 게올키가 .

Paucis opus est litteris ad bonam mentem ( 지식인 ) 는 많은 교육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 .

Si quando turpe non sit, tamen non est non turpe quum id a multitudine laudetur ( 부끄러워해서는 안 될 일도 대중에게 승인되면 부끄러운 일이 되기 시작한다 ) .

Mihi sic usus est , tibi ut opus est facto, fac ( 이것이 내가 하는 방식이다 . 당신은 당신이 좋을 대로 하라 ) . 테렌티우스 .

 

364

Rarum est enim ut satis se quique vereatur ( 인간이 십분 자존한다는 것은 드문 일이다 ) .

Tot cicra unum caput tumultuantes deos ( 많은 신들이 단 하나의 머리를 싸들고 소동한다 ) .

Nihil turpius quam cognitioni assertionem praecurrere ( 알기도 전에 단언하는 것처럼 부끄러운 일은 없다 ) . 키케로 .

Nec me pudet ut istos fateri nescire quid nesciam ( 아직도 나는 그들처럼 자기가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고백함을 부끄럽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 .

Melius non incipie t ( 착수하지 않는 것은 그만두는 것보다 쉬운 일이다 ) .

 

365

사고 ( 思考 ) = 인간의 모든 존엄성은 사고에 있다 .

그러나 이 사고란 무엇인가 ? 그것은 얼마나 우열한 것인가 ?

사고는 그러므로 그 본성상 훌륭하고 무비한 것이다 . 사고가 경멸된다면 틀림없이 거기에는 이상한 결함이 있을 것이다 . 그런데 사고는 이 이상 더 우스운 것이 없다고 생각될 정도로 커다란 결함을 가지고 있다 . 그것은 본성으로 보면 얼마나 위대한 것인가 ! 결함으로 보면 얼마나 비천한 것인가 !

 

366

세계 최고의 법관의 정신도 그 주위에서 일어나는 최초의 소음에 의해 곧 혼란되지 않을 정도로 초연한 것은 아니다 . 그의 사고를 방해하기 위해서는 대포소리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 풍차나 활차의 소리만 가지고도 넉넉하다 . 그의 추론이 현재 잘 되어가지 않는다 하여 놀랄 바는 아니다 . 한 마리의 파리가 그의 귀 밑에서 시끄러운 소리를 내고 있다 . 그로 하여금 명안이 머릿속에 떠오르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 만일 당신들이 그로 하여금 참다운 것을 발견하게 하고 싶거든 그의 이성을 방해하고 수많은 도시와 왕국을 통치하는 그의 유력한 지성을 혼란시키고 있는 저 동물을 내쫓도록 하라 . 얼마나 우스운 신인가 ! O ridicolosissimo eroe ! ( 아아 , 우스운 인기자여 !)

 

367

파리의 힘 . 파리는 전투에 이기고 우리 혼의 활동을 방해하고 우리의 신체를 좀먹는다 .

 

368

열이란 어떤 구상분자 ( 球狀分子 ) 의 운동이고 , 빛은 우리가 감각하는 Conatus recedeudi ( 원심력 ) 이라고 사람이 말하면 우리는 놀랐다 . 무엇이라고 ? 쾌락은 정신의 무용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란 말인가 ? 우리는 그에 관해 전혀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 그리고 그런 느낌은 우리가 그에 비해서 별무차이라고 말하는 다른 느낌과는 대단히 거리가 먼 것처럼 보인다 . 불의 감각 , 접촉과는 전혀 달리 우리에게 전파되는 열 , 음이나 빛의 감응 , 이런 모든 것이 우리에게 신비스럽게 보인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돌에 얻어맞은 것처럼 보통인 것이다 . 솜털 구멍 속에까지 들어가 박히는 미세한 정기가 다른 신경에 가 닿는 것은 사실이다 . 그러나 그것은 역시 신경에만 접촉하는 것이다 .

 

369

기억은 이성의 모든 작용을 위해서 필요한 것이다 .

 

370

우연은 사상을 환기하고 또 제거한다 . 사상을 보존하고 획득하는 방법은 없다 .

도망쳐 버린 사상 , 나는 그것을 기록해 두고자 했다 . 그렇게 하지 못하고 사상이 도망쳤다고 나는 쓴다 .

 

371

어렸을 때 나는 나의 책을 붙잡곤 했다 . 그리고 때때로…그것을 붙잡았다고 생각할 때가 있었으므로 나는 의심했다… .

 

372

나의 사상을 기록하고 있노라면 때때로 그것은 도망쳐 버리곤 한다 . 그러나 이로 말미암아 나는 자기가 늘 망각하고 있는 자기의 취약성을 상기하게 된다 . 이것은 나의 잊어버린 사상과 마찬가지로 나에게는 교훈적이다 . 왜냐하면 나는 나의 공허를 알기 위해 전심하고 있기 때문이다 .

 

373

피로니즘 = 나는 여기에다 나의 사상을 무질서하게 , 그러나 뜻하지 않는 혼란에도 빠지지 않고 기록하려고 생각한다 . 이것이 참다운 질서이고 , 무질서 그 자체에 의해서 나의 목적을 항상 표명하려는 것이다 . 만약 내가 질서 정연하게 이 문제를 취급하면 너무나 그것을 존중한 셈이 된다 . 왜냐하면 나는 피로니즘이 질서를 가질 수 없다는 것을 표시하고 싶기 때문이다 .

 

374

나를 가장 놀라게 하는 것은 세상 사람들이 자기의 약함에 놀라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 사람은 성실히 행동하고 각자는 그 신분에 따라가고 있다 . 그것은 습관이니 실제에 있어서 복종하는 것이 좋다는 이유에서가 아니고 마치 각자가 도리와 정의가 어디 있는 가를 확실히 알고 있는 것 같이 행동한다 . 사람은 항상 기만당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 그런데 우스운 겸손에 의해 그것은 자기의 잘못이라고 생각하고 자기가 가지고 있음을 늘 뽐내곤 하는 처세술의 과오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 그러나 이런 사람들이 세상에 흔히 있으면서도 피론학파가 아니라는 것은 피로니즘의 영광을 위해 좋은 것이다 . 이것은 인간이 자기는 생래의 피하기 어려운 취약성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생래의 지혜 속에서 살고 있다고 믿을 수 있는 탓으로 , 전혀 얼토당토 않는 의견을 가질 수 있음을 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

세상에 피론학파가 아닌 사람이 있다는 것처럼 피로니즘을 강화해 주는 것은 없다 . 만일 모든 사람이 그렇다면 피론학파들은 잘못을 범하고 있는 셈이 된다 .

 

375

나는 세상에는 하나의 정의가 있다고 믿으면서 내 생애의 긴 시기를 보냈다 . 그리고 그 믿음은 잘못이 아니었다 . 신이 우리에게 정의를 표시하려던 정도에 따라 세상에는 정의가 있기 때문이다 . 그러나 나는 그처럼 해석하지는 않았다 . 그것이 나의 과오의 원인이었다 . 그도 그럴 것이 나는 우리의 정의를 본질적으로 옳다고 생각하고 , 또 자기는 그것을 인식하고 판단할 수 있는 그 무엇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 그러나 나는 너무도 빈번히 올바른 판단을 못하곤 하였다는 것을 알게 되고 , 나중에는 자신을 그리고 남을 신용하지 않게 되었다 . 나는 모든 국가나 사람들이 변천하는 것을 보았다 . 그리고는 참다운 정의가 무엇이냐 하는 데 견해를 몇 번 바꾼 후 우리의 본성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 그 이래 나는 변하지 않았다 . 만일 변하였다면 나의 의견만을 확증하였을 따름이었으리라 .

독단론자로 되돌아간 피론학파 알케시라오스 .

 

376

이 학파 ( 피론학파 ) 는 그 찬성자에 의해서보다 반대자에 의해서 스스로를 강화한다 . 왜냐하면 인간의 취약성은 그것을 자각하고 있는 사람들보다도 자각하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더욱 뚜렷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

 

377

겸손의 논의도 거만한 사람들에게는 거만의 재료가 되고 겸손한 사람들에게는 겸손의 재료가 된다 . 그와 마찬가지로 피로니즘의 논의도 긍정하는 사람에게는 긍정의 재료가 된다 . 겸손에 관해 겸손하게 말하는 사람이 적고 , 순결에 관해 순결하게 이야기하는 사람이 적고 , 피로니즘에 관해 회의적을 말하는 사람이 적다 . 우리는 허위 • 이중성 • 모순에 지나지 않는다 . 그리고 자기에 대해 자기를 감추고 허식한다 .

 

378

피로니즘 = 극도의 재능은 극도의 무지함과 마찬가지로 어리석음으로서 비난을 받는다 . 중용 이외에 좋은 것은 없다 . 이것을 결정하였고 어느 끝에서도 일탈하는 자를 욕설하는 것은 대중이다 . 나도 거기에는 반대하지 않고 그 속에 놓이게 되는 데 대해 충분히 동의한다 . 그러나 하단에 놓이게 되는 것은 거부한다 . 그것은 아래이기 때문이 아니고 끝이기 때문이다 . 그 까닭은 나는 상단에 놓이게 되는 것도 마찬가지로 거부할 것이기 때문이다 . 중용에서 떠난다는 것은 인도에서 떠난다는 것이다 . 중용에 머무를 줄 아는 데 인간의 혼의 위대함이 있다 . 위대하다는 것은 중용을 벗어나는 데 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 오히려 중용에서 절대로 벗어나지 않는 데 있다 .

 

379

너무나 자유스럽다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니다 . 모든 필요가 충족되는 것도 좋은 일은 아니다 .

 

380

모든 좋은 격언이 세상에 존재한다 . 사람들은 그런 격언의 적용을 잘못 하고 있을 따름이다 . 예를 들면 공공의 선을 수호하기 위해서는 생명을 걸어야 한다는 것을 의문으로 여기는 사람은 없다 . 그러나 종교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다 .

사람들 사이에 불평등이 있어야 한다는 것은 진리다 . 그러나 일단 이것이 시인되면 곧 문호는 최선의 통치를 향하여서만이 아니라 , 최악의 전제를 향해서도 또한 개방된다 .

정신을 다소 이완시킨다는 것은 필요한 일이다 . 그러나 이것은 최대의 방탕을 향해 문을 열어 준다 — 그 한계에 유이할 필요가 있을 성 싶다 — 사물에는 아무런 한계도 없는 것이다 . 법률이 거기에다 한계를 설정하려고 하지만 , 정신이 그것을 참아낼 수 없다 .

 

381

사람이 젊었을 때는 올바른 판단을 내리지 못한다 . 너무 늙어도 마찬가지다 . 충분히 생각하지 않는 경우나 지나치게 생각하지 않는 경우에는 그에 대해 머리가 완고해지거나 열중해진다 . 자기가 한 일을 끝마친 직후에 생각하면 아직도 호의적인 편견의 눈으로 보게 된다 . 너무나 오랫동안 시일이 경과한 뒤에는 그 당시의 기분을 가질 수가 없다 .

그림도 너무 멀리서 보든가 너무 가까이서 보면 이와 같은 것으로서 , 참다운 장소라고나 할 정확무비한 점이란 꼭 하나밖에 없는 것이다 . 그 이외의 점은 너무 가깝든가 너무 멀든가 너무 높든가 너무 낮든가 하다 . 그림의 기술에 있어서는 배경법이 그것을 결정해 준다 . 그러나 진리나 도덕에 있어서는 무엇이 그것을 결정지어 줄 것인가 ?

 

382

모든 것이 꼭 같이 움직일 때에는 마치 아무것도 움직이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 배에 타고 있을 때 그렇다 . 모든 사람들이 방탕의 길을 달리고 있을 때에는 누구 하나 거기를 달리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 머물러 있는 자가 마치 고정되어 있는 점이나 되다시피 남들의 흥분에 대해 주의를 환기시켜 준다 .

 

383

불규칙한 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들은 규칙적인 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 당신들은 본성을 어기고 있는 것이라고 말하고 자기들은 본성을 따르고 있는 것으로 자신한다 . 이는 마치 배를 타고 있는 자가 육지에 있는 자들이 도주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다 . 쌍방이 다 그렇게 주장해도 좋을 이유를 가지고 있다 . 그러나 그것을 옳게 판단학기 위해서는 고정한 점이 있어야 할 것이다 . 항구는 배를 타고 있는 사람들을 판단하는 점이다 . 그러나 도덕의 세계에 있어서는 그런 고정된 항구란 어디 있는 것인가 ?

 

384

모순은 진리의 하나의 나쁜 표지이다 . 확실한 몇 개의 사물이 모순되어 있을 때도 있고 수다한 모순 없이 통할 때도 있다 . 모순은 허위의 표지가 아닌 동시에 모순이 없다는 것도 진리의 표지가 안 된다 .

 

385

피로니즘 = 이 세상에서는 개개의 사물이 부분적으로는 진리이고 부분적으로는 허위인 것이다 . 본질적인 진리는 그렇지 않다 . 그것은 완전히 순수하고 완전히 진실한 것이다 . 이런 혼합은 진리를 해치고 절멸시킨다 . 순수하게 진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 그러므로 순수한 진리의 의미라면 무엇 하나 진실한 것이란 없을 것이다 . 살인이 악이라는 것은 진실이라고 당신들은 말할지 모른다 . 그렇다 . 우리는 악과 거짓을 잘 알고 있으니까 . 그렇지만 무엇을 선이라고 말하려는 것인가 ? 정절은 ? 나는 아니라고 대답한다 . 세계에는 종말이 있을 터이니까 . 결혼을 ? 아니다 .

절제의 편이 나을 것이다 . 결코 살인하지 않는 것을 ? 아니다 . 무질서란 무서운 것이고 악인이 선인을 모두 죽이고 말 터이니까 . 살인을 ? 아니다 . 그것은 본성을 파괴하니까 . 우리들은 진과 선을 부분적으로밖에 가지고 있지 못하며 악과 위를 혼합시키고 있는 것이다 .

 

386

만약 우리가 밤마다 같은 꿈을 꾼다면 , 이것은 우리가 매일 보고 있는 사물과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영향을 미칠 것이다 . 만약 어떤 직공이 매일 밤 열 두 시간을 계속하여 자기가 왕이 되어 있는 꿈을 꾸곤 한다면 , 그는 밤마다 열 구 시간씩 잇따라 자기가 직공이 되어 있는 꿈을 꾸곤 하는 왕과 거의 마찬가지 정도로 행복스러운 것으로 생각된다 .

만약 우리가 밤마다 적에게 추격당하여 그 고통스러운 환상 때문에 고민하는 꿈을 꾸든가 혹은 여행을 하고 있을 때처럼 여러 가지로 분주하게 소일하고 있는 꿈을 꾸게 되면 우리는 그런 일을 마치 사실인 양 고민하고 실제로 그와 같은 불행에 빠질 염려가 있는 분들이 잠에서 깨어나는 것을 겁내는 것처럼 잠들게 되는 것을 무서워할 것이다 . 그리고 실제로 그것은 현실과 거의 마찬가지인 고통을 부여할 것이다 .

그러나 꿈이란 모두 서로 다르고 , 또 같은 것이라도 변화하는 까닭으로 꿈속에서 보는 것은 깨어 있을 적에 보는 것처럼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 이것은 깨어 있어서 보는 데는 연속성이 있기 때문이다 . 그러나 그 연속성도 결코 변하지 않는 정도로 연속하여 평균되어 있는 셈이 아니고 , 여행 시처럼 급격한 변화를 하는 때가 드물다 뿐이다 . 그래서 변화가 있을 때에는 “마치 꿈이나 꾸고 있는 것 같다”라고 사람들은 말한다 . 왜냐하면 인생이란 변화가 조금 부족한 꿈밖에 되지 않기 때문이다 .

 

387

참다운 논증이란 있을 수 있을까 ? 그러나 그것은 확실하지 않다 . 따라서 그것은 만사가 불확실하다는 것이 확실하지 않다는 것을 표시하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 그러니 피로니즘에 대하여 영광이 있다고 할까 .

 

388

양식 = 그들은 이렇게 말하지 않을 수 없다 . 「 당신들은 성의를 가지고 행동하고 있지 않다 . 우리는 잠자고 있진 않다… 」 라고 . 나는 이 오만한 이성이 겸손하여 애원하고 있는 바를 얼마나 보고 싶어 하는 것인가 ! 왜냐하면 이것은 그 사람의 권리가 침해되고 있는 인간 , 그리고 그 권리를 무력행사로서 지키고 있는 인간의 말이 아니기 때문이다 . 그는 사람들이 성의로써 행동하고 있지 않음을 말함으로써 자위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런 성의 없음을 힘으로 책벌하고 있는 것이다 .

 

389

전도서는 신을 떠난 인간이 완전한 무지와 불가피한 불행 속에 놓여 있음을 보여준다 . 원하기는 하되 뜻을 이룰 수 있는 능력이 없다는 것은 불행한 일이니까 . 그런데 인간은 행복해지기를 원하고 약간의 진리를 확인하고 싶어 한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알 수도 없고 전혀 알지 못하기를 원할 수도 없다 . 그는 의심조차 할 수 없으니까 .

 

390

오 ! 신이여 ! 이러한 논의란 얼마나 어리석은 것입니까 ! 「 신은 세계를 지옥에 떨어뜨리기 위해 만들어 놓았을까 ? 신은 이렇게도 취약한 인간들을 이다지도 고생시키기를 요구할 것인가 ? 등등 . 」 피로니즘은 이런 병에 대한 치료법이고 , 이런 허영을 타파할 것이다 .

 

391

회화 = 위대한 말 . 나는 종교를 부정한다 .

회화 = 피로니즘은 종교를 도와준다 .

 

392

피로니즘 반박 = …그러므로 사람들이 그것들을 애매하게 하지 않고서는 정의할 수가 없다는 것은 기묘한 일이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것을 최대의 확신을 가지고 이야기하고 있다 . 우리는 수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샅은 방식으로 사고하고 있는 것으로 가정한다 . 그러나 우리의 가정에는 아무런 근거도 없다 . 우리는 그에 대해 아무런 증거도 갖고 있지 않으니까 . 같은 말이 같은 경우에 사용되곤 하는 것 . 또 어떤 물체가 장소를 바꾸는 것을 두 사람이 볼 때마다 두 사람이 다 이 같은 대상의 관찰을 같은 말로써 표현하고 「 그것은 움직였다 」 라고 쌍방이 다 말하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다 . 그리고 이 적용의 일치로부터 사람들은 관념의 이치라는 유력한 추정을 만들어 낸다 . 그렇지만 이것은 제아무리 긍정의 편에 승산이 많다 하더라도 결정적인 확실을 절대적으로 부여해 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 그도 그럴 것이 다른 전제에서 같은 귀결이 가끔 나오곤 하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기 때문이다 .

이것은 적어도 문제를 혼란시키는 데 충분하다 . 그것은 이들 사물을 우리에게 확인시켜 주는 자연의 빛을 완전히 제거해 버려서 아카데미시안에게 승리를 얻게 해주는 것이 못 된다 . 오히려 그것은 그 빛을 희미하게 하여 독단론자들을 현혹하게 하고 피론학파의 무리들에게 개가를 올려 주게 한다 . 피로니즘이란 이런 막연한 애매함과 모종의 불분명 속에 성립한다 . 거기서는 우리의 의혹이 모든 빛을 제거할 수도 없고 우리의 자연의 빛이 일체의 암흑을 추출할 수고 없다 .

 

393

신과 자연의 모든 율법을 차버린 뒤에 자기 스스로 법률을 만들고 거기에 엄격히 복종해 나가는 사람이 이 세상에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기묘한 일이다 . 이를테면 , 마호메트의 병사 • 도적 • 이교도들이 그렇고 , 논리학자 역시 마찬가지다 .

그들이 이렇게도 정당하고 신성한 한계를 많이 뛰어넘는 것을 보면 그들의 방종에는 아무런 한도도 , 혹은 한계도 없지 않나 생각된다 .

 

394

피론학파 • 스토아학파 • 무신론자들의 모든 원칙은 진실하다 . 그러나 그들의 결론은 잘못이다 . 반대의 논거 역시 진실하기 때문이다 .

 

395

본능 • 이성 = 우리에게는 증명의 능력이 없다 . 이것은 모든 독단론을 가지고서도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이다 . 우리에게는 진리의 관념이 있다 . 이것은 모든 피로니즘을 가지고서도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이다 .

 

396

두 가지 사물이 인간에게 그 전 본성을 가르쳐 주는 데 , 그것은 본능과 경험이다 .

 

397

인간의 위대함은 , 그가 자기의 비참을 알고 있다는 데서 위대하다 . 수목은 자기가 비참함을 모른다 . 그러므로 자기의 비참함을 아는 것은 비참한 일이지만 , 인간이 비참함을 아는 것은 위대한 것이다 .

 

398

이러한 모든 비참 그 자체가 인간의 위대함을 증명한다 . 이것은 대영주의 비참이요 , 폐위된 왕의 비참이다 .

 

399

사람은 감각하지 않고서는 비참하지 않다 . 파괴된 집은 비참하지 않다 . 비참한 것은 인간뿐이다 .

Ego uir videns ( 우리는 고민에 부딪친 인간이다 ) .

 

400

인간의 위대함   우리는 인간의 혼을 매우 위대하다고 생각하고 있으므로 , 그것이 경멸되거나 혹은 누구로부터 존경을 받지 못하거나 하면 참을 수가 없다 . 그리고 인간의 모든 행복은 이 존경 속에 있는 것이다 .

 

401

영예 = 동물은 서로를 존경하는 법이 없다 . 말은 그 벗에게 경의를 표하지 않는다 . 그것은 달음질칠 때 그들 사이에 경쟁심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 그런 것이 별로 중요한 결과를 가져오지 않는 까닭이다 . 왜냐하면 외양간 안에서는 인간이 남들에게 해주기를 바라는 것처럼 가장 둔하고 가장 못생긴 말이 다른 말에 귀리를 양보하는 따위의 일은 하지 않으니까 , 말들의 덕은 자기충족적이다 .

 

402

인간은 사욕 속에서조차 위대한 것이다 . 사욕 속에서도 하나의 훌륭한 기준을 끄집어 낼 줄을 알고 , 하나의 사랑의 영역을 만들어 낼 정도이다 .

 

403

위대함 = 사욕에서 이처럼 훌륭한 질서를 끄집어내고 있으니 현실의 이유는 위대함을 증명한다 .

 

404

인간의 가장 비천한 점은 영예를 추구하는 데 있다 . 그러나 이것은 그의 탁월성을 가장 큰 표지이기도 하다 . 왜냐하면 그가 지상에 아무리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다손 치더라도 , 또 아무리 건강하고 본질적인 편의를 가지고 있다고 해도 남의 존경을 받지 못하면 결코 만족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 그는 인간의 이성을 그렇게도 높이 평가하고 있는 까닭으로 그가 지상에서 어떠한 이득을 가지고 있든지 간에 인간의 판단에 있어서 그와 같은 정도로 높이 평가되지 않는다면 그는 결코 만족하지 않을 것이다 . 이것이야말로 세계에서 가장 좋은 자리라고 할 수 있다 . 따라서 누구도 그로 하여금 이 욕망을 버리게 할 수는 없는 것이니 , 이 욕망이야말로 가장 지울 수 없는 사람 마음의 성질이라 하겠다 .

그리고 인간을 가장 멸시하여 금수와 같은 지위에 놓으려는 자들도 남들로부터 존경과 신임을 받기를 원하고 있으니 , 그들은 그들 자신의 감정으로 말미암아 자가당착에 빠지고 있는 셈이다 . 무엇보다도 강한 그들의 본성은 , 이성이 그들로 하여금 그들의 비천함을 자각하게 하는 것보다 훨씬 더 강하게 인간의 위대함을 확신시켜 주고 있는 것이다 .

 

405

모순 = 오만이라는 것이 모두 비참을 상쇄하고 있다 . 인간이란 그의 비참을 숨기거나 혹은 그가 비참을 드러내면 비참을 인식하였다는 것을 자랑으로 삼는다 .

 

406

오만이 모든 비애를 상쇄하고 제거한다 . 여기 기이한 괴물이 있는 것이고 , 가장 명백한 착오가 있는 것이다 . 인간은 그 자리에서 떨어지고서는 초조히 그 자리를 찾으러 다닌다 . 이것은 모든 사람들이 하고 있는 바이다 . 누가 그것을 발견해 낼 것인가를 보기로 하자 .

 

407

악의가 자기편에 이성을 가지고 있을 때에 그놈은 오만해지고 , 이성을 그 모든 훌륭한 면에서 자랑하여 보여준다 . 내핍이나 엄격한 선택이 참으로 좋은 열매를 이루지 못해 다시금 뒤돌아와 본성에 순종하지 않으면 안 될 때 , 그놈은 이 복귀를 이유삼아 오만해진다 .

 

408

악이란 저지르기 쉬운 것이고 무한한 것이다 . 선이란 거의 단일하다 . 그러나 모종의 악은 소위 선을 발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발견하기 어려운 것이고 , 가끔 이 때문에 이런 특별한 악이 선으로 간주되기도 한다 . 거기에 이르기 위해서는 선에 이르는 것과 마찬가지로 영혼의 특출한 위대성이 필요하다 .

 

409

인간의 위대성   인간의 위대함이란 그의 비참에서조차 추출해 낼 수 있을 정도로 명백하다 . 왜냐하면 동물에게 있어서는 자연스러운 것을 인간에게 있어서는 비참한 것이라고 우리는 부르고 있기 때문이다 . 그로 말미암아 인간의 본성은 현재 동물의 그것과 같은 것이므로 인간은 과거 자기에게 고유했던 훌륭한 본성에서 타락했다는 것을 우리는 인정하게 된다 .

폐왕이 아니고서는 누가 왕이 아님을 불행으로 생각할 것인가 ? 사람들은 파우스트 에밀리우스가 집정관을 그만둔 것을 불행이라 생각했을까 ? 오히려 반대로 세상 사람들은 그가 집정관이었음을 행복이었다고 생각했다 . 그의 지위는 영속적인 것이 아니었으니까 .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페르세우스가 왕위에서 나간 것을 대단히 불행하다고 생각했다 . 그의 지위는 영속적인 것이고 세상 사람들은 그가 살아남이 있다는 것을 기묘한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 입이 하나밖에 없는 것을 불행으로 생각하는 자가 있을까 ? 또 눈이 하나밖에 없는 것을 불행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자가 있을까 ? 세상 사람들은 아마 눈이 세 개가 아니라는 것을 감히 통탄하지 않을 것이다 . 그러나 눈이 하나도 없는 자에 대해서는 위로해 줄 바도 없으리라 .

 

410

마케도니아 왕 페르세우스와 파우스트 에밀리우스 = 사람들은 페르세우스가 자살하지 않았다는 것을 비난했다 .

 

411

우리를 억압하고 우리의 목을 졸라매는 여러 가지 비참을 눈앞에 보면서도 우리는 자기를 높이려는 억제할 수 없는 본능을 가지고 있다 .

 

412

이성과 정용 사이에 일어나는 인간의 내적 투쟁 .

만일 인간이 정욕이 없고 이성만을 가지고 있다면… .

만일 인간이 이성이 없고 정욕만을 가지고 있다면… .

그러나 쌍방을 다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는 싸우지 않고서는 견디어 낼 수 없고 , 남과 싸우지 않고서는 남과 화평할 수가 없다 . 이리하여 그는 항상 분열하고 그 자신에 대해 반항하게 된다 .

 

413

이 이성과 정욕 사이의 내적 투쟁은 평화를 희구하는 사람들을 양파로 분열시켰다 . 일파는 정욕을 버리고 신이 되기를 원했으며 다른 일파는 이성을 버리고 야수가 되기를 원했다 ( 데 바로 ) . 그러나 그들은 그 중 어느 하나도 되지 못했다 . 그리고 이성은 여전히 남아 있어 정욕의 비열과 부정을 비난하고 , 정욕에 몸을 맡기고 있는 사람들의 안식을 교란하고 있으며 , 또 정욕은 이를 버리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여전히 그냥 남아 있다 .

 

414

인간이란 필연적으로 미친 자들이므로 , 미치지 않은 자도 광증의 다른 형식에 비추어 미쳤다고 말할 수 있다 .

 

415

인간의 본성은 두 가지 양식으로 고려된다 . 하나는 그의 목적에 의한 것으로 , 그때 그는 위대해서 비교를 하지 않는다 . 또 다른 하나는 다수성에 의한 것으로서 , 말이나 개의 성질을 그 달음질치는 것이나 et animum arcendi ( 도주본능 ) 을 보고 판단하는 경우처럼 다수성에 의한다 . 그때야말로 인간이란 비천하고 쓸모없는 존재이다 . 이들 두 개의 길이야말로 인간은 갖가지로 판단시키고 철학자들로 하여금 대단히 심한 논쟁을 하게 하는 것이다 .

그 까닭은 양자가 서로 상대방의 가정을 부정하기 때문이다 . 한편에서는 말하기를 “인간은 그런 목적을 위해 탄생한 것이 아니다 . 그의 전 행위는 그것을 싫어하고 있으니까”라고 한다 . 다른 편에서는 말하기를 , “인간이 그런 비열한 행위를 할 때 그는 그 목적에서 이탈되어 있는 것이다”라고 한다 .

 

416

A • P • R 위대함과 비참함 = 비참함은 위대함에서 , 그리고 위대함은 비참함에서 결론되어지는 것이므로 어떤 사람들은 비참함의 논거를 위대함에 두었으니만큼 더욱 적절하게 비참함을 결론하고 또 다른 어떤 사람들은 비참함 그 자체에서 위대함을 결론하였으니만큼 더욱 힘차게 위대함을 결론했다 . 한편이 위대함을 표시하기 위해 말한 모든 것은 다른 편이 비참함을 결론하고자 한 의논에 도움을 부여했을 따름이다 . 왜 그런가 하면 , 사람은 높은 곳에서 떨어지면 그만큼 더 비참하고 , 그 반대도 역시 진리이기 때문이다 . 그들은 끝날 줄 모르는 원을 그리면서 서로 움직이고 있다 . 다만 확실한 것은 인간의 빛을 많이 가짐에 따라 인간 속에 위대함과 비참함을 발견한다는 것이다 . 한 마디로 말하면 인간은 자기가 비참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 그러므로 그는 비참하다 . 왜 ? 사실상 비참하니까 . 그러나 나는 대단히 위대하다 . 왜 ? 자기의 비참함을 알고 있으니까 .

 

417

인간의 이중성은 너무도 명백하기 때문에 우리는 두 개의 혼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 사람들이 있을 정도이다 . 그들에게는 동일한 인물이 한량없는 자아도취에서 무서운 절망으로 순식간에 변화하는 것 같은 일은 있을 수 없는 것으로 보일 것이다 .

 

418

인간에게 그 위대함을 표시해 주지 않고 그가 얼마나 금수와 흡사한 것인지만 지나치게 보여주는 것은 위험하다 . 인간에게 그 비천함을 보여 주지 않고 그 위대함을 지나치게 보여주는 것 역시 위험하다 . 쌍방을 다 알지 않은 것은 더욱 위험하다 . 그러나 쌍을 다 표시해 두는 것은 대단히 유익하다 .

인간은 자기를 금수와 같다고 생각해도 안 되며 천사와 같다고 생각해 도 안 된다 . 쌍방을 다 모르고 있어도 안 된다 . 쌍방을 다 알아두어야 한다 .

 

419

나는 인간이 머무를 곳도 휴식도 없는 상태에 이르기 위해서 그가 누구에게나 의존하는 것을 허용하지 아니할 작정이다 .

 

420

그가 잘났다고 뽐내며 나는 그를 겸손하게 할 터이고 , 그가 겸손하면 나는 그를 추켜 줄 터이다 . 그리고 그가 자신이 불가해한 괴물이라는 것을 인정하기까지 항상 그에게 항변할 터이다 .

 

421

사람을 칭찬하는 편에 가담하는 사람들이나 , 사람을 비난하는 편에 가담하는 사람들이나 , 스스로를 즐겨하는 편에 가담하는 사람들을 나는 꼭 같이 비난한다 . 그리고 나는 신음하면서 탐구하는 자만을 시인할 수가 있다 .

 

422

참다운 선을 구하여 헛된 탐구로 피곤할 대로 피곤하여지는 것은 좋은 일이다 . 결국은 구세주에게 두 팔을 내미는 것이니까 .

 

423

모순 - 인간의 비열과 위대를 표시하고 나서   이제 인간이 자기의 가치를 알기를 바란다 . 그가 자기를 사랑하기를 바란다 . 왜 ? 그에게는 선을 행할 수 있는 본성이 있으니까 . 그러나 그것 때문에 자기 속에 있는 비열함을 사랑하지 않기를 바란다 . 그는 자기를 경멸하기를 바란다 . 왜 ? 이 선을 핼할 수 있는 힘은 공허한 것이니까 . 그러나 그 때문에 이 생래의 힘을

경멸하지 않기를 바란다 . 그는 자신을 미워해도 좋고 사랑해도 좋다 . 그는 그 자신 속에 진리를 알고 행복하게 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 . 그러나 안정된 진리나 만족할 만한 진리는 가지고 있지 않다 .

그러므로 나는 사람으로 하여금 진리를 발견하고 싶다는 의욕을 가지도록 이끌어 주고 싶다 . 그리고 그의 인식이 정욕 때문에 얼마나 희미해져 있는가를 알고 있으니 , 나는 사람을 이끌어 정욕에서 해방되게 하여 진리를 발견할 수 있는 처지에서 진리를 찾아낼 수 있도록 그에게 준비를 갖추게 하고 싶다 . 나는 인간이 그의 의사의 결정권을 쥐고 있는 사욕을 미워하기를 절실히 염원한다 . 그가 선택을 하려는데 사욕이 그를 맹목하게 하든가 , 선택한 뒤에 사욕이 그의 행동을 멈추게 하는 일이 생겨나지 않게 하기 위해서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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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의 인식에서 나를 가장 멀리 하게 한 것처럼 보였던 이런 모든 모순된 일이 진실한 자에게 나를 가장 빨리 인도해 줄 것이다 .

 

 

 

 

  

제 7 편 도덕과 교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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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 부 , 신앙 없는 사람은 참다운 선도 정의도 알 수 없다   모든 사람은 행복하게 되기를 원하고 있다 . 여기에 예외는 없다 . 그 때문에 사용하는 방법은 가지가지이지만 , 그들이 모두 이 목적을 지향하고 있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 어떤 사람들을 전쟁에 나가게 하고 다른 어떤 사람들은 전쟁에 나가지 않게 하는 것도 이 같은 원망에서이다 . 이 원망은 쌍방에 다 있는 것이지만 , 다만 상위하는 견해를 부수하고 있을 따름이다 . 의지는 이 목적을 향해서가 아니면 단 한 걸음도 나가고자 하지 않는다 . 이것은 뭇 인간 — 목매어 죽고자 하는 인간에 이르기까지 — 의 모든 행위의 동기이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도 긴 세월에 걸쳐 모든 사람들이 항상 바라보고 있는 이 점에 누구도 신앙 없이는 도달하지 못했다 . 모든 사람들이 한탄하고 있다 . 왕후도 신하고 , 귀족도 평민도 , 노인도 청년도 , 강자도 약자도 , 학자도 무식자도 , 건강인도 병인도 , 모든 국가 모든 시대 , 모든 연령 모든 신분의 사람들이 한탄을 하고 있다 .

이렇게도 길게 이어져 일치한 경험은 우리 자신의 노력으로서 선에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을 우리에게 확실히 납득시켜 주었어야 할 것이다 . 그러나 실례는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바 적다 . 약간의 미묘한 차이도 없으리만큼 완전한 유사라는 것은 있을 수 없다 . 그래서 우리는 이번만은 종전처럼 희망을 배반당하는 일이 없으리라고 기대한다 . 이처럼 현재는 우리를 결코 만족시켜 주지 않으므로 , 경험이 우리를 속이고 불행으로 이끌어 , 드디어 그 영원한 정점인 죽음에까지 이끌어간다 .

그렇다면 이 열망과 이 무력이 우리에게 호소하는 바는 무엇일까 ? 그것은 지난날 한때 인간에게는 진실한 행복이 있지만 , 오늘날 그것은 인간에게 완전히 공허한 기호와 흔적을 남기고 있는 데 불과하다는 것 , 그리고 인간은 자기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을 가지고 그 공허를 채워보려고 헛되게 노력하고 있어 , 현존하는 사물에서는 얻을 수 없는 구원을 현존하지 않는 사물에서 구하지만 , 이 무한의 심연은 무한하고도 불변한 존재 , 즉 신 자신에 의해서만 충족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 그런 사물에는 구원할 힘이 전무하다는 것이 아니고 무엇일까 ?

신만이 우리 인간의 진실한 선이다 . 그런데 우리 인간이 신을 포기한 이래 , 인간이 자연 가운데 신의 위치에 끌어올리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은 기묘한 일이다 . 별 • 하늘 • 땅 • 원소 • 식물 • 양배추 • 파 • 동 물 • 곤충 • 소 • 뱀 • 열병 • 페스트 • 전쟁 • 기아 • 악덕 • 간음 • 불륜 등이 신의 자리를 차지한다 . 그리고 인간이 진실한 선을 상실한 이래 , 모든 것이 마찬가지로 그들에게는 선으로 보이고 , 신에도 도리에도 전체로서의 자연에 완전히 어긋나는 데도 불구하고 자살까지 선으로 보이게 되었다 .

어떤 사람들은 진실한 선을 권위에서 구하고 어떤 사람들은 호기심과 학문에서 구하고 , 어떤 사람들은 쾌락에서 구한다 . 그 선에 실제로 더 한층 접근한 다른 사람들은 다음과 같이 생각했다 . 만인이 구하고 있는 보편적인 선은 단 한 사람에 의해서밖에 소유되지 않은 개개의 사물 속에는 반드시 존재하지 않으리라 . 그런 사물을 나눠 가지면 , 소유자로 하여금 그 소유하고 있는 부분의 향유에 의해서 만족을 느끼게 하는 것보다 , 그가 소유하지 못하고 있는 부분의 결여에 의해 고뇌를 주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라고 , 그들은 진실한 선은 만인이 손실도 선망도 없이 일시에 소유할 수 있으며 누구도 자기의 의지에 반해서는 상실할 수 없는 것이어야 한다고 이해했다 . 그리고 그들의 이유는 이 원망이 만인에게 반드시 있고 , 그것을 가지지 않을 수 없는 이상 , 인간에게 자연스러운 것이라는 데 있고 , 그들은 여기서 결론하기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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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한 본성이 상실되고 모든 것이 인간 자신의 본성이 되었다 . 마치 진실한 선이 상실되고 모든 것이 인간의 진실한 선이 된 것처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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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어떠한 위치에다 자기를 놓아야 하는 것인가를 모른다 . 그는 분명히 갈팡질팡하고 있다 . 그 원래의 장소에서 떨어져 그것을 다시 찾아내지 못하고 있다 . 그는 사방을 분간 못할 어둠 속에서 불안스럽게 여기저기 찾아다니고 있지만 성공할 수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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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자연을 가지고 신을 증명하는 것이 취약성의 증거라고 한다면 , 성서를 멸시하지 말라 . 만약 이러한 모순을 알았다는 것이 힘의 증거라고 한다면 , 성서를 존중하도록 하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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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수에 굴복하여 그들을 숭배하게 된 인간의 비열함이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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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루아얄을 위해서 ( 불가해를 설명한 후에 쓰기 시작한 것 )   인간의 위대함과 비참함은 너무도 명백하기 때문에 , 참다운 종교는 인간에게 어떤 위대함의 원천과 어떤 비참함의 원천이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반드시 가르쳐 주는 것이어야 한다 . 즉 그것은 이들 놀라운 모순의 이유를 밝혀 주는 것이어야 한다 .

인간을 행복하게 하기 위해 진실한 종교는 유일의 신이 존재한다는 것 , 인간은 신을 사랑해야만 한다는 것 , 우리의 참다운 행복은 신에 있다는 것 , 또 우리의 유일한 불행은 신으로부터 이탈하는 데 있다는 것을 표시하여야 한다 . 그것은 우리가 암흑에 가득 차 있어 그 때문에 신에의 인식과 사랑을 방해당하고 있다는 것 , 그래서 우리의 의무는 우리에게 신을 사랑하는 것을 강요하지만 , 우리의 사욕이 신으로부터 우리를 배반케 하므로 우리는 불의에 가득 차 있음을 알고 있어야 한다 . 진실한 종교는 우리가 신과 우리의 진실한 선에 대한 이러한 반항의 이유를 밝혀 놓아야 한다 . 그것은 이 무능력에 대하는 구원법과 , 그 구원법을 획득하는 수단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것이어야 한다 . 이런 점에 관해 세계의 모든 종교를 음미하고 그것들을 충족할 수 있는 것이 그리스도교 외에 또 있는지 없는지를 생각해 주기를 바란다 .

우리들 자신에 있는 선을 완전한 선으로서 우리에게 제시하는 철학자들이 그것일까 ? 참다운 선은 그런 곳에 있을까 ? 그들은 우리의 불행에 대한 구원법을 발견했을 것인가 ? 인간을 신과 동등하게 만들어 놓음으로써 인간의 오만을 쾌유했을 것인가 ? 우리를 짐승과 동렬에다 놓은 사람들 , 지상의 쾌락을 내세에 있어서도 완전한 선이라고 제시한 마호메트교도 , 그들을 우리의 사욕의 구원법을 만들어 냈을 것인가 ? 그러면 어떤 종교가 우리의 오만과 사욕을 치료하는 길을 가르쳐 줄 것인가 ? 결국 어떤 종교가 우리의 선 , 우리의 의무 , 그것들로부터 우리를 배반하게 하는 취약성 , 그 취약성의 원인 , 그것을 치료할 수 있는 구원법 , 그 구원법을 획득할 수 있는 수단 등을 우리에게 가르쳐 줄 것인가 ? 다른 모든 종교는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 신의 하고자 하는 바 지혜가 무엇인가를 보기로 하자 .

신의 지혜는 말한다 . 「 인간에 대해서는 진리도 위안도 기대하지 말라 . 나는 당신들을 형성한 자이고 당신들이 무엇인가를 가르쳐 줄 수 있는 유일한 자이다 . 그러나 당신들은 내가 당신들을 형성해 놓았을 때의 상태에 있지 않다 . 나는 인간을 신성하고 순진하고 완전하게 만들어 놓았다 . 나는 그에게 빛과 이지를 채워 주었다 . 나는 그에게 나의 영광과 경이를 부여했다 . 그때 인간의 눈은 신의 위엄을 보았다 . 그때 그는 그를 맹목하게 하는 암흑 속에도 그를 고민시키는 죽음과 비참함 속에도 있지 않았다 . 그러나 그는 그렇게 많은 영관을 가질 수가 없어 오만에 빠지고 말았다 . 그는 자기를 그 자신의 중심으로 삼고 나의 구원에서 독립하고자 했다 . 그는 나의 지배에서 벗어났다 . 그리고 그 자신 속에 자기의 행복을 발견하고자 함으로써 그를 나와 동등하게 만들어 놓았으므로 , 나는 그를 제멋대로 내버려 두었다 . 그리고 그에게 순종했던 피조물을 그에게 배반시켜 그것들을 그의 적으로 만들었다 . 이리하여 오늘날 인간은 짐승과 흡사해지고 , 나에게서 멀리 떨어져 그 창조주의 희미한 빛을 남기고 있는 데 지나지 않는 것으로 되었다 . 이 정도까지 그의 일체의 지식은 소실되고 혼란되고 만 것이다 . 감성은 이성에서 독립하여 가끔 이성의 주인도 되고 이성을 구사하여 쾌락을 추구하게 하였다 . 모든 피조물은 그를 고민시키고 혹은 유혹한다 . 그리고 그들의 힘으로써 굴복시키든가 그들의 미로써 매혹시킴으로써 그를 지배한다 . 그 주에서도 매혹의 지배는 더욱 무섭고 더욱 당당한 것이다 . 」

「 오늘날 인간이 처해 있는 상태는 바로 이것이다 . 그들에게는 그들이 원래의 상태에 있어서 받던 행복의 무능한 본능이 어느 정도 남아 있다 . 그리고 그들은 맹목과 사욕의 비참 속에 빠졌는데 이것이 그들의 제 2 의 천성으로 되었다 . 」

「 내가 당신들에게 제시하는 이 원리로써 , 당신들은 ( 모든 사람을 놀라게 하고 그들을 그렇게도 많은 여러 갈래의 견해로 나누어 놓은 ) 여러 가지 모순의 원인을 알 수 있을 것이다 . 그런데 그렇게도 많은 비참한 시련을 가지고서도 없애 버릴 수 없는 위대함과 영광의 모든 느낌을 관찰하도록 하라 . 그리고 그런 느낌의 원인이 다른 본성에 있어야 할 것인가를 보도록 하라 . 」

 

포르루아얄을 위해 . 내일을 위해 ( 의인법 )   「 아아 ! 인간들이여 , 당신들의 비참의 치료법을 당신들 자신 속에 구한다는 것은 헛수고이다 . 당신들의 모든 빛은 당신들 자신 속에 진리도 선도 발견할 수 없으리라는 것을 가르쳐 줄 수 있는 데 불과하다 . 철학자들은 그것을 당신들에게 약속 했지만 , 약속을 이행할 수가 없었다 . 그들은 당신들의 진실한 선이 무엇이며 , 당신들의 진실한 상태가 무엇인가도 모른다 . 그들이 알지도 못하는 불행의 치료법을 어찌 그들이 제시할 수 있을 것인가 ? 당신들의 주요한 병은 당신들을 신으로부터 떼어 놓은 오만 , 당신들을 지상에다 붙들어 매 두는 사욕이다 . 그리고 그들은 이런 병중에서 적어도 하나를 조장시켜 주는 이외에 아무 일도 못했다 . 만약 그들이 당신들에게 신을 목적으로서 부여해 주었다면 그것은 당신들의 오만을 연마해 주기 위한 것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 그들은 당신들이 날 때부터 신에 흡사하고 신과 일치하고 있는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게 하였다 . 그리고 이런 오만의 공허함을 간파한 사람들은 당신을 다른 낭떠러지에 집어던지고 , 당신들의 본성이 짐승의 본성과 같다는 것을 이해시키고 , 당신들로 하여금 동물이 분여 받고 있는 사욕 속에서 당신들의 선을 구하게끔 만들어 놓았다 . 이것은 당신들의 불의를 고치는 방법이 아니다 . 이런 현명한 사람들은 그 방법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 나만이 당신들이 무엇인가를 이해시킬 수 있다… . 」

아담 ․ 예수 그리스도 .

만약 당신들이 신과 결합한다면 이는 은총에 의한 것이지 본성에 의한 것은 아니다 . 만약 당신들이 겸손해지게 된다면 이는 참회에 의한 것이지 본성에 의한 것은 아니다 .

이렇듯 이 이중의 능력은… .

당신들은 당신들이 신에게 만들어졌을 때의 상태대로 있는 것이 아니다 .

이런 두 개의 상태가 계시된 이상 당신들은 그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 당신들 자신의 느낌에 순종하고 자신을 관찰하도록 하라 . 그리고 거기에 이런 이중성이 생동하고 있는 징조를 발견할 수 있는가 없는가를 보 도록 하라 . 이다지도 많은 모순이 단일한 주체 속에 존재할 수 있을 것인가 ?

불가해 ? — 모든 불가해한 것은 반드시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 무한수 . 무한한 공간은 유한과 같다 .

신이 스스로 우리와 결합한다는 것은 믿기 어렵다 . 이런 견해는 우리의 비천함을 보는 데서만 생겨나는 것이다 . 그러나 만약 당신들이 참으로 성실하다면 내가 한 것처럼 더 한층 그것을 추구하고 , 정말로 우리는 너무도 비천하기 때문에 우리는 신의 자비가 우리를 신에 통하게 할 수 있는가 없는가를 인식할 수조차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 왜냐하면 자기가 너무도 약함을 아는 이 동물 ( 인간 ) 이 신의 자비를 측정해서 자기가 환상적으로 상정한 한계를 신의 자비에 맞추어 볼 권리를 어디서 획득했는가를 알고 싶기 때문이다 . 인간은 신이란 어떤 가인가를 거의 모르고 , 자기 자신이 어떤 자인가는 더욱 모른다 . 그래서 그 자신의 상태를 보고서는 완전히 당황하고 , 신은 인간을 그와의 접촉에 참여시킬 수 없다고 감히 말하고 한 다 .

그러나 나는 그에게 묻고 싶다 . 신은 인간이 신을 알고 그를 사랑하는 것 이외에 또 무엇을 요구하실 것인가 ? 또 인간은 자연적으로 사랑과 인식을 할 수 있는 자인데 어찌하여 신이 스스로를 인간에게 가르치고 사랑을 하게끔 할 수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 인간이란 적어도 자기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과 무엇을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음은 사실이다 . 그렇다면 만약 그가 자기의 처해 있는 암흑 속에서 어떤 자를 보고 , 지상의 사물 중에서 어떤 사랑할 대상을 발견했다고 하면 , 또 신이 그에게 신의 본질의 어떤 빛을 부여해 주었다고 하면 , 신이 우리들과 사귀려는 그와 같은 방식으로 인간이 신을 알고 신을 사랑하지 못할 도리가 있을 것인가 . 그러므로 이런 종류의 의논은 , 가령 표면으로는 겸손에 입각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손 치더라도 참을 수 없는 오만을 수반하고 있음은 의심할 여지도 없다 . 그 겸손은 , 우리는 자기가 무엇인지를 스스로 알 수가 없으므로 신에게서 가르침을 받는 외에 다른 도리가 없음을 우리에게 고백시켜 주는 종류의 것이 아니라면 , 진실하지도 않고 합리적이지도 않다 .

나는 당신들의 신앙을 까닭 없이 나에게만 귀속시키라고는 말하지 않는다 . 당신들을 전제적으로 복종시키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 나는 당신들에게 모든 이유를 해명해 주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 그것보다는 오히려 이들의 모순을 일치시키기 위해서 나에게 있는 신성의 표지를 설득적인 증거로서 당신들에게 해명해 주고자 한다 . 그러한 표지는 내가 어떤 자인가에 관해 당신들에게 확신을 주고 , 당신들이 부정할 수 없는 기적과 증거로서 나의 권위를 세워 줄 것이다 . 그리고 당신들은 그런 표지가 정말인가 아닌가를 자기로서는 알 수 없다는 것 이외에 그것을 부정할 이유를 발견하지 못하게 되고 내가 당신들에게 가르치는 바를 주저하지 않고 믿게 될 것이다 .

신은 인간을 구원하고자 생각하여 구원을 원하는 사람들에게 문을 열어 주려고 하였다 . 그러나 인간이 그것을 받아들일 만한 자격을 스스로 포기했으므로 , 신은 정당하게도 받을 자격이 없는 자에 대한 연민 때문에 어떤 자들에게는 주었던 것을 다른 어떤 자들에게는 그 완고함을 이유로 주기를 거부했다 . 만약 신이 가장 완고한 사름들의 편집에도 이기려고 했더라면 그들이 신의 본질의 진리를 의심하지 못하리만큼 분명히 자기를 계시함으로써 그렇게 하였을 것이다 . 그것은 최후의 날에 있어서 죽었던 자도 살아나고 , 눈이 어두운 자도 볼 수 있으리만큼 격심한 우렛소리와 자연의 붕괴로 나타날 것이다 .

신이 스스로를 나타내고자 하는 것은 이러한 방식에서가 아니고 유화한 강림에서이다 . 왜냐하면 많은 사람들이 신의 관용을 받을 만한 자격을 상실하였으므로 , 신은 그들이 원하지 않는 선을 상실시킨 채로 내버려두려고 한 것이기 때문이다 . 이 까닭으로 신이 분명히 신답게 모든 인간을 설파할 수 있는 정도로 절대적인 방식으로 자기를 나타낸다는 것은 옳지 못 했다 . 그러나 신이 신을 성실하게 구원하고 있는 사람들도 인지할 수 없으리만큼 숨어서 나타난다는 것 역시 옳지 못했다 . 신은 그런 사람에게는 자기를 완전히 가르치고자 했다 . 이렇듯 전심으로 신을 찾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명백히 나타나고 전심으로 신을 피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숨어 있으려고 하기 때문에 , 신은 자신에 관한 인식을 조절해서 신을 찾고 있는 자에게는 보일 수 있도록 , 찾고 있지 않는 자에게는 보일 수 없도록 표지를 해 놓았다 .

오직 뵈옵기를 원하고 있는 사람에게는 충분한 빛이 있고 , 반대의 경향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는 충분한 암흑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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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어떤 종교도 인간이 가장 훌륭한 피조물임을 인정하지 않았다 . 인간이 우월하다는 사실을 잘 인정한 사람들은 인간이 자기 자신에 관해 자연적으로 가지고 있는 비천한 감정을 비겁이나 배은망덕으로 생각하였고 , 그런 비천이 얼마나 현실적인가를 잘 인정한 이들은 인간에 대해 마찬가지로 자연스러운 이 위대한 감정을 가소로운 오만으로 취급했다 .

어떤 이들은 말한다 . “당신들의 눈을 돌려 신에 향하게 하라 . 당신들과 흡사하면서도 당신들로부터 숭배를 받기 위해 당신들을 만들어 놓은 자를 보라 . 당신들은 그와 흡사한 자가 될 수 있다 . 당신들이 그를 순종하기를 원한다면 지혜는 당신들을 그와 동등하게 만들어 줄 것이다”라고 . 에픽테토스는 말한다 . “자유인이여 , 머리를 들어라”라고 . 그런데 다른 어떤 이들은 인간에게 말한다 . “당신들의 눈을 돌려 땅을 바라보도록 하라 . 당신들은 약하고도 약한 벌레들이다 . 당신과 동류의 짐승을 바라보도록 하라”라고 .

그러면 인간은 어떻게 될 것인가 ? 신과 동등하게 되는 것인가 , 짐승과 동등하게 되는 것인가 ? 이는 얼마나 무서운 거리인가 ! 그러면 우리는 무엇이 되는 것인가 ? 이런 모든 것을 가지고 인간이 방황하고 있다는 것 , 그 지위에서 떨어졌다는 것 , 불안스레 그 지위를 찾고 있다는 것 , 그 지위를 다시는 찾아낼 수 없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자가 있을까 ? 그러면 누가 그를 거기에 데려다 줄 것인가 ? 가장 위대한 인간들도 그렇게 할 수가 없었는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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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로니즘은 진리이다 . 왜냐하면 결국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 이전에는 자기들이 어디 있었는가를 몰랐고 , 자기들이 위대한지 혹은 미소한지를 몰랐기 때문이다 . 그리고 그 중 어느 것을 말한 이도 그것을 전혀 모르고 이유 없이 우연히 추측했음에 불과하다 . 그리고 또 그들은 그 중 어느 하나를 배제함으로써 늘 과오를 범하고 있었던 것이다 .

Quod ergo ignorantes quaeritis , religio annuntiat vobis ( 그대들이 모르면서 구하고 있는 것을 종교는 그대들에게 밝혀 주리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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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본성을 다 알고 난 뒤에 = 어떤 종교가 진리이기 위해서는 그 종교는 우리의 본성을 알고 있어야만 한다 . 그것은 위대함과 미소함을 그리고 쌍방의 이유를 알고 있어야 한다 . 그리스도교 외의 어떤 종교가 그것을 알고 있었던가 ?

 

434

피론학파의 중요한 힘은 ( 자세한 것은 생략하기로 하지만 ) 신앙과 계시를 제외하고서는 이런 원리의 진실성을 확인하는 방도로서는 우리가 그것을 자기 속에서 자연적으로 지각하는 외에 아무것도 없다는 데 있다 . 그런데 이 자연적인 직관은 그런 원리가 진리임을 납득시키는 증거가 되지 못한다 . 왜냐하면 신앙을 제외하고는 인간이 선한 신에 의해 창조되었는지 악의에 찬 악마에 의해 창조되었는지 , 혹은 우연히 생겨났는지를 확인할 도리가 없으므로 , 우리에게 주어진 이런 원리는 과연 진실한지 허위인지 불확실한지가 우리의 기원 여하에 따라 의문이 되기 때문이다 . 그뿐더러 누구도 신앙을 떠나서는 자기가 깨어 있는지 잠자고 있는지를 확인할 수 없다는 것은 꿈속에서도 자기가 깨어 있음을 정말 깨어 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굳게 믿을 수 있는 경우가 있음을 보아도 알 수 있다 . 꿈속에서 공간 • 형상 운동을 보고 있다고 생각하고 , 시간이 흐르고 있음을 느끼고 , 그것을 재보기조차 한다 . 사실상 깨어 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움직인다 . 이리하여 인생의 반은 꿈속에서 지나고 , 기기서 무엇이 일어나건 간에 진실한 관념은 아무것도 없다고 우리 자신이 승인하고 있다 . 그렇다면 우리의 직관은 모두 착각이고 우리가 깨어 있다고 생각하는 인생의 다른 절반도 , 우리가 자면서도 깨어 있다고 생각하는 처음의 절반과 좀 다른 또 하나의 잠이 아니라고 누가 알 수 있을 것인가 ?

사람이 다른 사람들과 같이 꿈을 꾸고 우연히 그 꿈이 일치한 경우 ( 그것은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 , 그리고 혼자서 깨어 있을 때 사물이 전도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을 누가 의심할 것인가 ? 결국 우리가 가끔 꿈속에서 꿈을 꾸고 꿈 위에다 또 꿈을 중복하는 것처럼 우리가 깨어 있다고 생각하는 인생의 절반도 그 자신 하나의 꿈에 지나지 않고 , 우리는 그 위에가 또 꿈을 중복시켜 드디어 죽을 때에야 비로소 깨어나는 것이고 , 그 동안은 보통 잠잘 때와 마찬가지로 , 우리는 진과 선의 원리를 거의 가지고 있지 않는 것이 아닐까 ? 우리를 움직이는 이런 여러 가지 사상도 , 우리가 꿈속에서 경험하는 시간의 경과와 공허한 환상과 마찬가지로 착각에 지난 않는 것이 아닐까 ?

여기에 쌍방의 중요한 강점이 있다 . 나는 피론학파들이 이를테면 습관이라든가 , 교육이라든가 , 향토의 풍속이라든가 , 그 외 이러한 것과 비슷한 사물의 영향에 대해서 하는 의논을 사소한 일로 생략한다 . 그것들의 영향은 그런 공허한 토대 위에서만 독단을 쌓아올리는 보통 사람들의 대다수를 매혹한다고 하지만 , 피론학파의 약한 한 입김을 가지고서도 뒤집어지고 만다 . 만일 우리가 이를 잘 이해할 수 없다면 그들의 책을 보기만하면 된다 . 우리는 곧 이해하게 될 것이요 , 아마 지나칠 정도로 이해하게 될 것이다 .

나는 독단론자의 유일한 강점에 머무르고자 한다 . 그것은 성의와 진실을 가지고 말하기만 한다면 자연의 원리를 의심할 수 없다는 것이다 . 이에 대해서 피론학파는 한 마디로 말하면 우리의 본성의 기원까지도 포함해서 , 우리의 기원이 불확실하다는 것을 가지고 반박한다 . 독단론자는 세계가 있기 시작한 이래 늘 이에 대해 응답해 온 것이다 .

이리하여 사람들 사이에 싸움이 벌어진다 . 이 싸움에 있어서 각자는 거취를 결정하고 독단론이 아니면 피로니즘의 어느 한 편에 가담해야 한다 . 왜냐하면 중립을 지키고 있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훌륭한 피론학파일 것이기 때문이다 . 그런 중립이야말로 이 학파의 특성이다 . 그들에게 적대하지 않는 자는 훌륭히 그들 편에 가담하고 있는 자이다 ( 여기에 그들의 유리한 점이 나타난다 ) . 그들은 그들 자신의 편에도 들지 않는다 . 그들은 만사에 중립이고 , 무관심하고 , 회의하고 , 그들 자신에 대해서도 제외 예를 설정하지 않는다 .

그러면 인간은 이런 상태에 있어서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 만사를 의심해야 되는가 ? 자기가 깨어 있다는 것도 , 꼬집히고 있다는 것도 , 불태워지고 있다는 것도 의심해야 할 것인가 ? 자기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도 의심해야 할 것인가 ? 우리는 거기까지는 도달할 수 없다 . 그리고 나는 참으로 철저한 피론학파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을 사실이라고 생각한다 . 자연히 우리의 무력한 이성을 지탱하여 거기까지 극단으로 나가는 것을 저지하고 있는 것이다 .

그러면 반대로 , 인간은 진리를 파악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 조금이라도 떠밀리면 진리의 권능을 피할 수가 없고 , 붙잡고 있는 것마저 놓치지 않고서는 견디지 못하는 인간이 ? 그러면 인간이란 도대체 어떤 괴물일까 ? 신기하기 그지없다 . 요괴하기 그지없다 . 혼돈하기 그지없다 . 모순에 가득 찬 주인공 , 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가 ! 만물의 심판자이면서 어리석은 지렁이 . 진리의 수탁자이면서 불확실과 오류의 시궁창 . 우주의 광영이면서 우주의 쓰레기 .

누가 이 엉킨 것을 풀 것인가 ? 자연은 피론학파를 혼란하게 하고 , 이성은 독단론자를 혼란하게 한다 . 아아 ! 인간이여 , 자연의 이성에 의해 자기의 진실한 상태가 어떤 것인가를 탐구하고 있는 그대들은 대테 무엇이 되려는 것인가 ? 그대들은 이런 학파의 어느 쪽도 피할 수 없고 어느 쪽도 고집할 수 없느니라 .

그렇다면 오만한 인간이여 ! 그대들은 그대들 자신에 대해 얼마나 모순 덩어리인가를 알지어다 . 겸손하라 , 무력한 이성이여 . 조용하라 , 우둔한 본성이여 , 인간은 무한히 인간을 초극하고 있음을 깨달아라 . 그리고 그대들이 모르는 그대들의 진실한 상태를 그대들의 주인에게서 배우도록 하라 . 신의 말을 들어라 .

만일 인간이 타락하지 않았더라면 무죄한 채로 진리와 지복을 확실히 향유하였을 것이요 , 또 인간이 처음부터 끝내 타락해 온 것이었다면 , 진리와 지복을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 그러나 불행히도 , 그리고 우리의 상태 속에 있는 위대한 것이 전혀 없었던 것보다 더욱 불행하게도 , 우리는 행복의 관념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거기에 도달할 수가 없는 것이다 . 진리의 이미지를 느끼면서도 허위밖에 가지고 있지 않다 . 완전한 무지일 수도 없고 , 또 확실히 알 수도 없다 . 그만큼 우리는 원래 완전한 단계에 있었는데 , 불행히도 거기에서 떨어지고 말았다는 것이 명백하다 .

그러나 우리의 인식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신비 , 다시 말하면 원죄 전승의 신비가 , 그것을 무시하면 우리가 자신에 관해 아무런 이해도 얻을 수 없는 하나의 사물이라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 왜냐하면 최초의 인간의 죄가 그 본원에서 너무도 멀리 떨어져 있어 , 그 죄를 같이 나누어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할 수 없는 사람들까지도 유죄하게 만들어 놓았다는 것처럼 우리의 이성에 어긋나는 것은 확실히 없기 때문이다 . 이런 전승은 우리에게 불가능하게 보일 뿐더러 매우 부당하게도 생각된다 . 그도 그럴 것이 , 의지력이 없는 어린애들 , 그가 이 세상에 태어나기 6 천 년 전에 범해진 , 그와는 거의 관련이 없어 보이는 죄로 말미암아 영원히 정죄한다는 것처럼 우리의 빈약한 정의의 척도에 부합되지 않는 것은 없기 때문이다 . 확실히 이 교리처럼 격심하게 우리에게 와서 부딪치는 것은 없다 . 그러나 만물 중에서 가장 불가해한 이 신비가 없다면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해서 불가해하게 된다 . 우리의 상태를 풀어 줄 실마리는 이 심연 속에 엉클어져 있다 . 이렇듯 인간에게는 이 신비가 없으면 , 이 신비가 인간에게 불가해한 것보다 더욱 불가해지게 된다 .

