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불교와 분석심리학의 만남
나무 한 그루
이 문 성
언젠간 시들고야 말겠지만
아름답게 꽃을 피워내야 하겠고
아름다운 꽃 이파리도 가는 세월 따라
바람에 실려 보내야 하겠지
내 인생도 그렇게
한 그루의 나무가
아름답게 피워낸 한 송이의 꽃이
시들어 떨어지는 꽃 이파리가 아니겠는가.
내 인생처럼 그렇게
한 송이의 꽃이 시들어 사라져도
봄이 오면 다시 아름답게
꽃을 피워내는 한 그루의 나무.
차 례
어리석은 부처님과 깨달은 중생 ❙ 왜 육조단경(六祖壇經)인가? ❙ 자성(自性)과 자기(自己) ❙ 당신의 생각, 당신이 생각한 것인가? ❙ 어리석은 자성(自性)과 깨달은 자성(自性)
어떤 것이 ‘참나’던고? ❙ 어떤 것을 ‘나’라고 하였던가? ❙ 이성(理性)이란 무엇인가? ❙ 부처님의 말씀도 의심하기 ❙ 부모미생전본래면목(父母未生前本來面目) ❙ ‘참나’를 알았다?
자성(自性)의 수레바퀴 ❙ 무념, 무상, 무주(無念無相無住)의 수레바퀴 ❙ 인격발달의 수레바퀴: 성주괴공(成住壞空) ❙ 성(成): 자아형성 ❙ 주(住): 자아실현 ❙ 괴(壞): 자발적 자아희생 ❙ 공(空): 자기실현
카를 구스타프 융과 분석심리학 ❙ 뜻을 알면 생멸을 떠난다(解義離生滅) ❙ 모두 대법(對法)을 취하여라 ❙ 마땅히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내어라 ❙ 항상 허물을 드러내어 자기에게 있게 하라 ❙ 마군(魔軍)이 변하여 부처가 된다
어리석은 부처님과 깨달은 중생
부처는 자기의 성품이 지은 것이니, 몸 밖에서 구하지 말라.
자기의 성품이 미혹하면 부처가 곧 중생이요
자기의 성품이 깨달으면 중생이 곧 부처이니라.[1]
-돈황본 육조단경-
어리석은 사람을 중생이라 하고 깨달으면 부처라 하는데, 어찌 어리석은 부처님이 있고 깨달은 중생이 있을 수 있겠는가? 하지만 육조단경을 읽어보면 ‘어리석은 부처님’도 있고 ‘깨달은 중생’도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육조단경은 중국 선종(禪宗)의 육조(六祖) 혜능(慧能) 스님이 조계산에서 문인들에게 설법한 것을 기록한 경전인데, 바로 이 책에서 혜능(慧能) 스님은 ‘자기의 성품이 미혹하면 부처가 곧 중생이요, 자기의 성품이 깨달으면 중생이 곧 부처이니라.’고 하였다. 여기서 ‘자기의 성품’은 육조단경 원문에 있는 자성(自性)이라는 낱말을 풀어서 말한 것이고 ‘미혹하다’는 말의 뜻은 무엇에 홀려 정신을 차리지 못한다는 것이다.[2] 그렇다면 자성이 무엇에 홀리게 되면 부처가 곧 중생이 된다는 것일까?
미혹한 사람은 경계 위에 생각을 두고 생각 위에 곧 삿된 견해를 일으키므로 그것을 반연하여 모든 번뇌와 망령된 생각이 이로부터 생기느니라.[3]
‘자성이 미혹하면 부처가 곧 중생이요’라는 혜능 스님의 설법으로 미루어보면 ‘미혹한 사람’의 말뜻은 ‘자성이 미혹한 중생’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미혹한 사람은 경계 위에 생각을 둔다.’고 하였으니 자성이 경계[4]에 홀려서 정신을 차리지 못하면 부처가 곧 중생이라는 가르침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자성이 미혹(迷惑)하다’라는 말을 우리말로 풀어서 자성이 깨닫지 못하여 어리석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면, 위에서 인용한 육조단경의 구절은 ‘자성(自性)이 어리석으면 부처가 곧 중생이요, 자성(自性)이 깨달으면 중생이 곧 부처이니라.’는 말이 된다.
앞에서 인용한 육조단경의 구절에서 눈여겨봐야 할 점은 ‘누가’ 깨닫고 ‘누가’ 어리석은가이다. 자성이 깨닫고 자성이 어리석다고 하였으므로, 그 ‘누가’, 즉 주체는 ‘자성(自性)’이다. 그리고 ‘부처는 자기의 성품(自性)이 지은 것이니’라는 구절에서도 부처를 ‘누가’ 만드는가 하면 자성(自性)이 주체로서 부처를 만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부처를 만든 것이 자성이라면, 중생도 또한 자성이 어리석어서 만든 것이다. 부처가 깨닫는 게 아니라 자성이 깨달아서 부처가 되는 것이며, 중생이 어리석은 게 아니라 자성이 어리석어 중생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처와 중생은 자성(自性)이 어리석거나 깨달아서 만들게 되는 두 가지 겉모습일 뿐이고, 부처와 중생의 본래 성품인 자성은 원래 하나이며 서로 같은 것이다.
‘부처가 곧 중생이요, 중생이 곧 부처이니라.’는 구절도 부처와 중생의 자성(自性)이 원래 하나이며 서로 같기 때문에 부처와 중생도 원래 하나이며 서로 같다는 말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원래 하나라고 하더라도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은 부처와 중생이라는 서로 다르고 구별이 가능한 두 가지이다. 그러므로 같으면서 또한 다른 것이 부처님과 중생이리라. 그리하여 ‘어리석은 부처님’과 ‘깨달은 중생’이라는 역설적인 표현도 가능하게 된다.
앞에서 인용한 육조단경의 구절은 ‘자성이 어리석은 부처님은 곧 중생이요, 자성이 깨달은 중생은 곧 부처님이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여기서 ‘자성이 어리석은 부처님’을 줄여서 ‘어리석은 부처님’이라고 하였을 때 이 말은 중생을 뜻하게 된다. 마찬가지로 ‘자성이 깨달은 중생’은 ‘깨달은 중생’으로 줄일 수 있고 이 말은 부처님을 뜻하게 된다.
저자는 육조단경을 읽고 나서, 깨달음에 대하여 이전에 가지고 있었던 저자의 관점이 잘못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저자는 깨달음의 주체가 나라고 생각하고 있음을 발견하였다. 깊이 생각해서 그런 결론을 내린 것이 아니고, 그냥 그렇게 생각하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잘못된 생각에 빠져서 살아온 것은 이 세상을 살아오면서 익히게 된 습기(習氣)때문이었을 것이다. 육조단경은 저자가 이런 습기에 빠져있었음을 알게 해주었을 뿐만 아니라 벗어날 수 있는 길도 가르쳐주었다.
그리고 앞에서 말한 것처럼, 깨달음의 주체가 중생인 내가 아니라 자성(自性)이라는 점을 가르쳐주는 육조단경을 읽고 나서 알게 된 것은 내가 아무리 깨달았다고 해도 깨달은 게 아니고 망상일 가능성이 많다는 것이다. 견성성불(見性成佛)이라 하여 부처가 되려면 우선 자성(自性)을 보아야만 되는데, 자성이 무엇인가? 알음알이, 즉 지적인 이해로는 자성을 볼 수 없다고 한다. 말 그대로 불가사의(不可思議)한, 도저히 생각으로는 알 수 없는 것이 자성이라고 하니 자성을 보지도 않고 책 좀 보고 나서 깨달았다고 하면 망상임에 틀림이 없다. 그리하여 저자는 망상에서 벗어나 참모습인 자성(自性)을 보는 것을 인생의 목표로 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자성(自性)을 보기 위한 불교수행에는 많은 종류가 있다. 그중에서 어떤 수행 방법을 따르는가는 개개인(箇箇人)의 인연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저자는 한국의 간화선 전통에 마음이 이끌렸다. 그래서 큰 스님께 화두를 받아서 참구를 해왔다. 화두참구를 하는 한편, 칼 구스타프 융의 분석심리학이 전공인 저자로서는 어쩔 수 없이 분석심리학과 선불교를 서로 비교하여 ‘알음알이’로서 이해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한국 선불교의 핵심 경전 중 하나인 육조단경을 분석심리학적으로 이해하려고 노력해왔고 이 책은 그 결과물이다.
육조단경은 중국 선종(禪宗)의 육조(六祖) 혜능(慧能) 스님이 조계산에서 문인들에게 설법한 것을 기록한 자서전적 경전이다. 이 경은 불교에 대한 중국적인 수용 형태를 대변해주는 고전이며 불교가 중국화하는 과정에서 매우 큰 역할을 담당하였음은 육조 혜능의 멸후 이백여 년 만에 이른바 오가칠종(五家七宗)의 선종이 중국을 풍미할 때, 거의 모든 후학들이 혜능을 잇고 있다고 자부함에서 알 수 있다.[5]
그리고 한국불교에 대한 혜능의 영향력도 절대적이다. 신라 후기에서 고려 초에 많은 스님들이 중국에 건너가 혜능대사의 남종선(南宗禪)을 체득하고 돌아와 구산에 선문을 세운 것이 구산선문(九山禪門)이다. 이 구산선문 선사들은 모두 혜능대사의 손상좌 되는 마조와 석두 법맥을 이었기에 공통분모는 혜능대사였다. 이런 까닭에 우리나라 구산선문은 통칭해서 선종(禪宗) 또는 조사선(祖師禪)이라 하거나 혜능대사와 연관하여 남종선(南宗禪) 또는 조계선(曹溪禪) 등으로 불리었다. 중국에서는 선종이 혜능대사 법맥에서 모두 기원하여 임제종ㆍ위앙종ㆍ운문종ㆍ조동종ㆍ법안종 등의 5가7종으로 분화된다. 우리나라에서는 구산에 선문이 들어섰지만 조계종 단일 종파를 유지하였다. 그러므로 우리나라의 조계종은 중국과 일본에도 없는 종파 이름이다. 우리나라에서 ‘조계(曹溪)’라는 최초의 표현은 887년 쌍계사 진감국사비문에 진감국사를 조계(혜능)의 현손이라 기록한 것이다. 이후 많은 선사들의 비문에 공통적으로 조계 법손이라는 기록이 보이는데, 조계종이라는 이름은 1172년 대감국사의 비문에 ‘고려국조계종굴산하단속사대감국사(高麗國曹溪宗崛山下斷俗寺大鑑國師)’라는 구절이 나온다. 굴산선문이 조계종 소속임을 표현하고 있는데 이것은 구산선문이 공히 조계종 소속이었음을 표현한 것이다.[6]
고려시대 보조국사 지눌도 혜능이 머물던 조계산(曹溪山)의 이름을 따서 조계산 송광사의 정혜결사를 도모하였으며, 그때 그가 후학을 지도하던 귀감이 된 것은 바로 육조단경과 금강경이었다. 그리고 고려 말의 선승(禪僧) 태고 보우(太古 普愚), 나옹 혜근(懶翁 惠勤) 등이 중국에 유학하였다가 귀국한 후, 모두 육조(六祖) 혜능의 후예 임제의 법손(法孫)임을 자부하기도 하였다.[7]
혜능(慧能, 638-713)은 중국 당나라 시절의 승려로서 당시 일반적으로 사람들에게 경시된 남방의 소수민족 출신이었다. 혜능의 집안은 매우 가난하였으며, 그의 부친은 일찍 죽어 노모(老母)와 서로 의지하며 살다가 뒷날 남해(南海; 지금의 廣東省 光州市)로 가게 되었다. 혜능은 무일푼이어서 땔나무를 팔아서 생활하였다고 전해진다. 이러한 과장된 표현은 혜능의 조사선(祖師禪)[8]과 신수계의 여래선(如來禪)[9]을 구별하게 만들었으며, 또한 혜능이 평민으로서 종교의 영수(領袖)가 될 수 있다는 기본 특징을 부각시키고 있다. 실제로 여래선이 항상 귀족 계층에서 유행된 반면 조사선은 늘 외진 곳의 일반 민중 속에서 유행되었다. 특히 초기 단계에는 원시 기독교처럼 하층민의 종교였다.[10]
신수 등의 여래선은 점수적(漸修的)인 면에서 달마 이래의 선법을 발휘하였고, 혜능의 조사선은 돈오(頓悟)와 무수(無修)의 각도에서 선의 기본 정신을 세웠다. 신수 등이 선과 정치의 결합을 일으킬 때, 혜능은 오히려 선과 보통 사람들의 생활을 결합시키고, 신수가 진심(眞心)에 대해 형식상의 토론을 하고 있을 때, 혜능은 열정적으로 중생의 구체적인 염심(染心)에 관심을 가졌다. 또한 신수가 이념(離念)해탈을 추구할 때, 혜능은 진염(塵染)을 떠나지 않고 직지인심(直指人心)으로 해탈할 것을 선양하였으며, 신수가 일반적으로 내적인 선지식(善知識)을 담론할 때, 혜능은 자증자오(自證自悟)를 거듭 강조하였다.[11] 이후 혜능의 제자인 신회가 혜능의 정통성을 추진하자 남방에서 유행한 혜능의 남종(南宗)과 북방에서 유행한 신수의 북종(北宗)과의 대립이 심화되었지만 결국 혜능의 남종이 종파를 통일하여 전국적으로 넓게 퍼졌으며,[12] 만당(晩唐), 송(宋), 원(元) 불교에서는 조사선을 선학의 최고 단계로 보고, 선종의 가장 높은 단계로 삼았다.[13]
선불교의 역사에서 육조단경이 가지는 이러한 의미와 중요성으로 볼 때, 혜능 스님의 설법을 기록한 육조단경은 견성성불(見性成佛)하려는 참선 수행자는 물론이고 선불교의 깨달음이란 무엇인가를 연구하는 사람들이 기준으로 삼아야 할 가장 중요한 자료일 것이다.
일반적인 불교학에서 불성(佛性)이라고 부르는 것을 혜능은 자성(自性)이라고 부른다. 자성(自性)에서 ‘자(自)’는 배타적ㆍ독자적인 의미가 있으므로 자성은 구체적인 인성(人性)을 가리킨다.[14] 불성이라고 하면 내가 아닌 다른 곳에 있는 부처님의 본성이라는 느낌을 받기 쉽다. 그러나 혜능은 자성(自性)이라는 말을 사용하여 구체적인 개인의 자성(自性)이 불성이며 법신(法身)[15]임을 강조한다.
“선지식들아, 자기의 성품(自性)이 스스로 깨끗함을 보아라. 스스로 닦아 스스로 지음이 자기 성품(自性)인 법신이며, 스스로 행함이 부처님의 행위이며, 스스로 짓고 스스로 이룸이 부처님의 도이니라.”[16]
‘자기의 성품(自性)이 스스로 깨끗함을 보아라.’고 하였는데, ‘스스로’ 깨끗한 것의 주체도 역시 자성(自性)이다. 그리고 ‘스스로 닦아 스스로 지음이 자성법신(自性法身)이며,’라는 구절의 자성법신이 ‘스스로 닦아 스스로 지은’ 결과물인 보신(報身)이기도 하겠지만, ‘스스로 닦아 스스로 짓는’ 주체인 법신(法身)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스스로’의 주체를 법신(法身), 즉 자성(自性)이라고 보고 다음 구절을 해석하면, ‘자성법신이 스스로 행함이 부처님의 행위이며, 자성법신이 스스로 짓고 스스로 이룸이 부처님의 도이니라.’라고 할 수 있다. ‘나’, 즉 중생의 자아가 노력하여 부처가 되는 것이 아니라, 자성(自性)이 스스로 부처의 도를 이루는 것이다. 그러므로 ‘스스로’ 하는 주체도 ‘내’가 아니고 ‘자성’임이 분명하다.
또한 육조 혜능은 ‘스스로의 부처님’이라는 구절을 강조하여 구체적인 개인의 마음, 즉 자성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만약 부처님에게 귀의한다고 할진대는 부처가 어느 곳에 있으며, 만약 부처를 보지 못한다면 곧 귀의할 바가 없느니라. 이미 귀의할 바가 없으면 그 말이란 도리어 허망될 뿐이니라.
선지식들아 각각 스스로 관찰하여 그릇되게 마음을 쓰지 마라. 경의 말씀 가운데 「오직 스스로의 부처님께 귀의한다」 하였고 다른 부처에게 귀의한다고 말하지 않았으니, 자기의 성품에 귀의하지 아니하면 돌아갈 바가 없느니라.[17]
그리하여 혜능은 자성의 삼보(三寶)[18]에게 귀의하도록 한다.
선지식들아, 혜능이 선지식들에게 권하여 자성의 삼보에게 귀의하게 하나니, 부처란 깨달음이요 법이란 바름이며 승이란 깨끗함이니라.
자기의 마음이 깨달음에 귀의하여 삿되고 미혹이 나지 않고 적은 욕심으로 넉넉한 줄을 알아 재물을 떠나고 색을 떠나는 것을 양족존이라고 한다. 자기의 마음이 바름으로 돌아가 생각마다 삿되지 않으므로 곧 애착이 없나니 애착이 없는 것을 이욕존이라고 한다. 자기의 마음이 깨끗함으로 돌아가 모든 번뇌와 망념이 비록 자성에 있어도 자성이 그것에 물들지 않는 것을 중중존이라고 하느니라.[19]
‘경의 말씀 가운데 「오직 스스로의 부처님께 귀의한다」 하였고 다른 부처에게 귀의한다고 말하지 않았으니, 자성(自性)에 귀의하지 아니하면 돌아갈 바가 없다.’고 하였다. 그러나 사람들이 이것을 분명히 깨닫지 못하였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나게 될까?
‘자성(自性)이 스스로 자성(自性)에 귀의하는’ 것임을 분명히 깨닫지 못하면, ‘스스로의 부처님께 귀의’한다고 하더라도 그 주체는 ‘나’일 수밖에 없다. 그리하여 아마도 귀의하기는 하되 ‘스스로의 부처님’이 아니라 자성을 보았다고 착각하는 자아에게 귀의하게 될 것이다. 이런 경우는 분석심리학적 관점에서 보면, 다음에 설명할 마나 인격에 사로잡힌 자아의 팽창에 해당된다.
마나-인격[20]은 아득한 시간 이래 인간 정신에서 그에 상응하는 경험을 통하여 형성된 원형(原型, Archetype)에 해당된다. 원시인이 볼 때, 만약 다른 사람이 자기보다 더 똑똑하고 강하다면 그는 바로 마나를 가진 것이다. 즉, 그는 자신보다 더 큰 힘을 가지고 있다. 마찬가지로 그는 이 힘을 잃어버릴 수도 있는데, 그것은 아마도 그가 잠을 자고 있을 때 어떤 사람이 그의 몸 위로 넘어갔거나, 또는 그의 그림자를 밟았기 때문일 것이다.
마나-인격은 역사적으로는 영웅상과 신인(神人)으로 발전되어 왔는데 그 세속적인 형상은 사제이다.
......
자아가 아니마에 속한 것으로 보이는 힘을 자신에게 끌어온다면[21] 자아는 바로 마나-인격이 된다. 이런 발전은 거의 통상적인 현상이다. 나는 이런 유의 다소 진척된 발전과정이 적어도 일시적이라도 이와 같은 마나-인격의 원형과의 동일시가 일어나지 않고 이루어진 경우를 아직 본 적이 없다. 그런 일이 생기게 되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자연스러운 것이다. 왜냐하면 그 자신뿐만이 아니라 모든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되기를 기대하기 때문이다.
......
사람들은 어딘가에 구체적으로 촉지할 수 있는 영웅, 또는 탁월한 현인, 지도자, 아버지, 의심할 바 없는 권위를 찾으려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기꺼이 작은 신들에게 신전을 세워주고 향을 피우며 칭송한다. 이것은 분별력 없는 맹종자의 가련한 어리석음일 뿐 아니라 한번 있었던 것은 앞으로도 계속 되풀이해서 있게 된다는 심리학적 자연법칙이기도 하다. 의식이 원상(源像)[22]들의 순진한 구체화를 중단하지 않는 한, 그것은 항상 그렇게 될 것이다.[23]
자아가 이러한 ‘마나 인격 원형’과 동일시하는 경우의 위험성을 융은 다음과 같이 경고하고 있다.
원형에 사로잡히게 되면 인간을 단지 집단적 모습, 일종의 가면으로 만들어버리고 그 가면 뒤에서 인간적인 것은 더 이상 발전될 수 없고 점점 더 위축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마나–인격의 주요 특성에 빠질 수 있는 위험을 의식하고 있어야 한다. 그 위험은 자기 스스로 아버지의 가면이 되는 것뿐 아니라 또한 다른 사람이 그 가면을 쓸 때 그것에 빠지게 될 위험이기도 하다. 스승과 제자는 이런 뜻에서 같은 배를 탄 것이다.[24]
이러한 위험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은 마나-인격의 원형으로부터 자아를 구별함으로써 시작된다. 그렇게 되면 자기실현의 목표인 자기 자신에게로 되돌아가게 된다.
자아를 마나-인격의 원형으로부터 구별함으로써 마나-인격에 특이한 무의식의 내용을 의식화하지 않을 수 없다. 역사적으로 마나-인격은 언제나 비밀스런 이름이나 특별한 지식 또는 특수한 행동의 특권(주피터 신은 해도 되는 것을 소가 해서는 안 된다), 한 마디로 개인적 탁월성을 가지고 있다. 마나-인격의 원형을 구축하고 있는 내용의 의식화는 남성에게는 아버지로부터의, 여성에 있어서는 어머니로부터의 제2의 참된 해방을 의미하며, 이렇게 함으로써 자신의 개성[25]에 대한 진정한 지각이 처음으로 생기게 된다. 이 부분의 과정은 구체적인 형태의 원시적 성인식으로부터 기독교를 포함한 일종의 고대 신비종교가 공식화하고 있는 세례, 즉 육체적인(또는 ‘동물적인’) 부모로부터의 분리와 ‘새로운 갓난아기’로의 재탄생, 영생과 정신적 아들로서의 재탄생이 의도하는 바와 정확히 일치한다.
......
마나-인격에 특이한 무의식의 내용을 의식화함으로써 마나-인격이 사라지게 되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우리자신에게로 되돌아오는 길로 향하게 된다. 안과 밖의 두 세계상 사이에서 그리고 희미하게 파악되는 그 세계상들의 힘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잡고 있는, 실제로 살아있는 ‘어떤 것’이 우리자신이다. 이와 같은 ‘어떤 것’은 우리에게 낯설면서도 매우 가깝고, 전적으로 우리자신이면서도 우리에게 인식되지 않은 그토록 비밀스러운 체질을 갖춘 잠재적 중심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동물과의 친족관계, 여러 신들, 수정(水晶)과 별들과의 친족관계를, 이 모든 것을 요구해도 우리를 놀라게 하지 않으며, 우리의 거부감을 자극하지 않는다. 이 ‘어떤 것’이 모든 것을 사실이라고 주장하더라도 우리는 이러한 주장에 정당하게 반대할 만한 아무런 수단도 가지고 있지 않다. 반대하기보다는 그 말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분명히 더 현명하다.
나는 이 중심을 자기(自己 Self)라고 부른다. 지적인 면에서 자기는 하나의 심리학적인 개념에 지나지 않는다. 자기는 우리가 이것이라고 포착할 수 없는 인식 불가능한 본체를 표현하게 될 하나의 구조이다. 이 구조는 벌써 그 정의로 미루어 알 수 있듯이 우리의 이해능력을 넘어서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 안에 있는 하느님’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모든 정신적인 삶의 여러 출발점들은 이 중심점에 뿌리를 내리고 있어서 서로 떼어놓을 수 없으며, 우리의 모든 최상의 그리고 최후의 목표는 이 중심을 향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와 같은 역설은 피할 수 없다. 우리의 이해능력을 넘어서는 어떤 것의 특색을 나타내려 할 때에는 언제나 그럴 수밖에 없다.[26]
원래 우리 자신이면서, 우리의 모든 정신적인 삶의 여러 출발점이자 또한 모든 최상의 그리고 최후의 목표인, 우리 정신의 중심을 융은 ‘자기(Self)’라고 하였고, 본래의 ‘자기(Self)’로 되돌아가는 것을 자기실현이라고 하였다.
마음을 알아 자성을 보면 스스로 부처의 도를 성취하나니, 당장 활연히 깨쳐서 본래의 마음을 도로 찾느니라.”[27]
‘자기실현이란 본래의 자기 자신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라는 융의 설명에 나타난 자기(自己 Self)와 ‘자성을 보아 부처의 도를 성취하면(見性成佛) 본래의 마음을 도로 찾게 된다.’는 혜능의 설법에서의 자성(自性)과는 큰 차이가 없어 보인다. 물론 구체적인 면에서 많은 차이점이 있을 수 있겠지만, 궁극적이고 본질적인 면에서 볼 때 그렇다는 것이다.
진여는 생각의 본체요 생각은 진여의 작용이니라. 그러므로 자기의 성품(自性)이 생각을 일으켜 비록 보고 듣고 느끼고 아나, 일만 경계에 물들지 않아서 항상 자재하느니라.[28]
당신이 생각하고 보고 듣고 느끼고 알 때, 그렇게 하는 주체는 누구일까? 이렇게 물어본다면 당신은 당연히 ‘나’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러나 육조 혜능은 당신 자신이 아니라 당신의 자성(自性)이 생각을 일으켜 보고 듣고 느끼고 안다고 말한다. 그리고 생각의 주체는 진여(眞如)이고 진여의 작용으로 당신이 생각한다고 한다. 여기서 진여가 뜻하는 바는 자성이 뜻하는 것과 같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당신의 생각은 스스로 그렇게 생각한 게 아니라 진여, 즉 자성이 작용하여 그렇게 생각하도록 만든 것이라는 가르침이다.
내 생각이 분명한데 나 스스로 생각한 것이 아니라니? 내가 머리를 이리저리 굴려서 생각한 것임이 너무나도 확실한 사실임에도 그것이 아니라고 하는 육조 혜능의 가르침을 순순히 받아들이기는 매우 어렵다. 만약 순순히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이미 깨달은 사람이거나 또는 머리로만 이해하였을 것이다.
분석심리학의 창시자인 칼 구스타프 융도 위에서 인용한 육조 혜능의 가르침과 비슷한 주장을 하였다.
중요한 이념(idea)이나 견해의 어느 것 하나라도 태고로부터 시작된 원형적 형식들에 기초하여 만들어지지 않은 것은 없다. 원형적 형식들의 구체화는 의식이 생각하지 않고 단지 받아들이기만 할 때부터 시작되었다. “생각들(thoughts)”은 내적 지각의 객체였을 뿐 생각되어진 것은 전혀 아니었고 소위 보고 듣게 되는 외적 현상처럼 지각된 것이었다. 생각은 본질적으로 계시된 것이고, 발명된 것이 아니고 강요된 것이었다. 강요된 것이 아니라면 그것의 직접적인 사실성에 의해 확신을 갖게 된 것이었다. 이런 종류의 생각들은 원시적 자아의식에 선행한다. 원시적 자아의식은 이런 생각들의 주체라기보다는 객체이다. 그러나 우리 역시 의식성의 마지막 정점에 아직 오르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마찬가지로 우리도 선재(先在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물론 우리가 전통적 상징에 의해 지지되는 한, 즉 꿈의 언어로 표현하자면, 아버지나 왕이 죽지 않는 한 선재하는 생각을 우리는 알지 못한다.”[29]
원시인의 자아는 어린아이의 자아와 비슷하였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현대의 성인과 비교해볼 때 아주 약하고 그 존재도 희미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어린아이와도 같은 원시인의 마음속에 말 그대로 ‘선재하는 생각’이 먼저 있었고 이 ‘선재하는 생각’이 계시와 같은 방식으로 생각을 떠오르게 하니 원시인의 자아는 그 생각을 지각하였을 뿐이라는 것이다. 아무 생각 없이 멍하니 있는데 불쑥 어떤 생각이 떠오르는 경험과 비슷한 것이다. 물론 현대인의 이런 경험은 개인적 무의식에서 유래된 것이 많고 원시인처럼 ‘선재하는 생각’이 만들어내는 계시를 지각하는 경우는 드물지만, 생각을 일으키는 궁극적인 주체가 ‘선재하는 생각’이라는 것에는 차이가 없다. 그리하여 ‘중요한 이념(idea)이나 견해의 어느 것 하나라도 태고로부터 시작된 원형적 형식들에 기초하여 만들어지지 않은 것은 없다.’라고 한 것이다. ‘원형적 형식들’이란 ‘선재(先在)하는 생각’과 같은 개념의 말이다.
‘선재(先在)하는 생각’은 영어로는 ‘pre-existent thinking’이며 융이 쓴 다음 글에 나오는 ‘선험적으로 존재하는 idea의 본질’과 같은 말로 볼 수 있으며, 그 뜻은 원형(原型)의 개념과 같은 것이다.
나는 ‘idea’라는 용어를 사용할 때는 원상(源像)의 의미를 표현한다.
......
‘idea’가 원상(源像)으로부터 상징적으로 표현되어 만들어진 의미라면, ‘idea’의 본질은 파생되었거나 발달된 어떤 것이 아니고, 심리학적으로 말하자면, 선험적으로 존재하는 것인데, 그것은 전반적으로 여러 가지의 생각을 할 수 있는 미리 정해진 가능성이다. 그리하여 ‘idea’의 본질을 따르면(‘idea’의 형태가 아니라), ‘idea’는 선험적 존재를 가지고 있는 심리학적 결정인자가 된다. 이런 의미에서 플라톤은 ‘idea’를 사물들의 원형(prototype)이라고 하였고, 칸트는 ‘idea’를 모든 이성(理性)을 실제로 사용하는 것의 원형(archetype, Urbild), 그 자체로는 경험이 가능한 영역을 벗어나는 초월적 개념, 경험을 통해서는 그 대상을 찾을 수 없는 이성적 개념이라고 하였다.[30]
원상(源像)과 원형(原型)과 ‘선재하는 생각’은 같은 것을 가리키는 이름이다. ‘선재하는 생각’이라고 하였지만 어떤 구체적인 생각이 있다는 것이 아니다. 어떤 생각이 나타나서 자아가 경험하기 전에, 즉 선험적으로 존재하는, 생각을 만들어내는 가능성이다. ‘선재하는 생각’ 자체는 어떤 생각도 없는 텅 빈 조건이다. 원형(原型)에 대하여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원형은 그 자체로는 텅 빈, 형식상의 조건인데, 그 조건은 ‘미리 형식을 만드는 능력’으로, 즉 선천적으로 주어진 관념 형식의 가능성이다. 유전되는 것은 관념들이 아니라 형식들이며 마찬가지로 이것은 이런 관점에서 형식상 결정된 본능에 바로 해당된다. 원형 그 자체의 존재와 마찬가지로 본능도 구체적으로 활동하지 않는 한 그 존재를 증명하기 어렵다. 유전되는 형식은 수정(水晶)의 축계와 비교할 수 있는 것이다. 축계는 그 자체가 질료적 존재를 갖추지 않은 채 모액(母液) 속에서 결정의 형성을 미리 준비하고 있다. 질료적 존재는 먼저 이온들이, 그 다음에 분자가 결정을 이루어가는 방식에 따라 비로소 나타난다. 형식의 특정성을 수정 형성과 관련지어 비교하는 것은, 그 축을 이루는 체계가 단지 입체기하학적 구조를 결정하는 것이지, 개별 수정의 구체적인 모양을 결정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설득력이 있다. 그 하나하나의 수정은 클 수도 있고 작을 수도 있으며, 그 표면이 여러 가지로 다르게 이루어지거나 수정이 서로 뒤섞여 자라기 때문에 그 모양이 다양하게 변할 수도 있다. 다만 변하지 않는 것은 원칙적으로 불변의 기하학적 관계를 고수하고 있는 축계이다. 그것은 원형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원형은 원칙적으로 명명될 수 있고, 변하지 않는 의미의 핵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항상 원칙적으로만 그러하며, 구체적으로 나타나는 양식을 결코 결정하지는 않는다. 예를 들면 모성 원형이 어떻게 경험적으로 나타나는가 하는 것은, 원형만으로 유도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요인들에 근거를 두고 있다.[31]
‘원형(原型) 그 자체는 텅 비어 있어서 구체적으로 나타나지 않는 이상 그 존재를 증명하기 어렵다.’는 것과 ‘법신은 일체 형상과 모양이 없어 육안으로 능히 볼 수 없다’는 혜능의 설법은 서로 통하는 바가 있다. 여기서 법신(法身)은 앞에서 언급된 진여(眞如) 또는 자성(自性)과 같은 뜻으로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색신(色身)은 곧 상(相)이 있음이요 법신(法身)은 상(相)이 없음이니, 색신(色身)이란 사대(四大. 地, 水, 火, 風)가 화합하여 부모가 낳았기에 육안으로 볼 수 있거니와 법신(法身)이란 형상이 없어서 청(靑), 황(黃), 적(赤), 백(白)이 있지 않으며 일체 형상과 모양이 없어 육안으로 능히 볼 수 없으므로, 혜안(慧眼)이라야 능히 볼 수 있다.’[32]
원형에 대하여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원형은 인간이면 누구의 정신에나 존재하는 인간 정신의 보편적이며 근원적인 핵이며, 태어날 때 이미 부여되어 있는 인간의 선험적 조건이다.
원형은 태곳적부터 현대에 이르는 긴 시간에 수없이 반복되었으며, 또한 반복되어 갈 인류의 근원적인 행동유형을 가능하게 하는 선험적 조건이다. 어떠한 나라의, 어떠한 문화권의, 어떠한 종족의 인간도 어떠한 시대의 사람도 한결같이 생각하였고, 느꼈고, 행동하였고, 말한 것의 유형들이다.
......
우리는 원형의 존재를 신화와 민담의 세계에서 발견할 수 있다. 전 세계에 퍼져 있는 이야기 속에서 언제나 어디서나 발견되는 이야기의 핵, 이른바 신화소(神話素 Mythologem)는 바로 원형의 내용, 원형상이다.
......
융의 원형론은 융의 다른 학설이 모두 그러하였던 것처럼 경험을 통하여 얻은 가설이다. 그는 문화적 배경을 달리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꿈을 관찰하였고 거기에 문화적 배경이나 인종과 관계없이 반복적으로 출현하는 신화적 요소를 발견하였다. 이러한 요소가 교육이나 학습과도 관계없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이렇게 무의식 속에 출현하는 신화적 요소는 또한 분열증 환자의 환각이나 망상에 그대로 나타남을 보았고 그것과 원시인들의 사고 내용이 유사함도 원시 사회의 실지 답사를 통해서 증명할 수 있었다. 신화적 요소는 신화나 민담에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각종 종교현상 속에도 나타남을 보았다. 연금술사의 경전, 근대의 문예작품에 이르기까지 인류의 무의식이 작용하여 이루어진 인간 정신의 유산 속에 나타나고 있었다. 융은 처음에 집단적 무의식을 종족의식, 종족본능 같은 것으로 생각하다가 동양의 사상과 종교를 접하여 거기서 또한 보편적 신화적 요소를 발견하자, 어느 종족에 국한되지 않는 보편적 심성으로서의 원형론의 가설에 확신을 가지고 이를 제창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33]
‘어떠한 나라의, 어떠한 문화권의, 어떠한 종족의 인간도 어떠한 시대의 사람도 한결같이 생각하였고, 느꼈고, 행동하였고, 말한 것의 유형들을 가능하게 하는 선험적 조건’인 원형(原型)은 만법(萬法)을 포함하는 함장식(含藏識), 즉 자성(自性)과 같다고 할 수 있다.
법의 성품이 육식(六識)인 안식, 이식, 비식, 설식, 신식, 의식의 육식과 육문(六門)과 육진(六塵)을 일으키고 자성(自性)은 만법(萬法)을 포함하나니, 함장식(含藏識)이라고 이름하느니라. 생각을 하면 곧 식(識)이 작용하여(思量卽轉識) 육식이 생겨 육문으로 나와 육진을 본다. 이것이 삼(三) 육(六)은 십팔(十八)이니라. 자성이 삿되기 때문에 열여덟 가지 삿됨이 일어나고, 자성이 바름(正)을 포함하면 열여덟 가지 바름이 일어나느니라. 악의 작용을 지니면 곧 중생이요, 선이 작용하면 곧 부처이니라.[34]
‘자성(自性)이 삿되면 중생이요, 자성이 올바르면 부처이니라.’라는 혜능의 설법(說法)은 앞부분에서 인용한 ‘아버지나 왕이 죽지 않는 한 선재(先在)하는 생각을 우리는 알지 못한다.’는 융의 주장과 비교하여 이해해보자.
분석심리학적 관점에서 보면 아버지나 왕은 집단적 의식의 상징이다. 집단적 의식이란 교육이나 정치적 이념으로 의식적으로 집단에 전승되어 구성되는 집단 공유의 문화적 전통을 말한다.[35] 이러한 전통은 부처나 조사에도 해당될 수 있다. 그리하여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인다.’는 말이 생겨난 것으로 보인다. ‘자성(自性)이 어리석으면’ 부처나 조사가 자성(自性)을 가리키는 언어 문자에 불과한 것임을 모른 채 자신이 배워서 알고 있는 부처나 조사에 대한 알음알이, 즉 집단적 의식에 사로잡히게 된다. 그러므로 이러한 집단적 의식에 속박된 상태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여만’ 할 것이고 그런 다음에야 부처나 조사의 자성을 보게 될 것이다.
