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의 발견

 

 

 

 

차 례

 

   

 

 

머리말

 

제 1 장 각성

제 2 장 인간관에 대하여

제 3 장 인간적인 것

제 4 장 누가 인생을 즐겁게 보낼 수 있는가 ?

제 5 장 인생의 향연

제 6 장 유유자적한 생활에 대하여

제 7 장 가정의 즐거움

제 8 장 생활의 즐거움

제 9 장 자연의 즐거움

제 10 장 교양의 즐거움

제 11 장 신에 가까운 자

제 12 장 사고방식

 

가난 속에서 스스로 창조하는 기회를 찾으라 ( 초청강연 )

후 기

 

  

 

 

 

 

머리말

 

 

이 책은 사랑과 인생에 대한 나의 체험을 서술한 나 개인의 증언이다 . 그러므로 객관적인 입장에서 쓴 것은 아니다 . 또한 영구불변의 진리를 주장하려는 것도 아니다 . 실은 나는 철학의 객관성을 멸 시하고 있다 . 객관적 진리보다도 사물을 어떤 관점에서 보고 생각하 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줄로 안다 .

서정시적이라는 말이있다 . 나는 이 말을 개성이 강한 독자적인 견해라는 뜻으로 간주하여 , 이 책을 “ 서정철학” 이라고 부르고 싶다 . 그러나 그것은 너무 아름다운 이름인 듯싶어서 쓰지 않기로 했다 . 너무 높은 곳을 노리면 독자들이 지나친 기대를 갖게 될지도 모르는 데다가 내 사상을 구성하고 있는 주요 골자는 서정시적인 것이 아니라 평범한 산문으로 되어서 , 자연스럽고 쉬운 글이므로 누구나 쉽사 리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 너무 높은 곳을 쳐다보지 않고 이처럼 낮은 곳에서 땅을 딛고 , 흙투성이가 되어 버려도 만족한다 . 내 마음은 흙과 모래 속에 묻혀 즐겁게 뛰노는 것만으로도 행복을 느낄 수 있다 . 이 지상의 생활에 도취될 때 , 방금 날개라도 돋쳐 하늘로 날 아오르게 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마음이 경쾌해지는 수가 더러 있 지만 실상 우리들의 육신은 땅 위에서 6 척도 떨어져 있는 일이 별 로 없는 것이다 .

나는 이 책을 전부 플라톤의 『 대화편』식으로 써 볼까 하는 생각도 해 보았다 . 그런 형식은 두서없이 사사로운 이야기를 하거나 , 혹은 평소의 생활에서 일어나는 일 가운데서 무슨 뜻있는 듯싶은 이야기를 적거나 할 때에 편리한 형식이다 . 특히 아름답고 조용한 사상의 풀밭 을 이리저리 거닐 때에는 더욱 그러할 것이다 . 그러나 웬일인지 나는 그런 형식을 취하고 싶지 않았다 . 그 이유는 나도 잘 알 수 없다 . 아 마 그런 형식을 취한 글은 오늘날 별로 눈에 띄지 않으며 독자들도 환영하지 않으리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 저자는 무엇보다 도 자기 책이 많이 읽히기를 바란다 .

그런데 내가 말하는 대화란 신문에 기재되는 회견기사의 문답 같 은 것도 아니고 많은 절로 나누어진 논설 같은 것도 아니다 . 내가 말하는 대화는 하나의 글이 몇 페이지고 죽 계속되며 , 재미있게 주고받는 한가한 담화를 뜻한다 . 그리하여 그 글은 멀리 돌아가는 경우도 있지만 갑자기 지름길로 빠져 처음의 논점으로 되돌아오는 경우도 있는 그러한 종류의 것이다 . 마치 담을 넘어서 먼저 집으로 돌아와 나중에 돌아오는 동행한 친구들을 놀라게 하는 식의 글 말이다 . 나는 뒷담을 넘어서 집으로 돌아오거나 샛길을 거닐거나 하는 것을 무척 즐긴다 . 내 친구들은 내가 집에 돌아오는 길을 비롯하여 그 근처의 시골 지리에 밝다는 것을 인정해 줄 것이다 . 그러나 나는 굳이 그런 짓을 하고 싶지 않다 .

이 책에는 독창적인 것은 없다 . 여기서 말하고 있는 사상은 동서의 많은 사상가들이 몇 번이나 생각하고 또 서술한 것들이다 . 특히 동양에서 빌어온 것은 이미 낡아빠진 진리이다 . 한편 그럼에도 불구 하고 그것은 나의 사상이기도 하다 . 그 사상은 이미 내 몸의 일부가 되어 있는 것이다 . 그것이 내 머리 속에 뿌리를 박았다면 본래 내 안에 그런 독창적인 요소가 있어 받아 들였기 때문이며 처음에 내가 그런 사상에 접했을 때 본능적으로 찬성의 뜻을 표했기 때문이다 . 그러므로 나는 그 사상을 존경하고 사랑한다 . 그것은 결코 그 사상을 피력한 인물의 가치 때문이 아니다 . 실상 나는 남의 책을 읽을 때에도 저술을 할 때와 마찬가지로 지름길을 지나왔었다 .

이 책에 인용한 저자들은 거의가 무명 인사들로서 중국문학 교수 들은 별로 기억하고 있지 않을 것이다 . 가끔 유명한 사람의 이름도 등장하지만 그것은 그들의 사상을 직접 인용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인용한 것이지 결코 그 저자가 유명해서가 아니다 . 이름도 없는 싸구려 헌 책을 사들여 그 속에 혹시 숨은 보배라도 있지 않을까 싶어 뒤져 보는 것이 나의 버릇이 되어 있다 . 만일 문학 교수들이 내 사상의 출처를 안다면 “ 이런 속물이 어디 있나 ! ” 하고 어이없어 할 것이다 . 그러나 보석상의 진열장에서 커다란 진주를 구경하는 것보다 쓰레기통 속에서 작은 진주를 찾아내는 것이 더욱 즐거운 일이 아니 겠는가 .

나는 심오한 사상가가 아니며 또 박식하지도 못 하다 . 책을 너무 많이 읽으면 옳은 것과 그른 것을 분명히 분간할 수 없게 된다 . 나 는 로크나 흄이나 버클리와 같은 철학자들의 책을 아직 읽지 못 하였 다 . 그리고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한 것도 아니다 . 전공이란 관점에 서 말하면 내가 닦은 학문의 방법과 수련은 그릇된 것이었다 . 나는 철학서적을 읽지 않고 직접 인생 자체를 읽는 데 그쳤기 때문이다 . 그것은 철학연구치고는 파격적이라고 볼 수밖에 없으므로 그릇된 방 법이다 . 여기 내가 지닌 철학지식의 출처를 몇 가지 예로 들어 이야 기하려고 한다 . 우선 우리 집 가정부인 황 씨 부인―그녀는 중국 양 가집 딸로서 가정교육도 남만큼 받은 여인이며 이해력도 넓은 편이 다 . 그리고 입이 사나운 중국 소주의 여자 뱃사공 , 상해의 전차 차 장 , 우리 집 요리인의 마누라 , 동물원의 새끼사자 , 뉴욕 중앙공원의 다람쥐 , 한때 그럴 듯한 비평을 하던 저 유명한 천문란의 필자 (10 년 전쯤에 사망하였음 ), 신문 매점에 들어온 온갖 뉴스 , 이밖에 인생에 대한 우리들의 호기심과 자기 자신의 호기심을 억제하지 않으려는 작가라면 다 좋다 . 그러나 그것을 일일이 적자면 끝이 없다 .

이와 같이 나는 철학에 대하여 학문적인 수련을 쌓지 못 하였다 . 그러니까 철학책을 쓰는 것을 누구보다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 순수 한 철학자란 무엇이든지 어렵게 말하려고 든다 . 그러므로 그러한 철 학을 그만두고 거기서 온 폐단을 보상할 생각을 한다면 무슨 일이든 지 분명하게 , 그리고 단순하게 눈에 보이게 마련이다 . 하긴 과연 그렇게 잘 될는지 의문이 아닐 수 없다 . 세상 사람들은 내 철학적인 토대에 대하여 이러니저러니 말이 많을 것이다 . 즉 내가 사용하는 용어가 정통적인 철학자처럼 깊지가 못 하느니 , 사물을 너무나 쉽게 다루느니 , 혹은 진중한 맛이 없느니 , 신성한 철학의 전당에 들어와 서도 나지막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점잖게 걷지 않는다느니 , 혹은 적당히 엄숙한 표정을 짓지 않는다느니 등등 여러 가지로 트집을 잡으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 근대 철학자들에게서 가장 찾아보기 어려운 미덕은 용기가 아닌가 싶다 . 나는 언제나 철학의 성역 밖에 서 서성거렸기 때문에 그것이 나에게 용기를 가져다 주었다 . 감히 말 하노니 여기에 자기의 직감적인 판단에 의지하는 하나의 방법이 있 는 것이다 . 즉 자기 자신의 사상을 생각해 내고 , 독특한 판단을 내리고 , 어린아이처럼 자연스럽게 세상에 발표하는 그런 방법 말이다 . 아마 세계 어느 곳엔가 나와 같은 생각을 갖고 내 견해에 찬동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 이렇게 자기 사상을 엮어낸 사람은 다른 저 자들이 이러니저러니 하고 논란 하지만 , 결국은 자기와 같은 소리를 하고 자기와 같이 사물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알고 놀랄 때가 있을 것이다 . 그러나 필경 더 쉽고 더 아름답게 표현하는 방법도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 이런 경지에 들어서야만 비로소 옛사람을 발견하게 되며 옛사람은 그를 인정하여 , 양자는 마음의 벗으로 영원히 맺어지 게 되는 것이다 .

이리하여 나는 많은 옛사람 , 특히 중국 고대의 마음의 벗들에게 적지 않은 신세를 지게 되었다 . 그러니까 이 책에는 고대의 많은 협 조자가 있었던 것이다 . 그들은 저마다 친절한 사람들이므로 나는 깊 은 호감을 갖고 있다 . 그들도 나에게 호감을 가질 것이다 . 그들의 마음은 언제나 나와 함께 있었기 때문이다 . 이것이야말로 내가 진심 으로 이상적이라고 생각하는 정신교육의 유일한 형식이다 . 생각건대 두 사람의 인간이 오랜 세월의 차이가 있으면서 같은 생각을 하고 같은 느낌을 갖고 피차 상대방을 완전히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 또 한 이 책을 서술함에 있어서 나를 가르쳐 주고 나에게 조언을 해 주 고 여러모로 힘이 되어 준 몇몇 마음의 벗이 있다 .

즉 8 세기의 백낙천 , 11 세기의 소동파 , 16 세기와 17 세기에 걸쳐 독창적인 사상을 가졌던 여러 인물들 , 그리고 낭만적이고 달변이었 던 도적수 ( 屠赤水 ) , 익살을 잘 부리고 독창성이 많던 원중랑 ( 袁 中 郎 ), 심오하고 웅대한 사상을 지녔던 이탁오 ( 李卓吾 ), 민감한 궤변 가 장조 ( 張潮 ) , 쾌락파에 속하는 이립옹 ( 李笠翁 ) , 유쾌하고 명랑하 던 늙은 쾌락주의자 원매 ( 袁枚 ) , 허풍을 잘 떨고 유머러스하고 흥분을 잘 하던 김성탄 ( 金聖嘆 ) ―저마다 어떤 언습에 매이지 않은 인물 들로 독창성이 풍부하고 다감하였기 때문에 정통적인 철학 비평가들 에게는 호감을 얻지 못 하였다 . 그리고 유학자들의 눈엔 도덕적이라 고 보기에는 너무나 선량하고 , 선량하다고 보기에도 너무나 선량한 사람들로 보였다 . 몇 명 되지 않는 훌륭한 인물들이라 , 이들의 출현 에 대한 후세 사람들의 기쁨도 클 것이다 . 그러므로 그들의 가치는 올바로 재평가되어야 한다 . 이런 사람들 축에 속하는데 이 책에 그 이름이 오르지 못 한 분도 있을지 모르지만 , 그분의 정신만은 언제나 이 책 속에 맥맥이 흐르고 있는 것이다 . 그들이 중국에서 정당한 평가를 받을 날도 멀지 않았다 . 그들과 마찬가지로 이름이 세상에 알려져 있지 않으나 훌륭한 글을 써서 호감을 갖게 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 이들은 내가 말하려는 것을 그대로 대변하고 있는 것이다 .

나는 이들을 중국의 아미엘이라고 생각한다 . 입은 무겁지만 , 이 야기를 시작하면 언제나 센스가 풍부하다 . 나는 그 센스에 경의를 표한다 . 그리고 어느 시대 , 어느 고장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유명한 아논 ( Anons ) 의 친구로 삼고 싶은 사람들도 있다 . 이들은 세상에 알 려지지 않은 위인의 아버지처럼 영감을 느끼면 자기가 지닌 지식 이 상의 말을 곧잘 한다 .

끝으로 지금까지 언급한 사람들보다 더 위대한 인물들이 있다 . 이 분들은 내 마음의 지기라기보다도 스승으로 우러러보는 처지로 , 인생과 자연에 대한 이들의 밝고 투명한 경지에는 인간미가 담뿍 풍긴 다 . 그리고 신성하고 자연히 우러나는 예지는 문자 그대로 순수하여 조금도 인위적인 자취를 찾아볼 수 없다 . 이런 인물에 장자 ( 莊子 ) 가 있고 도연명 ( 陶淵明 ) 이 있다 . 그 순박한 마음씨는 도저히 소인배들의 추종을 불허한다 . 나는 때때로 이들의 말을 독자에게 직접 인용 하였다 . 이것은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다 . 한편 내가 스스로 자기 의견을 말하는 것처럼 보일 때에도 실은 이 옛 철학자들의 말을 대 변하고 있는 것이다 . 그들과 사귈수록 그 사상에서 받은 은혜로 인 해 더욱 친밀해지며 , 부지불식간에 이들과 혼연일체가 되어 버린다 . 마치 훌륭한 가정에 풍기는 아버지의 감화와 같다고 할 수 있을 것 이다 . 그렇게 되면 나는 이러저러한 점이 아주 같다고 분명히 지적 할 수도 없게 된다 .

나는 또한 이 책에서 중국인으로서가 아니라 , 근대생활을 영위하 고 있는 근대인으로서 이야기하려고 애썼다 . 다시 말하면 옛사람들의 충실한 소개자로서 이야기할 뿐만 아니라 , 근대생활을 하는 가운 데 내가 체득한 것을 이야기하려고 하였다 . 이러한 태도에는 결함도 따르지만 대체로 말하면 한결 진지하게 일해 나가게 된다고 생각한 다 . 따라서 옛사람의 말에 대한 취사선택은 완전히 나의 재량에 의 한 것이다 . 그런데 나는 어느 시인이나 철학자의 전모를 이 책에 그리려는 생각은 추호도 없었으므로 여기 실린 글에 의해 옛사람을 판 단할 수는 없을 것이다 . 그러므로 나는 판에 박은 듯한 다음과 같은 말로 이 머리말을 끝낼 수밖에 없다 . 즉 , 이 책의 가치는 ( 만일 가치 가 있다면 ) 주로 내 마음의 벗의 귀띔에 의한 것으로 , 만일 내 판단에 그릇된 것이나 불완전한 것이나 미숙한 점이 있다면 그 책임은 오직 나에게 있는 것이다 .

끝으로 나는 이 책을 쓰도록 착상을 갖게 한 리처드 윌시 부부가 유익하고 솔직한 비평을 해준 데 대하여 감사하는 바이다 . 또한 원 고를 인쇄하기까지 필요한 여러 가지 준비와 교정에 협조해 주신 휴 웨이드 씨에게 감사하며 , 색인을 만들어 주신 릴리언 페프 양에게 사의를 표하는 바이다 .

 

뉴욕에서 임어당

 

 

 

 

 

 

 



 

 

1. 제 1 장 각 성

 

 

 

 

 

1. 인생의 길목에서

 

지금부터 나는 예로부터 우리 중국인들이 지녔던 사물에 대한 견 해를 생각해 보고자 한다 . 나로서는 독창적인 견해는 도저히 피력할 수 없기 때문이다 . 나는 다만 중국인 가운데서 가장 우수하고 총명 한 사람들의 눈에 비치어 그것이 민족적인 예지와 문학작품이 되어 나타난 인생관과 자연관에 대해 말하려는 것이다 . 그런데 그것은 먼 옛날에 어느 여유 있는 생활 속에서 우러난 당당한 철학임을 나는 잘 알고 있다 . 아무튼 그러한 인생관이야말로 본질적인 의미에서 참 된 인생관이며 , 어느 한 나라에서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게 한 것을 전 인류는 느낄 수 있다 . 인간이란 한 껍질 벗고 보면 누구나 그 바탕이 같은 것이다 . 나는 여기서 중국 시인이나 철학자들이 , 그들 의 상식과 현실주의와 시적 감동에 의해 파악한 중국인의 독특한 인 생관을 독자들에게 소개하려는 것이다 . 또한 저 이교도 ( 기독교도가 아닌 ) 의 세계에서의 어떤 아름다움 , 즉 인생의 희로애락의 감정을 그 려보고자 한다 . 그런데 이 이교도적인 심미감은 동물로서의 인간이 별로 보잘것없음을 크게 느끼면서도 인간의 긍지를 잃지 않고 있는 것이다 .

중국 철학자란 한 쪽 눈을 뜬 채 꿈을 꾸는 사람들이다 . 그들은 사랑과 감미로운 야유로 인생을 살아간다 . 의심과 묵묵히 참고 따르 는 것을 혼합하여 인생의 꿈에서 깨었다 잠들었다 한다 . 그런데 이 들은 한결같이 깨어 있을 때보다 잠들어 있을 때에 사물을 더욱 생 생하게 느끼니 별일이다 . 그리하여 잠이 깨었을 때에도 꿈나라의 황 홀감을 그대로 지니려고 한다 . 그들은 신변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일이나 , 자기 노력이 헛된 것임을 한 쪽 눈은 감은 채 바라보고 있다 . 그렇다고 그런 현실을 살아가려는 결의까지도 잃어버리는 것은 아니다 . 인생에 대하여 무지개를 그리지 않으므로 환멸을 느끼는 일 도 적으며 , 큰 희망을 지니고 있지 않으므로 실망도 적다 . 그리하여 중국인들의 정신을 이러한 심경 속에 놓여 있는 것이다 .

나는 중국의 문학과 철학을 연구하여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하였다 . 즉 중국인들이 생각하는 교양의 최고봉은 언제나 현자라고 자 각하고 초연하게 인생을 살아가는 데 있다 . 이러한 심경에서 고매한 정신이 우러나는 것이다 . 그리고 이런 정신을 지닐 수 있기 때문에 그들은 세상을 거만하게 빈정대는 재미로 살며 부귀영화의 유혹에서 벗어나 나중에는 죽음도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이다 . 이 초연한 정신에서 자유나 방랑에의 애착이나 긍지와 유유자적한 마음이 생 기는 것이다 . 결국 우리네 중국인이 삶의 기쁨을 강렬히 느끼는 것은 오직 이러한 자유와 초탈한 정신의 소치이다 .

내가 여기서 말하는 철학을 서구 사람들이 긍정하느냐의 여부에 대하여는 개의치 않으려고 한다 . 서구 사람들의 생활을 이해하려면 완전히 그들의 위치에서 , 다시 말하면 그들의 심정과 육체적인 특징 과 감수성에서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 미국인은 중국인이 감당하 지 못 하는 여러 가지 어려운 일들을 견딜 수 있는 두터운 신경을 갖고 있다 . 그러나 이와 반대의 경우도 있다 . 즉 미국인이 갖지 못 하는 일을 중국인이 찾아내는 경우가 많다 .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는 각각 태생이 다르기 때문이다 .

그런데 이것은 상대적인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 . 분주하고 시끄러운 미국인의 생활 속에는 욕구불만이 적지 않으므로 그들도 한가 한 오후 같은 때에는 아름다운 나무 그늘이나 싱싱한 잔디 위에서 편히 쉬고 싶을 것이다 . 세상에서는 “ 일어나라 , 활동하라 ! ” 라고 외치지만 , 이렇게 외치는 것 자체가 인간답게 살기를 원하는 소수의 현 명한 미국인들이 하루에 몇 시간쯤은 꿈결 속에서 보내고 싶어 하는 증거일 것이다 . 결국 미국 사람 전체가 다 나쁘다고 할 수는 없다 . 다만 그들이 지금 내가 말한 소질을 다소라도 갖고 있는지 또 그런 식으로 살아나가려면 그들의 생활 자체를 어떻게 조절해야 하느냐가 문제인 것이다 .

그들은 세상 사람들이 모두 일하고 있는데 자기만 빈둥빈둥 놀고 있다는 핀잔을 듣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여 언제나 그렇게 분주히 서둘고 있는 것이다 . 나는 그들의 심정을 환희 들여다보고 있다 . 그러나 그들도 역시 하나의 동물이다 . 그러므로 사지를 펴고 푹 쉬고 싶을 때도 있을 것이며 잔디밭에 드러누워 팔베개를 벤 채 다리를 오그리고 한가하게 보내고 싶을 때도 있을 것이다 . 그렇다면 그들이 라고 해서 옛날의 안회 ( 顔回 ) 와 별로 다를 것이 없다 . 이분은 덕이 많은 분으로 공자의 그 많은 제자들 가운데서 특별히 칭찬을 받았던 것이다 . 그런데 인간은 어디까지나 정직하게 살아야 한다 . 일을 하 고 싶을 때에 일을 하되 진력이 나면 푸른 잔디밭 위에 누워 한가히 시간을 보내는 것도 좋을 것이다 . 이때야말로 “ 인생은 아름답다”고 마음속으로 느끼게 마련이다 . 나는 이 사실을 세상 사람들에게 강조하고 싶다 .

다음에 우리는 중국인들이 대체로 지니고 있는 철학이나 생활태도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 좋은 의미에서나 혹은 나쁜 의미에서나 이 세상에 중국인들이 지니고 있는 철학이나 생활태도와 유사한 것은 찾아볼 수 없을 것 같다 . 중국인은 특수한 사고방식에 의해 전혀 새 로운 인생관을 지니고 있다 . 무릇 모든 국민의 문화는 그들 정신의 산물이다 . 그러므로 서구문화 세계와는 인종적으로도 다르며 역사적 으로도 판이한 국민의 사고방식이 있을 수 있다면 우리는 인생문제에 대한 새로운 해답을 기대할 수 있다고 본다 . 또한 서로 상반되는 두 개의 정신세계를 접근시키는 새로운 방법이나 나아가서는 인생문제 자체를 다루는 새로운 방법을 구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

역사에 나타난 중국적인 사고방식 속에는 장점도 많지만 단점도 많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 그 속에는 빛나는 예술도 있지만 보잘 것 없는 과학도 찾아볼 수 있다 . 또한 건전한 상식이 있는가 하면 유치한 논리도 있다 . 인생에 대한 섬세하고 연약한 군말은 많 지만 학구적인 철학은 없다 . 그리하여 중국의 국민성은 현실적이고 빈틈이 없는 것으로 세상에 알려져 있다 . 그리고 중국예술의 애호가 들은 중국민족성에는 깊은 감수성이 깃들어 있다고 말하고 있다 . 또 극히 소수의 사람들은 시적이고 철학적인 깊은 정서가 있음을 인정한다 . 어쨌든 중국인은 사물을 철학적으로 생각하는 국민으로 알려 져 있다 . 이것은 중국에 위대한 철학이 있으며 따라서 몇 사람의 대 철학자가 있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다 . 어떤 국민이 몇 사람의 철학자를 갖고 있다는 것은 별로 보기 드문 일은 아니지만 사물을 철학적으로 생각한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 아무튼 중국인들을 한 국민으로서 생각해 볼 때 현실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철학적이라고 할 수 있다 . 설사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4,000 년이라는 오랜 세월에 걸쳐 능률적으로 생활의 고혈압을 능히 견디어 낸 국민은 오직 중국 사람뿐이다 . 그토록 오랫동안 그런 생활을 계속하 면 웬만한 국민들은 지쳐서 녹초가 될 것이다 . 이런 국민성을 가겼기 때문에 다음과 같은 큰 결과가 빚어진 것이다 . 즉 서구인들 가운 데는 정신병원에 상당한 인원이 입원하지만 중국에는 정신병자가 드 물어 오히려 이들을 소중히 생각하고 있는 형편이다 .

중국 문학을 좀 아는 사람이면 이러한 사실을 누구나 지적할 수 있다 . 내가 주목하고 있는 점은 바로 이것이다 . 그렇다 . 중국인이 태평스럽고 명랑한 철학을 갖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 그리고 그들이 철학적인 기질을 가장 뚜렷이 나타내고 있는 것은 현명하고 통쾌한 생활철학이다 .

 

 

2. 이 상적인 자유

정신적으로 동양과 서양의 혼혈아인 내가 보기에는 인간이 지니 고 있는 위엄은 인간이 금수와 다른 점에 있는 것이다 . 첫째로 인간 에게는 유희적인 호기심과 지식을 탐구하는 타고난 재질이 있다 . 둘째로 여러 가지 꿈과 높은 이상주의가 있다 ( 막연하여 꼬리가 얼른 잡 히지 않고 건방을 부리는 폐단이 있지만 어쨌든 대견하다 ) . 셋째로―한층 더 중요한 것이다―유머로 꿈을 수정하여 이상주의를 보다 건전한 현실주의로 억제할 수 있다 . 끝으로 인간은 환경에 기계적 , 획일적으로 반응하지 않고 자진하여 반응을 취하여 자기 의사대로 환경을 변화시키는 능력과 자유를 지니고 있다 .

이 맨 나중의 특질은 어떤 기계적인 법칙에 인간의 개성을 굴복 시킬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 아무튼 인간의 마음은 영원히 휘어 잡을 수 없고 파악하기 어려우며 예측하기 곤란한 까다로운 것이다 . 그리하여 머리가 돈 심리학자나 독신의 경제학자가 기계적인 법칙이 나 유물변증법을 인간에게 적용시키려고 하면 한사코 여기서 빠져나가려고 한다 . 역시 인간이란 기묘하고 꿈 많고 유머러스하고 뭐라고 종잡을 수 없는 동물이다 .

내가 쓴 『내 나라 , 내 국민』에서 내가 “ 능구렁이 철학자”들을 예 찬하였다는 것이 독자 여러분들의 인상인 것 같다 . 그러나 이 책에 서는 자유인을 예찬하는 일에 최선을 다한 것으로 생각해 주기를 바 란다 . 제발 그렇게 되었으면 한다 . 그런데 세상일은 얼른 생각하면 간단한 것 같지만 실은 그렇지가 않다 . 민주주의와 개인의 자유가 위협을 받고 있는 현대를 살아가면서 , 잘 순종하게 조직적 , 획일적으로 훈련된 노무자들 틈에 끼어 공정가격대로 취급되는 신세를 면 하려면 오직 자유인이 되어 자유를 옹호하는 정신을 굳게 지니고 있어야 한다 .

독재자에게 가장 두려운 인간은 이 자유인이다 . 이들이야말로 인간의 존엄성과 개인의 자유를 옹호하는 투사이며 끝까지 압제를 거 절하는 사람으로 , 현대 문명의 발달은 오로지 이들의 두 어깨에 달 려 있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

조물주가 맨 처음 이 땅에 창조한 인간은 발랄한 자유인이었다 . 그런데 그 발랄한 자유인은 필경 귀찮은 존재였을 것이다 . 그래도 인간에게 이런 자유로운 성격은 최대의 보물이 아닐 수 없다 .

어쨌든 조물주가 처음에 창조하신 인간은 발랄한 젊은이로 , 아직 갈피를 잡을 수 없고 정신을 차리지 못 하여 자기를 과대평가하기가 일쑤였다 . 그리하여 자기가 위대하고 현명한 인간이라는 자부심을 갖고 유흥을 즐기며 자유롭고 방탕한 생활을 사랑하였으나 이 자유 인에게는 많은 장점도 있었다 . 그러므로 조물주는 아직도 그에게 희 망을 걸고 있을 것이다 . 그것은 마치 세상 아버지들이 , 나이가 스물 이 넘어 건장하기는 하나 난봉기가 있는 자식에게 희망을 갖고 있는 것과 같다 . 조물주는 때가 되면 스스로 기꺼이 은퇴하여 우리의 지배권을 그 자식에게 넘겨 주지나않을까 … .

나는 한 중국인의 입장에서 말하거니와 , 어떠한 문명이라도 인공에 서 자연으로 나아가 의식적으로 순박한 생각을 하며 순박한 생활로 돌아가기 전에는 완전한 문명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 또한 누구나 현자의 지혜를 터득하고 나서 어리석은 사람의 슬기까지 익혀 , 먼저 인생의 비극을 뼈아프게 느낀 연후에 인생의 희극을 체득하여 웃는 철학자가 되기 전에는 그를 현명하다고 보지 않는다 . 우리는 웃기 전에 우선 울어야 한다 . 슬픔에서 깨닫는 바가 있는 , 그 깨달음에서 온 정과 관용을 아울러 지닌 철학의 너털웃음이 우러나는 법이다 .

세계는 매우 엄숙한 것이다 . 그런 까닭에 우리에게는 현명하고 명 랑한 철학이 있어야 한다 . 니체의 말을 그대로 인용한다면 , 중국인 의 생활철학이야말로 “ 명랑한 과학”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요컨 대 명랑한 철학이 곧 심원한 철학이다 . 서구식의 엄숙한 철학은 인생이 무엇인지 처음부터 전혀 이해하고 있지 않은 것이다 . 내 개인의 생각으로는 철학의 유일한 기능은 돈푼이나 있는 이 세상의 일반 장사꾼들이 생각하고 있는 것보다도 더 가볍고 명랑하게 인생을 이 해시키는 데 있다고 본다 . 무슨 소리냐 하면 나이가 50 이 되어도 은퇴하려 들지 않고 돈벌이에 눈이 어두운 장사꾼은 아무래도 철학 자로는 보이지 않으니 말이다 . 이것은 우연히 떠오른 생각이 아니라 뿌리 깊은 생각이다 . 우리는 이 가볍고 명랑한 정신에 젖었을 때에 만 평화롭고 온전한 생활을 즐길 수 있을 것이다 . 현대인은 인생을 너무 엄숙하게 생각한다 . 그런 까닭에 이 세상의 귀찮은 일만 눈에 띈다 . 우리는 인생을 참으로 즐기고 마음이 좀 더 온전하고 평화롭고 또 침착하게 되는 방도를 생각할 필요가 있다 .

이러한 견해는 아마도 어느 한 학파의 철학이라고 하기보다는 모 든 중국인의 철학이라고 부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 이것이야말로 공자나 노자보다도 더 위대한 철학이다 . 이 철학은 공자나 노자 , 그 밖의 많은 옛 철학자들의 사상을 능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 이 철학은 모든 사상의 원천에서 흘러나와 하나의 전체적인 것으로 조화시킨 것이다 . 그리하여 그 모든 철학자들의 추상적인 예지의 요점을 간추려 현대인이라면 누구나 이해하고 가까이 할 수 있는 실제적인 생활방법을 창조해 낸 것이다 . 나는 중국의 문학과 철학을 통틀어 연구한 끝에 다음과 같은 명백한 결론에 도달할 수 있었다 . 즉 , 현자의 깨달음 과 인생의 향락을 존경하는 철학이야말로 중국의 문학 · 예술 · 철학을 일관하는 메시지이며 가르침이라는 것이다 . 그것은 곧 가장 끈덕 지고 가장 색다르고 가장 집요한 중국사상의 후렴이기도 한 것이다 .

 

 

 

 

 

 

 

 

제 2 장 인간관에 대하여

 

 

 

 

 

 1. 기독 교도 , 고대 그리스인과 중국인

 

인간관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 전통적인 기독교의 신학적 인간관 , 고대 그리스인의 기독교적 인간관 , 그리고 중국인의 도교적 , 유교적 인 인간관이 그것이다 ( 불교적인 인간관은 너무나 비관적이므로 여기서는 제외한다 ). 이 세 가지 인간관에 내포된 우화 같은 의미까지도 잘 음 미하여 보면 , 삼자 사이에는 큰 차이가 없다 . 더구나 발달된 생물학 적 , 인류학적 지식을 지니고 있는 현대인이 넓은 의미에서 해석해 보면 더욱 그 차이는 적어진다 . 그러나 본래는 각각 차이가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 전통적인 기독교적 인간관에 의하면 인간은 처음에 죄와 상관이 없는 완전한 존재로 다소 미련하기는 하지만 행복하게 창조되어 에덴동산에서 벌거벗고 살다가 이윽고 지식과 지혜가 생기 게 되자 그만 실낙원에 떨어져 인간에게 고난이 닥치게 되었다는 것이다 . 그 고난이란 남자는 이마에 땀을 흘리며 일을 해야 하고 여자는 아이를 낳는 고통을 받게 된 것이다 .

인간은 본래 죄를 떠난 완전한 존재였는데 오늘날과 같이 불완전 한 모양이 된 것을 설명하기 위해 새로운 허수아비를 내세웠다 . 그 것이 마귀라는 것이다 . 인간의 고질은 본성의 마음속에 살아 있는데 , 마귀는 주로 육신을 통해 간계를 부린다는 것이다 . 나는 기독교의 역사상 영혼이라는 것이 언제부터 생겨나게 되었는지 잘 모르지만 이것은 인간의 기능 이상의 역할을 하는 실체가―부속물이 아니라― 되어 있다 . 그런데 동물은 영혼을 갖고 있지 않으므로 인간과 구별 된다 . 즉 인간과 동물을 구별하는 것은 영혼의 유무에 달려 있다 . 이제 논리는 여기서 막다른 골목에 부딪치고 말았다 . 왜냐하면 우리는 마귀의 기원을 설명해야 하기 때문이다 .

중세의 신학자들은 스콜라 철학의 논리로써 이 문제를 해결하려 고 하다가 진퇴양난에 빠져 버렸다 . 즉 신이 아닌 마귀가 신에게서 나왔다고 할 수 없고 , 또 태초에 신이 아닌 마귀가 신과 같은 영원 한 존재로 있었다고 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 그리하여 궁지에 몰린 끝에 마귀는 천사가 타락한 것이라는 데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 그러나 이것은 악의 기원에 대한 속임수에 불과하다 ( 왜냐하면 거기 이 타락한 천사를 유혹한 다른 마귀가 이미 있어야하기 때문이다 ). 그러므로 이 해석에는 만족할 수 없으나 그냥 둘 수밖에 없었다―그런데 이런 견해에 입각하여 영혼과 육신을 교묘히 갈라놓고 있다 . 이 신 화적인 관념은 오늘날에도 널리 유력하게 행세하면서 인생과 그 행복에 대한 철학에 많은 영향을 주고 있는 것이다 .

이어서 속죄라는 관념이 생겼다 . 이 속죄는 어린 양으로부터 받는 것으로 되어 있는데 옛날에는 신은 찐 고기의 냄새를 좋아하기 때문 에 “ 희생을 바치지 않으면 인간의 죄를 용서하지 않는 것”으로 간주 하고 있었다 . 이 속죄란 인간의 모든 죄를 한꺼번에 용서받는 것이 며 , 이것으로 기독교의 교리가 완성되었다 .

기독교 사상에서 가장 기묘한 것은 “ 구원”의 사상이다 . 이것은 고 대의 쇠퇴기에서 발원하는 것으로 , 사후의 생명을 강조하는 행복론 또는 처세론이 구세 ( 救世 ) 의 문제로 발전하게 되었다 . 즉 부패와 혼 란 속에서 최후의 파멸에 이르게 마련인 현세에서 어떻게 하면 죽지 않고 영생을 누릴 수 있느냐 하는 것이 이 구원의 사상이다 . 그리하여 불사의 문제가 큰 중요성을 띠게 되었다 . 그런데 이것은 신께서 인간의 영생을 원치 않은 창세기의 기록과 모순된다 . 창세기를 보면 아담과 이브가 에덴동산에서 내쫓긴 것은 주지하는 바와 같이 지혜의 나무열매를 따먹었기 때문이다 . 만일 그들을 내쫓지 않으면 다시 신의 명령을 어겨 이번에는 생명의 나무열매를 따먹고 영생을 얻을 지도 모를 일이었다 . 신은 이것이 걱정이 되었던 것이다 .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이 사람이 선악을 분별하게 되었으니 손을 들어 생명나무 열매를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 ”

그리하여 신은 아담을 에덴동산에서 하계로 내쫓아 일찍이 아담을 만들었던 흙을 갈도록 하였다 .

“이리하여 하나님은 그를 내쫓고 , 에덴동산 동편에 천사의 무리들 과 화염검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 ”

지혜의 나무는 에덴동산 한복판에 있었던 모양이지만 생명나무는 동쪽 출입구 근처에 있었던 것 같다 . 거기에 천사의 무리가 버터고 서서 인간이 가까이 오지 못하도록 파수를 보고 있는 것이다 .

요컨대 모든 것을 타락이라고 보는 견해가 오늘날까지도 존속하고 있는 것이다 . 즉 인생의 낙은 죄와 악으로 간주된다 . 따라서 불유쾌한 괴로움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 훌륭한 행동이다 . 그리고 인간은 어떠한 다른 힘에 의하지 않고는 구원을 받지 못 한다 . 오늘날에 와서도 이 죄에 대한 가르침은 여전히 기독교의 근본적인 가정이다 . 선교사들은 기독교로 개종시키려는 사람들에게 무엇보다도 먼저 죄와 악에 대한 의식을 주입시키는 것이 보통이다 ( 그것은 물론 선교사가 호주머니 속에 넣고 다니는 하나의 기성품인 구원을 선교하기 위한 불가결의 전제 조건이다 ).

요컨대 기독교인으로 만들려면 우선 나는 죄인이라고 믿게 하여야 한다 . 어떤 사람은 퉁명스럽게 말하는 것이었다 . “기독교는 너무나 편협해서 탈이야 . 밤낮 죄에 대해서만 생각하게 하니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서 발길을 돌릴 밖에 . ”

 

고대 그리스의 세계는 하나의 별천지여서 인간관도 상당히 달랐었 다 . 내가 가장 흥미 있게 생각하는 것은 기독교도가 인간을 신과 같이 만들려고 애쓰고 있는 데 반하여 , 고대 그리스인들은 모든 신들을 인간과 같이 만들려고 한 점이다 . 저 올림피아의 신들은 명랑하고 여자를 좋아하여 사랑도 하고 배반도 하고 싸움도 하며 맹세도 곧잘 어기고 화도 잘 내는 것으로 되어 있다 . 그리하여 그리스인들처럼 사냥도 즐기고 전차도 타고 창도 던지는 것이다 . 그런가 하면 결혼도 하고 나아가서는 사생아도 낳는다 . 그러므로 신과 인간의 차 이점은 다만 신들은 하늘에서 우렛소리를 내고 , 지상의 초목이 무성 하게 자라도록 하는 신기한 능력을 갖고 , 영생불사하며 , 포도주 대신에 신의 술을 마시는 정도이다 . 그런데 술을 빚는 과일은 대체로 같은 것이었다 . 그리스인들은 이 신들과 사이좋게 사귈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 그리하여 배낭을 걸머지고 아폴론이나 아테네 신들과 함께 사냥도 가고 혹은 길가에서 헤르메스 신을 상대로 마치 친구나 되는 것처럼 농담도 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

그리스인에게는 조금도 신다운 점이 없었지만 그들의 신도 인간다 웠던 것이다 . 기독교에서 말하는 완전무결한 신과는 얼마나 큰 차이가 있는가 ! 그리스인들에게는 신이란 인간의 다른 종족에 불과하였 다 . 즉 , 영생을 누리지 못 하는 지상의 인간과는 달리 신들은 영생을 누리는 거인의 족속인 것이다 . 이러한 전제 하에서 데메테르 , 프로 셀피나 , 올포이스 등의 아름다운 신화가 얼마든지 생겨나는 것이다 . 그리스인들은 신을 믿는 것을 극히 당연한 일로 생각하였다 . 그리하 여 소크라테스까지도 독배를 마실 때 신에게 제사를 드리고 이 세상 에서다음 세상으로 가는 길을 빨리 끝내게 해달라고 빌었던 것이다 . 이것은 공자의 태도와 비슷하다 . 그러나 옛날에는 그럴 수밖에 없었 을 것이다 . 인간과 신에 대하여 오늘의 그리스인이 어떤 견해를 갖고 있는지는 불행하게도 분명히 알 길이 없다 . 다만 고대 그리스인의 이교도적 세계는 현대적이 아니었으며 현대적 기독교의 세계는 고대 그리스적이 아닌 점이 유감스러울 뿐이다 .

고대 그리스인들의 머리를 지배하고 있는 생각은 인생이란 때로는 참혹한 운명에 놓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 일단 이런 생각에 젖으면 그들은 자기 자신의 현실에 만족과 행복을 느낀다 . 그리 하여 그들은 이 인생과 우주를 사랑하고 자연계를 과학적으로 이해하려고 애썼으며 , 나아가서는 인생의 가치 , 즉 진 · 선 · 미를 탐구하 는 데 흥미를 갖게 되었다 . 그들에게는 에덴동산과 같은 황금시대에 도 인간타락의 우화는 없었다 . 그들은 큰 홍수가 지난 다음에 저 평 원으로 찾아온 데우칼리온과 그의 아내 피라가 손으로 주워서 어깨 너머로 집어던진 작은 돌멩이에서 생겼다고 생각하였다 . 인간의 질병과 괴로움에 대한 그들의 설명은 더욱 우습다 . 즉 질병과 괴로움 은 어느 보석상자의 뚜껑을 열고 그 속을 들여다보지 못 해 애쓰는 젊은 여자의 욕망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한다 . 그들의 공상은 매우 아름다웠다 . 그리고 그들은 인간성을 넓게 해석하였다 . 기독교인들 은 고대 그리스인들이 “ 이 세상에 태어난 자는 반드시 죽는다”라고 체념하고 있었다고 말할 것이다 . 그러나 그들의 생각은 너무나 아름 답다 . 거기에는 인간의 이해력과 탐구정신을 자유롭게 활동시킬 수 있는 여지가 충분히 있었다 .

고대 그리스의 소피스트들 가운데는 인간의 본성을 선이라고 생각 한 자도 있고 악이라고 생각한 자도 있었지만 거기에는 근세의 홉스 와 루소 사이에서 볼 수 있는 커다란 모순은 없었다 . 플라톤은 인간 을 욕구와 정서와 사상의 혼합물이라고 생각하였으며 이상적인 인생 이란 예지 ( 참된 이해력 ) 를 좇아서 이 세 가지를 조화시켜 나아가는 데서 비롯된다고 생각하였다 . 그에 의하면 “ 이데아는 영원불멸의 것이지만 각 개인의 심령은 정의와 지식과 절제와 아름다움을 사랑하 느냐의 여부에 따라서 비속하게도 되고 고상하게도 된다”라는 것이 다 . 소크라테스에 의하면―『 파이돈 편』에서 보는 바와 같이―영혼은 영원불멸의 독립된 존재라는 것이다 . 즉 “ 영혼이 홀로 육체에서 떨 어져 있거나 육체가 영혼에서 떨어져 있으면 그것은 바로 죽음을 의 미하는 것이다”라고 쓰여 있다 . 이 영혼불멸에 대한 믿음은 기독교 도와 고대 그리스인과 노자와 장자 전공 학자 및 유교도의 견해가 일치된다 . 그러나 그것은 근대에 와서 영혼의 불멸을 주장하는 자들 이 내세울 만한 것이 못 된다 . 영혼불멸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믿음은 아마 현대인에게는 아무런 흥미도 없을 것이다 . 왜냐하면 재생설과 같은 영혼불멸설을 주장하는 소크라테스의 모든 전제는 오늘날 우리 에게 쉽사리 납득이 가지 않기 때문이다 .

 

중국인들의 인간관은 인간이 창조주 , 즉 만물의 영장이라는 것이 다 . 유교에서는 인간이 “ 천지인” 가운데서 천지와 동격으로 간주된 다 . 이러한 인간관의 배경을 이루고 있는 것은 정령설이다 . 즉 만물 은 살아서 정령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 말하자면 산도 강도 오랜 세월이 지난 것은 모두 살아 있다는 것이다 . 그리고 바람이나 우뢰는 정령 자체이며 아무리 높은 산이나 큰 강이라 할지라도 이 정령의 지배를 받는다고 한다 . 모든 꽃은 하늘에서 그 세월과 번영을 주관하는 작은 요정을 갖고 있다 . 소위 만화여제 ( 萬華女帝 ) 라고 해서 그 탄생일은 2 월 12 일로 되어 있다 . 또한 버드나무도 소나무도 여우도 몇 백 살이 되면 정령을 갖게 된다 .

이 정령설이라는 배경이 있기 때문에 인간에게도 영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당연하다 . 이 정령은 우주의 모든 생명과 마찬가지로 남성의 능동적 , 적극적인 양 ( 陽 ) 의 원리와 여성의 수동적 , 소극적인 음 ( 陰 ) 의 원리의 결합으로 생기는 것이며 사실상 후세의 양전기와 음전기의 원리를 일찌감치 머릿속에 그린 것이 잘 들어맞은 셈이다 . 이 정령이 인간의 육체 속에 깃들면 백 ( 魄 ) 이라고 하고 육체 속에 깃들지 않고 홀로 떠돌면 혼 ( 魂 ) 이라고 한다 ( 강한 개성 , 즉 정령을 지닌 사람은 매력 , 다시 말해서 백력 ( 魄力 ) 의 에너지를 많이 지닌 사람이다 ) .

이 혼은 인간이 죽은 후에도 계속하여 떠돌아다닌다 . 그 정령은 평 상시에는 사람을 괴롭히지 않지만 그 사람이 죽어서 매장된 후에 뒤 를 보살필 자가없으면 망령이 된다 . 물에 빠져 죽은 자나 , 타향에서 죽어서 매장할 사람이 없는 정령에 대하여 7 월 15 일을 기해 널리 제사를 드리는 것은 이 때문이다 . 또한 남에게 암살을 당하거나 원 통하게 죽거나 하였을 때 그 망령은 부정을 탓하여 그 원한이 풀릴 때까지 허공을 떠돌아다닌다 . 인간이 살아 있는 동안은 정령이 육신에 깃들어 있기 때문에 아무래도 번뇌나 욕망과 같은 활력의 흐름 , 즉 일종의 정신력 비슷한 것을 갖고 있는데 이것은 그 자체로서는 좋고 나쁨이 없이 인간에게 주어져 있다 . 모든 사람은 정열과 욕망 과 야심과 양심을 갖고 있다 . 정욕 , 기아 , 공포 , 분노 , 고통 , 번뇌가 있고 죽음을 면치 못 한다 . 수양이란 이러한 모든 번뇌와 욕망을 조 화시키는 방법이다 . 이것이 유교의 견해이며 인간성에 맞추어 생활함으로써 ( 제 6 장 끝에 인용한 바와 같이 ) 인간은 천지와 동격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

그러나 불교도들은 육체적 욕구에 대하여 중세기의 기독교도들과 본질적으로 같은 견해를 갖고 있다 . 즉 그것은 쫓아 버려야 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 머리가 너무 좋아서 극단의 생각을 갖기 쉬운 남녀 들은 이 사상에 물들어 중이 된다 . 그러나 유교의 상식은 이것을 금 하고 있다 . 그리고 다소 노장철학 ( 老壯哲學 ) 의 영향에서 오는 것이긴 하지만 박명에 우는 미녀는 , 육적인 정욕을 품어 천계의 의무를 저 버린 탓으로 벌을 받아 지상으로 쫓겨나 인간적 고난을 당하는 타락한 선녀라는 것이다 . 또한 인간의 정신은 에너지의 흐름이라고 본 다 . 정신이란 문자 그대로 정 ( 精 ) 의 신 ( 神 ) 으로 정 이란 본질상 여우 의 정 , 바위의 정 , 소나무의 정을 운운할 때의 뜻으로 쓰인다 . 영어 로 제일 가까운 말은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vitality ―활동력 또는 정신력이라는 말로서 하루 동안 아니 일생 동안 , 그리고 때에 따라 저 바닷물과 같이 출렁거리는 것이다 . 그리고 이 세상에 태어난 자는 누구나 어떤 고민과 욕구와 또한 활동력을 갖고 인생의 첫걸음을 내딛는 것이며 유년시절 , 청년시절 , 노년시절 , 그리고 끝으로 죽음을 통하여 여러 주파를 갖고 돌고 있는 것이다 . 공자는 “ 젊어서는 색을 조심하고 , 장년시대에는 경쟁을 조심하고 , 늙어서는 이득을 조심하라”라고 말하였는데 이것을 뒤집어 생각해 보면 젊어서는 이성을 좋아하고 , 장년기에는 경쟁을 좋아하며 , 늙어서는 돈을 탐낸다는 뜻이다 .

중국인은 이 육체적 , 정신적 , 도덕적인 문제에 대해서도 다른 모 든 문제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입장에서 다루어 나간다 . 그것은 “ 중용을 취하라”라는 한 마디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 즉 무슨 일에 대해서든지 너무 많은 기대도 하지 않고 너무 적은 기대도 하지 않는 것이다 . 인간은 하늘과 땅 , 이상주의와 현실주의 , 숭고한 사상과 비천한 고뇌사이에 놓여 있다 . 이것이 인간성의 본질인 것이다 . 인 간은 지식에도 목마름을 느끼지만 , 물에도 목마름을 느낀다 . 훌륭한 사상도 숭상하지만 한 접시의 맛있는 돼지고기 요리도 좋아한다 . 금 언 명구도 좋아하지만 미인에게도 마음이 끌린다 . 이것이 곧 인간이 고 인간의 적나라한 모습이다 . 그러므로 세상 자체가 불완전하다고 볼 수밖에 없다 . 인간사회를 여러모로 개선할 필요는 물론 있지만 , 우리 중국인은 완전한 평등이나 완전한 행복 같은 것은 별로 탐내지 않는다 . 이러한 태도는 다음과 같은 우화에도 나타나 있다 .

어떤 사나이가 지옥으로 떨어졌다가 다시 태어나려고 할 때에 염라대왕에게 말하였다 . “ 대왕께서 저를 인간으로서 세상에 다시 보내시려면 저의 청을 들어주셔야 합니다 . ” 그러자 대왕은 “ 대관절 무슨 청이냐 ? ” 하고 물었다 . “ 이번에 인간으로 태어나게 되면 우선 대신 의 아들이 되어야 하겠고 , 장차는 진사의 아버지가 되어야 하겠습니 다 . 제 집 부근에는 1 만 정보의 땅과 고기가 뛰노는 연못과 온갖 과 일이 무르익은 과수원과 선량하고 애정이 깊은 아름다운 아내를 거 느릴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 천정에 이르기까지 황금과 진주로 장식된 많은 방과 곡식이 가득 찬 여러 창고와 돈이 잔뜩 들어 있는 가 방도 있어야 하겠습니다 . 그리고 저는 왕후장상 ( 王侯將相 ) 이 되어 명 예와 영화를 마음껏 누리며 백 세까지 장수를 누려야겠습니다 . ” 이에 염라대왕은 대답하였다 . “ 세상에 그런 사람이 어디 있느냐 ? 그런 사람이 있을 수 있다면 내가 다시 태어나서 그리로 가지 너를 보내 려고 하겠느냐 ? ”

우리에게는 인간성이라는 것이 있다 . 그러므로 우리는 이 천성 그 대로 살아가려는 것이다 . 이것이 지각 있는 인간의 태도일 것이다 . 인간고에서 벗어나는 길은 그밖에는 없다 . 새삼스럽게 번뇌니 본능이니 선이니 악이니 하고 떠들어대도 소용없는 것이다 . 도리어 그 때문에 구애되어 빗나갈 우려가 있다 . 그러므로 되도록 중용에 머물 라 . 이러한 태도 속에서 관대한 철학이 생기는 것이다 . 중용의 도에 서사는 교양 있고 너그러운 철학자의 눈으로 볼 때 법률적이든 도 덕적이든 또는 정치적이든 인간의 보편성에 속하는 모든 과실이나 불의는 용서해야 한다는 것이 하나의 진리이다 . 중국인들은 한 걸음 나아가 하늘 즉 신은 이해성이 깊고 너그럽다고 생각하기에 이르렀 다 . 그러므로 인간은 이 마지막으로 의지하는 생활신조에 따라 중용 의 생활을 하게 되면 두려워할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다 . 즉 이렇게 마음에 거리낌이 없으면 양심의 만족을 최대의 선물로 받아 망령도 두렵지 않다는 것이다 . 합리적인 것과 비합리적인 것을 동시에 관장하는 “ 중용의 신”이 있기 때문에 이 세상의 모든 일이 제대로 되어 가는 것이다 . 폭군은 결국 쓰러지고 , 반역자는 자살하며 , 탐욕스러운 자의 재물은 남의 손에 넘어가고 , 권세 있고 돈 많은 골동품 수집가의 자식들은 아버지가 애써 모아 놓은 물품을 남들에게 팔아 없애며 , 살인한 자는 나중에 시체로 발견되고 , 욕을 본 여자는 원수를 갚게 마련이다 . 그러므로 괴로움을 당하고 있는 많은 사람들은 때때 로 이렇게 중얼거리는 것이다 . “하나님도 부처님도 없단 말이야… . ”

정의는 눈이 멀기 일쑤다 . 도교나 유교의 기본 원리나 최고의 목 적은 요컨대 자연을 완전히 이해하고 자연과 완전히 조화하는 것이 다 . 여기 해당되는 용어가 필요하다면 중도적 자연주의라고나 할까 ? 이 중도적 자연주의자는 일종의 동물적인 만족감으로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다 . 어떤 무식한 중국 여자는 말하였다 . “누가 우리를 낳았다 . 그리고 우리는 누군가를 낳았다 . 그밖에 또 무엇을 하란 말인 가 ? ” 이 말에는 깊은 철학이 깃들어 있다 . 이렇게 되면 인생은 하나의 생물적 과정이 되어 이른바 불멸론 같은 것은 어디로 쑥 들어가 버린다 . 이것은 그대로 손자의 손을 잡고 가게로 과자를 사러 가는 중국 할아버지의 마음이기도 하다 . 5 년이나 10 년만 지나면 무덤 속 으로 들어가는 것을 할아버지는 조상들 앞으로 가는 정도로만 생각 하고 있다 . 이 세상에서 바랄 수 있는 최상의 것은 다만 남부끄럽지 않은 아들이나 손자를 갖는 것으로 , 중국식 생활태도는 모두가 이 하나의 관념에서 나온 것이다 .

 

2. 지 상의 것

 

그러므로 결국은 이런 결론에 이르게 된다 . 즉 살고는 싶다 . 그러나 시사의 삶에 그치는 것이다 . 천국에서 살겠다는 생각은 아예 말 아야 한다 . 영혼은 날개를 달아 신 앞으로 날려 보내고 지상을 저버리지 말아야 한다 . 우리의 수명은 한정되어 있다 . 그러므로 언젠가는 반드시 죽어야만 한다 . 우리에게 허용된 수명은 겨우 70 년 정도이다 . 영혼이 너무나 오만불손하여 영생을 바란다면 이 70 년의 생애 는 너무나 덧없는 것으로 생각될 것이다 . 그러나 자기 자신을 좀 알 고 나면 , 이것으로 족하다 . 70 년이면 웬만한 것은 다 알 수 있으며 또한 웬만한 즐거움도 다 맛볼 수 있는 것이다 . 인간의 무력함을 알 고 스스로 예지를 닦는 데 필요한 3 대는―아버지 , 아들 , 손자에 이르는― 짧기는커녕 너무나 긴 세월이다 . 2 대에 걸친 세상의 추이를 통하여 모든 풍습 , 도덕 , 정치의 변천을 몸소 체득한 현자라면 , 인생을 하직할 때 진심으로 만족을 느껴 벌떡 일어나면서 “ 아 , 참 재미있는 구경이었다”라고 말하고 눈을 감을 것이다 .

우리는 지상의 것이다 . 그리하여 지상에서 태어나 지상에서 사라 진다 . 이를테면 70 년 동안의 길손으로서 아름다운 지상에 태어난 것은 조금도 불행한 일이 될 수 없다 . 가령 그곳이 움 속 같은 곳이라고 하더라도 즐거운 무대로 만들어야 한다 . 그런데 실은 움이 아니라 60 내지 70 년이나 보낼 아름다운 지상이다 . 만일 즐겁게 보내지 못 한다면 결국 자기의 분수를 차리지 못 하는 것이 된다 . 인간은 때로는 엄청난 야심으로 인해 겸손하고 양순한 지구를 경멸하기도 할 것이다 . 그러나 마음의 평화를 원하거든 이 육신과 정신의 여관인 지상에 대하여 “ 어머니와 같은 대지”라는 생각에서 진심으로 커다란 애착을 느껴야 할 것이다 .

그리하여 우리는 이 지상의 생활을―사물을 그 자체의 모양대로 보는 동물적 신앙과 같이―일종의 물적 무신론을 마음의 지주로 삼고 살아가야 한다 . 그리고 자기 자신을 흙과 같은 것으로 느끼고 겨 울이면 따뜻한 봄의 햇살을 참을성 있게 고대하며 살아간 시인 소로 와 같은 섬세한 감정을 잃어서는 안 될 것이다 . 그는 아무리 실망하였을 때라도 “ 정신을 탐구하는 것이 자기의 일”이 아니라 자기를 탐구하는 것이 정신의 일 이라고 생각하려고 하였다 . 그의 행복은 자기 말대로 다람쥐의 행복과 같은 것이었다 .

하늘은 실재가 아니지만 지구는 실재이다 . 우리가 엄연히 있는 지 구와 있지 않은 하늘 사이에 태어난 것은 얼마나 커다란 행복인가 !

적어도 훌륭한 실천철학이라면 인간에게 육신이 있다는 것을 긍정 하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 . 근래에 와서 인간이 동물임을 정직하게 인정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것은 당연한 일이다 . 이미 진화론의 진 리가 발견되고 생물학 , 특히 생물화학이 커다란 진보를 보이고 있는 오늘날 그것은 필연적인 귀결이다 . 우리네 스승이나 철학자가 높은 지성에 대하여 학자다운 자랑을 느끼는 인텔리 계급에 속해 있었던 것이 큰 화근이었다 . 양화점에서 가죽을 자랑하듯이 번번이 “ 정신 , 정신” 하고 떠들어대는 자들은 오직 정신만을 유일한 자랑거리로 삼 는다 . 그들은 “ 정신”이라고만 하면 추상적인 감이 부족하다고 해서 때로는 “ 본질”이니 , “ 심령”이니 , “ 관념”이니 하는 따위의 말을 위협적인 큰 글자로 사용하기도 한다 .

그리하여 인간은 현학이라는 이름의 기계에 증류되어 일종의 정기 로 변하였으며 또 그 정기는 일종의 진액으로 압축되어 버렸다 . 우리는 술을 만들 때에 맛을 가미하기 위해 향료를 섞는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 가련한 우리네 속인들은 압축된 정신의 진액을 손쉽게 마실 수 있는 것으로 안다 . 이와 같이 정신을 지나치게 강조하였기 때문에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하였다 . 즉 인간이 본능에게 싸움을 걸 도록 한 것이다 . 내가 주로 비난하는 것은 , 이리하여 원숙한 인간성의 해석을 내릴 수 없게 만들어 놓은 사실이다 . 생물학이나 심리학의 임무는 무엇인가 ? 감각과 정서와 본능은 인간생활에서 어떤 위치에 놓여 있는가 ? 이런 문제들을 잘 알지 못 하므로 이러한 착오가 일어나는 것이다 . 인간은 육신과 정신으로 되어 있다 . 그러므로 양자 가 서로 조화되어 혼연일체가 되도록 하는 것이 철학자의 임무인 것이다 .

 

3. 영혼과 육체

철학자들이 무엇보다도 상을 찌푸리고 외면하는 것은 “ 인간에게 육 체가 있다”라는 사실이다 . 인간의 정신적인 결함이나 야수적인 본능 또는 충동에 정떨어진 설교자들은 때때로 인간도 천사와 같기를 바란 다 . 그런데 대관절 천사란 무엇일까 ? 우리가 천사에 대하여 상상해 볼 때 천사도 육신을 지닌 인간과 같은 모양을 하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우와―다만 날개가 있는 것이 다르다―그렇지 않은 경우 가 있다 . 그런데 재미있는 현상은 아직도 세상에서는 천사라면 인간 과 같은 모양을 하고 두 날개를 가진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점이다 . 나도 천사는 감각을 지니고 육신을 갖고 있는 편이 좋을 것 같다 . 만일 내가 천사가 된다면 여학생 같은 얼굴을 했으면 한다 . 그러 자면 우선 피부부터 있어야 한다 . 그리고 토마토 주스나 아이스 오렌 지 주스 같은 것을 마시려면 목이 말라야 할 것이고 , 음식을 맛있게 먹으려면 배가 고파야 할 것이다 . 아무리 천재라도 화구가 없이 어떻 게 그림을 그릴 수 있으며 , 소리를 듣지 못 하고 어떻게 노래를 부를 수 있겠는가 ? 가렵지 않은데 긁는 쾌감을 맛볼 수는 없지 않는가 ? 즐 거움을 맛보는 능력을 상실한다는 것은 대단히 두려운 일이다 . 인간은 육체를 지니고 그 욕구를 만족시키거나 또는 순수한 정신적인 존 재가 되어 아무런 만족도 얻지 못 하는 둘 중의 하나를 택해야 한다 . 만족이란 욕구 충족과 같은 말이다 .

만일 망령이나 천사에게 육신이 없다면 그 무슨 지독한 형벌일까 ! 맑고 차디찬 시냇물이 흐르고 있는 것을 보고 그 속에 들어가 “ 아 , 참 상쾌하다”라는 느낌을 맛보려고 하여도 우선 다리가 없다 . 좋은 요리를 맛보려고 하여도 혀가 없으며 탐스러운 과일이 있어도 씹어 먹을 이빨이 없다 . 아름다운 애인의 얼굴을 보아도 사랑을 느낄 수 있는 정열이 없다 . 언제나 영혼으로 이 지상에 오므로 아이들의 침 실에 들어가 고요히 잠들어 있는 것을 보아도 어루만져 줄 손이 없고 안아 일으킬 팔이 없다 . 아이들의 체온을 느껴 볼 가슴도 없으며 아이들의 얼굴을 비벼 볼 뺨도 없고 아이들의 목소리를 들을 귀도 없다 . 이 얼마나 두렵고 서글픈 일이냐 !

이러한 천사에 대한 변호를 들어보면 대단히 막연하여 공감을 느낄 수가 없다 . 그들은 “ 그러나 정신세계에서는 그런 감각적인 만족은 필요 없다”라고 말할 것이다 . 나는 반문하고자 한다 . “그럼 당신은 그러한 만족 대신에 무엇을 느낄 수 있습니까 ? ” 그는 이 물음에는 아무 말도 못 하다가 간신히 이렇게 대답한다 . “공허와 평화와 정적과… . ” 나는 다시 묻는다 . “그런 것으로 무슨 소득을 봅니까 ? ” 그는 말한다 . “노동에 종사하는 고통과 슬픔은 느끼지 않는다 . ”

이따위 천국은 배 밑에서 일하는 노예들에게나 매력을 느끼게 한다면 나도 동감이다 . 이런 소극적인 이상과 소극적인 행복관은 불교도들의 견해와 가까운 것으로 허황되고 한심스러운 것이며 , 그 근원 을 찾아보면 유럽보다도 아시아에서 먼저 나타나고 있다 ( 이 경우는 소아시아이다 ).

이런 공론은 역시 실없는 이야기가 되고 말겠지만 어쨌든 “ 감각이 없는 심령”이란 도저히 수긍할 수 없다는 점을 지적해 두고자 한다 . 하물며 우주 자체도 어떤 지각을 가진 존재라는 느낌을 갖는 오늘에 있어서야 심령의 특징은 역시 정지보다도 운동에 있는 것 같다 . 육체가 없는 천사가 누리는 즐거움의 하나는 매초 2 만 내지 3 만 번의 속도로 세포핵의 둘레를 돌고 있는 양자와 같이 회전하는 데서 얻어 지는지도 모른다 . 아마도 이러한 회전에는 유람철도를 타고 빙빙 도 는 것보다도 더 신기한 즐거움이 있을 것이다 . 그렇다면 얼마나 근사할 것인가 ! 또한 몸뚱이가 없는 천사는 광선이나 에테르의 파동속에 들어 있는 우주선처럼 매초 83,000 마일의 속도로 공간을 돌아다니는지도 모른다 .

그런데 천사가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는 천사만이 사용하는 어떤 화구가 있어야 하며 그 밖의 창조적 활동을 즐길 경우에도 이에 따르는 특수한 표현수단이 필요하다 . 예컨대 가락이나 울림이나 빛을 느끼려고 하면 에테르의 진동이 있어야 한다 . 그리고 천사의 뺨을 바람이 스치려면 에테르의 움직임이 있어야 한다 . 그렇지 않다면 심령 자체는 썩은 개울물과 같이 흐려서 , 바람 한 점 없는 여름날 오후의 숨 막힐 듯한 더위에 허덕이는 사람처럼 천사도 견딜 수 없을 것이다 . 적어도 생명이 있는 곳에는 형태 여하를 불문하고 언제나 어떤 운동과 정서가 나타나 있을 것이다 . 그러므로 절대의 휴식과 무감각은 있을 수 없다 .



4. 생 물학적 인간관

 

우리는 육체의 기능이나 정신의 활동을 깊이 통찰하면 우리 자신에 대하여 좀 더 올바른 견해를 가질 수 있다 . 따라서 내가 말하는 “ 동물적”이라는 어휘에 대하여 사람들이 전부터 품어 오던 나쁜 감정도 다소 해소될 것이다 . “이해는 용납을 의미한다”라는 옛말은 인간의 육체적 , 정신적 작용에도 해당된다 . 우리가 육체의 기능을 좀 더 충분히 이해하면 육체를 그렇게 멸시하지 않을 것이다 . 이 점에 대하여 의아하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지만 틀림없는 사실이 다 . 우리는 인체에 대하여 말할 때에도 , 가령 소화 작용이 고상하느냐 혹은 비천하냐 하고 문제 삼을 것이 아니라 다만 그것을 이해하여야 한다 . 이해를 하게 되면 소화 작용이 소중하게 생각된다 . 그밖 에 발한작용이나 오물의 배설작용이나 지라 , 쓸개 , 내분비선의 작용은 물론 섬세한 감정이나 사색의 작용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생물학 적 기능과 작용을 잘 이해하기만 하면 한결 소중하게 보인다 . 그렇게 되면 가령 콩팥을 육신의 한 부분이라고 해서 경멸하는 일이 없으며 , 오직 그것을 이해하려고 든다 .

충치를 보고 육신이 썩어가기 시작하는 징조라고 생각하거나 영혼 의 행복을 소중히 생각하라고 일깨워 주는 것이라고 떠들지 말고 , 치과 의사의 진찰을 받고 적절한 치료를 하면 되는 것이다 . 아무튼 치과 의사의 치료실에 다녀온 사람은 자기 이빨을 경멸하지 않고 소 중히 생각하게 된다 . 전보다 더 기쁜 마음으로 선악과나 갈비를 뜯 을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 내로라하는 형이상학자들은 이빨을 가리 켜 악마의 소유물이라고 말한다 . 신플라톤학파의 철학자가 이의 존 재를 멸시하면서 치통으로 고생하거나 , 낙천적인 시인이 소화불량증 에 걸리는 것을 보면 나는 언제나 통쾌한 조소를 퍼부을 수 있는 즐거움을 느낀다 . 어찌하여 치통 같은 것에는 개의치 말고 , 그 자랑스 러운 철학적 논증에 주력하지 못하는가 ? 어찌하여 이가 아프면 우리 는 옆집 사람과 마찬가지로 두 볼을 움켜잡고 끙끙거리고 있을까 ? 그리고 어찌하여 낙천적인 시인은 소화불량에 대하여 그렇게 맥을 못 쓰는가 ? 시인이라면 좀 더 열심히 시를 읊어야 하지 않겠는가 ? 창자가 정상적으로 작용하여야만 인체에 아무런 해도 끼치지 않게 되는데 , 이 창자를 무시하고 정신만을 내세운다는 것은 배은망덕이 아닐 수 없다 .

일찍이 인체의 작용에 놀라움과 신비감을 주어 이 인체를 더욱 소중히 여기도록 가르쳐 온 것은 사실이다 . 동물발생학에서 인간이 맨 처음 나타나게 된 경위에 대하여 알게 되었다 . 인간은 진흙으로 만든 것이 아니라 동물의 정상에 오름으로써 인간 구실을 하게 된 것이다 . 이 얼마나 대견한 일인가 ! 언제나 정신 , 정신 하고 떠들며 정신에 도취된 사람이 아닌 한 이것은 누구나 충분히 납득이 갈 것이다 . 그러나 우리가 오늘날 이 지구 위에서 두 다리로 똑바로 서서 걸어가게 되기까지에는 공룡은 필경 수백만 년 전에 살다가 멸종이 되었다는 주장을 나는 믿지 않는다 . 인간이 두 발로 걸어간다는 것을 운운하지 않더라도 생물학은 인류의 위엄을 조금도 손상하지 않 으면서 인류가 지구상의 생물 중에서 가장 뛰어난 존재라는 것을 증명해 준다 . 따라서 인류의 위엄을 강조하려는 모든 사람에게 불만이 없을 것이다 .