이 까닭으로 신은 우리의 존재의 어려운 문제를 우리 자신에게 이해시키지 않으려고 , 그 해결의 실마리를 우리가 도달하지 못하리만큼 높은 곳에 아니 보다 잘 말한다면 낮은 곳에 감추어 둔 것으로 보인다 . 이리하여 우리는 이성의 오만한 활동에 의해서가 아니라 , 이성의 단순한 복종에 의해서 참으로 자기를 알 수 있게 된다 .

종교의 불가침한 권위 위에 견고하게 수립된 이런 토대는 동등하게 항구적인 두 개의 신앙의 진리가 있음을 우리에게 가르쳐 준다 . 그 하나는 , 인간은 창조 또는 은총의 상태에 있어서는 전 자연 위에 끌어올리어 신과 흡사해져 그 신성에 참여한다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타락과 죄의 상태에 있어서는 위에서 말한 상태에서 떨어져 짐승과 같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

이 두 개 명제는 동등하게 견고하고 확실하다 . 성서는 이를 명백히 우리에게 선언하며 어떤 곳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 Deliciae maae esse cum filiis hominum ( 나의 기쁨은 인간의 자식들과 같이 있는데 있다 ) . Effundam spiritum meum super omnem carnem ( 나는 나의 영혼을 모든 사람에게 바치겠노라 ) . Dii estis ( 너희들은 신이로다 ) 등 , 또 다른 곳애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다 . Omnis caro foenum ( 사람은 모두 풀 이로다 ) . Homo assimilatus est jumentis insipientibus , et similis factus est illis ( 인간은 심정 없는 짐승과 비유되어 그 동류가 된다 ) . Dixis in corde meo de filiis hominum . Eccl. 3( 나는 나의 마음을 향해 말하기를 인간의 자식들은… ) .

이로써 인간은 은총에 의해 신에 흡사해져 그 신성에 참여하는 자이지만 은총이 없으면 짐승과 같은 자임을 명백히 알 수 있다 .

 

435

이런 신성한 지식이 없으면 사람들은 그들의 과거의 위대성이 남아 있는 내적 의식에 의해 자기를 높이든가 혹은 그들의 현대의 취약성을 인정하고 자기를 끌어내리는 외에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 ? 왜냐하면 그들은 전체의 진리를 보지 못하였으므로 완전한 덕성에 도달할 수가 없 었기 때문이다 . 어떤 이들은 본성은 부패하지 아니한 것으로 생각하고 다 른 어떤 이들은 회복할 수 없는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모든 악덕의 두 개의 원천인 오만과 게으름을 피할 수가 없었다 . 그도 그럴 것이 , 그들은 비열하게 악덕에다 몸을 맡기든가 , 오만으로서 악덕에서 벗어나는 외에 다른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 그들은 인간의 우월을 알았을망정 그 타락은 몰랐다 . 그래서 게으름은 면했으나 오만에 빠지고 말았다 . 그리고 본성의 약함을 알았을망정 그 존엄함을 몰랐다 . 그래서 허영을 피할 수 있었으나 절망 속에 뛰어 들어가고 말았다 . 이런 데서 스토아학파와 에피쿠로스학파 , 독단파와 아카데미학파 등 여러 학파가 생겨난 것이다 .

오직 그리스도교만이 이 두 개의 악덕을 고칠 수가 있었다 . 지상의 지혜에 의해 하나를 가지고 다른 것을 축출한 것이 아니라 , 단순한 복음에 의해 양자를 같이 축출한 것이다 . 왜냐하면 그리스도교는 의인에 대해서는 그들이 신성에 참여할 수 있도록 끌어올리지만 , 그런 숭고한 상태에 있어서도 역시 그들은 모든 부패의 원천을 가지고 있어 , 그 때문에 일생 동안 오류 • 비참•죽음•죄에 빠지기 쉽다는 것을 가르쳐 줌과 동시에 , 신앙이 가장 없는 사람들에 대해서도 그들이 구세주의 은총에 참여 할 수 있음을 부르짖기 때문이다 . 이리하여 그리스도교는 그가 의로운 사람들을 떨게 하고 그가 죄 많은 사람들을 위안하면서 , 은총에도 참여할 수 있으면서 죄도 범할 수 있다는 , 만인에게 공통된 이중의 가능성을 가지고 공평하게 공포와 희망을 조절하고 , 단순한 이성이 할 수 있는 것보다도 무한히 낮게 사람들을 겸손 시키지만 결코 절망에 빠지게 하는 법은 없고 , 또 본성의 오만이 할 수 있는 것보다도 무한히 높게 사람들을 끌어올리지만 결코 자만하지는 않는다 . 이렇듯 유독 오류와 악적을 면하고 있으므로 그리스도교만이 사람을 가르치고 교정할 수 있다는 것이 분명해진다 .

그렇다면 이런 하늘의 빛을 믿고 숭배하는 것을 누가 거부할 수 있을 것인가 ? 왜 우리가 자기 내부에 지우기 어려운 우월의 특성을 느끼고 있다는 것은 대낮보다도 더 명백하지 않은가 ? 또 우리가 자기의 한탄스러운 상태의 결과를 늘 경험하고 있다는 것 역시 그와 마찬가지로 진실하지 않는가 ? 그러니 이 혼돈과 이 기괴한 혼란은 이런 두 개의 상태가 진실함을 거부할 수 없으리만큼 강한 소리로 우리에게 절규하고 있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

 

436

약함 = 사람들의 모든 영위는 부를 획득하는 데 있다 . 그러면서도 그들은 그 부의 소유가 정당함을 증명하는 이유를 제시할 수가 없다 . 왜냐하면 그들은 인간의 변덕만을 가지고 있을 뿐 부를 확실히 소유할 만한 역량을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 이것은 학문에 관해서도 마찬가지다 . 병이 들면 학문과 거리가 떨어지니까 . 우리는 진도 선도 바랄 수가 없다 .

 

437

우리는 진리를 기구한다 . 그러면서도 우리 자신 속에 불확실만을 발견한다 .

우리는 행복을 찾는다 . 그러면서도 비참과 죽음만을 발견한다 .

우리는 진리와 행복을 기구하지 않고서는 못 견딘다 . 그러면서도 확실도 행복도 얻을 수가 없다 . 이 욕망이 우리에게 남아 있는 것은 우리를 벌하기 위함과 동시에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어디서 떨어져 왔는가를 알게 하기 위해서이다 .

 

438

만약 인간이 신을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더라면 , 어찌하여 신에 있어서만 행복할 수 있는 것인가 ? 만약 인간이 신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라면 왜 이다지도 신에 반역하고 있는 것인가 ?

 

439

타락한 본성   인간은 그의 본질을 이루고 있는 이성에 따라서 행동하지 않는다 .

 

440

이성의 부패는 서로가 대단히 다르며 부조리한 풍습에 나타나고 있다 .

인간이 자기 자신 속에서 살지 않기 위해서는 진리가 왔어야 하는 것이었다 .

 

441

그리스도교가 인간의 본성은 부패하고 , 신으로부터 타락하고 있다는 원리를 계시하자마자 그것이 나의 눈을 열어 주고 도처에서 이 진리의 증거를 보여주었다는 것을 나는 고백한다 . 왜냐하면 자연이라는 것은 인간의 내외를 불문하고 도처에 잃어버린 신과 부패한 본성을 입증하고 있기 때문이다 .

 

442

인간의 진실한 천성 , 그의 진실한 선 , 진실한 덕성 , 진실한 종교 등은 이 인식과 분리할 수 없는 것이다 .

 

443

위대 비참 = 우리는 빛을 많이 가질수록 인간에 있어서의 위대함과 비열함을 더욱 많이 발견한다 .

보통 사람들 — 좀 더 교양이 있는 이들 , 즉 철학자들 — 은 보통 사람들을 놀라게 한다 .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철학자들을 놀라게 한다 .

그러므로 사람이 빛을 많이 가지는 데 따라 그만큼 더 많이 인식하게 된다는 것을 종교만이 철저히 인식시켜 줌을 보고서 놀라지 않는 이가 있을까 ?

 

444

사람들이 그들의 최대의 빛을 통해서 알 수 있었던 바를 이 종교는 그의 아이들에게 가르쳤다 .

 

445

원죄란 사람의 눈에는 우스운 것으로 보인다 . 아닌 게 아니라 그것은 우스운 것으로서 제공되어 있다 . 그러므로 당신들은 이 교리에는 도리가 없다고 하여 나를 책해서는 안 된다 . 왜냐하면 나는 이 교리가 도리 없이 존재하는 것으로 제공하고 있기 때문이다 . 그러나 이 어리석음은 이난의 모든 지혜보다도 현명하다 . Sapientius est hominibus ( 사람보다 현명하다 ) . 이것을 떠나서 인간이 무엇인가를 어떻게 말할 수 있을 것인가 ? 그의 모든 상태는 이 지각할 수 없는 한 점에 달려 있다 . 그런데 이것이 이성에 의해 어떻게 인식될 수 있을까 ? 왜냐하면 그것은 이성에 어긋나는 것이고 , 이성은 자기의 방법으로 그것을 발견하기는커녕 그것이 제출되기만 하면 거기서 멀어지기 때문이다 .

 

446

원죄에 관해 . 유대인에 의한 원죄의 완전한 전승 = 창세기 8 장의 말에 의하면 인간의 마음씨는 어릴 때부터 나쁘다고 한다 .

 

라비 모세 하달샨   이 나쁜 빵 종자는 인간이 만들어질 때부터 그 속에 자리 잡고 있었다 .

 

마세셋트 숫카   이 나쁜 빵 종자는 성서 안에 일곱 가지 명칭을 가지고 있다 . 그것은 악 • 포피 ( 包皮 ) • 적 • 더러움 • 추문 • 석심 ( 石心 ) • 북풍이라고 불리고 있다 . 이런 모든 것은 인간의 마음속에 숨겨지고 새겨져 있는 사악을 의미한다 .

미드라세 티림 같은 이야기를 하고 신이 인간의 선성을 악성에서 해방시켜 주리라고 말한다 .

이 사악이 매일처럼 인간에 대해 새로운 힘을 발휘한다는 것은 시편 37 편에 기록되어 있는 바이다 .

「 악한 자는 의로운 자를 역보고 그를 죽이려고 한다 . 그러나 신은 의로운 자를 버리시지 않을 것이다 」 . 이 사악은 현세에 있어서 인심을 유 혹함과 아울러 내세에 있어서는 그를 고발할 것이다 . 이런 모든 것은 ≪ 탈무드≫에 쓰여 있다 .

미드라세 티림 시편 4 편 「 늘 두려움을 가지고 죄를 범하지 말라 」 의 주해 . 삼가 너희 사욕을 무서워하라 . 그러면 사욕은 너희들을 죄로 이끌어가지 않을 것이다 . 또 시편 36 편 「 악한 자는 그 마음속에서 말하기를 신을 두려워하는 생각이 내 앞에 나타나지 말라 」 라고 한다 . 이것은 곧 인간 생래의 사악이 악한 자에게 그렇게 말한 것이다 .

 

미드라세 엘 코헤렐   「 가난하고 마음이 어진 어린애는 미래를 예지하지 못하는 어리석은 늙은 왕보다 낫다 . 」 어린애는 덕이고 , 왕은 인간의 사악이다 . 그것이 왕이라고 불리는 이유는 모든 지체가 그에게 순종하기 때문이다 . 늙었다고 불리는 까닭은 그것이 어릴 때부터 연로할 때까지 사람의 마음속에 있기 때문이다 . 어리석다는 말을 듣는 까닭은 그것이 인간이 예지하지 못한 「 멸망 」 의 길에 그를 인도하기 때문이다 .

이와 마찬가지 이야기는 미드라세 티림 에도 있다 .

베레셋트 라비아 의 시편 36 「 주여 , 나의 모든 뼈는 그대를 축복하리다 . 그대는 가난한 자를 전제자로부터 구출하셨나이다 」 의 주해 . 「 나쁜 빵 종자 이상으로 위대한 폭군이 있을 것인가 ? 」 그리고 잠언 25 장 「 너희 원수가 만약 굶주리거든 그에게 먹을 약식을 주어라 」 의 주해 . 이것은 만약 나쁜 빵 종자가 굶주려 있으면 잠언 9 장에 쓰여 있는 지혜의 약식을 주고 , 만일 목말라 있으면 이사야 55 장에 쓰여 있는 물을 주라는 것이다 .

미드라세 티림 마찬가지 이야기를 하고 성서가 여기서 우리의 원수라고 말한 것은 나쁜 빵 종자를 의미하고 , 또 그에게 그의 양식과 물을 준다는 것은 그의 머리에다 뜨거운 석탄을 놓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

미드라세 엘 코헤렐 전도의 9 장 「 위대한 임금 조그만 거리를 공격하다 」 의 주해 . 여기 위대한 임금이라 함은 나쁜 빵 종자이고 그가 거리를 향해 빙 둘러 세워 놓은 큰 장치라 함은 유혹을 의미한다 . 그리고 그 거리를 구원한 지혜로운 가난한 이가 있었다고 하는 것은 곧 덕을 가리킨다 .

그리고 시편 41 편 「 가난한 자를 돌보아 주는 자 복이 있으리라 」 의 주해 .

그리고 시편 78 편 「 영혼은 가고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 의 주해 . 이 말을 어떤 이들은 잘못 해석하여 영혼의 불사를 반박하는 이유로 삼았다 . 그러나 그 의미는 이 영혼은 나쁜 빵 종자이고 , 그것은 인간이 죽을 때까지 따라다녀 부활할 때는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는 소리이다 . 시편 3 편에도 같은 말이 있다 .

그리고 시편 16 편에도 ,

랍비들의 원리 . 두 개의 구세주 .

 

447

사람들이 정의는 땅에 떨어졌다고 말함으로써 그들이 원죄를 알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인가 ? Nemo ante obitum beatus est ( 아무도 죽을 때까지는 행복하지 않다 ) 라는 것은 죽음과 더불어 영원한 본질적인 지복이 시작됨을 그들이 인정하고 있는 셈이다 .

 

448

미톤은 본선이 타락했으며 또 인간이 도의에 어긋났음을 잘 알고 있다 . 그러나 그는 , 왜 인간이 더 높이 날 수 없는 가를 모르고 있다 .

 

449

질서 = 「 타락의 장 」 의 뒤에 다음과 같이 말하다 . 「 그 상태에 있는 이가 거기에 만족하고 있는 사람이든 불만족하고 있는 사람이든 모두 그 상태를 잘 알고 있다는 것은 옳다 . 그러나 모든 사람이 속죄를 이해하고 있다는 것은 옳지 못하다 . 」

 

450

만일 사람이 자신이 오만과 야심과 사욕과 취약과 비참과 부정에 가득 차 있음을 모른다고 하면 그는 확실히 장님이라 하겠다 . 그리고 또 알고 있으면서도 거기에서 구출되기를 원하지 않는다고 하면… 인간에 관해 무엇이라 말하랴 ? 그렇다면 인간의 결함을 이렇게도 잘 알고 있는 종교를 존경하는 것 외에 또 그에 대해서 이렇게도 유망한 구원법을 약속하는 종교가 진리이기를 원하는 것 외에는 할 수 있을 것인가 ?

 

451

모든 인간은 날 때부터 서로를 증오한다 . 인간은 사욕을 공공의 복리에 봉사하도록 가급적 많이 사용한다 . 그러나 그것은 겉치레에 지나지 않고 자비심의 허상에 지나지 않는다 . 실제로는 그것이 증오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

 

452

불행한 사람들에게 동정하는 것은 사욕에 어긋나는 것이 아니다 . 그와 반대로 인간은 아무것도 주지는 않고 그런 호의의 증거를 보여주며 자애 깊다는 평판을 얻기를 좋아하는 것이다 .

 

453

인간은 사욕으로부터 경찰이나 도덕이나 재판에 관한 훌륭한 규칙을 만들고 또 끄집어냈다 . 그러나 실제로는 인간의 이 더러운 뿌리 , 이 figmentum malum ( 나쁜 상태 ) 는 가려져 있을 따름이지 제거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

 

454

부정 = 그들은 남을 해치지 않고서 자기의 욕망을 만족시키는 방법을 발견할 수가 없었다 .

 

455

「 자아 」 은 미워해야 할 것이다 미톤 군 , 군이 그것을 숨겨 보게나 .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것을 제거한 셈은 못될 것이다 . 그러므로 군은 여전히 미움을 받아야 한다 — 그럴 리가 있나 . 왜 ? 우리가 하고 있는 것처럼 모든 이에게 친절히 대하면 남에게 미움을 받을 이유가 있겠나 — 그것은 그렇다 . 만약 자아를 미워한다는 것이 자아에서 생기는 불쾌만을 미워한다는 뜻이라면 . 그러나 내가 그것을 미워하는 까닭이 자아기 만사의 중심이 되면 부정하기 때문이라고 하면 나는 여전히 그것을 미워하는 셈이 된다 .

한 마디로 말하면 자아는 두 개의 특성을 가지고 있다 . 그것은 만사의 중심이 되므로 부정하다 . 그것은 남을 종속시키고자 하므로 남에게는 불쾌하다 . 왜냐하면 개개의 자아가 적이 되고 다른 모든 자아의 폭군이 되려고 하기 때문이다 . 군은 불쾌함을 제거하지만 부정함은 제거하지 않는다 . 그래서 자아의 부정함을 미워하는 사람들에게 그것을 사랑스러운 것으로 만들어 주지 않는다 . 자아 속에 적을 인정하지 않는 부정한 사람들에게만 그것을 사랑스러운 것으로 만들어 준다 . 따라서 군은 여전히 부정하고 , 부정한 사람만을 기쁘게 해 줄 따름이다 .

 

456

사람들이 다른 모든 사람들 위에만 서 있으려 하고 , 그들 자신의 재산 , 그들의 행복과 생명의 영속을 다른 모든 사람들의 그것보다 좋아한다는 것은 얼마나 잘못된 판단인가 !

 

457

각 인간은 자기 자신에 대해 하나의 전부다 . 왜냐하면 그가 죽으면 그로서는 모든 것이 죽는 셈이 되기 때문이다 . 이 까닭으로 인간은 만물에 대해 전부라고 생각하게 된다 . 자연은 우리의 처지에서 판단할 것이 아니라 그 자신에 따라서 판단해야 한다 .

 

458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은 육의 욕 , 눈의 욕 , 생명의 자과 ( 自誇 ) 이다 . li- bido sentiendi , libido sciendi , libido dominandi ( 관능욕 ․ 지식욕 ․ 지배 욕 ) 화로다 . 이 세 줄기의 불의 강이 흐르고 있다기보다 불타고 있는 저주된 지상은 ! 행복이로다 . 이 강 위에 있으면서 가라앉지도 않고 휩쓸려 들어가지도 않고 , 태연자약하게 낮고 안전한 장소에 , 서지도 않고 앉아 있는 사람들은 ! 그들은 빛이 비치기까지 , 거기서 일어서지 않고 편안히 쉬다가 , 그들을 끌어올려 성 예루살렘의 성문에 확실히 서게 하려는 자에게 손을 내민다 . 거기에서는 벌써 오만도 그를 책하고 넘어뜨릴 수가 없다 . 그러나 그들은 눈물을 흘린다 . 멸망하는 모든 것이 격류에 휩쓸려 흘러가는 것을 보고서 그런 것은 아니다 . 그 오랜 우리의 세월을 두고 부단히 앙모해 온 그들의 사랑하는 고국 , 하늘의 예루살렘이 그리워서이다 .

 

459

바빌론의 강은 흐르고 , 내리고 휩쓸어 들인다 .

아아 , 성스러운 시온의 거리여 , 거기서는 모든 것이 안정되어 있어 허물어지는 법이 없다 !

우리는 강물 위에 앉아야 한다 . 밑도 아니고 속도 아니고 , 바로 위에 . 또 서 있지 않고 앉아 있어야 한다 . 앉는 것은 겸손하기 위해서이고 , 위에 있는 것은 안전하기 위해서이다 . 그러나 우리는 예루살렘의 성문에서는 일어서게 될 것이다 .

그 쾌락이 머물러 있는지 흐르는지를 보라 . 만약 흘러간다면 그것은 바빌론의 강이로다 .

 

460

육체의 욕 , 눈의 욕 , 오만 등 = 사물에는 세 개의 질서가 있다 . 육체 • 정신 • 의지이다 . 육체적인 것은 부자나 왕자이다 . 그들은 육체를 목적으로 한다 . 탐구자나 학자는 그들의 정신을 목적으로 한다 . 현자들 , 그들은 정의를 목적으로 한다 .

신은 만물을 지배해야 하고 , 만물은 그에게 귀의해야 한다 . 육의 사물은 본래 사욕의 지배에 속하고 , 정신의 사물은 본래 탐구심의 지배에 속하며 , 지혜의 사물은 본래 오만의 지배에 속한다 . 이것은 사람이 재산이나 지식을 뽐낼 수 없다는 뜻은 아니다 . 다만 그것들은 오만의 장소가 아니라는 소리다 . 왜냐하면 우리는 어떤 이가 학자임을 인정하면서도 그가 오만함은 잘못이라고 그에게 설득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 오만 의 본래의 장소는 지혜이다 . 왜냐하면 우리는 어떤 이가 지식인으로 자 처함을 인정하면서도 그가 뽐내고 있음을 잘못이라고 말할 수 없기 때 문이다 . 그것은 정당한 일이니까 . 이렇듯 신민이 지혜를 주신다 . 그러므로 Qui gloriatur , in Domino glorietur ( 뽐내는 자는 주에 의해 뽐내야 한다 ) .

 

461

세 개의 사욕은 세 개의 학파를 만들었다 . 철학자들은 세 개의 사욕 중 어느 하나를 따르는 외에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

 

462

진실한 선의 탐구   보통 사람들은 선을 재산이나 , 외적인 행복이나 , 최소한 심심풀이에다 둔다 . 철학자들은 그런 모든 것의 공허함을 표시하고 , 그들이 놓을 수 있는 자리에다 그것을 놓았다 .

 

463

예수 그리스도 없이 신을 믿는 철학자들에 대해 .

철학자들 = 그들은 신만이 사랑받고 찬미될 만한 자격이 있다고 믿으면서도 . 사람들로부터 사랑받으며 찬미되기를 원했다 . 그들은 자기들의 부패를 모른다 . 만일 그들이 신을 사랑하고 존경하는 감정에 가득 차 있다고 스스로 느끼고 거기에 그들의 주요한 기쁨을 발견한다 하거든 자기를 선하다고 생각해도 좋다 . 그것은 좋은 일이니까 . 그러나 만일 그들이 거기에 혐오를 느끼고 남들의 존경을 받으면서 입신하고자 하는 의향밖에 가지지 않는다면 , 또 완전한 이상으로서 , 그들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남들을 강요하지 않고 그들 철학자를 사람하게 함으로써 행복을 느끼게 하려는 데 있는 것이라면 , 나는 그런 이상을 무서운 것이라고 말하리라 . 무엇이냐고 ! 그들은 신을 알고 있었는가 . 그리고 사람들이 신을 사랑하는 것만을 원하지 않고 그들 자신에게도 주목해 주시기를 원하고 있었는가 ! 그들은 사람들의 자의적인 행복의 대상이 되기를 원하고 있었던 것이다 .

 

464

철학자들 = 우리는 우리를 밖으로 내던지는 사물에 충만되어 있다 .

우리의 본능은 우리의 행복을 자기의 밖에서 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느끼게 한다 . 우리의 정욕은 그 대상이 나타나 그를 자극하지 않을 때에 있어서도 우리를 외부로 떠민다 . 외부의 대상은 또 그 스스로가 우리를 유인하고 , 우리가 그것을 생각하지 않을 때에도 우리를 불러낸다 . 이 까닭으로 철학자들이 , “당신 자신에게로 돌아가라 . 당신들은 거기서 당신들의 선을 발견하게 되리라”라고 말했댔자 쓸데없는 것이다 . 사람들은 철학자들을 믿지 않는다 . 그들을 믿는 이들은 가장 무능하고 가장 어리석은 자들이다 .

 

465

스토아학파 사람들은 말한다 . “당신들은 자신 속으로 돌아가라 . 거기 서 당신들은 평안을 발견하게 되리라”라고 . 그러나 이것은 진실하지 않 다 .

다른 이들은 말한다 . “밖으로 나가라 . 심심풀이 속에 행복을 찾으라”라고 . 그러나 이것도 진실하지 않다 . 병이 깃들어 온다 . 행복이란 우리의 외부에도 내부에도 없다 . 그것은 신의 속에 , 즉 우리의 외부와 내부에 있는 것이다 .

 

466

에픽테토스는 길을 완전히 깨달았을 때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 “당신들은 길을 잘못 들었다”라고 했다 . 그는 그 길 이외에 다른 길이 있음을 표시했으나 그리로 인도해 주지 않았다 . 그것은 신이 바라는 바를 원하 는 길이다 . 예수 그리스도만이 거기에 인도하신다 . via veritas ( 길 진리 ) .

체논 . 자신의 악덕 .

 

467

실제의 이유 = 에픽테토스 . 「 당신은 머리를 앓고 있다 」 라고 말하는 사람들 . 이것은 같은 것이 아니다 . 사람은 건강을 보증해도 정의를 보증하지 못한다 . 그리고 사실 그의 정의는 유치한 것이었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 우리의 힘으로 할 수 있을까 없을까 」 라고 말 할 때에 정의는 논증할 수 있다고 믿었다 . 그리고 심정을 규정하는 것이 우리의 역량 밖의 일임을 인정하지 않았다 . 그러면서도 그리스도교도가 존재한다는 사실로부터 그것을 결론한 것은 그의 잘못이었다 .

 

468

다른 종교는 어느 하나도 자기 증오를 주장하지 않았다 . 그래서 다른 종교는 자기를 미워하고 참으로 사랑할 존재를 구하고 있는 이들의 뜻에 맞을 수가 없다 . 그러나 그런 이들은 겸손한 신의 종교에 관해서는 이야기를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 해도 곧 이를 받아들일 것이다 .

 

469

나는 내가 존재하지 않았을는지 모른다고 느낀다 . 「 자아 」 는 나의 사고 속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 그러므로 내가 탄생하기 전에 나의 어머니가 피살되었다면 , 이 사고하는 「 나 」 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 그렇다면 나는 필연적인 존재가 아니다 . 이와 마찬가지로 나는 영원도 아니고 무한도 아니다 . 그러나 자연 중에는 필연적이고 영원하고 , 그리고 무한한 존재가 있음을 나는 명백히 알고 있다 .

 

470

“기적을 보았더라면 나는 회심했을 것이다”라고 그들은 말한다 . 그들은 자기들이 알지도 못하는 것을 행동한다고 어떻게 보증할 수 있을까 ? 그들은 이 회심이 자기가 제멋대로 생각해 낸 교류와 회화로서의 신에 대한 예배에서 일어난다고 상상하고 있다 . 참다운 회심은 이 보편적인 존재 , 즉 우리가 가끔 성화를 내게 하고 , 아무 때나 우리를 정당하게 멸망할 수 있는 존재 앞에서 우리 자신이 완전히 무가 되는 데에 있고 , 그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 , 그의 냉담만 자아내는 외에 그로부터 아무것도 받을 자격이 없다는 것을 인식하는 데에 있다 . 회심은 신과 우리 사이에는 극복하지 못할 대립이 있다는 것 , 매개자가 없으면 신과의 일치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아는 그때에 이루어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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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자신에게 집착한다는 것은 , 가령 기뻐 스스로 집착하는 것이라 하더라도 부당한 것이다 . 나는 나에게 그런 염원을 일으키게 해 준 사람들을 배반하게 될 것이다 . 나는 어느 누구의 목적도 아니요 , 그들을 만족시킬 아무것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멀지 않아 죽어야 할 존재가 아닌가 ? 그렇게 되면 그들의 집착의 대상도 죽게 될 것이다 . 그러므로 ( 허위를 믿게 한다는 것은 , 가령 내가 친절히 사람들을 설득하고 , 사람들이 기뻐 그것을 믿고 , 또 내가 거기에 기쁨을 느낀다손 치더라도 죄인 것처럼 ) 나를 사랑하게 한다는 것은 , 가령 내가 사람들을 유인해서 나에게 집착시킨다 해도 죄악인 것이다 . 나는 거짓말을 믿는 데 동의한 자에 대해 , 그로 말미암아 내가 어떤 이익을 얻게 된다 해도 결코 그것을 믿어서는 안 된다고 충고해야만 하는 것처럼 , 나에게 집착해서는 안 된다고 충고해야 한다 . 왜냐하면 그들은 신을 기쁘게 하기 위해 , 또 신을 구하게 하기 위해 생애를 바치고 근심해야 하기 때문이다 .

 

472

자기 의사는 만사를 뜻대로 할 수 있었던 경우에도 결코 만족하지 않을 것이다 . 그러나 사람은 자기 의사를 내던진 그 순간부터 만족하게 된다 . 그것이 없어지면 사람은 불만을 가질 수가 없겠고 , 그것이 있는 한 사람은 만족할 리가 없겠다 .

 

473

사고하는 지체에 가득 찬 신체를 상상해 보라 .

 

474

지체 = 여기서부터 시작한다 — 우리가 자기에게 주어야 할 사랑을 조정하기 위해서는 사고하는 지체에 가득 찬 신체를 상상해야 한다 . 왜냐하면 우리는 전체자의 지체이고 , 각 지체가 그 자신을 어떻게 사랑할 것인가를 알고 있는 까닭이다… .

 

475

만일 다리나 손에 제각기의 의지가 있다면 그들은 전체를 통치하고 있는 제 1 의 의지에 제각기의 의지를 복종시키지 않는 한 질서를 유지할 수 없을 것이다 .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들은 무질서하게 되고 불행하게 된다 . 오직 전체의 선을 바램으로써 그들은 각자의 선을 실현하게 된다 .

 

476

우리는 신만을 사랑해야 하고 자기만을 미워해야 한다 .

만일 다리가 몸에 속해 있다는 것 , 자기가 의존하고 있는 몸이 있다는 것을 항상 모르고서 , 자기 자신만을 알고 또 사랑했을 따름이었다가 자기가 의존하는 몸에 속하고 있음을 알게 되는 경우 ( 자기의 지난날의 생활에 관해 , 자기에게 생명을 준 이 몸이 자기가 그것을 떠났던 것처럼 , 그 몸이 자기를 버리고 자기로부터 떨어졌다면 자기는 꼭 멸망했을 ) , 그 몸에 대해 무익하였다는 데 대해 얼마나 후회하고 얼마나 부끄러움을 느끼게 될 것인가 ! 그리고 그 몸의 일부로서 보존되기를 얼마나 기원할 것인가 ? 또 몸을 통치하고 있는 의지에 통치되기 위해 얼마나 복종하고 헌신할 것인가 ? 만약 필요하다면 자기가 절단되는 것도 승락할 것이다 . 그렇지 않으면 지체로서의 특성을 상실하게 되기 때문이다 . 왜냐하면 모든 지체는 전체를 위해서는 멸망도 자원해야 하고 , 전체야말로 모든 지체가 존재하는 유일한 목적이기 때문이다 .

 

477

우리가 남으로부터 사랑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고 , 그러기를 바라는 것은 부당하다 . 만약에 우리가 분별 있고 공평하게 이 세상에 태어나 우리 자신과 남을 잘 알고 있었다면 우리는 자기의 의지에 대해 이런 편향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 그러나 우리는 그런 편향을 가지고 이 세상에 태어났다 . 그러므로 우리는 부당한 자로서 태어난 것이다 . 모든 것이 자기를 향하고 있으니 말이다 . 이것은 일체의 질서에 어긋난다 . 우리는 일반적인 것에 향해야 할 것이다 . 자기에의 편향은 전쟁 • 경찰 • 경제 • 인간의 개체 등에 있어서의 모든 무질서의 시초이다 . 그러므로 의지는 부패해 있다 .

만약 자연적 및 문화적 공동체의 각 지체가 전체의 행복을 향한다면 , 공동체 그 자체는 그것을 지체로 삼고 있는 더욱 일반적인 다른 전체로 향해야 할 것이다 . 따라서 인간은 일반적인 것을 향해야 한다 . 우리는 부당하게 부패해서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이다 .

 

478

우리가 신을 생각하려고 할 때 , 우리의 마음을 그곳에서 떠나게 하고 다른 것을 생각하도록 유혹하는 자는 없을까 ? 이런 모든 것은 악이고 우리가 이 세상에 가지고 태어난 것이다 .

 

479

만일 하나의 신이 존재한다면 우리는 그만을 사랑해야 하며 , 흘러가는 피조물을 사랑해서는 안 될 것이다 . 「 지혜의 서 」 에 있는 불신자들의 추론은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토대에만 입각하고 있다 . 그들은 말한다 . “그렇게 되어 있음을 알고 피조물로서 즐겨 나가자” 고 . 이것은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의논이다 . 그러나 만일 사랑할 유일의 신이 있다고 하면 , 그들은 그런 결론을 내리기 않고 정반대의 결론을 내리게 된 셈이다 .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지식인들의 결론 , 즉 「 하나의 신이 존재한다 . 그러므로 피조물을 즐겨서는 안 된다 」 라는 것이다 .

그러므로 우리를 유인하여 피조물에 집착하게 하는 것은 모두 악이다 . 왜냐하면 그것들은 우리가 신을 알고 있는 경우에는 신이 봉사하는 것을 방해하고 우리가 신을 모르고 있는 경우에는 신을 구하는 것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 그런데 우리는 사욕에 가득 차 있는 고로 또 악에도 가득 차 있다 . 따라서 우리는 우리 자신과 우리를 유인하여 유일한 신 이외에 다른 것에 집착시키는 모든 것을 미워하지 않으면 안 된다 .

 

480

각 지체를 행복하게 하기 위해서는 그 각자가 하나의 의지를 가지고 또 그 의지를 전체에 복종시킴이 필요하다 .

 

481

스파르타인이나 그 외의 사람들의 훌륭한 죽음의 모범은 우리를 그다지 감동시키지 않는다 . 왜 ? 그것은 우리에게 얼마나 도움을 줄 것인가 ? 그러나 순교자들의 죽음의 모범은 우리를 감동시킨다 . 그것은 「 우리의 지체 」 이므로 우리는 그들과 공통한 유대를 가지고 있다 . 그들의 결의는 우리의 결의를 형성할 수 있다 . 단지 모범에 의해서가 아니라 , 아마 그들의 결의가 우리의 결의를 촉진할 수 있었기 때문이리라 . 이런 것은 이교도의 모범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 우리는 그들과 아무런 연결을 갖지 않는다 . 이는 마치 사람은 자기와 아무런 관계가 없는 제 3 자가 부자가 되는 것을 보고서는 부자가 될 수 없지만 , 자기의 아버지나 남편이 부자가 되는 것을 보면 부자가 될 수 있는 것과 같다 .

 

482

도덕 = 신은 천지를 창조했으나 천지는 자기의 존재의 행복을 감지하지 못하므로 , 신은 그것을 의식하는 존재 , 즉 사고하는 ( 지체 ) 가 하나의 전체를 구성하고 있는 존재를 만들고자 했다 . 왜냐하면 우리의 지체는 그들 지체의 연결의 행복이나 , 그들의 놀라운 지성의 행복이나 , 그들에게 정신을 불어넣어 주고 그들을 생장 • 존속시키기 위해 자연이 배려하여 주는 행복을 느끼지 않기 때문이다 . 만일 그들이 그것을 느끼고 그것을 안다면 얼마나 행복스러운 것일까 ! 그러나 그러기 위해서 그들은 그것을 인식하는 지성과 보편적인 영혼의 의지에 동의하는 선한 의지를 필요로 할 것이다 . 그러나 지성이 수여된다 하더라도 그들이 그것을 자기의 양분으로 사용하는 데만 그치고 , 다른 지체에 보내기를 허용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비단 부정할 뿐만 아니라 불쌍하기도 하고 , 따라서 자신을 사랑하기보다 오히려 증오하게 될 것이다 . 그들의 축복은 그들의 의무와 마찬가지로 그들이 속해 있는 전체의 혼 , 즉 그들이 자신을 사랑 하고 있는 이상으로 그들을 사랑하고 있는 혼의 안내에 동의하는 데 있다 .

 

483

지체로서 존재한다는 것은 전체의 정신에 의해서만 , 또 전체를 위해서만 생명을 가지고 존재하고 운동을 한다는 뜻이다 .

지체가 분리해서 자기가 속해 있는 전체를 이미 돌보지 않게 된다면 , 그것은 멸망해가고 죽어가는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 . 그런데 지체는 자기를 전부라고 믿고 , 자기가 의존해 있는 전체를 돌보지 않으므로 자기에게만 의존해 있다고 믿고 , 자기를 중심으로 삼아 자기 자신을 전체로 하려고 한다 . 그러나 자기 속에 생명의 근원을 찾아낼 수 없으므로 방황하지 않을 수 없다 . 또 자기가 전체가 아님을 느끼면서도 , 자기가 어떤 전체의 지체임을 깨닫지 못하는 데서 자기의 존재의 불안정에 놀란다 . 마침내 자기를 알게 되면 그는 마치 자기 자신에기 돌아간 것처럼 전체를 위해서만 자기를 사랑할 따름이고 , 지난날의 방황을 후회한다 .

지체는 그 성질상 자기 자신을 위해 자기에게 복종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면 다른 어떤 것도 사랑할 수가 없다 . 왜냐하면 각자는 무엇보다도 자기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 그러나 전체를 사랑한다는 것은 자기를 사랑한다는 것이다 . 그 까닭은 지체는 전체에 있어서 , 전체에 의해서 , 그리고 전체를 위해서만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 Qui adhaeret Deo unus spiritus est ( 신과 결합하는 자는 신과 하나의 영을 이룬다 ) .

전체는 손을 사랑한다 . 손이 만약 하나의 의지를 가지고 있다면 혼이 손을 사랑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신을 사랑해야 할 것이다 . 그것을 넘는 사랑은 모두 부당하다 .

Adhaere Deo unus spiritus est ( 신과 결합하면 하나의 영이 된다 ) .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 지체이므로 자기를 사랑한다 .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가 전체이고 자기가 그 지체인 고로 그리스도를 사랑한다 . 삼위일체처럼 전체는 하나이고 , 하나는 전체 속에 있다 .

 

484

두 개의 율법은 모두 정치적 법률보다 낫게 그리스도교 국가를 통치하는 데 충분하다 .

 

485

참다운 유일의 도덕은 , 그러므로 자기를 미워하는 것 ( 왜냐하면 인간은 그 사욕 때문에 미워해야 할 것이기 때문 ) 과 , 참으로 사랑할 존재를 사랑하기 위해 그 존재를 구하는 것뿐이다 . 그러나 우리는 우리 자신 밖에 있는 것을 사랑할 수가 없기 때문에 우리 속에 있으면서도 우리 자신이 아닌 존재를 사랑해야 한다 . 이것은 전 인류의 한 사람 한 사람에 관해서 진리이다 . 그런데 보편적 존재만이 그렇다 . 신의 나라는 우리 속에 있다 . 보편적인 선은 우리 속에 있고 우리 자신이면서도 우리 자신이 아닌 것이다 .

 

486

인간의 존엄은 그 타락 이전에는 피조물을 사용하고 지배하는 데 있었다 . 그러나 현재에는 피조물에서 떠나고 그에 복종하는 데 있다 .

 

487

그 신앙에 있어서 유일신을 모든 사물의 근원으로 숭배하지 않는 종교 , 그 도덕에 있어서 유일신을 모든 사물의 목적으로 사람하지 않는 종교는 모두 허망하다 .

 

488

…그러나 신이 처음이 아니라면 결코 그는 끝이 될 수 없다 . 우리는 눈을 높은 곳에 돌리고 있지만 , 모래 위에 몸을 지탱하고 있다 . 그러므로 땅이 허물어진다면 인간은 하늘을 바라보면서 넘어질 것이다 .

 

489

만일 만물의 유일의 근원이 있고 , 만물의 유일의 목적이 있다면 , 만물은 그것을 통해서 , 또 그것을 위해서 존재하게 된다 . 그러므로 참다운 종교는 우리에게 그것 ( 神 ) 만을 숭배하고 사랑해야 할 것을 가르쳐 주어야 한다 . 그러나 우리는 자기가 알지 못하는 것을 숭배할 수도 없고 , 자기 이외의 것을 사랑할 수도 없기 때문에 이러한 의무를 가르쳐 주는 종교는 이 무능력에 관해서도 가르쳐 주고 그 구원법도 가르쳐 주어야 할 것이다 . 그것은 한 사람 때문에 만인이 타락하고 신과 우리와의 결합을 깨뜨려 주었지만 한 사람에 의해 그 결합이 회복되었음을 우리에게 가르쳐 준다 .

우리는 신의 사랑을 완전히 배반한 채 이 세상에 태어났다 . 따라서 우리가 죄를 가지고 채어났다는 것은 필연적이다 . 그렇지 않으면 신이 부정한 셈이 된다 .

 

490

인간이란 선행을 하는 데에는 습관이 되어 있지 않고 , 선행이 행하여진 것을 보고 거기에 보답하지 않는 데에만 습관화되어 있으므로 신까지도 자기류로 해석한다 .

 

491

참다운 종교는 신에의 사랑을 의무로 하는 데 그 특색이 있어야 한다 . 그것은 매우 지당한 것인 데도 불구하고 어떤 종교도 그것을 명하지 않았었는데 , 우리는 종교는 그것을 명했다 . 참다운 종교는 또 사욕과 무력도 알고 있어야 하는 법인데 , 우리의 종교는 그것을 알고 있다 . 그런 종교는 그에 대한 구원법도 마련해 주어야 하는데 그 중의 하나는 기도이다 . 어떤 종교는 신을 사랑하고 신에 복종할 것을 ( 그러면 인간에게 힘을 줄 것을 ) 신에게 요구하지 않았다 .

 

492

자기에게 있는 자애심을 증오하지 않고 자기 스스로를 신으로 만들려는 본능을 증오하지 않는 자는 완전한 장님이다 . 그것처럼 정의와 진리에 어긋나는 일이 없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자가 있을까 ? 왜냐하면 우리가 신에 해당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미망이기 때문이다 . 거기까지 간다는 것은 부정하고 불가능하다 . 이는 만인이 같은 것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 그러므로 이것은 우리가 타고 난 명백한 부정이고 우리가 스스로 결코 탈각 ( 脫却 ) 할 수 없는 것 , 그러면서도 탈각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종교도 자애가 죄라는 것 , 우리가 그것을 가지고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것 , 거기에 반항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지 않고 그에 대해 구원법을 마련하는 것도 생각하지 않는다 .

 

493

진실한 종교는 우리의 의무와 무력 ( 오만과 사욕 ) 을 표시하고 , 또 그에 대한 구원법인 ( 절제와 겸손 ) 을 가르쳐 준다 .

 

494

진실한 종교는 위대함과 비참함을 가르쳐 주고 , 자기의 존중과 경멸로 사랑과 증오로 인도해 주는 것이어야 한다 .

 

495

우리가 무엇인지를 탐구하지도 않고 살아나간다는 것이 말할 나위도 없는 맹목이라고 하거든 , 신을 믿으면서 나쁜 생활을 한다는 것은 더 무서운 맹목이라 하겠다 .

 

496

경험은 신앙과 선량 사이에 커다란 차이가 있음을 우리에게 알려 준다 .

 

497

신의 자비를 믿고 , 선행은 하지 않은 채 방종하게 살아나가는 사람들에 대해서 = 우리는 죄의 두 개의 원천은 오만과 게으름이므로 , 신은 그것을 구원하기 위해 그의 두 가지 희생 — 자애심과 정의 — 을 우리에게 계시했다 . 정의가 정의인 소이는 오만을 겸손하게 하는 데 있다 , 그 행위가 여하히 신성하다손 치더라도 . et non intres in judicium, etc. ( 너희 부하들의 심판에 관심하지 말라 ) . 그리고 자애심이 되는 소이는 선행을 권하고 게으름과 싸우는 데 있다 . 그 구절로는 「 신의 선의는 그대를 회개로 인도하리라 」 와 니네베 사람들의 다른 구절 , 「 회개하고 신이 우리를 연민하느냐 하지 않느냐를 보도록 하자 」 가 있다 . 이렇듯 연민은 방종을 허용하지 않을 뿐더러 , 오히려 반대로 그와 완강히 싸우는 특성이 있다 . 그러므로 「 신에게 연민이 없었더라면 덕을 위해 모든 노력을 할 셈이었는데 」 라고 하는 대신 , 오히려 「 신에게 연민이 있으니만큼 모든 노력을 해야 한다 」 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

 

498

신앙에 들어가는 데 고통이 따른다는 것은 사실이다 . 그러나 이 고통은 우리에게 싹트기 시작한 신앙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고 , 아직도 남아 있는 불신에서 생겨나는 것이다 . 만약 우리의 감성이 회개에 반대하지 않고 또 우리의 부패가 신의 순결함에 반대하지 않았더라면 , 신앙의 길에는 우리를 괴롭힐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 우리는 생래의 악덕이 초자연의 은총에 저항하는 데 따라서만 고통을 느낀다 . 우리의 마음은 상반하는 두 개의 노력 사이에 분열됨을 느낀다 . 그러나 이 횡포를 우리를 붙잡는 이 세상에 기인시키지 않고 , 우리를 인도하는 신에 기인시킨다는 것은 완전한 잘못이다 . 그것은 어떤 어린애가 그 어머니 힘으로 도둑의 손에서 탈환될 때 그 애가 느끼는 고통 중에서 , 그의 자유를 획득해 주는 자의 사랑에 찬 정당한 폭력을 사랑하고 그를 부당히 붙잡아 두는 자들의 횡포하고 잔인한 폭력을 마음껏 미워하는 것이 당연한 것과 마찬가지다 . 이 인생에 있어서 신이 사람들에게 과할 수 있는 가장 참혹한 전쟁은 그 들로 하여금 신이 초래한 이 전쟁을 치르지 않게 내버려 두는 것이다 . “나는 싸움을 일으키기 위해서 왔노라 ” 라고 그는 말한다 . 또 이 싸움에 관해 가르치기 위해 “나는 검과 불을 던지기 위해서 왔노라 ” 라고도 말한다 . 그 이전에는 사람들은 허위의 평화 속에 살고 있었던 것이다 .

 

499

외적행위 = 신에게도 인간에게도 기쁨을 주는 것처럼 위험한 일은 없다 . 왜냐하면 신에도 인간에게도 기쁨을 주는 상태는 한편으로는 신을 기쁘게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을 기쁘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 성 테레사의 위대함과 같은 것이 바로 그것이다 . 신을 기쁘게 한 것은 이 여인이 계시를 받았을 때의 깊은 겸손이고 , 인간을 기쁘게 한 것은 이 여인의 지혜이다 . 그런데 사람들은 이 여인의 상태를 배울 셈으로 그의 말을 모방하는 데 매우 열심이지만 , 이 여인처럼 신이 사랑하신 것을 사람하고 신이 사랑한 상태에 자기 몸을 두려고 하지 않는다 . 단식하지 않고 겸손해지는 것은 단식하고 거기에 만족을 느끼는 것보다는 낫다 . 바리새인 세리 .

만약 기억이라는 것이 나에게 해도 되고 이익도 된다 하거든 , 또 만사가 신의 축복에 달려 있다고 하거든 , 기억을 대 두었댔자 무슨 소용이 있을까 ? 신은 그 축복을 신을 위해 행하여진 것에 대해서만 신의 법칙에 따라 , 신의 방법에 의해 주시는 것이니 양식 사물과 마찬가지로 아니 십중팔구 그 이상으로 중요한 것이 아닐까 ? 왜냐하면 신은 악에서 선을 끄집어 낼 수가 있고 , 인간은 신을 떠나면 선에서 악을 끄집어내기 때문이다 .

 

500

선과 악이라는 말의 의미 .

 

501

제 1 단 , 악을 행하고 꾸지람을 듣고 , 선을 행하고 칭찬을 받는다는 것 .

제 2 단 , 꾸지람도 칭찬도 받지 않는 것 .

 

502

아브라함은 자기를 위해서는 아무것도 갖지 않고 오직 종복을 위해서만 가졌다 . 이처럼 의인도 자기를 위해서는 세상에서 아무것도 갖지 않고 세상의 칭찬도 받으려 하지 않고 , 오직 그의 정념을 위해서만 가졌 다 . 그는 자신이 주인으로서 그 정념을 사용하고 그 하나에게는 「 가라 」 라고 하고 , 다른 하나에게는 「 오라 」 라고 말한다 . Sub te erit appetitus tuus ( 너는 너의 원을 다스리라 ) . 이와 같이 지배된 정념은 그대로 덕인 것이다 . 탐욕 ․ 질투 ․ 분노는 신까지도 자기의 속성으로 삼고 있다 . 그리고 이것들은 같이 정념인 관용 ․ 자비 ․ 성의와 아울러 훌륭한 덕인 것이다 . 우리는 그것들은 노예로서 부리고 그것들에게 양식을 주고 그 양식을 혼에게 빼앗기지 않도록 해야 한다 . 왜냐하면 정념이 주인이 되면 그것들은 악덕이 되고 , 그때는 정념이 혼에게 자기의 양식을 주고 혼이 그것을 먹어서 중독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

 

503

철학자들은 악덕을 신 자신에게 귀속시킴으로써 그것을 신성화했다 . 그리스도교도는 덕을 신성화했다 .

 

504

의인은 가장 사소한 일에 있어서도 신앙에 따라 움직인다 . 그는 사환을 꾸짖을 적에도 신의 영에 의해 그들이 회심하기를 바라고 , 신이 그들을 교정해 주시기를 기도한다 . 그리고 그 자신을 꾸짖어 바로잡기를 기대함과 아울러 신에게 기대하고 신이 그의 교정을 축복하시도록 기도한다 . 다른 행위에 있어서도 이와 마찬가지다 .

 

505

모든 것이 비록 우리에게 유익하도록 만들어진 것이라도 우리에게 치명적인 것이 될 수 있다 . 자연계에 있어 벽은 우리를 죽일 수 있고 , 계단도 발을 잘못 디뎌 미끄러지면 우리의 생명을 빼앗을 수 있다 .

최소의 운동도 전 자연에 영향을 준다 . 바다 전체가 하나의 돌로 변동한다 . 이와 마찬가지로 , 은총의 세계에 있어서도 최소의 행위의 결과가 전체에 미친다 . 그러므로 모든 것이 중요하다 .

매개 행위에 있어서 행위 그 자체 외에 우리의 현재 • 과거 • 미래의 상태와 , 그 행위의 영향 때문에 일어나는 다른 상태를 관찰하고 그런 모든 것들의 관계를 보아야 한다 . 그렇게 하면 인간은 상당히 신중하게 될 것이다 .

 

506

신이 우리의 죄 , 다시 말하면 우리의 죄의 모든 결과와 연쇄를 우리에게 돌려주시지 않기를 . 최소의 과실이라도 신의 자비를 떠나 사람이 이를 따라가고자 할 때는 무서운 것이다 .

 

507

은총의 작용 , 심정의 완고 , 외적 사정 .

 

508

한 사람을 성도로 하기 위해서는 은총이라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 . 그리고 그것에 의문을 품는 이는 성도가 무엇이며 인간이 무엇인가도 모르는 사람이다 .

 

509

철학자들 = 자기를 모르고 있는 인간을 향해서 당신은 자기의 힘으로써 신이 있는 곳에 가라고 부르짖는 것도 묘한 일이다 . 또 자기를 알고 있는 인간을 향해 그렇게 말하는 것도 묘한 일이다 .

 

510

인간은 신의 은총을 받을 만한 자격을 가지고 있는 자가 아니다 . 그러나 자격을 가지게 될 수 없는 자도 아니다 .

신이 불쌍한 인간과 결합하신다는 것은 신답지 않은 일이다 . 그러나 인간을 그 비참에서 끄집어낸다는 것은 신답지 않은 것이 아니다 .

 

511

만약 어떤 사람이 인간은 너무도 작기 때문에 신과의 교제에 참여할 자격이 없다고 말하려 한다면 , 그런 판단을 내리기 위해서는 비상히 위대해야만 한다 .

 

512

기묘한 표현법이지만 , 그것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전부라고는 말할 수 없다 . 두 개의 사물이 변화하지 않고 결합하면 , 하나가 다른 것으로 되었다고는 말할 수 없다 . 이와 같이 혼은 몸과 , 불은 나무와 변화하지 않고 결합한다 . 그러나 일방의 형이 타방의 형이 되기 위해서는 변화가 필요하다 . 이것이 신의 말씀과 인간과의 결합의 경우이다 .

나의 몸은 나의 혼을 떠나서는 인간의 몸을 구성하지 않을 터이므로 , 나의 혼은 어떤 물질과 결합해서 나의 몸을 구성하게 될 것이다 . 필요한 조건과 충분한 조건은 구별되지 않는다 . 결합은 필요하지만 충분한 것은 아니다 . 왼쪽 팔이 아니다 . 불가입성은 물체의 본질이다 .

Numero ( 수 ) 의 동일은 , 같은 시간에 있어서 물질의 동일을 요구한다 . 따라서 만일 신이 나의 혼을 중국에 있는 어떤 신체에 결합시켜 놓았다고 하면 , 수에 있어서 동일한 그 신체는 중국에 있을 것이다 . 거기에 흐르고 있는 동일한 강은 , 같은 때에 중국을 흐르고 있는 강과 물에 있어서 동일하다 .

 

513

신이 기도를 설정하신 이유 .

1. 그 피조물에게 인과율의 존엄성을 가르쳐 주기 위해서 .

2. 우리에게 덕을 준 자가 누구인가를 가르쳐 주기 위해서 .

3. 우리로 하여금 노력을 다해서 다른 여러 가지 덕에 참여시키기 위해서 . 그러나 신은 우선권을 보유하기 위해 그 마음에 드는 자에게 기도를 주신다 .

항의 . 그러나 인간은 스스로 기도를 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

그것은 불합리하다 . 왜 ? 사람은 신앙을 얻어도 덕을 얻는다고 할 수 없는데 , 어떻게 그 신앙을 얻을 수 있단 말인가 ? 신앙으로부터 덕까지의 거리보다도 , 불신으로부터 신앙까지의 거리가 더 크단 말인가 ?

「 자격이 있다 (M é rite) 」 . 이 말은 애매하다 .

Meruit habere Redemptorem ( 구세주 ) 를 가질 만한 자격이 있다 ) .

Meruit tam sacra membra tangere ( 이렇게도 성스러운 지체에 접촉할 자격이 있다 ) .

Digno tam sacra membra tangere ( 이렇게도 성스러운 지체에 접촉할 만하다 ) .

Non sum dignus ( 모자라는 자로다 ) .

Qui manducat indignus ( 자격 없이 먹는 자 ) .

Dignus est accipere ( 받을 만한 자격이 있다 ) .

Dignare me ( 나는 자격이 있다 ) .

 

신은 자기의 약속에 순종할 뿐이다 . 그는 기도하는 자에게 정의를 주실 것을 약속하셨지만 , 약속한 애들에게만 기도를 약속하셨다 .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명확히 말했다 . “능력은 의인으로부터 제거되리라”라고 . 그러나 그는 우연히 그렇게 말한 것이다 . 왜냐하면 그것을 말할 기회가 오지 않을 수도 있었을 터이기 때문이다 . 그러나 그 기회가 오면 그가 그것을 말하지 않는 것도 , 그 반대를 말하는 것도 있을 수 없으리라함은 그의 근본 방침에 비추어 명백하다 . 그렇다면 그는 기회가 왔기 때문에 그렇게 말했다기보다도 , 기회가 온 이상 그렇게 말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 전자는 우연이고 후자는 필연이다 그러나 이 두 가지 경우는 인간이 요구할 수 있는 전부이다 .

 

514

두려움을 가지고 자기의 구원을 완성하라 .

기도의 증거 Petenti dabitu ( 구하라 , 받으리라 ) .

그러므로 구한다는 것은 우리의 능력 안에 있다 . 반대로… 그것은 우리의 능력 밖에 있다 . 받는다는 것은 우리의 능력 안에 있지만 , 기도라는 것은 그 밖에 있기 때문이다 . 왜냐하면 구원이 우리의 능력 안에 있지 않고 받는 것이 우리의 능력 안에 있다고 하면 , 기도는 우리의 능력 안에 있지 않는 셈이 되기 때문이다 .

그렇다면 의인은 벌써 신에게 기대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 왜냐하면 그 는 기대하지 않아도 구한 것을 받으려고 노력하기만 하면 족하기 때문이다 .

그러므로 인간은 최초의 타락 이래 현재 불의 속에 있고 , 또 신은 인간이 신을 떠난 것이 그 때문임을 원치 않는 까닭으로 , 인간이 ( 신을 ) 떠나지 않고 있는 것은 오직 최초의 효력에 의해서라는 결론이 나온다 .

그러므로 떠나는 자는 이 최초의 것 , 즉 그것이 없으면 인간이 신을 떠나게 되는 것을 가지고 있지 않고 , 떠나지 않는 자는 이 최초의 효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 따라서 이 최초의 효력에 의해 은총의 시간을 얼마동안 보낸 것 같으면서도 기도를 그만두는 사람은 이 최초의 효력을 가지고 있지 않는 것이다 .

다음에 신은 이 의미에서 스스로 떠나시고 만다… .

 

515

신에게 선택받은 자는 자기의 덕을 모르고 , 신으로부터 버림받은 자는 자기의 되가 얼마나 큰가를 모른다 . 「 주여 , 언제 그대의 굶주리고 목마른 것을 보고… 」

 

516

로마서 3 장 27 절 . 「 자만은 제거되다 . 어떤 율법에 의해서인가 ? 행위의 율법인가 ? 아니다 . 신앙에 의해서이다 . 」 그러므로 신앙은 율법의 행위처럼 우리의 가지고 도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 그것은 다른 길을 통해 우리에게 부여된다 .

 

517

마음을 안식하도록 하라 . 너희가 그것을 기대하는 것은 너희에게로서가 아니다 . 오히려 반대로 너희에게서는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으므로 그것을 기대해야 할 것이다 .

 

518

모든 상태는 순교자의 그것까지도 성서에 의하면 무서워해야 할 것이 다 .

연옥의 고통 중 가장 큰 것은 심판의 미결이라는 것이다 . Deus absconditus ( 심어 있는 신 ) .

 

519

요한복음 8 장 . Multi crediderunt in eum . Dicebat ergo Jesus: Simanseritis … vere mei discipuli eritis , et Veritas VIBERABIT Vos. Responderunt ; Semen Abrahae sumus , et nemini Servimus unquam ( 많은 사람들이 그를 믿었다 . 여기 예수 가라사대 「 너희들…이어 , 참으로 나의 제자로다 . 그리고 진리는 너희들에게 자유를 얻게 해 주리라 」 라고 . 그들 대답하되 「 우리는 아브라함의 자손으로서 아직도 남의 노예가 되어 본 적이 없다 」 라고 ) .

제자와 「 참다운 」 제자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 . 양자의 구별을 알기 위해서는 그들에게 , 「 진리는 너희들에게 자유를 얻게 해 주리라 」 라고 말해 보는 것이 좋을 듯하다 . 만약 그들이 , 「 우리들은 자유롭다 . 악마에의 예속에서 자력으로 탈출했다 」 라고 대답했다면 그들은 확실히 제자이기는 하지만 참다운 제자는 아니기 때문이다 .

 

520

율법은 인간의 본성을 파괴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교육했다 . 은총은 율법을 파괴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실행시켰다 . 세례 때 받은 신앙은 그리스도교도 및 회심자의 전 생애의 원동력이다 .

 

521

은총은 늘 이 세상에 존재할 것이다 — 자연도 역시 — 그래서 은총은 어느 의미에서 자연적이다 . 이리하여 이 세상에는 늘 페라기우스주의자가 있고 , 늘 가톨릭교도가 있고 , 늘 싸움이 있을 것이다 . 왜냐하면 제 1 의 탄생이 전자를 만들고 , 제 2 의 탄생인 은총이 후자를 만들기 때문이다 .



522

율법은 자기가 주지 않았던 것을 강요했다 . 은총은 자기가 강요하는 것을 부여해 준다 .

 

523

모든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와 아담에 있어서 성립되고 , 모든 도덕은 사욕과 은총에 있어서 성립된다 .

 

524

인간은 절망과 오만의 이중의 위험에 늘 부딪쳐 있으므로 , 은총을 받을 수도 잃을 수도 있다는 이중의 가능성을 가르쳐 주는 교리처럼 인간에게 적절한 교리는 없다 .

 

525

철학자들은 두 개의 상태에 상응하는 심정을 규정하지 않았다 .

그들은 순수하게 위대한 움직임을 취했으나 그것은 인간의 상태가 아니 다 .

그들은 완전히 저열한 움직임을 고취하였으나 그것도 인간의 상태가 아니다 .

자연이 아니라 참회에서 생기는 비하의 움직임 , 거기에 머물러 있기 위해서가 아니라 위대함에 이르기 위한 비하의 움직임이 필요하다 . 공덕에서가 아니라 은총에서 생기는 위대함의 움직임 , 그리고 또 비하를 통과한 후의 위대함의 움직임이 필요하다 .

 

526

비참은 절망을 , 오만은 분수에 넘쳐 지나치게 된다 . 신의 아들이 되셨다는 것은 인간이 필요로 했던 구원이 얼마나 위대한 것이었던가를 밝힘으로써 인간의 비참의 위대함을 인간에게 표시해 주는 것이다 .

 

527

자기의 비참을 모르고서 신을 안다는 것은 오만을 자아낸다 . 신을 모르고서 자기의 비참을 안다는 것은 절망을 자아낸다 .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되면 중간을 취하게 된다 . 왜냐하면 우리는 그에 있어서 신과 우리의 비참을 찾아보기 때문이다 .

 

528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이 교만해지지 않고 접근시키게 하며 , 절망하지 않고 그 밑에서 자기를 비하시킬 수 있는 신이다 .

 

529

…우리로 하여금 선을 행할 수 없다고 생각하게 하는 정도의 비하도 아니고 , 악에서 완전히 벗어난 맑음도 아니다 .

 

530

어떤 사람이 어느 날 자기는 참회에서 돌아오는 길에 대단한 기쁨과 안심을 느꼈다고 말하였다 . 다른 사람이 , 자기는 공포를 그냥 느꼈다고 말했다 . 이에 관하여 나는 생각했다 . 이 두 사람을 합하면 하나의 훌륭한 인간이 되리라 . 쌍방이 각각 타방의 감정을 느끼지 않는 데 결함이 있다고 . 이와 같은 일은 다른 사물의 경우에도 많이 일어나는 것이다 .

 

531

주인의 의지를 알고 있는 자는 ( 과오를 범했을 때에 ) , 더 한층 많이 얻 어맞으리라 . 안다는 것은 그의 특권이니까 . Qui justus est , justificetur adhuc ( 의로운 자는 더욱 의로워지리라 ) . 의로운 것은 그의 특권이니까 . 가장 많이 받은 자는 가장 많이 지불을 청구 받으리라 . 원조를 받은 것은 그의 특권이니까 .

 

532

성서는 모든 상태의 사람을 위로하고 , 모든 상태의 사람을 두렵게 하기 위해 그 장절 ( 章節 ) 을 마련한다 .

자연도 자연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의 두 개의 무한에 의해 같은 일을해 놓은 것처럼 보인다 . 왜냐하면 우리가 높은 것과 낮은 것 , 훌륭한 것과 훌륭하지 못한 것 , 고상한 것과 비참한 것을 늘 가지고 있다는 것은 우리의 오만을 끌어내리고 우리의 비굴을 높이기 위해서이기 때문이다 .

 

533

Comminutum cor ( 부서진 마음 ; 성 바오로 ).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교의 성격이다 . 「 알바는 군을 지명했다 . 나는 군과 벌써 연이 없다 」 ( 꼬르네 이유 ). 이것이 바로 비인간적인 성격이다 . 인간적 성격은 그 반대이다 .

 

534

세상에는 두 종류의 인간이 있을 뿐이다 . 그 하나는 자기를 죄인이라 고 생각하는 의인이고 , 다른 하나는 자기를 의인이라고 생각하는 죄인이 다 .

 

535

우리는 결점을 지적해 주는 사람들에게 대단히 감사해야 한다 . 왜냐하면 그들은 우리에게 고통을 주기 때문이다 . 그들은 우리가 경멸되고 있었음을 가르쳐 주지만 , 우리가 장래 같은 일을 반복하는 것을 말리지 않는다 . 우리는 경멸받아야 할 결점을 그 외에도 많이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 그러나 그들은 교정의 수련과 어떤 결점으로부터의 면제를 준비해 준다 .