‘선재하는 생각’은 생각을 만들어내는 선험적 가능성이다. 이러한 선험적 가능성은 생각의 본체인 진여(眞如), 즉 자성(自性)이 뜻하는 바와 같다고 볼 수 있다. ‘선재하는 생각’은 원형을 가리키는 말이고 ‘만법(萬法)을 포함하는 함장식(含藏識), 즉 자성(自性)과 같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자성을 본다는 것은 분석심리학적 관점에서 보면 원형(原型)[36]을 본다는 것이 된다. 그런데 원형은 창조의 샘[37]이기도 하지만 모든 것을 파괴할 수 있는 에너지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원형을 체험할 때는 매우 조심해야 함을 분석심리학은 강조한다.
원형은 집단적 무의식[38]을 구성하고 있다. 바꾸어 말해서 집단적 무의식의 층은 많은 원형으로 구성된다. 화산이 터져서 지각을 덮으면 거기의 모든 생물이 죽어버린다. 원형의 에너지도 때로는 이와 같은 무서운 힘으로 의식을 지배하여 그 기능을 말소해버린다. 어떠한 이성적인 설득으로도 변하지 않는 피해망상, 과대망상에 사로잡힌 환자를 경험한 사람은 거기서 원형이 지닌 큰 힘을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반드시 정신병리 현상일 뿐 아니라 정상적인 사람의 꿈이나 일상생활에서 누구나 겪는 일이다.
원형은 인간의 전 정신을 사로잡는 원초적 폭력이라 할 만한 것이다. 이 힘은 자아로 하여금 통속적인 인간적인 영역을 뛰어넘게 한다. 자아의 힘은 원형과의 접촉을 통하여 팽창하거나 과장되고 자유를 잃으며 원형의 크나큰 세력에 사로잡히게 된다. 그것은 창조적인 방향이든 파괴적인 방향이든 자아를 구속하게 된다. 그리하여 한 인간이 꼼짝없이 위대한 사랑에 사로잡혀 자기를 희생하거나 위대한 창조적 영감에 사로잡혀 불후의 작품을 남기는가 하면 악마적인 파괴의 화신이 되어 집단 살인을 자행하게 되기도 하는 것이다. 원형이 일으키는 감정은 평범한 감정이 아니라 누미노줌(Numinosum, 신성한 힘)을 내포한 감동 또는 충격이다. 그것은 초인적이며 또한 비인간적인 충동이다. 왜냐하면 집단적 무의식은 인간이 아니라 인간 속에 있는 제신(諸神)의 세계이기 때문이다.[39]
자성(自性)과 원형이 같은 것을 가리키는 말이라면, 자성을 보기 위한 참선 수행 과정에서도 원형의 파괴적인 영향으로 여러 가지 정신적 문제가 발생할 가능성이 항상 존재함을 알 수 있다.
저자가 원형에 대한 주제로 강의를 할 때 항상 보여주는 그림이 있다. 그것은 ‘위험’과 ‘제한구역’이라는 글이 크게 쓰여 있는 원자력 제한구역 표시이다. 이 그림을 보여주는 이유는 원자력이 인류에게 이로울 수도 있지만 극단적으로 파괴적일 수도 있는 특성이 원형의 특성과 같기 때문이다. 원형들로 구성되어 있는 집단적 무의식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는다는 것은 원자력 제한 구역에 들어가는 것과 같이 매우 위험한 작업이다.
원자력 제한구역의 출입은 원자력의 위험성에 대하여 잘 알고 원자력에 대한 방호장비를 갖춘 전문가만이 가능한 것처럼, 원형으로 구성된 집단적 무의식이라는 위험 구역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원형의 위험성에 대하여 잘 알고 있고 이러한 위험에 잘 대처할 수 있는 전문가인 융 학파의 정신분석가와 동행해야만 한다. 그리고 집단적 무의식에의 접근이 명백히 위험하다고 판단되는 피분석자의 경우에는 분석가가 이를 금지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자성(自性)을 보기 위한 선수행에도 이러한 위험이 항상 존재함을 알아야 할 것이다.
자기의 성품이 미혹하면 부처가 곧 중생이요
자기의 성품이 깨달으면 중생이 곧 부처이니라.[40]
‘어리석은 부처님과 깨달은 중생’이라는 역설적인 표현은 자세한 설명을 듣기 전에는 그 뜻을 이해하기 어렵다. 그러나 중생이 어리석은 게 아니라 자성이 어리석은 것이며 부처님이 깨닫는 게 아니라 자성이 깨닫는 것이라는 육조 혜능의 가르침을 따르게 되면 ‘어리석은 부처님과 깨달은 중생’이라는 역설적인 표현은 ‘어리석은 자성(自性)과 깨달은 자성(自性)’이라는 단순하고 어려울 게 하나도 없는 말로 표현 할 수 있게 된다.
‘어리석은 부처님과 깨달은 중생’이라는 표현은 자성(自性)을 알지 못하는 ‘나’의 입장에서 볼 때 역설적이고 현묘(玄妙)한 뜻을 가진 말로 들릴 수밖에 없다. 그 이유는 대극(對極)의 한 측면만을 보고 있는 ‘나’의 입장에서 중도(中道), 즉 서로가 대극인 모든 것을 포함하고 있지만 전혀 모순되지 않는 자성(自性)을 이해한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음의 주체가 자성(自性)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어리석은 자성(自性)과 깨달은 자성(自性)’이라는 단순하고 명백(明白)한 말로 표현할 수 있고, 이러한 표현은 ‘어리석은 부처님과 깨달은 중생’이라는 역설보다 더 적절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어리석은 자성(自性)’은 중생이 되고 ‘깨달은 자성(自性)’은 부처가 된다. 그렇다면 어리석은 자성, 즉 중생은 어떻게 하고 있는지 자세히 살펴보자.
미혹한 사람은 경계 위에 생각을 두고 생각 위에 곧 삿된 견해를 일으키므로 그것을 반연하여 모든 번뇌와 망령된 생각이 이로부터 생기느니라.[41]
‘자성이 미혹하면 부처가 곧 중생이요’라는 혜능 스님의 설법으로 미루어보면 ‘미혹한 사람’의 말뜻은 ‘자성이 미혹한 중생’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미혹하다’는 말의 뜻은 무엇에 홀려 정신을 차리지 못한다는 것이다.[42] 그렇다면 자성이 무엇에 홀리게 되면 부처가 곧 중생이 된다는 것일까? ‘미혹한 사람은 경계 위에 생각을 둔다.’고 하였으니 자성이 경계에 홀려서 정신을 차리지 못하면 부처가 곧 중생이라는 가르침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자성이 미혹(迷惑)하다’라는 말을 쉬운 우리말로 풀어서 자성이 깨닫지 못하여 어리석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면, 위에서 인용한 육조단경의 구절은 ‘자성(自性)이 어리석으면 부처가 곧 중생이요, 자성(自性)이 깨달으면 중생이 곧 부처이니라.’는 말이 된다. 그러므로 ‘미혹한 사람’이란 중생, 즉 ‘어리석은 자성(自性)’이다. 그러므로 ‘미혹한 사람은 경계(境界) 위에 생각을 둔다.’는 말은 ‘어리석은 자성은 경계에 홀려서 그것에 대한 생각에 머무르게 된다.’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원래의 진여자성(眞如自性)은 경계에 홀리거나 물들지 않는다.
진여는 생각의 본체요 생각은 진여의 작용이니라. 그러므로 자기의 성품(自性)이 생각을 일으켜 비록 보고 듣고 느끼고 아나, 일만 경계에 물들지 않아서 항상 자재하느니라.[43]
경계란 육경(六境)[44]을 뜻한다고 볼 때, ‘경계 위에 생각을 둔다.’는 것은 자성이 생각을 일으킨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육경에 홀려서 육경에 대한 인식인 육식(六識)에 머물러 집착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생각 위에 곧 삿된 견해를 일으킨다.’는 것은 육식(六識)에 대한 집착을 토대로 삿된 견해가 생긴다는 가르침이다. 삿된 견해가 무엇을 뜻하는지 분명하지는 않지만, ‘자성이 삿되면 중생’이라는 말에서 유추해보면 삿된 견해는 중생의 견해라고 볼 수 있겠다. 자성(自性)이 ‘참나’라는 것을 모르고, 이 세상에 태어나서 육근(六根)이라는 신체의 여섯 가지 감각기관의 대상인 육경(六境)에 홀리게 되면 이것에 대한 인식인 육식(六識)의 주체가 ‘나’라는 삿된 견해를 일으키게 되고 이는 모든 번뇌와 망념의 원인이 된다고 이해할 수 있다. 혜능의 이러한 관점은 자기 신체를 통하여 형성된 ‘의식’의 주체인 ‘자아’가 전체 정신의 주체인 자기(自己)로부터 멀리 떨어지게 되면 인격의 해리 또는 정신질환을 일으킬 수 있다는 융의 견해와 비슷해 보인다.
의식은 이렇게 첫째로는 자기 신체, 자기존재에 대한 의식을 통해서, 둘째로는 일련의 기억에 의하여 형성된다.[45]
“노이로제는 내적인 해리, 자기(自己)와의 분리이다. 모든 이러한 분리를 강화하는 것은 병을 만든다. 이것을 완화하는 모든 것은 그를 건강하게 한다.”고 융은 말한다.
......
노이로제는 자기로부터 멀리 떨어져 나갔을 때 생기는 것이다. 그것은 일종의 자기소외이다. 자아가 자기와 멀리 떨어지면 떨어질수록 인격의 해리를 일으킬 위험은 커진다.[46]
어리석은 자성은 ‘경계 위에 생각을 둔다.’는 구절로 돌아가서 그 의미를 현대과학적인 관점에서 다시 살펴보자. 경계, 즉 육경(六境) 중에서 색(色)이란 눈을 통해서 보이는 것으로 모양이나 빛깔을 뜻한다. 그러므로 ‘미혹한 사람은 경계 위에 생각을 두고 생각 위에 곧 삿된 견해를 일으킨다.’는 말은 ‘어리석은 자성(自性)은 눈으로 본 모양이나 빛깔에 홀려서 그에 대한 생각에 집착함과 동시에 그렇게 생각하는 주체가 ‘나’라는 잘못된 견해를 일으킨다.’라고 이해할 수 있다.
눈으로 본 모양이나 빛깔에 홀려서 그에 대한 생각에 집착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인간의 눈은 3,800에서 7,700 옹스트롬 사이의 빛만을 볼 수 있다고 한다. 그 이외의 빛을 인간은 인식할 수 없다. 그러므로 인간은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본 것이 아니라 인간의 눈을 통하여 본 것에 홀려서 사물의 참모습을 보았다고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사람이 인식한 어떤 물건의 빛깔이라는 것도 물건에 반사된 빛이 눈에 들어와서 인식하게 된 것일 뿐이고 그 물건 자체의 색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깜깜한 밤이 되어 빛이 사라지게 되면, 그 물건에 반사되어 우리의 눈에 들어오게 될 빛도 없어지므로 그 물건은 아무런 색도 띠지 않게 된다. 그리고 눈으로 본 모양이라는 것도 망막과 시신경을 통해서 뇌에 전달되어 파악된 것일 뿐이다. 현미경으로 보게 되면 눈으로 본 물건의 모양과는 큰 차이가 난다는 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 수 있는 사실이겠지만, 현대물리학이 발견한 것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한다. 딱딱하고 빈틈이 없어 보이는 물건의 표면도 그것을 구성하고 있는 원자의 세계로 들어가 보면 빈틈이 훨씬 많다고 한다. 원자는 핵과 전자로 구성되어 있는데, 핵과 전자 사이의 거리는 크기에 비례해서 보면 지구와 달 사이 거리만큼이나 멀다고 한다. 이렇게 허공과 같이 빈틈이 많은 것이 우리가 일상 보는 물건들의 실제 모습이지만, 이런 과학적인 사실과는 다르게 우리는 눈으로 본 모양이나 빛깔에 홀려서 그것이 사물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라고 착각하면서 살아왔던 것이다. 이렇게 보면, ‘미혹한 사람은 경계(境界) 위에 생각을 둔다.’는 육조단경의 이 구절이 현대 물리학적인 관점에서도 합당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현대 물리학이 발견한 사실이라는 것도 멀지 않은 미래에 새로운 물리학적 발견으로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지게 될지도 모른다. 그리고 과거의 사실을 부정하는 새로운 발견은 끝없이 반복될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어떤 것이 사물의 참모습인지 과학적으로 파악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리게 될지도 모른다.
귀로 듣고 코로 냄새를 맡고 혀로 맛을 보고 몸으로 촉감을 느끼는 것 그리고 생각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이 세상에 태어난 뒤에 이렇게 근본적인 한계를 지닌 육근(六根)을 통해서 보고 들어서 알게 된 육경(六境)에 홀려서 그에 대한 인식인 육식(六識)을 있는 그대로의 사실로 받아들이는 인간의 자아의식은 참된 것이라고 할 수 없다.
앞에서 인용한 육조단경의 핵심은 인간의 모든 고뇌가 이러한 육식(六識)을 기초로 형성된 ‘삿된 견해’로부터 생겨난다는 것이다. 여기서 ‘삿된 견해’의 뜻을 별다른 해석 없이 그대로 받아들여도 되겠으나, 제7식인 말나식을 가리키는 말로 이해할 수도 있겠다. ‘제7말나식은 제8식의 견분(見分)을 자아로서 반연한다.’[47]고 하였으니, 궁극적인 주체인 제8식, 즉 자성을 보지 못하고 ‘자아’라는 삿된 견해를 일으킴으로써 모든 번뇌와 망령된 생각에 빠지게 된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경계 위에 생각을 둔다고 하였는데 이러한 행위의 주체는 누구일까? 미혹한 중생은 그 주체가 자아, 즉 ‘나’라고 알고 있지만, 사실은 어리석은 자성(自性)이 행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중생의 모든 번뇌와 망령된 생각은 어리석은 자성(自性)이 경계 위에 생각을 두고 그 토대 위에 세워진 ‘나’라는 아상(我相)으로 인하여 생긴 것이라는 가르침이다. 그러므로 자성(自性)이 어리석지 않으면 경계 위에 생각을 두지 않고 더구나 그를 토대로 하여 삿된 견해를 일으키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다.
이 책을 읽고 있는 당신은 어떠한가? 사과 특유의 모습과 빛깔을 보고 나서 그것을 토대로 그것이 사과라고 생각을 하는 주체가 바로 당신이라고 보는가? 그렇다고 대답한다면 당신은 ‘자성이 어리석은 부처님’이라는 것을 육조단경이 가르쳐 주고 있다.
자아는 나의 의식의 주체일 뿐이다. 무의식을 포함하는 나의 전체 정신의 주체는 자기(自己 Self)다.[48]
분석심리학적 관점에서 볼 때도 전체 정신의 중심은 자아가 아니고 자기(自己)다. 자아는 의식의 중심일 뿐이다. 의식이란 자아가 알고 있는 정신이다. 우리가 의식하고 있는 것은 전체 정신의 아주 작은 부분에 지나지 않으며 나머지 대부분은 알지 못한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정신을 ‘무의식’이라고 부른다.
분석심리학적 관점에서 보면 사람들이 ‘나’라고 알고 있는 자아는 태어날 때는 존재하지 않는다. 자아의식은 살아가면서 생겨나는데, 모든 괴로움의 원인이 바로 이 후천적으로 생겨난 자아의식이라는 것이 육조단경의 가르침이다.
처음에 있었던 것은 무의식적인 것이다. 의식은 무의식적인 상황에서 생겨났다. 유아기에 우리는 무의식적인 상태에 있다. 가장 중요한 본능적인 기능들은 모두 무의식적인 것이다. 아이들은 마치 자아가 없는 것처럼 행동한다. 네 살 또는 그 이전에 자아감각(sense of ego), ‘나, 내 자신’이라는 것을 발전시킨다.[49]
태어날 때 ‘나’ 라고 부르는 자아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사람들은 아무것도 없이 태어나는 것일까? ‘나’라는 자아가 자신의 전부라고 믿고 있는 사람들은 당연히 ‘그렇겠지’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러나 분석심리학적 관점에서 보면 그렇지 않다. 사람은 ‘집단적 무의식’이라는 정신적 토대를 가지고 태어난다. 무의식이란 분명히 자신의 마음이지만 ‘나’라는 자아가 알고 있지 못하는 마음을 가리킨다. 갓난아이는 물론이고 어린이들도 대부분 무의식 상태에서 살아간다. 그러나 나이가 들어가면서 의식이 생겨나고 의식하는 주체를 ‘나’라고 여기게 된다. 어른이 되면 자아의식은 보다 확고해진다. 사람들은 자아를 중심으로 살아가면서 그것을 자신의 정체성으로 삼는다. 그러나 정신적 토대인 집단적 무의식은 그대로 존재한다. 하루의 대부분을 무의식 상태로 살아가는 것은 어린이만이 아니고 어른도 마찬가지이다. 하루 종일 자신을 잘 살펴보면, 자신이 의식하고 살아가는 시간이 얼마나 적은지 잘 알게 될 것이다. 자아의식만이 자신의 전부라고 착각하고 있다면, 자기 자신의 전체 정신, 즉 자신의 참모습을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불교적 관점에서 볼 때 우리의 참모습은 불성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다음에 인용하는 열반경에는 불성은 항상 있으나 모든 중생이 무명에 덮여 있으므로 능히 불성을 보지 못한다고 설해져 있다.
중생이 견해를 일으킴에 무릇 두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상견(常見)이요 다른 하나는 단견(斷見)이니라. 이와 같은 두 견해는 중도(中道)라 하지 않으며 상견도 없고 단견도 없음을 중도라 한다. 상견과 단견 없음이 곧 십이인연(十二因緣)을 보는 지혜이며 이와 같이 보는 지혜가 불성이니라. 성문과 연각이 비록 인연을 보나 아직 불성이라 이름할 수 없느니라. 불성은 비록 항상 있으나 모든 중생이 무명에 덮여 있으므로 능히 불성을 보지 못하는 것이요, 또 능히 십이인연의 강을 건너지 못하는 것이 마치 토끼나 말이 강을 건너지 못하는 것과 같다. 왜냐하면 불성을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50]
육조 혜능도 같은 내용의 설법을 하고 있다.
선지식들아, 보리반야의 지혜는 세상 사람들이 본래부터 스스로 지니고 있는 것이다. 다만 마음이 미혹하기 때문에 능히 스스로 깨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름지기 큰 선지식의 지도를 구하여 자기의 성품을 보아라.[51]
중생이란 자신의 자성(自性)이 부처의 자성(自性)과 다르지 않고 항상 있지만 무명에 덮여서 자성을 보지 못하는 존재임을 열반경과 육조단경이 우리에게 분명하게 밝혀주고 있다. 무명이란 지혜인 명(明)이 없음을 말하며, 이는 곧 불교의 진리인 연기나 무아(無我)의 도리를 알지 못함을 뜻한다.[52] 그러므로 중생이 중도(中道)를 보지 못하고 상견과 단견의 어리석은 견해를 일으킨다는 것은 중생이 어리석기 때문이 아니라 사실은 자성이 어리석어서 중생 노릇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자성이 어리석으면 불성, 즉 자성이 자신에게 항상 있으나 그것을 보지 못하고 밖으로 부처를 찾는다고도 하였다.
모든 중생이 스스로 미혹한 마음이 있어서 밖으로 닦아 부처를 찾으므로 자기의 성품을 깨닫지 못하느니라.
그러나 이같이 근기가 작은 사람일지라도 단박에 깨치는 가르침을 듣고 밖으로 닦는 것을 믿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마음에서 자기의 본성으로 하여금 항상 바른 견해를 일으키면 번뇌, 진로의 중생이 모두 다 당장에 깨치느니라.[53]
그러나 불성, 즉 자성을 본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불성은 원래 일체중생이 다 갖추고 있지만 모든 중생이 근본무명인 제8아뢰야에 덮여 있기 때문에 능히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십이인연을 불성(佛性)이라 하며, 또는 제일의공, 또는 중도, 또는 부처, 또는 열반이라고 합니다. 이 모든 것들이 이름만 다를 뿐 뜻은 다 같은 것입니다. 이것을 바르게 알려면 오직 깨쳐서 불지(佛地)에 들어가야만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아뢰야 근본무명의 뿌리를 뽑아야 알 수 있지, 이 근본무명의 뿌리를 뽑지 못하면 십이인연을 바로 알 수 없습니다.[54]
근본무명을 제8아뢰야라고 하였다. 그 이유는 제8식의 견분(見分)을 자아로서 반연하는 것이 제7말나식[55]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제8아뢰야의 다른 이름인 아애집장(我愛執藏)은 아뢰야식이 끊임없이 계속 이어져서 중생의 주체가 되므로 제7말나식이 이것을 잘못 알고 나(我)라고 집착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56] 그리고 모든 생물(生類)들은 각자의 업력을 따라서 삼계(三界)를 윤회하는데 그때의 주체가 제8식이다.[57] 이렇게 보면 ‘나’라는 삿된 견해를 갖게 만드는 주체인 제8식을 근본무명이라고 할 만 하다.
그러나 육조 혜능 스님은 제8아뢰야를 포함한 여덟 가지 식의 자성이 본래 청정한 것을 바로 깨달으면 여덟 가지 식 그대로가 네 가지의 지혜(四智)라고 하였다. 또한 제8식(第八識)의 자성이 청정한 것을 대원경지(大圓鏡智)라고 하였는데, 성철 스님은 이 구절의 뜻을 제8식을 끊고 제8식을 전환하여 대원경지를 증득하는 것이 아니라 제8식의 자성이 청정한 그대로가 대원경지라고 풀이하였다.[58] 제8식의 자성이란 지금까지 이 책에서 언급되어온 자성과 같은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앞의 이야기들을 종합해보면,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물의 주체인 제8식 즉, 자성은 원래 청정한 그대로이다. 그러나 자성이 어리석은 경우 ‘나’라고 하는 자아가 자신의 주체라고 착각하여 중생으로 살아가게 된다는 것이다. 분석 심리학적인 용어로 설명하자면, 원래 자신의 참모습이 자기(自己 Self)라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자아가 자신의 주체라고 착각하여 참된 주체인 자성을 소외시키고 살아가면서 온갖 고통을 겪게 된다. 이러한 문제의 해결은 자아의식만이 자신의 전부라는 착각에서 벗어나서 원래 자신의 전체 정신이 되는 것이다. 이것을 분석심리학에서는 자기실현이라고 부른다.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물의 주체 즉, 참모습은 자성이며 자아가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인식하는 것이 근본무명의 뿌리를 뽑는 데 첫걸음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하여 ‘깨달은 자성’은 어떻게 하는지 알아보자.
무념법이란 모든 법을 보되 그 모든 법에 집착하지 않으며, 모든 곳에 두루 하되 그 모든 곳에 집착치 않고 항상 자기의 성품을 깨끗이 하여 여섯 도적들로 하여금 여섯 문으로 달려 나가게 하나 육진 속을 떠나지도 않고 물들지도 않아서 오고감에 자유로운 것이다. 이것이 곧 반야삼매이며 자재해탈이니 무념행이라고 이름하느니라.[59]
‘항상 자성(自性)을 깨끗이 한다.’는 것은 자성이 깨달아서 어리석음에서 벗어남을, 여섯 도적들이란 육식(六識)[60]으로, 여섯 문이란 육근(六根)[61]으로, 육진이란 육경(六境)[62]을 뜻하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미혹한 사람, 즉 어리석은 자성(自性)은 눈으로 보고 귀로 들어서 아는 것만이 실재하는 것으로 인식하며 그 주체는 ‘나’라고 생각한다. 증명될 수 있는 것만을 사실로 보는 과학은 바로 중생의 이러한 관점에서 출발한다.
그러나 깨달은 자성(自性)은 어리석은 자성과 달리 이러한 경계에 머물러 오염되지도 않지만 이러한 경계를 부정하여 이를 떠나지도 않는다고 하였다. 다시 말하자면 깨달은 자성은 과학적인 사실에 홀려서 그것만이 실재한다는 관점으로만 세상을 보는 어리석음에 빠지지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과학적 관점을 부정하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태도는 오온[63]이 모두 공(空)함을 보는 것과 같다.
“십이인연을 불성이라 하니 불성은 곧 제일의공이요, 제일의공은 중도라 하고 중도는 부처라 하며 부처는 열반이라 하느니라.”[64]
혜능이 자성(自性)이라고 표현한 불성을 제일의공(第一義空)이라고 하였다. 불성(佛性)이 가장 으뜸가는 뜻에서의 공(空)이라고 하는 것은 불성(佛性)이 아무것도 없이 비었다는 것이 아니라 혜능이 말한 대로 자성(自性)이 비었지만 만법을 포함하고 있음을 뜻한다.
지금까지 살펴본 자성에 대한 알음알이만으로는 자성을 보았다고 할 수 없다. 자성(自性)을 보기 위해서는 화두를 참구하여 ‘참나’를 보아야만 될 것이다.
어떤 것이 ‘참나’던고?
이 몸뚱이는 지수화풍(地水火風) 사대(四大)로 이루어진 것으로, 백 년 이내에 썩어서 한 줌 흙으로 돌아가고 나면 아무 것도 없다. 그러니 이 몸뚱이는 '참나'가 아니다. 그러면 부모에게 이 몸을 받기 전, 태어나기 전에 어떤 것이 '참나'던고?[65]
- 眞際 禪師-
석가여래 제79대 법손(法孫) 진제 선사는 1,700여 가지의 화두 중에서 현대인들에게 가장 와 닿고 의심이 나는 것으로 항상 위에 제시한 화두를 제시하면서, 모든 부처님도 ‘참나’를 알아 위대한 부처님이 되셨고, 역대 도인들도 ‘참나’를 알아 위대한 도인이 되셨으니, 일상생활 속에 자나 깨나 이 화두를 잊어버리지 말고 간절히 참구하여 ‘참나’만 알면 누구나 위대한 부처님이 되고 도인이 된다고 한다.
이 몸뚱이를 가지고 세상에 태어나면서 ‘나’의 인생이 시작되었고 언젠가 이 몸뚱이가 죽게 되면 ‘나’도 죽게 될 것으로 알고 있는 중생의 입장에서 보면, 부모에게 이 몸을 받기 전, 태어나기도 전에 ‘나’라는 것이 존재하였고 그것이 ‘참나’라는 가르침은 참으로 이해하기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큰 선지식의 가르침이니 그대로 믿고 받아들이는 것이 불자(佛子)의 일반적인 태도일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믿음이 부모에게 태어나기 전 어떤 것이 ‘참나’라는 것을 알게 해주는 것 같지는 않고 오직 스스로 깨쳐야만 하는 것 같다. 하지만 스스로 깨칠 수 없는 중생은 어떻게 할 것인가? 이러한 질문을 육조 혜능 선사에게 하였다면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으리라.
만약 능히 스스로 깨치지 못하는 이는 모름지기 큰 선지식을 찾아서 지도를 받아 자성을 볼 것이니라. 어떤 것을 큰 선지식이라고 하는가? 최상승법이 바른 길을 곧게 가리키는 것임을 아는 것이 큰 선지식이며 큰 인연이다. 이는 이른바 교화하고 지도하여 부처를 보게 하는 것이니, 모든 착한 법이 다 선지식으로 말미암아 능히 일어나느니라.[66]
진제 선사도 ‘무사자오(無師自悟)는 천마외도(天魔外道)임’을 강조한다. 스승 없이 스스로 깨달았다고 하는 사람은 마구니이거나 외도라는 말이다. 그러니 화두를 참구하는 데 있어서 깨달은 선지식의 지도는 필수적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한 번 빠지면 헤어나기 힘든 커다란 함정이 있다. 우리를 함정에 빠지도록 만드는 것은 바로 큰 선지식에 대한 믿음이다. 왜냐하면 육조 혜능은 마음 밖에 있는 선지식에 의지하지 않아야 함을 또한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스스로 깨친 이라면 밖으로 선지식에 의지하지 않는다. 밖으로 선지식을 구하여 해탈을 얻기를 바란다면 옳지 않다. 자기 마음속의 선지식을 알면 곧 해탈을 얻느니라.
만약 자기의 마음이 삿되고 미혹하여 망념으로 전도되면 밖의 선지식이 가르쳐 준다 하여도 스스로 깨치지 못할 것이니, 마땅히 반야의 관조를 일으키라. 잠깐 사이에 망념이 다 없어질 것이니 이것이 곧 자기의 참 선지식이라, 한번 깨침에 곧 부처를 아느니라.[67]
우리가 이 함정에 빠지는 것은 밖에 있는 큰 선지식에게 어떤 허물이 있어서가 아니라 우리 자신의 마음이 삿되고 미혹하여 자기 마음속의 선지식을 알려고 하지 않고 밖에 있는 선지식을 맹목적으로 따르기 때문이다. C. G. Jung도 이러한 위험성을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제자는 겸손하게 스승의 발밑에 앉아서 자기 고유의 생각을 삼간다. 정신적 게으름은 미덕이 되고 적어도 절반은 신(神)이 된 것 같은 존재의 빛을 받는 기쁨이 허용된다. 무의식적 환상의 고태성과 유아성은 스스로의 노력의 대가를 치르지 않고도 완전히 자기의 기대대로 된다. 왜냐하면 모든 책무는 스승 쪽에 전가되기 때문이다. 스승을 부추겨 격상시킴으로써 은연중에 자신의 가치도 격상된다. 더욱이 위대한 진리를 스승으로부터 직접 전수받은 것이다. 이 진리는 제자 자신이 스스로 발견한 것이 아니다. 이런 경우 집단적 무의식에 의한 팽창이 나타나고 개성의 자립성은 손상을 입는다.[68]
처음에는 당연히 스승을 따르고 배워야 하겠지만 모방에 그쳐서는 안 될 것이다. 궁극적으로는 밖으로 선지식을 구하여 해탈을 얻기를 구하지 말고 본래 마음을 스스로 알고 본래 성품을 스스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도 또 하나의 큰 함정이 도사리고 있으니 황벽 삼장(黃檗 三掌) 화두[69]를 살펴보자.
당나라 선종(宣宗)이 왕이 되기 전의 이름이 대중(大中)이었다. 무종(武宗)이 그의 숙부인 대중을 여러 차례 죽이려고 하였으나 요행히 천명으로 살아나 향엄지한 선사의 회상으로 가서 사미승이 되었다. 나중에 사미 대중은 염관 선사 회상으로 갔다. 그곳에서 시절 인연을 기다리며 지내는데, 당시 염관 선사 회상에는 황벽 선사께서 유나 소임을 맡고 계셨다. 스님네는 항시 조석(朝夕)과 사시(巳時)에 부처님 전에 예배를 드리는데, 하루는 대중이 예불을 올리고 계시는 황벽 선사를 보고 다가가서 여쭈었다.
“부처님 경에, ‘부처님에게도 집착해서 구하지 말 것이며, 부처님의 진리의 법에도 집착해서 구하지 말 것이며, 부처님의 진리의 법을 수행하는 스님에게도 의지해서 구하지 말라.’는 법문이 있는데, 스님께서는 예불을 올리는 뜻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러자 황벽 선사께서 그 말을 받아서,
“부처님께 집착해서 구하는 바 없이 부처님께 예배를 올리고, 부처님의 진리의 법에 집착해서 구함이 없이 부처님의 진리의 법에 예배를 올리고, 부처님의 진리의 법을 수행하는 스님들에게 집착함이 없이 스님들께 예(禮)하노라.”라고 말씀하셨다.
“그러할진대는 예배드릴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
대중(大中)이 이렇게 반문하자, 황벽 선사께서 대중의 뺨을 한 차례 갈겨 버리셨다.
“대단히 머트러운 스님이시군요.”
“이 부처님 진리 가운데 무슨 머트럽고 세밀함이 있을 수가 있느냐?”
하시며 황벽 선사께서 연거푸 대중의 뺨을 두 대나 더 올려치셨다.
사미 대중은 황벽 선사의 예불에 대하여 ‘불법승에 집착하여 구하지 말라.’는 부처님 말씀을 근거로 하여 판단을 내렸다가 선지식의 법방망이를 맞게 된다. 이렇게 보면, 부처님의 말씀에 근거한 우리의 판단도 믿을 게 되지 못한다. 부처님 말씀이 근본적으로 틀렸다는 것이 아니라, 부처님 말씀에 대하여 잘못된 알음알이를 계속해서 주장하는 사미 대중의 견해에 잘못이 있다는 것이다. 사미 대중처럼 모든 중생은 자신의 견해가 옳다고 믿고 있지만, 사실은 망상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망상에서 벗어나기 위한 첫 걸음은 자신이 당연하게 옳다고 알고 있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인가를 의심해보는 것이 될 것이다. 이렇게 자신의 모든 견해를 의심하는 것을 작은 의심이라고 한다면, 간화선 수행에서 화두를 통해 가지게 되는 의심은 ‘큰 의심’이라고 할 수 있다.
간화선 수행의 핵심은 ‘의심(疑心)’으로서, 화두를 통해 참학자(參學者)가 큰 의심을 일으키고, 그 의심의 힘으로 ‘화두일념삼매(話頭一念三昧)’에 깊이 빠져 모든 의식·분별과 자기 몸뚱이까지도 다 잊었다가 홀연히 보는 찰나, 듣는 찰나에 화두를 타파(打破)하고 자신의 참 성품[自性]을 깨닫게 된다.[70]
하루에 천번 만번 의심을 밀어주다보면 참의심이 시동이 걸립니다. 참의심이 시동이 걸리면 그때는 흐르는 시냇물과 같이 끊어지지 아니하고 쉬지 아니하고 밤낮으로 화두 한 생각이 흘러갑니다. 보는 것, 듣는 것도 다 잊어버리고, 앉아 있어도 밤이 지나가는가, 낮이 지나가는가도 모르고 화두 한 생각이 흘러갑니다.
이렇게 간절한 화두 한 생각만 흘러가다가 홀연히 사물을 보는 찰나, 소리를 듣는 찰나에 화두가 박살이 남과 동시에 억만년 전 자기의 참모습이 드러납니다. 그러면 한 걸음도 옮기지 아니하고 진리의 문에 들어가서 팔만 사천 법문이 흉금에서 쏟아져 나옵니다.[71]
C. G. Jung도 의심하는 것이 지혜롭게 되는 첫걸음이라고 강조한다.
의심은 살아 있는 것이지만, 진리는 때로는 죽었거나 정체된 것이다. 당신이 의심할 때 당신은 삶의 어둡고 밝은 양쪽을 통합할 절호의 기회를 만나게 된다. 사람들이 나이가 많이 들게 되면 그들 자신이나 세상이 분명치 않다는 것이 그들에게 매우 중요하다. 지혜롭게 되는 첫걸음이 의심하는 것이다. 존재의 가치를 의심하기 시작하는 것이 중요한데, 그렇게 함으로써 세상에 속박되었던 그들 자신을 해방시킬 수 있다.[72]
진제 선사는 화두를 들 때, 화두 전체가 분명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만 가지 진리의 법은 하나로 돌아가고 그 하나는 어디로 돌아가는고?’ 하는 화두를 든다면 화두 전체, 즉 화두의 머리(만 가지 진리의 법은 하나로 돌아가고)와 꼬리(그 하나는 어디로 돌아가는고?)가 분명해야 하는데, 머리만 있고 꼬리를 흘려버려도 안 되고 꼬리만 있고 머리를 흘려버려도 안 된다. 머리와 꼬리가 한 덩어리가 되어 쭉 의심과 같이 흘러가서 화두 전체가 분명한 가운데 간절한 의심덩어리가 제목과 같이 한 덩어리가 되어 성성하게 또록또록 흘러가야 된다.[73]
그러므로 “이 몸뚱이는 ‘참나’가 아니니 어떤 것이 ‘참나’던고?” 하는 화두를 참구할 때도 어떤 것이 ‘참나’던고? 의심하기 전에 이 몸뚱이가 ‘참나’가 아니라고 하는데, 이 말이 무엇을 가리키는지를 먼저 참구해야 할 것이다.
이 몸뚱이가 ‘참나’가 아니라는 것은 우리가 이 몸뚱이를 지금까지 철석같이 ‘참나’라고 믿고 살아왔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말이다.
이 몸뚱이를 불교 용어로 바꾸어 보자면, 색신(色身)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색신(色身)은 육근(六根)으로 이루어져 있으니 안이비설신의 (眼耳鼻舌身意)라는 신체 기관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이 육근(六根)이 ‘참나’가 아니라면, 육경(六境)[74]과 육식(六識)[75]도 당연히 의심해야 할 대상이다.
우선 눈으로 보고 귀로 들어서 알게 되는 색깔과 소리에 대해서 살펴보자. 인간의 눈은 3,800에서 7,700 옹스트롬 사이의 빛만을 볼 수 있고, 인간의 귀는 16에서 20,000 헤르츠 사이의 소리만 감지할 수 있지만 동물들은 더 많은 것을 보고 들을 수 있다고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보고 들어서 알게 되는 색깔과 소리는 동물들이 보고 들어서 아는 것과 다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있는 그대로 보고 듣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코로 냄새를 맡고 혀로 맛을 보고 몸으로 촉감을 느끼는 것도 마찬가지다. 이 세상에 태어난 뒤에 이렇게 근본적인 한계를 지닌 육근(六根)을 통해서 보고 들어서 알게 되는데, 중생은 이러한 경험을 하는 주체가 ‘나’라는 삿된 견해를 가지게 된다. 그러므로 육근(六根)과 육경(六境) 그리고 육식(六識)을 토대로 하여 형성된 인간의 자아의식은 참된 것이라고 할 수 없다. 육조 혜능의 다음과 같은 설법도 이러한 측면에 대하여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미혹한 사람은 경계 위에 생각을 두고 생각 위에 곧 삿된 견해를 일으키므로 그것을 반연하여 모든 번뇌와 망령된 생각이 이로부터 생기느니라.[76]
지금까지 전오식(前五識)[77] 중 안식(眼識)과 이식(耳識)의 근본적인 한계에 대해서 알아보았는데, 이제 제6식인 의식(意識)과 제6경(六境)인 법(法) 그리고 제6근(六根)인 의근(意根)에 대하여 자세히 살펴보자.