둘째로 우리는 인체의 신비와 아름다움에 대하여 깊은 인상을 받는 바이다 . 그 내부 기관의 작용과 각 기관 사이의 놀라운 상호작용을 알게 될 때 , 우리는 그것이 불가사의한 자연의 조화로 극히 단순 하고 신비스럽게 이루어지고 있음을 느끼게 마련이다 . 과학도 이 신 비에 대해서는 당황할 수밖에 없다 . 왜냐하면 이 인체 내의 작용을 분명히 알아서 그것을 단순한 원리로 해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 이 내부 조직의 작용은 생리학의 지식이 없는 일반 사람들에게는 상상 외로 알기 어려운 것이다 . 즉 인체 밖의 우주의 커다란 비밀도 인체안의 비밀과 같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

생리학자는 인체의 생리학적 및 생물학적 과정을 분석하고 연구할 수록 더욱 놀라움을 금치 못 하게 된다 . 그리하여 그 놀라움이 지나 치면 탐구정신이 투철한 생물학자까지도 생명의 신비설에 항복을 하 게 된다 . 알렉시스 카델 박사의 경우가 그러하다 . 그가 쓴 『 인간불 가지론』을 보면 다른 주장은 어떻든 인체 내의 기능에 대하여는 일 찍이 해명된 일도 없고 또 앞으로도 해명될 수 없으리라고 주장하고 있는데 이에 대하여는 공감이 간다 . 우리는 우선 물질 속에 내포된 지적 감각을 탐구하는 데서부터 시작하자 .

인간의 모든 기관은 분비액을 갖고 있는데 이것은 신경계통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 인체의 각 요소는 다른 요소에 적응시켜 나가는 데 이 적응의 방식은 본래 목적론적이다 . 기계론자나 생리론자가 주 장하는 바와 같이 , 각각의 조직 속에 우리들의 분별력과 질적으로 같은 분별력이 있다고 본다면 , 모든 생리작용은 일정한 목적을 달성 하기 위해 서로 연합해 있는 것처럼 보인다 . 그러므로 유기체 속에 어떤 목적성이 존재한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 인체의 각 기관은 현재 및 미래에 걸친 전체적인 목표가 무엇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듯이 이에 따라서 움직인다 . 인체의 조직에 있어서는 시간과 공간의 의미가 인간의 정신에 있어서의 경우와 다르다 . 인체는 원근을 인식 하는 동시에 현재와 미래도 인식한다 . 이를테면 창자가 상했을 때 우리는 전혀 치료에 힘쓰지 않아도 창자는 자기의 상처를 치료한다 . 이것은 실로 놀라울 만한 일이다 . 즉 상한 창자는 처음에는 움직이지 않는다 . 한동안 마비상태에 빠지는 것이다 . 이것은 이렇게 하여 똥이 뱃속으로 새어나가는 것을 막기 위해서이다 . 그와 동시에 다른 창자나 장망막의 표면이 상처로 가까이 밀려와서 복막의 고착성에 의해 상처를 유착시키면 4, 5 시간 내에 아물어 버린다 . 외과 의사가 바늘로 상처를 꿰맸을 때 아무는 것도 복막의 표면이 스스로 유착되 기 때문이다 .

살 자체가 이러한 분별력을 보여주는데 어찌하여 우리는 육체를 경멸할 수 있겠는가 . 우리는 육체를 공급받고 있는 격이다 . 그것은 스스로 영양을 보급하고 스스로 조정하고 스스로 수리하고 스스로 기동하고 스스로 생산하는 기계나 마찬가지다 . 이 기계는 우리가 세 상에 태어날 때 한 번 장치해 두면 고급 구식 분동시계처럼 약간의 손질로 한 세기의 3 분의 2 동안이나 움직이는 것이다 . 그것은 무선 시각과 청각을 갖춘 기계로 세계에서 가장 복잡한 전신 전화의 내부 구조보다 더 긴요한 신경과 임파선을 갖고 있다 . 그리하여 인체는 이 복잡한 신경조직에 의한 여러 가지 보고를 정리하는 데 매우 능 률적이며 비교적 중요하지 않은 서류는 창고 속에 보존해 두고 다른 서류는 가까운 책상 속에 보관해 둔다 . 그런데 창고 속에 30 년 동 안이나 그대로 넣어 두었던 서류도 필요할 때에는 번개같이 재빨리 찾아낸다 . 또한 인체는 가제동이 완전한 , 소리 없는 자동차와 마찬 가지로 운전할 수 있다 . 만일 그 자동차가 사고를 내어 유리창이나 손잡이가 파손되면 그 자동차는 스스로 분비작용을 일으켜 유리의 대용물을 만들기도 하고 손잡이를 제동하는 데 최선을 다하거나 혹 은 적어도 스타링 샤프트의 끈으로 어떻게 해서든지 운전을 할 수 있게 만든다 . 또한 한 쪽 신장을 적출시켜도 남은 다른 쪽 신장이 스스로 비대해져서 오줌을 알맞게 통과시킬 수 있도록 그 기능이 증 대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 또한 인체는 화씨 10 분의 1 도 이상의 차이가 나지 않도록 정상 체온을 유지하고 음식물을 생리조직으로 변형시키기 위해 자기에게 필요한 화학약품을 제조한다 . 신기하기 짝이 없는 것은 인체가 생명의 리듬에 대한 감각과 시간의 감각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 그것도 몇 시간이나 며칠 동안이 아 니라 수십 년에 걸친 시간의 감각을 갖고 있는 것이다 . 즉 유년기 , 사춘기 , 성년기를 조정하고 성장을 멈출 시기가 되면 멈추고 , 아무 도 모르는 사이에 사랑니가 나기도 한다 . 인간의 지혜는 이 사랑니 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이다 .

그리고 인체는 독소를 제거하기 위해 특별한 해독제를 만들어 놀라운 성과를 올리고 있다 .

인체가 모든 작용을 하고 있을 때 공장처럼 절대로 소란을 피우는 일이 없다 . 그 덕택에 자부심이 강한 형이상학자는 시끄러운 소리의 방해를 받는 일 없이 그 전공인 “ 정신”이나 “ 순수성”에 대하여 마음 깊이 사색할 수 있는 것이다 .



5. 인생은 한 편의 시

 

생물학적인 견지에서 볼 때 인생은 한 편의 시에 가깝다 . 인생에는 독특한 리듬이 있고 맥박이 있다 . 성장과 노쇠의 내부적인 주기도 있다 . 무심한 유년시절부터 비롯하여 성년기의 사회활동에 적응 하기 위한 청춘기가 거기 따른다 . 이 청춘기에는 젊음의 안타까움과 어리석음이 있다 . 이상과 야심이 있다 . 이윽고 눈부신 활동을 하게 마련인 성년기에 이르러 경험을 얻고 사회와 인간성을 깊이 깨닫게 된다 . 이어서 장년기에 들어서면 어느 정도 마음의 안정을 얻어 과일이 익고 술이 익듯이 성격도 차츰 성숙해진다 . 그리하여 전보다 배도 나오게 되고 냉소의 참뜻도 알게 되며 , 인생을 한결 따뜻이 대 하게 된다 . 그러나 인생의 황혼기에 들어서면 내분비선이 활발히 움 직이지 못 하게 된다 . 우리가 만일 이 시기에 참된 노년기의 철학으 로 살아간다면 , 마음의 평화와 안정을 얻어 유유자적하게 된다 . 마지막으로 생명이 다하면 영원히 잠들어 다시는 깨지 않는다 .

우리는 이 인생 리듬의 아름다움을 깨달아야 한다 . 대교향악을 들 을 때와 같이 , 그 테마 , 불협화음 , 그 마지막 협화음을 음미할 줄 알 아야 한다 . 인생의 주기적인 움직임은 보통 사람의 생애에 있어서는 누구나 마찬가지인 것이다 . 이 인생의 음악은 각자가 작곡해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 사람에 따라서는 불협화음이 점점 퍼져서 나중에는 멜로디의 흐름을 압도하거나 말살해 버리는 수가 있다 . 또 때로는 이 불협화음이 너무 강해서 멜로디가 중단되어 권총자살을 하거나 강물에 뛰어들기도 한다 . 높은 수양이 없기 때문에 멜로디가 뒤집혀 절망에 빠진 끝에 그런 일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 . 이러한 경우는 별도로 치고 , 정상적인 인생은 엄숙한 행진이나 행렬처럼 끝까지 지속되는 법이다 . 그러나 잡음이나 단음이 지나치게 많은 경우가 있다 . 그럴 때에는 템포가 잘못된 것이므로 불쾌하게 들린다 . 저 주야를 가리지 않고 유유히 흘러서 바다로 들어가는 큰 강물의 웅장한 템포 야말로 우리가 동경하여 마지않는 바이다 .

유년시기 , 장년시기 , 노년시기가 골고루 갖추어진 이 인생은 아름답고 화려한 자연의 배치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 하루에 아침과 낮 과 저녁이 있고 1 년에 춘하추동이 있다 . 이것은 훌륭한 일이다 . 인생에는 선악이 있을 수 없다 . 춘추의 계절에 따르면 모두가 선이다 . 우리가 생물학적 인생관에 의하여 이 인생의 춘하추동에 순응하여 살아가면 혼자서 잘난 체하는 바보나 터무니없는 이기주의자가 아닌 한 , 인생은 한 편의 시라고 생각하며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

셰익스피어는 “ 인생의 일곱 단계”에 대한 글에서 이 견해를 더욱 분명히 드러내고 있다 . 중국의 문인들 가운데도 이러한 견해를 갖고 있는 사람이 많다 . 셰익스피어에게는 별로 종교적인 면을 찾아볼 수 없다 . 그는 종교에 별로 흥미를 갖고 있지 않았다 . 이 점에 대하여 는 이상한 생각이 들지만 나는 이것이야말로 그의 위대한 점이라고 생각한다 . 그는 인생을 있는 그대로 널리 보았다 . 그의 희곡에 등장 하는 인물들이 다 천성 그대로의 모습을 나타내고 있는 것처럼 그는 모든 지성의 섭리에 대하여 아는 체하지 않았다 . 그는 대자연 자체와 같았다 . 이 말은 세상의 문인이나 사상가들에게 보낼 수 있는 최 대의 찬사인 것이다 . 그는 다만 인생을 그대로 보고 살다가 죽었다 .

 

 

  

 

 

 

 

제 3 장 인간적인 것

 

 

 

 

 

1. 인 간의 권위에 대하여

 

앞에서 인간이 동물로부터 이어받은 유전 , 즉 인간과 금수에게 공통되는 면과 그것이 문명에 끼친 영향에 대하여 생각해 보았다 . 그러나 단지 그것만으로는 아직 완전치 못 하다 . 인간과 인간의 권위 에 대한 견해라고 하기에는 아직도 거기 무엇인가 결여되어 있는 것이다 . 인간의 권위―그렇다 . 여기 대하여 역설 ( 力說 ) 해 둘 필요가 있다 . 그리고 그것이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지 알아보아야 할 것이 다 . 그렇지 않으면 논점이 혼란되어 인간의 권위 자체까지도 잃어버 릴 우려가 없지 않다 . 20 세기 , 특히 오늘날과 앞으로 수십 년 동안에 그것을 잃어버릴 위험이 농후하다 . 만일 누가 “ 당신이 인간도 동 물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옳다고 칩시다 . 그러나 인간은 동물 중에서 가장 놀라운 동물이라고 생각하지 않소 ? ” 하고 묻는다면 나는 “그야 물론 그렇게 생각하죠”라고 대답할 것이다 .

우리는 문명을 만들어내는 것은 오직 인간뿐이라는 사실을 쉽사리 잊어서는 안 된다 . 물론 어느 면에서는 인간보다 더 재주 있는 동물 도 있다 . 그리고 인간보다 생김새도 더 훌륭하고 고상한 모습을 한 동물도 있다 . 예컨대 말 같은 것이 그렇다 . 또한 사자와 같이 억센 육체를 가진 것 , 개와 같이 후각이 예민하고 주인에 대한 충성심이 대단한 것 , 솔개와 같이 뛰어난 시력을 갖고 있는 것 , 비둘기처럼 방향 감각이 예민한 것 , 개미처럼 검소하고 일을 잘하는 것 , 사슴처럼 기질이 유순한 것 , 소처럼 강한 인내력과 만족감을 갖고 있는 것 , 종달새와 같은 훌륭한 가수 , 앵무새나 공작과 같은 아름다운 몸 차림을 한 것 등등이 있다 . 그러나 나는 이 모든 등물보다도 원숭이를 좋아한다 . 원숭이에게는 좋아할만한 그 무엇이 있다 . 그러나 원숭이보다 인간이 더욱 좋다 . 인간에게는 원숭이의 호기심과 원숭이의 영리함이 깃들어 있다 .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 개미는 인간보다 어느 면에는 더 이성적이어서 훈련이 잘 되어 있으며 오늘날의 스페인보다도 더 안정된 정부를 갖고 있다 . 그러나 그들은 도서관이나 박물관을 갖고 있지 않다 . 개미나 코끼리가 잠망경을 발명하거나 새 로운 별을 발견하거나 일식을 예언할 수 없으며 , 물개가 미적분을 생각해 내거나 , 비버가 파나마 운하를 개척할 수 없다 . 만일 그들에게 이러한 것이 가능하다면 나는 그들에게 세계의 총대장이나 창조 주로서의 특권을 서슴지 않고 물려주려고 한다 . 분명히 인간은 자기 자랑을 해도 무방하다 . 그런데 그 자랑거리는 무엇인가 ? 즉 인간 권 위의 본질은 무엇인가 ? 우리는 이것부터 알아보아야 할 것이다 .

인간의 권위는 이 책의 첫머리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 중국 문학에서 찬미하는 자유인의 네 개의 특징으로 되어 있다 . 즉 유희적 호기심 , 꿈꾸는 능력 , 그리고 그 꿈을 시정하는 유머 , 끝으로 행동의 변덕성과 분방성이다 . 이 네 가지를 합치면 미국의 이른바 개인주의 의 가르침을 중국식으로 바꾼 것이 된다 . 중국 문학에서 자유인을 묘사한 것 이상으로 개인주의의 산 모습을 묘사할 수는 없다 . 미국의 개인주의를 대표하는 최대의 작가인 휘트먼 자신이 “ 위대한 백수”이라고 부르는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

 


2. 인간의 유희적 호기심에 대하여


인간은 어떻게 해서 자연의 상태에서 문명을 향하여 나아갔는가 ? 장차 진화를 거듭한 결과 굉장한 생물이 생길지도 모르는 최초의 징 후 , 또는 발전성이 있는 지성의 최초의 징조는 무엇인가 ? 이 물음에 대하여 , 그것은 인간의 유희적인 호기심이라고 서슴지 않고 대답할 수 있다 . 즉 손으로 물건을 찾아 더듬거리고 , 손에 잡히는 대로 뒤집어 살펴보려는 최초의 노력이 그것이다 . 이것은 원숭이를 보면 잘 알 수 있다 . 원숭이는 한가하면 서로 눈꺼풀이나 귀를 뒤적거리며 살피고 있다 . 이라도 있지 않나 해서 찾고 있는 것인지 , 혹은 아무것도 찾고 있지 않는지 , 어쨌든 열심히 뒤적거리고 있다 . 동물원에 가서 원숭이가 서로 귀를 잡아 다니고 있는 모습을 보면 우리는 거기서 앞으로 뉴턴이나 아인슈타인이 나타날 징조가 감춰져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

인간이 손에 무엇이고 찾아보려는 듯이 장난삼아 더듬는 모습 속에는 단순한 동작 이상의 의지가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 즉 거기에는 과학적인 진실이 숨어 있다 . 인류문화의 토대는 인간이 두 다리로 서게 된 결과 , 두 손이 땅에서 해방된 데서 다져지기 시작한 것 이다 .

이 유희적 호기심은 고양이도 갖고 있다 . 걸으면서 몸을 지탱하는 의무에서 앞다리가 벗어났을 때의 고양이의 모습이 바로 그것이다 . 그러므로 인간이 원숭이로부터 진화된 것이라면 마찬가지 이유에서 고양이로부터 진화되었다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 다만 원숭이의 경우에는 언제나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으므로 손가락이 충분히 발달되었으나 , 고양이의 발은 그냥 발로 살이나 연골의 뭉치에 불과한 것이다 .

이 점에 대하여는 내가 생물학자가 아니므로 더 언급하지 않기로 하고 손의 해방에서 비롯되는 인류문명의 발달에 대하여 생각해 보기로 하겠다 . 누가 이미 말하였는지 , 혹은 말하지 않았는지는 알 수 없으나 몇 마디 이야기하고자 한다 . 인간이 꼿꼿이 서게 된 것과 , 그 결과로 손이 땅에서 해방된 이 두 가지 일은 인류의 진화과정에 커다란 영향을 가져왔다 . 우선 도구를 사용하게 되고 수치감을 느끼 게 되고 여성이 남성에게 예속되게 되었다 . 언어도 이와 관련되어 발달하게 되었다 . 그리고 유희적인 호기심과 물건을 뒤적이는 본능을 크게 증대시켰다 .

인간의 문명이 도구의 발견에서 비롯되고 도구의 발견은 손의 발 달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은 이미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다 . 유인원 이 나무에서 내려오려고 할 때 ( 아마 몸이 너무 무거운 탓이었겠지만 ) 두 가지 방도가 있었다 . 즉 네 발로 걷는 짐승처럼 하든지 뒷발로만 걷는 것을 배우기 시작한 오랑우탄과 같이 하든지 둘 중의 하나이다 . 인류의 조상은 네 발 짐승에서 나왔다고는 생각할 수 없다 . 오랑우탄이 두 다리로 서게 되었기 때문에 손은 자유를 얻은 것이다 . 그런데 이 자유가 문명의 발달에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였는지 모 른다 . 이때 이미 유인원은 손으로―그 커다란 입으로 과일을 따지 않고―따는 법을 알고 있었다 . 유인원이 높은 낭떠러지 위에 있는 굴에서 살게 된 때부터 저들을 향해 올라오는 적을 향하여 돌멩이를 던지거나 바위를 아래로 굴리는 것은 과일을 손으로 따는 것과 같은 성질의 것이다 .

인간도 맨 처음에 사용한 도구가 그것이었다 . 여기서 우리는 유인 원이 무엇이고 손에 움켜쥐고 주무르고 있는 모습을 머릿속에 그려 볼 필요가 있다 . 무슨 뚜렷한 목적의식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이윽고 인간은 끝이 뾰족한 부싯돌이나 돌조각을 도구로 사용하게 되었다 . 그것은 돌을 손으로 집어 던지는 동안에 적을 죽이는 데는 동글 동글한 돌멩이보다도 삐죽하게 날이 선 것이 좋다는 것을 자연히 알 게 된 것이다 . 다만 물건을 관찰하는 방향만 약간 바꾸어도 , 예컨대 귓바퀴를 양쪽은 물론 뒤쪽도 보게 되면 , 벌써 그 사물을 이해하는 힘이 그만큼 더하게 되며 따라서 머릿속에 그리는 여러 가지 이미지의 수도 많아진다 . 이렇게 하여 두뇌의 전두엽이 자극을 받아 발달하게 된다 .

인간이 성적 수치감을 느끼게 된 시초도 서서 걷기 시작한 자세 에 있다고 생각한다 . 이러한 수치감은 다른 동물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다 . 이 수치감은 아마도 대자연 창조의 계획 속에 미처 생각지도 않은 직립이라는 자세를 인간이 취하여 본래 신체의 후면에 있던 부 분이 별안간 그 중심부를 차지하게 된 데서 비롯된 것이다 . 이와 같이 배후에 있어야 할 것이 전면에 붙게 되었으니 부끄러울 수밖에 없었다 . 이러한 새로운 사태로 주로 주부들이 여러모로 괴로움을 당 하게 된 것이다 . 즉 유산이 많아지고 월경도 고르지 못 하게 되었다 . 해부학적으로 말하면 인간의 근육은 본래 네 발의 자세로 활동하게 설계되어 , 발달해 왔다고 한다 . 예컨대 암퇘지에 있어 배의 태아는 마치 빨래가 한 개의 줄에 매달려 있듯이 , 수평의 척추에 매달려 있다 . 그런데 임부에게 똑바로 서라는 것은 빨랫줄을 수직으로 세워 놓고 , 빨래에게 종전의 위치를 잃지 말라고 당부하는 것과 마찬가지 이다 . 인간의 뱃살은 똑바로 서도록 되어 있지 않은 것이다 .

만일 인간이 본래 두 발로 걷게 되어 있었다면 그런 근육은 어깨에 알맞게 달려 있었을 것이다 . 그렇게 되었다면 참 편리하였을 것 이다 . 그리고 해부학을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여자의 자궁이나 난소 가 간신히 자기 자리를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 전위증이나 월경의 장애가 그 정도에서 멈춘 데 대하여 놀라게 될 것이다 . 월경에 대한 모든 비밀은 오늘날 아직도 충분히 해명되어 있지 않다 . 난소의 주기적인 갱신의 필요성을 인정하더라도 월경이 그 기능을 다하는 데 극히 비능률적이며 필요 이상으로 오래 가고 많은 고통을 여자들에게 주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며 , 이러한 폐단은 인간이 두 발로 똑바로 서는 자세에서 비롯됨은 명백한 사실이다 .

이러한 현상은 이윽고 여성들의 예속을 초래하였다 . 또한 오늘날 보는 바와 같은 인간사회의 발달도 촉진하였다 . 만일 인류의 어머니 가 네 발로 걸어 다녔다면 그 남편에게 예속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 그러나 이때 이미 두 개의 힘이 동시에 작용하기 시작하였다 . 즉 한편으로는 남녀를 막론하고 유희적인 호기심을 지닌 , 놀기를 좋 아하는 동물이 되었다 . 따라서 성적 본능은 새로운 동작을 배우게 되었다 . 그러나 입을 맞춘다는 행동은 아직 그다지 즐거운 것이 아니었다 .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아직은 그러한 행동을 재치 있게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 그 삐죽 나온 뻣뻣한 입을 마주 대고 있는 두 마리의 검은 원숭이를 보면 능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 그러나 손은 전보다 한결 감각적으로 부드럽게 놀릴 수 있도록 발달시켰다 . 예컨대 툭 치거나 , 쓰다듬거나 , 간질이거나 , 껴안거나 하는 동작이 그것이다 . 이러한 동작은 피차에 이를 잡아 주는 데서 우연히 발달된 것이다 . 만일 털이 많은 우리의 먼 조상들이 몸에 이가 꾀지 않 았던들 오늘의 서정시는 별로 발달되지 못 하였을 것이다 . 이 새로운 동작은 성적 본능을 발달시키는 데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

한편 두 발로 걸어 다니는 임부들은 꽤 오랫동안 무기력한 서글픈 자세를 찾아야 했을 것이다 . 인간이 아직도 두 발로 똑바로 걷는 자세에 완전히 적응하지 못 한 당시의 임부가 뱃속에 어린애를 배고 걷는다는 것은 상당히 고행이었을 것이다 . 다리와 발뒤꿈치가 알맞게 개선되고 뱃속의 짐 ( 태아 ) 과 균형이 잡히게 골반이 적당히 뒤로 물러나기까지는 몸을 가누기가 더욱 어려웠을 것이다 . 이보다 훨씬 이전의 먼 옛날에는 두 발로 걷는 자세가 형편이 없었다 . 그리하여 이 지질시대의 어머니들은 아픈 등뼈를 쉬게 하기 위해 남몰래 네 발로 기어 다녔던 것이다 . 이런 딱한 일이 허다한데다가 그밖에도 여자만이 맛보는 고생이 적지 않았으므로 어머니들은 성애의 에누리 와 유희를 하기 시작하였다 .

똑바로 선 자세는 갓난아이가 걷는 법을 배우는 것을 어렵게 하여 그만큼 영아기간이 길어졌다 . 소나 코끼리의 새끼는 날 때부터 설 수 있는데 인간의 어린애는 같은 동작을 배우는 데 2, 3 년이나 걸린다 . 따라서 그동안에 아이들의 치다꺼리를 하는 것은 어머니밖에 없다 .

인류는 그 후로 새로운 길을 향해 발달하게 되었다 . 즉 섹스를 넓게 해석하여 생활을 다채롭게 장식하기 시작하는 데서 사회는 발달해 나갔다 . 여자는 의식적으로 암컷에서 여자로 변해 갔다 . 다시 말 하면 암호랑이에서 여자로 , 암사자에서 백작부인으로 , 남녀의 분화현 상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 아마도 이 일은 얼굴이나 가슴의 털을 뽑는 일에서 시작되었을 것이다 . 아무튼 여자들은 그때부터 몸을 치 장하게 되었다 . 이것은 수컷의 몸이 더 단장되어 있는 일반 동물계의 현상과는 정반대이다 . 모두가 생존하기 위한 전술이 동물계에는 분명히 나타나고 있다 . 호랑이가 공격을 하고 거북이가 숨고 말이 뛰는 것 등은 생존을 하기 위한 것이다 . 여성의 애정이나 아름다움이나 애교도 일종의 생존을 위한 전술이다 . 여자들은 남성이 너무 뚝심이 강하여 정면으로 대항하여도 소용이 없으므로 그들을 매혹시 키고 기분을 맞추어 기쁘게 해줄 필요가 있게 된다 . 이것은 오늘에 이르기까지 인류문명의 한 성격을 이루고 있다 . 여자는 저항하고 공 격하는 대신 매혹시키는 법을 배우고 , 힘으로 목적을 달성하려고 하 지 않고 좀 더 부드러운 수단을 쓰려고 하였다 . 그리하여 결과적으로 문명 자체까지도 부드러움을 띠게 되었다 .

나는 인류의 문명이 남자에게서 시작된 것이 아니고 여자에게서 시작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 언어의 발달에도 남자보다 여자가 더 큰 역할을 하였다 . 여자의 수다는 상당히 뿌리가 깊은 것으로 언어의 창조에 여자가 커다란 공헌을 하였다고 나는 생각한다 .

원시인은 벙어리처럼 무뚝뚝하여 싱겁기 짝이 없었을 것이다 .

인간의 언어는 다음과 같이 하여 시작된 것으로 생각된다 . 옛날 유인원의 수놈이 자기 굴에서 나와 먹을 것을 찾으러 가는데 , 옆에 살고 있는 두 암놈이 굴에서 “ 윌리엄은 하롤트보다 잘 생긴 사내야 ! ” 하거나 , “아니 , 하롤트가 윌리엄보다 잘 생겼어 ! ” 또는 “ 하롤트가 어제 밤에 그랬어 ” , “그이는 아주 화를 잘 내더군 ! ” 하며 지껄이는 데서 언어가 시작되었을 것이다 . 이 밖의 형식을 취할 리가 없다 . 그리고 손으로 음식물을 집어 먹게 됨으로써 턱의 부담이 적어지는 동시에 점점 퇴화되어 모양이 작아져서 언어의 발달을 촉진하게 되었다 .

그러나 전에도 말한 바와 같이 두 다리로 똑바로 서는 자세가 초 래한 가장 큰 결과는―두 손이 해방된 원숭이가 이를 잡는 손재주를 부리는 데서 엿볼 수 있는 것처럼―인간의 손에 물건의 방향을 바꾸 거나 뒤집어서 살펴보는 등등의 자유가 부여된 데서 온 것이다 . 그리하여 진리의 자유로운 탐구 정신도 실은 이 이 잡기에서부터 발달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 오늘의 인류의 진보도 사회를 괴롭히고 있는 어떤 이를 잡는데 거의 달려 있다고 하겠다 .

이렇게 해서 모든 사회 문제와 사회적 폐단을 자유로운 입장에서 유희적으로 탐구하는 호기심이라는 본능이 발달되었다 . 그런데 이 정신활동은 음식물을 찾는 것과 관계있는 순수하고 또 단순한 정신작용이다 . 원숭이는 먹기 위해서 이를 잡는 것이 아니고 다만 재미있기 때문에 잡는 것이다 . 그리고 이것은 그대로 가치 있는 학술 연구의 특징이기도 하다 . 즉 유희적 호기심은 사물 자체 속에 감춰진 말을 헤치고 사물을 사실 그대로 알아보려는 유희적인 단순한 활동이다 . 지식은 직접적으로나 감정적으로 우리를 배부르게 하지는 못 한다 ( 중국 사람인 내가 여기서 자기모순에 빠진다면 이 역시 나로서는 행 복하다 ) . 그것은 인간의 권위에 크게 이바지하며 그러한 진리 탐구의 과정은 유희의 한 형식이다 .

훌륭한 업적을 올리는 과학자나 발명가의 태도 역시 그러하다 . 연구심이 강한 의사는 인간보다도 미생물에 대하여 더 흥미를 갖고 있 으며 , 천문학자는 몇 억 킬로미터나 떨어져 있는 아득한 별의 운동을 기록하고 있는데 그 별이 이 지구상에 살고 있는 인간의 생애에 대하여 어떤 직접적인 관계가 있을 리 없다 .

동물들은 대개 어린 시절에도 유희 본능을 갖고 있다 . 그러나 유희적인 호기심이 크게 발달한 것은 인간뿐이다 .

옛날에 에우리피데스는 노예를 가리켜 사상이나 의견 발표의 자유 를 상실한 자라고 말하였다 . 전제정치란 이러한 노예를 생산하는 공장이다 . 이런 예는 동서를 막론하고 20 세기의 오늘에 있어서도 문명 국가에서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 그러므로 그 형태 여하를 막론 하고 전제정치는 지적으로 퇴보된 정치형태이다 . 일반적으로 유럽의 중세시대에 일어난 강압정치 , 특히 스페인의 종교재판소가 그 두드 러진 실례이다 . 당시에 소견이 좁은 정치가나 승려들은 신앙과 사상 의 통일이 사회의 평화와 질서유지에 공헌한다고 생각하였을지 모르 지만 역사적으로 고찰해 보면 그것은 언제나 인간생활을 압박하고 악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였던 것이다 . 그러한 전제주의자는 국민의 외적 행동을 구속할 뿐 아니라 한 걸음 나아가서 국민의 내적 사상 과 신앙을 지배하려고 한다 . 이것은 일반국민을 멸시하고 덤벼드는 태도이다 . 그들은 인간의 정신이 획일주의에 능히 견딜 수 있다고 간단히 믿고 있는 것이다 . 즉 정부 당국의 선전부문을 맡고 있는 사 람들의 견해에 의하면 국민 대중은 책이나 협주곡이나 영화 같은 것 을 좋아하기도 하고 싫어하기도 하는 변덕스러운 아들이라는 것이 다 . 그리하여 전제정부는 으레 선전운동으로 문학을 혼란시키고 정 책으로 예술을 교란시키며 애국심으로 인류학을 대신하도록 하며 지 배자를 예배하는 것으로써 종교를 짓밟아 버리기가 일쑤이다 .

그러나 이러한 일은 터무니없는 짓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 사상을 통제하는 자가 지나치게 인간성에 배치되는 일을 하면 자연히 멸망의 길로 가게 마련이다 . 맹자는 말하기를 임금이 그 신하를 수족과 같이 보면 신하는 임금을 심복같이 보고 , 임금이 신하를 말이 나 개처럼 하찮게 보면 신하는 임금을 길 가던 사람같이 보며 , 임금 이 신하를 먼지같이 하찮게 보면 신하는 임금을 원수같이 본다고 하였다 .

인간의 자유와 사상을 도적질할 만한 큰 도적은 이 세상에 없다 . 만약 사상과 자유를 잃어버리면 다시 네 발로 기어 다녀야 한다 . 그 리하여 두발로 걷던 때의 모든 경험은 다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하게 됨으로써 적어도 3 만 년 전의 모습으로 되돌아가게 된다 . 여기서 맹자의 말을 빌리면 전제자가 민중을 경멸하듯이 민중은 그 도적 ( 전제 자 ) 을 미워한다 . 이때 쌍방은 같은 비례로 나간다 . 즉 도적이 많이 훔쳐갈수록 민중은 더욱더 미워지게 된다 . 우리에게 지적 , 도덕적 미도 종교적 신앙만큼 귀하고 소중하고 친밀감이 가는 것은 없다 . 따라서 이것들에 대한 권리를 우리에게서 빼앗아가는 자에 대한 증오심만큼 큰 것도 없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제정치에서는 이런 근 시안적인 우매함을 흔히 찾아볼 수 있다 . 그것은 전제자가 언제나 지적으로 뒤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 인간에게는 반발심이 있으며 마음속에는 억제할 수 없는 자유가 꿈틀거리고 있으므로 반드시 전제자에게 복수를 하려드는 법이다 .



3. 꿈에 대하여

 

“불만은 성스러운 것이다”라고 세상에서는 말하고 있다 . 아무튼 불만이 인간 특유의 것임은 사실이다 . 동물이 진화하는 과정에서 원숭이는 최초의 불평가였다 . 나는 침팬지 이외의 동물이 진실로 슬픈 표정을 하고 있는 것을 본 적이 없다 . 이 침팬지야말로 철학자일지 모른다 . 비애와 사려는 비슷한 것이니 말이다 . 침팬지의 슬픈 표정을 보면 무슨 생각에 잠겨 있는 듯이 보인다 . 그렇다고 무슨 철학적인 사색을 하고 있는 것은 물론 아닐 것이다 . 그런데 소는 언제나 만족스러운 듯한 얼굴을 하고 있다 . 그리고 코끼리는 어떤 분노를 마음속에 품고 있는지 모르지만 끊임없이 코를 휘두르는 것을 보면 사색은커녕 불평만 잔뜩 터뜨리고 있는 것 같다 . 그런데 생활에 지쳐 버린 권태로운 표정을 하는 것은 오직 원숭이뿐이다 . 이 얼마나 장한 일인가 !

모든 철학은 아마도 이 심심하다는 권태감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 그런데 어떤 이상에 대하여 커다란 동정을 갖고 있는 것은 인간 의 특징이다 . 그리하여 현실 세계에서 살아가면서도 다른 세계를 꿈 꾸고 있다 . 인간과 원숭이의 차이는 원숭이가 다만 심심하게 살고 있지만 인간은 그런 권태증 이외에 상상력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 인간은 누구나 낡은 환경에서 벗어나려고 한다 . 즉 누구나 자기 이외의 무엇이 되고 싶어 하는 것이다 . 누구나 꿈을 갖고 있다 . 병졸은 하사의 꿈을 꾸고 , 하사는 대위의 꿈을 꾸며 대위는 소령이나 대령의 꿈을 꾸고 있다 .

세상은 일품 요리 집과 비슷하다 . 옆 테이블에서 주문한 요리가 자기 것보다 더 많아 보이고 맛있어 보이는 법이다 . 오늘날 중국의 어느 대학교수는 이러한 심리에 대하여 경고하고 있다 . 남의 마누라 는 더 아름다워 보이고 , 저술은 자기 저술이 잘 된 것으로 보인다 . 아무튼 세상 사람들은 아무도 좀처럼 만족을 느끼며 살지 못 한다 . 그리하여 저마다 자기 아닌 누가 되고 싶어 한다 .

인간은 상상력과 꿈꾸는 능력을 갖고 있는 것이 특색이다 . 상상력 이 클수록 불만이 많아진다 . 상상력이 풍부한 아이를 다루기 어려운 것은 이 때문이다 .

인간은 소처럼 행복하고 만족스럽기보다는 원숭이와 같이 슬프고 권태로운 얼굴을 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

가령 이혼 같은 것을 두고 보더라도 상상력이 풍부한 이상주의자들 사이에 빈번히 일어나고 있다 . 이상적인 인생의 반려를 갖고 싶 다는 생각은 상상력이 희박하고 이상주의적인 요소가 적은 사람에게 서는 좀처럼 찾아볼 수 없다 . 대체로 인류는 이 이상주의로 말미암아 향상도 되며 동시에 타락도 한다 . 어쨌든 상상력이 없이는 인류의 진보는 바랄 수 없는 것이다 .

인간에게는 향상심이 있다 . 이것은 반가운 일로 향상심은 고귀한 정신이다 . 사실 우리는 개인으로서나 국민으로서 저마다 꿈을 갖고 있으며 그 꿈이 크든 적든 거기 따라서 움직인다 .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보다 꿈이 크다 . 그리고 어떤 집 아이들은 꿈이 많지만 어떤 집 아이들은 그렇지 못 하다 . 나는 꿈 많은 아이들을 좋아한다 .

꿈이 많은 자는 남달리 슬픔이 많다 . 그러나 그것으로 족하다 . 슬픔이 많기 때문에 더욱 큰 기쁨과 감동을 느낄 수 있으며 나아가서는 어떤 황홀경에 도달할 수도 있는 것이다 . 마치 라디오가 공중에 서 음악을 수신하는 것처럼 인간은 상상의 신호를 받아들이는 수신기와 같은 작용을 하고 있는 것이다 . 감수성이 예민한 세트는 극히 미량한 단파도 감수한다 . 먼 곳에서 오는 약하고 희미한 음악이 감수하기 어렵다고 해서 나쁜 음악이라고 할 수는 없다 .

소년시절의 꿈은 흔히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그렇게 허황된 것은 아니다 . 이 무렵의 꿈은 평생토록 남아 있다 . 만일 내가 작가라면 누구보다도 안데르센이 되고 싶다 . 그리하여 인어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하고 공상을 하거나 , 크게 자라면 물 위로 떠오르리라는 생각을 하면서 인어에 대한 이야기를 쓰며 마치 자기 자신이 인 어가 된 것 같이 생각한다면 그것은 가장 섬세하고 아름다운 기쁨의 하나가 될 것이다 .

아이들은 골목이나 지붕 밑이나 곳간 속이나 또는 시냇가에 뒹굴면서 언제나 꿈을 꾸고 있는 것이다 . 그런데 그 꿈은 곧잘 실현이 된다 .

에디슨도 꿈 많은 소년이었다 . 스티븐스이나 스코트 역시 그러 하였다 . 세 사람 다 어린 시절에 남달리 꿈이 많았다 . 그런데 이런 마술 같은 꿈속에서 일찍이 인간이 보지 못 한 눈부시게 아름다운 피 륙이 짜이는 것이다 . 이렇게 소수의 아이들은 꿈이 많으며 그 꿈의 내용은 다를지라도 기쁨은 마찬가지다 . 그들은 마음속에 동경을 갖 고 있다 . 잠자리 속에서 언제나 멋대로의 동경에 잠기곤 한다 . 이러한 동경을 가슴에 지닌 채 아침에 눈을 뜨면 하룻밤 사이의 꿈이 사 실이기를 바라면서 다시 잠들기도 한다 .

꿈 이야기는 좀처럼 다른 사람에게 하지 않는다 . 꿈은 자기만의 것이다 . 그리하여 꿈은 마음속에서 깊이 자라고 나중에는 자아의 한 부분을 차지하게 되는 것이다 . 아이들의 꿈은 특히 현실성이 농후하 다 . 꿈은 여러 국민의 경우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 꿈을 갖고 있지 않은 국민은 없다 . 그런데 그 꿈은 여러 세대에 걸쳐 계속되는 것이 보통이다 . 그 꿈 가운데는 고상한 것도 있고 저속한 것도 있다 . 강대국이 되어 다른 나라를 정복하려는 꿈은 흉악하여 평화의 꿈을 꾸고 있는 국민보다 언제나 큰 괴로움에 부딪치게 마련이다 .

그러나 이런 정복에의 꿈과는 달리 훌륭한 꿈도 얼마든지 있다 . 예컨대 이상 세계를 건설하려는 꿈 , 즉 각 국민이 화목하게 살 수 있는 평화로운 세계를 건설하여 잔인함과 흉악함과 가난함과 고통을 제거하겠다는 꿈들이 그것이다 . 악몽은 인도주의의 훌륭한 꿈을 훼방하기 쉽다 . 그리하여 좋은 꿈과 나쁜 꿈 사이에 싸움이 그치지 않는다 . 인간은 재물을 위해서도 싸우지만 꿈을 위해서도 싸운다 . 이 경우에 꿈은 환영의 세계에서 현실 세계로 내려와 실제로 영향을 발 휘한다 .

꿈은 막연하지만 실현되기까지는 사람의 마음을 진정시켜 주지 않 는다 . 그것은 마치 땅 속에서 싹튼 씨가 반드시 햇빛을 찾아 땅 위 로 고개를 내미는 것과 같다 .

꿈은 매우 현실적인 것이다 . 현실성이 희박한 어지러운 꿈을 꾸면 매우 해롭다 . 그러한 꿈은 도피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 몽상가는 흔히 이 세상에서 도피하는 꿈을 잘 꾼다 .

『 파랑새』는 언제나 로맨티스트의 꿈을 자극한다 . 인간에게는 각 자 현재의 자기와는 다른 사람이 되어 보겠다는 욕망이 있다 . 그리 하여 현재의 생활에서 벗어나 자기 마음에 맞는 어떤 변화를 일으키 려고 한다 . 이것은 커다란 매력이 아닐 수 없다 .

예컨대 전쟁의 경우를 생각해 보자 . 거기에는 언제나 매력이 따른 다 . 전쟁이 일어나면 시청 서기도 군복을 입고 각반을 차고 무전여 행을 할 기회가 돌아온다 . 그러나 참호 속에서 3 년쯤 싸움을 계속하 면 휴전을 갈망하고 평화를 그리워하게 된다 . 휴전이 되면 출정한 군인들은 각각 자기 집으로 돌아와 신사복에 빨간 넥타이를 맬 수 있는 것이다 . 인간에게는 이러한 자극이 필요하다 . 그러므로 전쟁을 폐지하면 각국 정부에서는 20 세에서 45 세까지의 국민을 전시와 마찬가지로 징집하여 10 년에 한 번씩 유럽에 데리고 가서 박람회라도 구경시킬 필요가 있을 것이다 .

영국 정부는 군비로 50 억 파운드를 서슴지 않고 던지고 있다 . 50 억 파운드면 영국 사람을 모두 리비에라까지 여행시킬 수 있는 금액이다 . 그러나 군비는 필요하며 여행은 쓸데없는 낭비라고 하니 나는 아무래도 납득할 수 없다 . 오히려 반대이다 . 여행은 필요하지만 전 쟁은 낭비가 아닌가 ?

그밖에 유토피아의 꿈 , 장생불사의 꿈이 있다 . 이 장생불사의 꿈은 인간미가 있다 . 동서고금에 이 꿈이 없는 곳이 없으니 주목할 만한 일이다 . 그런데 이 유토피아의 꿈이나 장생불사의 꿈은 종잡을 수 없어 불멸의 생명이 손에 잡혔을 때 어떻게 대처해야 좋을지 몰 라 갈팡질팡한다 . 따라서 이 장생불사의 소원은 정반대로 자살에의 유혹과 같은 것이다 . 그 어느 경우에 있어서나 자기 멋대로 현세를 부정하고 있다 . 어찌하여 현세가 그렇게 못 마땅할까 ? 봄날에 햇빛을 담뿍 쏘이며 들길을 한 차례 거닐고 나면 이런 의문에 대하여 답변할 필요조차 느끼지 않는다 . 그는 다만 기가 막혀서 입을 딱 벌리고 말 것이다 .

유토피아의 꿈도 이와 비슷한 것이다 . 이상주의란 어떤 다른 세계 의 질서를 바라는 심리상태이다 .

이상을 운운하는 자유주의자들은 언제나 자기가 살고 있는 사회나 국가가 최악의 것이라고 생각한다 . 그도 역시 요리 집에 가서 옆에 앉은 사람이 주문한 요리가 자기 것보다 더 맛이 있으리라고 생각하 는 사람이다 . 『뉴욕 타임즈』의 화제란의 필자는 말한 적이 있다 . 즉 이런 자유주의자들의 눈에는 러시아의 토니에플 댐만이 진짜 둑으로 보이며 ,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아직 댐을 만든 일도 없는 것 같이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 따라서 그들은 지하철도 소비에트만이 만들 었다고 생각할 것이다 . 그런가 하면 파시스트의 신문은 오직 자기네 파시스트 나라에서만 현명하고 정당하고 능률적인 정치를 하고 있다 고 국민들에게 설득하고 있다 . 이런 독선적인 생각 속에 파시스트의 선전부 간부나 유토피아적 자유주의자들이 빠지는 위험이 내재해 있 는 것이다 . 이러한 폐단을 고치는 데는 유머 감각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 .

 

 

4. 유머에 대하여

 

유머의 중요성은 오늘날까지 충분히 인정되어 있지 않다 . 유머를 사용하는 데 따라서 우리의 문화생활이 질적으로 성격적으로 변화될 수 있는 것이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유머가 정치 , 학문 , 그리고 인생 자체에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지 분명히 모르고 있는 형편이다 .

유머의 기능은 물리적이라기보다는 화학적이다 . 그리하여 사상과 경험의 바탕을 변질시켜 버린다 . 카이젤은 얼굴에 웃음을 담지 못 한 까닭에 그의 제국을 잃어버렸다 . 한편 미국식으로 말하면 카이젤은 웃지 않았기 때문에 수십 억 불을 탕진하였던 것이다 . 그도 사생활 에서는 웃었겠지만 공적 생활에서는 무엇이 못 마땅하였던지 언제나 그 카이젤 수염을 삐죽이 꼬아 올리고는 엄격하고 사나운 얼굴을 하 고 있었다 . 아무튼 카이젤의 웃음이 자기 운명을 좌우하는 커다란 요인이 된 것은 사실이다 . 카이젤의 웃음이란 으레 승리의 웃음 , 성공의 웃음 , 세계 제압의 웃음이었다 . 그가 언제 웃을 것인지 또는 무엇에 대하여 웃어야 할 것인지 몰랐기 때문에 독일은 전쟁에 패하 고 말았다 . 그의 꿈은 유머의 통제를 받지 못하였던 것이다 .

민주주의의 대통령은 웃을 줄 알고 있는데 전제주의 국가의 독재 자들은 언제나 찌푸린 얼굴을 하고 있다 . 턱을 쑥 내밀고 딱 버티고 앉은 채 아랫입술을 삐죽거리며 , 천하의 대사는 오직 자기의 두 어깨에 달려 있으니 자기가 아니면 인류를 구제할 수 없다는 얼굴을 하고 있다 . 이런 말은 독재자의 귀에 제일 따끔하게 들릴 것이다 . 루즈벨트는 공석에서 곧잘 웃었다 . 이것은 자기 자신을 위해서도 매 우 좋은 일이지만 그 미소를 보고 싶어 하는 국민들에게도 좋은 선물이 아닐 수 없다 . 그러나 유럽의 독재자들의 미소는 대체 어디서 찾아볼 수 있을까 ? 혹시 그 나라 백성들은 그 독재자의 미소를 보기 싫어하는 것일까 ? 또는 그 독재자들은 자기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애써 그런 찌푸린 표정을 해야만 하는 것일까 ?

그들은 어느 때는 위협을 느끼는 듯한 표정을 하는가 하면 어느 때는 제법 위엄이 당당한 듯한 얼굴을 하고 또 어느 때는 잔뜩 화가 난 표정을 한다 . 왜 이들은 이렇게 남달리 엄숙한 얼굴을 하고 있어야만 하는가 . 나는 지금까지 히틀러에 대하여 읽은 글 가운데서 제일 마음에 드는 것은 그가 사생활에서는 완전히 자연인으로 돌아갔다는 사실이다 . 그 때문에 나는 히틀러를 약간 달리 보았다 . 그러나 아무리 독재자라도 언제나 화가 난 얼굴을 하거나 뽐내는 얼굴을 해 야 한다면 , 그에겐 반드시 어딘가 잘못된 점이 있을 것이다 . 아니 독재정치 자체가 기분이 좋을 리가 없는 것이다 . 우리는 지금 여기서 독재자의 웃음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지만 이것은 결코 한가한 농담일 수 없다 .

통치자의 얼굴에 미소가 사라졌다면 문제는 중요하다 . 왜냐하면 그는 모든 무기를 한 손에 쥐고 있기 때문이다 . 정치에서 유머가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크다고 하겠다 . 우리가 여기서 언제나 농담을 좋아하는 통치자가 조성하는 분위기를 머릿속에 그려보면 능히 알 수 있다 . 우리는 앞의 장에서 말한 “ 꿈꾸는 힘”을 발휘하여 상상해 보기로 하자 . 가령 세계 최대의 유머리스트 5, 6 명을 국제회의에 파 견하여 그들에게 전체군주와 같은 정권을 맡겨 보라 . 그것으로 세계는 능히 구원을 받을 것이다 . 유머에는 반드시 상식과 이성적 정신 이 따르며 모순과 어리석은 토론과 괴상망측한 대화가 등장한다 . 그 런가하면 대단히 민감한 정신력도 작용한다 . 유머야말로 인간의 지 혜가 지닐 수 있는 최고의 형식이므로 유머리스트를 파견한 나라들 은 가장 온건하고 원만한 인물들을 대표로 선출한 셈이다 . 아일랜드 는 쇼를 대표로 파견하기로 하자 . 그리고 캐나다의 대표로는 디콕을 , 영국은 체스터튼이 죽었으므로 오드하우스나 헉슬리를 대표로 선출하자 . 미국은 로저스가 살아 있었다면 훌륭한 외교를 하였을 것 이다 . 그러나 그는 이미 죽었으므로 벤치레나 브라운을 모셔오자 . 그리고 이탈리아 , 프랑스 , 독일 , 러시아에서도 각각 적당한 사람이 나올 것이다 .

세계대전의 위기가 절박하였을 때 이런 인물들이 국제회의에 파견되었다고 생각해 보자 . 그들이 아무리 애써도 전쟁을 일으킬 수는 없었을 것이다 . 조용히 생각해 보라 , 안 그런가 ?

이 한 그룹의 외교관들이 실제로 전쟁을 일으키리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다 . 아니 전쟁은 계획도 못 할 것이다 . 유머 감각이 그것을 용납하지 않기 때문이다 . 어느 한 나라가 다른 나라에 대하여 싸움을 일으킬 때에는 국민 전체가 거의 미치광이가 되어 버리며 그 들은 저마다 자기 나라만 옳다고 생각하고 신은 자기편이라고 확신하지만 그들보다 상식이 풍부한 유머리스트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다 . 쇼는 국제적 분규의 원인이 바로 아일랜드에 있다고 외칠 것이며 , 베를린의 한 만화가는 다 독일이 잘못한 탓이라고 사과할 것이고 , 브라운은 모든 실수를 다 미국이 저질렀다고 주장할 것이며 , 이에 대하여 디콕은 의자에 앉은 채 인류를 위해 사과를 하고 , 이런 어리석은 일로 해서한 나라가 다른 나라보다 우월하다고 주장할 수 없음을 우리에게 상기시킬 것이다 . 회의의 분위기는 대체로 이렇게 돌아갈 터인데 유머로 어찌 충돌을 할 수 있겠는가 ?

유능하고 , 영리하고 , 야심이 많고 , 거만한 자들은 , 이상하게도 한 편으로는 가장 겁이 많고 얼빠지고 유머의 깊은 맛을 모르며 현명하 지 못 하다 . 그리하여 언제나 쓸데없는 문제를 열심히 갑론을박하곤 한다 . 그러나 보다 더 넓은 정신 영토를 갖고 있는 유머리스트들은 좀 더 모든 일의 본질을 직감할 수 있다 . 그런데 현실은 보는 바와 같이 , 나지막한 소리로 수군거리며 신중한 태도로 조심스럽게 임하 지 못 하는 외교관은 자격이 없다는 것이다 . 그렇다고 해서 억지로 세계를 구제하기 위한 유머리스트들의 국제회의를 개최할 필요는 없 다 . 이 우수한 유머 감각은 모든 사람에게 흡족히 제공되어 있기 때문이다 . 그러므로 유럽을 파멸로 인도하는 전쟁의 위기가 도래하였 을 때는 그 해결을 위한 국제회의에 가장 서투른 외교관을 파견하여 도 무방할 것이다 . 즉 가장 노련하고 자신만만하고 야심에 가득 차 나지막한 소리로 수군거리며 임기웅변의 태도를 취하며 특히 인류를 위한 봉사정신이 농후한 외교관을 파견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 다만 그 경우에 매일 오전 오후에 걸쳐 회의가 시작될 때마다 미키마우스를 10 분 동안씩만 강제로 구경시키면 전쟁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

이것은 유머의 화학적 작용 , 즉 사상의 바탕을 변화시키는 작용이 라고 하겠다 . 이 작용이야말로 인류문화의 본질에까지 영향력을 미쳐서 앞으로 인류사회가 중용시대에 이르는 길을 개척하게 될 것이다 . 인류에게 이 중용시대보다 더 큰 이상은 바랄 수 없다 . 왜냐하 면 보다 더 큰 이상적 정신을 가지고 건전한 상식과 소박한 견해와 평화를 사랑하는 마음과 문화를 애호하는 기질을 오늘보다 더 많이 갖춘 인종이 나타나는 것이 가장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 인류의 이상 세계는 결코 합리적인 세계는 아니다 . 또한 어느 의미에서나 완전한 세계도 아니다 . 그것은 그 불완전성이 곧 인식되어 모든 분 쟁이 깨끗이 해결되는 세계이다 . 이것이야말로 인간이 바랄 수 있는 최선의 것이다 . 또한 이룰 수 있는 최고의 꿈이기도 하다 . 그 속에는 다음과 같은 특징이 내포되어 있다 . 즉 소박한 사고 , 명랑한 철학 , 그리고 중용문화를 가능케 하는 건전한 상식이 그것이다 . 그런데 이런 것은 유머의 특질도 된다 . 그러므로 유머에서 발생되어야 할 성질의 것이다 .

이런 새로운 세계를 상상하는 것은 손쉬운 일이 아니다 . 현재의 세계와 너무나 동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 도대체 현대인의 생활은 지 나치게 복잡하다 . 과학은 너무나 번거롭고 철학은 과도로 우울하고 사상은 난잡하기 그지없다 . 사상과 학문이 이렇게 난해하고 복잡하기 때문에 이 세계는 오늘날과 같이 불행하게 되었다 . 그러므로 생활과 사상의 단순성은 문명의 가장 이상적인 요건이 아닐 수 없다 . 문명이 이 단순성을 상실하여 난해한 법칙이 참된 사리를 어둡게 하는 한 퇴폐와 쇠퇴 일로를 더듬는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

이러한 사태가 계속되면 인간은 스스로가 만들어낸 개념 , 사상 , 야심 , 사회조직의 노예가 되고 만다 . 이러한 짐을 걸머지고 있는 인류는 여기서 벗어나 이를 지배하는 지위에 오를 가망이 보이지 않는다 . 그러나 다행히도 우리에게는 이 모든 개념 , 사상 , 야심 등을 초월하여 웃음으로 바라볼 수 있는 정신력이 있다 . 이 정신력이 유머리스트의 묘리인 것이다 . 골프나 당구 선수가 그 공을 다루듯이 , 슬기로운 목동이 그 올가미를 잘 놀리듯이 유머리스트는 사상과 개념을 잘 다룬다 . 거기에는 숙련에서 오는 편안과 정확성과 경쾌한 묘미가 있다 . 요컨대 자기의 사상을 때에 따라 힘들이지 않고 표현할 수 있는 자만이 그 사상의 주인공이며 , 이러한 주인공만이 사상에 예속되지 않는다 . 무슨 일이고 몰두한다는 것은 애써 노력함을 입증 하며 , 애써 노력하는 한 아직 숙달되지 못 함을 입증한다 . 세상에 흔히 볼 수 있는 벼락부자나 벼락감투들은 어딘가 어색한 면이 엿보인 다 . 이들은 언제나 자기의 본바탕이 꺼림칙하게 남아 있어 침착성을 잃기가 일쑤이다 . 이것은 지나치게 노력하는 저술가의 경우도 마찬 가지이다 . 그에게는 어딘가 모르게 무리가 있고 글이 놓일 데 놓이기 어려운 것이다 . 왜냐하면 자기의 사상을 손쉽게 이해하기까지에 이르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

역설처럼 보일지 모르나 , 사상의 단순성이란 그 길이의 증거요 상징인 것이다 . 학문이나 또는 그 저술에 있어서 이 단순성에 도달하기란 그리 쉬운 것이 아니다 . 각 사상을 명확하게 표현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 사상을 명확하게 이해할 때에만 비로소 그 단순성에 이를 수 있기 때문이다 . 저술가가 어떤 개념구성 때문에 고생하고 있으면 그 개념도 저술가 때문에 고생하고 있는 것이다 . 일반적으로 우등생으로 학교를 갓 나온 젊은 대학 조교수의 강연은 알아듣기 어렵고 번거로운 반면에 노련한 교수들의 강의는 설명이 단순하고 알기 쉬운 것이다 . 이것으로도 내가 지금 한 말이 납득될 것이다 . 젊은 교수가 현학적인 말을 쓰지 않는다면 참으로 기특한 일로서 큰 기대를 가질 만하다 . 복잡한 전공에서 단순한 지식으로 , 즉 전문가에서 상식가에 이르려면 그 지식을 잘 소화하고 있어야 한 다 . 이것은 신체의 신진대사의 작용과 비슷하다 .

아무리 학식이 깊은 학자라도 그 지식을 몸소 소화하여 자신의 인생관과 관련시킬 때까지는 그 전문 지식을 단순한 말로 나타낼 수 없는 것이다 . 그가 애써 지식―윌리엄 제임스가 말하는 이른바 심리적 지식―을 탐구하고 있는 동안은 먼 길을 걸어 피로한 나머지 냉수를 마시는 것처럼 “몇 번이고 담배 한 대 피우고 나서”를 되풀이할 것이다 . 그리하여 담배를 한 대 피우는 동안에 그 전문가는 이렇게 자문해 볼 것이다 . “대체 나는 무엇을 논하고 있는가 ? ” 단순성 은 소화에서 비롯되며 성숙을 전제로 하고 있다 . 나이를 먹는 데 따 라서 우리의 사상은 점점 분명해져서 별로 중요하지 않은 점이나 잘못 된 점은 제지하여 버리므로 , 우리로 하여금 불안에 빠지지 않게 한다 . 그리고 관념은 더욱 명확한 형태를 취하여 산만한 사상의 줄기가 점차로 간편한 공식의 형태로 정리되며 ( 어느 맑게 갠 날 아침 같은 때 , 그런 공식이 갑자기 머릿속에 떠오른다 ) 그렇게 되면 비로소 이른바 예지라는 진여 ( 眞如 ) 의 경지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다 .

그렇게 되면 이미 사상을 표현하기 위해 노력하는 일이 없고 , 진 리는 이미 명확하게 되었으므로 간단히 이해할 수 있으며 그것을 단 순한 공식으로 나타내는 편이 자연스럽다는 생각을 하게 되며 커다란 기쁨에 잠기게 마련이다 . 사상과 표현형식이 자연스럽다는 것은 중국의 시인이나 비평가들이 대단히 존중하는 바로서 그것은 점차 성숙되어 감을 뜻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 원숙한 경계에 도달한 소동 파의 산문을 가리켜 “ 소동파는 이제 자연의 경지에 가까워졌다”라고 말한다 . 다시 말하면 그가 청년시절에 즐겨 사용하던 과장이나 현학 적이며 대가인척하던 태도나 문학적으로 수식하려는 근성을 청산한 문체를 말하는 것이다 .

그런데 유머의 감각이 이 사고의 단순성을 조장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 이론가가 지나치게 개념에 사로잡히는 데 반해서 유머리스트는 사실 자체에 접근해 간다 . 사상이 복잡해지는 것은 개념에 구애되기 때문이다 . 그러나 유머리스트는 개념과 현실 사이에 개재된 모순을 재빠르게 파악하여 상식이나 기지를 구사하여 문제를 단순화한다 .

이 유머리스트는 언제나 현실과 접해 있으므로 탄력성이 있고 경쾌하고 섬세한 묘미가 있다 . 따라서 모든 형식 , 허위 , 현학적 난센스 , 아카데믹한 우열성 , 그리고 사회적인 허식은 어느덧 슬그머니 내쫓기고 만다 . 그리하여 사려가 자연스럽고 기지가 풍부하여 스스로 현자의 풍모를 갖추게 된다 . 생활과 사고가 단순하고 명확한 것을 특징으로 하는 지각 있고 건전한 정신은 지금보다 훨씬 유머러스 하게 생각하게 될 때만 비로소 조성된다는 것을 내가 믿는 까닭은 이 때문이다 .

 

 

5. 인 간성의 무궤도에 대하여

 

여러 가지 논란은 있겠지만 나는 어디까지나 자유인을 찬미한다 . 단연코 자유인을 찬미한다 . 집 없는 방랑객을 찬미한다 . “메리야 , 메 리야 , 그건 안 된다”라는 구절에 동감한다 . 인간의 심술궂은 성격이 야말로 인류문명의 유일한 기둥이 되는 것이다 . 인간은 소에서 진화 된 것이 아니라 원숭이에서 진화된 것이기 때문이다 . 성질이 심술궂 다는 것은 인간이 원숭이에서 진화하여 , 원숭이의 고상한 것에 불과 함을 의미한다 . 소는 소대로 자기 자신에 만족하며 온순하게 살아가 는 편이 좋을 것이다 . 따라서 인간의 명령이 한 번 떨어지면 타고난 바탕대로 점잖게 고분고분 목장에도 가고 도살장에도 가며 언제나 주인을 위해 자기를 희생할 것을 명심하라 .

나는 한 인간으로서 인간을 사랑하고 있다 . 그러므로 소와 같은 것이 되고 싶지는 않다 . 만일 소가 인간의 콧대가 센 것을 알게 되어 반란을 일으키고 심술궂은 행동을 감행하거나 또는 종전처럼 기계적으로 움직이지 않게 되면 소를 인간대접해도 무방하다 .

내가 독재주의를 거부하는 것은 생물학적 이유이다 . 독재자는 소 하고는 함께 살 수 있으나 원숭이하고는 함께 살 수 없다 . 사실 나는 서양문명에 대하여 종전과 같이 별로 경의를 표하지 않게 되었다 . 나는 일찍이 중국문명을 부끄럽게 생각하고 서양문명을 찬미해 왔었다 . 중국의 헌법과 민권사상이 발달되지 못 한 것을 그 문명의 탓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 또한 입헌정체나 공화당이나 왕당을 문화의 진보라고 생각해 왔었다 . 그런데 오늘날 서양문명의 발상지에서 , 인권도 개인의 자유도 찾아볼 수 없는 것이다 . 심지어 자고로 중국에서도 용납되어 온 신앙의 자유까지도 유린되어 있다 . 입헌정체는 이젠 최고의 정치 형태라고 볼 수 없게 되었다 . 중앙 유럽에서는 봉건시대보다도 더 많은 에우리피데스 같은 노예가 존재하며 , 중 국 사람보다 논리는 훌륭하지만 상식은 뒤떨어진 나라가 서구에도 생기게 되었다 . 그 꼴을 보니 통쾌하고 흐뭇하다 .

나는 이제 유럽의 여러 군자들에게 , 중국 고대의 사상인 적래적거 ( 適來適去 ) , 무애자재 ( 無碍自在 ) , 천지에 몸을 맡기는 자유방랑의 경지 를 내세워 몰래 숨겨둔 최후의 방패로 사용하는 것은 손쉬운 일이다 . 미안한 말이지만 , 서양에 이보다 더 훌륭한 진리의 열쇠가 있을까 ? 서양에 인간의 자유와 민권의 교의가 엄숙하고 뿌리 깊은 신념 내지 본능임을 보여주는 그 무엇이 있었던가 ? 이것은 제복을 입은 노동자를 예찬하는 현대 사조가 사라진 후로 문명을 제자리에 돌아 가도록 사상의 방향을 바꾸는 힘을 갖고 있는 것이다 . 이러한 것이 서양에 있으면 보여주기 바란다 .

유럽에서 싹튼 자유의 전통이 어찌하여 버림을 받고 또 어찌하여 오늘날 그릇된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는가를 검토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 거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 첫째 , 오늘날 생산을 위주로 하는 경제체제의 결과이며 , 둘째는 빅토리아 중기의 기계론적 고찰 의 유산이다 . 모든 산업주의―사회적 , 경제적 , 정치적―가 흥성한 현 대에 있어서 인간이 모든 반항정신을 상실하고 각자의 위엄을 저버리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다 . 인간적인 모든 사고를 압도하는 경제 문제와 경제사상이 버티고 있기 때문에 보다 더 인간미가 있는 지식 이나 개인적 생활문제를 다루는 인간본위의 철학에 대해서 우리는 전혀 모르거나 또는 무관심한 처지에 있다 . 마치 위궤양 환자가 언제나 위장타령만 하고 있는 것처럼 , 경제적 질환에 걸려 있는 우리는 언제나 돈에 대한 생각만 한다 . 그리하여 개인에 대해서는 전혀 무관심하며 자기 자신을 거의 망각하고 있다 . 인간이 인간다운 것은 인간인 까닭이다 .

그런데 오늘에 와서는 인간을 가리켜 물질적 법칙이나 경제적 원 리에 맹목적으로 복종하는 자동인형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 우리는 이미 인간을 인간으로 생각하지 않고 톱니바퀴의 한 톱니로서 , 또는 조합이나 계급의 일원으로서 , 혹은 이민 할당제로 입국의 허가를 받 은 이방인으로서 , 그리고 좀 경멸하는 어투로 말하면 쁘띠부르주아 로서 , 고약한 자본가로서 , 또는 노동자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동지로 생각하게 되었다 . 쁘띠부르주아니 , 자본가니 , 노동자니 하는 따위의 딱지를 한 장 붙이기만 하면 인간을 충분히 이해한 것이 된다 . 그리 하여 인간은 그 분리에 따라서 미움을 받기도 하고 동지로서 환영을 받기도 한다 . 그러므로 거기에는 개인이나 인간을 찾아볼 수 없다 . 거기 있는 것은 단지 하나의 계급에 불과하다 . 이것은 사물을 너무나 단순하게 생각하는 것이다 . 이리하여 이상으로서의 자유인은 완전히 자취를 감춰 버리고 말았다 . 또한 환경에 대하여 끈기 있고 용감하게 도전하는 자유인의 소지를 지닌 사람도 볼 수 없다 . 거기에는 인간 대신에 계급의 이론이 있을 뿐이다 . 사상이나 개인적 취미나 관습 대신에 이데올로기 , 즉 계급사상이 있다 . 개성 대신에 맹목적인 힘이 있다 . 개인 대신에 모든 인간 활동을 계약하고 예견하는 마르크스적 변증법이 있다 . 이리하여 인간은 저마다 개미와 같이 되기 위해 기꺼이 일을 하고 있다 .

나는 지금 진부한 민주적 개인주의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 그러나 공산주의자들도 마르크스가 100 년 전에 헤겔의 논리학과 빅토리아 중기의 영국 정통적 경제학파의 산물임을 상기하기 바란다 . 오늘에 와서 그 논리학이나 경제 사상만큼 진부한 것은 없다 . 특히 중국의 인간주의적 견지에서 보면 이것처럼 납득이 가지 않고 거짓이 많고 상식에서 벗어나는 것은 없다 .

그러나 기계가 자연의 정복을 자랑하고 있는 시대에 기계론적 인간관이 대두된 이유는 알고도 남음이 있다 . 이 주장은 결국 도용된 것이다 . 그 기계적 논리를 인간사회에 적용하여 자연법칙을 인간 문제의 연구가들에게도 당당히 요구하게 된 것이다 . 이리하여 환경은 인간보다 더 위대하며 인간을 하나의 방정식으로 풀어낼 수도 있다고 주장하기에 이른 것이다 .

그것은 경제학의 입장에서는 용납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생물학의 견지에서는 결코 용납될 수 없다 . 생물학에 의하면 외계에 대한 개인의 반응력은 물질적 환경과 더불어 생명이 성장하는 요인이 된다 . 이것은 마치 현명한 의사가 환자의 기질과 그 반응력이 투병에 중요 한 구실을 한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다 . 오늘날 의사들은 이 개인의 적응력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을 분명히 알게 되었다 . 병 리학적으로나 또는 선례로 보아 생명을 잃을 수밖에 없는 많은 환자 가 손쉽게 그리고 간단히 죽음을 면하고 병에서 벗어나 의사들을 놀 라게 하는 일이 적지 않다 . 그러므로 같은 병에 걸린 두 사람의 환 자에게 같은 방식으로 치료를 하면 같은 결과를 초래하리라고 생각 하는 의사가 있다면 그것은 매우 위험한 태도라고 보아야 할 것이 다 . 그런데 이러한 의사와 마찬가지로 위태로운 존재는 개성이 다른 개인의 반응력을 염두에 두지 않는 , 따라서 힘차고 억세고 호탕한 인간의 행동을 저버리고 있는 사회철학자들이다 .

나는 경제학을 잘 모른다 . 그러나 경제학도 나를 잘 모를 것이다 . 오늘날 경제학이 여전히 발버둥을 치며 하나의 과학으로서 행세하지 못 하는 원인도 거기에 있다 . 즉 원인은 경제학이 인간을 떠났기 때 문이다 . 만일 경제학이 상품의 연구에만 몰두하고 인간적인 동기에 대하여 탐구하지 않으면 결코 과학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

그런데 한편 인간적 동기까지 탐구한다면 그것은 더욱 과학이라고 할 수 없다 . 가령 그것이 통계학적 평균치에 의하여 인간적 동기를 탐구해 나간다면 기껏해야 사이비 과학에 지나지 못 할 것이다 . 나는 과학을 위해 이 사실을 서글프게 생각한다 . 경제학은 인간의 정신을 연구하는데 적합한 방법을 생각해 내지 못 하였다 . 그렇다고 해서 경 제학이 만일 그 수학적 연구방법과 특히 자랑삼는 통계학자의 평균치 산출방법을 인간 활동의 영역에까지 적용시키면 더욱 혼란에 빠질 우려가 있다 . 중요한 경제적 수단이 채용되려고 할 때마다 두 사람의 경제전문가 또는 사계의 권위자가 전혀 상반되는 입장에서 대 립되는 것은 그 때문이다 . 경제학은 결국 인간정신에 뿌리박고 있는 각자의 개성에 그 기초를 두고 있을 터이지만 , 이에 대하여 전문가들은 그 개념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 .