 

536

인간은 , 너희는 바보라는 말을 가끔 듣게 되면 그런가 생각하고 또 자기가 자기에게 때때로 그렇게 말하곤 하면 그런가 생각하도록 되어 있다 . 왜냐하면 인간은 혼자서 자기와 내적인 훼방을 하는 자이기 때문이다 . 그래서 그것을 조절함이 극히 요긴하다 . Corrumpunt mores bonos collaquia prava ( 나쁜 교제는 선한 풍속을 해친다 ) . 우리는 되도록 침묵하고 우리가 진리라고 인정하고 있는 신과만 이야기해야 한다 .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진리를 자기에게 납득시킬 수 있다 .

 

537

그리스도교는 묘하다 . 그것은 인간에게 자기가 천하고 심지어는 증오해야 할 자임을 인식하라고 명령하고 , 또 신에 흡사해질 것을 명한다 . 이런 균형을 취해 주는 추가 없다면 그 거만은 그를 무섭도록 공허하게 만들 것이며 , 그 비하는 그를 무섭도록 천하게 만들 것이다 .

 

538

그리스도교도는 자기가 신과 결합되어 있음을 믿고 있으면서도 얼마나 오만치 않은 것인가 ! 자기를 지렁이와 비하면서도 얼마나 비굴하지 않은 것인가 !

생과 사 , 행과 불행을 받아들이는 아름다운 태도 .

 

539

순종에 관해 병사와 샤르트르의 수도사 사이에는 얼마나 큰 차이가 있는 것인가 ? 그들은 서로들 마찬가지로 유순하고 의존적이고 같은 고행을 하고 있다 . 그러나 병사는 늘 명령자가 되려고 하나 , 결코 그렇게 될 수 없다 . 대장이나 장관들조차도 항상 예속자이고 의존자이기 때문이다 . 그러나 병사는 늘 그것을 희망하고 늘 그렇게 되려고 애쓴다 . 이에 반해 샤르트르의 수도사는 영원히 의존자가 될 것만을 서약한다 . 이렇듯 그들은 양자의 상태인 부단한 예속이라는 점에서 다르지 않지만 , 한쪽은 늘 가지고 있고 다른 쪽은 결코 가지지 못하는 희망이라는 점에 있어서 다르다 .

 

540

무한을 , 선을 얻고 싶다고 하는 그리스도교도의 희망에는 공포 속에 현실적인 기쁨이 섞여 있다 . 그것은 어떤 왕국을 바라더라도 , 신하이기 때문에 전연 얻을 수가 없다는 것과 다르다 . 그리스도교도는 깨끗함을 바라고 불의에서의 해방을 바라는 데 이미 그 약간을 얻고 있기 때문이 다 .

 

541

진정한 그리스도교도처럼 행복하고 , 도리에 부합하고 , 유덕하고 , 사랑스러운 자는 없다 .

 

542

인간을 「 사랑스럽고 동시에 행복한 자 」 라고 하는 것은 그리스도 외에는 없다 . 도의만 가지고서는 인간은 사랑스럽고 동시에 행복한 자가 될 수 없다 .

 

543

서언 = 신의 형이상학적 증거는 사람들의 추리와는 거리가 멀고 대단히 복잡하므로 그다지 감명을 주지 못한다 . 그것은 어떤 사람들에게는 유용하다 하더라도 그들이 그 논증을 보고 있는 순간에만 유용한 데 지나지 않는다 . 한 시간만 지나면 기만당하지 않았나 하며 겁을 먹게 된다 . Quod Curiositate cognoverunt superbia amiserunt ( 그들은 호기심 때문에 발견한 것을 오만 때문에 상실했다 ) .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 없이 얻을 수 있는 신의 인식 , 즉 매개자 없이 알게 된 신과 , 매개자 없이 교제한 결과이다 . 이에 반해 매개자를 통해서 신을 알게 된 사람들은 자기의 비참을 안다 .

 

544

그리스도교도의 신은 혼으로 하여금 신이 그의 유일한 선이라는 것 , 혼의 일체의 불안은 신에게 있다는 것 , 혼의 유일한 기쁨은 신을 사랑하는데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해 주는 신이다 . 또 신은 그와 동시에 혼을 붙잡는 장애 , 혼이 전력을 다해서 신을 사랑하는 것을 방해하는 장애를 혼으로 하여금 두렵게 해 주는 신이다 . 혼을 붙잡는 자애와 사욕은 신으로서 참기 어려운 것이다 . 이 신은 혼이 자멸하는 자애의 뿌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 , 신만이 그것을 치료할 수 있는 것을 혼으로 하여금 느끼게 한다 .

 

545

예수 그리스도는 아래와 같은 교훈을 주었을 뿐이다 . 즉 ,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있다 . 그들은 노예이고 장님이고 병자이고 불행한 자이고 죄인이다 . 나는 그들을 해방하고 빛을 던져 주고 축복하고 구원해주어야 한다 . 이것은 그들이 스스로를 증오함으로써 , 또 고난과 십자가의 죽음으로 나를 따라오는 데서 완성된다 .

 

546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이탈하면 인간은 악덕과 비참 속에 빠져 있어야 한다 .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있으면 인간은 악덕과 비참에서 벗어난다 . 그에게는 우리의 모든 덕과 모든 행복이 있다 . 그를 떠나서는 악덕 • 비참 • 오류 • 암흑 • 죽음 • 절망이 있을 뿐이로다 .

 

547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아는 신 =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신을 안다 . 이 매개자가 없으면 신과의 교제는 전혀 할 수가 없다 .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는 신을 안다 .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지 않은 채 신을 알고 신을 증명한다고 주장한 사람들은 무효한 증명을 해놓는 데 불과하다 .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증명하기 위해서 우리에게는 예언이 있다 . 그것은 확실하고 명백한 증거이다 . 이런 예언은 성취되고 사실에 의해 그 진리는 입증되었으므로 이런 진리의 확실성 , 다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의 증거를 표시하고 있는 것이다 . 그러므로 그에 있어서 , 또 그에 의해서 , 우리는 신을 알게 된다 , 그를 떠나서 , 성서도 없이 원죄도 없이 약속에 의해 강림하신 필요한 매개자가 없이는 사람은 신은 완전히 증명할 수도 없고 올바른 교리와 올바른 도덕을 가르칠 수도 없다 .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 예수 그리스도에 있어서 , 인간은 신을 증명하고 도덕과 교리를 가르칠 수 있다 .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의 진실한 신이다 .

그러나 우리는 그와 동시에 우리의 비참을 알고 있다 . 왜냐하면 이 신은 우리의 비참의 구세주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 그래서 우리는 자기의 죄를 깨달음으로써만 신을 분명히 알 수 있다 . 따라서 자기의 비참을 모르 고 신을 안 사람들은 신을 영예롭게 해 준 것이 아니라 , 사실 자기를 숭배하는 것이다 . Quia … non cognovit per sapientiam … placuit Deo per stultam praedicationis salvos facere ( 사람은 자기의 지혜로는 신을 모르나니 , 신은 선교의 어리석음을 가지고 구원을 시행함을 기꺼이 받으셨느니라 ) .

 

548

우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만 신을 알 뿐더러 , 또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만 우리 자신을 안다 .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만 삶과 죽음을 안다 . 예수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우리의 생 • 사 • 신 , 그리고 우리 자신이 무엇인가를 모른다 .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만을 주제로 하는 성서가 없으면 우리는 아무것도 모르고 , 신의 성질에 관해서도 우리 자신의 본성에 관해서도 애매함과 혼란을 발견할 따름이리라 .

 

549

예수 그리스도를 떠나서 신을 안다는 것은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헛 수고이기도 하다 . 그들은 신으로부터 떨어지지 않고 오히려 가까워졌다 .

자기를 낮추지 않고서… .

Quo quisquam optimus est , pessimus , si hoc ipsum, quod optimus est adscribat sibi ( 우리를 착하게 해 주는 이유를 자기 자신에게 구한다면 , 가령 착한 것이라도 나빠질 것이다 ) .

 

550

나는 빈곤을 사랑한다 . 그 ( 그리스도 ) 도 빈곤을 사랑했으니까 . 나는 부를 사랑한다 . 그것은 불쌍한 사람을 돕는 수단을 제공하니까 . 나는 모든 사람에 대해 충신을 지킨다 . 나는 나에게 악을 행하는 사람들에게 악으로써 보답하지 않는다 . 오히려 나는 인간에게서 선도 악도 받아들이지 않는 , 나와 같은 상태가 그들에게도 주어지기를 원한다 . 나는 모든 사람에게 대해 공정하고 성실하고 진지하고 충실하려고 애쓴다 . 또 신이 나에게 보다 더 가까이 결부시켜 준 사람들에 대해 진심으로 애정을 느낀다 . 그리고 나 홀로이건 사람 앞에서건 나의 모든 행위를 그것을 심판해 주실 신 , 그리고 내가 모든 것을 바친 신의 눈앞에서 행한다 .

이것이 바로 나의 기분이다 . 그리고 나는 그런 기분을 나에게 주신 나의 구세주 , 약함과 비참함과 사욕과 오만과 야심에 가득 찬 인간을 그 은총으로써 그런 모든 악에서 벗어난 인간으로 만드신 구세주를 내가 사는 날까지 찬미한다 . 모든 영광은 그 은총에 돌려 하니 나에게는 비참과 오류만이 있을 따름이다 .

 

551

Dignior plagis quam osculis non timeo quia amo ( 입술을 맞추기보다 뺨을 얻어맞을 만한 자격밖에 없어도 나는 겁을 내지 않는다 . 나는 사랑하고 있으므로 ) .

 

552

예수 그리스도의 묘 = 예수 그리스도는 죽었지만 십자가 위에서 구경감이 되었다 . 그는 죽었기 때문에 무덤에 숨겨졌다 .

예수 그리스도는 성도들에 의해서만 매장되었다 .

에수 그리스도는 무덤 안에서 아무런 기적도 행하지 않았다 .

그 속에 들어간 것은 성도들뿐이다 .

예수 그리스도가 새 생명을 얻은 것은 그곳이지 , 십자가 위에서가 아니다 .

그것은 고난과 속죄의 최후의 신비이다 .

예수 그리스도가 땅 위에서 쉴 수 있었던 장소란 무덤 밖에 없었다 .

그의 적은 무덤에 이르기까지 그냥 그에게 고통을 주었다 .

 

553

예수의 신비 = 예수는 그 고난에 있어서는 사람이 그에게 가하는 고통을 받으신다 . 그러나 그의 오랫동안 고민에 있어서는 그가 그 자신에게 주는 고통을 받으신다 . turbare semetipsum ( 스스로 슬퍼서 ). 그것은 사람의 손에서 생기는 고통이 아니다 . 전능의 손에서 오는 고통이다 . 거기에 견디어 내기 위해서는 전능해야 한다 .

예수는 적어도 그 세 사람의 가장 사랑하는 벗에게 얼마간의 위안을 구하시다 . 그러나 그들은 잠들어 있다 . 그들이 자기와 함께 좀 더 참아 주기를 요구하시다 . 그러나 그들에게는 그다지 동정심이 없었으므로 일순간도 잠을 쫓을 수가 없어 그를 완전히 등한시하고 돌보지 않는다 . 이리하여 예수는 홀로 신의 노여움 앞에 남아 있게 된다 .

 

예수는 홀로 땅 위에 계신다 . 땅 위에는 그의 고통을 느끼고 고통을 같이 나눌 자가 없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알고 있는 자도 없었다 . 그것을 아는 자는 하늘과 그 자신뿐이었다 .

 

예수는 정원에 계시다 . 그것은 맨 처음의 인간 아담이 전 인류를 타락시킨 쾌락의 뜰이 아니고 , 그가 자기와 전 인류를 구하신 고뇌의 뜰이다 .

 

그는 이 고통과 버림의 비애를 밤의 공포 속에서 보내신다 .

 

예수가 한탄하신 것은 이때 꼭 한번만이라고 생각한다 . 그러나 이때는 극도의 고통에는 이미 참을 수 없는 것처럼 한탄하셨다 . 「 나의 마음 슬픔에 가득 차 죽을 지경이다 . 」

예수는 인간 측에서 벗과 위안을 구하시다 . 이런 일은 그의 일생에 꼭 한 번뿐이었다고 생각한다 . 그러나 그는 그것을 구할 수가 없다 . 그 제자들이 잠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

 

예수는 이 세상의 종말까지 고민하시리라 . 그동안 우리는 잠자고 있어서는 안 된다 .

 

예수는 이렇듯 만물에게 버림받고 그와 함께 깨어 있던 간택된 벗에게까지 버림을 받으면서도 그들이 잠들어 있음을 보시고는 자기가 아니라 그들 자신에게 절박해 온 위험 때문에 마음 아파하시고 그들이 은혜를 잊고 있는 동안에도 그들에 대한 애정을 가지고 그들 자신의 구원과 행복에 관해 주의를 하시고 , 「 마음은 불타도 몸은 약하다 」 라고 말씀하시다 .

 

예수는 그들이 예수를 생각하여서나 그들 자신의 일을 생각해서 눈을 뜨고 있을 수가 없어 그대로 잠자고 있는 것을 보시고 친절히도 그들을 깨워 일으키시지 않고 휴식한 채로 두어두시다 .

 

예수는 아버지의 거룩하신 뜻을 확실히 알지 못한 채 기도하고 죽음을 두려워하시다 . 그러나 그것을 알게 되자 죽음에 몸을 맡기시다 . Eamus.

 

Processit ( 우리는 가리라 , 한 걸음 나오시다 ; 요한 ) .

예수는 인간에게 요구하셨으나 용납되지 않았다 .

예수는 그 제자들이 잠자고 있는 동안 그들의 구원을 행하시다 . 그는 의인이 생전의 허무와 생후의 죄 속에 잠들고 있는 동안 그 각각에 대해 구원을 행하시다 .

 

그는 한번만 , 그러면서도 유순히 기도하시다 , 「 술잔을 면하게 해 주소서 」 라고 . 그리고 다시 기도하시다 , 「 부득이 하거든 당신의 뜻대로 하소서 」 라고 .



애수에 잠긴 예수 .

 

예수는 그의 제자들이 모두 잠들고 , 그의 적들이 모두 깨어 있음을 보시고 스스로를 하나님 아버지에게 다 바치시다 .

 

예수는 유다에게 적의를 보이지 않고 자기가 사랑하는 신의 명령을 찾아보고 그것을 말로 표현하시다 . 유다를 벗이라 불렀으니까 .

 

예수는 최후의 고민 속에 들어가고자 그 제자들을 떠나시다 . 그를 모방하고자 하는 자도 가장 친근한 사람들로부터 떠나야 한다 .

 

예수는 최후의 고민 , 최대의 고통 속에 계시다 . 우리도 더욱 길게 기도하자 .

 

우리는 신의 연민을 절망한다 . 신이 악덕에다 우리를 안치해 두시지 않고 악덕에서 우리를 구출해 주시기 위하여 .

만약 신이 손수 주인들을 우리에게 보내 주신다면 , 아아 , 얼마나 기뻐서 그들을 따라가야 할 것인가 ! 필요와 사건은 반드시 그에 수반해 온다 .

 

— 「 마음을 놓도록 하라 . 너희가 나를 발견치 않았더라면 너희는 나를 찾지 않았을 것이다 . 」

 

「 나는 나의 , 최후의 고민에 있어서도 나희를 생각했다 . 나는 너희 때문에 이렇게도 피를 흘렸다 . 」

 

「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사물을 이모저모 잘해보겠다 심려하는 것은 너희 자신을 시험하는 것보다 오히려 나를 시험하는 것이다 . 실제로 그런 일이 생겨나면 나는 너희에게 있어서 그 일을 행하리라 . 」

 

「 나의 규범에 따라 당신을 인도하도록 하라 . 나를 수태하고 일하게 한 성모나 , 성도들이 나를 얼마나 잘 인도하였던가를 보라 . 」

 

「 아버지는 내가 하는 모든 일을 기쁘게 받으신다 . 」

 

「 너희는 눈물도 흘리지 않으면서 나에게는 나의 인간성의 피를 늘 흘리기를 원하는가 ? 」

 

「 너희의 회심이야말로 나의 관심사이다 . 겁내지 말라 . 나를 위해 기도 할 때처럼 확신을 가지고 기도하라 . 」

 

「 나는 성서 안에 있는 나의 말을 통해서 , 교회 안에 있는 나의 영을 통해서 , 영감을 통해서 , 사제들에게 있는 나의 능력을 통해서 , 신자들에게 있는 나의 기도를 통해서 너의 앞에 나타난다 . 」

 

「 의사는 너희를 고치지 못할 것이다 . 너희는 결국에 가서는 죽고 말 터이므로 , 그러나 나야말로 너희를 고쳐 주고 너희를 불사케 하리라 . 」

 

「 물질적인 쇠사슬과 예속을 참아나가도록 하라 . 나는 현재 정신적인 예속에서 너희를 해방할 뿐이로다 . 」

 

「 나는 누구보다도 친한 너희 벗이다 . 왜냐하면 나는 너희를 위해서 누구보다 더 많은 일을 했으니까 . 누구도 내가 너희를 위해 고민한 것처럼 고민하지 않고 , 너희가 불신자요 잔인했을 적에 내가 너희를 위해 죽은 것처럼 죽지는 않을 것이다 . 그리고 그 죽음이야말로 내가 간택한 사람들과 성스러운 업적 사이에 있어서 내가 하고자 했고 또 하고 있는 일이다 . 」

 

「 만약 너희가 자기의 죄를 알게 되면 , 너희는 기절하고 말리라 . 」

「 그렇게 하면 주여 , 나는 기절하고 말리라 . 나는 주의 증언에 의해 나의 죄의 사악을 믿고 있으니까 . 」

「 기절해서는 안 된다 . 왜냐하면 너희에게 그것을 가르치는 나는 너희를 고칠 수가 있으니까 . 그리고 내가 너희에게 그것을 고하는 것은 내가 너희를 고치려는 표지이다 . 너희는 너희의 죄를 속해 내는 데 따라 그 죄를 알게 되리라 . 그리고 󰡔 보라 . 너희의 죄는 용서되었다 󰡕 라는 말을 듣게 되리라 . 그러므로 너희의 숨은 죄를 위해서 , 또 너희가 알고 있는 죄의 은근한 악의를 위해서 회개하도록 하라 . 」

주여 , 나는 주에게 모든 것을 바치나이다 .

 

「 너희가 자기의 더러움을 사랑한 이상으로 더 한층 열렬히 나는 너희를 사랑할 것이다 . ut immun-dus pro luto ( 진흙탕에 섞어 더러워졌으므로 ).

「 나에게 영광을 돌리라 . 벌레이며 흙덩이인 너희 자신에게 돌리지 말라 . 」

 

「 나 자신의 말이 너희에게 악과 허영 또는 호기 ( 好奇 ) 의 기회가 되거든 너희의 지도자에게 물어보도록 하라 . 」

 

나는 나의 오만 • 호기심 • 사욕의 심연을 본다 . 나로부터 신에 이르는 또는 의로운 예수 그리스도에 이르는 길은 없다 . 그러나 그는 나로 말미암아 죄로 되셨다 . 그대의 화는 모두 그 위에 떨어졌다 . 그는 나보다 더 한층 증오해야 할 존재가 되면서도 나를 싫어하기는커녕 , 내가 그 밑에 가서 그를 도와줌을 영광으로 생각하신다 .

그러나 그는 스스로를 고치셨다 . 그러므로 더욱 나를 고쳐 주려 하실 것이다 .

나의 상처를 그의 상처에다 결합시켜 나를 그와 결합시켜 놓아야 한다 .

그러면 그는 스스로를 구하시면서 나도 구하실 것이다 . 이것은 장래에 밀어둘 일이 아니다 . Eritis sicut dii scientes bonum et malum ( 너희들도 신같이 되어서 선악을 알게 되리라 ) . 모든 사람은 「 이것은 선하다 , 악하다 」 라고 판단함으로써 , 또 사건을 너무 기뻐하든가 슬퍼함으로써 신을 만들고 있다 .

소사를 대사처럼 행하도록 하라 . 우리를 통해 모든 일을 행하시고 , 우리의 생애를 살아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위엄을 위해서 , 또 대사를 쉬운 소사처럼 행하도록 하라 , 그의 전능을 위해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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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는 부활한 뒤 그의 상처에만 접촉하는 것을 허락하신 것이라고 나는 생각된다 . Noli me tangere ( 나를 다치지 말라 ) . 우리는 그의 고난과 결합해야 한다 .

그는 최후의 만찬에 있어서는 죽어야 할 자로서 , 엠마오의 제자들에 대해서는 부활한 자로서 , 전 교회에 대해서는 승천하신 자로서 , 교체를 위해 자신을 맡기시다 .

 

555

너희를 타인과 견주지 말고 나와 견주도록 하라 . 만약 너희가 자기와 견주고 있는 사람들에게서 나를 발견치 못한다면 , 너희는 미움을 받아야 할 자에게 자기를 견주고 있는 것이다 . 만일 너희가 거기에서 나를 발견한다면 거기에 있는 나와 비교해 보라 . 그러나 너희는 거기서 누구를 견주어 보려는가 ? 너희인가 , 너희에게 있는 나인가 ? 만일 너희라면 그것은 미움을 받아야 할 자이다 . 나라면 너희는 나에게 나를 견주는 셈이 된다 . 그런데 나는 모든 것에 있어서 신인 것이다 .

「 나는 가끔 너희에게 말하고 너희에게 권한다 . 그것은 너희의 지도자가 너희에게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 나는 너희에게 지도자가 없는 것을 바라지 않기 때문이다 . 」

「 또 아마 나는 그의 기도에 보답해서 그것을 하게 되리라 . 거기서 그는 너희에게 나타나지 않은 채 너희를 지도한다 . 너희는 나를 소유하지 않았더라면 나를 찾아오지 않았을 것이다 . 」

「 그러므로 근심하지 않아도 좋다 . 」

 

 

 

  

제 8 편 그리스도교의 기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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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자기네들이 알지도 못하는 것을 비난한다 . 그리스도교는 두개의 점에서 성립한다 . 그것을 안다는 것은 인간으로서 동등하게 중요하고 , 그것을 모른다는 것은 마찬가지로 위험하다 . 그리고 그 두 개의 표징이 제시된 것은 마찬가지로 신의 연민에 의하는 것이다 .

그런데 그들은 그 두 개의 점 중 일방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타방의 존재를 수긍해야 할 논거에서 가끔 결론하는 경향이 있다 . 세계는 유일한 신만이 존재한다고 말한 지식인들은 박해되고 유대인은 증오를 받고 그리스도교도는 더욱 미움을 받았다 . 그들은 자연의 빛에 의해서 지상에 유일한 종교가 존재한다면 모든 사물의 동향은 그 중심인 이 종교에 향해져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

사물의 모든 동향은 종교의 확립과 위대함을 그 목적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 사람은 종교가 가르쳐 주는 사물과 일치한 관념을 자기 속에 갖고 있어야 한다 . 그리고 결국 종교가 모든 사물이 향해야 할 목적이 되고 중심이 되고 그 원리를 아는 자는 특수적으로는 인간의 전 성질을 , 일반적으로는 세계의 전 동향을 설명할 수 있게 까지 되어야 한다 .

그런데 이상을 가지고 그들은 그리스도를 비난하는 증거로 삼는다 . 이는 그들이 그것을 오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 그들은 그리스도교를 위대 • 전능 • 영원하다고 생각되는 어떤 신을 예배하는 데서만 성립되어 있다고 상상한다 . 그것은 원래 이신론 ( 理神論 ) 이어서 그리스도교와의 거리가 그 정반대인 무신론과 비슷하다 . 그리고 거기서 그들은 결론해서 이 종교는 진실하지 않다고 한다 . 왜냐하면 신이 분명히 자기를 인간에게 나타내고 있다는 이 점을 모든 사물이 확립하게끔 협력하고 있는 것으로는 보이지 않기 때문이라고 한다 .

그러나 이신론에 대해서는 하고 싶은 대로 계속해도 좋을 것이지만 그것은 결코 그리스도교에 대한 결론이 되지 않는다 . 그리스도교는 원래 구세주의 신비 속에 성립하고 이 구세주는 자기 속에 두 개의 성질 , 즉 인간성과 신성을 결부시키고 그 신성에 의해 인간을 신과 화합시키기 위해 그들을 죄의 타락에서 구출해 낸 것이다 .

그러므로 그리스도교는 다음 두 개의 진리를 동시에 인간에게 가르쳐 준다 . 세계에는 유일의 신이 존재하고 인간은 그 신을 알 수 있다 , 또 인간의 본성에는 부패의 소지가 있는데 , 그것이 인간으로 하여금 신을 가까이 못하게 한다 . 이런 점을 둘 다 안다는 것은 인간으로서 매우 중요하다 . 그리고 자기의 비참을 모르고서 신을 안다는 것과 그것을 고칠 수 있는 구세주를 모르고 자기의 비참을 안다는 것은 인간으로서 마찬가지로 위험하다 . 이런 인식의 일방에만 머물러 있었기 때문에 신을 알고서 자기의 비참함을 모르는 철학자의 오만과 구세주를 모르고서 자기의 비참을 아는 무신론의 절망이 생겨난 것이다 .

이렇듯 이 두 가지 점을 아는 것이 인간의 필요사임과 마찬가지로 그것들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것은 신의 연민이다 . 그리스도교는 그것들을 알게 한다 . 여기에 그리스도교가 성립한다 .

이런 점에서 세계의 질서를 검토하고 모든 사물이 이 종교의 두 요점을 확립하는 방향으로 향하고 있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조사해 봄이 옳을 듯하다 . 오류에 빠지는 자는 모두 이들 두 개 중 하나를 보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이다 . 결국 인간은 자기의 비참을 모르고서 신을 알 수도 있고 신을 모르고서 자기의 비참을 알 수도 있다 . 그러나 신과 자기의 비참을 동시에 알지 않고서 예수 그리스도를 알 수는 없다 . 예수 그리스도는 만물의 목적이요 만물이 향하는 중심이다 . 그를 아는 자는 모든 사물의 이유를 알고 있는 것이다 .

그러므로 나는 여기 자연적인 이유로 신의 존재라든가 , 삼위일체라든가 , 영혼의 불멸이라든가 , 이런 모든 종류의 사물을 설명하고자 하지 않았다 . 그것은 단자 완고한 무신론자를 설득할 수 있는 떤 사물을 자연 속에서 발견할 만한 자신이 나에게는 없다고 생각되기 때문은 아니다 . 그런 지식은 예수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무익하고 헛되기 때문이다 . 가령 어떤 사람이 수의 비례는 비물질적인 영원한 진리여서 , 그 본원인 소위 「 신 」 이라는 어떤 근본적인 진리에 의존하고 있다는 납득을 하더라도 , 나 는 그 사람이 그의 구원을 향해 많이 전진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

그리스도교도의 신은 기하학적 진리나 여러 원소의 질서의 창조자에 지나지 않는 것 같은 신은 아니다 . 그것은 이교도와 에피쿠로스학파들의 견해이다 . 또 단지 인간의 생활과 재산에 대해서만 그 섭리를 행하고 , 예배하는 자에게 행복한 세월을 은혜롭게 베푸는 데 지나지 않는 것 같은 신도 아니다 . 그것은 유대교도의 관심사이다 . 이에 반하여 아브라함의 신 , 이삭의 신 , 야곱의 신 , 그리스도교도들의 신은 사랑과 위안의 신인 것이다 . 그가 붙잡는 사람들의 혼과 심정을 충족해 주시는 신이다 . 그들로 하여금 자기의 비참과 신의 무한한 연민을 내심에 감지케 하시는 신이다 . 그들의 혼의 속 깊이 있어서 그들과 결합하고 그들에게 겸손과 기쁨과 신뢰와 사랑을 가득 채워 주고 그들로 하여금 신 이외의 다른 목적을 가질 수 없게 하는 신이다 .

예수 그리스도 이외의 것에 신을 구하고 자연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은 모든 만족할 수 있는 어떤 빛도 발견하지 못하든가 , 혹은 매개자 없이 신을 알고 신에 봉사하는 방법을 만들어 내게 되든가 하기 때문에 거기서 무신론 아니면 이신론에 빠지게 된다 . 이 둘은 그리스도교가 거의 마찬가지로 잘못된 것이다 .

예수 그리스도 없이 세계는 존재치 않았을 것이다 . 왜냐하면 그 경우 세계는 허물어지든가 지옥처럼 되든가 양자 중의 하나가 되었을 것이니까 .

만일 세계가 인간에게 신을 가르쳐 주기 위해 존재하고 있었다고 하면 그 신성은 의심할 여지도 없으리만큼 모든 방면에 빛을 내고 있었을 것이다 . 그러나 세계는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만 존재하고 , 인간에게 그 타락과 속죄를 가르쳐 주기 위해서만 존재하고 있는 까닭으로 , 모든 것은 이 두 개의 진리를 증명하는 것으로써 빛을 던져 주고 있는 것이다 .

세계에 존재하는 것은 신성을 완전히 배제하지도 않았고 , 또 신성을 명백히 나타내고 있는 것도 아니다 . 다만 스스로를 감추고 있는 신의 존재를 표시하고 있다 . 만물은 이 특성을 띠고 있는 것이다 .

그 본성을 아는 자는 비참하게 되기 위해서만 그것을 아는 것일까 ? 그것을 아는 자만이 불행한 것일까 ?

그는 아무것도 전혀 보지 않을 수는 없다 . 또 그가 그것을 소유하고 있다고 느끼는 그것처럼 충분히 볼 수도 없다 . 다만 그는 그가 그것을 상실했다는 것을 인식하는 데 충분하리만큼 보는 것이다 . 왜냐하면 타락했다는 것을 알기 위해서는 보는 것과 보지 않는 것이 필요하다 . 그리고 이것이 바로 자연적이 인간의 상태이다 .

그가 어느 편을 택하건 간에 , 나는 그로 하여금 거기 안주시키지 않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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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모든 것이 인간에게 그의 상태를 가르치고 있음은 사실이지만 , 그는 그것을 올바르게 이해해야 한다 . 왜냐하면 모든 것이 신을 나타내고 있다는 것은 진리가 아니고 , 또 모든 것이 신을 숨기고 있다고 하는 것도 진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 그러나 신이 신을 시도하는 자에게는 스스로를 숨긴다는 것과 신을 구하는 자에게는 스스로를 나타내신다는 것은 다 같이 진리이다 . 왜냐하면 인간은 신을 알 수 없는 자인 동시에 신을 알 수 있는 자로서 , 그 부패에 의해서는 신을 알 수 없고 , 그 최초의 본성에 의해서는 신을 알 수가 있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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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모든 어둠으로부터 결론할 수 있는 것은 우리의 무가치가 아니고 무엇일까 ?

 

559

만약 신이 전혀 나타나지 않았다고 하면 , 이 영원의 결여는 양의적으로 되어 , 인간이 신을 알 만한 자격이 없음을 표시함과 아울러 대체로 신적인 것은 존재하지 않음을 표시했을지도 모른다 . 그러나 신이 늘 나타나시는 것은 아니라도 가끔 나타나신다는 것은 양의성을 제거해 버린다 . 만일 신이 한번 나타나신다면 항상 존재하고 계시는 것이다 . 그래서 신은 존재하지만 사람이 신을 알 수가 없는 것이라 결론짓지 않을 수 없다 .

영원한 존재자는 한번 존재하면 영원히 존재한다 .

 

560

우리는 아담의 영광스러운 상태도 그의 죄의 성질도 그 죄가 우리에게 전승했다는 것도 이해하지 못한다 . 그것은 우리와는 전혀 다른 성질의 상태 속에서 일어난 것으로서 우리의 현재의 이해력의 상태를 넘는 것이다 .

이런 모든 것은 거기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알아도 무익한 것이다 . 우리가 꼭 알아두어야 할 것은 우리는 비참하고 타락하고 신을 떠나서 있지만 ,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속죄되었다는 것 , 그리고 이에 관해서는 지상에 훌륭한 증거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 이리하여 타락과 속죄의 두 개의 증거는 종교에 무관심하게 살고 있는 불신자와 , 종교와 화해하기 어려운 적인 유대인으로부터 인출된다 .

이렇듯 전 우주는 인간에게 그가 타락해 있다는 것 , 또는 속죄되어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 만사는 인간에게 그의 위대함 , 혹은 비참을 가르쳐 준다 . 신의 포기는 이교도에 나타나 있고 신의 보증은 유대인에게 나타나 있다 .

 

561

우리에게 종교의 진리를 납득시키는 방법에 두 가지가 있다 . 하나는 이성의 힘에 의하는 것이고 , 다른 하나는 말하는 사람의 권위에 의하는 것이다 . 사람들은 후자를 쓰지 않고 전자를 쓴다 . 「 이것은 믿어야 한다 . 그것을 기록한 성서는 신성하므로 」 라고 말하지 않고 , 그것은 이러이러한 이유로 믿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한다 . 이것은 박약한 의논이다 . 이성은 모든 것에 유약하지 않는가 ?

 

562

지상에는 인간의 비참이나 신의 연민을 표시하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 신을 떠난 인간의 무력이나 신과 같이 있는 인간의 능력을 표시하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

 

563

지옥에 떨어지게 된 자의 낭패의 하나는 그가 그리스도교를 비난할 작정으로 사용한 , 바로 그와 같은 이유로 자기가 비난당함을 발견하는 것이리라 .

 

564

예언이나 기적에 이르기까지 우리 종교의 모든 증거는 절대로 설득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 그러나 그런 증거는 믿으면 불합리하다는 말을 들을 수 있는 종류의 것도 아니다 . 결국 거기에는 어떤 사람들을 계몽하고 다른 사람들을 알지 못하게 하는 명 ( 明 ) 과 암 ( 暗 ) 이 있다 . 그러나 그 명은 반대의 증거 이상의 것이든가 , 못하여도 그것과 궁금한 것이다 . 그래서 명을 따라가지 않으리라고 결심하게 하는 것은 이성이 아니다 . 그렇다면 그것은 사욕과 악심이라 아니할 수 없다 . 그런 까닭으로 세계에는 죄를 정하기에는 충분한 명이 있고 , 설득하기에는 불충분한 명이 있다 . 이는 명을 따라가는 사람들에게는 그들의 순종이 은총이지 이성이 아님을 해명해 주고 , 명을 피하는 사람들에게는 그들을 피하게 하고 있다는 것은 야욕이지 이성이 아님을 해명하기 위해서이다 . Vere discipuli , vere Israelita , vere liberi , vere cibus ( 참으로 제자 , 참으로 이스라엘인 , 참으로 자유 , 참으로 빵 ) .

 

565

그러므로 종교의 불분명 그 자체 속에 , 종교에 관해 우리가 갖고 있는 빛이 얼마 안 된다는 것 속에 , 종교를 안다는 데 대해 우리가 무관심하다는 것 속에 종교의 진리를 인식하도록 하라 .

 

566

사람은 신이 어떤 사람들은 맹목으로 하고 다른 사람들을 계몽하려고 하셨다는 것을 원칙으로 인정하지 않는 한 신의 거룩한 업적에 관해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한다 .

 

567

두 개의 상반하는 논거 , 거기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고 또 전부가 이단적이다 . 그리고 개개의 진리의 결말에 반대의 진리가 상기된다는 것도 부언해야 한다 .

 

568

이의 = 분명히 성서에는 성령이 말하지 않은 이야기가 많다 — 답 .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신앙에 해가 되지 않는다 .

이의 — 그러나 전부가 성령에서 나왔다고 교회는 결정했다 — 답 . 나는 두 가지를 들어 대답한다 . 하나는 교회가 그런 결정을 하지 않았다는 것 , 또 하나는 교회가 그런 결정을 했다 하여도 그것은 지지될 수 있다는 것 .

세상에는 거짓 성령이 많다 .

데오누시오는 자비심을 가지고 자리에 앉아 있었다 .

복음서에 인용된 예언은 당신들을 믿게 하기 위해 기록되어 있다고 생각하는가 ? 아니다 . 그것은 당신들을 신앙에서 멀리하기 위해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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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전적 ( 正典的 )   이단적인 것도 교회의 성립 당초에는 정전적인 것을 증명하는 데 도움을 준다 .

 

570

「 기초 」 의 장에다 「 표징 」 의 장에 있는 표징의 원인에 관한 것을 부가해야 한다 . 예수 그리스도가 ( 예언자들에 의해 ) 그 최초의 강림을 예언하신 이유 . 그 강림의 방식이 애매하게 예언된 이유 .

 

571

표징을 쓴 이유 = ( 그들은 육체적인 민족을 상대로 해서 그 민족을 영적인 계약의 수탁자로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 . 메시아를 믿게 하기 위하여서는 선행적인 예언이 존재할 필요가 있고 , 또 그 예언이 혐의를 받지 않고 근면 충실하고 지극히 열성적이고 또 전 지상에 알려진 사람들에 의해 유지될 필요가 있었다 .

이런 모든 것을 성취하기 위해서 신은 이 육체적인 민족 ( 유대인 ) 을 선택하고 그들에게 메시아를 구세주로서 , 또 이 민족이 좋아하던 육체적인 행복의 부여주 ( 附與主 ) 로서 예고하는 예언을 부탁했다 . 그래서 그들은 그들의 예언자들에 대해 비상한 열의를 가지고 그들의 메시아를 예고하고 있는 그런 책을 만인의 눈앞에서 유지하고 메시아가 오리라는 것 , 오는 데도 그들이 전 세계에 공표한 책에 예고된 방식으로 오리라는 것을 모든 이에게 확언했다 . 그러나 이 민족은 메시아의 비천하고 가난한 강림에 기대가 어긋나 그의 가장 잔인한 적이 되었다 . 이리하여 그들 즉 우리에게 호의적이라는 의심을 가장 적게 받는 민족 , 그리고 그들의 율법과 예언자에 대해 가장 엄격하고 열렬하다는 말을 들을 수 있는 민족이 그런 책을 순수하게 보존한 것이다 . 그런 까닭으로 그들에게 차질이 된 예수 그리스도를 배척하고 십자가에 못을 박은 사람이야말로 그를 입증하고 그가 차질될 것이라고 말했던 책을 전달하는 사람들이다 . 따라서 그들은 그를 거부함으로써 그가 그리스도임을 표시한 것이고 , 그는 그를 받아들인 의로운 유대인에 의해서도 , 그를 배척한 부정한 유대인에 의해 서도 마찬가지로 증명된 것이다 . 그 어느 것도 예언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

그 때문에 예언은 어떤 숨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 . 그것은 이 민족이 싫어한 영적인 의미이고 , 그들이 좋아한 육체적인 의미의 배후에 있는 것이다 . 만일 영적인 의미가 노출되었으면 그들은 그것을 좋아할 수가 없었으리라 . 그리고 만일에 그들이 영적인 약속을 좋아하고 메시아가 올 때까지 그 약속을 순수하게 보존했다고 하면 그들의 증언은 효력을 상실했을 것이다 . 왜냐하면 그들은 메시아의 벗이 되어 있던 셈이 되기 때문이다 .

여기에 영적인 의미가 은폐되어 있는 것이 오히려 좋았던 이유가 있다 .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 의미가 전연 감추어져 조금도 나타나지 않았다면 메시아의 증명으로서 소용이 없었을 것이다 . 그러면 어떻게 행하여졌던가 ? 어떤 장절에서는 현세적인 것에 의해 가려지고 , 어떤 장절에 있어서는 분명히 표현되었다 . 그 뿐더러 세계의 시기와 상태가 명약관화하게 예언되었다 . 그리고 이 영적인 의미는 어떤 곳에서는 매우 명료하게 설명되어 있으므로 ( 영이 육체에 굴복할 때 육체가 영에 투입한 맹목과 같은 ) 맹목에 빠지지 않는 한 그것을 인식하지 않을 수 없다 .

그러므로 신의 업적이 어떤 것인가가 여기에 나타나 있는 것이다 . 이 영적인 의미는 많은 곳에서는 다른 의미에 의해 가려지고 , 어떤 곳에서는 드물게 나타나 있다 . 그런데 그것이 감추어져 있는 곳은 양의적이어서 두 가지 의미로 해석할 수 있게끔 되어 있고 , 다른 한편으로 그것이 나타나 있는 곳은 단의적이어서 영적인 의미로밖에 해석할 수 없게끔 되어 있다 .

이렇듯 영적인 의미가 오류로 이끌 수는 없다 . 이를 오해한 자가 있다면 , 그것은 마찬가지의 육체적인 한 민족뿐이었다 .

왜냐하면 행복이 풍족히 약속되어 있는 경우 , 그것을 참다운 축복으로 해석함을 방해하는 것은 그 의미를 지상의 행복에만 한정하는 그들의 욕심이 아니고 무엇일까 ? 그러나 신에 있어서만 행복을 발견한 사람들은 그런 행복을 오직 신에 결부시켰다 . 세상에는 인간의 의지를 나누는 두 개의 원리 , 즉 욕과 사랑이 있기 때문이다 . 그러나 욕은 신에의 신앙과 양립될 수 없고 , 또 사랑은 지상의 행복과 공존할 수 없다는 것은 아니다 . 다만 욕은 신을 이용해서 이 세상을 즐기지만 , 사랑은 그 반대라는 것이다 .

그런데 성서에서는 최후의 목적에 따라 사물의 명칭이 부여된다 . 우리는 목적을 이루는 데 방해가 되는 모든 것은 적이라고 부른다 . 그러므로 어떠한 좋은 피조물이라 해도 의인을 신에게 배반시킨다면 의인의 적이다 . 신이라도 신에 의해 그 탐욕을 자극받는 사람들에게는 적이 되는 것이다 .

이처럼 적이라는 말은 최후의 목적에 달려 있으므로 의인은 적을 그들의 욕정이라고 해석했고 , 내적인 사람들은 바빌로니아인이라고 해석했다 . 그래서 이런 용어는 불의한 사람에 대해서만 분명치 않았던 것이다 . 이것이 바로 이사야가 Signa legem in electis meis ( 율법을 내가 간택한 자들 사이에 봉해 두리라 ) . 고 말하고 , 또 예수 그리스도는 걸림돌이 되 리라 . 고 말한 것이다 . 그러나 「 그에 걸려 넘어지지 않는 자는 행복이다 . 」 호세아도 이를 교묘하게 말한다 . 「 현자는 누구인고 . 그는 나의 말을 깨달으리라 . 의로운 사람은 내 말을 알리라 . 신의 길은 똑바르지만 , 악한 자들은 거기에 걸려 넘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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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들이 사기꾼들이라는 말 = 시기는 명료히 , 방법은 애매하게 . 표징의 다섯 개의 증거 .

 

573

성서에 있어서의 맹목 = 유대인은 말했다 . 「 그리스도는 어디서 올지 모 른다고 성서에 기록되어 있다 」 . 요한복음 7 장 27 절 . 또 12 장 34 절에는 「 그 리스도는 영원히 머물러 있으리라고 성서는 기록하고 있다 . 그런데 이 사람 ( 예수 ) 은 자기는 죽으리라고 말했다 . 」

또 성 요한은 「 그가 이렇게도 많이 기적을 행하시었어도 그들은 믿지 않았다 . 이것은 이사야의 말이 성취되기 위해서이다 . 왈 , 신이 그들의 눈을 어둡게 해 주고 , 운운 」 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12 장 37~40 절 ) .

 

574

위대 = 종교는 대단히 위대한 것이다 . 그러므로 종교가 분명치 않다고 하면 , 이를 탐구할 만한 노력을 취하고자 하지 않는 자가 종교를 박탈당한다는 것은 당연하다 . 이 종교는 구함으로써 발견될 수 있는 것이니만큼 , 그에 관해 불평을 말할 것이 무엇이냐 .

 

575

모든 것은 성서의 애매함에 이르기까지 간택된 사람들에게는 다행으로 변한다 . 그들은 신성한 광명 때문에 그런 애매함을 존중하는 까닭이다 . 그러나 모든 것은 광명까지라도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는 불행으로 변한다 . 그들은 자기들이 이해할 수 없는 애매함을 이유로 그런 광명을 비난하는 까닭이다 .

 

576

교회에 대한 세상 사람들의 일반적 태도 , 신은 눈을 어둡게 해 주고 혹은 밝게 해 준다 = 사실은 이런 예언이 신에서 나왔음을 증명해 주므로 그 외의 예언도 믿을 수 있을 것이다 . 그로 말미암아 우리는 세계의 질서를 아래와 같이 본다 . 즉 천지 창조와 대홍수의 기적이 망각되었으므로 신은 모세의 율법과 기적을 보내 주시고 , 특수한 사물을 예언하는 예언자들을 보내 주셨다 . 그리고 영속적인 기적의 준비로서 여러 가지 예언과 그 성취를 준비하셨다 . 그러나 예언은 의심을 받을 수 있으므로 신은 그런 협의를 받을 여지가 없는 것으로 만들어 놓고자 하셨다 . 운운 .

 

577

신은 이 민족의 맹목을 , 간택된 자들의 행복을 위해서 이용하셨다 .

 

578

간택된 사람들을 계몽하는 데는 충분한 광명이 있고 , 그들을 겸손하게 하기 위해서는 충분한 암흑이 있다 . 버림받은 사람들을 맹목하게 하기에는 충분한 암흑이 있고 , 그들을 정죄하고 변명할 수 없게 만들기 위해서는 충분한 광명이 있다 . 성 아우구스티누스 ․ 몽테뉴 ․ 스봉 .

구약성서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계도는 다른 많은 무용한 것들 사이에 끼어 있어 분별하기 어려울 정도로 되어 있다 . 만일 모세가 예수 그리스도의 조상만을 기록했다면 그것은 대단히 명료했을 것이다 . 만일 그가 예수 그리스도의 계도를 표시하지 않았다면 그것은 너무도 불명료했을 것이다 . 그러나 결국 세밀히 보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계도가 타말 , 룻 , 기타에 의해 충분히 분별할 수 있다는 것을 안다 .

희생의 공물을 제정한 사람들은 그것이 무용함을 알고 있었고 , 무용을 선언한 사람들은 그것의 집행을 그만두지 않았다 .

만일 신이 단 하나의 종교밖에 허용하시지 않았더라면 그 종교는 매우 쉽사리 알려졌을 것이다 . 그러나 세밀히 관찰하는 사람은 이 혼란 속에 있어서도 진정한 것을 충분히 분별해 낼 수 있다 .

전제 . 모세는 현명한 인간이었다 . 그러므로 그가 이지로서 자기를 율하고 있었다면 , 이지의 정면에서 어긋나는 일을 명백히는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

이처럼 극히 명백한 취약성조차도 모두 강한 힘이 된다 . 예를 들면 마태오복음과 루가복음의 두 개의 계도 . 이것들이 서로들 조회해서 작성된 것이 아니라는 것 이상으로 명료한 일이 있을까 ?

 

579

신과 사도들의 오만의 종자가 이단을 탄생케 하리라는 것을 예견하고 , 그 이단이 자기 자신의 말에서 생기는 경우를 막아내고자 성서와 교회의 기도문 가운데 상반되는 말과 글을 배치하고 , 그것이 때에 따라 결실하도록 했다 .

이와 마찬가지로 신은 도덕에 있어서도 사욕에 대결하여 결실하는 사랑을 부여하시다 .

 

580

자연은 스스로가 신의 영상 ( 影像 ) 임을 표시하기 위해 , 어떤 완전성을 가지고 있고 또 스스로가 영상을 불과함을 표시하기 위해 어떤 결함을 가지고 있다 .

 

581

신은 이지보다도 의지를 정비하려고 하신다 . 완전한 빛은 이지에는 유용할 것이지만 , 의지에는 유해할 것이다 . 오만을 비하시킬 것 .

 

582

인간은 진리를 가지고서도 우상을 만든다 . 사랑을 떠난 진리는 신은 아니라 영상이고 우상이지 사랑할 것도 숭배할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 하물며 진리의 반대인 허위를 사랑하든가 숭배해서는 안 된다 .

나는 완전한 암흑을 사랑할 수 있다 . 그러나 신이 나를 박명 속에 놓아두신다면 그런 근사한 어둠은 나를 불쾌하게 할 것이다 . 나는 완전한 암흑에 있는 것과 같은 장점을 거기에 인정하지 못하므로 유쾌해질 수 없다 . 이것은 바로 결점이고 , 내가 신의 명령을 떠나 암흑을 자기의 우상으로 삼고 있는 증거이다 . 그러니만큼 숭배해야 할 것은 신의 명령뿐이다 .

 

583

허약자라 함은 진리를 인식하기는 하지만 자기의 이해가 거기에 합치하는 한에 있어서만 이를 지지하는 사람들이다 . 그 외의 경우에는 진리를 포기한다 .

 

584

세계는 연민과 심판을 행하기 위해 존속하고 , 인간은 거기에 신의 손에서 태어나온 사람처럼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신의 적인 것처럼 존재하고 있다 . 인간들에 대해 신은 그들이 신을 찾고 신에 순종할 것을 바라기만 하면 신의 밑에 돌아가는 데 충분한 빛을 은총에 의해서 부여해 주시지만 , 그들이 찾고 순종하기를 거부한다면 그들을 책벌하는 데 충분한 빛도 부여해 주신다 .

 

585

신이 자신을 감추려고 하셨다는 것 = 만약 하나의 종교밖에 없었다면 , 신은 그 속에 명백히 나타나실 것이다 . 우리의 종교에 한해서만 순교자가 있었을 때에도 이와 마찬가지일 것이다 .

신은 이처럼 숨어 계시므로 신이 살아 계신다는 것을 설복하지 않는 종교는 모두 진리가 아니다 . 그리고 그 이유를 설명하지 않는 종교는 모두 유익하지 않다 . 우리의 종교는 그것들을 충족하고 있다 .

Vere tu es Deus absconditus ( 참으로 그대는 숨어 계시는 신이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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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애매함이 없었더라면 인간은 자기의 타락을 알지 못했을 것이다 . 만일 빛이 없었더라면 인간은 구원을 원하지 않았을 것이다 . 따라서 신이 반은 숨어 계시고 반은 나타나 계신다는 것은 우리에게 정당할 뿐만 아니라 유익하기도 하다 . 왜냐하면 자기의 비참을 모르고 신을 안다는 것도 , 신을 모르고 자기의 비참을 안다는 것도 , 인간에게는 마찬가지로 위험하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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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종교 — 기적 • 독실하고 결점 없는 성도 • 학자 • 위대한 증인 • 순교자 • 책립된 임금 ( 다윗 ) ․ 왕족 이사야 등 — 에 있어서 위대하고 , 지식에 있어서 위대한 이 종교는 모든 기적과 모든 지혜를 늘어놓은 다음 그것들 전부를 부인하여 말하기를 , 자기에게는 지혜도 표징도 없고 다만 십자가와 어리석음이 있을 따름이라고 했다 .

왜냐하면 그런 표징과 지혜로써 당신들의 신뢰를 얻게 된 사람들 , 그리고 그런 성질을 당신들에게 입증한 사람들이 선언하기를 , 그런 모든 것은 우리를 개변할 수도 없고 , 우리로 하여금 신을 알고 사랑하게 할 수도 없다 . 그것을 할 수 있는 것은 지혜도 표징도 없는 십자가의 어리석음의 힘이지 , 이 힘이 없는 표징이 아니라고 했기 때문이다 . 이와 같이 우리의 종교는 그 유력한 원인에 관해서는 어리석지만 , 그 준비를 하는 지혜에 있어서는 현명한 것이다 .

 

588

우리의 종교는 현명하면서도 어리석다 . 현명하다는 것은 그것이 가장 지혜롭고 , 기적이나 예언 위에 견고하게 서 있기 때문이다 . 어리석다는 것은 인간을 거기에 귀의시키는 것은 결코 이런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 기적이나 예언들은 이 종교에 귀의하지 않는 자를 정죄할 것이지만 거기에 귀의하는 자에게 신앙을 주는 것은 아니다 . 그들을 믿게 하는 것은 십자가다 . ne evacuata sit crux ( 십자가가 공허해지지 않기 위해서 ) . 그래서 지혜와 표징을 가지고 온 성 바오로는 , 자기는 지혜도 표징도 가지고 온 것이 아니라고 말했다 . 왜냐하면 그는 회심시키기 위해 왔기 때문이다 . 그러나 단순히 설득하기 위해서 온 사람은 지혜와 표징을 가지고 왔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

모순 = 종교의 무한한 지혜와 어리석음 .

 

 

 

 

  

제 9 편 영속성

 

  

 589

그리스도교가 유일한 종교가 아니라는 데 관해 = 이것은 그리스도교를 진실한 종교가 아니라고 믿게 하는 이유가 되기는커녕 오히려 진실한 종교임을 가르쳐 주는 것이다 .

 

590

여러 종교에 대해서는 성실해야 한다 . 참다운 이교도 , 참다운 유대인 , 참다운 그리스도교도 .

 

591

  591

592

다른 종교의 허망 = 그들에게는 증인이 없다 . 이 사람들 ( 유대인 ) 에게는 그 증인이 있다 . 신은 다른 여러 종교에 도전해서 이런 증거를 만들어 내시다 . 이사야 43 장 9 절 . 44 장 8 절 .

 

593

중국사 = 증인이 그것을 위해서는 죽어도 좋다는 역사만을 나는 믿는다 . ( 둘 가운데 어느 것을 더욱 믿을 수 있는가 ? 모세인가 , 중국사람인가 ?)

문제는 그것을 개관하는 것이 아니다 . 내가 당신들에게 말하고 싶은 것은 , 거기에는 사람을 맹목하게 하는 것과 계몽하는 것이 있다는 것이다 .

이 한 마디로써 나는 당신들의 모든 이론을 타파한다 . “그렇지만 중국은 혼미를 느끼게 한다”라고 당신들은 말한다 . 나는 대답한다 . “중국은 혼미를 자아낸다 . 그러나 거기에서는 빛도 발견할 수 있다 . 그 빛을 찾아보라”라고 .

이처럼 당신들이 말하는 것은 모두 하나의 의도를 받들 따름이고 , 다른 의도에는 어긋나지 아니한다 . 따라서 그것은 이익이 될망정 손해는 되지 않는다 .

그러므로 그것은 자세히 볼 필요가 있다 . 문서는 책상 위에 놓여야 한다 .

 

594

중국사에 대한 반박 . 멕시코의 역사가들 , 다섯 개의 태양 , 그 최후의 태양은 8 백 년밖에 경과되지 않았다 .

1 민족에 의하면 수락된 책과 1 민족을 만드는 책과의 상위 .

 

595

마호메트에게는 권위가 없었다 . 따라서 그의 이론은 그의 고유한 힘에만 의거했으므로 매우 유력했을 것이다 .

그러면 그는 자기를 믿게 할 만한 그 무엇을 이야기했던가 ?

 

596

시편은 전 세상에서 노래 불린다 .

마호메트의 증언을 하는 자 그 누구냐 ? 그 자신이다 .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 자신의 증언이 무효이기를 바라신다 .

증인은 그 성질상 항상 여러 곳에 존재함을 필요로 한다 . 그런데 불쌍하게도 마호메트는 자기 한 사람뿐이다 .

 

597

마호메트의 반박 = 코란은 마호메트의 것이지만 , 그 이상으로 복음서는 성 마태오의 것이다 . 왜냐하면 복음서는 많은 제자들에 의해 몇 세기에 걸쳐 인용되고 , 그 적인 케르소스나 포르피리오스까지 그를 부인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

코란은 말한다 , 성 마태오는 선인이었다고 . 그러므로 선인을 악인이라 말했고 , 그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서 말한 바를 동의하지 않았던 마호메트는 가짜 예언자였던 것이다 .

 

598

마호메트에 있어서의 막연한 것은 신비적인 의미로 해석될 수 있는 것에 의해서가 아니고 , 오히려 그의 천국이나 그 외의 것처럼 뚜렷한 것에 의해서 그를 비판해 주기를 바란다 . 그것이야말로 그의 웃음거리가 되는 점이다 . 그러므로 그의 뚜렷한 것이 그의 웃음거리라면 그의 막연한 것이 신비적으로 해석된다는 것은 부당한 일이다 .

성서는 결코 그와 동일하게 논할 바 아니다 . 그 속에는 마호메트의 막연함과 마찬가지로 기이한 막연함이 있음을 나도 인정한다 . 그러나 거기에는 훌륭한 빛이 있고 , 명백히 성취된 예언이 있다 . 그러므로 승부는 대등하지 않다 . 막연함에 있어서만 비슷하고 , 그 막연함을 존경시킬 만한 빛에 있어서 비슷하지 않다는 것을 혼동하고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 .

 

599

예수 그리스도와 마호메트의 차이 = 마호메트는 예언되지 않았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예언되어 있었다 .

마호메트는 죽이지만 ,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의 것을 죽이게 한다 .

마호메트는 독서를 금하지만 , 사도들은 독서를 명한다 .

이는 요컨대 ( 둘은 ) 완전히 상반되어 있으므로 마호메트가 인간적으로 성공하는 길을 택했다 하면 ,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적으로 파멸하는 길을 취한 셈이 되고 , 또한 마호메트가 성공했으니 예수 그리스도도 충분히 성공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결론하는 대신에 , 마호메트가 성공했으니 예수 그리스도는 당연히 파멸했어야 할 것이라고 결론지어야 한다 .

 

600

마호메트가 한 일은 누구나 할 수 있다 . 그는 기적도 행하지 않았고 예언도 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 예수 그리스도가 한 일은 누구도 할 수 없다 .

 

601

우리의 신앙의 토대 = 이교도는 ( 오늘날에 있어서는 ) 아무런 기초도 없다 . 지난날 이교에는 말에 의한 신탁이라는 기초가 있었다 한다 . 그러나 이를 우리에게 보증해 주는 책이란 어떤 것인가 ? 그런 책은 그 저자들이 유덕한 소치로 믿을 만한 가치를 가지고 있는 것일까 ? 그것은 결코 손상당하지 않으리라고 보증할 수 있는 절대한 주의를 가지고 보존되어 있는가 ?

마호메트교는 그 기초로서 코란과 마호메트를 가지고 있다 . 그러나 세계의 최후의 희망이어야 할 이 예언자는 과연 예언을 했던가 ? 그는 자칭 예언자가 되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찾아볼 수 없는 어떤 증거를 가지고 있었던가 ? 어떤 기적을 행하였다고 그는 자칭하고 있는가 ? 자기 면허의 전설에 의해도 좋으니 , 어떤 신비를 그는 가르쳤던가 ? 어떤 도덕과 어떤 지복을 ?

유대교는 성서의 전설에 있어서와 민중의 전성에 있어는 서로 달이 해석되어야 한다 . 그의 도덕과 행복은 민중의 전설에 의하면 웃음거리로 보인다 . 그러나 ( 성서의 ) 전설에 의하면 훌륭한 것이다 . 이것은 모든 종교에 관해서도 마찬가지다 . 왜냐하면 그리스도교도 성서에 있어서와 회의론자에 있어서는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 그 기초는 훌륭하다 . 이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책이고 가장 진정한 책이다 . 또 마호메트가 그의 책을 존속시키고자 그 독서를 금한 데 대해서 , 모세는 그의 책을 존속시키고자 모든 사람에게 그의 독서를 명했다 .

우리의 종교 ( 그리스도교 ) 는 다른 하나의 신성한 종교 ( 유대교 ) 를 단순한 밑바탕으로 삼고 있는 정도로 신성한 것이다 .

 

602

질서 = 유대인의 모든 상태 속에서 명백한 것과 논쟁할 여지가 없는 것을 찾아볼 것 .

 

603

유대교는 그 권위 , 그 기간 , 그 영속 , 그 도덕 , 그 교리 , 그 효과에 있어서 완전히 신성하다 .

 

604

상식과 인간의 본능에 어긋나는 유일한 학문이야말로 , 사람들 사이에 항상 존속해 온 유일한 학문이다 .

 

605

본성에 어긋나고 상식에 어긋나고 우리의 쾌락에 어긋나는 유일한 종교야말로 항상 존재해 온 유일한 종교이다 .

 

606

우리의 종교 이외의 어떤 종교도 인간이 죄악 속에 태어났음을 가르쳐 주지 않았다 . 철학자들의 어떤 학파도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 그러므로 누구도 진리를 말하지 않았던 것이다 .

그리스도교를 제외하고는 어떠한 학파도 종교도 지상에 영존하지 않았다 .

 

607

유대인의 종교를 조잡한 자료로 판단하는 자는 이를 오해하리라 . 이 종교는 성서와 예언자들의 성전 ( 聖傳 ) 에 있어서 명백하고 , 양자는 예언자들이 율법을 정의적으로 해석하지 않았다는 것을 명시해 준다 . 이와 같이 우리의 종교도 복음과 사도와 성전에 있어는 신성하지만 , 그 취급방법을 그릇되게 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우스운 것이 된다 .

메시아는 육체적인 유대인에 의한다면 이 세상의 위대한 임금이 될 예정이었다 . 예수 그리스도는 육체적인 그리스도교에 의하면 , 우리로 하여금 신에의 사랑을 면하게 하고 우리와는 무관하게 만사를 행하는 기적을 보여주기 위해 온 것이라 한다 . 이것들은 다 그리스도교도 아니고 유대교도 아니다 .

진실한 유대인과 진실한 그리스도교도가 늘 대망해 온 것은 그들로 하여금 신을 사랑하게 하고 , 그 사랑으로 적을 타도케 하는 메시아였다 .

 

608

육체적인 유대인은 그리스도교도와 이교도 사이에 있어 중간의 위치를 점한다 . 이교도는 신을 모르고서 이 세상만을 사랑한다 . 유대인은 진실한 신을 알고서 이 세상만을 사랑한다 . 그리스도교도는 진실한 신을 알고자 이 세상을 사랑하지 않는다 . 유대인과 이교도는 같은 행복을 사랑한다 . 유대인과 그리스도교도는 같은 신을 인정한다 .

유대인에는 두 종류가 있었다 . 하나는 이교도적 감정밖에 가지고 있지 않았으나 ,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교적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

 

609

각 종교에 있어서의 두 가지 종류의 사람들 . 이교도들 간에서는 금수의 숭배자와 자연종교 내의 유일신의 숭배자 . 유대인 간에서는 육체적인 사람들과 낡은 율법 내의 그리스도교 신자였던 영적인 사람들 . 그리스도교도 간에서는 새로운 율법 내의 유대인인 조잡한 사람들 .

육체적인 유대인은 육체적인 메시아만을 대망했다 . 조잡한 그리스도교도는 메시아가 자기들로 하여금 신을 사랑하는 것을 면해 주리라고 생각한다 .

진실한 유대인과 진실한 그리스도교도는 자기들로 하여금 신을 사랑하게 하는 메시아를 숭배한다 .

 

610

진실한 유대인과 진실한 그리스도교도는 같은 종교를 가지고 있음을 표시하기 위해 = 유대교는 본래 아브라함의 부성 • 할례 • 공물 • 의식 • 성궤 • 선전 • 예루살렘 , 그리고 마지막으로 모세의 율법과 계약에만 있는 것으로 생각되어 왔다 .

나는 말한다 . 유대교는 그런 것들 중 어느 것에도 존재하지 않고 오직 신의 사랑에만 존재하고 , 신은 그 외의 모든 것을 버리셨다고 .

신은 아브라함의 자손을 받아들이지 않으셨다 .

유대인은 신을 배반하는 경우 , 이방인과 마찬가지로 신의 처벌을 받으리라 . 신명기 8 장 19 절 , 「 너희들이 만약 너희들의 신을 잊고 다른 여러 신을 따라간다면 , 나는 너희들에게 고하노니 너희들은 신이 너희들 앞에서 멸망시킨 나라의 백성처럼 멸망당하게 되리라 . 」

이방인도 신을 사랑하면 유대인과 마찬가지로 신께서 기꺼이 받아들이시리라 . 이사야 56 장 3 절 , 「 이방인이여 , 주 나를 받아들이지 아니하신다고 말하지 말라 . 신에게 봉사하고 , 신을 사랑하기 위해 결합한 이방인들을 나의 성스러운 산에 인도하고 그들로부터 공물을 받으리라 . 이는 나의 집은 기도의 집이기 때문이다 . 」

진실한 유대인은 그들의 공덕이 아브라함에게서가 아니라 신에게서만 온다고 생각했다 . 이사야 63 장 16 절 , 「 그대는 참으로 우리의 아버지이시다 . 아브라함 우리를 모르고 , 이스라엘 우리를 인정하지 않았지만 , 그대야말로 우리의 아버지 , 우리의 구속자이시다 . 」

모세까지도 그들에게 말하기를 , 신은 사람을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했다 . 신명기 10 장 17 절 , 「 신은 사람도 공물도 받아들이지 않는다 」 라고 그는 말한다 .