유식학에서 말하는 의식(意識)은 심리학에 말하는 의식(consciousness)과 밀접한 관계가 있어 보인다. 심리학에서 의식은 자아가 인식하고 있는 상태를 말한다. 그리고 법(法)은 불교에서 진리나 종교적 가르침을 뜻하기도 하고 어떤 현상을 성립시키고 있는 특성이나 성질 및 그러한 성질을 지닌 각각의 존재나 현상을 말한다. 그리고 법은 산스크리트어로는 ‘다르마(dharma)’ 라고 하는데, 이는 사람이 파악한 것, 생각한 것, 본 것, 만든 것과 다 관련이 있게 된다.[78] 그러므로 법(法)을 심리학적 용어로 번역해본다면, 자아가 생각하여 파악한 것, 즉 의식의 내용(conscious contents)이 될 것이다. C. G. Jung은 자아가 파악한 의식의 내용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람들이 어떤 사실에서 개념을 만드는 순간, 그들은 그 여러 측면 중의 하나를 포착하는 것에 성공한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때 통상적으로 전체를 파악하였다는 착각에 빠져든다. 전체적 파악이 절대로 불가능하다고 자신에게 변명하는 일도 없다. 전체적이라고 규정된 개념조차 전체적인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여전히 예견할 수 없는 성질들을 지닌 고유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자기기만은 분명히 마음의 평화를 가져다준다. 왜냐하면 미지의 것에 이름을 붙였고, 멀리 있는 것이 이제는 손에 올려놓을 수 있을 정도로 가까워졌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그것을 소유하게 되었고, 그것은 마치 죽임을 당해 더 이상 도망가지 못하는 야생동물과 같은 부동(不動)의 소유물이 되었다. 그것은 원시인이 사물에 대해, 심리학자가 심혼에 대해 행하는 마법의 과정이다. 사람들은 더 이상 그것을 포기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만약 사람들이 해석을 통해서 그것을 속박하지 않았더라면 전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을 모든 특성을, 바로 객체를 개념적으로 파악함으로써 발달시킬 가장 좋은 기회를 얻는다는 것을 의심치 않기 때문이다.[79]
이번에는 의근(意根)에 대해서 좀 더 자세하게 살펴보자. 의근(意根)을 신체기관이 아닌 것으로 보는 관점도 있다. 그러나 현대의학적 관점에서 보면 의근(意根)이 다른 오근(五根)과 같이 신체기관인 뇌(Brain)가 아니라고 할 이유가 없어 보인다.
그러나 의근(意根)을 뇌(Brain)라고 한다고 하더라도 정신현상의 근원을 뇌(Brain)라고 보는 생물정신의학적 입장과는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다. 왜냐하면 유식학에서는 모든 정신현상의 궁극적인 근원이 의근(意根)이 아니라 제8식이라고 본다. 이와 달리 생물정신의학적 입장은 뇌가 사라지면 모든 정신현상도 사라지게 되고, 뇌를 포함한 몸뚱이가 사라지면 ‘나’라는 존재도 사라진다고 본다. 그걸로 모든 게 끝이다. 그리고 부모로부터 이 몸뚱이를 받기 전의 ‘참나’는 아예 탐구의 대상이 되지 아니한다. 이렇게 보면 생물정신의학은 ‘참나’가 아닌 몸뚱이만을 탐구 대상으로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의근(意根)을 뇌(Brain)라고 보고 뇌를 포함하는 이 몸뚱이가 ‘참나’가 아니라고 한다면, 모든 과학적 발견을 포함하여 뇌를 통해서 이루어진 인간 의식의 모든 업적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물론 여기서 의심하는 것은 ‘무념법이란 모든 법을 보되 모든 법에 집착하지 않으며, 모든 곳에 두루 하되 그에 집착치 않고 항상 자기의 성품을 깨끗이 하여 여섯 도적들로 하여금 여섯 문으로 달려 나가게 하나 육진 속을 떠나지도 않고 물들지도 않아서 오고감에 자유로운 것이다.’[80]라는 관점에서 의심하는 것이다. 즉, 현대과학이 이루어놓은 뇌과학(Neuroscience)의 눈부신 업적을 부정하고 도외시하자는 뜻이 아니고 단지 뇌과학의 발전으로 인하여 마음의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고 해결할 수 있다는 관점을 의심해야 한다는 것이다.
C. G. Jung은 인간의 정신에도 가청주파수나 가시광선과 같이 아래와 위의 ‘문턱’이 존재할 수 있다고 본다. 그렇다면 인간이 의식할 수 있는 것은 위와 아래의 ‘문턱’ 사이에 있는 일부만 의식할 수 있으며 ‘문턱’ 밖에 있는 것은 아무것도 인식하거나 알 수 없다. 따라서 뛰어난 인식체계라고 할 수 있는 의식(consciousness)조차도 눈이나 귀와 같은 다른 신체기관의 감각 기능과 다를 바가 없다. ‘자연에는 비약이 없다’는 원칙에 따르면 이 가설이 완전히 잘못된 것은 아닐 것이다.[81] 의식에 대한 C. G. Jung의 견해를 좀 더 살펴보자.
의식의 규정성(definiteness)과 정향성(directedness)은 값비싼 희생의 대가를 치르고 획득된 것이고 인류의 편에서 보면 가장 위대한 임무를 수행하여 얻은 매우 중요한 성과인 것이다. 그 성과가 없었다면 과학과 기술, 문명은 불가능하였을 것이다. 그것이 정신적 과정의 신뢰할 수 있는 영속성과 균형성 그리고 목적 지향성을 모두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특성들이 지니고 있는 장점은 또한 엄청난 단점에 결부되어 있다. 즉 의식이 특정한 목표로 방향을 잡는다는 것은 겉보기에나 실제로 의식의 방향에 어울리지 않는 모든 정신적 요소들을 억제하고 배제함을 뜻한다. 의식의 의도와는 다른 목표로 정신과정을 이끌어가려는 모든 정신적 요소들을 억제하고 배제한다. 경우에 따라서는 미리 정해진 방향을 위해 임의로 왜곡하기도 한다. 그러나 어떤 근거로 심리적 자료들이 어울리지 않는다고 인식되는가? 그 인식은 원하는 길의 방향을 확정짓는 판단행위에 근거를 두고 있다. 그 판단은 편파적이고 선입견에 사로잡혀 있다. 그것은 모든 다른 가능성을 희생하여 선택한 독단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
우리의 문명화된 삶은 고도의 집중력과 정향적(定向的) 의식의 활동을 요구하기 때문에 무의식과의 현저한 분리라는 위기에 처하게 된다.[82]
우리의 의식은 항상 일방적이다. 의식적인 상태가 되기 위해서는 집중하지 않으면 안 된다. 사람들은 항상 특정한 그 무엇을 의식하게 된다. 의식이란 들판을 이리저리 비추는 탐조등과 비슷하다. 환하게 비추어지는 곳만 의식하게 된다. 우리가 보고 있는 세상은 전체가 아니고 단지 그 표면일 뿐이다. 우리는 이 세상의 본질을 볼 수 없다. 칸트는 이 본질을 ‘물자체(物自體. the things in itself)’라고 하였다. 그것은 사물의 무의식일 것이고, 그것이 무의식적인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알 수 없다.[83]
사람들은 밝게 비추어져서 알고 있는 것, 다시 말하자면 이 세상에 몸을 받아 태어나서 몸뚱이를 통해서 보고 듣고 알게 되는 경험을 통해서, 보고 듣고 아는 주체가 나라고 착각하지만, 그것은 ‘참나’가 아니다. ‘참나’는 어두운 곳에 자리를 잡고 있어서 우리가 볼 수 없는 탐조등 또는 탐조등을 조작하고 있는 그 무엇이지 않겠는가? 항상 고요하고 항상 비추는(常寂常照) 그 주체가 ‘참나’라고 본다면, 이 몸뚱이는 물론이고 이 몸뚱이의 경험을 통해서 알고 있는 ‘나’라는 것도 ‘참나’가 아니고 다만 ‘참나’가 비추어서 환하게 밝혀진 한 부분일 뿐이다.
분석심리학적 용어로 어두운 무의식 속에 있으면서 밝게 비추어 자아의식을 만들어내는 것을 자기원형(自己原型, Self archetype)라고 하고 의식과 무의식 모두 합한 전체를 자기(自己 Self)라고 한다. 자기원형과 자기는 궁극적으로는 같은 것으로 볼 수 있으며, 불교의 자성(自性)이나 불성(佛性)에 해당된다.
분석심리학적 입장에서 보더라도 ‘나’는 의심해보아야 할 대상이다. 다만 이는 인생의 후반기에 해당되는 과제이고 인생의 전반기에는 이와 다르게 ‘나’를 견고히 할 수 있어야 한다. 사람들은 무의식적인 상태로 태어나서 이런 상태로 유아기를 보내게 되는데, 아이들은 마치 자아가 없는 것처럼 행동한다. ‘나, 내 자신’이라는 자아감각(sense of ego)은 네 살 무렵에야 생겨난다.[84] 이렇게 생겨난 ‘나’를 견고하게 만들어 자아를 실현함은 분석심리학적 관점에서 볼 때 인생의 전반기에 우리가 반드시 이루어야 할 과제이다. 만약 자아가 제대로 확립되지 못하면 인격 장애를 비롯하여 불안증과 우울증 등을 포함하는 여러 정신장애가 발생하게 된다. 이런 정신장애를 가진 사람들을 치료할 때의 목표도 당연히 자아를 견고하게 확립하여 자아를 실현하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하여 성공적인 인생의 목표를 달성한 다음에 찾아오는 인생의 후반기에는 지금까지 견고하게 만들어온 ‘나’라는 것이 사실은 ‘참나’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아야만 한다. 분석심리학적인 관점에서 보면 ‘나’는 전체 정신의 한 부분일 뿐이고, ‘참나’는 ‘나’를 만들어내는 선험적 존재인 ‘자기(自己 Self)’[85]이다.
그러나 ‘자기(自己 Self)’가 나를 만들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내’가 나 자신의 정신세계를 만들었다는 입장을 벗어나기 힘들다.
정신적인 사건들은 자유재량으로 멋대로 만들어낸 산물이며, 심지어 그 사건들을 일으킨 인간이 고안해낸 것이라는 견해에 우리는 너무나도 익숙해 있어서 정신(Psyche)과 그 내용은 우리 자신의 의도적인 발명이라는 편견을 떨쳐버리지 못한다. 사실을 말하자면, 어떤 이념들은 어디서나 어느 때나 출현한다. 그 이념들은 개인이 만든 것이 아니다. 그에게 생겨난 것이다.[86]
C. G. Jung은 자신이 평생 동안 이루어놓은 막대한 양의 학문적 업적에 대해서도 ‘모자에 담은 강물’일 뿐이라고 하면서, 그 강물은 그가 만들어낸 것이 아니고 원래 있던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
사람들이 나를 현자(賢者)라거나 지자(智者)라고 한다면 나는 이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 어떤 사람이 어느 날 강물에서 모자 하나에 가득히 물을 퍼냈다고 하자. 그게 뭐 그리 대단한 일이냐? 나는 그 강물이 아니다. 나는 강(江)에 있지만 아무것도 만들지 않는다. 다른 사람들도 같은 강가에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들 자신이 그 강물을 가지고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고 느끼고 있다.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나는 한 번이라도 버찌가 줄기 위에 달리도록 보살펴야 할 사람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 나는 그저 거기에 서서 자연이 이룰 수 있는 것을 놀라운 마음으로 바라볼 뿐이다.[87]
E. Fromm은 ‘ZEN BUDDHISM and PSYCHOANALYSIS’의 서문에서 Suzuki로부터 깊은 감명을 받았음을 다음과 같이 고백하고 있다.
어떤 심리학자라고 하더라도 자신의 동료가 선불교와 같은 ‘신비한’ 종교체계에 흥미를 느끼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면 이에 대해 크게 놀라거나 충격을 받게 될 것이다. 그리고 참석한 사람들 대부분이 단지 흥미를 느끼는 것이 아니라 깊은 관심을 가진 것을 알게 된다면 더 놀라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 책에 실린 나의 논문은 학술모임에서 발표하였던 내용을 완전히 수정한 것인데, 그렇게 논문을 수정한 가장 큰 이유는 내가 선불교 서적에 대해서 알고는 있었지만 Suzuki와의 워크숍에서 자극을 받아서 나의 생각들이 크게 확장되고 수정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는 선(禪)에 대한 이해뿐만이 아니라 무엇이 무의식을 구성하는가, 무의식의 의식으로의 변환, 그리고 정신분석적 치료의 목표 등과 같은 정신분석학적 개념에도 해당된다.[88]
이 글을 읽어볼 때 그가 Suzuki로부터 소개된 선불교에 대하여 깊은 감명과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선(禪)과 정신분석’의 본문을 읽어보게 되면, 선불교의 깨달음에 관한 E. Fromm의 견해에는 몇 가지 근본적인 잘못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선불교는 인간이 자신의 존재에 대한 물음에 대해 답을 찾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 그 대답은 유대교나 기독교 전통에서 얻을 수 있는 대답과 근본적으로는 같으면서, 현대인의 귀중한 업적인 합리성과 현실주의 내지 자주성에 모순되지 않는 것이다. 역설적으로 동양의 종교 사상이 서양의 종교 사상 이상으로 서양의 합리적 사상과 일치하고 있다는 것이 밝혀져 왔다.[89]
그가 이렇게 보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니체가 ‘신은 죽었다’라고 선언하였던 것에서 볼 수 있는 19세기의 유신론적인 사고의 포기는 어떤 한 측면에서는 적지 않은 성취이다. 인간은 과감하게 객관성을 향해 발을 내디뎠다.
프로이트는 인간의 보이지 않는 동기 유발에 대해 새로운 객관성을 가지고 연구하는 동안, 전지전능한 신에 대한 신앙이란 인간 실존이 스스로 어떻게도 할 수 없는 곳에서 구원의 아버지와 어머니로 표상되는 하늘의 신에 대한 신앙을 통해서 인간의 무력함에 대처해 보려는 의도에 그 근원을 두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또한 그는, 인간은 자기만이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위대한 스승의 가르침이나 어버이, 벗들, 사랑하는 사람의 애정이 인간을 도울 수는 있지만, 그것은 오직 실존의 도전에 과감하게 대응하여 그것에 전심전력을 다해 대처하려는 것을 도울 수 있을 뿐이라는 것을 알았다.
일신교적인 종교가 그들의 소망을 나타내 주는 초월적인 아버지, 즉 구세주라는 개념의 무거운 짐을 동양은 갖고 있지 않았다. 도교와 불교는 서양의 종교보다 우월한 합리성과 현실주의를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각자(覺者) 이외의 어떤 사람도 인간을 인도할 수 없고, 모든 사람은 자신 안에 깨달음을 얻고 개오(開悟)를 얻을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인간은 실제적으로 그리고 객관적으로 인도될 수 있다고 보았다.[90]
그의 주장을 들어보면, 서양의 일신교적인 종교의 교리는 사람을 구원해주는 존재가 사람의 마음 밖에 있어서 사람들은 스스로 자신을 구원할 수 없었지만, 니체와 프로이트는 신(神)을 부정함으로써 인간 자신만이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을 뿐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E. Fromm은 이렇게 인간 자신만이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다는 인식의 보다 확실한 예를 동양의 종교에서 찾은 듯하다.
마음의 문제에 대한 원인과 해결책을 외부에 있는 초월적인 존재가 아니라 마음 안에서 발견하게 된 것은 현대 심층심리학의 커다란 성취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러나 과연 선불교가 E. Fromm이 주장하는 것처럼 현대인의 귀중한 업적인 합리성과 현실주의 내지 자주성에 모순되지 않는지는 의문이다.
프로이트의 목표는 이성(理性)에 의하여 비합리적이고 무의식적인 정념(情念)을 지배하는 것이었다.
......
그의 목표는 진실에 관한 최선의 지식이며, 그것은 현실(reality)에 대한 지식이었다. 이러한 목표들은 합리주의와 계몽주의 철학 내지 청교도적 윤리의 전통적 목표였다.[91]
그러나 C. G. Jung의 입장은 프로이트와 달랐다. 순전히 본능적이고 원시적인 상태에서 있었던 인류의 정신이 성취한 인간의 이성(理性)이 커다란 발전임에는 틀림이 없지만, 이성(理性)에만 의지하여 마음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다면 오히려 이성(理性)이 정신의 지속적 발전에 가장 큰 장애가 됨을 C. G. Jung은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만약 인간이 전적으로 본능적으로 그리고 기계적으로(automatically) 살아간다면, 정신적 에너지의 변환은 순전히 생물학적인 법칙에 따라서 일어나게 될 것이다.
......
문명화된 인간에게 의식의 합리성(rationalism)은, 다른 한편으로는 매우 쓸모가 많았지만, 정신적 에너지가 마찰이 없이 변환(transformation)이 되는 데 가장 큰 장애가 됨이 증명된다. 이성(理性 reason)은 항상 그에게 이율배반적인 것을 회피함으로써 이쪽과 저쪽의 어느 한쪽 입장만을 취하게 되며, 한 번 선택하였던 가치관을 사력을 다해 꽉 쥐고 있으려고 한다.
......
이성(理性)은 단지 목적을 이루기 위한 하나의 수단, 즉, 발전해나가는 과정에서의 과도기적 상태에 대한 상징적 표현일 뿐이다.[92]
이쪽과 저쪽의 어느 한쪽 입장만을 취하게 되는 서양의 이성적인 태도는 부처님의 가장 기본적인 가르침인 중도(中道)에 어긋난다. 그러므로 이성을 중시하고 합리주의를 추종하는 E. Fromm의 견해는 불교의 기본적인 태도에 대한 깊은 이해가 없었음을 알 수 있다.
Suzuki와의 만남을 통해서 선불교가 E. Fromm에게 심적 변화를 일으킬 정도로 커다란 영향을 미쳤지만 그러한 변화를 통하여 선불교적 관점에서 마음을 이해해보려고 노력해보지 않고 합리주의를 추종하는 기존의 프로이트 정신분석학적 가치관에만 매달려 있었던 것이 그가 선불교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던 이유로 보인다.
‘불교는 서양의 종교보다 우월한 합리성과 현실주의를 가지고 있다’는 자신의 관점에서 볼 때, 부처님의 말씀도 의심해야 한다는 선불교적 관점을 E. Fromm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원오극근 선사는 다음과 같이 대혜종고 선사를 경책하고 있다.
언구(言句)를 의심하지 않음이 큰 병이니,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야만 그대를 속이지 못한다.[93]
원오극근 선사는 문자선(文字禪)의 가장 완비된 형식을 제공한 「벽암록」의 저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언구(言句)를 의심하여야 함을 강조하였다. 대혜종고 선사는 원오극근 선사의 제자였다. 그가 살았던 중국 송나라 시대는 그의 스승이 편찬한 「벽암록」이 선림(禪林)에 풍미하고, 문자선(文字禪)이 매우 발전한 때였지만, 그 폐단은 날로 심각하게 드러나고 있었다. 참선은 실수(實修)에 치중하지 않았으며, 단지 어구(語句)를 외우는 것만 알 뿐이었다. 대혜종고 선사는 이렇게 하다가는 참선이 껍데기만 있고 내용이 없는 것으로 추락될 것이라고 보았다. 선림을 널리 바로 잡고 선풍을 구하며, 아울러 선학(禪學)의 발전을 정도(正道)로 인도하기 위하여, 대혜종고 선사는 결연히 스승의 「벽암록」의 유포를 금지시키고 불살라버렸다. 그리고 간화선을 제창하면서 ‘크게 의심하면 크게 깨닫고, 적게 의심하면 적게 깨달으며, 의심이 없으면 깨닫지 못하고, 큰 의심 아래서는 반드시 큰 깨달음이 있다.’[94] 고 강조하였다.
석가여래 제63대 법손(法孫)인 청허휴정 선사도 부처님의 말씀을 의심하여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허공장경」에서 ‘글도 마구니의 업이요 이름과 모양도 마구니의 업이며 부처님의 말씀조차도 마구니의 업이다.’라고 말하는 것도 바로 이 뜻이다. 여기서는 바로 깨달음의 본분(本分)을 말하는 것이므로 부처나 조사 스님들도 어찌할 도리가 없다.[95]
그러나 깨달음의 본분을 말하는 ‘여기’에 있지 못한 중생은 부처님과 의사소통하기 위해서는, 마치 어린아이들이 부모와 의사소통하기 위해 말을 배우는 것처럼, 우선 부처님 말씀부터 배워야 할 것이다.
그러나 부처님의 말씀을 열심히 배워서 부처님이 하신 말씀의 이치를 잘 이해할 수 있게 된 다음에는 그 말씀을 의심해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어린아이들이 말을 배우는 과정을 살펴보면 말이라는 게 원래 의심스러운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C. G. Jung은 사람들이 생각할 때 언어와 언어적 개념을 사용하여 생각을 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언어는 처음부터 바깥세상을 연결하는 다리로 사용되었고 언어의 유일한 목적은 의사소통(communication)이었다고 하였다.[96] 이렇게 외부와의 의사소통을 위해서 필요한 말을 어린아이들이 배우는 과정을 설명한 볼드윈의 다음 글을 인용하면서 그의 관점이 융 자신의 관점과 일치한다고 하였다.
어린아이들의 교육의 대부분은 전적으로 언어의 사용에 의해서 이루진다. 어린아이들이 사실이나 이미지에 대하여 나타내는 개인적인 반응들 중에서 예상 밖의 것들은 이러한 교육에 의해서 인류가 그동안 축적해 놓은 건전한 판단들로 바뀌게 된다. 아이가 말할 때 아이는 부모가 알고 있는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의미에 대하여 이러이러한 것을 의미하는 게 아닌가 하고 세상을 향해 하나의 제안을 내놓는다. 그것을 받아들이는 부모의 태도에 따라서 아이는 자신의 제안이 부모가 알고 있는 보편적이고 상식적인 의미에 합당한지 아닌지를 알게 된다. 이러한 아이와 부모와의 지속적인 상호작용을 통해서 아이는 판단 훈련을 받게 된다. 이 모든 경우에 효율적인 판단이란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판단이다. 언어는 적절한 증서가 되어서 사회적 판단과 개인적 판단이 일치한다는 것을 증명해준다. ‘적합하다’고 판단된 동의어(同義語)적인 의미는 사회적으로 보편화되고 인정된 ‘사회적’ 의미가 된다.[97]
C. G. Jung은 볼드윈의 이와 같은 설명으로 언어적 사고의 한계가 충분히 강조될 수 있다고 하면서, ‘언어적 사고는 문화의 공공연한 도구다. 수세기 동안 언어적 사고에 부여해온 강력한 교육의 작업은, 바로 사고를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것에서 객관적이고 사회적인 것으로 풀어냄으로써 인간 정신의 적응행위를 강요해왔다고 말해도 틀리지 않을 것’[98]이라고 하였다.
이렇게 볼 때, 사람들이 언어로 의사소통할 때 그 언어가 사회적으로 인정된 의미만을 전달하고 받아들일 수 있을 뿐이고 그 이외의 것은 불가능함을 알 수 있다. 부처님도 자신의 깨달음을 중생의 언어로 전달할 수 없다는 것을 아셨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중생과의 의사소통을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언어를 사용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향엄지한(香嚴智閑) 선사는 원래 위산영우(潙山靈祐) 선사와 함께 백장 선사를 사사(師事)하였는데, 그는 경전에 박식하고 사고가 민첩하였지만 백장문하에서 오히려 선도(禪道)를 깨닫지 못하였다. 백장 선사가 입적한 후, 그는 사형(師兄)이었던 위산영우 선사를 따랐다.
위산 선사는 지한 스님에게 “나는 너에게 일반적인 학해(學解)와 경전에 기록된 것을 묻지 않겠다. 왜냐하면 나는 네가 스승인 백장 선사에게 있을 때, 지혜롭고, 민첩하고 총명한 사람이어서 하나를 물으면 열을 답하고, 열을 물으면 백을 답함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단지 너에게 부모로부터 태어나기 전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이 무엇인지 물을 뿐이다.”라고 하자, 지한 스님은 전혀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질문에 망연히 대답할 바를 알지 못하였다. 지한 스님은 경서(經書)에서 답을 찾아보았으나 찾지 못하고, “부모미생시(父母未生時)”의 의미를 해석해 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영우 화상은 끝내 답을 하지 않고 말하길,
“내가 만약 너에게 설명해준다면, 너는 이후 나를 욕하게 된다. 내가 말하는 것은 나의 것으로, 끝내 네 일이 될 수 없는 것이다.”라고 하자, 경전과 책을 모두 태워버리고 영우화상을 떠났다.
어느 날 그가 풀을 베고 있을 때, 기와조각을 던졌는데 대나무를 맞추면서 경쾌한 소리를 내었다. 경쾌한 소리는 그로 하여금 돌연 조사선(祖師禪)을 깨닫게 하였다. 이어 분향재계(焚香齋戒)하고 멀리 영우화상을 향하여 예를 갖추어 말하기를,
“화상의 자비하심과 보살핌이 부모를 뛰어넘었도다. 당시에 만약 나를 위해 설명하여 주었다면, 어찌 오늘과 같은 일이 있겠는가?”[99]
향엄지한(香嚴智閑) 선사는 기와조각이 대나무를 맞추면서 나는 소리를 듣고, 위산영우(潙山靈祐) 선사가 그에게 물었던 ‘부모로부터 태어나기 전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이 무엇인지 깨달았던 것이다. 즉, ‘참나’를 깨달았던 것인데, 이를 조사선(祖師禪)을 깨달았다고 표현하고 있다. 여기서 조사선이란 신수계의 여래선(如來禪)[100]과 구별되는 혜능의 조사선(祖師禪)[101]을 말한다.
신수 등의 여래선은 점수적(漸修的)인 면에서 달마 이래의 선법을 발휘하였고, 혜능의 조사선은 돈오(頓悟)와 무수(無修)의 각도에서 선의 기본 정신을 세웠다.[102]
최초로 직접 여래선을 비판하고, 조사선의 개념을 제시한 사람은 바로 앙산혜적 선사이다. 그가 향엄 선사에게 “스승님은 사제가 대사(大事)를 분명하게 알았다고 찬탄하셨는데, 제게 보여줄 수 있겠습니까?”라고 말하였다. 이에 향엄 선사는 그의 오도게(悟道偈)인 “한번 부딪침에 알음알이를 잊어버리고, 다시 닦는 때를 빌리지 않네. 움직임에 옛 사람의 길을 내세우며, 근심스러운 근기(根機)에 떨어지지 않네. 곳곳에 종적(蹤迹)은 없으나, 성색(聲色)은 밖으로 위의(威儀)를 갖추고 있다. 제방의 도(道)에 통달한 사람들은 모두 상상기(上上機)를 말하는구나.”를 읊었다.
앙산 선사는 이것이 “심기(心機) 의식이 만들어서 이루어진 것”이고, “평소의 훈습(薰習)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므로 바른 깨달음이 아니라고 보아 그에게 바른 깨달음에 대한 다른 답을 요구하였다. 그러자 향엄 선사는 다시 다음과 같은 게송을 읊었다.
거년(去年)의 가난은 가난한 것이 아니요
금년(今年) 가난이 비로소 가난함이로다.
거년 가난에는 송곳 꽂을 땅도 없더니
금년에는 송곳조차 없음이로다.[103]
앙산 선사는 향엄 선사의 이 깨달음은 다만 여래선을 얻은 것이지 조사선을 얻은 것이 아니라고 말하였다. 어떤 것이 진정한 조사선인가? 향엄 선사가 다시 게송을 지었다.
나에게 한 기틀이 있어
눈 깜짝할 사이에 그대에게 보이노니,
만약에 그대가 알지 못할진대는
달리 사미라고 부르리라.[104]
앙산 선사는 이 게송으로 향엄 선사가 조사선을 알았다고 하였다.[105]
향엄 선사의 깨달음을 점검한 앙산 선사의 관점으로 보자면, 여래선을 알았다고 하더라도 ‘참나’를 보았다고 할 수 없고, 조사선을 알아야지 ‘참나’를 보았다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참나’인 자성을 본다는 것이 결코 쉽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알음알이로 자성을 본다는 것은 더욱더 거리가 먼 이야기가 될 것이다. 육조(六祖) 혜능 선사의 가르침을 좀 더 살펴보자.
자성이 미혹하면 부처가 곧 중생이요, 자성이 깨달으면 중생이 곧 부처이니라.[106]
자성(自性)은 불성(佛性) 즉, ‘참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자성이 미혹하기도 하고 깨닫기도 한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나’는 삿되고 ‘참나’는 바르기만 한 것이 아니고, ‘참나’가 삿되기도 하고 바르기도 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이 중요한 이유는 ‘성불(成佛)의 주체는 누구인가?’하는 문제와 관련되기 때문이다. 성불(成佛)의 주체가 ‘참나’라면 이 어리석은 ‘참나’가 깨달으면 중생이 곧 부처일 것이다. 하지만 이 몸뚱이로 이루어진 ‘나’를 성불(成佛)의 주체라고 본다면 어리석은 ‘나’로서는 영겁이 가도 성불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몸뚱이로 보고 듣고 말하고 아는 것으로는 ‘참나’를 볼 수 없다. 다만 ‘참나’가 스스로 어리석음에서 벗어나 깨달으면 부처가 될 것이다. 여기에 돈오(頓悟)의 비밀이 숨어 있는 듯하다.
카를 구스타프 융도 “의식 속에서 자기(Self)를 나타내는 것이 자아(自我)이다. 자아와 자기의 관계는 피동자(被動者, the moved)와 능동자(能動者, the mover) 또는 객체와 주체이다. 자기는 자아가 생겨나는 선험적 존재이다.”[107] 라는 글에서 ‘나’ 즉, 자아는 객체일 뿐이고 주체가 아니라는 말로 이 주체의 문제를 언급하고 있다. 그는 주체를 ‘자기원형(Self Archetype)’이라고 하였다.
융은 ‘자기원형’에 대하여 “우리가 이것이라고 포착할 수 없는 인식 불가능한 본체를 표현하게 될 하나의 구조이다. 이 구조는 벌써 그 정의로 미루어 알 수 있듯이 우리의 이해능력을 넘어서는 것이다.”[108] 라고 설명하고 있다.
융이 말하는 ‘자기원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원형’에 대한 개념을 알아둘 필요가 있다. 원형의 개념은 앞에서도 살펴보았지만, 여기서 다시 소개한다.
원형은 그 자체로는 텅 빈, 형식상의 조건인데, 그 조건은 ‘미리 형식을 만드는 능력’으로, 즉 선천적으로 주어진 관념 형식의 가능성이다.[109]
원형은 태곳적부터 현대에 이르는 긴 시간에 수없이 반복되었으며, 또한 반복되어 갈 인류의 근원적인 행동유형을 가능하게 하는 선험적 조건이다. 어떠한 나라의, 어떠한 문화권의, 어떠한 종족의 인간도 어떠한 시대의 사람도 한결같이 생각하였고, 느꼈고, 행동하였고, 말한 것의 유형들이다.[110]
‘원형은 선천적으로 주어진 선험적 조건’이라는 말은 ‘부모로부터 태어나기 전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을 분석심리학적으로 이해하는 데 중요한 관점을 제공한다.
이러한 원형들의 중심이자 전체 정신의 중심을 자기 원형(自己 原型)이라고 하며 전체 정신을 그냥 자기(自己)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우리 안의 그리스도, 우리 안의 불성(佛性), 혹은 도(道)라고 부르는 것을 분석심리학적으로는 모두 자기(自己)라는 용어로 일컬을 수 있다고 융은 말하였다.[111]
그러므로 분석심리학에서 ‘참나’에 해당될 만한 이름이 있다면 그것은 ‘자기(自己)’다. 그리고 이러한 ‘참나’인 자기가 되는 것을 ‘자기실현(自己實現)’이라고 하는데, 성불의 주체가 자성이라는 맥락을 따르자면, 자기실현의 주체도 당연히 자아가 아니라 자기가 될 것이다.
융도 자신의 인생 경험을 통해서 자아가 자기실현의 주체가 아니라 무의식임을 밝히고 있다. 여기서 말하고 있는 ‘무의식’이란 무의식에 자리 잡고 있는 자기(Self)를 뜻한다.
나의 생애는 무의식이 그 자신을 실현한 역사이다. 무의식에 있는 모든 것은 사건이 되고 밖의 현상으로 나타나며, 인격 또한 그 무의식적인 여러 조건에 근거하여 발전하며 스스로를 전체로서 체험하게 된다. 이러한 형성의 과정을 묘사함에 있어 나는 과학적인 언어를 사용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나는 나 자신을 과학의 문제로서 경험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112]
자기실현의 과정을 과학적인 언어, 즉 이성적인 자아의 언어로 표현할 수 없다함은 ‘참나’를 참구함에 있어서 언구(言句)를 의심해야 한다는 말과 그 맥락이 같으며, 앙산혜적 선사가 “제불(諸佛)의 밀인(密印)을 어찌 말로 표현할 수 있겠는가?”[113]라고 말한 바와 같다.
그러나 육조(六祖) 혜능 선사는 자성(自性)이 사람의 언어와 함께 함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어떻게 자성이 기용하는가? 삼십육대법이 사람의 언어와 더불어 함께 하나, 밖으로 나와서는 모양에서 모양을 떠나고, 안으로 들어와서는 공(空)에서 공을 떠나나니, 공에 집착하면 오직 무명만 기르고 모양에 집착하면 오직 사견만 기르느니라.
법을 비방하면서 곧 말하기를 문자를 쓰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나 이미 문자를 쓰지 않는다고 말할진대는 사람이 말하지도 않아야만 옳을 것이다. 언어가 곧 문자이기 때문이다.[114]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참나’가 어떤 것이라고 사람의 말로 표현되기는 하지만, ‘참나’는 말을 떠나 있기 때문에 그 참뜻은 사람의 말에 있지 않다고 할 수 있다.
고인(古人)들께서 말씀하시기를, “일구(一句)의 진리를 깨달을 것 같으면 부처님과 역대(歷代)조사(祖師)의 스승이 되고, 이구(二句)의 진리를 깨달을 것 같으면 인간과 천상인(天上人)의 스승이 되고, 삼구(三句)의 진리를 깨달으면 자기도 구제하지 못한다.”라고 하셨다.
그러면, 어떠한 것이 제일구(第一句)의 진리냐?
만리에 뼈무더기가 즐비함이로다.[115]
어떠한 것이 제이구(第二句)의 진리냐?
빗방울 쏟아지듯 방망이로 때림이로다.[116]
어떠한 것이 제삼구(第三구)의 진리냐?
물음도 있고 또한 답도 있음이로다.[117]
이 불법(佛法)의 진리는 혼자서 스스로 ‘알았다’고 하는, 그것으로써 살림을 삼으면 모두 사견(邪見)에 빠지고 만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도 “스승 없이 혼자 깨달았다는 것은 모두 천마(天魔)이고 외도(外道)이다.”라고 하셨던 것이다.
그러한 고로 제불제조(諸佛諸祖)께서 모든 사견으로부터 정법정인(正法正眼)을 지키기 위하여 인증(印證)의 가풍(家風)을 확고히 세워놓으신 것이다.[118]
그러므로 어떤 것이 ‘참나’인가를 깨달았다고 하는 이가 있다면, 진제(眞際) 선사처럼 불조정맥(佛祖正脈)을 이어오고 계신 선지식을 친견하여 자신의 깨달음이 이구(二句)나 삼구(三句)의 진리가 아니라 일구(一句)의 진리를 깨달았는지 점검을 받아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일구(一句)의 진리를 깨달았다는 인증(印證)을 받아야만 ‘참나’를 바로 보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니 ‘참나’를 보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분석심리학에서 ‘참나’를 보는 것, 즉 견성성불(見性成佛)에 해당되는 것은 ‘자기실현(自己實現)’이다. 성불의 주체가 자성이라는 맥락을 따르자면, 자기실현의 주체도 당연히 자아가 아니라 자기(自己)가 될 것이라고 앞에서 강조한 적이 있다.