만일 어느 학자가 영국이 금본위제를 폐지하면 파멸이 온다고 생 각한다면 , 다른 학자는 그와 반대로 금본위제를 폐지하는 것만이 경 제위기를 구제하는 유일한 방도라고 생각한다 . 주식을 두고 말하면 언제 사서 언제 파는 것이 좋은지 , 아무리 우수한 전문가라도 이치 에 맞게 예언할 수는 없다 . 증권거래소에서 투기가 행해지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 증권거래소에서 아무리 세밀하게 전 세계의 모든 자료 를 수집하여도 금이나 은 혹은 상품의 오르내림을 일기예보와 같이 과학적으로 미리 알 수는 없다 .

이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 왜냐하면 거기에는 언제나 인적 요소가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다 . 즉 지나치게 많은 사람들이 팔러 나오면 일부에서는 사들이기 시작하며 , 또 지나치게 많은 사람이 사기 시작 하면 일부의 사람만이 팔러 나온다 . 이렇게 거기에는 인간적 반발성과 불확실성의 요소가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 모두 바보처럼 보일 것이며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 이 경우에 누가 바보인지 이제는 오직 장차 다가올 사실만이 입증할 수 있을 것이다 . 이것은 인 간의 행위가 제멋대로 변덕을 부린다는 산 증거이다 . 그런데 그것은 실제의 상품거래에 있어서만 진리인 것이 아니라 인간이 역사의 방향을 결정하는 경우에 있어서나 또한 도덕 , 습관 , 사회개량 등등에 대한 반응이나 작용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의 진리이다 .

 

 

6. 개 인의 존엄성에 대하여

 

현대인은 여러 가지 사상 속에 살고 있다 . 어떤 사람은 커다란 사회 혁명의 위협을 받는 민주주의 국가에 살고 있으며 , 어떤 사람은 그 민주주의 사상에 더욱 복귀하고 있는 공산주의 나라에 살고 있다 . 그런가 하면 어떤 사람은 독재체제 하에 살고 있다 ( 살고 있는 사람이 죽기까지 독재체제가 남을지 혹은 망할지 그 둘 중의 하나이지만 ). 이렇게 여러 가지 경우가 있을 터이지만 인간의 사생활은 때의 흐름 에 따라서 여러 가지 양상을 취하면서도 아직은 개성을 한 개의 실체로 보유해 나가고 있다 .

철학은 개인에서 시작하여 개인에서 끝난다 . 개인은 생명의 최종 단위이기 때문이다 . 개인은 그 자체가 목적이며 다른 무엇을 창조하 기 위한 수단이 아니다 . 영국과 같은 세계 최대의 제국도 국민 하나하나가 행복한 생활을 하기 위해 존재한다 .

그러나 기만적인 철학은 그 국민 하나하나가 대영제국을 유지해 나가기 위해 살고 있다는 것이다 . 아무리 훌륭한 사회철학도 영국과 같은 나라에 살면 누구나 행복을 누릴 수 있을 것이라는 견해 이상의 말을 하지 않을 것이다 . 만일 문명의 최종 목적이 개인의 행복한 생활에 있음을 부정하는 사회철학이 있다면 그것은 병든 정신의 소산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

여러 가지 형태의 문화에 대한 최종의 가치는 그 문화가 어떤 남 녀의 유형을 조성하고 있느냐에 따라서 결정된다고 생각한다 . 미국 의 가장 현명하고 박식한 사람 중 한 사람인 휘트먼이 그의 논문 『 민 주적 형태』 속에서 모든 문명의 최종 목적으로서 개체의 원리 , 즉 개성주의를 논하고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

생각이 여기에 미친 때 풍부하고 윤택하고 변화무쌍한 개성주의를 토대로 문명이 꽃피고 있는 것이다 . 종교 , 예술 , 학교 등을 갖고 있는 문명은 필경 어떤 목적이 있는 것일까 ? 인생만사가 다 이 개성주 의의 덕을 입고 있는 것이다 . 오늘날 민주주의가 다른 이데올로기를 압도하고 있는 것은 당연하다 . 그것은 민주주의만이 세계가 개성주의의 토대 위에 서기를 원하며 대자연의 판도 아래서 넓고 넓은 인류의 황무지를 개척하여 씨를 뿌리고 이를 거두어들이는 일에 만인이 동등한 자격으로 참례할 수 있도록 하기 때문이다 . 한 국가에 어찌하여 문학과 시가와 미술 등이 커다란 역할을 하는가 . 그것은 이러한 것들이 그 나라의 여성과 남성에 대하여 개성이 무엇인가를 여러 가지 소재와 유효한 방법으로 가르쳐 주기 때문이다 .

구경의 존재로서의 개성에 대하여 휘트먼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 “인간의 마음이 가장 건전한 상태에 있을 때에는 여기에 대한 자의식이 있다 . 즉 높은 상념이 있다 . 그리하여 다른 것에 의존하지 않고 독립되어 있는 별처럼 언제나 고요히 빛난다 . 개성은 본체이다 . 즉 네가 누구이든 네 것은 네 것이고 , 내가 누구이든 내 것은 내 것이며 , 말로 표현할 수 있는 기적중의 기적이요 , 지상의 꿈 가운데서 가장 영적이고 막연하면서도 엄연히 존재하는 모든 사물의 기본이다 . 또한 그것은 삼라만상을 헤아리는 유일한 꿈으로 이 경건 한 황홀경에 도취되어 심원한 천지의 경이를 느끼게 된다 ( 여기서 내가 천지의 중심부에 도사리고 있기 때문에 심원하다는 말을 사용한 것이다 ). 그리하여 옛 신조도 전통도 이 간단한 자아 앞에 맥을 쓰지 못 하고 아무런 가치도 없게 된다 . 꿈이 빛나는 곳에 자아의 사상은 홀로 광채를 발한다 . 옛 이야기에 나오는 난장이처럼 일단 자유를 얻어 지상을 떠나면 하늘에 오른다 . ”

이 전형적인 미국 철학자는 개인의 영광을 역설하는 것 가운데 아직도 인용하고 싶은 대목이 많으나 여기서는 다만 다음과 같은 결 론을 소개하고자 한다 .

“…결론적으로 말하면 간단명료하다 . 즉 우리가 의거할 최종의 보 루는 인성에 있다는 것이다 ( 이것이 없으면 만물의 운행은 목적도 없고 따라서 기만이요 , 결국 파멸에 이른다 ). 다시 말하면 아무 미신도 따르지 않는 인간 고유의 풍요한 소질에 있는 것이다 . 민주주의의 목표는 어디에 있는가 ? …모든 그릇된 것을 시정하고 , 조소와 논란과 실수를 지양하며 , 모든 위험을 무릅쓰고 다음과 같이 천명케 하는 데 있다 . 최고의 자유 가운데 올바른 훈련을 쌓은 인간이야말로 하나의 모범이 될 것이다 . 아니 , 되지 않으면 안 된다 . ”

중요한 것은 우리의 환경이 아니라 그 환경에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달려 있다 . 프랑스 , 독일 , 영국 및 미국 사람들은 똑같이 기계문 명 속에서 살고 있지만 그 생활태도와 생활감정은 각각 다르다 . 그리하여 나라를 다스려 나가는 방법도 판이하다 . 인간은 이와 같이 변화가 많은 생활을 하며 , 화물자동차를 운전하는 두 사람의 운전수 사이에도 농담을 이해하는 각도가 다르다는 것을 알면서도 인간이 기계의 힘으로 균일하게 무미건조한 생활을 해야 한다면 실로 한심한 노릇이라 아니할 수 없다 .

여기 어떤 아버지가 두 아들에게 똑같은 교육을 시켜서 동시에 사회에 내보내었다고 하자 . 이 경우에 자식들은 각각 독자적인 입장 에서 점차로 자기 생활을 영위해 나가는 모습이 아버지의 눈에 뛸 것이다 . 둘이다 같은 액수의 자본으로 은행장이 되었다고 하더라도 사회적인 활동무대나 행복을 추구하는 방법이 각각 다르게 마련이다 . 어투 , 악센트 , 기질도 다 다르다 . 또한 그 책략도 , 문제의 취급 방법도 다르며 행원에 대한 태도도 다를 것이다 . 즉 행원들에게 사납게 대할 수도 있고 , 혹은 존경을 받을 수도 있으며 , 가혹하고 고집이 세기도 하고 , 또는 쾌활하고 관대할 수도 있다 . 돈을 버는 방법이나 쓰는 방법이 다르고 , 오락을 즐기고 , 친구와 사귀고 , 클럽에 나가고 , 독서하고 , 아내를 대하는 모든 개인생활도 다 다르다 . 신문의 부고를 보면 , 같은 시대에 살다가 죽은 사람들이 전혀 다른 생활을 하고 있는 데 놀라게 된다 . 즉 같은 환경 속에서도 그렇게 변화 가 많은 것이다 . 어떤 사람은 직업에 열성을 기울여 거기서 행복을 찾는가 하면 , 어떤 사람은 산전수전 다 겪고 , 어떤 사람은 발명을 하고 , 어떤 사람은 탐험을 하고 , 어떤 사람은 농담을 곧잘 하고 , 어 떤 사람은 전혀 유머를 모르고 , 어떤 사람은 명성과 부귀를 노려 로 켓처럼 뛰어가다가 그 로켓의 폭발연기 속에 쓰러지고 , 또 어떤 사 람은 얼음과 설탕 장사를 하여서 2 만 달러나 벌었으나 지하실 광속에서 피살되었다 .

이것이 있는 그대로의 사실이다 . 인간의 생활은 발달된 이 산업시 대에 있어서도 실로 묘하기 짝이 없다 . 인간이 인간인 한 그 생활 모습은 천자만태 ( 千姿萬態 ) 이며 이것이 인생의 묘미이다 . 인간 문제는 정치나 사회 혁명으로 일신된 일이 없다 . 도리어 인간적인 요인 이 새로운 학설이나 체계를 내세우는 자들의 의도를 흔히 뒤집어 놓 았다 . 그것은 법률 , 제도 , 사회개조의 만능 약― 오네이타의 고등 사 회나 , 미국 노동연합회나 린제 판사의 시험결혼 등등―이 모든 주창 자들의 뒷덜미를 후려친다 . 신랑과 신부의 개성은 결혼과 이혼의 약 속보다 더 중요하며 법률의 집행인이나 지지자가 법률 자체보다 더 중요하다 .

그런데 개인이 중요한 것은 , 개인생활이 모든 문명의 목적일 뿐만 아니라 사회생활이나 정치활동 , 그리고 국제관계의 개선이 한 나라 를 이루고 있는 개인의 활동과 기질의 총화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 요컨대 문제는 결국 개성 여하에 달려 있다 . 따라서 한 국가가 잘 통치되어 발전해 가는 요인은 국민의 기질이라고 할 수 있다 . 한 국민이 일을 어떻게 하며 ,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느냐 하는 것은 산업을 발전시키는 법칙을 언제나 능가하기 때문이다 .

루소는 프랑스 혁명이 나아갈 길과 나폴레옹의 출현을 예기하지 못 하였다 . 마르크스도 그 사회주의 이론이 구체적으로 이루어질 내 용과 스탈린의 출현을 예견하지 못 하였다 . 프랑스 혁명은 자유 · 평등 · 박애의 슬로건으로 이루어져 나간 것이 아니라 일반적으로는 인 간의 어느 특성에 의하여 , 그리고 부분적으로는 프랑스인의 기질에 의해 결정된 것이다 . 마르크스의 사회 혁명에 대한 예언은 그 엄숙 한 변증법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처참하게 실패하였다 . 프롤레타리아 혁명은 그의 예언대로 이론적인 법칙에 따라서 산업문명이 가장 발 달되어 강력한 노동계급이 형성된 곳에서 일어나야 했을 것이다 . 우 선은 영국 혹은 미국 , 경우에 따라서는 독일을 손꼽을 수 있을 것이다 . 그러나 공산주의는 유력한 노동계급이 존재하지 않는 러시아와 같은 농업국가에서 처음으로 실험해 볼 기회를 갖게 되었다 . 마르크 스는 영국 사람이나 미국 사람들의 기질을 셈에 넣지 않았던 것이다 . 즉 이들의 일하는 방법이나 문제를 처리하는 방법이 문제인 것이다 . 그러나 대체로 미숙한 경제학은 국민생활의 밑바닥에서 움직 이는 어떤 불가해한 요인을 미처 파악하지 못 하고 이론을 전개하는 실수를 범한다 . 이론이나 슬로건을 믿지 않는 영국 사람의 기질 , 매사에 꾸물거리며 서투르기 짝이 없는 듯하면서도 언제나 꾸준히 앞 길을 개척해 나가는 영국인의 방법 , 개인의 자유를 옹호하는 앵글로 색슨의 기질과 자존심과 상식 , 그리고 질서를 아끼는 마음―이러한 요건들은 영국이나 미국인들이 일을 결정하는 데 있어서 , 독일 변증법의 모든 논리보다 훨씬 강한 작용을 하는 것이다 .

이렇게 국민에 따라 문제를 처리하는 방도가 다르며 사회적으로 발전해 나가는 방향도 다르다 . 그것은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을 지배 하는 어떤 관념에 의해 한정되어 있는 것이다 . 이 민족적 기질―우리 가 추상적으로 국민성 이라고 부르는―은 결국 국민 전체에 미치는 개성의 총화이다 . 즉 민족적 기질은 어떤 위기에 임하였을 때 이에 대처하는 국민성을 말한다 . 이 천품을 그 어휘 이상의 것이라고 생각 하거나 중세 신학의 영혼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 한 국민의 천품이란 국가의 일을 처리해 나가는 태도나 방법에 지나 지 않는다 . 그것은 한 국가의 운명처럼 어떤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라 오직 행동을 통해서만 인정을 받을 수 있는 성질의 것이다 .

나라에 어떤 긴박한 사태 또는 위기가 닥쳐왔을 때 , 국민의 최종 진로를 결정하는 것은 일종의 선택이다 . 따라서 어떤 것은 싫어서 버리고 또 어떤 것은 좋아서 취하게 된다 . 고루한 역사가는 헤겔을 본떠서 한 나라의 역사는 이념의 발전으로 일종의 기계적인 , 그리고 필연적인 현상이라고 하며 , 현실적인 역사관―좀 더 역사의 낌새를 이해하는―은 거의가 역사의 우연성을 문제 삼는다 . 즉 국민은 유사 시에 선택을 하게 되며 이 경우에 상반되는 세력과 대립되는 욕구 사이에 투쟁이 시작되는데 어떤 욕구가 약간 많거나 혹은 적은 데 따라서 저울대는 어느 한 쪽으로 기울게 마련이다 . 이때 국민의 천품은 그대로 어느 쪽을 더 원한다거나 , 혹은 원치 않는 의욕을 분명 히 밝히는 국민의 결의에 작용한다 . 그리하여 모든 국민은 그 좋고 나쁨을 가려내는데 이러한 선택은 국민의 시대적 사조와 도의심과 기호에 따라서 좌우된다 .

국회에서 황제의 퇴위를 요구할 수밖에 없게 된 최근의 헌법상의 위기에 처하여 영국 국민성이 분명히 드러났었다 .

국내에서 찬반양론이 비등하여 갑론을박하는 견해 중에는 각각 여 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 무엇보다도 국왕에 대한 개인적인 충성이며 , 이혼을 꺼리는 영국 교회의 편견 , 국왕에 대한 영국인의 전통적 인 관념 , 그리고 다음과 같은 문제들―황제에게 사사로운 일이 있을 수 있을까 또는 황제는 장식물 이상의 것이 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 가 제기된다 . 이런 상반되는 견해 가운데서 어느 하나가 비중을 더 많이 차지하느냐에 따라서 그 위기의 해결방안이 다르게 결정된다 .

우리가 현대사를 통하여 보더라도 지노비에프와 카메네프와 다코 프가 과연 총살되었는지 , 또는 리페크가 투옥되었는지 , 스탈린 정권에 대한 반혁명 음모와 반란이 상당히 확대되었는지 , 독일의 신 · 구 교가 나치스 정권의 탄압에 의해 신앙을 제대로 간직하게 될는지 ( 이 것은 독일인에게 반항심이 얼마나 있느냐에 따라서 결정될 성질의 문제이다 ), 영국은 과연 노동당이 집권할 수 있을지 , 미국의 공산당은 강성 해질는지 아니면 민중의 지지를 상실할는지 등등의 문제는 결국 국가의 성원인 개개인의 사상과 감정과 성격에 따라서 결정된다 . 이 인류 역사의 파노라마 속에 전개되는 것은 인간 고유의 변덕 , 예측을 불허하는 선택에 의하여 결정되는 변화무쌍한 양상들이다 .

유교에서는 세계 평화의 문제를 개인생활의 수양과 결부시켜 생각 해 왔었다 . 송나라의 유학자들이 학도들이 숭상해야 할 가르침으로 정한 글에는 다음과 같은 대목이 있다 .

옛 명덕을 천하에 밝히고자 하는 자는 나라부터 다스린다 . 그 나라를 다스리고자 하는 자는 먼저 그 가정을 잘 돌본다 . 가정을 잘 돌보려는 자는 먼저 그 몸을 수양한다 . 몸을 수양하려는 자는 먼저 그 마음을 바르게 한다 . 그 마음을 바르게 하려고 하는 자는 먼저 그 뜻을 정성스럽게 한다 . 그 뜻을 정성스럽게 하고자 하는 자는 먼저 그 앎의 극치에 이른다 . 그리고 앎의 극치는 사물에 투철하는 데 있다 .

사물에 투철한 후에 앎에 이르고 , 앎에 이르면 그 뜻이 정성스럽 게 된다 . 뜻이 정성스럽게 된 후에 마음이 바르게 되고 , 마음이 바르게 된 후에 비로소 몸을 닦을 수 있다 . 몸을 닦은 후에 가정을 잘 돌보게 되고 , 가정을 잘 돌보게 된 후에 나라를 다스릴 수 있으며 , 나라를 잘 다스리면 천하가 태평하게 된다 .

임금으로부터 평민에 이르기까지 진심으로 수신에 힘쓰는 것을 근 본으로 삼는다 . 그 근본이 흔들리면 그 지엽을 다스릴 수 없다 . 두터워야 할 것이 없고 엷어야 할 것이 두터워서는 안 된다 .

사물에는 본말이 있고 , 일에는 시종이 있다 . 그 선후를 알면 도에 가깝다 .

 

 

 

 

 



제 4 장 누가 인생을 즐겁게 보낼 수 있는가 ?

 

 

 

 

 

 1. 너 자신을 찾으라 _ 장자

 

근대사회에서는 철학자란 ( 만일 그런 인간이 실제로 존재한다면 ) 아마 도 세상에서 가장 존경을 받든지 , 그렇지 않으면 가장 무시당하고 있는 인간이라고 할 수 있다 . 철학자라는 말은 단지 사회적인 명칭이 되고 말았다 . 그리하여 꽤 까다롭고 편협한 사람을 가리켜 누구 나 철학자라고 하게 되었다 . 그런가 하면 현실에 초연한 사람도 흔 히 철학자라고 한다 . 후자의 의미라면 어느 정도 납득이 간다 . 셰익 스피어가 『 뜻대로 하세요』라는 작품 속에서 터치스톤의 입을 통하여 “ 목동이여 , 너는 철학이라도 갖고 있느냐 ? ” 라고 말하였는데 , 그것은 후자의 뜻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 이런 의미의 철학은 자연과 인생에 대한 평범하고 조잡하고 누구나 갖고 있는 생각을 가리킨 데 불과하다 . 이 정도의 것이라면 누구나 다소는 갖고 있다 . 모든 현실 의 표면적인 가치를 중요시하지 않거나 또는 신문 지상에 나타난 말 을 믿으려고 하지 않으면 누구나 다소 철학자라고 할 수 있는 것이 다 . 다시 말하면 그는 속아서 살지 않는 사람이다 .

대체로 철학에는 깨달음에서 오는 법열이 따르게 마련이다 . 철학 자가 인생을 보는 법은 화가가 풍경을 보는 것과 흡사하여 베일이나 안개를 통하여 바라본다 . 그렇게 되면 현실 그대로의 선명하고 싱싱 한 면이 다소 흐려지므로 도리어 현실의 대의를 파악하기 쉽다 . 적어도 중국의 예술가나 철학자의 사고방식은 그렇다 . 그러므로 철학자는 현실적인 용건에 매여 , 그 성패나 득실에만 관심이 있는 철저한 현실주의자와는 정반대의 입장에 서 있는 것이다 . 이런 현실주의 자는 사물에 대하여 의문을 갖지 않으므로 본인은 물론 남도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다 . 공자는 “ 어떻게 할까 , 어떻게 할까 하고 걱정하지 않는 자는 나도 어떻게 할 도리가 없다”라고 말하였다 . 이 말은 내가 공자의 이야기 가운데서 발견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해학의 하나이기도 하다 .

나는 이 장에서 중국의 철학자들이 인간이 살아갈 올바른 길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였는가를 이야기하고자 한다 . 이들의 견해는 각각 다르지만 한편 일치되는 것도 있다 .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 인 간은 현명해야 한다는 것이다 . 즉 즐겁게 생활하기를 주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 맹자의 견해는 적극적인 것으로 보이고 노자의 견해 는 교활한 평화주의처럼 보이지만 , 두 사람은 이른바 중용의 철학 속에 하나로 용해되고 말았다 .

나는 이 중용의 철학이 일반 중국인의 종교라고 생각한다 . 활동과 무위라는 서로 상반되는 생각은 일종의 타협 , 즉 이 땅 위에 이룩된 불완전한 천국에 만족한다는 데 합류하고 만다 . 그리하여 현명하고 명랑한 생활철학이 생겨났으며 , 중국 역사상 최대의 시인이며 또한 최고의 인격자라고 생각되는 도연명의 생활에서 그 전형을 찾아볼 수 있다 .

중국의 모든 철학자들이 무의식중에 가장 중요한 문제로 생각한 것은 인생을 어떻게 즐기느냐 , 다시 말하면 누가 인생을 가장 즐길 수 있느냐하는 문제이다 . 그것은 결코 저 엄격주의와는 다르다 . 바랄 수 없는 일이 이루어지기를 기대하거나 , 도저히 알 수 없는 것을 굳이 알아내려는 것도 아니다 .

다만 이 초라한 인생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고 평화롭게 일하며 무던히 참고 즐겁게 살기 위해서는 생활을 어떻게 해 나가야 하느냐에 대하여 문제 삼는 것이다 .

우리는 어떠한 존재인가 ? 이것이 제일 먼저 부딪치는 문제이다 . 그런데 이 물음에 대하여 완전한 답변을 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 그러면 일상생활에 골치를 앓고 있는 우리가 참된 의미의 우리 모습이 아니라는 데 우리는 동감이다 . 단지 이 세상에서 목숨을 이어나갈 따름이라면 어딘가 허전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 그리하여 그 무엇을 찾아 구하면서 벌판을 쏘다니는 사람이 있을 경우에 , 그를 바라보는 사람에게 현자는 “ 자 , 이 문제를 풀어 보시오 ” 하고 어 떤 난제를 제시할 수 있을 법한 일이다 . 즉 “ 저 사람은 무엇을 잃어버렸을까요 ? ” 하고 물으면 어떤 사람은 “ 시계”라고 대답할 것이요 , 또 어떤 사람은 “ 다이아몬드 브로치”라고 대답할 수도 있을 것이다 . 그밖에 사람들은 여러 가지로 생각해 볼 것이다 . 그러나 그것은 다 옳지 못 하다 . 여기서 오직 현자만이―그 사람이 무엇을 찾고 있는지 는 모르지만―여러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할 것이다 . “당신들에게 가르쳐 주지 . 저 사람은 매우 소중한 것을 잃어버렸소 . ” 이 말이 사실임을 아무도 부정하지 못할 것이다 .

이와 같이 우리는 먹고 살기에 허덕이는 동안에 흔히 참된 자기를 잃어버리게 된다 . 그것은 마치 사마귀를 노리는 새가 자기 자신의 위험을 잊어버리고 , 사마귀도 자기의 위험을 잊어버리고 있는 것과 같다 . 이것은 다음에 적은 장자의 우화에 잘 나타나 있다 .

 

장자가 어느 날 조릉 ( 雕陵 ) 이라는 밤숲에서 활을 갖고 노는데 , 까 치가 남쪽 하늘에서 날아오는 것을 보고 쏘아 잡으려고 하였다 . 그때 무심코 주위를 훑어보니 한 쪽에는 한 마리의 매미가 녹음에 숨어 있고 다른 한편에는 이 매미를 잡아먹으려고 노리는 사마귀가 있었다 . 그런데 이 사마귀는 까치가 노리고 있고 이 까치는 장자가 노리고 있는 것이었다 . 이렇게 각자 자기의 위험을 깨닫지 못 하고 있었다 . 장자는 이 광경을 보고 크게 느낀 바가 있어 , 그만 활을 버리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밤숲지기는 장자가 밤도둑인 줄 알고 뒤쫓아 와서 욕설을 퍼붓는 것이었다 .

집에 돌아온 장자는 깊은 생각에 잠겼다 . 그리하여 그 후로 석 달 동안이나 뜰에도 나오지 않았으므로 제자 인차 ( 藺且 ) 가 이상하게 여 겨 “요새는 웬일이십니까 ? ” 하고 물었더니 장자가 대답하기를 “나는 진작 인생을 탐구하면서 한 번 이상한 새를 보고나서는 내 신분을 잊어버리게 되었다 . 나는 조릉에 놀러갔다가 까치란 놈이 밤숲에 날아 와 자기를 잊어버린 꼴이 되었는데 그 밤숲지기에게 밤도둑이라는 의 심을 받고 모욕까지 당하였다 . 이 일이 부끄러워 뜰에도 나가지 못 하 겠구나 . ”

 

맹자가 공자의 뒤를 이은 능변가였던 것처럼 장자는 노자의 대표 적인 후계였다 . 둘 다 스승보다 약 1 세기쯤 뒤에 태어난 인물이다 .

노자가 공자와 같은 시대의 사람인 것처럼 장자는 맹자와 같은 시대 의 사람이었다 . 또한 맹자와 장자는 다음과 갈은 점에서 견해가 일치 된다 . 즉 인간은 어떤 매우 소중한 것을 잊고 있으므로 철학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이 잊어버린 것 , 맹자의 이른바 적자의 마음 ( 赤子之心 ) 을 되찾는 데 있다는 것이다 . “ 어른이란 어린애의 마음을 잃지 않는 것”이라고 맹자는 말하였다 . 그는 개화된 인공적 생활이 타고난 젊고 싱싱한 인간의 마음에 끼치는 영향을 , 나무 숲을 마구 자르는 것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 그는 말하였다 . “ 우산의 숲은 한때 매우 아름다웠으나 도시 근처에 있어 나무꾼들이 나무를 마구 잘랐으 니 어찌 아름답다 할 수 있으리요 . 밤낮으로 자라고 비와 이슬이 내 려 새싹이 났으나 소와 양떼가 쏘다니게 되었느니라 . 그 후로 우산은 저렇게 벌거숭이가 되었거니와 , 사람들이 이를 보고 아직 큰 재목이 없다고 하지만 , 그것은 이 산이 지닌 본성이 아니다 . ”

인간도 마찬가지이다 . 인간에게 어찌 인의의 마음이 있겠는가 . 그 양심의 발로도 도끼로 나무 자르듯이 날마다 그 순을 잘라 버리면 어찌 아름답게 피어날 수 있겠는가 ? 밤과 낮이 그 상처를 아물게 하고 신선한 새벽 공기가 몸을 튼튼하게 하지만 인간이 악을 저지르면 아무 소용도 없다 . 타고난 착한 본성을 끊임없이 도끼질하는 경우에 는 밤에 취한 휴식과 건강 회복이 소용없으며 , 짐승과 별로 다름없는 인간이 되어버린다 . 이를 보고 그에게는 타고난 착한 마음씨가 없었다고 생각한다 . 그런데 이것이 그가 타고난 참된 본성이었을까 ? 본성을 올바로 기르면 커지고 올바로 기르지 못 하면 사그러지는 것이다 . 공자가 “ 지조가 있으면 곧 존속되고 지조가 없으면 망하여 , 출입에 때가 없고 그 있는 곳을 알 수 없다”라고 말한 것도 이 마음 을 가리키는 것이다 .

 

 

2. 정 ( 情 ) · ( 智 ) · ( 勇 ) _ 맹자

 

인생을 가장 행복하게 보낼 수 있는 이상적인 성격은 무엇일까 ? 그것은 온정을 지니고 근심을 모르는 용감한 성격이다 . 맹자는 위대 한 인물의 덕성으로서 세 가지를 들었다 . 지 ( 智 ) · 인 ( 仁 ) · 용 ( 勇 ) 이 그것이다 . 나는 “ Compassion ”이라는 말의 첫 음절을 떼어 버리고 인정 (Passion) , 지혜 , 용기를 위대한 인물이 지녀야 할 세 가지 덕성이라고 생각한다 . 영어에는 다행히 “ Passion ”이라는 말이 중국어의 정 ( 情 ) 이라는 말과 비슷한 의미로 쓰인다 . 두 말이 다 성적 정열 (Sexual passion) 이라는 좁은 뜻에서 시작되었으나 지금은 이보다 넓 은 의미를 갖고 있다 . 장조의 말과 같이 “ 정이 있는 사람은 언제나 이성을 사랑하지만 , 이성을 사랑하는 자에게 역시 정이 있다고 할 수는 없다 . ” 또한 “ 정은 인간생활의 토대가 되고 재 ( 才 ) 는 그 지붕을 색칠한다 . ”

아닌 게 아니라 인간에게 정이 없으면 아무 일도 할 수가 없는 것이다 . 인생의 활기 , 별의 광채 , 음악의 멜로디 , 꽃의 환희 , 새의 날개 , 여자의 아름다움 , 학구생활―이것은 모두가 정의 한 표현이다 . 소리 없는 음악을 생각할 수 없듯이 정이 없는 마음이란 있을 수 없다 . 정이야말로 인생을 즐겁게 보낼 수 있는 따뜻한 기분과 풍부한 생명력을 제공해 준다 .

중국 문인들이 정이라는 말을 패션과 비슷하게 생각하는 것은 잘 못일지 모른다 . 패션이라는 말보다 한결 조용하고 , 거친 파도와 같 은 정열의 뜻이 비교적 덜 포함된 센티멘트 (Sentiment) 라는 말로 옮겨 놓는 편이 좋을 것 같기도 하다 . 아니 어쩌면 전에 낭만주의자들 이 곧잘 입에 올린 감수성 (Sensibility) 라는 말과 같은 의미로 사용해 도 무방할 것 같다 . 이 말의 진의는 정답고 관후한 예술가들의 심정 속에서 찾아볼 수 있다 .

이 Passion 이라는 말 , 또는 이 말보다 좀 더 뜻이 약한 Senti- ment 를 우리는 태어날 적부터 다소 간직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 우리는 부모를 자기 마음대로 골라잡을 수 없듯이 나면서부터 차디찬 성질이든 혹은 따뜻한 성질이든 갖지 않을 수 없다 . 이것은 사람의 힘으로서는 어찌 할 수 없으며 불행하게도 부인할 수 없는 오묘 한 사실이다 . 그렇다고 해서 마음속까지 속속들이 차디찬 성질을 갖 고 태어나는 어린이는 아무 데도 없다 . 우리가 따뜻한 마음씨를 잃게 되는 것은 청년시절의 씩씩한 심정을 잃는 것과 정비례한다 . 중 년이 되면 거친 주위환경 때문에 본래 지녔던 다감한 성질은 말살되 고 냉각되고 위축되는 경우가 있다 .

이렇게 되는 가장 큰 이유는 그러한 순정을 그대로 간직하려고 애쓰지 않는 우리들의 태만에 있거나 그렇지 않으면 무자비한 환경의 영향을 피할 힘이 없는 데서 비롯된다 . 세상에서 체험을 쌓아가는 동안에 외부 세계의 여러 가지 힘이 우리들의 타고난 천성에 영향을 주고 마음이 무디어지고 잔재주를 부리며 때로는 냉혹한 성미를 갖게 된다 . 그리하여 세상에서 경험을 많이 쌓은 것을 자랑하게 될 무렵이면 신경은 한층 더 무디어지고 마비되어 버린다 .

이러한 현상은 정치계나 실업계에 있어서 특히 현저하다 . 그리하여 누구든지 옆으로 제쳐놓고 자기가 앞서 나가려고 한다 . 그들에게는 강철 같은 의지와 굳은 결의는 엿보이나 인간적인 맛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 이들은 의리나 인정 같은 것은 어리석은 이상주의나 감상쯤으로 간주하는데 내가 경멸하고 싶은 것은 바로 이런 인간들이다 . 도 대체 이 세상에는 냉혹한 사람들이 너무 많다 . 만일 국가의 시책으로 멸종을 할 수 있다면 도의심이 마비된 자 , 심미감이 없는 자 , 감정이 둔한 자 , 잔인하고 냉혹한 수단으로 출세하는 자 , 절망적인 냉혈한 , 그리고 인생의 운치를 모르는 자 , 이런 따위의 인간부터 제거해야 할 것이다 . 격심한 생활에 시달려 정신이상에 걸린 자나 폐병환자보다는 이들을 먼저 단종을 시켜야 하리라고 생각한다 .

정열이나 인정미가 있는 사람은 상식에서 벗어나는 짓이나 뜻하지 않는 행동을 하는 경우도 있는데 , 인간에게 그런 면이 없으면 한낱 실없는 그림에 불과할 것이다 . 저 도데의 『 사포』에 견주어 보면 이런 인간은 언제나 기계나 , 자동인형이나 , 또는 지상의 오물밖에 되지 않는다 .

매춘부 가운데도 실업가로 성공한 사람보다 훨씬 마음이 깨끗한 사람이 많다 . 사포는 죄를 범했다 . 그런데 그것이 어쨌단 말인가 ? 그녀는 사람을 사랑하였다 . 사람을 그렇게 열심히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은 그 죄를 용서 받아야 할 것이다 . 그녀는 현대에 못 지않은 살기 어려운 세상에 태어났지만 백만장자들보다 훨씬 뜨거운 사랑을 갖고 있었다 . 막달라 마리아를 숭배하는 것도 당연하다 . 정열이나 센티멘털한 성격 때문에 과오를 범하여 벌을 받는 것은 어찌 할 도 리가 없다 .

그건 그렇고 , 이 세상에는 죄를 범한 어머니가 그 죄로 말미암아 오히려 보다 훌륭한 사랑을 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 그리고 흔히 지 나치게 엄격한 사람들에게서 찾아볼 수 있는 바와 같이 늘그막에 일 생을 무미건조하게 보내지 않고 가족들과 즐겁게 보냈더라면 하고 생각하는 어머니도 있을 것이다 . 언젠가 친구에게서 들은 이야기지만 78 세나 되는 어떤 할머니는 이렇게 말하였다고 한다 . “ 78 년의 생애를 돌이켜 볼 때 죄를 범한 일을 회상하면 그래도 즐거워요 . 그러나 너무나 어리석은 일을 했구나 싶을 때엔 이 나이가 되어서도 용납할 수 없군요 . ”

그러나 세상은 냉혹하다 . 착하고 너그럽고 다정한 사람은 흔히 남 의 꾀에 넘어가기 쉽다 . 원래 마음이 너그러운 사람은 그 때문에 일에 곧잘 실패한다 . 적을 너그럽게 대하고 친구를 너무 믿기 때문이 다 . 이런 현상은 중국의 시인이나 학자들에게서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 저 위대한 장대 ( 張垈 ) 는 아낌없이 자기 재산을 탕진하고 친구와 친척에게까지 배반을 당한 끝에 열 두 편의 시를 남겼는데 , 그것은 내가 읽은 시 가운데서 가장 비통한 시이다 . 그는 끼니를 잇지 못 하는 곤궁함 속에서도 죽을 때까지 그 너그러운 마음씨를 잃지 않 았다 . 한때 비통에 잠겼을지도 모르지만 그런 생각은 금세 한 조각 구름처럼 사라져 버리고 행복한 생활을 하였을 것이다 .

그러나 이 온정과 관용을 지니고 살아가려면 하나의 철학을 지녀 야 한 다 . 세상은 너무나 냉혹하여 온정만으로는 부족하기 때문이다 . 그러므로 정 (Passion) 은 지혜와 용기로 결합되어 있어야 한다 . 나는 지혜와 용기를 동일하게 생각한다 . 왜냐하면 용기는 인생을 잘 이해 하는 데서 생기기 때문이다 . 인생을 완전히 이해하는 자는 언제나 용기가 있다 . 어쨌든 우리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지 못 하는 지혜는 소용이 없다 . 어리석은 야심을 버리고 사상문제나 생활태도에 있어서 세상 사람들이 사로잡히기 쉬운 망집에서 벗어날 때 , 비로소 지혜는 용기와 하나가 되는 것이다 .

세상에는 망집이 많다 . 중국의 불교에서는 그 많은 망집을 명성과 부귀 둘로 크게 나누었다 . 옛날 건륭황제 ( 乾隆皇帝 ) 가 남부 지방으로 여행할 때 ,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올라가 배들이 분주히 바다 를 내왕하는 것을 바라보면서 측근자들에게 저 몇 백 척이나 되는 배 속에 무엇이 들어 있느냐고 물었다 . 그러나 그 측근자는 “ 배는 두 척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 명성의 배와 부귀의 배 말씀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

교양이 많은 사람은 부의 유혹을 물리칠 수는 있지만 명성의 유혹은 물리치기가 어렵다 . 그것은 극히 위대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 옛날 어떤 승려가 제자에게 세속적인 번뇌의 두 개의 근원에 대하여 설명하기를 “ 명예욕을 버리는 것은 돈 욕심을 버리기보다 더 어렵다 . 은퇴한 학자나 승려들도 동료들 사이에서 두각을 나타내 어 이름을 내려고 하는 법이다 . 그들은 많은 청중이 있는 공석에서 설교하기를 원하며 , 너와 나처럼 둘이서 스승 하나에 제자 하나밖에 없는 조그마한 절간에서 숨어 살기를 원치 않는다 . ” 이에 제자가 대답하였다 . “스님 , 옮은 말씀입니다 . 스님이야말로 명성욕을 이긴 유일한 분이십니다 . ” 그러자 스님은 빙그레 웃더라는 것이다 .

나는 불교에서 인간의 망집을 이렇게 둘로 나누는 것은 부당하다고 생각한다 . 인간의 커다란 망집은 두 가지가 아니라 세 가지이다 . 즉 명성 , 부귀 , 권력이 그것이다 . 이 셋을 하나의 큰 망집으로 요약한 말이 미국에는 있다 . 그것은 성공 이라는 말이다 . 그러나 현명한 사람들은 잘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성공 , 즉 명성과 부귀에 대한 욕구의 충족은 실패와 빈곤과 무명의 두려움을 완곡히 표현하는 말이며 , 이러한 두려움이 우리의 생활을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

그런데 세상에서 이미 상당한 명성과 부귀를 얻은 연후에도 남을 지배하려고 하는 사람이 많다 . 이런 사람들은 흔히 나라를 위해 목 숨을 바치고 있다 . 그러므로 때로는 엄청난 희생을 지불하게 된다 .

가령 지금 어떤 현자더러 군중에게 실크 모자를 흔들며 하루에 일곱 번 연설을 하고 대통령의 자리에 앉으라고 권고해 보라 . 그는 나라 일을 할 것을 거절하리라 . 제임스 프라이스는 말하였다 . “ 미국 의 민주주의 제도는 그 나라에서 가장 훌륭한 사람을 정계에 끌어들 이는 것을 별로 염두에 두지 않는다 . ”

격렬하기 이를 데 없는 대통령 선거의 광경을 보기만 하여도 미국의 현자들을 공포에 떨게 하기에 족하다 . 고관의 자리에 앉으면 , 인류를 위해 몸을 바친다는 명목 하에 한 주일 동안에 엿새는 만찬회에 참석해야 한다 . 왜 가정에서 단란하게 저녁 식사를 마치고 침실에서 편히 쉬지 못 하는가 ? 한 번 명성이나 권력의 마술에 집착하게 되면 곧 그 밖의 모든 우발적인 망집에 끝없이 사로잡히게 마련이다 . 그리하여 그들의 머릿속엔 사회를 개량하고 싶다 , 도의심을 앙양시키고 싶다 , 교회를 보호해야겠다 , 죄악을 일소하고 싶다는 등 남을 위해 여러 가지 계획을 세우는 동시에 남이 세운 계획은 저지 하려고 한다 . 어느 협의회 같은 데서 자기가 감독하는 사람들이 훌륭한 일을 했다는 통계보고를 읽고 싶어 하며 , 박람회의 청사진을 위원석에 앉아 검사하고 싶어진다 . 나아가서는 정신병원까지도 세우 고 싶어 한다 .

요컨대 남의 사생활에 간섭하고 싶어지는 것이다 . 하긴 책임을 면 할 수 없는 이러한 일을 스스로 메고 나서는 것은 기특하기도 하다 . 즉 자기는 이런 사회 개량문제를 전담하고 경쟁자에게는 그 길을 가로막으려는 것이다 . 이것은 본인도 일찍이 꿈꾸어 보지 못 한 엄청난 일이 아니겠는가 . 그는 대통령 선거에서 노동 , 실업 , 세금 등등의 커 다란 문제를 가지고 연단에서 기염을 토하다가도 , 막상 낙선을 하고 나서 두 주일쯤 지나면 깨끗이 잊어버리고 만다 . 남의 생활을 개선 하여 자기의 덕을 높이고 , 때로는 남을 정신병원에도 넣는다 . 다 좋 은 일이지만 이런 엄청난 일을 감히 하려고 나서는 그 장본인은 대 체 어떤 사람인가 ? 그러나 이렇게 제이의적 ( 第二義的 ) 인 망집도 잘만 해 나가면 즐거운 하루하루를 분주히 지낼 수 있으므로 자기가 정말 세상에 큰일을 하는 장한 인물이나 된 듯한 착각을 하게 마련이다 .

다음으로 사회적인 망집이 있다 . 일반적으로 널리 알려진 강력한 망집으로 , 남에게 잘 보이고 싶다는 생각이다 . 자기의 자연스러운 모습을 그대로 남에게 보여줄 수 있는 용기를 가진 사람은 매우 드 문 것이다 .

그리스의 철학자 데모크리토스는 자기가 두 개의 커다란 두려움 , 즉 신에 대한 두려움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서 오는 압박으로부터 인간을 해방시키려는 위대한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 그건 어 쨌든 죽음과 신에 대한 일반적인 공포와 같은 또 하나의 공포 , 즉 이웃 사람에 대한 공포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지는 않았던 것이다 . 앞에 말한 두 가지 공포에서 해방된 사람도 이 이웃에 대한 공포에 서 해방된 사람은 극히 드물다 .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우리는 그 역할이나 몸가짐에서 저마다 세상 사람들의 인정을 받고 있는 인생의 배우이다 .

이 연극의 재능은 밀접한 관계가 있는 모방의 재능과 함께 우리의 조상인 원숭이로부터 이어받은 습성 중에서 가장 뚜렷한 것이다 . 남의 눈에 뜨이기를 좋아하는 인간의 습성에서 오는 이득은 여러 가지 가 있다 . 그런데 많은 갈채를 받기 위해서는 남의 눈에 잘 띄어야 한 다 . 그러나 그 갈채가 크면 클수록 무대 뒤에서 느끼는 불안도 또한 큰 것이다 . 이것도 사람이 살아나가는 방법이므로 관중의 마음에 들도록 연기를 하였다고 부끄러워할 일은 아니다 . 다만 배우가 인간을 대신하여 인간 본래의 모습을 상실하게 되는 것이 못마땅할 뿐이다 .

커다란 명성을 얻거나 높은 지위에 오른 자가 언제나 얼굴에 미소를 띠고 본래의 자기 모습을 잃지 않는 일은 보기 드문 일이다 . 이런 사람은 연극이 연극인 줄 알고 있으며 , 따라서 지위나 명성이 나 재물이나 부귀 따위의 인위적인 환각에 사로잡히지 않는 인물이 다 . 그리하여 자기 몫으로 오는 것을 언제나 너그러운 미소로 받아 들이고 자기를 여느 사람과 조금도 다르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 사생 활에서도 원칙적으로 간소하다 . 그러므로 이런 인물이야말로 위대한 정신의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다 .

간소하게 살아가는 것이 언제나 위대한 인물의 모토가 되는 것은 그들이 위에서 말한 모든 환각에 속아 넘어가지 않기 때문이다 . 자 기가 잘났다고 뽐내는 못 난 관리나 , 보석을 자랑삼는 사교계의 여자 나 , 대가인척 하며 간소하고 자연스러운 생활을 청산한 풋내기 작가 들처럼 세상에 불쌍한 소인은 없는 것이다 .

인간의 연극적 본능은 이처럼 뿌리가 깊다 . 그러므로 때때로 무대 에서 떠나서 본래의 자기대로 살기를 저버리는 수가 많다 . 그리하여 우리는 이마에 땀을 흘리며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다 . 그것도 인간의 참된 욕구에 따라 자기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세상에서 칭찬을 받 기 위해서이다 . 중국의 격언대로 “ 남의 혼인 옷 을 만들고 있는 늙은 처녀”와 같이 실속 없는 짓이다 .

 

 

3. 냉소 · 대우 ( 大愚 ) · 은폐 _ 노자

 

괴벽하기 짝이 없는 노자 ( 老子 ) 의 『 노회 ( 老獪 ) 철학』은 자고로 중국인 최고의 이상인 평화 , 관용 , 소박 , 지족 ( 知足 , 만족함을 안다는 뜻 ) 이 정신의 바탕이 되어 왔었다는 사실은 야릇한 일이 아닐 수 없다 . 이와 같은 가르침에는 우자 ( 愚者 ) 의 예지 , 위장의 이점 , 약자의 힘 , 그리고 회의에 투철한 자의 소박함이 내포되어 있다 .

나무꾼과 어부들의 생활에 대한 시적인 환상과 찬미에 가득찬 중 국 예술은 이런 철학이 없이는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

중국인의 평화주의의 뿌리에는 다소의 이해타산도 염두에 두지 않 고 행복이 찾아오기를 기다리는 편이 낫다는 생각이 숨어 있는데 , 그들은 다음과 같은 신념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 즉 만물의 운행은 스스로 정해진 바가 되어 동 ( 動 ) 과 반동 ( 反動 ) 의 법칙에 지배 되는 것으로 언제까지나 우월한 지위에 있는 자도 없고 한평생 고생 을 짊어진 어리석음도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

 

대성 ( 大成 ) 은 어리석은 것같이 보이고

대 웅변은 말을 더듬는 것같이 보이고

동 ( 動 ) 은 추위를 이기고

정 ( 靜 ) 은 열을 이기나니 ,

청정 ( 淸靜 ) 은 천하의 정 ( 正 ) 이니라 .

 

자연의 대도 ( 大道 ) 에는 언제까지나 우위에 있는 자도 없고 한평생 고개를 들 수 없는 큰 바보도 없음을 안다면 인생사를 다투고 겨룰 필요가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 노자의 말을 인용하면 현자는 “ 그 다투지 않음으로 해서 천하가 그와 다투는 일이 없다 . ” 또한 이렇게 말하고 있다 . “ 폭력을 쓰는 자로서 그 종말이 좋은 자가 있다면 내가 스승으로 모시겠다 . ” 현대인이라면 여기에 이렇게 보태어 말할 것이다 . “ 비밀경찰의 도움을 받지 않고 독재를 할 수 있는 자 가 있다면 나는 그 부하가 되겠다 . ” 그래서 노자는 말하였던 것이다 . “천하에 도 ( 道 ) 가 행해지고 있지 않으면 말은 군마로 훈련을 받게 되고 , 도가 행하여지면 똥차를 끌게 훈련을 받느니라 . ”

 

뛰어난 용사는 성급히 전진하지 않고

잘 싸우는 병사는 노하지 않는다 .

위대한 정복자는 남의 병력을 빌지 않고도 승리하며

남을 잘 부리는 자는 마치 남의 부림을 당하는 자와 같이 된다 .

이를 다투지 않는 덕 ( 德 ) 이라고 하고

이를 남의 힘을 쓰는 법이라고 하며 ,

이를 또한 하늘의 순리 ( 順理 ) 를 좇는다고 하여

옛날부터 전해 내려오는 비법이다 .

 

동 ( 動 ) 과 반동 ( 反動 ) 의 법칙은 반작용 ( 反作用 ) 을 낳는다 .

 

 

도 ( 道 ) 로써 임금을 돕는 자는

병력으로 천하를 정복하지 않는다 .

이런 일은 인심을 잃게 마련이다 .

군마 ( 軍馬 ) 가 머무른 곳에 가시덤불이 자라고

대군 ( 大軍 ) 이 지나간 뒤에는 반드시 흉년이 든다 .

그러므로 명장 ( 名將 ) 은 자기 뜻을 이룬 뒤에는 곧 군대를 거두며

승리의 이득을 더는 취하려 들지 않는다 .

자기가 이룬 일을 영광스럽게 여기지 않고

자기가 이룬 일을 자랑하지 않으며

자기가 이룬 일에 교만하지 않는다 .

뜻을 이루기 위해서는 부득이한 일만 행하며 , 폭력을 쓰지 않느니라 .

누구나 기력이 강하면 이윽고 노쇠하게 마련이다 .

이를 지키지 않음은 도 ( 道 ) 를 어김이며

도를 어기면 곧 멸하느니라 .

 

만일 노자가 베르사유 평화회의의 일원으로서 초대를 받았다면 , 저 광폭한 히틀러와 같은 자는 나타나지 못 하였을 것이다 . 히틀러는 기적적으로 권좌에 앉았으므로 , 자기는 분명히 신의 축복을 받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 그러나 나는 더욱 간단히 생각한다 . 즉 그 는 적국인 프랑스의 클레망소의 축복을 받고 있는 것이다 . 중국인의 평화주의는 몽상적인 박애주의자들이 주장하는 바와 같은 그런 평화주의가 아니고 , 저 노회철학 ( 老獪哲學 ) 에 의한 평화주의이다 . 즉 그것은 보편적인 사랑에 근거를 둔 것이 아니라 , 확고부동하고 현묘 한 예지에 기인하는 것이다 .

 

늦추고 싶거든

우선 팽팽하게 해야 하며

약하게 하려고 하면

우선 강하게 해야 한다 .

폐 ( 廢 ) 하려고 하면

우선 일으켜야 하고

빼앗으려고 하면

먼저 주어야 한다 .

이를 미명 ( 微明 ) 이라고 하느니라 .

그리하여 약자가 강자를 이기나니

물고기는 연못을 떠나지 않도록 하고

나라의 이기 ( 利器 ) 는 사람의 눈에 뜨이지 않도록 간직하여야 하느니라 .

 

약자가 지닌 힘 , 평화의 승리 , 겸손한 자의 이득을 노자만큼 효과 적으로 이야기한 사람은 없었다 . 노자에게는 물이 영원히 약자의 힘 을 상징하고 있었다 . 조용히 한 방울씩 떨어져서 바위를 뚫는 저 물 .

 

강과 바다가 뭇 골짜기의 여울을 모아 능히 왕 ( 王 ) 이 된 연유는 무엇인고 ?

강과 바다는 뭇 골짜기보다 아래에 처져 자기를 낮추었기 때문이로다 .

 

이에 못 지않게 세상에 널리 알려진 것은 저 곡 ( 谷 ) 의 설 ( 說 ) 로서 , “ 곡”이란 공동 ( 空洞 ), 만물의 자궁 ( 子宮 ), 즉 모체 , 곧 현 ( 玄 ) 이나 암 ( 牝 ) 을 뜻한다 .

 

곡신 ( 谷神 ) 은 죽지 않노니

이를 가리켜 현암 ( 玄牝 ) 이라 하도다 .

현암의 문 ( 門 ),

이를 가리켜 천지의 근 ( 根 ) 이라 하도다 .

면면히 존재하여

소비하여도 없어지는 법이 없느니라 .

 

동양문명은 암 ( 牝 ) 의 원리를 대표하고 , 서양문명은 수 ( 牡 ) 의 원리 를 대표한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 어쨌든 자궁이라는 말과 중국인이 생각하는 수동적인 힘으로서의 곡 ( 谷 ) 이라는 말 사이에는 유사한 점이 있다 . 노자는 “ 천하의 곡 ( 谷 ) 이 되면 , 덕 ( 德 ) 을 갖추게 마련이다”라고 말하였다 .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작은 마을이라도 좋으니 우두머리가 되고 싶 다고 하였고 , 노자는 그와 반대로 “ 아예 천하의 앞자리에 서지 말라” 라고 하였다 . 지나치게 뛰어나면 위태롭다는 생각은 장자도 하였는 데 그것은 공자에 대한 풍자와 현학의 형태로 나타나 있다 . 장자의 글에는 공자를 비방하는 대목이 상당히 많다 . 그러나 장자가 그 글을 쓸 무렵에는 이미 공자는 세상을 떠난 지 오래 되었고 또 중국에 는 옛날에도 명예훼손죄 같은 것은 있었다 .

공자가 진 · 채의 두 나라 접경 사이에서 적에게 둘러싸여 7 일 동 안이나 굶은 일이 있었다 . 그때 대공임 ( 大公任 ) 이 찾아가서 공자에게 말하기를 “자 ( 子 ) 는 생명이 위독한가 봅니다” 하였더니 공자는 “ 그렇소 ” 하고 대답하였다 . 이에 임이 다시 묻기를 “ 자는 죽음을 두려워 하십니까 ? ” 공자는 역시 “ 그렇소 ” 하고 대답하였다 . 이에 임이 다시 이렇게 말하였다 . “ 내가 죽지 않는 길에 대하여 이야기하겠습니다 . 동해 ( 東海 ) 에 의태 ( 意怠 ) 라는 새가 있는데 그 새는 아무 재주도 없는 것 같으나 날 때에는 친구 새들을 이끌고 날면서도 앞에 서지 않으며 그렇다고 뒤에 서는 법도 없습니다 . 모이도 먼저 먹지 않고 남이 먹고 난 나머지를 취하므로 일행에게 배척을 당하지 않고 외인 ( 外人 ) 이 해치지도 않아 화를 면합니다 . 곧은 나무는 먼저 잘리고 , 맑은 샘물은 먼저 마르게 마련입니다 . 자 ( 子 ) 는 지식을 내세워 우매한 사람들을 놀라게 하고 , 몸을 닦아서 남의 허물을 밝히며 마음 평안히 살아가는 것 같습니다 . 그러므로 이런 봉변을 면하지 못 하는 것입니 다 . ” 이에 공자가 “ 그래도 할 수 없소 ” 하고 대답하자 , 임은 공자와 의 교류를 사절하고 곧 제자들의 곁을 떠나 큰 연못을 피하여 가죽옷 을 입고 도토리와 밤을 먹으며 짐승들 가운데 끼어도 떼를 어지르 지 않고 새들 속에서도 그 무리를 쫓지 않았다 .

나는 노장 사상의 높은 가르침을 다음과 같이 요약하여 시를 지었다 .

 

우자 ( 愚者 ) 의 슬기가 있는 곳에

유장 ( 悠長 ) 의 아름다움이 있고

노둔 ( 魯鈍 ) 의 묘리 ( 妙理 ) 가 있으며

하위 ( 下位 ) 의 이득 ( 利得 ) 이 따르도다 .

 

기독교를 믿는 독자들에게는 산상수훈의 한 대목과 같은 느낌이 들지도 모르겠다 . 그리고 아마도 산상수훈과 같이 별로 감명을 받지 못 할 것이다 . 그 수훈의 복음과는 달리 노자는 “ 백치 ( 白痴 ) 에게 복이 있을지니라 . 그는 지상에서 가장 복된 자로다”라고 말하였는데 참으 로 능청스러운 말이다 . 노자의 유명한 말에 대성 ( 大成 ) 은 어리석은 것처럼 보이고 , 대웅변은 더듬는 것 같이 보인다 라는 것이 있고 장자는 “ 소지 ( 小知 ) 에서 떠나라”라고 하였다 .

8 세기의 사람 유종원 ( 柳宗元 ) 6) 은 근처의 산을 우구 ( 愚丘 , 어리석은 언덕 ) 라고 부르고 , 옆에 흐르는 개울을 우계 ( 愚溪 , 어리석은 개울 ) 라고 하였다 . 그리고 18 세기의 사람 정판교 ( 鄭板橋 ) 는 다음과 같이 유명한 말을 남겼다 . 즉 “ 현명한 사람이 되기도 어렵거니와 우매한 사람이 되기도 어렵다 . 그러나 현명한 경지를 넘어서 우매한 경지에 이르기는 더욱 어렵다 . ” 중국 문학에는 이 어리석음에 대한 찬미가 그치지 않는다 . 이런 경지에 이른 예지는 일찍이 미국 사람들도 “ 지나치게 똑똑한 체하지 말아라”라는 속담을 통하여 이해한 적이 있다 .

아무튼 최고의 현자는 얼빠진 얼굴을 한 사람 가운데 있는 것이 다 . 그리하여 중국의 교양 가운데는 신기한 현상들이 나타나고 있는 데 그것은 자기를 의심하는 높은 지성이요 , 또한 무지의 복음과 옛 사람의 자기 은폐술을 발전시켜 처세의 무기로 삼는 높은 이성인 것이다 .

장자가 말하는 이른바 “ 소지 ( 小知 ) 를 떠나라”라는 가르침과 치인 ( 痴人 ) 예찬과는 그 차이가 별로 없다 . 그것은 거지나 산림 속에 기 거하는 선인이나 기승 , 또는 도적수 ( 屠赤水 ) 가 쓴 『 명료자 ( 冥廖子 ) 』 에 나오는 괴벽한 은자 ( 隱者 ) 들을 그린 중국의 그림이나 문학적 표현 속 에 언제나 반영되어 있다 . 초라한 누더기를 몸에 걸친 미치광이 같은 중이 최고의 예지와 숭고한 품성을 나타내는 상징이 될 때 , 이런 총명한 깨달음은 낭만적이고도 종교적인 느낌을 주어 드디어는 시적 ( 詩的 ) 환상의 세계로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

우인 ( 愚人 ) 의 덕망은 부인할 수 없다 . 동 · 서양을 가릴 것 없이 친 구에게 너무 깍듯이 대하는 자는 배척을 받게 마련이다 . 일찍이 원중 랑 ( 袁中郎 ) 은 자기와 그 형제들이 남달리 인간이 모자라는 충실한 네 사람의 하인을 부리고 있는 이유에 대하여 쓴 적이 있듯이 , 누구나 자기의 친구나 동료들을 생각해 보면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 우리가 좋아하는 사람은 재주가 뛰어나기 때문에 존경할 만한 인사가 아니고―오히려 이런 사람은 그 뛰어난 재능 때문에 좋아 질 수 없다―안심하고 신뢰할 수 있는 평범한 사람이다 . 우리가 못 난 하인을 두는 것도 비슷한 이유에서이다 . 즉 하인이 못 났기 때문에 우 리의 마음도 한결 편하여 이들이 옆에 있다고 해서 방어태세를 취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 세상만사가 그런 것이다 . 머리가 뛰어난 남자는 지나치게 영리한 아내를 택하지 않으며 , 머리가 좋은 처녀는 남편으로서 지나치게 영리한 사람을 택하지 않는 법이다 .

중국의 역사에는 유명한 우인들이 많이 등장한다 . 이들은 저마다 정말 정신에 이상이 있거나 혹은 이상이 있는 것처럼 행동함으로써 뭇 사람들의 호감을 사게 된 것이다 . 예컨대 송나라의 유명한 화가 미불 ( 米 芾 ) 도 그런 사람이었다 . 그는 미전 ( 米顚 , 米 狂人 ) 이라고도 하 는데 의부 ( 義父 ) 라고 부르는 바위의 한 귀퉁이에 절을 하기 위해 예복을 차려입고 집을 나갔다고 해서 이런 별명이 생긴 것이다 . 이 미시와 또 원나라의 유명한 화가 예운림 ( 倪雲林 ) 은 더러운 것을 몹시 싫어하는 괴벽스러운 결벽광이었다 . 이밖에도 유명한 기승이요 시인 인 한산 ( 寒山 ) 이 있다 . 그는 더벅머리에 맨발로 마구 돌아다니면서 절간 부엌에서 심부름이나 하고 식은 밥술을 얻어먹으면서 절이나 그 부엌 벽에 불후의 명시들을 남겨 놓았던 것이다 .

중국 사람들의 상상력을 여지없이 자극한 기승은 제전 ( 濟顚 , 濟 狂 人 ) 또는 제공 ( 濟公 , 濟大人 ) 으로 , 이 스님에 대한 이야기는 살을 덧붙이고 과장하여 『 돈키호테』의 세 갑절가량 되어 오늘날까지 그칠 줄을 모른다 . 숱한 일화의 주인공인 그는 마법 , 영약 , 취기의 세계에 살면서 수백 리나 떨어진 다른 나라에도 하루 사이에 나타날 수 있 는 선술을 체득한 인물이기도 하였다 . 그를 흠모하는 비석이 오늘날 도 항주 ( 杭州 ) , 서호 ( 西湖 ) 부근의 호포사 ( 虎 跑 寺 ) 에 서 있다 . 이밖에 도 ―그 만은 못하지만― 16 , 17 세기의 위대한 낭만파의 천재들은 우 리와 다름없이 멀쩡한 제 정신을 지닌 사람들이었지만 남들에게 그 괴상한 풍채와 언행 때문에 항용 기인이나 광인이라는 인상을 주였 던 것이다 . 예컨대 서문장 ( 徐文長 ), 이탁오 ( 李卓吾 ), 김성탄 ( 金聖嘆 ) 같은 사람들의 경우가 그러하다 .

 

 

 4. 중 용의 철학 _ 자사

 

아무 것에도 구애되지 않고 근심 걱정을 모르는 생활을 목표로 하는 철학은 너무 번잡한 생활이나 지나치게 무거운 책임을 지는 직 위에 오르지 않도록 우리를 경고하여 인간의 행동의욕을 저하시키는 경향이 있다 . 그러나 한편 근대인은 자기 자신을 위해서는 이득이 될지언정 조금도 해로울 것이 없는 이 철학의 신선한 맛을 볼 필요가 있다 .

인간을 쓸데없는 일에 휘몰아다가 물불을 헤아리지 않고 줄달음질 치게 하는 것은 고금을 통한 온갖 견유철학과 견주어 볼 때 , 인류에게 끼친 손해가 더욱 막심할 것이다 . 누구에게나 이런 철학에 반발하려는 생물학적인 충동이 있다 . 그러므로 이 위대한 철학이 널리 행하여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중국인은 세계에서 가장 부지런한 민 족의 하나가 되어 있는 것이다 .

대부분의 사람들은 견유철학을 숭상할 수 없다 . 왜냐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철학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 그러므로 이 견유철학이 대 중화될 우려는 거의 없다 . 노장철학이 수천 년 동안에 걸쳐 본능적으로 마음의 심금을 울리며 영향을 끼치고 , 모든 시나 온갖 산수화 속에서 우리를 지켜보고 있는 중국에 있어서도 , 부귀와 명성과 권력을 망신하는 사람들 대부분이 자기 나라를 위해 일하겠노라고 굳게 결심하고 또 그렇게 하기를 바라고 있기 때문에 우리의 인생은 마냥 즐거울 수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 아닌 게 아니라 그렇지 못 하다면 세상을 살아나갈 맛이 없을 것이다 .

사실 중국인은 인생에 실패했을 경우에 흔히 남을 빈정대게 되고 , 시를 끄적거리게 되며 , 중국인의 대다수는 재미있는 흥행사들이기도 하다 . 노장적인 냉소철학의 영향은 중국인들의 생활 템포를 더디게 했을 뿐 천재지변이나 실정을 겪게 되면 결국 “ 동 ( 動 ) 과 반동 ( 反動 ) 의 법칙”에 대한 신뢰를 조장하게 된다 .

그러나 이 무애무우 ( 無碍無憂 , 사물에 구애되지 않고 걱정 없이 지냄 ) 의 철학 , 즉 자연 우유 ( 優遊 ) 철학과 정반대되는 철학의 영향이 중국인들의 사상 속에 들어있는 것도 또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 자연적 신사에 대한 사회적 신사의 철학이 그것이다 .

즉 노장철학에 대한 유교철학을 가리키는 것이다 . 그런데 노장사상과 유교사상이 단지 인생에 대한 소극적인 태도와 적극적인 태도를 의미하는 데 불과하다면 그것은 중국 특유의 것이라기보다는 만든 인간성에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 다시 말하면 인간은 절반은 노장파로 , 나머지 절반은 유교파로 태어난 것이다 . 그러나 철저히 노장철학을 숭상하는 자라면 그 논리적인 귀결로서 산림 속에 숨어서 선인이나 은자의 생활을 하면서 나무꾼이나 어부처럼 , 되도록 세상을 등진 원시생활을 해야 할 것이다 . 즉 푸른 산의 임자인 나무꾼이나 , 푸른 물의 임자인 어부의 생활을 해야 한다 .

영마루에 걸린 구름에 반쯤 몸을 가린 노장파의 은자는 나무꾼이 나 어부를 눈 아래 내려다보고 있다 . 이 나무꾼이나 어부들은 “ 산은 영원히 푸르고 물은 밤낮 흘러서 그치지 않는다 . 만사 이것으로 족하다” 하며 한가히 이야기를 주고받는다 . 이 초라한 두 친구에게는 아랑곳없이 산은 푸르고 물은 흐른다 . 이런 조용한 세계에서 은자는 평화를 체득하게 된다 . 그러나 이것은 인간사회에서 떠나기를 가르치는 초라한 철학의 소치라고 하겠다 .

그런데 중국에는 이러한 자연주의보다 더 위대한 철학이 있다 . 휴 머니즘 즉 인간주의 철학이 그것이다 . 중국사상의 이상은 자기가 타 고난 복된 천성을 간직해 나가기 위해서 반드시 인간사회를 도피하여 생활할 필요가 없는 그런 인간이 되는 것이다 . 인간사회에서 도 피하여 산 속에서 홀로 사는 은자는 아직 환경에 휩쓸리는 아류의 은자에 불과하다 . 그러므로 “ 위대한 은자는 시장 속에 숨는다 . 그는 홀로 유유자적하는 능력을 지니고 있으므로 환경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 그리하여 인간사회로 돌아가 돼지고기를 먹고 술을 마시고 여자와 친하고도 자기 마음을 더럽히지 않는다 . 이런 사람이야 말로 고승이다 . ”

그러므로 이 두 철학은 서로 융합할 가능성이 있다 . 유교와 노장학 사이의 다른 의견은 상대적인 것으로 양 극단을 이루고 있으며 이 양자 사이에는 여러 가지 중간 단계가 있는 것이다 .

절반의 견유철학자가 최고의 견유철학자이다 . 결국 최고의 생활은 『 중용』의 저자요 , 공자의 손자인 자사 ( 子思 ) 가 말한 바와 같이 오묘 하고 사려 깊은 생활을 가리킨다 . 인생 문제를 논한 동서고금의 철학 을 살펴보더라도 , 사물의 두 극단의 어디엔가 자리 잡고 있는 “ 알맞은 생활”의 가르침 , 즉 중용의 가르침보다 더 깊은 진리가 없다 . 반쯤은 세상에 나타나고 반쯤은 숨어 사는 사람의 이상 속에서 엿볼 수 있는 것은 ( 활동하건 안하건 간에 ) , 완전한 조화에 이르는 오묘하고 심원한 정신이다 . 즉 반은 쉬고 반은 활동하며 , 반은 일하고 반은 쉬 는 정도 , 집세를 못 낼 만큼 가난하지도 않고 , 조금도 일할 필요가 없 을 만큼 부유하지도 않으며 , 또한 돈이 너무 많아서 도리어 선심을 쓰지 못 할 정도도 아니고 , 피아노는 있으나 친한 친구에게 들려주거 나 자기 혼자 즐기는 정도이며 , 골동품 수집을 하되 그것을 선반 위 에 진열해 놓을 정도이고 , 독서를 하지만 정도를 지나치지 않으며 , 학문을 숭상하되 전문가는 되지 않고 , 글을 쓰되 신문에 투고하여 기각되기도 하고 게재되기도 할 정도 , 요컨대 중국인이 발견한 가장 건 전하고 이상적인 생활은 중산계급의 그것이 아닌가 한다 . 이것은 이 밀 ( 李密 ) 이 지은 중용의 노래속에 잘 나타나 있다 .

 

이 세상 모든 일은 중용이 제일이라고 믿고 살았지 .

그런데 참 이상도 하네 , 이 중용은

씹으면 씹을수록 단맛이 나네 .

그러니 중용의 길만 걸으면

당황하지 않고 서둘지 않으니 마음 편하이 .

하늘과 땅 사이는 넓기도 해라 .

도시와 시골 사이에 살며

산과 개울 중간에서 밭을 가네 .

반은 선비요 , 반은 농부일세 .