안식일은 표징에 지나지 않는다 . 출애굽기 31 장 13 절 , 그리고 이집트를 떠난 기념에 지나지 않는다 . 신명기 5 장 15 절 , 그러므로 그것은 벌써 필요치 않다 . 이집트는 망각당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

할례는 표징에 지나지 않았다 . 창세기 17 장 10 절 , 그런 까닭으로 황야에 있을 때는 그들은 할례를 받지 않았다 . 왜냐하면 그들이 다른 민족들과 섞인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에 .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 후에는 이미 필요치 않은 것이다 .

마음의 할례가 명령되다 . 신명기 10 장 16 절 , 예레미야 4 장 4 절 , 「 마음의 할례를 행하라 . 너희의 마음의 앞 가죽을 제거해라 . 그리고 완고해지지 말라 . 이는 너희의 신은 위대하고 유력하고 무서운 신이어서 , 사람을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이다 . 」

신은 다른 날 그것을 행하리라고 말하셨다 . 신명기 30 장 6 절 , 「 신은 너희의 마음과 너희의 아들의 마음에다 할례를 행하고 , 너희로 하여금 진심으로 신을 사랑하게 하시리라 . 」

마음의 할례를 받지 않는 자는 심판을 받으리라 . 예레미야 9 장 26 절 , 신은 할례를 받지 않은 백성과 이스라엘의 백성 전부를 심판하시리라 . 왜 ? 그들은 「 마음에 할례를 받지 않은 자 」 들이므로 .

외면적인 것은 내면적인 것 없이는 무효하다 . 요엘 2 장 13 절 , Scimidite corda vestra ( 너희들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도록 하라 ) 등 이사야 58 장 3, 4 절 등 .

신을 사랑하는 것은 신명기 전부에 걸쳐 권고되어 있다 . 신명기 30 장 19 절 , 나 하늘과 땅을 불러 증거로 삼는다 . 나는 생과 사를 너희들 앞에 놓아둔다 . 너희들 생명을 택하고 , 신을 사랑하고 , 신에 순종토록 하라 . 이는 신이 너희들의 생명이기 때문이다 .

이 사랑을 결핍한 유대인은 그 죄 때문에 배척당하고 , 그 대신 이교도가 간택되리라 . 호세아 1 장 9 절 , 신명기 32 장 20 절 , 「 나 그들의 최후의 죄를 보고 내 얼굴을 그들에게 감추리라 . 이는 그들이 바르지 못한 불신의 백성이기 때문이다 . 그들은 신 아닌 자를 가지고 나의 분노를 자아냈으니 나도 나의 백성이 아닌 다른 백성을 가지고 그들에게 질투를 일으키게 하고 , 알지 못하고 깨닫지 못한 백성들을 가지고 질투를 자아내게 하리라 」 . 이사야 65 장 1 절 .

이 세상의 행복은 거짓이다 . 참다운 행복은 신과 결합하는 데 있다 . 시편 144 편 15 절 .

신은 그들의 제사를 기뻐하시지 않는다 . 아모스 5 장 21 절 .

신은 유대인의 공물을 기뻐하시지 않는다 . 이사야 66 장 1~3 절 , 동 1 장 11 절 , 예레미야 6 장 20 절 , 다윗 Miserere ( 시편 51 편 ) — 선인의 공물도 Exspectavi ( 이사야 5 장 7 절 ) 시편 58 편 8~14 절 .

신은 그것 ( 공물 ) 을 오직 그들이 완고하기 때문에 정하셨다 . 미가 6 장은 훌륭하다 . 열왕기상 15 장 22 절 , 호세아 6 장 6 절 .

이교도의 공물은 신이 기꺼이 받으시고 유대인의 공물에는 유의하시지 않는다 . 말라기 1 장 11 절 .

신은 메시아에 의해 새로운 계약을 맺으시고 낡은 계약을 버리시리라 . 예레미야 31 장 31 절 .

선하지 않은 망령 . 에스겔 .

옛날 일은 망각하리라 . 이사야 43 장 18, 19 절 , 65 장 17 절 , 18 절 .

성궤는 상기되지 않으리라 . 예레미야 3 장 15, 16 절 .

신전은 돌보아지지 않으리라 . 예레미야 7 장 12 절 ~14 절 .

재래의 공물은 배척되고 다른 순수한 공물이 제정되리라 . 말라기 1 장 11 절 .

아론의 제사직은 폐지되고 멜기세덱의 그것이 메시아에 의해 초래되리라 . Dixit Dominus ( 시편 110 편 ) .

이 제사직은 영속하리라 . 동상 .

예루살렘은 버림받고 , 로마는 받아들이리라 . Dexit dominus ( 시편 110 편 ) .

유대인의 이름은 포기되고 새로운 이름이 부여되리라 . 이사야 65 장 15 절 .

이 후의 이름은 유대인의 이름보다 훌륭하고 또 영원히 지속되리라 . 이사야 56 장 5 절 .

유대인에게는 예언자가 없고 ( 아모스 ) , 임금이 없고 , 제후가 없고 , 공물이 없고 , 우상이 없게 되리라 .

유대인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족으로서 늘 존속하리라 . 예레미야 31 장 36 절 .

 

611

나라 = 그리스도교 국가는 유대인의 나라와 마찬가지로 지배자로서 신만을 가지고 있었다 . 유대인 피론이 「 왕국론 」 에서 지적한 그대로이다 .

그들이 전쟁을 했다면 이는 신을 위해서였다 . ( 그들은 ) 주로 신에다 희망을 걸었다 . 그들은 그의 거리거리를 신에 속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 신을 위해 수비했다 . 역대기상 19 장 13 절 .

 

612

창세기 17 장 , 「 나 나의 계약을 나와 너희 사이에 세워 영원한 계약으로 하고 너희의 신이 되리라 」 (7 절 ) .

「 너희는 나의 계약을 지켜라 」 (9 절 ) .

 

613

영속성 = 이 종교 , 즉 인간은 영광의 상태 및 신과의 교응에서 비애와 회죄와 신에서 멀어진 상태에 떨어졌지만 , 그런 생활 후에 내림하실 메시아에 의해 다시 원상으로 돌아가리라는 신앙으로서 성립되는 이 종교는 늘 지상에 존재해 왔다 . 모든 것은 지나갔지만 모든 것의 존재 목적인 이 종교는 존속했다 .

이 세계의 초기에 있어서 사람들은 모든 종류의 혼란 속에 빠졌지만 , 그래도 여전히 에녹나 라멕 그 외 사람들처럼 세계의 시초부터 약속된 그리스도를 인내성 있게 기다린 성도들이 있었다 . 노아는 인간의 악이 절정에 달한 것을 보고 , 그 자신이 그 표징이었던 메시아를 기대함으로써 스스로 사람들을 구할 수 있는 자가 되었다 . 아브라함은 우상 숭배자들에게 둘러싸여 있을 적에 , 그가 오해 전부터 그 출현을 축복한 메시아의 신비를 신으로부터 제시받았다 . 이삭과 야곱의 시대에는 증오할 일이 모든 땅에 만연했었으나 이들 성도는 신앙 속에 살았다 . 그리고 야곱은 임종에 그의 애들을 축복하고 표현을 못한 만큼 감격해서 부르짖었다 . 「 아아 , 나의 신이여 , 나는 그대가 약속하신 구세주를 기다렸노라 . Salutare tuum exspectabo , Domine 」 라고 . 애굽인은 우상숭배와 마술에 감염되어 있었다 . 신의 백성들까지도 그들의 관례에 끌려 들어가고 있었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 모세나 그 이외의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신을 믿고 , 신이 그들을 위해 준비하신 영원한 하사품을 바라면서 신을 예배했다 .

다음에는 그리스인과 로마인이 허위의 여러 신을 횡행시켰다 . 신인들은 몇 백 가지의 다른 신학을 고안해 냈고 , 철학자들은 수천의 서로 다른 학파로 분열했다 . 그래도 여전히 유대의 중심에는 그들만이 알고 있는 메시아의 강림을 예언하는 간택된 사람들이 늘 존재했다 .

드디어 때가 되어 그는 오셨다 . 그때부터 사람들은 많은 분리와 이단과 , 많은 국가의 멸망과 , 모든 사물의 현저한 변화가 생기는 것을 보았다 . 그러나 늘 예배되어 오던 신을 예배하는 교회는 끊임없이 존속했다 . 그리고 늘 지속한 이 종교가 항상 공격받아 온 종교라는 사실은 놀랍기 짝이 없고 완전히 신성한 것이다 . 이 종교는 몇 천 번이나 전반적 파괴의 위기에 이르곤 했다 . 그러나 그런 상태에 빠질 때마다 신은 그 힘의 이상한 발동으로서 이를 부흥하시곤 했다 . 그와 아울러 놀라운 일은 이 종교가 폭군의 의지에 굴복하지 않고 불요불굴 , 자신을 보존해 온 것이다 . 그도 그럴 것이 , 국가라면 그 법률을 필요에 따라 가끔 굴복하곤 하면 존속한다는 것은 묘한 일이 아니지만… ( 몽테뉴 ) 중의 지적된 곳을 보라 .

 

614
국가는 그 법률을 필요에 따라 때때로 굽히곤 하지 않으면 멸망하리라 . 그러나 종교는 그것을 허용하지 않았고 , 또 그렇게 하지도 않았다 . 확실히 그런 타협이나 특이한 사례도 필요하다 . 굽힘으로써 자신을 보존한 예는 드물지 않다 . 그러나 그것은 엄밀히 자신을 계속시키는 길이 아니다 . 그래도 역시 결국에는 전멸한다 . 천 년이나 계속한 것은 하나도 없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 이 종교가 늘 자신을 지속하면서 변절하지 않았다는 것은 , 그의 신성을 표시한다 .

 

615

여기 새삼스러이 말할 것도 아니지만 , 그리스도교에는 어떤 경탄할 만한 것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 「 그것은 당신이 그 속에 태어났기 때문이라 」 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는지도 모른다 . 천만에 , 나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그 선입견에 오도될까 크게 경계하고 있다 . 그러나 나기가 그 속에서 태어났다 하더라도 그것이 경탄할 만한 것임을 인정치 않을 수 없거든 .

 

616

영속성 = 메시아는 늘 신앙되어 왔다 . ( 메시아에 관한 ) 아담의 전설은 노아와 모세에 있어서는 더욱 새로웠다 . 그 이래 예언자들은 메시아의 일을 예언했고 , 그와 아울러 다른 일도 늘 예언했다 . 그런 사건들은 때때로 사람들의 안전에서 일어나고 , 그들의 사명이 건실하다는 것 , 나아가서는 메시아에 관한 그들의 약속이 진실하다는 것을 표시했다 . 예수 그리스도는 기적을 행하시고 , 사도들 역시 기적을 행해 모든 이교도를 회심시켰다 . 이리하여 모든 예언은 성취되고 메시아는 영원히 증명된 것이다 .

 

617

다음 사항을 고찰해 주기를 원한다 . 세계의 시초부터 메시아에의 기대 , 또는 예배가 끊어지지 않고 존속해 온 것 , 그 백성을 구할 구세주가 생기리라는 표시를 신으로부터 받았다고 말한 사람이 존재했다는 것 , 그 다음 아브라함이 나타나 그가 낳은 아들에게서 메시아가 나타나리라는 계시를 받았다고 말한 것 , 야곱이 그 열 두 명의 아들 중 유다에게서 메시아가 생겨나리라고 언명한 것 , 다음에는 모세와 예언자들이 나타나 메시아 강림의 시기와 방식을 언명했다는 것 , 그들은 그 소유하는 율법이 메시아의 율법의 준비에 지나지 않고 , 그때까지 그들의 율법은 존재하지만 메시아의 율법은 영구히 존속하고 , 때문에 그들의 율법 또는 그것이 약속했던 메시아의 율법은 영원히 지상에 존재하리라고 말했다는 것 , 사실 그것은 항상 존속했다는 것 , 나중에 예수 그리스도가 모든 예언된 사정 아래 강림하셨다는 것 , 이런 것은 놀라운 일이다 .

 

618

이것이 확실한 사실이다 . 모든 철학자들이 여러 가지 학파로 분열되어 있는 동안에 , 세계의 한 구석에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민족에 속하는 사람들이 있어 「 전 세계는 미망에 빠져 있다 . 신은 자기들에게 진리를 계시하셨다 . 그 진리는 지상에 영원히 존재하리라 」 라고 선언했다는 것은 . 실제로 다른 학파는 단절했지만 , 이 사람들은 끊임없이 존속해서 벌써 4 천 년이 된다 .

그들은 아래와 같이 선언한다 . 인간은 신과의 교응을 상실하고 신에게서 완전히 멀어졌으나 , 신은 그들의 구원을 약속하셨다는 것을 자기들은 조상으로부터 전승받았다 . 이 교리는 지상에 영원히 존속할 것이다 . 그들의 율법은 이중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 1,600 년 동안 그들이 예언자로 믿었던 사람들이 있어 , 시기와 방식을 예언했다 . 400 년 후에 그들은 여러 곳에 분산했다 .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도처에 선전되기 위해서였다 . 예수 그리스도는 예언된 방식과 시기대로 강림했다 . 그때부터 유대인은 곳곳에 분산해서 저주를 받으면서도 존속하고 있다 .

 

619

나는 그리스도교가 그보다 선행하는 종교 ( 유대교 ) 위에 기초를 두고 있 음을 인정한다 . 그에 관해 확실하다고 생각되는 바를 다음에 말하리라 .

나는 여기에서 모세 ․ 예수 그리스도 ․ 사도들의 기적에 관해서는 말하지 않으련다 . 그것은 애초부터 설득적으로 보이지 않고 , 또 내가 여기서 해명하고자 하는 바는 그리스도교의 모든 기초 , 즉 명명백백하여 누구도 의문을 품을 만한 여지가 없는 것뿐이기 때문이다 . 우리가 세계의 여러 장소에 세계의 다른 모든 민족에서 분리된 특수한 한 민족 , 자칭하기를 유대인이라고 하는 사람들을 보고 있다는 것은 확실한 사실이다 .

다음에 나는 세계의 여러 장소와 모든 시대에 많은 종교가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 그러나 그런 종교에는 나의 마음에 드는 도덕도 , 나를 이끄는 증거도 없다 . 이리하여 나는 마호메트의 종교도 , 중국의 종교도 , 이 단 하나의 이유 , 즉 그것들 중 어떤 것도 진리의 표지를 다른 것에 비해 더 많이 가지고 있지 못하며 , 이것이 아니면 안 된다는 그런 어떠한 것도 가지고 있지 않으므로 , 이성은 그 어느 것에도 나를 경주케 할 수 없기 때문에 동등하게 배척하지 않을 수 없다 .

그러나 이렇게 시대가 변천하는 데 따라 , 풍속도 신앙도 다 불안정하고 기괴한 여러 가지 모양을 표시하는 것을 고찰하고서 나는 세계의 한 구석에 , 지상에 있는 다른 모든 민족과 분리되어 여러 민족 중 가장 오래되고 , 그 역사는 우리가 알고 있는 가장 오래된 역사보다 수세기나 더 앞서 있는 특수한 한 민족을 발견한다 .

그 위에 또 나는 이 위대하고 , 수가 많은 민족이 단 한 사람에서 생겨났으며 , 유일의 신을 예배하고 신의 손에서 받았다고 자칭하는 하나의 율법에 의해 인도되고 있음을 보고 있다 . 그들은 신으로부터 신비를 계시 받은 세계 유일의 민족이라는 것 , 모든 인간은 타락해서 신의 은총을 상실하고 있다는 것 , 인간은 모두 자기의 감성과 자기의 생래의 이지 속에 방임되어 있다는 것 , 거기서 종교나 습관에 관해 인간들 사이에 기괴한 미망이나 끊임없는 변화가 생긴다는 것 ,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러한 행위에 있어 부동의 태도를 가진다는 것 , 그러나 신은 다른 여러 민족을 영원히 이 암흑 속에 방임해 두지 않으신다는 것 , 만인을 위해 구세주가 오신다는 것 , 그들은 이 일을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 , 그들은 이 큰 사건의 선구자 및 전령자가 되기 위해 , 또 만민을 소집해서 그들과 같이 이 구세주를 기다리기 위해 특별히 만들어졌다는 것 등을 — 그들은 주장한다 .

이 민족과의 만남은 나를 놀라게 하고 나의 주의를 촉구할 만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 나는 그들이 신에게서 받았다고 자랑하고 있는 율법을 관찰하고 그것이 훌륭하다는 것을 인정한다 . 그것은 모든 율법 중 최초의 것이고 , 그리스인들 사이에 법률이라는 말이 통용되기에 앞서 그들에게 수락되고 끊임없이 준수되어 온 것이다 . 또 내가 기묘하게 생각하는 것은 이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법률이 가장 완전한 것이었다는 것이다 . 그런 까닭으로 세계 최대의 입법자들이 유대인의 율법을 차용했다는 것은 아테네의 12 계율에도 나타나 있다 . 이것은 뒤에 로마 사람들에 의해 차용된 것이고 , 요세푸스 , 기타의 사람들이 이러한 사유를 충분히 기술하지 않았지만 이를 증명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

 

620

유대 민족의 장점 = 이 연구에 있어서 유대 민족은 그들 사이에 발견되는 허다한 놀랍고 특이한 사실에 의해 우선 나의 주의를 끈다 .

최초에 나의 주목을 끈 것은 한 민족이 전부 동포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다 . 다른 모든 민족들이 무수한 민족의 집합으로서 구성되어 있는 데 대해 , 이 민족은 수가 많았지만 모두 단 한 사람으로부터 생겨났다 . 이처럼 전부가 같은 혈육이고 서로들 지체였기 때문에 그들은 하나의 유력한 가족국가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 이것이 독자적인 점이다 .

이 민족은 비단 그 역사가 오래된 점에 있어서 중요할 뿐만 아니라 그 영속성에 있어서도 이례적이다 . 이 민족은 발생 이래 여태까지 연면히 조속해 왔었다 . 왜냐하면 그보다 훨씬 뒤에 나타난 그리스 • 이탈리아 • 스파르타 • 아테네 • 로마 , 기타 여러 민족은 벌써 오래 전에 멸망한 데 반해서 이 민족은 항상 존속해 왔기 때문이다 . 그런데다가 유대인의 역사가들이 입증하고 있는 것처럼 또 긴 세월을 통한 사물의 자연적인 귀추에서 쉽사리 판단되는 것처럼 수많은 유력한 왕들이 몇 백 번이나 그들을 멸망시키려고 별별 일을 기도하였는데도 불구하고 , 그들은 여전하게 늘 보존되어 ( 또 그 보존이 예언되어 ) 왔다 . 그리고 그들의 역사는 가장 오래된 세대로부터 최근 세대까지 걸쳐 있으므로 , 그 기간에는 우리의 모든 역사의 기간이 포함되어 있다 ( 우리의 기간보다 훨씬 선행하고 있는 것이다 ) .

이 민족을 통치하는 율법은 세계법률 중 가장 오래되고 또 가장 완전한 것인 동시에 , 한 나라에 있어서 늘 끊임없이 수호 되어 온 유일한 것이다 . 이것은 요세푸스가 < 아비온에 답함 > 이라는 글 속에 훌륭히 표시하고 , 유대인 피론이 여러 가지 구절로 표시한 바로서 그런 책에서 그들은 유대인의 율법이 아주 오해된 것이고 , 법률이라는 명칭조차도 그보다 천 년 이상이나 지난 뒤 가장 오래된 민족에 의해 겨우 알게 된 데 지나지 않는다고 지적해 놓았다 . 따라서 여러 나라의 이야기를 쓴 호메로스도 이 명칭을 사용치 못했다 . 또 그 완전함을 알기 위해서는 한 번만 읽으면 넉넉하다 . 그 율법에서는 만사가 비상한 지혜와 다대한 공정과 , 극도의 분별력을 가지고 마련되어 있으므로 , 이를 약간 알고 있었던 그리스 ․ 로마의 가장 오래된 입법자들은 그들의 주요한 법률을 유대의 율법에서 차용했을 정도였다 . 이것은 12 계율이라고 불리는 법률이나 , 요세푸스가 제시한 다른 증거에 의해서 명백하다 .

그러나 이 율법은 , 그와 동시에 그들의 종교적 제의에 관한 한 모든 율법 중 가장 준엄하고도 가혹한 것이고 , 이 민족으로 하여금 그 의무에 복종시키기 위해 수천의 까다로운 시행세목을 사형이란 극형에 호소해서 그 집행을 요구하고 있다 . 그러므로 그것이 이처럼 반역적이고 , 인내 깊지 못한 민족에 의해 몇 세기에 걸쳐 끊임없이 간직되어 왔다는 것은 매우 놀라운 일이다 . 그 동안에 다른 모든 국가는 제각기의 법률을 훨씬 완화한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빈번히 변경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

모든 법률 중 최초의 법률을 포함하는 이 책자는 그 자신이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책으로서 호메로스의 책이나 헤시오도스의 책들보다 6, 7 백 년 전에 나타난 것이다 .

 

621

천지창조와 대홍수는 이미 지나간 일이고 , 신은 벌써 세계를 파괴하는 것도 , 하물며 그것을 다시 창조하는 것도 , 그 자신의 그렇게 큰 표징을 주시는 것도 , 다 필요하지 않게 되었으므로 특별히 만드신 한 민족을 땅위에 배치하기 시작하고 , 메시아가 그 성령을 가지고 만드시는 한 민족이 생겨날 때까지 그들을 존속시키려 하셨다 .

 

622

세계의 창조가 과거의 일로 되기 시작했으므로 신은 단 한 사람의 동시대의역사가를 비치하시고 , 한 민족에게 그 책의 수호를 위임하시고 , 그 역사가 세계에서 가장 진정한 것이 되고 , 전 인류가 반드시 알아야 할 한 가지 사물을 그 책을 통해서 배울 수 있되 , 그 책에 의하지 않고서는 알 수 없게끔 만들어 놓았다 .

 

623

야벳 으로부터 계도는 시작된다 . 요셉은 그 두 팔을 교차하고 아우를 내세우다 .

 

624

어째서 모세는 사람들의 수명을 이렇게도 길게 하고 , 그들의 세대를 이렇게도 적게 했을까 ?

이는 사물을 애매하게 하는 것은 연대의 길이가 아니라 세대가 많은 것이기 때문이다 . 왜냐하면 진실은 사람들이 달라짐에 따라서만 왜곡되기 때문이다 . 그렇지만 그는 과거 인간의 머리에 떠오른 가장 기억할 두 개의 사건 , 즉 천지창조와 대홍수를 매우 가까이 거의 간격이 없다시피 배열해 놓았다 .

 

625

셈은 라멕을 보았고 , 라멕은 아담을 보았는데 , 그 셈이 또 야곱을 보고 , 야곱이 , 모세를 본 사람들을 보았다 . 그러므로 대홍수와 천지창조는 사실이다 . 이는 그것을 바르게 이해하는 어떤 사람들 간에서는 결정적이다 .

 

626

족장의 수명이 길다는 것은 지난날의 사실의 역사를 상실시키기는커녕 오히려 그것을 보존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 왜냐하면 사람이 조상의 역사를 잘 모르는 경우가 생기는 것은 그들과 같이 오랫동안 생활하지 않았기 때문이고 , 인간이 이성에 눈뜨게 될 무렵에는 조상들이 많이 죽었기 때문이다 . 그런데 사람들이 매우 장수하였을 때는 , 애들도 그의 양친들과 같이 오랫동안 생활했다 . 그들은 서로들 오랫동안 이야기했다 . 그럴 때 그들은 조상의 이야기밖에 또 무엇을 이야기했을 것인가 ? 왜냐하면 모든 이야기는 조상의 이야기로 되돌아왔고 , 그들에게는 ( 오늘날 ) 일상 회화의 대부분을 점하고 있는 연구나 , 학문이나 , 기예 등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 그래서 이 시대에는 사람들이 자기의 계도를 보존하기 위해서 각별한 주의를 돌리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

 

627

나는 여호수아가 신의 백성 가운데서 이 이름을 붙인 최초의 자이고 , 예수 그리스도는 신의 백성 가운데서 그 최후의 자였다고 믿는다 .

 

628

유대인의 고대성 ( 古代性 ) = 어떤 저작과 다른 저작 사이에는 얼마나 큰 차이가 있는 것인가 ! 나는 그리스인이 일리어드를 쓰고 , 애굽인이나 중국인이 그들의 역사를 썼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는다 .

그러나 어떻게 해서 그것이 발생했던가를 관찰할 필요가 있다 . 이 전설적 사가들은 그들이 쓴 사건과 같은 시대 사람들이 아니다 . 호메로스는 한 편의 소설을 써서 , 소설로써 세상에 발표하고 , 소설로써 통용되었다 ( 왜냐하면 트로이아도 아가멤논도 , 황금의 사과와 마찬가지로 실패하지 않는다는 것은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 . 따라서 그는 역사를 만들려고 생각하지 않고 단순히 오락도서를 만들려고 생각했던 것이다 . 그는 그 시대의 유일한 저작자이고 그 저작의 아름다움으로 말미암아 거기 쓴 이야기를 후세에 전했었다 . 만인이 그것을 배우고 그것을 입으로 옮긴다 . 그것은 반드시 알아야 하고 누구나 그것을 암기하고 있다 . 4 백 년 후에는 기록된 사건의 목격자는 이미 생존하지 않는다 . 누구도 자기의 지식을 가지고 그것이 단순히 꾸며진 이야기인지 역사인지를 알 수가 없다 . 사람이 그것을 조상으로부터 계승하였다는 이유가 있어야만 비로소 그것은 진실로써 통하게 된다 .

같은 시대의 기록이 아닌 모든 역사 , 예를 들면 시빌서 , 트리스메기스투스의 서 , 기타 세간에서 믿어지긴 많은 책은 위서이고 시간이 경과하는 데 따라서 위서임이 판명된다 . 같은 시대의 저자들의 경우는 그렇지 않다 .

한 개인이 써서 민족에게 발표하는 책과 , 한 민족이 스스로 만드는 책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 그런 책이 민족과 같은 오래된 것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

 

629

요세푸스는 그 민족의 수치를 감춘다 .

모세는 자기 자신의 수치를 감추려 하지 않았고… Quis midi det ut omnes prophetent ? ( 백성들이 다 예언자가 되기를 바라고 싶다 ) . 그는 민중에게 권태를 느꼈다 .

 

630

유대인의 순진성 = 그들에게 이미 예언자가 나타나지 않게 된 뒤의 마카베오 가문의 사람들 . 예수 그리스도 이후의 마소라 .

「 이 서는 너희들을 위해 증거가 되리라 . 」 불쾌한 최후의 글자 .

그들은 명예를 차버리면서 순진하고 그 때문에 죽음을 아끼지 않는다 . 이것은 세계에 유래가 없을 뿐더러 자연성에 그 뿌리가 있는 것도 아니다 .

 

631

유대인의 순진성 = 그들이 사랑과 충성으로 전하는 이 책 속에서 , 모세는 그들이 사는 날까지 신의 은총을 몰랐으며 , 자기가 죽은 뒤 더욱 그렇게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으나 , 자기는 하늘과 땅을 불러 그들에 대한 증인으로 하리라 . 자기는 그들에게 가르쳐 줄 것만큼은 충분히 다 가르쳤다고 언명하고 있다 .

모세는 또 , 나중에 신은 그들에 대해 화를 내시고 그들을 지상의 만민 사이에 분산시키리라 . 그들이 자기들의 신이 아닌 여러 신을 예배함으로써 신을 분노케 한 것처럼 신도 그 백성이 아닌 다른 백성을 불러내서 그들을 분노케 하시리라 . 신은 자기의 모든 말이 영구히 보존되기를 원하고 , 또 그 서가 그들에 대해 어디까지나 증거로써 사용되기 위해 계약의 궤에 납입되기를 원한다고 언명한다 .

이사야도 제 30 장에 같은 말을 하고 있다 .

 

632

에즈라에 관해서 = 여러 책이 신전과 함께 소실되었다는 설 . 마카베오서에 의하면 허위 「 예레미야 그들에게 율법을 주시다 . 」

그가 전부를 암기했다는 설 . 요세푸스와 에즈라는 「 그는 책을 읽었다 」 라고 지적하고 있다 . 바로니우스 연대기 180 면 「 여러 책이 소실되어 에즈라에 의해 재편되었다는 말은 에즈라 제 4 서밖에는 고대 히브리인 중 누구도 전하지 않았다 . 」

그가 글자를 바꾸었다는 설 . 피론 Vita moysis ( 모세전 ) 에 「 옛날 율법이 기록되었을 때의 말과 글자는 이렇게 70 년간 존속했다 . 」 이렇게 요 세푸 스는 말한다 . 율법이 70 인에 의해 번역되었을 때 히브리어였다고 .

안티오크스와 베스파시아누스의 치하에서는 여러 책을 금하라고 했으나 그때는 예언자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행해지지 않았다 . 바빌로니아인의 치하에서는 아무런 박해도 행해지지 않고 예언자도 많이 있었는데 , 그것이 소실되는 대로 내버려 두었을까 ? 요세푸스는 … 에 견디어내지 못한 그리스인을 조소했다 .

텔트리아누스 「 바빌로니아의 침략을 받아 예루살렘이 멸망했을 때 유대의 여러 책을 에즈라가 회복한 것처럼 , 무서운 홍수 때문에 훼손된 여러 책을 훗날 성령에 의해 재건할 수 있었다 . 」 그는 말한다 . 에즈라가 포로 중에 잃어버린 성서를 재편할 수 있었던 것처럼 , 노아도 홍수 때문에 잃어버린 에녹을 기억에 의해 충분히 재편할 수 있었으리라고 .

「 느부갓네살의 시대의 백성은 포로가 되고 율법의 책은 불태워졌으나… ( 신은 ) 레비의 일족인 제사장 에즈라에게 성령을 주어 전에 있었던 예언자들의 말을 모두 재록하시고 모세에 의해 부여되었던 율법을 백성 앞에 재건하셨다 」 ( 이상 원문은 그리스어 ) . 그는 이것을 인용하여 아래와 같이 증명하려고 한다 . 즉 70 명이 놀랄 만한 저 균일주의를 가지고 성서를 해명했다는 것은 믿기 어려운 것이 아니냐고 . 유세비우스 ≪교회사≫ 5 권 8 장 . 그리고 그는 그것을 성 에이레나이오스로부터 인용한다 .

성 힐라리우스는 시편의 서언에 , 에즈라는 시편을 올바르게 배열했다고 말했다 . 이 전설의 기원은 에즈라 제 4 서 14 장에 있다 . 「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같은 말 , 같은 이름에 의해 인용되었기 때문에 신이 찬미되고 진실을 성서가 믿어졌다는 것은 현재 사람들이 알고 있는바 그대로이다 . 성서가 신의 성령에 의해 해명되고 , 신의 또 그것은 하나의 서책에 있어서 행하셨다는 것을 의심할 수 없으니 말이다 . 느부갓네살에 의해 백성들이 포로가 되었을 때 저서는 훼손되었으나 70 년 후 유대인이 고국에 돌아오고 다음에 아르타크세르크세스가 페르시아의 왕이었을 때 , 신은 레비의 일족인 제사장 에즈라에 성령을 주시고 전에 있었던 예언자들의 말을 전부 상기시키고 모세를 통해 주었던 율법을 재건하여 백성에게 표시하시다 」 .

 

633

에즈라의 말을 반박하는 마카베오 제 2 서 제 2 장 = 요세푸스 고대사 2 장 1 절 . 키루스는 이사야의 예언을 이유로 민족을 석방했다 . 유대인은 바빌론에서 , 키루스의 치하에서 그 재산을 평화로이 유지했다 . 그러므로 그들이 율법을 가지고 있던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 열왕기하 17 장 27 절 .

요세푸스는 에즈라에 관한 모든 이야기 속에서 , 이 재편 건에 관해서는 일언반구도 언급하지 않았다 .

 

634

에즈라의 말이 믿을 만하다면 성서가 성스러운 책임은 더욱 굳게 믿어져야 한다 . 왜냐하면 그 말은 70 명의 권위를 주장하는 사람들의 권위 위에서만 서 있고 , 그 70 명은 성서가 성스러운 것임을 입증하고 있기 때문이다 .

따라서 그 말이 진실이라면 우리는 자기가 원하고 있는 것을 거기서 얻게 될 것이고 , 그렇지 않더라도 다른 곳에서 얻게 될 것이다 . 그러므로 모세 위에 세워진 우리의 종교의 진리를 파괴하려는 자들은 그들이 공격에 사용하는 그 같은 권위에 의해서 우리의 종교의 진리를 세워 주는 셈이 된다 . 이처럼 이 섭리에 의해 우리의 종교는 아직도 존재한다 .

 

635

랍비 교설의 연대기 = 면수의 표시는 푸기오의 책에 의함 .

27 면 , R. 하키드슈 (2 백 년 ) 「 미쉬나 」 또는 「 구전 」 또는 「 제 2 의 율법 」 의 저자 .

미쉬나의 주해 (340 년 ) . 하나는 시프라 ․ 파라제톳트 ․ 예루살렘 탈무드 ․ 토시프톳트 .

베레시트 라바 ․ 오사이아 라바 저작 , 미쉬나의 주해 .

베레시트 라바 ․ 발 나코니는 치밀하고 쾌적한 논술이고 역사적 ․ 신학적이다 . 이 저자는 ≪ 라봇트≫라는 책을 썼다 .

예루살렘의 탈무드의 백 년 후 (440 년 ) 에 , 라브 아쉬가 바빌론의 탈무드를 편집했다 . 그것은 유대인 전부의 일반적 찬성을 얻은 것으로서 , 유대인은 그 속에 기록되어 있는 일체를 엄격히 준수할 의무가 있다 . 라브 아쉬의 부록은 게마라라고 불린다 . 그것은 미쉬나의 주해이다 .

또 탈무드는 미쉬나와 게마라를 둘 다 포함하고 있다 .

 

636

Si ( 만약 ) 은 무관심을 뜻하지 않는다 . 말라기 ․ 이사야 ․ 이사야 Si volumus ( 만약 원하거든 ) 운운 . In quacumque die ( 그 날에는 ) .



637

예언 = 왕권은 바빌론 포로로 인하여 중단되지 않았다 . 복귀가 약속되고 예언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

 

638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 = 70 년 내에 석방되리라는 확신을 가지고 포로로 된다는 것은 정말로 포로된 것이 아니었다 . 그러나 이제 그들은 아무런 희망이 없는 포로의 몸이 되었다 .

신은 그들에게 약속하시기를 , 가령 너희들을 이 세계의 끝머리까지 분산시켜 놓아도 , 만약 너희들이 나의 율법에 충실하다면 너희를 다시 모아 놓으리라고 하셨다 . 그들은 율법에는 매우 충실하지만 아직도 여전히 압박을 받고 있다 .

 

639

느부갓네살이 유대 민족을 데리고 갈 적에 , 왕권이 유대에게서 제거 되었다고 사람들이 생각할까 염려해 그들의 포로의 시일이 짧았다는 것 , 다시 귀국하게 되리라는 것 등이 미리 예고되었다 . 그들은 늘 예언자들로 부터 위안을 받았으며 , 그들의 왕실은 보전되었다 . 그러나 제 2 의 파멸은 회복의 약속도 없고 , 예언자도 없고 , 왕도 없고 , 위안도 없고 , 희망도 없는 것이다 . 그것은 왕권이 영구히 제거 당했기 때문이다 .

 

640

다음과 같은 사실을 본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며 각별한 주의를 요하는 일이다 . 즉 이 유대 민족이 벌써 오랜 세월을 두고 늘 비참한 상태로 존속하고 있었다는 것 ,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로서 필요하므로 ,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명하기 위해 존속함과 아울러 그를 십자가에 못 박았기 때문에 비참하다는 것 , 그리고 비참하다는 것과 존속한다는 것은 상반하는 일인데 , 그들이 그 비참에도 불구하고 늘 존속하고 있다는 것 .

 

641

그들이 메시아의 증인으로 사용되기 위해 특별히 만들어진 민족이라는 것은 명백하다 ( 이사야 43 장 9 절 , 44 장 8 절 ) . 그들은 여러 책을 보존하고 사랑했으나 , 그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 그리고 신의 심판은 그들에게 위임되었지만 그것은 봉인된 책이다라고 하는 것이 모두 예언되고 있다 .

 

 

 

 

  

제 10 편 표 징

 

 

 642

구약과 신약을 한꺼번에 증명하는 것 = 이 둘을 한꺼번에 증명하기 위해서는 , 한쪽의 예언이 다른 쪽에 있어서 성취되어 있는가를 살피기만 하면 된다 . 예언을 검토하기 위해서는 예언을 이해해야 한다 . 만일 예언이 하나의 뜻밖에 가지고 있지 않다고 믿는다면 , 메시아가 강림하지 않으리라는 것은 확실하지만 , 그것이 이중의 뜻을 가지고 있다 하면 , 메시아가 예수 그리스도로서 강림하리라는 것은 확실하다 . 그러므로 모든 문제는 예언에 이중의 뜻을 포함하고 있는지 없는지에 달려 있다 .

성서에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들에 의하여 밝혀진 이중의 뜻이 있다는 것은 다음 사항에 의해 입증된다 .

  1. 성서 자체에 의한 증명 .

  2. 랍비들 ( 유대교 법학자 ) 에 의한 증명 . 모세 마이모니데스는 말한다 . 성서에는 두 가지 면이 있다 . 예언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서만 예언했다고 .

  3. 카발라 ( 구약에 관한 전설 ) 에 의한 증명 .

  4. 랍비들 자신이 성서에 붙이는 신비적 해석에 의한 증명 .

  5. 랍비들의 근본원리에 의한 증명 . 이중의 뜻이 있다 . 그들의 태도에 따라 영광의 자세에서이든가 , 비천한 자세에서이든가 , 메시아의 두 가지 강림이 있다 . 예언자들은 메시아에 관해서만 예언했다 — 율법은 영구적이 아니고 , 메시아에 의해 개변되어야 할 것이다 — 이때 사람들은 벌써 홍해를 상기하지 않게 될 것이다 . 유대인과 이교도는 섞일 것이다 .

  6. (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들이 우리에게 주는 열쇠에 의한 증명 ) .

 

643

이사야 51 장 . 홍해 , 속죄의 영상 . Ut sciatis quod filius hominis habet potestatem remittendi peccata tibi dics ; surge ( 인자가 땅 위에서 죄를 용서할 권위가 있음을 너희에게 가르쳐 주기 위해 너희에게 고한다 . 일어나라 ) . 신은 눈에 보이지 않는 청정한 것을 가지고 성스러운 백성을 만들고 , 그에게 영원한 영광을 채워 줄 수 있음을 표시하기 위해 눈에 보이는 사물을 만드시었다 . 자연은 은총의 영상이므로 신의 은총의 선물 속에서 하실 것을 자연의 사물 속에 하시었던 것이다 . 이는 신이 눈에 보이는 것을 하고 있는 이상 , 눈에 보이지 않는 것도 할 수 있다는 것을 사람에게 알리기 위해서이다 .

그래서 신은 이 민족을 대홍수에서 구출하고 아브라함에서 탄생하게 하고 , 적의 수중에서 속출해 내고 , 그리고 평안 속에 살게 했다 .

신의 목적은 단지 풍요한 땅에만 인도하고자 대홍수에서 구출하고 , 한민족 전부를 아브라함께서 탄생시킨 것은 아니다 .

그리고 은총도 영광의 표징에 지나지 않는다 . 왜냐하면 은총은 궁극의 목적이 아니므로 은총은 율법에 의해 표징되고 그 자신이 또 영광을 표징한다 . 은총은 영광의 표징이고 그 권리 또는 원인이 된다 .

인간의 일상생활은 성도의 생활에 흡사하다 . 그들은 누구나 만족을 구한다 . 다만 그 만족을 어디에 두고 있는가가 다를 뿐이다 . 그들은 자기를 방해하곤 하는 사람들을 적이라고 부른다 . 그러므로 신은 눈에 보이는 자에 대해서 가지고 있음을 표시한 힘에 의해 눈에 보이지 않는 사물을 부여할 수 있는 힘을 표시하신 것이다 .

 

644

표징 = 신은 성스러운 백성을 만들고 그들을 다른 모든 국민으로부터 분리하여 그 적으로부터 구출하고 안식의 땅에다 배치하고자 그렇게 하실 것을 약속하고 , 그 예언자들을 통해 메시아 강림의 시기와 방식을 예언하셨다 . 그렇지만 그 선민의 희망을 북돋아 주기 위해서 신은 그들에게 모든 시대에 걸쳐 그 희망의 그림자를 보여주시고 , 그들을 구하려는 신의 힘과 의지에 대해 그들이 확신을 잃지 않도록 하셨다 . 왜냐하면 인간이 창조되었을 때 , 아담은 그 증인이었고 , 여자께서 구세주가 탄생하리라는 약속의 수탁자였기 때문이다 . 그때는 사람들이 아직도 천지창조와 시간적으로 그리 거리가 멀지 않았으므로 그들의 창조와 타락을 잊을 수 없는 무렵이었다 . 아담은 본 사람들이 이미 이 세상에 다 없어졌을 때 , 신은 노아를 보내어 하나의 기적에 의해 그를 구출하고 온 땅을 물로 뒤 덮었다 . 이 기적은 신이 세계를 구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 , 또 그 구원을 행할 의지를 가지고 , 여자의 자손에서 그 약속하신 메시아를 탄생시킬 의지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명백히 표시한 것이다 . 기적은 ( 인간의 ) 희망을 굳게 하는 데 충분했다 .

대홍수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고 , 노아도 아직 살아 있었을 무렵 , 신은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시고 , 또 셈이 아직 살아 있을 때 신은 모세를 보내시고… .

 

645

표징 = 신은 그를 믿는 자들로부터 소멸할 행복을 빼앗으려고 했으므로 , 그것이 무력에 의한 것이 아님을 표시하기 위해 유대 민족을 만들었다 .

 

646

유대인의 교회는 표징이었기 때문에 멸망하지 않았다 . 그러나 그 교회는 표징에 지나지 않았으므로 예속의 상태에 빠졌다 . 표징은 진리가 나타날 때까지 존속했다 . 교회는 진리를 약속하는 형상으로든가 현실로써 , 항상 눈에 보여야 하는 것이므로 .

 

647

율법은 표징적이었다는 것 .

 

648

두 개의 오류  

1. 모든 것을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것 .

2. 모든 것을 정신적으로 해석하는 것 .

 

649

너무도 큰 표징에 반대해서 말하는 것 .

 

650

표징 중에는 명백히 논증적인 것도 있지만 약간 이치에 맞지 않는 것으로 보이는 것도 있다 . 후자는 이미 설득된 사람들에게 증거를 제시할 따름이다 . 이는 묵시문서설 ( 黙 示文書說 ) 에 흡사하다 . 그러나 그 차이점은 그 설이 조금도 확실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 따라서 이를 가리켜 우리의 표징의 어떤 것과 마찬가지로 완전히 잘 기초되어 있다고 주장하는 것처럼 부당한 일은 없다 . 그것은 그런 표징처럼 논증적이 아니다 . 그래서 승부는 대등하지 않다 . 양자를 동열에 놓고 혼동해서는 안 된다 . 왜냐하면 양자는 어떤 점에서는 흡사한 것처럼 보이지만 다른 점에서는 전혀 판이하기 때문이다 . 분명한 것이야말로 ( 그것이 신성한 경우 ) 그 막연한 점을 존경받아도 좋은 것이다 .

그것은 어떤 종류의 막연한 말을 사용하는 사람들과 비슷한 것으로 , 이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겨우 겉껍질의 뜻밖에 알 수 없는 것이다 .

 

651

묵시주의자 , 아담 이전 인류존재론자 , 천년지복론자들의 부조리 = 성서에 부조리한 설의 토대를 두고자 하는 사람은 , 이를테면 「 이러한 일이다 성취될 때까지 이 세대는 끝나지 않으리라 」 와 같은 말 위에 그 설을 세우려고 한다 . 이에 관해서 나는 , 지금 대 다음에는 다음 대가 오고해서 , 늘 계속적이라고 말하고 싶다 . 「 역대기하 」 에는 솔로몬과 왕이 다른 사람이었던 것처럼 기록되어 있다 . 그들은 두 사람이었다고 나는 말하고 싶다 .

 

652

특수한 표징 = 두 개의 율법 , 두 개의 계율 , 두 개의 신전 , 두 개의 포로 .

 

653

표징 = 예언자들은 허리띠 • 수염 • 불탄 머리카락 등의 표징을 가지고 예언했다 .

 

654

오찬과 만찬의 상위 = 신에 있어서 말과 의향은 어긋나지 않는다 , 신은 진실하시므로 . 말과 결과도 어긋나지 않는다 , 신은 전능하시므로 . 수단과 결과도 어긋나지 않는다 , 신은 현명하시므로 . 베르나르 — Ult serm in Missus.

아우구스티누스 , ≪ 신국론 ≫ 5 권 10 장 . 이 기준은 일반적이다 . 신은 만사를 행하실 수 있다 . 죽는다든가 , 기만을 당한다든가 , 기만을 한다든가 등 그가 그것을 하면 전능이 아니게 되는 것만은 제외하고서 .

진리의 확증을 위한 몇 사람의 복음 기자들 , 유익한 그들의 불일치 .

최후의 만찬 후의 성찬 , 표징 후의 진리 .

예수 사후 40 년 만에 생겨난 예루살렘의 멸망 , 세계의 멸망의 표징 . 「 나 는 모른다 」 인간으로서 또 사절 ( 使節 ) 로서 . 마르코복음 3 장 32 절 .

유대인과 이방인에 의해 정죄된 예수 . 두 사람 아들에 의해 표징된 유대인과 이방인 . 아우구스티누스 , ≪ 신국론 ≫ 20 권 29 장 .

 

655

여섯 개의 시대 = 여섯 개 시대 , 여섯 명의 조상 , 여섯 시대의 당초의 6 개의 경이 , 여섯 시대의 당초의 여섯 개의 아침 .

 

656

아담 forma futuri ( 오려는 자의 형 ) . 한편을 만들기 위한 6 일 , 또 한 편을 만들기 위한 6 개 시대 . 아담의 형성을 위해 모세가 그린 6 일은 ,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를 형성하기 위한 6 개 시대의 영상에 불과하다 . 만일 아담이 죄를 범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가 강림하시지 않았더라면 계약은 단 하나밖에 없고 , 인간의 시대도 단 하나밖에 없고 , 천지창조는 단 한 시간에 성취된 것으로 그려졌을 것이다 .

 

657

표징 = 유대 ․ 애굽의 양 민족은 모세가 만났던 두 명의 개인에 의해 명백히 예언되어 있다 . 애굽인이 유대인을 때리고 , 모세가 유대인을 위해 복수하여 애굽인을 죽이고 , 유대인이 그에 대해 감사하지 않았다고 하는 저 두 사람에게 .

 

658

병든 넋의 상태를 나타내는 복음서의 표징은 병든 몸이다 . 그러나 하나의 몸만 가지고서는 여하히 병들어 있어도 잘 설명할 수 없으므로 많은 몸이 필요했다 . 그러한 까닭으로 귀머거리 • 벙어리 • 장님 • 중풍 환자 • 죽은 라자로 • 악귀에 사로잡힌 자들이 기록되어 있다 . 이런 모든 것이 병든 넋 속에 같이 포함되어 있다 .

 

659

표징 = 구약성서가 표징에 불과하다는 것과 , 예언자들이 현세의 행복을 내세의 행복으로 해석했다는 것을 표시하고 있는 바는 다음과 같다 .

첫째 , 그것은 신과 관련할 만한 자격이 없으리라는 것 .

다음 그들의 교설은 현세의 행복의 약속을 똑똑히 명시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 그 교설은 막연한 것이어서 그 뜻은 결코 이해되지 않을 것이라고 그들이 말하고 있는 것 . 그로 말미암아 분명해지는 것은 이 숨겨진 뜻이 그들의 명시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 . 따라서 그들은 다른 공물 , 다른 구세주 등에 관해 이야기할 생각이었다는 것 . 시대의 종말에야 비로소 처음으로 사람들은 이해하게 되리라고 그들은 말하고 있다 ( 예레미야 30 장 결구 ) .

제 3 의 증거는 그들의 교설이 대립 • 상쇄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 그들이 율법이라든가 공물이라든가 하는 말은 모세의 그것을 뜻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면 , 거기에 크고 현저한 모순이 생기리라는 것이다 . 그러므로 그들은 가끔 같은 사물에 관하여 서로 반대하면서 다른 일을 가르치고 있었던 것이다 .

그런데 어떤 저자의 뜻하는 바를 이해하고자 하면 .

 

660

사욕은 우리에게 자연적인 것이 되고 제 2 의 천성이 되었다 . 그래서 우리에게는 좋은 천성과 나쁜 천성의 두 가지가 있다 . 신은 어디 계시는가 ? 당신들이 없는 곳에 있다 . 그리고 신의 나라는 당신들 속에 있다 . 랍비들 .

 

661

모든 비적 가운데서 단 하나 참회만이 유대인에게 명백히 선포되고 선구자 성 요한에 의해 행하여졌다 . 그 다음에 다른 비적이 그 뒤를 이었다 . 전 세계에 있어서도 , 각자에 있어서도 , 이 차례가 준수되어야 한다는 것을 표시하기 위해 .

 

662

육체적인 유대인은 그들의 예언 가운데 예고된 메시아의 위대함도 겸허함도 이해하지 못했다 . 그들은 예고된 메시아의 위대함도 오해했다 . 예를 들면 메시아는 다윗의 아들이라고는 하지만 , 그의 주 ( 主 ) 라든가 , 그는 아브라함보다 먼저 있었던 자여서 아브라함은 그를 보았다든가 하는 이야기를 그리스도가 말한 경우가 그렇다 . 그들은 메시아의 위대함이 그 영원성에 있다고 믿지 않았다 . 또 메시아의 겸허와 죽음도 그와 마찬가지로 오해했다 . 「 메시아는 영생하시리라 . 그런데 이 사람은 나는 죽으리라고 말한다 」 라고 그들은 말했다 — 따라서 그들은 메시아를 죽은 자라고 믿지 않고 영생할 자라고 믿지 않고 , 다만 그의 육체적인 위대성만을 구했던 것이다 .

 

663

표징 = 탐욕처럼 사랑에 흡사한 것은 없고 , 탐욕처럼 사랑에 어긋나는 것도 없다 . 그래서 탐욕을 채워 주는 재산을 아니 가진 유대인은 그리스도교도에 가장 흡사했던 동시에 대단히 상반되어 있었다 . 이처럼 그들은 반드시 가져야 할 두 개의 특성 — 즉 메시아를 표징하기 위해 그와 흡사하다는 것과 의심스러운 증인이어서는 안 되기 때문에 그에 전혀 상반된다는 것을 갖추고 있었다 .

 

664

표징 = 신은 유대인을 예수 그리스도에 봉사시키기 위해 그들의 사욕을 이용하였다 ( 그리스도는 사욕의 구치법 ( 救治法 ) 을 가지고 왔으므로 ) .

 

665

자비는 표징적인 훈계가 아니다 . 예수 그리스도는 표징을 제거하고 진리를 세우기 위해 왔었는데 , 그가 자비의 표징을 세우고 기존의 현실적인 것을 제거하기 위해서만 왔다고 한다면 , 이는 무서운 일이다 .

「 만일 빛이 어두움이라면 그 어두움은 얼마나 심할 것인가 . 」

 

666

매혹 = Somnum suum ( 깊은 잠이로다 ) . Figura hujus mundi ( 이 세상의 상태 ) .

성찬 = Comedes panem tuum ( 너희들이 먹는 식물 ( 食物 )) . Panem nostrum ( 우리의 양식 ) . Inimici Dei terram lingen ( 신의 원수는 땅을 핥으리라 ). 죄인이 땅을 핥는다는 것은 땅 위의 쾌락을 사랑하는 것이다 .

구약성서는 내세의 기쁨의 표징을 내포하고 있었으나 , 신약은 거기에 도달하는 방법을 내포하고 있다 .

표징은 기쁨이고 , 방법은 참회였다 . 그렇지만 유월절의 어린 양은 씀바귀 Cum amaritudinibus 를 첨가해서 먹었다 .

Singularis sum ego donec transeam ( 그동안에 우리는 완전히 도피하리라 ) . 예수 그리스도는 죽기 전 거의 단 한 명의 순교자였다 .

 

667

표징 = 칼과 방패라는 용어 . Potentissime ( 대장부 ) .

 

668

사랑에서 멀어질 때 사람은 헤매게 된다 .

우리의 기도와 덕성은 예수 그리스도의 기도와 덕성이 아니라면 신 앞에서 증오되어야 할 것이다 . 또 우리의 죄는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것이 아니라면 신의 ( 연민 ) 의 대상이 되지 않고 신의 정의의 대상이 될 것이다 . 그는 우리의 죄를 인수하시고 우리에게 ( 그와의 ) 결합을 ( 허용 ) 하셨다 . 왜냐하면 그에게는 덕이 ( 고유하고 ) 죄는 외래의 것이지만 우리에게는 덕이 외래의 것이고 죄가 고유한 것이기 때문이다 .

선한 것을 판단하기 위해 , ( 여태껏 ) 우리가 써오던 기준을 바꾸도록 하자 . 우리는 자기의 의지를 그 기준으로 해왔다 . 그러나 이제는 ( 신의 ) 의지를 기준으로 삼도록 하자 . 신이 바라시는 것은 모두 우리에게 선하고 의로운 것이지만 , 신이 바라시지 않는 것은 모두 악이로다 .

신이 바라시지 않는 일체는 금지되고 있다 . 죄는 신이 그것을 바라지 않는 것이고 그가 말하신 일반적인 선언에 의해 금지되어 있다 . 신이 일반적으로 금지하지 않고 방치해 두신 것 , 이것을 구실로 사람들이 해도 좋다고 말하고 있는 것은 반드시 늘 허용된 것이 아니다 . 왜냐하면 신이 어떤 일을 우리로부터 멀리하였을 때에는 또 신의 의사 표시인 어떤 사건에 의해 , 우리가 어떤 일을 하는 것을 신이 바라시지 않고 있는 것처럼 생각될 때에는 그 일이란 죄로서 우리에게 금지되어 있기 때문이다 . 그 까닭은 신의 의지가 그 어느 것을 해도 안 된다는 것을 우리에게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 다만 양자 간의 상위는 신이 죄를 바라시지 않는다는 것은 확실하지만 그와 반대로 신이 타당을 결코 바라시지 않는다는 것은 확실하지 않다는 것뿐이다 . 그러나 신이 그것을 바라시지 않는 이상 우리는 그것을 죄로 알아야만 할 것이다 . 오직 단 하나의 완전한 선 , 완전한 의이신 신의 의지를 결여함으로써 그것이 부정이 되고 악이 되어 있는 한에 있어서는 .

 

669

우리가 약한 까닭으로 표징을 바꾼다 .

 

670

표징 = 유대인은 아래와 같이 세속적인 것을 생각하면서 늙었다 . 즉 신은 그들의 조상 아브라함 , 그 육체 , 그리고 거기서 생겨난 자손을 사랑하셨다 . 그 때문에 그들을 증식하셨고 , 다른 여러 민족과 구별해 놓으셨고 , 그들이 이혼함을 허용하지 않았다 . 그들이 애굽에서 신음하였을 때에는 그들을 위해 많은 위대한 기적을 행하여 그들을 거기서 데리고 나오셨다 . 황야에서는 만나를 가지고 부양하시고 대단히 기름진 땅에 인도하셨다 . 또한 그들에게 왕과 신전을 주셨다 . 이는 거기에다 희생을 바치고 그 피를 주입하게 함으로써 그들을 깨끗하게 만들기 위해 세워진 것이다 . 그리고 나중에는 그들을 전 세계의 지배자로 하기 위해 메시아를 보내려고 그 강림의 시기를 예언하셨다 .

세계가 이런 육체적인 미망 속에서 해를 보내고 있을 때 , 예수 그리스도는 예언된 시기에 강림했었으나 , 사람들이 예기했던 것처럼 광휘 속에서는 아니었다 . 그 때문에 그들은 , 그가 메시아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 그의 사후 , 성 바오로는 사람들에게 가르쳐 주기 위해 왔다 . 이런 모든 것은 표징으로서 일어났던 것이다 . 신의 나라는 육체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영혼 속에 있다 . 인간의 적은 바빌론인이 아니고 정욕이다 . 신은 사람의 손을 빌어 만들어진 신전을 좋아하시지 않고 , 맑고 겸손한 마음을 좋아하신다 . 육체의 할례는 무익하고 , 마음의 할레야말로 필요한 것이다 . 모세는 그들에게 하늘로부터의 빵을 주시지 않았다는 것 등 .

그러나 신은 이러한 일을 깨달을 만한 자격이 없는 이 민족에게 명시하고자 하시지는 않았다 . 그렇지만 그것을 믿게 하기 위해 예언하시고자 , 그 시기를 명백히 예언함과 아울러 , 그것을 때로는 분명히 , 또 대다수의 경우에는 표징을 가지고 나타내시어 표징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에게 그것을 유의시키고 , 표징된 것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사랑하는 것을 거기에서 찾아낼 수 있게끔 하셨다 .

사랑에까지 도달하지 못하는 일체는 표징인 것이다 .

성서의 유일의 목적은 사랑이다 .

이 유일한 목적에까지 이르지 못하는 것은 모두 표징이다 . 왜냐하면 목적은 하나밖에 없으므로 거기까지 가 닿지 못하는 것은 모두 정확히 말해 표징인 것이다 .

이렇듯 신은 이 사랑의 유일한 훈계로 다채롭게 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필요한 유일자에게 항상 인도해 주는 이 다채로움에 의해 다채로움을 구하는 우리의 호기심을 만족시키고자 하신다 . 필요한 것은 단 하나이지만 우리는 다채로움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 그래서 신은 필요한 유일자로 인도하는 이 다채로움에 의해 쌍방의 요구를 만족시켜 주시는 것이다 .

유대인은 표징하는 것을 매우 좋아하고 그것을 갈망했기 때문에 , 사실이 예언된 시기와 방식대로 나타났을 때에 이를 오해했다 .

랍비들은 신부의 유방을 표징으로 해석하고 , 또 그들이 가지고 있는 유 일한 목적 , 즉 땅 위의 재보를 나타내지 않는 것을 모두 표징으로 해석한 다 .

그러나 그리스도 신자들은 성찬까지도 그들이 목적하고 있는 영광의 표징으로 해석했다 .

 

671

제국과 제왕을 지배하게끔 소명된 유대인은 죄의 노예였다 . 그리고 봉사와 복종을 사명으로 한 그리스도 신자는 자유의 아들이다 .

 

672

형식주의자를 위해서 = 성 베드로와 사도들이 할례의 폐기 , 즉 신의 율법에 어긋나는 행동에 관해 숙의했을 때 그들은 예언자들의 의견을 듣지 않고 , 다만 할례를 하지 않은 사람이 성령을 받은 데 대해서 주목했다 .

그들은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것보다도 , 신이 자기의 영을 채워 주신 사람들을 기꺼이 받아들이신다는 것이 더욱 확실하다고 판단했다 . 율법의 목적은 성령뿐이라는 것 , 그리고 사람은 할례 없이도 성령을 받는 이상 할례는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그들은 알고 있었던 것이다 .

 

673

Fac secundum exemplar quod ibi ostensum est in monte ( 너희들 산에서 표시된 형식을 따르도록 노력하라 ).

그렇다면 유대인의 종교는 메시아의 진리에 유사하다는 토대 위에 형성 되었고 , 메시아의 진리는 그의 표징이었던 유대인의 종교에 의해 인정되어 온 것이다 .

유대인에게는 진리가 표징되어 있었을 따름이다 . 천상에 진리가 명시된다 .

교회에서는 진리는 은폐되어 있고 표징과의 관련에 있어서만 인정된다 .

표징은 진리에 입각해서 만들어졌고 , 진리는 표징에 입각해서 인정되었다 .

성 바오로는 사람들이 결혼을 금하리라고 스스로 말하고 나서 , 고린도 사람들에게는 마치 걸려 넘어지기를 기다리기나 하는 것처럼 결혼하지 말라고 말했다 . 만일 어떤 예언자가 전자를 말했는데 , 뒤에 성 바오로가 후자를 말했다고 하면 그는 비난을 받았어야 됐을 것이기 때문이다 .

 

674

표징 = 「 너희들 산상에 표시된 형에 따라 만사를 해하도록 하라 . 」 이에 관해 성 바오로 유대인은 천상의 것을 본받았다고 말했다 .

 

675

…그렇지만 어떤 사람들을 맹목으로 하고 , 다른 어떤 사람들을 계몽하기 위해 만들어진 이 성서는 그로 말미암아 맹목으로 되는 사람들 가운데서도 다른 사람들이 알아두어야 할 진리를 표시하고 있다 . 그들이 신께서 받은 눈에 보이는 행복은 매우 크고 또 깨끗한 것이었으므로 신이 그들에게 보이지 않는 행복과 메시아를 주시는 것도 가능하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

왜냐하면 자연은 은총의 영상이고 , 눈에 보이는 기적은 누에 보이지 않는 기적의 영상이기 때문이다 . 「 너희들에게 가르치기 위해…너희들에게 고하노니 일어나라 . 」

속죄는 홍해를 걸어서 건너는 것과 같을 것이라고 이사야는 51 장에서 말하고 있다 .

그래서 신은 이집트나 홍해에서의 탈출 , 왕들의 정복 , 마나 ․ 아브라함의 모든 계보 등에 의해 신이 구원을 행하실 수 있다는 것 , 천래의 양식 을 주실 수 있다는 것 등을 표시하신 것이다 . 이런 까닭으로 적국의 국민 이라는 것은 그들이 모르는 메시아 그 자신의 표징이고 형상인 것이다 .

그래서 신은 이런 모든 것이 표징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 , 참다운 자유 , 참다운 이스라엘 , 참다운 할례 , 하늘로부터의 빵 등이 무엇인가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다 .

이런 약속 속에 각자는 마음 깊숙이 들어박혀 있는 것 , 즉 일시적인 행복이든가 영적인 행복이든가 , 신인가 피조물인가를 찾아낸다 . 그러나 다음과 같은 차가 있다 . 즉 거기에 피조물인가를 찾아낸다 . 그러나 다음과 같은 차가 있다 . 즉 거기에 피조물을 구하는 사람은 구하는 것을 찾아내기는 하지만 , 그와 동시에 허다한 모순과 그 피조물을 사랑해서는 안 된다는 금지된 명령과 신만을 숭배하고 신만을 사랑하라 ( 이것들은 다 같은 것에 불과하지만 ) 는 명령을 발견하게 된다 . 요컨대 메시아는 그들을 위해 강림하시지 않는다 . 이에 반해 거기에 신을 구하려는 사람은 아무런 모순도 없이 신만을 사랑하라는 훈계와 아울러 신을 찾아낸다 . 메시아는 그들이 찾고 있는 행복을 주시기 위해 예언된 시기에 강림하시는 것이다 .

이렇게 유대인은 기적과 예언을 가지고 그 예언이 성취되는 것을 보았다 . 또 그들의 율법의 가르침은 유일의 신만을 존경하고 또 사랑하라는 것이어서 , 이 역시 영속적인 것이었다 . 따라서 그 종교는 진실한 종교의 모든 특징을 갖추고 있었으며 사실로 진실한 종교였다 . 그러나 유대인의 교회와 유대인의 율법의 교회는 구별하지 않으면 안 된다 . 그런데 , 유대인의 교리는 기적이나 예언이나 영속성을 가지고 있기는 했으나 진리는 아니었다 . 왜냐하면 그 교리는 신만을 존경하고 또 사랑한다고 하는 또 하나의 점을 갖추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

 

676

유대인을 위해 이 책 ( 성서 ) 위에 씌워진 베일은 사악한 그리스도교도 를 위해 , 또 자기 자신을 미워하지 않는 모든 자들을 위해서이기도 하다 .