자기(自己)는 우리가 알고 있는(conscious) 정신과 우리가 모르는(unconscious) 정신을 모두 포함한다. 이러한 전체 정신의 일부분인 자아의식 즉, ‘나’에 대해서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우리의 참모습이 자기(Self)라고 하였을 때, 그것이 어떤 것인가에 대한 명확한 모습을 그려낸다는 것은 우리의 상상력으로서는 가능하지 않다. 왜냐하면 이러한 작업에서는 일부분이 전체를 파악하여 이해해야만 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아무리 많이 알게 된다고 하더라도, 분명하지도 않고 분명히 할 수도 없는 무의식적 요소가 항상 남아 있게 될 것이다. 이러한 무의식적 요소도 자기(Self)라는 전체에 속하는 것이다.[119]
그러므로 우리가 부모로부터 이 몸뚱이를 받은 이후 몸뚱이를 통해서 형성된 ‘나’라는 입장에서 ‘참나’를 본다는 것은 애초부터 그리고 영원히 불가능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아가 주체가 되어 자기실현을 해나가게 되면 자아가 마나 인격이 될 수밖에 없음을 C. G. Jung은 경고하면서, 마나 인격(mana-personality)에 대하여 설명하기를 사람들을 홀리는 신비한 성질(mana)이 풍부하고 마술적인 지식과 힘을 가지고 있는 존재라고 하였다.[120] 이러한 마나 인격 원형과 동일시한 사람은 자아가 팽창되어 모든 힘을 능가하는 초인(超人, superman)이 된다. 최소한 반은 신이 된다.[121]
신과 인간을 엄격하게 분리한 기독교 사회인 서양에서, 자신이 초인이 되었다고 어떤 사람이 주장한다면 그 사람은 신성모독의 죄를 지은 것이 될 것이다. 이는 예수님 자신이 신의 아들이라고 주장한다고 고발당하여 죽임을 당한 것을 미루어 짐작해보면 잘 알 수 있다. 그리하여 서양에서는 마나 인격 원형과 동일시하여 자신이 초인이 되었다고 굳게 믿었더라도 자신의 생각을 공개적으로 밝히기는 매우 어려웠을 것이기 때문에 이런 생각들은 억압되었을 가능성이 많다. 억압된 생각들은 사라지지 않고 자신이 의식하지 못하는 마음 속 깊은 곳, 즉 무의식으로 가라앉게 된다. 무의식에 존재하는 생각들은 우리가 인식하지 않고 멀리하면 할수록 무의식 속에서 강한 세력을 형성하여 결국에는 자아의식을 사로잡게 된다. 그리하여 의식적으로는 겸손함을 강조하지만, 무의식 속으로 억압된 초인은 자아로 하여금 자신이 절대적으로 옳다는 독선적인 생각에 사로잡히게 한다. 그러나 정작 당사자는 이런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다.
서양과 달리 부처와 중생이 둘이 아니라는 불교적 세계관을 가진 동양에서는 ‘참나’를 보지 못하였음에도, 마나 인격 원형과 동일시하여 자신이 깨달음을 얻은 부처가 되었다고 착각하여 도인(道人) 행세를 해도 별 지장이 없었을 것 같다. 그러므로 불교적 세계관을 가진 동양 사람들은 자신이 깨달았다는 생각이 들더라도, 또는 세상 사람들이 그렇게 인정해준다고 하더라도 자신이 가짜 도인은 아닌지 의심해보아야 할 것이다.
자성(自性)의 수레바퀴
법달아, 마음으로 행하면 <법화경>을 굴리고 마음으로 행하지 않으면 <법화경>에 굴리게 되나니, 마음이 바르면 <법화경>을 굴리고 마음이 삿되면 <법화경>에 굴리게 되느니라. 부처님의 지견을 열면 <법화경>을 굴리고 중생의 지견을 열면 <법화경>에 굴리게 되느니라.[122]
“보살계경에 말씀하기를 ‘나의 본래 근원인 자성이 청정하다.’고 하였다. 마음을 알아 자성을 보면 스스로 부처의 도를 성취하나니, 당장 활연히 깨쳐서 본래의 마음을 도로 찾느니라.”[123]
보살계경에는 ‘자성(自性)’을 ‘나의 본래 근원’이라고 하였고, 육조 혜능은 ‘마음을 알아 자성(自性)을 보면 부처가 되어 본래의 마음을 도로 찾는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본래 근원과 본래 마음과 자성은 모두 같은 것을 지칭하는 말임을 알 수 있다.[124] 그런데 깨닫게 되면 본래의 마음을 도로 찾는다고 하니, 일체 중생은 자신의 본래 마음을 잃어버리고 살고 있었다는 말이 된다. 잃어버리고 살다가 깨달아서 도로 찾게 되는 본래의 마음, 즉 자성(自性)이야말로 ‘참나’일 것이다.
그러므로 육조단경의 ‘부처님의 지견을 열어, 마음이 바르고, 마음으로 행하면 법화경을 굴린다.’는 말은, 잃어버리고 살다가 깨달아서 도로 찾게 되는 본래의 마음, 즉 자성(自性)이 주체가 되고 중심이 되어 법화경을 굴린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때 법화경은 자성이 중심이 되어 굴리게 되는 수레바퀴의 테두리일 뿐이다. 그러므로 ‘중생의 지견을 열어, 마음이 삿되고, 마음으로 행하지 않으면 중생은 법화경에 굴리게 된다.’는 말의 뜻은 ‘참나’인 본래의 마음, 즉 자성(自性)을 잃어버려서, 자성이 주체가 되고 중심이 되는 게 아니라 자성이 만들어놓은 법화경이 중심인 줄 착각하게 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법화경은 자아가 이해한 법화경으로서 중생 지견의 중심이 되고 중생은 법화경이라는 쳇바퀴를 따라 돌게 된다.
법달 스님은 항상 <법화경>을 외어 칠 년이 되었으나 마음이 미혹하여 바른 법의 당처(當處)를 알지 못하여 육조 혜능 스님에게 와서 ‘경에 대한 의심이 있습니다. 큰 스님의 지혜가 넓고 크시오니 의심을 풀어주시기 바랍니다.’라고 하였더니, 대사께서 말씀하셨다.
“법달아, 법은 제법 통달하였으나 너의 마음은 통달하지 못하였구나. 경 자체에는 의심이 없거늘 너의 마음이 스스로 의심하고 있다. 네 마음이 스스로 삿되면서 바른 법을 구하는구나. 나의 마음 바른 정(定)이 곧 경전을 지니고 읽는 것이다.”[125]
법달 스님이 통달한 법화경을 ‘쳇바퀴’라고 표현한 것은 자성의 수레바퀴와 차별을 두기 위해서이다. 중생은 오래된 습기에 젖어서 다람쥐 쳇바퀴 돌리듯이 일정한 수레바퀴만을 돌린다. 그러나 자성의 수레바퀴는 일정한 원칙이 있어 보이지만 형태는 때와 장소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예를 들자면 봄ㆍ여름ㆍ가을ㆍ겨울이 오고 가는 것에 일정한 법칙이 있어 보이지만 한 번도 똑같은 봄은 없고 한 번도 똑같은 꽃을 피운 적이 없다. 똑같은 일상적인 일과를 행할 때 그 일이 똑같은 것처럼 보여도 똑같지 않음을 본다면 매일매일이 새로운 날이고 매일매일 새롭게 태어나서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될 것이다. 다음 생에 좋은 곳에 태어나기를 바라고 그때까지 기다릴 필요도 없다. 매일매일 또는 순간순간에 좋은 곳에 태어날 수 있다. 완전한 해탈은 ‘참나’인 자성을 보아야 가능하겠지만, 위에서 말한 이러한 것들을 알음알이로 알기만 해도 스스로 만든 인생의 속박에서 벗어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자성(自性)의 수레바퀴와 달리 중생의 쳇바퀴는 항상 똑같은 것을 반복하는데, 이는 중생이 오래된 습기에 젖어 있기 때문이다. 습기(習氣)는 버릇이나 습관을 뜻하는 말로서 바람직하지 않게 굳어버린 행동을 가리키는 말로 많이 사용된다. 그러나 습(習)이라는 한자는 회의문자(會意文字)로서 ‘어린 새가 날개(羽)를 퍼드덕거려 스스로(自→白)날기를 연습한다.’ 하여 ‘익히다’를 뜻한다.[126] 처음부터 나쁜 행동으로 시작된 버릇이나 습관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린 새가 반복해서 날개를 퍼드덕거려서 스스로 날기를 연습하는 것은 이 세상에 태어나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필수적인 행동이며 바람직한 것이지 결코 처음부터 잘못된 것은 아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여서 어린아이들이 무한반복해서 같은 놀이를 하는 경우를 많이 보게 된다. 그리고 학생들의 학업도 반복학습을 통해서 성과를 올릴 수 있다. 그러나 이렇게 노력하여 익힌 습관은 처음에만 힘들게 돌리면 더 이상 힘들게 노력하지 않아도 저절로 굴러가게 되는 쳇바퀴와 같다. 칠년 동안 항상 <법화경>을 외웠던 법달 스님도 무진 노력을 다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노력을 안 할 수도 없지만 아무리 노력을 한다고 하더라도 마음이 미혹하면 바른 법의 당처(當處)를 알지 못한다는 가르침이니 자성(自性)의 수레바퀴를 돌린다는 것은 말 그대로 불가사의(不可思議)한 일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융도 자아를 움직이게 만드는 주체가 ‘자기(Self)’라고 하였다.
“의식 속에서 자기(Self)를 나타내는 것이 자아(自我)이다. 자아와 자기의 관계는 피동자(被動者, the moved)와 능동자(能動者, the mover) 또는 객체와 주체이다. 자기는 자아가 생겨나는 선험적 존재이다.”[127]
‘나’, 즉 자아는 객체일 뿐이고 주체는 자기라고 하였다. 이렇게 보면 자기(自己)와 자성은 같은 것을 가리키는 말이 될 것이다.
융이 말하는 자기(自己)가 수레바퀴를 돌리는 중심이자 자성(自性)에 해당될 수 있음은 ‘중앙(the middle; center)으로 다가가는 것’에 대한 다음 글을 읽어보아도 알 수 있다.
“중앙으로 차차 다가감으로써 ‘비어 있는’ 중앙의 영향 때문에 자아의 값이 떨어집니다. ‘비어 있는’ 중앙은 결코 원형과 동일한 것이 아니고 원형의 존재를 가리키는 근거라 할 수 있습니다. 중국식으로 표현해서 원형이란 도(道)의 ‘이름’일 뿐 도(道) 그 자체는 아닌 것입니다. 예수회 신부들이 도를 ‘신’이라 번역하였듯이, 우리는 이 중앙의 ‘비어 있음(虛)’을 신이라 부를 수 있습니다. 비어있다고 해서 결손이라든가 부재(不在)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최고의 강도를 지닌 인식할 수 없는 것을 말합니다.”[128]
‘중앙으로 다가감으로써 자아의 값이 떨어진다.’는 그의 말은 자기(自己)중심적인 삶이 되면, 즉 자성(自性)의 수레바퀴를 돌리게 되면 자아(自我)는 그 존재가치가 줄어든다는 말이 된다.
융도 자신이 취한 모든 발걸음이 하나의 점 즉, 중심점(中心點)으로 되돌아간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그것은 그가 1918년과 1919년에 수없이 많은 만달라를 그린 후였다.
“만달라 그림을 그리면서 내 마음속에는 되풀이해서 의문이 솟았다. 이 과정이 인도하는 목적이 무엇인가? 어디에 그 목표가 있는가? 나의 경험에 비추어볼 때 나는 이제까지 내가 믿을 만한 가치가 있는 목표를 내 스스로 선택할 수 있었던 적이 없음을 알고 있었다. 나는 자아가 최고의 위치에 있다는 생각을 포기해야 한다는 사실을 경험하였다. 나는 그런 생각을 하다가 좌절되었던 것이다. 나는 <리비도의 변환과 상징>에서 시작한 것과 같은 신화의 학문적 연구를 계속하고 싶었다. 그것은 나의 목표였다. 그러나 그건 문제가 되지 않았다. 나는 무의식의 과정을 스스로 거쳐 자나가도록 강요되었다. 나는 먼저 내 자신을 이 무의식의 흐름에 내맡기는 도리밖에 없었고 그것이 나를 어디로 데려가게 될지 알 수가 없었다. 내가 만달라를 그리기 시작하자 나는 그 모든 것, 내가 따라온 모든 길, 내가 취한 모든 발걸음이 하나의 점 즉, 중심점(中心點)으로 되돌아간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만달라가 중심임이 내게 더욱 분명해졌다. 그것은 모든 길의 표현이다. 그것은 중심을 향한 길, 개성화를 향한 길이다.”[129]
‘개성화’란 자기실현과 같은 뜻으로 사용되는 말이다. 그러므로 ‘중심점으로 되돌아가는’ 길은 자기실현의 길이며, 잃어버리고 살았던 ‘참나’를 찾아가는 길이다. ‘중심점’은 자기(自己)에 해당되며, 수레바퀴의 중심인 자성(自性)과도 같다.
자성(自性) 즉, ‘참나’를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궁극적인 주체’라고 할 수 있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의 마음, 즉 모든 것을 만들어내는 ‘마음’이 궁극적인 주체일 것이다. 궁극적인 주체의 이름을 불교는 ‘자성’이나 ‘불성’ 또는 ‘참나’라고 하고 분석심리학은 ‘자기’라고 부른다. 법화경을 굴리는 ‘마음’이 바로 이 ‘마음’일 것이다. 모든 것을 만드는 마음으로 행하면 법화경을 굴리게 된다. 그러나 중생은 이런 마음으로 행하는 것이 아니다. 중생이 행하는 것은 ‘나’라는 마음이 행하는 것이다. 심리학적 용어로 ‘나’는 자아라고 한다. 자아는 의식의 중심이다. 내가 보고 듣고 깨달아 아는 존재가 바로 ‘나’, 즉 자아라고 알고 있으면 중생이다. 궁극적인 주체는 자아가 아니고 ‘자성’ 또는 ‘자기’라고 부르는 ‘참나’이다. 일체유심조를 ‘모든 것은 내가 마음먹기에 달렸다’라고 오해하는 경우가 있다. 이때의 마음은 중생의 자아의식일 뿐이다.
모든 만법이 다 자기의 몸과 마음 가운데 있느니라. 그럼에도 어찌 자기의 마음을 좇아서 진여의 본성을 단박에 나타내지 못하는가?[130]
‘모든 만법이 다 자기의 몸과 마음 가운데 있기’ 때문에 ‘마음’이 모든 것을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다(一切唯心造). ‘마음’이 만들어내는 것은 법화경만이 아니고 모든 만법이다.
불교에서 법이라고 할 때는 진리나 종교적 가르침을 뜻하기도 하고 어떤 현상을 성립시키고 있는 특성이나 성질 및 그러한 성질을 지닌 존재(현상) 하나하나를 말한다.[131] 그러므로 만법(萬法)은 모든 경서뿐만이 아니라 모든 현상이나 존재를 뜻한다. 법을 산스크리트어로는 ‘다르마(dharma)’라고 한다. 다르마의 ‘다르(dhar)’는 ‘드리(dhṛ)’라는 동사에서 유래되었는데, 이를 명사형으로 만든 것이 ‘다르마(dharma)’이다. ‘드리(dhṛ)’는 ‘손에 쥔다(to hold)’는 뜻이므로, 법(dharma)은 사람이 파악한 것, 생각한 것, 본 것, 만든 것들과 다 관련이 있게 된다.[132]
사람이 파악하고 생각한 모든 것, 즉 법화경을 포함한 모든 만법에 대하여, 어리석은 부처님, 즉 중생은 그것이 사람 마음의 밖에 있다고 보기 때문에 법화경에 굴리게 된다. 또한 모든 만법에도 굴림을 당하게 된다. 하지만 ‘모든 만법이 다 자기의 마음 가운데 있음[133]’을 깨쳐서 마음이 열리게 되면 큰 지혜를 가진 사람 즉 부처가 되어, ‘자기의 마음(自心)을 좇아서 진여의 본성을 단박에 나타내게’ 된다. 즉, 깨치게 되면 자성(自性)의 수레바퀴를 돌리게 된다는 것이 혜능의 가르침이다.
“선지식들아, 나의 이 법문은 옛부터 모두가 생각 없음[無念]을 세워 종(宗)을 삼으며 모양 없음[無相]으로 본체를 삼고 머무름 없음[無住]으로 근본을 삼느니라.
어떤 것을 모양이 없다고 하는가? 모양이 없다고 하는 것은 모양에서 모양을 떠난 것이다. 생각이 없다고 하는 것은 생각에 있어서 생각하지 않는 것이요, 머무름이 없다고 하는 것은 사람의 본래 성품이 생각마다 머무르지 않는 것이다. 지나간 생각과 지금의 생각과 다음의 생각이 생각 생각 서로 이어져 끊어짐이 없나니, 만약 한 생각이 끊어지면 법신이 곧 육신을 떠나느니라.
순간순간 생각할 때에 모든 법 위에 머무름이 없나니, 만약 한 생각이라도 머무르면 생각마다에 머무는 것이므로 얽매임이라고 부르며 모든 법 위에 순간순간 생각이 머무르지 아니하면 곧 얽매임이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머무름이 없는 것으로 근본을 삼느니라.”[134]
육조 혜능은 무념, 무상, 무주(無念無相無住)를 자신의 법문의 근본[135]으로 삼는다고 하였다. 그리고 ‘머무름이 없다(無住)고 하는 것은 사람의 본래 성품(本性)이 생각마다 머무르지 않는 것이다.’라고도 하였다. 사람의 본래 성품(本性)이 자성(自性)을 뜻하는 말이므로, 머무름이 없음의 주체가 자성임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보면, ‘모양에서 모양을 떠나는’ 무상(無相)과 ‘생각에 있어서 생각하지 않는’ 무념(無念)의 주체가 모두 자성임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내’가 아무리 무념, 무상, 무주(無念無相無住)를 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마음이 삿되어 <법화경>에 굴리게 되는 것과 같이 <무념, 무상, 무주>에 굴림을 당하는 것이 될 것이다. 그러나 자성이 주체가 되면 <무념, 무상, 무주의 수레바퀴>를 스스로 굴리게 될 것이다.
도는 모름지기 통하여 흘러야 한다. 어찌 도리어 정체할 것인가? 마음이 머물러 있지 않으면 곧 통하여 흐르는 것이요, 머물러 있으면 곧 속박된 것이니라.[136]
여기서 도(道)는 마음과 같은 뜻을 가진 말로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마음은 ‘자성(自性)’과 같은 말이다. 자성이 머물러 있으면 속박된 것이므로 흘러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유마경에서는 ‘첫째 뜻에 있어서 움직이지 않는다.’고 하였다.
“진여는 생각의 본체요 생각은 진여의 작용이니라. 그러므로 자기의 성품(自性)이 생각을 일으켜 비록 보고 듣고 느끼고 아나, 일만 경계에 물들지 않아서 항상 자재하느니라. 유마경에 말씀하시기를 ‘밖으로 능히 모든 법의 모양을 잘 분별하나 안으로 첫째 뜻에 있어서 움직이지 않는다.’ 하였느니라.”[137]
유마경의 ‘밖으로 능히 모든 법의 모양을 잘 분별하나 안으로 첫째 뜻에 있어서 움직이지 않는다.’는 구절과 앞에서 언급된 ‘자기의 성품(自性)이 생각을 일으켜 비록 보고 듣고 느끼고 아나, 일만 경계에 물들지 않아서 항상 자재하느니라.’는 구절과 대비시켜 보면, 유마경의 ‘움직이지 않는’ 주체는 ‘항상 자재(自在)한 자성(自性)’임을 알 수 있다.
‘도는 모름지기 통하여 흘러야 한다.’고 하여 자성(自性)이 머물러 있으면 안 된다는 말과 ‘첫째 뜻에 있어서 움직이지 않는 자성(自性)’이라는 말은 서로 모순이 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런 모순을 해결할 수 있는 표현이 ‘자성의 수레바퀴’ 또는 ‘무념, 무상, 무주의 수레바퀴’라고 할 수 있다.
자성(自性)은 수레바퀴의 중심이 되고 수레바퀴의 주체로서 ‘무념, 무상, 무주의 수레바퀴’를 돌리지만, 수레바퀴의 중심에서 벗어나서 움직이질 않고 항상 그곳에 자리를 잡고 있다. 이렇게 자성(自性)을 수레바퀴의 중심에 비유하면, ‘밖으로 능히 모든 법의 모양을 잘 분별하나 안으로 첫째 뜻에 있어서 움직이지 않는다.’는 표현이 수레바퀴의 중심이 되어 움직이지만 움직이지 않는 자성(自性)으로 이해할 수 있어서 모순이 될 게 전혀 없다.
융(C. G. Jung)이 인용한 Meister Eckhart의 신비체험에서 이와 비슷한 깨달음을 발견할 수 있다.
깨달음이란 ‘나’라는 형태에 한정된 의식이 내가 아닌 것처럼 보이는 자기(自己 non-ego-like Self)로 돌파(break-through)해 들어감으로써 나타나는 것으로 해석된다. 이러한 관점은 선(禪)의 정수에 해당될 뿐만 아니라 Meister Eckhart의 신비체험에도 해당 된다. Meister Eckhart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내가 신(God)으로부터 흘러나왔을 때 모든 사물은 ‘하느님은 계신다.’라고 선언하였다. 그러나 지금 나는 이 말로부터 은혜를 받지 못한다. 왜냐하면 나는 내 자신이 피조물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돌파(breakthrough)해 들어감에 있어서 나는 신의 의지 속에서 텅 빈 채로 서 있다. 그리고 또한 나는 내 안에 신의 의지도 신의 모든 창조물도 그리고 신 그 자신조차도 없는 채로 서 있다. 그때 나는 모든 피조물들 그 이상이다. 이때 나는 신도 아니고 피조물도 아니다. 나는 늘 그대로의 나이다. 그리고 나는 영원히 존재할 것이다.
......
이렇게 돌파(breakthrough)해 들어감으로써 나는 신과 내가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것을 받아들인다. 나는 늘 그대로의 나이다. 나는 늘어나지도 않고 줄어들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나는 모든 것을 움직이게 하지만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는 움직이는 자(the unmoved mover)이기 때문이다.”[138]
‘나는 모든 것을 움직이게 하지만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는 움직이는 자(the unmoved mover)이다.’라는 Meister Eckhart의 신비체험은 ‘밖으로 능히 모든 법의 모양을 잘 분별하나 안으로 첫째 뜻에 있어서 움직이지 않는 자성(自性)’의 체험과 비교될 수 있을 것이다.
“몸에는 ‘생로병사(生老病死)’의 괴로움이 있고, 세상은 ‘성주괴공(成住壞空)’의 허망함이 있으며, 마음에는 ‘생주이멸(生住異滅)’의 무상함이 있다. 이 덧없는 불길의 고통이 사방에서 함께 타오르고 있다.”는 구절이 선가귀감에 있다.[139] ‘덧없는 불길의 고통’이라 함은 죽거나 사라져 버릴 몸과 마음에 대한 ‘나’의 집착과 세상에 대한 ‘나’의 욕망으로 인한 고통을 뜻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모든 것을 만들어내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의 마음, 즉 만법(萬法)을 포함하는[140] 자성(自性)의 관점에서 보면, ‘생로병사(生老病死)’와 ‘성주괴공(成住壞空)’과 ‘생주이멸(生住異滅)’이라는 ‘덧없는 불길의 고통’도 자성이 수레바퀴를 돌려서 만들어낸 모습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세 가지 모습 중에서 ‘생로병사(生老病死)’와 ‘생주이멸(生住異滅)’은 ‘나’의 관점에서만 본 변화이지만, ‘성주괴공(成住壞空)’은 자성(自性)이 돌리는 수레바퀴의 모습을 이르는 말이라고 해도 큰 무리는 없을 것이다. 그리하여 한 사람의 인격이 발달하는 과정도 자성(自性)이 중심이 되고 주체가 되어 성주괴공(成住壞空)의 수레바퀴를 돌리는 것으로 보고 이를 분석심리학적으로 이해하고자 한다.
머무름이 없다고 하는 것은 사람의 본래 성품이 생각마다 머무르지 않는 것이다. 지나간 생각과 지금의 생각과 다음의 생각이 생각 생각 서로 이어져 끊어짐이 없나니, 만약 한 생각이 끊어지면 법신이 곧 육신을 떠나느니라.
순간순간 생각할 때에 모든 법 위에 머무름이 없나니, 만약 한 생각이라도 머무르면 생각마다에 머무는 것이므로 얽매임이라고 부르며 모든 법 위에 순간순간 생각이 머무르지 아니하면 곧 얽매임이 없는 것이다.[141]
‘지나간 생각과 지금의 생각과 다음의 생각이 생각 생각 서로 이어져 끊어짐이 없나니’라고 하였다. 그런데 미래가 현재가 되면 다음 생각이 지금 생각이 되고 또 그 다음 생각이 이어지게 되므로 무념(無念)의 수레바퀴는 끝도 없는 생각들이 이어져 끊임이 없게 될 것이다. 그리고 과거의 생각도 마찬가지로 끝없이 이어져서 시작을 알 수 없을 것이다.
빅뱅이론에 따르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우주는 시작이 있었고 계속해서 미래를 향해 팽창하고 있다. 과거와 미래의 구분이 뚜렷하다. 그런데 불교의 선사들은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깨달음의 세계를 말한다.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세계는 자성의 수레바퀴를 돌려서 나타나는 세계라고 이해할 수 있다. 자성이 중심이 되어 수레바퀴를 돌리게 되면 이에 따라 시간이 흐르고 성주괴공의 변화가 끊임이 없이 지속되겠지만 어디가 시작이고 끝인지 알 수 없거나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세계가 될 것이다.
<무념, 무상, 무주의 수레바퀴>처럼, 머물지 않고 영원히 굴러가는 것이 성주괴공(成住壞空)의 수레바퀴의 본성일 것이다. 그러나 성주괴공 중에 어느 한 부분에라도 머물게 되면 자성(自性)의 수레바퀴는 제대로 굴러가지 못하게 된다.
‘만약 한 생각이 끊어지면 법신이 곧 육신을 떠나느니라.’는 육조단경의 한 구절도 자성(自性)이 <무념, 무상, 무주의 수레바퀴>를 돌리지 못하고 ‘나’라는 삿된 견해로 인하여 ‘나’의 생각에 머물게 되었을 때 일어날 수 있는 현상을 설명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위의 구절은 ‘만약 한 생각이라도 머물러 얽매여서 다음 생각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끊어지면 법신이 곧 육신을 떠나느니라.’고 풀이할 수 있다. 법신이 육신, 즉 색신을 떠난다는 말의 뜻은 무엇일까?
“색신은 곧 상(相)이 있음이요 법신은 곧 상(相)이 없음이니, 색신이란 사대(四大; 地水火風)가 화합하여 부모가 낳았기에 육안으로 볼 수 있거니와 법신이란 형상이 없어서 청, 황, 적, 백이 있지 않으며 일체 형상과 모양이 없어 육안으로 능히 볼 수 없으므로, 혜안이라야 능히 볼 수 있음이니라.”[142]
또한 색신시상 법신시성(色身是相 法身是性)이라[143] 하여 법신은 자성(自性)임을 밝히고 있다. 그러므로 ‘만약 한 생각이 끊어지면 법신이 곧 육신을 떠나느니라.’고 한 말의 뜻을 풀이해보면, ‘어리석은 부처님, 즉 중생이 ’나‘의 생각에 집착하여 머무르게 되면 법신이 곧 육신을 떠나서 죽은 송장이나 마찬가지가 된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사람이 죽게 되면 사람의 육신은 송장이 되었다가 원래의 사대(四大)로 돌아가게 되므로 육신은 법신과 헤어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죽지 않았더라도 법신인 자성(自性)을 보지 못하고 자아가 자신의 주체인 줄 착각하고 살아간다면, 그것은 법신이 육신을 떠났기 때문에 ‘산 송장’이나 마찬가지이다.
아침이 오고 밤이 되는 것을 멈추게 할 수 없으며,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수레바퀴는 일정하게 돌고 있다. 이처럼 사람의 인생도 생로병사(生老病死)의 수레바퀴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러나 어리석은 부처님, 즉 중생은 늙고 병들어 죽지 않았으면 한다. 하지만 생로병사의 수레바퀴는 중생이 원한다고 해서 멈출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원하지 않더라도 모든 중생은 생로병사를 경험할 수밖에 없다.
평소에 수행을 많이 하여 <무념, 무상, 무주의 수레바퀴>를 돌리게 되면 생로병사(生老病死)의 어느 것에도 머무르지 않을 것이며 죽음에 임박해서도 생로병사의 수레바퀴를 스스로 돌리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경우에는 죽음이라는 수레바퀴에 강제로 끌려들어가는 고통을 받게 될 것이다.
‘나’의 물질적인 측면인 몸은 부모로부터 왔지만, ‘나’의 정신적인 측면인 자아는 어떻게 형성되었을까?
제7 말나식은 8식의 견분(見分)을 자아로서 반연하고[144] 자기(Self)는 자아가 생겨나는 선험적 존재이다. 유식학적 관점에서 보면 8식의 자성(自性)으로부터 자아가 형성되고, 분석심리학적인 관점에서 보면 자기로부터 자아가 형성된다. 이렇게 만들어진 자아는 나쁜 것인가? 아니면 올바른 것인가?
자아라는 말을 들었을 때 아상(我相)이나 아집(我執)을 버려야 한다는 말을 먼저 떠올리는 사람은 자신을 사랑하고 중요시하는 것을 좋지 않게 여기는 사람일 것이다. 그들은 자신의 이기적인 경향을 싫어하고 이타적인 삶을 살아가려고 노력한다. 타인을 배려하고 이타적인 삶을 지향하는 태도는 당연히 바람직하고, 남을 배려하지 않고 이기적이기만 한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하지만 남은 잘 돌보면서 자신은 돌보지 않는 것이 문제가 된다. 그들은 남들에게 아주 좋은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사실은 자신을 배려하는 마음이 없고 심지어 자신을 학대하는 아주 몹쓸 사람이 바로 자신이라는 것을 모른다. 그렇게 지내다가 학대받은 마음에 결국 병이 생겨서 정신건강의학과를 찾아올 수밖에 없는 경우를 많이 보게 된다.
아상(我相)이나 아집(我執) 또는 아만(我慢)이라고 하여 ‘나’라는 것이 나쁜 것처럼 취급받게 된 것은 자성(自性)이 바르지 못해서 ‘나’까지 나빠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성이 올바르면 ‘나’도 올바르게 된다는 것이 육조단경의 가르침이다.
법의 성품이 육식(六識)인 안식, 이식, 비식, 설식, 신식, 의식의 육식과 육문(六門)과 육진(六塵)을 일으키고 자성(自性)은 만법(萬法)을 포함하나니, 함장식(含藏識)이라고 이름하느니라. 생각을 하면 곧 식(識)이 작용하여 육식이 생겨 육문으로 나와 육진을 본다. 이것이 삼(三) 육(六)은 십팔(十八)이니라. 자성이 삿되기 때문에 열 여덟 가지 삿됨이 일어나고, 자성이 바름(正)을 포함하면 열 여덟 가지 바름이 일어나느니라. 악의 작용을 지니면 곧 중생이요, 선이 작용하면 곧 부처이니라.[145]
흔히 교가(敎家)에서는 ‘식을 전환하여 지를 이룬다[轉識成智]’고 말하는데, 여덟 개의 모든 식[諸八識]을 전환하여 네 가지 지혜[四智]를 성취한다는 뜻으로, 이는 유식학이 표방하는 기본 도리입니다. 8식이라는 것은 중생생활 전체를 말하는 것으로, 중생이 성불하여 구경각을 성취하면 네 가지 보리를 얻는다는 뜻입니다. 일반적으로 유식학에서는 네 가지 지혜를 취급함에 있어서 8식이 반드시 전환해야만 네 가지 지혜가 성취될 수 있다는 입장이 통설입니다. 그러나 육조 스님은 그러한 통설에 따르지 않으면서도 독특하고, 오히려 타당할 수도 있는 해석을 하고 있습니다. 즉 육조 스님은 여덟 식을 전환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여덟 식 그대로가 네 가지 지혜[四智]라고 합니다.
대원경지(大圓鏡智)는 제8식의 자성이 청정한 것을, 평등성지(平等性智)는 바로 제7말나식에 병이 없음을, 묘관찰지(妙觀察智)는 무루(無漏)의 제6식을 말합니다. 그리고 성소작지(成所作智)는 청정한 전5식을 뜻하는데 이것은 대원경지와 같습니다. 전5식은 제8식을 의지하여 존재하기 때문에 제8식이 청정하여 대원경지가 될 때 오근(五根)으로 행하는 일체가 대원경지의 작용이 됩니다.[146]
이렇게 ‘참나’인 자성(自性)이 바르면 자아도 바르고 부처가 되나, 자성이 바르지 못하고 삿되면 자아도 나쁘게 되어서 중생 노릇을 하게 된다. 그러므로 아이의 자아가 올바르게 형성되는 것도 어린아이의 자성이 옳아야 할 것이다. ‘어린이’ 상징의 의미를 알아봄으로써 어린아이의 자성에 대해서 분석심리학적으로 살펴보자.
‘어린이’는 시작이자 끝이며, 최초의 인간이자 최후의 인간이다. 최초의 인간은 인간이 존재하기 이전에 있었으며 최후의 인간은 인간이 사라진 뒤에도 있을 것이다. 이것의 심리학적인 의미는 ‘어린이’가 의식이 생겨나기 이전과 의식이 사라진 이후의 인간의 본성을 상징한다는 것이다. 의식이 생겨나기 이전의 인간의 본성은 초기 유아기의 무의식 상태이며, 의식이 사라진 이후의 인간의 본성은 사후 세계를 유추(類推)해보았을 때 예상되는 것이다. 모든 것을 포괄하는 정신적 전체성이 이런 생각 속에 표현되어 있다. 전체성은 결코 의식하여 알고 있는 마음의 범위 안에 있지 않다. 전체성은 특정하거나 정의를 내릴 수 없는 무의식을 포함한다. 그러므로 전체성은 경험을 통해서 측정할 수 있는 것은 결코 아니며, 의식이 생겨나기 전부터 있었고 의식이 사라진 뒤에도 남아 있으며, 시간과 공간 속에 존재하는 의식을 둘러싸고 있다. 추측해서 이렇게 말하는 것은 결코 아니며 이것은 정신적으로 직접 경험한 것이다. 무의식적으로 일어나는 사건들이 의식적인 과정과 함께 지속적으로 일어날 뿐만 아니라, 의식적인 과정을 이끌어가고 도와주거나 또는 반대로 방해하는 경우가 자주 일어난다. 의식을 갖기 전에도 어린이의 정신적인 삶은 존재한다.[147]
‘어린이’가 의식이 생겨나기 이전과 의식이 사라진 이후의 인간의 본성을 상징한다는 것으로 미루어볼 때, ‘어린이’는 구체적인 어린이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인간의 본성, 즉 자성(自性)을 상징하는 말임을 알 수 있다.
어린이는 대극을 융합하는 상징이며, 치유에 이르게 하는 중재자, 즉 전체성을 실현하는 자이다.
......
나는 의식을 초월한 전체성을 자기(Self)라고 명명하였다. 개성화 과정의 목표는 자기의 합성이다. 다른 관점에서 고찰하면, ‘합성’이라는 용어 대신 ‘엔텔레키(Entelechie)’[148]를 추천한다. 엔텔레키라는 표현이 어째서 더 실제로 적합한지에 대해서는 경험적인 이유가 있다. 전체성의 상징은 개성화 과정의 초기에 자주 나타나는데, 심지어 영아기의 첫 꿈에서 관찰된다. 이러한 관찰은 잠재적인 전체성이 이미 선험적으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뒷받침한다.[149]
전체성의 상징이 아주 어린아이에서도 관찰된다는 것은 자기, 즉 자성(自性)은 태어날 때 이미 가지고 태어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자웅동체(雌雄同體)의 어린이도 대극을 합일하는 전체성의 상징이다.
우주를 창조한 신(神)들 대부분이 남녀의 성징(性徵)을 모두 지녔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사실이다. 자웅동체(雌雄同體)가 의미하는 바는 반대(反對)하는 경향이 상호 간에 가장 강하고 현저한 대극(對極)들이 하나로 합해진 것이다. 이러한 합일과 관련되어 가장 먼저 언급되는 것은 원시적인 정신 상태, 즉 차이와 대비(對比)가 거의 분리되지 않거나 아예 완전히 병합되어 있었던 상태이다. 그러나 의식이 점점 더 명료해지면서 대극들은 서로의 차이점을 더욱 더 분명히 하여 양립(兩立)할 수 없을 정도로 멀어지게 된다.[150]
문명이 발전함에 따라, 양성적(兩性的) 특징을 가진 원초적 존재는 인격의 통일, 즉 자기(Self)의 상징이 되는데, 대극간(對極間)의 갈등은 그 속에서 평온해진다. 이런 방식으로 양성적(兩性的) 특징을 가진 원초적인 존재는 인간이 이루어야 할 자기 발전(self-development)이라는 머나먼 미래의 목표가 된다. 양성적(兩性的) 특징을 가진 원초적인 존재는 처음부터 인간의 무의식적 전체성이 투사되었던 것이다. 전체성의 특징은 의식적 인격과 무의식적 인격이 하나로 통합된 것이다.
......
남성의 경우 의식만이 남성의 징후로 드러나고, 무의식은 여성적 특징을 지닌다. 여성의 경우는 그 반대다. 나는 이러한 사실을 아니마 이론에서 재발견하고 설명하였다.[151]
이렇게 남성과 여성이라는 대극(大戟)이 합일(合一)된 상징인 ‘자웅동체(雌雄同體)의 어린이’는 어린아이가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태어나는 자기(自己)의 상징이다. 이는 자성(自性), 즉불성은 중도라는 부처님의 가르침과 비교해볼 때, ‘자웅동체(雌雄同體)의 어린이’는 중도(中道), 즉 자성의 상징이기도 하다.
부처님께서 「열반경」에서 불성을 예기하시면서 중도를 많이 말씀하셨습니다.