적당히 때 맞춰 일하고 적당히 놀고 ,

아랫사람에게도 알맞게 대하며

집은 나쁘지도 좋지도 않네 .

실내 장식도 반은 하고 반은 하지 않고

옷은 때 묻지도 않고 깨끗지도 않네 .

식사는 적당히 하고

하인들은 바보도 아니고 영리한 자도 아니며

아내는 똑똑하지도 않거니와 멍청하지도 않네

나라는 사람은 반쯤 부처님이 되고

반쯤 노자 ( 老子 ) 가 되어

육신의 반은 하늘로 오르고

나머지 반은 자식을 위해 힘쓰노라 .

자식의 일도 잊지 않지만

죽으면 염라대왕에게 아뢸 말씀 ,

이렇게 말할까 저렇게 말할까 , 궁리도 절반 .

술에도 알맞게 취하고

꽃도 반쯤 피었을 때 볼 만하며

배는 반쯤 돛을 다는 편이 안전하도다 .

말고삐는 반쯤 늘였다 반쯤 조이고

재물이 너무 많으면 걱정이 따르고

가난하면 물욕이 생겨서 탈일세 .

세상은 달고도 쓴 것 .

그 한가운데 달지도 쓰지도 않는 맛이 제일이로세 .

 

우리는 여기에 노장철학의 빈정대는 냉소주의가 유교의 적극론과 하나로 융합되어 중용의 철학을 이루는 것을 볼 수 있다 . 매사에 어 처구니없으리만큼 저돌적으로 돌진하는 서구인들은 내 말에 불만을 느낄지 모르지만 인간은 역시 실재하는 대지와 가공의 천국 중간에 태어났다 . 나는 누가 뭐라고 하든지 그것은 최대의 철학이라고 생각 한다 . 이것이야말로 가장 인간적인 철학이다 . 이렇게 생각해 보면 린드버그 대령도 중용을 지키는 편이 좋았을 것이다 . 그 편이 더욱 행복하였으리라고 생각된다 . 미국을 떠나서 대서양을 건너는 도중에 서 중지하는 편이 훨씬 현명한 일이 아니었을까 .

물론 이 세상의 탐험가 , 정복자 , 대발명가 , 위대한 대통령 , 역사의 진로를 바꾸는 영웅들처럼 어느 정도 초인간적인 능력이 필요한 사 람은 논외로 치고 가장 행복한 사람은 간신히 경제적인 독립을 하여 인류를 위해서 큰일은 하지 못 하였으나 약간의 이바지를 하고 , 세 상에 이름이 좀 알려졌으나 별로 유명하지는 않은 그런 중산계급에 속한 사람이다 . 우리가 가장 행복을 느끼고 처세를 잘 해나가려면 생활에 걱정이 없으나 그렇다고 해서 전혀 걱정을 안 하는 것도 아닌 , 이름이 알려졌다면 알려졌고 알려지지 않았다면 알려지지 않은 약간의 재산을 가진 조촐한 환경에 놓여 있어야 한다 . 뭐니 뭐니 해도 우리는 이 세상에서 살아가야 하므로 철학을 하늘에서 땅 위로 끌어내려야 한다.

 

 

5. 인생을 사랑하는 자 _ 도연명 ( 陶淵明 )

 

사리가 이러하므로 인생에 대한 적극적인 견해와 소극적인 견해를 서로 융합시킴으로 조화된 중용의 철학에 도달할 수 있는 , 그것은 활동과 정지의 중간 위치에 서는 것을 뜻하여 악착같이 헛되이 버둥 대는 일도 없고 그렇다고 인간의 책임에서 떠나지 않는다는 의미에 서 다른 어느 철학과 비교해 보아도 가장 건전하고 행복한 처세철학 임을 알 수 있다 . 또한 중요한 것은 이 두 견해를 융합하면 조화 있는 개성을 이를 수 있으며 이러한 개성은 인간의 모든 교양과 교육이 지향할 목표가 되는 것이다 . 그뿐만 아니라 이 조화된 개성에 의해 우리는 인생의 즐거움과 사랑을 지닐 수 있는 것이다 .

이러한 인생의 사랑이란 무엇인가 ? 이 마음에 대한 설명은 쉬운 것이 아니다 . 그러므로 그런 사랑의 내용을 지닌 어떤 우화에 대하여 이야기하거나 또는 진실하게 인생을 사랑한 인간의 생애를 그대로 이야기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 나는 여기서 중국문화가 낳은 최 대의 시인으로 , 가장 조화된 인격을 지닌 도연명의 생애가 머릿속 에 떠오른다 .

그는 중국문예사를 통하여 가장 조화된 원만한 인격자라고 하여도 좋을 것이다 . 적어도 중국에서는 아무도 이에 대하여 이의가 없으리 라고 생각한다 . 이렇다 할 벼슬자리에 오른 것도 아니고 , 권세나 공명을 얻은 것도 아니고 , 남아 있는 저술이라야 얼마 되지 않는 시편과 몇몇 논설이 있을 뿐이다 . 그러나 그가 죽은 지 천 년이 넘는 오 늘날에도 아직 찬란히 빛나는 등불이요 , 후세의 군소 시인이나 문인 들에게 최고의 인간성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고 있는 상징으로 되어 있다 .

그의 생활에는 시풍과 마찬가지로 진지한 면이 있으며 , 한편 활기 가 있어 이론을 앞세우는 자들에게 두려움을 느끼게 하기에 족하다 . 그가 오늘날까지 차지하고 있는 지위는 진정으로 인생을 사랑한 모범 인물이라는 것이다 . 그는 세속적인 욕구에 항거하였지만 , 그렇다 고 이를 등지고 외면해 버리지는 않았다 . 그리하여 관능을 무시하지 않고 생활에 잘 조화시켜 나갔었다 . 중국에서는 약 2 백 년 동안이나 유교를 반대하고 문화적 낭만주의 , 즉 한적한 생활을 구가하는 노장사상이 숭상되었으나 결국에 가서는 과거의 유교철학과 협동하여 조 화 있는 성격―도연명에게서 찾아볼 수 있는 바와 같이―을 찾아내 게 되었다 . 도연명의 사상을 보면 사물에 대하여 적극적인 견해가 없지는 않으나 그 어리석은 자기만족을 탈피하는 동시에 회의철학의 준엄한 반역성을 지양하여 , 인간의 지혜가 비로소 너그러운 해학 속에서 원만히 무르익은 경지에 이르렀던 것이다 .

도연명이야말로 저 현묘하고 이채로운 중국인다운 교양을 지닌 인 물이었다 . 그 교양은 육욕에 집착하지 않는 동시에 고답적인 금욕주의에까지 이르지 않고 , 정신과 육신의 불가사의한 결합으로 관능과 영혼이 하나의 조화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 이상적인 철학자란 여성의 아름다움을 이해하며 이에 대한 예의를 잊지 않고 , 인생을 길이 사랑하되 스스로 절도가 있으며 , 이 세상의 성공과 실패가 모두 허 망함을 알고 속세를 초월하여 달관하고 있으나 그렇다고 속세를 무 시하지 않는 선비를 가리키는 것이다 . 도연명은 정신적으로 성숙하게 된 결과 이런 참된 조화의 경지에 이른 것으로 , 거기에서 내면적인 갈등을 조금도 찾아볼 수 없으며 그의 생애는 그 시와 같이 자연스럽고 솔직담백하였던 것이다 .

도연명은 4 세기 말 , 어느 저명한 학자로 벼슬에 오른 사람의 증손자로 태어났다 . 조부는 분주히 일하기를 좋아하여 언제나 무엇이고 손에 일거리가 있어야 한다고 하면서 , 아침에 일어나면 한 짐이나 되는 기와를 한 곳에 나르고 오후가 되면 다시 먼저 자리로 갖다 놓는 그런 사람이었다 . 도연명은 젊은 시절에 늙은 양친을 부양하기 위해 어떤 공직에 종사하였으나 곧 사직하고 , 전원으로 돌아가 일개 농부로서 밭일을 하다가 병을 얻게 되었다 .

공직에 종사하게 된 연유는 이러하였다 . 어느 날 그는 친척들과 친 구들에게 “ 이 논밭을 그대로 보존하려면 , 방랑신이 되어 돈푼이나 벌 며 돌아다니는 것이 내 성격에 맞지 않을까 ? ” 하고 물었다 . 이 말을 들은 어떤 친구가 구강 ( 九江 ) 에서 가까운 팽택 ( 彭澤 ) 의 태수 ( 太守 ) 자 리를 주선해 주었다 .

그는 술을 매우 좋아하여 빈 밭에는 언제나 술의 원료가 되는 차 조를 심게 하였다 . 그러나 아내가 이를 반대하였으므로 땅을 둘로 나누어 한쪽에는 차조을 심고 다른 쪽에는 메벼를 심는 것을 허용하 였다 . 하루는 관청에서 관리가 와서 도연명에게 예복을 입고 자기를 맞아들이라고 하자 그는 탄식하며 말하였다 . “ 내 어찌 쌀 다섯 말 때문에 허리를 굽혀 향리의 소아 ( 小我 ) 를 맞이할 수 있겠느냐 . ” 이리하여 그는 곧 관직을 버리고 저 유명한 『 귀거래사 ( 歸去來辭 ) 』 를 지었 던 것이다 . 그 후로는 가난한 농민의 생활을 하면서 여러 차례 벼슬을 하라는 권유가 있었으나 다 거절하였다 . 그는 가난한 사람들 속에서 함께 자랐으므로 자식들까지 장차 성장하여 여느 사람들처럼 고생할 것을 걱정하여 그 아들에게 준 편지에서 아버지다운 걱정을 하였다 . 그는 평택의 태수가 되어 집을 떠나 있을 때 , 집에 남아 있 는 자식들에게 한 어린 일꾼을 보내어 자식들의 수고를 덜려고 하였 는데 그때의 편지에 이런 대목이 적혀있다 . “그 아이도 역시 사람의 아들이니 심히 굴지 말고 잘 대우하여라 . ”

그의 가장 큰 약점은 술을 몹시 좋아하는 것이었다 . 그는 대체로 시골에서 유유자적한 생활을 하고 있었으므로 손님들은 별로 찾아오 지 않았다 . 그리하여 아무리 낯선 사람이라도 술대접을 하려고 청하 기만 하면 기꺼이 응하였다 . 혹시 자기가 다른 사람에게 술을 대접 할 경우에 먼저 취하게 되면 손님들에게 곧잘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 다 . “나는 취해서 자고 싶으니 여러분은 돌아들 가시오 . ”

그는 가야금을 하나 갖고 있었으나 줄은 전혀 없었다 . 가야금은 옛날 악기로서 느리게 켜야 하며 , 마음이 조용히 가라앉았을 때에만 비로소 제 소리가 나는 것이다 . 그는 술좌석이 과한 뒤에 기분이 나면 이 줄 없는 가야금을 어루만져 흥취를 돋우며 말하는 것이었다 . “ 이제 음악의 진미를 알았으니 줄을 당기는 소리를 들을 필요가 어 디 있느냐 . ”

그는 담백하면서도 고매한 성품을 지닌 사람이었으므로 남과 사귀 기를 귀찮게 여겼다 . 그를 숭배하던 강주 ( 江洲 ) 의 관리 왕홍 ( 王弘 ) 은 그와 깊이 사귀기를 바랐으나 가까이 하기가 매우 힘들다는 것을 알 게 되었다 . 그는 왕홍에게 천연스럽게 말하였던 것이다 . “ 내가 이렇게 혼자서 조용히 살고 있는 것은 본래 남과 어울리기를 좋아하지 않는 성미를 타고났기 때문이오 . 게다가 몸도 불편하고요 . 결코 세상일에 초탈하다는 명성이라도 얻기 위하여 이런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오 . ”

이리하여 왕홍은 그와 사귀기 위해 그의 친구와 상의하여 한 꾀를 생각해 내었다 . 즉 도연명을 어느 주석에 초대하여 왕홍과 자연 스럽게 만나게 하는 것이었다 . 그리하여 도연명은 친구의 초대를 받 아서 오는 길에 어느 숲 속 정자에 이르러 거기 술상이 마련되어 있는 것을 보고 눈이 번쩍 뜨여 자리에 앉았다 . 그때 근처의 숲에 숨어 있던 왕홍이 나타나 도연명과 만났다 . 연명은 기분이 좋아 저녁 때까지 왕홍과 담소하면서 정자를 뜨지 않고 , 초대를 받은 친구에게 가는 것도 잊어버렸다 .

왕홍은 연명이 신발이 없는 것을 보고 , 하인에게 신발을 만들도록 일렀다 . 하인이 신발의 크기를 물으니 연명은 대뜸 발을 내밀며 재라고 하였다 .

그러나 그 후 왕홍은 연명을 좀처럼 만날 수 없었다 . 그리하여 어느 숲 속이나 호수 부근에서 우연히 만날 수 있기를 바라는 도리밖 에 없었다 . 그런데 혹시 술좌석에 어울려 친구들의 술을 따를 때에 는 으레 연명이 머리에 쓰고 있던 두건으로 먼저 술을 거르고 나서 다시 나눠 주는 것이었다 .

그 무렵에 연명이 살고 있는 대려산 ( 大麗山 ) 속에는 선종 ( 禪宗 ) 에 속하는 훌륭한 고승들의 종단이 있었는데 , 대학자요 승장인 혜원법 사 ( 慧遠法師 ) 가 연명을 초대하여 그 종단에 가입시키려고 하였다 .

어느 날 연명이 그들로부터 술을 마셔도 좋다는 조건부로 초대를 받았다 . 그는 불교도의 금주계를 깨뜨려도 무방하다면 가보겠다는 생각에서 산으로 들어갔으나 나중에 종단에 가입하기 위해 이름을 적어 넣으려는 마당에 와서 눈살을 찌푸리고 도망쳐 버렸다 . 이 승 단은 사령운 ( 謝零運 ) 과 같은 대시인도 가입하려고 애썼으나 허용되지 않았던 것이다 .

연명이 도망쳐 온 후에도 승장은 여전히 호의를 보여 , 어느 날 노 장파 ( 老莊派 ) 의 친구 육수정 ( 陸修靜 ) 과 함께 연명을 술자리에 초청하 였다 . 이리하여 세 사람이 한 자리에 모이게 되었는데 승장은 불교를 대표하고 , 연명은 유교를 대표하며 , 육수정은 도교를 대표하고 있었다 . 혜원법사는 날마다 산책을 할 때에 호계교 ( 虎溪橋 ) 를 결코 건너지 않는다는 규칙을 엄수하고 있었으나 , 그날 친구와 함께 연명 을 전송할 때 주고받은 이야기가 너무나 재미있어 자기도 모르는 사 이에 그 다리를 건너고 말았다 . 이 사실을 알아차리고 세 사람은 한 바탕 크게 웃었는데 이 웃는 세 노인은 호계삼소도 ( 虎溪三笑圖 ) 라 해 서 흔히 중국 그림의 소재가 되고 있다 . 그것은 사물에 구애를 받지 않고 근심 걱정을 저버린 세 사람의 현자가 즐거이 환담하는 모습으 로 유교 , 불교 , 도교 , 세 종교의 가르침이 유머로 통일되어 있는 것을 보여주는 그림이다 .

도연명은 이렇게 일생을 보내다가 무애무우 ( 無碍無憂 ) 의 한 가난한 농촌 시인으로서 또는 현명하고 명랑한 늙은이로서 세상을 마쳤다 . 그러나 술과 전원을 노래한 조그마한 시집이나 때에 따라 적어둔 수 필이며 자식들에게 보낸 편지 , 그리고 희생정신이 넘치는 삼수 ( 三首 ) 의 기도문 ( 그 중에서 하나는 자기 자신에 대한 것이었다 ) 또는 그의 자손에게 남긴 몇 가지 교훈들을 잘 검토하여 보면 , 그가 완전무결한 자연 그대로의 경지에 도달하여 일찍이 누구에게서도 찾아볼 수 없는 조화 있는 생활에 대한 정감의 재능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그가 서기 405 년 12 월 태수의 자리를 내놓고 고향으로 돌아가 려고 결심할 때 귀거래사 ( 歸去來辭 ) 를 지었는데 여기 실려 있는 내 용은 인생에 대한 그의 위대한 사랑이었다 .

 

 

歸去來辭



돌아가리로다 , 내 집 뜰과 전원 ( 田園 ) 에 잡초가 무성하리라 . 어찌 돌아가지 않으리오 .

내 육신의 종이 되었거니 , 어찌 홀로 슬퍼만 하리오 ?

 

지난 일은 돌이킬 수 없는 것이니 앞으로 닥칠 일을 염려할 지어다 .

길을 잘못 든 지 얼마 되지 않았도다 .

비록 어제까지의 일은 잘못 되었어도 오늘은 올바로 깨달았노라 .

배는 물 위를 가볍게 미끄러져 가고 바람은 펄펄 옷 깃을 날리는구나 .

지나가는 길손에게 길을 묻도다 . 새벽빛이 희미함이 한스럽도다 .

이윽고 내 돌아갈 옛집 지붕을 바라보고 발길을 재촉하노라 .

하인들은 나를 반가이 맞이하고 자식들은 문 앞에서 나를 기다리네 .

뜰 안의 오솔길은 거칠어졌으나 국화와 소나무는 옛날과 같이 싱싱하다 .

어린 것 손을 잡고 방안에 들어서니 탁자 위에 놓인 병에 술이 차 있네 .

 

스스로 술을 따라 마시고 뜰 앞의 나무를 바라보니 한결 마음이 가벼웁다 .

남창 ( 南窓 ) 에 기대어 걸터앉으니 무릎을 가누기에 편하도다 .

 

날마다 정원을 거닐며 낯을 익히고 정을 들이도다 .

아무도 찾는 이 없어 대문은 잠긴 채 ,

지팡이에 의지하여 조용히 거닐다가

걸음을 멈추고 멀리 푸른 하늘을 쳐다보노라 .

 

구름은 무심히 산머리를 돌아가고

날개가 지친 새는 둥우리를 생각하리라 .

해는 뉘엿뉘엿 지려 하는데 나는 홀로 서 있는 소나무를 어루만지 며 거닐고 있노라 .

고향으로 돌아가리 , 이제부터는 홀로 사는 법을 배우리라 .

세상은 나를 저버렸는데 다시 무엇을 찾아 헤매랴 .

 

친지들과 주고받는 정다운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음악과 독서로 소일하리라 .

농부가 나더러 봄이 왔다고 일러 주면

장차 서녘 밭에 일거리가 생기겠구나 .



때로는 포장한 달구지를 몰고 , 때로는 쪽배의 노를 젓고

때로는 조용한 연못을 찾고 또 때로는 험한 산에 오르리라 .



나무들은 싱싱하게 무럭무럭 자라고

샘물은 졸졸 흘러내리누나 .

철따라 만물이 자라남을 가상히 여기나니 ,

내 인생도 이윽고 쉴 때가 있으리라 .

 

이 몸을 얼마나 오래 세상에 매어 두겠기에

왔다가 가는 길에 이 어인 수선인고 .

 

부귀도 권세도 내 바라는 바가 아니므로

어찌 천국을 기약할 수 있으리오 , 맑은 아침 홀로 거닐고

때로는 지팡이를 옆에 세워 놓고 밭도 매리라 .

깨끗한 냇가에서 시를 읊기도 하고

동고 ( 東皐 ) 높은 언덕에 올라가 휘파람도 불리라 .

 

천지의 조화를 따라 살다가 기꺼이 죽으리니

내 무엇을 의심하리 , 천생을 기꺼이 받아들이리라 .

 

도연명을 가리켜 은자라고 한 사람이 있을지 모르지만 결코 그렇지는 않다 . 그가 피하려고 한 것은 다만 정치이지 인생 자체는 아니 었다 . 그가 만일 논리를 존중하는 사람이었다면 중이라도 되어 인생 을 외면하려고 하였을지 모른다 . 그러나 그에게는 인생에 대한 위대 한 사랑이 있었으므로 그렇게 할 수는 없었다 . 그에게는 아내나 아 이 너무나 소중한 존재였다 . 전원과 자기 집 뜰 안에 뻗은 나뭇가 지 하며 , 아름다운 언덕에 우뚝 솟은 늙은 소나무에게 한결같은 애 착을 느꼈었다 . 그는 이론가가 아니고 다정다감한 사람이었으므로 그러한 것들을 간과할 수 없었다 . 그는 그만큼 인생을 사랑하였으며 인생을 질투하기까지 하였다 . 그가 인생의 조화를 느끼게 된 것―그 것은 그가 지닌 교양의 특징이다―은 인생에 대하여 적극성을 갖고 사리를 분별할 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 이러한 인생의 조화를 느끼는 데서 위대한 시가 우러났던 것이다 .

그는 이 세상에 태어난 인간으로서 인생에서 도피하는 것이 아니라 , “맑은 아침에 홀로 들을 거닐기도 하고 때로는 지팡이를 옆에 세워 놓고 밭에 김을 매기도 한다”라는 것이었다 . 그는 다만 전원과 가족들에게 돌아온 것이다 . 그가 원하는 것은 조화요 , 결코 반역은 아니었다 .

 

 

 

 

 

 

 

 

제 5 장 인생의 향연

 

 

 

 

 

 1. 행복이란 무엇인가 ?

 

인생에는 즐거움이 여러 가지가 있다 . 이를테면 우리 자신이 누리는 즐거움 , 가정생활의 즐거움 , 나무 , 꽃 , 구름 , 시냇물 , 폭포 , 그밖에 삼라만상을 보는 즐거움 , 그리고 어떤 형태를 취하든 마음의 교류―시가 , 미술 , 사색 , 우정 , 환담 . 독서의 즐거움들이 그것이다 . 맛있는 음식을 먹는다거나 , 유쾌한 모임을 갖거나 , 가족과 함께 단란 하게 지내거나 , 아름다운 봄날 들놀이를 가는 즐거움과 같이 분명한 것도 있고 , 시가 , 미술 , 사색의 즐거움과 같이 그다지 분명치 않은 것도 있다 . 이 두 갈래의 즐거움을 물질적이니 정신적이니 하고 말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생각한다 . 첫째로 나는 이런 구별을 믿을 수 없으며 , 둘째로 이런 분류를 하려면 언제나 갈피를 잡을 수 없다 .

남녀노소가 즐겁게 들놀이를 하고 있는 것을 보면 어느 것을 물질적인 즐거움이라고 보고 어느 것을 정신적인 즐거움이라고 볼 수 있는지 분간할 수 없다 . 어느 아이는 잔디밭에서 뛰놀고 있고 또 어느 아이는 들국화를 따서 꽃 줄을 만들고 있다 . 어머니는 샌드위치 를 먹고 있으며 , 아저씨는 맛 좋은 사과를 먹고 , 아버지는 하늘의 흰 구름을 바라보며 땅바닥에 누워 있으며 , 할아버지는 파이프를 입 에 물고 있다 . 그리고 아마도 누가 축음기를 틀고 있는지 멀리서 음악소리가 음파를 타고 들려온다 .

이러한 즐거움 가운데서 어느 것이 물질적이고 어느 것이 정신적 인 것일까 ? 샌드위치를 먹는 즐거움과 우리가 시흥이라고 부르는 풍 경감상의 즐거움 사이에 금을 그어 구별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 우리가 예술이라고 부르는 음악의 즐거움이 물질적이라고 부르는 파이프 취미보다 단연 높은 즐거움이라고 할 수 있을까 ? 나 로서는 정신적인 즐거움과 물질적인 즐거움을 구별하는 것은 난처한 일이며 , 이것은 그릇된 생각으로 별로 현명한 일이 아니라고 본다 . 그것은 정신과 육체를 엄격히 구별하고 참된 즐거움을 직접 맛보려고 들지 않는 그릇된 철학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닐까 ? 혹시 내 주장 이 지나친 독단일까 ? 혹은 인생의 목적에 대하여 논점의 중심을 잘못 잡고 있는 것일까 ?

나는 지금까지 생활의 목표는 참된 즐거움을 얻는 데 있다고 말해 왔었다 . 사실이 그러니까 그렇다고 할 따름이다 . 그런데 나는 이 목표니 목적이니 하는 말을 사용하기를 꺼린다 . 참된 즐거움을 누리 는 것을 위주로 하는 인생의 목표나 목적은 인생에 대한 인간의 태도 여하에 달려 있다는 그런 의식적인 의미의 것이 아니라고 본다 . 목적이라고 말하면 무슨 연구라든가 노력이라든가 하는 것을 지나치 게 연상케 한다 . 인간이 이 세상에 태어나 당면하는 문제는 앞으로 애써서 도달할 목적이 무엇이냐 하는 것이 아니라 , 우선 5, 60 년의 일생을 어떻게 살아가느냐 하는 것이 문제이다 . 이에 대한 대답이 최대의 행복을 누릴 수 있도록 생활을 꾸려 나가겠다는 것이라면 , 그것은 마치 주말을 어떻게 보낼 것인가 하는 문제와 마찬가지의 성 질의 것으로 대우주의 섭리 속에 태어난 인간의 목적이 무엇이냐 하 는 형이상학적인 명제보다 훨씬 실제적인 문제라고 본다 .

그러나 인생의 목적이 무엇이냐 하는 문제를 해결하려고 드는 철 학자들은 처음부터 인생 자체에 반드시 어떤 목적이 없을 수 없다고 단정하고 있다 . 그러므로 그들은 논리의 선후를 잘못 잡고 있는 것 이다 .

서구의 사상가들이 지나치게 깊이 파고든 이 문제가 오늘날 중요성을 갖게 된 것은 분명히 신학의 영향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 우리는 흔히 무슨 설계나 목적 같은 것을 필요 이상으로 가정하는 경향이 있다 .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이 문제에 분명한 해답을 얻으려고 애쓰며 논쟁을 거듭해 왔지만 좀처럼 해결을 못 하고 있는 것을 보면 이 문제는 아무리 깊이 파고들어도 결국 헛수고에 그칠 수밖에 없음 을 말해 주고 있다 . 따라서 우리는 그 문제 자체가 논할 만한 필요가 없음을 알 수 있다 . 만일 인생의 목적이나 설계가 있다면 그것을 발견하기가 그처럼 어렵고 막막하고 힘들 리가 없는 것이다 .

이 목적은 결국 두 가지로 고찰할 수 있을 것이다 . 즉 그것은 신이 인간을 위해 정해 놓은 신성한 목적이 아니면 인간이 자기 자신에 대하여 정해 놓은 굳센 목적일 것이다 .

그런데 나는 전자에 대하여는 관여하고 싶지 않다 . 왜냐하면 신의 뜻 가운데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바로 우리 자신이기 때문이다 . 즉 신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고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 아닌 게 아니라 신의 마음속을 헤아린다는 것은 인간의 능력으로서는 곤 란한 일이다 . 이 경우에 흔히 도달하는 결론은 신을 우리 군대의 기수로 만들어 인간과 같은 맹목적인 애국자로 간주하기 일쑤이다 .

다음에 두 번째 문제에 대하여는 인생의 목적이 무엇이냐 하는 것이 논점이지 , 결코 무엇이어야 하느냐가 논점이 아니다 . 그러므로 형이상학적인 문제가 아니라 실제 문제이다 . 인생의 목적이 무엇이 어야 하느냐 하는 물음에 대하여는 누구나 자기 나름의 견해나 자기 가 옳다고 생각하는 가치 판단이 있을 수 있다 . 이 문제에 대해 우 리가 논란을 거듭하는 것은 사람마다 가치 기준이 다르기 때문이다 . 내가 생각하기에는 이런 문제는 너무 철학적으로 다룰 것이 아니라 좀 더 실제적으로 다루었으면 한다 . 인생에 반드시 어떤 목적이나 의의가 있다고 단정할 수는 없는 일이다 .

휘트먼은 말하였다 . “나는 다만 이렇게 살고 있을 뿐이며 이것으로 족하다 . ” 사실 이것으로 그만 아닌가 ? 아마 앞으로 몇 해 더 살 테지 . ―이것이 인생이 아니겠는가 ? 이것으로 족한 것이다 . 이렇게 생각하면 문제는 간단하게 된다 . 그리하여 거기엔 두 개의 다른 대 답이 있을 수 없는 것이다 .

이 행복론이 모든 이교도의 철학자들에게는 크게 문제되는데 이상 하게도 기독교의 사상가들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있다 . 신학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는 이들이 크게 문제 삼는 것은 인간의 행복이 아니라 인류의 구제이다 . 그러나 이 구제라는 말은 나에게 별로 달갑지가 않다 . 왜냐하면 중국에서는 날마다 “ 국민의 구제”를 외치고 있기 때문이다 . 저마다 중국을 구제하려고 덤빈다 . 이런 말을 들으면 침몰해 가는 배 안의 사람들의 심정 , 피할 길 없는 마지막 운명이라든가 목숨을 건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는 절박한 심정을 연상케 된다 .

“멸망해 가는 두 세계의 ( 그리스와 로마 ) 마지막 탄식”이라고 하는 기독교에는 오늘날까지 아직 찌꺼기가 남아 있다 . 그들은 지금도 여 전히 “ 구제”를 강조하니 말이다 .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 ” 하는 문제는 “ 어떻게 해서든지 이 세상에서 살아가고 싶다”라는 문제 앞에서는 버림을 받게 마련이다 . 멸망할 운명을 염두에 두지 않는 한 , 구제에 대하여 그렇게까지 머리를 썩일 필요가 어디 있겠는가 ? 신학의 영향을 받고 있는 사람들은 구제에 대하여 너무 열의를 갖고 있기 때문에 인생의 행복에는 별로 관심이 없다 . 그들이 앞날에 대하여 가르치고 있는 것은 막연히 천국이 있다는 것뿐 우리가 거기서 무엇을 하게 되며 , 어떤 즐거움을 누리게 되는가 하고 물으면 성가 소리가 들리고 , 백의의 천사가 날고 있다는 등 극히 막연한 대답만 한다 .

그러나 마호메트는 그렇지 않았다 . 그는 천국에 가면 향기로운 술 과 맛좋은 과일이 가득하고 검은 머리에 커다란 눈을 한 정열적인 처녀들이 놀고 있다고 하였다 . 이렇게 말하면 누구나 잘 알 수 있다 . 천국의 내막이 좀 더 분명하고 확신할 수 있어야지 그렇지 않는 터에 지상생활을 망각하고 천국으로 가려고 애쓸 필요가 어디 있겠 는가 ? “ 내일의 암탉보다 오늘의 달걀”이라고 하지 않는가 . 우리는 여 름방학을 어떻게 보낼까 하고 계획을 세울 때 우리가 가 보려는 지방에 대하여 미리 여러 가지로 알아두려고 한다 . 이때 여행 안내소가 그 지방에 대하여 아무것도 모른다면 나는 완전히 흥미를 잃고 차라리 집에 남아 있으려고 할 것이다 .

무릇 진보와 노력의 대가를 얻는 사람이라면 천국에도 그러한 면 이 있으리라고 생각할 것이다 . 그런데 과연 우리는 천국에 가서도 부지런히 노력해야 할까 ? 그러나 그때 인간은 이미 완전한 존재가 되어있을 터인데 어찌하여 더 이상 노력하여야만 한단 말인가 ? 아니 면 혹시 천국에서는 아무 일도 하지 않고도 근심 걱정 없이 편히 지낼 수 있단 말인가 ? 그렇다면 이 세상에 살아 있을 동안에는 빈들거리며 천국에 가서 살 준비를 해야 하지 않는가 ?

만일 우리가 하나의 우주관을 가져야 한다면 그것을 인생에만 국한시켜서는 안 될 것이다 . 좀 더 넓게 생각하여 그 우주관 속에 바 위나 나무나 동물 등등 삼라만상의 의미까지도 포함시켜야 한다 . 자 연 현상에는 일정한 의도가 있다고 본다 ( 그러나 이것은 내가 가장 싫어 하는 목적이나 목표 같은 말 하고는 다르다 ). 내가 말하려는 것은 자연 현상에는 하나의 규범이 있다는 것이다 . 그리고 이 우주에 대하여 인간이 어떤 견해를 갖게 된 연후에 비로소 우주 안에서 인간이 차지하는 위치가 밝혀진다는 것이다 . 자연 속에서 살고 있는 인간의 위치에 대하여 생각하는 것은 지당하다 . 인간은 살아 있는 한 자연을 떠날 수 없으며 죽은 연후에도 자연으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

인간은 자기 분수에 넘치는 일을 기도하여 대뜸 어떤 결론에 도달하려고 하기 때문에 탈이다 . 그렇지 않으면 천문학 , 지리학 , 생물학 , 역사는 우리에게 많은 연구 재료를 제공하여 정당한 생각을 하도록 힘이 되어 줄 것이다 . 자연 조화의 목적을 이처럼 대국적으로 생각하면 인간의 위치는 좀 빈약하게 된다 . 그러나 이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 인간에게는 그 위치가 엄연히 있다 . 따라서 자연과 조 화 있는 생활을 해 나가면 인생 자체에 대하여도 실제적이고 합당한 견해를 갖게 된다 . 그리고 이것으로 족한 것이다 .

 

 

 2. 행 복은 관능적인 것

 

인간의 행복은 모두 생물적인 것이다 . 이것은 매우 과학적인 생각 이다 . 오해할는지 모르기 때문에 나는 이 점에 대하여 좀 더 분명히 말하고자 한다 . 거듭 말하거니와 인간의 행복은 모두 관능적인 데 있다 . 아마도 유심론자들은 나를 오해할 것이다 . 그러나 유심론자와 유물론자는 언제나 피차에 오해하게 마련이다 . 왜냐하면 양자는 같 은 언어를 사용하지 않거나 , 설사 같은 언어를 사용하여도 다른 뜻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

우리는 이 행복을 보전하는 문제에 있어서 유심론자들에게 속아서 진정한 행복은 정신적인 것밖에 없다고 생각해야 하는가 ? 우리는 한 걸음 양보하여 그들의 견해를 인정하고 나서 곧 우리의 지론을 내세 워 이렇게 말하도록 하자 . 즉 정신이란 인간의 내분비선의 기능이 완전히 발휘되어 있는 상태이다 . 그렇다면 정신적 행복이란 무엇을 가리키는 것인가 ?

나는 행복이란 주로 오장육부의 운행에 달려 있다고 생각한다 . 내가 세상에서 받고 있는 명성이나 존경 같은 것을 잃지 않고 간직하려 면 저 미국 대학 총장의 소매 그늘에 숨으면 된다 . 이 총장은 신입생 들에게 훈계를 할 때엔 으레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 제군들이 명심 해야 할 일이 두 가지가 있다 . 즉 성서를 읽는 것과 뒤 보는 것 ( 용변 ) 을 잊지 말아야 한다 .

참으로 지혜로운 분이다 . 여간 현명하고 온정에 넘치는 사람이 아 니면 총장으로서 이런 말을 할 수 없을 것이다 . 그렇다 . 인간은 내 장만 잘 움직여 주면 행복하고 그렇지 못 하면 불행하다는 문제는 간 단하다 .

우리가 행복을 논할 때에 추상적으로 이야기해서는 안 된다 . 그리하여 과연 어떤 때에 정말 행복하였는가를 자신이 사실대로 따져 보 아야 한다 .

이 세상에서 어떤 소극적인 것을 행복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 다 . 즉 슬픔이나 괴로움이나 육체적인 고통이 전혀 없는 상태를 행복 이라고 한다 . 그러나 적극적인 행복도 얼마든지 있다 . “ 환희”가 그것이다 . 예컨대 나의 경우에 정말 행복한 것은 다음과 같은 경우이다 .

잠을 푹 자고 나서 새벽 공기를 마시면 가슴이 한결 부풀어 오른 다 . 그리하여 깊숙이 숨을 들이마시고 싶어지며 가슴의 근육이 기꺼 이 뛰놀며 뿌듯해 와서 “ 자 , 이제 일을 해야지” 하고 생각하는 한때 .

한 손에 파이프를 들고 의자에 길게 발을 뻗으면 담배 연기가 하 늘하늘 피어오른다 . 이러한 한때 .

여름 한철 여행길에서 목이 마를 때 마침 곁에서 맑은 샘물이 흐르는 소리가 들려와 구두와 양말을 벗고 그 얼음 같은 샘물에 발을 담그는 한때 .

맛 좋은 음식을 실컷 먹고 나서 안락의자에 파묻혀 마음 맞는 친구들과 정담을 나누면서 몸도 마음도 태평스러운 한때 .

어느 한여름의 오후에 지평선을 바라보니 검은 구름이 뭉게뭉게 피어올라 이윽고 소나기가 올 것 같다 . 비를 맞고 싶지만 우산도 안가지고 비를 맞는 것도 쑥스러운 생각이 든다 . 그래서 급히 밖으로 뛰어나가 벌판 한가운데서 소나기를 만난 셈치고 얼마 후에 흠뻑 젖 어서 집에 돌아와서는 가족들에게 “ 뭐 비를 좀 맞았지” 하고 말하는 한때 .

어린애들이 떠들며 지껄이는 소리를 듣거나 그 통통한 종아리들을 볼 때 .

그런데 나는 아이들을 육체적인 의미에서 사랑하고 있는지 또는 정신적인 의미에서 사랑하고 있는지 분명히 말할 수 없다 . 그 환희를 육체와 정신의 두 부류로 나눠서 말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 다 . 이성을 육체적으로 사랑하지 않고서 정신적으로 사랑할 수 있을 까 ? 그리고 사랑하는 아내의 아름다움―그 웃음 , 보조개 , 고갯짓 , 여 러 가지 사물에 대한 그때그때의 반응 등등―을 해부하고 분석하기 란 남자로서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다 .

어떤 아가씨가 좋은 옷 을 입었을 때에는 더욱 행복을 느끼게 마 련이다 . 화장품은 여자의 마음을 자극한다 . 자기가 아름답게 화장을 하였다는 데서 오는 정신적인 침착성과 마음의 고요도 있을 수 있 다 . 이러한 느낌은 몸을 아름답게 단장한 그녀에게는 진실하고 뚜렷 한 것이다 . 그러나 세상의 정신주의자들은 이런 심정을 상상도 못 한 다 . 인간이란 생명을 지닌 육신이며 육체와 정신의 차이란 있다면 있고 없다면 없을 정도이다 . 그리하여 아무리 섬세한 정서와 위대한 정신미가 높이 평가되더라도 인간의 감각을 무시하고 그런 상태에 도달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

촉각 , 청각 , 시각과 같은 감각에는 도덕성이니 비도덕성이니 하는 것이 있을 수 없다 . 인생의 적극적인 환희를 받아들이는 힘이 부족한 것은 주로 관능적인 감수성이 줄어들기 때문이거나 또는 그것을 만족스럽게 쓰지 않기 때문이다 . 이런 일은 흔히 있을 수 있다 . 그 럼에도 불구하고 어찌하여 헛된 논란을 거듭하고 있는 것일까 ? 차라 리 구체적인 실례를 들어서 동서의 모든 위대한 인생 애호자들이 쓴 글에서 그들이 무엇을 즐거운 한때라고 생각하고 있는지 알아보아야 할 것이다 . 또한 그런 행복한 한때가 청각이나 후각이나 시각과 같은 중요한 감각과 얼마나 밀접한 관계가 있는지 살펴보기로 하자 . 다음에 인용하는 글은 “ 숲의 시인”이라고 부르는 도로가 귀뚜라미 우는 소리를 듣고 느낀 시적 흥취를 기록한 것으로 심미적인 감회가 풍기고 있다 .

 

 

우선 귀뚜라미가 우는 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라 . 귀뚜라미는 돌 틈 에 얼마든지 있다 . 그놈이 한 마리뿐일 때에는 더욱 흥취가 있다 . 그 울음소리를 들으면 어쩐지 처량한 생각이 든다 . 그러나 이 세상에서의 짧은 목숨이 다하면 영원한 죽음을 맞이할 것이라는 생각 때문에 처 하게 생각된다 . 또한 헛되이 허덕이고 있는 인간의 번뇌를 생각할 때에도 처량한 생각이 드는 것이다 .

그러나 그 울음소리는 본래 모든 시간관념을 떠나 있으므로 반드시 처량하다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 그보다는 오히려 봄의 욕정이나 애들의 열광이 한참일 때에 홀로 상쾌하고 원숙한 가을의 느낌을 준다고 볼 수 있다 . 귀뚜라미는 새에게 말한다 . “너희들은 아이들처럼 충동에 못 이겨 울고 있다 . 그런데 실은 자연이 너희들을 통하여 이야기를 건네고 있는 것이다 . 우리에게는 원숙한 지혜가 있다 . 우리에 게는 계절의 변화란 있을 수 없다 . 우리는 사철의 자장가를 부르고 있는 거란다 . ”

그리하여 그들은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 . 그들이 머물러 있는 곳이 바로 천국이다 . 그러므로 새삼스럽게 천국으로 가게 할 필요는 없다 . 5 월에도 11 월에도 변동이 없다 . 그렇잖은가 ? 침착하고 조용한 예지의 노래 속에는 산문과 같은 확실성이 깃들어 있다 .

술은 마시지 않지만 이슬은 마신다 . 그것은 교미하는 시기가 지나면 덧없이 사라지는 사랑의 선율이 아니다 . 신의 영광을 찬미하여 영원히 그것을 즐기고 있다 . 그 가락은 계절이 변천하는 테두리 밖에서 진리와도 같이 변치 않는다 . 그러므로 마음이 극히 고요히 가라앉았을 때에만 그 울음소리를 들어야 한다 .

 

 

우리는 다음에 휘트먼의 후각 , 시각 , 청각 등이 그의 정신을 얼마나 높여 주었으며 따라서 그가 그런 감각을 얼마나 중대시하였는가를 인용하는 글에서 살펴보기로 하자 .

 

아침부터 내리는 눈보라가 종일토록 그치지 않는다 . 나는 휘날리는 눈에 휩싸여 같은 숲 , 같은 길을 두 시간 남짓 걸었다 . 바람이 불었 다 . 그런데 소나무 사이로 나지막한 음악소리가 들려온다 . 매우 뚜렷 한 그 음악소리는 신비롭기까지 하다 . 폭포수라도 떨어지는 소리 같 다 . 때로는 나지막하게 또 때로는 우렁차게 들려온다 . 모든 감각―시 각 , 청각 , 후각이 가져오는 형언키 어려운 기쁨 , 눈은 여전히 내려 쌓 인다 .

상록수, 떡갈나무, 월계수, 그밖에 온갖 나무들의 무수한 잎과 가지 위에 쌓이고 쌓인다 . 그리하여 잎은 허옇게 부풀어 초록 빛깔의 가장자리가 뚜렷이 드러난다―사방에 빽빽이 들어선 소나무의 높고 꼿꼿한 기둥―엷은 송진 냄새가 눈의 향기에 어울린다 ( 향기는 이 세 상 만물에 다 있다 . 눈에도 향기가 있다 . 다만 제군들이 그 향기를 맡을 수 있느냐가 문제이다 . 이 세상에 똑같은 두 장소란 있을 수 없다. 시간도 마찬가지이다 . 한때와 한때는 반드시 다르다 . 정오와 밤중, 겨울과 여름, 바람이 부는 때와 조용한 때에 그 향기가 얼마나 다르냐 말이다).

 

정오와 밤중의 향기 , 겨울과 여름의 향기 , 바람이 부는 때와 조용한 때의 향기를 분간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 도시보다 농촌 이 살기가 즐겁다면 그것은 도시의 시각 , 후각 , 청각의 변화와 뉘앙 스가 농촌보다 선명치 못 하기 때문이다 . 어디나 단조로운 잿빛 울타 리나 시멘트 길로 해서 그런 변화와 뉘앙스가 사라져 버리는 것이다 .

즐거운 한때의 한계와 내용과 성질에 대하여는 중국인과 미국인은 비슷한 견해를 갖고 있다 . 다음에 인용하는 글은 어느 중국의 학자가 쓴 『 즐거운 한때에 관한 33 절』을 번역한 것이다 . 독자에게 소개하기 전에 그 글과 비교해 보기 위해 휘트먼의 글을 한 대목 인용하겠다 . 이 글을 보면 중국인의 생활감정과 비슷한 것을 알 수 있다 .

 

맑게 갠 상쾌한 어느 날 , 건조한 미풍이 불어오고 산소로 가득 차 대기는 나를 삼키려는 듯하였다 . 아름다운 가지가지의 기적―나무 , 물 , 풀 , 햇빛 , 첫서리―특히 내가 유심히 바라보고 있는 것은 이상하게 맑은 푸른 가을 하늘이다 . 구름이라고 해야 한 점 얄팍한 흰 구름뿐 , 조용히 생각에 잠긴 듯 하늘을 스쳐간다 . 아침나절 ( 오전 7 시부터 11 시까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에는 언제나 투명하고 싱싱한 푸른빛이었으나 이윽고 한낮이 가까워 오면 그 빛은 엷어져서 두서너 시 간 동안은 잿빛으로 변하다가 점점 더 빛이 바래서 황혼에 접어든다 . 그리하여 언덕 위에 커다란 나뭇가지 사이로 지는 해가 찬란한 빛을 던진다 . 불꽃이 퍼져 수면에 비스듬히 은빛을 던진다 . 엷은 황색과 짙은 밤색과 붉은 색깔로 무늬를 놓은 장관―맑게 가라앉은 그림자며 반사하는 햇살은 그림으로도 그려낼 수 없는 선명한 색조를 보여주고 있다 .

나는 몇 시간 동안 흐뭇한 마음으로 가을을 즐길 수 있었다 . 아마도 가을의 기쁨은 이 하늘 때문에 한결 더 절실히 느끼는 것 같다 .

나는 세상에 나와서 지금까지 저 하늘을 날마다 보아 왔으나 참된 하늘의 모습을 제대로 본 적이 없었다고 가끔 생각하곤 하였다 . 이러 한 순간들은 더 바랄 나위 없이 행복한 순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나는 일찍이 바이런이 친구에게 자기는 전 생애를 통하여 즐거웠 던 때라고는 단 세 시간밖에 되지 않는다고 말한 것을 어느 책에선가 읽은 일이 있다 .

이와 비슷한 내용으로 된 임금의 종이라는 오랜 전설이 독일에 도 있다 . 나는 문 밖의 숲에 나가서 나뭇가지 사이로 빛나는 저녁의 아름다운 황혼을 바라보며 바이런과 그 종에 대한 것을 머릿속에 생 각해 보았다 . 그러자 나는 방금 행복한 한때를 보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 나는 이렇게 즐거운 한때의 기억을 적어본 일이 없다 . 그런 순간에 이르면 메모를 적음으로서 모처럼 행복한 기분을 잡치는 것이 싫었기 때문이다 . 그러므로 나는 다만 고요한 황홀감에 잠긴 채 기분에 맡길 따름이다 ).

그런데 대체 행복이란 무엇인가 ? 내가 체험한 그런 한때거나 또는 그와 비슷한 한때를 말하는 것이 아닐까 . 행복이란 매우 미묘하여 삽 시간에 사라지는 빛깔이 아닐까 . 나는 분명히 알 길이 없다―그러므로 나로 하여금 이 알 길 없는 즐거움을 마냥 맛보게 하여 주소서 . 신이여 , 당신이 그 투명한 남빛 심연 속에 저와 같은 병든 자를 위해 명약을 간직하고 계시나이까 ( 저는 몸이 불편하고 마음이 번거로운 것 이 3 년 동안이나 계속되어 왔습니다 )?

신은 대기를 통하여 나에게 신기한 명약을 몰래 주신 것일까 ?

 

 

3. 즐 운 한때에 관한 33 절 _ 김성탄

 

우리는 여기서 한 중국인이 쓴 『 즐거운 한때』라는 글을 감상해 보자 . 이 중국인의 이름은 김성탄이다 . 그는 17 세기의 위대한 인상 파에 속하는 평론가로서 『 서상기 ( 西廂記 ) 』 라는 희곡의 풀이 가운데서 33 절에 걸쳐 즐거운 한때에 대하여 열거하고 있다 . 이 글은 일찍이 그가 친구와 함께 비로 길이 막혀 열흘 동안 어느 절간에서 꼼짝 못 하고 갇혀 있을 때 둘이서 추려 낸 것이다 . 그들은 다음에 적는 33 절이야말로 인간의 정신이 관능과 조화되어 인생의 참된 즐거움을 맛볼 수 있는 한때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

 

1.   유월의 어느 무더운 날 , 태양은 하늘에 걸려 있고 구름 한 점 없다 . 앞뒤 뜰은 마치 가마 속 같이 찌는 듯하다 . 하늘을 나는 새 한 마리 구경할 수 없고 땀은 전신에 폭포수처럼 흘러내린다 . 점심식사를 하려고 하여도 더위 때문에 수저를 들 엄두가 나지 않아서 자리를 땅바닥에 깔고 그 위에 벌렁 누워 본다 . 그러나 돗자리는 축축하고 파리 떼가 얼굴에 날아들어 아무리 쫓아도 막무가내다 . 이렇게 되면 나는 완전히 기진맥진하게 된다 . 그때에 별안간 우렛소리가 요란스럽게 들리더니 먹구름이 겹겹이 하늘을 덮고 마구 싸움터로 달려드는 대군처럼 당당히 모여든다 . 이윽고 처마에서 굵은 비가 장대처럼 쏟아지기 시작한다 . 땀은 순식간에 걷히고 축축하던 땅도 간 데 없고 파리 떼들은 다 어디로 숨어 버려 그제야 밥 생각이 난다 . 아아 , 이 어찌 흐뭇한 일이 아니겠 는가 .

2.   10 년 동안이나 만나보지 못 한 친구가 갑자기 저녁때에 찾아온다 . 문을 열어 반가이 그를 맞이하여 배로 왔는지 육로로 왔는지 묻지 않고 침대나 의자에 걸터앉아 쉬란 말도 하지 않은 채 바로 안방에 들어가서 아내에게 말한다 . “여보 , 당신도 소동파의 부인처럼 술 좀 담뿍 받아오구려 . ” 그러면 아내는 기꺼이 금비녀를 빼들고 “ 이걸 팔도록 하지요” 하고 말한다 . 적어도 사흘 동안은 실컷 마실 수 있을 것 같다 . 아 , 이 또한 즐거운 한때가 아니겠 는가 .

3.   나는 빈 방에 우두커니 앉아 있다 . 베개 너머로 쥐가 넘나들며 차차 성가시게 군다 . 대관절 바삭바삭 하며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 . 무엇을 갉아 먹고 있는 것일까 . 내 어느 책을 쓸고 있을까 . 이렇게 생각하면 어쩌면 좋을까 하고 망설이고 있는데 별안간 사 나운 얼굴을 한 고양이가 놈을 노리고 있는 것처럼 꼬리를 흔들며 눈을 부릅뜨고 가까이 다가온다 . 나는 숨을 죽인 채 꼼짝도 않고 기다려 보기로 한다 . 그러자 쥐는 바삭하더니 바람처럼 달아 난다 . 아 , 이 또한 즐거운 한때가 아니겠는가 .

4.   서재 앞에 있는 해당화와 자형을 열 그루나 스무 그루와 푸릇 푸릇한 파초를 심는다 . 아 , 이 또한 즐거운 한때가 아니겠는가 .

5.   봄날 저녁에 몇 사람의 낭만적인 친구들과 어울려 술을 나누고 거나하게 취하였다 . 잔을 놓기는 싫고 그렇다고 더는 먹을 수도 없다 . 그때 옆에 있던 친구 하나가 분위기를 잘 알아차리고 바구 니에 여남은 개의 폭죽을 담아가지고 온다 . 나는 식탁에서 일어나 마당에 나가 그 폭죽을 터뜨린다 . 유황 냄새가 코를 찌르고 머리를 자극하여 기분이 근사하다 . 아 , 이 또한 즐거운 일이 아 니겠는가 .

6. 길가에서 두 사람의 깡패가 아귀다툼을 하고 있다 . 얼굴은 상기 되고 눈은 분노에 타서 흡사 불구대천의 원수라도 되는 것 같다 . 그러나 서로 예의를 지킨답시고 팔을 올리고 허리를 굽혀 절을 하면서 “ 댁에서 말씀예요” 또는 “어찌된 셈이에요 ? ” , “그렇지 않아도 ? ” 하며 점잖은 말을 쓰면서도 시비는 그칠 줄 모른다 . 그때 난 데없이 험상궂은 사나이가 팔을 휘두르며 나타나서 그만 집어치워라 ! 하고 불호령을 한다 . 이 또한 즐거운 한때가 아니겠는가 .

7. 식사를 마치고 심심풀이로 근처의 가게에 들려 간단한 물건을 사 려고 한다 . 흥정을 시작한다 . 좀 더 깎아 주었으면 하는데 점원 아이가 팔려고 하지 않는다 . 그래 나는 내가 깎으려는 값어치에 해당되는 물건을 호주머니에서 꺼내어 슬그머니 그에게 넘겨준 다 . 그러자 그는 금세 얼굴에 웃음을 띠고 공손히 고개를 숙이며 말한다 . “나리 , 참 마음이 좋으신 분입니다 . ” 아 , 이 또한 즐거운 한때가 아니겠는가 .

8.   항아리에서 물이 넘쳐흐르듯이 자식들이 옛 글을 줄줄 왼다 . 나는 가만히 엿듣는다 . 아 , 이 또한 즐거운 한때가 아니겠는가 .

9. 식사를 마치고 심심풀이로 헌 가방을 열고 뒤적거렸더니 그 안에 서 전에 우리 집에서 돈을 빌려 준 사람들의 차용증서가 및 십 장 또는 몇 백 장이나 무더기로 나왔다 . 그 채무자들 가운데는 이미 작고한 자도 있고 아직 살아 있는 자도 있다 . 그러나 도저히 돈을 받아낼 가망은 없는 것이다 . 나는 몰래 그 차용증서 무 더기를 불사르면서 그 연기가 사라져 버릴 때까지 지켜본다 . 이 또한 즐거운 한때가 아니겠는가 .

10. 어느 무더운 여름에 모자를 쓰지 않고 맨발로 밖에 나가 양산을 받고 서서 젊은이들이 물방아를 돌리며 부르는 노래 소리를 우두커니 듣고 있다 . 논의 물은 녹은 백은이나 백설같이 흰 거품을 내면서 물방아 속으로 흘러든다 . 아 , 이 또한 즐거운 한때가 아 니겠는가 .

11.   아침에 자리에서 일어나 눈을 뜨니 간밤에 누가 죽었다고 집안 식구들이 수군대고 있는 것 같다 . 나는 누가 죽었느냐고 물어본 다 . 죽은 사람은 바로 우리 동네에서 제일 구두쇠였다는 것을 알 게 된다 . 아 , 이 역시 즐거운 한때가 아니냐 .

12. 여름 아침 일찍 자리에서 일어나 밖에 나가니 사람들이 물받이 홈통으로 쓰려고 소나무 선반 아래서 커다란 대나무를 톱으로 켜고 있다 . 아 , 이 또한 즐거운 한때가 아니냐 .

13. 한 달씩 계속된 긴 장마로 주정뱅이는 병자처럼 아침 늦게까지 자리에서 일어나기가 싫다 . 그때 창 밖에서 비가 개인 것을 알리는 새의 울음소리가 들려온다 . 나는 벌떡 일어나 침실의 커튼을 제치고 창문을 연다 . 태양이 환히 비춰 오고 나무들은 목욕을 하 고 난 것처럼 말쑥하다 . 아 , 이 또한 즐거운 한때가 아닌가 .

14.   한밤중에 누가 멀리서 나를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 이튿날 그 장본인을 찾아간다 . 그 집에 들어서니 본인은 남쪽 들창가의 책상에서 무슨 책을 읽고 있다가 나를 보고 조용히 인사를 하고 나서 내 옷소매를 잡아 앉히고 “ 마침 잘 왔네 . 이걸 좀 읽어 보세” 한다 . 우리는 해가 기울 때까지 즐겁게 이야기를 주고받곤 하였다 . 드디어 친구는 배가 고픈지 나에게 슬며시 묻는다 . “자네도 시장하지 ? ” 아 , 이것도 즐거운 한때가 아니냐 .

15.   집을 마련하려고 꼭 마음먹은 것은 아니지만 뜻밖에 얼마간 돈이 생겨서 집을 짓게 되었다 . 그때부터 밤낮 재목을 사 들여라 , 기와 , 벽돌 , 회를 사라 , 못을 사라 하고 성화다 . 나는 그것들을 파는 상점을 낱낱이 찾아다닌다 . 모두가 집을 지으려는 일 때문이 다 . 이런 역사를 하는 동안에는 물론 새 집에 살 수 없다 . 나는 그만 성가셔서 다 집어치우고 싶은 생각도 든다 . 그러다가 드디어 어느 날 집이 다 되어 , 벽에는 흰 회칠을 하고 마루는 깨끗이 닦여 있고 창문에는 종이를 바르고 , 방 안에는 서화를 걸고 , 목수나 미장이는 다 돌아가 버렸다 . 이윽고 친구들이 찾아와서 여기저기 놓여 있는 걸상에 걸터앉는다 . 이것도 역시 즐거운 한때가 아니겠는가 .

16.   겨울밤에 술을 마시고 있는데 방안이 싸늘해 온다 . 창을 열고 밖 을 내다보니 함박눈이 펄펄 쏟아져 내려 벌써 땅 위에 네댓 치 쌓여 있다 . 아 , 이것도 즐거운 한때가 아니냐 .

17.   한여름의 오후 . 새빨간 큰 소반에 새파란 수박을 얼어 놓고 날이 선 칼로 선뜻 자른다 . 아 , 이것 역시 즐거운 한때가 아니냐 .

18.   나는 전부터 승려가 되려고 하였다 . 그러나 육식을 할 수 없는 바람에 망설이고 있었는데 앞으로는 승려가 고기를 먹어도 좋다 고 하자 . 그렇게 되면 나는 대야에 더운 물을 부어 놓고 잘 드는 면도칼로 머리를 박박 깎는다 . 아 , 이것도 즐거운 한때가 아 니냐 .

19.   부끄러운 곳에 조그마한 습진이 생겨서 문을 꼭꼭 닫아걸고 , 가끔 더운 김을 쏘이거나 더운 물에 적신다 . 아 , 이 역시 즐거운 한때가 아니냐 .

20.   가방 속에서 우연히 옛 친구의 편지를 발견한다 . 아 , 이것도 즐거운 한때가 아니냐 .

21.   어느 가난한 선비가 돈을 꾸러 왔으나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아 서 망설이다가 화제를 딴 데로 돌리려고 한다 . 나는 그의 괴로운 심정을 미리 짐작하고 단둘이 있을 수 있는 곳에 그를 데리고 가서 얼마나 필요하냐고 묻는다 . 그리고 나서 다시 방에 들어와 돈을 내주고 이렇게 묻는다 . “지금 곧 가서 그 문제를 처리해야 하나 ? 좀 더 있으면서 한 잔 들고 가면 어때 ? ” 아 , 이 또한 즐거운 한때가 아니겠는가 .

22.   나는 조각배에 몸을 싣고 있다 . 산들바람이 기분 좋게 불어오는 데 배에는 줄이 없다 . 그런데 갑자기 한 커다란 배가 나타나더니 태풍처럼 재빨리 다가온다 . 나는 그 배에 가까이 가서 갈고리를 걸려고 한다 . 나는 그 배에 줄을 걸고 끌어달라고 부탁하고는 두 보의 시 < 청석봉란 황지굴유 > 를 읊으며 껄껄 웃는다 . 아 , 이 또 한 즐거운 한때가 아니냐 .

23.   친구와 함께 집을 보러 다니나 마땅한 집이 없다 . 그때 마침 어떤 사람이 마땅한 집이 있다고 한다 . 별로 크지도 않은 집인데 방이 여남은 개 되며 , 강기슭의 아름다운 숲에 싸여 있다는 것이다 . 나는 그 사람에게 저녁을 대접하고 무작정 집을 보러 간다 . 대문을 들어서니 널따란 정원에 공지가 있고 곡식 창고가 예닐곱 채나 된다 . 나는 마음속으로 “앞으로는 배추와 호박 걱정은 않겠구나” 하고 생각한다 . 이 역시 즐거운 한때가 아니겠는가 .

24.   길을 떠난 사람이 먼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다 . 정든 성문이 보이 고 냇가에서는 아낙네와 아이들이 고향 사투리를 지껄이고 있다 . 이 또한 즐거운 한때가 아니냐 .

25.   옛 자기 그릇이 깨어지면 누구나 다시 제대로 맞출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 깨진 그릇 조각을 이리저리 만져보아야 화만 치밀 뿐이 다 . 그럴 때에는 그 그릇을 부엌에서 일하는 사람에게 내어주고 다른 헌 그릇과 같이 쓰라고 하면서 일단 깨진 그릇은 내 눈에 띄지 않도록 하라고 이른다 . 아 , 이 또한 즐거운 한때가 아니냐 .

26.   나는 성인군자가 아니므로 불의를 행하기도 한다 . 밤중에 일종의 불의를 저지르고 아침에 일어나면 기분이 좋지 않다 . 그때 불의 를 감추지 않는 것이 곧 참회라는 불교의 가르침을 생각하고 , 주 위의 모든 사람들 ( 낯선 사람이거나 옛 친구거나 ) 에게 간밤의 불의를 이야기한다 . 아 , 이것도 즐거운 한때가 아니냐 .

27.   아래위로 한 자가 되는 큰 붓글씨를 쓰는 것을 옆에서 바라보고 있다 . 아 , 이것 역시 즐거운 한때가 아니냐 .

28.   방문을 열고 방안의 파리를 쫓아낸다 . 아 , 이것도 즐거운 한때가 아니냐 .

29.   태수가 북을 치게 하여 퇴청 시간을 알린다 . 아 , 이것도 즐거운 한때가 아니냐 .

30.   누가 날리던 연 줄이 끊어져서 연이 날아가는 것을 쳐다본다 . 아 , 이것도 역시 즐거운 한때가 아니냐 .

31.   초원이 불에 타고 있는 것을 구경한다 . 아 , 이 역시 즐거운 한때가 아니냐 .

32.   그동안 빚진 돈을 다 갚아 버린다 . 아 , 이것도 또한 즐거운 한때가 아니냐 .

33.   규염객전 ( 虬 髯 客傳 ) 을 읽는다 . 아 , 이것도 역시 즐거운 한때가

아니냐 .

 

 

한 평생에 오직 세 시간 밖에는 즐거운 시간을 가져보지 못하였 다는 바이런의 정신은 병적이거나 지나치게 뒤틀려 있었던가 보다 . 아니면 시작 생활 10 년 동안에 시대적인 풍조가 되다시피 한 만민의 고통을 아끼는 데 지나지 않았던 모양이다 . 그러한 풍조가 아니었던들 적어도 30 시간쯤은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으리라고 그도 인정하였을 것이다 . 나로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

이상에 언급한 바에 의하여 생각해 볼 때 인생은 관능에 의해서 만 향락할 수 있게 되어 있다 . 그러므로 이러한 향락을 긍정하는 교 양이 필요하다 . 그래야만 그것을 솔직하게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 이것은 길게 설명할 나위도 없는 분명한 일이다 . 자기 자신의 관능 과 함께 발동되는 이 호화로운 세계를 외면하는 것은 유심론자들이 우리로 하여금 관능을 두려워하게 만들어 버린 탓이 아닐까 .

이러한 철학자들은 우리가 육체라고 부르는 섬세한 감각기관에 대 한 신뢰감을 다시 갖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 그리하여 육체를 멸시하는 사고방식을 버리고 나서 관능을 두려워하는 태도를 지양해야 한다 .

이러한 철학자들이 실제로 물질을 승화시키고 인간의 육체를 기화 하여 신경도 , 미각도 , 후각도 , 색감도 , 운동감각도 , 촉감도 느낄 수 없는 하나의 영혼으로 만들어 버리지 않는다면 , 그리고 저 힌두교의 고행자와 같은 짓을 할 배포를 갖지 않는다면 우리는 모름지기 용감 하게 있는 그대로의 현실에 충실하도록 하자 . 진실을 인정하는 철학 만이 우리를 참된 행복에 이르게 할 수 있다 . 그러므로 이러한 철학이야말로 우리에게 건전한 가르침을 줄 수 있는 것이다 .

 

 

4. 유 물론의 오해

 

앞의 절에서 이야기한 인생의 즐거운 한때에 대한 김성탄의 주장을 읽은 사람은 인간의 정신적인 즐거움과 육체적인 즐거움이 서로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다는 것을 이미 알았을 줄 믿는다 .

정신적인 즐거움은 육체를 통하여 느껴질 때 비로소 참된 즐거움이 되는 것이다 . 나는 이 가운데 도덕적인 즐거움까지도 넣고 싶다 . 옛날 에피쿠로스학파나 스토아학파의 철학자들이 가끔 오해를 받 듯이 어떤 주장을 내세우려면 그런 오해쯤 받을 각오를 해야 한다 . 마르크스 아우렐리우스에게서 찾아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스토아 철 학자의 정신 속에 숨은 본질적인 정념이 얼마나 오해를 받아 왔던가 . 그리고 예지와 절제를 존경하는 에피쿠로스학파의 가르침이 일반 사람에게 한낱 쾌락설로서 받아들이는 경우가 얼마나 많았던가 . 어딘가 유물론적인 인상을 받는 이러한 철학사상에 대하여는 으레 이런 반발을 받을 것이다 . 즉 그것은 이기적이며 , 사회적인 책임을 질 것 없이 자기만의 쾌락을 추구하라 가르친다는 것이다 . 그러나 이러한 반박은 무지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 이런 주장을 하는 자는 자기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고 있는 것 같다 . 그들은 견유 철학자처럼 인생을 사랑하는 자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 한다 . 인생을 사랑한다는 것은 무슨 가르침이나 신조 또는 지적 신념에서 오는 것 이 아니며 이론적으로 해명함으로써 되는 것도 아니다 .

설명이 필요한 인류애는 참된 사랑이 아니다 . 참된 사랑은 마치 새가 날개 치듯이 자연스러운 것이라야 한다 . 즉 그것은 건전한 마 음속에서 스스로 우러나서 대자연에 접촉하여 작용하는 순수한 감정 이어야 한다 . 진심으로 나무를 사랑하는 자라면 동물이나 이웃에 잔 인한 짓은 못하는 법이다 .

인생이나 인류에 대하여 통찰하고 자연에 대하여 깊은 이해를 지닌 건전한 정신의 소유자라면 사랑은 극히 자연스러운 일에 속한다 . 그러한 사람에게는 사랑을 가르치는 철학도 인위적인 처세법을 초월 해 있으므로 정신적 도덕적인 건전한 인격을 이룰 수 있기 때문이다 .

우리는 대지를 파헤치고 사랑의 샘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올 수 있 도록 구멍을 크게 내려는 것이다 . 이것은 이타주의의 비판은 될지언 정 그 비난을 받아야 할 아무런 이유도 없는 것이다 .

유물론은 오늘에 이르기까지 통탄할 만한 오해를 받아 왔었다 . 이 점에 대하여 나는 조지 산타야나를 대변자로 내세우려 한다 . 그는 자기를 가리켜 “ 당대에 두려운 유일한 유물론자”라고 말하였으나 세상에 알려진 바와 같이 현대인 가운데서 깊은 사랑을 갖고 인생을 살아간 사람이었다 .

그에 의하면 세상 사람들이 유물론에 대하여 편견을 품는 것은 외부에서 고찰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 그들은 자기만이 오래 전부터 지니고 있던 신조에 비추어 본 다음에 유물론에서 겨우 알게 된 몇 가지 결함을 발견하고 놀라는 것이다 . 그러나 우리가 아직 모르고 있는 어떤 신조나 종교 또는 국가를 올바로 이해하려면 이 새로운 세계를 완전히 이해하여야 한다 . 대부분의 세상 사람들이 오해하고 있는 유물론에는 약동하는 환희와 건강한 감성이 있다 .

산타야나도 말한 바와 같이 참된 유물론자는 언제나 웃고 있는 철 학자 데모크리토스와 같은 사람이다 . “ 시끄러운 지성의 화를 입어 웃 음을 잃은 것은 바로 우리들 자신이다 . ” 즉 어쩔 수 없이 유물론자가 되어 있으면서도 정신주의를 추구하지만 이기적이고 물질적인 생활에 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

유물론을 철저히 신용하는 자는 무심코 기독교의 세례를 받고 언제나 흔들리는 신자들과는 달라서 저 웃음의 철학자인 위대한 데모크리토스와 같은 인물이다 . 삼라만상으로 나타나고 엄청난 정열의 어머니인 대자연의 모습을 꿰뚫어 보는 데모크리토스의 환희는 생물 진열관을 구경하는 사람들의 지적인 환희와 같은 것이다 . 표본상자 속에 들어 있는 많은 나비 , 학이나 갑각류 , 매머드나 고릴라가 거기 있다 . 이 수많은 생명체에게는 분명히 여러 가지 고뇌가 있었을 것이다 . 그러나 이제 그러한 괴로움은 사라져 버렸다 . 대자연을 널리 보면 , 이 야외극은 얼마나 엄청난 것인가 . 우주의 교호작용 속에는 얼마나 무궁무진한 흥취가 깃들어 있는가 . 또한 그 조그마한 욕정은 얼마나 어리석으며 얼마나 악착같은가 ! 이러한 감탄이야말로 유물론 이 답답한 사람들의 마음속에 불러일으키는 감정이다 . 그것은 적극성을 띠고 있으며 환희에 충만하다 . 또한 개인주의로 빠지는 일이 없이 자기 환상을 존중한다 . 거기에는 한 조각의 냉소도 허용하지 않는다 .