그러나 사람이 진실로 자기 자신을 미워할 때 얼마나 잘 성서를 이해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끔 마련되어 있는 것인가 !

 

677

표징은 유와 무를 , 쾌와 불쾌를 초래한다 — 부호는 이중의 뜻을 가진다 . 명백한 것과 , 그 뜻이 숨겨져 있다는 말을 듣는 것과 .

 

678

초상은 무와 유를 쾌와 불쾌를 초래한다 . 실물은 무와 불쾌를 배제한다 .

율법과 공물이 실물인가 표징인가를 알기 위해서는 예언자들이 그런 이야기를 함에 있어서 그들의 견해와 사상을 그것에만 한하고 , 단지 저 낡은 계약만을 거기에다 인정했는가 , 혹은 그렇지 않고 그들이 거기에 어떤 다른 것을 인정하고 , 그것들 ( 율법과 공물 ) 을 그 어떤 다른 것의 모방이라고 하였는가를 검토해 보아야 한다 . 초상 속에 표징된 사물이 보이기 때문이다 . 그것을 알아보기 위해서는 그들이 그에 관해 말한 바를 검토하면 된다 .

그들은 그 사물은 영원하다고 말할 때 , 이는 그들 자신이 그 변할 것을 언명하고 있는 계약에 관하여 말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해야 할 것인가 ? 그리고 공물 등에 관해서도 마찬가지일까 ?

부호는 이중의 뜻을 가지고 있다 . 인간이 중요한 편지를 받고 , 거기에 명백한 뜻을 인정하면서도 그 뜻이 가려지고 애매해지고 , 말하자면 감추어져 있으므로 , 그 편지를 보지 않고서 보고 , 이해하지 못하고서 이해하는 경우 , 사람은 거기에 이중의 뜻을 가진 부호가 있다는 것 외에 무엇을 생각할 것인가 ! 하물며 글자의 뜻에 명백한 모순이 인정되는 경우에는 더욱 심할 것이 아닌가 ? 예언자들은 명백히 말했다 . 이스라엘은 항상 신의 사랑을 받는다 . 율법은 영원히 존속할 것이라고 . 또 그들은 말하기를 사람들은 그들의 말의 뜻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며 , 그것 ( 뜻 ) 은 가려질 것이라고 했다 .

그렇다면 부호를 우리에게 명시하고 숨겨진 뜻을 알게끔 가르쳐 주는 사람들을 얼마나 존경해야 할 것인가 . 특히 그런 이들이 만들어 내는 원리가 실로 자연스럽고 명료한 경우에는 !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와 그 사도들이 행하신 바이다 . 그들은 봉인을 뜯고 막을 찢고 내용을 표시했다 . 그들은 이렇게 함으로써 인간의 적은 자기의 정욕이라는 것 , 구세주는 영적이고 그 지배도 영적이라는 것 , 두 번의 강림이 있는데 , 그 하나는 교만한 사람들을 겸손하게 하기 위한 비천한 강림이고 , 다른 하나는 겸손한 사람들을 높여 주기 위한 영광의 강림이라는 것 , 예수 그리스도는 신이면서 인간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준 것이다 .

 

679

표징 = 예수 그리스도는 성서를 이해시키기 위해 그들의 마음을 열어 주셨다 .

3 대 계시라 함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

1. 모든 것이 그들에게는 표징으로서 생겨났다 . Vere Israelite ( 진실한 이스라엘 ) . Vere leberi ( 진실한 자유 ) . 하늘로부터의 진실한 빵 .

2. 십자가에 이르기까지의 겸손한 신 . 그리스도는 영광에 들어서기 위해 고난을 받아야 하는 것이었다 . 「 자기의 죽음을 가지고 죽음을 이겨내기 위해 . 」 두 개의 강림 .

 

680

표징 = 일단 이 비밀이 밝혀지기 시작하면 그것을 보지 않고서는 견디어 낼 수 없다 . 이 견지에서 구약성서를 읽어보도록 하라 . 그리고 공물이 정말로 있어야 했던가 , 아브라함을 조상으로 하는 것이 신의 사랑을 받는 참다운 원인이었던가 , 또 약속의 땅이 정말로 안식의 장소였던가를 조사해 보도록 하라 — 그렇지는 않았다 . 그러므로 그것들은 표징이었던 것이다 . 이와 마찬가지로 정해진 모든 의식 , 사랑에 관한 것 외에 모든 훈계를 조사해 보도록 하라 . 그것들이 표징임을 알게 되리라 .

이런 모든 공물과 의식은 따라서 표징이 아니면 우매한 일이다 . 그런데 그것들을 우매한 일로 보기에는 너무도 분명하고 고상하다 .

예언자들이 그들의 견해를 구약성서에 한했는지 , 혹은 거기에 다른 사물을 인정했는지 알아둘 것 .

 

681

표징적인 것 = 부호를 관건 . Veri adoratores ( 진실한 예배자 ) . Ecce agnus Dei qui tollit peccata mundi ( 보라 , 이것이 바로 세상의 죄를 지고 가는 신의 어린 양 ) .

 

682

이사야 1 장 21 절 , 선을 악으로 바꾸는 것 및 신의 복수 .

이사야 10 장 1 절 , 「 불의의 규칙을 정하는 자에게는 화가 있으리라 . 」

이사야 26 장 20 절 , 「 나의 백성들이여 , 가거라 , 너희의 뒤에 들어가 뒷문을 닫고 분노가 지나가는 동안 잠시 숨어 있도록 하라 」 — 이사야 28 장 1 절 , 「 오만한 면류관은 화를 입으리라 . 」

기적 — 이사야 33 장 9 절 , 「 땅은 우수에 잠겨 쇠망하고 , 레바논은 부끄러워 시들게 되고 , 운운 」 .

「 주 가라사대 나 이제 깨어나고 , 이제 일어나고 , 스스로를 높이하리라 」 — 이사야 40 장 17 절 , 「 만국의 사람들 모두 없으나 다름없다 . 」 이사야 41 장 26 절 , 「 누가 애초부터 우리에게 고해서 가르쳐 주었던가 , 옛날부터 우리에게 고해서 이는 옳다고 말하게 했던가 」 — 이사야 43 장 13 절 , 「 내가 행하면 누가 감히 이를 멈출 수 있을 것인가 」 — 예레미야 11 장 21 절 , 「 주의 이름을 빌어 예언하지 말라 . 아마 너희는 우리의 손에 걸려 죽게 되리라 . 이 때문에 주 이렇게 말하시다 」 .

이사야 44 장 20 절 , 「 나의 오른손에 거짓이 있지 않는가 생각하지 않는다 」 .

이사야 44 장 21 절 이하 , 「 야곱이여 , 이스라엘이여 , 이런 일을 명심하라 , 너희는 나의 부하로다 . 나 , 너희를 만들었다 . 너희는 나의 부하로다 . 이스라엘이여 , 나는 너희를 잊지 않으리라 」 .

「 나 , 너희의 잘못을 구름처럼 해소하고 너희의 죄를 안개처럼 무산시켰다 . 너희 나에게 돌아오도록 하라 . 나 , 너희를 속하였으니 」 .

44 장 23, 24 절 , 「 하늘이여 , 노래 부르시라 , 주 연민을 행하시다…주는 야곱을 속하고 이스라엘에 영광을 주시리라 . 너희를 속하고 너희를 배 안에 만드신 주 , 이렇게 말하시다 . 나는 주로다 . 나 , 만물을 창조했고 , 오직 나만이 하늘을 펼치고 스스로 땅을 열었노라 」 .

이사야 54 장 8 절 , 「 나 , 분노에 넘쳐 잠깐 나의 얼굴을 너희에게 감추었지만 영원한 자비심을 가지고 너희를 연민하리라 . 이는 너희를 속하시는 주의 말씀이다 」 .

이사야 63 장 12 절 , 「 영광의 팔을 모세의 오른쪽에 돌리시고 , 그들 앞에 물을 갈라 스스로 영원한 이름을 만드신 자 」 .

이사야 63 장 14 절 , 「 너희는 이렇게 자기의 백성을 지도해서 영광의 이름을 만드시라 」 .

이사야 63 장 16 절 , 「 그대는 우리의 아버지이시다 . 아브라함 우리를 모르고 , 이스라엘 우리를 인정하지 않는다 」 .

이사야 63 장 17 절 , 「 우리들의 마음을 완고히 함으로써 그대를 두려워하지 않게 하시느냐 」 .

이사야 63 장 17 절 , 「 스스로를 깨끗이 하고 스스로를 분별해서… 사람들는 모두 절단하리라고 주 말씀하시다 」 .

예레미야 2 장 35 절 , 「 너희 말하기를 , 나에게 죄 없으니 , 그 분노는 반드시 나에게까지 미치지 않으리라고 . 보라 , 너희 , 죄를 범하지 않았다고 말함으로써 나와 너희와 다투게 되리라 」 .

예레미야 4 장 22 절 , 「 그들은 악을 행하는 데 재빠르지만 선을 행할 줄을 모른다 」 .

예레미야 4 장 23, 24 절 , 「 나 , 땅을 보건대 형태 없고 공허하도다 . 하늘을 바라보건대 거기에 빛이 없도다 . 나 , 산을 보건대 모두 떨고 있었으며 , 언덕이란 언덕은 모두 움직이고 있도다 . 나 , 보건대 인적은 없고 하늘의 새도 다 날아가 버렸도다 . 나 , 보건대 좋은 땅은 황무지로 되고 그 거리들은 모두 주 앞에서 그 무서운 노여움 앞에 파손되었도다 . 이를 주 말씀하시기를 이 땅은 모두 황무지가 되리라고 . 그러나 나 , 이를 전부는 멸망시키지 않으련다 」 .

예레미야 5 장 4 절 , 「 그러므로 나 말하기를 , 이들은 오직 천하고 우매한 자들이니 주의 길과 그 신의 심판을 모르고 있는 것이라고 . 나 귀인들에게 가서 말하리라 . 그들은 주의 길을 알고 있다 . 그런데 그들도 역시 멍에를 꺾고 결박을 끊었도다 . 때문에 숲 속에서 나온 사자 , 그들을 죽이고 표범이 그 거리를 엿보도다 」 .

예레미야 5 장 29 절 , 「 주 가라사대 , 나 이런 일을 벌하지 않을 것이냐 , 나의 마음은 이런 백성들에게 복수를 하지 않을 것이냐고 」 .

예레미야 5 장 30 절 , 「 이 땅에 놀라운 일과 증오할 일이 행하여진다 」 .

예레미야 5 장 31 절 , 「 예언자들은 허위로 예언을 하고 , 사제는 그들의 손을 빌어 통치하고 , 우리 백성은 이런 일을 사랑한다 . 그러나 너희들 그 종말에 무엇을 하려는가 」 .

예레이먀 6 장 16 절 , 「 주 가라사대 , 너희들 길에 서서 보고 , 낡은 길에 가서 어느 것이 선한 길인가를 묻고 , 그 길을 걷도록 하라 . 그렇게 하면 너희들 넋의 안식을 얻으리라고 , 그러나 그들 대답하기를 우리는 거기를

걷지 않겠다고 하도다 」 .

「 나 또 너희들에게 파수를 배치하고 나팔소리를 들으라고 말했노라 . 그러나 그들 답하기를 우리는 듣지 않겠다고 하도다 」 .

「 그러므로 모든 백성들이여 , 들어라 . 그들이 부딪칠 바를 알아두라 . 땅이여 , 들어라 . 나 , 이 백성에게 화를 입히리라 . 운운 」 .

외적 의식에의 충성 .

예레미야 7 장 14 절 , 「 나 실로에게 했던 것처럼 나의 이름으로 불러지는 이 집에게도 그렇게 하리라 . 즉 너희들의 부탁을 내가 너희들과 너희들 조상에게 준 이곳에서 행하여 주리라 . 그러니 이 백성을 위해 기도하지 말라 」 . — 요긴한 것은 외적 공물이 아니다 .

예레미야 7 장 22 절 , 「 나 , 너희의 조상을 애굽으로부터 인도해 내던 날에 벌써 번제 ( 燔祭 ) 와 희생에 관해 말한 바 없고 명령한 바 없다 . 다만 나의 일을 그들에게 명령하고 너희들이 나의 소리를 듣는다면 나 너희들의 신이 되고 너희들 나의 백성이 되리라 . 또 나 너희들에게 명한 바 모두를 걸어서 행복을 얻으리라고 말했다 . 그러나 그들은 듣지 않았다 」 .

다수의 설교 .

예레미야 11 장 13 절 , 「 유다여 , 너희의 신의 수는 너희의 거리의 수와 같다 . 또 너희들 예루살렘의 거리의 수에 따라 수치스러운 것에 단을 세웠다 . 그러니 이 백성을 위해 기도하지 말라 」 .

예레미야 15 장 2 절 , 「 그들이 만일 너희에게 우리들 어디로 가게 되냐고 말한다면 너희 그들에게 주가 아래와 같이 말씀하신다고 전하라 . 죽기로 정해진 자는 죽게 되고 , 검을 맡기로 되어 있는 자는 검을 맡고 , 굶주리기로 되어 있는 자는 굶주리게 되고 , 포로로 정해 있는 자는 포로로 되리라고 」 — 예레미야 17 장 9 절 , 「 마음은 다른 모든 것보다도 거짓말을 하는 것이 가장 나쁘다 . 누가 이것을 알랴 」 . 이는 누가 그 모든 악의를 알 수 있으랴 , 그 사악은 이미 알려진 바 있으므로 하는 뜻이다 . 「 여호수아인 나는 깊은 마음속을 알아보고 폐부를 시험한다 . 그들은 말한다 . 이제 우리는 계략을 꾸며 예레미야를 떠보리라 . 사제에게는 율법이 있고 , 예언자에게는 말씀이 있어 없어지지 않느니라 」 — 예레미야 17 장 17 절 , 「 너희 나를 공포하게 하는 자가 되지 말라 . 재난의 경우엔 너희는 나의 도피장이니라 」 .

예레미야 23 장 15 절 , 「 사악이 예루살렘의 예언자께서 나와 이 온 땅에 퍼지기 때문이다 」 .

예레미야 23 장 17 절 , 「 항상 그들은 나를 멸시하는 자를 향해서 너희를 평안하게 할 수 있으리라고 주가 말씀하셨다 하고 , 또 자기의 완고한 마음에 따라 움직이는 모든 자를 향해서 너희들에게 재난이 오지 않으리라고 말하다 」 .

 

683

표징 = 형식은 죽인다 , 모든 것은 표징으로서 생겨났다 . 이것이 바로 성 바오로가 우리에게 주는 부호이다 . 그리스도는 고난을 받아야 한다 . 겸손한 신 . 마음의 할례 , 진실한 단식 , 진짜 공물 , 진짜 신전 , 이런 것들은 모든 영적인 것이어야 한다고 예언자들은 지시했다 .

썩은 육체가 아니고 썩지 않은 육체 .

「 너희들은 참으로 자유롭게 되리라 . 」 그러므로 다른 자유는 이 자유의 표징에 지나지 않는다 .

「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진짜 빵이로다 . 」

 

684

모순 = 우리의 모든 상반된 점을 일치시키지 않는 한 훌륭한 인간성을 만들 수 없다 . 또 상반된 것을 일치시키지 않고 일치된 성질의 계열에 따르기만 해도 불충분하다 . 어떤 저자가 뜻하는 바를 이해시키기 위해서는 모든 상반되는 어구를 일치시켜야 한다 .

이와 같이 성서를 이해하는 데도 모든 상반하는 어구가 거기서 일치하는 것 같은 하나의 뜻을 포착해야 한다 . 몇 개 일치하는 어구를 해명하는데 편리한 하나의 뜻을 포착하지 않고서는 불충분하다 . 상반하는 어구와도 일치되는 하나의 뜻을 포착함이 필요하다 . 모든 저자는 모든 상반하는 어구를 일치시키는 하나의 뜻을 가지고 있든지 , 혹은 전혀 뜻을 가지고 있지 않든지 둘 중의 하나이다 . 성서나 예언자에 관해서는 그렇게 말할 수 없다 . 그것들은 확실히 훌륭한 뜻을 가지고 있다 . 그러므로 모든 상반하는 것을 일치시키는 하나의 뜻을 찾아내야 한다 .

그렇다면 진짜 뜻은 유대인이 해명한 그것이 아니다 . 예수 그리스도에 있어서만 여러 가지 모순은 일치하는 것이다 . 유대인은 호세아에 의해 예언된 왕이나 , 제후들의 단절을 야곱의 예언과 일치시킬 수 없었다 .

만약 사람이 율법 • 공물 • 왕위 등을 실질적인 것으로 해석한다면 이런 모든 어구를 일치시킬 수 없다 . 따라서 그것들은 아무리 해도 표징밖에 될 수가 없다 . 사람은 같은 저자 , 같은 책 , 때로는 같은 장의 어구를 일치시키는 것마저 불가능하다 . 이것은 저자가 뜻하는 바가 무엇이었던가를 명시하고 있다 . 예를 들면 , 에스겔 20 장에 , 인간은 신의 계명에 의해 살아야 한다고 말하고 , 또 살아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있는 경우가 그렇다 .

 

685

표징 = 만약 율법과 공물이 진리였다면 그것들은 신께서 받아들이고 신의 미움을 받지 않을 것이다 . 만약 그것들이 표징이었다면 받아들이기도 하고 미움도 받게 될 것이다 .

그런데 성서 전체를 보면 그것들은 받아들이기도 하고 , 혐오되기도 한다 . 거기에 기록되기를 율법은 변하고 공물도 변하리라 . 또 그들에게는 율법도 군주도 공물도 없어지리라 . 새로운 계약이 맺어지고 , 율법은 갱신되리라 . 그들이 받은 훈계는 좋지 않다 . 그들의 공물은 미운 것이다 . 신은 결코 그런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고 한다 .

이에 반해 율법은 영속하고 , 이 계약은 영원히 남고 , 공물은 영구히 시행되리라 . 왕권은 결코 그들로부터 제거되지 않으리라 . 왜냐하면 영원한 왕이 강림할 때까지 왕권을 그들로부터 제거당할 것이 아니기 때문이라고도 기록되어 있다 .

이런 모든 어구는 실재적인 것을 표시하고 있는 것일까 ? 아니다 . 그러면 표징적인 것을 나타내고 있는 것일까 ? 아니다 . 실재 아니면 표징 어느 하나를 표시하고 있다 . 그러나 앞 어구에서는 실재를 제거함으로써 표징에 지나지 않음을 나타내고 있다 .

이들 쌍방의 어구는 모두 실재에 관해 말한 것이라고 할 수 없지만 , 표징에 관해 말한 것이라 할 수는 없다 .

그러므로 그것들은 실재에 관해 말한 것이 아니라 표징에 관해 말한 것이다 .

Agnus occisus est ab origine mundi ( 세계의 시초부터 도살되어 있는 어린 양 ) . 사제인 심판자 .

 

686

모순 = 메시아까지 지속한 왕권 . 왕도 없고 군주도 없다 .

영원한 율법━━━변화된 율법 .

영원한 계약━━━새로운 계약 .

선한 율법━━━나쁜 교훈 . 에스겔 20 장 .

 

687

표징 = 신의 진실한 말은 글로는 잘못되어 있어도 영적으로는 진실하다 . Sede a dextris meis ( 나의 오른쪽에 앉아라 ) . 이것은 자의적으로는 잘못이다 . 그러므로 영적으로는 진실하다 .

이런 표현에 있어서 신은 의인적의로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 그리고 이것은 인간이 그 오른쪽에 누구인가를 앉힐 때 가지는 것과 같은 의향을 신도 가진다는 것 외에 아무것도 뜻하는 것이 아니다 . 그래서 그것은 신의 의향의 표시이고 , 그 실행방법의 표시는 아니다 .

아래와 같이 기록되어 있는 경우도 마찬가지다 . 「 신은 너희의 향기의 훈기를 받아들이신다 . 그 보답으로써 풍요한 땅을 너희들에게 주시리라 . 」 이는 어떤 사람이 당신들의 향기를 기뻐하고 , 그 보답으로써 풍요한 땅을 당신들에게 주고 싶다는 의향을 가지는 것처럼 , 신도 같은 의향을 당신들에 대해서 가지게 되리라는 뜻이다 . 왜냐하면 당신들은 어떤 사람이 향을 바치는 상대방에 대하서 가지는 것과 같은 의향을 자신에 대해서도 가졌기 때문이라는 뜻이다 . iratus est ( 성을 내시다 ) . 「 질투하는 신 」 도 마찬가지다 . 그도 그럴 것이 , 신이 일을 설명하기 어려우므로 그런 일을 그 외에 표현할 방도가 없기 때문이다 . 그래서 교회는 오늘도 아직 그런 말을 쓰고 있다 . Quia confortavit seras ( 그것은 너희 나무를 견고히 하고 ) 등 .

성서가 스스로 가지고 있음을 우리에게 계시하지 않은 뜻을 성서에게 부여하는 것은 용허되지 않는다 . 예를 들면 이사야가 봉하신 멤이 6 백을 뜻한다는 것은 아직도 계시되지 않고 있다 . 마지막의 차디와 생략된 형태의 헤가 신비를 뜻함과 같다고 말할 수 있을는지 모른다 . 그러나 그렇다고 말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고 , 하물며 그것은 철학자의 돌 의 방식이라고 말하는 것은 더 한층 허용될 수 없다 . 그러나 글의 뜻이 진실하지 않다는 것은 예언자들 자신도 말했으므로 우리도 그렇게 말해도 무방하다 .

 

688

「 멤 」 은 신비적이라고 나는 말하지 않는다 .

 

689

모세는 ( 신명기 30 장에 ) 약속하기를 , 신은 그들의 마음에 할례를 행하시고 그들로 하여금 신을 사랑할 수 있게 하리라고 했다 .

 

690

다윗이나 모세의 한 구절 , 예를 들면 「 신은 마음에 할례를 행하시라 」 라는 구로써 그들의 정신을 판단할 수 있다 . 다른 모든 설화가 막연해서 , 그들이 과연 철학자인가 그리스도 신자인가가 의심된다 치고라도 이런 종류의 일구는 다른 일체를 결정한다 . 마치 에픽테토스의 일구가 다른 일체의 어구를 반대의 뜻으로 결정하는 것처럼 . 거기까지는 분명히 지속하지만 , 거기서부터는 애매함이 없어진다 .

 

691

우스갯소리를 하고 있는 두 사람 중 , 한쪽이 그 친구들 사이에 이해되는 양의적인 말을 사용하고 , 다른 쪽이 단의적인 말밖에 사용하지 않았다고 하자 . 거기에 그 비밀을 모르는 어떤 사람이 찾아와서 두 사람들이 그런 이야기를 주고받는 것을 듣게 되면 두 사람에 대해서 같은 판단을 내리게 되리라 . 그러나 뒤에 그 회화의 나머지 부분에서 한 쪽이 천사와 같은 사물을 이야기 하고 다른 쪽이 여전히 일상 다반지사를 이야기하였다고 하면 , 한쪽은 신비를 말하고 있으며 다른 쪽은 그렇지 않다고 그 사람은 판단하게 될 것이다 . 한쪽은 그런 너저분한 일을 말할 수 없지만 신비를 말할 수 있다는 것을 충분히 표시했고 , 다른 쪽은 신비는 말할 수 없고 너저분한 일을 말할 수 있다는 것을 충분히 표시했기 때문이다 .

구약성서는 부호 ( 符號 ) 이다 .

 

692

인간의 유일한 적은 그를 신으로부터 멀리 하게 하는 야욕이지 신이 아니라는 것 , 유일한 행복은 신이지 풍요한 땅이 아니라는 것을 명백히 인식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 인간의 행복은 육체에 있고 불행은 관능적 쾌락에서 그를 멀리 하게 하는 데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은 거기에 포만하고 거기에 탐닉하기를 바란다 . 그러나 진심으로써 신을 구하고 신을 놓쳐 보지 못하게 되는 것만을 불행이라고 느껴 신을 소유하려는 소원 밖에 없고 , 신으로부터 자기를 멀리하는 자를 적으로 알고 , 이런 적에게 자기가 포위되고 좌우되고 있음을 보고 슬퍼하는 사람들은 , 스스로 안도하기를 바란다 . 나는 그들에게 행복한 소식을 전한다 . 그들에게는 한 사람의 구세주가 있다 나는 그 구세주를 그들에게 보여주리라 . 그들의 유일한 신이 있음을 보여주리라 . 다른 사람에게는 신을 보여주려고 하지 않겠다 . 나는 그들을 적의 손에서 구해주실 한 사람의 메시아가 약속되어 있다는 것 , 또 그 메시아는 그들을 죄로부터 구출하기 위 해 온 것이지 , 적의 수중에서 구출하기 위해 온 것이 아님을 알려주리라 .

메시아는 그 백성을 적의 수중에서 구출하리라고 다윗이 예언했을 때 그것은 애굽인으로부터 구출을 뜻한다고 육체적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 그렇게 되면 그 예언이 성취되었음을 표시할 수는 없다 . 그러나 그것은 죄로부터의 구출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하다 . 사실 적은 애굽인이 아니고 죄야말로 적이기 때문이다 . 그러므로 적이라는 말은 양의적이다 . 그러나 만약 그가 실제로 말하고 있는 것처럼 이사야 기타 사람들과 같이 메시아는 그 백성을 죄에서 구출하리라고 다른 곳에서 말했다고 하면 , 양의성은 제거되고 적의 이중의 뜻은 죄라는 단일한 뜻으로 환원되는 셈이 된다 . 왜냐하면 그가 마음에 죄를 느끼고 있으면 그것을 적이라는 말로 표현한다는 것은 충분히 가능하지만 , 만일 그가 단순히 적에 관해서만 생각하고 있다면 , 그것을 죄라고 볼 수 없기 때문이다 .

그런데 , 모세 • 다윗 • 이사야는 같은 말을 썼다 . 그렇다면 그러한 말들이 같은 뜻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누가 말할 수 있는가 . 또 다윗이 적이라고 말했을 적에는 명백히 죄를 뜻했는데 , 모세가 적이라고 말했을 때는 ( 그것이 ) 같은 것을 뜻하지 않았다고 누가 말할 수 있으랴 ?

다니엘은 ( 다니엘 9 장에 ) 그 백성이 적의 포로로부터 구출되기 위해 기도하고 있다 . 그러나 그는 죄에 관한 것을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 그리고 그렇다는 것을 표시하기 위해 , 천사 가브리엘이 나타나 그의 기도를 받아들인다 . 이제 70 주만 기다리면 된다 . 그것이 지나면 백성은 죄에서 구출되고 , 죄는 종말을 고하고 , 지극히 성스러운 구세주는 영원한 정의를 , 율법적인 정의가 아닌 영원한 정의를 초래하리라고 했다는 말을 한 것이다 .

 

 

 

 

  

제 11 편 예 언

 

 

 693

인간의 행복과 비참을 볼 때 , 침묵하고 있는 전 우주를 바라다볼 때 , 인간이 아무런 빛도 없이 홀로 내버려져 있고 , 마치 우주의 이 한 구석에 방황하고 있는 것처럼 누가 자기를 거기에다 놓았는가 , 무엇을 하려고 거기에 왔는가 , 죽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도 모르고 모든 인식을 박탈당하고 있음을 볼 때 , 나는 잠들어 있는 동안 황폐할 대로 황폐한 무서운 섬에 연행되어 깨어보니 ( 자기가 어디 있는지를 ) 모르고 거기서 탈출하는 수단도 모르는 사람과 같은 공포를 느낀다 . 그것을 생각하면 이처럼 비참한 상태에 놓여 있는 인간이 어찌하여 절망에 빠지지 않는가를 나는 의심한다 . 나는 내 주위에도 같은 성질의 사람들을 보게 된다 . 그들에게 나보다 더 많은 것을 알고 있느냐를 질문해도 , 그들은 아니라고 대답한다 . 그래서 이들 비참한 방황자들은 자기의 주위를 돌아보고 무엇인가 즐거워 보이는 것을 발견해서 , 거기에 전심하고 집착했다 . 나로서는 그런 점에 집착할 수가 없었다 . 그리고 자기가 보고 있는 것 이외에 무엇이 또 있어 보이는 기색이 짙음을 인정하고 , 신이 자기의 징조로 그 무엇을 남겨놓지나 않았느냐고 탐구했던 것이다 .

나는 상반하는 종교가 많이 있다는 것을 안다 . 그러므로 그중 하나를 제외하고서는 모두 허위이다 . 각 종교는 그 자신의 권위를 가지고 신앙을 요구하고 , 불신자를 위협한다 . 그러므로 나는 그것들을 믿지 않는다 . 누구도 그런 것을 말할 수 없고 , 누구도 자기를 예언자라고 부를 수는 있다 . 그러나 그리스도교를 보면 거기에는 예언이 존재한다 . 그런데 이것은 누구에게나 불가능한 일이다 .

 

694

그리고 이것들 일체를 크게 이루는 것은 예언이다 . 그것을 우연히 소치라고 말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 .

누구이건 간에 8 일밖에 살 수 없는 인간이 , 그것들 일체를 우연한 일이 아니라고 믿는 편에 도리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

그런데 정욕이 우리를 붙잡지 않는다면 8 일도 백년도 마찬가지인 것이다 .

 

695

예언 = 위대한 팡은 죽었다 .

 

696

Suscepererunt verbum cum omni aviditale , scrutantes Scriptur -as, si ita se haberent ( 대단한 간절함으로써 주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 이 일이 정말로 그랬던가 그렇지 않았던가 성서를 조사한다 ) .

 

697

Prodita lege ( 고해진 바를 읽어라 ) .

Impleta cerne ( 성취된 것을 보라 ) .

Implenda collige ( 성취되어야 할 것을 생각하라 ) .

 

698

예언된 일이 생겨나는 것을 보고 비로소 사람들은 예언을 이해하게 된다 . 따라서 은퇴 • 근신 • 침묵 등의 증거는 이를 알고 또 믿는 사람에게만 유효하다 .

완전히 외적인 율법 속에 있어서 극히 내적이었던 요셉 .

외적인 회개는 내적인 회개의 준비이다 . 마치 비하가 겸손의 준비인 것처럼 . 이리하여… .

 

699

유대교의 회당은 유대교회에 선행하고 , 유대인은 그리스도교도에 선행했다 . 예언자들은 그리스도교도에 관해 예언했고 , 성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서 예언했다 .

 

700

헤롯이나 카이사르의 역사는 신앙의 눈으로 보면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가 .

 

701

율법과 신전에 대한 유대인의 열심 ( 요셉과 유대인 피론의 카이우수에게 주는 글 ). 다른 어떤 민족이 그런 열심을 가지고 있었던가 ? 그들은 열심을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 예수 그리스도는 그 강림의 시기와 세 계정세에 관해 예고되어 있었다 . 발 틈에서 제거된 주권 및 제 4 왕국이 암흑 속에서 이 빛을 얻는다는 것은 얼마나 행복한 일일까 !

다리우스 • 키루스 • 알렉산드로스 • 로마인 • 폼페이우스 • 헤롯이 복음의 영광을 위해서 그런 줄을 모르고서 움직이고 있는 것을 , 신앙의 눈을 가지고 보는 것은 얼마나 훌륭한 일인가 !

 

702

율법에 대한 유대 민족의 열심 , 특히 예언자가 없어진 뒤의 열심 .

 

703

예언자들이 율법을 유지하려고 했던 동안 민중은 냉담했다 . 그런데 예언자들이 없어지고 나니 냉담은 열심으로 변했다 .

 

704

악마는 예수 그리스도 이전에는 유대인의 열심을 방해했다 . 그 ( 악마 ) 가 그들 ( 유대인 ) 에게는 유익했기 때문이다 . 그러나 그 뒤는 그렇지 않다 .

이방인에게 조롱당한 유대 민족 , 박해된 그리스도교도 .

 

705

증거 = 예언과 그 성취 . 예수 그리스도 이전의 것과 이후의 것 .

 

706

예수 그리스도가 메시아라는 최대의 증거는 예언이다 . 신도 또한 예언을 위해 최대의 준비를 하셨다 . 왜냐하면 그 예언의 성취로써 이러한 일들은 교회의 발생으로부터 종국에 이르도록 계속하는 일대 기적이기 때문이다 . 그래서 신은 천 6 백 년간에 예언자들을 일으키시고 , 그리고 그 후 방방곡곡에 유포하셨다 . 이런 것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에 대한 준비였다 . 그 복음은 온 세계 사람들로부터 신앙되어야 하는 것이므로 , 이를 믿게 하기 위해서 예언의 필요성이 있었을 뿐 아니라 , 복음을 온 세계 사람들에게 받아들이게 하기 위해 예언이 온 세계에 퍼질 필요가 있었다 .

 

707

그러나 예언이 있다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 그것은 도처에 유포되고 어느 때에도 간직되어 있어야만 하는 것이었다 . 그리고 그 성취가 우연의 소치라고 생각되지 않기 위해 그것이 예고되어 있을 필요가 있었다 .

메시아로서 참으로 절대적인 영광이란 그들 ( 유대인 ) 이 그의 목격자였고 그의 영광의 수단이었기도 했다는 것이다 . 신이 그들을 보존하신 것은 제외하고서 .

 

708

예언 = 그 시기는 유대 민족의 상태에 의해서 , 이교 민족의 상태에 의해서 , 신전의 상태에 의해서 , 햇수에 의해서 예언되었다 .

 

709

동일한 사물을 여러 방식으로 예언하기 위해서는 대담해야 한다 . 우상 숭배적 또는 이교적인 네 개의 왕국과 , 유대의 치세의 종말과 , 70 주 간은 동시에 일어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었고 , 또 이것들은 모두 제 2 의 신전이 파괴되기 전에 일어나야 하는 것이었다 .

 

710

예언 = 단 한 사람만이 예수 그리스도 강림의 시기와 방식에 예언하는 책을 쓰고 , 예수 그리스도가 그런 예언에 따라 강림하셨다 해도 이는 매우 유력한 사실일 것이다 .

그러나 여기 그 이상의 일이 있다 . 그것은 역대 사람들이 4 천 년에 걸쳐서 끊임없이 불변하며 잇따라 나타나 이 같은 사건을 예언했다는 것이다 . 그것을 선포하는 것은 1 민족 전체이다 . 그들은 그들이 갖고 있는 확신을 하나가 되어 입증하기 위해 4 천년동안 존재한다 . 그리고 그들에 대해서 행해진 어떠한 위협 , 어떠한 박해도 그들로부터 그 확신을 떼어버릴 수는 없었다 . 이것은 각별히 중대한 일이다 .

 

711

특수한 사물의 예언 = 그들이 애굽에 있어서는 그 나라에서도 , 다른 곳에도 , 사유재산이 전무한 외래자였다 . 그 당시의 그들에게는 뒤에 영속한 왕권이나 , 모세가 제정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시대까지 계속한 산헤드린이라고 불리는 70 명의 의원으로써 구성되는 최고의회는 아직 그 맹아도 나타내지 않고 있었다 . 이 모든 것은 그들 당시의 상태에서 최대한 떨어져 있는 것이었다 . 그때 야곱은 죽고 , 열 두 명의 애들을 축복하고 , 그들이 큰 토지를 소유하게 되리라고 선언했다 . 그리고 특히 유대민족에 대해서 , 훗날 그들을 통치하는 왕들이 그의 종족에서 나오게 되리라 . 그의 형제들은 모두 그의 신하가 되리라 . 제국민의 대망의 적이 메시아까지가 그로부터 탄생하게 되리라 . 대망의 메시아가 그의 종족 중에 나타나기까지는 왕권은 제거당하지 않고 , 통치자와 입법자도 그 자손으로부터 제거당하지 않으리라고 예언하였다 .

이 같은 야곱은 장래 소유할 토지를 마치 자기가 그 소유자인 양 분배하고 , 그 분배 할당을 다른 자보다도 요셉에게 많이 주고 말하기를 , 「 나는 너에게 하나의 몫을 더 준다 」 라고 했다 . 그리고 요셉이 그 앞에 ( 야곱 앞에 ) 자기의 두 아들 에브라임과 므낫네를 데리고 와 , 형인 므낫네를 오른편에 , 동생인 에브라임을 왼편에 세우고 있는 것을 축복함에 있어서 , 그 ( 야곱 ) 는 두 손을 서로 엇걸고 오른손을 에브라임의 머리 위에 , 왼손을 므낫네의 머리 위에다 놓고 ( 이렇게 해서 ) 두 사람을 축복했다 . 이에 대해서 요셉이 아버지께서는 아우를 각별히 더 사랑하시느냐고 항의하니 , 그는 놀라울 정도로 위엄을 나타내면서 대답하기를 , 「 나는 잘 안다 . 내 아들아 , 나는 잘 안다 . 그러나 에브라임은 므낫네보다 더 큰 자가 되리라 」 라고 했다 . 이것은 실제로 그 결과에 있어서 진실하게 됐다 . 이 일족은 아주 번영하고 두 개의 혈통을 합하면 일국을 이룰 정도였기 때문에 , 보통 에브라임이라는 하나의 이름으로 불리어져 왔다 .

이 같은 요셉은 죽음에 임해 그 아들들이 저 토지에 들어갈 적에 그의 뼈를 같이 가지고 가라고 명령했으나 , 이 명령은 3 백 년 뒤에야 겨우 실행되었다 .

모세는 이러한 모든 일이 실제로 일어나기 훨씬 앞서 기록해 두었지만 , 마치 자기가 그 지배자인 양 그 토지에 들어가기에 앞서 , 그 받은 몫은 스스로 모든 종족들에게 할당했다 . 그리고 그는 신이 그들의 국민과 가계로부터 한 사람의 예언자를 나타나게 하시리라는 것 , 그 ( 모세 ) 는 그 예언자의 표징이라는 것을 언명하고 , 또 그가 죽은 뒤에 그들이 가려고 하는 땅에 있어서 그들에게 닥쳐올 모든 일 , 신이 그들에게 주실 승리 , 신에 대한 그들의 불경 , 그로 말미암아 그들이 받는 형벌 , 기타 그들에게 부딪칠 모든 일이 정확히 예언했다 . 그는 그들에게 그 분할을 해 줄 심판자를 주시고 , 그들이 지켜야 할 모든 행정기구 , 그들이 세워야 할 도피의 거리를 규정하고… .

 

712

예언 중 특수한 사물에 관한 것과 메시아에 관한 것이 섞여 있는 것은 , 메시아에 관한 예언이 증거를 가지지 않을 수 없고 , 특수한 예언이 결실하지 않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

 

713

유대인의 무기수 = 예레미야 11 장 11 절 , 「 나는 재앙을 유다에게 주리라 . 그들은 이를 면할 수 없을 터이다 」 .

표징 = 이사야 5 장 , 「 주는 포도원을 하나 가지고 , 좋은 포도가 결실되기를 대망하고 있었다 . 그런데 결실된 것은 들포도였다 . 그러므로 나는 그 포도원을 황폐시키고 이를 파멸시키리라 . 땅은 다만 가시나무만을 생산하게 되리라 . 나 하늘에 명해 그 위에 비오시지 않도록 하리라 . 주의 포도원은 이스라엘의 집이다 . 그 기뻐하시는 새싹은 유다의 사람들이다 . 나 그들에게 정의를 행하기를 바랐건만 그들은 불의를 낳았을 따름이로다 」 .

이사야 8 장 , 「 너희들 공포와 전율로써 주를 숭배하라 . 그 밖에 누구도 무서워하지 마라 . 그러면 그는 너희의 성소가 되시리라 . 그러나 이스라엘의 두 개의 집에는 걸리는 돌 , 방해의 돌이 되리라 . 예루살렘의 백성에게는 함정이 되고 , 파멸의 원인이 되리라 . 그들 중 많은 사람이 돌에 걸려 넘어지고 , 상하고 , 함정에 빠지고 , 멸망하게 되리라 . 나의 제자들을 향해 내 말을 숨기고 나의 율법을 봉하라 」 .

「 그러므로 나는 야곱의 집으로 나를 감추어 주신 주를 참으면서 대망하리라 . 」

이사야 29 장 , 「 이스라엘의 백성들아 ! 너희들 어리둥절해지고 또 놀래라 . 움직이고 , 비틀비틀하고 , 도취되어라 . 그러나 술 때문은 아니다 . 비틀거려라 . 그러나 도취 때문은 아니다 . 이는 신이 너희들에게 깊은 잠의 영혼을 마련하여 주시었기 때문이다 . 신은 너희들의 눈을 가리고 너희들의 임금들과 우상을 보는 예언자들을 현혹하게 하시리라 」 . 다니엘 12 장 , 「 악한 자는 깨닫지 못하리라 . 그러나 올바르게 가르침을 받은 자는 깨달으리라 」 . 호세아 마지막 장 마지막 절에 일시적 행복을 많이 기록하신 다음 말하기를 , 「 누가 지혜 있는 자인가 , 그는 이런 일을 깨닫게 되리라 」 운운 했다 . 모든 예언자들의 계시는 너희들에게는 봉인된 서책처럼 보이리라 . 그것을 글자를 해독하는 학자에게 넘겨주어도 , 그는 봉인되어 있는 까닭으로 읽을 수 없다고 말하리라 . 또 읽을 줄 모르는 사람들에게 넘겨주면 그들은 글자를 모른다고 말하리라 .

「 주 나에게 가라사대 , 이 백성은 나를 존경하지만 , 그 마음은 나로부터 멀리 떠나도다 . 이것이 이유이고 원인이다 . 이는 그들이 만약 진심으로 신을 존경한다면 예언을 깨달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 그들은 나에게 봉사하되 인간적인 길을 통해서이다 . 이 때문에 나는 이 백성 위에 초래한 다른 모든 것 외에 하나의 놀라운 일 , 크고 무서운 일을 더 가해 주리라 . 지식인의 지혜도 상실되고 , 그들의 깨달음도 희미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 」

예언 . 신성의 증거 = 이사야 41 장 , 만일 너희들이 신이라면 가까이 오라 . 미래사를 나에게 고하라 . 우리들은 너희들 말에 마을을 기울이리라 . 태초에 있었던 바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 앞으로 일어날 일을 미리 고하라 .

「 그것으로서 우리들은 너희들이 신임을 알게 되리라 . 너희들 , 만일 가능하다면 선이나 악을 행하도록 하라 . 그러면 우리는 보고 같이 추리하리라 . 그러나 너희들은 아무것도 아니다 . 너희들은 미움 받을 자에 지나지 않는다 . 운운 . 너희 중 누가 ( 사건과 동시대의 저자들에 의해서 ) 태초부터 , 시원부터 , 행하여진 사물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었던가 ? 그리고 우리로 하여금 너희는 옳다고 말하게 하였던가 ? —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자는 한 사람도 없고 , 미래사를 고해 주는 자도 한 사람도 없도다 . 」

이사야 42 장 , 「 바로 주인 나는 나의 영광을 남에게 주지 않는다 . 나야말로 이미 일어난 일을 예언했고 앞으로 일어날 일을 예언하리라 . 온 땅이여 , 신을 향해 새로운 노래를 불러라 」 .

「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백성을 여기 데리고 오라 . 모든 국민을 한 곳에 모아라 . 그들 중 — 또는 그들의 여러 신들 중 — 누가 지난날의 일과 앞날의 일을 너희들에게 가르쳐 줄 것인가 . 그들 자신을 옳다고 변명하기 위해 그 증거를 가져오기를 . 그렇지 않으면 나의 말을 듣고 진리는 여기 있다고 말하지 않기를 . 」

「 주 가라사대 , 너희들은 나의 증인이로다 . 나를 알리게 하고 , 내가 주임을 알게 하고자 내가 간택한 부하들이로다 . 」

「 나는 예언하고 , 나는 구원하고 , 나만이 너희들 눈앞에서 이런 불가사의한 일을 했다 , 너희들은 내가 신임을 입증하는 증인이라고 주 말씀하시다 . 」

「 나야말로 너희들을 사랑하는 까닭으로 바빌론 사람들의 힘을 제거한 것이다 . 나야말로 너희들을 신성하게 하고 너희들을 창조한 자로다 . 」

「 나야말로 너희들로 하여금 물속 , 바다 속 , 흐름 속을 통과케 하고 , 너희들에게 항거한 유력한 적을 영원히 물에 빠지게 하고 멸망시킨 자로다 . 」

「 그러나 이런 옛날 은혜를 상기하지 말도록 하라 . 지난날의 일을 돌이켜 보지 않도록 하라 . 」

「 보라 , 나는 새로운 일을 하련다 . 곧 일어날 터이니 , 너희들은 알게 되리라 . 나는 황야를 사람이 살 수 있는 아름다운 곳으로 만들리라 . 」

「 나는 자기를 위해 이 백성을 형성했고 , 나의 영예를 알리고자 그들을 세워 놓았노라 . 」 운운 .

「 그러나 나야말로 나 자신을 위해서 너희들의 죄악을 씻어 주고 너희들의 죄를 망각하려는 자다 . 너희들 자신을 정당화하기 위해 너희들의 불경을 기억하도록 하라 . 너희들의 먼 조상들은 죄악을 범했고 , 너희들의 스승은 모두 나를 배반했다 . 」

이사야 44 장 . 「 주 가라사대 나는 시초이고 종말이다 . 나와 동등해지고자 하는 자는 내가 최초의 백성들을 만들어 놓은 이후 지금까지 해 내려온 사물의 순서를 이야기하고 , 또 앞으로 닥쳐올 일을 고하도록 하라 . 겁을 내지 말라 . 나는 이런 일을 다 너희들에게 가르쳐 주지 않았더냐 . 너희들은 나의 증인이다 . 」

키루스에 관한 예언 = 이사야 45 장 4 절 , 「 내가 간택한 야곱 때문에 나는 너희의 이름을 불렀도다 」 .

이사야 45 장 21 절 , 「 와서 같이 토론해 보도록 하자 . 누가 세계의 시초부터의 일을 밝혀 주더냐 . 누가 그때부터의 일을 미리 고해 주더냐 . 그는 주인 나 아니었더냐 」 .

이사야 46 장 , 「 주 가라사대 , 너희들 태고의 세대를 상기하고 나에 비할 말한 자 없음을 깨닫도록 하라 . 나는 종말에야 일어날 일을 시초부터 이야기했고 세계의 기원에 관해 말했다 . 나의 명령을 존속하고 나의 의사는 모두 성취되리라 」 .

이사야 42 장 9 절 , 「 옛날의 일을 미리 예언했던 것처럼 일어났도다 . 보라 , 이제 나는 새로운 것을 예언하고 , 그것이 일어나기도 전에 너희들에게 전하리라 」 .

이사야 48 장 3 절 , 「 나는 시초의 일을 먼저 예언했고 다음 그대로 성취했노라 . 그것은 내가 말한 그대로 일어났다 . 이는 내가 너희들의 마음이 완고하고 반역적이며 후안무치함을 알고 있는 까닭이다 . 그러므로 나는 일이 성취되기 전에 그 일들을 너희에게 알게 해 주련다 . 너희들에게 그것을 가르쳐 너희들이 내 신과 , 내 신의 신상이 명령했다고 말하지 않기 위해서이다 」 .

「 너희들은 예고된바 사물이 그대로 생겨났음을 보았도다 . 너희들 그것을 광고하지 않으려는가 . 이제 나는 새로운 것을 너희들에게 고하련다 . 그것은 나의 힘 속에 감춰 두었던 것으로서 너희들이 아직 보지 못한 것이로다 . 이것은 방금 내가 갖추게 된 것이므로 앞서부터 있었던 것이 아니다 . 나는 이를 너희들에게 숨겨 두었노라 . 그렇지 않으면 너희들은 자랑삼아 말하기를 우리는 이미 그것을 알고 있었노라고 할 터이니 . 」

「 이는 너희들이 이것을 전혀 알지 못하고 , 너희들에게 이것을 말해 주는 사람이 없고 , 너희들의 귀는 그에 관해 들은바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 또 나는 너희를 알고 , 너희들이 배신하기를 좋아함을 알고 있어 너희들의 생겨난 첫날부터 배역자라는 이름을 너희들에게 붙여 주었기 때문이다 . 」

유대인의 배척과 이상인의 회심 = 이사야 65 장 — 나와 의논하지 않은 자들이 나를 찾아냈고 , 나를 찾지 않은 자들이 나를 발견했다 . 나의 이름을 부르지 않던 백성들에게 , 나는 여기 있다고 나는 말했노라 .

「 나는 자기들의 욕망에 따라 나쁜 길을 걸어가는 불신의 백성들에게 종일토록 나의 손을 펼쳐 주었다 . 이 백성들은 내 앞에서 행하는 죄악의 소치로 끊임없이 나의 분노를 자아내고 , 자신을 공물로 우상에 바치는 백성이로다 . 」 운운 .

「 이런 것들은 내가 분노하는 날 연기처럼 사라지리라 . 」 운운 .

「 나는 너희들과 너희 조상들의 죄과를 수집하고 너희들의 저지른 업에 따라서 전부를 너희들에게 보복하리라 . 」

「 주 아래와 같이 말씀하시다 . 나 , 나의 종들을 사랑하는 까닭으로 이스라엘을 모두 멸망시키지 않고 그 중 어떤 자들을 남겨 놓으리라 . 사람이 포도송이 속에 한 알을 남겨 놓고 , 이것을 따지 말라 . 그것은 축복이고 과실의 희망이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 」

「 이리하여 나는 내가 간택한 종들이 상속할 나의 모든 산과 , 기름지고 참으로 풍부한 전원을 가지기 위해 야곱과 유다께서 사람들을 뽑아내리라 . 그러나 그 외의 다른 자들을 모두 절멸시키리라 . 이는 너희들이 신을 잊어버리고 , 이방의 여러 신들에 봉사했기 때문이다 . 나는 너희들을 불렀지만 , 너희들은 나에게 대답하지 않았다 . 나는 이야기했지만 너희들은 듣지 않았다 . 너희들은 내가 금한 사항을 간택했느니라 . 」

「 이 까닭으로 주 아래와 같이 말씀하시다 . 보라 , 나의 종자들은 포식할 터이지만 너희들은 굶주릴 터이고 , 나의 종자들은 기뻐하지만 너희들은 부끄러워할 터이고 , 나의 종자들은 마음의 흡족한 기쁨으로 노래 부를 터이지만 너희들은 마음이 슬퍼 큰 소리를 지르며 어쩔 줄을 모르게 되리라 . 」

「 그리고 너희들은 너희들의 이름을 내가 선발한 자들에 대한 저주의 자료로서 남기게 되리라 . 주 너희들을 근절하시리라 . 그러나 자신의 종자들을 다른 이름으로 부르시리라 . 이 때문에 땅에 있어서 행복스러워지려는 자는 신에 있어서 행복스러워질 수 있으리라 . 」 운운 . 이는 처음의 고뇌는 망각될 것이기 때문이다 .

「 보라 , 나는 새로운 천지를 창조한다 . 지나간 일을 기억에 남기지 않고 , 생각에 떠오르게 하지 않으리라 . 」

「 그러나 너희들은 내가 창조하는 새로운 사물들에 대해 영원히 기뻐

하라 . 이는 내가 예루살렘을 만들어 기쁨의 극치로 삼고 , 그 백성으로 낙을 삼으려는 때문이다 . 」

「 또 나는 예루살렘과 그 백성을 즐길 것이니 거기에는 고합과 울음소리가 다시 들리지 않으리라 . 」

「 그들이 요구하기 전에 내가 먼저 대답하고 , 그들이 말을 하기 시작하면 곧 나는 들어 주리라 . 늑대와 어린 양이 같이 풀을 먹고 , 사자와 소는 같은 짚을 먹고 , 뱀은 먼지만을 먹게 되리라 . 이리하여 나의 신성한 산의 어느 곳에서도 죽이지 않고 해치지 않으리라 . 」

이사야 56 장 3 절 , 「 주 가라사대 , 너희들 공평을 지키고 정의를 행하 라 . 이는 나의 구원은 가까워오고 나의 정의는 나타나려고 하기 때문이다 」 .

「 이런 일을 행하고 안식일을 지켜 그 손을 눌러 나쁜 짓을 하지 않는 자에게는 복이 있으리라 . 」

「 나에게 귀의하는 이방인은 말하지 말라 . 신이 나를 그 백성으로부터 분리하시리라고 , 이는 주 아래와 같이 말씀하셨기 때문이니라 . 누구나 나의 안식일을 지키고 나의 의사를 행하기를 택하고 , 나의 계약을 지키는 자에게는 나는 나의 집에서 지위를 주고 , 내 아들에게 준 이름보다 나은 이름을 주리라 . 이것은 영원한 이름이 되어 언제까지나 끊이지 않으리라 . 」

이사야 59 장 9 절 , 「 우리의 죄악 때문에 공평이 우리로부터 멀어졌도다 . 우리는 빛을 기다렸지만 암흑만을 발견할 따름이고 , 광명을 바랐지만 어둠 속을 걸어가게 된다 . 우리들은 장님과 같이 바람벽을 손으로 찾고 대낮에도 밤중과 같이 넘어지고 , 어둠 속에 있는 죽은 사람과 같다 . 우리들은 모두 곰처럼 울부짖고 , 비둘기처럼 지저귄다 . 공평을 기다리지만 그는 오지 않고 , 구원을 바라지만 우리들을 멀리 떠난다 . 」

이사야 66 장 18 절 , 「 그러나 내가 그들을 모든 민족과 모든 국민과 같이 모아놓기 위해 오게 될 때 나는 그들의 업적과 사상을 물어보리라 . 그리고 그들은 나의 영광을 보게 되리라 」 .

「 또 나는 그들에게 하나의 기호를 표시해 놓고 구원된 자들을 아프리카 • 리디아 • 이탈리아 • 그리스의 국민과 내가 말한 것을 들은 일이 없고 나의 영광을 본 일이 없는 백성들에게 보내 주리라 . 그들은 너희들의 형제를 데리고 오리라 . 」

 

신전의 기각 = 예레미야 7 장 , 「 너희들 내가 내 이름을 처음 세웠던 실로에 가서 나의 백성의 죄악 때문에 내가 거기서 무엇을 했던가를 보도록 하라 . 주 가라사대 , 이제 너희들 같은 죄를 범했으니 나의 이름이 불리는 곳 , 너희들의 스스로 믿는 곳 , 내 자신이 너희들의 사제에게 준 곳인 이 궁전에다 내가 실로에서 했던 것과 같은 일을 하리라 ( 이는 내가 이것을 버리고 , 나 자신 다른 궁전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 」 .

「 또 나는 너희들의 형제인 에브라임의 애들을 버린 것과 마찬가지로 , 너희들을 나로부터 멀리하리라 ( 영원한 기각 ) . 그러니 이 백성을 위해 기도하지 말라 . 」

예레미야 7 장 22 절 , 「 너희들 공물에 공물을 가해서 무슨 이득이 있느냐 . 내가 너희들의 조상을 애굽에서 인도해 냈을 때에 , 공물과 번제에 관해 이야기한 바 없고 , 어떤 명령도 내린 일이 없다 . 내가 그들에게 준 교훈은 다음과 같다 . 너희들 나의 계명을 순종하고 이를 지키도록 하라 . 그러면 나 너희들의 신이 되고 , 너희들 나의 백성이 되리라 」 . 그들이 금송아지에 공물을 바치게 된 뒤 비로소 나 자신 나쁜 습관을 좋은 것으로 만들기 위해 공물을 설정했다 .

예레미야 7 장 4 절 , 「 너희들 , 너희들에게 이것은 주의 궁전이요 , 주의 궁전이요 , 주의 궁전이요라고 말하는 사람들의 거짓말을 믿지 않도록 하 라 」 .

 

714

신의 증인인 유대인 . 이사야 43 장 9 절 , 44 장 8 절 .

성취한 예언 = 열왕기상 13 장 2 절 — 열왕기상 23 장 16 절 — 여호수아 6 장 26 절 — 열왕기상 16 장 34 절 — 신명기 23 장 .

말라기 1 장 11 절 . 배척된 유대인의 공물과 이교도의 공물 ( 예루살렘 이외의 ) 도처에 있어서 .

모세는 죽음에 앞서 , 이방인의 소명 ( 신명기 32 장 21 절 ) 과 유대인이 버림받으리라는 것을 예언했다 .

모세는 각 종족에 일어날 일을 예언했다 .

예언 = 「 너희들의 이름은 나의 선민들에게 증오의 대상이 되리라 . 나는 그들에게 다른 이름을 주리라 . 」

「 그들의 마음을 완고케 하고 」 어떻게 해서인가 ? 그들의 사욕에 아첨하고 그 충족을 바라게 함으로써 .

 

715

예언 = 아모스와 자카리아 . 그들 ( 유대인 ) 은 의인을 팔았다 . 이 까닭으로 결코 소환되지 않는다 — 배신당한 예수 그리스도 .

사람들은 애굽에 관해서는 다시 상기하지 않으리라 . 이사야 43 장 16~19 절 . 예레미야 23 장 6~7 절을 보라 .

예언 = 유대인은 도처에 분산되리라 . 이사야 27 장 6 절 — 새로운 율법 . 예레미야 31 장 32 절 .

말라기 . 그로티우스 . 영광스러운 제 2 의 신전 . 예수 그리스도는 거기 오시리라 . 아가 2 장 7~10 절 .

이방인이 소명되는 것 . 요엘 2 장 28 절 , 호세아 2 장 24 절 , 신명기 32 장 21 절 , 말라기 1 장 11 절 .

 

716

호세아 3 장 — 이사야 42 장 , 48 장 , 「 그들이 내가 누구인가를 가르쳐 주기 위해서 옛날부터 나는 예언했다 」 . 54 장 , 60 장 마지막 구절 . 야두스로부터 알렉산드로스까지 .

 

717

예언 = 다윗에게는 항상 후계자가 있으리라는 서약 . 예레미야 13 장 13 절 .

 

718

다윗의 혈통의 영구한 통치 , 「 역대기 상하 」 모든 예언에 의해 또 서약으로서 . 그런데 그것은 현세적으로는 성취하지 않았다 . 예레미야 23 장 20 절 .

 

719

예언자들이 왕권은 영원한 왕 ( 메시아 ) 이 강림할 때까지 유대족에서 결코 떠나지 아니하리라고 예언했을 적에 그들은 민중에 아첨해서 그렇게 말한 것이고 , 그들의 예언은 헤롯의 즉위에 의해 오류임이 밝혀진 것이라고 ( 사람들은 아마 ) 생각할는지도 모른다 . 그러나 그들이 뜻한 것은 이것이 아니라 , 이와 반대로 이 현세적 왕국이 단절하는 것을 그들이 잘 알고 있음을 표시하기 위해서 유대인은 왕도 없고 군주도 없이 오랫동안 존속하리라고 , 그렇게 말했던 것이다 . 호세아 .

 

720

Non habemus regem nisi Caesarem ( 카이사르 외에 우리들에게는 왕이 없다 ) .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는 메시아였던 것이다 . 왜냐하면 그들은 벌써 타국인 외에는 왕으로 섬기지 않고 , 또 다른 왕을 바라고 있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

 

721

「 카이사르 외에 우리에게는 왕이 없다 . 」

 

722

다니엘 2 장 , 「 너희가 물어보는 비밀은 너희의 점술사들도 지식인들도 , 이를 너희에게 해명해 주지 못한다 . 그러나 하늘에는 유일한 신이 있어 , 이를 해 줄 수 있다 . 그는 후일에 일어날 일을 꿈을 통해서 너희에게 해명해 주신다 . 이 꿈이 그에게 많은 심뇌를 자아내게 하였다 」 .

「 내가 이 비밀을 알게 된 것은 내 자신의 지혜에 의한 것이 아니고 이 같은 신의 계시에 의한 것이다 . 그는 나에게 이를 나타내 주시고 , 너희 앞에서 이를 해명하도록 해 주신다 . 」

「 그러므로 너희의 꿈은 이와 같다 . 너희는 하나의 크고 높고 무서운 모 이 너희 앞에 서 있음을 보았다 . 그 머리는 금 , 가슴과 두 팔은 은 , 배와 넓적다리는 동 , 다리는 쇠로 되어 있지만 , 발은 쇠와 흙 ( 진흙 ) 을 섞어서 만들어진 것이었다 . 너희 이것을 부절히 생각해 왔었는데 , 나중에 하나의 돌이 사람 손을 빌지 않고 절단되어 그 모 의 쇠와 흙을 섞은 발을 때려 이를 분쇄했다 . 」

「 그렇게 되니 , 그 쇠와 흙과 구리와 은과 금은 , 산산이 깨어져 바람에 날아가 버리다 . 그러나 그 상을 때린 돌은 , 큰 산이 되어 온 땅에 가득 차다 . 이것이 너희의 꿈이었다 . 나 이제 그 해석을 너희에게 해주리라 . 」

「 너희는 여러 왕 가운데에서 가장 위대하고 , 신은 너희에게 만민을 두렵게 할 만한 굉장한 힘을 주셨다 . 너희는 너희가 보았던 모 의 금의 머리로써 나타나게 된다 . 그러나 너희 다음에 그 힘이 너희보다 모자라는 하나의 나라가 생겨나리라 . 그리고 그 다음에 제 3 의 동의 나라가 생겨나서 온 세계에 퍼지리라 . 」

「 그러나 제 4 의 나라는 쇠처럼 강하리라 . 쇠가 모든 것을 분쇄하는 것처럼 그 나라도 모든 것을 분쇄하리라 . 」

「 그러나 너희가 그 발과 발가락을 보았는데 , 일부는 쇠 , 일부는 흙이었다는 것은 그 나라가 분열돼서 쇠처럼 굳은 곳과 , 흙과 같이 취약한 곳이 된다는 것을 표시한다 . 」

「 그러나 쇠와 흙이 굳게 결합할 수 없는 것처럼 , 쇠와 흙으로서 나타나게 된 것들도 , 가령 혼인에 의해 결합되더라도 영속적인 동맹을 간직하기 어려우리라 . 」

「 그런데 이 왕들의 시대에 신이 나라를 하나 세우리라 . 이 나라는 영원히 멸망하지 않고 다른 백성들에게 귀속되는 일이 없으리라 . 이 나라는 다른 모든 나라를 분산시키고 멸망시키리라 . 그러나 자기만은 영원히 계속하리라 . 저 큰 돌이 사람의 손을 빌지 않고 절단되고 , 산에서 굴러내려 쇠와 흙과 은과 금을 분쇄한 것은 내가 본 바와 같다 . 이렇게 신이 후일에 일어날 일을 너희에게 표시해 주신 것이다 . 이 꿈은 참다운 꿈이고 , 이 해석도 확실하다 . 」

「 여기 이르러 느부갓네살 땅에다 머리를 대고 , 운운 . 」

다니엘 8 장 8 절 , 「 다니엘이 숫양과 숫염소의 싸움을 보고 있었는데 숫염소가 숫양에게 이겨 땅을 통치하도다 . 그런데 그 큰 뿔이 붉어지고 다른 네 개 뿔이 하늘의 사방을 향하다 . 그리고 그 중 한 뿔에서 조그마한 뿔 하나가 생겨나 , 남쪽으로 향하고 , 동쪽으로 향하고 , 이스라엘의 땅을 향해 대단히 커지고 , 천군 ( 天軍 ) 과 맞서도록 높아지고 , 별들을 집어던져 떨어뜨리고 짓밟고 , 드디어 군주를 타도하고 , 영속적인 공물을 폐지시키고 , 성소를 황폐시키다 」 .