“불성은 있는 것도 아니며 없는 것도 아니며, 또한 있는 것이며 또한 없는 것이니 있는 것과 없는 것이 합하는 까닭에 중도라고 한다.”(佛性 非有非無 亦有亦無 有無合故 名爲中道)
불성은 비유비무(非有非無), 즉 있는 것도 아니며 없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있는 것과 없는 것을 완전히 떠나면 또한 있는 것이며 또한 없는 것이니(亦有亦無) 있는 것과 없는 것이 서로 융합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있는 것과 없는 것이 서로 통하므로 중도(中道)라고 하는 것입니다.[152]
어린이는 자기, 즉 자성(自性)을 가지고 태어나지만 자성을 스스로 보지 못하고 무의식 상태로 살아간다. 무의식 상태인 어린아이의 정신 상태는 원시인의 정신 상태와 같다고 할 수 있다.
원시인의 정신 상태는 문명인의 정신 상태와 비교할 때, 의식의 확장과 강도에서 훨씬 덜 발달되었다는 차이가 있다. 사고, 의지 등과 같은 기능이 아직 분화되지 않았고, 의식이 생겨나기 이전의 상태에 있었다. 예를 들자면, 생각할 때 보면 의식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이 나타나는 것이다. 원시인은 자신이 생각한다고 주장할 수 없고 “자신 안에서 어떤 것이 생각한다.”고 말할 수 있다. 인과적인 관점에서 보면 생각하는 행위는 의식이 아니라 무의식에서 저절로 일어나는 것이다.[153]
인격의 통합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고(현존하는 원시인의 인격도 튼튼하게 통합되어 있지 않다) 의식도 전혀 없었던 시절에도 이미 존재하였던, 즉 의식이 생겨나기 이전의(pre-conscious) 정신을 우리는 초기 유아기에서 관찰할 수 있다. 초기 유아기에 꾸는 꿈은 종종 매우 주목할 만한 원형적 내용을 나타낸다.[154]
그런데 어린아이의 마음은 거의 전적으로 부모의 영향 아래에 있다.
심하게 의존적이고 주변 상황의 영향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쉬운 어린아이의 마음은 부모의 심리 안에 오랫동안 잠겨있으며 이러한 영향에서 벗어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한참 후의 일이다.[155]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어린아이에게도 정신적으로 진행되는 과정이 존재한다는 것을 발견할 수는 있지만, 생후 1년 동안 어린아이에게 의식이라고 할 만한 것은 거의 없다. 어린아이의 정신적 과정은 조직화된 자아를 중심으로 모여 있지 않다. 즉, 중심이 없기 때문에 영속성도 없고 이러한 것들이 없으면 의식을 가진 인격도 불가능하다. 그리하여 어린아이들의 정신적 과정이 매우 유연하고 감수성이 높음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은 어른들이 하는 것과 같은 기억을 전혀 하지 못한다. 아이가 “나”라고 말하기 시작하는 그때가 되어야 비로소 인지할 수 있는 의식의 영속성이 생겨난다. 그러나 의식이 생겨났다고 하더라도 그 사이에는 무의식 상태가 지속된다. 의식(conscious mind)은 여러 조각들이 점진적으로 하나로 모아지면서 그 존재가 나타나게 됨을 우리는 실제로 볼 수 있다. 이런 과정은 전 생애를 통해서 지속되지만, 사춘기 이후로는 무의식에 있던 여러 조각들이 의식에 추가되는 속도는 점차 느려지고 그 양도 적어지게 된다. 이런 성장과정을 통해서 이전에 무의식에 속하였던 정신적 과정이 이제는 자아와 견고하게 연결됨으로써 그러한 정신적 과정의 원천이었던 무의식으로부터 분리된다. 바다로부터 새롭게 솟아오른 섬과 같이, 의식은 이런 방식으로 무의식으로부터 올라온다. 교육과 문화는 아동에게서 일어나는 이러한 과정을 강화하는데, 학교는 사실상 의식의 통합을 강화시키는 수단이다.[156]
자신을 의식하지 못하는 생후 2년 또는 3년 동안의 어린아이는 동물과 마찬가지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자궁 속의 태아가 사실상 어머니 신체의 일부분이라고 할 수밖에 없고 태아가 전적으로 어머니에게 의존적인 것처럼, 초기 유아기 아동의 정신은 대부분 어머니의 정신에 속해 있다가 곧 양친 부모의 정신에 속하게 될 것이다. 어린아이의 최초의 심리는 부모의 심리와 융합된 상태이고, 한 개인으로서의 심리는 오직 잠재적으로만 존재할 뿐이다. 이런 이유로 인하여 유아기로부터 학령기 아동에 이르기까지 모든 어린아이의 정신질환은 거의 전적으로 부모의 정신세계 내부의 장애로부터 발생하게 된다.[157]
어린아이는 자성(自性)을 가지고 태어난다. 하지만 어린아이의 자성이 올바르지 않고 삿된 작용을 나타내는 것은 거의 전적으로 부모의 영향이다.
어린아이가 자신의 자아에 대한 의식을 발달시키게 되면 커다란 변화가 일어나는데, 자신을 가리켜 ‘나’라고 표현하게 된다. 이러한 변화는 생후 3년째나 4년째에 정상적으로 발생하지만 보다 빨리 시작될 수도 있다. 이런 시점으로부터 개별적인 한 사람의 정신이 존재한다고 말할 수는 있지만, 사춘기가 지나서야 어느 정도의 독립성을 획득하는 것이 정상이다. 그때까지 개인의 정신 대부분은 본능과 주위환경의 노리개였을 뿐이다.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여섯 살 난 아이의 정신 대부분은 여전히 그의 부모의 정신이 만들어낸 산물이다. 그 아이는 자아의식의 씨앗을 가지고 태어나기는 하였지만 그 자신의 무의식에 존재하는 개성(individuality)[158]을 발휘할 수는 없다. 고집이 세고 반항적이고 독특하여 다루기 힘든 아이를 해석함에 있어서 그 아이의 개인적인 문제로 또는 그 아이의 아집(我執)으로 보려는 경우가 자주 있는데, 이것은 잘못이다. 이런 아이를 치료할 때 우리는 항상 부모가 어떤 상태에 있으며 부모가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자세히 살펴보아야 한다. 거의 예외 없이 우리는 아이가 가진 장애를 일으키는 타당한 원인이 전적으로 부모에게 있음을 발견한다.[159]
그러나 부모의 자성이 올바르면 어린아이의 자성도 삿되지 않고 올바르게 작용하여 정신적인 장애를 일으키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부모의 자성이 깨달아서 부처가 되어야만 아이의 자성도 올바르게 작용할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다는 결론에 다다르게 된다. 그런데 깨달아서 부처가 된 부모가 이 세상에 몇 명이나 있을까?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사실상 거의 모든 부모가 정도의 차이가 있겠지만 아이들에게 나쁜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볼 수밖에 없다.
자식을 위해서라도 부모가 자신의 자성을 보고, 스스로 깨달아서 부처가 되어야 하겠지만 참선 수행을 해본 사람들은 이것이 너무나도 힘들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낄 것이다. 이럴 때 어린아이는 부모의 도움이 필요한 존재가 아니라 오히려 부모의 큰 스승이 되어 부모가 자성을 보는 데 큰 도움을 줄 수 있다. 어린아이를 낳아서 키우는 과정에서 부모는 어린 자식의 자성을 관찰함으로써 자신의 자성을 보는 데 도움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성철 스님이 “숨김없이 지 생각나는 대로 반응하는 것이 어린애 아니냐. 그게 얼마나 좋냐.”라고 하면서 아이들은 ‘천진불(天眞佛)’[160]이라고 하였다는[161] 이야기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람이 죽을 때는 의식이 전부 그치고 제7식은 작용을 못하지만 제8아뢰야식만은 생명을 마칠 때까지 남아 있다가 생명이 끊어질 때, 즉 윤회할 때 최후까지 남아서 따라갑니다. 또 사람이 다시 몸을 바꾸어 환생할 때에 제6의식이나 제7식은 작용하지 않지만 제8아뢰야식은 제일 먼저 와서 그 중생의 주인이 되는 것입니다.[162]
어린아이의 마음은 자아의식(自我意識)이 거의 발달하지 않았는데, 이를 유식학적 관점에서 살펴보면 8식은 있으나 6식과 7식은 거의 생겨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전5식은 본래 제8식인 아뢰야식의 상분(相分)에 의지하는 것이므로, 6식과 7식이 없더라도 어린아이의 전5식은 8식에 의지하여 활동하는 것이다.[163] 어린아이에게 6식이 전혀 없다면 제7지 보살인 무상정(無想定)과 같아서 몽중일여(夢中一如)의 상태이고 7식이 전혀 없다고 하면 멸진정(滅盡定)에 들어간 제8지 보살의 경지와 같아서 숙면(熟眠)에서도 일여가 되는 오매일여(寤寐一如)의 상태와 같다고 할 수 있다.[164] 참선수행을 하더라도 몽중일여(夢中一如)나 오매일여(寤寐一如)의 경지에 이르기는 매우 어렵다고 하는데, 어린아이는 태어날 때 이미 이런 경지와 가까운 상태로 태어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어린아이가 몽중일여(夢中一如)나 오매일여(寤寐一如)의 상태라고 하더라도 완전한 깨달음은 아니다.
숙면에서도 일여가 되는 오매일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공부를 완전히 성취한 것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아직도 제8마계(第八魔界)라는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즉, 무심(無心)의 경지에 도달하기는 하였지만 여전히 그 무심에 머무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재보살로서 색자재(色自在)하고 심자재(心自在)하고 법자재(法自在)하지만 제8지, 제9지, 제10지, 등각보살들도 공에 빠지고 적멸에 머물러 있기 때문에[沈空滯寂] 아직 아뢰야 마계에 있는 것이므로 자성을 바로 본 것이 아닙니다. 물론 장식(藏識)이라는 이름은 버렸지만 아직도 이숙식(里熟識)이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그러므로 색자재 이상에 가서 이숙식이 완전히 공한 대원경지를 증득해야 공부를 바로 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165]
어린아이의 상태가 완전한 깨달음을 얻은 상태가 아닌 것은 분명해 보이지만 타고난 그대로의 청청한 자성의 작용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어른들의 자성은 타고난 그대로의 청청함이 아니라 경계에 물들어서 어리석은 자성이 되었다. 그러므로 부모가 자식을 키울 때 부모의 관점에 매달려서 어린아이가 청청한 자성의 수레바퀴를 스스로 돌리는 것을 방해하지 않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3세 이전의 어린아이는 부모가 항상 옆에 있거나 같이 놀아주어야 하는데, 이때 어린아이가 주도적이고 부모는 수동적이어야 한다. 부모가 능동적으로 아이를 어떤 방향으로 키우려고 해서는 안 된다. 이는 어린아이의 자성(自性)이 스스로 활동할 수 있는 기회를 부모가 방해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중생이 견해를 일으킴에 무릇 두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상견(常見)이요 다른 하나는 단견(斷見)이니라. 이와 같은 두 견해는 중도(中道)라 하지 않으며 상견도 없고 단견도 없음을 중도라 한다. 상견과 단견 없음이 곧 십이인연(十二因緣)을 보는 지혜이며 이와 같이 보는 지혜가 불성이니라. 성문과 연각이 비록 인연을 보나 아직 불성이라 이름할 수 없느니라. 불성은 비록 항상 있으나 모든 중생이 무명에 덮여 있으므로 능히 불성을 보지 못하는 것이요, 또 능히 십이인연의 강을 건너지 못하는 것이 마치 토끼나 말이 강을 건너지 못하는 것과 같다. 왜냐하면 불성을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166]
상견(常見)이니 단견(斷見)이니 하는 것은 자아의식, 즉 6식과 7식이 생겨난 뒤에 일어나는 것이다. 어린아이가 자라나서 자아의식을 가지게 되면 어차피 상견과 단견을 일으킬 수밖에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3세 이전의 어린아이는 이러한 상견과 단견이 없는 상태로서 청청한 자성이 있는 그대로 발휘될 수 있는 시절이다. 그러므로 자신의 어린 자식이 바로 청청한 자성의 화신인 부처님이라고 보고 어린아이의 몸과 마음을 충분히 보살펴 주어야 한다. 어린아이의 몸이 요구하는, 먹고 마시고 편안함을 추구하는 본능적 욕구가 충족되어야 하고, 어린아이의 마음을 잘 보살펴서 자신이 사랑받고 존중받고 있음을 충분히 느끼게 해주어 건강한 ‘자아’가 형성되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이렇게 몸과 마음이 충분히 보살핌을 받은 아이는 어머니로부터 눈을 돌려 이 세상에 관심을 가지게 되고, 모진 세상의 풍파를 헤쳐 나갈 수 있는 자신감과 자존감을 가진 아이가 될 것이다. 물론 어린아이가 커가면서 생기게 되는, 어머니로부터 독립하려는 아이의 욕구를 방해하는 과잉보호는 금물이다.
부모에게 지나치게 강한 애착을 보이게 되면, 아이가 나중에 세상에 적응할 때 심각한 어려움을 겪게 된다. 왜냐하면 인간은 성장해가는 존재이고 그래서 인간의 운명은 영원히 부모의 아이로 남아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모가 그들 자신의 나이가 들기를 바라지 않고 부모로서의 권위와 힘을 포기하고 싶지 않기 때문에 자신의 아이들을 유아적인 상태에 계속해서 머물도록 하는 부모들이 많이 있음은 불행한 일이다. 이런 방식으로 그들의 아이들이 자기가 맡은 일을 남의 도움이 없이 스스로 책임지는 개인이 될 수 있는 모든 기회를 박탈하기 때문에 부모는 그들의 아이들에게 매우 나쁜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이런 부모들과 달리 그들 자신의 허약함 때문에 적절한 권위를 가지고 아이들을 대할 수 있는 위치에 있지 못한 부모들도 있다. 이리하여 교사는 한 사람의 인격체로서 억압적인 권위를 부리지 않으면서도 동시에 아이들을 다루는 어른에게 적절한 권위를 행사하는 까다로운 과업에 직면하게 된다.[167]
아이를 충분히 보살펴주면서도 과잉보호도 하지 말아야 하는데 어떻게 해야 그렇게 할 수 있을까? 그 기준을 어디에 두어야 할 것인가? 이러한 문제에 관심을 가졌던 부모라면, 적절한 권위의 기준을 세우기가 매우 어렵다는 것을 모두 인식하였을 것이다. 부모가 이러한 문제를 풀어나가는 데 있어서 육아에 대한 책이나 이론을 통해서 도움을 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이의 자성을 다루는 적절한 권위는 어떤 이론이나 알음알이가 아니라 부모가 스스로 자성을 보고 깨달은 중도(中道)로부터 나올 것이다. 분석심리학파에서 실시하는 소아정신분석의 토대와 목표도 이러한 중도가 되어야 하며,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중도를 깨닫는 것이 매우 어렵다고 하더라도 포기하지 말고 계속해서 노력해야 할 것이다.
사람들은 아이가 인격체(개성적 주체라는 뜻에서-역주)로 교육되어야 한다고 계속 이야기한다. 나는 당연히 이 드높은 교육적 이상을 찬양한다. 그러나 누가 인격체로 교육하는가? 가장 처음이자 중요한 자리에 평범하고 무능력한 부모가 있다. 이들은 스스로 한평생 반쯤, 혹은 전적으로 아이들과 다름없는 어른이다. 누가 그 평범한 부모들에게서 인격체를 기대하겠으며, 누가 그 부모들에게 ‘인격’을 가르쳐줄 수 있는 방법들을 고안해낼 생각을 하였겠는가? 그래서 당연히 전문적 교육자들에게서 더 많은 기대를 하게 된다.
......
교직을 평생직업으로 선택한 젊은이들은 보통 그들이 교육해야 하는 아이들과 똑같은 결함 있는 교육을 받았으며 대체로 그들만큼이나 인격체가 아니다. 우리의 교육문제는 보편적으로 교육대상인 아이만 일방적으로 가리키고 성인인 교육자들의 무교육 상태를 일방적으로 무시하는 문제를 안고 있다.
......
평균적 교육자에게서는 평균적 부모에게서보다 더 많은 것을 기대할 수 없다. 그들이 괜찮은 전문가라면, 자녀를 가능한 한 잘 교육하는 부모에게 만족하듯이 그들에게도 만족할 수밖에 없다.
......
나는 아동에 대한 우리 시대의 교육학적, 심리학적 열광에 정직하지 않은 의도가 있지 않나 의심한다. 즉, 아이 이야기를 하지만 실은 어른 속에 있는 아이를 생각한다고 의심하는 것이다. 어른 속에 아이가 들어 있는 것이다. 이 ‘영원한 아이’는 여전히 형성되어가는 과정에 있으며, 결코 완성이 없고, 끊임없는 보살핌과 관심과 교육이 필요하다. 그것은 성장하여 전체가 되고 싶어 하는 인간 인격의 한 부분이다. 그러나 이 전체성으로부터 우리 시대의 인간은 까마득히 멀리 떨어져 있다. 자신의 결함을 어렴풋이 예감하면서 그는 아동교육을 장악하여, 자기 자신의 교육과 아동교육에 무엇인가 잘못되었음이 분명하며 다음 세대에서 그것을 없앨 수 있다는 허황된 가정을 하면서 아동심리학에 열광한다. 이 의도는 장하지만, 내가 스스로 범하는 잘못을 아이에게서 고칠 수 없다는 심리학적 사실 때문에 좌절한다.
......
우리가 아이들에게서 바꾸려고 하는 모든 것을 우리부터 먼저 고쳐야 하는 것이 아닌지 주의 깊게 검토해야 한다.[168]
결론은 부모나 교사가 먼저 깨달음을 얻은 다음 아이를 키우고 가르쳐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먼저 깨달은 선지식의 도움을 받아 깨달음을 얻어야 할 것이다. 또는 부모의 문제를 분석가나 정신치료자에게 의뢰하여 해결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경우 분석가나 정신치료자는 먼저 자신의 정신적인 문제를 해결한 사람이어야 할 것이다. 정신적인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는 각 학파의 관점에 따를 것이므로 일정한 목표나 방법이 없다.
저자의 전공 분야인 분석심리학에서 제시하는 정신적 문제의 궁극적인 해결책은 자기실현이다. 자기실현은 궁극적으로 볼 때 견성성불(見性成佛)이 지향하는 바와 같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의 정신적 문제를 해결하는 분석가가 되려면 먼저 자신의 문제를 해결해야 할 뿐만 아니라 자기실현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분석심리학의 분석가 수련과정에서 가장 중요하게 보는 것이 분석가 후보 자신의 마음에 대한 분석을 받는 교육분석이다. 현재 한국 융 연구원에서 이러한 과정을 거쳐서 분석가가 되는 데 최소 10년 이상이라는 오랜 시간이 걸린다. 이런 과정을 거친 융 학파의 분석가가 부모가 가진 문제의 원인과 해결책을 찾으려고 할 때 매우 중요하게 보는 것이 부모의 꿈이다.
꿈이란 무엇인가? 꿈은 우리가 잠을 자고 있을 때 무의식에서 일어나는 정신적 활동의 산물이다. 잠을 잘 때의 마음은 우리 자신이 의도적으로 조절할 수 없는 조건하에 있다. 의식의 작은 일부분은 꿈을 꿀 때도 유지되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받아들여서 알 수는 있지만, 우리가 바라고 목적하는 바에 따라 정신적 사건이 일어나도록 이끌어갈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다. 그리하여 우리 자신을 속일 수 있는 가능성도 없다. 꿈은 무의식의 독자적인 활동이 만들어내는 자연발생적인 과정이며, 음식물을 소화시키는 생리작용과 마찬가지로 꿈도 의식적으로 조절할 수 없다. 그리하여 우리는 완전히 객관적으로 일어나는 과정인 꿈으로부터 실제 있는 그대로의 상황에 대한 객관적인 결론을 이끌어낼 수 있다.[169]
분석가는 자신의 관점이 아니라 피분석자인 부모의 마음이 만들어내는 꿈으로 객관적인 결론을 내려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다. 이는 자아의식의 관점이 아니라 자성의 관점에서 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도라고 볼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자살이 큰 사회적 문제가 된 지 10년이 넘었다. 그 이후로 많은 사람들이 자살방지를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여전히 높은 자살률을 보이고 있어서 이 문제가 쉽게 해결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필자는 자살예방이라는 문제가 종교적 관점에서 다루어야 해결될 수 있다는 생각에서 출발하여, 자살에 대한 석가모니 부처님의 관점을 연구한 연구 논문을 찾아보다가 다음 글을 발견한 적이 있다.
붓다가 베살리의 대림에 있는 중각강당에 머물 때, 붓다가 설한 신체의 부정(不淨)에 대해서 부정관(不淨觀) 등의 수행으로 자신의 몸에 상처를 내고, 몸을 혐오한 비구들이 있었다. 그들은 사문의 옷을 입고 있는 미가란디까에게 발우를 주기로 하고 죽여 달라고 부탁하였다. 그리하여 미가란디까는 225명 비구들을 살해하였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비구가 의도적으로 인간을 죽이거나 칼을 지니기를 원한다면 비구는 또한 바라이[170]이고 함께 살지 못한다. 그리고 이와 같이 세존께서 비구들에게 조문을 규정하셨다.”
그리고 이 율의 제정 이후에 육군비구는 병든 우바새[171]의 아내를 얻고자 그 우바새에게 죽음을 권유하고 찬탄하여 그를 죽게 하였다. 그 때문에 세 번째 바라이죄에 대한 추가적인 규정이 세워졌다. “한편 비구가 의도적으로 인간을 죽인다면, 또는 그가 칼을 지니고자 한다면, 죽음을 찬탄하거나 죽음에 들게 한다면 ‘오, 사람아, 네게 이 사악하고 좋지 않은 생명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죽는 것이 사는 것보다 낫다.’라고 하면서 이와 같은 마음이나 뜻으로, 이와 같은 생각으로 여러 가지 방법으로 죽음을 칭찬하거나 죽음에 들게 한다면 이것은 또한 바라이이며 불공주(不共住)이다.”[172]
율장의 내용은 신체의 부정(不淨)에 대한 붓다의 설법을 잘못 이해하여 자신의 목숨을 끊는 것을 도와주거나 또는 ‘이 사악하고 좋지 않은 생명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죽는 것이 사는 것보다 낫다.’라고 생각하여 현생(現生)의 삶을 혐오하고 자살을 선택하게 하는 것이 옳지 못함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신체가 깨끗하지 못하다는 붓다의 설법은 우리의 몸을 구성하는 육근(六根)의 대상인 육경(六境)에 대한 인식, 즉 육식(六識)의 주체가 자성(自性)이 아니라 ‘나’라고 알고 있는 중생들에게 신체에 대한 집착을 버리라는 가르침이었을 터인데, 우리 몸 자체가 깨끗하지 못한 것으로 받아들여서 몸을 가진 현생(現生)의 삶은 살 가치가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여 자살하고자 하는 것이 잘못이라고 붓다가 직접 설하였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중도(中道)의 가장 기본적인 형태는 있음[有]과 없음[無], 생함[生]과 멸함[滅] 등 상대적인 어떤 두 극단에 집착하지 않는 것입니다. 부처님이 도(道)을 이루고 난 뒤에 비구들에게 최초로 설법한 것이 있는데, 이것을 초전법륜이라고 합니다.
이 초전법륜의 가르침에는 여러 가지 중요한 불교의 근본 교리가 들어 있으며, 중도설도 그중의 하나에 해당합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중도설은 극단적인 두 변에 집착하지 말라는 기본적이고도 간단한 형식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집착하지 말라는 그 두 변은 이론적인 사항이 아니라 수행의 면에서 지켜야 할 실천적인 사항입니다.[173]
유(有)는 우리의 신체를 포함하여 유정(有情)으로서의 존재 또는 직접 경험에 나타나는 실재(實在)를 이르는 말이다.[174] 유(有)를 우리의 신체에 한정시켜서 붓다의 중도법문을 이해하자면 우리의 신체가 생겨나서 존재하는 것에도 집착하지 말고, 신체가 멸하여 없어짐에도 집착하지 말라는 가르침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나 지금이나 어느 한 극단에 집착하는 것은 중생의 어리석음 때문이다. 현재의 삶에 대하여 집착하지 말라는 붓다의 가르침에 자살을 택한 사람들은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175]이니 꽃을 아예 피우지 않거나 꺾어버리는 것과 같이 자연의 법칙을 거스르는 어리석은 행동이다.
“불성은 있는 것도 아니며 없는 것도 아니며, 또한 있는 것이며 또한 없는 것이니 있는 것과 없는 것이 합하는 까닭에 중도라고 한다.”(佛性 非有非無 亦有亦無 有無合故 名爲中道)[176]
그러므로 붓다가 깨달은 중도(中道)는 현재의 삶인 유(有)를 결코 전적으로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인생을 허망하게만 보는 것은 전적으로 무(無)에 집착하여 무기공(無記空)에 빠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어떻게 자성이 기용하는가? 삼십육대법이 사람의 언어와 더불어 함께 하나, 밖으로 나와서는 모양에서 모양을 떠나고, 안으로 들어와서는 공(空)에서 공을 떠나나니, 공에 집착하면 오직 무명만 기르고 모양에 집착하면 오직 사견만 기르느니라.[177]
인간으로 태어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우며 현재의 삶이 얼마나 귀중한 것인지 부처님의 설법을 직접 들어보자.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 미후(獼猴)못 가에 있는 2층 강당에 계셨다. 그 때 세존께서 모든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비유하면, 이 큰 대지가 모두 큰 바다로 변할 때, 한량없는 겁을 살아온 어떤 눈 먼 거북이 있는데, 그 거북이는 백 년에 한 번씩 머리를 바닷물 밖으로 내민다. 그런데 바다 가운데에 구멍이 하나뿐인 나무가 떠돌아다니고 있는데, 파도에 밀려 표류하고 바람을 따라 동서로 오락가락한다고 할 때 저 눈 먼 거북이 백 년에 한 번씩 머리를 내밀면 그 구멍을 만날 수 있겠느냐?”
아난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불가능합니다. 세존이시여, 왜냐 하면 이 눈 먼 거북이 혹 바다 동쪽으로 가면 뜬 나무는 바람을 따라 바다 서쪽에 가 있을 것이고, 혹은 남쪽이나 북쪽, 4유(維)를 두루 떠도는 것도 또한 그와 같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반드시 서로 만나지는 못할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눈 먼 거북과 뜬 나무는 비록 서로 어긋나다가도 혹 서로 만나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어리석고 미련한 범부가 5취[178]에 표류하다가 잠깐이나마 사람의 몸을 받는 것은 그것보다 더 어려우니라. 왜냐 하면 저 모든 중생들은 그 이치를 행하지 않고 법을 행하지 않으며, 선(善)을 행하지 않고 진실을 행하지 않으며, 서로서로 죽이고 해치며, 강한 자는 약한 자를 업신여기며 한량없는 악(惡)을 짓기 때문이니라.
그러므로 비구들아,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에 대하여 아직 빈틈없고 한결같지 못하다면 마땅히 힘써 방편을 쓰고 왕성한 의욕을 일으켜 빈틈없는 한결같음을 배워야 하느니라.”
부처님께서 이 경을 말씀하시자, 모든 비구들은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기뻐하며 받들어 행하였다.[179]
사람의 몸을 받아서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것은 전생에 수많은 선업(善業)을 지었기 때문이며 현재를 사는 동안에도 부처님의 가르침을 열심히 배워야 한다는 가르침이다. 이러한 관점은 현재의 삶을 매우 긍정적으로 보는 것이며 불교는 염세적이라는 오해와는 거리가 멀다. 사람의 몸을 받았다는 것은 자성(自性)이 인간의 모습으로 이 세상에 나타난 것이다. 즉, 제8식의 자성으로부터 인간의 자아의식이 형성된 것으로 볼 수 있고, 분석심리학적으로는 자기(自己)로부터 자아의식이 생겨났다고 할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자아 또는 ‘나’는 매우 긍정적인 존재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렇게 생겨난 자아의식을 가지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열심히 배워서 깨달음을 얻도록 해야 한다는 부처님의 말처럼, 현재의 삶으로부터 도피하지 말고 삶 속으로 나아가서 꽃을 활짝 피워야 할 것이다. 어떤 결실을 맺더라도 그런 다음에야 이루어질 것이다. 인생의 꽃을 피운다는 것은 어린아이가 부모로부터 독립하여 어른이 되는 것이다. 어린아이의 미성숙했던 자아는 어른이 되면서 보다 견고해져서 자아실현을 하게 된다. 이것이 성주괴공(成住壞空) 수레바퀴의 두 번째 부분인 주(住)에 대하여 자아실현이라는 설명을 덧붙인 이유다.
한 개인이 유아적인 것은 그가 유아적인 환경이나 자신의 부모에게 맞추어 살아왔던 삶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완전하지 못하였거나 또는 충분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한편으로는 아이가 부모에게 하듯이 세상에 대해서도 잘못 반응하여 항상 사랑을 요구하거나 감정적 보상을 즉각적으로 요구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부모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부모와 지나치게 동일시하여 그의 행동은 아버지나 어머니를 닮아간다. 이런 사람은 자기 자신의 인생을 살아갈 수 없으며 자기 고유의 특성을 발견할 수도 없다.[180]
삶을 지향하는 리비도는 아들의 의식을 지배하여 어머니로부터의 분리를 요구하지만, 아들의 어머니에 대한 유아적인 그리움은 모든 종류의 신경증적 공포, 즉 삶에 대한 전반적인 두려움의 형태로 나타나게 되는 정신적인 저항을 형성하여 어머니로부터 분리되는 것을 막는다. 현실에 자신을 적응시키지 못하고 위축되면 될수록 그 두려움은 더 커져서 사사건건 그가 가는 길을 위협한다. 그 결과 악순환이 형성된다. 삶과 사람들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하여 더욱 더 뒤로 물러나게 되고 유치한 행동을 하게 되고 결국 ‘어머니 속으로’ 되돌아가게 된다. 이렇게 되는 원인이 외부 환경의 잘못 때문이라거나 또는 부모에게 그 책임이 있다는 식으로 자신의 외부로 투사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물론 어머니가 얼마나 아들을 떠나가지 못하도록 하였는지 살펴보기는 해야 할 것이다. 아들은 모든 것이 어머니의 잘못 때문이라고 설명하겠지만, 부모를 탓함으로써 자신의 능력부족에 대한 변명을 늘어놓으려는 온갖 헛된 시도를 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다.[181]
어린아이에게 문제가 있다면 그 원인은 대부분 아이의 부모에게 있다는 것은 앞에서 밝힌 바가 있다. 그러나 나이가 들어서도 어른이 되지 못하고 부모로부터 독립하지 못하는 경우, 아무리 그 문제의 발단이 부모에게 있었다고 하더라도 이제는 부모에게 책임을 미루지 말고 스스로 어른으로서 문제를 해결해나가야 한다. 어른이 되어 스스로 자성(自性)의 수레바퀴를 돌려야 한다.
주(住)는 무주(無住)로 나가는 관문이다. 주(住)는 자아가 목표로 하는 것을 성취하여 실현하는 것이라면 무주(無住)는 모든 것을 성취하여 실현시킬 수도 있지만 그 어느 것에도 머물지 않는 것을 말한다. 물론 모든 것을 실현시켜야 한다는 것이 아니고, 인연에 따라 필요한 일은 무엇이든 성취할 수 있다는 말이다.
모든 만법이 다 자기의 몸과 마음 가운데 있느니라. 그럼에도 어찌 자기의 마음을 좇아서 진여의 본성을 단박에 나타내지 못하는가?[182]
모든 것을 허망하게 보고 아무것도 안하는 것보다는 하나라도 제대로 할 수 있는 게 낫다. 그런 다음에야 제행무상(諸行無常)이나 제법무아(諸法無我)를 깨달아 무주(無住)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 어느 하나도 제대로 실현시키지 못한 사람이 어떻게 모든 만법을 실현시킬 수 있겠는가? 육조 혜능의 무주(無住)는 머무르면 안 된다(不住)는 것이 아니라, 머무르되 머물지 않는(住而不住) 중도(中道)를 이르는 말이다.
머무름이 없다(無住)고 하는 것은 사람의 본래 성품이 생각마다 머무르지 않는 것이다. 지나간 생각과 지금의 생각과 다음의 생각이 생각 생각 서로 이어져 끊어짐이 없나니, 만약 한 생각이 끊어지면 법신이 곧 육신을 떠나느니라.
순간순간 생각할 때에 모든 법 위에 머무름이 없나니, 만약 한 생각이라도 머무르면 생각마다에 머무는 것이므로 얽매임이라고 부르며 모든 법 위에 순간순간 생각이 머무르지 아니하면 곧 얽매임이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머무름이 없는 것으로 근본을 삼느니라.“[183]
주(住), 즉 머무는 것이 자아실현의 목표라고 본다면 머물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반복이다. 학교 공부도 반복 학습이 필요하며, 운동선수에 필요한 고도의 기술도 반복적인 연습이 절대적이다. 풀잎이 무성한 산길이라도 반복하여 같은 길을 다니게 되면, 말 그대로 길이 나서 다니기가 쉽다. 그러나 이렇게 길이 생기고 나면, 새로운 길로 가야할 때가 오더라도 새로운 길을 개척하지 않고 다니던 길로만 다니게 된다. 중생의 습기라는 것이 모두 이렇게 생겨난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자아의 모든 것이 처음에는 자성의 작용으로 생겨나기 때문에 자아의식 그 자체가 잘못은 아니지만, 자아의 모든 것이 공함을(五蘊皆空) 보지 못하고 여기에 머물러 있게 되는 것이 잘못이다. 알콜 중독이나 도박 중독 등 일시적인 즐거움을 반복적으로 탐닉하는 경우도 습기의 병적이며 바람직하지 못한 예라고 볼 수 있다.
자아는 외부세계와 접촉하는 가운데 외부의 집단세계에 적응하는데 필요한 여러 가지 행동양식을 익히게 된다. 이것을 융은 ‘페르조나(Persona)’라 하였다.
‘페르조나’란 고대 그리스의 연극에서 배우들이 쓰던 가면을 말한다. 우리나라의 탈춤처럼 어떤 사람이 노인의 탈을 쓰면 그는 노인 역할을 하며 왕의 탈을 쓰면 왕이 되는 것처럼 인간이 집단 속에서 살아가는 데 있어서도 여러 개의 탈을 썼다가 벗었다가 하면서 살고 있다는 뜻에서 이 말을 고른 것이다.
사람들이 곧잘 나의 생각, 나의 신념, 나의 가치관, 나의 것이라고 하는 것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것은 결코 자기의 생각이 아니라 남들의 생각, 즉 부모의 생각, 선생의 생각, 다른 친구들의 생각이라고 할 만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즉 집단적으로 주입된 생각이나 가치관인데 마치 자기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는 것이다. 엄밀히 말해서 ‘페르조나’는 참다운 것이 아니다.
‘페르조나’는 내가 나로서 있는 것이 아니고 남과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는 나’를 더 크게 생각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진정한 자기(自己 Self)와는 다른 것이다.
우리나라 말 가운데 ‘페르조나’에 해당되는 말은 체면, 얼굴, 낯과 같은 것이다. 어른의 체면, 남편의 체면, 교육자의 체면, 선생의 체면, 숙녀의 체면 등 그것은 모두 어떤 사회집단이 그 집단의 특수한 성원에게 한 결 같이 요구하는 일정한 행동상의 규범이며 제복과 같은 것이다. 체면이라는 말을 ‘사명’, ‘역할’, ‘본분’, ‘도리’라는 말로 바꾸어도 같은 설명이 성립된다.
‘페르조나’는 가상(假相)이다. 그러나 그것은 없애야 할 것이라기보다 구별되어야 할 것이다. ‘페르조나’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니라 ‘페르조나’와의 맹목적인 동일시가 문제되는 것이다. 사회적인 역할, 의무, 도덕규범, 예의범절, 이러한 것을 없애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맹신하지 않는 것이다.
인간이 집단 속에서 생을 영위하는 이상, 가정과 사회의 교육을 위해서 페르조나를 형성하고 강화하는 것은 필요한 일이고 또한 필수적인 것이다. 특히 소아기에서 청소년기에 이르기까지 페르조나의 형성은 외계와의 관계에서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184]
자아를 형성하고 자아를 실현해야 하는 인생의 전반기에는 페르조나를 형성하는 것이 중요한 과제이지만, 인생의 후반기에도 진정한 자기(自己), 즉 ‘참나’가 아닌 페르조나로 살아가려고 하면 우울증과 같은 여러 정신적인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그러므로 아상(我相)이나 아집(我執)을 버려야 한다는 말은 인생의 전반기가 아니라 인생의 후반기에 요구되는 과제임을 알 수 있다.
인생의 전반기에 자신이 속한 사회집단이 요구하는 페르조나를 확립하게 되면, 페르조나에 적합하지 않은 마음은 억압되어 의식에서 사라지게 된다. 의식 차원에서는 사라졌고 자아의 입장도 이런 마음에 집착하여 머물지 않으므로 무주(無住)에 해당된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전혀 반대이다. 억압된 것은 없어진 것이 아니라 무의식으로 사라진 것이다. 예를 들어 온화한 페르조나를 확립하게 된 사람은 화를 참거나 화를 내더라고 아주 소극적인 방법을 사용하게 된다. 심한 경우에는 화가 전혀 나지 않는다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은 자신이 알지 못하는 마음, 즉 무의식 속에서 화를 더 크게 키우고 있는데 그것을 ‘나’만 모르고 있을 뿐이다. 이런 사실을 모른 채 평생 살다가 인생의 후반기가 되면, 자신도 모르게 주변 사람에게 심하게 짜증을 내거나 억압된 분노가 폭발하여 온화한 페르조나를 뿌리째 흔들어 놓게 된다. 또는 신경증이나 우울증에 걸리기도 한다. 마음속에 강한 분노를 키우고 있음을 자신은 전혀 모르고 살아왔기 때문에 일부러 위선적인 삶을 살아왔다고 할 수는 없으나, 자기 자신을 속인 업보는 어쩔 수 없이 받게 된다.