원래 유물론적인 윤리학은 살아 있는 뭇 중생의 심통한 슬픔을 냉담하게 옆에서 구경만 하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 도리어 모든 자선기관과 같이 인간이 슬픔을 두려워하면서 의지가 좌절되지 않게 고행자와 같은 태도로써 굳이 밀고 나가는 힘이 있었다 . 인간의 비 애를 가볍게 생각하는 것은 크리슈나의 신을 찬송하면서 낙천주의 적인 신의 수레를 끄는 사람들이 하는 것이다 . 그러나 허영심이나 자기기만에서 오는 모든 악덕이나 , 자기를 가리켜 우주의 중심이요 정상이라고 생각하는 거만한 자들의 언사에 대하여는 유물론적인 냉 소야말로 알맞은 방패가 될 것이다 .

웃음에는 다음과 같은 미묘한 점이 있다 . 유물론자는 깊은 동정이 나 우정을 찾아볼 수 없는 것을 싫어한다 . 예컨대 돈키호테와 같은 어처구니없는 짓이나 수난기를 읽고 웃기는 하지만 이 영웅의 마음 속까지는 비웃지 않는다 . 그의 정열에 대하여는 찬양할 만한 가치가 있다 . 그런데 인간사회를 알맞게 개선하려면 우선 그 사회를 잘 알아야 한다 . 그리고 인생의 행복을 얻으려고 하면 먼저 이성적으로 생각해 보아야 한다 .

우리가 언제나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관능적인 생활보다 높이 평가 하는 지능적인 생활이나 정신적인 생활이란 무엇인가 ? 미안한 말이지만 근대 생물학은 정신을 가리켜 동물의 섬유나 분비액이나 신경으로 된 일종의 장치라고 보고 그것을 본래의 위치로 올려놓으려는 경향이 있다 . 내가 생각하기에는 낙천주의란 한 개의 분비액이나 마 찬가지다 . 적어도 어떤 분비액에 의하여 그 작용이 가능한 신경의한 상태이다 .

정신생활이란 어디서 비롯되는 것인가 ? 또한 그것은 무엇에 의하 여 존속되며 어디서 그 영양을 섭취하고 있는가 ? 일찍이 철학자들은 인간의 모든 지식은 감각적인 경험에서 비롯된다고 지적하였다 . 아 닌 게 아니라 인간은 시각이나 촉각 또는 후각이 없으면 아무런 지식도 얻지 못 한다 . 그것은 마치 렌즈와 감광판이 없으면 사진이 찍혀 나오지 못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 현명한 자와 우매한 자의 차이도 전자가 우자에 비하여 머릿속에 선명한 영상이 비치고 오래 보존 할 수 있는 정결한 렌즈나 필름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 그리고 글에 의한 지식에서 인생의 참된 지식을 얻으려면 간단한 사유나 사색으 로는 불충분하며 반드시 자기의 독특한 방법을 체득할 필요가 있다 . 즉 사물을 있는 그대로 느끼고 인생과 인간성에 대한 모든 현상을 하나하나 따로 생각하지 않고 전체적인 각도에서 보고 좀 더 명확한 인상을 얻어야 하는 것이다 . 이와 같이 인생을 느끼고 체득하면 우리 모든 감각은 서로 잘 협조를 하는 법이다 . 우리가 지성적인 온정을 느끼는 것은 모든 감각이 협동하는 데서 오는 것이다 . 즉 심정과 지능과의 협동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것이다 . 그러므로 이성적인 온 정은 소중한 것으로 푸른 나무가 표적인 것처럼 그러한 온정은 인생 의 표적이다 .

우리가 어떤 사람의 인생관을 알아보려고 하면 우선 그 사람에게 이러한 온정의 유무를 알아보면 된다 . 그것은 마치 재해를 당하여 죽어가는 나무가 아직 생명이 붙어 있는가의 여부를 알려고 할 때 잎사귀에 생기와 수분이 남아 있는지 또는 섬유의 조직이 튼튼한지 의 여부를 보면 알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

 

 

5. 정신적인 기쁨이란 ?

 

여기서 우리는 흔히들 차원이 높다고 생각하는 지적 , 정신적 즐거 움이 지 력보다 감각과 얼마나 밀접한 관계가 있는가를 생각해 보고 자 한다 . 일반적으로 저급한 감각과 구별되는 이른바 정신적인 즐거 움이란 대체 어떤 것인가 ? 그것은 인간의 감각 속에 뿌리를 박고 그것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동일한 사물이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나 있는 것이 아닐까 ?

문학 , 미술 , 음악 , 종교 , 철학 등 차원이 높은 정신적인 즐거움에 대하여 잘 생각해 보면 그 지력이라는 것이 인간의 감각이나 감정에 비하여 얼마나 무력한 것인가를 알 수 있다 . 예를 들어 회화에 대하여 살펴보자 . 우리가 풍경화나 초상화를 볼 때에 실제의 경치나 아름다운 얼굴을 보고 싶은 관능적인 즐거움을 우리에게 연상시켜 주지 못 한다면 그 그림에 무슨 값어치가 있겠는가 ? 또한 문학도 마찬가지다 . 문학이 인생의 생생한 모습을 그 안에 재현시켜 그 정취와 희비를 그려보고 목장의 향기나 뒷골목의 악취를 느끼게 하지 못 한 다면 무슨 값어치가 있겠는가 ? 소설은 인간과 그 희로애락의 참된 모습을 그려야만 작품 가치가 있다고 말한다 . 그러므로 인간을 인생 에서 분리시켜 다만 냉혹하게 분석하는데 불과한 것이라면 문학이라 고 할 수 없을 것이다 . 문학은 인간적인 진실을 많이 담고 있을수록 걸작이라고 할 수 있다 . 소설이 단지 냉정한 해부에 그치고 인생의 신 맛 , 쓴 맛과 더불어 그 향취를 그려내지 못 한다면 어찌 독자에게 감명을 줄 수 있겠는가 ?

또한 방향을 바꾸어 시와 음악에 대하여 생각해 보더라도 그렇다 . 시란 희로애락의 어둡고 밝은 면을 표현한 인생의 진실에 불과하며 음악은 말을 소리로 대신한 감정의 표현이다 . 그리고 종교는 공상의 형태를 취한 예지에 지나지 않는다 . 그림이 색채와 상상의 감각에 토대를 두고 있듯이 시가는 인생 애환의 진실을 나타내는 동시에 음 향과 가락과 리듬의 감각 위에 기초를 두고 있다 . 음악은 순수한 감정의 표현으로 인간의 지력이 함께 작용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인 언어를 전혀 필요로 하지 않는다 . 음악은 소의 목에 단 방울 , 어시 장과 전쟁터의 모든 음향이나 때로는 꽃의 아름다움이나 파도의 물결과 달빛의 아름답고 잔잔한 모습까지도 표현한다 . 그러나 감각의 한계를 넘어서 철학적인 관념을 표현하려고 하면 금세 음악은 타락해 버린다 .

종교도 이와 마찬가지다 . 종교가 타락하는 원인은 산타야나도 말 한 바와 같이 지나치게 이론을 숭상하는 데 있는 것이다 . 그는 말하였다 . “불행하게도 종교가 헛된 이론의 옷 을 입은 미신으로 타락하 기 위해 상상의 세계에서 지혜를 제공하기를 그만둔 지도 이미 오래 되었다 . ”

종교가 타락한 것은 신조나 신앙형식이나 신앙개조나 교의 및 그 해석 따위에 전력을 기울여 현학적인 정신에 빠져 버렸기 때문이다 . 신앙은 정당화하고 합리화하여 옳다고 믿게 됨에 따라서 경건한 생각이 줄어든다 . 모든 종교가 자기들만이 진리를 발견하였다고 맹신을 하는 편협한 종파로 화한 것은 이 때문이다 . 그리하여 모든 종파 에서 보는 바와 같이 이론으로 신앙을 정당화하면 할수록 더욱 편협 한 것이 되어 버린다 . 그리하여 종교는 가장 악질인 완고덩어리가 되고 철저한 이기주의와도 결합되는 것이다 . 종교는 이렇게 되면 다 른 종파에 대하여 너그러운 태도를 갖는 것이 불가능하다 . 그뿐만 아니라 종교의식을 신과 인간의 사사로운 거래로 만들어 버림으로써 이기주의를 길러내게 된다 . 그리하여 같은 종파인 A 는 B 에 대하여 기회 있을 때마다 찬송가를 부르며 B 의 영광을 찬미하며 B 도 마찬 가지로 A 를 축복한다 . 그러나 이 경우에 누구보다 먼저 자기 자신 과 자기 가족부터 축복하는 것이다 . 믿음이 두터워서 교회에 빠짐없이 다니는 노파들 가운데서 가끔 욕심꾸러기를 찾아볼 수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 결국 자기만이 진리를 발견하였다고 망상하는 독단이 종교의 토대가 되어 있는 모든 온정을 몰아내는 것이다 .

대체 미술이나 시가나 종교는 무엇 때문에 있는 것인가 ? 그것은 우리의 마음속에 상상의 신선미 , 보다 큰 정서적인 심미감 , 보다 더 발랄한 생명감을 북돋아 주기 위해서이며 그 밖의 다른 이유가 있을 수 없다 . 인간은 나이를 먹음에 따라서 감각이 차차 둔해지며 , 괴로움이나 불의나 잔인성에 대한 희로애락의 정도 미약해지고 , 차디찬 현실의 보잘 것 없는 일에 구애되어 인생에 대한 상상력도 위축되어 버리는 것이다 .

다행히 이 세상에는 날카로운 감수성이나 섬세한 정서적인 감응이 나 상상의 신선미를 잃지 않고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몇몇 시인과 예술가가 있다 . 이런 사람들의 임무는 우리들의 양심을 일깨워 주고 둔해진 상상력을 반성케 하는 거울이 되며 위축된 신경을 조정해 주 는 데 있는 것이다 . 예술은 우리의 마비된 정서나 , 생기를 잃은 사고나 , 부자연스러운 생활의 풍자가 되고 경고가 되어야 할 것이다 . 예술은 이론이 분분한 이 세상에서 이론을 초월하는 법을 가르쳐 준 다 . 또한 그것은 건전한 생활을 회복하게 하고 정신 과로에서 오는 광란증을 치료해 준다 . 그리하여 우리들의 감각을 날카롭게 하고 지 성과 인간성의 관계를 재조정하여 인간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게 함으로써 균형을 잃은 생활의 파편들을 다시금 조립하여 먼저대로의 완전한 모습으로 돌아가게 한다 . 이해가 따르지 않은 지식 , 감상이 결여된 맹목적인 비판 , 사랑이 없는 미 , 인정이 깃들지 않은 진리 , 자비가 결핍된 정의 , 온정을 찾아볼 수 없는 예절이 성행되는 이 세상은 얼마나 비참한가 .

정신의 활동이라고 생각되는 철학에 대하여 생각해 보더라도 인생 자체에 대한 감흥을 잃는다면 그 위험은 상당히 큰 것이다 . 이른바 정신적인 즐거움 속에는 수학의 기다란 방정식을 푸는 기쁨이나 우주의 오묘한 이치를 깨닫는 기쁨도 포함되어 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 이렇게 이치를 깨닫는다는 것은 모든 정신적인 것 중에서도 가장 순수한 것이리라 . 그러나 나는 그것도 맛있는 음식과 바꾸라면 선뜻 응하겠다 .

첫째로 그 정신적 즐거움 속에는 정신작용의 부산물이라고 할 수 있는 심심풀이 같은 것이 들어 있다 . 즉 그것은 자기가 재미있어서 하는 일이요 , 인체에 반드시 긴요한 것은 아니다 . 이러한 지적인 기쁨은 결국 크로스 워드 퍼즐을 용케 풀었을 때의 기쁨과 같은 것 이다 .

둘째로는 이 경우에 철학자는 흔히 자기 자신을 속이고 완전이라 는 추상적인 생각에 빠짐으로써 진실을 배경으로 삼기보다는 세계의 논리적 완성을 과대평가하기 쉬운 것이다 . 그것은 결코 사물을 올바 로 고찰하는 방법이라고 할 수 없으며 , 마치 별을 ⋆ 의 모양으로 그리는 것과 같은 것이다 . 즉 공식 ( 公式 ) 에의 환원 , 기교적인 정형화 , 지나친 단순화이다 . 그러나 정도를 지나치지만 않으면 그것도 무방 하다 .

그런데 수많은 사람들은 만물의 설계 속에 깃들어 있는 단일의 이치를 찾아내지 않아도 즐겁게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것이 사실이 다 . 즉 그런 것은 없어도 무방한 것이다 .

수학자와 이야기를 주고받느니 아름다운 아가씨와 이야기를 나누 는 것이 훨씬 재미있다 . 그녀의 말은 구체적이며 그 웃음에는 인정 미가 넘치기 때문이다 . 그리고 그녀와 이야기를 나누면 인간성에 대 한 지식도 늘게 된다 . 나는 언제나 시가보다는 돼지고기를 택한다 . 노르스름하게 타서 씹으면 바삭바삭하는 , 고급 소스를 발라 잘 구운 등심 살코기 한조각이라면 복잡한 철학쯤 집어던져도 좋다 . 나는 이 런 의미의 유물론자이다 .

사색보다 생활을 더 소중히 생각하여야만 과열된 철학이 주는 숨막히는 기분에서 헤어날 수 있으며 , 동심 속에 감추었던 참된 직관력의 신선하고 소박한 맛을 되찾을 수 있는 것이다 . 어떠한 철학자 도―만일 그가 진정한 철학자라면―아이들의 태도를 보고 스스로 부 끄러워할 것이다 . 아니 울안에 있는 새끼사자를 보고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 그 발톱이나 힘살하며 , 아름답고 부드러운 털 , 뾰족한 귀 , 반짝이는 눈 , 민첩한 동작 , 장난기―이 모든 요소가 어쩌면 그렇게 완전히 갖추어졌을까 . 하늘이 준 완전한 것이 가끔 인간의 손으로 불완전한 것이 됨을 볼 때 , 철학자는 마땅히 부끄러워해야 할 것이 다 . 안경을 쓰고 식욕도 없고 때때로 번민을 하고 인생의 정취를 깨 닫지 못 함을 철학자는 부끄러워할지어다 . 이런 철학자들에게서는 아 무것도 얻을 수 없다 . 왜냐하면 그가 하는 말에서는 요긴한 것이라 고는 하나도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 그러나 철학이 우리에게 다 소 도움이 될 때가 있다 . 그것은 철학이 시와 손을 잡고 우선 자연을 , 이어서 인간성의 참된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줄 때이다 .

상당한 가치를 지닌 인생철학이라면 인간의 타고난 본성을 조화하 는데 중점을 두어야 한다 . 지나치게 관념적인 철학자는 거기 곧 흡 수되어버린다 . 중국 유학자들의 주장에 의하면 인간의 가장 높은 충 격은 자연에 순응하여 살다가 나중에는 천치와 같은 최고의 경지에 도달할 때 비로소 얻게 된다는 것이다 . 이것이 곧 공자의 손자에 의 해 서술된 『 중용』에 들어 있는 가르침이다 .

 

천명을 성 ( 性 ) 이라 하고 , 성에 따르는 것을 도 ( 道 ) 라 하며 , 도를 닦는 것을 교 ( 敎 ) 라고 한다 . 아직 희로애락을 발하지 않음을 중 ( 中 ) 이 하고 , 발하여 절도에 맞는 것을 화 ( 和 ) 라고 한다 . “ 중”은 천하의 대목 ( 大木 ) 이요 . “ 화”라는 천하의 달도 ( 達道 ) 이다 . 중화 ( 中和 ) 의 극치에 이르면 천지에 위치하고 만물이 성장한다 .

성 ( 誠 ) 이 있음으로써 명 ( 明 ) 이 있다 . 이것을 성 ( 性 ) 이라고 한다 .

“ 명”하게 함으로써 성 ( 誠 ) 에 이른다 . 이것을 교 ( 敎 ) 라고 한다 . 성 ( 誠 ) 이 있으면 “ 명”이 있고 “ 명”하게 하면 성 ( 誠 ) 에 이른다 .

인간은 오직 천하의 지성을 다해야 한다 . 그 성 ( 誠 ) 을 다하면 능히 그 사람의 성 ( 性 ) 을 다하게 된다 . 그리하여 인간이 성 ( 性 ) 을 다하면 천하의 육화 ( 育化 ) 를 도울 수 있다 . 천하의 육화를 도우려면 천지에 함께 참여하여야 한다 .

 

 

  

 

 

 

 

제 6 장 유유자적한 생활에 대하여

 

 

 

 

 

 1. 일하는 동물

 

인생의 향연은 우리들의 눈앞에 있다 . 문제는 우리가 얼마나 식욕 을 느끼느냐에 달려 있다 . 식욕은 향연과 인연이 멀기도 하다 . 그러므로 인간생활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인간은 왜 일을 해야만 하는가 . 그리고 그 일 ( 문명이 그에게 부과한 ) 의 분량이 과연 타당한가 하는 것이다 .

자연계의 모든 생물들은 모두가 빈들빈들 놀고먹는데 어찌하여 인 간만이 일을 해야만 하는가 . 인간은 일을 하지 않아서는 안 되기 때문에 일을 한다 . 문명이 발달됨에 따라서 인생은 의무 , 책임 , 공포 , 속박 , 야심 등등에 사로잡혀 복잡해지기 때문이다 . 이러한 현상은 자연발생적으로 일어난 것이 아니고 인간의 사회생활에서 인위적으 로 비롯된 것이다 .

나는 지금 여기서 책상을 향하고 있는데 창문 저쪽에 보이는 교회 의 지붕 꼭대기에 한 마리의 비둘기가 날아다니고 있다 . 그러나 그 비둘기는 점심 먹을 것에 대하여 조금도 걱정을 하고 있지 않다 . 그 런데 내 점심은 상당히 복잡하다 . 내가 먹는 여러 가지 음식 가운데는 수천 명의 노동자의 노동 , 경작 , 교역 , 운송 , 조제 등등 복잡한 산 업구조가 포함되어 있다 . 그러므로 인간은 금수보다 음식물을 얻기가 어렵다 . 만일 한 마리의 짐승이 도시에 들어와서 인간은 무엇 때문에 이렇게 애써 일을 하고 있나 하고 생각할 수 있다면 , 이 인간사회에 대하여 깊은 회의와 곤혹을 느끼게 될 것이다 .

이때 짐승의 머리에 먼저 떠오르는 것은 인간이란 동물 중에서 일하고 먹는 유일한 존재라는 사실일 것이다 . 말이나 소를 제외하면 가축도 일을 할 필요가 없다 . 이밖에 때때로 일하는 동물은 경찰견 정도이고 집을 지키는 개는 아침 시간에도 양지바른 곳에서 기분 좋 게 잠이나 자는 것이 보통이다 . 거만을 피우는 고양이도 먹고 살기 위해 일하는 법이 없다 . 워낙 몸이 민첩하므로 옆집 울타리든 어디든 가축이라는 신분도 저버리고 마음대로 쏘다닌다 .

이렇게 생각해 보면 생활에 버둥거리는 인간만이 우리 안에 갇혀 있으면서도 먹이도 얻지 못 하고 문명과 복잡한 환경의 강요에 못 이 겨 일을 하는 것이다 . 그러나 인간생활에도 좋은 점이 없지 않다 . 그것은 나도 잘 알고 있다 . 즉 지식의 기쁨 , 고상한 대화의 즐거움 , 연 극을 구경하며 공상에 잠기는 재미 등등이 그것이다 . 그러나 인간생활은 너무나 복잡하여 직접 간접으로 일하는 목적의 90% 가 먹기 위 한 것이라는 근본 사실을 저버릴 수 없다 .

문명은 거의가 먹이를 찾는 데 이바지하고 진보란 먹이를 얻는 일이 더욱 어려워지는 일이다 . 먹이를 찾는 일이 이렇게까지 어렵지 않다면 사람들이 오늘날과 같이 악착같이 일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

인간사회가 너무 개화되는 데 위기가 있다 . 먹이를 얻는 일이 너 무 격심하기 때문에 일하는 도중에 입맛을 잃게 되도록 문명이 도달 할 것이다 . 이러한 현상은 짐승이 보든 철학자가보든 조금도 고마운 일이 아닐 것이다 . 대도시에 즐비한 건축물의 지붕을 바라볼 때마다 나는 언제나 놀라움을 금치 못 하였다 . 그것은 실로 기가 찬 광경이다 . 서너 개의 급수탑이 솟아 있고 건축 중인 수형교환소의 두세 개의 철근이 등을 보이고 그 가운데 몇 개의 첨탑이 솟아 있으며 육중 한 지붕을 한 벽돌로 된 건물들이 즐비하게 늘어섰고 모양도 두서도 없이 네모난 것 , 광택이 나는 것 , 우뚝 솟은 것들이 죽 서 있으며 퇴색하고 더러워진 굴뚝이나 장대나 안테나가 교차된 선이 그 사이 에 드문드문 보인다 . 거리 속을 내려다보면 거기에도 회색빛이나 낡 고 붉은 기와의 벽이 죽 계속하여 보인다 . 자그마하고 어두컴컴한 같은 모양의 창문들이 죽 늘어서 있으며 반은 열려있고 반은 커튼에 감춰져 있다 . 그 문지방에는 아마도 우유병이라도 놓여 있을 것이다 . 어떤 어린아이가 강아지를 데리고 지붕 위로 올라가 층계에 걸터앉아 아침마다 햇빛을 쪼이고 있다 . 다시 돌아보면 몇 10 리나 되는 멀리까지 지붕이 죽 늘어서 보기 싫게 네모난 외곽을 이루고 있다 . 그밖에도 급수탑과 벽돌집들이 많이 눈에 뜨인다 .

인간은 실로 그러한 곳에 살고 있는 것이다 . 이 한두 개의 어두컴컴한 들창 저쪽에서 어떤 가족이 어떻게 살아가는 것일까 . 생활을 위해 일들을 하고 있는 것일까 . 생각하면 머리가 아찔하다 . 그곳에 는 마치 비둘기가 둥우리에 사는 것처럼 부부가 돌아와서 밤마다 잠 자리에 들고 이튿날 일어나서 아침 식사를 마치고 , 남편은 거리에 나가서 가족을 위해 빵을 구하고 아내는 먼지를 털며 부지런히 자기 집을 청소한다 . 오후 4 시나 5 시까지는 문간 층층대에 나가서 이웃 사람들과 잡담을 하거나 상대방의 생활형편을 엿보거나 한다 . 또는 약간의 신선한 공기를 마시다가 이윽고 밤이 되면 지쳐서 잠자리에 든다 . 그들은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다 .

물론 좀 더 훌륭한 아파트에서 부유하게 살고 있는 사람들도 있다 . 거기에는 방도 전등갓도 좀 더 예술적이다 . 모든 것이 다 정돈되어 있고 깨끗하며 방도 약간 넓은 편이다 . 아래층에 방을 예닐곱 개쯤 빌리면 호화판이라고 한다 . 자기 소유가 아니라 세 든 것이다 . 그러나 그렇게 해 본들 보다 행복하게 살아간다고 할 수도 없다 . 그들은 돈 걱정도 하지 않고 빚독촉도 별로 받지 않을 것이다 . 그러나 한편 성가신 분규나 이혼이 자주 일어난다 . 밤이 늦도록 돌아오지 않는 난봉꾼 남편들이 많고 어떤 울적한 마음을 풀기 위해 밤거리를 거닐고 있는 부부도 더러 눈에 뜨일 것이다 . 이것은 기분전환이다 . 신이여 , 도와주소서 ! 이런 사람들은 단조롭고 아무런 변화도 없는 벽돌담이나 반들거리는 마루방에서 기분을 다른 데로 전환하고 싶은 것이다 . 그리하여 흔히들 벌거숭이 여자를 구경하러 나간다 . 여기서 생기는 탈은 여러 가지이다 . 신경쇠약 , 돈이 드는 여러 가지 병 , 맹장염에 소화불량 , 뇌력 박약에 간장경화 , 십이지장궤양 , 내장상해 , 위장과 신장의 과로 , 방광염 , 비장장애 , 심장팽창 , 신경착란 , 가슴앓 이 , 고혈압 , 당뇨병 , 프라이드씨병 , 각기병 , 류마티스 , 불면증 , 동맥경화 , 치질 , 만성변비 , 식욕부진 , 생활 권태감―이러한 것을 더욱 상세히 말하면 별로 신통할 것이 하나도 없다 .

여러분이 도시의 거리를 산책할 때 미장원이나 꽃가게나 해운공사 가 있는 대로변 뒤에는 약방 , 식료품점 , 철물점 , 세탁소 , 대중식당 , 신문잡지 판매소들이 죽 늘어서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 계 속해서 한 시간쯤 더 산책해 보라 . 거기가 대도시라면 여러분은 언제나 같은 곳을 맴돌게 될 것이다 . 여러분의 눈에는 계속해서 거리의 모습이 비칠 뿐이고 어디나 약방 , 식료품점 , 철물상 , 이발관 , 세탁소 , 대중식당 , 신문잡지 판매소가 눈에 뜨일 터이니 말이다 .

그런 가게의 일을 보는 사람들은 대체 어떻게 살고 있는 것일까 ! 어찌하여 그런 가게들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을까 . 대답은 간단하 다 . 세탁소는 이발관과 식당 종업원들의 옷 을 빨고 식당 종업원들은 세탁소와 이발관에 식사를 나르고 이발관은 세탁소와 식당 종업원들 의 머리를 깎는 것이다 .

이것이 이른바 문명이다 . 기가 막힐 노릇이 아닌가 . 이러한 세탁소나 이발관 종업원 가운데는 한평생 그 일하는 장소에서 십 리 밖 에도 나가보지 못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 고맙게도 그들에게는 영 화라는 오락이 있다 . 스크린에서는 새가 울고 나무가 무성하다 . 터 키도 , 이집트도 , 히말라야도 , 안데스도 , 폭풍도 , 난파선도 , 대관식도 , 개미도 , 송충이도 , 생쥐도 , 도마뱀과 지네의 싸움도 , 달도 다 나타나 보인다 .

오 , 현명한 인류여 ! 두려울 만큼 현명한 인류여 . 나는 한숨이 나온다 . 머리에 서리가 일 때까지 쉴 새 없이 먹기 위해 일을 하고 , 노는 것을 져버린 이 문명은 참으로 알고도 모를 괴물이다 .

 

 

2. 한 적한 생활에 대한 중국인의 견해

 

중국인들이 위대한 게으름뱅이로 유명한 것처럼 미국인들은 활동 가로 알려져 있다 . 양자 사이에 서로 칭찬할 것이 있다면 역시 중국 의 게으름뱅이들은 미국식 활동가를 찬미하고 , 미국의 활동가는 중 국식 게으름뱅이를 찬미할 것이다 . 여기에는 각각 국민적 특질로서 장점들을 갖고 있다 .

동서의 문명이 결국 합류하게 되는 것인지 나는 분명히 알 수 없다 . 그러나 여기 명백한 사실은 동서의 문명이 차츰 합류하여 가고 있다는 것이다 . 이러한 경향은 근대문명이 발달되어 교통의 편의가 증대함에 따라 더욱 촉진되고 있다 . 적어도 중국에서는 서양의 기계 문명을 결코 거부하려는 것이 아니다 . 다만 문화 즉 중국 고대의 인 생철학과 서양의 근대적 기술문명을 융합시켜 일종의 살아가는 방법 을 규명하는 것이 하나의 커다란 과제가 되어 있는 것이다 . 이러한 문제는 옛 동양철학의 영향을 받아 살아오던 우리네 동양인에게 논의 대상이 되는 특히 중대한 문제이다 . 하기는 아무도 앞날의 일을 함부로 예언할 수는 없지만 아무튼 기계문명은 우리를 한가한 시대로 가까이 가게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 그리하여 인간은 싫든 좋든 노는 시간이 많고 일하는 시간이 적게 될 것이다 . 모든 사물은 환경의 지배를 받게 마련이다 . 만일 한가한 시간을 언제든지 얻을 수 있게 되면 오히려 귀찮을 정도로 그 여가를 즐기는 데 가장 현명 한 방법을 생각해내야 하며 그렇게 하려면 가장 손쉬운 것부터 찾아 보아야 할 것이다 .

그러나 결국 다음 세기에 일어날 일에 대하여는 아무도 감히 분명한 예언을 할 수 없다 . 2, 30 년 후에 일어날 인간생활에 대하여 예언하는 것도 무모한 일일 것이다 . 그러나 오늘날처럼 문명이 끊임없이 눈부시게 발전해 나가면 언젠가는 그 문명 자체에 지칠 때가 올 것이다 . 그리하여 사람들은 물질문명 덕택에 손에 넣은 물건들을 재검토하게 될 것이다 .

앞으로 인간생활에 있어서 물질적 조건이 지금보다 나아져서 병이 없어지고 가난이 줄어들고 수명이 연장되고 먹을 것이 풍부해질 때가 오면 오늘날과 같이 인간이 살기에 버둥대지 않을 것이다 . 그런 데 이러한 환경에서 살아갈 때 결과적으로 인간이 지금보다 더 게을 러지지 않으리라고 단언할 수는 없다 .

이와는 달리 인간의 주관적인 요인은 객관적인 요인과 마찬가지로 소중한 것이다 . 즉 인간의 마음속에 철학이라는 주관이 있으면 그 외모도 변하고 성격 자체도 변하는 것이다 . 그러므로 이 기계문명에 대하여 얼마나 반응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는 그 인간의 됨됨이에 달려 있다 . 생물계에서는 일정한 자극에 대하여 감수성이 각각 다르 게 나타난다 . 즉 환경에 대한 반응이 느리기도 하고 예리하기도 한 것이다 . 그리하여 같은 생활조건이나 환경 아래서도 모든 동물의 움 직임은 여러 가지로 다른 것이다 . 어떤 동물은 다른 동물에 비하여 반응이 둔하다 .

미국 , 영국 , 프랑스 , 독일 , 이탈리아 , 그리고 러시아 등등 나라의 기계문명에 대하여 생각해 보더라도 이러한 현상을 찾아볼 수 있다 . 즉 그러한 기계문명에 대한 반응은 국민성에 따라서 여러 가지로 다 르다 . 또한 같은 환경에 대하여도 각각 독특한 반응을 보이는 것을 무시할 수 없다 .

중국 사람에 대하여 생각해 보면 그들이 오늘까지 일정한 환경에 반응하여 이루어 놓은 생활방식은 프랑스 사람들의 그것과 비슷하다 . 그것은 양자의 기질이 본래 유사한 까닭이다 .

오늘날 미국은 기계문명의 왕좌에 오르고 있다 . 그리고 기계가 지 배하는 미래의 세계는 오늘날 미국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것 같은 생 활 형태나 생활규범에 가까워질 것이라고 흔히들 말하고 있는데 , 나 는 여기에 대하여 이론을 제기하려고 하지 않는다 . 왜냐하면 미국 사람들의 기질은 앞으로 어떠한 모양으로 변할는지 아무도 모르기 때문이다 . 다만 여기서 말할 수 있는 것은 미국 사람들의 기질이 변해 가고 있다는 사실뿐이다 . 그러나 저 반 와이크 부룩크가 쓴 신간 서적에서 언급된 바와 같이 뉴잉글랜드 시대의 문화가 부활할는지 모른다는 것은 일리가 있는 견해라고 생각한다 . 일찍이 꽃처럼 피어 났던 뉴잉글랜드 문화가 곧 전형적인 미국 문화가 아니라고는 아무 도 말할 수 없을 것이며 또한 휘트먼이 쓴 민주적 형태라는 책 속에서 주장한 이상이 미국의 민주주의 발전의 이상이 아니라고 아무도 말할 수 없을 것이다 . 그는 그 책 속에서 앞으로 자유로운 인간이나 원만한 어머니가 나타날 것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 그러나 지금 현재의 미국은 다소의 휴식이 필요하다 . 그리고 모든 의미에서 저 골드 러쉬 때문에 쇠퇴해 버린 미국 고전문화가 다시 때가 오면 그때야말로 제 2 의 휘트먼 , 제 2 의 도로 , 제 2 의 로웰이 나타날 것이라고 확신한다 . 그때가 되면 미국의 국민성은 오늘의 그것과 전혀 달라져 에머슨이나 도로에 가까운 것이 되리라고 생각한다 .

인간의 교양이란 본래 한가한 시간의 산물이다 . 그러므로 교양을 얻는 법은 그대로 한가한 시간을 보내는 법과 같다고 할 수 있다 . 중국의 사고방식에 의하면 한적한 생활을 사랑하는 현자가 교양이 가장 높은 사람이다 . 역시 번거로운 생활과 현자의 생활 사이에는 철학적인 차이가 있는 것 같다 . 현자는 결코 쩔쩔매는 법이 없다 . 쩔쩔매며 허둥지둥하는 사람은 현자의 자격이 없다 . 그러므로 최고의 현자는 가장 거룩하고 아름다우며 한적한 생활을 즐기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다 . 나는 여기서 중국 사람들이 한적한 생활을 하는 방법에 대하여 설명하려고 한다 . 즉 자고로 중국 사람이 한적한 생활에 대한 신성한 소망을 북돋아 주고 중국의 철학자나 또는 이보다 수준이 낮은 일반 중국 사람에게서 찾아볼 수 있는 , 걱정 없이 한적 한 나날을 보내며 유유자적하는 기분 ( 때로는 시적인 기분이 되기도 한 다 ) 의 원천인 중국 철학에 대하여 이야기하려고 한다 . 세상에서 영달하여 성공을 거두는 것을 싫어하고 다만 생활다운 생활을 사랑하는 이런 중국인다운 성격은 대체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

우선 18 세기의 문명학자 ( 부드럽게 문명 속에 파묻혀 있었다 ) 서백향 ( 舒白香 ) 의 말에 의하면 중국시의 유유자적한 원리는 다음과 같다 . 즉 시간이 유용한 것은 그 유용하지 않은 데 있다 . “ 시간을 집안의 마루라고 한다면 한가한 시간이란 가구가 놓여 있지 않은 부분과 같 은 것이다 . ” 사방 한 치도 빈틈없는 작은 방을 빌려 쓰고 있는 직업 부부는 방안을 두루 걸어 다닐 수 없으므로 기분이 나지 않는다 . 그러므로 봉급이 오르면 곧 좀 더 넓은 방으로 이사를 가려고 한다 . 그렇게 되면 거기에는 싱글베드와 화장대와 파이프가 두 개나 달린 가스장치 등에 점령을 당한 공간으로 약간의 마루가 있다 . 이 방이 마음에 드는 것은 이러한 공간이 있기 때문이다 . 우리가 인생을 그럭저럭 살아가는 것도 이러한 공간 , 즉 생활에 시간 여유가 있기 때 문이다 .

어느 돈 많은 부인이 뉴욕의 공원 거리에 살고 있는데 그녀는 자기 집 옆에 고층건물을 짓지 못 하도록 인접한 땅을 다 사들였다 . 나는 그녀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 그녀는 넓은 공간을 내 것으로 삼아 완전히 무용지물로 하기 위해 막대한 돈을 지불한 것이 다 . 이보다 더 현명하게 돈을 쓰기란 어려울 것이다 .

이와 관련하여 나는 내 경험의 일단을 말하고 싶다 . 나는 뉴욕에 서 마천루의 아름다움을 찾아볼 수 없었다 . 마천루의 앞뜰이 상당히 넓고 그 둘레에 적어도 반 마일 정도의 공지만 있었던들 보기에 매우 아름다울 것이다 . 나는 이것을 시카고에서 절실히 느꼈다 . 이런 점에 있어서는 시카고가 매우 행복하다 . 시카고는 뉴욕의 맨해튼에 비하여 상당히 공지가 많다 . 그리하여 고층건물은 충분한 공간을 차 지하고 있다 . 그러므로 먼 데서 바라보아도 눈에 거슬리는 것이 하 나도 없다 . 이것을 인간생활에 비유하여 말하면 우리가 사생활에 너 무나 쪼들리고 있기 때문에 정신생활의 아름다운 전망을 자유롭게 즐길 수 없는 것과 같다 . 우리에게는 정신적 정원이 없는 것이다.

 

 

3. 한 적한 생활의 예찬

 

중국 사람들이 한적한 생활을 사랑하는 것은 여러 가지 원인이 결합된 결과이다 . 우선 중국 사람들의 기질에서 발단이 되고 이어서 문학적으로 예찬을 받고 철학에서 그 타당성을 발견하였다 . 즉 생활 에 대한 강한 사랑에서 비롯되어 대대의 문학적 낭만주의의 흐름에 따라서 강화되고 노장철학에 의해 올바르고 현명하다고 단정된 것이 다 . 아니 노장의 인생관을 중국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받아들였다는 것은 그들의 기질 속에 노장적인 핏줄이 흐르고 있음을 입증하는 것 이다 . 이 경우에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것을 분명히 밝혀두어야 할 것이다 .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가 한가한 시간의 산물이라고 부르는 한 적한 생활에 대하여 낭만적인 예찬을 아끼지 않는 것은 흔히 세상에 서 말하듯이 부유층을 위한 것은 결코 아니다 .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문제 자체를 오해하는 것이다 . 그것은 스스로 한적한 생활을 택하였거나 또는 부득이 그러한 생활에 들어간 불우하고 청빈한 선비를 위한 것이다 . 중국 문학의 걸작을 펴놓고 가난한 대철학자가 역 시 가난한 동료 철학자들을 향하여 소박하고 한적한 생활을 노래한 시를 읽고 있는 광경을 생각해 볼 때 , 이러한 선철들은 그 시 속에서 커다란 개인적인 만족과 정신적인 위안을 맛보았음에 틀림이 없다고 생각된다 . 명성을 얻는 데 불리한 입장에 서게 되어 관직을 떠나는 것이 차라리 낫다고 생각한 이 선철들이 써 놓은 많은 시문은 필경 등용시험에 실패한 사람들의 마음을 위로해 주고도 남음이 있었을 것이다 .

또한 “ 배고플 때 먹는 것이 감식이다”라는 말은 그들이 가족에게 변변치 못 한 음식만을 먹이게 되는 마음의 짐을 가볍게 하였을 것이다 . 오늘날 중국의 젊은 프롤레타리아 작가들은 소동파나 도연명을 비롯하여 그들이 싫어하는 유한한 지식계급에 속하는 시인들을 비난하지만 문학사적으로 볼 때 이보다 더 큰 오해는 없는 것이다 .

생각해 보라 . “강산에 맑은 바람이 불어오고 산간에 밝은 달이 떴 도다”라고 읊은 소동파나 “ 저녁 이슬이 내 옷 깃을 적신다” 또는 “ 닭 이 뽕나무 위에서 운다”라고 읊은 도연명을 프롤레타리아적이 아니 라고 하는 것은 마치 강산의 맑은 바람이나 산간의 밝은 달이나 뽕 나무 위에서 우는 닭이 자본가 계급의 독점물이나 되는 것처럼 생각 하는 것이다 . 이런 위대한 시인들은 농부의 생활을 노래하는 한계를 넘어서 그들 자신이 가난한 농부의 생활을 영위하면서 그 가운데서 평화와 조화를 발견하였던 것이다 . 이러한 견지에서 나는 한적한 생 활에 대한 낭만적인 예찬은 본질적으로 민주적인 것이라고 생각한 다 . 감상에 잠기기 위해 여행을 떠나는 로렌스 스톤이나 심미감에 떨면서 전 유럽을 도보여행을 한 워즈워드나 코울리지의 일을 생각할 때 이 낭만적인 예찬의 의미를 한층 더 여실히 맛볼 수 있다 . 전에는 여행을 하는 데 반드시 부자가 아니라도 무방하던 시대가 있었다 . 오늘에 있어서도 여행은 부자들의 호강이라고만 단정할 수 없 는 것이다 . 한가한 생활의 즐거움은 호강스러운 즐거움보다 분명히 돈이 적게 든다 . 문제는 보다 더 유유자적할 수 있는 한가한 오후를 열심히 찾고 있는 예술가적 기분에 있는 것이다 . 이런 한적한 생활은 일찍이 도로가 그 “ 발덴 ” 속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돈이 들지 않는 것이다 .

높은 감수성과 자유의 정신을 지닌 궁극의 낭만주의자들은 경제적 인 면에서 볼 때 가난은 하였지만 정조는 풍부한 사람들이었다 . 그들 은 생활을 사랑하는 마음이 극진하였다 . 그리하여 저마다 관직에 있 는 것을 싫어하고 정신을 육체의 노예로 삼기를 단호히 거절하였던 것이다 . 한적한 생활을 가리켜 부자나 권력가나 그밖에 어떤 성공한 자의 특권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당치 않으며 , 중국에서는 정취에 취하는 경지에 들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 이러한 경지는 유럽인들이 생 각하는 방랑자의 기품과 비슷하다 . 이런 사람들은 남의 원조를 구하 기에는 너무나 긍지가 높고 일을 하기에는 너무나 자유분방한 기질이 강하며 세상의 성공을 탐내기에는 지나치게 현명한 사람들이다 .

그들의 높은 정신은 인생에 대한 일종의 달관에서 오는 것이며 이와 필연적으로 관련이 있는 것이다 . 그것은 인생의 어리석은 모든 일과 야심과 부귀영화의 유혹을 투시하는 능력에서 비롯된다 . 어쨌든 인생의 영달보다는 마음의 영화를 존중하고 명성과 부귀보다는 정신을 높게 평가하는 이러한 경지의 선비야말로 중국 문학의 가장 이상적인 인간상이었던 것이다 . 그들은 자연히 훌륭한 고상한 대화 를 하며 살아가는 사람들로 , 일반 사회에서 높이 평가하는 세속적인 성공은 자부심을 갖고 백안시하였던 것이다 .

이러한 부류에 속하는 위대한 문인들은― 도연명 , 소동파 , 백낙천 , 원중랑 , 원목―대개 한동안 관직에 있으면서 하찮은 일에 머리를 쓰 며 상사에게 굽실거리거나 동료들을 송영하는 그러한 생활에 진저리 를 내고 깨끗이 관직에서 물러나 현명하게도 들에 묻혀 살았던 것이 다 . 특히 원중랑은 중국 소주 현령으로 있을 때 상관에게 일곱 통의 진정서를 계속해서 제출하여 언제나 머리를 굽실거리게 마련인 생활 을 청산하고 자유로우며 거리낌 없이 살 수 있는 한 인간으로 돌아갈 것을 허용해 주기를 간청하였다 .

한적한 생활을 즐기기 위해서는 돈이 전혀 필요 없다 . 한적한 생활의 참된 즐거움은 부유층의 것이 아니다 . 그것은 오직 부귀를 무엇보다도 냉소하는 사람들에게서만 찾아볼 수 있는 즐거움이다 . 그 것은 소박한 생활을 사랑하고 돈을 벌 줄 모르는 사람들의 마음에서 우러나온다 . 생활을 즐기려고 마음먹으면 즐거운 생활을 언제든지 또 어디서든지 찾아볼 수 있다 . 만일 이 지상의 생활을 즐길 수 없다면 그것은 인생을 충분히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며 , 또한 평범한 하루하루의 생계에 얽매이게 되는 것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이다 . 노자는 인간의 실생활에 적의를 보였다고 해서 비난을 받고 있지만 인간의 생활이 오직 먹고 살기 위한 일에 매이는 것을 간과하기에는 인생에 대한 노자의 사랑에 너무나 인정미가 깊었으며 또 그 때문에 그는 속된 생활을 포기할 것을 가르친 것이다 .

자고로 사랑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질투가 있는 것이다 . 인생을 깊 이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이를 위한 자기 시간이 남에게 빼앗기지나 않을까하고 언제나 질투하고 있어야 한다 . 그리고 자유인으로서의 독 특한 품위와 자랑을 갖고 있어야 한다 . 그리하여 낚시질을 하고 있는 동안도 , 일에 종사하는 몇 시간도 한결같이 신성한 것이라야 한다 . 마 치 영국 사람이 스포츠를 할 때에 그런 경지에 들어가는 것처럼 일종 의 종교가 되어야 한다 . 과학자가 연구실에서 연구에 몰두할 때 남에 게 방해를 당한다는 것은 참을 수 없을 만큼 불쾌한 일이다 . 마찬가 지로 스포츠에 몰두하는 사람이 운동장에서 증권시장에 관한 이야기 를 듣는 것도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일일 것이다 . 또한 상인이 그날 물건을 얼마 팔지 못 한 것을 억울하게 생각하듯이 쏜살같이 흘러가는 봄의 얼마되지 않는 나머지 일자를 세어가며 춘색을 찾아 산으로 들 로 지팡이를 끌고 돌아다니지 않은 것을 무한히 한탄할 것이다 .

 

 

4. 지 상은 그대로 천국이다

 

이 벅찬 인생에 대한 사랑이 생자필멸이라는 인생의 실상에 접할 때 시적인 애조를 띠게 된다 . 좀 이상한 말이지만 중국의 시인이나 철학자들이 인생의 무상에 눈을 뜨면 보다 더 강하고 억세게 인생을 즐기려고 하였던 것이다 . 이 지상의 생명이 인간에게 주어진 전부라면 살아있는 한 힘껏 이것을 즐기려는 마음이 생기는 것은 정한 이치이다 . 헛되이 영생을 바란다면 지상생활의 건전한 즐거움은 깨어지고 만다 . 케이드가 전형적인 중국 사람의 마음에서 한 다음과 같은 말이 바로 이것을 경고하고 있다 . 즉 “ 지상이야말로 유일한 천국이다 . 이 한 가지 사실을 세상 사람들이 나와 함께 믿는다면 이 지상을 천국으로 삼기 위해 더욱 힘쓰게 될 것이다 . ” 소동파는 말하였다 . “ 모든 일은 일장춘몽으로 깨고 보면 흔적 없이 사라진다 . ” 그 때 문에 그는 인생을 남달리 사랑하였던 것이다 . 중국 문학에서 우리가 흔히 접하게 되는 것은 인생무상 , 생자필멸의 감상이다 . 중국의 시 인이나 철학자들이 즐거운 놀이와 환락에 몸을 적실 때 그들의 마음 속에 언제나 검은 그림자를 던지는 것은 인간의 수명이 눈 깜짝할 사이고 , 인생은 무상하다는 애상이었다 . 이러한 느낌이야말로 둥근 달과 아름다운 꽃을 머리에 그리고 우리가 언제나 영탄하여 마지않는 “ 달에 영허가 있고 꽃에 성쇠가 따른다”라는 시구에 실려 있는 애상이다 . 이태백이 저 유명한 시 “ 뜬세상은 꿈과 같도다 . 즐겨본들 얼마 동안이겠느냐”를 지은 것은 춘야도리원 ( 春夜桃李園 ) 에서 잔치를 하고 술잔을 들었을 때였다 .

생자필멸 , 즉 인간은 결국 무로 돌아가 촛불처럼 꺼져버린다고 생각하는 것은 매우 훌륭한 일이다 . 이렇게 생각하면 마음이 냉정해지 고 다소의 비애까지도 느껴 웬만한 사람은 시적인 기분에 잠기게 된 다 . 어쨌든 이렇게 생각함으로써 처세의 결의도 굳어지고 사려도 깊 어지며 인생을 진실하게 생각하고 어떤 체념을 갖고 살 수 있게 된다 . 여기에 마음의 평화가 있는 것이다 . 진실한 평화는 최악의 경우를 받아들이는 마음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

본래 유교는 어딘가 모르게 현실적인 경향 , 즉 대단히 세속적인 면이 있다 . 그리하여 인간은 조지 산타야나가 말한 “ 동물적인 신앙”을 상당히 지니고 있는 일종의 상식 , 즉 인류의 과거는 하등동물이었다는 상식을 갖고 인생을 살아왔었다 .

다윈의 힘을 빌지 않아도 인생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이 동물적 신앙의 덕택으로 인간은 본래 동물의 일족이었다는 현명한 판단을 내릴 수 있었다 . 따라서 “ 우리 인간은 모두 동물이다 . 그러므로 본능이 정상적으로 충족되었을 때에 참된 행복을 맛볼 수 있는 것이 다”라고 믿음으로써 이 본능과 관능적인 인생에 집착할 수 있는 것이다 . 이러한 사실은 인생의 모든 즐거움에 대하여 말할 수 있는 것이다 . 그렇다면 우리는 유물론자인가 ? 이 문제의 답변은 중국 사람 에게 매우 곤란하다 . 중국 사람의 정신성은 일종의 물질적이고 현세적인 생활기반 위에 놓여 있기 때문에 정신과 육체의 구별이 그들에 겐 이해가 되지 않는다 . 말할 필요도 없이 중국 사람은 동물적인 유 흥을 좋아한다 . 그러나 동물적 유락은 관능적인 것이므로 정신과 육 체와의 구별을 하는 것은 오직 이지에 의해서만 가능한 것이다 . 그러나 인간의 감각은 앞장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영육의 두 개의 문을 갖추고 있다 . 음악은 말할 것도 없이 우리를 정신세계로 끌어올 리는 가장 정신적인 예술이지만 그것은 청각 위에 서 있다 . 그러므로 중국 사람에게는 맛있는 음식에 대한 “ Sympathy ” ( 공감 ) 어찌하여 음향의 “ Symphony ”와 틀리는지 그 까닭을 모르고 있다 .

애인의 경우도 그렇다 . 우리는 이와 같은 현실적인 의미에서만 애 인을 생각할 수 있다 . 애인의 마음과 육체를 분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 우리가 어떤 여자를 사랑하고 있다면 그 얼굴의 기하학적 정확성을 사랑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여인의 움직임이나 몸짓을 사 랑하고 그 여인의 표정이나 미소를 사랑하는 것이다 . 그러나 여인의 표정이나 미소가 육체적인 것이냐 정신적인 것이냐 하는 물음에는 아무도 대답할 수 없을 것이다 .

현실에 대한 중국인의 느낌 속에는 중국적인 인간주의와 중국적인 사고방식 및 처세법의 영향이 숨어 있다 . 중국인의 철학을 요약하면 진리를 아는 것보다 인생을 알기에 여념이 없다 . 무릇 형이상학적인 사변은 인간이 살아가는 데는 방해물이 된다 . 그것은 인간의 지성 속에 생긴 창백한 사색에 불과하므로 모조리 쓸어 버려야 한다 . 그리하 여 인생 자체에 입각하여 언제나 최초이자 최종인 설문을 던져야 하 는 것이다 . 즉 “ 어떻게 살 것인가 . ”

그러므로 중국 사람들의 눈에는 서구 철학이 상당히 한가한 짓으 로 보인다 . 그들은 언제나 논리적으로 따지고 지식에 도달하는 방법 이나 지식의 가능성의 문제를 다루는 인식론에 몰두하고 인생 자체를 아는 문제를 망각하고 있다 . 이것은 실로 어리석고 쓸데없는 것이다 . 이를테면 오직 구애와 구혼을 할 뿐 결혼하여 어린애를 낳지 않는 것과 같고 전쟁하러 나가지도 않고 기고만장하여 시가를 행진 하는 영국 병정들과 같아서 결국 헛일이다 . 독일 철학자들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인간 중에서 으뜸간다 . 그들은 열렬한 애인처럼 진리 에 구애하고는 한 번도 결혼 신청을 하지 않는 것이다 .

 

 

5. 미국의 세 가지 결함

 

미국에는 세 가지 큰 결함이 있다 . 능률 , 정확 , 성공욕이 그것이 다 . 이것이야말로 미국을 오늘날과 같이 불행하게 하고 신경질로 만들 있는 것이다 . 이러한 결함이 미국에서 한적하게 살아가는 권리― 인간에게 꼭 있어야 하는―를 빼앗고 , 즐겁고 아름다운 오후의 한가 한 한때를 앗아가 버리는 것이다 .

미국인 편집자는 신문 잡지에 오식이 없도록 무척 애를 쓴다 . 그러나 중국인 편집자는 좀 현명하다 . 독자가 스스로 다소의 오식을 발견하여 혼자 잘난 체하는 기쁨을 느끼도록 내버려 둔다 . 한 걸음 나아가서 중국의 신문 잡지는 연재물을 싣는 것까지는 좋은데 중도에서 그것을 잊어버리기 일쑤이다 . 만일 미국에서 그랬다가는 크게 문제가 될 것이다 . 그러나 중국에서는 별로 큰 허물로 보지 않는다 . 이유는 간단하다 . 그것은 그리 대단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

미국 기사가 다리를 놓을 때에는 자세히 , 그리고 정확하게 숫자를 산출하여 양쪽 언덕에서 놓아 나오던 다리가 가운데서 한 치도 틀리 지 않는다 . 그런데 두 사람의 중국인이 산 양쪽에서 굴을 파기 시작하였다면 각각 끝까지 파 나갈 것이다 . 그들은 굴을 파다가 양쪽에 서 코스가 어긋난들 어떠냐 하고 생각하는 것이다 . 굴이 하나가 될 것이 둘이 되었다면 길이 둘 생겨서 더 좋지 않느냐는 것이다 . 하긴 그렇다 . 공사가 급하지만 않다면 터널이 두 개 있으나 하나 있으나 상관이 없다 . 무난히 일을 마치고 기차가 탈 없이 다닌다면 그것으로 족한 것이다 . 그러나 대체로 중국인은 충분한 시간 여유만 있으면 무슨 일이든지 정확하게 할 수 있다 . 그들은 설계만 서둘지 않고 천천히 한다면 , 언제나 이 느긋한 설계에 따라서 일을 훌륭히 마치는 것이다 .

근대 산업경제 시대의 생활 템포는 이런 영광스럽고 위대한 “ 유 장”을 용납하지 않는다 . 그런데 더욱 한심한 일은 이러한 생활 템포 는 중국 사람들의 시간관념과는 달라서 시계만능의 시간관념을 주고 있는 점이다 . 그리하여 인간을 시계화하여 버린다 . 이러한 현상은 보시다시피 오늘날 중국에도 나타나고 있다 . 예컨대 20 만 명의 노동 자를 고용하는 공장을 두고 볼 때 그 많은 노동자가 공장을 분주히 드나드는 광경은 물론 놀랍기만 하다 . 그러나 결국 이러한 것이 생 존경쟁을 격심하게 하고 열병적인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소이 ( 所以 ) 이다 . 어느 일정한 장소에 오후 다섯 시까지 꼬박 일하고 있어야 한다면 한시부터 다섯 시까지의 오후 시간은 완전히 빼앗기고 만다 . 미국의 어른들은 학생들의 본을 따서 하루의 스케줄에 따라 시간표를 짠다 . 즉 세시에는 무엇을 하고 다섯 시에는 무엇 , 여섯시 반에 는 옷 을 갈아입고 , 여섯시 오십분에는 택시를 잡아타고 , 일곱 시에 는 호텔의 몇 호실로 들어간다 . 이래서야 어디 살아갈 맛이 있는가 . 이리하여 미국인들은 이제 비참한 상태에 도달하고 있다 . 그들의 행동은 내일을 위해 예정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다음 주 아니 다음 달에 걸쳐서까지 예정되어 있는 것이다 . 2 주일 후의 일을 예정한다 는 것은 중국 사람들은 전혀 생각도 못 할 일이다 .

만일 중국인이 어떤 모임에 초대장을 받았을 때에는 출 · 결석의 가부를 회답하지 않아도 좋게 되어 있다 . 물론 출석을 하려면 “出” 결석을 하려면 “缺多謝”라고 쓰는 것도 무방하지만 대개는 단지 “明 日”이라고 쓸 뿐이다 . 그것은 초대를 해주신 것을 잘 알고 있다는 뜻이며 , 참석하겠다는 의미는 아니다 .

미국 사람이나 유럽 사람이면 상해를 떠날 때 , “ 1938 년 4 월 19 일 오후 세 시 파리 위원회에 참석하고 , 4 월 21 일 일곱 시 차로 빈에 도착합니다”라는 말을 예사로 할 것이다 .

그런데 가령 어느 일정한 날에 어떤 죄수에게 유죄 판결을 내려 사형을 집행해야 할 경우에 이 날짜를 일찌감치 알릴 필요가 있을까 ? 그리고 어떤 여행을 할 경우에 저 좋을 대로 출발하고 좋을 대로 도착하여 천하에 거리낌 없이 자유롭게 살아갈 수는 없을까 ?

미국 사람들이 중국 사람처럼 한가하게 살 수 없는 것은 그들이 사업욕과 또한 활동을 삶 자체보다 중요시하기 때문이다 . 미술사에 이름을 남길 만한 걸작이 되려면 그 작품에 품격이 있어야 한다 . 이 와 마찬가지로 우리들의 생활에도 품격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 그러 나 불행히도 이 품격은 하룻밤 사이에 되는 것이 아니며 , 그것은 술의 향기와도 같아서 조용히 긴 세월을 기다려야 한다 . 미국의 늙은 남녀가 그러한 생활태도로 해서 자존심을 느끼고 젊은이로부터 존경 을 받기 위해 움직이고 있는 것은 우리네 동양 사람이 볼 때 우습기 짝이 없다 . 늙은이들이 지나치게 바삐 돌아가는 것은 몇 백 년 역사를 가진 다 쓰러져가는 절 지붕 위에서 재즈 음악을 방송하는 것과 같은 꼴이다 . 늙은이는 늙은이답게 , 다만 나이를 먹은 것으로 족하 지 않을까 ? 늙은이가 어찌하여 늘 분주히 일을 하고 있어야 하는가 ? 중년 신사가 빈들빈들 놀고 있는 것도 보기가 싫지만 늙은이가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은 인간성에 배치되는 죄악이리라 .

품격은 나이 들어 완성되는 것으로 시일이 필요하다 . 그것은 중년 신사의 얼굴에 아름다운 주름살이 잡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 그 주 름살은 그 사람의 품격이 끊임없이 새겨져서 되는 것이다 .

어중이떠중이들이 저마다 작년에 유행한 자가용을 버리고 신형으 로 바꾸는 것을 자랑삼는 생활에서는 품격을 찾아보기 어렵다 .

우리가 만드는 물건이나 우리 자신은 미에 있어서 같은 위치에 있 다 . 즉 1937 년에는 남녀를 막론하고 1937 년의 얼굴을 하고 있으며 1938 년에는 1938 년의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이다 . 그런데 우리는 옛 절이나 오래된 가구나 고색이 창연한 은이나 낡아빠진 사전이나 인쇄 물은 아끼지만 노인의 미에 대해서는 전혀 느끼지 못 하고 있다 . 이러 한 미의 감상은 인간생활에 없어서는 안 될 요소가 될 것이다 . 미란 노 ( 老 ) , 숙 ( 熟 ) , 훈 ( 燻 ) 에 있는 것이다 .

나는 때때로 무슨 예언자와도 같은 환상에 잠기는 일이 있다 . 그 것은 저 아름다운 밀레니엄의 환상으로 , 그때가 되면 저 유명한 맨해튼의 거리에서 사는 사람들도 유유히 거닐게 될 것이며 또한 미국 식 급진파들도 동양식 걸음을 배우게 될 것이라는 꿈을 꾸는 것이 다 . 그때에 미국의 신사들은 슬리퍼를 끌고 손을 호주머니 속에 넣은 채 거리의 보도를 어슬렁어슬렁 걸어 다닐 것이다 . 중국 사람식 으로 반드시 양쪽 소매에 팔짱을 끼지 않아도 무방하다 . 교통순경은 네거리에서 우물쭈물하는 치들과 우스갯소리를 하고 , 운전수들은 차 를 잠시 세우고 서로 인사를 나누며 , 가게 앞에서는 이를 닦으면서 이웃사람과 이야기를 할 것이고 때로는 멍하니 무슨 생각에 잠기면서 책을 옆에 낀 학자가 저쪽에서 오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 그리고 어떤 사람은 다방에서 대낮부터 저녁까지 멀거니 시간을 보낼 작정 을 하고 한 잔 커피를 놓고 한 시간씩 버틸 것이다 . 술도 단숨에 마셔 버리지 않고 즐거운 이야기를 나누면서 서서히 마시는 법을 배우 게 될 것이며 , 병원의 접수부는 폐지되고 감시인은 옛날이야기가 되 는 것이며 , 환자는 의사와 철학도 이야기할 것이다 . 기차는 천천히 달려 승객들은 가끔 차를 세우고 하늘을 나는 기러기를 쳐다보면서 그 머리수를 세어 맞추는 내기라도 할 것이다 . 이러한 맨해튼 거리의 밀레니엄이 실현될 가망이 전혀 없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 우리에게는 좀 더 유유자적할 수 있는 오후가 있어야 할 것이다 .

 

 

  

 

 

 

 

 

제 7 장 가정의 즐거움

 

 

 

 

 

 1. 생물은 생물다워라

 

어떠한 문명도 최후의 가치는 그 문명이 어떤 남편과 아내 , 아버지 와 어머니를 만들어 내느냐에 있다고 나는 옛날부터 생각해 왔었다 . 이 극히 간단한 것을 생각하지 않고서는 모든 문명이 이룩한 공적― 즉 예술 , 철학 , 문학 , 물질적 생활―은 아무 의미도 없는 것이다 .

나는 중국문명과 서구문명을 애써 비교하여 현혹되는 우리 동료에 게 언제나 위에서 말한 것을 들려주고 하나의 진정제로 삼고 있다 . 그런데 나 자신도 그런 생각을 갖게 되었다 . 그 약이 몸에 잘 듣기 때문이다 . 중국 학생으로서 서구인의 생활이나 학술을 배운 자는 중 국 본토에서 배웠든 외국에서 배웠든 약학 , 지리 , 천문학을 비롯하여 마천루나 광활한 자동차 길이나 천연색 사진들의 눈부신 서구의 문물에 현혹되는데 이것은 무리가 아니다 .

이런 학생들은 서구의 문물에 열중하거나 혹은 중국에 그러한 문물이 없음을 부끄럽게 생각하거나 또는 이 양자 , 즉 열중도 하고 부 끄럽게도 여긴다 . 그리하여 열등감에 사로잡혀 , 자기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지도 모르고 동양문화의 가장 존대하고 편협한 옹호 자가 되어 버리는 것을 종종 찾아볼 수 있다 . 그는 하나의 제스처로서 마천루나 호화로운 자동차 길을 비난하는 것이다 . 그런데 나는 그들이 그 우수한 천연색 사진을 비난했다는 말을 듣지 못 하였다 . 그들은 어딘가 모르게 감상적이다 . 그러므로 동서 문화의 차이를 냉 정한 입장에서 파악할 수가 없는 것이다 . 이러한 열등감으로 하여 부끄러워하고 미혹을 당하고 괴로워하는데 그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 해서는 중국 사람의 이른바 진정제가 필요한 것이다 .

내가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가치판단에 의하면 문화나 문명에 불 필요한 모든 것을 배제하고 만인을 단순하고 명백한 평등의 지위에 놓게 되므로 전 인류를 균등화시키는 데 기묘한 효과를 가져 온다 .

모든 문명은 보다 훌륭한 남편이나 , 아내나 , 아버지나 , 어머니를 만들어 내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 인간의 90% 까지가 남편이 나 아내가 되고 100% 가 부모를 갖고 있는 한 , 그리고 결혼과 가정이 인간생활에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는 한 , 보다 훌륭한 남편이나 아내나 부모를 만들어 내는 문명은 보다 행복한 인간생활을 향해 나 아가는 것으로 , 그렇게 되어야만 보다 높은 문명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

우리의 주위에 살고 있는 남녀의 소질이 어떠냐 하는 문제는 그들이 성취하는 일보다 훨씬 중요한 것이다 . 그런데 어떤 처녀라도 문명이 그녀보다 훌륭한 남편을 얻게 한다면 그것이 어떤 문명이든 고맙게 생각해야 할 것이다 . 그러나 이것은 상대적인 문제로 이상적 인 남편이나 아내나 부모는 어떤 때에나 또 어느 나라에나 있기는 있었다 . 아마도 훌륭한 남편이나 아내를 얻는 가장 좋은 방법은 우 생학의 가르침에 따르는 것이리라 . 이에 의하여 우리는 아내나 남편 을 교육하는 커다란 수고를 덜 수 있는 것이다 . 한편 가정을 무시하고 그것을 보잘 것 없는 지위로 떨어뜨리는 문명은 보다 열등한 남편과 아내와 부모를 만들어 내기 쉬운 것이다 .

내 견해가 생물적으로 기울어지고 있음을 나도 잘 알고 있다 . 나는 생물적이다 . 그러나 모든 남녀가 다 생물적이다 . 그러므로 새삼 스럽게 “ 생물답게 살아가자”라고 외칠 필요도 없는 것이다 . 왜냐하면 좋든 싫든 간에 인간은 다 생물답게 살아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 인간은 어떤 자의식은 갖고 있지 않을지 모르지만 생물로서 행복하며 생물로서 분노를 느끼고 야심을 품고 종교를 믿고 또한 생물로서 평 화를 사랑하는 것이다 .

생물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인간은 누구나 갓 낳았을 때에는 어린애로서 어머니의 젖을 빨고 결혼해서는 아이를 낳는다 . 이러한 사실 은 아무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 누구나 다 여자의 배에서 나오고 대부분의 남자들은 한평생 아내와 함께 살며 , 또한 자식들의 아버지 가 된다 . 여자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 누구나 여자의 배에서 태어나서 거의 한평생을 남자와 함께 살면서 아이를 낳는 것이다 . 하긴 어 버이가 되기를 거부하는 자도 있으나―자기의 씨를 연속시키기 위해 종자를 만드는 것을 거부하는 나무나 꽃이 있듯이―누구나 그 어버이로부터 태어났음을 거부하지 못 할 것―어느 나무나 다 종자에서 움틀 것을 거부할 수 없듯이―이다 .

이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기본적인 사실에 도달하게 된다 . 즉 인간의 가장 원시적인 관계는 남녀와 그 자식들 사이의 관계이며 , 어 떤 생활철학도 이 기본적인 관계를 문제 삼지 않는다면 철학으로서 만족스럽다고 할 수 없다 . 아니 철학이라고 부를 수도 없다 .

그러나 남녀 관계만으로는 불충분하다 . 그것은 아이를 낳는 일에 귀착되어야 한다 . 그렇지 못 하면 불완전한 것이다 . 어떠한 문명도 아이를 낳을 권리를 인간으로부터 빼앗아 버리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 . 이것은 오늘날 매우 중대한 문제이다 . 오늘날에는 결혼을 달갑게 여기지 않는 남녀가 상당히 많다 . 그리고 결혼을 하더라도 아이 낳기를 거부하는 부모도 상당히 많다 .

이유가 어디 있든 누구나 자식이 없이 세상을 떠나는 것은 자기 자신에게 최대의 죄악을 범하는 것이다 . 만일 아이를 낳지 않는 이유가 신체에 있다면 신체가 정상이 아닌 것이다 . 만일 생활비가 많이 들기 때문이라면 많이 드는 생활비가 좋지 않은 것이며 만일 결혼관이 너무 높기 때문이라면 역시 그 높은 것이 탈이다 . 그들의 개인주의 철학이 그 이유라면 그 철학이 나쁜 것이다 . 또한 사회제도 자체에 이유가 있다면 그 제도가 나쁜 것이다 .

앞으로 생물학이 더욱 발달되어 생물로서의 인간이 분명히 이해되 면 아마도 21 세기의 남녀는 내 말에 수긍할 것이다 . 19 세기가 자연과학총론의 세기였던 것처럼 21 세기는 생물학의 세기가 될 것이다 . 인간이 자기 자신을 좀 더 깊이 이해하고 자연으로부터 물려받은 본 능에 거스르는 것이 쓸데없는 일임을 알게 되면 내가 말하는 단순한 예지를 더욱 높이 평가할 것이다 .

스위스의 심리학자 융은 어느 부유한 부인 환자에게 시골에 가서 병아리나 어린애나 또는 인삼이라도 기르라고 권고하였다는데 그런 데서 우리는 근대에 유력해지고 있는 생물학적 의학적 예지의 일단을 이미 찾아보게 되는 것이다 . 돈 많은 부인 환자가 다루기 곤란한 것은 그녀들이 생물적인 역할을 하지 못 하고 있거나 또는 그녀들의 생물적인 역할이 변변치 못하기 때문이다 .

역사가 있은 후로 남자와 여자가 함께 산다는 것은 누구한테서도 배우지 않았었다 . 그러나 기묘하게도 남자는 여자 없이 살아간 예가 없다 . 여자가 없이는 아무도 이 세상에 태어나지 못 한다는 것을 생각할 때 여자를 결코 경멸할 수 없는 일이다 . 탄생에서 죽음에 이르 기까지 남성은 혹은 어머니에게 혹은 아내에게 혹은 딸에게 둘러싸이게 된다 . 결혼을 하지 않는 독신자라도 윌리엄 워즈워드처럼 자기 의 누이들에게 의지해야 하며 , 또는 허버트 스펜서와 같이 가정부에게 수고를 끼쳐야 하는 것이다 . 아무리 훌륭한 철학도 어머니나 누이와 원만한 관계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워즈워드의 마음을 사지 못 했을 것이며 가정부와 적절한 관계를 맺지 못 하였다면 , 신이여 , 스펜서를 긍휼히 여기소서 . 자기 아내와 원만한 사이를 이루지 못 하 고 외도를 하는 사람에게는 어딘가 모르게 일종의 가련한 데가 있는 것이다 .