「 다니엘이 본 것은 바로 이것이었다 . 그가 그 해명을 구하니 하나의 소리가 나면서 아래와 같이 부르짖었다 . 가브리엘아 , 그로 하여금 그 본 바를 깨닫게 하라 . 가브리엘이 그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본 숫양은 메데아와 페르시아의 왕이로다 . 그리고 숫염소는 그리스의 왕 , 그 눈 사이에 있는 큰 뿔은 그 나라의 초대 왕이로다 . 」

「 그리고 그 뿔이 붉어져 그 대신에 뿔이 네 개 생겨난 것은 이 왕의 뒤를 이은 이 나라의 네 명의 왕들이로다 . 그러나 그들의 힘은 최초의 왕에 못 미치리라 . 」

「 그런데 이 나라 말기에 불의가 늘어남에 따라 한 사람의 왕이 생겨나리라 . 불손하고 용맹하지만 자기의 힘에 의하는 것이 아니라 , 그는 만사를 제 뜻대로 하리라 . 성스러운 백성을 못살게 하고 , 표리부동 허위의 정신은 가지고 그가 뜻하는 바를 성취하고 , 많은 사람들을 멸망시키리라 . 그리고 나중에는 군주들의 군주에 반대해서 일어서리라 . 그러나 그는 폭력적인 손에 의하지 않고서 불행히도 멸망하고 말리라 . 」

다니엘 9 장 20 절 , 「 내가 전심으로 신에게 기도하고 , 나의 죄와 , 나의 모든 백성들의 죄를 참회함으로 신의 어전에 무릎을 꿇고 있었는데 내가 처음 계시 속에 보았던 저 가브리엘 , 저녁의 공물을 바칠 무렵 , 나에게 와서 나를 스치면서 나에게 가르쳐 주기를 , 다니엘아 , 지금 나는 너희에게 사물에 대한 인식의 길을 열어 주기 위해서 왔노라 . 너희가 기도하기 시작했을 적부터 나는 너희의 소원이 무엇인가를 표시하기 위해 온 것이다 . 이는 너희가 욕망의 인간이기 때문이다 . 그러므로 이 말을 듣고 계시의 의의를 깨닫도록 하라 . 너희의 백성과 너희의 신성한 거리를 위해 70 주간이 설정되었다 . 그 잘못을 제거하고 , 죄악에 종지부를 찍고 , 불의를 깨뜨리고 영원한 정의를 초래하고 , 계시와 예언을 성취하고 , 성자 중의 성자에게 기름을 부어 주기 위해서이다 . 그 다음 부터는 이 백성은 벌써 너희 백성이 아니고 , 이 거리는 성스러운 거리가 되지 않으리라 . 분노의 시대를 지나고 은혜의 연대는 영원히 오리라 」 .

「 그러므로 너희 알고서 들어라 . 예루살렘을 재건하라는 말이 나올 때부터 메시아의 군주가 나타나시기까지 7 주와 62 주가 있으리라 」 ( 히브리인은 수를 나누어 적은 수를 앞에 놓는 것을 보통으로 한다 . 그러므로 이 7 과 62 는 69 로다 . 그렇다면 70 주 중 제 7 주 , 즉 최후의 7 년이 남는다 . 이에 관하여서는 그가 다음에 언급할 것이다 ).

「 거리와 돌담은 소란 통에 재건되리라 . 그 62 주 ( 최초의 7 주에 다음 가는 것이다 .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69 주 다음 즉 맨 나중 주에 살해되리라 ) 뒤에 그리스도도 살해당하리라 . 또 하나의 백성 그 임금과 같이 와서 거리의 성소 ( 聖所 ) 를 파괴하고 , 홍수처럼 모든 것을 뒤집어엎으리라 . 이 전쟁의 종말에는 극도로 황폐하리라 . 」

「 그런데 , 그는 1 주 ( 남아 있는 제 70 주 ) 동안에 많은 자들과 계약을 맺으리라 . 그리고 그 주의 절반 뒤에는 ( 즉 최후의 3 년 반 ) 공물과 희생을 폐지하고 , 혐오할 물건을 놀라울 정도로 펼쳐 놓고 , 그에 놀라는 사람들에게 극도에 이르게까지 계속 주입하여 주리라 . 」

다니엘 11 장 , 「 천사가 다니엘에게 가라사대 , 차후에 ( 키루스 다음에 , 키루스의 대에는 아직도 그렇지 않다 ) 페르시아에 세 사람의 왕이 생기리라 ( 캄비세스 • 스메리디스•다리우스 ) . 그리고 그 다음에 오는 제 4 의 왕 크세르크세스는 부와 힘에 있어서 가장 강하고 그 백성을 모두 통솔하여 그리스인을 공격하리라 」 .

「 그러나 한 사람의 강한 왕 알렉산드로스가 생겨나서 , 그 영토를 크게 확장하고 , 모든 기도 ( 企圖 ) 를 뜻대로 성취하리라 . 그러나 그 나라는 바야흐로 건립될 무렵에 멸망하고 넷으로 나뉘어져 하늘 사방에 향하리라 ( 이미 6 장 6 절 , 8 장 8 절에서 천사가 말한 바와 같다 ) . 그러나 그의 혈통에 속하는 누구에게도 귀속되지 않으리라 . 그리고 그의 후계자에게는 그의 힘에 미치는 자 없으리라 . 이는 그의 나라마저 분산당해서 후계자 아닌 ( 저 네 사람의 주요한 후계자들이 아닌 자 ) 에게 귀속할 것이기 때문이다 . 」

또 그의 후계자 중 남방을 통치하는 자 ( 애굽 라고스의 아들 프톨레마이오스 ) 는 강하게 되리라 . 그러나 다른 자가 이에 이기고 , 그 나라는 큰 나라가 되리라 ( 시리아의 왕 셀레우코스 . 그는 알렉산드로스의 후계자들 중 가장 강한 자라고 아비누스는 말한다 ) .

햇수가 경과한 뒤 그들은 서로를 합하리라 . 남쪽 나라 왕의 딸이 ( 베레니케 , 다른 프톨레마이오스의 아들인 프톨레마이오스 필라텔프스의 딸 ) 북쪽나라 왕 ( 셀레우코스 라기다스의 조카 시리아인 아시아의 왕 안티오쿠스 데우스 ) 에게 감으로써 그들 사이에 친분이 맺어지리라 . 그러나 그 여자도 그 자손도 장기에 걸쳐 권위를 간직할 수 없으리라 . 이는 그 여자와 그를 파견한 자와 그 아들과 그의 벗들을 죽음으로 인도달할 것이기 때문이다 ( 베레니케와 그 아들은 셀레우코스 칼리니코스 때문에 살해당한다 ) .

「 그러나 그 여자의 줄기에서 솟아난 하나의 싹 ( 프톨레마이오스 에우에르게테스는 베레니케와 같은 아버지로부터 탄생하다 ) 이 나와 대군을 가지고 북쪽 나라 왕의 토지에 공격해 들어가리라 . 거기서 그는 전부를 그 예하에 두고 , 또 그들의 신 ․ 군주들 ․ 금은 및 기타 귀중한 모든 물건을 애굽에 가지고 가리라 ( 만일 그가 가정 사정 때문에 애굽에 소환되지 않았더라면 셀레우코스의 물건을 다 박탈했을 것이라고 유스티누스는 말한다 ) . 그리고 북쪽의 왕은 그에 대해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햇수만 보내리라 . 」

「 이리하여 그는 그 나라에 돌아가리라 . 그러나 북쪽의 왕의 아들들 ( 셀레우코스 케라우누스 ․ 안티오코스 대왕 ) 은 분격하여 많은 군사를 모으리라 . 그들의 군대는 진격해 와서 모든 것을 황폐시키고 말 것이리라 . 여기에 이르러 남쪽의 왕 ( 프톨레마이오스 필로파토르 ) 은 노하여 , 또 대군을 일으키고 교전하여 ( 안티오코스 대왕과의 라피아의 싸움 ) 이를 물리치리라 . 그러나 그 승리는 확실하지 않다 . 이는 북쪽의 왕 ( 안티오코스 대왕 ) 이 첫 번째보다 더 큰 군대를 가지고 돌아오기 때문이요 , 또 이때 수많은 사람들이 일어나 남쪽의 왕에 대적하기 때문이다 ( 젊은 프톨레마이오스 에피파네스의 치세 ) . 그리고 너희 백성 중 배교자 ․ 무뢰한들이 스스로 잘난 척해가지고 계시를 성취해 드디어 멸망하리라 . 에우에르게테스가 스코파스에 군대를 보내려고 했을 때에 그의 마음에 들게 하고자 자기의 종교를 포기한 사람들 — 이는 안티오코스가 스코파스를 빼앗고 그들을 무찌르려고 했기 때문이다 . 공격으로 성책을 파괴하고 매우 견고한 거리를 공략하리라 . 남쪽 나라의 전군은 이와 맞설 수 없어 모두 그 의도를 따라가리라 . 그는 이스라엘의 땅에 남게 되고 , 그 땅은 그에게 항복하리라 . 이리하여 그는 애굽 전국의 임금이 되고자 하리라 ( 에피파네스의 연소함을 깔보았다고 유스티누스는 말하다 ) . 그러기 위해 그는 애굽왕과 동맹을 맺고 , 그 땅을 그에게 주리라 . 클레오파트라 , 그 여자로 하여금 그 남편을 배신하기 위해서 , 이에 관해 아피아누스는 말하다 . 애굽이 로마인의 보호 하에 있기 때문에 실력으로써 그 임금이 될 수 있느냐를 의심하고 술책을 가지고 일을 성취하고자 한 것이라고 . 그는 그 여자의 타락을 원할 것이나 그 여자는 그의 뜻에 순종하지 않으리라 . 이리하여 그는 다른 계략에 전심하고 몇 개 섬들 ( 즉 해안의 항구마을 ) 의 주인이 되고자 그 중 몇 개를 공취하리라 ( 아피아누스가 말한 대로 ) .

  그러나 대장 한 사람이 그의 정복에 반항하고 (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 , 그는 안티오코스 대왕의 진군을 저지했다 . 이는 대왕이 로마인의 동맹국을 침범해서 로마인의 기분을 손상했기 때문이다 ) 그에 대해 설욕하리라 . 이리하여 그는 그 나라에 돌아가고 거기서 멸망해서 ( 그는 신하에게 피살된다 ) 이미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게 된다 .

「 그리고 그를 계승하는 자 ( 안티오코스 대왕의 아들 셀레우코스 필로파토르 , 또는 소텔 ) 는 폭군으로서 과세를 가지고 나라의 영광 ( 그것은 백성을 가리킴 ) 을 고생시키리라 . 그렇지만 얼마 안 가 그는 반란에도 전쟁에도 의하지 않고 죽으리라 . 그의 자리를 계승하는 자는 비천한 자로서 왕의 영예를 받을 자격이 없다 . 그는 교묘하게도 감언을 가지고 임하리라 .

모든 군세가 그 앞에 굴복하고 , 그는 그들을 패배시키고 , 먼저 동맹을 맺었던 군주에 대해서도 이기리라 . 이는 그간 동맹을 갱신하여 , 그 군주를 속이고 얼마 안 된 군세로써 조용히 겁내지 않고 그의 영토에 쳐들 어가서 가장 좋은 토지를 빼앗고 , 그의 조상들마저 못한 짓을 행해 도 처를 황폐화시키기 때문이다 . 그는 그 치세 중 위대한 계략을 책정하리 라 . 」

 

723

예언 = 다니엘의 70 주간은 예언의 기일이므로 시작되는 시기에 관해서는 막연하다 . 또 역사학자들 사이에 의견 차이가 있기 때문에 끝나는 시기에 관해서도 그렇다 . 그러나 이들 일체의 의견 차이는 기껏해야 2 백년을 넘지 못한다 .

 

724

예언 = 제 4 왕국 시대 제 2 신전의 파괴 전 , 유대인의 왕권이 제거되기 전 , 다니엘의 제 70 주간에 제 2 신전이 존속하고 있는 동안 이교도는 가르침을 받고 , 유대인이 숭배하는 신을 알게 되리라는 것 , 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그들의 적으로부터 구출되고 신을 두려워하고 사랑하는 마음이 충족되리라는 것 .

그랬더니 제 4 왕국 시대 제 2 신전이 파괴당하기 전 , …이교도가 떼를 지어 신을 숭배하고 천사와 같은 생활을 하게 되었다 . 처녀들은 그 정조와 생애를 신에 바치고 남자들은 모든 쾌락을 버렸다 . 플라톤이 소수의 선발된 교양 있는 인사에게만 설득할 수 있던 것을 , 어떤 비밀의 힘이 근소한 말로써 수백만의 무지한 사람들에게 설득한 것이다 .

부자는 그 재산을 버리고 , 아들은 아버지의 즐거운 집을 떠나 황폐한 사막에 가곤 했다 ( 유대인 피론의 책을 보도록 하라 ) . 도대체 이것은 무엇인가 , 그것은 벌써 오래 전부터 예언되었던 바이다 . 2 천년 동안 한 사람의 이교도도 유대인의 신을 예배치 않았다 . 그런데 예언된 시기가 되니 다수의 이교도가 이 유일의 신을 존경하게 되었다 . 여러 신들의 궁전은 파괴되고 왕들도 십자가에 복종했다 . 도대체 이것은 전부 무엇일까 ? 이것은 신의 영이 지상에 퍼진 것이다 .

모세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까지는 랍비들 말에 의거하더라도 한 사람의 이교도도 믿지 않았다 . 예수 그리스도 이후 다수의 이교도가 모세의 글을 믿고 , 그 본질과 정신을 준수하고 , 그 중 쓸데없는 것은 배척했다 .

 

725

예언 = 애굽인들의 회심 ( 이사야 19 장 19 절 ) , 애굽에 있어서 진정한 신의 제단 .

 

726

예언 = 애굽에서 푸기오 659 면 , ≪탈무드≫ , 「 우리들 사이에 하나의 전설이 있다 . 메시아가 오시려 할 때 , 그의 말씀을 증명하기 위해 세워졌던 신의 집은 불결과 부정에 가득 차 학자들의 지혜는 타락하고 부패하리라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 죄를 범하기를 무서워하는 자는 국민에게 배척당하고 바보로 간주되리라 」 .

이사야 49 장 , 들어라 , 멀리 있는 백성들이여 , 또 너희들 바다에 사는 사람들이여 , 주는 나의 어머니의 태 속에서부터 나의 이름을 부르셨다 . 그는 나를 그의 손의 그림자 밑에 보호해 주시고 , 나의 말 ( 언어 ) 을 잘 드는 검과 같이 만들어 주셨다 . 또 나에게 가라사대 , 너희는 나의 종이로다 . 너희를 통해 나는 나의 영광을 나타내리라고 . 그러나 나는 말하기를 , 주여 , 나는 헛되이 수고했는가 , 무익하게 나의 힘을 다했는가를 심판하소서 . 나의 노고는 그대 앞에 있노라고 했다 . 그때 야곱과 이스라엘을 인도하기 위해 나를 어머니의 뱃속에서부터 손수 만들어 주시고 , 완전히 자기의 것으로 하신 주 ,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 너희는 내 앞에서 영광하게 되리라 . 나 자신 너희의 힘이 되리라 . 너희가 야곱의 종족을 회개시킨다는 것은 사소한 일이다 . 나는 너희를 내세워 이방인의 빛으로 하고 , 나의 구원의 힘으로 하여 대지의 끝머리까지 이르게 하리라 . 이것이 바로 자기의 넋을 겸손케 한 자 , 이방인에게 멸시되고 미움을 받는 자 , 땅 위에 권력 있는 사람에게 복종하는 자에게 주가 말씀하신 이야기이다 . 군주와 왕등은 너희를 숭배하리라 . 이는 너희를

간택하신 주는 진실하기 때문이다 .

「 주 또한 아래와 같이 말씀하시다 . 나는 구원의 날 , 은혜의 날에 너희의 원을 들어 주었다 . 나 , 너희를 내세워 백성들의 계약으로 삼고 , 가장 풍요한 나라를 너희의 소유로 해 주리라 . 너희로 하여금 속박된 자를 향해 나와서 자유로워지라고 하고 , 어둠 속에 있는 자를 향해 빛이 있는 곳으로 나와 풍요한 토지를 가지라고 말하기 위해서다 . 그들은 다시는 기갈과 열기 때문에 고통을 받지 않을 터이다 . 이는 그들을 연민하신 자 , 그들을 인도하여 주시기 때문이다 . 주는 그들을 샘물로 인도하시고 그들 앞에서 산들을 평탄케 만드시리라 . 보라 , 사람들 동서남북 각 방면에서 모여들리라 . 하늘이여 , 신에게 영광을 올리소서 . 땅이여 , 기뻐하라 . 이는 주께서 그 백성을 위안함을 받아들이시고 그에다 희망을 거는 가난한 자를 드디어 연민하였기 때문이다 . 」

「 그렇지만 시온은 감히 말하다 . 주께서 나를 버리시어 주께서 나를 잊으셨다고 .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 나는 너희를 잊지 않을 것이라 . 나는 늘 나의 두 손으로 너희를 지탱하고 너희의 성벽이 항상 내 앞에 있나니 , 너희를 다시 세우고자 하는 이는 속히 돌아오고 , 너희를 헐고 너희를 황폐케 하던 자들은 너희를 떠나가리라 . 너희 눈을 들어 사방을 보라 . 그들이 다 모여 너희에게로 오느니라 . 나 맹세하노니 너희가 반드시 그 모든 무리를 영원히 장식으로 삼을 수 있게 되리라 . 너희의 황폐하고 적막한 곳들과 너희의 파멸을 당하였던 땅이 , 이제는 주민이 많으므로 좁게 될 것이니라 . 너희가 나지 않은 해에 난 아들들이 너희에게 말하기를 , 이 땅은 너무 좁으니 땅을 넓혀 살 장소를 마련할 것이라고 . 그때 너희 마음속에 생각하기를 , 누가 이렇게 많은 아들을 나에게 주었느냐 . 나는 애를 낳지 않고 애기 없이 이주당하고 포로가 되었는데 , 누가 나를 위해 이 자들을 길러 주었느냐 . 나는 구원을 받지 못해 버림을 받았는데 어디로부터 이런 자들이 모두 오게 된 것이냐고 , 주는 나에게 말씀하시리라 . 나를 봐라 , 나는 내 힘을 이방인에게 나타내고 , 나의 깃발을 만백성 위에 들었노라 . 그들은 그 팔과 품 안에 아이들을 데리고 너희에게 오리라 . 왕과 왕후들은 너희의 양친이 되고 , 그의 얼굴을 땅에다 대고 너희를 예배하고 너희의 발바닥의 먼지를 핥게 되리라 . 그리고 너희는 내가 주임을 알고 나를 대망하는 자는 영원히 혼미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리라 . 누가 강한 힘을 가지고 있는 자로부터 빼앗는 것을 다시 빼앗을 수 있으랴 . 그러나 가령 그로부터 빼앗을 수 있다 하더라도 내가 너희의 아들을 구원하고 , 너희의 적을 멸망시키는 데 방해를 놀 수 있는 자 결코 없으리라 . 이리하여 만인이 내가 주이고 , 너희를 구하는 자며 , 야곱의 유력한 구세주임을 알게 되리라 」 .

「 주 가라사대 , 내가 너희들의 회당을 버린 이연장 ( 離緣狀 ) 은 어디 있는가 . 무엇 때문에 내가 이것을 너희들의 적의 손아귀에 넘겨주었던가 . 내가 그것을 버린 것은 그의 불신과 죄악의 까닭이 아니었던가 . 」

「 그것은 내가 왔으나 맞이하여 주는 이 없고 , 내가 불렀으나 내 말을 듣는 자 없기 때문이다 . 내 팔이 짧아 구원할 힘이 없단 말인가 . 」

「 이 까닭으로 나는 내 분노의 표지를 나타나게 하리라 . 나 어둠으로서 하늘을 덮고 , 베일을 가지고 이를 감출 것이니라 . 」

「 주는 잘 교육된 햇발을 나에게 주고 슬픔에 잠겨 있는 자를 나의 말로써 위안해 줄 수 있게 하시다 . 주는 나로 하여금 그의 가르침을 알게 하였고 , 나는 스승처럼 그의 말을 들었다 . 」

「 주는 나에게 그 의사를 표시하셨고 , 나는 그 의사에 티끌만치도 어긋남이 없었노라 . 」

「 나는 나를 때리려는 자에게 내 몸을 맡겨 주었고 , 나를 해치려는 자에게 나의 뺨을 맡겨 주었고 , 치욕과 남이 뱉는 침에 대해 나의 얼굴을 가리지 않았다 . 그러나 주 나를 지지하여 주셨기 때문에 혼미에 빠지지 않았다 . 」

「 나를 외롭게 하는 자 나와 같이 있도다 . 누가 감히 나를 비난할 것이며 , 누가 나와 다투어 나의 죄를 책하려고 일어설 것인가 . 신이 손수 나를 보호하시지 않는가 . 」

「 사람은 모두 지나가고 시간과 같이 소실되리라 . 그러나 신을 두렵게 여기는 자여 , 신의 종자의 말씀을 들어라 . 암흑 속에서 고뇌하는 자여 , 주에 의뢰하도록 하라 . 그러나 신의 분노를 자기 몸에다 태우기만 하고 있는 자들이여 , 너희들은 그 불꽃 위를 걷고 , 너희들이 스스로 불붙여 놓은 불꽃을 걸어가거라 . 이런 재화를 너희들에게 초래한 것은 나의 손이므로 너희들은 그 고뇌 속에서 소멸할 것이니라 . 」

「 너희들 의를 찾고 주를 찾는 자여 , 내 말을 들어라 . 너희들이 절단되어 나온 바위와 , 너희들이 끌려 나온 연못을 상기해 보라 . 너희들의 아버지 아브라함과 너희들을 낳은 사라를 상기하라 . 보라 ! 그가 혼자 있어 아직도 자식이 없을 때 나는 그를 불러 이렇게도 많은 아들을 주었다 . 내가 얼마나 많은 축복을 시온에게 주었으며 , 얼마나 많은 은혜와 위안을 거기에 충만케 하여 주었던가를 알고 있으라 . 」

「 나의 백성들이여 , 이런 모든 일을 유의하고 , 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도록 하라 . 그것은 율법이 나로부터 나오고 , 이방인의 빛이 될 심판도 나로부터 나올 것이기 때문이다 . 」

아모스 8 장 , 「 예언자는 이스라엘의 죄목을 열거한 후 , 신이 그 복수를 하겠다는 서약을 했다고 말하다 . 」

「 그의 말은 다음과 같다 . 그 날에 나는 대낮에 해를 지게 하여 , 밝은 대낮에 어두움으로 땅을 덮어 너희들의 성대한 제전을 눈물로 바꾸고 , 너희들의 모든 송가를 슬픔으로 바꾸리라 . 」

「 너희들은 모두 비애와 고뇌 속에 빠질 것이니라 . 나는 이 국민들에게 외아들을 잃어버렸을 때에 비할 만한 슬픔을 주고 , 그 마지막 날짜들을 오뇌의 시간이 되게 할 것이니라 . 주 가라사대 , 보라 , 그런 날이 오면 그때 나는 기근을 이 나라에 보내 줄 것이니 , 이는 빵에 굶주리고 물에 목마르는 것이 아니라 , 주의 말을 듣는 데 있어서의 굶주림과 목마름을 의미하는 기근이다 . 그들은 바다에서 바다로 방황하고 , 북쪽에서 동쪽으로 날아가고 , 주의 말씀을 고하는 자를 찾아다닐 터이지만 , 끝내 그를 찾아내지 못할 것이니라 . 」

「 그들의 처녀와 젊은이는 이 목마름 때문에 쇠망하리라 . 저 ‘ 사마리아’의 우상에 봉사한 자 , ‘ 단’에서 숭배되는 신을 향해서 약한 자 , ‘ 브엘세바’의 습관을 따른 자들은 넘어져서 다시는 그 몰락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니라 . 」

아모스 3 장 2 절 , 「 땅 위에 모든 국민 가운데 나는 너희들만을 나의 백성으로 인지했도다 」 .

다니엘 12 장 7 절 , 다니엘은 메시아의 치세가 장기에 걸친다는 것을 기록하여 가라사대 , 「 이스라엘의 백성의 분산이 완성될 때 이런 일도 모두 성취될 것이라 」 라고 .

학개 2 장 4 절 , 「 너희들 최초의 신전의 영광과 제 2 신전의 그것을 비교하고 이를 멸시하는 자들이여 , 용기를 내라고 주 말씀하시다 . 너희 ‘ 스룹바벨’과 너희 대사제 여호수아야 , 너희들 땅 위의 모든 백성들아 , 힘써 용기를 내기를 그치지 말라 . 이는 내가 너희들과 같이 있기 때문이라고 , 만군의 주 말씀하시다 . 내가 너희들을 애굽으로부터 인도해 올 때 내가 한 약속은 존속하고 있으며 , 나의 영혼은 너희들 속에 있다 . 이제 얼마 동안 지나면 내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육지를 진동시키리라 ( 위대하고 이상한 변화를 나타내는 표현법 ) . 그리고 나는 또 만국을 뒤흔들리라 . 그때 모든 이방인에 의해 소원된 자 찾아오리라 . 그리고 나는 영광을 이 궁전에 가득 채워 주리라 」 .

「 은도 금도 나의 것이라고 , 주 말씀하시다 . 즉 이런 것에 의해 내가 숭배됨을 원치 않는다는 뜻이다 . 뜰에 있는 짐승은 모두 나의 것이니라 . 그것을 공물로써 나에게 바친다 하더라도 나에게 무슨 도움이 되라고 , 다른 곳에 기록되어 있는 것과 같다 . 이 새 신전의 영광은 최초 신전의 영광보다 더 클 것이라고 만군의 주께서 말씀하시다 . 바로 그 장소에 나는 나의 신전을 짓겠노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다 . 」

「 호렙에 너희들이 모였던 날 , 너희들 말하기를 , 주여 , 친히 우리들에게 말씀하시지 마시옵소서 . 죽을 우려가 있으니 우리로 하여금 다시는 이불을 보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라고 . 여기 주 나에게 말씀하시기를 , 그들의 기도는 옳다 . 나 그들의 형제 가운데 너희와 같은 한 사람의 예언자를 그들을 위해 기용하고 , 그 입에다 나의 말을 담아 줄 것이다 . 그는 내가 명하는 바를 모두 그들에게 고하여 주리라 . 그가 나의 이름으로 말하는 말에 순종하지 않는 자는 누구이건 간에 내가 친히 심판할 작정이고 . 」

창세기 49 장 , 「 너 유다야 , 너희는 형제들의 칭찬을 받고 , 너희의 적들에게 이길 자이니라 . 너희 아버지의 아들들이 너희를 숭배하리라 . 사자의 아들인 유다야 , 내 아들아 , 너는 맹수들에게 달려들어 , 사자처럼 , 일어서려는 암사자처럼 몸을 굽혔구나 」 .

「 왕의 지팡이가 유다를 떠나지 않고 . 입법가가 그의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않고 , 실로가 올 때까지 그런 상태가 계속되리라 . 만백성이 그 밑에 모여 그를 순종하게 되리라 . 」

 

727

메시아의 재세 중에 = Aenigmatis ( 수수께끼 ) . 에스겔 17 장 .

그의 선구자 말라기 3 장 .

그는 어린이로서 태어난다 . 이사야 9 장 .

그는 베들레헴 거리에 탄생한다 . 미가 5 장 . 그는 주로 예루살렘에 나타나 유다와 다윗의 가족에서 탄생한다 .

그는 현자와 학자의 눈을 어둡게 한다 . 이사야 6, 8, 29 장 등 . 복음을 가난한 자와 천한 자에게 전한다 . 이사야 29 장 , 장님의 눈을 뜨게 하고 , 병자의 건강을 회복시키고 , 어둠 속에서 헤매는 자에게 빛을 준다 . 이사야 61 장 .

그는 완전한 길을 가르쳐 주고 이방인의 교사가 되다 .

이사야 55 장 , 42 장 1~7 절 .

예언은 불신자에게는 이해되지 않는다 . 다니엘 12 장 , 호세아 14 장 10 절 , 그러나 올바르게 배운 자에게는 이해된다 .

예언은 메시아를 가난한 자로서 표현함과 동시에 모든 국민의 주로 표현한다 . 이사야 52 장 14 절 등 , 53 장 , 스가랴 9 장 9 절 .

메시아 강림의 시기를 예고하는 예언은 그를 이방인의 주 , 고난의 주고서 예고할 따름이다 . 구름을 타고 오는 심판자로서 예고하지 않는다 . 또 그를 심판자 , 영광의 주로서 예고하는 예언은 시기를 지시하지 않는다 .

그는 세상의 죄를 위해 희생된다 . 이사야 39, 53 장 등

그는 귀한 초석이 된다 , 이사야 28 장 16 절 .

그는 걸림돌과 방해의 돌이 된다 . 이사야 8 장 . 예루살렘은 이 돌에 부딪친다 .

건축사는 이 돌을 버린다 . 시편 118 편 22 절 . 신은 이 돌을 한구석의 머릿돌로 하신다 .

그리고 이 돌은 큰 산이 돼서 온 땅에 가득 찬다 . 다니엘 2 장 .

이리하여 그는 버림받고 , 거부당하고 , 배반당하고 , 시편 109 편 8 절 , 팔리고 , 스가랴 11 장 12 절 , 침 뱉기고 , 매를 얻어맞고 , 조롱당하고 , 모든 방식으로 괴로움을 당하고 , 쓴 것을 마시게 되고 , 시편 69 편 , 찔리고 , 스가랴 12 장 , 두 팔과 두 손을 찔리고 , 죽임을 당하고 , 그 옷은 제비뽑기에 붙여진다 .

그는 소생한다 . 시편 16 편 , 사흘 만에 , 호세아 6 장 3 절 .

신의 오른편에 앉기 위해 승천한다 . 시편 110 편 .

왕들은 그에 항거하여 무기를 잡는다 . 시편 2 편 .

그는 아버지이신 신의 오른편에 있다 . 그의 적을 물리친다 .

땅 위에 왕들과 온 백성은 그를 숭배한다 . 시편 61 편 .

유대인은 국민으로서 존속한다 . 예레미야 .

그들은 방황한다 . 왕 없이 운운 . 호세아 3 장 . 예언자 없이 , 아모스 . 구원을 고대하면서도 그를 발견하지 못하고서 , 이사야 .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이방인이 소명되는 것 , 이사야 52 장 15 절 , 55 장 5 절 , 60 장 등 , 시편 82 편 .

호세아 1 장 9 절 , 「 너희들이 흩어지고 수가 많아진 뒤에는 너희들은 벌써 나의 백성이 아니며 , 나는 너희들의 신이 아니리라 . 너희들은 나의 백성이 아니라는 말을 들은 곳에서 나는 그들을 나의 백성이라고 말하리라 」 .

 

728

주가 간택한 장소인 예루살렘 밖의 땅에서 공물을 헌납한다는 것은 허락되지 않았으며 , 10 분의 1 의 헌물을 먹는 것마저 금지되어 있었다 . 신명기 12 장 5 절 등 , 신명기 14 장 23 절 등 , 15 장 20 절 , 16 장 2, 7, 11, 15 절 .

호세아는 예언하기를 그들에게는 왕이 없고 , 군주도 없고 , 공물도 없고 , 우상도 없어지게 될 것이라고 했다 . 이것은 예루살렘 밖의 땅에서

정식 공물을 바칠 수 없게 된 오늘날 성취된 셈이다 .

 

729

예언 = 메시아의 시대가 되면 , 그는 애굽으로부터의 탈출도 잊어버리 게 할 정도로 새로운 계약을 세우기 위해 오실 것이다 ( 예레미야 23 장 15 절 , 이사야 43 장 10 절 ) . 그는 그의 율법을 외부가 아닌 내심에다 과해 주실 것이다 . 그때까지 외면적인 것에 지나지 않았던 그에 대한 두려운 느낌을 마음속에 가지게 하리라고 예언되어 있다 . 이런 모든 것 속에 그리스도교의 율법을 찾아보지 못하는 이가 있을까 ?

 

730

…그때 우상 숭배는 뒤집어엎어지리라 . 이 메시아는 모든 우상을 타도하고 , 사람들로 하여금 진실한 신을 예배하게 하리라 .

우상의 사원은 타도되고 , 또 세계의 모든 국민과 모든 장소에서 그에게는 순수한 희생이 바쳐지고 , 동물은 바쳐지지 않게 되리라 .

그는 유대인과 이방인의 왕이 되리라 . 그런데 이 유대인과 이방인의 왕은 쌍방으로부터 모욕당하고 살해의 음모를 받을 터이지만 , 쌍방의 지배자인 그는 모세의 숭배를 그 중심인 예루살렘에서 파괴하고 , 거기다 그의 최초의 교회를 세운다 . 또 우상의 숭배를 그 중심인 로마에서 파괴하고 , 거기에다 그의 주요한 교회를 세운다 .

 

731

예언 = 예수 그리스도는 신이 그의 적을 그에게 순종시키도록 할 때까지 신의 오른편에 앉게 하시리라 .

그러므로 그는 손수 그들을 순종시키지는 않으시리라 .

 

732

— 「 …그때 사람들이 그 아웃 사람에게 가르쳐 너희 주를 알라고 다시 말하지 아니할 것이다 . 그것은 신이 모든 사람에게 자신을 알리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 .

— 「 너희들의 자식은 예언하시리라 」 . 「 나는 나의 영혼과 나를 두려워하는 심정을 너희들의 마음속에 자리 잡게 하리라 」 .

이것들은 모두 같은 일이다 . 예언함은 신에 관해 말함이요 , 외적인 증거에 의하지 않고 내적이고도 직접적인 직관에 의해 말함이니 .

 

733

신은 사람들에게 완전한 길을 가르쳐 주시리라고 . 그리고 그 ( 그리스도 ) 의 앞에도 뒤에도 이에 가까운 신성한 것을 가르친 이는 한 사람도 없었다 .

 

734

…예수 그리스도는 , 처음엔 작지만 뒤에는 크게 되리라 . 다니엘의 작은 돌 .

가령 내가 메시아에 관해 아무것도 들은 바 없더라도 세계의 과정에 관해서 이렇게도 놀라운 예언이 있고 , 또 그 예언이 성취하는 것을 보고는 그것이 신성하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 그리고 이들 같은 책자들이 하나의 메시아를 예언하고 있음을 알게 되면 그의 내임을 확신하지 않을 수 없다 . 또 이들 책자가 그의 내임의 시기를 제 2 의 신전이 파괴 전에 두었음을 알고서는 , 그는 이미 오셨다고 나는 말하지 않을 수 없다 .

 

735

예언 = 유대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버리고 , 그 때문에 신의 버림을 받는다 . 선발된 포도나무는 들포도의 열배밖에 맺지 않는다 . 선발된 백성은 불충 • 불경 • 불신 , Populum non credentem et contradicentem ( 순종하지 않고 거역하는 백성 ) 이 된다 . 신은 그들에게 벌을 주어 장님으로 만드시고 그들은 장님처럼 대낮에도 손으로 찾으며 다닌다 . 한 사람의 선구자가 그들의 앞에 나타난다 .

 

736

Transfixerunt ( 찌른 자 ) , 스가랴 12 장 10 절 .

악마의 머리를 때려 부수고 , 그 백성을 죄로부터 , ex omnibus iniquitatibus ( 그 모든 사약으로부터 ) 해방해 줄 구세주가 강림한다 . 새로운 계약이 맺어지고 그것이 영속한다 . 멜기세덱의 위계에 따르는 다른 제사장제가 정해지고 그것이 영속한다 . 그리스도는 번영하고 유능하고 강해진다 . 하지만 비참하게도 사람들은 그가 누구인지를 모른다 . 사람들은 그를 메시아로 생각하지 않고 그에 반항하고 또 죽인다 . 그를 부인한 백성은 벌써 그의 백성이 아니게 된다 . 우상을 섬기던 교도가 그를 받아들이고 그에게 구원을 원한다 . 그는 시온을 떠나 , 우상 숭배의 중심지를 통치한다 . 그러나 유대인은 그냥 존속한다 . 그는 유대민족으로부터 , 그리고 또 왕이 없는 시대에 탄생한다 .

 

 

 

 

  

제 12 편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

 

 

 737

…여기 나는 다른 모든 종교를 거부한다 . 여기 나는 모든 항의에 대한 회답을 발견한다 .

지극히 성스런 신이 , 마음이 정화된 사람들에게만 자기를 나타내신다는 것은 정당하다 .

그러므로 이 종교는 내게는 사랑스러운 것이다 . 나는 이 종교가 이렇게도 신성한 도덕에 의해 이미 충분히 권위가 부여되어 있음을 발견하지만 , 나는 거기에 그 이상의 것을 발견한다 .

인간의 기억이 계속한 이래 ( 여기 다른 모든 민족보다도 더 앞서 존속하는 민족이 있다는 것 ) , 인류를 향해 인류는 전반적으로 부패하고 있지만 , 얼마 안 가 구세주가 오리라고 끊임없이 선언되어 온 것 , 그가 오기 전 한 민족 전체가 그에 관한 것을 예언하고 , 그가 온 뒤에 한 민족 전부가 그를 숭배한다는 것 , 그것을 말한 이는 한 사람이 아니라 거의 무수의 사람들이고 , 한 민족 전체가 4 천 년간 우상도 왕도 없어지도록 예언하고 명시해 왔다는 것 등은 나에게 효과적인 것으로 보인다 . 그들의 책자는 4 백 년간이나 흩어져 있었다 .

그런 책들을 탐구하면 탐구할수록 나는 거기에는 많은 진리를 발견한다 . 즉 선행한 것 뒤에 일어난 것 , 예언된 회당과 거기에 다니는 불쌍한 사람들 , 그리고 우리의 적이면서도 그들의 비참과 맹목까지도 예언하는 이들 , 예언의 진실성을 유효하게 실증하는 사람들 .

나는 이 연관이 , 이 종교가 그의 권위 ․ 기간 ․ 영속 ․ 도덕 행위의 교리와 효과에 있어서 완전히 신성함을 발견한다 . 유대인의 예언된 무서운 암흑 , Eris palpans in meridie ( 너희는 대낮에도 손으로 찾으리라 ) . Dabitur liber scienti litteras , et dicet : Non possum legere ( 한 권의 책을 문맹자에게 주려니 그는 말하기를 「 읽을 줄 모른다 」 라고 하리라 ) . 왕의 지팡이는 아직 최초의 이방인의 찬탈자의 손아귀에 있는데 예수 그리스도 강림의 복음 .

그러므로 나는 구세주에게 두 손을 내민다 . 그는 4 천 년 동안 예언되어 오다가 , 예언된 시기와 예언된 모든 사정 밑에서 나를 위해 죽고자 땅 위에 내려오셨다 . 그리고 나는 그와 영원히 결합되리라는 희망을 가지며 조용히 그의 은혜로서 죽음을 기다린다 . 그러나 이제는 그가 그의 의사에 의해 내게 주신 행복 속에서 , 혹은 그가 나의 행복을 위해 보내 주시고 또 그의 모범을 통해 인내할 것을 나에게 가르쳐 주신 불행 속에서 기쁨을 가지고 산다 .

 

738

예언은 메시아의 강림에 즈음하여 전부 일어나게 될 가지가지의 표지를 알려 놓았으므로 , 그런 표지는 모두 동시에 일어나지 않으면 안 되겠다 . 이리하여 다니엘의 70 주간이 끝나면 , 제 4 왕국이 도래하여 왕권이 유대로부터 이탈할 필요가 있었다 . 이런 모든 것은 아무런 곤란도 없이 행해졌다 . 그때 메시아가 오시게끔 되어 있었는데 ,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을 메시아라고 칭하면서 오셨다 . 이런 것도 모두 하등의 곤란 없이 행하여졌다 . 이것은 예언이 진실함을 충분히 입증한다 .

 

739

예언자들은 예언을 했지만 , 예언되어 있지는 않았다 . 다음 성도들은 예언되었지만 , 예수 그리스도는 예언되어 있었고 또 예언을 했다 .

 

740

  예수 그리스도 , 두 개의 성서는 그를 보기를 , 구약은 그 희망으로써 , 신약은 그 모범으로써 같이 중심으로 삼고 있다 .

 

741

세계 최고의 책 두 권은 모세의 것과 욥의 것이다 . 하나는 유대인 , 다른 하나는 이교도이지만 양자 공히 예수 그리스도를 그 공통의 중심 및 목적으로 본다 . 모세는 아브라함 ․ 야곱 등에 대한 신의 약속과 그의 예언을 이야기함으로써 , 욥은 Quis mihi det ut , etc. scio enim quod redemptor meus vivit , etc ( 부디 나의 말이 기록되기를 , 운운 . 나는 안다 . 나를 속죄해 주시는 이가 살리라는 것을 , 운운 ) .

 

742

복음서는 성모의 처녀성에 관해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때까지 밖에 이야기하지 않는다 . 모든 것은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련에서 .

 

743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   왜 룻기는 보존되었을까 ?

왜 타말의 이야기는 ?

 

744

「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기도하라 . 」 유혹당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

그리고 사람들이 유혹을 당하는 것은 기도를 하지 않기 때문이다 .

「 너희들 돌아간 뒤 너희의 형제들을 굳게 하라 . 」 그러나 그보다 앞서

「 예수 몸을 돌이켜서 베드로를 바라보시다 . 」

성 베드로는 마르크스를 때려 부수는 허가를 구하고 , 그 대답을 듣기 전에 이를 쳐부수시다 .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대답은 뒤에 행해진다 .

유대인의 군중이 빌라도 앞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고소했을 때 , 거의 우연히 부르짖은 「 갈릴리 」 라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를 헤롯에게 보내는 구실을 빌라도에게 주었다 . 이로 말미암아 메시아가 유대인과 이방인으로부터 심판 당한다는 신비는 이루어졌다 . 우연이 외견상 신비를 성취하는 원인이 되었던 것이다 .

 

745

신앙을 가지는 데 주저하는 사람들은 유대인이 믿지 않았다는데 그 이유를 구한다 . 왈 , 「 그것이 그렇게도 명백한 것이었다면 , 왜 그들 ( 유대인 ) 은 믿지 않았을 것인가 ? 」 라고 . 그리고 유대인이 신앙을 거절했다는 선례 때문에 자기들이 신앙에 들어감을 주저하지 않기 위해 , 유대인이 신앙했었다면 하는 생각을 갖고 있는 듯하다 . 그러나 그들의 거부야말로 우리의 신앙의 토대인 것이다 . 만약 그들이 우리 편을 들었더라면 우리는 신앙을 더한층 등한시했을 것이요 , 그러기 위하여서는 보다 더 큰 구실을 마련했을 것이다 .

유대인을 예언된 사항에 대한 열정적인 애호자로 만드심과 같이 , 그 실현의 큰 적으로 만들어 놓으신 것은 실로 놀랄 만하다 .

 

746

유대인은 크고 눈부신 기적에 습관화되어 있었다 . 그래서 홍해나 , 가나안 땅에서의 위대한 이변도 , 닥쳐올 그들의 메시아의 위대한 업적의 전조라고 생각했으므로 , 그들은 좀 더 눈부신 기적 , 즉 모세가 행했던 기적도 그 표본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보이는 기적을 대망하고 있었다 .

 

747

육체적인 유대인과 이교도는 고난에 차 있고 , 그리스도교들도 그렇다 . 이교도에게는 구세주는 존재하지 않는다 . 그들은 그런 것을 바라지도 않고 있기 때문이다 . 유대인에게도 구세주는 존재하지 않는다 . 그들은 그것을 바라고 있으나 헛된 노력이다 . 구세주는 그리스도교를 위해서만 존재한다 ( 영속성을 보라 ) .

 

748

메시아의 시대에는 백성들이 서로들 갈라져 있었다 . 영적인 인간은 메시아를 수락했으나 , 옹졸한 인간들은 메시아의 목격자로서 도움이 되었을 따름이다 .

 

749

「 만약 이것이 그렇게도 명백하게 유대인에게 예언되어 있었다면 , 어째서 그들은 그것을 믿지 않았겠는가 ? 또 그들은 그렇게도 명백한 사실을 거부해 가지고 어떻게 절멸을 당하지 않았을 것인가 ? 」 이에 대한 나의 대답은 다음과 같다 .

첫째로 , 그들이 그렇게도 명백한 사실마저 믿지 않으리라는 것과 , 그들이 절멸당하지 않으리라는 것은 다 같이 예언되어 있었다 . 그리고 이처럼 메시아의 영광이 되는 일은 없다 . 왜냐하면 예언자들이 존재했다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 그들의 예언이 의심을 받지 않고 보존됨이 필요했었기 때문에 , 그렇지만 운운 .

 

750

만약 유대인이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전부 회심되었더라면 , 우리는 의심나는 증인만을 가지고 있을 뿐일 것이다 . 또 만약 그들이 절멸되었더라면 , 우리는 증인을 한 사람도 못 가지고 있었을 터이다 .

 

751

예언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 무어라 말했던가 ? 그는 뚜렷한 신이라고 했던가 ? 아니다 . 그는 정말로 숨어 있는 신이다 . 그는 무시당할 것이다 . 이 사람이 ( 예언에 나온 ) 그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것이다 . 그는 사람을 넘어뜨리는 돌이 되고 , 많은 사람들이 거기에 걸려서 넘어지리라 운운이라고 예언되어 있다 . 그렇다면 명확성이 부족하다고 하여 우리를 책해서는 안 될 것이다 . 우리는 그것을 공언하고 있으니 말이다 .

그러나 아무래도 막연한 점이 있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 그런 것이 없었다면 누구나 예수 그리스도에 걸려 넘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 더욱이 이 막연함은 예언자들의 명백한 의도의 하나인 것이다 . Excaeca … ( 마음을 둔하게 하고 ) .

 

752

모세는 먼저 삼위일체 • 원죄 • 메시아를 가르쳐 준다 .

다윗 , 위대한 증인 , 선량하고 자애 깊은 왕 , 아름다운 영혼 , 현명하고 유능한 인물 — 그는 예언하고 그 기적을 행하는 데 , 그것은 일일이 헤아릴 수 없다 .

그에게 만약 허영심이 있었다면 자기는 메시아라고 말하기만 하면 됐을 것이다 . 그에 관한 예언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것보다 명백하기 때문이다 .

이것은 성 요한에 관해서도 마찬가지다 .

 

753

헤롯은 메시아를 믿고 있었다 . 그는 왕권을 찬탈했으나 그 자신은 유대의 출신이 아니었다 . 여기서 하나의 유력한 당파가 생겨났다 .

유대인에게 수락되었던 바르코크바 외 1 인 . 또 이 당시 도처에 유포되었던 풍설 . 수에토니우스 , 타기투스 , 요세푸스 .

메시아에 의해 왕권이 영원히 유대인의 손아귀에 남아 있고 , 또 그가 강림하자마자 왕권이 유대의 손아귀에 탈취된다고 하면 , 그는 어떤 방식으로 강림함이 좋았을 것인가 ?

보고서도 안 본 척 , 듣고서도 못들은 척하게 그들을 만들기 위해서는 이 이상의 것이 더 행해질 수가 없었을 것이다 .

시대를 3 구분하는 사람들에 대한 그리스인의 저주 .

 

754

「 너희 사람들이면서 자기를 신으로 한다 」 .

「 너희들은 신들이라 」 라고 기록되다 — 성서는 폐지할 바 아니다 .

이 병은 죽음에 인도하지 않는다 — 그러나 죽는다 .

「 라자로는 잠들었다 」 — 다음에 그는 「 라자로는 죽었다 」 라고 말한다 .

 

755

복음서의 외견상의 불일치 .

 

756

장차 일어날 일을 분명히 예언하고 사람들을 맹목하게 함과 동시에 눈을 밝게 한다는 의도를 공언하고 , 장차 일어날 명백한 일 가운데 막연한 것을 섞어 놓은 사람에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있을까 .

 

757

제 1 의 강림의 시기는 예언되었으나 제 2 의 강림의 시기는 예언되지 않는다 . 그 이유는 첫 번째 강림은 남모르게 행해질 것이었으나 , 두 번째 강림은 눈부시고 그 적마저 인지하지 아니할 수 없을 정도로 명백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 그러나 처음에는 사람의 눈에 띠지 않게 강림하고 성서는 탐구하는 사람들에 의해서는 알려질 작정이었다 .

 

758

신은 메시아를 선인에게는 인식시키고 악인에게는 인식시키지 않을 작정으로 , 그에 관한 것을 이처럼 예언시킨 것이다 . 만약 메시아가 강림하는 방식이 명백히 예언되어 있었다면 , 악인에게도 막연한 것이 없어졌을 것이다 . 또 만약 그 강림의 시기가 막연하게 예언되어 있었으면 , 선인으로서도 막연한 바가 있었을 것이다 . 왜냐하면 그들은 「 그 마음이 착하다는 것 」 만으로는 , 이를테면 봉인된 멤 「 mem 」 이 6 백년을 뜻한다는 유의 것을 이해할 수 없었을 터이기 때문이다 . 그래서 시기는 명백하게 예언되고 , 방식은 표징에 의해 예언된 것이다 .

이처럼 악인은 약속된 행복을 물질적으로 해득하여 그 시기가 명백히 예언되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갈피를 못 잡았으나 , 의인은 결코 혼미에 빠지지 않았다 . 왜냐하면 약속된 행복의 해석은 자기가 사랑하는 것을 행복으로 부르는 마음의 여하함에 달려 있으나 , 약속된 시기의 해석은 마음의 여하함에 달려 있지 않기 때문이다 . 이리하여 시기의 명백한 예언과 , 행복의 막연한 예언은 단지 악인을 속이는 데 불과하다 .

 

759

유대인 아니면 그리스도교도 중 어느 한쪽이 악인이 아니면 안 된다 .

 

760

유대인은 그를 거부하나 , 모두가 거부하는 것은 아니다 . 성도는 그를 받아들이고 , 육체적인 사람들은 그를 거부한다 . 이것은 그의 영광을 손상시키기는커녕 오히려 그 영광을 완성하는 최후의 일필이다 . 그들이 그를 거부하는 이유 , 그것도 그들의 모든 책 , 탈무드나 랍비들의 책에 발견되는 유일한 이유는 , 예수 그리스도가 무기를 손에 들고 gladium tuum potentissime ( 대장부여 , 너희 그 검을 차라 ) . 제 국민을 정복하지 않았다는 데 불과하다 . 그들은 그것 외에 또 이야기할 게 없는가 ? 그들은 말하기를 예수 그리스도는 살해됐다 . 패배했다 . 그 힘을 가지고 이교도를 정복하지 않았다 . 이교도로부터의 전리품을 자기들에게 나누어 주지 않았다 . 재물을 주지 않았다고 한다 . 그들은 그 외에 또 말할 것이 없는가 ? 바로 이 까닭으로 해서 그는 나에게 사랑스런 존재가 된다 . 그들이 바라고 있던 것 같은 메시아라면 나는 원하지 않는다 . 명백한 일은 그들로 하여금 그를 수락하게 하는 데 방해가 된 것이 바로 그의 생애라는 것이다 . 그리고 이런 거부로 말미암아 그들은 비난할 여지가 없는 증인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 한 걸음 더 나아가 그 거부로써 예언을 성취시켰던 것이다 . ( 이 민족이 그를 수락하지 않았다는 사실 때문에 다음 같은 이변이 생겼다 . 즉 예언은 사람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영속적인 기적이지만 자칫하면 거부되기 쉽다는 것이다 .)

 

761

유대인은 그가 메시아임을 인정하지 않고자 그를 살해함으로써 그에게 메시아의 최후의 증거를 제공했다 .

그리고 그를 계속 부인함으로써 그들 자신이 비난할 여지가 없는 증인이 되었다 . 그를 죽이고 , 또 계속 거부함으로써 예언을 성취시키고 말았다 ( 이사야 60 장 , 시편 71 편 ) .

 

762

그에 대적하던 유대인이 할 수 있던 바는 무엇인가 ? 그를 받아들였으면 메시아 대망의 수탁자들이 그를 수락한 셈이 되므로 그 수락 행위로 말미암아 그가 메시아임을 증명하게 되고 , 그들이 그를 거부하면 그 거부 행위로 말미암아 그를 증명하게 된다 .

 

763

유대인이 그 ( 그리스도 ) 가 신이냐 아니냐를 시험하고 그가 사람이었음을 표시했다 .

 

764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가 인간임을 부인한 사람들에게 대해서 그가 인간이었음을 표시하기 위해 , 그가 신이었음을 표시함과 동등한 정도의 고생을 했다 . 외관상으로는 쌍방이 다 유력했다 .

 

765

상반의 원천 = 십자가에 죽을 정도로 겸손하신 신 . 자기가 죽음으로써 죽음에 이겨낸 메시아 . 예수 그리스도에 있어서 두 개의 성질 , 두 개의 강림 , 인간 본성의 두 가지 상태 .

 

766

표징 = 구세주 • 아버지 • 사제 • 헌물 • 양식 • 왕 • 현자 • 입법자 • 수난 자 • 가난한 자 • 백성을 만들고 그를 양육하여 자기의 땅에 인도할 자… .

예수 그리스도 직무   그는 간택된 신성한 하나의 위대한 민족을 자기 혼자 만들고 , 그를 훈도 ․ 양육하여 맑은 휴식의 장소로 데리고 가 신 앞에서 성스럽게 만들고 , 신의 궁전으로 삼고 , 신과 화해시키고 , 신의 분노에서 구출하고 , 인심을 노골적으로 지배하는 죄의 속박에서 해방하고 , 그 백성에게 율법을 주고 , 그 율법을 그들의 마음에 새겨 주고 , 그들을 위하여 자기를 신에게 바치고 , 그들 때문에 희생이 되며 , 무구한 헌물이 되고 , 스스로 사제가 되고 , 그 자신을 즉 그의 살과 피를 바치고 , 게다가 또 빵과 포도주를 신에게 바치지 않으면 안 된다 .

lngrediens mundum ( 세상에 오다 ) .

돌 위에 돌을 .

그보다 앞선 것 , 그보다 뒤에 온 것 , 온 유대인은 존속하고 방황하고 있다 .

 

767

땅 위에 있는 모든 것 중에 그 ( 그리스도 ) 는 불쾌한 것에만 참여하고 유쾌한 것에는 참여하지 않는다 . 그는 이웃 사람을 사랑하나 그의 사랑은 그 범위 안에만 머물러 있지 않고 그의 적에게 , 나가서는 신의 적에게까지 미친다 .

 

768

요셉에 의해 표징된 예수 그리스도 . 아버지의 총애를 받고 , 아버지의 심 부름을 받아 형제들을 만나러 간다 , 등등 . 죄 없이 형제들에게 은 20 냥으로 팔리고 , 바로 그 때문에 그들의 주인 , 그들의 구세주 , 세상의 구세주로 된다 . 이런 일은 그를 없애기 위해 팔아치우고 , 배척하려던 형제들의 기도가 없었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

감옥 안에서 죄수 두 사람의 틈에 끼어 있는 죄 없는 요셉 , 십자가 위에서 도둑 두 사람 사이에 놓인 예수 그리스도 , 요셉은 같은 징조로 한 사람에게는 구원을 , 다른 한 사람에게는 죽음을 예고한다 . 예수 그리스도는 같은 죄로부터 간택된 사람에게는 구원을 , 버림받은 사람에게는 형벌을 준다 . 요셉은 예고만 할 따름이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실행한다 . 요셉은 구원될 사람을 향해서 그 사람이 영예를 차지하면 자기를 상기해 주기를 원한다 .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구원되는 사람은 그리스도가 그 왕국에 들어가실 적에 자기를 상기해 달라고 부탁한다 .

 

769

이교도들의 회심은 다만 메시아의 은총이 나타날 때까지 보류되어 있었다 . 유대인은 오랫동안 그들과 싸웠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 솔로몬과 예언자들이 그들에게 말한 것도 전부 헛된 노력이었다 . 플라톤이나 소크라테스 같은 현인들도 그들을 설득할 수는 없었다 .

 

770

미리 많은 사람들이 나타난 뒤 , 드디어 예수 그리스도는 강림해서 말하시다 . 「 나는 여기 있다 . 때는 왔다 . 예언자들이 말한 바 , 때가 오면 일어날 일은 이제 나의 사도들이 행하리라 . 유대인은 버림받고 , 예루살렘은 곧 파괴되고 , 이교도들은 신을 알게 되리라 . 너희들이 포도원의 상속자를 죽인 뒤 , 나의 사도들이 그것을 행하게 되리라 . 」

  다음에 사도들은 유대인에게 말하기를 , 너희들은 저주받으리라 ( 켈수스는 그것을 비웃었다 ) 고 했고 , 이교도들에게 말하기를 “너희들은 신을 알게 되리라”라고 말했다 . 그리고 이것은 그때에 성취했다 .

 

771

예수 그리스도가 강림하신 것은 눈이 밝은 사람을 소경으로 만들고 , 소경의 눈을 뜨게 하고 , 병자를 고치고 , 건강한 자를 죽이고 , 죄인을 회개로 인도해서 의롭게 하고 , 의인을 죄 속에 머물게 하고 , 가난한 자를 채워 주고 , 부자를 공허케 하기 위해서다 .

 

772

청정 = Effundam spiritum meum ( 나의 영을 주입하리라 ) . 만민은 불신과 사욕 속에 헤매고 있었다 . 온 땅은 사랑에 불타고 , 왕후는 그 영화를 버리고 , 소녀들은 순교의 죽음을 감수했다 . 이런 힘은 어디서 솟는가 . 그것은 메시아가 강림하셨기 때문이다 . 이것이야말로 그의 강림의 효과이며 표징인 것이다 .

 

773

예수 그리스도에 의한 유대인과 이교도의 차별철폐 , Omnes gentes Venient et adorabunt eum ( 온 백성은 신전에 와서 예배하리라 ) . Parum est ut , et ( 가벼운 일이다 , 운운 ) . Postula a me ( 나에게 구하라 ) . Adorabunt eum omnes reges ( 모든 왕은 그 앞에 엎드려 ) . Testes iniqu i ( 사악한 증인 ) . Dabit maxillam percutienti ( 나를 때리는 자에게 뺨을 돌려라 ) . Dederunt fel inescam ( 쓴 풀은 음식물로 주어라 ) .

 

774

만일을 위한 예수 그리스도 . 한 민족을 위해 모세 .

아브라함에 있어서 축복된 유대인 , 「 나는 너희를 축복하는 자를 축복 해 주리라 」 . 그러나 「 너희의 자손에 의해 온 백성 축복을 받으리라 」 . Parum est ut , etc ( 가벼운 일이다 , 운운 ) .

Lumen ad revelationem gentium ( 이방인을 비춰 주는 빛 ) .

Non fecit taliter omni nation i ( 신은 어느 나라도 이렇게 취급하시지 않았다 ) 라고 다윗은 율법에 관해 이야기했다 .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 이야기한다면 다음과 같이 말해야 한다 . Fecit taliter omni nationi ( 주는 어느 나라도 이처럼 취급하셨다 ) . Parum est ut , etc ( 가벼운 일이다 ) . 이사야 . 따라서 보편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혜택이다 . 교회도 신자를 위해 공물을 헌납하는 데 불과하다 . 예수 그리스도는 만인을 위해 십자가의 공물을 바치셨다 .

 

775

Omnes 를 늘 모두라고 해석하는 이단이 있고 , 또는 때에 따라서는 모두라고 해석치 않는 이단이 있다 . Bibite ex hoe omnes ( 너희들 모두 이제부터 마셔라 ) . 위그노는 이것을 「 모두 」 라고 해석하는 이단이다 . In quo omnes peccaverunt ( 모든 사람이 죄를 범했다 ) . 위그노는 신자의 아들을 제외하는 이단이다 . 그러므로 우리는 제각기의 경우를 알기 위해 교부들과 교회의 전통에 따라가야 한다 . 왜냐하면 무서운 이단은 어느 쪽에도 있기 때문이다 .

 

776

Ne timeas pusillus grex ( 두려워하지 말라 . 적은 무리들아 ) . — Timore et tremore ( 두려워 떨면서 ) . — Quid ergo? Ne timeas . [modo] timeas ( 그러면 어떻게 ? 너희들 두려워하라 . 두려워하지 말라 ) . 두려워하고 있다면 두려워하지 말라 . 그러나 두려워하고 있지 않다면 두려워해라 .

Qui me recipit , non me recipit sed eum qui me misit ( 나를 받아들이는 자는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 나를 남겨 놓은 자를 받아들이는 것 ) .

Nemo scit , neque Filius ( 누구도 모른다 , 애들도 모른다 ) .

Nubes lucida obumbravit ( 빛나는 구름 , 그들을 가린다 ) .

성 요한은 아버지의 마음을 아들에게 돌릴 작정이었고 , 예수 그리스도는 분쟁을 자아내신다 — 이것들은 모순되지 않는다 .

 

777

In communi ( 일반적 ) 사실과 particulari ( 특수적 ) 사실 , 반 펠라기우스파가 특수적으로만 진실인 것은 일반적이라고 주장하는 점이 잘못이다 . 또 칼빈주의자가 일반적으로 진실인 것은 특수적이라고 주장하는 점이 잘못이라고 ( 나는 생각한다 ) .

 

778

Qmnis Judaeu regio, er Jerosolomytae universi, et bapt - izabantur ( 유대 전국 , 그리고 예루살렘 사람들 모두 바브티스마를 받았다 ) . 모든 신분의 사람들이 거기 모였기 때문에 .

이런 돌들도 아브라함의 아들이 될 수 있다 .

 

779

인간이 자신을 알고 있었으면 , 신은 치료하고 용서해 주셨으리라 . Ne convertantur et sanem eos 이사야 , et dimittantur eis peccata . 마르코복음 3 장 ( 뒤돌아 와서 치유되고 죄가 용서되지 않기 위해 ) .

 

780

예수 그리스도는 묻지 않고 정죄하는 법은 없었다 . 유다에게 Amice, ad quid venisti ? ( 벗이여 , 무엇하러 왔는가 ?) 혼례복을 입지 않던 사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

 

781

속죄의 전체성의 표징은 태양이 만물을 비치는 것처럼 전체를 표시할 뿐이다 . 그러나 제외성의 ( 표징 ) 은 이방인을 제외하고 유대인을 선정한 것처럼 제외를 표시한다 .

「 만인의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 」 — 그렇다 . 왜냐하면 그는 그 밑에 오기를 원하는 모든 사람들을 속한 사람으로서 속죄해 주기 때문이다 . 도중에서 죽은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죽는 사람들의 불행이다 . 그러나 그의 편으로 말한다면 그는 그들을 속죄해 준 셈이다 — 과연 그런 예는 속죄하는 사람과 죽음을 막는 사람이 다른 사람인 경우에는 타당하다 . 그러나 양자는 겸한 예수 그리스도의 경우에는 타당치 않다 — 아니 그렇지도 않다 . 예수 그리스도는 아마 구세주의 이름으로서 만인의 주가 되어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 따라서 그는 그 자신에 있어서 만인의 구세주인 것이다 ,

예수 그리스도가 만인을 위해 죽은 것이 아니라고 말하면 , 너희들은 그 예의를 곧 자기에게 적용하는 인간에 있기 쉬운 병폐에 빠진다 . 그것은 인간의 희망을 강하게 하는 대신 절망을 가승해 준다 . 왜냐하면 사람은 그렇게 함으로써 외적 습관을 통해 내적인 덕에 익숙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

 

782

죽음에 대한 승리 , 「 사람이 전 세계를 얻게 된다 하더라도 , 자기의 목숨을 잃어버리면 무슨 유익이 있겠는가 ! 자기의 목숨을 보호하려는 자는 이를 상실하게 되리라 」 .

「 내가 온 것은 율법을 깨뜨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 오히려 성취하기 위해서다 . 」

「 새끼양은 세상의 죄를 제거하지 않았다 . 그러나 나는 죄를 제거하는 새끼양이다 . 」

「 모세는 하늘로부터의 빵을 너희들에게 주지 않았다 . 모세는 포로로부터 너희들을 해방시키지 않았고 , 너희들을 정말 자유로운 사람으로 만들지 못했다 . 」

 

783

그때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사 아래와 같이 말씀하시다 . 너희들은 너희들 자신 외에 적을 갖고 있지 않다 . 너희들을 신으로부터 떼어 놓는 것은 너희들의 정욕이다 . 나는 그런 정욕을 때려 부수고 나의 은혜를 너희들에게 나누어 주려고 왔다 . 그것은 너희들 전부가 가지고 , 하나의 신성한 교회를 만들기 위해서다 . 나는 그 교회에 이교도와 유대인을 끌어들이기 위하여 왔다 . 이교도의 우상과 유대인의 미신을 깨뜨리기 위해 온 것이라고 . 이런 말에 대해 모든 사람이 반항한다 . 그것은 단지 사욕의 자유스러운 반항에 의해서가 아니다 . 그 가운데서도 땅 위에 왕들은 이미 예언되어 있는 바 , 이제 갓난 이 종교를 멸망시키고자 야합한다 . 예언 , Quare fremerunt gentes … reges terrae … adversus Christum ( 왜 여러 국민은 소동을 일으키고…땅 위의 왕들은 그리스도에 반항하고 ) .