이러한 업보를 받지 않으려면 페르조나가 가상(假相)[185]임을 깨달아서 페르조나에 맹목적으로 동일시하여 집착하는 아상(我相) 또는 아집(我執)을 자발적으로 버려야 한다. 아상(我相)을 스스로 버리지 않는다면 자아는 원하지 않는 희생을 치르거나 파괴될 수밖에 없다. 그리하여 성주괴공(成住壞空) 수레바퀴의 세 번째 부분인 괴(壞)의 제목을 자발적 자아 희생이라는 이름을 붙여보았다. 물론 페르조나는 ‘남에게 보이는 나’이고 자아의 한 측면일 뿐이므로 페르조나를 자발적으로 희생시킨다고 해서 자아를 완전히 희생하는 것은 아니다. 자아란 ‘나’와 관련된 모든 것이므로 궁극적이고 완전한 자아의 희생은 제7식이 완전히 사라져서 멸진정(滅盡定)에 들어간 제8지 보살의 경지, 즉 숙면(熟眠)에서도 일여가 되는 오매일여(寤寐一如)[186]의 상태가 되어야 할 것이다.
오매일여의 상태가 되는 것은 매우 어렵고 불가능할지도 모르지만, 페르조나와의 지나친 동일시를 그만두는 것은 비교적 쉽다. 그러나 이것도 실제로 실천해보면 매우 어려운 일임을 알 수 있다.
페르조나와의 지나친 동일시를 그만 두는 것, 즉 페르조나를 자발적으로 희생시킬 수 있을 때 비로소 개인적 무의식에 억압되어 있던 그림자를 의식화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런 다음에야 지금까지 ‘나’라고 알고 살아왔던 페르조나를 그림자와 통합할 수 있게 된다. 그리하여 통합이 되었다고 하더라도 전체 인격의 통합은 아니고 다만 의식적인 자아와 무의식적인 자아의 부분적 통합일 뿐이지만, 페르조나와 그림자는 서로 반대되는 성격을 가지고 있으므로 이 둘을 통합하는 것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분석심리학적인 의미에서의 그림자란 바로 ‘나(自我, Ego)’의 어두운 면, 즉 무의식적인 측면에 있는 나의 분신이다. 자아의식이 강하게 조명되면 될수록 그림자의 어둠은 짙어지게 마련이다.
정의를 주장하는 사람이 부정의 수렁에 자기도 모르게 빠지며, 도덕적인 결백을 신조로 내세우는 사람이 성적인 추문을 일으키며, 자유와 고매한 정신을 지향하는 지식인이 권력과 물욕에 눈이 어두워 뭇사람의 손가락질을 받게 된다. 이 세상에서 ‘좋은 것’만을 하고자 하고 자기가 옳다고만 생각하는 사람은 오히려 ‘나쁜 것’에 대한 유혹에 빠지기 쉽다. 위선자라든가 이중인격자란 바로 자기 마음속의 검은 그림자를 의식하지 못하는 데서 온다.
의식의 바로 뒷면에 있는 여러 가지 심리적 내용인 그림자는 열등한 인격과 같은 것이다. 그것은 마치 어두운 창고에 내버려진 곡식이나 연장과 같은 것으로 오래 두면 곰팡이가 피고 녹이 슬게 된다. 다시 말해서 의식될 기회를 잃어버렸으므로 미분화된 채로 남아 있는 원시적인 심리적 경향, 심리적 특징들이다. 그러므로 그림자가 외부의 대상에 투사되어 의식될 때 자아는 그 대상에서 미숙하고 열등하고 부도덕하다는 등 부정적인 인상을 갖게 된다. 그러므로 그림자를 자기의 일부분으로 받아들이기란 좀처럼 쉽지 않다. 그러나 그림자는 본래부터 그렇게 악하고 부정적이고 열등한 것이 아니라 그늘에 가려 있어서, 다시 말해서 무의식 속에 버려져 있어 분화될 기회를 잃었을 뿐이고, 그것이 의식되어 햇빛을 보는 순간, 그 내용들은 곧 창조적이며 긍정적인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서 겉으로 보아 파괴적이며, 위험하며, 부정적인 작용을 나타내는 그림자를 창조적인 것으로 전환시킬 수 있는가. 그 열쇠는 자아의식이 무의식에 대하여 얼마만큼 관심을 가지고 그림자의 존재를 깨닫고자 노력하느냐에 달려 있다. 그것을 깨달을 때 의식의 변화가 생기며 그림자의 부정적 작용이 해소된다.[187]
페르조나는 자아의 의식적인 태도이므로 자아가 페르조나를 인식하는데 큰 어려움이 없다. 그러나 그림자는 무의식의 내용이므로 쉽게 알아차릴 수가 없다. 의식이란 내가 알고 있는 나의 마음이고 무의식이란 나의 마음이지만 내가 모르는 마음이기 때문에 그 속에 어떤 것이 있는지 파악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그림자와 같은 속성을 자신이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도 없고 인정할 수도 없다. 예를 들어 매우 근면성실한 페르조나를 가진 사람이 있다고 하자. 이런 사람들은 그와 가까운 사람들 중에 게으름을 피우는 사람을 아주 싫어하는 경우가 많고, “당신도 이렇게 게으름을 피우는가?”라고 물어보면, 전혀 그렇지 않다고 대답하곤 한다. 이럴 때 저자는 “게으름을 피우고 싶은 마음이 들 때가 한 번도 없었는가?”라고 물어보게 되는데, 어떤 사람은 기억을 한참 더듬어도 게으름을 피우고 싶은 마음이 든 적이 없다고 하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런 마음은 좋지 않은 것이므로 곧 무시하고 억압해버렸다고 대답한다. 그런데 이런 사람이 평소에 싫어하던 ‘게으름뱅이’가 그의 꿈에 나타나서 어려운 상황에 처한 그를 도와주는 경우가 있다. 이러한 꿈의 메시지는 무엇일까? 꿈꾼 사람이 지금까지 성공적인 인생을 살아올 수 있게 하였던 근면성실한 태도로는 그가 현재 처한 상황을 해결할 수 없지만, ‘게으름뱅이’가 도와주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사람을 자세히 살펴보면 근면성실함이라는 아상(我相)에 사로잡혀서 자아의식과 다른 관점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쉬고 싶어도 쉬지 못하고 하고 싶은 일도 하지 않고 살아온 자신과는 반대로 쉴 때 쉬고 하고 싶지 않은 일은 하지 않는 사람들을 게으름뱅이라고 싫어하였던 것이다. 그렇게 게으름을 부리면서도 잘 사는 사람들을 보면서 세상은 불공평하다고 한탄하기도 하였다. 인생의 전반기에는 물론 근면성실하게 살아가는 것이 미덕이며 그렇게 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인생의 후반기에 접어든 그에게 꿈이 보내는 메시지는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잠을 잘 자야 하듯이, 쉬엄쉬엄 일을 해야지 당면한 문제를 풀 수 있다는 것이다. 꿈에 나타난 ‘게으름뱅이’도 그가 보기에 그렇다는 것이지 실제로는 게으름뱅이가 아니고 ‘여유를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일 가능성이 많다.
페르조나와 개인적 무의식의 그림자의 통합이 이루어지고 나면, 외부로 투사되었던 집단적 무의식의 아니마, 아니무스를 내부로 되돌려서 전체 인격을 통합해야 하는 과제를 만나게 된다.
아니마, 아니무스란 무의식에 있는 내적 인격의 특성을 말하며, 간단히 말해서 남성의 무의식 속에 있는 여성적 요소를 아니마, 여성의 무의식 속에 있는 남성적 요소를 아니무스라고 부른다고 할 수 있다. 이때 말하는 남성적, 여성적이란 사회적인 통념을 넘어선 보편적, 원초적 특성을 말한다. 의식의 외적 인격으로서의 남성과 여성은 각기 다른 내적 인격의 특성을 갖추게 되고 이것이 전 인격에 보충됨으로써 하나의 개체를 이룬다고 할 것이다.
아니마, 아니무스는 어디까지나 경험적 관념이며, 따라서 철학적, 이론적으로 이해하기보다 경험적으로 이해하기를 강조한다. 원형으로서의 아니마, 아니무스는 그것이 투사되어 경험될 때 잘 인지될 수 있는 것이다. 비근한 예로 이성 간의 사랑에서 강렬한 황홀감을 일으킬 때, 그리고 상대방이 이 세상에 둘도 없는 선녀, 현자(賢者) 또는 영웅으로 인식될 때, 거기에는 언제나 아니마, 아니무스 원형의 일방적 또는 상호 투사가 일어나고 있다. 남성은 그녀에게서 현실적인 여성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무의식에서 투사된 여신상을 보고 있는 것이며, 여성은 그에게서 신화에 나오는 영웅상, 성자(聖者)상 같은 것을 보고 있는 것이다.[188]
전체 인격을 통합하는 과정에서 아니마는 보이지 않기 때문에 매우 위험한 영향을 끼치기도 한다.
개성화, 즉 자기실현의 목적을 위해서는, ‘그가 남들에게 그리고 자기 자신에게 보이는 그의 모습’과 ‘있는 그대로의 자기 자신’을 서로 구별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그리고 자신을 아니마와 구별하기 위하여 ‘무의식과 관계하는 그의 보이지 않는 체계, 즉 아니마’의 의식화도 자기실현의 목적을 위해서 필수적인 것이다. 물론 무의식적인 어떤 속성과 자신을 구별할 수는 없다. 페르조나의 경우에는 그 사람과 그의 직책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그에게 분명히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다. 그러나 아니마로부터 자신을 구별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데, 아니마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189]
환상은 가장 위험하다; 상상속의 어린아이나 여인은 위험한 현실이라고 우리의 마음을 정하는 것이 현명할 것이다. 볼 수 없기 때문에 더욱 더 위험하다. 나는 상상속의 여인과 상대하기 보다는 현실에 존재하는 여인과 상대하겠다. 아니마는 매우 놀라운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살아있는 현실의 어떤 여인도 그렇게 할 수는 없지만, 아니마는 실제로 한 남자를 이 세상 어디라도 가게 할 수 있다. 만약에 아니마가 그렇게 말하면 그는 그렇게 해야만 한다.[190]
주된 위험은 원형의 매혹적인 영향에 굴복하는 것인데, 이것은 사람들이 원형상을 의식화하지 않았을 때 가장 잘 나타날 수 있다. 정신병적인 소인이 있는 경우에는 자연적인 누미노제 덕분에 어느 정도의 자율성을 갖게 된 원형의 형상이 의식의 지배로부터 벗어나 완전히 독립성을 얻게 되는, 즉 빙의라는 현상을 만들어내게 된다. 예를 들어 아니마에 사로잡히게 되는 경우에 환자는 자기 거세를 통해서 마리아라는 이름을 가진 여자로 변하거나, 그와 같은 것이 그에게 닥칠까봐 두려워하게 된다.[191]
이처럼 무의식에 있는 내적 인격인 아니마와 아니무스를 통합하는 과정은 건강하고 튼튼한 자아를 가진 개인에게서 시도되어야 하고 그렇지 못한 경우 큰 위험에 빠질 수밖에 없다. 이렇게 매우 위험할 수도 있고 어렵기도 하지만 자기실현의 과정에서 매우 중요하고 필수적이기 때문에서 분석심리학에서 실시하는 개인분석에서 이 과정은 오랜 시간에 걸쳐서 이루어진다.
하지만 자아의 관점에서 이루어지는 과정이기 때문에 아니마, 아니무스를 완전한 동화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며 또한 그렇게 하려고 하지 말아야 한다. 만약 자아가 아니마, 아니무스를 완전히 의식화하였다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착각이고 자아의 팽창과 과대망상을 초래하게 된다.
전체 인격의 통합, 전체 정신의 합일은 자아가 주도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自己)가 주체가 되어서 자기실현을 하는 것이다. 즉, 자성(自性)이 주체가 되어 자성의 수레바퀴를 돌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관점에서 보면 자아가 아니마와 아니무스를 의식화한다고 하더라도, 자아가 완전히 사라진 오매일여의 상태에 이를 수 없다. 그리고 아니마와 아니무스의 의식화를 어렵게 성취한 자아도 스스로를 희생시켜야만 진정한 자기실현에의 길로 나아갈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자율적 콤플렉스인 아니마와 아니무스는 본질적으로 심리학적 기능인데, 그 기능 자체가 자율적이면서 또한 아직 발달이 안 되었기 때문에 인격의 모습을 취하게 되었고 지금까지 그 모습을 유지해온 것임을 알게 된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그들의 인격화를 파괴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본다. 아니마와 아니무스를 의식화함으로써 그것은 무의식으로 연결하는 다리로 전환된다. 아니마와 아니무스가 인격화된 콤플렉스에 머물러 있는 이유는 우리가 의도하는 대로 그것을 심리학적 기능으로 사용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상태에 있는 한 아니마와 아니무스는 비교적 독립된 인격들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아니마와 아니무스가 간직하고 내용이 무엇인지 알려지지 않는 한 그들은 의식에 통합될 수 없다. 변증법적 대화의 목적은 이러한 내용들을 밝히는 데 있다. 이러한 작업이 완수되고 의식적인 마음(conscious mind)이 아니마에 반영된 무의식적 과정과 충분히 친숙해졌을 때, 아니마는 기능으로 지각될 것이다.[192]
인격화란 자아와는 별개로 독립적으로 행동하는 사람의 모습을 취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아니마나 아니무스의 상(像. anima, animus figure)으로 나타나게 된다. 그리하여 아니마, 아니무스의 인격화가 파괴되어 기능으로 지각된다는 것을 육조 혜능의 선법으로 이해하면 다음과 같다. 아니마나 아니무스의 상(像)에 머물러 집착하는 자아를 자발적으로 희생시켜 이에 머물지 않는 무상(無相)의 행(行)을 한다는 것이다. 이는 자성(自性), 즉 자기(自己)가 스스로 아니마와 아니무스의 상(像)을 만들어낸 줄을 모르고 이것에 머물러 집착하는 자아를 스스로 희생시키고 자기(自己) 스스로 아니마와 아니무스의 기능을 수행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금강경의 다음 구절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무릇 모든 상(相)은 다 허망하니, 만약 모든 상(相)이 상(相)이 아님을 본다면 여래를 보리라.[193]
자아의 모든 것을 희생하여 자아가 완전히 사라진다고 하더라도 자아는 다시 자기(自己)로부터 생겨나게 된다. 자기(自己)가 ‘참나’라는 스스로 깨닫게 되면 자아가 다시 형성이 되더라도 자아는 청정한 그대로이다.
대원경지(大圓鏡智)는 제8식의 자성이 청정한 것을, 평등성지(平等性智)는 바로 제7말나식에 병이 없음을, 묘관찰지(妙觀察智)는 무루(無漏)의 제6식을 말합니다. 그리고 성소작지(成所作智)는 청정한 전5식을 뜻하는데 이것은 대원경지와 같습니다. 전5식은 제8식을 의지하여 존재하기 때문에 제8식이 청정하여 대원경지가 될 때 오근(五根)으로 행하는 일체가 대원경지의 작용이 됩니다.[194]
자아형성과 자아실현은 하나의 자아를 형성하고 거기에 머무는 것이고, 자발적인 자아희생은 무주(無住)로서 자아마다 머무르지 않는 것이다. 하나의 자아를 희생하면, 자성(自性)은 인연에 따라 새로운 자아를 형성하게 된다.
자성(自性)이 중심이 되고 주체가 되어 성주괴공(成住壞空)의 수레바퀴를 돌린다는 관점에서 보면 자아를 자발적으로 희생하는 주체도 자아가 아니고 자기(自己)다. C. G. 융도 ‘미사의 심리학’이라는 제목의 글에서 신의 자기희생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다.
미사 중에 행해지는 의례를 인간의 관점에서 볼 수도 있고 신의 관점에서 볼 수도 있다. 인간의 관점에서 보면 제단에 있는 신에게 제물을 봉헌하는 것인데, 이것은 동시에 성직자와 신도들 스스로를 봉헌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의례는 봉헌되는 제물과 그것을 바치는 자들 모두를 축성한다. 미사 의례는 우리의 주님이 그의 제자들과 나눈 최후의 만찬, 그리스도의 온전한 성육신(成肉身), 수난, 죽음, 그리고 부활을 기념하고 표현한다. 그러나 신의 관점에서 보면 이렇게 인간의 모습으로 행해지는 의례는 겉모습일 뿐이고 그 안에서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것은 결코 인간의 행위가 아니라 신이 만들어낸 사건이다. 시간을 초월하여 영원히 존재하는 그리스도의 삶을 잠시나마 보게 되는데, 성스러운 의례의 압축된 형태로, 시간의 경과에 따라 그의 삶이 펼쳐진다: 그리스도는 제물로 봉헌된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나서, 고난을 당하고, 죽임을 당하고, 무덤에 누웠다가, 지하세계의 권력을 이기고 영예롭게 부활한다. 축성(祝聖)의 말씀을 통하여 하느님이 개입하여 스스로 행동하고 실제로 존재함으로써, 미사에서 가장 근본적인 사건은 신의 은혜로운 행위이고, 그 안에서 사제는 섬기는 자일뿐임을 선포한다. 신도와 봉헌된 제물들도 마찬가지다: 이들은 모두 성스러운 일에 봉사하는 자들이다. 하느님[195]의 현존을 통해서 제물을 바치는 행위의 모든 부분들이 신비한 통일성을 갖추게 되고, 그리하여 희생 제물로서 자신과 사제와 신도를 봉헌하는 것이 바로 신 자신이며, 또한 사람의 아들 모습으로 나타나서 아버지에 대한 속죄를 위해 스스로 희생을 하는 것도 바로 신 자신이 된다.
성부(聖父)와 성자(聖子)는 본질상 하나이지만, 한편으로는 영원한 아버지의 모습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이 땅에서의 유한한 삶에 구속당하는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난다.[196]
자기(自己)와 자아의 관계가 아버지와 아들과의 관계와 일치하기 때문에, 자기는 우리에게 우리자신을 희생하도록 강요함으로써 자기(自己) 스스로 희생행위를 수행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197]
아상(我相)이 없어야 함을 가르쳐주는 부처님의 전생 이야기를 보더라도 부처님은 스스로의 몸을 베이는 희생을 당하면서도 아상(我相)이 없음을 강조한다. 아상이 없다면 희생의 주체가 자아일 리가 없다. 자아가 주체가 되어 스스로의 몸을 희생하는 것이 아니라면 그 주체는 누구인가? 결국 자성(自性)이 주체가 되어 스스로를 희생하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육도집경의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예전에 보살이 한때 바라문이 되었다. 이름은 찬제화(提和)였는데, 산택에 처하여서 나무 밑에서 정밀하게 사유하였다.
그때 왕의 이름은 가리(迦梨)였다. 산에 들어가서 사냥을 하다가 사슴을 쫓아서 그 발자국을 찾았더니, 보살의 앞으로 지나간지라, 왕이 도사에게 물었다.
“짐승의 발자국이 이리로 지나갔는데 그것이 어디로 갔느냐?”
보살이 속으로 생각하였다.
‘중생이 불안하게 움직이는 것이 오직 몸과 목숨 때문이다. 죽는 것을 무서워하고 살기를 탐하는 것이 나의 마음과 무엇이 다르랴. 내가 만약 왕에게 말하면 학살하여 어질지 않으리니 죄가 왕과 같아지고, 만약 보지 못하였다고 하면 내가 속이는 것이 된다.’
마음속으로 난처해서 머리를 숙이고 말하지 않았다.
왕이 곧 노하여 “너는 누구냐?”고 물었더니,
보살은 “저는 인욕(忍辱)하는 사람입니다.”
왕이 노하여서 칼을 빼어 그의 두 팔과 다리 그리고 귀와 코를 끊으니, 피가 샘솟듯 하여 흘렀으며, 그 아픔이 한량 없었다.
그러자 사천대왕이 모두 함께 내려와 가리왕을 죽이려고 하자, 도사가 대답하였다.
“그 무슨 말씀입니까? 이 앙화는 내가 전 세상에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들지 않고 저에게 독해를 가하였기 때문에 악한 짓을 한 앙화가 마치 그림자가 형체에 매인 것처럼 쫓아온 것입니다. 예전에 조금 심은 것을 지금에 많이 거두는 것이니, 내가 만약 천왕의 뜻에 순종한다면 그 앙화가 하늘땅과 같아서 여러 겁 동안 그 죄를 받아도 끝이 없을 것입니다.” 보살은 왕을 원망하기는커녕 자비심으로 그를 불쌍히 여겼다.[198]
이러한 육도집경의 내용에 대하여 부처님은 금강경의 이상적멸분(離相寂滅分)에서 다음과 같이 설한다.
“수보리여, 인욕바라밀도 여래는 인욕바라밀이 아니라고 말씀하신다. 그 이름이 인욕바라밀인 것이다. 왜냐하면 수보리여, 내가 옛날 가리왕에게 몸을 베이고 끊임을 당하였으되, 내가 그때에 아상(我相)이 없었으며, 인상(人相)이 없었으며, 중생상(衆生相)도 없었고, 수자상(壽者相)도 없었기 때문이니라. 왜냐하면 내가 그때 마디마디 사지를 찢길 때, 만약 아상이나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있었더라면, 마땅히 성내고 원망하는 마음을 내었을 것이니라.”[199]
이렇게 아상(我相)이 없다면 아니마, 아니무스를 의식화하는 자아도 없을 것이고, 아니마, 아니무스의 인격화도 없을 것이다. 그리고 아니마, 아니무스를 통합하는 주체도 자아가 아니고 자기(自己)가 되어야 완전한 통합이 될 것임이 명백해진다. 그리고 페르조나를 형성하는 것도, 그림자를 만들어내었다가 스스로 파괴하여 통합시키는 것도, 아니마, 아니무스의 인격화를 만들어내었다가 인격화를 스스로 파괴하여 전체 인격을 통합하는 것도 자성(自性)과 자기(自己)가 중심이 되어 성주괴공의 수레바퀴를 돌리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사람의 몸을 받아서 자아를 형성해나가는 어린 시절이 성(成)이라면, 주(住)는 자아를 실현하는 청년기이다. 성(成)과 주(住)는 인생의 전반기에 해당되고, 자아를 자발적으로 희생하는 괴(壞)와 자기실현의 공(空)은 인생의 후반기에 해당된다. 그리고 성(成)은 새로운 꽃을 피우는 봄이고 주(住)는 꽃을 활짝 피우는 여름이고 괴(壞)는 꽃잎이 시들어 떨어지는 가을이고 공(空)은 땅 위의 모든 생명이 사라져 없어지는 겨울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모든 생명이 사라져 없어지는 겨울을 공(空)이라고 하는 것은 자아의 관점에서 본 것이고, 자성(自性)의 관점에서 보면 공(空)은 만법(萬法)을 포함하고 있다.
실존(實存)하지 않는 실존(實存), (the non-existent existence), 비유(非有)인 유(有), (the being which is non-being) 또는 완전히 텅 빈 의식이라는, 불교적 역설(paradox)이 많이 알려져 있다. 불교도들이 항상 설명하고자 노력하는 것처럼, 텅 빈 의식은, 비었다고 할 때 우리가 일상적으로 이해하는 것처럼 그렇게 비어 있는 의식이 아니라, 의식의 내용에 지배당하지 않는 의식이다. 의식의 내용들은 욕망의 불로 우리의 의식을 공격하여 우리를 사로잡게 된다. 해탈이라는 불교적 관념은 의식의 내용들이 우리를 집어삼켜버리게 내버려두어서는 안 되고 오히려 우리 자신이 그것들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의식을 지배하고 있는 내용들을 의식에서 비워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지 못하고 만약에 무엇인가 남아 있다면 그것은 연못속의 물고기들과 같을 것이다. 물고기는 연못의 주인이 아니고 단지 연못의 내용물일 뿐이다. 그러므로 연못을 지배할 수 없다. 연못은 물고기가 존재하는 근거이다. 연못은 물고기들을 담고 있는 그릇이다. 물고기들이 연못을 담고 있는 것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그들이 연못을 포함하고 있고, 연못의 물을 모두 마셔서 그들 자신의 팽창된 배 속에 간직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과대망상증을 앓고 있는 물고기들이 항상 있게 마련이다. 그리하여 만달라 중심부에 위치한 동그라미, 그 빈 공간의 의식을 광활한 무의식이라고 설명하는 게 나을 것이다. 광활한 무의식은 너무나도 많은 것을 품고 있어서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다. 왜냐하면 그곳에는 특별히 중요한 것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열반(Nirvana)이라는 관념에 대하여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설명이다.[200]
공(空)은 견성성불(見性成佛)하여 잃어버리고 살던 ‘참나’를 다시 찾는 시기이고 분석심리학적으로는 자기실현의 단계이다. 네 번째 단계인 공(空)은 마지막 완성 단계로서 끝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으로 끝이 아니고 첫 번째인 성(成)의 단계로 이어져서 인격발달의 수레바퀴가 계속 돈다고 보면 처음도 끝도 없게 된다. 그리하여 공(空)은 성주괴공의 수레바퀴를 완성하는 네 번째 단계이기도 하지만 완성된 수레바퀴 전체이기도 하다. 그리고 공(空)은 영원히 돌고 있는 성주괴공(成住壞空) 수레바퀴의 중심, 즉 움직여도 움직이지 않는 자성(自性)이기도 하다. 이것들은 합리적인 머리로는 이해할 수는 없고 오로지 불교수행을 통해서 자성(自性)을 보아야지 가능할 것이다.
분석심리학에서 견성성불에 해당되는 상태를 자기실현 또는 개성화라고 한다. 칼 구스타프 융은 개성화의 목표에 도달된 상태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자기(自己)를 어떤 비합리적인 것, 정의할 수 없으나 존재하는 것, 그것에 대해 자아가 대항하지도 굴복하지도 않으며 다만 밀착해 있는 것, 그리고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도는 것처럼 그 주위를 도는 것이라고 감각할 때, 개성화의 목표는 도달된 것이다. 나는 자아와 자기의 관계가 지닌 지각적 성격을 나타내기 위하여 감각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이 관계에서는 알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우리가 자기(自己)의 내용에 관하여 말할 것이 아무 것도 없기 때문이다. 자아는 우리가 아는 자기의 유일한 내용이다. 개성화된 자아는 알지 못하는 상위의 주체의 객체로서 자신을 지각한다.”[201]
육조단경에 대한 분석심리학적 이해
카를 구스타프 융은 1875년 7월 26일 스위스 동북부 투르가우 주의 작은 마을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1961년 6월 6일 퀴스나흐트의 호숫가에서 서거하였다.
융은 의과대학을 졸업한 뒤 무슨 과목을 전공할지의 문제에 부딪혔다. 그는 뮌헨에서 부름을 받아 부임하는 내과 교수의 조교가 되어주기를 요청받았고 그의 마음은 거의 기울어져 있었다. 그 무렵 정신과 강의나 실습, 정신과 교수는 그의 마음을 별로 끌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크라프트 에빙의 정신과 교과서(1890)를 접하게 되었다. 정신의학이 학문 대상에 대하여 무엇을 말하는지를 한번 살펴보기 위해 책의 서문부터 읽기 시작하였다. “학문 분야의 특이성과 그 형성의 불완전성 때문에 정신과 교과서는 어느 정도 주관적인 인상을 가지고 있다”는 말과 “정신병을 인격의 병”이라고 한 대목에 이르러 융은 갑자기 흥분을 느꼈다. 왜냐하면 그 순간 자기에게는 정신의학 이외에 다른 목표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융이 그렇게도 미래가 약속된 내과를 서슴없이 버리고 누구나 탐탁지 않게 생각하던 정신과를 택한 것을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하였다.
1900년 융은 취리히 대학 정신과 병원에 당시 주임 교수로 있던 오이겐 블로일러 밑에 차석 조수로 들어갔다. 1902년 제1조수가 되어 발표한 논문, 「소위 심령현상(心靈現象)의 병리와 심리에 대하여」는 그의 학위 논문이며 그가 전 생애에 걸쳐 추구하였던 마음의 심층에 대한 관심의 첫 공식 표현이었다고 할 수 있다.
융이 프로이트(1856-1939)의 학설을 접한 것은 1900년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에 관한 논문을 블로일러 교수가 주재한 세미나에 소개하면서부터이다. 융은 처음에는 그의 글을 잘 이해하지 못하였으나 뒤에 자기가 하던 연상 검사의 결과가 프로이트 이론과 관련이 있음을 깨닫고 1906년 프로이트에게 그 연구 논문을 보내면서 자기의 의견을 서면으로 전하였으며, 그 후 두 사람 사이에는 인간심리에 관한 활발한 학문적 토론이 교환되기 시작하였다. 1907년 융은 빈에서 프로이트와 감격적인 상봉을 하고 긴 시간 동안 열띤 토론을 한다. 융의 회상록[203]과 최근에 발간된 프로이트와 융의 서한집을 보면 융이 프로이트의 학설―특히 그의 성욕중심설―에 관해서 처음부터 전적으로 동의하지는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융은 프로이트의 인간심리를 사변적인 이론에 의해서가 아닌 스스로의 체험으로 진지하게 탐구해가는 것을 보고 그 경험론적 태도에 깊은 감명을 받았고, 의식 너머의 마음의 심층을 처음으로 과학의 대상으로 삼아가는 것에 매료되었으며, 자기가 프로이트의 성욕설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프로이트가 늘 그에게 말하였듯이 경험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당시 상당히 사변적인 독일 대학 정신과 주임 교수들의 프로이트에 대한 비판이 빗발치는 가운데서 프로이트를 옹호하고 나섰다.
고독하였던 프로이트는 자기 학설의 지지자가 게르만의 땅에서, 그것도 대학에서 생긴 것에 무척 기뻐하였을 뿐 아니라, 융의 성격에도 매료되어 융을 곧 그의 후계자로 생각하기에 이를 만큼 그의 능력을 높이 인정하였다. 그러나 두 사람의 인간관에는 처음부터 상통하기 어려운 간격이 있었다. 이 간격은 융이 「리비도의 변환과 상징」이라는 책을 내놓고 1912년 뉴욕의 포덤 대학교에서 정신분석학에 관한 강의를 하고 나서 더욱 표면화되었다. 그는 이 책에서 한 정신분열 증상을 가진 환자의 환상세계의 상징적 의미를 수많은 신화와 종교적 표상을 통해서 구명하고 그것이 반드시 개인적이며 생물학적인 성적 내용이 아님을 입증하였다. 무의식에는 억압된 성적 욕구나 충동뿐 아니라 종교적 원천과 같은 전혀 다른 창조적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이는 모든 인류에게 태초의 시간부터 내재하는 것이라 하여 이를 원상(源像)이라 명명하였다. 프로이트의 권위의식과 성(性)에 대한 당시 프로이트의 거의 신앙에 가까운 집념으로 보아서, 그리고 융에 대한 후계자로서의 기대에 비추어 이러한 이견은 허용될 수 없었다. 두 사람은 결국 만난 지 6년 만에 헤어지고 말았다.
프로이트의 무의식에 관한 가설이 심적(心的) 사실(事實)을 충분히 설명하지 못한 편향된 것이라고 인식하였으나 프로이트를 떠난 뒤 정작 무의식이 무엇인지 그 뜻을 어떻게 설명해야 옳은지 융은 알지 못하였다. 그런데 융 자신의 관심은 그 무렵 더욱더 강력하게 알 수 없는 무의식의 온갖 비합리적인 충동과 표상에 쏠렸다. 그가 대학에서 정교수가 되어 출세하는 길을 포기하고 무의식의 탐구에 전념하기로 한 데는 무의식을 알고자 하는 욕구가 출세보다도 엄청나게 컸기 때문이었다.
무의식의 밑바닥에서 올라오는 신화적 상(像)을 항상 대면한다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병적이고 약한 자아의 소유자는 무의식의 세력에 휩쓸려 붕괴될 수도 있다. 그것은 때로는 정신병적 와해로 유도될 수도 있다. 그러나 무의식에서 올라오는 환상들을 차단하면 그 또한 신경증적 해리 혹은 정신병적 와해를 자초할 수도 있다. 융은 이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융은 용기 있게 무의식에 직면하는 모험을 하나의 학문적 실험으로 감행하였다. 그는 감정을 상(像)으로 번역하는 것, 감정 속에 숨어 있는 상(像)들을 성공적으로 발견함으로써 내적인 안정을 얻었고 ‘내가 감히 나 스스로 행할 수 없는 것을 나의 환자에게 기대할 수는 없다’는 확신, ‘이 모험이 결국 나 개인을 위해서일 뿐만 아니라 또한 나의 환자를 위해서도 감행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위험한 고비를 여러 차례 넘겨주었다고 회상하였다. 그리고 그가 사회인으로, 가장(家長)으로, 매일매일 해야 하는 현실적 의무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 무의식에 휩쓸리지 않을 수 있게 한 버팀목의 역할을 하였다고 하였다. 그의 사상의 틀은 이런 과정을 거쳐서 1920년경 어느 정도 확립되었다.
1928년경부터 융은 유럽의 기독교 문명사 가운데서 중세에 꽃을 피웠으나 19세기 이후의 합리주의 사조 때문에 학문적으로 거의 돌보아지지 않고 있던 연금술(鍊金術, Alchemy)에 관한 강의를 시작하고 이 방면의 연구를 심화한다. 그가 찾으려던 것은 최고의 물질을 만들려던 연금술사들의 노력에 반영된 무의식적 과정이었다. 연금술에 관한 융의 연구는 그의 평생 과제였다. 그는 서양 연금술사들의 노력 속에 개성화 과정이 상징적으로 표현된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연금술사의 오랜 경전을 심리학적 견지에서 해석한 그의 저서 「융합의 비의(秘儀), Mysterium Coniunctionis」는 그가 80세의 고령에 저술한 것으로서 난해하고 얼른 보기에 현실적인 응용 가능성과 동떨어진 내용처럼 보여 그의 반대자로 하여금 신비주의적이라는 오해를 살 만하지만, 그 속에는 물질과 정신의 이원론을 지양하고 분리된 양극에 다리를 놓으려는 현대적 연금술사라 할 수 있는 마음의 의사, 융의 심오한 통찰이 담겨져 있다.
1945년에 이르기까지 그는 사회적으로도 무척 바쁘게 활동하였지만, 사회적 명성은 그에게 큰 감명을 주지는 못하였던 것 같다. 그는 언제나 사색하는 학자의 위치로 돌아와 새로운 연구를 시작하곤 하였다.
1948년 정신요법에 대한 본격적인 수련장을 만들기 위해 그는 C. G. 융 연구소(C. G. Jung Institut)를 스위스 취리히에 설립하고 후진을 양성하기 시작하였다. 이 연구소는 세계 각지에 설립 운영되고 있는 융 연구소의 효시가 되었다.
1961년 86세의 고령으로 영면하기까지 만년의 융이 관심을 가졌던 것은, 노벨물리학상을 탄 스위스의 물리학자 볼프강 파울리(Wolfgang Pauli)와 함께 1951년 출간한 「자연해석과 정신」에도 나타나는 바와 같이, 물질과 정신의 상호관계에서 볼 수 있는 비인과적(非因果的) 원리로서의 동시성(同時性)에 관한 연구였다.
융은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설에 비판을 가하고 그를 떠나 분석심리학이라는 독자적인 심리학을 제창하였다. 그러나 인간의 의식 너머에 무의식의 존재를 인정하고 그것을 중요시한다는 점에서 분석심리학과 정신분석학은 공통의 바탕 위에 있다. 또한 무의식적인 것을 의식에 동화해가는 의식화 과정이 인간의 성숙에 중요하다고 강조하는 점도 같다. 다만 분석심리학은 무의식의 기능과 내용에서 정신분석학설과 다른 견해를 가지며 무엇보다도 융이 비판하고 있는 점은 프로이트의 인간심리를 보는 관점에 있다. 프로이트는 인간을 너무 지나치게 병리적인 측면과 그 결함의 측면에서 설명하고자 하였다는 점이다. 예를 들자면, 프로이트는 종교를 환상이거나 신경증의 증상으로 보았지만, 융은 모든 사람들의 건강한 심성(心性)의 원천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프로이트 학설 가운데서 융을 포함한 많은 학자들의 비판 대상이 된 것은 리비도설이다. 융은 프로이트의 리비도설에 대하여 프로이트가 처음으로 역동적 심리학적 관련성을 탐구한 점에서 크게 평가하나 그것을 성적인 관계에서만 보고자 하거나 거기에 특정한 성격을 부여하는 것에 반론을 제기한다.
분석심리학의 특징 중 하나는 극단적인 인과론과 목적론을 다 같이 비판한다. 인간이란 오직 과거의 생에 묶인 어쩔 수 없는 과거의 포로도 아니고 역사를 잃은, 미래를 향한 의지의 화신만도 아니다. 이 두 개의 입장은 사실 하나의 입장에 포함될 수 있는 대극(對極)이다. “정신이란 이것이냐 저것이냐로 파악되기 보다는 이것이기도 하고 저것이기도 한 것”이라는 융의 관점이 여기에서 생긴다.