오스카 와일드까지도 “ 남자는 여자와 살 수도 없지만 안 살 수도 없다”라고 말하였다 . 아무튼 인간의 예지는 저 힌두교 이야기의 작자와 오스카 와일드 사이에 한 발짝도 앞으로 나서지 못 하였다 . 힌두교 창조설의 작자는 4000 년 전에 오늘날과 조금도 다른 것이 없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 즉 이 창조설에 의하면 신이 여자를 만들 때 꽃의 아름다움 , 새의 노랫소리 , 무지개의 빛 , 미풍의 부드러 움 , 물결의 미소 , 양의 온순 , 여우의 교활 , 구름의 움직임 ( 제멋대로의 ), 소나기의 변덕 , 이 모든 것을 간추려서 여자의 몸에 불어넣어 가지고 남자에게 아내로서 제공하였다는 것이다 . 이리하여 아내를 가진 힌두교의 아담은 행복하였다 . 두 내외는 아름다운 지상을 즐겁 게 뛰놀았다 . 그런데 며칠이 지나서 아담은 신에게 돌아와 “ 그 여자를 딴 곳으로 보내 주십시오 . 도무지 같이 살 수가 없습니다” 하고 애원하였다 . 신은 그의 소원대로 이브를 다른 데 보내었다 . 그랬더니 아담은 마음이 쓸쓸하여 견디지 못 하였다 . 며칠이 지나 아담은 다시 신에게 “ 그 여자를 돌려주십시오 . 그 여자가 없이는 살 수가 없습니다” 하고 간청하였다 . 신은 다시 그 소원을 들어 주어 이브를 도로 보내 주었다 . 며칠이 지나 아담은 또 다시 신 앞에 나가 애원하였다 . “신이여 , 제발 당신이 만드신 이브를 데려가 주십시오 . 이제 맹세하오니 도저히 함께 살 수가 없습니다 . ” 무한한 예지를 지닌 신은 이번에도 그 소원을 들어 주었다 . 그랬더니 아담은 네 번째로 다시 신 앞에 와서 여자가 없이는 살 수 없다고 호소하는 것이었다 . 이때 신은 아담에게 다시는 마음이 변하여서는 안 되며 , 좋든 싫든 그 여자와 운명을 함께 나누면서 이 지상에서 같이 살 것을 다짐 받 았다 .

이러한 광경은 오늘에 있어서도 본질적으로 그리 다를 바가 없다 .

 

 

2. 문명의 기형아로서의 독신생활

 

위에서 보는 바와 같이 단순하고 자연적인 생물적 견지에서 보면 다음과 같은 두 가지 모순이 생긴다 . 즉 하나는 개인주의와 가정생활의 모순과 또 하나는 딱딱한 주지적 철학과 아늑한 본능적 철학의 더욱 심각한 모순이다 . 왜냐하면 개인주의와 주지주의는 인간을 가 정생활의 아름다움에 무감각하게 만들기 쉽기 때문이다 . 그런데 전 자는 후자만큼은 나쁘지 않다 . 개인주의를 신용하고 그것을 논리적으로 해명하려는 사람은 총명하여 관용할 점이 있으나 인간의 따뜻한 인정을 외면하고 차디찬 두뇌를 믿으려는 자는 어리석기 짝이 없 다 . 생각건대 단지 사회적인 단위로서의 가족의 대용물은 이 사회에 여러 가지가 있으나 , 부부나 부모의 애정을 상실하고 보면 이를 보충할 만한 것은 아무데서도 찾아볼 수 없다 .

인간은 세상에서 혼자서는 행복하게 살아갈 수 없다 . 그러므로 반 드시 자기보다 더 큰 집단과 결합되어야 한다는 것을 전제해야 한다 . 자아란 그 자체보다 더 클 수가 있는 것이다 . 그 정신적 , 사회적인 활동이 있는 곳에서 고립된 자아보다 더 큰 자아가 있다 .

그러나 어느 시대 , 어느 나라에 있어서도 , 또 어떤 형태의 정부 아래서도 참된 생활로서 다소의 의의가 있는 것이라면 , 결코 그 나라 , 그 시대와 보조를 같이 한 넓은 행동반경을 갖지 못 하고 우리가 한껏 “ 보다 큰 자기”라고 부르는 보다 작은 환경 속에서 살아가는 것으로 그 범위는 친구들이나 활동 범위에 따라서 결정되는 것이다 . 인간은 어디까지나 사회적 단위 속에서 움직이고 존재하는 것이다 . 이 사회적인 단위는 교구일 수도 있고 학교나 형무소나 비밀결사나 또는 자선단체일 수도 있다 . 그리하여 그것들은 사회적 단위로서의 가정을 대신할 수도 있으며 , 때로는 가정을 송두리째 동댕이치는 경 우도 있는 것이다 . 종교나 정치운동도 인간의 생애를 완전히 삼켜 버리는 수가 있다 .

그러나 이 모든 집단 속에서 가정만이 자연스럽고 생물학적으로 진실하여 만족스럽고 뜻있는 유일한 생활 단위로서 부동의 위치에 놓여 있다 .

인간은 세상에 태어날 때 이미 가정에 있었으며 그 후 평생을 두고 가정에서 살아야 하므로 나는 이것을 가리켜 “ 자연”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 그리고 거기에는 핏줄이 위에서 말한 “ 보다 큰 나라”를 분명히 형성하여 주기 때문에 나는 생물학적 진실이라고 부른다 . 이 가정이라는 자연적인 집단생활을 잘 해나가지 못 하는 사람은 다른 모든 집단생활에서 성공을 거둘 수가 없다 . 공자는 말하고 있다 . “젊은이는 모름지기 집안에서는 효도를 하고 사회에 나가서는 남을 존중할 줄 알아야 하며 성실하고 정직하여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어 진 선비들과 사귀며 여력이 있으면 글을 배우라 . ”

이와 같은 가정생활의 중요성을 별 문제로 치더라도 인간이 자기의 뜻을 이루고 자기 자신에 충실하여 개성을 최고로 발전시키려면 적당한 이성이 빈틈없이 조화된 마음씨에 의존해야만 한다 .

남성보다도 깊은 생물적인 감각을 지니고 있는 여성은 요즘의 사정을 잘 알고 있다 . 중국의 처녀들은 저마다 무의식중에 빨간 혼인 치마를 입고 혼례 가마를 탈 것을 꿈꾸고 있으며 , 유림의 처녀들도 역시 저마다 결혼의 면사포와 결혼식을 알리는 종소리를 꿈꾸고 있다 . 이러한 모성적 본능은 인공적인 문명에 의해 쫓겨나기에는 너무나 강하다 . 나는 여자의 목적은 처녀가 되는 데 있지 않고 어머니가 되는 데 있다고 서슴지 않고 말하고 싶다 . 그런 까닭에 여자는 나면서부터 여러 가지 정신적 , 도덕적 특질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 그리 하여 이러한 특질이 어머니의 역할을 다하도록 그녀들을 인도하고 있으며 , 그것은 모성적 본능 속에 적당히 결합되어 있다 . 예컨대 여성의 현실적인 판단력 ,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의 참을성 , 약자에 대한 사랑 , 남을 돌봐 주기를 좋아하는 성품 , 강한 동물적인 사랑과 증오감 , 그리고 자기본위이고 울기를 잘하는 감상적인 기질 , 일반 다반사에 대한 찬찬한 견해 등이 그것이다 . 그러므로 만일 철학이 자연의 의도에서 벗어나 여자의 전 생명의 강한 특질이며 또한 기본 적인 요소인 모성의 본능을 무시하고 여자를 행복하게 하려 한다면 터무니없는 헛수고에 그치고 만다 . 일자무식인 여자나 건전한 고등 교육을 받은 여자나 다 같이 모성의 본능은 결코 억제당하지 않고 어릴 적부터 싹터 청춘시절보다도 성년기에 더욱 강력하게 작용하는 것이다 .

이와는 반대로 부성의 본능은 30 세까지는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 그리하여 남자는 대체로 딸이나 아들이 다섯 살쯤 되기까지는 부성애를 느끼지 못 한다 . 25 세쯤 되는 남자가 진심으로 아버지 행세를 한다고는 생각할 수 없다 . 그때에는 다만 여자와 애욕에 빠져 우연히 아이를 낳았을 뿐 , 어린애 생각에 가득 찬 아내와는 달리 남편은 그런 것을 느끼지 못 하는 것이다 . 그러다가 30 세쯤 되어서야 비로소 아이들을 시장으로 데리고 다니기도 하고 친구에게도 자랑하게 된다 . 이때 비로소 자기가 아버지라는 자의식을 갖기 시작한다 . 따라서 20 세나 25 세쯤 되는 남자로 아버지가 되기를 좋아할 사람은 별로 없다 . 좋아하기는커녕 그러한 일은 거의 꿈도 꾸지 않고 있다 . 이와는 반대로 여자는 어머니가 되었다는 사실 또는 어머니가 될 것 이라는 기대까지도 그 생애에서 가장 심각한 사건으로서 몸과 마음 전체에 커다란 변화를 일으키며 , 그 영향은 여자의 성격이나 습성까 지도 변하게 하는 것이다 .

여자가 아기를 낳기를 기다리고 있는 동안은 세계가 완전히 변해 버린다 . 그녀는 이제 인간의 사명이나 생활의 목적에 대하여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게 된다 .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녀는 세상이 그 생존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 그녀는 이 세상에 없어서는 안 될 존재이며 또한 그녀는 그녀대로 그 책임을 다하려고 하는 것이다 . 어느 부유한 중국 사람 집에서 아무런 부자유도 느끼지 않고 귀염을 독점하며 자란 한 처녀가 나중에 어머니가 되어 아이가 병들게 되자 몇 달 동안이나 아이 곁에서 잠도 자지 않고 뜬 눈으로 보내었다는 사실을 나는 알고 있다 . 자연의 설계에 있어서는 이렇게까지 강한 부성애는 불필요한 것이다 . 남성에게는 그런 본능이 부여되어 있지 않다 . 남성은 대체로 오리나 기러기의 수놈처럼 수컷으로서의 책임을 다할 뿐 , 태어난 자식에 대하여는 별로 아랑곳하지 않는다 . 그러나 여자는 이와 같은 생존의 원동력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 하여 그 책임을 다하지 못 하면 심리적으로 괴로움을 당하게 마련이다 . 그럼 에도 불구하고 미국문명은 수많은 훌륭한 부인이 아무 죄도 없이 미 혼인 채 살아가는 것을 방임하고 있다 . 부인에 대하여 무력하고 무능한 문명이란 재고할 가치조차 없는 것이다 .

결국 우리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어떻게 하면 행복하게 사느냐는 것이다 . 외부생활의 피상적인 영달보다 더 높은 곳에 , 즉 남녀의 본 성에 깊숙이 자리 잡고 있는 근원에서 정당한 생활의 배출구를 찾아 내지 못 하면 아무도 행복하게 살 수가 없는 것이다 . 개인의 경력을 장식하기에 가장 알맞은 독신생활 속에는 어떤 개인주의적인 면과 어리석은 주지주의적 요소가 깃들어 있거니와 이 후자로 말미암아 독신주의는 배척되어야 할 것이다 . 스스로 쓸데없이 주지주의자가 되어 버린 어리석은 독신주의자나 미혼 여성은 자기의 외행적인 업 적에 지나치게 현혹되어 있다 . 그녀들은 가정생활 이외의 어떤 대용 물에 의해 행복을 찾고 만족감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 그리하여 지적 , 예술적 , 직업적인 흥미를 찾기에 여념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

그러나 나는 이것을 찬성할 수 없다 . 만족할 만한 가정생활을 하지 못 하는 대신에 어떤 경력이나 사사로운 업적이나 동물학대 반대 운동 등에서 사는 보람을 찾아 결혼도 하지 않고 아이도 낳지 않는 사람이 있는데 , 그 개인주의적인 태도는 어리석고 우스꽝스럽게만 보인다 . 이러한 현상은 심리적으로 다음과 같은 경우에 나타난다 . 즉 올드미스가 호랑이 잔등에 있는 채찍 자국을 보고 무슨 잔인한 학대라도 받지 않았나 해서 서커스 지배인더러 호랑이에게 너무 가혹한 매를 때리지 말라고 당부하는 경우 , 이러한 일종의 항의는 호랑이라는 당치 않은 족속을 향한 역시 터무니없는 모성애에서 오는 것으로 마치 호랑이가 약간의 매를 맞았다고 해서 기진맥진하고 있는 것처럼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 그녀들은 인생의 어느 한 부분을 헛되이 걸으면서 자타에게 그것을 정당화 하려고 애쓰고 있다 .

정치적 , 문학적 , 예술적 업적의 대가는 그 주인공의 창백한 이지적인 자기만족에 그치고 말지만 자기 자식들이 무럭무럭 자라는 모 습을 보는 기쁨은 언어를 초월한 엄청난 진실이다 . 저술가나 예술가 들 가운데서 노인의 시기에 이르러 자기의 업적에 대하여 만족한 기쁨을 느끼는 자가 과연 몇 사람이나 될까 ? 그리고 그 업적은 한갓 노인의 위안일 뿐더러 주로 먹고 살기 위해 한 일이라고까지 험담하 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

허버트 스펜서는 죽기 며칠 전에 18 권이나 되는 『 종합철학』을 무릎 위에 올려놓고 그 딱딱한 책의 무게를 느끼면서 책보다 손자가 더 좋았을지도 모르겠다고 술회한 일이 있다 . 현명한 가정부였던 에 리아는 스펜서의 저술과 그 꿈속의 아들을 기꺼이 바꾸지 않았을까 . 사실 설탕이나 버터나 솜의 대용품은 실로 보잘 것이 없다 . 그러나 어린애의 대용품이란 도대체 말도 되지 않는다 . 록펠러는 인류의 행복에 크게 공헌하였으므로 필경 도덕적 , 미적 만족을 느꼈을 것이다 . 그러나 이러한 도덕적 , 미적 만족이란 실로 박약하기 짝이 없는 것 으로 골프장에서 공이라도 멋지게 한 번 날리는 날에는 속절없이 도 망가 버린다 . 그러므로 결국 진실하고 영속적인 만족은 제 2 세의 록 펠러였다는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

이와 다른 각도에서 보면 행복이란 대개 자기 자신에게 적합한일 , 즉 자기가 평생 심혈을 기울일 수 있는 일을 발견하는 데 있다 . 오늘날 일정한 직장을 갖고 있는 많은 남녀들 가운데서 자기 자신을 잊어볼 만한 일자리를 발견하였다고 할 만한 자가 90% 쯤 될까 ? 세상에는 흔히 “ 자기가 하는 일이 재미있다”라고 큰 소리를 치는 사람도 있지만 그런 말은 대체로 액면대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 누구 나 가정을 사랑한다고 말하는데 이것은 뻔한 일이다 . 보통 사무원들 은 마치 중국 여인이 어린애라도 낳을 때와 비슷한 기분으로 자기 사무실에 드나들고 있다 . 모두들 그렇게 하고 있으니 난들 별 수 있느냐는 것이다 . “일이 재미있어요” 하고 모두들 말하지만 그런 말은 승강기 안내원들이나 교환수나 치과의사의 경우라면 거짓말일 것이고 편집자나 부동산 관리인이나 증권 브로커의 경우에는 과장일 것 이다 . 발명하고 발견하는 일에 종사하는 북극 탐험가나 연구실의 과 학자라면 모르지만 내가 생각하기에는 일이 자기 성품에 맞고 또한 좋아한다는 것은 우리가 바랄 수 있는 최상의 경우라고 본다 . 그러나 언어의 뉘앙스를 셈에 넣고 생각해 보아도 일에 대한 사랑과 아이들에 대한 모성애는 비교도 되지 않는다 . 많은 사람들이 천직을 찾아 자주 직장을 바꾸지만 어머니로서 어린애를 기르는 , 여자로서 평생에 걸친 일에 대하여는 아무런 군말이 없는 것이다 .

정치가로서 상당한 성공을 거둔 사람도 정치를 집어치우는 경우가 있다 . 편집자로서 성공한 사람도 신문이나 잡지에서 손을 떼는 수가 있다 . 비행가로서 성공한 사람도 비행기를 버리기도 하고 권투선수 로 성공한 사람도 링을 곧잘 떠나며 배우로서 이름난 사람도 무대와 하직하는 수가 많다 . 그러나 성공과 실패에 개의치 않고 어머니가 모성애를 버린다는 것은 생각조차 못 할 일이다 . 어머니는 어린애에게 자기가 필요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 그녀들은 인생에 있어서 의 자기 위치를 발견하고 이 세상에서 그와 바꿀 수 있는 더 큰 일 이 없다고 확신한다 . 그리하여 그 확신은 히틀러가 독일을 구하려는 확신보다 더 깊은 것이다 .

남녀를 막론하고 인생에 주어진 지위가 있음을 아는 만족보다 더 큰 행복이 있을까 . 이 세상에서 겨우 5% 도 못 되는 자가 자기의 취미에 맞는 일을 찾아내어 이에 종사하고 있는 형편인데 , 모든 어버 이들은 어린애를 기르는 일에서 가장 깊고 또 가장 근본적인 인생을 찾아내고 있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 아닌가 ? 그러므로 자연의 법칙에 잘못이 없는 한 여자는 어려운 일에 이것저것 손을 댈 것이 아니라 , 어머니의 일에만 종사하고 있으면 참된 인생의 행복을 찾을 수 있는 기회는 확실히 많은 것이다 . 그렇지 않은가 ? 결혼은 여자의 최고 직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부인 독자들은 내 말을 잘 이해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 그리고 가정을 지켜나가는 무거운 짐은 결국 주부가 져야 함을 잘 알고 있는 터에 , 내가 굳이 가정에 대하여 왈가왈부하는 것을 보고 못 마땅하게 여길 것이다 . 그것은 내가 예로 든 일로 바로 이야기의 주제이기도 하다 . 그러므로 앞으로 남은 문제는 누가 여성에 대하여 더 친절하냐 하는 것이다 . 왜냐하면 우리가 지금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사회적인 업적에 의한 여성의 행복이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의 여성이 누릴 수 있는 깊은 행복에 대한 것이기 때문이다 . 어떤 직업에 적합하고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를 두고 생각해 보더라 도 여성이 어머니로서 적임자인 이상으로 자기 일에 어울리는 은행장은 적을 것이다 . 무능한 과장 , 무능한 지배인 , 무능한 은행가 , 무능한 총재는 얼마든지 있지만 무능한 어머니는 없다고 할 수 있다 . 그러므로 여성은 본래 타고 나기를 모성적이며 , 그렇게 되기를 바라 고 또한 그렇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것이다 .

오늘날 미국의 대학에서 공부하는 여대생들의 이상은 그 정도에서 떠나 흔들린 적은 있어도 대다수는 솔직하게 결혼하고 싶다고 말한다 . 즉 그녀들은 인생을 건전한 각도에서 바라보는 능력을 갖고 있다 . 내 눈에 비치는 이상적인 부인은 화장품과 수학을 동시에 사랑하는 사람으로 이런 사람은 남녀평등주의자보다 더욱 여성답다 . 그녀들에게는 먼저 화장품부터 주어라 . 그리고 공자의 말대로 행위에 여력이 있으면 수학을 공부하게 하라는 것이다 .

이 경우에 우리는 일반 남녀들의 이상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는 것을 양해하여 주기를 바란다 . 세상에는 뛰어난 남자가 있는 것처럼 뛰어난 여자도 있다 . 그런 사람들의 창조력은 인류사회의 발전에 이 바지하는 것이다 . 그런데 이런 특수한 여성이 아니라 보통 여성들에 게는 결혼을 이상적인 직장으로 생각하여 어린애를 낳고 설거지도 할 것을 권유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보통 남성들에게는 예술 같은 것 은 잊어버리고 머리를 깎거나 구두를 닦거나 도적을 잡거나 땜질을 하거나 심부름을 하거나 하여 가족들의 빵을 벌 것을 나는 요구하고 싶다 . 이들은 어린애를 나서 기르고 홍역을 무사히 치르게 하고 선량하고 현명한 시선으로 육성하여야 하지만 남자는 어린애를 낳을 수 없으며 , 또한 어린애를 안거나 씻어주는 것은 서투를 터이므로 이러한 일은 역시 여자의 손을 빌어야 하는 것이다 .

보통 사람으로서 어린애를 낳는 것과 머리를 깎거나 구두를 닦거나 백화점의 문지기를 하는 것 중 어느 쪽이 더 고상한지 나는 알 수 없다 . 남편이 백화점에서 문을 여닫는 일을 하고 있는데 아내가 집에서 접시를 씻기 싫어할 계제가 못 된다 . 옛날에는 남자가 상점에 서 물건들을 많이 팔았지만 오늘날에는 젊은 여성들이 점원으로 그 자리에 있고 남자는 문지기 일이나 하게 되었다 . 그들이 이런 일을 기꺼이 맡으면 사회는 그들을 환영하는 것이다 . 무슨 일이든지 생활 의 수단으로 생각하면 직업의 귀천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

그런데 처녀가 어떤 직장에서 손님들의 모자를 맡아서 간수하는 일을 하는 것과 부인이 집에서 남편의 양말을 꿰매는 일은 다르다 . 즉 전자가 후자보다 더 필요하고 낭만적인 일이라고 할 수는 없다 . 양자의 다른 점은 이러하다 . 즉 양말을 꿰매는 아내에게는 그녀의 운명을 좌우하는 남편이 있는 데 반하여 모자를 간수하는 처녀에게 는 그것이 없다 . 물론 그 양말을 신는 사람이 아내에게 그런 일을 시킬 만한 값어치가 있는 사람이기를 바라지만 , 남편의 양말 따위는 아내가 만지는 것이 아니라고 단정하여 동댕이치는 것은 부당한 일이다 . 남자란 그렇게까지 무가치한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

문제의 중요성은 다음과 같은 데 있다 . 즉 가정에는 앞으로 자녀들 을 길러야 할 중대하고도 신성한 일이 있는데 그러한 가정생활을 부 인이 시시한 일로 간주하는 것은 건전한 사회인의 태도라고 볼 수 없는 것이다 . 그러므로 이러한 일은 부인과 가정과 모성애를 소중히 생 각하지 않는 저급한 교양을 지닌 가정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것이다 .

 

 

3. 성적 매력에 대하여

 

여성의 권리와 그 사회적 지위가 커진 사실은 겉으로는 인정되고 있지만 여성들은 아직도 정당한 대우를 받지 못 하고 있다 . 이것은 미국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 나의 견해가 잘못이라면 그나마 다행이 겠다 . 그리고 여성의 권리가 증대됨에 따라 여성에 대한 숭배감도 감소되지 않기를 바라고자 한다 . 여성 숭배 즉 여성에 대한 참된 존경심은 여성들에게 돈을 잘 쓰게 하거나 마음대로 돌아다니게 하거나 사무에 종사하게 하거나 또는 투표를 하게 하는 것과 반드시 비례된다고 할 수 없다 .

낡은 대륙의 한 시민으로서 낡은 대륙적인 생각에 젖어 있는 나는 평소에 이렇게 생각해 왔었다 . 즉 세상에는 중요한 일도 있고 아 무래도 좋은 일도 있는 법인데 대륙의 여성들은 중국 여성과 비교해 보면 아무래도 좋은 일에 대해서는 상당히 앞서고 있지만 중대한 일 에는 여전히 동등한 위치에 놓여 있다 . 아무튼 유럽보다 미국에서 여성 숭배사상이 더 강하게 , 그리고 분명히 나타나 있다고 할 수는 없다 .

미국 여성들이 누리고 있는 참된 주권은 여전히 그 전통적인 왕좌 , 즉 가정에서 오는 것으로 이곳에서만 가족을 수호하는 행복한 천사로서 통솔자의 위치에 서게 되는 것이다 . 그러한 천사는 오직 신성한 가정에서만 찾아볼 수 있다 . 거기에서는 부엌이나 응접실을 조용히 내왕하며 가족에 대한 사랑에 몸을 바치는 주부의 모습이 돋 보인다 . 그리고 거기에서만 여인들은 어딘가 모르게 광채를 낸다 . 그러한 광채는 사무실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으며 또 어울리지도 않는다 .

그것은 단지 사무복을 입고 있을 때보다는 평복을 하고 있을 때가 한결 매력이 있고 애교가 있기 때문일까 ? 또는 나의 공상에 지나지 않을까 ? 반드시 그렇다고만 볼 수는 없을 것이다 . 여성이 가정에 머물러 있는 것은 물고기가 물속에 있는 것처럼 어울린다는 데 취할 맛이 있는 것이다 . 여성에게 사무복을 입히면 남자들은 동료로서의 비판적인 눈으로 그녀들을 바라보게 된다 . 그러나 그녀들에게 명주 크레이프나 비단 모슬린으로 된 부인 옷 을 입혀서 하루 7 시간의 일 과에서 한 시간만 사무실을 조용히 거닐게 해보라 . 남자들은 경쟁의 식을 버리고 감탄하며 압도되어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할 것이다 .

한편 여성들은 일정한 잔일을 시키면 곧 요령을 터득하고 남자들 보다 썩 잘 한다 . 그런데 사무실 직원들이 어느 결혼식에 참석하여 차라도 함께 마시게 되어 장소가 바뀌면 여성은 곧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 동료나 상사를 보고 이발을 하라느니 비듬을 없애는데 이러 저러한 로션이 좋다느니 하고 타이르는 것이다 . 사무실에서는 그녀들의 언사가 정중하지만 일단 사무실을 나오면 당당히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

남성의 입장에서 솔직하게 말하면 구태여 감출 필요가 없으니 말이다 . 공공생활에 여성들이 자리를 같이 하게 되면서부터 사무실이나 거리에 매우 부드러운 분위기를 이루게 하여 고맙기 짝이 없다 . 남성들은 사무실에서도 말씨가 점잖아지고 옷차림도 한결 말쑥해지 고 책상도 깨끗해졌다 . 자연이 부여한 성적 매력이나 남성이 그것을 요구하는 심정에는 조금도 변함이 없으나 , 그래도 나는 미국 남성들 은 다른 나라에 비하면 매우 행복하다고 생각한다 . 왜냐하면 미국 여성들은 중국 여성들과 비교하면 성적인 매력에 있어서 남성을 기쁘게 하기 위해 상당히 노력하고 있기 때문이다 . 그러므로 유럽 사 회에서는 섹스에만 정신을 팔기 때문에 여성 그 자체를 너무나 소홀 히 여긴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

유럽 여성들이 머리를 매만질 때에는 중국 여성들과 마찬가지로 상당히 시간이 걸린다 . 그러나 그 화장은 중국 여성들보다 훨씬 짙어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는다 . 그녀들은 식사를 가려서 하고 , 미 용체조를 하고 , 얼굴을 마사지하고 , 아름다운 몸가짐을 위해 광고를 읽는 등 매우 열심이다 . 또한 허리의 곡선을 아름답게 보이기 위해 침대 속에서 두 다리를 뻗기도 하고 차기도 하며 중국 여성들과는 딴판이다 . 중국 여성이라면 상상조차 못 할 나이가 되어도 이마의 주 름살을 펴고 머리에 물을 들이고 하는 것이다 . 로션이나 향수에 던지는 돈도 중국의 젊은 여자들보다 많으면 많았지 적지 않다 . 화장품 또한 굉장하다 . 데이 크림 , 나이트 크림 , 모공 크림 , 레몬 크림 , 볕에 그을림을 방지하는 기름 , 주름살을 펴는 기름 , 거북이 알에서 짜낸 기름 , 그밖에 생각조차 못할 여러 가지 향유… .

생각건대 미국 부인들에게는 시간과 돈이 넉넉하기 때문이리라 . 그녀들은 남자를 즐겁게 하기 위해 옷 을 입거나 자기 자신을 즐겁게 하기 위해 옷 을 벗고 , 혹은 반대로 남자를 즐겁게 하기 위해 옷 을 벗거나 자기 자신을 즐겁게 하기 위해 옷 을 입는 , 또는 그 양자 다 같이 해당되는지 모르겠다 . 중국 여성들은 오늘날 화장품들을 미국 여성들처럼 충분히 손에 넣을 수 없는 처지이기 때문에 그런 차이가 생기는지도 모르겠다 . 한결같이 이성에게 매력적이기를 원하는 여성 들에게 인종적인 구분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 지금부터 약 50 년 전에는 중국 여성들은 발을 억지로 줄여서까지 남성들의 환심을 사려고 비통한 괴로움을 겪었었다 . 그러나 오늘날에는 그런 풍속을 폐지하고 기꺼이 하이힐을 신게 되었다 .

나는 예언자는 아니지만 한 마디 확신을 갖고 미리 말할 수 있는 것은 중국 여성들은 가까운 장래에 남편도 자기 자신도 함께 즐길수 있도록 아침 10 분쯤은 두 다리를 흔드는 미용체조를 하게 될 것 이다 . 그것은 어쨌든 오늘의 미국 여성들은 육체적인 매력에 신경을 쓰고 성적 매력이 무엇인가를 잘 알고 옷 을 입으며 남성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애쓰고 있다는 것이다 . 그 결과는 정직하게 나타나 공원 이나 거리에 나타난 미국여성들은 중국 여성들보다 스타일도 좋고 옷 도 훌륭하다 . 이것은 모두가 육체의 미를 위해 주야로 놀라운 노 력을 하기 때문이며 , 따라서 남성들로서는 실로 고맙기 짝이 없는 노릇이다 . 그러나 한편 신경도 꽤 피로할 것이다 . 내가 여기서 말하 는 성적 매력에는 모성애의 아름다움 또는 여성 전체의 아름다움과 는 대조적인 의미가 깃들어 있다 . 이성적 매력의 아름다움이란 근대 적인 문명에서는 근대적 연애나 결혼의 특질이 되어 있다고 본다 .

예술은 근대인에게 섹스에 대하여 눈뜨게 하였다 . 이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 . 우선은 예술이라는 탈을 쓰고 시작되지만 이 윽고는 여성들의 육체를 영리적인 목적에 이용하게 된다 . 그리하여 여성의 육체적인 곡선에 근육의 움직임 , 매니큐어를 한 손톱과 발톱 끝까지 놓치지 않는다 . 여성의 육체가 이렇게 남김없이 돈벌이에 이용된 적은 일찍이 없었던 것이다 . 미국 여성들의 육체가 어찌하여 기꺼이 돈벌이에 제공되게 되었는지 참으로 알고도 모를 일이다 .

우리 동양인으로서는 여성의 육체를 영리에 이용하는 것과 여성들 을 존경하는 것을 결부시켜 생각할 수 없다 . 예술가들은 이것을 미라고 부르고 관객들은 예술이라고 하지만 , 프로듀서나 매니저만은 정직하게 성적 매력이라고 말한다 . 이 틈에 횡재를 하는 것은 이 세상의 뭇 남성들이다 . 여성들만이 영리를 위해 발가벗을 뿐 소수의 광대를 제외하고는 남자가 발가벗는 일이 없다 .

이것은 남자가 이룩하고 남자가 지배하는 사회의 전형적인 현상이 다 . 여성은 무대에서 거의 알몸에 가깝게 옷 을 벗지만 남성은 모닝코트와 검은 넥타이를 매고 구경을 한다 . 만일 여성이 지배하는 사회라면 아마도 여자는 옷 을 벗지 않고 남자만 옷 을 벗게 되었을 것 이다 .

예술가는 남자와 여자의 해부학을 골고루 연구하지만 남성의 육체 를 돈벌이에 이용하기는 어려운 모양이다 . 극장은 사람을 발가벗기 는 곳이지만 대개 여자를 발가벗기지 남자를 발가벗기는 일은 없다 . 예술인 동시에 도덕을 존중하려는 고급 흥행물에 있어서도 으레 여자는 예술적이고 남자는 도덕적으로 둔갑을 하게 마련이지 여자가 도덕적이고 남자가 예술적인 경우는 없다 ( 남자 배우들은 손님들을 웃 기는 일에 열중하고 있다 . 예술적이라는 무용에 있어서도 그렇다 ).

돈을 벌기 위해 광고를 낸다 . 그러면 테마가 결정된다 . 그것을 언 제나 겉모양만 바꿔서 상연하는 것이다 . 그러므로 남자 배우가 예술 적이고자 하면 잡지를 한 권 사서 광고란을 한 번 훑어보면 된다 . 그러나 여자 배우는 다르다 . 그녀들은 일방적으로 예술적이라야 한 다는 의무감을 너무나 강하게 느껴 무의식중에 섹스에 대한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자기 자신을 위축시키며 , 성적 매력을 발휘하기 위하 여 몸의 마사지나 그 밖의 여러 가지 엄한 훈련을 달게 받아야만 한다 . 즉 날로 아름다워지는 이 세상에 더욱 이바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 좀 난봉기가 있는 여자라면 남자를 꽉 잡고 놓치지 않는 비결은 오직 성적 매력에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

그러나 이 섹스의 매력을 지나치게 내세우는 것은 여성 본래의 자질에 대한 설익은 사고방식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 그리하여 연애나 결혼의 품위에 대하여 어떤 나쁜 결과를 가져온다 . 그러므로 연애관이나 결혼관도 자연히 비뚤어진 것이 되어 버린다 . 이리하여 여성은 가정의 지도자가 아니라 고작 남자의 상대역 정도로 생각하게 된다 .

여성은 아내이자 어머니이다 . 그런데 섹스를 이렇게까지 강조하면 남성의 상대로서의 여성의 의의가 어머니로서의 의의를 말살시켜 버 린다 . 여성은 어머니의 위치에서만 최고의 권좌에 오르게 되는 것이 며 , 어머니가 되기를 기피하는 아내는 그 존엄과 진실의 대부분을 상실하고 하나의 인형이 될 위험성이 있는 것이다 . 자식을 낳지 않는 아내는 첩이요 첩도 자식만 낳으면 아내인 것이다 . 법률이 뭐라 고 하든 이것은 사실이다 . 자식만 낳으면 본처가 아니더라도 존귀하 고 신성한 존재이지만 자식이 없으면 아내의 위치도 떨어지게 마련 이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래의 부인네들 가운데는 얼굴의 아름다 움을 잃을까 두려워하여 피임하는 자가 있다는 것은 누구나 잘 아는 사실이다 .

애욕의 본능은 스스로 인간생활을 풍부하게 하기 위해 상당한 작 용을 하고 있다 . 그러나 그 정도가 지나치게 되면 여성 자신을 망치는 것이다 . 성적 매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여성들이 상당히 신경을 쓰게 마련이지만 , 이것은 남성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하겠다 . 그런데 이 성적 매력에 너무 힘을 기울이면 불공평한 일이 생기게 된다 . 지나치게 아를다움과 젊음을 존중하면 중년부인은 백발과 시간의 흐름을 적으로 돌리고 승산이 없는 싸움을 하게 되기 때문이 다 . 어느 중국 시인은 이미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다 .

 

청춘과 샘물은 한 조각 허망한 꿈과 같거니

아직 아무도 태양을 힘으로 움직이고

흘러가는 청춘을 돌이킬 수는 없도다 .

 

중년부인이 성적 매력을 유지하려고 초조해 하는 것은 세월의 흐 름에 도전하는 것으로 무의미한 일이다 . 다만 유머만이 이것을 구제할 수 있다 . 노령과 백발을 상대로 싸워 승산이 없는 싸움을 계속하 는 것이 어리석음을 알아야 한다 . 어찌하여 백발은 백발로서 미가 될 수 없단 말인가 ? 일찍이 주계영 ( 朱桂英 ) 은 노래하였다 .

 

날로 느느니 백발이라

막을 도리 없나니 그대로 두세 .

내 어이 이를 한탄할까 보냐

세월 따라 사는 것도 흥겨웁거니 .

 

바로 그대로이다 . 이렇게 생각하지 않는 미국식 사고방식은 모두가 부자연스럽고 불공평하다 . 헤비급의 선수가 몇 해 후에는 다른 젊은 도전자에게 선수권을 넘겨주고 , 뛰어난 경주 말도 늙으면 젊은 준마에게 그 지위를 물려 줘야 하는 것처럼 중년부인이 젊은 여자와 경쟁해 본들 승패는 뻔한 노릇이므로 그런 짓은 그만두는 것이 상책 이다 . 그것은 결국 자기 자신의 섹스와 싸우는 꼴이 되기 때문이다 . 그러므로 이 세상의 어머니에게는 밑지는 이야기밖에 되지 않는다 . 성적 매력의 문제를 에워싸고 중년부인이 젊은 여자와 경쟁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며 터무니없는 노릇이다 . 여자란 섹스보다 더욱 소중한 일이 있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 구애나 결혼은 흔히 육체적인 매력을 전제로 하는 것이지만 성년 남녀는 이미 그런 나이가 아니지 않는가 .

인간은 모든 동물 가운데서 가장 섹스가 강한 것이다 . 그러나 이 섹스의 본능 이외에 가정생활에서 오는 어머니로서의 강한 본능이 있다 . 섹스의 본능과 어머니로서의 본능은 대다수의 동물에게도 있으며 , 가족의 시초는 손이 긴 원숭이의 생활 속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 그러나 미술 , 영화 , 연극 등을 보고 언제나 섹스의 자극을 거듭 받고 너무나 변질적인 교양에 젖어 섹스의 본능이 어머니로서의 본능을 억압하게 되면 사태는 위험하다 . 이러한 습성을 지니게 되면 가족적인 이상이 망각되기 쉽고 거기에 개인주의적인 사상까지 곁들이면 더욱 사태는 악화된다 . 그러므로 그러한 사회에서는 결혼이란 매우 기괴한 것으로 보인다 . 그런 사회에서는 아내란 남성인 남편의 상대역이요 어머니는 아니라는 괴상한 소리가 곧잘 들린다 . 이렇게 되면 이상적인 아내란 오직 육체적으로 완전히 균형이 잡히고 매력 있는 젊은 여성을 가리키게 된다 .

그러나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 요람 곁에 서 있는 여자처럼 아름다운 것은 없다 . 젖먹이를 가슴에 품고 , 4, 5 세 정도 되는 어린아이의 손목을 잡고 걸어갈 때 비로소 여자에게서 참된 권위를 찾아볼 수 있다 . 나는 전에 유럽 화가가 그린 어느 그림에서 어머니 가 베개를 베고 옆으로 드러누워 가슴에 젖먹이를 올려놓고 놀고 있 는 광경을 본 적이 있는데 여성으로서는 이때가 가장 행복할 것이 다 . 내가 모성애에 대하여 여러 가지 이야기를 너무 심각하게 했는지 모르겠다 . 하긴 그래도 무방할 것이다 . 왜냐하면 중국인들은 심리적인 충격 같은 것은 잘 이해하지 못 하므로 별로 큰 충격을 받지 않았을 터이니 말이다 . 저 정신분석학적인 오이디푸스식 인과관계 나 아버지와 딸 , 어머니와 아들 사이의 심리적인 갈등 따위를 끌어내어 보아도 중국인의 눈에는 우스꽝스럽기만 하고 믿을 만한 것이 못 되는 것이다 . 나의 여성관은 이런 깊은 모성론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중국인의 가정에 대한 이상에서 오는 것이다 .

 

 

4. 중 국인의 이상적 가정

 

나는 아무래도 < 창세기 > 는 고쳐 쓰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한 다 . 중국의 소설 『 홍루몽 ( 紅樓夢 ) 』 을 보면 주인공인 귀공자 , 매보옥 ( 買寶玉 ) 소년은 다정다감한 겁쟁이로서 여자 친구를 좋아하였다 . 그 리하여 아름다운 사촌누이를 애타게 연모하면서 자기는 아직 나이가 차지 않은 어린 소년임을 한탄하였다 . 그래서 그는 “ 여자란 물로 되어 있고 남자는 흙으로 되어 있다”라고 말하였던 것이다 . 즉 그가 좋아하는 여자들은 다 사랑스럽고 청초하고 영리한 데 비하여 그 자신이나 남자 친구들은 모두 못 나고 둔하고 변변치가 않다고 생각하 였던 것이다 . 만일 < 창세기 > 의 작자가 이 매보옥 소년의 말을 이해하였던들 < 창세기 > 는 달리 쓰였을 것이다 .

< 창세기 > 에 보면 신은 한 줌의 흙으로 인간의 형상을 만들고 콧 구멍으로 숨을 불어 넣었다 . 이리하여 아담이 생겨났는데 이 아담은 곧 부서지기 시작하여 가루가 되어 버렸다 .

그리하여 신은 물을 갖고 와서 흙을 섞었는데 아담의 몸에 들어간 물이 이브라는 여자이다 . 그러니까 아담은 이브라는 물을 몸에 간직하게 됨으로써 비로소 완전한 인간이 된 것이다 . 이 이야기는 적어도 결혼이 무엇인가를 상징적으로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 여자는 물이고 남자는 흙 , 물은 흙 속으로 스며들어가서 형상을 유지한 다 . 또한 흙은 물을 간직하고 있음으로써 물에게 모든 물질을 제공하고 물은 그 안에서 유동하여 물의 소임을 다한다 .

인간의 결혼에 대하여는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또 있다 . 즉 원나 라의 화가 조맹이 ( 趙孟 頫 ) 의 아내이며 여류 화가로서 궁정에서 그림 을 가르치던 관부인 ( 管夫人 ) 이 지은 시가 그것이다 . 남편이 중년에 접어들면서 아내에 대한 사랑이 식어 첩을 얻으려고 하자 관부인은 다음과 같은 시를 지어서 들뜬 마음을 가라앉혔다고 한다 .

 

저 마다 서글퍼 함은

정화 ( 淨火 ) 가

불타고 있기 때문인가 .

한 줌 흙을 움켜쥐고

만들지 않으려는가 ,

그대와 나를 .

이를 부수고

다시 이겨서

만들지 않으려는가 ,

그대와 나를 .

이렇게 해야만

그대의 흙과 내 흙이

잘 뒤섞여

아무도 그 사이를 가르지 못 하리니

한 자리에 함께 누워

같은 무덤에 묻히고자 하노라 .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중국인의 사회와 중국인의 생활은 가족제도 위에 이루어져 있다 . 그리하여 이 제도가 모든 중국인의 생활태도를 결정하고 또한 여기에 색조를 주고 있는 것이다 . 이러한 가정의 이상은 무엇에서 비롯되는 것일까 ? 이것은 별로 언급되어 있지 않은 문제이다 . 왜냐하면 중국인은 그것을 당연한 일로 생각하고 있 으며 , 외국인 연구가는 이 문제를 다룰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 공자는 가족제를 모든 사회적 , 정치적 생활의 모체로 생각하고 여기에 철학적 기를 둔 인물로서 유명하거니와 , 그는 모든 인간관계의 토대가 되는 부부관계나 효도나 성묘 , 조상 숭배 , 또는 가묘의 제도 등을 강조하였던 것이다 .

중국인의 조상 숭배는 이미 몇몇 논자에 의해 종교라고까지 불리고 있다 . 나는 우선 이러한 견해를 대체로 옳다고 생각한다 . 그 가 운데서 종교적이 아닌 면은 그 조상 숭배가 초자연적인 요소를 몰아 내고 그것을 매우 경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 이 조상 숭배는 초자연적인 면을 제쳐놓고 생각해 보면 기독교 , 불교 , 마호메트교에 있어 서의 신불의 신앙과 병존할 수 있다고 본다 . 조상 숭배의 의식은 종 교의 형태를 취하지만 무릇 신앙은 외형적인 상징과 형식을 갖추어 야 하므로 , 그것은 당연한 일이며 또한 일리가 있는 것이다 .

그건 그렇고 중국 사람이 조상들의 이름을 새긴 30 센티 가량의 위패에 보내는 존경은 영국 우표에 임금의 초상을 모시는 것과 비교 하여 보다 종교적이라고 할 수도 없거니와 또한 종교적이 아니라고 할 수도 없다 . 위패나 우표딱지나 다를 것이 없는 것이다 . 우선 무 엇보다도 이러한 조상의 영혼은 신이라기보다는 도리어 인간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며 , 이 세상에서 생존 시에 늙어서 자손들이 모시듯이 죽은 연후에도 여전히 그렇게 모시는 것이라고 그들은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 그러므로 살아 있는 사람은 죽은 사람의 영혼에 대하여 그 무엇을 달라거나 병을 고쳐 달라고 빌지도 않는다 . 그리고 이렇게 존중하고 숭앙하는 자와 받는 자 사이에 흔히 있는 이득도 없다 . 그리고 이 존중하고 숭앙하는 식전은 다만 적당한 날에 가족이 모여 서 조상이 살아생전에 가족들에게 해준 일들을 추모하면서 옛사람에 대한 경건한 추억에 잠기는 하나의 기회에 지나지 않는다 . 그러므로 그것은 기껏해야 옛사람이 살아 있을 때의 생일잔치를 대신하는 정 가 되는 것이지만 그 정신에 있어서는 부모의 생일 축하나 미국의 “ 어머니날”과 별로 다를 것이 없다 .

기독교 선교사는 중국인 기독교 신도가 조상 숭배의 의식이나 마을 의 연회나 동네 제사에 참례하는 것을 금하는데 그 유일한 까닭이 조상의 위패 앞에 무릎을 꿇기 때문이다 . 그것은 모세의 십계명에 위배 된다는 것이다 . 이것은 선교사들이 이해성이 없다는 가장 두드러진 실례이다 . 중국인의 무릎은 서구인의 그것처럼 그렇게 빳빳하지 않다 . 중국인은 임금 앞에서는 물론 장관 앞에서도 , 그리고 정월에는 부모 앞에서도 무릎을 꿇는다 . 중국인의 무릎은 서구인의 그것에 비하여 굴곡이 자유롭다 . 그러므로 목제 캘린더와 같은 조상의 위패 앞에 무 릎을 꿇었다고 해서 이교도가 되는 것은 아니다 . 농촌이나 읍에 살고 있는 중국 기독교 신자는 일반 잔치나 동네 제사에도 가는 것을 금지 당하고 있으며 때로는 연극 같은 것을 하게 되면 일반사람들이 얼마간 돈을 기부하기도 하는데 그것까지도 하지 못 하게 되어 있으므로 공동생활에서 고립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 그러므로 중국의 기독교 도는 자기가 살고 있는 마을에서도 외톨이가 되게 마련이다 .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은 자기 조상에 대한 존경심이나 신비스러운 의무 관념이 높아질 때 , 흔히 실제로 깊은 종교적 태도를 취하게 되는 것은 두말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 17 세기 사람으로서 유교의 최대 지도자의 한 사람인 염원 ( 閻元 ) 의 경우를 보기로 들어보면 , 그가 늘그막에 형제의 거처를 찾아 먼 길을 떠났다 . 그는 자식이 없었 으므로 형제를 찾기만 하면 그들에게는 소생이 있으리라는 생각에서 기대가 적지 않았었다 . 지식보다도 행동을 소중히 여기는 이 유교의 학도는 사천성에 살고 있었는데 그의 형제는 몇 해 동안 행방을 몰랐었다 . 그는 어느 날 공자를 가르치기가 싫증이 나서 행방불명이 된 자기 형제를 찾기 위해 , 기독교 선교사의 이른바 “ 신의 인도”와 같은 것을 느끼고 있었다 . 그러나 막연한 노릇이었다 . 그는 자기 형제가 어디 있는지는 고사하고 그 생사여부도 알지 못 하였다 . 그 당시에 먼 길을 무작정 떠난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로서 마침 명나라가 망한 때라 나라 안은 매우 소란스러웠다 . 그러나 이 노인은 그야말로 순교자적인 여행을 떠났었다 . 그는 여행길에서 성문이나 술집에 광고를 붙여가면서 형제들을 찾는 수밖에 없었다 . 서부 중국 에서 몇 천리의 길을 가면서 산을 넘고 강을 건너 북부 중국에 이르기까지 형제를 찾아 헤매던 끝에 가까스로 그 형제가 살고 있는 집에 찾아 들어갔다 . 그가 공동변소에 들어가 있는 동안에 , 그 벽에 세워 놓은 우산에 쓰인 이름을 마침 조카아이가 보았던 것이다 . 그런데 그때 이미 그 형제는 세상을 떠났었다 . 그러나 그는 목적을 달성하였다 . 그것은 선조 대대로의 가문을 이을 남자 후계자를 찾는데 그 목적이 있었던 것이다 .

공자가 어찌하여 부모에 효도하고 조상을 공경하는 일을 그렇게까 지 강조하였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하는 일이지만 , 존 C. H. 오 박사는 그의 계몽적인 논문에서 다음과 같은 점을 지적하고 있다 . 즉 공자는 아버지를 몰랐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 한평생 가정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는 사람이 “ 홈 스위트 홈”의 노래를 읊은 것과 같은 심리현상이다 . 만일 공자가 어릴 적에 그 아버지가 살아 있었다면 유 교의 부성관념이 그렇게까지 낭만적인 광채를 던지지는 못하였을 것 이다 . 그리고 만일 공자가 성인이 된 후에도 그 아버지가 살아 있었 더라면 그 결과는 훨씬 냉담하게 나타났을 것이다 . 왜냐하면 그때에 는 아버지의 여러 가지 결함이 눈에 띄었을 것이며 따라서 절대적인 효도를 고집하는 것은 불가능하였을지도 모른다 . 어쨌든 공자가 태어났을 때에는 아버지가 이미 죽은 뒤였다 . 그뿐만 아니라 아버지의 산소가 있는 곳도 알 수 없었다 . 공자는 서자로 태어났던 것이다 . 그러므로 어머니는 아버지가 어떤 분인지 알리기를 꺼렸었다 . 어머니가 돌아갔을 때 공자는 “ 다섯 아버지의 거리”에 가매장을 하였다 가 어느 할머니로부터 아버지의 산소가 있는 곳을 알게 되어 겨우 양친을 한 자리에 묻을 수 있었던 것이다 .

이 명철한 주장은 상당히 높이 평가해야 할 것이다 . 그러나 중국인의 생활에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은 가정의 이상은 중국의 학문과 예술을 훑어보면 곧 알 수 있다 . 그것은 인간을 개체로 보지 않고 가 족의 한 단위라는 관점에서 보고 있다 . 그리고 유전설이라고 부르고 있는 인생관을 배경으로 하여 인간의 자연적인 본능의 충족을 도덕과 정치의 구경의 목표로 삼는 철학에 의해 이론이 전개되어 있다 .

가족제도의 이상은 필연적으로 개인주의의 이상과 철저히 대립된 다 . 결국 아무도 전적으로 고립된 생활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

그러한 개인을 생각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 여기에 한 개인이 있 는데 그는 자식도 형제도 아버지도 친구도 아니라면 도대체 어떤 사 람인가 ? 이러한 개인은 형이상학적인 하나의 추상에 불과한 것이다 . 그런데 중국인의 머릿속은 생물적으로 사물을 생각하게 되어 있으므 로 인간의 생물적인 관계를 먼저 손꼽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 이리하여 가족은 인간생활의 자연적인 생물 단위가 되고 , 결혼도 한 가족의 일이지 결코 한 개인의 일이 아니다 .

내가 전에 쓴 『 내 나라 내 국민 (My country and my people) 』 속 에서 이러한 지나친 가족 본위의 폐단을 지적한 일이 있지만 그것은 확대된 이기주의의 형태를 취하여 국가의 발전을 저해하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이다 . 그런데 이러한 폐단은 인간사회의 모든 제도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것으로 서양의 개인주의나 국수주의라고 예외일 수 없으며 그것은 모두가 인간성의 결함에서 오는 것이다 . 중국에서는 어떠한 경우에도 인간은 국가보다 더 위대하고 소중하다고 생각되어 왔지만 가족보다 위대하고 소중하다고 생각한 적은 없다 . 가족이 없 이는 인간은 참된 존재일 수 없기 때문이다 .

국수주의의 폐단은 근대 유럽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 이 경우에 국가는 한 괴물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 우리는 그 실례를 이미 몇몇 나라들에서 찾아볼 수 있으며 개인적 언론의 자유도 , 종교적 양심이나 신앙의 자유도 , 그 개인적인 명예도 , 나아가서는 행복이라 는 궁극의 목적까지도 한 입에 삼켜 버리고 마는 것이다 . 이러한 전 체주의적인 사상의 이론적인 결말은 파시즘과 공산주의에 분명히 나 타나 있다 . 그리고 이에 대하여는 사실 칼 마르크스가 이미 논리적 으로 전개하였던 것이다 . 마르크스주의를 신용하는 나라에서는 어버 이가 지닌 본능을 짓밟아 버린다 . 그 나라에서는 가정의 애정이나 정절과 같은 것은 앞으로 도래할 풍족한 물질적 환경 속에서는 소멸 될 부르주아적인 정조라고 해서 배척되고 있다 .

칼 마르크스가 이 문제에 대하여 생물학적으로 어느 정도의 확신을 갖고 있었는지 나는 알 수 없다 . 그는 경제학에서는 뛰어난 인물이었을 터이지만 상식에 있어서는 거의 백치였을 것이다 . 미국 학생이라면 1 만 년의 타성을 지니고 있는 인간적인 본능을 위축시키는 데 5 천 년은 너무나 짧다고 생각할 것이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이한 현상은 이러한 주장이 정연한 이론이라 해서 유럽의 지식계급에 매력을 준다는 점이다 . 그것은 『 뉴욕 신문』의 논설위원의 말을 빌면 “ 미친놈의 논리로 일관되어” 있는 것이다 . 인간은 일정한 기계론적 법칙에 따라서 계급투쟁을 하고 있다는 생각은 당연히 신념이나 개 인의 자유를 박탈한다 . 그러므로 이러한 극단의 견해에 의하면 개인주의는 공산주의 사회에서 가족주의 제도하에서보다 더 배격된다 .

유럽의 이러한 개인주의나 국가주의에 대하여 중국에는 가족 관념 이 있으며 인간은 개인이 아니라 가족의 일원으로 , 즉 커다란 가족 생활의 흐름의 일부로 생각되는 것이다 . 이것이 곧 내가 유전설이라 고 말하는 것이다 . 인류의 생활을 크게 보면 그것은 여러 가지 종족으로 된 어떤 생명의 흐름이거니와 인간은 가족이라는 생명의 흐름 에 있어서 직접적으로 사물을 느끼고 보는 것이다 . 중국인이나 서구 인을 막론하고 인간의 일생은 저 가족의 나무 의 한 가지에 지나지 않으며 이 가지는 원줄기에서 뻗어 나와 나무를 영원히 무성하게 한 다 . 그러므로 인생은 역시 하나의 발전 또는 계속이라고 생각해야 하며 그동안에 우리는 저마다 가족사의 한 역할을 담당하여 가족 전 체의 의무를 다하고 자기 자신과 가족생활에 치욕을 가져오기도 하 고 영광을 가져오기도 한다 .

이러한 의미에서 가족의식이나 가족의 명예는 중국인의 생활 속에 서 아마도 유일한 집단의식을 형성할 것이다 . 다른 팀에게 지지 않고 또는 그보다 더 교묘히 인생의 유희를 하기 위해서는 가족들은 게임을 그르치거나 반칙을 하여 지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 그리고 될 수 있는 한 적의 골대 가까이 공을 갖고 육박해야 한다 . 그러므로 게으른 자식은 자기 자신의 수치일 뿐 아니라 가족 전 체의 수치이다 . 그것은 마치 실수를 하여 공을 떨어뜨리는 쿼터백과도 같은 것이다 . 그리고 고등고시에 수석으로 합격한 자는 터치다운 의 묘기를 연출한 선수와 같은 것으로 그 영광은 자기 자신의 영광이요 , 또한 가족 전체의 영광이다 . 고등고시의 수석 합격은 더 말할 것도 없고 3 류의 진사급 , 5 급 공무원 ) 에 합격하는 것도 기분이나 물질적으로도 가족이나 친척 , 가문 혹은 사람들에게 혜택을 줄 수 있는 일이다 . 그러므로 100 년 , 200 년 고향 사람들은 어느 때 자기 고을에서 장원 합격자가 나왔다고 자랑하게 되는 것이다 . 자식이 장원이나 진사의 자격을 얻어 고향에 돌아와서 조상의 제단 앞에 영예 로운 금박을 한 합격증을 바치면 어머니는 눈물을 흘리고 마을 전체 가 명예로 생각하여 가족과 함께 축제 기분에 젖는다 . 이것과 요새 대학 졸업증을 얻은 광경과 비교해 보면 시시껄렁하기 짝이 없다 .

가족생활의 이러한 풍경 속에는 커다란 변화나 명암이 내포되어 있다 . 우리는 유년시절 , 소년시절 , 청년시절 , 장년시절 또는 노년시절을 이 가족 속에서 보낸다 . 우선 가족의 도움을 받는 일에서 시작 하여 이윽고 가족을 돕고 늙어서는 또한 가족들에게 폐를 끼친다 .

우리는 누구나 우선 가족에게 복종하고 가족을 존경하는 데서 시작하여 나이를 먹음에 따라서 반대로 복종을 받고 존경을 받게 된다 . 여자는 더욱 그렇다 . 대대로 계속되는 이 가족생활에서 여자는 결코 하나의 장식품일 수 없고 한낱 아내에 그칠 수도 없다 . 그녀는 “ 가 족나무”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한 부분으로서 그녀가 있기 때문에 그 가족 전체의 생활이 지속되는 것이다 . 즉 “ 가족나무”의 가지가 굳세게 자랄 수 있는 것은 그 집에 시집을 온 여자가 어떻게 행동하며 , 그 가족의 앞날을 이어나갈 어떤 핏줄의 후손을 낳아 주느냐에 달려 있다 . 우리가 나무에 접을 붙일 때 좋은 나무를 고르듯이 , 현명한 가장은 좋은 핏줄을 이을 여자를 신중히 고르는 것이다 .

누구나 절실히 느끼고 있는 바와 같이 남자의 일생 , 특히 그 가정 생활은 아내의 손에 좌우되므로 가족의 앞날은 그녀의 어깨에 달려 있다고 해도 무방하다 . 즉 자손의 건강이나 가정의 법도 ( 중국에서는 이 점을 중요시한다 ) 는 오직 며느리가 자란 가정교육 여하에 달려 있 다 . 이것은 일종의 막연한 무형의 우생제도로 이러한 유전의 신념에 따라서 때때로 문벌을 존중하는데 , 어느 경우에 있어서나 양친이나 조부모의 안목으로 보아 며느리가 건강하고 아름답고 좋은 가정에서 자란 것이 기준이 된다 ( 여기서 문벌이란 혈통이나 가계를 뜻한다 ) . 대체 로 부지런하고 일을 잘 하며 예의범절이 바르면 된다 . 이 경우에 특히 전통 있는 훌륭한 가정교육을 중요시한다 ( 서구인들이 이른바 좋은 문벌의 딸을 택한다는 뜻이다 ) . 만일 유감스럽게도 며느리가 예의범절을 모르는 하찮은 여자임을 시부모들이 알게 되면 우선 그 친정교육 부터 탓하게 마련이다 . 그러므로 자기 딸이 시집을 가서 흠을 잡히지 않기 위하여 가정교육을 실시할 임무가 그 양친에게 있다 . 예컨대 딸이 시집을 가서 음식―특히 제사음식―을 잘 만들 줄 모르면 탈이다 .

중국의 가족제도에서 보는 바와 같은 유전설에 의하면 장생불사는 거의 눈으로 볼 수 있고 손으로 잡힐 것 같다 . 조그마한 가방을 들고 학교에 다니는 손자를 바라보는 할아버지는 저마다 자기가 다시 어린애가 되어서 이 세상에 살고 있는 느낌을 갖게 될 것이며 , 아들의 손목을 잡고 그 뺨을 만지면서 자기 자신의 피와 살이 거기 있다고 느끼게 될 것이다 . 자기의 생애는 가족나무 의 한 마디가 영원에서 영원으로 흐르는 가족이라는 커다란 생명의 흐름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고 느낌으로써 마음 놓고 죽어갈 수가 있는 것이다 . 살 아생전에 아들딸들이 결혼하는 것을 애써 보고 싶어 하는 이유가 실 로 여기 있는 것이다 . 그것은 자기 무덤의 위치를 궁금해 하거나 훌륭한 관을 선택하는 것보다 더욱 중대한 일이다 . 왜냐하면 자기 아들이나 딸들이 어떤 처녀나 청년과 결혼할 것인가를 살아서 눈으로 보기 전에는 그 자식들이 앞날에 어떤 생활을 하게 될는지 짐작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 그러나 며느리나 사위에 만족을 느끼고 있다면 마음 놓고 죽을 수 있는 것이다 .

이러한 인생관을 갖고 있기 때문에 모든 일에 깊은 고찰을 하게 된다 . 인생은 한 개인의 생멸과 운명을 같이 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 인생의 축구에서 센터나 쿼터백은 지더라도 시합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

이렇게 되면 인생의 승패는 다시 다른 복잡한 형태를 취하게 된다 . 중국인의 생활 이상은 조상에게 욕을 보이지 않도록 하며 남부끄럽지 않은 아들을 두는 데 있다 . 중국인 관리가 관청을 떠날 때에 는 흔히 이렇게 말한다 . “ 자식이 있으니 만사가 만족스럽고 관청을 떠나게 되니 몸이 홀가분하다 ( 有子事足去官輕身 ) . ” 우리에게 닥쳐올 최대의 비극은 가족의 명예를 유지할 수 없고 그 재산까지도 지켜 나갈 수가 없는 그런 못난 자식을 두는 일이리라 .

백만장자가 된 아버지도 방탕한 자식이 있으면 평생을 걸려서 이룩한 재산도 다 탕진한 거나 마찬가지이다 . 그 자식이 설치면 그만인 것이다 . 이와는 반대로 기쁨을 앞날에 의탁하고 있는 과부는 다섯 살쯤 된 똑똑한 아들만 있으면 빈곤이나 굴종 , 때로는 박해까지도 오랜 세월을 두고 곧잘 참아 나간다 .

중국의 역사를 읽어보면 모든 궁핍과 박해를 참아가면서 아들이 자라 집안을 일으키거나 또는 출세할 날을 기꺼운 마음으로 기대하고 있는 수많은 과부의 모습을 찾아볼 수가 있다 . 그 예를 근대에서 들어 보면 장개석 ( 蔣介石 ) 자신이 그렇다 . 그는 어릴 때 편모슬하에서 동네 사람들에게서 천대를 받았었다 . 그러나 그 과부는 아들에게 기 대를 걸고 결코 실망하지 않았었다 . 이 세상의 과부들이 대개는 여자 특유의 현실적인 배려에서 자식들에게 충분한 성격 교육이나 도덕 교 육을 하는 데 성공하고 있는 것을 보면 아버지란 자식의 교육에 있 어서는 전혀 불필요한 존재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 아무튼 과부 는 잘 웃는다 . 그것은 최후의 웃음을 웃을 수 있기 때문이다 .

이와 같이   가족 속에 인생의 거점을 두면 인간생활의 생물적인 모든 면을 고려하기 때문에 매우 좋은 일이다 . 공자가 주로 말하고자 한 것도 결국은 이것이다 . 그가 생각한 위정자의 최고 이상은 생물학적인 것이었다 . “ 인 ( 仁 ) 을 이루면 늙어서 화평을 즐길 수 있고 젊어서는 정절을 지키게 되느니라 . 그렇게 되면 안으로 원한을 품은 여자가 없고 밖으로 방자한 남자가 없게 되느니라 . ”

이것은 공자의 말씀 가운데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말로 , 단지 문 자 그대로의 뜻에서 한걸음 나아가서 위정자의 최고 목표를 나타내 는 말이라고 생각하면 그 의미가 더욱 커진다 . 이것은 따칭 ( 大慶 ), 즉 본능의 충족이라는 뜻으로 알려져 있는 인간주의 철학이다 . 공자 는 인간의 모든 본능이 우선 충분히 충족되기를 원하고 있었다 . 이렇게 되어야만 비로소 우리는 만족스러운 생활을 하면서 정신적인 평화를 누릴 수 있으며 , 이 정신적인 평화만이 참된 평화이기 때문이다 . 이것은 정치가 필요 없게 되는 , 일종의 정치 이상이기도 하다 . 그 평화는 인간성에 깊이 뿌리를 박고 흔들리지 않는 평화이기 때문이다 .

 

 

5. 우 아한 노경으로

 

중국 가족제도는 늙은이나 어린 소년에 대하여 각별한 배려를 하여 주로 그것을 토대로 마련되어 있다 . 하긴 유년시절과 노년시절은 인간생애의 절반을 차지하므로 , 그들이 만족스러운 생활을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견지에서이다 . 아이들은 무력하여 자기 자신의 걱정을 할 힘도 없으나 한편 노인보다는 물질적인 위로가 없어도 즐겁게 살아간다 .

아닌 게 아니라 그들은 물질적인 궁핍 같은 것은 거의 모르는 경 우가 많다 . 그러므로 가난한 집 아이들은 부잣집 아이들만큼 행복하 지 못 하더라도 과히 불행하지 않은 것이다 . 아니 부잣집 아들만큼 행복한 경우도 있다 . 맨발을 벗고 다녀도 조금도 괴롭지 않고 오히 려 재미있어 한다 . 그러나 늙은이들더러 맨발로 걸어 다니라면 도저 히 못 견딘다 . 그것은 아이들에게는 커다란 생명력이 약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 그들에게도 가끔 슬플 때가 있을 터이지만 곧 잊어버린 다 . 늙은이들처럼 돈에 대하여 관심이 없으며 돈을 장만하고 싶다는 귀찮은 생각도 하지 않는다 . 부잣집 늙은이들은 즐겨 공채를 사들이 지만 어린이들은 고작 장난감 권총이라도 사려고 담뱃갑 속의 경품권을 모으는 정도일 것이다 . 이 두 개의 수집에 따르는 재미를 비교해 볼 수도 없다 . 왜냐하면 아이들은 모든 어른들과 마찬가지로 아직 세상의 쓰라림을 모르기 때문이다 . 그리고 자기의 습성도 아직 고정되어 있지 않으며 ( 굳이 무슨 상표의 커피라야 입맛에 당기는 일도 없고 ) 무엇이든지 잘 먹는다 . 인종적인 편견도 매우 적으며 더구나 종교적인 편견 따위는 찾아볼 수 없다 . 그 사상이나 관념이 어떤 선 입관에 사로잡힌 일도 없다 . 그러나 청소년에 비하여 늙은이는 위구 심도 뚜렷하고 좋아하는 것도 엄격하게 정해져 있으므로 가족들의 신세를 져야 한다 .

노인에 대한 이런 다정한 태도는 중국인의 원시적 감정 속에 이미 존재하였었다 . 이러한 심정을 서구인에게서 찾아보면 , 오직 기사도 정신이나 부인에 대한 온정 정도일 것이다 . 그러나 만일 옛날 중 국인에게 기사도가 있었다면 부인이나 어린이에 대하여 발휘된 것이 아니라 노인에게 발휘되었을 것이다 .

이 기사도의 정신은 다음과 같은 맹자의 말 가운데 분명히 나타나 있다 . 즉 백발의 노인이 무거운 짐을 지고 길을 가는 모습이 눈에 뜨이지 말아야 하느니라 . 이 말은 선정의 궁극적인 목적으로 나타나 있다 . 공자는 또한 이 세상에서 가장 무력한 네 종류의 사람들에 대 하여 말하고 있다 . 즉 과부 , 홀아비 , 고아 , 자손이 없는 노인이 그것 이다 . 이들 중에서 처음의 양자는 세상에 미혼 남녀가 없도록 하려는 정책에 의해 구제될 것이다 . 그러면 고아는 어떻게 할 것인가 . 내가 아는 한 이 점에 대하여 맹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다 . 그러나 옛날부터 고아원은 양로원과 함께 언제나 있었던 것이다 . 이 고아원 과 양로원이 가정의 대용물임은 누구나 아는 일이다 .

가정만이 늙은이나 어린이에게 충분한 보호를 할 수 있는 것이다 . 그런데 어린이는 별로 크게 보호를 하지 않아도 무방하다 . 자연히 부모의 사랑이 있기 때문이다 . 그러나 물은 낮은 데로 흐르지 높은 데로 흐르지 않는다 라고 중국인이 입버릇처럼 말하는 바와 같이 , 양친이나 조부모에 대한 애정은 다소의 수양을 쌓지 않고서는 우러 나지 않는다 . 인간의 본성은 어린이를 사랑하고 인간의 수양은 어버이를 사랑한다 . 이리하여 노인에 대한 사랑과 존경은 드디어 만인이 받아들이는 가르침이 되고 말았다 . 그리하여 몇몇 논자들의 의견에 의하면 늙은 어버이를 잘 섬길 수 있는 자격을 보유하고 싶어 하는 심정은 드디어 커다란 욕구로 발전하였다는 것이다 .

중국인으로서 가장 유감스러운 것은 임종이 가까운 양친에게 약이 나 고기를 충분히 제공하여 최후의 효도를 드릴 기회를 상실하거나 또는 양친의 임종 곁에 있지 못 하는 일이다 . 5, 60 이 된 고관이 고향에서 양친을 서울 자택에 모셔다가 함께 살며 , 저녁에 자리에 드는 것을 보고 아침에 문안 인사를 드리는 일을 하지 못 하면 , 돌이켜 생각할 때 부끄럽기 짝이 없는 죄를 범하는 것으로 친구나 동료들에 게 언제나 궁색스럽게 변명이나 설명을 해야 하는 법이다 . 이 유감 스러운 심정은 모처럼 고향에 돌아왔어도 부모의 임종에 함께 있지 못 한 자가 지은 다음의 두 줄의 감회에 잘 나타나 있다 .

 

 

나무는 조용히 있고자 하나 바람이 멎지 않고

자식은 봉양하고자 하나 어버이가 기다려 주지 않는도다 .

 

 

만일 이 세상을 한 편의 시라고 생각한다면 그 생애의 황혼기를 가장 행복한 때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 죽음을 너무 두려워하여 굳 이 오래 살려고 들지도 않을 것이고 , 오히려 자진하여 노경이 닥쳐오 는 것을 기다려서 생애 가운데서 가장 즐거운 시대를 서서히 이루어 나갈 수도 있을 것이다 . 우리는 그렇게 생각해야 할 것으로 안다 .