땅 위의 모든 위대한 자 , 학자 ․ 지식인 ․ 왕들이 서로를 결합한다 . 학자는 기록하고 , 지식인은 심판하고 , 왕자는 사형에 처한다 . 그러나 그 모든 반항에도 불구하고 , 이 단순하고도 무력한 사람들은 그런 일체의 권력에 항쟁하고 , 왕 • 학자 • 지식인들마저 굴복시키고 우상숭배를 온 땅에서 일소한다 . 그리고 이것은 전부 이를 예언한 힘에 의해 행해지는 것이다 .

 

784

예수 그리스도는 마귀의 증언이나 신에게 소명되지 않은 자의 증언을 바라지 않고 , 다만 신과 세례 요한의 증언을 바라셨다 .

 

785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모든 사람들 속에 , 그리고 우리 자신 속에 바라본다 . 사람의 아버지 속에 아버지로서의 예수 그리스도 , 사람의 형제 속에 형제로서의 예수 그리스도 , 가난한 사람 속에 가난한 가람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 , 부자 속에 부자로서의 예수 그리스도 , 사제 속에 박사 및 사제로서의 예수 그리스도 , 왕후 속에서 주권자로서의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처럼 . 왜냐하면 그는 신이기 때문이다 . 그 영광에 있어서는 위대한 것 일체이고 , 그 죽어야 할 생명에 있어서는 가난하고 비천한 것 일체이기 때문이다 . 그는 모든 인간에 있어서 모든 상태의 모델이 될 수 있게 하고자 불행한 상태를 택하신 것이다 .

 

786

예수 그리스도의 미천함은 ( 세속적 뜻에서의 미천함인데 ) 국가의 중대사만 기록하는 사가들이 그를 인정치 않았을 정도였다 .

 

787

요세푸스도 타키투스도 , 기타의 사가들도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는 데 대해   이것은 반증이 아니라 오히려 확증이 된다 . 그도 그럴 것이 예수 그리스도가 실재했다는 것 , 그의 종교가 크게 평판이 된다는 것 , 이 사람들이 그에 관해 무지하지 않았음은 확실하고 , 따라서 그들이 고의로 그것을 숨기고 있었던가 , 또는 말하기는 말했는데 금지 내지 개작되었음이 명백하니까 말이다 .

 

788

「 나는 7 천 명을 남겼다 . 」 세상에 알려지지 않고 예언자들에게도 알려지지 않았던 예배자들을 나는 사랑한다 .

 

789

예수 그리스도가 사람들 사이에 알려지지 않고 남아 있었던 것처럼 , 그의 진리도 보통의 의견들 가운데 외관상으로는 아무런 차도 없이 남아 있다 . 마찬가지로 성체도 보통의 빵 속에 남아 있다 .

 

790

예수 그리스도는 재판의 형식을 밟지 않고 살해당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 왜냐하면 재판을 받고 살해당하는 것이 부정한 소동에 의해 살해되는 것보다 훨씬 치욕적이기 때문이다 .

 

791

빌라도의 거짓 정의는 예수 그리스도를 한층 더 고민하게 했을 따름이다 . 왜냐하면 그는 그 거짓 정의를 이유로 그리스도를 구타하게 하고 다음에는 죽였기 때문이다 . 이것은 차라리 단숨에 죽이는 편이 나았을 것이다 . 거짓 의인들도 그와 마찬가지다 . 그들은 세상 사람을 기쁘게 하기 위해 , 또 예수 그리스도를 부끄러워했으므로 전혀 그의 편이 아님을 표시하기 위해 선한 일도 하고 , 악한 짓도 한다 . 그리고서는 나중에 큰 유혹이나 기회가 오면 그를 죽이고 만다 .

 

792

어느 누가 그처럼 광채를 내었을까 ? 유대 민족이 그의 강림에 앞서 전체로서 그를 예언한다 . 이방인이 그의 강림 뒤에 그를 예배한다 . 이방인과 유대인의 두 백성이 그를 그들의 중심이라고 인정한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처럼 이 광채를 누리지 않았던 이가 있었을까 ?

33 년 중 30 년간은 눈에 띄지 않고 세월을 보낸다 . 3 년간은 사기꾼으로서 취급된다 . 사제와 장로는 그를 거부하고 , 벗과 근친들은 그를 경멸한다 . 나중에는 그의 동무 중 한 사람에게 배반당하고 , 다른 한 사람에게 부인되고 , 모든 사람에게 버림받고 죽게 된다 .

그렇다면 그는 광채에 얼마나 덕을 보았는가 ? 이처럼 큰 광채를 얻은 이도 없었지만 , 이처럼 많은 치욕을 받은 이도 없다 . 이런 모든 광채는 그를 우리에게 알리기 위해 우리에게 도움을 준 데 지나지 않는다 . 그는 자신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취한 바 없었다 .

 

793

신체와 정신 사이에 무한한 거리는 , 정신에서 사랑에의 무한대로 무한한 거리에 흡사하다 . 왜냐하면 사랑은 초자연이기 때문이다 .

이 세상의 위대한 것들의 모든 광채는 정신의 탐구에 종사하는 사람들에게는 빛을 잃는다 .

정신적인 인간들의 위대함은 왕자 • 부자 • 장군 , 그리고 육체에 있어서 위대한 모든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는다 .

신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면 무라고나 할 지혜의 위대함은 육체적인 사람들에게도 정신적인 사람들에게도 보이지 않는다 . 이것들이 종류를 달리하는 3 개의 질서이다 .

위대한 천재들은 그들의 권력 , 그들의 광휘 , 그들의 위대 , 그들의 승리 , 그들의 광채를 가지고 있으므로 육체적 내지 정신적인 위대를 조금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 그들의 위대는 육체적 내지 정신적 위대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 . 그것들에게 플러스를 주는 바도 없고 , 마이너스를 주는 바도 없기 때문이다 . 성도들의 위대함은 신과 천사에게는 보이지만 , 신체와 호기적인 정신으로부터는 보이지 않는다 . 그것은 신만으로서 충분한 것이다 .

아르키메데스는 이 세상의 광휘가 없더라도 마찬가지로 존경받았을 것이다 . 그는 눈에 보이는 전쟁을 하지 않았다 . 그러나 모든 정신적인 사람들에게 그의 창작을 제공했다 . 오호 ! 그는 정신적인 사람들에 대해서는 얼마나 광휘를 던져 주었던 것인가 !

예수 그리스도는 재산도 없고 , 학문의 대의적인 업적도 없고 , 그 맑은 질서 속에 계시다 . 그는 창조를 제공해 주지 않았고 지배도 하지 않았다 . 그러나 겸손하고 , 인내 깊고 청정해서 신에 대해서는 깨끗하고 , 악마에 대해서는 무서웠고 , 아무런 죄도 없었다 . 오호 ! 지혜를 내다보는 심정의 눈을 가진 사람들에 대해서 그는 얼마나 위대한 장엄성과 훌륭한 호화로움을 가지고 강림하셨던 것인가 !

아르키메데스로서는 그 기하학의 책에서 왕자처럼 행세한다는 것은 , 가령 그가 왕후였다 하더라도 무용했을 것이다 .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서도 그 맑은 세계에서 빛나기 위해 왕자로서 강림한다는 것은 무용했을 것이다 . 그러나 그는 그의 질서에 알맞은 광채를 가지고 오셨던 것이다 .

예수 그리스도의 비천을 그가 강림해서 나타내려고 하시던 위대함과 같은 질서에 속하는 것으로 욕설한다는 것은 웃음거리이다 . 이 위대함을 그의 생애와 그의 고난과 그의 미천함과 그의 죽음과 제자들의 선정과 그들로 부터의 버림받음과 그의 비밀리의 부활 등에 찾아보도록 하라 . 사람들은 그것이 얼마나 위대한가를 알고 , 거기에 찾아볼 수도 없는 비천을 가지고 비난의 자료로 삼지는 못할 것이다 .

그러나 세상에는 정신적인 위대성은 마치 없기나 하는 것처럼 육체적인 위대함에만 감복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고 , 또 지혜가운데 더 한층 무한히 높은 것은 없기나 하는 것처럼 정신적인 거에 대해서만 감복하는 사람들도 있다 .

모든 물체 , 즉 하늘 • 성신 • 대지 • 그 왕국 등은 정신의 가장 작은 것에도 견줄 바 아니다 . 왜냐하면 정신은 그들 일체와 자기를 인식하나 , 물체는 아무것도 인식치 못하는 까닭이다 .

모든 물체의 총화도 , 모든 정신의 총화도 , 또 그것들의 모든 업적도 , 사람의 가장 작은 동작에도 미치지 못한다 . 사랑은 무한히 높은 질서에 속하는 것이다 .

모든 물체의 총화로부터도 조그마한 사고를 발생시킬 수 없다 . 그것은 불가능하다 . 그리고 다른 질서에 속하기 때문이다 . 모든 물체와 정신으로 부터도 사람은 참다운 사랑의 한 동작도 끄집어 낼 수 없다 . 그것은 불가능하다 . 그리고 다른 초자연적인 질서에 속하는 까닭이다 .

 

794

어찌하여 예수 그리스도는 그 이전의 예언에서 자기의 증거를 끄집어내는 대신 좀 더 눈에 띄는 방식으로 강림하시지 않았을까 ? 어찌하여 그는 표징에 의해서만 예언시켰을 것인가 ?

 

795

만약 예수 그리스도가 성화를 위해서만 강림하셨다면 모든 성서 및 일체의 일들은 그 목적을 향해 있었을 터이고 , 불신자의 설득은 매우 용 이했을 것이다 . 만약 예수 그리스도가 맹목적으로 하기 위해서만 강림 하 셨다면 그의 온갖 행위는 혼란했을 것이고 , 우리는 불신자를 설득할 방 법을 몰랐을 것이다 . 그러나 그는 이사야도 말한 바이지만 , In sanctificationem et in scaudalum ( 맑은 피정처가 되고 걸려 채는 돌이 되기 ) 위해 강림하셨으므로 우리는 불신자를 설득할 수가 없고 , 그들도 우리를 설득할 수 없다 . 그러나 이 사실 그 자체에 의해 우리는 그들을 설득한다 . 왜냐하면 그의 온갖 행위에는 어느 쪽에도 확신을 주는 것은 없다고 우리는 말함이니 .

 

796

예수 그리스도는 악인을 소경으로 남겨 두기 위해 자기는 나사렛 출신이 아니라고 말하지 않고 , 요셉의 아들이 아니라고 말하지도 않는다 .

 

797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 = 예수 그리스도는 큰일이라도 마치 그것을 대단한 것으로 생각해 본 적이 없는 것처럼 단순히 말씀했으나 , 자기의 생각이 남에게 곧 납득되도록 명료하게 말씀하셨다 . 이 소박함과 이 명철함의 결합은 놀라운 일이다 .

 

798

복음서의 문체는 여러 가지 점으로 놀라운 바 있다 . 예수 그리스도의 처형자나 , 적에 대해 아무런 욕설도 퍼붓지 않는 점에 있어서 그렇다 . 어느 복음사가도 유다나 빌라도나 기타의 유대인에 대해 그런 욕설을 퍼붓지 않았다 .

만약 복음사가들의 이런 겸손이 극히 우수한 특질을 가진 다른 많은 필치와 아울러 허식적인 것이고 , 또 단순히 주의를 끌기 위한 허식이었다고 하면 , 가령 그들 자신을 감히 거기에 유의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그런 점을 그들의 장점이라고 인정해 주는 벗을 얻는 데는 부족함이 없었을 것이다 . 그러나 그들은 그런 허식을 한 것이 아니고 완전히 사심없는 동기로 움직였으므로 , 그런 점을 누구에게도 지적받지 않았다 . 그리고 내 생각으로는 이런 것들의 대다수는 여태껏 전혀 주목되지 않고 있었으나 이것이야말로 붓대날림이 얼마나 냉정했었던가를 입증해 주는 것이다 .

 

799

부에 관해 이야기하는 직공 , 전쟁 • 왕위 등에 관해 이야기하는 대변인 . 그러나 부자는 부에 관해 잘 이야기하고 , 왕은 부여된 대로 큰 선물에 관해 냉정히 이야기하고 , 신은 신에 관해 잘 이야기한다 .

 

800

누가 완전히 영웅적인 넋이 특성을 복음기자들에게 가르쳐 주고 , 그것을 예수 그리스도를 묘사함에 있어 이렇게도 완전히 발휘시켜 주었을까 ? 왜 그들은 최후의 고민 속에 있는 그를 이렇게도 약하게 묘사했을까 ? 그들은 조용한 죽음을 그릴 수가 없었을까 ? 아니다 . 왜냐하면 같은 성 루가는 성 스테파노의 죽음을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보다 웅장하게 그려 놓았기 때문이다 .

그러므로 그들은 그를 죽음의 필연이 도래하기까지는 두려움을 알 수 있는 자로서 , 또 그 뒤에는 완전히 강한 자로서 그려 놓은 것이다 .

그러나 그들이 그를 고뇌하는 자로서 묘사할 적에는 그가 자진하여 고뇌할 때이다 . 사람들이 그를 고뇌에 빠뜨릴 때에 그는 가장 강한 것이다 .

 

801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 = 사도사기사설 ( 使徒詐欺師說 ) 은 전혀 불합리하다 . 이 설을 깊이 따져보라 . 이 열 두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 죽은 뒤 모여서 그가 부활했다는 설을 퍼뜨리자는 계략을 꾸몄다고 상상하자 . 그들은 이 때문에 모든 권력과 항쟁한다 . 인간의 마음이란 기묘하게도 경솔 • 변화 • 예측 • 재산 등에 기울여지기 쉬운 것이다 . 만약 이 사람들 중 한분이 그런 유혹을 받아 , 또는 그 이상 더 나가 감옥이나 고문이나 죽음에 의해 조금이라도 자기를 배반하게 됐다면 그들은 멸망했을 것이다 . 이것을 깊이 생각해 보라 .

 

802

사도들이 사기를 했느냐 , 사기를 당했느냐 , 그 어느 편인가를 말하기는 매우 어렵다 . 왜냐하면 어떤 사람이 부활했다는 운운으로 생각함은 불가능한 일이니 .

예수 그리스도는 사도들과 같이 계신 동안은 그들을 지지하실 수 있었다 . 그러나 그 뒤에 만약 그가 그들 앞에 나타나시지 않았다면 누가 그들을 활동시켰을 것인가 ?

 

 

 

 

  

제 13 편 기 적

 

 

803

발단 = 기적은 교리를 식별하고 , 교리는 기적을 식별한다 .

허위의 것과 진실한 것이 있다 . 그것들을 알기 위해서는 하나의 지표가 있어야만 한다 . 그렇지 않으면 기적은 무익한 것이 되고 만다 . 그런데 기적은 무익이 아닐 뿐 아니라 오히려 기본인 것이다 . 우리에게 주어진 기준은 모든 기적의 주요한 목적인 진리에 관해 진짜 기적이 행하는 증명을 파괴하지 않는 것이어야 한다 .

모세는 그런 기준을 두 가지 제공해 주었다 . 예언이 성취하지 않는 경우 , 즉 신명기 18 장과 기적이 우상숭배로 인도하지 않는 경우 , 즉 신명기 13 장이다 .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를 제공해 주었다 .

만약 교리가 기적을 규정한다고 하면 기적은 교리에게는 무익하게 된 다 .

만약 기적이 규정한다고 하면… .

기준에 항의 = 시대의 구분 . 하나의 기준은 모세가 살아 있을 때 , 다른 하나의 기준은 현대 .

 

804

기적 = 기적은 그 수단으로써 사용되는 자연의 힘 이상의 작용이다 . 또 사이비 기적은 그 수단으로 사용되는 자연의 힘 이하의 작용이다 . 따라서 악마를 불러다가 병을 고치는 사람은 기적을 행하고 있는 것이 아 니다 . 그것은 악마의 자연의 힘을 넘지 못한 것이기 때문이다 . 그러나… .

 

805

두 개의 기초 , 하나는 내적 , 다른 하나는 외적 . 은총과 기적 . 어느 편이나 초자연적 .

 

806

기적과 진리는 필요하다 . 인간 전체의 몸과 정신을 설득해야 하므로 .

 

807

어느 시대에도 인간이 진짜 신에 관해 이야기를 했든가 , 혹은 진짜 신이 인간을 향해 이야기를 했든가 둘 중 하나다 .

 

808

예수 그리스도 는 자기가 메시아임을 확증하는데 , 그의 교리를 성서나 예언에 의해 확증하지 않고 기적에 의해 확증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

그는 자기가 죄를 용서할 수 있음을 기적에 의해 증명한다 .

「 너희의 기적을 기뻐하지 말라 . 너희들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되어 있음을 기뻐하라 」 라고 예수 그리스도는 말씀하시다 .

「 만약 그들이 모세를 믿지 않는다면 죽음에서 소생한 자도 믿지 않을 것이다 . 」

니고데모는 그 ( 그리스도 ) 의 기적에 의해 그의 교리가 신으로부터 나온 것임을 인정했다 . 「 스승이시여 , 나는 그대가 신으로부터 왔음을 안다 . 신이 만약 같이 계시지 않는다면 그대가 행하시는 이런 표징은 누구도 할 수 없는 것이다 . 」 그는 교리에 의해 기적을 판정하지 않고 기적에 의해 교리를 판정했다 .

유대인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교리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신의 교리를 가지고 있었는데 , 그것은 기적에 의해 확증되어 있었다 . 그들은 일체의 기적을 행하는 자를 믿지 말도록 금지당하고 , 게다가 대사제들의 조언을 구하고 , 그들에게 의뢰하게끔 명령받고 있었다 .

그러므로 우리가 기적을 행하는 자를 믿기를 거부하기 위해서 가지고 있는 모든 이유를 , 그들은 그들의 예언자들에 대해서 가지고 있었던 셈이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예언자들을 그 기적 때문에 거부하고 , 또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한 것은 대단히 죄가 깊은 일이었다 . Nisi fecissem … , peccatum non haberent ( 내가 만약 행하지 않았더라면… 그들에게는 죄가 없었으리라 ). 그러므로 신앙은 모두 기적 위에 있는 것이다 .

예언은 기적이라고는 할 수 없다 . 예를 들면 성 요한은 가나에서의 제 1 의 기적에 관해 말하고 , 다음에 예수 그리스도가 사마리아 여자의 숨긴 생애를 폭로했을 적에 사용된 말을 기록하고 , 그리고 백부장의 아들을 고치신 것을 기술했는데 , 성 요한은 이 치유를 제 2 의 표징이라고 말하고 있다 .

 

809

기적의 결합 .

 

810

제 2 의 기적은 제 1 의 기적을 상정시킬는지 모른다 . 그러나 제 1 의 기적은 제 2 의 기적을 상정시킬 수 없다 .

 

811

기적이 없다면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서 죄를 범하게 되지 않았을 것이다 .

 

812

기적이 없었더라면 나는 그리스도교도가 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말했다 .

 

813

기적 = 기적을 의심하게 하는 사람들을 나는 얼마나 미워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 몽테뉴는 그에 관해서 두 곳에서 정당한 말을 하고 있다 . 한 곳에서는 그는 매우 신중하다 . 그러나 다른 한 곳에서는 그는 믿으면서 불신자를 비웃고 있다 .

그것은 고사하고 , 교회는 그것들이 도리에 합당한가 , 합당하지 않는가에 관한 증거를 가지고 있지 않다 .

 

814

기적을 부정하는 몽테뉴 .

기적을 긍정하는 몽테뉴 .

 

815

기적에 반대하고 합리적으로 믿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

 

816

가장 경솔한 불신자 . 그들은 모세의 기적을 믿지 않으려고 베스파시아누스의 기적을 믿는다 .

 

817

제목 = 사람이 기적을 보았다고 칭하는 여러 거짓말쟁이를 믿고 인간을 죽지 않게 하고 또는 젊어지게 하는 비결을 알고 있다고 칭하는 거짓말쟁이를 믿지 않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 사람이 묘약을 가지고 있다고 칭하는 여러 거짓말쟁이들에게 대단한 신뢰를 보이고 , 가끔 자기를 생명까지를 그들의 손에 위임하게 된다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를 생각해 보고서 , 내가 알게 된 것은 세상에 진정한 약이 있다는 것이 그 진짜 이유라는 것이었다 . 진짜가 없다면 가짜가 그렇게도 많을 이유가 없겠고 , 또 가짜를 그렇게 신용한다는 것도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 만약 병에 대해 아무런 약도 없고 , 또 모든 병이 낫지 못하는 것이라면 사람들이 그런 약이 제공되리라고 생각하지 않을 터이고 , 하물며 그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약을 가지고 있다고 자만하는 사람들을 신용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 이와 마찬가지고 어떤 이가 죽음을 막아낼 수 있다고 자만했다 하더라도 그런 예는 하나도 없으니 누구나 정말로 여기지 않을 것이다 . 그러나 세상에는 저명한 인사들이 그 밝은 신견을 가지고 진리라고 증명한 약이 상당히 많았으므로 사람들은 그것을 신용하는 습성을 가지게 되고 , 어떤 것이 있을 수 있는 일임을 알게 되면 있었던 것으로 단정한다 . 왜냐하면 민중들은 보통 다음과 같이 추리한다 . 「 어떤 일을 있을 수 있다 . 그러므로 그것은 존재한다 」 라고 — 그도 그럴 것이 개개의 효과가 진실한 이상 그것을 전적으로 부정할 수는 없으므로 개개의 작용 중 어느 것이 진실인가를 식별할 수 없는 민중은 전부를 믿어 버리기 때문이다 . 이와 마찬가지로 사람들이 달의 작용에 관해 많은 허위를 믿고 있음은 그 중에는 진실한 것 , 이를테면 만조와 같이 진실한 것이 있기 때문이다 .

이것은 예언 • 기적 • 해몽 • 마술 , 기타에 관해서도 마찬가지다 . 만약 이것들 중에 진실한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다 한다면 사람들은 그것들을 전혀 믿지 않았을 것이다 . 따라서 세상에는 허위의 기적이 많으니 진실한 기적은 없다고 결론하지 않고 , 그와 반대로 거짓 기적이 많이 있는 이상 기적이 진짜 있는 것은 확실하다고 말해야 하며 , 진짜 것이 있으니 가짜 것도 있는 것이라고 말해야 한다 . 종교에 관해서도 이와 마찬가지로 추론해야 한다 . 참다운 종교가 없었더라면 사람이 거짓 종교를 많이 생각해 낼 수는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항의로 야만인도 모종의 종교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들 수 있다 . 그러나 거기에 대해서는 그들이 대 홍수 • 할례 • 성 안드레의 십자가 등에 의해 엿볼 수 있는 것처럼 , 진짜 종교에 대한 이야기를 엿볼 수 있는 것처럼 , 진짜 종교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기 때문이라고 대답해 둔다 .

 

818

세상에 거짓 기적 , 거짓 계시 , 거짓 마술이 많은 것은 무엇 때문인가를 생각해 본 결과 , 그 진짜 원인은 속된 것들 속에 진실한 것이 있기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 왜냐하면 진짜 기적이 없었더라면 가짜 기적이 있을 리 없고 , 진짜 계시가 없었다면 가짜 계시가 있을 리 없고 , 진짜 종교가 하나도 없었다면 가짜 종교가 많이 있을 리도 없기 때문이다 . 그런 진짜가 전무하다면 사람이 그것들을 생각해 낸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하물며 다른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믿는다는 것은 더욱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 그런데 세상에는 참으로 위대한 진짜가 있고 , 또 그것들이 저명한 사람들에 의해 믿어져 왔으므로 이 인상이 거의 모든 사람들에게 가짜도 믿게 한 원인이 된 것이다 . 따라서 허위의 기적이 많으므로 진실한 기적은 없다고 결론하는 대신 , 오히려 그 반대로 가짜가 많으므로 진짜 기적이 있고 , 진짜가 있는 까닭으로 가짜도 있고 , 또 이와 마찬가지로 진짜 종교가 있는 까닭으로 가짜 종교도 있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 이런 주장에 대한 항의 , 야만인도 종교를 가지고 있지 않느냐고 . 그러나 그것은 성 안드레 • 대홍수 • 할례 등을 통해 알 수 있는바 그들이 진짜 종교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 이것은 인간의 정신이 진리에 이끌리어 그 방향으로 기울어지는 습성이 형성되고 , 거기서 이…의 모든 거짓을 받아들이기 쉽게 되었기 때문이다 .

 

819

예레미야 23 장 32 절 , 거짓 예언자들의 기적 , 히브리어와 바타블 번역본 ( 라틴어 성서 ) 에는 경솔함이 있다 .

기적이란 말은 반드시 기적을 뜻하지 않는다 . 사무엘 전서 14 장 15 절에서는 기적은 두려움을 뜻하고 히브리어에서도 그렇다 . 욥기 33 장 7 절도 이와 마찬가지다 . 이사야 21 장 4 절 , 예레미야 44 장 13 절도 같다 . Portentum ( 징조 ․ 기적 ) 은 Simulacrum ( 모습 , 현상 ) 을 뜻한다 . 예레미야 50 장 38 절 , 그리고 히브리어에서도 바타블 번역본에서도 그렇다 . 이사야 8 장 18 절에 예수 그리스도 가라사대 , 그와 그 제자들은 기적으로서 존재하리라고 .

 

820

만약 악마가 자기를 파멸시키는 설교에 가담한다면 악마는 분열할 것이라고 예수 그리스도는 말씀하시다 . 만약 신이 교회를 파괴하는 설교의 편을 들으신다면 신은 분열할 것이다 . Omne regnum divisium ( 갈라져 싸우는 모든 나라들 ) . 예수 그리스도는 신의 나라를 세우기 위해 악마와 항쟁하고 , 인심에 미치는 악마의 힘을 파괴하신 것이어서 악마를 내 쫓는 것은 그 표징이다 . 그래서 그는 다음과 같이 덧붙여 말씀하시다 . 「 만약 신의 손에 의해서…신의 나라는 너희들에게 . 」

 

821

시험하는 것과 오류로 인도하는 것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 신은 인간을 시험하시나 오류로 이끄시지는 않는다 . 시험이라 함은 인간이 신을 사랑하지 않으면 어떤 일을 할 것으로 생각되는 것 같은 , 반드시 그렇게 하지 않아도 무방한 기회를 준다는 뜻이다 . 오류로 이끈다 함은 , 사람들은 반드시 허위로 인도하여 가고 , 거기에 따라가지 않을 수 없도록 한다는 뜻이다 .

 

822

아브라함 기드온 계시 이상의 표징 . 유대인은 기적을 성서에 의해 판단하고 소경이 됐다 . 신은 참다운 예배자들을 결코 버리시지 않았다 .

나는 다른 누구보다도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가고 싶다 . 그에게는 기적 • 예언 • 교리 • 영속성 등이 있기 때문이다 . 도나티스트 . 이것은 악마의 탓이라고 말해야 할 기적이 하나도 없다 . 신 • 예수 그리스도 • 교회를 한정하면 할수록… .

 

823

거짓 기적이 없었더라면 확실성이 있었을 것이다 . 그것들을 식별할 시준이 없었더라면 기적은 무익하고 그것들을 믿을 이유도 없었을 것이 다 .

하지만 인간적으로 말하면 인간적인 확실성이란 없고 오직 이성이 있을 따름이다 .

 

824

신은 거짓 기적을 혼란시키든가 , 혹은 그것들을 예고하시든가 둘 중의 하나였다 . 그리고 그 어느 것에 의해서도 신은 우리의 척도로서 초자연적인 것 이상으로 자신을 높이시고 , 우리들도 거기까지 높여 주셨다 .

 

825

기적은 회심시키는 데도 도움을 주지 않으나 , 정죄하는 데는 도움을 준다 (Q.113, A.10, Ad.2) .

 

826

사람들이 믿지 않는 이유 = 요한복음 12 장 37 절 , 이처럼 많은 표징을 보여주셨는데도 불구하고 그를 믿지 않았다 . 이것은 이사야의 말이 성취되기 위해서이다 . 그들의 눈을 어둡게 하고 , 운운 .

「 이사야가 이렇게 말한 것은 예수의 영광을 보았기 때문이고 그를 가리켜 이야기한 것이다 」 .

「 유대인은 표징을 요구하고 , 그리스인은 지혜를 요구한다 . 그러나 우리들은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를 구한다 . 」 그러나 넉넉한 표징이 있고 지혜가 있다 . 너희들이 바라고 있는 것은 십자가에 못 박히지 않은 그리스도 , 기적도 없는 종교이다 .

사람들이 진짜 기적을 믿지 않는 것은 사랑이 모자라는 까닭이다 . 요 한복음 . 「 그렇지만 너희들은 믿지 않았다 . 내 양이 아니기 때문이다 . 」 거짓 기적을 믿는 것은 사랑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 데살로니가 후서 2 장 .

종교의 기준 . 그것은 기적이다 . 그렇다면 ? 신은 기적에 어긋나는 것을 이야기하고 , 사람들이 신에 대해 가지고 있는 신앙의 기초에 어긋나는 것을 이야기하실까 ?

만약 하나의 신이 존재한다면 , 신에의 신앙은 땅위에 존재할 것임에 틀림없다 .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기적은 거짓 그리스도에 의해서 예언되어 있지 않았지만 , 거짓 그리스도의 기적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예언된 바 있다 .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가 메시아가 아니었다면 그는 틀림없이 사람을 오류로 이끌어 갔을 터이나 , 거짓 그리스도가 오류에 이끈다는 것은 도저히 있을 수 없다 . 예수 그리스도가 거짓 그리스도의 기적에 관해 예언했을 적에 그는 자기의 기적에 대한 사람들의 신앙을 파괴할 생각이었을까 ?

모세는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것에 예언하고 , 그에 순종할 것을 명령했다 . 예수 그리스도는 거짓 그리스도에 관한 것을 예언하고 그에의 순종을 금했다 .

모세의 시대에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던 거짓 그리스도에의 신앙을 가진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 그러나 거짓 그리스도의 시대에는 이미 알려져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매우 용이하다 .

거짓 그리스도를 믿는 이유로서 ,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이유가 되지 않는 것은 하나도 없다 .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이유 중에는 거짓 그리스도를 믿는 이유가 되지 않는 것이 허다하다 .

 

827

사사기 13 장 23 절 , 「 주가 우리를 죽이고자 하셨다면 이런 모든 일을 우리에게 표시하지 않았을 것이다 」 .

히스기야 산헤립 .

예레미야 , 거짓 예언자 하나니야는 7 월에 죽었다 .

마카베오 제 2 서 3 장 , 바야흐로 약탈되려던 신전이 기적적으로 구원되었다 — 마카베오 제 2 서 15 장 .

열왕기상 17 장 , 과부가 그 아들을 소생시킨 엘리야에 향해 , 「 이로 말미암아 너희의 말이 진실함을 안다 」 .

열왕기상 18 장 , 엘리야와 바알의 예언자들 .

진짜 신이니 종교의 진리에 관한 논쟁에 있어서 오류가 있는 측 , 진리가 아닌 측에 기적이 일어난 예는 절대로 없다 .

 

828

논쟁 = 아벨과 카인 , 모세와 마술사 , 엘리야와 거짓 예언자 , 예레미야와 하나니야 , 미가와 거짓 예언자 , 예수 그리스도와 바리새인 , 성 바오로와 바르예수 , 사도와 주술사 , 그리스도교도와 불신자 , 가톨릭과 이단자 , 엘리야 , 에녹와 거짓 그리스도 , 진짜는 아무 때나 기적에 의해서 이긴다 . 두 개의 십자가 .

 

829

예수 그리스도는 , 성서가 자기에 대해 증언을 해 준 것이라고 말씀하셨으나 , 그것이 어떤 점인가는 지적하지 않았다 .

예언도 예수 그리스도를 그 존재 중에 증명할 수 없었다 . 따라서 기적이 있으면 교리가 없어도 충분했다는 것이 아니라면 , 사람들이 그 생전에 믿지 않더라도 죄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 그런데 그를 그 존재 중에 믿지 않았던 사람들이 죄인이었음은 그 자신이 언명한 바로써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 그렇다면 그들은 하나의 확증을 부여하면서도 그에 반항한 것이다 . 그런데 그들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서를 가지고 있지 않고 , 오직 기적만을 가지고 있었을 따름이다 . 그러므로 기적은 교리에 어긋나지 않는 한충분한 것이고 , 믿을 만한 것이다 .

요한복음 7 장 40 절 . 오늘날 그리스도교도 간의 논쟁과 흡사한 유대인간의 논쟁 . 한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다른 편은 그가 베들레헴에서 탄생할 것이라는 예언을 이유로 그를 믿지 않았다 . 후자는 그가 메시아인가 아닌가를 좀 더 주의해야 할 것이었다 . 왜냐하면 그의 기적은 설득적인 것이었으므로 그의 교리와 성서 간의 소위 모순에 관해서는 안심을 해도 좋았기 때문이다 . 그렇지만 그런 불분명은 그들에게 불신의 구실을 주는 것이 아니라 , 오히려 그들을 소경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 따라서 아무런 근거도 없이 소위 모순을 이유로 하여 오늘날의 기적을 믿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에게는 변명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 .

그리스도를 그 기적 때문에 믿던 사람들을 향해 바리새인들은 말했다 . 「 율법을 모르는 이 백성들은 저주당하고 있는 자들이다 . 그러나 사제 또는 바리새인 중 그를 믿는 사람이 하나라도 있었던가 . 이는 예언자가 가리라야에서 나오지 않는다 함을 우리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 」 니고데모는 대답한다 . 「 우리의 율법은 먼저 그의 말을 듣기 전에 어찌 그이를 심판할 수 있을 것이냐 」 라 고 ( 하물며 이런 기적을 행하시는 여사한 인간에게 있어 서랴 ) .

 

830

예언은 애매했으나 , 이미 그렇지 않게 되었다 .

 

831

5 개조 명제는 명료하지 않았으나 , 이미 그렇지 않다 .

 

832

기적은 이미 필요하지 않다 . 그것은 이미 충분히 행해졌으니까 , 그러나 사람들이 이제 성스러운 전통에 따르지 않고 , 교황만을 끄집어내고 , 교황을 속이고 , 성스러운 전통인 진리의 참다운 깊이를 제외하고 , 성스러운 전통의 수탁자인 교황을 공정치 못하게 하고 , 진리를 자유로이 발언시키지 않는다면 , 그때는 사람들이 진리에 관해 이야기할 것이 아니라 , 진리가 스스로를 사람들에게 이야기하지 않으면 안 된다 . 이것은 아리우스의 시대에 일어났던 것이다 ( 다오크레티아누스 치하의 아리우스 시대의 기적 ) .

 

833

기적 = 민중은 자기들 스스로 그런 결론을 내렸다 . 그러나 당신들이 그 이유를 설명해야 될 입장에 섰다면… .

그것이 원칙에 대해 예외임은 곤란한 일이다 . 예외에 대해서는 엄격해야 할 것이고 , 반대해야 할 것이다 . 그러나 원칙에 예외가 있음을 확실한즉 , 판단은 엄격함과 동시에 공평해야 한다 .

 

834

요한복음 6 장 26 절 , 「 표징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먹고 배불렀기 때문이다 」 .

예수의 기적을 보고서 그를 따르는 사람들은 그런 모든 기적을 낳는 그의 힘을 숭배한다 . 그렇지만 , 그의 기적을 보고서 그를 따른다고 공언하면서 , 기실 이 세상의 행복을 가지고 자기네들을 위안해 주고 배부르게 해 주는 까닭으로 , 그에 순종하는 사람들은 자기네들에게 불편한 기적이라면 이를 유린하고 말게 되는 것이다 .

요한복음 9 장 18 절 , 「 저 사람은 안식일을 지키지 않으니 신으로부터 나온 자가 아니다 . 다른 자 말하기를 , 죄 있는 사람이 어찌 이런 기적을 행 할 수 있으랴 」 라고 .

어느 편이 명백할까 ?

이 집은 신에서 유래한 것이 아니다 . 왜 ? 거기 있는 사람들은 5 개조 명제가 장세니우스에 있음을 믿지 않으므로 . 다른 어떤 이는 말한다 . 이 집은 신으로부터 유래한다 . 왜 ? 거기서 이례의 기적이 행해졌으므로 .

어느 편이 더 명백할까 ?

너희는 그에 관해 어떻게 말하는가 . 나는 아래와 같이 말한다 . 「 그는 예언자요 , 그가 만약 신으로부터 나오지 않았다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었을 터이므로 」 .

 

835

구약성서에서는 기적이 당신들을 신으로부터 멀리하고자 할 때 , 신약성서에서는 기적이 당신들을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멀리하고자 할 때 . 이런 경우에는 모종의 기적을 믿어서는 안 된다 . 그 밖의 경우에 그래서는 안 된다 .

그렇다면 그들은 자기네들에게 온 예언자들을 모두 배척할 권한을 가지고 있다고 할 것인가 ? 아니다 . 그들은 신을 부정하는 예언자들을 배척한다면 죄를 범했을 것이고 , 또 신을 부정하지 않는 사람들을 배척해도 죄를 범했을 것이다 .

그러므로 하나의 기적을 발견하면 , 곧 그것을 승인하든가 또는 그에 반대되는 이상한 증거를 발견하든가 , 둘 중 하나를 취해야 한다 . 그것이 신 • 예수 그리스도 • 교회 중 어느 것을 부정하느냐 그렇지 않느냐를 알아 두어야 한다 .

 

836

예수 그리스도의 편이 아니라 하는 것과 그의 편이라고 자칭하는 것 사이에는 , 또 예수 그리스도 편이 아닌 것과 그의 편인 것처럼 가장하는 것 사이에는 거대한 차이가 있다 . 한편은 기적을 행할 수 있으나 , 다른 편은 행할 수가 없다 . 한편이 진리에 어긋남은 명백하나 , 다른 편은 그렇지 않은 까닭이다 . 그래서 기적은 더욱 명백하게 된다 .

 

837

유일의 신을 사랑해야 한다 함은 지극히 명백한 것이어서 , 이를 증명하기 위해서는 별로 기적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

 

838

예수 그리스도는 기적을 행하셨다 . 다음 사도들도 , 초대의 다수의 성도들도 기적을 행하셨다 . 그것은 예언이 아직 성취되지 않고 그들에 의해 성취되고 있는 중이었으므로 기적밖에 증거가 될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 메시아가 온 국민을 회심시킨다는 것은 예언된 바 있었다 . 이 예언이 온 국민의 회심 없이 어떻게 성취될 수 있을 터인가 ? 또 온 국민은 메시아를 증명하는 예언의 이 최후의 결과를 보지 않고서 어떻게 메시아에게 마음을 돌릴 수 있겠는가 ? 그러므로 메시아가 죽고 , 부활하고 , 온 국민을 회심시키기까지는 예언은 전부 성취했다고는 말할 수 없다 . 그래서 이 시기 동안에는 기적이 필요했던 것이다 . 이제 유대인에 대해서는 그럴 필요가 없다 . 성취된 예언은 영속적 기적인 까닭이다 .

 

839

「 만약 너희들 나를 믿지 않는다면 , 적어도 나의 기적이나 믿도록 하라 . 」 그는 가장 유력한 것으로는 기적을 들고 있는 것이다 .

유대인과 그리스도교도에게 마찬가지로 알려진 바는 , 예언자들을 반드시 믿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 그런데 바리새인과 율법사들은 그리스도의 기적을 비상히 염려하여 , 그것이 거짓이고 , 또는 악마의 소치임을 표시하고자 시도한다 . 만약 그것이 신에서 유래한 것임을 인정하면 어차피 설득되는 셈이 되기 때문이다 .

우리들은 오늘날 그러한 판정을 내릴 시끄러운 입장에 서 있지 않다 . 그것은 매우 쉬운 일이다 . 신도 , 예수 그리스도도 부인하지 않는 사람들은 확실하지 못한 기적을 결코 행하지 않는다 . 「 나의 이름으로서 힘 드는 일을 하고 , 나를 비방할 수 있는 자는 없다 . 」

그러나 우리는 그런 판정을 하지 않아도 좋다 . 여기 하나의 성스러운 유물이 있다 . 여기 이 세상의 군주의 권력의 권력도 미치지 못하는 구세주의 가시관의 일부가 있다 . 그 가시가 우리를 위해서 흘린 저 보혈의 특별한 힘에 의해 기적을 행하신 것이다 . 이제 신은 이 집을 친히 택하시고 , 거기서 그의 능력을 나타내신 것이다 .

이것은 인간의 미지의 괴이한 힘에 의해 기적을 행하시고 , 우리로 하여금 그 판정에 고통을 느끼게 하는 따위의 것이 아니다 . 그것은 신 자신이다 . 그것은 신의 독자의 수난의 그릇이다 . 그 독자가 여러 장소 가운데에서 이 장소를 택하시고 , 사방에서 사람을 모으게 해서 쇠약해져 가는 그들에게 기적적인 위안을 받게 하고 있는 것이다 .

 

840

교회에는 적이 세 가지 있다 . 아직 한 번도 그 단체에 속한 일이 없는 유대인 , 거기서 탈출한 이단자 , 내구에 있어서 분열을 꾀하는 나쁜 그리스도교도 등이다 .

이들 3 종의 상이한 적은 항상 색다른 방법으로 교회를 공격한다 . 그러나 여기 그들이 같은 수단으로 교회를 공격하는 경우가 있다 . 그들이 다른 기적을 가지고 있지 못한 데 대해 , 교회는 항상 그들에게 기적을 행해왔으므로 그들은 모두 기적을 피하는 데 같은 관심을 가지고 기적에 의해 교리를 판단해서는 안 된다 . 오히려 교리에 의해 기적을 판단해야 한다는 억지를 일률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점이다 .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은 사람들 중에는 두 파가 있었다 . 하나는 그의 기적을 보고 그의 가르침을 따른 사람들이고 , 다른 하나는…라고 말한 사람들이다 . 칼빈의 시대에는 두 파가 있었다…지금은 제수이트가 있다 , 운운 .

 

841

기적은 유대인과 이교도 , 유대인과 그리스도교도 , 가톨릭과 이단자 , 비난하는 자와 비난받는 자 사이의 두 개의 십자가 간의 의심되는 문제를 판정한다 .

그러나 이단자에게는 기적은 무용하다 . 이미 신으로서 얻은 기적에 의해 권위와 부여된 교회는 그들이 정말 신앙을 가지고 있지 않음을 우리에게 고하기 때문이다 . 교회의 초기 기적이 이단자가 기적의 믿음을 배척하고 있는 이상 , 그들이 신앙을 가지고 있지 않음을 의심할 여지가 없다 . 그런 까닭으로 기적에 대항하는 기적이 있고 , 최초 또 최대의 기적은 교회 측에 있는 것이다 .

이 아가씨들은 자기네들이 멸망의 길에 놓여 있다든가 , 청죄사 ( 聽罪師 ) 들이 자기네들을 제네바로 인도하고 있다든가 , 그들이 자기네들을 향해서 예수 그리스도는 성찬 중에도 아버지이신 하나님의 오른편에 계시지 않는다고 고취해 주었다든가 하는 말을 듣고 놀랐으나 , 그것들이 모두 거짓임을 알고서 Vide si via inquitatis in me est ( 나에게 사악할 길이 있느냐 없느냐를 보시라 ) . 이 태도를 그 몸을 신에게 바치고 있는 것이다 . 거기에 무엇이 일어났던가 ? 악마의 궁전이라는 말을 듣는 이 장소를 신은 그 자신의 궁정으로 하신다 . 사람들은 거기서 아이들을 축출하라고 하지만 , 신은 거기서 그들을 고쳐 주신다 . 사람들은 거기를 지옥의 근거라고 하지만 , 신은 거기를 은총의 성소로 하신다 . 최후에 사람들은 천래의 모든 분노와 징계로써 그들을 협박한다 . 그러나 신은 그 자비심을 가지고 그들을 가득 채워 주신다 . 그러므로 그들이 멸망의 길에 들어 있다고 결론하는 사람은 경기를 잃어버린 사람일 것이다 ( 우리들은 의심할 바 없이 성 아타나시오스와 같은 증거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

 

842

「 너희가 만약 그리스도이거든 우리에게 말하라 . 」

「 나의 아버지 이름으로 내가 행하는 일은 나를 입증해 준다 . 그러나 너희들은 믿지 않으니 , 이는 내 양이 아니기 때문이다 . 나의 양은 내 소리를 듣는다 . 」

요한복음 6 장 30 절 , 「 우리가 보고 너희를 믿을 수 있게 하기 위해 어떤 증거를 내놓는가 — 그들은 어떤 가르침을 주시려나라고는 말하지 않는다 」 .

「 신이 만약 같이 계시지 않는다면 너희가 행하는 이런 기적은 누구도 할 수 없는 것이니라 . 」

마카베오 제 2 서 14 장 15 절 , 「 똑똑한 증거를 가지고 위업을 계승하는 자를 보전하시는 신 」 .

「 그를 시험하려고 하늘로부터의 증거를 구한다 . 」 루가복음 11 장 16 절 .

「 사악한 사대는 증거를 요구할 것이나 , 제공받지 못할 터이다 . 」

「 그는 깊이 탄식하여 가라사대 , 무엇 때문에 지금의 시대는 증거를 구하느냐 」 라고 . 마르코복음 8 장 12 절 . 그들은 나쁜 동기에서 증거를 구했다 .

「 그는 이적을 행할 수 없었다 . 」 그렇지만 그는 그들에게 요나의 증거 , 즉 그의 부활이라는 커다란 증거를 약속하시다 .

「 너희들 증거를 보이지 않으면 믿지 않는다 . 」 그는 그들이 기적이 없으면 믿지 아니한다는 것을 비난하신 것이 아니다 . 그들 자신이 그 목격자가 되지 않으면 믿지 않는다는 것을 비난하신 것이다 .

「 거짓 증거를 보이는 」 거짓 그리스도라고 성 바오로는 말한다 . 데살로니가 후서 2 장 . 「 그는 사탄의 동작을 따라 멸망하는 자들을 현혹케 하려고 한다 . 이는 그들이 진리를 사랑하는 사랑을 받지 않고서 , 구원당할 일을 행하지 않기 때문이다 . 이 까닭으로 신은 그들이 거짓을 믿게 하기 위해서 현혹할 요소를 그 속에 작용시키시다 . 」 모세의 말에 있는 것처럼 「 너희들의 신은 너희들이 그를 사랑하지 않느냐 하는 것을 알기 위해서 너희들을 시험해 보신다 」 .

「 보라 , 먼저 너희들에게 고해둔다 . 그러니 너희는 스스로 보도록 하라 . 」

 

843

땅 위에 진리의 나라는 없다 . 이 아가씨 ( 진리 ) 는 눈에 띄지 않도록 사람들 사이를 헤매 다닌다 . 신은 이 아가씨에게 베일을 씌워 놓았으므로 , 이 여자의 목소리를 듣지 않은 사람들은 이 여자를 모르고 지난다 . 적어도 극히 뚜렷한 진리마저 모독을 받을 여지가 있다 . 복음의 진리가 유포되면 , 그 반대도 유포되어 , 문제는 애매해서 민중은 식별할 수 없게 된다 . 그래서 그들은 질문한다 . 「 어찌하여 당신들만이 그렇게 믿고 있는 것인가 ? 어떤 증거를 당신들이 내놓을 수 있는가 ? 당신들은 말 ( 언어 ) 만 가지고 있음이 아닌가 , 그런 것은 우리도 가지고 있다 . 만약 당신들이 기적을 가지고 있으면 좋을 터인데 . 」 교리가 기적에 의해 지지되어야 한다 함은 일종의 진리이기는 하나 , 그것은 교리를 모독하기 위해 남용된다 . 그리고 기적이 일어나면 기적은 교리 없이는 불충분하다는 말을 듣는다 . 그것은 기적을 모독하기 위해 남용되는 다른 일면의 진리다 .

예수 그리스도는 안식일에 , 날 때부터의 소경을 고치고 많은 기적을 행하셨다 . 이리하여 그는 교리에 의해 기적을 판단해야 한다고 말했던 바리새인을 소경으로 하였다 .

「 우리에게는 모세가 있다 . 그러나 그가 어디서 왔는지 모른다 . 」 너희들은 그가 어디서 왔는지를 모르고 있는 데도 불구하고 , 그가 그런 기적을 행하신다는 것은 그야말로 놀라운 일이 아닌가 .

예수 그리스도는 신에 어긋나거나 모세에 어긋나는 말씀을 하신 일이 없다 .

구 ․ 신약성서에 예언된 거짓 그리스도나 거짓 예언자는 , 신과 예수 그 리스도에 어긋나는 일을 공연히 말할 것이다 . 심어 있지 않는 자가… , 복면의 적이 될 자가 기적을 공연히 행함을 신은 용허하시지 않으리라 .

공공연한 논쟁에 있어서 두 파가 제각기 신에 , 예수 그리스도에 , 교리에 속해 있다고 자칭하는 경우 , 여태껏 거짓 그리스도들 편에 기적이 있어 본 일이 없었고 , 진짜 그리스도교도들 편에 기적이 일어나지 않았던 일이 없다 .

「 그는 마귀에게 사로잡히었다 . 」 요한복음 10 장 21 절 , 다른 사람들은 말한다 . 「 마귀가 소경의 눈을 뜨게 할 수 있을 것이냐 」 라고 .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들이 성서에서 인용하는 증거는 논증적이 아니다 . 그들은 단지 , 모세는 한 사람의 예언자가 나타나리라고 예언했다고 주장할 뿐이므로 그것만으로는 예언자가 바로 이 사람이라는 증명이 되지 않는다 . 그리고 바로 그것이 최대의 문제이었던 것이다 . 그러므로 그런 구절은 그들이 성서에 어긋나 있지 않다는 것 , 거기에는 아무런 모순도 없다는 것을 표시하는 데 소용될 따름이고 , 거기에 일치성이 있음을 나타내는 데는 아무런 도움을 주지 않는다 . 그러나 기적만 있으면 모순을 제외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것이다 .

신과 인간 사이에는 행하여야 할 또는 부여되어야 할 서로의 의무가 있 다 . Venite, Quid debui ? ( 오너라 , 어떤 일을 해야 하는가 ?) 「 나를 책하라 」 라고 신은 이사야에서 말씀하시다 .

신은 스스로의 약속 등을 성취하지 않으면 안 된다 .

인간은 신이 주신 종교를 수락해야 할 의무를 신에 대해 지고 있다 . 신은 인간을 오류로 이끌어 가지 않을 책임을 인간에 대해 지고 있다 . 그런데 기적을 행한 이들이 상식의 빛에 비추어 명백히 오류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교리를 선고하였다면 , 그리고 한 사람의 더욱 위대한 기적을 행하는 자가 그런 사람들에게 믿어서는 안 된다고 미리 경고해 놓지 않았다면 , 사람들은 오류로 이끌렸을 것이다 .

이리하여 만일 교회 안에 분열이 생겨 , 이를테면 아리우스파의 사람들이 가톨릭과 마찬가지로 성서에 입각하고 있다고 자칭하여 기적을 행하고 , 가톨릭 사람들은 기적을 행하지 못하였다면 사람들은 오류에 빠졌을 것이다 .

왜냐하면 신의 비의 ( 祕義 ) 를 우리에게 전해 주는 어떤 이가 , 그 사사로운 권위의 면에서 믿을 만하지 못한 경우에 그이를 의심하는 불신자는 있을 터이지만 , 어떤 이가 신과의 사이를 간직하고 있는 교제의 증거로써 죽은 사람을 소생시키고 , 미래를 예언하고 , 바다를 옮기고 , 병자를 고치는 경우 , 그 사람에게 머리를 숙이지 아니할 불신자는 없기 때문이다 . 그리고 바로왕과 바리새인의 불신은 그런 이상한 완고성의 결과인 것이다 .

그러므로 같은 한편에 , 기적과 의심하지 못할 교리가 겸비되어 있으면 거기에는 아무런 곤란도 없다 . 그러나 같은 한편에 기적과 의심되는 교리가 있다면 , 어느 것이 더 분명한가를 추궁해야 한다 . 예수 그리스도도 의심을 받으셨다 .

소경이 된 바르예수 . 신의 힘은 적의 힘을 이긴다 .

유대의 마술사들은 악령에 사로잡힌 자들로부터 , 「 나는 예수와 바오로를 안다 . 그런데 너희들은 누구냐 」 하는 말을 듣고 넘어졌다 .

기적이 교리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지 , 교리가 기적을 위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

만약 기적이 진짜였다면 어떤 교리라도 믿게 할 수 있을까 ? 아니다 . 그렇게 되지는 않을 터이다 . Si angelus … ( 천사라 해도… ) .

원칙 . 기적에 의해 교리를 판단해야 하고 교리에 의해 기적을 판단해야 한다 . 이것들은 모두 진실이고 결코 모순이 아니다 . 왜냐하면 각 시대는 구별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

일반적인 원칙을 알고서 당신들은 과연 기뻐할 것이다 . 그것으로서 혼란을 일으키고 , 일체를 수포로 돌릴 생각으로 ! 신부님 , 거기에는 방해가 있으리다 . 진리는 유일 , 또 확실하므로 .

어떤 인간이 그 나쁜 교리를 감추고 좋은 교리만을 나타내 , 신과 교회에 일치한다고 자칭하고 , 허위의 교묘한 교리를 점차 주입하고자 기적을 행한다는 것은 , 신의 인간에 대한 책임상 불가능한 것이다 . 그러나 일이란 있을 수 없다 .

하물며 사람의 마음을 알고 계시는 신이 , 그런 사람에게 유리한 기적을 행하신다는 법은 더욱 있을 수 없다 .

 

844

종교의 세 가지 증거 , 영속성 , 착한 생활 , 기적 . 그들은 개연성을 가지고 영속성을 파괴하고 , 그들의 도덕을 가지고 착한 생활을 파괴하고 , 그 진리 , 또는 진리의 귀결을 파괴함으로써 기적을 파괴한다 .

그들을 믿는다면 , 교회는 영속성이나 , 순수나 , 기적과 아무런 관계도 없게 될 것이다 . 이단자들은 그것들 자체 아니면 그것들의 귀결을 부인하는데 , 그들도 마찬가지다 . 그러나 그것들 자체를 부인하려면 성실성의 결여가 필요할 것이고 , 또 그것들의 귀결을 부인하기 위해서는 바른 마음의 상실이 필요할 것이다 . 여태까지 자기가 보았다는 거짓 기적 때문에 순교한 자는 없었다 . 왜냐하면 투르크인이 전설에 의해 믿고 있는 기적을 위해서는 인간의 어리석음은 순교까지 이끌고 갈는지 모르나 , 자기가 본 기적을 위해서는 거기까지는 가지 않기 때문이다 .

 

845

이단자들은 자기들이 가지고 있지 못하는 이들 세 가지 증거를 늘 공격하여 왔다 .

 

846

첫째 항의 = 「 하늘로부터 천사 . 기적에 의해 진리를 판단하지 않고 , 진리에 의해 기적을 판단해야 한다 . 그러므로 기적은 무용하다 . 」

그런데 그것들은 유용한 것이어서 진리에 어긋날 리가 없다 . 그래서 신부 랭장드는 말했다 . 「 신은 기적이 오류로 이끌어 감을 허락하지 않으시리라 」 라고 . 같은 교회 내에 논쟁이 생겼을 때에는 기적이 결정할 것이다 .

 

둘째 항의 = 「 그러나 거짓 그리스도도 기적을 행하리라 . 」

바로왕의 마술사들은 결코 오류로 이끌어 가지 않았다 . 따라서 사람들은 거짓 그리스도에 관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 , 「 당신은 나를 오류로 이끌어 갔다 」 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 거짓 그리스도는 예수 그리스도에 반대하는 기적을 행하므로 그의 기적은 오류로 이끌어 갈 수 없기 때문이다 . 신은 거짓 기적을 허락하시지 않으시든가 그 이상의 것을 주시든가 둘 중 하나다 .

「 세계의 시초부터 예수 그리스도는 존재하고 계신다 . 」 이것은 거짓 그리스도의 어떤 기적보다도 유력한 것이다 . 같은 교회 내에서 기적이 혼미하고 있는 측에 일어난다면 사람은 오류에 이끌릴 것이다 . 교회분리도 눈에 띄는 것이고 , 기적도 눈에 띄는 것이다 . 그러나 기적이 진리의 증거인 이상으로 분리는 오류의 증거이다 . 그러므로 기적은 오류로 이끌어 갈 수 없다 .

그러나 분리를 제외하고서는 오류는 기적이 눈에 띄는 것처럼 눈에 잘 띄지 않는다 . 그러므로 기적은 오류로 이끈 것이다 . Ubi est Deus tuus ? ( 너희의 신은 어디 계시느냐 ?) 기적은 신을 표시하는 것이고 , 그 섬광의 하나다 .

 

847

성탄절의 저녁 기도 성가의 한 구절에 .

Exortum est in tenebris rectis corde ( 바른 자를 위해 어둠 속에서도 빛이 나타난다 ) .

 

848

만약 신의 연민이 광대한 것이어서 숨어 계실 적에도 우리에게 유익한 인도를 해 주신다면 , 나타나실 적에는 이에 기대하지 못할 어떤 빛이 있겠는가 ?

 

849

Est et non est ( 수락과 거절 ) 은 , 기적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 신앙 그 자체에 있어서도 수락될 수 있을 것인가 ? 또 만약 그것이 기적과 떼어질 수 없는 것이라면… .

성 하비에르이 기적을 행하실 적에 — 성 힐라리우스 — 우리로 하여금 기적에 관한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게 하는 불쌍한 사람들 .

불공편한 심판자들이 , 임기응변의 법률을 만들지 말고 , 너희들 자신에 의해 제정된 법률로써 심판하라 . Vae qui conditis leges iniquas ( 불의의 규칙을 정하는 자는 화를 입으리라 ) .

부단의 거짓 기적 .

너희들의 논적을 약화시키고자 전 교회에서 무기를 빼앗았다 .

만약 그들이 우리의 구원은 신에게 의존한다고 말한다면 , 그들은 이단자인 것이다 . 그들이 자기네들은 교황에 복종하고 있노라고 말한다면 , 그것은 위선이다 . 그들이 모든 조항에 서명하려고 한다면 , 그것은 불충분한 것이다 . 그들이 사람은 사과 한 알쯤으로 살해당할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면 , 이는 가톨릭의 도덕을 공격하고 있는 것이다 . 그들 사이에 기적이 행해진다면 , 이는 신성의 증거가 아니라 오히려 이단의 징조인 것이다 .

교회가 존속한 방식은 다음과 같았다 . 즉 진리가 논의되지 않고서 존재했든가 , 진리가 논의된 경우에는 교회가 존재하지 않았으면 교황이 존재 했든가 중의 하나였다 .

 

850

유죄로 정해진 5 개조 명제 . 기적은 그렇지 않다 . 왜 ? 진리는 공격당하지 않았으므로 . 그러나 소르본느는 … 그러나 칙서는… .

전심으로 신을 사랑하는 자는 교회를 부인하지 못한다 . 그만큼 교회는 뚜렷한 것이다 — 신을 사랑하지 않는 자는 교회를 확인할 수가 없다 .

기적에는 놀라운 힘이 있으므로 신의 존재는 실로 명백하지만 , 신에 어긋나서 기적을 믿어선 안 된다고 신 자신이 경고하실 필요가 있었다 .

그렇지 않았더라면 기적은 인심을 현혹시키는 소재가 되었을 것이다 .

그럼으로써 신명기 13 장의 어구는 기적의 권위에 상반되지 않을 뿐더 러 , 오히려 이처럼 기적의 힘을 나타내는 것은 없다고 할 것이다 . 거짓 그 리스도에 관해서도 마찬가지다 . 「 가능하다면 선민까지도 현혹시키고자 한 다 . 」

 

851

태어날 때부터의 소경에 관한 이야기 .

성 바오로는 무엇이라 말했는가 ? 그는 시종 일관하여 예언의 증명에 관해 말했는가 ? 아니다 . 그의 기적에 관한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 . 예수 그리스도는 무엇이라 말씀하셨는가 ? 예언을 증명함에 대하여 말씀하셨는가 ? 아니다 . 그의 죽음은 예언은 성취하지 않았다 . 그러나 그는 말씀하시기를 Si non fecissem ( 내가 만약 행치 않았다면 ) 내 업적을 믿으라고 .

완전히 초자연적인 우리 종교의 두 개의 초자연적인 기초 . 하나는 눈에 보이고 , 하나는 눈에 보이지 않는다 . 은총을 수반하는 기적 , 은총을 수반하지 않는 기적 .

교회의 표징으로써 사랑을 받으면서 처우되고 , 또 단지 표징에 불과했으므로 증오를 받으면서 취급된 유대인의 회당은 , 신과의 관계가 정당했을 때는 붕괴에 임하면서도 다시 부흥되었다 . 이렇게 그것은 표징이었던 것이다 .

기적은 신이 사람 마음에 대해서 행사하는 힘을 몸에 대해서 행사하시는 힘으로써 입증한다 .

교회는 이단 사이에 행해진 기적을 결코 시인치 않았다 .

종교의 지주인 기적 , 그것은 유대인들을 식별하고 그리스도교도들 , 설도들 , 순수한 사람들 , 진짜 신자들을 식별해 왔다 .

분파주의자들 사이에 행해지는 기적은 별로 무서워할 정도가 아니다 .

왜냐하면 분파는 기적보다 더한층 노골적이어서 그들의 오류를 명백히 표시하기 때문이다 . 그러나 분파는 없고 오류가 논증될 적에는 기적이 판정한다 .

「 내가 만약 누구도 아직 행하지 않았던 바를 그들 사이에 행하지 않았더라면 . 」 우리로 하여금 기적을 말하지 않을 수 없게 한 저 불쌍한 사람들 .

아브라함 기데온 . 기적으로써 신앙을 확인한다 .

유디트 . 드디어 신은 극도의 압박 속에 이야기하신다 .

가령 사랑이 냉각되어 교회에 진실한 예배자가 거의 없어진다 하더라도 기적은 진실한 예배자를 부흥시킬 것이다 . 그것은 은총의 최후의 노력이다 .

기적이 하나라도 제수이트 측에서 행해졌던가 !

기적이 이를 목격한 사람들의 기대에 어긋나고 , 그들을 신앙상태와 기적의 도구 사이에 불균형이 이루어지면 , 그때는 기적이 그들을 고쳐 주어야 한다 . 그러나 당신들의 경우는 다르다 . 만약 성찬이 죽은 사람을 소생시킨다면 가톨릭교도로 남아 있기보다 칼빈주의자가 되어야 한다는 말에는 상당한 이유가 있을는지 모른다 . 그러나 기적이 기대를 충족해 주고 , 의약을 축복해 주시는 것처럼 신에게 구한 사람들이 의약에 의하지 않고 고쳐지는 것을 보게 된다면… .

불신자 = 신의 편에 보다도 유력한 기적이 일어나든가 , 적어도 그것이 일어난다는 예언이 행해질는지도 모르는 한 , 악마 측에 기적이 일어나는 법은 없다 .

 

852

신이 눈에 띄게 지켜 주시는 사람들을 부당하게도 박해하고 있는 자들이여 , 군들의 과격을 그들이 책하면 , 「 그들은 이단자처럼 말한다 」 라고 하고 ,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은 우리를 식별한다고 말하면 , 「 그들은 이단자 」 라고 말하고 , 그들이 기적을 행하면 , 「 그것은 이단의 증거 」 하고 말한다 .

에스겔 — 사람들은 말한다 . 신의 백성이 이렇게 말하는 것이라고 — 히스기야 .

「 교회를 믿으라 」 는 말은 있었으나 , 「 기적을 믿으라 」 는 말은 없었다 . 기적은 자연이요 , 교회는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 하나는 명령을 필요로 했으나 다른 하나는 명령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

유대인의 회당은 표징이었으므로 멸망치 않았다 . 그러나 표징에 지나지 않았으므로 쇠멸하였다 . 회당은 진리를 포함하는 표징이었다 . 따라서 진리를 포함하지 않게 될 때까지 그것은 존속했다 .

나의 존경하는 신부여 , 이것들은 모두 표징으로 일어났습니다 . 다른 여러 종교는 쇠멸하나 이것은 결코 쇠멸하지 않습니다 .