그러므로 분석심리학에서는 흔히 말하는 일관성, 명쾌한 단정, 합리적인 설명 같은 것을 찾기 어렵고 항상 어두운 면과 밝은 면, 창조와 파괴의 양극(兩極) 관계가 설명되는 만큼 합리적이고 직선적인 머리로는 이해하기가 어렵고, 따라서 그러한 것을 기대하는 사람들에게 불만을 일으키게 할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인간 심리를 명쾌하게 단정적으로 설명하고 그것이 인간 심리의 전모를 기술한 것이라는 생각은 극히 단순한 생각이다.
무의식이 의식에서 억압되어 이루어진 것만이 아니며 또한 성적인 욕망의 욕망만이 아니라 창조적인 기능을 가진 것이라 보는 분석심리학의 입장에서는 프로이트의 방어기제(defence mechanism)가 정신분석학설처럼 중요시될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인간의 무의식이 위험한 충동의 도가니가 아닐진대, ‘방어’보다는 창조적인 ‘실현’이 더욱 중요할 것이며 정신적인 상처를 찾아내는 일보다는 극복할 수 있는 무의식의 치료 기능의 촉진이 더욱 중요해진다. 이리하여 분석심리학은 인간의 고통에 대하여 어디에서 유래하였는가를 과거의 역사에서 살펴보는 동시에, 아니 그보다도 그 고통이 그에게 무엇을 의미하고 장차 그를 어디로 이끌어 가기를 촉구하고 있는가 하는 정신의 지향성(指向性), 목적성을 알고자 한다.
그렇다면 분석심리학의 창시자인 카를 구스타프 융은 선(禪)에 대하여 어떤 견해를 가지고 있었을까? 스즈키의 ‘Introduction to Zen Buddhism’이라는 책에 실린 융의 서문에 보면 선(禪)에 대한 그의 견해를 알 수 있다.
“선(禪)은 팔리어 경전(붓다가 제자들 앞에서 말없이 꽃을 들어보였을 때 가섭존자만이 이해하였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에 뿌리를 둔 나무로부터 유래된 과실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다.”[204]
융은 선불교가 석가세존이 가르침을 펼치기 시작한 이후로 가장 중요한 것임을 지적하면서 팔리어 경전에 대한 각주(脚註)에서 ‘붓다가 제자들 앞에서 말없이 꽃을 들어보였을 때 가섭존자만이 이해하였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음’을 밝히고 있다. 이는 붓다가 경전의 언어문자가 아닌 삼처전심(三處傳心)을 통하여 깨달음을 전하였다는 것을[205] 융이 잘 이해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융이 Kaiten Nukariya(동경의 So-to-shu 불교대학교수)의 깨달음에 대한 설명을 제시하면서 이에 대한 비평을 가하고 있다.
“Kaiten Nukariya는 아마도 서구의 합리주의에 호소하는 것 같다. 그러나 선(禪)은 서구에서 말하는 언어적 의미의 철학이 아닌 그 무엇이다. 그럼에도 그는 동양의 신비한 세계를 수입해서 서구철학의 범주에 집어넣고는 그 둘을 혼동하고 있다.”[206]
이처럼 융(1975-1961)은 서구에서 선(禪)을 합리주의적 지성으로 이해하는 것을 경고하고 있다. 이는 융보다 이후에 활동한 Erich Fromm(1900- 1980)이 합리주의에 머물러 있었던 것과는 큰 차이가 있다.[207] 20세기 중반에[208] 행해졌던 융의 이러한 비판은 21세기를 살고 있는 현대의 서구인들뿐만이 아니라 서양식 교육을 받은 한국의 현대 지식인들도 귀담아들어야 할 이야기가 아닌가 한다.
그리고 융은 서양인들이 합리적인 사고체계 안에서는 선(禪)을 통한 깨달음을 얻기가 어려움을 피력하고 있는데, 이것 또한 서양의 철학적 사고방식을 배우고 자란 한국의 현대인에게도 해당되는 이야기다.
“선(禪)은 광대한 불교적 사고로 비옥해진 중국의 정신(spirits)에서 피어난 가장 훌륭한 꽃 중의 하나이다. 그런데 불교교리를 이해하려는 노력을 실제로 해본 서구인이라면 누구라도 개인적인 깨달음의 경험의 이상야릇한 표면이 단단하지 않아서 깨지기 쉬울 수도 있음을 의심하기 시작할 것이다. 또는 서구의 종교와 철학이 무시해버려도 좋다고 생각해왔던 불안하게 만드는 어려움을 감지하게 될 것이다. 만약에 그가 철학자라면 그는 전적으로 삶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종류의 이해에만 관심을 가질 것이다. 그리고 만약에 그가 기독교인이라면 그는 이교도와는 교제하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서구적인 한계 안에서는 깨달음은 없다. 그것은 순전히 동양적인 것이다.”[209]
분석심리학에서 말하는 자기실현(自己實現)은 분석심리학 이론에 대한 지적인 이해만으로는 불가능하고 자신의 꿈이나 적극적 명상을 통하여 자신의 마음속에 존재하지만 자아를 초월하는 자기원형(自己原型)의 작용에 대한 직접적인 체험을 통하지 않고서는 이루어질 수 없다. 이와 마찬가지로 선불교에서도 불립문자(不立文字) 직지인심(直指人心) 견성성불(見性成佛)이라 하여 문자를 내세운 알음알이가 아닌 사람의 마음을 직접 가리켜 본성(本性)을 보아 부처가 되고자 한다. 마음에 대한 직접적인 체험을 강조하는 이러한 유사점으로 인하여, 육조단경을 분석심리학적으로 이해하려 해보았고 그중에서 이 책의 앞부분에서 거론되지 않은 몇 가지 중요한 구절들을 소개하고자 한다. 이러한 시도가 간화선 전통을 이어오고 있는 한국 선불교를 현대인들이 심리학적으로 이해하는 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어떤 것을 바라밀이라고 하는가?
이는 서쪽 나라의 범음으로서 저 언덕에 이른다는 뜻이니라.
뜻을 알면 생멸을 떠난다. 경계에 집착하면 생멸이 일어나서 물에 파랑이 있음과 같나니, 이는 곧 이 언덕이요, 경계를 떠나면 생멸이 없어서 물이 끊이지 않고 항상 흐름과 같나니, 곧 저 언덕에 이른다고 이름하며, 그러므로 바라밀이라고 이름하느니라.[210]
혜능은 ‘뜻을 알면 생멸을 떠난다. 경계에 집착하면 생멸이 일어난다.’고 하였다. 이 구절에서 사용된 ‘뜻(義)’이란 ‘경계’와 대비되는 용어로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경계’를 감각이나 인식작용의 대상이라고 본다면, 겉으로 드러난 현상의 본질적 의미가 ‘뜻’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뜻을 안다(解義)’는 것은 인식작용 대상의 배후에 있는 본질적인 의미를 아는 것이다. 융도 현실적인 정신현상의 의미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다.
“인과적 관점에서 볼 때 모든 정신적 산물은 앞서 일어난 정신적 내용의 결과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또한 목적론적 관점에서 볼 때 모든 정신적 산물은 현실적인 정신 현상 속에 고유의 의미와 목적을 가지고 있음을 알고 있다. 이러한 기준은 꿈에도 적용할 수 있다.
......
어떤 심리적 사실을 설명하여야 할 때 심리학적인 것은 이중적인 관찰방식을 요구한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즉 인과성과 목적성이 그것이다. 목적성이라는 말로 나는 단지 내재하는 심리학적 목표지향성을 규정하고자 한다. ‘목표지향성’이라는 말 대신에 ‘목적의미’라고도 한다. 모든 심리학적 현상 속에는 그러한 목적의미가 살아 있다.”[211]
분석심리학에서 꿈에 나타난 상징의 의미가 무엇인지 그리고 꿈 전체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우리가 인식하는 꿈에 나타난 상(像)들은 정신적 현상으로서 이 언덕이라고 볼 수 있다면, 꿈을 만들어내는 무의식, 즉 우리가 인식할 수 없는 깊은 마음속은 저 언덕에 해당될 것이다. 그러므로 꿈의 의미를 안다는 것은 저 언덕에 이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꿈의 의미는 지적으로 해석되는 것이 아니다. 꿈의 해석은 하나의 체험이다. 꿈은 생물학자가 세포의 기능을 설명하는 것처럼 해석되는 것이 아니고 몸소 느끼고 묻고 해답을 구하고 깨닫는 매개체이다.[212] 이와 마찬가지로 ‘뜻을 알면 생멸을 떠난다.’에서 뜻을 안다는 것도 지적인 앎이 아닐 것이다. 그것은 경계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만법을 포함하는 심성(心性)에 대한 자증자오(自證自悟)일 것이다. 그러므로 뜻을 알아 생멸을 떠나서 부처의 도를 이루는 것과 꿈의 해석을 통하여 무의식의 목적의미를 알아서 자기실현을 이루려는 노력은 서로 유사한 것으로 보인다.
‘뜻을 알면 생멸을 떠난다.’는 것이 자기실현과 관련이 있다고 본다면, 혜능의 이 말은 융의 ‘의식적인 삶’과도 비교될 수 있다. 융은 빌헬름이 도(道)를 의미(Sinn, Meaning)로 번역한 것에 공감을 표현하면서 의식적인 삶의 획득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도(道)라는 한자(漢字)는 ‘머리’와 ‘가다(going)’라는 글자로 구성되어 있다. ‘머리’는 의식으로, 그리고 ‘가다’는 길을 가는 것으로 취급될 수 있으므로 도(道)는 의식화(to go consciously) 또는 의식적 방법(the conscious way)이 될 것이다.
......
만약 우리가 분리된 것을 하나로 만드는 수단 또는 의식적 방법을 도(道)라고 한다면, 도(道)에 대한 심리학적 의미에 가까이 갔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무의식속에 숨겨진 대극의 다른 한 쪽(opposite)을 인식하는 것은 우리 존재의 무의식적 법칙들과 다시 하나가 된다는 것을 뜻하고, 이러한 재결합의 목적은 의식적인 삶(conscious life)의 획득이며, 도(道)의 실현(the realization of the Tao)이다.”[213]
그러므로 ‘뜻을 알아 생멸을 떠나 저 언덕에 이른다.’는 것은 무의식 속에 숨겨진 대극의 다른 한쪽을 인식함으로써 의식과 무의식의 대극합일(對極合一)을 이루는 것이요 자기실현을 성취하는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만약 사람들이 법을 묻거든 말을 다 쌍으로 해서 모두 대법(對法)을 취하여라. 가고 오는 것이 서로 인연하여 구경에는 두 가지 법을 다 없애고 다시 가는 곳마저 없게 하라.
......
자성이 삿되기 때문에 열여덟 가지 삿됨이 일어나고, 자성이 바름을 포함하면 열여덟 가지 바름이 일어나느니라. 악의 작용을 지니면 곧 중생이요, 선이 작용하면 곧 부처이니라. 작용은 무엇들로 말미암는가? 자성의 대법으로 말미암느니라.
......
어둠이 스스로 어둡지 아니하나 밝음 때문에 어두운 것이다. 어둠이 스스로 어둡지 아니하나 밝음으로써 변화하여 어둡고, 어둠으로써 밝음이 나타나나니, 오고 감이 서로 인연한 것이다.[214]
혜능은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법을 묻거든 모두 대법(對法)을 취하여라.’고 가르치고 있다. 이 구절의 뜻은, 어리석은 부처님, 즉 중생은 자아가 파악한 대극(對極)의 어느 한쪽에 집착하고 있으므로 대극의 다른 한쪽을 제시하라고 한 것이다. ‘오고 감이 서로 인연한 것’처럼 대극은 서로 인연하여 생기는 것이다. 법을 물어올 때 대법을 취하는 목적은 이 두 가지 법을 없애고 다시 가는 곳마저 없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여기서 ‘가는 곳’이란 말의 뜻을 ‘저 언덕’이라고 풀이해보자면, ‘가는 곳마저 없게 하라’는 것은 양변(兩邊)을 떠나게 되면 원래 자신의 본래 마음, 즉 자성(自性)을 도로 찾게 되는데, ‘이 언덕’과 ‘저 언덕’이 모두 본래 마음에 속해 있었던 것이므로 다시 또 ‘저 언덕’으로 갈 필요도 없고 갈 이유도 없다는 뜻이 된다. 양변을 떠나는 것은 중도(中道)이고, 중도는 대극합일(對極合一)의 자기(自己)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의식과 무의식이라는 대극이 통합된 전체 정신을 이르는 말이 자기(自己)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단절되었던 대극이 함께 하게 되면 상호조정을 통하여 균형을 이룰 수 있다는 융의 다음과 같은 말도 ‘대법을 취하여라.’고 한 혜능의 말과 일맥상통한다.
“리비도가 정체되었을 때는 항상 대극의 쌍이 단절되어 분리된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리비도가 진행(progression)하는 동안에는 대극의 쌍은 정신적 과정의 상호조정된(co-ordinated) 흐름 속에서 통합된다. 대극의 공동 작업은 이러한 과정에 대한 균형 잡힌 조화를 가능하게 하지만, 이러한 내면의 대극이 없다면 일방적이거나 비이성적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나치게 과장된 모든 행동을 대극적인 충동의 상호조정효과(coordinating effect)가 분명히 결핍되었기 때문에 생기는 균형의 상실이라고 보는 것을 정당화시킬 수 있다.”[215]
그러므로 ‘말을 다 쌍으로 해서 모두 대법을 취하여라’고 한 것은 바로 이러한 균형의 상실을 회복시켜 대극의 균형 잡힌 조화를 가능하도록 하기 위한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그리고 아니마에 대한 다음 설명에서도 융은 아니마의 작용을 대극의 관점에서 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남성의 외적인격을 페르조나라고 할 때 남성의 내적인격은 여성적 특징을 가진 아니마라고 부른다.
아니마와 삶이 그들 자신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설명해주는 아무런 해석도 제공하지 않는다면 아니마와 삶은 의미없는 것이 될 것이다. 그러나 아니마와 삶은 해석될 수 있는 본성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모든 혼돈 속에 질서가 있으며, 모든 무질서에는 은밀한 질서가, 모든 자의성에는 항구적 법칙이 있기 때문이며, 작용하는 모든 것은 그것의 대극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216]
아니마, 아니무스 즉, 내적 인격을 통합하여 전체 인격이 되고자 하는 자기실현도 ‘모두 대법(對法)을 취하여라.’는 혜능의 선법(禪法)에 해당되는 것으로 보인다.
혜능은 종보본(宗寶本) 육조단경에 의하면 「금강경의 “마땅히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내어라”하는 구절을 듣고는 곧 마음을 깨달았다(能一聞經 應無所住而生其心 心卽開悟)」고 한다.[217] 금강경의 구절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그런 까닭에 수보리여, 모든 보살마하살은 응당 이와 같이 청정한 마음을 낼 것이니 마땅히 색(色)에 머물러서 마음을 내지 말며, 소리와 냄새와 맛과 느낌과 법에 머물러서 마음을 내지 말며, 마땅히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낼지니라.”[218]
이 구절에 해당하는 산스크리트어 원본의 번역은 다음과 같다.
“그러므로 수보리여, 구도자ㆍ훌륭한 사람들은 집착 없는 마음을 일으키지 않으면 안 된다. 무엇인가에 집착된 마음을 일으켜서는 안 된다. 형태에 집착된 마음을 일으켜서는 안 된다. 소리나 냄새나 맛이나 감촉이나 마음의 대상에 집착된 마음을 일으켜서는 안 된다.”[219]
한역 금강경에 보면 머물지 말아야 할 대상은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이며 머물지 않는다는 것(無住)은 산스크리트 원본의 해석으로 미루어 보면 집착하지 않는다는 뜻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색성향미촉법에 집착하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내라는 금강경의 한 구절을 듣고 혜능의 마음이 열리고 깨닫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렇듯 무주(無住)는 혜능 선법의 출발점이자 목적지라고 할 수 있다.
혜능은 또한 ‘머무름이 없다(無住)고 하는 것은 사람의 본래 성품이 생각마다 머무르지 않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 말의 뜻은 자성(自性)이 인연에 따라 순간순간 다른 생각을 만들어낸다는 뜻이다. 자성은 어느 한순간의 인연에 따라 한 생각을 일으키고, 그 다음 순간에는 그 순간의 인연에 따라 다른 생각을 일으키게 된다. 그러나 중생의 자아는 지나간 한순간의 생각에 집착하여 머물게 되기 쉽다. 그리하여 어느 한순간의 생각, 그것이 자성(自性)이 일으킨 것이라고 하더라도 지나간 생각에 집착하지 말 것을 강조한다. 혜능의 ‘지나간 생각’은 융이 말하고자 하는 ‘죽은 상징’과 관련이 있다.
“살아 있는 상징은 다른 어떤 더 좋은 방식으로도 그 특징을 표현할 수 없는 어떤 것의 표현이다. 상징은 의미를 잉태하고 있는 동안에만 살아있다. 그러나 상징의 의미가 밝혀지게 되거나, 지금까지 상징으로 받아들여지던 것보다 더 나은 표현이 발견되면 그 상징은 죽은 것이 되고 오직 역사적인 중요성만 간직하게 된다.”[220]
상징(symbol)은 그 의미를 남김없이 구체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이다. 만약 남김없이 설명하였다고 믿는다면 그것은 상징의 깊은 불가해한 궁극적인 뜻을 생각하지 않는 태도로서 상(相)에 집착하는 태도와 같다. 왜냐하면 상(相)은 밖에 보이는 구체적 현상(外相, 色身)이나 형상일 뿐 ‘의미를 잉태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하나의 상징이 더 이상 정신상황에 대한 충분한 표현이 되지 못할 경우, 새로운 상징이 출현할 수 있음을 융은 말하고 있다. 무의식은 항상 의식이 처한 상황에 가장 적절한 상징을 의식에게 보여준다. 이러한 상징이 표현하려고 하였던 무의식의 알려지지 않은 어떤 것의 의미를 자아가 인식하게 되면 무의식으로부터 새로운 상징이 나타난다는 것을 융의 말에서 알 수 있다. 원래의 상징이 가진 의미를 자아가 인식하게 되면 원래 알려지지 않았던 어떤 것의 내용도 달라지고 의식 상황도 달라질 것이다. 그리하여 이러한 상황에 가장 적절한 상징이 새로 태어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원래의 상징이 준 영향에 매혹되면 그것이 이미 죽어버렸음에도 불구하고 원래의 상징에 집착하여, 새롭게 태어난 살아 있는 상징을 보지 못하게 된다. 이런 상황의 변화는 꿈을 해석할 때 자주 나타난다. 꿈이 의식에게 전해주는 상징의 의미는 때에 따라 달라지고 경우에 따라서는 정반대가 될 수가 있다. 그러므로 과거 어느 한 때 자아가 처한 상황을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되었던 상징이었지만 상황이 바뀌었는데도 그 상징만을 따르다가 보면 오히려 해를 입을 수가 있다. 예를 들면 종교적 상징인 도그마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종교적 상징인 도그마를 통하여 신성한 종교적 체험을 하게 된다면, 우리는 이때 살아 있는 상징으로서 도그마를 체험하는 것이다. 그러나 도그마가 개인에게 누미노줌[221]을 일으키지 못하면서도 형식적인 의례로서만 남아 있는 경우라면 그것은 죽은 상징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도그마가 어떤 사람에게는 살아있는 상징이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죽은 상징이 될 수도 있다. 한 개인이 죽은 상징에만 매달릴 때, 자신의 내부에서 올라오는 새로운 종교적인 상징은 억압되거나 무시될 수밖에 없다. 개인의 무의식에서 유래되는 종교적 체험을 하기 위해서는 죽은 상징에 집착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융은 그리스도의 모방이 개인의 자기실현, 즉 ‘자신의 본성’을 되찾는 데 장애가 될 수도 있음을 말한다.
그리스도의 모방 즉 그의 본을 따르고 닮아가라는 요구는 고유한 내적 인간의 발전과 고양을 목적으로 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피상적이고 기계적인 상투성에 빠져드는 신자들에 의해 외적인 예배 대상이 되어버렸다. 바로 그런 식의 숭배 때문에 예배의 대상은, 심혼 깊은 곳을 파고들어 심혼을 본보기에 부응하는 전체성으로 거듭나게 하는 데 실패한다. 그로서 신적인 중재자는 외부의 상(像)으로 존재하고, 인간은 깊은 본성이 변화되지 않은 채 조각난 존재로 남아 있는 것이다. 인간을 변화시키지 못하는, 한낱 인공물에 지나지 않는 그러한 단순한 모방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개인이 삶의 영역에서 자기의 고유한 방법으로 ―신의 용인 아래(Deo concedente)― 본보기를 실현시켜 가는 일이다.[222]
이렇듯 자신의 본성을 되찾기 위해서는, 아무리 그것이 좋은 정신치료 이론이나 학설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에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내어야” 할 것이다. 융이 정신치료의 기본원칙으로 제시하는 변증법적 방법이 바로 그러하다.
“정신치료가 사람들이 처음에 이해하였던 것처럼 간단하면서 틀림없는 방법이 아니라 어떤 의미로는 변증법적 과정, 즉 두 사람 사이의 대화, 또는 토론임이 점차로 명백해졌다. 변증법은 원래 고대 그리스 철학의 대화술의 하나였는데, 예로부터 새로운 합성(合成)을 만들어내는 과정을 일컫는 명칭이 되었다.”[223]
“그러므로 내가 개별적인 인간의 정신치료를 하고자 하는 한, 좋든 싫든 간에 모든 권위, 영향을 주고자 하는 마음이나 내가 더 잘 안다는 온갖 마음들을 포기해야만 한다. 어쩔 수 없이 나는 서로의 소견을 비교하는 변증법적 방법을 택해야만 한다. 이것은 다른 사람이 나의 전제로 인해 제약받지 않고 그의 소견을 완전히 표현하는 기회를 갖도록 해줌으로써 가능하다.”[224]
“개인적인 것은 일회적인 것, 예측할 수 없는 것, 해석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이 경우 치료자는 그의 모든 가정과 기법을 포기해야만 하고, 모든 방법을 피하는 태도를 취하면서 순수한 변증법적 과정에만 국한시켜야 한다.”[225]
치료자 자신이 가지고 있는 이론적 가정이나 기법은 일반적인 것으로서 지금 치료자와 피치료자의 만남에 대한 가장 적절한 이해의 수단이 될 수 없다. 그러므로 치료자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어떠한 가정이나 기법에도 집착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신수는 이념(離念)하여 깨닫고, 이오(離汚)하여 정(淨)하며, 이동(離動)하여 정(靜)함을 주장하여 이른바 망념의 장애됨을 과장하나, 혜능은 즉망(卽妄)에서 깨닫고, 즉염(卽染)에서 정(靜)하며, 즉물(卽物)에서 공(空)한다.[226]
신수는 망념과 더러움을 제거하려고 하였다. 망념과 더러움이란 아집(我執)과 법집(法執)이라고 볼 수 있는데, 신수는 집착하는 아(我)와 집착의 대상인 법(法)을 모두 없애버리려고 하였지만 혜능은 집착하는 데 잘못이 있지 아(我)와 법(法) 자체에는 잘못이 없다고 보아 아(我)와 법(法)을 없애려고 하지 않았고 다만 집착하지 않으면 된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혜능은 ‘망념과 더러움에서 깨닫는다.’라고 하였고, 또한 ‘항상 허물을 드러내어 자기에게 있게 하라. 도(道)와 더불어 서로 합하는 도다.’[227]라고 하여 자신의 허물도 없애려고 하지 않고 드러내도록 하였다.
혜능의 ‘허물’에 대한 이러한 태도는 분석심리학에서 ‘그림자’를 대하는 태도와 비슷한 점이 있다.
의식의 바로 뒷면에 있는 여러 가지 심리적 내용인 그림자는 열등한 인격과 같은 것이다. 그것은 마치 어두운 창고에 내버려진 곡식이나 연장과 같은 것으로 오래 두면 곰팡이가 피고 녹이 슬게 된다. 다시 말해서 의식될 기회를 잃어버렸으므로 미분화된 채로 남아있는 원시적인 심리적 경향, 심리적 특징들이다. 그러므로 그림자가 외부의 대상에 투사되어 의식될 때 자아는 그 대상에서 미숙하고 열등하고 부도덕하다는 등 부정적인 인상을 갖게 된다. 그러므로 그림자를 자기의 일부분으로 받아들이기란 좀처럼 쉽지 않다. 그러나 그림자는 본래부터 그렇게 악하고 부정적이고 열등한 것이 아니라 그늘에 가려 있어서, 다시 말해서 무의식 속에 버려져 있어 분화될 기회를 잃었을 뿐이고, 그것이 의식되어 햇빛을 보는 순간, 그 내용들은 곧 창조적이며 긍정적인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서 겉으로 보아 파괴적이며, 위험하며, 부정적인 작용을 나타내는 그림자를 창조적인 것으로 전환시킬 수 있는가. 그 열쇠는 자아의식이 무의식에 대하여 얼마만큼 관심을 가지고 그림자의 존재를 깨닫고자 노력하느냐에 달려 있다. 그것을 깨달을 때 의식의 변화가 생기며 그림자의 부정적 작용이 해소된다.[228]
‘항상 허물을 드러내어 자기에게 있게 하라. 도(道)와 더불어 서로 합하는 도다.’라는 육조단경의 구절을 그림자에 대한 설명과 대비시켜 이해하면 다음과 같다. 허물을 ‘어두운 창고에 오래 내버려 두어 곰팡이가 핀 음식이나 녹이 슨 연장처럼’ 만들지 말고 항상 ‘햇빛을 보게 하여 허물을 자기의 일부분으로 받아들이게’ 되면, 허물은 악하고 부정적이고 열등한 것에서 창조적이며 긍정적인 것을 바뀌게 될 것이다.
“진여의 깨끗한 성품이 참 부처요
삿된 견해의 삼독이 곧 참 마군이니라.
삿된 생각 가진 사람은 마군이 집에 있고,
바른 생각 가진 사람은 부처가 곧 찾아오는도다.
성품 가운데서 삿된 생각인 삼독이 나나니
곧 마왕이 와서 집에 살고
바른 생각이 삼독의 마음을 스스로 없애면
마군이 변하여 부처되나니 참되어 거짓이 없도다.”[229]
참 마군(魔軍)[230]은 탐진치(貪瞋癡)[231] 삼독(三毒)인데, 삼독은 성품 가운데서 나온다고 하였다. 이는 자성(自性)이 포함하는 만법 중에는 탐진치(貪瞋癡) 삼독(三毒)도 있다는 말이 된다. 자성(自性)은 분석심리학적 관점에서 보면 자기원형[232]에 해당된다.
‘파우스트’와 악마 ‘메피스토펠레스’, 니체의 초인 ‘자라투스트라’와 ‘추악한 인간’ 그리고 심지어는 ‘그리스도’와 ‘마귀’에서 보듯이 모든 선하고 정의로우며 초인적인 존재의 악하고 추하며 비천한 반려자는 모두 그것의 그림자들이다.
......
원형(原型, Archetype)에는 밝은 면과 어두운 면이 있다. 즉 창조적인 면과 파괴적인 면이 있다. 인격의 통일을 가능하게 하는 자기원형(Self archetype)에도 그림자가 있다고 생각된다. 신의 그림자라고 부를 만한 것이다. 그리고 이 밝은 면과 어두운 면은 고정 불변의 것이 아니고 서로 바뀔 수 있는 것이다.
......
그러나 그림자가 원형과 관련될 때는 좀처럼 그 의식화가 어렵다. 그것은 거의 하나의 자연적인 조건이며 인간본성에 포함되는 원초적 특징이다. 이때 우리는 렐리기오(religio), 즉 주의깊은, 성실한 관조의 자세를 취해야 할 것이다. 그림자 원형은 우리가 의식에 동화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233]
자기원형의 그림자라고 부를 수 있는 마귀가 창조적인 면으로 바뀔 수 있다는 카를 구스타프 융의 입장은 ‘마군이 변하여 부처가 된다.’는 혜능의 선법과 같아 보인다. 그런데 분석심리학에서는 그림자 원형을 의식에 동화시킬 수 없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는 자아팽창(ego inflation)의 위험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자아팽창을 불교의 관점에서 이해하자면, 깨달았다는 주체가 자아인 경우를 말한다. 혜능은 ‘바른 생각이 삼독의 마음을 스스로 없애면’이라고 하였는데, 바른 생각, 즉 무념(無念)을 행하여 삼독의 마음을 스스로 없애는 주체는 자성(自性)이다. 그러므로 자아팽창은 자성(自性)이 주체로서 무념(無念)을 행하여 ‘마군이 변하여 부처가 된’ 것이 아니라, 자아가 중심이 되어 알음알이로서 깨달았다고 착각하여 바람직하지 않은 행동을 자기 마음대로 하면서 무애행(無碍行)을 한다고 주장하나 오히려 자신이 마왕(魔王)의 노예가 된 줄 모르는 경우이다.
원형이 형이상학적인 본질을 잃어버렸을 때 원형은 개인의 의식적인 마음과 동일시되는 것은 심리학적인 법칙이다. 원형은 개인에게 영향력을 미치고 개인을 그 자신의 모습에 따라 개조시킨다. 그리고 원형은 항상 어느 정도의 신성한 힘(numinosity)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러한 신성한 것을 통합하게 되면 자아의 팽창을 야기하게 된다. 자아의 팽창은 괴테가 파우스트에게 초인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던 것과 같은 심리적인 상황에 전적으로 부합된다. 최근의 역사에서 자아의 팽창은 니체를 지나서 정치심리학적인 면으로 확대되어왔다. 그리고 신성한 것이 인간으로 육화(incarnation)되면 권력남용으로 초래되어왔던 모든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234]
‘나’의 정신적인 측면인 자아와 마찬가지로, ‘나’의 물질적인 측면인 몸도 자성(自性)의 바름과 삿됨에 따라 바른 것이 될 수도 있고 나쁜 것이 될 수도 있다.
음욕의 성품은 본래 몸의 깨끗한 씨앗이니
음욕을 없애고는 깨끗한 성품의 몸이 없다.
다만 성품 가운데 있는 다섯 가지 욕심을 스스로 여의면
찰나에 성품을 보나니, 그것이 곧 참이로다.”[235]
음욕의 성품이란 말의 뜻은 뒤에 나오는 다섯 가지 욕심(五欲)과 연관지어 이해하여 볼 수 있다. 다섯 가지 욕심이 오온(五蘊, 色受想行識)[236]에 대한 욕심이라고 본다면, 음욕의 성품(婬性)이란 오온(五蘊) 중에서도 색(色), 즉 ‘나’의 물질적 현상인 몸에 대한 욕구를 일으키는 본성(本性), 즉 자성(自性)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음욕의 성품은 본래 몸의 깨끗한 씨앗이니 음욕을 없애고는 깨끗한 성품의 몸이 없다.’라는 구절은 ‘음욕을 일으키는 성품, 즉 자성(自性)은 본래 청정한 몸(淸淨身)이 될 수도 있는 씨앗이기 때문에 음욕을 제거해버리게 되면 깨끗한 성품으로 인한 몸도 있을 수 없다.’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즉, ‘목욕물 버리다가 아이까지 버린다(Throw the baby out with the bath water)’는 서양 속담처럼 더러운 물을 버린다고 하다가 아이까지 버리게 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성품 가운데 있는 다섯 가지 욕심(五欲)을 스스로 여의기만(自離五欲) 하면 찰나에 견성(見性)한다.’고 한 것처럼 음욕을 제거하려고 하지 말고 그대로 두되 음욕을 스스로 떠나서 여의기만 하면, 즉 오온이 공함을 보면(照見五蘊皆空) 견성한다는 가르침이다.
저자는 카를 구스타프 융의 분석심리학보다는 불교를 먼저 만났다. 먼저 만난 불교에 대한 이해는 나중에 접하게 된 분석심리학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나중에는 거꾸로 분석심리학에 대한 이해가 불교에 대한 이해를 보다 심화시켜 주었다.
저자가 분석심리학파의 분석가가 되기 위하여 받았던 수련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교육분석이었다. 교육분석이란 자신이 알지 못하였던 자신의 깊은 마음을 주로 자신의 꿈을 통하여 이해함으로써 지금까지 ‘나’를 중심으로 살아왔던 삶에서 벗어나 자기(Self)가 중심인 삶을 살아가도록 하는 과정이다. 저자는 이러한 분석가 수련 과정에서 저자 자신이 알지 못하고 살아왔던 깊은 마음을 직접 체험함으로써 자기(Self)에 대한 이해의 폭을 조금씩 넓혀갈 수 있었다. 분석심리학의 자기(Self)는 선불교의 자성(自性) 또는 자심(自心)에 해당되는 말이다. 분석심리학의 자기(Self)는 분석심리학에 대한 이론적인 공부만으로는 결코 이해할 수 없고 자신의 마음이지만 모르고 살아왔던 마음, 즉 무의식을 직접 체험함으로써 이해할 수 있다. 이는 불립문자(不立文字) 직지인심(直指人心) 견성성불(見性成佛)을 내세우는 선불교에서 자성(自性)을 보는 것과 맥을 같이 한다.
재가신자인 저자의 간화선 수행은 선방 수좌 스님들의 수행에 비길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간화선 수행을 하는 선방 수좌 스님들이 한국 융 연구원 분석가 수련과정을 이수한다면 저자보다 훨씬 더 분석심리학을 깊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수좌 스님들이 분석가 수련과정을 이수한 후에 분석가로서 활동하게 된다면 이는 한국 선불교의 간화선 전통이 분석심리학을 통해서 현대화를 이루는 것이 될 것이며 많은 중생들이 깨달음을 얻는 데도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이렇게 되는 출발점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쓴 이 책의 출판을 기꺼이 허락해주신 집문당 임동규 대표님께 그리고 좋은 책을 만들어주신 임용우 부장님, 편집자 장이지님과 표지 디자이너 홍기화님께 진심으로 감사의 마음을 전해드린다
각주
[1] 성철 편역(1967): 《돈황본 육조단경》, 장경각, 경남 합천군, 200-201쪽.佛是自性作 莫向身外求. 自性迷佛卽衆生 自性悟衆生卽是佛.
[2]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
[3] 성철 편역(1967): 《돈황본 육조단경》, 장경각, 경남 합천군, 130쪽.卽緣迷人於境上有念念上便起邪見 一切塵勞妄念從此而生
[4] 경계란 육경(六境)을 뜻한다. 육근(六根)은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의 여섯 가지 감각기관을 말하고. 육경(六境)은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의 여섯 가지 인식대상을, 육식(六識)은 안식(眼識)·이식(耳識)·비식(鼻識)·설식(舌識)·신식(身識)·의식(意識)의 여섯 가지 식(識)을 말한다. 이기영, 불교개론 강의 하권, 한국불교연구원, 1998, 157쪽.
[5] 정병조 역해, 육조단경, 한국불교연구원, 1996, 7쪽.
[6] 조계종 略史, 대한불교조계종 홈페이지; http://www.buddhism.or.kr
[7] 정병조 역해, 육조단경, 8-9쪽.
[8] 넓은 의미의 조사선은 혜능이 세운 선법을 가리키며 남악계와 청원계를 거치는 오가분등의 선법을 포괄한다. 좁은 의미의 조사선은 혜능 자신의 선법과 기본적인 혜능 선법의 풍격을 가진 선승들의 선법이다. 이러한 선승은 주로 하택신회와 대주혜해를 일컫는다. 오가분등의 선법을 분등선이라고 따로 나누기도 한다. 董群(김진무 역), 祖師禪, 운주사, 21-22쪽.
[9] 여래선은 인도불교 중의 선법 및 중국에 전래된 불교가 선종을 창립하기 전의 선법, 특히 혜능남종 창립 이전의 선법을 포괄한다. 그러나 혜능의 남종선 창종 이후에도 선의 직지인심(直指人心)과 돈오무수(頓悟無修) 등의 종지를 엄격하게 준수하지 않았던 일련의 선사들이 있었는데, 이들도 여래선 계통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능가경에 나열된 사종선 가운데 앞의 세 가지 선은 자연히 여래선이고, 그 최고선법, 즉 네 번째의 “여래선”은 조사선과 확실히 대립되는 의의로서의 여래선이다. 이 여래선은 경전상의 선일 뿐 아니라, 경교(經敎) 내의 선으로서 여래지(如來地)에 오입(悟入)함을 목표로 하여, 여래지를 초월하는 것은 아니다. 같은 책, 20쪽.
[10] 董群(김진무 역), 祖師禪, 운주사, 2000, 110-112쪽.
[11] 董群(김진무 역), 祖師禪, 운주사, 2000, 109쪽.
[12] 董群, 祖師禪, 23쪽.
[13] 董群, 祖師禪, 13쪽.
[14] 董群(김진무 역), 祖師禪, 운주사, 2000, 147쪽.
[15] 부처님은 법신(法身), 보신(報身), 화신(化身)의 세 가지 몸으로 계신다고 한다. 변화하지 않는 불생불멸의 심진여(心眞如)가 법신이고, 법신이 생멸 속에 들어와 상(相)을 취한 것이 보신이고, 법신이 교화 받을 상대방의 필요에 상응하여 알맞은 식으로 변화한 것이 화신이다. 이기영, 불교개론 강의 하권, 한국불교연구원, 1998, 146-147쪽.