흔히들 동양인의 생활과 서구인의 생활을 비교 대조하지만 연령에 대한 동양인의 사고방식을 제외하면 커다란 차이는 없다 . 그러나 이 점에 대하여는 완전히 구분되어 그 중간적인 것이 있을 수 없다 . 섹스 , 여자 , 일 , 노름 또는 성공에 대한 동양 사람의 태도가 서양 사람의 그것과 다르다는 것은 모두가 상대적인 의미에서 하는 말이다 . 중국인의 부부관계도 본질적으로는 서양인의 그것과 다르지 않으며 부모 자식 간의 관계도 역시 그렇다 . 개인의 자유나 민족주의적인 사상 또는 인민과 지배자의 관계도 결국은 그렇게 큰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니다 .

그러나 연령에 대한 중국인의 태도는 서구인과 매우 다르다 . 이점에 대하여는 동 · 서가 정반대의 견해를 갖고 있다 . 남의 나이를 묻거나 자기 나이를 댈 때의 태도를 보면 이 점이 분명히 나타난다 . 중국에서는 공용으로 사람을 불렀을 경우에 그 이름을 묻고는 곧 이 어서 나이를 묻는다 . 그리하여 그때 “ 23 세입니다” 혹은 “ 28 세입니다” 하고 어쩐지 말하기 거북한 듯이 대답하면 물어 본 편에서 흔히 상대방을 위로하여 “ 아직 앞날이 창창한데 뭘 그러세요 . 앞으로 언젠 가는 노인이 될 게 아닙니까 ? ” 하고 말한다 . 만일 상대방이 “ 35 세입니다” 또는 “ 38 세입니다” 하고 대답하면 존경하는 마음으로 “참 반갑습니다” 하고 말한다 . 즉 높은 나이를 대면 댈수록 묻는 편에서는 점점 점잖아진다 . 그리하여 만일 쉰 몇 살이라는 말이라도 나오면 당장 음성을 낮추고 존경을 표시한다 . 늙은이들이 이왕이면 중국에 가서 살고 싶어 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 중국에서는 거지라도 머리가 희면 특별대우를 한다 . 중년층에 있는 사람들은 50 회 생일 잔치 날을 고대하고 있다 . 돈 많은 상인이나 출세한 관리들은 불혹 ( 不惑 , 40 세 ) 의 생일도 굉장히 차린다 . 그러나 보통은 50 회 생일 즉 인생의 반세기가 된 것을 알리는 날에 모든 사람들이 축하를 받게 마련이 다 . 이순 ( 耳順 , 60 세 ) 이 되면 50 세보다 물론 행복하고 위대한 나이로 간주한다 . 고희 ( 古稀 , 70 세 ) 는 이보다 더 굉장하고 미수 ( 未壽 , 80 세 ) 의 생일을 축하할 수 있는 사람은 사실 하늘에서 특별한 은총을 내린 사람으로서 존경한다 . 흰 수염을 기른다는 것은 할아버지가 된 자의 특권이다 . 그러나 할아버지가 되거나 50 을 넘지 않고―이것은 필요 한 자격이다―흰 수염을 기르면 남의 손가락질을 받을 우려가 있다 . 그러나 간혹 젊은이들이 늙은이의 태도나 위엄이나 식견을 흉내 내어 나이가 들어 보이게 하려고 애쓰기도 한다 .

나는 몇몇 젊은 중국 문인들을 알고 있는데 그들은 중학을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아무래도 21 세에서 25 세로밖에는 보이지 않는데 도 잡지에 젊은이는 무엇을 읽고 , 무엇을 읽지 말아야 하는가 ? 하는 글을 실어 마치 어버이다운 노파심으로 젊은이들이 빠지기 쉬운 유혹을 경계하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

일반 중국인들이 이와 같이 노령을 존중하는 것을 알게 되면 그들이 하루 속히 나이를 먹고 싶어 하고 , 언제나 늙어 보이게 하려는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

우선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것은 늙은이들의 특권이다 . 젊은이들은 늙은이의 이야기를 잠자코 듣고 있어야 한다 . “젊은이는 귀가 있어도 입은 없다”라는 중국의 속담과 같이 30 세가 된 사람이 이야기를 하면 20 세가 된 청년은 듣고 있어야 하고 30 세가 된 자가 만일 40 세 된 자의 이야기를 듣게 되면 역시 잠자코 듣고만 있어야 한다 . 누구나 자기 이야기를 잘 들어 주기를 바랄 터이므로 나이를 먹을수 록 이야기를 들려 줄 기회가 많아지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 이것 은 에누리 없는 인생의 게임이다 . 왜냐하면 누구나 언젠가는 늙은이 가 될 때가 있기 때문이다 . 사리가 이러하므로 아버지가 자식에게 무슨 훈계를 할 때라도 할머니가 뭐라고 입을 열면 곧 공손하게 잠자코 있어야 한다 .

“네가 길을 건너온 것보다 나는 더 많은 다리를 건너왔어” 하고 늙은이들이 말하는 터에 젊은이가 뭐라고 감히 입을 열 수 있겠는가 ? 젊은이들에게는 남과 이야기할 권리부터가 박약한 것이다 .

나는 서구인의 생활이나 연령에 대한 태도를 잘 알고 있으면서도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가끔 어리둥절하게 될 때가 있다 . 이러한 실례는 주변에 얼마든지 있다 . 하루는 할머니가 “ 나는 손주가 있는 걸요” 하고는 입을 열더니 이어서 “ 처음 손주를 보고 할머니 소리를 들었을 때는 질색이었어요” 하고 말하는 것이었다 . 미국 사람들이 늙은이 취급을 받는 것을 싫어하는 줄 잘 알면서도 막상 이렇게 이 야기하는 소리를 들으면 어처구니없다 . 그것도 50 세 미만의 중년이라면 또 모르겠다 . 이들에게는 아직 일할 만한 기력이 있다는 인상을 남에게 주고 싶어 하는 심정이 있다 . 그것은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 그런데 말 상대를 하고 있는 내가 아무런 실수도 하지 않았는 데 화제가 자연히 연령에 미치면 이상하게도 백발이 된 할머니가 날 씨에 대한 이야기만 끄집어내는 것이 아닌가 . 나는 이렇게 되면 어 리둥절하지 않을 수 없다 . 그리하여 나는 엘리베이터나 차에 늙은이 를 먼저 오르게 할 때 “ 늙은이들은 어서 먼저 타세요” 하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오는 것을 언제나 꾹 참고 어물어물해 버린다 . 어느 날 어떤 의젓한 노신사에게 무의식중에 이 말을 입 밖에 내었다 . 그 랬더니 차에 앉은 이 노신사는 아내를 돌아보면서 우습다는 듯이 말 하는 것이었다 .

“이 사람이 나보다 젊다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자부심이 이만저만 아니야 . ” 이것은 실로 어리석은 이야기이다 . 그러나 나로서는 얼른 해석하기가 곤란하다 . 아가씨나 중년부인이 나이에 대하여 이야기하 는 것을 싫어하는 심정은 잘 알 수 있다 . 이들이 젊음을 존중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기 때문이다 . 중국 처녀들도 22 세가 되도록 아 직 결혼이나 약혼을 하지 못 하고 있으면 나이에 대해서 상당히 걱정을 한다 .

세월은 에누리 없이 흘러만 간다 . 독일인은 이런 입장을 가리켜 “무서운 마감 시간” 이라고 하는데 거기에는 자기만이 등 뒤에 남게 되었다는 불안감이 감돌고 있다 . 밤늦게 문이 닫힌 공원에 홀로 남았을 때의 불안한 심정과 같다 . 그러므로 흔히 여자의 일생을 통하 여 가장 긴 나이는 29 세라고 한다 . 그리하여 29 세의 나이는 3 년 , 4 년 또는 5 년이나 계속되기도 한다 . 그러나 이런 입장이 아니면서도 남이 자기 나이를 아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 연장자로 보이지 않고서 어떻게 현명하다는 인상을 줄 수 있겠는가 ? 그리고 나이도 아직 젊은 터에 어찌 인생이나 결혼 또는 세상의 여러 가지 진가에 대하여 참된 지식을 얻을 수 있겠는가 ?

서구인들이 젊음을 존경하여 모든 사람들이 나이에 대하여 말하는 것을 꺼리는 심정을 이해할 수는 있다 . 나무랄 데 없는 유능하고 활동적인 45 세의 부인 비서도 그녀의 진짜 나이를 알게 되면 곧 매력을 잃게 된다 . 정말 괴상한 일이다 . 그러니 직장을 잃지 않기 위해 자기 나이를 숨기려고 할 밖에 ! 이래서는 인생 자체도 젊음의 존귀함도 모두 하잘 것 없는 것이 아니겠는가 . 내가 보기에는 무의미한 일이다 .

이러한 현상이 일어나는 것은 분명히 직장생활의 결과이다 . 부인 은 사무실에 있을 때보다도 가정에 있을 때 나이에 대하여도 더 존 경을 받으리라고 생각한다 . 그러나 미국인들이 일의 능률이나 업적 등에 지나치게 관심을 갖지 않게 될 때까지는 해결책이 없다 . 미국 인 아버지들이 인생의 이상적인 거처를 사무실보다도 가정에서 구하 고 중국인 양친처럼 자기는 대를 이을 훌륭한 아들이 있어 부양을 받고 있노라고 당당히 여러 사람들 앞에서 말할 수 있게 될 때에만 즐거운 노경을 그리워하여 50 이 되기를 손꼽아 기다리게 될 것이다 . 미국의 노인들은 오늘날에도 분주한 생활을 하고 있다 . 그것은 어 리석으리만큼 큰 세력을 이룬 개인주의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이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 그것이 그들의 긍지요 , 독립정신이요 , 따라서 자식들의 신세를 지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는 태도이다 . 그런데 미 국인들은 헌법 속에 많은 인권에 대하여 규정하고 있지만 이상하게도 자식들의 부양을 받을 권리에 대하여 기록할 것을 잊고 있다 . 그 것은 효도에서 비롯되는 권리요 의무이다 . 일찍이 자식들을 위해 노 고를 무릅쓰고 그들이 병에 걸리면 며칠 밤을 지새우며 간호하였으며 , 아직 말도 못 할 무렵부터 기저귀를 빨고 한 세기의 4 분의 1 동 안이나 자식들을 기르며 훌륭히 자립하여 살아가도록 가르친 어버이 들이 늙어서 그들의 부양을 받고 또한 존경을 받을 권리가 있음을 누가 부정할 수 있겠는가 ?

중국인이 늙은 어버이를 섬기고 효도할 생각을 하는 것은 은혜에 보답하려는 마음에서이다 . 친구로부터 돈을 꾸는 데는 한도가 있지만 , 부모의 은혜에는 한도가 없다 . 중국인이 효도에 대하여 쓴 것을 보더라도 기저귀를 빤다는 말이 몇 번이나 되풀이되어 나온다 . 이것 은 우리 자신이 부모가 되었을 때에 뼈에 사무치게 느끼게 되는 말이다 . 그러므로 부모가 늙으면 거꾸로 자식들의 봉양을 받아 맛 좋은 것을 먹고 구미에 당기는 식탁의 요리를 즐기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 효도의 의무를 다하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일이지만 , 어버이 를 섬기는 것과 호텔의 손님을 같이 취급하는 것은 효도의 신성함을 모독하는 일이다 . 다음에 인용하는 도석석 ( 屠錫石 ) 의 글은 자식이 가 정에서 어버이를 섬기는 의무에 대하여 서술한 것이며 , 옛날 학교 수신책에 실렸던 것으로 매우 유명하다 .

 

여름에 부모를 섬길 때에는 옆에서 부채질을 하여 더위를 쫓아내 는 동시에 파리와 모기를 쫓아야 하며 , 겨울에는 따뜻한 침구를 마련 하고 화로를 덥게 하여 언제나 불이 꺼지지 않도록 명심해야 한다 .

들창이나 문에 구멍과 틈이 있어 바람이 들어오지 않는지 살펴보며 , 언제나 부모를 기쁘게 하고 만족스럽게 하도록 해야 한다 . 10 세가 지 나면 부모보다 먼저 일어나 세수를 하고 부모가 주무시는 방에 가서 아침 인사를 드려야 한다 . 만일 부모가 이미 일어나 계시거든 아침 인사와 함께 기분이 어떠한지 묻고 나서 절을 하고 방에서 나온다 . 밤에 주무실 때에는 부모의 자리를 깔아드리고 잠이 드실 때까지 옆을 떠나지 않고 있다가 잠이 드신 것을 본 연후에 머리맡에 커튼을 쳐 드리고 물러나야 한다 .

 

이런 형편이니 중국인들이 노부나 조부가 되기를 원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

이러한 견해를 중국의 프롤레타리아 논객들은 봉건적이라고 비웃지만 이런 풍습 속에는 중국의 노신사들로 하여금 집착을 갖게 하고 근대의 중국은 이제 보잘 것 없는 나라가 되었다고 생각하기에 충분 한 매력이 있는 것이다 . 인간이 추상적 세계에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며 , 문자 그대로 독립하여 살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 어리석은 개인주의를 말살시킬 수 있다면 인생의 황금시대는 늙어가는 앞날에 있으며 아무것도 모르던 지나간 젊은 시절에 있지 않다는 입장에서 인생의 계획을 세워야 한다는 것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 그렇지 않고 반대의 태도를 취하면 , 세월이라는 무자비한 코스 위에서 참혹한 경주를 하는 꼴이 되어 ( 그런 줄도 모르고 ) 언제나 앞에 놓인 환영 ( 幻影 ) 의 위협을 받고 모두들 패배하고 말 것이다 .

아무도 늙어가는 것을 저지할 수는 없다 . 인간은 늙어간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자기를 속이는 것이 된다 . 자연에 대하여 항거할 필요가 없으니 의젓이 나이를 먹을지어다 . 인생의 교향악은 평화 , 고요 , 안락 , 정신적 만족의 위대한 피날레로써 막을 내려야지 깨어진 북과 찌그러진 신발의 소리로 끝마쳐서는 안 될 것이다 .

 

  

 

 

 

 

 

 

제 8 장 생활의 즐거움

 

 

 

 

 1. 와상 ( 臥床 ) 대하여

 

아무튼 나는 길거리 철학자의 운명을 타고 난 모양이다 . 그것도 할 수 없는 노릇이다 . 철학은 흔히 단순한 문제를 복잡하게 다루는 학문으로 생각되고 있으나 나는 반대로 복잡한 문제들을 단순화하는 학문이 철학이라고 생각한다 . 유물론이니 , 인도주의니 , 선험론이니 , 다원론이니 , 그밖에 여러 가지 명칭이나 주의가 있으나 그 굉장한 이름에 비하면 하나도 내 철학보다 깊지 못하다 .

나는 인생이란 요컨대 먹고 자고 친구와 어울렸다 헤어졌다 하고 , 친목회나 송별연을 하고 , 눈물을 흘리고 , 웃고 , 한 주일에 한 번씩 이발을 하고 , 화분의 화초에 물을 주고 , 이웃 사람이 지붕 위에서 떨어지는 모습을 바라보고―이러는 가운데 세월은 흘러가게 마련이 다 . 이런 단순한 인생의 현상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일종의 학술적 인 잠꼬대로 꾸며대는 것은 대학교수들의 의식내용이 빈곤하거나 막연함을 감추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 그 때문에 철학은 공부할수록 인간의 일을 난해하게 하는 학문이 되어 버린다 . 그리하여 철학자는 철학에 대하여 열심히 이야기를 하는데 우리는 더욱 어렵게만 들린다 . 이것이 곧 철학의 업적이다 .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과학적 , 철학적 발견의 9 할까지는 그들이 밤중에 두시 또는 새벽 다섯 시쯤에 침대 속에서 웅크리고 자고 있을 때에 이루어진 것이다 . 그런데 이 와상술 ( 臥床術 ) 의 중요함을 의식하고 있는 사람이 별로 없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

세상에는 대낮에 자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밤에 자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 여기서 잔다 라는 말은 육체와 정신이 동시에 잠드는 것을 의미한다 . 이것은 우연히 동시에 일어나는 현상이다 . 우리가 침대에 눕는 것은 인생 최대의 즐거움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 나의 생각에 공명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 반대로 침대에 드러눕는 것을 예찬하지 않는 사람은 거짓말쟁이로 , 대낮에 자는 ( 육체적으 로나 정신적으로 ) 축들이다 . 이 낮잠을 자는 무리는 도학자요 , 유치원 선생이요 . 이솝 이야기의 독자들이다 . 그러나 와상술에 대하여 배 우라는 나의 주장에 공명하는 자는 교훈 같은 것이 포함되어 있지 않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와 같은 이야기를 애독하는 정직한 자이다 .

침대에 몸을 눕히는 정신적 , 육체적 의의는 어디에 있을까 ? 육체 적으로 말하면 침상에 누워 휴식과 안정과 명상에 가장 알맞은 자세 를 취하는 것은 외계에서 떠나 자기 혼자되려는 데 그 의도가 있다 . 그것은 실로 호사스러운 자세이다 . 위대한 인생 예술가 공자는 침대 위에 시체처럼 똑바로 몸을 뻗고 반듯이 드러눕지 않고 , 언제나 몸을 좌우 어느 한 쪽으로 움츠리고 누웠다고 한다 . 나도 이렇게 눕는 것을 인생 최대의 즐거움의 하나로 생각한다 . 그리고 심미적인 즐거 움을 최대한으로 즐기고 정신력을 활동시키려면 팔을 놓는 자리도 매우 중요하다 . 가장 이상적인 자세는 침상에 평평하게 눕는 것이 아니고 , 한 쪽 팔이나 혹은 두 쪽 팔을 머리 뒤로 돌리고 크고 부드러운 베개에 머리를 30 도 각도로 베는 자세일 것이다 . 이런 자세라면 시인은 저마다 명시를 쓸 것이요 , 철학자는 사상에 혁명을 일으킬 것이요 , 과학자는 획기적인 발견을 할 수 있을 것이다 .

독방에서 혼자 명상에 잠기는 가치를 아는 사람이 너무나 적은데 놀라지 않을 수 없다 . 와상술은 긴장된 하루의 활동을 푸는 육체적 휴식 이상의 것이다 . 즉 그것은 낮에 만난 사람들 , 찾아간 사람들 , 잡담에만 정신을 파는 친구들 , 남의 행실을 시정하여 천국에 가 는 보증인이 되려는 교회의 형제자매들―이런 사람들 덕분에 시달릴 대로 시달린 육신의 안식 이상의 것이다 . 다시 말하면 와상에 드러눕는 것은 육체를 완전히 쉬게 하는 방법이지만 거기에서 그치지 않는다는 이야기이다 .

와상술에 대하여 어느 정도 체득하고 나면 마음의 대청소를 할 수가 있다 . 아침부터 저녁때까지 분주하게 돌아다니면서 , 세 대의 탁상전화가 쉴 새 없이 울려오는 것을 자랑으로 생각하는 많은 사업 가들은 , 새벽 1 시거나 아침 7 시거나 언제든지 한 시간 동안만 눈을 뜨고 침상에서 혼자 생각에 잠기는 시간을 가지면 , 재산을 갑절 늘릴 수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 . 아침 8 시까지 침대 속에 드러누워 있다고 해도 상관없지 않느냐 말이다 . 깡통에 넣은 고급 담배를 머리맡 탁자 위에 마련해 두고 , 서서히 자리에서 일어나서 이도 닦기 전에 그 날에 처리할 문제들을 미리 해결을 지을 수 있다면 얼마 나 좋겠는가 . 갑갑하고 진저리나는 털옷이나 , 귀찮은 가죽 혁대나 , 바지 멜빵이나 , 숨 막힐 것 같은 칼라나 , 무거운 구두 등을 몸에 걸치지 않고 발가락이 마음껏 해방이 되어 한낮에는 있을 수 없는 자 유가 회복되는 아침에 잠옷 하나만 몸에 걸치고 편히 침대에 드러누 워 기다랗게 몸을 뻗기도 하고 , 움츠리기도 할 때에야말로 진짜 사업적인 머리가 잘 도는 것이다 . 발가락이 해방되어야 머리가 해방되고 , 머리가 해방되어야 생각을 제대로 할 수 있는 것이다 .

그렇게 편한 위치에 놓여 있으면 어제의 업적과 과오에 대하여 깊이 반성하여 , 앞으로 해야 할 계획 중에서 중요한 일과 사소한 일을 잘 가려낼 수 있다 . 또박또박 9 시 정각이나 , 9 시 50 분 전에 사무실에 나가 노예의 주인이나 된 것처럼 사원들을 감시하며 이른바 “악착같이” , 너절한 일에 몸과 마음을 소모하느니 자기가 할 일이 무엇인가를 분명히 파악하고 나서 10 시쯤에 사무실에 나타나는 편이 나을 것이다 . 자리 속에 한 시간쯤 잠자코 누워 있는 것은 사색가 , 발명가 , 사상가에게는 상당히 효과 있는 일이다 .

저술가는 아침부터 밤중까지 책상에 마주앉아서 억지로 머리를 짜 내느니 , 이런 평안한 자세를 취하고 있을 때가 논문이나 소설의 착상에 풍부하게 할 수 있다 . 그런 때에만 전화나 선의의 방문객이나 일상생활의 자질구레한 일에서 해방되어 , 이를테면 유리나 빌로드를 수놓은 스크린을 통하여 인생을 바라보고 현실 세계는 시적인 환상에 둘러싸여 이 세상의 광경 같지 않은 아름다움을 나타내게 되기 때문이다 . 그의 눈에 뜨이는 것은 있는 그대로의 생생한 현실이 아 니라 순식간에 예운림 ( 倪雲林 ) 이나 미불 ( 米 芾 ) 이 그린 명화처럼 진짜 화상으로 변하고 마는 것이다 .

그런데 자리 속에 누워 있으면 실제로 어떤 일이 생기는가 ! 우선 근육이 휴식을 취하게 되며 혈액순환이 한결 원활하고 규칙적으로 이루어지고 , 호흡이 한결 차분해지고 , 시 · 청 · 혈관 신경이 푹 쉬게 되며 , 어느 정도 완전한 육체적 안정을 얻게 되는 것이다 . 그러므로 이념이니 정감에 대하여 더욱 정신을 집중시킬 수 있다 . 예컨대 후각이나 청각과 같은 감각도 잠자리에 들어 있을 때에 가장 예민한 법이다 . 따라서 좋은 음악은 모름지기 누워서 들을 일이다 . 이립옹 ( 李笠翁 ) 은 『 양류 ( 湯柳 ) 』 라는 제목의 글에서 자리에 누워서 새벽에 새가 우는 소리를 들어보라고 말한 적이 있거니와 , 사실 새벽에 눈을 뜨고 아름다운 새 소리에 귀를 기울이면 거기 얼마나 아름다운 세계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지 모른다 .

 

 

2. 한 ( 閑談 ) 대하여

 

“자네와 하룻밤 이야기하는 것이 , 10 년 동안 책을 읽는 것보다 낫네 . ” 이것은 중국의 어떤 학자가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고 나서 한 말이다 . 이 말에는 많은 진리가 담겨 있다 . 오늘날 야담 ( 夜談 ) 이라는 말이 친구와 밤에 즐거운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가리키는 유행어가 되어 있다 ( 그것은 어젯밤에 주고받은 이야기든 또는 앞으로 나눌 밤의 한 담이든 관계없다 ) . 아무튼 친구와 함께 마음껏 이야기를 주고받으면서 하룻밤을 보낸다는 것은 일생을 두고 좀처럼 맛볼 수 없는 즐거움이 다 . 이립옹도 말한 바와 같이 현명한 사람이면서 구변까지 좋은 사람은 드물고 , 구변이 좋은 사람치고 현명한 사람은 보기 어려운 법 이다 . 그러므로 실제 세상의 모든 물정을 이해하고 더구나 말솜씨도 뛰어난 사람과 산 속 깊은 절간에서 우연히 만나는 일은 천문학자가 새로운 별을 발견하거나 식물학자가 새 식물을 발견했을 때처럼 , 인 생 최대의 기쁨을 맛볼 것이다 .

현대인은 사업으로 경황이 없기 때문에 벽난로를 에워싸고 크래커 통에 걸터앉아 이야기를 주고받는 화술이 날로 쇠퇴해 간다고 한탄하고 있다 . 그런데 그것은 생활이 복잡해진 데도 원인이 있지만 그보다도 가정 자체가 전과는 달리 통나무를 땔 수 있는 벽난로가 없는 아파트에서 살게 된 데 더 큰 까닭이 있다 . 그리하여 여기서부터 화술이 쇠퇴하기 시작하였으며 , 이어서 자동차의 영향이 그 쇠퇴를 크게 부채질 하였다고 본다 . 도대체가 템포 자체부터 틀린 것이다 . 다정한 친구와 청담 ( 請談 ) 을 나누려면 여유 있는 마음에서 비롯되는 안도감 , 유머 , 언어의 뉘앙스를 즐길 줄 아는 사람들 사이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 인간이 단순히 이야기를 주고받는다는 것과 , 이런 운치 있는 청담을 나눈다는 것은 분명히 다르다 . 중국어는 이 구별을 설화 ( 說話 , Speaking) 나 담화 ( 談話 , Conversation) 로 짓고 있다 . 즉 담화는 설화보다 마음이 한결 가볍고 유연한 풍치가 있으며 , 이야기의 내용도 한결 친밀하여 사무적인 데가 적은 것이 특징이다 . 또한 그 차이는 사무적인 통신과 친구 사이의 편지에서도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

사무적인 일에 대한 이야기는 상대방을 가릴 필요 없이 아무하고 도 할 수 있지만 , 밤이 새도록 환담할 수 있는 상대는 극히 드문 법이다 . 그러므로 참된 이야기 상대를 발견 하였을 때의 기분은 재미있는 작가의 작품을 읽는 즐거움 이상이라고는 할 수 없어도 거기 필적하는 것이다 . 그런데 환담의 경우는 직접 상대방의 육성을 듣고 동작을 볼 수 있는 데서 오는 즐거움이 있다 . 때로는 옛 친구들과 자리를 같이한 즐거운 연회석상에서 , 때로는 회고에 잠기는 친구들 사이에서 , 때로는 야간열차의 흡연실에서 , 또 때로는 먼 여행을 하는 숙소에서 우리는 그런 환담의 기쁨을 맛보곤 한다 . 이때 여러 가지 재미있는 이야기가 오고 가는 것이다 . 혹은 독재자나 반역자를 공박하는 통렬한 말재주에 뒤섞여 유령이나 여우 귀신의 이야기 같은 것도 튀어나올 것이다 . 그 가운데는 현재 어떤 나라에서는 이러 저러한 사태가 일어나고 있는데 목전에 도달한 정권의 전복이나 정 변의 전주곡이라고 하면서 우리에게 새로운 뉴스를 들려주는 뛰어난 식견과 안목을 가진 좌담가도 있을 것이다 . 그리하여 이러한 이야기는 평생을 두고 길이 기억에 남아 잊지 못할 것이다 .

이야기를 나누기에 가장 알맞은 때는 물론 밤이다 . 한낮에 주고받 는 이야기는 어딘가 모르게 매력이 부족하다 . 그런데 이야기를 나누 는 장소는 아무데라도 무방하다 . 문학이나 철학에 대한 유쾌한 이야 기를 즐기려면 18 세기 식으로 꾸민 살롱에서 할 수도 있고 오후의 따뜻한 햇볕을 쬐면서 어느 농장에 놓인 빈 술통에 걸터앉아서 할 수도 있다 . 혹은 이런 경우도 있을 것이다 . 즉 바람이 불어오거나 비가 오는 밤에 배를 타고 강을 내려가면서 맞은 편 기슭의 배에서 비치는 불빛이 물 위에 어른거리는 그런 분위기 속에서 사공들은 어느 여왕의 공주 때 이야기를 들려준다 . 사실 이야기의 구수한 맛은 장소나 시간이나 상대자가 그때그때 바뀌는 데 있다고 하겠다 . 그리 하여 이러한 이야기를 어느 때에는 계피 꽃이 활짝 피고 산들바람이 불어오는 달 밝은 밤과 관련시켜 회상하게 되고 , 또는 벽난로에 통나무를 지피던 캄캄한 밤에 폭우가 몰아치던 기억을 더듬으면서 연 상되기도 한다 . 또 때로는 어느 높은 누각에 자리 잡고 앉아서 멀리 강물을 따라 떠내려가는 몇 척의 작은 배를 내려다보던 일을 회상하 게 되는 수도 있을 것이다 . 그런가 하면 아침 한때를 정거장 대합실에서 보낸 것이 추억에 떠오르기도 할 것이다 . 그러한 정경들은 그 때그때 주고받은 이야기의 기억과 함께 좀처럼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는 법이다―그때 방안에 있던 사람은 불과 두서너 명이었지 . 아니 어쩌면 대여섯 명 되었을지도 몰라 . 진군은 그날 밤 술에 취했었지 . 코감기에 걸려 약간 목쉰 소리로 이야기를 했던 것 같아 . 그 때문에 그날 밤의 분위기는 더욱 좋았어 . “달이 언제나 만월일 수 없고 , 꽃이 항상 아름다울 수 없으며 , 좋은 친구들도 늘 함께 만날 수는 없는 것이다”―이것이 인생이다 . 우리가 이런 즐거움에 잠겨 있었다고 해서 신들이 질투를 하지는 않을 테지 .

좋은 이야기는 언제나 친밀감을 느끼며 읽을 수 있는 훌륭한 에세이와 같은 것이다 . 이야기의 스타일이나 내용을 보더라도 에세이 와 비슷하다 . 여우의 망령 , 날파리 , 영국인의 이상한 버릇 , 동 · 서 문화의 차이점 , 세느강 변의 고서점 , 음란한 양복점 여자직공 , 우리들의 지배인 , 정치가 , 장군들의 숨은 에피소드 , 불수감의 보존법 등등―이러한 것들은 모두 한담의 적당한 화제일 것이다 .

한담이 에세이와 가장 흡사한 점은 그 여유만만한 스타일에 있다고 생각한다 . 물론 그 이야기 가운데는 자기 나라의 비참한 모습이나 혼란 상태에 대한 비판도 있을 것이고 , 자유와 인간의 품위 또는 인간이 행복하게 살려는 목표까지도 앗아가는 포악한 정치사조 속에 문명 자체가 몰락되어 가는 오늘의 상황에 대한 비판도 있을 것이다 . 그리고 우리의 가슴을 치는 진리나 정의의 문제도 있을 터이지 만 그러한 이야기가 아무리 엄숙하고 중요한 것일지라도 이야기를 나누는 장본인들은 가벼운 마음에서 친밀한 가운데 여유 있는 태도 로 자기의 견해를 말하는 것이다 . 왜냐하면 우리가 자유의 약탈자에 게 아무리 강한 분노를 갖고 있더라도 , 문명사회에서는 입 언저리나 펜 끝에 띠운 가벼운 미소로 그 감정을 표시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 자기의 감정을 전부 폭발시켜 핏대를 올리는 말은 극히 소수의 친한 친구 사이가 아니면 입 밖에 내지 못 하는 것이다 . 그러므로 진 실로 한담을 즐기려면 멀리해야 할 사람은 빼돌리고 흉금을 열고 말 할 수 있는 친구끼리 모여 앉아 진실한 분위기 속에서 가벼운 마음으로 이야기를 주고받아야 하는 것이다 .

참된 담화와 이와는 다른 점잖은 의견 교환의 차이는 친밀감이 가는 훌륭한 에세이와 정치성명의 차이를 보면 쉽사리 알 수 있다 . 하긴 정치가의 성명 가운데도 고상한 감정이 표현된 것이 더러 있다 . 즉 민주주의에의 성의 , 봉사가의 열의 , 빈민의 행복에 대한 감 정 , 국가에 대한 충성심 , 숭고한 이상주의 , 평화에의 사랑과 다를 바 없는 국제적인 우의의 확보 , 권세에 대한 욕심이나 재물에 대한 욕심 또는 명예에 대한 욕심 같은 것은 절대로 풍기지 않는 떳떳한 태도 등등은 정치가의 고상한 정조의 발로라고 할 수 있지만 , 그럼에 도 불구하고 화려한 옷 에 짙은 화장을 한 여자처럼 좀처럼 친밀감을 느낄 수 없는 어떤 구린내가 감돌고 있다 . 이와는 반대로 진짜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거나 , 친밀한 매력을 느끼는 에세이를 읽고 있을 때에는 검소한 옷 을 입고 개천가에서 빨래를 하고 있는 시골 처녀들 을 빨래를 하고 있는 시골 처녀들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이다 . 머리 매무새는 다소 흩어지고 단추는 하나쯤 떨어져 있지만 매력적이고 친밀감과 호감을 함께 느낄 수 있다 . 이것은 바로 서양 부인들이 입 는 실내 옷 이 노리는 친밀감이 깃든 매력이요 , 언뜻 보아 아무렇게 나 꾸민 듯한 아름다움이다 . 친밀감에서 오는 이 매력이야말로 모든 즐거운 이야기와 에세이에 공통된 요소이다 .

그러므로 담화의 진정한 양식은 친밀감과 대범한 데서 온다고 하 겠다 . 한 자리에 모인 친구들은 저마다 자기의식을 잃어버리고 옷 차 림이 어떻고 이야기의 태도가 어떻고 , 재채기를 했느니 , 어디에 손 을 놓았느니 하는 자질구레한 예절 따위는 이내 잊어버리고 있는 것 이다 . 그리고 이야기가 어떤 방향으로 흐르든 개의할 것이 못 된다 . 이렇게 친한 친구들과 만나서 서로 가벼운 마음을 가질 수 있어야만 참으로 그 이야기를 즐길 수 있게 된다 . 동료의 한 사람은 곁에 놓인 테이블 위에 두 다리를 올려놓고 있으며 , 어떤 사람은 들창 가에 걸터앉아 있다 . 그런가 하면 어떤 친구는 마룻바닥에 주저앉아 소파 의 쿠션에 상반신을 기대고 있어 그 소파의 3 분의 2 가 텅 비어 있다 . 인간이란 누구나 손발부터 편하게 자세를 취해야 심장도 편히 가질 수 있다 .

“보아하니 흉허물 없는 친구뿐 , 주위에 눈에 거슬리는 위인이 하나 도 없다 . ”

이것이야말로 예술이라는 이름을 붙일 만한 담화의 요건이 갖추어 진 것이다 .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개의치 않으므로 이야기에는 순서도 방법도 없지만 그치지 않고 곧잘 이어 나간다 . 이윽고 저마다 즐거운 기분으로 작별을 하게 된다 .

위에서 말한 것이 한가와 한담의 관계이며 또한 담화와 산문의 관계이기도 하다 . 참으로 세련된 한 나라의 산문은 담화가 이미 하나의 예술의 경지에까지 발달 되었을 때 나타날 수 있다 . 이 사실은 고대 그리스의 산문이 발달해 온 자취를 뒤돌아보면 더욱 분명히 알 게 된다 .

공자가 나타난 후로 몇 세기에 걸쳐서 , 중국 사상은 발랄한 생기를 얻어 이른바 구류학파 ( 九流學派 ) 가 생기게 되었는데 , 그 원인은 주로 담론 ( 談論 ) 을 즐겨 일삼는 학자계급으로 구성된 , 교양이 높은 시대적 배경의 덕분이라고 하겠다 . 나의 이러한 주장을 밑받침하는 것에 배짱과 호탕함과 사교로 유명한 다섯 사람의 부유한 대귀족의 이야기가 있다 . 이들은 저마다 수천 명의 학자를 식객으로 두었는데 , 그 가운데 제나라의 맹상군 ( 孟嘗君 ) 이 있다 . 그는 3,000 명의 학자를 식객으로 두었다고 한다 . 이들이 전개한 갑론을박은 실로 가관이었을 것이다 .

화술이 생길 수 있는 것은 유한한 사회에 한정된 일이기는 하다 . 동시에 친밀감을 느낄 수 있는 훌륭한 에세이가 나타나는 것도 화술이 존재하는 경우에 국한된다 . 대체로 화술과 훌륭한 산문의 기술은 개화된 인류 역사상 뒤늦게 발달한 것이 사실이다 . 왜냐하면 인간정 신은 어느 정도 감정이 섬세해지고 경쾌해지도록 발달하지 못 하면 육성되지 않는 것인데 , 그것은 다 한적한 생활에서만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

오늘날 공산주의자의 입장에서 보면 한가한 시간을 즐긴다는 것은 가증스러운 유한계급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것으로 , 그 자체가 반혁명적임은 나도 잘 알고 있다 . 그러나 공산주의나 사회주의가 추구하 는 목적은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한가한 시간을 즐기도록 하는 데 있다고 나는 확신한다 . 그러므로 한가한 시간을 즐기는 것이 결코 죄악이 될 리 만무한 것이다 . 아니 죄가 되기는커녕 문화의 진보는 한가한 시간을 현명하게 이용하는 데 달려 있다고 할 수 있으며 , 담화란 그 하나의 형식에 지나지 않는다 . 하루종일 바쁘기만 하다가 저녁 식사를 마치기가 무섭게 잠들어 소처럼 쿨쿨 코를 고는 실업가 따위는 아마도 문화의 발달에 아무런 이바지도 하지 못 할 것이다 .

이런 한가한 시간은 억지로 만드는 수도 있지만 한편 요구한다고 해서 쉽게 얻어지는 것은 아니다 . 빛나는 앞날이 기대되는 문학적인 천재가 아무 쓸데없는 집회에 자주 드나들고 , 시사문제에 대한 논문을 쓰기에 정력을 낭비하고 있는 모습을 목격하면 그를 구제하는 가 장 좋은 방법으로 감옥에 집어넣는 일을 생각하게 된다 . 문왕 ( 文王 ) 이 인생의 변화를 논한 철학의 고전인 『 역경 ( 易經 ) 』을 쓴 것이나 사 마천 ( 司馬遷 ) 이 한문으로 쓴 가장 뛰어난 역사서인 『 사기 ( 史記 ) 』 를 쓴 것은 모두가 감옥에서였던 것이다 .

문인이 정치적 야심이 무너졌을 때 , 또는 정계의 정세가 너무나 비관적일 경우에 문학과 미술의 걸작이 나타날 수가 있다 . 몽고가 중국에 군림하였을 때 , 원나라에 위대한 화가와 희곡가가 많이 배출되었으며 , 만주인이 중국을 정복한 초기에 석도 ( 石濤 ) 나 팔대산인 ( 八大山人 ) 과 같은 위대한 화가가 나타난 이유가 거기에 있다 . 이민족의 지배하에 놓이면 애국심이 극도의 굴욕감을 느껴 , 예술과 학문에 전 력을 기울이게 되었던 것이다 . 석도는 주지하는 바와 같이 중국에서 으뜸가는 대가이지만 그 이름이 널리 유럽에까지 알려지지 않은 것 은 하나의 우연이기도 하며 청조 ( 淸朝 ) 의 역대 황제들이 자기네 통치 에 복종치 않는 예술가들의 작품을 인정하지 않은 데도 그 원인이 있다 .

과거에 떨어진 위대한 문인들은 그 정력을 오직 창작의 길로 쏟 기 시작하였다 . 『 수호전 ( 水滸傳 ) 』 을 쓴 시내암 ( 施耐庵 ) 이나 『 요제지이 ( 聊齊志異 ) 』 를 쓴 포류선 ( 浦留仙 ) 의 경우가 그 좋은 보기이다 .

『수호전』 가운데는 역시 시내암의 글로 전해지는 머리말에 친구와 함께 한담하는 즐거움에 대하여 언급한 이런 유쾌한 대목이 있다 .

 

우리 집에 친구들이 다 모이면 열여섯 명인데 한 사람도 빠지지 않고 다 모이는 경우는 거의 없다 . 그러나 비가 오거나 폭풍우가 휘몰아치지 않는 한 , 한 사람도 찾아오지 않는다는 것도 거의 있을 수 없는 일이다 . 보통 6, 7 명의 친구가 우리 집에 모이는데 그들은 집에 오자마자 곧 술을 마시거나 하는 일은 별로 없다 .

마시고 싶으면 서서히 목을 축이지만 , 싫어지면 그만이다 . 즐거움은 술잔을 비우는 데 있는 게 아니라 친구들끼리 이야기를 나누는 데 있기 때문이다 . 그렇다고 무슨 궁정 정치의 이야기를 주고받는 것은 아니다 . 그런 이야기는 우리 격에 맞지 않기도 하지만 , 이처럼 서울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곳에서는 대부분의 소식이 소문에 근거를 두고 있으니 그럴 수밖에 없기도 하다 . 한두 다리 건너서 귀에 들려오는 소식이 대부분이다 . 뜬 풍설에 불과하며 , 그런 풍설을 가지고는 떠든다는 것은 힘의 낭비인 것이다 . 그리고 우리는 남의 잘못은 일절 입에 담지 않는다 . 그들에게 큰 실수가 있는 것이 아니므로 탓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 또한 우리는 세상 사람들에게 어떤 충격을 주려고 이야기를 주고받는 것도 아니다 . 그러므로 아무도 충격을 받지 않는 다 . 그러나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을 남들이 알아주기를 바라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 그것은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니다 . 우리의 이야기는 인간의 마음속에 깊이 숨어 있는 그런 것이므로 살기에 바쁜 세상 사람들이 귀를 기울여 줄 수도 없는 것이다 .

 

시내암의 대작은 실로 이런 정서적인 분위기 속에서 나왔으니 , 그것은 실로 한가한 시간을 즐긴 선물이라고 할 수 있다 . 고대 그리스에서 산문이 발달된 것도 이런 사회적인 배경이 있었기 때문이다 . 그리스 사상이 밝고 순수할 뿐더러 명쾌한 산문으로 표현된 것은 분명히 한담술 ( 閑談術 ) 에서 온 것이라고 본다 . 그것은 플라톤의 『 대화편』이라는 표제만 보아도 충분히 짐작이 간다 . 『 향연』을 보면 그리스 철학자들은 한동안 땅바닥에 비스듬히 드러누워서 미소년들 에게 에워싸여 술과 과일을 나누면서 즐겁게 이야기를 주고받았던 것이다 .

그들의 사상이 맑고 순수하며 문장이 매우 명쾌한 것은 화술의 수련을 쌓았기 때문이다 . 아카데믹하고 현학적인 오늘의 거만한 문체와 비교해 보라 . 얼마나 뚜렷한 대조를 이루고 있느냐 말이다 . 고대의 그리스인들은 분명히 철학적인 화제를 가벼운 마음으로 다루는 법을 알고 있었다 . 그들의 매력적인 환담의 분위기며 , 이야기를 좋아하는 기풍 , 또한 상대방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태도가 어떠했는가는 『 페드러스』의 머리말에 아름다운 필치로 묘사되어 있다 . 이 글을 읽으면 고대 그리스에서 산문이 발달된 이유를 잘 알 수가 있다 .

플라톤이 쓴 『 공화국』만 보더라도 오늘의 저술가라면 으레 쓸 법 한 말 , 즉 “ 그 발전의 연속적인 단계를 통하여 본 인류문명은 이질에서 동질로 지향하는 역학적인 운동이다” 하는 식의 알 수 없는 잠꼬대 같은 말로 시작되어 있지 않다 . 그 대신 다음과 같은 명쾌한 문장이 서두에 나온다 . “어제 나는 아리스토의 아들 글로코와 함께 여신을 참배하기 위해 피레우스를 찾아갔었다 . 나는 시민들이 어떤 모양으로 제전을 축하하는지 보고 싶었다 . 이런 제전은 처음 보기 때문이다 . ”

사색이 가장 활발하고 왕성했던 고대 중국 철학자들 사이에 조성된 분위기가 위대한 비극작가는 동시에 “ 위대한 희극작가라야 하느 냐 ? 아니면 그래서는 안 되느냐 ? ”와 같은 문제를 놓고 따지는 그리스 사람들 사이에도 있었던 것이다 . 그것은 『 향연』에 묘사되어 있는 바와 같다 . 거기에는 진지성과 명랑성이 뒤섞인 분위기가 감돌아 실로 경쾌하고 친밀한 대화가 이루어지고 있다 . 한 자리에 참석한 사 람들은 소크라테스가 술을 마시는 모양을 놀리지만 , 그는 태연스럽 게 기분 내키는 대로 술잔을 비운다 . 손수 따라 마시므로 남의 신세 를 질 필요가 없다 . 그들은 아리스토텔레스와 아가톤을 제외하고는 밤이 새도록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다 . 소크라테스는 좌중의 여러 사람들에게 잠자리에 들도록 권하고 마지막에 혼자 남게 되자 연회석 상을 떠나 아침 목욕을 하려 리세움으로 간다 . 그리하여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상쾌한 마음으로 그날 하루를 보내는 것이다 . 그리스 철 학은 이런 친근감이 감도는 환담을 나눌 수 있는 분위기 속에서 태어났던 것이다 .

교양이 풍부한 담화를 하는데 필요한 부드러운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해 여성이 한몫 낄 필요가 있다 . 이 부드러운 분위기 자체가 환담의 요소가 되는 것이다 . 가끔 실없는 소리도 하고 너털웃음도 터져 나와야지 그렇지 않으면 이야기는 딱딱해지고 , 따라서 철학적인 내용도 인생과 인연이 없는 김빠진 것이 되어 버린다 . 어느 나라 , 어 느 시대를 막론하고 생활에 흥미를 가진 문화를 지녔을 때에는 언제나 사교석상에서 여성을 환영하였던 것이다 . 페리클레스 시대의 아 젠스에서도 그랬고 , 18 세기의 프랑스 살롱에서도 그러했다 . 남녀가 자리를 함께 하는 것을 금한 중국에서까지도 남자 학자들은 말벗이 되는 여성들의 참석을 바라고 있었다 . 화술이 세련되어 세상에 알려 진 금 , 송 , 명의 3 대에 있어서는 사도온 ( 師道 韞 ) , 조운 ( 朝雲 ) , 유여시 ( 柳如是 ), 그밖에 많은 재원들이 배출되었다 . 중국의 남성들은 아내 가 정숙하여 남의 남자에게 얼굴을 보이지 않을 것을 요구하면서도 , 한편 재질이 풍부한 여성들과 함께 즐기고 싶은 심정을 버리지 않았었다 . 중국 문학자는 결국 직업적인 창녀의 생활과 깊은 관계가 있는 것이다 .

이야기를 주고받는 자리에 여성들의 매력을 가미하고 싶은 마음은 누구나 갖고 있다 . 나는 전에 몇몇 독일 부인들과 만난 적이 있는데 , 그녀들은 오후 5 시부터 밤 11 시까지 계속해서 이야기를 지껄이는 것이었다 . 그 후 영국과 미국에서 내가 아무리 애써도 공부할 흥미가 나지 않던 경제학에 밝은 부인들과 만나 어리둥절해진 적이 있 다 . 마르크스나 엥겔스를 논하고 있는 여성은 덮어두더라도 남의 말 을 잘 알아들을 줄 알고 상냥하며 , 생각이 깊은 부인들이 몇 사람 끼면 이야기는 언제나 기분 좋은 자극을 받게 된다 . 나는 벽창호 같은 남자와 이야기를 할 때보다도 그 편이 훨씬 즐거웠다 .

 

 

3. 차 에 대하여

 

인류문화에 있어서 우리들의 행복에 가장 이바지하는 것은 담배와 술과 차이며 인류역사상 이 세 가지보다 더 큰 발명은 없다고 본다 . 우리가 여가와 우정 , 사교 , 한담을 즐기는 마당에 있어서 아닌 게 아 니라 이만큼 소중하고 유효한 것은 없다 . 이 세 가지는 공통된 특징을 갖고 있다 . 첫째로 우리에게 유용하며 , 둘째로 다른 음식처럼 위에 가득차지 않으므로 식간에 즐길 수 있고 , 셋째로 후각을 통하여 즐길 수 있는 점이다 . 이 셋은 문화에 실로 커다란 영향을 끼치고 있 다 . 식당차 곁에는 으레 흡연실이 마련되어 있으며 , 세상에는 레스토 랑이나 주점이나 다방이 얼마나 많은가 말이다 . 적어도 중국과 영국 에서는 차를 마시는 일이 하나의 사회제도가 되어 있는 것이다 .

그런데 여가와 우정과 사교의 분위기가 마련되어 있지 않으면 담배와 술과 차는 참으로 즐길 수 없는 것이다 . 이 셋을 충분히 즐기려면 우의를 이해하고 남과 어울리기를 좋아하며 본래 한적한 생활을 사랑하는 사람이라야 하는 법이다 . 이 셋은 사교성의 요소를 제외하면 무의미하게 된다 . 그러므로 이 셋을 즐기려면 달과 눈과 꽃을 즐길 때처럼 뜻이 맞는 상대가 있어야 한다 .

중국의 생활 예술가들이 때때로 역설하는 것은 이 점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 어떤 종류의 꽃은 어떤 종류에 속한 사람들이 아니고서는 더불어 즐길 수 없는 법이다 . 어떤 종류의 경치는 어떤 종류에 속한 여성들을 머릿속에 그려보게 마련이다 . 빗소리를 참으로 즐기려면 한여름 깊은 산 중의 절간에서 참대 침대에 몸을 기대고 듣지 않고 서는 불가능하다 . 매사에 기분이라는 것이 소중하기 때문이다 . 모든 사물에는 각각 독특한 기분이 있다 . 그러므로 상대방을 고르지 않으 면 그 기분을 완전히 잡쳐 버리는 것이다 . 어쨌든 생활을 논하는 예술가로서 생활을 즐기는 법을 배우려면 뜻이 맞는 친구를 발견하는 것이 우선 절대적인 요건이다 . 그리고 그 우정을 오래 지속시키기 위해서는 온갖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 즉 아내가 남편의 사랑 을 유지하기 위해 고심하며 , 장기의 명수가 천 리 길을 멀다 않고 동료를 찾아가는 것과 같은 노력이 필요한 것이다 .

분위기란 이렇듯 소중한 것이다 . 그러므로 학자의 서재와 생활을 즐기려는 일반적인 환경을 분명히 이해해야 할 것이다 . 우선 즐거움 을 함께 누리려는 그룹이 이루어져야 하는데 그 즐거움의 종류가 다 르면 , 이에 따라서 친구도 달라져야 한다 . 공부만 하며 늘 어두운 얼굴을 하고 있는 친구와 함께 승마하러 간다는 것은 음악을 모르는 친구와 함께 음악회에 가는 것과 같은 것으로 무모한 일이다 . 그러므로 중국의 한 문인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

 

꽃을 즐기려면 생활감정이 풍부한 친구가 있어야 하고 , 청루 ( 靑樓 ) 에 가기 ( 歌妓 ) 의 얼굴을 보러 가려면 풍류를 아는 친구와 같이 가야한다 . 높은 산에 오르려면 낭만적인 친구와 함께 가야하고 뱃놀이를 하려면 호탕한 친구와 함께 가야 한다 . 달을 감상하려면 냉철한 철학 을 가진 친구를 택해야 하고 , 눈을 구경하려면 멋진 친구가 있어야 하고 , 주석에는 정취와 매력이 있는 친구와 함께 가야 한다 .

 

 

차는 지상의 청순의 상징이다 . 그리하여 적차 ( 摘茶 ), 제차 ( 製茶 ), 보존 , 그리고 마시기에 이르기까지 청순이 강조되어 기름기가 있는 손이 찻잔이나 잎사귀에 닿으면 , 일체의 노고가 순식간에 헛것이 되 어 버린다 . 그러므로 차를 즐기려면 모든 허식이나 호사한 요소가 눈이나 마음속에서 사라져 버린 맑은 분위기라야 한다 . 가기 ( 歌妓 ) 의 즐거움은 술이 있어야 느낄 수 있으며 , 따라서 차를 마시며 기생과 희롱하는 자는 없다 . 그러나 자기와 함께 차를 마셔도 좋다고 생각 되는 경우에 그녀들은 이미 중국의 시인이나 학자들이 애호하는 축 에 들어 있다 . 일찍이 소동파는 차를 아름다운 처녀에 비교하였지만 , 후세의 비평가로 『 다천소품 ( 茶泉小品 ) 』 의 저자 전예형 ( 田藝衡 ) 은 차를 여자에게 비유하려면 마고선녀 ( 麻姑仙女 ) 밖에 없다고 하였다 . 그는 “얼굴이 아름답고 허리가 가느다란 미인은 깊은 안방에 거처해야 하며 , 바위나 샘을 더럽혀서는 안 된다”라고 하여 소동파 말의 참뜻을 분명히 하였다 . 그것은 이 필자의 주장에도 “ 사람들이 차를 마시는 것은 세속의 시끄러움을 잊기 위해서이며 , 차는 미의미식 ( 美衣美食 ) 하는 사람들의 것이 아닌 것”이기 때문이다 .

『 다록 ( 茶錄 ) 』 에 의하면 , “ 차를 즐기는 취미의 참뜻은 그 색채와 향 기와 풍미를 맛보려고 즐기는 데 있으며 , 차를 조제하는 원칙은 맑고 건조하고 깨끗이 하는 데 있다 . ” 그러므로 이런 차의 성질을 맛보고 즐기려면 고요라는 요소가 필요하다 . 차의 감상력은 “ 냉철한 머리로 작열 ( 灼熱 ) 한 세계를 볼 수 있는” 사람이 갖는 힘이라고 할 수 있다 .

송대 이후 다도의 전문가들은 한 잔의 박차 ( 薄茶 ) 로서 지미 ( 至味 ) 를 삼는다고 하였는데 아닌 게 아니라 박차가 지닌 섬세한 풍미는 생각 이 번거롭거나 주위가 소란스럽거나 하인들이 말다툼을 하거나 또는 얼굴이 미운 여자가 시중을 들려고 오거나 하면 맛볼 엄두도 갖지 못 한 채 , 경황이 없이 쭉 들이키기 쉬운 것이다 . 그리고 차를 함께 마시는 사람의 수도 적어야 한다 . 즉 손님이 적어야 하는 것이다 .

손님들이 많아서 떠들썩하게 되면 차가 풍기는 고상한 매력을 잃 게 된다 . 혼자 차를 마시면 속세를 떠났다는 말을 듣게 되고 , 둘이서 마시면 한적하다고 하며 , 셋 혹은 넷이서 마시게 되면 유쾌하다 고 하고 , 대 여섯이서 마시게 되면 저속하다는 소리를 듣게 되며 , 예닐곱 명이 함께 마시면 경멸하는 의미에서 “ 박애 ( 博愛 ) ” 라고 말한 다 . 그리고 『 다소 ( 茶疏 ) 』 의 저자가 말하는 바에 의하면 커다란 차 주전자에서 계속해서 몇 번이고 따라 마시거나 , 단숨에 꿀꺽 마셔 버리거나 , 좀 있다가 다시 데우거나 , 독한 차를 마시는 따위는 심한 노동을 하고 나서 배를 채우려고 차를 마시는 농부나 직공들이 하는 것이다 . 그렇게 하여서는 차를 마시는 풍미를 맛볼 수 없다 .

다도를 깨친 자라면 손수 차를 달이는 것을 커다란 즐거움으로 여기는 법이다 . 일본의 다도처럼 까다로운 예법으로 발달되지 않는 다면 차를 달여 마신다는 것은 언제나 즐거운 일인 동시에 침착하고 고아 ( 高雅 ) 한 정신을 사랑하는 일이기도 하다 . 일본의 다도는 일본인 처럼 잗달다 . 수박씨를 이빨 사이에 넣고 깨무는 것이 먹는 즐거움 의 절반을 차지하는 것처럼 차를 달인다는 것은 차를 마시는 즐거움의 절반을 차지하는 것이다 .

참으로 차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심정을 말하면 차 도구를 손으로 어루만지는 기쁨도 대단한 법이다 . 예컨대 채양 ( 蔡襄 ) 과 같이 늙어서 차를 마시지 못 하게 된 후에도 , 종전의 인습대로 차를 달이는 것을 낙으로 삼은 사람도 있었던 것이다 . 그리고 주온복 ( 周溫復 ) 이라는 학 자는 언제나 새벽부터 밤중까지 하루에 여섯 번씩 일정한 시간에 차 를 달여 마셨으며 , 차병 ( 茶甁 ) 을 극진히 사랑하여 죽을 때까지 관 속에 함께 넣도록 한 사람도 있었다 .

다도의 기술은 다음과 같이 몇 가지 요소를 들 수 있다 .

1.   차는 무엇보다도 냄새를 타기 쉬우므로 되도록 깨끗이 취급하여 술이나 향 , 그밖에 냄새나는 것을 취급하는 사람들을 멀리 떼어 놓아야 한다 .

2.   차는 서늘하고 건전한 곳에 보관할 것―장마철에는 그때그때 쓸 것을 작은 항아리에 적당히 갈라서 넣어두어야 한다 . 이때 사용할 작은 항아리로는 백납제 ( 白蠟製 ) 가 제일 좋다 . 그리고 큰 항아리에 저장해둔 차는 필요한 경우 이외에는 뚜껑을 열어 서는 안 된다 . 항아리에 넣어둔 차에 곰팡이가 슬었을 경우에는 차 잎사귀가 누렇게 퇴색하는 것을 막기 위하여 불에 약간 쬐면서 쉴 새 없이 부채질을 한다 .

3.   차를 잘 달이는 기술의 절반은 질이 좋은 맑은 물을 구하는 데 있다 . 산에서 나는 샘물이 가장 좋으며 , 강물이 그 다음이고 , 우물물이 세 번째라고 한다 . 용두 ( 龍頭 ) 에서 나오는 물도 제방에 고인 물이라면 사실은 산골짜기를 흐르는 물이므로 그것도 좋다 .

4.   진기한 찻잔을 감상하려는 친구들과 자리를 같이 한다 . 그러나 너무 많이 한꺼번에 모여 앉아서는 안 된다 .

5.   차의 색깔은 보통 엷은 황금색이 좋으며 , 다갈색 차는 우유나 레몬 , 박하 , 그 밖의 무엇이든 쓴 맛을 죽일 수 있는 것을 섞어서 마신다 .

6.   좋은 차에는 뒷맛이 있는 것이다 . 그것은 마시고 나서 30 초쯤 지났을 무렵에 화학적 요소가 타선 ( 唾腺 ) 에 작용하는 시간이 지 났을 때 느끼는 맛이다 .

7.   차는 신선한 것을 섞어서 곧 마시며 맛 좋은 차를 마시고 싶거든 한번 따르고 나서 남은 차를 너무 오래 차 주전자에 넣어 두지 않는다 .

8.   차는 방금 길어온 물로 달인다 .

9.   혼합물은 일체 금물이다 . 다만 어떤 종류의 외국산 향료를 약간 섞어서 달이는 취미가 있는 사람이라면 그 기호가 다른 점을 인정한다 .

10.   좋은 차의 향기는 갓난애의 살결에서 풍기는 연한 향기이다 .

 

차에 대한 훌륭한 평이 실려 있는 『다소 ( 茶疏 ) 』 는 사물을 즐기기에 알맞은 때와 환경을 규정짓는 중국의 관습에 따라서 다음과 같이 말 하고 있다 .

 

차를 마시기에 알맞은 때

마음과 손이 다 같이 한가할 때 ,

시를 읽고 피곤을 느꼈을 때 ,

생각이 어수선할 때 ,

노래를 듣고 있을 때 ,

노래가 끝났을 때 ,

휴일에 집에서 쉴 때 ,

거문고를 타고 그림을 볼 때 ,

밤에 이야기를 나눌 때 ,

밝은 창가의 깨끗한 책상에 마주앉았을 때 ,

미모의 친구나 아름다운 애첩이 곁에 있을 때 ,

친구를 방문하고 집에 돌아왔을 때 ,

하늘이 맑고 산들바람이 불어올 때 ,

가벼운 소나기가 내리는 날 ,

조그마한 나무다리 아래 떠 있는 단장한 배 안 ,

높게 하늘로 뻗은 참대 밭 속 ,

한여름에 연꽃을 한눈으로 내려다 볼 수 있는 누각 위 ,

작은 서재에서 향을 피울 때 ,

연회가 끝나고 손님이 집에 돌아간 뒤 ,

아이들이 학교에 간 뒤 ,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한적한 절에서 ,

맑은 샘물이 흐르고 묘한 바위가 솟은 근처 .

 

차를 마셔서는 안 될 때

일 할 때 ,

영화를 볼 때 ,

편지를 읽을 때 ,

비가 억수로 퍼붓거나 눈이 내릴 때 ,

손님들이 많이 모인 술좌석 ,

옛 서류 같은 것을 살펴볼 때 ,

분주한 날 ,

대체로 앞에 열거한 사항과 반대될 경우 .

 

차에 있어서의 금기

나쁜 물 ,

흉한 기구 ,

놋숟가락 ,

놋가마

나무로 만든 수통 ( 水桶 ) ―급수용 ( 汲水用 )

나무를 때서 달이는 것―연기가 나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

연한 숲 ,

단정치 못 한 심부름꾼 ,

성미가 금한 식모 ,

불결한 행주 ,

모든 향과 약 .

 

멀리 해야 할 물건과 장소

습기 찬 방 ,

부엌 ,

시끄러운 행길 ,

우는 어린애 ,

성미가 급한 사람들 ,

싸움하는 하인 ,

더운 방 .

 

 

4. 담 배에 대하여

 

오늘의 세계는 담배를 피우는 사람과 피우지 않는 사람으로 양분 되어 있다 . 전자가 후자에게 좀 폐를 끼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 이것은 어디까지나 육체적인 것이다 . 그런데 후자가 전자에 끼치는 폐는 정신적인 것이다 . 물론 담배를 피우는 사람에게 간섭하려고 들 지 않는 금연가도 많다 . 그리고 아내가 남편의 침대 속에서 담배연기를 참아 내도록 단련을 시킬 수도 있는 것이다 . 이것은 결혼생활 이 행복하다는 확실한 증거이다 . 그러나 금연가가 인류 최대의 쾌락 의 하나를 잃고 있는 줄도 모르고 , 금연을 도덕적으로 자랑할 만한 것처럼 터무니없는 생각을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 담배를 피우는 것 이 도덕적으로 약점이 된다는 것을 나도 긍정한다 . 그러나 이런 약점이 없는 사람은 우리가 조심스럽게 대해야 할 것이다 . 약점이 없는 사람은 믿을 수 없기 때문이다 . 그들은 언제나 지나치게 냉정해 실수를 하는 법이 없다 . 그들의 습관은 대체로 규칙적이다 . 즉 그들은 담배를 피우는 사람보다 생활이 기계적이며 언제나 이성이 감정을 지배하고 있다 . 나는 이성적인 사람은 좋아하지만 이성인은 딱 질색이다 . 그러므로 재떨이가 없는 집에 찾아가면 언제나 마음이 초 조하고 불안스럽다 . 방안은 대체로 지나치게 깨끗하게 정돈되어 있다 . 방석은 일정한 곳에 놓여 있고 가족들은 옷 을 단정하게 입고 있으나 따뜻한 인정미는 찾아볼 수 없다 . 이렇게 되면 나는 딱딱한 손님의 자세를 풀 수 없다 . 그것은 물론 불쾌한 짓이다 .

이렇게 근엄하기 이를 데 없는 도덕가들은 모든 일에 감동을 잃 고 시적인 정서를 이해하지 못 한다 . 더구나 담배를 피움으로써 얻는 도덕적 , 정신적인 이득을 감상한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다 . 그런데 우리네 담배 피우는 사람들이 비난을 받는 것은 예술적인 면 이 아니라 분명히 도덕적인 면이다 . 그러므로 담배를 피우는 사람으로서 금연가보다도 더 높은 수준에 있는 도덕을 위해 한 마디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

파이프를 입에 물고 있는 사람은 내 비위에 맞는다 . 그때의 흡연 가는 한결 명랑하고 사교적이고 흉허물 없는 태도를 보여주며 , 때로는 이야기에 재치가 넘치기도 한다 . 아무튼 이쪽이 그렇게 생각하듯 이 저쪽도 나에게 호감을 갖고 있다는 느낌을 갖게 한다 . “파이프는 철학자의 입술에서 지혜를 짜내며 , 어리석은 자의 입을 닫히게 한다 . 파이프는 명상적이며 , 생각이 깊고 인자하며 , 허식 없는 좌담을 하 게 한다 . ” 나는 이렇게 말한 새커리의 의견에 전적으로 찬동하는 바이다 .

담배를 피우는 사람의 손들은 대체로 더럽혀져 있지만 , 마음만 정 다우면 그런 것쯤 문제가 될 수 없다 . 어쨌든 명상적이고 , 생각이 깊고 , 친밀하고 , 허세를 부리지 않는 좌담이란 그리 흔치 않으므로 , 그런 즐거움을 맛보기 위해서라면 누구나 값비싼 희생을 치루는 것도 서슴지 않게 된다 . 그리고 중요한 것은 파이프를 입에 문 사람은 언제나 행복하며 , 행복은 결국 도덕적인 가치 가운데서 가장 뛰어난 것이라는 사실이다 . “여송연을 피우는 사람 가운데는 마음이 옹색한 자가 없다 . ” 이것은 W. 매긴의 말이다 .

파이프 담배를 즐겨 피우는 사람은 절대로 아내와 다투지 않는다는 말이 있는데 이것은 명언이다 . 왜냐하면 파이프를 입에 물고 큰 소리로 아내에게 야단을 칠 수는 없기 때문이다 . 그런 재주를 부리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찾아볼 수 없다 . 파이프를 입에 물고 있으면 나지막한 목소리로 이야기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 흡연가인 남편이 화를 내었을 때에 일어나는 현상은 대뜸 담배나 파이프에 불을 붙이 고 불쾌한 얼굴을 하는 것이다 . 그러나 그런 표정은 오래 가지 못 한다 . 그의 감정은 이미 발산할 데를 찾고 있기 때문이다 . 그는 자기 가 분개하였거나 모욕을 느낀 데 대하여 언제까지나 성난 얼굴을 하 고 있으려고 하여도 그것이 계속되지 않는 법이다 . 파이프에서 조용히 피어오르는 담배 연기가 사뭇 기분이 좋아 마음을 가라앉혀 주므로 , 그동안에 울적했던 노여움이 한번 연기를 내뿜을 적마다 새어나가는 듯이 생각되는 것이다 . 그러므로 현명한 아내는 부화를 터뜨리려는 남편의 기미를 알아차리면 곧 상냥하게 그 입에 파이프를 물려 주면서 “ 자 , 이제 그런 일 따위는 빨리 잊어버리세요” 하고 말하는 것이 상책이다 . 이 공식은 언제나 효과를 거두게 마련이다 . 아내가 실패하는 경우는 있어도 파이프가 실패하는 경우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

 

 

5. 술에 대하여

 

나는 술을 잘 마시지 못 하므로 술에 대하여 말할 자격은 없다 . 내 주량은 고작 쌀로 빚은 소흥주 석 잔 정도이고 , 맥주도 겨우 한 잔으로 완전히 취해 버린다 . 이것은 분명히 하나의 천성으로 , 차를 좋아하고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우는 것은 골고루 병행할 수 없나 보다 . 술을 잘 마시는 친구들 중에는 여송연을 반 대도 빨지 않았는데 머리가 핑 돌며 기분이 나빠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 반대로 눈을 뜨고 있는 동안은 하루 종일 계속해서 담배를 입에 물고 있어도 아무렇지 않은 사람도 있다 . 그런데 주량은 형편이 없다 .

일찍이 이립옹은 말하기를 차를 굉장히 즐기는 사람은 술을 좋아하지 않으며 , 술을 굉장히 많이 마시는 사람은 차를 즐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 그도 차를 굉장히 즐겼었다 . 그리하여 자기가 술꾼다운 태도를 남에게 보인 적이 한 번도 없다고 고백하였던 것이다 . 이밖 에도 내가 좋아하는 중국의 훌륭한 문인으로서 술을 잘 마시지 못 한 다고 솔직하게 고백하는 사람이 많다 . 이것은 나에게 커다란 기쁨이 요 , 위안이 아닐 수 없다 . 나는 상당한 시간을 들여서 그들의 편지와 그 밖의 글에서 이런 고백들을 찾아보았다 . 이립옹도 그 중의 한 사람이다 . 이밖에 원매 ( 袁枚 ) , 왕어양 ( 王漁洋 ) , 원중랑 ( 袁中郎 )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 그런데 이들은 저마다 술을 많이 못 하지만 , 취하는 기분만은 이해하고 있었다 .

나는 술 이야기를 할 자격은 없지만 , 이 제목은 무시할 수 없다 . 술은 어느 무엇보다도 문학에 커다란 공헌을 하였기 때문이다 . 마찬 가지로 담배를 피우는 풍습이 생긴 후로 흡연은 인간의 창조력을 북 돋아 주는데 상당한 공헌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 술을 마시는 즐거움 , 특히 중국문학작품에 자주 나오는 소위 “ 얼큰히 취하는” 즐거움은 나에게 언제나 신비롭기만 한데 , 누가 상해의 어느 미인이 얼큰 히 취한 상태에서 이른바 미훈 ( 微 醺 , 술냄새를 약간 풍김 ) 의 공덕을 예찬하는 말을 들은 연후에야 나도 납득이 가는 것이었다 . 그녀는 말하였다 . “나는 술에 얼큰히 취하여 이렇게 지껄이고 있어요 . 이때가 제일 행복해요 . ” 아닌 게 아니라 술에 얼큰히 취하여 기분이 거 나할 때에는 누구나 의기양양하여 어떤 어려움도 정복할 만한 자신 을 갖게 되며 , 감수성이 매우 예민해지고 , 현실과 꿈 사이에 위치한 창조적인 사고능력은 어느 때보다 더욱 활발해지는 것 같다 . 그리고 이런 창조적인 심경에 도달할 때 필요한 자신과 해방감이 생기는 것 같다 . 이 자신에 가득 찬 심정과 단순한 규칙이나 기술에서 해방되 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가는 예술부문에 종사하게 되면 분명히 알 수 있다 .