기적이란 당신이 생각하시는 이상으로 중요합니다 . 그것은 교회의 창립에 도움을 주었습니다마는 , 그 존속에도 도움을 줄 것입니다 . 거짓 그리스도의 시기까지 , 종말의 시기까지 .

두 사람의 증인 = 구 ․ 신약성서에서는 기적이 표징과 관련해서 행해졌다 . 그것은 구원이었든가 , 그렇지 않으면 성서에 복종해야 할 것을 표시해 주는 외는 무용한 것이었든가 , 둘 중의 하나였다 . 성찬의 표징 .

 

853

( 신부님 , 신의 훈계는 겸손하게 판단해야 합니다 . 말타 섬에 있어서의 성 바오로 .)

 

854

그러므로 제수이트의 완고함은 유대인의 그것 이상이다 . 유대인이 예수 그리스도를 무죄로 만들기를 거부한 것은 그의 기적이 신으로부터 나온 것인가 아닌가를 의문으로 알았기 때문에 그런 데 불과하다 . 이에 반해 제수이트는 포르루아얄의 기적이 신에서 유래했음을 의심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이 집 ( 포르루아얄 수도원 ) 의 무죄를 의심하고 있으니 말이다 .

 

855

내가 보기에는 사람들은 기적을 믿고 있다 . 군들은 벗에 아첨하든가 적에 대항하든가 함으로써 종교를 파괴하고 있다 . 군들은 제멋대로 종교를 처치하고 있는 것이다 .

 

856

기적에 관해 = 신은 이 가족은 다른 어느 가족보다도 행복하게 해 주었으니 , 어느 가족보다도 감사에 가득 찬 가족이 되게 하여 주시기를 .

 

 

 

 

 

  

제 14 편 그리스도 논쟁 단편

 

 

 857

명과 암 = 만약 진리가 눈에 보이는 증거를 가지고 있지 않았더라면 그것은 너무도 어두웠을 것이다 . 그것은 하나의 교회 속에 , 사람들의 눈에 보이는 모음 속에 항상 보존되어 있을 놀라운 것이다 . 만약 이 교회 속에 하나의 주장밖에 없었다면 그것은 너무도 밝았을 것이다 . 교회 속에 항상 존재해 온 것은 진리이다 . 왜냐하면 진실한 것은 늘 거기에 존재했으나 , 허위는 무엇이건 간에 늘 존재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

 

858

교회의 역사는 본래 진리의 역사로 불리어져야 한다 .

 

859

선박이 침몰당하지 않는다는 보증을 받으면 폭풍에 둘러싸인 배에 타고 있는 것은 유쾌한 일이다 . 교회를 괴롭히는 박해도 이와 같은 종류의 것이다 .

 

860

독실한 믿음의 많은 증거에 설상가상으로 그들은 박해까지 받았다 . 이것은 독실한 믿음의 증거 중 최선의 것이다 .

 

861

교회의 좋은 상태는 신에 의해서만 지지되고 있을 때다 .

 

862

교회는 상반하는 그릇된 주장에 의해 공격을 받아 왔다 . 그러나 아마 지금처럼 동시에 공격을 받은 적은 없을 게다 . 만약 그릇된 주장의 증거에 의해 교회가 더 한층 고뇌에 빠지게 된다면 교회는 그런 그릇된 주장들이 자기네들끼리 싸운다는 이익을 받게 될 것이다 .

교회는 쌍방을 다 나무라지만 , 칼빈주의자의 편을 그 분파의 이유로 더욱 나무란다 .

상반된 쌍방의 대다수가 기만을 당하고 있음을 확실하다 . 그들의 환상을 풀어 주어야 한다 .

신앙은 서로 모순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많은 진리를 내포하고 있다 .

「 웃을 적 , 울적 」 등등 . 「 대답하라 , 대답하지 말라 」 등등 .

이런 모순의 원천은 예수 그리스도에 있어서의 신인양성 ( 神人兩性 ) 의 결합이고 , 또 두 세계 ( 새로운 하늘과 새로운 땅의 창조 , 새로운 생명과 새로운 죽음 , 모든 것은 이중이어서 같은 명칭을 가지고 있다 ) 이고 , 진일보해서 의인 속에 있는 두 인간 ( 그것은 두 개의 세계이고 , 예수 그리스도의 지체와 영상이므로 따라서 모든 명칭이 그들에게 적합하다 . 의인과 죄인 , 사자와 생자 , 생자와 사자 , 간택된 자와 버림받은 자 등등 ) 이다 .

그러므로 세상에는 서로 용납되지 않는 것처럼 보이면서 , 기실 하나의 놀라운 질서에 있어서 전부가 공존하는 대다수의 신앙과 도덕의 지리가 있는 것이다 . 모든 이단은 이들 진리 중 어떤 것을 제외하는 데서부터 생겨난다 . 또 이단자들이 우리들에 대해서 주장하는 모든 항의는 우리의 진리 중 어떤 부분을 모르는 데서 생겨난다. 그리고 보통 있기 쉬운 것은 대립하는 두 개 진리의 관련을 이해하지 못하고 , 한편을 용납함이 다른 편을 제외함이라 믿고 , 한편에 고집하여 다른 편을 배척하고 우리를 그들의 반대자로 생각하는 것이다 . 그런데 배타야말로 그들의 이단의 원인이고 , 우리가 다른 진리도 간직하고 있음을 모른다는 것이야말로 그들의 항의의 원인이다 .

제 1 열 , 예수 그리스도는 신이고 인간이다 . 아리우스파는 이들 둘을 양립하기 어려운 것으로 생각하고 , 하나로 결부시키지를 못하고 그리스도는 인간이라고 한다 . 이 점에 있어서 그들은 가톨릭이다 . 그러나 그들은 그가 신임을 부정한다 . 이 점에 있어서 그들은 이단자이다 . 그들은 우리를 가리켜 그의 인생을 부정하는 자라고 주장한다 . 이 점에 있어서 그들은 무지하다 .

제 2 열 , 성체비적 ( 聖體祕蹟 ) 문제에 관해서 우리는 빵의 실질이 변화하고 , 본체적 변화를 일으켜 우리 주의 몸의 실질이 되고 , 예수 그리스도도 거기에 현실적으로 임재하고 계심을 믿는다 . 이것은 하나의 진리이다 . 또 하나는 이 비적이 십자가와 영광의 표징이고 양자의 기념이라는 것이다 . 여기 가톨릭의 신앙이 있고 , 거기에 대립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두 개의 진리가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

오늘날의 이단은 이 비적이 예수 그리스도의 현재 임재와 그 표징을 동시에 내포하는 것이고 , 희생인 동시에 희생의 기념임을 이해하지 않고 , 같은 이유에서 이들 진리 가운데 하나를 용인하면 다른 것을 배제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데 있다 .

그들은 이 비적이 표징적이라는 한 가지만을 고집한다 . 이 점에서 그들은 이단자가 아니다 . 그들은 우리가 이 진리를 배척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거기서 이 일을 긍정하는 교부들의 문구에 의해 많은 항의를 내놓는다 . 결국 그들은 그리스도의 임재를 부정한다 . 이 점 그들은 이단자인 것이다 .

제 3 열 , 속죄 .

이런 까닭으로 이단을 방지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진리 전부를 가르쳐 주는 것이다 . 그리고 그들을 반박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그 전부를 선언해 주는 것이다 . 왜 ? 이단자는 무엇이라 말하고 있는가 ? 어떤 주장이 어떤 교부의 것인가 아닌가를 알기 위해서… .

 

863

모든 사람은 제각기 하나의 진리를 추구하면 추구할수록 더욱 위험한 오류에 빠진다 . 그들의 과오는 하나의 허위를 추구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 다른 또 하나의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 데 있다 .

 

864

진리는 이 시대에서는 막연하고 , 허위는 확립되어 있으므로 , 사람은 진리를 사랑하지 않는 한 그것을 알 수가 없다 .

 

865

두 개 상반하는 진리를 주장해야 할 때가 있다면 , 그것은 일방을 제외하는 것이 비난을 받을 때이다 . 그렇다면 제수이트와 장세니스트가 그것을 숨긴다는 것은 잘못이다 . 그런데 장세니스트 편이 더욱 그렇다 . 제수이트는 그 쌍방을 다소나마 주장해 왔으니 말이다 .

 

866

두 종류의 사람들이 제삿날과 일하는 날 , 신자와 사제 양자가 범하는 모든 죄를 다 같다고 생각한다 . 여기서부터 한편은 사제에 나쁜 것은 신자에게도 나쁘다고 결론하고 , 다른 편은 신자에게 나쁘지 않은 것은 사제에게도 용서된다고 결론한다 .

 

867

고대 교회가 오류에 빠졌더라면 교회는 몰락했을 것이다 . 그렇지만 교회가 오늘날 오류에 빠졌다 하더라도 사태는 같지 않다 . 왜냐하면 교회는 고대 교회로부터 계승한 성스러운 전통이라는 훌륭한 방침을 늘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 그래서 고대 교회에 이런 복종과 일치는 모든 일을 주도하고 교정한다 . 그러나 고대 교회는 우리가 고대 교회를 머리에 그리고 생각하는 것처럼 , 장래의 교회를 머리에 그리거나 생각하지는 않았다 .

 

868

옛날 교회 안에서 일어났던 것과 오늘날 거기서 찾아볼 수 있는 것과를 비교하는 데 방해가 되는 것은 , 성 아타나시오스 ․ 성 테레사 , 기타 인물들이 영예로운 관을 차지한 자로서… 신성한 자로서 보통 간주되고 있다는 것이다 . 시간이 문제를 해결해 준 현재에 있어서 그들은 그런 영관을 차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 그러나 그들이 박해될 당시에는 저 위대한 성자도 아타나시오스라는 한 사내였고 , 성 테레사도 한 아가씨였다 . 「 엘리야는 우리와 같은 인간으로서 우리와 같은 정욕에 의해 움직였다 」 라고 성 베드로는 말하고 있다 . 이것은 성자의 모범을 우리의 상태에 부합하지 않는 것으로 , 버리려고 하던 저 그릇된 관념에서 신자를 해방하기 위해 말씀된 것이다 . 「 그들은 성자여서 우리들과 같은 사람이 아니라 」 라고 우리는 말한다 . 그러면 당시에 어떤 일이 생겼던가 ? 성 아나타시오스는 아타나시오스라는 한 사내여서 많은 죄를 뒤집어 씌워서 교회 회의에서 이러한 죄의 판결을 받았던 것이다 . 모든 사제는 그에 동의했고 , 나중에는 교황마저 승인했다 . 거기에 반대한 자는 어떤 말을 들었던가 ? 그들은 평화를 교란하는 자다 , 분열을 초래하는 자다 등의 비난을 받았다 .

열심 • 현명 . 네 종류의 사람들 , 지식은 없고 열심인 사람 , 열심은 없고 지식은 있는 사람 , 지식도 열심도 없는 사람 , 열심도 지식도 있는 사람 . 처음 세 종류의 사람들은 그를 죄로 몰고 , 최후의 사람들은 그를 용서하고 , 교회에서 파문당하고 그러면서도 교회를 구원한다 .

 

869

만약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오늘 나타나서 그 변호하는 사람들과 마찬가지지로 별로 많은 권위를 부여하지 않았더라면 그는 아무 일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 신이 이전에 권위를 주어 그를 보내 주신 것은 교회에 대한 선도였었다 .

 

870

신은 교회와 무관하게 사죄하심을 바라시지 않았다 . 교회가 죄과에 참여하는 것처럼 사면에도 참여할 것을 신은 바라신다 . 신이 교회에 이 특권을 주신 것은 왕이 의회에 그 힘을 부여해 준 것과 마찬가지다 . 그러나 교회가 신과 무관하게 풀어주든가 결부하든가 하면 그것이 벌써 교회가 아님은 의회와 마찬가지다 . 왜냐하면 왕이 어떤 이에게 사면을 해 준 경우 , 의회가 그것을 확인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 의회가 왕과 무관하다고 확인하든가 왕의 명령에 따라 확인하는 것을 거부하게 되면 , 그것은 벌써 왕의 의회가 아니고 반역자의 일당이 되었기 때문이다 .

 

871

교회 교황 단일 다수 = 교회를 단일로 간주하면 그 두목인 교황은 전체에 상당한다 . 교회를 다수로 본다면 , 교황은 그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 교부들은 교회를 때로는 전자로서 , 때로는 후자로서 생각했다 . 그러므로 교황에 관한 이야기도 가지가지가 있다 ( 성 키프리아누스 Sacerdos Dei( 신의 사제 )) . 그러나 그들은 이들 두 개의 진리의 한편을 설정하고 다른 편을 배제하지 않았다 . 단일에 귀착하지 않는 다수는 혼란이고 , 다수에 의존하지 않는 단일은 압제이다 . 교회 회의가 교황 위에 서 있다고 말할 수 있는 나라는 프랑스 외에는 거의 없다 .

 

872

교황은 수령이다 . 그 외의 누가 만인에게 알려져 있을 것인가 ? 그 외의 누가 도처에 뻗어가는 주요한 가지를 장악함으로써 전체에 퍼지는 힘을 가지고 만인에게 인정되고 있을 것인가 ? 그것을 전제로 타락시킨다는 것은 얼마나 쉬운 일인가 !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이 훈계를 그에게 수여하신 것이다 . Uos autem nou sic ( 너희들은 그렇게 되지 말라 ).

 

873

교황은 서약하고 그에게 복종하지 않는 학자들을 미워하고 또 겁낸다 .

 

874

교황이 무엇인가를 판단하기 위해서는 ( 그리스인이 어떤 교회 회의에서 말한 것처럼 ) 중요한 기준인 교부들의 어떤 말에 의해서는 안 된다 . 그보다는 오히려 교회와 교부들의 행위에 의하고 또 성서 정전에 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 .

하나와 다수 . Duo aut tres . in unum ( 둘 또는 셋 , 하나로 ) . 둘에서 하나를 배제함은 잘못이다 . 다수를 배제하는 교황주의자나 하나를 배제하는 위그노가 하는 것처럼 .

 

875

교회는 신과 성스러운 전통으로부터 그 빛을 받아들임으로써 그 명예를 손상당할 것인가 ?

그를 이 성스러운 결합에서 떼어 버리는 것이야말로 그 명예를 손상시키는 것이 아닐까 ?

 

876

신은 그 교회의 보통 행위에 있어서는 기적을 행하시지 않는다 . 만약 한 개인에게 무오류성을 찾아볼 수 있다면 그것은 일종 기묘한 기적일 것이다 . 그러나 무오류성이 다수 속에 있다면 이는 매우 자연스러워 보인다 . 신의 이 행위는 그의 다른 모든 업적과 마찬가지로 자연 속에 감추어져 있다 .

 

877

왕은 그 권력을 행사한다 . 그러나 교황은 그 권력을 행사할 수 없다 .

 

878

Summum jus, summa injunia ( 극도의 권력은 극도의 부정이다 ) .

다수주의는 최선의 길이다 . 그것은 공개자이고 복종시키는 힘을 가지고 있으니 말이다 . 그러나 이것은 가장 무능한 사람들의 의견이다 . 만약 가능하면 사람은 힘을 정의의 손에 쥐게 하였을 것이다 . 그러나 힘이 물질적 특성이어서 사람의 뜻대로 행사함을 용인하지 않는 데 대해 정의는 사람의 뜻대로 처리할 수 있는 정신적 특성인 까닭으로 사람은 정의를 힘의 손에 쥐게 할 것이다 . 이리하여 사람은 지키지 않을 수 없는 것을 가리켜 정의라 부른다 . 여기 칼의 권리가 생겨난다 . 칼은 진짜 권리를 부여하기 때문이다 . 그렇지 않다면 사람들은 폭력과 정의가 서로들 대립함을 보았을 것이다 ( 「 제 12 프로뱅시알 」 의 결말 구절 ) . 여기서부터 프롱드의 난 , 즉 그 소위 정의를 힘에 대항시키는 일이 생겨난다 . 그러나 교회에서는 그렇지 않다 . 왜냐하면 교회에는 진짜 정의는 있지만 아무런 폭력도 없기 때문이다 .

 

879

부정 = 재판권은 재판을 하는 사람을 위해서가 아니라 재판을 받는 사람을 위해 부여된 것이다 — 이런 일을 민중에게 가르쳐 주는 것은 위험하다 — 그러나 민중은 당신들을 충분히 신용하고 있으므로 , 이것은 그들에게 해가 되지 않고 당신들에게 도움을 중 것이다 . 그러므로 공표해야한다 . Pasce oves meas ( 나의 양을 길러라 ) . tuas ( 너희 ) 가 아니다 . 당신들은 나를 기를 책임이 있다 .

 

880

사람이란 확실함을 좋아한다 . 교황은 신앙에 있어서 무오류이고 , 엄격한 신학자들은 사람됨과 행실에 있어서 무오류이기를 좋아한다 . 자기의 확신을 간직하기 위해 .

 

881

교회의 교육과 신의 영감의 어느 것이나 무오류이다 . 교회의 활동은 신의 은총 또는 처벌을 준비하는 것에 도움을 주는 데 불과하다 . 교회가 하는 일은 처벌을 위해서는 충분하지만 영감을 위해서는 불충분하다 .

 

882

제수이트는 교황을 자기편에 끌어들일 적마다 모든 그리스도교도를 서약에 배반시키고 있다 .

교황은 그 직책상 또는 제수이트에 대한 신뢰 때문에 간단히 끌려 들어가고 , 제수이트는 중상을 수단으로 하여 그를 끌어들이는 것이 매우 능숙하다 .

 

883

나로 하여금 종교의 기초에 관해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게 한 불쌍한 사람들 .

 

884

  죄인은 참회하지 않고서도 정화되고 , 의인은 자애심 없이도 의로와지고 , 모든 그리스도교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이 없어도 , 신은 인간의 의지 이상의 힘이 없어도 , 예정에는 비의 ( 祕義 ) 가 없어도 , 속죄에는 확실성이 없어도 좋다는 것은 — .

 

885

되고자 하는 생각만 있으면 사제가 된다는 것 , 여로보암 치하나 다름없다 . 사람들이 오늘날의 교회의 규칙을 매우 좋다고 공언하고 그의 변경을 바라는 것은 죄라 함에 이르러서는 무서운 생각이 난다 . 옛날에 그 규칙은 확실히 좋았으나 그것을 고치더라도 별로 죄가 되지 않았다 . 그런데 오늘날에는 그런 사정으로 그 변경을 바랄 수조차 없게 되었다 . 사제를 임명하는 데도 아주 신중한 태도를 취해 사제가 될 만한 자격을 가지고 있는 자가 거의 없을 정도였었던 당시의 습관을 변경함도 허용되었었는데 , 될 만한 자격이 없는 자를 이렇게도 많이 임명하는 오늘날의 습관을 한탄해서는 안 된다 함은 이 무슨 소리인고 .

 

886

이단자 = 에스겔 . 이교도는 누구나 이스라엘을 욕했고 예언자 ( 에스겔 ) 도 그랬다 . 그러나 이스라엘 사람은 예언자를 향해 「 너희는 이교도처럼 말한다 」 라고 할 권리를 전혀 가지고 있지 않았다 . 오히려 예언자는 이교도가 자기처럼 이야기하는 것을 극력 억제했던 것이다 .

 

887

장세니스트는 도덕의 개혁에 있어 이단자들과 흡사하다 . 그런데 당신들은 악에 있어서 그들과 흡사하다 .

 

888

왕후 • 예언자 • 교황 , 그리고 사제마저도 … 이 모두가 일어나야 한다는 것을 모른다면 , 당신들은 예언을 모르고 있는 것이다 . 그러나 교회는 존속해야 할 것이다 . 신의 은총으로써 우리는 거기까지 이루지 못하고 있다 . 그런 사제들에게 화가 있을지어다 ! 그러나 우리가 거기까지 가지 않기 때문에 신이 연민을 해 주시기를 절망한다 .

  성 베드로 2 장 . 과거의 거짓 예언자들 , 장래의 표징 .

 

889

…그런 까닭으로 , 한편에 있어서 성직의 성원이 아닌 몇몇 타락한 수도사나 부패한 결의론자 ( 決疑論者 ) 들이 그 부패 • 타락 속에 잠겨 있는 것이 사실이라고 하면 , 다른 한편에 있어서 신의 말씀의 진실한 수탁자인 교회의 성실한 목사들이 , 그 말씀을 파괴하고자 한 사람들의 노력에 대해 단호히 그것을 수호해 왔다는 것 역시 확실하다 . 그러므로 신자들은 그들 자신의 목사들의 ( 아버지와 같은 ) 손에 의해 제공된 건전한 교리에 순종하지 않고 이런 종류의 결의론자들의 익숙하지 않은 손을 통해서만 내밀어지는 느슨해진 도덕에 순종할 구실을 전혀 가지지 않는다 .

또 불신자나 이단자들도 이런 폐해를 가리켜 교회에 대한 신의 섭리의 결여를 표시하는 것이라고 선전할 이유를 가지고 있지 않다 . 왜냐하면 교회는 본디 성직의 전체 속에 있는 것이므로 , 신이 교회를 타락 속에 내버려 두신다 함은 사태의 현상에서 결론할 수 없을 뿐더러 신이 교회를 타락으로부터 명백히 수호하고 있음이 오늘날처럼 현저한 적은 없기 때문이다 .

특별한 소명을 받아 보통의 그리스도교도보다 완전한 생존방식을 지키려고 출가하고 성의를 입겠다고 서약한 몇몇 사람들이 보통의 그리스도교도로부터 지탄을 받을 만한 미망에 빠져 , 과거 유대인 사이에 있어서 거짓 예언자 노릇을 한 자와 같은 존재가 되어 우리들 사이에 있게 된다면 , 그것은 실로 한탄할 특수한 개인적 불행이지만 , 이런 데서 결론을 내려 신이 교회에 대해 행하시는 배려를 부정할 수는 없다 . 그도 그럴 것이 , 그런 모든 일은 지극히 명백히 예언되고 , 그 유혹이 이런 종류의 사람들로부터 일어나리라 함은 이미 오랫동안 예고되어 왔으므로 , 올바르게 교육되기만 하면 사람들은 이런 일 가운데 , 우리에 대한 신의 망각의 증거보다도 오히려 신의 인도의 증거를 찾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

 

890

텔트리아누스 , Nunquam Ecclesia reformabutur   ( 교회는 결코 개혁되지 않을 것이다 . )

 

891

제수이트 교회를 자랑하고 있는 이단자들에게 가르쳐 주고 싶은 것은 , 그것이 교회의 교리가 아니라는 것 , 또 우리 ( 장세니스트 ) 의 분리가 제단으로부터의 분리가 아니라는 것이다 .

 

892

만약 상위하다는 것을 이유로 우리가 정죄되면 당신들은 옳을 것이다 . 다양성 없는 통일은 다른 사람들에게 무익하고 , 통일성 없는 다양은 우리에게 파멸을 초래한다 ( 하나는 대외적으로 유해하고 , 하나는 대내적으로 유해하다 ) .

 

893

인간은 진리를 제시하고 이를 얻게 할 수 있다 . 그러나 성직자의 부정을 제시하여 그것을 교정할 수는 없다 . 허위를 지적하면 양심은 보증되나 , 부정을 지적하면 돈 가방은 보증되지 않는다 .

 

894

교회를 사랑하는 자는 이 세상의 도덕과 사람 마음의 부패를 보고 한탄한다 . 그러나 최소한 율법은 존재한다 . 그러나 이 자들은 그런 율법을 부패시키고 규범을 파괴하고 있다 .

 

895

인간은 양심에 의해 악을 행할 때처럼 충분히 또 유쾌하게 악을 행하는 경우가 없다 .

 

896

교회가 파문이니 이단이니 하는 말을 만든 것은 헛된 노력이다 . 그런 말들은 교회에 반대해서 사용되고 있다 .

 

897

하인은 주인이 하는 일을 모른다 . 그것은 주인이 그에게 용무만을 알려 주고 목적을 알려 주지 않기 때문이다 .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하인이 맹목적으로 복종하고 왕왕 목적에 배반하는 까닭이다 .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목적을 가르쳐 주셨다 . 그런데 당신들은 그 목적을 파괴하고 있다 .

 

898

그들은 영원히 얻을 수가 없어 보편성을 구한다 . 그 때문에 자기들을 성자로 하고자 전 교회를 타락시킨다 .

 

899

성서의 구절을 남용하고 , 자기의 오류를 지지해 주는 것처럼 보이는 어떤 구절을 발견하여 득의만만하고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 — 수난 주 일요일 , 저녁 기도의 장 . 왕을 위한 기도 .

다음 말의 설명 , 「 나를 위해 존재하지 않는 자는 나를 배반하는 자이다 」 . 또 다음 말 , 「 너희들에게 반항하지 않는 자는 너희들을 위해 존재하는 자이다 」 . 어떤 이는 가로되 「 나는 누구를 위해서 있는 것도 아니요 , 누구를 반항해서 있는 것도 아니다 」 라고 이 사람에게는 … 라고 대답해야 한다 .

 

900

성서의 뜻을 해명하고자 하면서 그 뜻을 성서에서 캐내지 않는 자는 성서의 적이다 (Aug d, d, ch ) .

 

901

「 겸손한 자에게만 은혜를 베푸시다 . 」 신은 그들에게 겸손한 마음을 주시지 않았을까 ?

「 나의 백성은 그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 」 그를 받아들이지 않았던 자는 모두 그의 백성이 아니었을까 ?

 

902

휴이양은 말한다 . 「 이것이 실제로 그다지 확실하지 않은 것 같다 . 논쟁이 있다는 것이 불확실의 증거이므로 ( 성 아타나시오스 • 성 크리소스트모스 • 도덕 • 불신자 ) 」 .

제수이트는 진리를 불확실하게 만들지는 않았지만 그들 자신의 불신을 확실하게 했다 .

모순이 늘 잔존해 온 것은 악인을 맹목으로 하기 위해서이다 . 왜냐하면 진리 또는 사람에 반항하는 자는 모두 악이기 때문이다 . 이것이야말로 참다운 진리이다 .

 

903

무릇 이 세상의 종교와 종파는 자연적 이성을 지도자로 해왔다 . 다만 그리스도교만이 그 기준을 자기 밖에서 구하는 것 , 즉 예수 그리스도가 신자들에게 전하기 위해 옛 사람들에게 남겨 준 기준을 잘 배우도록 강제되어 왔다 . 이 강제는 이들 선량한 신부들을 권태하게 했고 , 이들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자기 망상에 따르는 자유를 알고자 하고 있다 . 옛날 예언자들이 유대인에게 말한 것처럼 , 「 교회 안으로 들어가라 . 옛 사람들이 교회에게 남긴 규칙을 잘 배우고 그 좁은 길을 찾아가도록 하라 」 라고 우리가 그들에게 부르짖어 보았댔자 소용이 없다 . 그들은 유대인처럼 「 우리는 그 길을 가지 않고 우리 마음을 따라갈 것이라 」 라고 했고 , 그들은 「 우리는 다른 국민과 같이 될 것이라 」 고 말했다 .

 

904

그들은 예외로부터 규칙을 만든다 .

옛 사람들은 회개 앞에 사면을 주었다고 ? — 그것은 예외로 알고 있었으리라 . 그러나 예외로부터 당신들은 예외가 없는 규칙을 만든다 . 그리고 그 규칙이 예외임을 바라기조차 않는다 .

 

905

회개의 증거가 없는 고백과 사면에 관해서 = 신은 내면만을 보시고 교회는 외면에 의해서만 판단한다 . 신은 마음속에 참회를 인정하자마자 용서를 해 주신다 . 교회는 업적 중에 그것을 인정하고서만 비로소 용서한다 . 신은 내적으로 순결한 교회를 만드시고 , 그 내면적인 또는 순전히 영적인 청정에 의해 거만한 현자나 바리새인의 내면적 불신을 당황시킨다 . 교회는 외면적 행장이 극히 순결한 인간의 집단을 만들고 이로써 이교도의 행장을 당황시킨다 . 가령 그 속에 위선자가 있다 하더라도 그 해독을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교묘히 변장하고 있으면 교회는 그들을 관용한다 . 왜냐하면 그들은 그들이 속일 수 없는 신에게는 수락하지 않더라도 그들이 속일 수 있는 인간에게는 수락하기 때문이다 . 따라서 교회는 그들의 맑게 보이는 행위에 의해 그 명예를 손상한다는 법은 없다 . 그런데 당신들은 내면이 신에게만 속한다는 이유로 교회가 내면적으로 판단함을 좋아하지 않고 , 또 신은 내면에만 착안하신다는 이유로 교회가 외면적으로 판단하는 것도 좋아하지 않는다 . 이렇게 해서 교회로부터 우수한 사람들을 모두 제거하고 그 안에 가장 방탕한 사람들과 교회의 명예를 대단히 손상시키는 사람들을 남게 한다 . 그들은 유대인의 회당이나 철학자의 학파에 의해서 옹졸한 자로서 축출당하고 , 불신의 무리로서 혐오받을지도 모를 자들이다 .

 

906

세속에 순응해서 사는 데 가장 용이한 상태는 바로 신에 순종해서 살아 나가는 데 가장 어려운 상태이다 . 그리고 그 반대 역시 진리이다 . 세속에 순응하면 종교적 생활처럼 어려운 것이 없다 . 신에 순종해서 살아나가려면 그 이상 더 쉬운 일이 없다 . 세속에 순응하면 고위 관직을 차지하고 , 큰 재산을 가지고 생활하는 것처럼 쉬운 일은 없다 . 그런 것을 가지고 있으면서 신에 의해 생활하고 , 그런 것에 흥미나 애착을 느끼지 않는 것처럼 어려운 일은 없다 .

 

907

결의론자 ( 決疑論者 ) 들은 타락한 이성에 결단을 맡기고 , 타락한 의지에 결단의 선택을 맡겨 인간 본성에 있는 모든 타락한 것을 그의 행위에 참여시키려고 한다 .

 

908

그러나 개연론을 확증해 주는 것은 개연적인 것인가 ?

마음의 평안과 확신의 상위 . 확신을 주는 것은 진리뿐이다 . 평안을 주는 것은 진리의 성실한 추구뿐이다 .

 

909

그들 결의론자들 전체를 가지고서도 과오를 범한 양심에 확신을 줄 수 없다 . 그리고 이것이 좋은 지도자의 선택이 중요한 이유이다 .

이리하여 그들은 걸어서는 안 될 길을 걸었던 까닭으로 , 또 그들이 들 어서는 안 될 교사의 말을 들었던 까닭으로 , 이중으로 비난을 받게 된다 .

 

910

당신들이 사물을 그럴 듯하게 꾸며 보이는 것은 세상 사람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가 아니고 무엇인가 ? 그들은 우리로 하여금 그것이 진실하다는 생각을 가지게 하고 , 결투의 풍습이 없었다 하더라도 , 문제 자체를 생각하면 인간이 투쟁을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이라는 생각을 가지게 하려는 것인가 ?

 

911

세상에서 악인을 절멸하기 위해서는 그들을 죽여야 할 것인가 ? 그것은 한쪽만이 아니라 양쪽을 악인으로 만드는 것이다 . Uince in bono malum ( Aug.)( 선을 가지고 악을 이겨라 . 성아우구스티누스 ) .

 

912

일반적 = 도덕과 언어는 특수적이지만 일반적인 학문이다 .

 

913

개연론 = 누구나 가할 수는 있다 . 그러나 누구도 제거할 수는 없다 .

 

914

그들은 사욕을 활동시키고 불안을 억제한다 . 오히려 그 반대로 했어야 할 것이다 .

 

915

몽탈트 = 미지근한 의견이 사람들의 마음에 들 것은 틀림없고 ,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것이 기이할 정도다 . 그런 의견은 모든 제한을 넘고 있기 때문이다 . 게다가 세상에는 진리를 보고 거기에 도달할 수는 없는 사람은 허다하지만 , 종교의 순결이 우리의 부패에 대항하고 있음을 모르는 사람은 드물다 . 영원히 보답이 에스코발의 도덕에 부여된다 함은 웃음거리다

 

916

개연론   = 그들은 진실한 원리를 다소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이를 남용한다 . 그런데 진리의 남용은 허위의 채용과 마찬가지로 처벌되어야 할 것이다 .

마치 두 개의 지옥이 하나는 사랑에 어긋나는 죄인을 위해 , 다른 하나는 정의에 어긋나는 죄인을 위해 있기나 하는 것처럼 .

 

917

개연론 = 만약 그럴듯해 보이는 것이 확실한 것이었다면 진리를 탐구한 성도들의 열의는 도로였을 것이다 . 가장 확실한 것을 끊임없이 구하던 성도들의 두려움 ( 성 테레사는 늘 청죄사 ( 聽罪師 ) 에 순종했다 ) .

 

918

개연론을 제거하라 . 그러면 당신들은 세상 사람들의 마음에 들지 못할 것이다 . 개연론을 들고 나오라 . 그러면 당신들은 세상 사람들의 기분을 상하지 않을 것이다 .

 

919

신분 높은 사람들이 아첨받기를 원한 것도 , 제수이트가 그런 사람으로부터 귀여움을 받기를 원한 것도 민중과 제수이트의 죄의 결과이다 . 양자 중 한쪽은 기만하기 위해 , 다른 쪽은 기만당하기 위해 어느 편도 거짓 영혼으로 인도 당할 만한 자격이 있었다 . 그들은 탐욕적이고 , 야심가이고 , 향락적이었다 . 「 교사를 증가하고 . 」 그런 교사들에게 digni sunt 알맞은 제자들로서 , 그들은 아첨하는 자를 구하고 그것을 발견한 것이다 .

 

920

만약 그들이 개연론을 버리지 않는다면 그들의 좋은 격언도 나쁜 격언과 마찬가지로 그다지 신성하지 않게 된다 . 그것들이 인간적 권위 위에 입각해 있는 까닭이다 . 따라서 그것들이 좀 더 정당해지면 그만큼 합리적으로도 될 것이나 결코 신성하게는 안 된다 . 그것들은 스스로를 접목한 야생의 나무과 같다 .

내가 말하는 바는 당신들을 계몽하는 데는 소용이 없을는지 모른다 . 민중에게는 도움을 될 것이다 .

만약 이 사람들이 침묵을 지키면 , 돌 ( 石 ) 이 말하게 될 것이다 .

침묵은 최대의 박해이다 . 성도들은 결코 침묵치 않았다 . 신의 소명이 필요하다는 것은 사실이나 , 사람이 과연 소명되어 있는가의 여부를 가르쳐 주는 것은 교회 회의의 재판이 아니고 , 말을 하는 필요성이다 . 그런데 로마 교황이 이미 언명하고 , 그가 진리를 유죄로 판결한 것이 드러나고 , 그것이 기록되고 , 그것을 반박한 책이 비난된 현재로서는 부당한 비난을 받으면 받을수록 , 또 광폭한 언론의 압박을 받으면 받을수록 우리는 더욱 높이 부르짖지 않을 수 없다 . 그 동안에 한 사람의 교황이 나타나 양 파의 주장을 듣고 옛 일에 비추어 정당한 판정을 내리게 될 것이요 , 그때까지 선량한 교황들은 교회가 계속 절규하는 소리를 듣게 돌 것이다 .

종교재판과 제수이트 교단 , 진리의 두 개의 방해물 .

왜 당신들은 아리우스주의로 그들을 비난하지 않는가 !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신이라고 말하지만 아마 본질적으로 그렇게 해석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 Dii estis ( 너희는 신이다 ) 라는 뜻으로 해석하고 있을는지도 모른다 .

만약 나의 편지가 로마에서 정죄된다면 내가 그 속에서 죄로 정한 것은 천상에서 죄로 정해지는 것이다 . Ad tuum , Domine gesu , tribunal appells ( 그대의 법정에 , 주 예수여 , 나 상소하나이다 ) .

당신들 자신이 타락하고 있다 .

나는 내가 정죄되었음을 알았을 때 내가 잘못 쓰지 않았다고 겁을 먹었다 . 그러나 수많은 신앙의 예가 그렇지 않음은 나로 하여금 확신을 가지게 해 준다 . 올바르게 쓰고 기록한다는 것은 벌써 용납되지 않게 되었다 . 그만큼 종교재판은 타락하고 또 무지한 것이다 .

「 인간에 순종하는 것보다 신에 순종하는 것이 좋다 . 」

나는 아무것도 무섭지 않다 .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 사교들은 그렇지 않다 . 포르루아얄은 겁을 먹고 있다 . 그러므로 그들을 분산시킨다는 것은 졸렬한 정책이다 . 왜냐하면 그들은 벌써 두려워하지 않고 두려움을 주는 자가 두었기 때문이다 . 나는 당신들의 개인적인 비난도 그것들이 성전 ( 聖傳 ) 의 비난 위에 입각해 있지 않는 한 별로 무서워하지 않는다 . 당신들은 전부를 비난하는가 ? 무엇이냐고 ! 나의 경의까지도 ?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 그러면 무엇을 비난하는가를 말해 달라 . 만약 나쁜 점과 그것이 왜 나쁜가를 지적할 수 없다면 아무 짓도 하지 말라 — 그런데 이것이 그들에게는 어려운 일이다 .

개연론 = 그들은 확실성이라는 것을 매우 묘하게 설명했다 . 그 이유는 자기네들의 길은 모두 확실하다고 단정해 놓으면서 , 그들은 그 길을 가기만 하면 아무런 위험도 없이 반드시 천국에 가 닿는 길을 확실하다고는 말하지 않고 , 자기들의 길에서 벗어날 위험이 없는 길을 확실하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

 

921

…성자들은 자기가 죄를 지고 있음을 깨닫는 데 세심하여서 자기의 선한 행위도 규탄한다 . 그런데 이 자들은 최대의 악인이라도 이를 방면하고자 세밀히 부심하다 .

이교의 현자들은 외관상은 마찬가지로 아름다우나 나쁜 기초를 가진 건물을 세웠다 . 그리고 악마들을 전혀 다른 기초 위에 서 있으면서도 외관의 비슷함을 가지고 사람들을 기만한다 .

과거 누구도 나처럼 훌륭한 입장을 가졌던 자는 없고 , 또 누구도 당신들처럼 좋은 미끼를 던져 준 자들이 없었다 .

그들은 나의 개인적인 취약성을 지적하면 지적할수록 나의 입장을 강화해 주는 것이다 .

당신들은 나를 이단자라고 한다 . 그런 것이 용서될 수 있을까 ? 당신들은 인간이 올바르게 심판함을 무서워하지 않더라도 , 신이 올바른 심판을 하는 것을 무서워하지 않는가 ?

당신들도 얼마 안 가 진리의 힘을 깨닫고 거기에 굴복하게 될 것이다… .

그런 소경에는 어떤 이상한 것이 있다 .

「 그들이 받아야 할 운명 . 」

가장 철면피한 허위 .

「 인간은 그 지혜에 따라 칭찬 받는다 . 」

허위의 경건 , 이중의 죄 .

나는 3 만 인에 대한 한 사람인가 ? 아니다 . 당신들은 궁전을 지키고 사기를 지켜라 . 나는 진리를 수호할 것이다 . 그것이 나의 힘의 전부이다 . 만약 내가 진리를 상실하면 나는 멸망하게 될 것이다 . 나에게는 비난과 박해가 불절한 것이다 . 그러나 나는 진리를 가지고 있다 . 어쨌든 간에 누가 승리자가 될 것인가를 알게 될 것이다 .

나는 종교를 옹호할 자격이 없다 . 그러나 당신들도 오류와 부정을 옹호할 자격이 없다 . 원하오니 신이 그 자애심을 가지고 나에게 있는 악을 끄집어내시고 , 당신들에게 있는 선을 모두 돌보사 , 우리 전부에게 혜택을 주셔서 진리가 나의 손에 의해 굴복되지 않고 , 허위가… .

 

922

개연 = 우리가 애호하는 것을 서로 대조함으로써 우리가 정말로 신을 탐구하고 있는가 , 그렇지 못한가를 조사해 보도록 하자 . 이 육식이 나에게 독이 되지 않음은 「 확실한 것 같다 」 . 내가 청원을 안 하기 때문에 소송에 지지 않게 되는 것도 「 확실한 것 같다 」 .

 

923

참회의 예전 ( 禮典 ) 에 의해서 죄를 용서하는 것만이 사면이 아니다 . 뉘우치고 깨달아도 사면한다 . 뉘우치고 깨닫는 것이 예전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면 정말로 아니다 .

 

924

약속을 지키지 않고 , 신앙이 없고 , 명예를 중히 알지 않고 , 언행이 표리부동하고 , 새와 물고기 사이의 애매한 위치를 점하고 , 과거 당신들에게 비난받은 우화 속에 나오는 저 양서 ( 兩棲 ) 동물에 흡사한 사람들… .

왕이나 제후는 경건하다는 칭찬을 받는 것이 중요하다 . 그 때문에 그들은 당신들에게 고백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

 

 

 

 

  

파스칼의 생애

블레즈 파스칼 (Blaise Pascal) 은 1623 년 중부 프랑스의 오베르뉴 주의 수도 클레르몽에서 탄생했다 . 그의 아버지 에티엔느는 그 지방의 세무재판소 차장을 본 직업으로 하고 있었으나 , 수학자로서도 일가를 이루고 , 나머지 과학에 대해서도 조예가 깊은 인물이었다 . 그의 사상은 스콜라 철학에서 벗어난 진보주의였고 , 그의 종교는 온건한 가톨릭교였다 . 파스칼의 어머니 앙투와네트는 신앙심이 깊고 지혜 있는 부인이었다고 전하나 , 그가 세 살 나던 해 세상을 떠났으므로 자세한 것은 알려지지 않았다 . 그의 누님 질베르트는 재색 겸비한 부인이었는데 , 후일 페리에 씨와 결혼하여 파스칼의 최초의 훌륭한 전기를 썼다 . 누이동생 자크린느 역시 재색 겸비한 여성이었는데 , 그 뛰어난 예술적인 재능을 버리고 포르루아얄 수도원에 들어가 파스칼에게 깊은 종교적 감화를 주었다 .

파스칼은 어렸을 때부터 두뇌가 명석하고 탐구심이 왕성한 아이로서 , 가끔 날카로운 질문을 던져 주위의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 아버지는 이 아들의 전도에 많은 기대를 걸어 , 재혼을 거부하면서까지 교육에 힘썼다 . 그 보람이 있었음인지 파스칼은 천재의 특유한 조숙성을 발휘하여 열한 살 때 이미 손님의 식탁 위에 놓인 접시와 나이프가 마주쳐서 생겨나는 소리에서 힌트를 얻어 , 음향에 흥미를 가지고 그에 관한 실험을 몇 번이고 해 본 결과 , < 음향론 > 이라는 최초의 논문을 썼다 . 또 열두 살 때 누구에게도 배우지 않은 기하학을 습득하고 점차로 숙달하여 삼각형의 내각의 총합은 180 °라는 명제까지 이르러 , 아버지와 그 친구를 놀라게 하였다 .

그가 파리 과학학사원의 전신이 된 연구회에 출입하여 , 수학이나 물리학의 문제를 처리하게 된 것은 그 나이 14, 15 세밖에 안 된 때였다 . 이 회에는 신부 멜센느를 비롯해 당시 제 1 류의 과학자들이 모여 있었는데 , 소년 파스칼은 그 사람들 사이에 섞여 당당히 문제를 내기도 하고 풀기도 했다 . 그가 과학적 정신을 깨닫게 된 것은 어렸을 때부터의 아버지의 교육이나 시대의 분위기에 의함은 물론이지만 , 직접적으로는 이 사람들의 감화나 지도에 유래하는 바 크다 . 특히 그의 과학적 방법 , 즉 스콜라 철학의 형이상학적 • 사변적 방법에 대한 실험적 • 객관적 방법은 이런 사람들과의 학문상 접촉에서 배운 바 크다 .

그는 한 번도 학교 문에 들어가 본 일이 없었지만 이와 같은 산 교육에 의해 학업이 진보하여 , 열여섯 살 때는 < 원추곡선론 ( 圓錐曲線論 ) > (Essai pour les conique ) 이라는 수학논문을 발표했다 . 이는 그 선배 데자르그의 방법을 채용하여 진일보의 발전을 이루어 근대 사영기하학에 접근을 실현한 것인데 , 그 속에는 천재의 최초의 섬광을 엿볼 수 있다고 한다 . 또 열아홉 살 때는 아버지의 일을 돕기 위해 계산기를 발표할 생각을 가졌는데 , 약 3 년간 고생 끝에 가감승제를 자유로이 할 수 있는 정밀한 기계를 제작했다 . 이것도 현대의 계산기의 선구를 이루는 것이라 한다 . 서른한 살 때 집필한 < 산술삼각론 ( 算術三角論 ) > ( Trait é du triangle arithm é tique ) 은 그의 수학 업적 중 매우 중요한 것의 하나다 . 이것은 사교계의 친구였던 슈발리에 드 메레의 제안에 따라서 고안한 수의 신기한 배열인데 , 확률 계산이나 순열 • 조합 등에 응용할 수 있는 , 극히 유용한 것이라고 한다 . 그리고 만년에는 그 당시 수학계의 숙제였던 사이클로이드의 문제를 몇 개 풀어 그것을 회람이나 소책자로써 공표했다 .

< 사이크로이드에 관한 회장 ( 回章 ) > (Lettres circulaires relatives á la cycloide ) ․ < 전적선 ( 轉蹟線 ) 이야기 > (Histoire de la roulette) 등이 그것인데 , 이는 미적분 발견에의 일 과정을 이루는 것으로서 , 파스칼 사후 라이프니츠는 그가 남긴 도형을 보고 큰 영감을 받았다고 한다 .

수학 외에 그는 물리학의 연구에도 흥미를 가져 그 방면의 실험도 많이 했다 . 스물세 살 때 갈릴레이의 제자 트리체리가 이탈이아에서 행한 진공 실험을 프랑스에서 최초로 반복하여 일반에게 공개했다 . 그 후부터 그는 이 문제를 추구하여 더 넓은 분야에까지 진출하여 공기에 무게가 있다는 것 , 그 무게가 다른 유체와 균형을 유지함으로써 여러 가지 자연현상이 일어난다는 것을 밝혀 유체정력학 ( 流體靜力學 ) 의 기본법칙을 설정하게 되었다 . 이런 실험과 연구는 < 진공론 ( 眞空論 ) > • < 유체균형론 ( 流體均衡論 ) > • < 기중론 ( 氣重論 ) > ( Trait é de la masse de l ’ air) 등 여러 논문에 이론적으로 전개됨과 아울러 , 기압계 • 수압펌프 등에 실제로 응용되었다 . 유명한 < 파스칼의 원리 > 는 이런 업적의 일부를 이루는 것이다 .

 

파스칼은 날 때부터 몸이 약했다 . 그의 건강은 과학의 연구나 발명으로 말미암아 너무 악화되고 , 25~26 세 될 무렵에는 벌써 보통의 업무를 지탱해 낼 수 없게 되었다 . 그래서 그는 의사의 권고에 못 이기어 사교계에 드나들고 , 심심풀이로써 건강을 회복하고자 노력하기 시작했다 . 그는 로아네스라는 젊은 공작과 사귀게 되었고 , 또 슈발리에 드 메레 , 미튼과 같은 사교인과도 교제하게 된 것 같다 . 또 여성으로서는 리슈류의 조카딸 에귀욘 공작부인이나 라 로슈푸코의 친구 사브레 후작부인과 깊이 사귀고 , 그 살롱이나 정원에서 오락이나 내기에 열중했다 .

이 시대의 초기에는 재기 있는 파스칼도 세련되지 못해 가끔 웃음거리가 되었던 모양이나 만사에 철저하지 않고는 못 배겼던 그인지라 , 얼마 안 가 이 방면에도 숙달하게 되었다 . 그렇다고 하여 그가 부도덕한 행위로 타락한 것은 아니다 . 이 점 그는 매우 근엄한 바 있었으나 , 원래가 재기 있는 사람이라 사교계에 출입한 지 얼마 안가 , 사교계의 표리에 능통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 당시 사교계에서 유명하던 것으로서 그의 흥미를 이끌지 않은 것은 거의 없었다 . 에픽테토스의 철학 , 몽테뉴의 에세이 , 스카론이나 스퀴데리의 문학 • 회화 • 음악 • 극 • 시 • 잠언 • 담화 • 골패 • 정구 • 수렵 • 도박 등등 . 후일 ≪팡세≫ 속에 삽입되어 그 생동한 소재가 된 것은 주로 이때 배운 것이었다 . 통설에 의하면 그는 이 동안에 로아네스 공의 여동생 샬롯트와 연애도 하였다고 하나 확실하지는 않다 . 만일에 < 애정에 관하여 > ( Discours sur les passions de l ’ amour) 라는 글이 그의 진필이라면 , 그는 이 글을 통해서 그 여자에 대한 연정을 은근히 토로하였던 셈이 된다 . 어쨌든 그가 그 여자와 결혼하지 않았던 것만은 사실이다 .

이 사교생활로 말미암아 파스칼은 여태까지 알지 못했던 세계를 발견하였다 . 이 세계는 인간의 마음의 세계요 , 미묘한 심리의 세계이다 . 이성으로만 뻗치던 이 젊은 과학자는 그가 자연계를 대할 때 쓰던 척도나 방법이 이 세계에서는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 이 섬세의 세계에서는 직관만이 유용한 척도여서 그것 없이는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다 . 섬세의 정신을 못 가진 지성인은 인간의 마음의 세계에 있어서는 한낱 시골뜨기에 지나지 않는다 . 이리하여 파스칼은 과학자와 인간학자를 겸하게 되었는데 , 그가 후세 문학사가들로부터 가끔 「 모럴리스트 」 ( moraliste ) 로 불리는 까닭은 여기에 있다 ( 본문 1 참조 ) .

 

그러나 파스칼의 심오한 혼은 이 제 2 의 세계에도 오랫동안 머물러 있을 수가 없었다 . 그리하여 제 3 의 질서인 신앙과 사람의 세계에 들어서게 된다 .

원래 그의 아버지는 성실한 가톨릭교도였으므로 그는 어릴 때부터 보통의 종교교육을 받은 바 있다 . 이 교육을 통해 그는 성서를 알게 되고 , 그리스도를 믿게 되고 , 신을 사랑하게 되었다 . 그리고 또 진공의 실험에 착수하기 직전 , 그는 어떤 인연으로 포르루아얄에 속하는 사람들과 접촉하게 되고 , 그들의 지도로 장세니즘의 신앙에 이끌려 , 그 가족과 더불어 신생 ( 新生 ) 을 경험한 일까지 있었다 . 그의 23 세 때의 < 최초의 회심 ( 回心 ) > ( Premi é re conversion) 이 그것이다 . 이 무렵 그는 장세니우스나 , 생 시랑이나 , 아르노 등 장세니즘 일파 사람들의 저작을 읽고 많은 감명을 받았다 . 그러나 과학연구에 깊이 들어가고 사교생활에 출입함에 따라 종교적 감격은 거의 사라지고 종교에 대한 흥미도 다른 것들에 의해 대체되었던 것이다 .

그러나 사교생활에도 한계가 있었다 . 서른 살도 끝날 무렵 파스칼은 그 한계에 부딪쳐 어쩔 수 없는 혼미를 느끼기 시작했다 . 지금까지의 생활에 대한 혐오와 멸시가 생기고 , 과거에 그를 매혹했던 일체의 향락이 어리석은 것으로 보이게 되었다 . 그는 혼의 어두운 밤을 그의 소위 「 신을 떠난 인간의 비참 」 ( 본문 60) 의 광야를 방황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 그 걷잡을 수 없는 마음의 공허를 채우고자 , 한동안 수학의 연구에 구원을 바란 일이 있었으나 「 외적 사물에 관한 학문은 고뇌할 적의 도덕적 무지를 위로해 주지는 않았다 」 ( 본문 67) .

남은 길은 단 하나 신앙에 돌아가는 것뿐이었다 . 파스칼은 그 누이동생이 수녀로 있는 포르루아얄에 빈번히 드나들게 되었다 . 그러는 동안 그의 마음에서는 쾌락이냐 신앙이냐 , 세속이냐 신이냐 하는 새로운 갈등이 날이 갈수록 더욱 심하게 벌어지게 되었다 . 이 내적 고민을 그는 < 죄인의 회심 ( 回心 ) 에 관해 > 라는 단상 속에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

“신이 진실로 접촉하고자 하는 혼에 최초로 일으켜 주는 것은 완전히 이상한 인식과 관측이어서 , 이로 말미암아 혼은 사물과 자신을 전혀 새로운 태도를 가지고 고료하게 된다 . 이 새로운 빛은 그에게 공포를 주고 , 지난날 그의 무상의 쾌락이었던 사물 속에 그가 발견했던 안식을 교란하는 의혹을 초래한다 . 혼은 자기를 매혹했던 사물을 벌써 조용히 즐길 수 없게 된다 . 끊임없는 불안이 향락에 젖어 있는 그와 싸운다 . 이 내적 성찰은 그가 전신을 기울여 탐닉하던 사물 속에 오랫동안 맛본 저 감미를 다시 맛보여 주지 않는다 . …”

이러한 심각한 고민 끝에 , 드디어 올 것이 왔다 . 1654 년 11 월 23 일 밤의 「 결정적 회심 」 (Conversion definitive) 이 그것이다 .

「 아브라함의 신 , 이삭의 신 , 야곱의 신 」 은 철학자나 학자의 신이 아니다 .

확신 • 확신 • 감격 • 환희 • 평화 .

예수 그리스도의 신 .

「 나의 신 즉 너의 신 . 」

너의 신은 나의 신이리라 .

신 이외 이 세상 및 일체 사물의 망각 .

그는 복음에 표시된 길에 의해서만 발견된다 .

인간의 혼의 위대함이여 .

「 의로운 아버지시여 . 세상은 그대를 전혀 모르되 , 나는 그대를 아노라 . 」

환희 • 환희 • 환희 • 환의의 눈물 .

나는 그대로부터 떠나 있었다 .

「 산 물의 원천인 나를 버렸도다 . 」

「 나의 신이시여 . 어째서 나를 버리나이까 . 」

원컨대 나 영원히 그대로부터 떨어지지 않기를… (1654 년 11 월 23 일부 「 각서 」 ) .

이상 그 자신의 수기가 무엇보다도 정확히 이때의 경험 내용을 이야기 하고 있다 . 그는 이때 예수 그리스도와 완전히 결합함으로써 천래의 영광을 받은 것이다 . 이 회심이 있는 후 , 파스칼은 속세를 떠나 포르루아얄 수도원에 객원으로 입원하여 , 거기 사는 은사들과 기거를 같이하면서 신앙의 생활에 이바지했다 . 아침은 일찍부터 일어나 모든 정례의 근행에 출석하고 , 단식이나 철야의 기도에 참가하여 오로지 신앙의 수련에 힘썼다 . 「 모든 쾌락과 모든 사치를 버린다 」 는 것이 그의 새로운 생활의 근본 방침이었다 . 그는 또 수도원에 부속해 있던 「 조그마한 학교 」 (Les petites é coles) 의 교육에도 참여하고 , 국어의 교수법에 전과 다른 새로운 방면을 개척함과 아울러 , 교사용 교과서 초안 작성에도 참가했다 . 이리하여 그는 신에 붙잡힌 신앙에 성찰함으로써 오랫동안 애달프게 구하던 혼의 휴식과 평안을 발견하고 넘쳐흐르는 자유와 환희를 맛보게 되었다 .

이 회심자의 내심의 파란이 안정될 무렵 외계의 폭풍우는 이와 반비례로 사나와져 , 그를 그 와중에 이끌고 들어갔다 . 이전부터 대립해 있던 제수이트나 장세니스트 사이의 항쟁이 발화점에 달했던 것이다 . 이 항쟁을 격발시킨 것은 포르루아얄의 대표적 인물 앙투안 아르노였다 . 이 논쟁을 좋아하는 신학자의 격정적인 언사는 무슨 일이 생기지 않을까 하고 기다리고 있던 상대방을 자극하여 , 사태를 극도로 악화시켜 마침내 전 포르루아얄 탄압을 강행하게 하였다 . 사태가 이렇게 되자 그 일원인 파스칼도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 그는 동지가 권하는 대로 토론 공격의 정면에서 장세니스트를 옹호함과 동시에 제수이트를 반격하는 일련 의 문필을 써서 연달아 발표하였다 . 18 통의 서간문체에 의한 신학론 ≪ 프로뱅시알 ≫ ( Provinciales ) 이야말로 이 전쟁에서 그가 사용한 무기인데 , 이는 전 세상의 눈과 귀를 이 문제에 집중시켰던 것이다 . 이는 예기 이상의 성공을 거두어 논적을 혼란에 빠뜨렸고 , 대중을 자기편에 이끄는데 도움을 주었다 . 그 문체도 경연완급 자재한 것이어서 프랑스 문학사상 하나의 새로운 기원을 그어 놓은 것이다 . 후일 볼테르가 이를 가리켜 , 「 산문으로 쓰인 최초의 천재적 저작 」 이라고 칭찬하였다 .

그 싸움이 한참 벌어지고 있을 무렵 하나의 기적적인 사건이 돌발했다 . 파스칼의 누님의 딸 마르그리트의 악질적인 눈병이 예수의 십자가에 씌워졌던 형관의 유물이라고 하는 것에 접함으로써 기이하게도 치유되었다 . 그 형관이 과연 진품이었던가는 별 문제로 하고 , 병이 완쾌하였다는 것만은 당시의 권위 있는 의사들에 의해서도 확인된 사실이라 , 이는 소위 「 성 형 ( 聖荊 ) 의 기적 」 (Le miracle de la sainte-Epine ) 으로서 세상에 널리 알려졌던 것이다 . 이 사건이 파스칼의 정신에 미친 영향은 매우 컸다 . 그의 누님 질베르트 페리에 부인은 ≪파스칼의 생애≫라는 저술 속에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다 .

「 아우는 자기 일신상에 일어난 이 은총에 심히 감격했다 . 그것은 기적을 받은 아이가 , 혈연이 통하는 친척이었다는 점 외에도 세례를 받을 때에 그가 이름을 지어 주었던 아이였던 까닭이다 . 세계의 대다수의 사람들의 마음에서 신앙이 완전히 자취를 감추어 버리지나 않나 하고 생각되었을 때 , 신이 이렇게도 명료하게 자기를 나타내신 것을 보고 그는 비상한 위안을 받았다 . 이에 관한 그의 기쁨은 참으로 큰 것이어서 , 그는 마치 그 기쁨에 몸부림치는 것 같았다 . 이리하여 그 때문에 완전히 마음과 혼을 빼앗겼던 그는 , 신으로부터 기적에 관해 무수히 훌륭한 사상을 계시 받았다 . 그것은 종교에 관한 새로운 빛을 그에게 주었고 , 그가 종래의 종교에 대해서 가지고 있었던 사랑과 존경을 배가시켰다 .

이것이 그로 하여금 무신론자들의 주요한 최강의 이론을 반박코자 하는 열렬한 투지를 갖게 한 기회였다 . 그는 그들의 이론을 세밀히 연구하고 그것을 극복할 모든 방법을 찾아내는 데 온갖 정력을 기울였다 .

그것을 위해 그는 모든 것을 바쳤다 . 그의 만년의 노력은 이 문제에 관해 여러 가지 사상을 수집하는 데 전부 소모되었다 . 」

이와 같은 경로로 파스칼은 그 필생의 저작으로서 ≪그리스도교 변증론≫ ( Apologie de la religion chr é tienne ) 의 집필을 결심하게 되었다 . 이 「 성 형 ( 聖荊 ) 의 기적 」 이 일어난 것은 1656 년 3 월 24 일의 일이었는데 이때 파스칼은 제 5 프로뱅시알을 끝마치고 , 제 6 프로뱅시알을 집필 중에 있었다 . 그 후에도 파스칼은 대 제수이트 논쟁을 계속하다가 1657 년 3 월 24 일에 발표한 제 18 프로뱅시알로써 이 논쟁에 일단락을 지었다 . 이것이 끝나자 그는 ≪그리스도교 변증론≫의 저작에 본격적으로 착수하기 시작했다 . 그는 먼저 성서를 비롯해 되도록 많은 참고서를 읽고 , 다음에는 복안을 짜고 , 서서히 자료가 될 만한 사상을 기록해 놓았다 . 그러던 차 1658 년경부터 그는 건강이 다시 악화하여 자리에 누워 세월을 보내는 날이 많게 되었다 . 그때부터 그는 마음에 떠오르는 사상을 손쉽게 붙잡을 수 있도록 종잇조각에다가 떨리는 손으로 써 두던가 , 조카나 하인에게 구술로써 필기시키곤 했다 . 그 속에는 평범한 메모도 있고 , 이해하기 어려운 단편도 있고 , 반대자와의 짧은 대화도 있고 비교적 정돈된 긴 논고도 있었다 . 그런데 아깝게도 그는 그것들을 집대성하여 편저할 만한 능력을 충분히 가지고 있으면서도 이 일을 할 만한 수명이 허락되지 않았으므로 중도에 이 세상을 떠나지 않으면 안 되었다 . 그 주저 ≪팡세≫ (Pens é es) 는 그 사후 그의 방에 쌓여 있던 종잇조각들을 친구들이 모아 정리하고 분류해서 출판한 것이다 . 그 권두에는 Pendent opera interrupta ( 일이 중단된 채 ) 라고 기록되어 있다 .

임종이 가까워짐에 따라 파스칼의 혼은 성정의 성에 접근하고 숭고의 빛을 발하게 되었다 . 만년의 그는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사랑과 봉사를 창립하여 그 이익을 자선사업에 바치고자 했다 . 죽기 2 개월 전 그는 자기 집에 가난한 한 가족을 동거시켰는데 , 그 집 아들이 천연두에 결렸으므로 그는 자기를 문병 오는 사람들의 위험을 생각하여 병자와 그 가족을 집에서 내보내는 대신 , 자기가 억지로 집을 나와 누님 댁으로 옮겼다 . 사랑 • 단순 • 겸손은 병상의 그를 특징짓는 성격이었다 . 거의 숨이 넘어갈 무렵에 그는 가난한 사람과 같이 죽기를 원하고 , 그 때문에 가난한 병자를 그의 병실로 데려오든가 , 자신을 자선병원으로 데려다 주기를 간절히 원했다 .

최후의 성찬에는 눈물을 흘릴 정도의 감동으로 이를 배수하고 “주여 , 나를 버리지 마소서”라는 , 십자가의 그리스도를 방불하게 하는 말을 남기고 눈을 감았다 . 때는 1662 년 , 그의 나이는 39 세였다 . 이와 같이 파스칼은 그 ≪팡세≫ 속에 기록한 신앙을 몸소 실천하면서 영원한 세계로 옮겨간 것이다 .

각주

[1] 기하학의 정신이란 것은 대개 수학적인 두뇌를 말하고 섬세의 정신은 직관적 관능을 말한다.

[2] 이 말의 원문은 le sentiment이지만, 파스칼은 l’intuition과 동의로 사용한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이렇게 번역한다.

[3] 원어는 1’esprit.

[4] 원어는 passions.

[5] 원어는 âme.

[6] 스카라무슈는 이탈리아의 배우. 본명은 티베리오 피오렐리이고 서기 1953~1959년에 쁘띠 부르봉에서 연극을 하였다. 코메디아 델아르트라는 극에서 그는 학자의 전통적인 역할을 연출하였다. 파스칼은 1653년에 이 연극을 보고 성격의 특징에서 받은 인상을 이 단장에 기록한 것이다(원주).

[7] 크레오뷰린은 코린트의 여왕인데, 스퀴데리양의 유명한 소설 아르타멘느 또는 대씨 루스에 등장하는 인물. 이 여자는 자기 신하의 중의 한 남자에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애정을 느끼고 연애하는 줄 모르면서 연애하였다(원주).

[8] 단장, 310․311 참조.

[9] 이 단장은 단장 15의 부록으로 되어 있으며 16은 없다.

[10] 이 강은 담화에 비유한 말이다.

[11] 살로몬 드 튤티(Salomon de Tultie)는 프로뱅시알의 저자 Louis Montalte의 철자 위치를 바꿔 쓴 전철어이며 파스칼 자신의 필명이다.

[12] 스토아학파의 표어.

[13] 여기 초상화(portrait)는 인물의 내적 성격을 표시하려던 사진적 작품. 상상화(tableau)는 외적 효과를 중시한 기교적 작품으로 이해하여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