[16] 성철 편역(1967): 《돈황본 육조단경》, 138쪽. 善知識 見自性自淨 自修自作 自性法身 自行佛行 自作自成佛道
[17] 성철 편역(1967): 《돈황본 육조단경》, 156-157쪽.若言歸佛 佛在何處 若不見佛 卽無所歸 旣無所歸 言却是妄 善知識 各自觀察 莫錯用意 經中 只卽言自歸依佛 不言歸他佛 自性不歸 無所歸處
[18] 불(佛),법(法),승(僧) 삼보(三寶)
[19] 성철 편역(1967): 《돈황본 육조단경》, 155-156쪽.善知識 惠能勸善知識 歸依自性三寶 佛者覺也 法者正也 僧者淨也 自心歸依覺 邪迷不生 少欲知足 離財離色 名兩足尊 自心歸正 念念無邪故 卽無愛著 以無愛著 名離欲尊 自心歸淨 一切塵勞妄念 雖在自性 自性不染著 名衆中尊
[20] 자아가 신화적인 인물과 동일시하게 되면 이른바 마성(魔性) 인격, Mana- Personality가 된다. 자아는 초인적인 힘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느끼고 스스로 영웅이나 구세주가 된 것 같은 기분으로 행동한다. 이런 현상을 자아의 팽창(Inflation)이라고 한다. 이부영(2011): 《분석심리학》 제3판, 일조각, 서울, 137쪽.
[21] 이렇게 되는 것은 아니마 현상이 중단된 다음이다. ‘아니마’는 남성의 마음속에 있는 여성적인 마음을 일컫는 말이다. ‘만약 그가 먼저 개인적 무의식의 사실적인 내용을, 그 다음에는 집단적 무의식의 환상내용을 알게 된다면 그는 그의 콤플렉스의 근원에 도달하며 그로써 사로잡힘의 해소에 이른다. 그렇게 함으로써 아니마 현상이 중단된다.’(C. G 융 기본저작집 3, 151-152쪽.) 융 학파의 개인 정신분석에서, 아니마 현상이 중단되기 위해서는 오랜 기간에 걸쳐 아주 힘들고 혼란스러운 과정을 겪어야만 한다. 그러므로 이런 현상을 자주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22] 원상(源像)은 원형(原型)과 같은 뜻으로 사용된다. 이 구절에서 원상은 마나-인격 원형을 가리키고 있다.
[23] 융, “자아와 무의식의 관계”, 《인격과 전이》, C. G 융 기본저작집 3, 152-153쪽.
[24] 융, “자아와 무의식의 관계”, 《인격과 전이》, C. G 융 기본저작집 3, 154쪽.
[25] 융이 말하는 개성(個性)은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뜻과는 다르게 사용된다. By individuality I mean the peculiarity and singularity of the individual in every psychological respect. If the individuality is unconscious, there is no psychological individual but merely a collective psychology of consciousness. The psychic individuality is given a priori as a correlate of the physical individuality, although, as observed, it is at first unconscious. A conscious process of differentiation or individuation is needed to bring the individuality to consciousness. (C. G. Jung, Definitions, C.W. 6) 융이 말하는 개성(individuality)은 선험적으로 미리 정해진 것으로서 무의식 상태에 있다가 개성화과정을 통해서 의식화되는 것이다.
[26] 융, “자아와 무의식의 관계”, 《인격과 전이》, C. G 융 기본저작집 3, 155, 158- 159쪽.
[27] 성철 편역(1967): 《돈황본 육조단경》, 173-175쪽.菩薩戒經云 我本源自性淸淨 識心見性 自成佛道 卽時豁然 還得本心
[28] 성철 편역(1967): 《돈황본 육조단경》, 장경각, 경남 합천군, 130-132쪽.眞如是念之體 念是眞如之用 自性起念 雖卽見聞覺知 不染萬境而常自在
[29] 융 C. G.(한국융연구원 번역위원회 역)(2002): “집단적 무의식의 원형에 관하여”, 《원형과 무의식》, C. G. 융 기본저작집 2, 솔, 서울, 145쪽.
[30] C. G. Jung, Definitions, C.W. 6, pp. 437-438.
[31] 융 C. G.(한국융연구원 번역위원회 역)(2002): “모성원형의 심리학적 측면”, 《원형과 무의식》, C. G. 융 기본저작집 2, 솔, 서울, 200-201쪽.
[32] 무비 역해, 금강경오가해, 불광출판부, 158쪽.
[33] 이부영(2011): 《분석심리학》 제3판, 일조각, 서울, 115-116, 121쪽.
[34] 성철 편역(1967): 《돈황본 육조단경》, 247쪽.法性起 六識 眼識 耳識 鼻識 舌識 身識 意識 六門 六塵 自性 含萬法 名爲含藏識 思量卽轉識 生六識 出六門 見六塵 是三六十八 由自性邪 起十八邪 含自性正 起十八正 含惡用卽衆生 善用卽佛 用由何等 由自性對
[35] 이부영(2011): 《분석심리학》 제3판, 일조각, 서울, 116쪽.
[36] 여기서 원형이란 자기(自己)를 중심으로 한 전체 원형을 뜻한다.
[37] 이부영(2011): 《분석심리학》 제3판, 일조각, 서울, 113쪽.
[38] 융은 무의식에는 두 가지 층이 있다고 보았다. 하나는 그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자라는 동안 겪은 개인 생활에서의 체험 내용 가운데서 무슨 이유에서든 잊어버린 것, 현실세계의 도덕관이나 가치관 때문에 현실에 어울리지 않아 억압된 여러 가지 내용들로서, 개인의 특수한 생활체험과 관련되고 개인의 성격상의 특성을 이루는 것들이어서 융은 이를 개인적 무의식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무의식에는 이러한 개인적 특성과는 관계없이 사람이면 누구에게서나 발견되는 보편적인 내용이 있다. 이러한 내용들은 태어난 이후의 경험내용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태어날 때 이미 가지고 나오는 무의식의 층으로서 일찍이 의식된 일이 없는 것들이다. 누구에게나 보편적으로 존재한다는 뜻에서 융은 이를 집단적 무의식이라 하였다. 이부영(2011): 《분석심리학》 제3판, 일조각, 서울, 83-84쪽.
[39] 이부영(2011): 《분석심리학》 제3판, 일조각, 서울, 114-115쪽.
[40] 성철 편역(1967): 《돈황본 육조단경》, 장경각, 경남 합천군, 200-201쪽.佛是自性作 莫向身外求. 自性迷佛卽衆生 自性悟衆生卽是佛.
[41] 성철 편역(1967): 《돈황본 육조단경》, 장경각, 경남 합천군, 130쪽.卽緣迷人於境上有念念上便起邪見 一切塵勞妄念從此而生
[42]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
[43] 성철 편역(1967): 《돈황본 육조단경》, 장경각, 경남 합천군, 130-132쪽.眞如是念之體 念是眞如之用 自性起念 雖卽見聞覺知 不染萬境而常自在
[44] 육근(六根)은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의 여섯 가지 감각기관을 말하고, 육경(六境)은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의 여섯 가지 인식대상을, 육식(六識)은 안식(眼識)·이식(耳識)·비식(鼻識)·설식(舌識)·신식(身識)·의식(意識)의 여섯 가지 식(識)을 말한다. 이기영, 불교개론 강의 하권, 한국불교연구원, 1998, 157쪽.
[45] 이부영(2011): 《분석심리학》 제3판, 일조각, 서울, 78쪽.
[46] 이부영(2011): 《분석심리학》 제3판, 일조각, 서울, 223쪽.
[47] 성철, 백일법문 上, 장경각, 256쪽.
[48] C. G. Jung, Definitions, C.W. 6, p. 425.
[49] 이부영(2011): 《분석심리학》 제3판, 일조각, 서울, 78쪽.
[50] 성철, 백일법문 上, 장경각, 319쪽.
[51] 성철 편역(1967): 《돈황본 육조단경》, 장경각, 경남 합천군, 119쪽.善知識 菩提般若之智 世人本自有之 卽緣心迷 不能自悟 須求大善知識 示導見性
[52] 성철, 백일법문 上, 장경각, 98쪽.
[53] 성철 편역(1967): 《돈황본 육조단경》, 장경각, 경남 합천군, 171-172쪽.爲一切衆生 自有迷心 外修覓佛 未悟自性 卽是小根人 聞其頓敎 不信外修 但於自心 令自本性 常起正見 煩惱塵勞衆生 當時盡悟
[54] 성철, 백일법문 上, 319, 323쪽.
[55] 성철, 백일법문 上, 256쪽.
[56] 성철, 백일법문 上, 265쪽.
[57] 성철, 백일법문 上, 263쪽.
[58] 성철, 백일법문 上, 272쪽.
[59] 성철 편역(1967): 《돈황본 육조단경》, 장경각, 경남 합천군, 180쪽.無念法者 見一切法 不著-切法 遍一切處 不著一切處 常淨自性 使六賊 從六門走出 於六塵中 不離不染 來去自由 卽是般若三味 自在解脫 名無念行
[60] 안식(眼識), 이식(耳識), 비식(鼻識), 설식(舌識), 신식(身識), 의식(意識).
[61]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
[62]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
[63] 五蘊(色受想行識). 고대 인도의 불교에서는 일체의 존재는 오온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생각하였다. 물질적 현상으로 존재하는 것, 수(受)는 감각 작용, 상(想)은 표상(表象), 행(行)은 작위(作爲), 식(識)은 외계의 사물을 식별하는 작용, 육식(六識)을 뜻한다. 이기영 번역, 반야심경 금강경, 한국불교연구원, 44,46쪽, 50-51쪽.
[64] 十二因緣 名爲佛性 佛性者 卽第一義空 第一義空 名爲中道 中道者 卽名爲佛 佛者 名爲涅槃. 大正藏 12, p. 768 下. 성철, 백일법문 上, 장경각. 322쪽에서 재인용.
[65] 화두와 참선, 해운정사 홈페이지, http://www.seon.or.kr/
[66] 성철 편역(1967): 《돈황본 육조단경》, 177쪽.
[67] 성철 편역(1967): 《돈황본 육조단경》, 178쪽.
[68] C. G. 융, 융 기본 저작집 3, 인격과 전이, 솔, 73-74쪽.
[69] 진제, 돌사람 크게 웃네(石人大笑), 백광, 314-321쪽.
[70] 화두와 참선, 해운정사 홈페이지, http://www.seon.or.kr/
[71] 바른 참선법, 해운정사 홈페이지, http://www.seon.or.kr/
[72] C. G. Jung, Dream Analysis, Princeton University Press, p. 89, p. 95.
[73] 질문과 답변, 해운정사 홈페이지, http://www.seon.or.kr/
[74] 色聲香味觸法 몸뚱이의 인식대상.
[75] 眼識,耳識,鼻識,舌識,身識,意識. 몸뚱이가 대상과 접촉하여 생기는 인식작용.
[76] 성철 편역, 돈황본 육조단경, 장경각, 130쪽.卽緣迷人 於境上有念 念上邪見 一切塵勞妄念 從此而生
[77] 육식(六識) 중에서 眼識,耳識,鼻識,舌識,身識의 다섯가지를 전오식(前五識)이라고 한다.
[78] 이기영, 불교개론 강의 상권, 한국불교연구원, 1998, 145-147쪽.
[79] C. G. 융, “정신의 본질에 관한 고찰”, 《원형과 무의식》, C. G. 융 기본저작집 2, 24쪽.
[80] 성철 편역(1967): 《돈황본 육조단경》, 장경각, 경남 합천군, 180쪽.無念法者 見一切法 不著-切法 遍一切處 不著一切處 常淨自性 使六賊 從六門走出 於六塵中 不離不染 來去自由 卽是般若三味 自在解脫 名無念行
[81] C. G. 융, 원형과 무의식, 융 기본 저작집 2, 솔, 33쪽.
[82] C. G. 융, 초월적 기능, 원형과 무의식, C. G. 융 기본저작집 2, 340-342쪽.
[83] C. G. Jung, Dream Analysis, Princeton University Press, p. 50-52.
[84] 이부영(2011): 《분석심리학》 제3판, 일조각, 서울, 78쪽.
[85] “의식 속에서 자기(Self)를 나타내는 것이 자아이다. 자아와 자기의 관계는 피동자(被動者, the moved)와 능동자(能動者, the mover) 또는 객체와 주체이다. 자기는 자아가 생겨나는 선험적 존재이다.” C. G. Jung, Transformation Symbolism in the Mass, Psychology and Religion: West and East, C.W. 11. p. 259.
[86] C. G. 융, 인간의 상과 신의 상, 융 기본 저작집 4, 솔, 17쪽.
[87] 아니엘라 야훼(이부영 역), C. G. Jung의 回想, 꿈 그리고 思想, 집문당, 400쪽.
[88] Fromm E, Suzuki DT, Martino RD.(1960): ZEN BUDDHISM and PSYCHOANALYSIS, Harper & Row, New York, pp. vii-viii.
[89] 에리히 프롬, 스즈키 다이세츠, 데 미르티노.(김용정 역)(1992): 《선과 정신분석》, 원음사, 서울, 12쪽.
[90] 에리히 프롬, 스즈키 다이세츠, 데 미르티노.(김용정 역)(1992): 같은 책, 12쪽.
[91] 에리히 프롬, 스즈키 다이세츠, 데 미르티노.(김용정 역)(1992): 같은 책, 14쪽.
[92] Jung C. G.(1948): “On Psychic Energy”, The Structure and Dynamics of the Psyche, C.W. 8, p. 25.
[93] 성철, 선문정로평석, 장경각, 1993, 136쪽.
[94] 王志躍 著(김진무, 최재수 공역), 분등선, 운주사, 361-362, 382쪽.
[95] 서산대사 지음(원순 역해), 선가귀감, 법공양, 27쪽.
[96] C. G. 융, 상징과 리비도, 융 기본 저작집 7, 솔, 32쪽.
[97] C. G. 융, 상징과 리비도, 융 기본 저작집 7, 솔, 37쪽.
[98] C. G. 융, 상징과 리비도, 융 기본 저작집 7, 솔, 38쪽.
[99] 王志躍 著(김진무, 최재수 공역), 분등선, 운주사, 32-33쪽.
[100] 여래선은 인도불교 중의 선법 및 중국에 전래된 불교가 선종을 창립하기 전의 선법, 특히 혜능남종 창립 이전의 선법을 포괄한다. 그러나 혜능의 남종선 창종 이후에도 선의 직지인심(直指人心)과 돈오무수(頓悟無修) 등의 종지를 엄격하게 준수하지 않았던 일련의 선사들이 있었는데, 이들도 여래선 계통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능가경에 나열된 사종선 가운데 앞의 세 가지 선은 자연히 여래선이고, 그 최고선법, 즉 네 번째의 “여래선”은 조사선과 확실히 대립되는 의의로서의 여래선이다. 이 여래선은 경전상의 선일 뿐 아니라, 경교(經敎) 내의 선으로서 여래지(如來地)에 오입(悟入)함을 목표로 하여, 여래지를 초월하는 것은 아니다. 董群(김진무 역), 祖師禪, 운주사, 20쪽.
[101] 넓은 의미의 조사선은 혜능이 세운 선법을 가리키며 남악계와 청원계를 거치는 오가분등의 선법을 포괄한다. 좁은 의미의 조사선은 혜능 자신의 선법과 기본적인 혜능 선법의 풍격을 가진 선승들의 선법이다. 이러한 선승은 주로 하택신회와 대주혜해를 일컫는다. 오가분등의 선법을 분등선이라고 따로 나누기도 한다. 董群(김진무 역), 祖師禪, 운주사, 21-22쪽.
[102] 董群(김진무 역), 祖師禪, 운주사, 109쪽.
[103] 去年貧未是貧 今年貧始是貧 去年無卓錐之地 今年錐也無. 진제, 돌사람 크게 웃네(石人大笑), 백광, 87쪽.
[104] 我有一機 瞬目示伊 若人不會 別喚沙彌. 진제, 돌사람 크게 웃네(石人大笑), 백광, 87쪽.
[105] 董群(김진무 역), 祖師禪, 운주사, 18-19쪽.
[106] 성철 편역(1967): 《돈황본 육조단경》, 장경각, 경남 합천군, 201쪽.
[107] Jung C. G.(1954): “Transformation Symbolism in the Mass”, Psychology and Religion: West and East, C.W. 11, p. 259.
[108] 융 C. G.(한국융연구원 번역위원회 역)(2004): “자아와 무의식의 관계”, 《인격과 전이》 C. G. 융 기본저작집 3, 솔, 서울, p. 159.
[109] 융 C. G.(한국융연구원 번역위원회 역)(2002): “모성원형의 심리학적 측면”, 《원형과 무의식》, C. G. 융 기본저작집 2, 솔, 서울, pp. 200-201.
[110] 이부영(2011): 《분석심리학》 제3판, 115쪽.
[111] 이부영(2002): 《자기와 자기실현》, 한길사, 서울, p. 80.
[112] 아니엘라 야훼 엮음(이부영 옮김), C. G. 융의 회상, 꿈, 그리고 사상, 집문당, 1989, 17쪽.
[113] 王志躍 著(김진무, 최재수 공역), 분등선, 운주사, 31쪽.
[114] 성철 편역(1967): 《돈황본 육조단경》, 장경각, 경남 합천군, 251-252쪽.
[115] 萬里起骨堆
[116] 桻如雨滴
[117] 진제, 돌사람 크게 웃네(石人大笑), 백광, 269-270쪽.
[118] 진제, 돌사람 크게 웃네(石人大笑), 백광, 77쪽.
[119] 융 C. G.(한국융연구원 번역위원회 역)(2004): “자아와 무의식의 관계”, 《인격과 전이》 C. G. 융 기본저작집 3, 솔, 서울, 80-81쪽.
[120] C. G. 융 기본저작집 3, 145쪽.
[121] C. G. 융 기본저작집 3, 147쪽.
[122] 성철 편역(1967): 《돈황본 육조단경》. 장경각. 경남 합천군. 232-235쪽.法達 心行轉法華 不行法華轉 心正轉法華 心邪法華轉 開佛知見轉法華 開衆生知見被法華轉.
[123] 성철 편역(1967): 《돈황본 육조단경》, 173-175쪽.菩薩戒經云 我本源自性淸淨 識心見性 自成佛道 卽時豁然 還得本心.
[124] ‘본래의 마음(本心)’이 자성(自性)을 뜻하는 말임은 다음 글을 미루어 보아도 알 수 있다. 금강경, 이 한 권의 경이 중생의 자성 속에 본래 있으니, 스스로 보지 못하는 이는 다만 문자만 독송할 것이요, 만약 본래 마음을 깨치면 이 경이 문자 속에 있지 않음을 비로소 알지니라. 此一卷經 衆生性中本有 不自見者 但讀誦文字 若悟本心 始知此經 不在文字 無比 譯解, 금강경오가해, 불광출판부, 37-39쪽.
[125] 성철 편역(1967): 《돈황본 육조단경》, 장경각, 경남 합천군, 227-228쪽.
[126] 네이버 한자사전, http://hanja.naver.com/
[127] Jung C. G.(1954): “Transformation Symbolism in the Mass”, Psychology and Religion: West and East, C.W. 11, p. 259.
[128] 이부영, 자기와 자기실현, 한길사, 58쪽.
[129] 아니엘라 야훼 엮음(이부영 옮김), C. G. 융의 회상, 꿈, 그리고 사상, 집문당, 1989, 223-224쪽.
[130] 一切萬法 盡在自身心中 何不從於自心 頓現眞如本性 성철 편역(1967): 《돈황본 육조단경》, 장경각, 경남 합천군, 174-175쪽.
[131] 이기영, 불교개론 강의 상권, 한국불교연구원, 1998, 145쪽.
[132] 이기영, 불교개론 강의 상권, 146-147쪽.
[133] 自身心中에서 身이라는 글자는 宗寶本 육조단경(故知 萬法盡在自心 何不從自心中 頓見眞如本性 정병조 역해, 육조단경, 한국불교연구원, 64쪽)에는 없으며, 돈황본의 다음 구절에도 何不從於自心이라고 하여 역시 身이라는 글자가 없으므로 自身心中에서 身의 의미는 무시하고 自心中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그러나 심신(心身)을 진속불이(眞俗不二)의 관점에서 보면, 일체만법이 자신의 마음 속에도 있고 또한 몸으로도 나타나 있다고 이해할 수도 있다.
[134] 성철 편역(1967): 《돈황본 육조단경》, 장경각, 경남 합천군, 127-128쪽.善知識 我自法門 從上已來 皆立 無念爲宗 無相爲體 無住爲本何名無相 無相者 於相而離相 無念者 於念而不念無住者 爲人本性 念念不住 前念今念後念 念念相續 無有斷絶 若一念斷絶 法身 卽是離色身 念念時中 於一切法上無住 一念若住 念念卽住 名繫縛 於一切法上 念念不住 卽無縛也 是以無住爲本
[135] 宗과 體와 本을 네이버 한자사전에서 뜻을 찾아보면, 공통적으로 ‘근본’이라는 항목이 있어서 宗과 體와 本의 뜻풀이를 모두 ‘근본’이라고 하였다.
[136] 道須通流 何以却滯 心不住在 卽通流 住卽被縛 성철 편역(1967): 《돈황본 육조단경》, 장경각, 경남 합천군, 123-124쪽.
[137] 성철 편역(1967): 《돈황본 육조단경》, 장경각, 경남 합천군, 131-132쪽. 眞如是念之體 念是眞如之用 自性起念 雖卽見聞覺知 不染萬境而常自在 維摩經云 外能善分別諸法相 內於第一義而不動
[138] Jung C. G. (1939): “Forward to Suzuki’s Introduction to Zen Buddhism”, Psychology and Religion: West and East, C.W. 11, pp. 542-543.
[139] 서산대사(원순 역해), 선가귀감, 2007, 법공양, 185쪽.
[140] ‘자성이 만법을 포함하는 것이 곧 큰 것이며 만법 모두가 다 자성인 것이다.’ 성철 편역, 돈황본 육조단경, 장경각, 160쪽.
[141] 성철 편역(1967): 《돈황본 육조단경》, 장경각, 경남 합천군, 127-128쪽. 無住者 爲人本性 念念不住 前念今念後念 念念相續 無有斷絶 若一念斷絶 法身 卽是離色身 念念時中 於一切法上無住 一念若住 念念卽住 名繫縛 於一切法上 念念不住 卽無縛也
[142] 무비 역해, 금강경오가해, 불광출판부, 157-158쪽.色身卽有相 法身卽無相色身者 四大和合 父母所生 肉眼所見法身者 無有形段 非有靑黃赤白 無一切相貌 非肉眼能見 慧眼乃能見之
[143] 무비 역해, 금강경오가해, 159쪽.
[144] 성철, 백일법문 上, 장경각, 256쪽.
[145] 성철 편역(1967): 《돈황본 육조단경》, 247쪽.法性起 六識 眼識 耳識 鼻識 舌識 身識 意識 六門 六塵 自性 含萬法 名爲含藏識 思量卽轉識 生六識 出六門 見六塵 是三六十八 由自性邪 起十八邪 含自性正 起十八正 含惡用卽衆生 善用卽佛 用由何等 由自性對
[146] 성철, 백일법문 상, 장경각, 271-273쪽.
[147] 융 C. G.(한국융연구원 번역위원회 역)(2002): “어린이 원형의 심리학에 관하여”, 《원형과 무의식》, C. G. 융 기본저작집 2, 솔, 서울, 269-270쪽.
[148] 잠재적 상태를 현재적 상태로 실현한다는 의미, 목적을 자체 내에 가지고 있는 것으로, 발전과 완성을 성취시키는 유기체 내부에 있는 힘-융 기본저작집의 역주.
[149] 융 C. G.(2002): “어린이 원형의 심리학에 관하여”, 《원형과 무의식》, C. G. 융 기본저작집 2, 솔, 서울, 253-254쪽.
[150] C. G. 융 기본저작집 2, 264쪽.
[151] C. G. 융 기본저작집 2, 266쪽.
[152] 성철, 백일법문 上, 장경각, 78쪽.
[153] C. G. 융 기본저작집 2, 240쪽.
[154] C. G. 융 기본저작집 2, 243쪽.
[155] C. G. Jung, Child Development and Education, C.W. 17, p. 50.
[156] C. G. Jung, Child Development and Education, C.W. 17, p. 52.
[157] C. G. Jung, Child Development and Education, C.W. 17, p. 53.
[158] 융이 말하는 개성(個性)은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것과는 다른 뜻으로 사용된다. 융이 말하는 개성(individuality)은 선험적으로 미리 정해진 것으로서 무의식 상태에 있다가 개성화과정을 통해서 의식화된다. 무의식에 존재하는 개성은 개인이 그만의 독특한 사람이 되도록 하는 본성이다. 일반적인 불교학에서 불성(佛性)이라고 부르는 것을 혜능은 자성(自性)이라고 부른다. 자성(自性)에서 ‘자(自)’라는 것은 배타적이며 독자적 의미가 있으므로 자성은 구체적인 인성(人性)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러므로 융의 개성은 혜능의 자성에 해당되고 융의 자기(Self)는 불성에 가깝다고 할 수 있겠으나 어떻게 이름을 붙이든지 모두 같은 것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By individuality I mean the peculiarity and singularity of the individual in every psychological respect. If the individuality is unconscious, there is no psychological individual but merely a collective psychology of consciousness. The psychic individuality is given a priori as a correlate of the physical individuality, although, as observed, it is at first unconscious. A conscious process of differentiation or individuation is needed to bring the individuality to consciousness. (C. G. Jung, Definitions, C.W. 6.)
[159] C. G. Jung, Child Development and Education, C.W. 17, p. 54.
[160] 법신(法身)은 천연(天然)의 진리이고 우주의 본체라는 뜻으로, ‘법신불’을 달리 이르는 말.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
[161] 원택(2016): “큰 스님의 천진불들”. 《성철 스님 시봉 이야기》. 전자책, 장경각.
[162] 성철, 백일법문 上, 장경각, 266쪽.
[163] 성철, 백일법문 上, 장경각, 248-249쪽.
[164] 성철, 백일법문 上, 장경각, 268-269쪽.
[165] 성철, 백일법문 上, 장경각, 269쪽.
[166] 성철, 백일법문 上, 장경각, 319쪽.
[167] C. G. Jung, Child Development and Education, C.W. 17, p. 55-56.
[168] 융 C. G.(2004): “인격의 형성”, 《인간과 문화》, C. G. 융 기본저작집 9, 솔, 서울, 12-15쪽.
[169] C. G. Jung, Child Development and Education, C.W. 17, p. 59.
[170] 음행(淫行), 투도(偸盜), 살인(殺人), 대망어(大妄語) 등 네 가지의 파계에 대하여 가해지는 ‘교단추방’이라는 벌칙을 사바라이(四波羅夷)라고 한다.
[171] 출가 수행자인 비구(남성)와 비구니(여성) 그리고 재가 신자인 우바새(남성)와 우바이(여성)을 사부대중(四部大衆)이라고 한다.
[172] 백도수, 불교에 나타난 자살에 대한 고찰, 인도철학, vol.11 no.2 (12), 2002, 208-210쪽.
[173] 성철, 백일법문 上, 장경각, 87쪽.
[174]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 http://stdweb2.korean.go.kr
[175] 열흘 동안 붉은 꽃은 없다는 뜻으로, 한 번 성한 것이 얼마 못 가서 반드시 쇠하여짐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
[176] 성철, 백일법문 上, 장경각, 78쪽.
[177] 성철 편역(1967): 《돈황본 육조단경》, 장경각, 경남 합천군, 251-252쪽.
[178] 오취(五趣); 오도(五道). 중생이 선악의 원인에 의하여 윤회하는 여섯 가지의 세계인 삼악도와 삼선도(三善道)를 통틀어 이르는 말인 육도(六道) 중에서 인간도(人間道)를 뺀 나머지.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
[179] 잡아함경 제15권 > 406. 맹구경(盲龜經), 한글대장경, 불교학술원, 동국대학교.
[180] 융 C. G.(한국융연구원 번역위원회 역)(2006): “어머니로부터 해방되기 위한 투쟁”, 《영웅과 어머니 원형》, C. G. 융 기본저작집 8, 솔, 서울, 198-199쪽.
[181] C. G. 융 기본저작집 8, 221-222쪽.
[182] 성철 편역(1967): 《돈황본 육조단경》, 장경각, 경남 합천군, 174-175쪽.一切萬法 盡在自身心中 何不從於自心 頓現眞如本性
[183] 성철 편역(1967): 《돈황본 육조단경》, 장경각, 경남 합천군, 127-128쪽. 善知識 我自法門 從上已來 皆立 無念爲宗 無相爲體 無住爲本何名無相 無相者 於相而離相 無念者 於念而不念無住者 爲人本性 念念不住 前念今念後念 念念相續 無有斷絶 若一念斷絶 法身 卽是離色身 念念時中 於一切法上無住 一念若住 念念卽住 名繫縛 於一切法上 念念不住 卽無縛也 是以無住爲本
[184] 이부영(2011): 《분석심리학》 제3판, 96-100쪽.
[185] 진여(眞如)의 반대말.
[186] 성철, 백일법문 上, 장경각, 268-269쪽.
[187] 이부영(2011): 《분석심리학》 제3판, 86-93쪽.
[188] 이부영(2011): 《분석심리학》 제3판, 102-103쪽.
[189] 융 C. G.(한국융연구원 번역위원회 역)(2004): “자아와 무의식의 관계”, 《인격과 전이》, C. G. 융 기본저작집 3, 103-104쪽.
[190] C. G. Jung, Dream Analysis, Princeton University Press, pp. 52-53.
[191] 융 C. G.(한국융연구원 번역위원회 역)(2002): “집단적 무의식의 원형에 관하여”, 《원형과 무의식》, C. G. 융 기본저작집 2, 솔, 서울, 153쪽.
[192] 융 C. G.(한국융연구원 번역위원회 역)(2004): “자아와 무의식의 관계”. 《인격과 전이》. C. G. 융 기본저작집 3, 124쪽.
[193] 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이기영 역해. 반야심경 금강경. 한국불교연구원, 173쪽.
[194] 성철. 백일법문 상. 장경각, 271-273쪽.
[195] 성부(聖父)와 성자(聖子)와 성령(聖靈)의 삼위가 일체인(三位一體)의 하느님.
[196] 융, 미사에서의 변환의 상징, C. G. 융 기본저작집 4, 226-227쪽.
[197] 융, 미사에서의 변환의 상징, C. G. 융 기본저작집 4, 246-247쪽.
[198] 한글대장경, 육도집경, 제5권, 44, 동국대학교 불교학술원.
[199] 이기영 역해, 반야심경 금강경, 한국불교연구원, 1997, 243쪽.
[200] C. G. Jung, Dream Analysis, Princeton University Press, pp. 467-468.
[201] 융, 자아와 무의식의 관계, 인격과 전이, C. G. 융 기본저작집 3, 162쪽.
[202] 카를 구스타프 융과 분석심리학에 대한 소개는 이부영(2011): 《분석심리학》 제3판, 15-57쪽에서 인용하였다.
[203] 아니엘라 야훼(이부영 역), C. G. Jung의 回想, 꿈 그리고 思想, 집문당.
[204] Jung C. G.(1939): “Forward to Suzuki's Introduction to Zen Buddhism”, C.W. 11, Psychology and Religion: West and East, p. 538.
[205] 삼처전심(三處傳心); “한번은 인천(人天) 백만 대중이 법문을 듣기 위해 좌정하고 있을 때, 제석천왕(帝釋天王)이 부처님께 우담바라꽃을 올리니 부처님께서 그 꽃을 받아서 아무 말 없이 대중에게 보이셨다. 한번은 부처님께서 법문을 설하기 위해서 법상에 좌정해 계시다가 자리의 반을 비켜 앉으셨다. 가섭존자가 부처님의 그 뜻을 알고는 선뜻 그 자리에 가서 앉으니, 부처님께서 가사를 같이 두르시고 대중에게 말없이 보이셨다. 그리고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신 지 일주일 후에, 교화(敎化)를 위해 타방(他方)에 가 있던 가섭존자가 돌아와서… 칠푼 두께의 금관 속에서 두 발이 쑥 나왔다…” 진제, 돌사람 크게 웃네. 백광. 부산. 1993, 395-397쪽.
[206] Jung C. G.(1939): “Forward to Suzuki’s Introduction to Zen Buddhism”. C.W. 11, Psychology and Religion: West and East. pp. 539-540.
[207] 이 책의 ‘이성이란 무엇인가?’에서 자세히 설명하였다.
[208] 스즈키의 책이 처음으로 발간된 것이 1939년이다.
[209] Jung C. G.(1939): “Forward to Suzuki’s Introduction to Zen Buddhism”. C.W 11, Psychology and Religion: West and East. pp. 541-542.
[210] 성철 편역(1967): 《돈황본 육조단경》, 162-163쪽.何名波羅蜜 此是西國梵音 言彼岸到 解義離生滅 著境生滅起 如水有波浪 卽是於此岸 離境無生滅 如水承長流故卽名到彼岸 故名波羅蜜
[211] 융, 꿈의 심리학에 관한 일반적 관점, 정신요법의 기본문제, C. G. 융 기본저작집 1, 153쪽, 155쪽.
[212] 이부영(2011): 《분석심리학》 제3판, 209쪽.
[213] C. G. Jung, Commentary on “The Secret of the Golden Flower”, Alchemical Studies, C.W. 13, pp. 20-21.
[214] 성철 편역, 육조단경, 245-253쪽.若有人問法 出語盡雙 皆取法對 來去相因 究竟二法盡除 更無去處......由自性邪 起十八邪 含自性正 起十八正 含惡用卽衆生 善用卽佛 用由何等 由自性對......暗不自暗 以明故暗 暗不自暗 以明變暗 以暗現明 來去相因
[215] C. G. Jung, On Psychic Energy, The Structure and Dynamics of the Psyche, C.W. 8, p. 32-33.
[216] 융 C. G.(한국융연구원 번역위원회 역)(2002): “집단적 무의식의 원형에 관하여”, 《원형과 무의식》, C. G. 융 기본저작집 2, 솔, 서울, 143쪽.
[217] 정병조 역해, 육조단경, 36쪽.
[218] 이기영 역해, 반야심경 금강경, 한국불교연구원, 1997, 211쪽. 是故 須菩提 諸菩薩摩訶薩 應如是生淸淨心. 不應住色生心. 不應住聲香味觸法生心. 應無所住 而生其心.
[219] 이기영 역해, 반야심경 금강경, 210쪽.
[220] C. G. Jung, Defintions, Psychological Types, C.W. 6, p. 474.
[221] 누미노줌(Numinosum 神聖力)이란 의지의 힘이 미치지 않는 곳에서 생기는 하나의 동적인 존재 혹은 작용이다. 누미노줌의 작용은 인간 주체를 사로잡고 지배하며, 인간은 그것을 만들어 낸 자라기보다 오히려 그것의 제물이며, 그것은 인간의 의지에 구애받지 않는, 인간 주체의 ‘조건’이다. 누미노줌은 눈에 보이는 객체의 성질이거나 보이지 않고 현존하는 것의 영향이며, 의식의 특수한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것이다. 이부영(2011): 《분석심리학》 제3판, 343쪽.
[222] C. G. 융 저작 번역위원회 옮김, 연금술의 종교심리학적 문제 서론, 꿈에 나타난 개성화과정의 상징, C. G. 융 기본저작집 5, 14-15쪽.
[223] 융, 실제 정신치료의 기본원칙, 정신요법의 기본문제, C. G. 융 기본저작집 1, 솔, 13쪽.
[224] 융, C. G. 융 기본저작집 1, 16쪽.
[225] 융, C. G. 융 기본저작집 1, 19쪽.
[226] 董群(김진무 역), 祖師禪, 운주사, 2000, 92쪽.
[227] 성철 편역, 육조단경, 205쪽. 常現在己過 與道卽相當
[228] 이부영(2011): 《분석심리학》 제3판, 86-93쪽.
[229] 성철 편역, 육조단경, 280-281쪽. 眞如淨性是眞佛 邪見三毒是眞魔邪見之人 魔在舍 正見之人 佛則過性中邪見三毒生 卽是魔王來住舍正見自除三毒心 魔變成佛眞無假
[230] 석존이 성도(成道)할 때에 욕계를 지배하는 제6타화자재천(他化自在天)의 마왕 파순(波旬, pāpiyas)이 그의 권속들을 거느리고 와서 성도를 방해함에 신통력으로 이들을 모두 항복받았다고 한다.
[231] 탐욕(貪欲)과 진에(瞋恚)와 우치(愚癡), 곧 탐내어 그칠 줄 모르는 욕심과 노여움과 어리석음. 이 세 가지 번뇌는 열반에 이르는 데 장애가 되므로 삼독(三毒)이라 한다.
[232] 종교에서 ‘신’이라고 부르거나 최고의 진리로 삼는 상들은 자기원형상(自己原型像)들이다. ‘신’이라든가 ‘도(道)’ 또는 ‘불성(佛性)’ 부처나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여러 가지 인격상들… 이부영(2011): 《분석심리학》 제3판, 131쪽.
[233] 이부영(2011): 《분석심리학》 제3판, 87, 93, 95쪽.
[234] Jung C. G.(1952): CW 11, “Foreword to Werblowsky’s Lucifer and Prometheus”, Psychology and Religion: West and East, Routledge & Kegan Paul, London, p. 315.
[235] 성철 편역, 육조단경, 282쪽. 婬性本身淸淨因 除婬卽無淨性身性中但自離五欲 見性刹那卽是眞
[236] 고대 인도의 불교에서는 일체의 존재는 오온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생각하였다. 물질적 현상으로 존재하는 것, 수(受)는 감각 작용, 상(想)은 표상(表象), 행(行)은 작위(作爲), 식(識)은 외계의 사물을 식별하는 작용, 육식(六識)을 뜻한다. 이기영 번역, 반야심경 금강경, 한국불교연구원, 44, 46쪽, 50-5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