오늘날 서구의 독재자들은 술을 마시지 않는다 . 그러므로 인류에 게 매우 위험한 존재라는 주장에는 충분한 이유가 있다 . 나는 얼마 전에 문학지를 읽는 중에 1937 년 6 월호의 하퍼지에서 찰스 퍼거 슨 씨가 쓴 < 독재자는 모두 금주가 > 라는 글을 보았는데 그처럼 멋 있고 자상하고 기지에 찬 글은 일찍이 본 적이 없었다 . 그의 사고방 식은 배울 만한 데가 있었으며 문장도 상당히 훌륭하여 전문을 인용 하고 싶으나 그렇게 할 수 없는 것이 유감이다 .

그는 이렇게 자기 생각을 피력하고 있다 . “ 스탈린 , 히틀러 , 무솔리니는 근엄한 인간의 전형이다 . … 히틀러는 육식을 하지 않으며 술을 마시지 않고 담배도 피우지 않는다 . 그는 부자유의 미덕에 또 하나 금욕이라는 미덕을 겸하고 있다 . 무솔리니는 식성이 썩 좋으나 알코 올음료만은 완강하게 멀리하고 있다 . 간혹 포도주나 한 잔 입에 댈 뿐 , 보기가 쑥스러울 지경이다 . 그 정도의 포도주로는 열등인종을 정복하려는 중대한 문제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 할 것이다 . 스탈 린은 방이 셋 있는 아파트에서 검소한 생활을 하고 있다 . 그리고 눈에 잘 뜨이지 않는 보잘 것 없는 옷 을 입고 엄청난 조식 ( 租食 ) 을 하며 , 마치 술 감정가나 되는 듯이 브랜디를 조금씩 맛볼 뿐이다 . 문 제는 이러한 사실들이 무엇을 의미하느냐에 있다 . 그로 인하여 우리 는 본래부터 독선가인 소수의 사람들 , 즉 가련할 정도로 고집이 강하며 , 무서울 만큼 근엄한 얼굴을 하고 있는 사람들의 지배를 받고 있는 것이다 . 그러므로 그들이 곧잘 술에 취해 녹초가 되게 하지 않으면 정말 위험천만이어서 , 세계는 구제될 길이 없는 것이다 . ”

내가 독재자를 좋아하지 않는 것은 그들이 비인간적이기 때문이다 . 비인간적인 것은 좌우간 덜 좋다 . 비인간적인 종교는 종교가 아니며 비인간적인 정치는 우열한 정치이다 . 비인간적인 예술은 열등한 예술이고 비인간적인 생활태도는 짐승의 생활태도이다 . 이 인간성은 보편적인 것이어서 생활의 모든 부문 , 모든 사상 체계에 적용될 수 있다 . 인간이 지닐 수 있는 최고의 이상은 도덕적 진열장이 되는 데 있지 않고 따스하고 사랑할 만하고 쓴 맛 단 맛을 잘 분간 하는 인간이 되는 데 있다 .

중국인이 술을 마시는 태도에는 이해하기 어려운 점도 있고 비난을 받아도 마땅한 점도 있으나 , 한편 칭찬할 만한 점도 있다 .

비난해 마땅한 점은 더는 마실 수 없다고 사양하는 사람에게 억 지로 마시게 하는 습관이다 . 서구사회에 이런 풍습이 있다는 이야기 를 들어본 적이 없다 . 혼자서 마시든 여럿이 어울려 마시든 그 주량보다 술이 지닌 신비로운 가치를 존중하는 것이 술꾼들의 불문율이 다 . 하긴 술을 강요하는 것도 즐겁고 흉허물 없는 친밀한 기분에서 비롯되는 행동이어서 술좌석이 그 때문에 떠들썩하게 되는 것이다 . 그리하여 이 소란스러움이 한결 주흥을 돋우어 주기도 한다 . 저마다 제 정신을 잃고 큰 소리로 술을 더 가져오라고 재촉하며 자리를 뜨기도 하고 바꿔 앉기도 하여 , 주인과 손님을 분간할 수 없게 된다 . 이런 광경은 그냥 보고만 있어도 마음이 흐뭇한 것이다 . 그러나 이 주연은 대체로 누가 술을 더 많이 마실 수 있느냐 하는 내기로 끝나기가 일쑤여서 저마다 엄청난 주량을 자랑하고 심지어 교지와 책략까지 꾸며서 어떻게 해서든지 상대방을 이기려고 든다 . 이쯤 되면 부정행위를 감시하는 자가 나와 비밀전술을 조사하고 경계해야 할 판이다 . 여기서 느끼는 즐거움은 아마도 경쟁의 정신에서 비롯될 것이다 .

중국인들이 술을 마실 때 칭찬할 만한 점은 떠들썩하다는 데 있다 . 중국 요리 집에서 식사를 하고 있으면 마치 어느 축구 시합장에 와 있는 듯한 착각을 하는 때가 있다 .

중국인은 라틴민족과 마찬가지로 명랑한 기질을 타고난 쾌활한 민   족이지만 , 외국인들은 이 사실을 의문시하고 중국인은 무뚝뚝하고

감정이 없는 인종이라는 선입감에 사로잡혀 있는데 , 이들에게는 무 엇보다도 중국인이 먹고 마시는 장면을 보여주고 싶다 . 그때가 그들 이 천성을 충분히 나타내 보여주며 도덕적으로도 완성되어 있는 때 이기도 하다 . 만일 중국인으로 태어나서 음식을 먹는 동안에 즐거운 한때를 보낼 수 없다면 언제 즐겨볼 수 있겠는가 .

중국인이 술좌석을 벌이면 흔히 두어 시간 정도는 금방 지나가 버리는 것은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다 . 식사하는 목적이 단지 먹고 마시는 데 있지 않고 즐거움 속에 잠겨 떠드는 데 있기 때문이다 . 그러므로 얼큰히 취할 줄 아는 사람이 진짜 술꾼이라고 할 수가 있다 . 그런데 술 마시는 기분은 술을 잘 못 하는 사람들도 즐길 수 있을 것이다 . “ 일자무식한 사람도 시정 ( 詩情 ) 을 알고 , 기도 한 마디 드릴 줄 몰라도 신을 위하는 마음이 있고 , 한 방울의 술도 입에 못 대지만 취한 기분이 어떻다는 것은 알며 , 암석의 정체를 몰라도 그 그림을 보고 정취를 느끼는 사람이 있다 . ” 이런 사람이야말로 시인 , 성자 , 애주가 , 화가들과 자리를 함께 할 자격이 있는 것이다 .

 

 

6. 음 식과 약에 대하여

 

집을 넓 은 의미로 해석할 때 생활에 관련된 모든 것을 포함하고 있는 것처럼 음식을 넓은 관점에서 생각해 보면 우리에게 영양을 공급해 주는 모든 것을 포합하고 있다 . 인간은 동물이므로 먹어야 산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다 .

인간의 목숨은 신의 무릎 위에서 보호를 받는 것이 아니라 요리 인의 무릎 위에서 보호를 받는 것이다 . 그러므로 중국의 신사는 누 구나 요리인을 소중히 여긴다 . 생활하는 즐거움의 대부분이 요리를 하는 그들의 손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 중국의 아버지 어머니들은 언제나 유모를 소중히 여기고 친절하게 대해 준다 . 아마도 서구인들 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 그것도 어린애의 건강이 오로지 유모의 기분이나 행복 , 그밖에 일반적인 생활조건에 좌우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 어린애에 대해서와 마찬가지로 자기 자신의 건강에 대해서 조심을 한다면 , 음식을 만드는 요리사에 대하여도 유모와 마 찬가지로 대우해 주어야 할 것이다 .

맑게 갠 날 아침에 자리에 누워 마음을 가라앉히고 이 세상에 정말 즐거움을 주는 것이 몇 가지나 있나 하고 손꼽아 보면 , 첫손가락에 꼽아야 할 것이 음식임을 깨닫게 된다 . 그러므로 좋은 음식을 먹고 있느냐의 여부를 알아보는 것은 그 사람이 현명한가 , 어리석은가를 알 아보는 기준이 될 것이다 .

오늘날 도시생활의 템포는 굉장히 빨라서 요리나 음식물에 대하여 많은 시간과 머리를 쓸 여가가 점점 적어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 가정의 주부요 , 또한 훌륭한 저널리스트이기도 한 아내가 남편에게 통조림 스프나 통조림 완두콩을 식탁에 내놓아도 남편이 투덜거릴 수는 없는 입장이다 . 그런데 인간이 먹기 위해 일하는 것이 아니고 일하기 위해 먹는 것이라면 , 이것은 좀 비정상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 남에게 친절하고 너그럽기 위해 애쓰기 전에 우선 자기 자신에 대하여 친절하고 너그러워야 할 것이다 .

부인이 시정의 부패상을 세상에 폭로하여 일반적인 사회 개선을 했기로 , 두 개의 가스버너를 동시에 틀어 놓고 음식을 만들어 10 분 동안에 밥을 지어야 한다면 이게 무슨 꼴인가 .

옛날에 공자는 아내의 요리 솜씨가 서툴다고 하여 이혼하였거니와 , 이런 여자가 공자에게 이혼을 당할 것은 뻔한 노릇이다 . 하긴 공자 편에서 이혼을 선언한 것인지 , 부인 쪽에서 까다로운 인생 예 술가의 식성을 잘 맞추지 못 하여 자진해서 집을 나갔는지 그 여부는 확실치가 않다 . 공자는 “ 쌀은 아주 희어야 하고 고기는 잘게 다져라” 라고 당부하였다고 한다 . 그런데 부인이 고기에 적당한 양념을 하지 않고 내놓거나 , 고기를 네모 반듯이 썰지 않거나 , 고기 빛깔이 좋지 않을 때에는 젓가락을 아예 대지 않았다는 것이다 . 이렇게 까다롭게 굴어도 참고 살아가던 부인이 어느 날 신선한 음식이 그만 동이 나 자 아들 이 ( 鯉 ) 를 시켜 근처의 음식점에 가서 술과 고기를 사오게 하여 임시변통을 하려고 하였더니 공자는 “ 나는 집에서 만든 술이라야 마시겠소 . 그리고 가게에서 사온 고기는 먹지 않겠소 ” 하고 호통을 쳤으니 , 부인은 짐을 싸고 도망칠 수밖에 . 물론 부인에 대한 이런 심리분석은 나의 짐작에 지나지 않지만 공자가 불쌍한 아내에게 요구한 조건이 고전에 남아 있는 것만은 사실이다 .

중국인은 음식을 모두 영양물이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음식과 약에 대하여 거의 구별을 하지 않는다 . 즉 몸에 이로운 것은 약인 동시에 음식물이라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

현대 의학이 병을 치료하는 데 음식물이 차지하는 중요성을 겨우 19 세기에 들어와서 인정하게 되었지만 , 오늘날에는 다행히 현대식 시설을 갖춘 모든 병원에서는 전문적인 식사요법을 적용하고 있다 . 오늘의 의사들이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식사요법가들을 중국에 파견 하여 수련을 시킨다면 약병의 수가 상당히 줄어들 것이다 .

옛날 중국의 의학자 손사막 ( 孫思 藐 ) 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 “ 참된 의사는 우선 병의 원인을 찾아낸다 . 그 원인을 알게 되면 우선 식사 요법으로 치료하게 마련이다 . 그러나 식사요법이 실패로 돌아가면 , 이때 비로소 약을 쓰게 된다 . ” 원나라의 궁정에서 일한 어느 요리사가 1330 년에 저술한 책이 있는데 이것은 현재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요리책으로 , 음식물은 원래 양생을 위한 것이라고 하여 그 머리말에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

 

자기의 건강을 잘 유지하려고 하는 사람은 음식을 절도 있게 먹고 근심되는 일을 하지 말며 , 욕심을 줄이고 감정을 억제하며 , 체력을 헛되이 소모하지 않도록 조심하고 말을 적게 하며 , 성패를 가볍게 생각하고 슬픔과 고통을 대수롭지 않게 알며 , 어리석은 야망을 버리고 사물을 지나치게 좋아하거나 나쁘게 생각하지 말며 , 시청각을 진정시 키고 , 내장의 섭생에 조심해야 한다 . 정신을 몹시 쓰고 영혼을 괴롭히는 일이 없으면 병에 걸릴 까닭이 없다 . 그러므로 몸과 마음을 기 르고자 하는 사람은 배고플 때에만 먹되 , 결코 배가 부르도록 먹어서는 안 된다 . 그리고 목이 마를 때에만 마시되 배가 부르도록 마시지 말라 . 음식은 오랜 사이를 두고 조금씩 먹어야 하며 , 너무 많은 분량을 자주 먹어서는 안 된다 . 배가 부르다고 하더라도 약간 허기진 느낌을 갖고 , 배가 고파도 약간 만복을 느끼게 해야 한다 . 포식을 하면 폐가 상하고 , 공복은 정력을 해친다 .

 

이 요리책도 ( 중국의 모든 요리책과 마찬가지로 ) 마치 약국 처방과 같 은 느낌을 준다 . 우리는 중국인들이 이와 같이 약과 음식을 적당히 혼동하고 있는 데 대하여 그들에게 축하의 뜻을 표하여야 할 것이다 . 이런 혼동으로 말미암아 약은 약다운 점이 적어지는 반면에 음식은 더욱 음식다워졌기 때문이다 .

중국의 원시시대에 이미 포식의 신이 나타났다는 사실은 상징적인 의미가 있다 . 그 신의 이름은 “ 타오티”라고 하여 옛날 사람들이 즐 겨 청동이나 돌 조각의 모티브로 쓰였다는 사실이 오늘날 밝혀졌다 . 이 “ 타오티”의 영혼이 중국인의 마음속에 도사리고 있다 . 그것이 중국 약전을 요리책과 비슷한 것으로 만드는 동시에 중국의 요리책을 약전과 비슷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 또한 중국에서 자연과학의 한 부 분으로서 식물학이나 동물학이 발달하지 못 하게 한 원인이 된 것이다 . 중국의 과학자들은 뱀 , 원숭이 , 악어 등의 고기나 낙타의 혹이 무슨 맛이 날까 하고 늘 생각해 왔던 것이다 . 즉 중국에서는 참된 과학적인 호기심은 식도락에 직결되어 있었던 것이다 .

중국의 가장 고급요리에 빠져서는 안 되는 세 가지 특징은 빛이 없고 고약한 냄새가 안 나고 뚜렷한 맛이 없다는 것이다 . 그런 음식 물로는 상어의 지느러미 , 새의 둥우리가 있다 . 이것들은 모두 무색 , 무취 , 무미가 그 특징이다 . 그것이 어찌하여 굉장히 맛이 있느냐 하면 언제나 값진 국을 만드는 데 사용되기 때문이다 .

 

 

7. 집에 대하여

 

“ 집”이라는 말은 모든 생활조건 , 즉 물질적 환경 전부를 포함해야 할 것이다 . 누구나 알다시피 집을 택하는 사람은 그 내부 구조보다 밖을 내다보는 전망을 중요시한다 . 사실 집의 위치며 주위의 경치가 중요한 것이다 . 나는 전에 자기가 소유하고 있는 손바닥만한 땅을 굉장히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는 상해의 부자들을 만나본 적이 있다 . 그 땅에는 지름이 10 피트쯤 되는 연못과 개미가 그 꼭대기까지 오르는데 3 분쯤 걸릴 듯한 동산이 있었는데 그들은 가난한 사람들이 산기슭 오두막집에 많이 모여 살면서 , 산과 시냇물과 호수를 자기네 정원으로 삼고 있는 줄 모르고 있었다 . 이 양자는 비교할 것도 못 된다 . 경치가 좋은 산 속에 주택을 세울 때에는 굳이 손바닥만한 땅을 자기 소유로 하여 담으로 둘러칠 필요도 없는 것이다 . 집에서 나와 한 발짝 옮겨 놓을 적마다 산마루에 걸린 흰 구름이며 하늘을 나는 새의 노래 소리와 폭포수의 소리가 한데 어울려 자연의 교향악을 연 주하고 있는 것이라든가 , 눈앞에 전개되는 모든 경치가 다 자기 것이기 때문이다 .

이 사람들이야말로 도시에서 살고 있는 어느 백만장자와도 비교할 수 없는 진짜 부자인 것이다 . 도시에 사는 사람들의 눈에도 물론 하 늘을 나는 구름이 보일 터이지만 그들이 실제로 구름을 바라보는 일 은 드물다 . 간혹 바라보는 일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 구름이 푸른 산 과 대조를 이루고 있지 못 하게 마련이다 . 그러므로 구름을 바라보는 묘미가 없을 것이다 .

그러므로 중국인은 집과 정원에 대하여 마치 아름다운 테 속에 들어있는 보석이 서로 조화를 이루듯이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풍경 의 일부분으로 조화를 이루는 한 요소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있다 . 따라서 인간의 손이 간 모든 흔적을 되도록 눈에 띄지 않게 하여 , 심지어 벽의 직선도 그 위에 드리워진 나뭇가지로 가리거나 중단시키거나 하는 것이다 . 거대한 벽돌과 같은 네모난 집은 공장 건물이라면 그런 대로 납득이 간다 . 공장이란 능률을 위주로 하기 때문이다 . 그러나 네모진 주택이란 어불성설이다 .

중국에서 이상적이라고 생각하는 주택은 어떤 문인이 쓴 다음과 같은 글에 잘 나타나 있다고 본다 .

 

 

대문 안에는 오솔길이 나 있다 . 이 길은 꼬불꼬불해야 한다 . 이 오솔길이 구부러진 모퉁이에 옥외 울타리가 있는데 이 울타리는 아주 낮아야 한다 . 울타리 뒤에는 테라스가 있으며 이 테라스는 평평해야 한다 . 테라스 양쪽의 높은 곳에는 꽃이 피어 있는데 그 꽃들은 언제나 생기가 있어야 한다 . 꽃 너머에는 담장이 있는데 그 담장은 야트막해야 하고 , 그 옆에는 한 그루의 소나무가 서 있다 . 이 소나무는 반드시 늙은 소나무라야 하고 그 아래에는 몇 개의 바위가 놓여 있는 데 그 바위는 반드시 묘하게 생겨야 한다 . 바위너머에는 정자가 서있는데 그 정자는 간소한 느낌을 주어야 하고 그 뒤에는 대나무들이 드문드문 서 있어야 한다 . 그리고 대나무 밭이 끝나는 곳에 집이 있는데 그 집은 한적한 느낌을 주어야 하며 집 부근에는 길이 있다 .

그 길은 여러 갈래로 나뉘어 있어야 하며 갈래의 길이 합치는 곳에 다리가 있으며 , 이 다리는 손님들이 건너보고 싶을 만큼 매력이 있어야 한다 . 다리를 건너면 나무들이 서 있는데 이 나무들은 키가 커야 하고 나무 그늘에는 잔디가 있으며 , 이 잔디는 반드시 싱싱하고 푸르러야 한다 . 잔디밭 위쪽에 도랑이 있는데 이 도랑의 폭은 좁아야 하고 그 끝에는 샘이 있으며 , 샘물은 콸콸 솟아야 하고 샘 위에는 산이 있다 .

이 산에는 깊은 산 속과 같은 흥취가 있어야 하고 산비탈에 서실 ( 書室 ) 이 있다 . 서실은 네모반듯해야 하고 , 서실 모퉁이에 채소밭이 있는데 이 채소밭은 넓어야 한다 . 채소밭에는 황새가 한 마리 있는데 그 황새는 춤추듯이 하고 있어야 한다 . 황새가 손님이 온 것을 알리는데 손님은 야비하게 굴어서는 안 된다 .

손님이 오면 술상이 나온다 . 술상은 절대로 물려서는 안 되며 잔 을 거듭하는 동안에 취기가 돌아도 , 취객은 자기 집으로 돌아갈 생각 을 해서는 안 된다 .

 

 

집의 매력은 그 집이 지닌 개성에 달려 있다 . 이립옹은 그의 저서 인 『 한정우기 ( 閑情偶寄 ) 』 속에서 집과 집안의 장식에 대하여 몇 장을 쓰고 있는데 , 그 머리말에서 친밀감과 개성을 역설하고 있다 . 나는 개성보다 친밀감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 아무리 큼직하 고 반듯이 지은 집이라도 주인이 기분 좋게 살 수 있는 특별실이 반드시 하나는 있어야 한다 . 이 방은 으레 좁으며 아무 장식도 없는 것이 오히려 친밀감과 정다움을 준다 . 그러므로 이립옹도 이렇게 말하고 있다 .

 

사람이 옷을 입지 않고 걸어 다닐 수 없는 것처럼 , 집이 없이는 살 수가 없다 .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하게 해주는 것이 옷 의 본질이거니와 이것은 집에도 그대로 해당된다 . 지름이 몇 자씩 되는 굵은 들보를 걸치고 , 높이 2, 30 척이나 되는 으리으리한 저택에 살면 위풍은 당당하겠지만 , 여름철에는 살기가 좋은데 겨울에 지내기 는 불편하다 .

관리의 저택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에 누구나 몸서리치는 것은 공간이 너무 넓기 때문이다 . 너무 커서 허리에 착 붙지 않는 가죽 외투 입고 있는 격이라고나 할까 . 그러나 한편 벽이 낮아서 겨우 무릎 을 하나 들여놓을 만큼 가난한 사람의 집은 검소한 생활을 하고 있는 미덕의 표시는 되겠지만 , 손님을 맞아들이기에는 적당치 않다 . 가난 한 선비가 거처하는 오두막집에 찾아갔을 때에 어쩐지 거북하고 답답 한 느낌을 주는 것은 그 때문이다 .

관리의 저택은 너무 높거나 크지 않은 것이 좋을 것이다 . 집과 그 집에 사는 사람은 반드시 서로 조화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 풍경화 를 그리는 화가는 집을 그릴 때 “ 10 척의 산을 그리면 1 척의 나무를 배치하고 한 치의 말을 그리면 인물은 콩알만 하여야 한다”라는 공식이 있다 . 그러므로 10 척의 산꼭대기에 2, 3 척이나 되는 나무를 그리고 한 치 말에 좁쌀만한 인물을 그리면 균형이 잡히지 않는다 . 관리의 키가 9 척이나 10 척쯤 되면 높이가 2, 30 척 가량 되는 저택에 사는 것도 좋을 것이다 . 대체로 집의 높이가 높을수록 집안에 사는 사람은 키가 작아 보이고 , 집이 넓을수록 몸집이 초라해 보이는 법이다 . 그러므로 저택을 조금 작게 짓고 몸을 좀 더 살찌게 하는 것이 상책일 것이다 .

호사와 낭비는 건축에 있어서도 경계해야 한다 . 서민뿐 아니라 왕 공현관 ( 王公顯官 ) 이라고 할지라도 검소의 미덕을 존중해야 한다 . 그 리고 주택의 가치는 화려한 데 있지 않고 탈속한 데 있으며 , 공을 들인 장식에 있지 않고 참신하고 우아한 데 있는 것이다 . 돈을 물 쓰듯 하여 호화로움을 자랑하려는 것이 위주요 , 창조하는 능력이 없으므로 다만 호사를 자랑하는 것으로 만족한다 .

  

 

 

 

 

 

 

 

 

 

제 9 장 자연의 즐거움

 

 

 

 

 

 1. 실 락원

 

지구상에 살고 있는 무수한 생물 가운데서 동식물은 자연에 대하 여 어떤 작용을 하지 못 하지만 오직 인간이라는 생물만은 자기 자신 과 주위의 환경을 의식하고 , 어떤 작용을 할 수 있는 것은 이상한 일 이라고 하겠다 . 인간의 예지는 맨 처음에 우주에 대한 회의를 품고 그 비밀을 탐구하려는 데서 비롯되었다 . 우주에 대한 태도에는 과학 적인 것도 있고 도덕적인 것도 있다 .

과학자의 관심은 지구의 내부와 표피의 화학적인 구조나 , 지구를 에워싼 대기의 두께나 , 대기의 성층권에 방사하는 우주선이나 , 구릉 이나 바위의 형성이나 , 생명의 법칙 같은 것을 발견하는 데 있다 . 이 과학적인 태도는 도덕적인 태도와 관련은 있으나 그 가장 큰 의도는 아는 것과 탐구하려는 순수한 욕구의 충족에 있다 .

이와 반대로 도덕적인 태도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 자연과의 조화 나 , 자연의 정복과 복종이나 , 자연의 지배와 이용의 관계를 문제 삼 기도 하고 , 때로는 자연에 대하여 불손하게 모멸하는 경우도 있다 . 이 나중의 태도 , 즉 불손하게도 자연을 모멸하는 태도는 문명 , 특히 어떤 종교에서 비롯된 것으로 실로 이상한 현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 그 근원은 실락원이라는 창세기의 이야기이다 . 이 이야기는 원시종교적 전설의 유물이지만 기이하게도 오늘날에도 상당히 널리 믿어지고 있다 .

낙원을 잃었다는 이야기가 과연 믿을 만한 것이냐 하는 의문을 품은 사람이 여태까지 전혀 없었다는 것은 기가 막힐 노릇이다 . 대 체 에덴동산이 얼마나 아름답고 , 이 우주의 실체가 얼마나 추하다는 말인가 . 아담과 이브가 죄를 범한 후로 꽃이 피지 않게 되었는가 ? 단 한 사람의 죄 때문에 신은 선악과나무를 저주하여 열매가 맺는 것을 금하였단 말인가 ? 꽃은 생기를 잃고 창백해질 것을 결정하였는 가 ? 꾀꼬리나 나이팅게일이나 종달새는 노래하지 못 하게 되었는가 ? 산마루의 눈은 녹아내리고 , 아름다운 호수에 그림자가 비치지 않게 되었단 말인가 ? 붉게 물든 석양이나 아름다운 무지개나 마을을 덮은 안개가 없어졌는가 ? 폭포수는 어떻게 되었는가 ? 맑은 물결은 ? 나무 그늘은 ? 대관절 누가 인간은 낙원을 잃고 추한 우주에서 살게 되었 다는 신화를 발명해 내었는가 ? 실로 우리야말로 은덕을 모르는 방자 한 신의 아들인 것이다 . 이 방자한 아들의 이야기를 하기로 하자 .

옛날에 어떤 사나이가 있었다 . 이름은 잠시 덮어 두기로 한다 . 이 사나이가 어느 때 신에게 와서 말하기를 “ 이 지상은 고약한 고장입니다 . 저를 천국의 진주문으로 보내 주소서 . ” 이에 신은 창공에 달린 달을 가리키면서 “ 저기는 놀기 좋을 테지 ” 하고 말씀하셨다 . 사나이는 머리를 흔들며 “ 저런 것은 보기가 싫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 그러자 신은 멀리 푸른 산을 가리키면서 “ 저것은 얼마나 아름다 운 경치냐 ” 하고 말씀하셨다 . 사나이는 대답하였다 . “저런 것은 얼마든지 볼 수 있는 , 아무렇지도 않은 것이올시다 . ” 이때 신은 사나이에게 난초와 3 색 오랑캐꽃을 보이면서 “ 그 빌로드처럼 부드러운 살 결에 손가락을 대어 보라”라고 말씀하시면서 그 색깔의 아름다움을 칭찬하셨다 . 사나이는 그것도 싫다고 하였다 . 신은 무한히 너그러운 태도로 사나이를 수족관으로 데리고 가서 색깔과 모양이 다 아름다 운 하와이물고기를 보여주셨다 . 그러나 사나이는 여전히 흥미가 없다고 하였다 . 이에 신은 서늘한 바람이 불어오는 나무 그늘에 데리고 가서 “ 이건 얼마나 상쾌하냐”라고 물으셨다 . 사나이는 다시 아무 런 감흥도 없다고 하였다 . 이번에는 산꼭대기의 호수에 데리고 가서 맑은 물과 소나무와 의젓한 바위와 아름다운 수면의 그림자를 보였 으나 , 사나이는 도무지 흥취를 느끼지 못 하겠다고 하였다 .

신은 이에 당신이 창조하신 이 사나이는 교만하여 자극이 강한 경치를 원하나보다고 생각한 나머지 로키산맥의 꼭대기와 그랜드캐 니언과 종유동과 석회동 , 양자강의 협곡 , 화강암으로 된 황산의 영 마루 , 간헐천 , 사막의 모래 언덕에 피어난 선인장 , 나이아가라의 폭포 등을 보이시고 “ 신의 힘으로 인간의 눈과 귀와 비위 등을 기쁘게 할 수 있는 것이 이밖에도 지상에 있다고 생각하느냐 ? ” 라고 물으셨다 . 그래도 사나이는 진주문의 천국을 원하는 것이었다 . 그리고 “ 이 지구는 내가 살 곳이 못됩니다” 하고 고집을 부렸다 . 신은 드디어 말씀하셨다 . “이 교만하고 은덕도 모르는 놈아 ! 이 지구가 네게 부 족하거든 지옥에나 가거라 . 지옥에는 허공을 떠도는 구름도 보이지 않고 , 꽃 피는 화초도 없고 , 시냇물이 흐르는 소리도 들을 수 없다 . 너는 목숨이 다할 때까지 지옥에 머물러 있어라 ! ”

이리하여 신은 그 사나이를 시가지의 아파트에 보내셨다 . 그 사나 이 이름은 크리스찬이었다 .

이 사나이를 만족시키기란 상당히 어려운 노릇이다 . 그런데 이 사 나이를 만족시킬 수 있는 천국이 과연 창조되었을까 ? 이것이 문제이 다 . 백만장자다운 콤플렉스를 가진 이런 사나이는 천국에 한 주일 동안만 있으면 진주문에 대하여 진저리가 날 것이다 . 그리하여 신은 이 방자한 사나이를 기쁘게 할 신기한 것의 발명에 골치를 썩을 것이다 .

근대 천문학이 우주를 탐구한 바에 의하면 이 지구야말로 정말 천국인 것이다 . 인간이 꿈꾸는 천국도 얼마간의 공간을 차지하고 있 을 것이다 . 별과 별 사이의 허공에 떠 있지 않는 한 창공의 별 어느 곳엔가 천국은 있어야 할 것이다 .

나는 지구보다 더 깨끗한 별―거기 달이 있든 없든―은 생각할 수 없다 . 만일 천국에 달이 있다면 하나가 아니라 여럿이어서 , 빛깔도 형형색색으로 찬란할 것이다 . 그리고 무지개도 지구의 무지개보다 아름답고 또 공중에 나타나는 도수도 많을지 모른다 . 그러나 하나의 달에 만족 못 하는 자는 한 다스의 달에도 만족 못 할 것이며 흔히 볼 수 없는 눈 내리는 경치나 무지개에 만족하지 못 하는 자는 언제나 보는 아름다운 무지개에도 곧 싫증이 날 것이다 . 천국의 계절은 여섯 계절이며 아름다운 봄과 여름 , 그리고 밤과 낮의 변화가 있을지 모를 일이다 . 그런데 그것이 대체 어떻다는 것인가 ? 지구의 봄과 여름을 즐길 줄 모르는 자가 어찌하여 천국의 육계를 즐길 수 있으랴 .

이렇게 말하는 나더러 큰 바보가 아니면 도통한 자라고 생각하는 자가 있을지 모른다 . 그러나 나는 불교도나 기독교도처럼 관능이나 육체적인 향락을 외면하고 공간도 없고 정령만으로 된 천국과 같은 곳을 그리워하지는 않으련다 . 나는 어느 별에서나 마찬가지로 생활할 수 있다 .

이 지구의 생활이 멋이 적고 단조로운 것이라고 누가 단언할 수 있겠는가 ? 그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 춥고 더운 변화 , 창공의 한결같은 빛깔 , 철 따라 맛볼 수 있는 과일의 진미 , 달마다 피어나는 여러 가지 꽃에 기쁨과 만족을 느끼지 못 하는 자라면 차라리 죽어 마땅할 것이다 . 그리고 있지도 않은 천국은 헛되이 꿈꾸지 말 일이다 . 천국은 신의 뜻에 맞을지 모르지만 결코 인간을 만족시킬 수는 없을 것이다 .

우리가 목격하는 자연의 모습―소리 , 향기 , 맛 , 그리고 우리의 시각 , 청각 , 후각 사이에는 신비스러운 교감작용이 있다 . 우주의 형태 , 소리 , 냄새와 지각기관의 관계는 매우 완전하여 저 볼테르에게 참혹 하게 비난을 받은 목적론의 논거가 되어 있다 . 그러나 우리가 저마다 목적론자가 될 필요는 없다 . 신은 이 향연에 우리를 초대할지도 모르며 또 초대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 그것은 아무래도 무방하다 .

어쨌든 향연에 참례하는 것이 우리네 중국인의 태도인 것이다 . 산해진미의 성찬이 눈앞에서 입맛을 다시게 하는데 어찌 손을 대지 않 을 수 있겠는가 . 그건 바보의 짓이다 . 자기가 과연 남과 같이 향연에 초대를 받았느냐의 여부를 따져 본다는 것은 철학자의 형이상학에 맡길 일이다 . 그러나 영리한 사람은 성찬이 식기 전에 먹어 버릴 것이다 . 허기증은 언제나 건전한 상식과 함께 있는 법이다 .

아아 , 지구는 얼마나 아름다운가 !

첫째 , 낮과 밤 , 아침과 저녁의 순환이 있다 . 분주한 아침을 알리며 고요히 밝아오는 새벽―이런 것이 있다 .

둘째 , 여름과 겨울의 전환이 있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다행한 일 이냐 . 더구나 봄은 여름으로 옮겨가고 가을은 겨울로 자연히 옮겨가 니 완전무결한 네 계절의 모습―이런 것이 있다 .

셋째 , 엄숙하고 숭고한 나무숲이 있다 . 여름은 녹음 , 겨울은 따스한 빛―이런 것이 있다 .

넷째 , 달마다 꽃이 피고 과일이 익는다―이런 것이 있다 .

다섯째 , 구름이 진하고 안개가 자욱한 날 , 하늘이 맑고 명랑한 날 , 그때그때의 변화―이런 것이 있다 .

여섯째 , 봄에 내리는 비 , 여름에 쏟아지는 소나기 , 서늘한 가을바람 , 그리고 겨울의 눈―이런 것이 있다 .

일곱째 , 공작과 비둘기와 종달새와 카나리아의 아름다운 노래―이 런 것이 있다 .

여덟째 , 동물원에 가보라 . 원숭이 , 호랑이 , 곰 , 낙타 , 코끼리 , 물소 , 악어 , 하마 , 소 , 말 , 개 , 고양이 , 여우 , 다람쥐 , 들쥐 , 그밖에 생각해 본 일도 없는 여러 가지 동물―이런 것이 있다 .

아홉째 , 홍어 , 뱀장어 , 고래 , 홍합 , 전복 , 새우 , 대하 , 거북 , 그밖에 상상도 못 할 다채로운 세계―이런 것이 있다 .

열 번째 , 장대한 나무의 굵다란 줄기 , 불을 뿜는 화산 , 웅대한 동굴 , 장엄한 산마루 , 늠름한 언덕 , 고요한 호수 , 맑은 시냇물 , 나무가 울창한 둑―이런 것이 있다 .

우리들 각자의 미각을 자극하는 메뉴는 실로 무궁무진하다 . 우리 는 우선 몸을 일으켜 향연에 참가하고 인생의 단조함을 한탄하지 않 는 것이 영리한 태도이다 .

 

 

2. 자 연의 대관

 

대자연은 그 자신이 하나의 요양소 (sanatorium) 이다 . 다른 병은 어쨌든 과대망상증에 걸린 환자에게는 뛰어난 효과가 있다 . 인간은 각자 있어야 할 곳에 있지 않으면 안 된다 . 그런데 자연을 배경으로 하고 있으면 , 언제나 그 있어야 할 곳에 있게 된다 . 중국의 풍경화에서 인물을 아주 작게 그리는 것은 이 때문이다 .

설후관산 ( 雪後觀山 ) 이라는 중국의 풍경화에서 눈 내린 후의 산을 바라보고 있는 듯한 인물을 찾아내려면 꽤 힘이 든다 . 자세히 찾아보면 소나무 아래에 쪼그리고 앉아 있는 작은 인물이 겨우 눈에 뜨인다 . 높이가 한 자 다섯 치나 되는 그림에서 인물의 크기는 한 치 밖에 되지 않는데 그나마 붓을 한 번 슬쩍 대었을 뿐이다 .

송나라 때의 그림에 네 현자를 그린 것이 있다 . 이들이 가을에 산 속을 거닐면서 하늘 높이 치솟은 거목 아래서 고개를 들어 나뭇가지 를 우러러보고 있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

인간이 때때로 자기를 무척 작은 존재로 생각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없다 . 내가 일찍이 산에서 한 해 여름을 보내던 때의 일이다 . 산마루에 드러누워 내려다보니 100 마일쯤 되는 저쪽 남경에 서 개미 같은 두 인간이 중국을 위해 앞을 다투어 무슨 봉사라도 하려는 것일까 ? 피차에 아귀다툼을 하는 광경이 눈에 띄었다 . 아무래 도 좀 우스꽝스럽게 보이는 것이었다 . 등산은 일종의 설사를 멈추게 한다 . 그리하여 가슴에 여러 가지 쑥스러운 야심이나 불필요한 번민 이 있으면 깨끗이 씻어 버리는 작용을 한다 . 이 작용에 대하여 중국인은 믿어 의심치 않는다 .

인간은 자칫하면 자기가 얼마나 미미한 존재요 보잘 것 없는 자인 가를 잊어버리기 쉽다 . 100 층쯤 되는 건물을 세워 놓고 자랑스럽게 여기는 경우가 흔히 있지만 이 터무니없는 자랑을 쓸어버리는 가장 좋은 방법은 항용 인간이 경멸하기 쉬운 산마루 근처에 마천루를 세 워 놓았다고 생각해 보는 것이다 . 그리하여 거대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분간하여야 한다 .

바다는 그 광대한 광경 때문에 사랑하게 되고 웅장한 모습 때문 에 마음이 끌린다 . 황산에 올라가 보라 . 화강암으로 된 높이 1,000 피 트 , 길이 10,000 마일의 담이 여기저기 불쑥불쑥 치솟아 있다 . 이러한 것이 중국 화가들에게 어떤 영감을 주었던 것이다 . 그 침묵 , 하늘 높이 솟아오른 웅장한 모습 , 그 유구한 지각에 대한 경이야말로 중국인이 즐겨 암석을 그리는 이유이다 . 이렇게 거대한 암석이 세상에 있다는 것을 알려면 황산에 가봐야 한다 . 그 무언의 화강암 봉우리에서 영감을 받은 황산파 ( 黃山派 ) 가 17 세기에 배출되었다 .

웅대한 대자연을 머릿속에 그려 보면 인간의 정신도 커진다 . 자연 의 풍경을 영화로 생각하고 이 영화보다 작은 것에는 만족을 느끼지 말며 , 여름철에 지평선에 떠 있는 뭉게구름을 무대의 배경으로 보고 이보다 못 한 배경에는 만족하지 말고 , 산림을 정원으로 생각하고 이보다 못 한 정원에 만족하지 말며 , 파도의 울부짖음을 연주회로 보고 이보다 못 한 연주회에 만족하지 말고 , 산바람을 냉방장치로 생각하 고 이만 못 한 냉방장치에 만족하지 않는―이런 자연생활법도 있는 것이다 . 이런 경지에 이르러야 비로소 인간이 크게 되어 대지와 창 공에 견줄 수 있다 . 중국 낭만파의 선배의 한 사람인 완적 ( 阮籍 , 214~ 263) 이 그린 대인 ( 大人 ) 과 같이 천지를 집으로 삼고 살 수 있는 것 이다 .

내가 지금까지 보았던 가장 엄청난 장관은 인도양에서의 하루 저 녁이었다 . 나는 여기서 장엄하고 웅대하다는 말의 참뜻을 알게 되었 던 것이다 . 광경의 무대는 넓이가 100 마일 , 높이는 3 마일인데 , 자연은 여기서 30 분 동안 드라마를 연출하였다 . 거룡 , 공룡 , 사자가 저녁하늘을 가로질러 날아오른다 . 사자는 고개를 오롯이 치켜들고 덥수룩한 머리털을 부르르 떨었다 . 용은 등을 잔뜩 도사리고 크게 꿈틀거렸으며 백의의 군졸과 갈색 군복을 걸친 군대가 대적하고 있는 데 거기에 금빛 견장을 붙인 사관 한 떼가 진군하여 좌충우돌하다가 퇴장한다 . 난투와 추격이 벌어지는 데 따라서 무대의 조명이 변한다 . 백의의 군졸은 갑자기 유자 빛을 띠고 갈색 군대는 순식간에 자색으로 변해 버린다 . 그리고 배경이 무지갯빛과 황금빛으로 불타오르더니 이윽고 자연의 무대장치계는 차츰 조명을 어둡게 하는 것이었다 . 그리하여 자색은 유자 빛과 어울려 짙은 자색으로 변하고 마지막 5 분 동안 라이트가 꺼지는 순간에 형용할 수 없는 비극과 암흑의 재앙이 출현하였다 . 나는 이리하여 밑천 한 푼 들이지 않고 내 생애의 최대의 쇼를 구경하게 되었던 것이다 .

산에는 산의 그윽한 운치가 있다 . 이 운치도 과대망상증에 좋은 약이 된다 . 고요한 산봉우리와 암석 , 정숙한 산림 , 모두가 장엄하다 . 일체를 그 옷 자락에 거느린 산악은 인생의 요양소이다 . 그 품 안에 안기면 인간은 한갓 어린애가 되어 어리광을 부리고 싶어진다 . 나는 크리스찬 사이언스를 믿지 않으나 장대한 늙은 나무나 산장의 신 비로운 치병술은 믿는다 . 그러나 그것은 뼈가 부러졌거나 피부에 종 기가 난 것까지 고칠 수는 없다 . 그것은 본능적인 욕심 , 마음의 병 , 절도벽 , 과대망상증 , 자기중심주의 , 우울증 , 절취광 , 아나키스트 , 병적인 지배욕 , 전쟁공포증 , 광장공포증 , 심술꾸러기 , 증오 , 사회노출증 , 일반적인 두뇌 혼란증―그밖에 여러 가지 병에 유효하다 .

 

 

3. 바 위와 나무

 

우리는 대체 무엇을 하려고 하는 것인가 ? 나는 알 수가 없다 . 네모진 집을 차례대로 지어나가고 나무도 없는 곧은길을 만들어 놓는 다 . 꾸불꾸불한 길이나 고풍스러운 집은 벌써 없어지고 정원에는 우 물도 없다 . 시가지 한복판에 저택을 지어본들 , 그것은 하나의 만화 밖에 되지 않는다 . 인간은 생활에서 자연을 쫓아내는 데 성공하였다 . 그리하여 지붕다운 지붕이 없는 집에 살고 있다 . 건물의 실용성만이 강조되어 건축가도 몸서리칠 정도이다 . 실용 이외의 것은 거의 도외시하고 있다 . 그래서 지붕 같은 것은 염두에 두지 않고 팽개쳐 둔다 . 오늘의 건물은 일반적으로 보아 나무 조각을 쌓아올리는 장난이라고나 할까 . 그것도 방자하고 변덕스러운 아이가 그 장난에 싫증 이 나서 도중에서 적당히 팽개치는 격이다 .

현대 문명인으로부터 자연의 정신은 떠나 버렸다 . 심지어 수목까지도 문명화하려고 한다 . 큰 길 가에 나무를 심게 되면 번호를 붙이 고 , 소독을 하고 , 가지와 잎을 자르고 끊고 해서 , 인간의 머리로 아 름답다고 생각되는 모양으로 만들고 싶어 한다 . 원이나 별의 모양이 나 그밖에 여러 가지 글자의 모양으로 꽃을 심는 것은 흔히 볼 수 있는 일이거니와 , 이렇게 심어 놓은 꽃이 조금이라도 줄에서 비뚤게 자라면 마치 웨스트 포인트 사관학교 생도가 보조를 그르친 것을 볼 때처럼 기분이 나빠서 곧 가위를 댄다 . 베르사유 궁전의 정원에는 원추형으로 전지를 한 나무가 완전한 원형이나 직선형 , 그 밖의 모양으로 고르게 심어져 있다 .

인간 세상의 명예와 위신이란 이런 것인가 . 제복을 입은 사병처럼 , 수목을 훈련하는 인간의 능력이란 고작해야 이런 것인가 . 그리하여 한 쌍의 나무 가운데서 한 그루가 너무 높이 자라거나 하면 균형이 깨어지고 나아가서는 명예와 위신이 손상되기나 한 것처럼 생각하여 곧 꼭대기를 잘라 버려야만 직성이 풀린다 .

그러므로 가정마다 자연을 되찾는 것이 커다란 문제가 되어 있다 . 실로 유감스러운 일이다 . 흙을 떠나 아파트에 살고서는 아무리 뛰어 난 예술가의 기질을 타고나도 소용없는 것이다 . 여유가 없어서 조그 마한 집에 세들어 살더라도 , 한 줌 풀밭이나 우물이나 대숲을 가지려면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 . 어쨌든 모든 일이 잘못되어 있다 . 사물에 대한 인식부족이 이토록 철저하면 벌써 돌이킬 수 없게 된다 . 높은 마천루나 야경의 창문 행렬 외에 감상할 만한 건물을 찾아볼 수 없다 . 이런 것을 바라보면 인간은 문명의 힘을 자랑하여 , 자기가 얼마나 보잘 것 없는 존재인가를 잊어버린다 . 그러므로 이런 문제는 해결할 가망이 없다 .

우리는 인간에게 충분한 땅을 부여하는 일부터 시작하지 않으면 된다 . 이유는 어디 있든 간에 인간으로부터 땅을 빼앗는 문명은 잘못되어 있다 . 앞날의 문명사회에서 모든 사람이 1 에이커 (1,224 평 ) 의 땅을 소유할 수만 있다면 환경을 좀 아름답게 꾸밀 수 있을 것이다 . 나무를 심어 정원도 마련하게 될 것이다 . 그 나무가 얼른 성장하지 않으면 버들이나 대처럼 빨리 자라는 나무를 심으면 된다 . 그렇게 되면 새장 속에 새를 기를 필요가 없다 . 새는 저절로 날아들기 때문이다 . 한 걸음 나아가서 개구리 , 도마뱀 , 거미 따위도 살게 정원 을 손질하면 아이들은 유리 상자 속에 넣은 자연이 아니라 천연의 자연을 공부할 수 있을 것이다 . 새끼 새가 알에서 부화하는 모습도 관찰할 수 있을 것이며 , 따라서 보스턴의 선량한 가정의 아이들에게 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성 ( 性 ) 과 번식에 대한 한심스러운 무지는 없어질 것이다 . 도마뱀과 거미가 생존을 위해 싸우는 모습도 재미있 게 바라볼 수 있을 것이며 , 진흙투성이가 되는 재미도 더러 맛볼 수 있을 것이다 .

바위에 대한 중국인의 심정에 대하여는 앞의 절에서 언급하였다 . 그 설명으로 중국의 풍경화가가 돌산을 사랑하는 이유를 충분히 이해하였을 것이다 . 그러나 그것은 기초적인 설명이요 , 바위가 깔린 정원이나 암석 일반에 대한 중국인의 취미는 충분히 설명된 것이 아 니다 .

바위는 거대하고 완강하여 영원을 생각게 한다는 것이다 . 바위는 말이 없고 흔들리지 않는 영웅과 같은 강한 성격을 지니고 있다 . 그 것은 세상을 외면한 학자처럼 세속을 떠나 고고하고 초연하다 . 그리 고 바위마다 옛 색채가 물들어 있다 . 그런데 중국인은 무엇이든지 오래 묵은 것을 좋아한다 . 큰 바위를 예술적인 각도에서 볼 때 위대 하고 장중하고 기괴하고 위태롭다 . 이 위태롭다는 말에는 특별한 뜻 이 들어 있으나 적합한 표현은 어렵다 . 지상 300 척 높이로 치솟은 낭떠러지는 위태로운 느낌을 주어야 매력이 있는 법이다 .

이 바위에 대하여 좀 더 생각해 보기로 하자 . 인간은 날마다 돌산을 구경하러 갈 수는 없는 일이므로 바위를 가정에 갖다 놓을 필요 를 느끼게 된다 . 중국을 여행하는 서구인들이 돌로 이루어진 정원이 나 석굴 같은 것을 이해하고 올바로 감상하기는 어려울 터이다 . 그것은 기괴하고 위태롭고 장중한 바위 봉우리가 늘어선 모습을 본뜨려는 것이다 . 그들이 이것을 이해하지 못 하고 감상할 줄 모른다고 해서 탓할 수는 없다 . 왜냐하면 인공산의 암굴은 대개 당치않게 손질되어 자연의 웅대하고 장중한 정취를 살리지 못 하고 있기 때문이다 . 인공의 석굴은 몇 개의 돌을 시멘트로 이어서 만들었으므로 그 시멘트가 눈에 거슬린다 . 예술적인 인공산은 회화의 구성처럼 조화가 되어 있어야 한다 .

집이나 정원의 돌의 효용을 철저히 감상하려면 서도 ( 書道 ) 에까지 안목이 있어야 한다 . 서도는 추상세계의 리듬과 선과 구성에 대한 연구에 지나지 않는다 . 참된 바위는 장중하고 초탈한 맛이 있어야 하지만 그보다도 중요한 것은 선이 제대로 되어 있어야 한다 . 선이라고 해서 직선이나 곡선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자연의 기묘한 선을 말하는 것이다 .

노자 ( 老子 ) 는 『 도덕경 ( 道德經 ) 』 에서 “ 새기지 않은 돌 ( 不刻立石 ) ” 에 대하여 역설하고 있다 . 자연에 잔재주를 부리지 말라 . 가장 뛰어난 예술은 가장 훌륭한 시나 문장과 마찬가지로 조금도 인공의 흔적이 없고 흐르는 물이나 떠도는 구름처럼 자연스러워 중국 비평가들이 때때로 말하는 손티를 찾아볼 수 없는 것이다 .

이것은 예술의 모든 분야에 적용된다 . 한 마디로 미라고 하더라도 여러 가지이다 . 불규칙한 미 , 리듬과 운동과 표정을 암시하는 미―이러한 것이 감상의 대상이 된다 . 상류층에 속한 어느 중국인의 서재에 흙투성이의 떡갈나무 의자가 있었는데 이런 것을 소중히 여기는 심정도 여기에 있다 . 그러므로 중국인의 정원에 있는 인공산은 거의가 자연 그대로의 돌로 되어 있다 . 높이가 10 내지 15 피트나 되고 위인처럼 위엄 있게 고립되어 있는 나무 껍질의 화석도 있으 며 , 호수나 굴속에서 발견되어 구멍투성이고 우툴두툴한 돌도 있다 . 어느 작가의 시사에 의하면 만일 구멍이 너무 둥글면 작은 돌을 삽입하여 그 원을 비뚤어지게 한다는 것이다 . 상해나 소주 근처의 인공산은 대개 옛 호수의 바위로 되어 있어 전 시대의 파도의 흔적이 보인다 . 이런 바위는 호수의 바닥에서 파낸다 . 그 선에 시정할 데가 있으면 망치로 마음에 맞도록 가공하여 다시 호수에 가라앉혔다가 1, 2 년 동안 방치해 둔다 . 물의 작용으로 망치의 자국을 아물게 하자는 것이다 .

나무에 대한 느낌은 더욱 이해하기 쉬우며 , 만인에게 공통된다 . 주위에 나무가 없는 집은 벌거벗은 인간과 같다 . 나무와 집의 차이는 집은 건축하고 , 나무는 자란다는 점이다 . 무엇이고 성장하는 것은 건축하는 것보다 아름답게 보이는 법이다 .

인공의 예지는 기교를 숨기는 데 있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웬일인지 그것을 과장하려고 한다 . 이 점에 관련하여 나는 청의 대 학자 완원 ( 阮元 ) 에게 찬사를 보내는 바이다 . 그는 현 지사로 있을 때 서호 ( 西湖 ) 에 작은 섬을 만든 일이 있는데 그 섬은 오늘날 “ 완공도”라고 불리고 있다 . 그는 이 섬에 정자나 기둥이나 비석과 같은 것으로 된 건축은 일절 세우지 않았었다 . 축조자의 손티를 완전히 말살해 버린 것이다 . 오늘날 이 완공도는 호수 가운데에 있으며 지름이 약 100 미터 , 수면에서 겨우 1 피트 위에 있고 주위에는 버드나무를 심어 놓았다 . 안개가 자욱한 날에 호수의 기슭에서 바라보면 이 꿈결 같은 섬은 물 속에서 솟아오른 듯이 보이며 버드나무는 호면에 거꾸로 그림자를 드리워 단조로움을 깨뜨리면서 하나의 조화를 이루 고 있다 . 즉 자연과 섬이 완전히 조화되어 있는 것이다 . 그것은 미 국에서 돌아온 학생이 그 부근에 세운 등대 모양의 기념비처럼 어색 하게 보이지 않는다 . 나는 이것을 볼 때마다 눈에 염증을 일으킬 지 경이다 . 내가 만일 후일에 비적의 두목이라도 되어서 항주를 공략하 면 그 기념비를 대포로 부셔 버리는 것을 첫째 임무로 삼겠다고 마음속으로 다짐해 보기도 하였다 .

나무의 종류는 무수하며 어떤 나무의 특수한 선이나 윤곽에는 그 림의 테마가 되는 아름다움이 있다 . 그런 나무는 특히 심미적인 감 흥을 일으킨다 . 시인이나 비평가들은 나무는 다 아름답지만 어떤 나 무는 각별한 표정이나 생기나 기품을 지니고 있다고 하는데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당연하다 . 아닌 게 아니라 이러한 나무는 어떤 감흥을 자아내게 한다 . 보통 감람나무에서는 소나무처럼 청초한 기품을 찾아볼 수 없고 버드나무는 우아하기는 하지만 장중하거나 영감적인 면이 없다 . 따라서 언제나 그림이나 시의 소재가 되는 것은 소수의 나무이다 . 특히 장대한 정취로 인하여 환영을 받는 소나무와 , 낭만적인 풍취로 사랑을 받는 매화나 , 선이 산뜻하여 가족적인 것으로 귀여움을 받는 대나무와 , 섬세한 미인을 연상케 하는 버드나무 등이 먼저 머리에 떠오른다 .

소나무의 감상은 특이할 만한 것으로 , 가장 시적인 나무이다 . 소 나무에는 유난히 숭고하고 단아한 기품이 서려 있다 . 대체로 나무에 는 숭고한 것도 있고 비천한 것도 있으며 웅자를 자랑하는 것도 있고 저속한 것도 있다 . 매튜 아놀드가 웅장한 호머의 시풍을 예찬 하듯이 , 중국의 예술가는 소나무가 지닌 대로 ( 大老 ) 의 기품을 찬양한 다 . 이 웅대한 정취를 버드나무에서 찾아보려는 것은 , 마치 스윈번 에게서 웅대한 시풍을 찾아보려는 것처럼 터무니없는 짓이다 .

하나같이 미라고 하여도 여러 가지이다 . 즉 섬세한 미 , 우아한 미 , 장중한 미 , 준엄한 미 , 기괴한 미 , 불균형의 미 , 힘의 미 , 고전미 등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이다 . 이 고전미 때문에 소나무는 특별대우를 받는다 . 그것은 옷 을 단정히 입고 대나무 지팡이를 끌며 산길을 걷는 선비 , 인간 최고의 이상으로서 존경을 받는 은자와 같은 것이다 . 이립옹은 과수원에도 한 그루의 소나무가 없으면 젊은 자녀 들이 우러러 볼 만한 준엄한 늙은 선비가 없는 것과 같다고 말하였 거니와 , 소나무 가운데도 특히 노송을 찬양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 만물은 늙을수록 존경할지니 늙은 것은 위엄이 있기 때문이다 .

소나무와 같은 정취를 갖고 있는 나무는 부처손이다 . 학명은 selaginela involvens 라고 부르며 대개 가지가 청초하게 구부정하니 드리워 있다 . 그 중에서 특히 하늘을 향하여 우뚝 솟은 가지는 청춘 과 희망의 상징으로 보이며 땅을 향해 드리워진 가지는 허리를 굽혀 소년을 어루만지는 할아버지의 모습을 연상케 한다 .

소나무는 침묵과 장중과 초탈을 나타내며 은자의 품격이 있으므로 이것을 감상하는 것은 예술적인 견지에서 뜻있는 일이다 . 소나무의 감상에서 반드시 부수되는 것은 중국 회화에서 자주 찾아볼 수 있는 바위와 나무 그늘 아래를 거닐고 있는 인물이다 . 소나무 아래 설 때 , 인간은 장중하고 원숙한 기품을 느끼고 , 그 고고한 자태에서 특이한 기쁨을 맛보게 된다 . 일찍이 노자는 이렇게 말하였다 . “말이 없는 것이야말로 자연 그대로의 모습이다 . ” 노송은 말이 없다 . 묵묵히 하늘로 치솟아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 이 아래서 많은 아이들이 자라 어른이 되었는데 그 어른이 늙은이로 변했었지 . 늙은 소나무는 단 것 , 쓴 것 맛본 늙은이처럼 모르는 것이 없으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데 , 거기에 신비스럽고 장중한 풍미가 있다 .

또한 우리가 매화를 즐기는 것은 그 가지가 낭만적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향기가 맑기 때문이기도 하다 . 우리의 시적 감상을 위해 택한 나무 가운데서 소나무 , 매화 , 대나무가 세한삼우 ( 歲寒三友 ) 로 알 려져 있으나 좀 우습기도 하다 . 왜냐하면 대나무와 소나무는 상록수 이고 , 매화는 겨울이나 이론 봄에 꽃피기 때문이다 .

매화는 특히 청아한 기품을 지니고 있다 . 싸늘한 공기에 싸인 청 아한 아름다움의 상징이다 . 그 단정한 모습은 세속을 떠난 사람처럼 공기가 싸늘할수록 기품이 있다 . 그리고 난초처럼 은일의 정취가 감 돌고 있다 . 송나라의 은둔시인 임화청 ( 林和請 ) 은 매화는 내 아내요 , 학은 내 아들이라고 하였거니와 , 서호 ( 西湖 ) 의 중앙 한산 ( 寒山 ) 에 있 는 그의 은둔처의 유적은 오늘날 문인과 화가들의 메카로 되어 있 다 . 그의 무덤 아래 그의 아들 학의 무덤도 함께 있다 .

이 시인의 유명한 칠언구에 매화의 향기와 그 풍취가 잘 묘사 되어 있다 .

 

暗香浮動月黃昏 ( 짙은 향기 달 뜨는 황혼에 감돌아라 ).

 

 

매화가 지닌 아름다움의 정수는 이 칠언에 다 표현되어 있으므로 한 글자도 움직일 여지가 없다는 것은 모든 시인들이 다 인정하는 바이다 .

참대가 좋은 점은 그 줄거리와 잎사귀가 화사한 데 있다 . 그러므로 흔히 학자의 가정에서 즐겨 기른다 . 그 아름다움은 온아함에 있다 . 우리는 이 참대로부터 온화하고 그윽한 기쁨을 느낀다 . 가늘고 연약하게 생긴 것이 참대가 지닌 최상의 정취이다 . 그러므로 생죽이 나 화죽이나 간에 두세 그루의 대나무는 한 무더기의 참대와 같이 귀히 여긴다 . 가늘고 연약한 잎사귀가 보기 좋기 때문에 두세 포기라도 그림이 될 수 있다 . 마치 매화 두세 송이가 훌륭한 그림의 테마가 되는 것과 같다 .

가늘고 부드럽게 나부끼는 대나무의 모습이 억센 바위와 잘 조화 된다 . 그러므로 두어 포기의 대나무에 곁들여서 한두 개의 바위가 화폭에 자주 오르게 되는 것이다 . 이러한 바위는 언제나 앙상한 아름다움을 지닌 것으로 묘사된다 .

버드나무는 어디서든지 기르기 쉬운 나무이지만 개천가에 무성하 게 자란다 . 이 나무는 매우 여성적이다 . 그리하여 장조는 이 나무를 우주의 만물 중에서 인심 ( 人心 ) 의 기미 ( 機微 ) 에 접하는 네 가지 사물의 하나로 간주하여 인간의 감상을 자아내게 한다고 말하였다 . 중국 부인의 섬세한 허리를 유요 ( 柳腰 , 버드나무 허리 ) 라고 하거니와 , 중국의 무용수들은 긴 소매와 옷 자락을 번득이며 바람에 흔들리는 버들 가지를 연상케 한다 . 버드나무는 기르기 쉬우므로 중국에서는 곳곳에 사방 1 마일에 걸쳐 심은 데가 많다 . 그 위를 바람이 스쳐갈 때의 모습을 버드나무 물결이라고 한다 .

버드나무 가지에 꾀꼬리가 즐겨 앉기 때문에 그림에 있어서나 또 사실에 있어서 버드나무에 꾀꼬리는 언제나 따라다니게 마련이다 . 매미도 그 가지에 곧잘 붙는다 . 서호 ( 西湖 ) 10 경의 하나인 유랑문앵 ( 柳浪聞鶯 , 버드나무 가지가 바람에 물결치고 꾀꼬리 우짖는도다 ) 이란 이 를 두고 하는 말이다 .

수목의 관상이 단지 수목만의 관상이 아니라 , 반드시 다른 자연 물 , 즉 바위 , 구름 , 새 , 벌레 , 인간 등등과 관련시켜 관상하여야만 그 참된 가치가 나타난다는 것을 명심할 일이다 . 그러므로 장조는 말하였다 . “ 꽃을 심는 것은 나비를 불러들이기 위함이요 , 바위를 쌓아 놓는 것은 구름을 부르기 위함이요 , 소나무를 심는 것은 바람을 맞이하기 위함이다 . 파초를 심는 것은 비를 기다리기 위함이요 , 버드나무를 심는 것은 매미를 청하기 위함이다 . ” 우리는 새소리를 나무와 함께 즐기고 귀뚜라미 소리를 바위와 함께 즐긴다 . 새는 나무 숲에서 노래하고 귀뚜라미는 바위 사이에서 운다 . 중국 사람들은 우 는 귀뚜라미나 매미를 고양이나 개나 그 밖의 가축보다도 훨씬 더 사랑한다 . 모든 가금 ( 家禽 ) 가운데서 오직 학만이 소나무나 매화와 같은 종목에 들 수 있다 . 학은 은자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 학은 물 론이고 백로가 한적한 연못에 희디흰 밝은 자태를 하고 늠름하게 , 또 얌전하게 가만히 서 있는 것을 보아도 중국학자들은 학이 되고 싶은 마음이 저절로 우러난다 .

나는 새를 장 속에서 길러서는 안 된다고 말한 바가 있거니와 이것은 물론 새가 싫어서가 아니라 새를 사랑하는 방법이 따로 있기 때문이다 . 새를 기르는 가장 좋은 방법은 집 주위에 수백 그루의 나무를 심어 거기 이룩한 새의 왕국을 보는 것이다 . 그렇게 하면 아침에 잠에서 깨어나 침상에 있을 때 천사의 노래와 같은 새들의 합창 소리도 듣게 된다 . 자리에서 일어나 옷 을 갈아입고 세수를 하고 이를 닦고 아침 차를 마실 때 , 아름다운 새들이 여기저기서 날아다니는 것을 보면 일일이 맞이하기에 경황이 없다 . 한 마리의 새를 새장에 넣어두고 바라보는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즐거움이다 .

무릇 생활의 즐거움은 우주를 공원으로 간주하고 바다를 연못으로 생각하는 데서 오는 것이다 . 그러므로 모든 생물은 각각 자기 본성에 따라서 살아가게 해야 한다 . 그때의 그 기쁨은 이루 형언할 수 없는 것이다 . 세상의 그 많은 즐거움 가운데서 새를 장에 넣고 물고기를 병에 넣어서 기르는 데서 느끼는 기쁨과 내가 말하는 이 즐거움을 견주어 보라 . 거기에는 얼마나 큰 차이가 있는 것인가 .

 

 

4. 꽃

 

꽃의 감상은 오늘날 보는 바와 같이 엉터리이다 . 그것은 나무의 감상처럼 꽃의 등급이나 순위를 잘 생각하여 일정한 정서와 환경을 어떤 꽃에 결합시키는 것으로부터 시작하여야 한다 . 꽃향기이다 . 재 스민처럼 강렬하여 분명히 맡을 수 있는 것도 있고 , 라일락처럼 미 묘한 것도 있고 , 중국의 난초처럼 기품 있고 맑은 향기를 토하는 것 도 있어 형형색색이다 . 그 향기가 맑고 미묘할수록 고상한 꽃이라고 할 수 있다 .

다음에 문제되는 것은 꽃의 색깔과 모양의 아름다움이다 . 그런데 이것도 실로 천차만별이다 . 어떤 꽃은 풍만한 처녀 같고 어떤 꽃은 말쑥하고 풍취 깊고 조용한 숙녀 같으며 , 어떤 꽃은 빛과 향기로 세상에 대하여 아양을 떠는 것처럼 보이고 , 또 어떤 꽃은 자기 빛과 향기를 자랑하며 꿈결 같은 날을 보내면서 스스로 만족하고 있는 것 처럼 보인다 . 그리고 화려한 빛을 자랑하는 꽃이 있는가 하면 얌전하고 겸손한 꽃도 있다 .

꽃은 우선 외계의 환경과 그 꽃의 시절을 생각하게 한다 . 즉 장미 꽃은 맑게 갠 봄날을 연상하게 하고 연꽃은 서늘한 여름아침을 연상 케 하며 , 물푸레나무는 달 밝은 가을을 연상케 하고 , 국화는 늦가을에 먹는 게 맛을 연상케 하며 , 매화는 눈을 연상케 하여 수선화와 함께 정월의 즐거운 추억에 없어서는 안 되는 것으로 되어 있다 . 모두가 자연히 일어나는 연상들이다 . 어떤 꽃이든지 적합한 환경에서 자라야만 비로소 그 진가를 발휘할 수 있거니와 , 꽃을 사랑하는 사 람이라면 동백꽃이 크리스마스를 연상케 하는 것처럼 꽃을 마음속에 그려보며 여러 계절에 특유한 정경을 생각하기는 손쉬운 일이다 . 국 화와 연꽃은 소나무나 대나무처럼 어딘가 모르게 고상한 정취가 감 돌아 언제나 감상되고 중국 문학에서는 군자의 상징으로 삼는다 . 특 히 난은 그 이국적인 아름다움이 높이 평가되고 있다 . 그리고 매화는 아마 어느 꽃보다도 중국 시인들의 사랑을 받고 있을 것이다 . 이점에 대하여는 앞의 절에서 이미 언급한 바가 있다 . 매화는 새해에 접어들면서 그러니까 네 계절의 꽃 중에서 제일 먼저 피기 때문에 제일화라고 한다 . 여기에는 물론 다른 의견이 없지 않다 . 옛날에는 , 특히 당나라 때에는 모란을 꽃의 왕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 모란은 그 빛과 꽃잎이 풍요하여 부귀와 행복의 상징으로 되어있다 . 즉 모란은 물질적으로 감상되고 매화는 정신적으로 감상된다 .

일찍이 어느 학자가 모란을 크게 칭찬한 일이 있는데 그것은 다 음과 같은 이유에서였다 . 즉 옛날 당나라의 무후가 과대망상적인 변 덕을 부려서 어느 겨울날 정원에 심은 모든 꽃을 일시에 피게 하라고 명령하였다 . 거기에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 다만 그렇게 해보고 싶을 따름이었다 . 그런데 유독 모란만이 용감하게도 몇 시간 늦게 피었으므로 무후의 기분을 크게 상하게 하였다 . 그리하여 몇 천 포 기나 되는 모란을 칙명에 의하여 모두 장안에서 낙양으로 추방해 버 렸다 . 그 후 낙양은 모란이 다투어 피어나 비록 임금의 사랑은 잃었을망정 모란의 명승지가 되었다 . 중국인이 장미를 별로 대단히 여기지 않는 것은 그 빛깔이나 자태가 모란과 동등한 위치에 놓이긴 하지만 , 모란의 호화로운 모습에 눌려 버린 때문일 것이다 . 중국의 첫 기록에 의하면 모란의 종류는 90 가지쯤 되는데 모두 매우 시적인 이름을 갖고 있다고 한다 .

난초는 모란과는 달라서 은둔적인 아름다움을 대표하고 있다 . 인 가에서 멀리 떨어진 깊은 산골짜기에 피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 이 꽃은 사람들이 관상하든 말든 스스로 고독한 아름다움을 즐기는 숨은 덕을 지니고 있다 . 그러므로 옮겨 심더라도 난초의 독특한 생활조건에 맞춰서 길러야 하며 여기에 어긋나면 곧 말라죽어 버린다 . 이런 점에서 우리는 깊은 산골짜기에 피어나는 난초를 깊숙한 안방 에서 성장하는 아름다운 처녀나 , 권세와 명성을 싫어하여 산 속에서 숨어사는 대학자와 비유하게 된다 . 그 향기는 맑기가 이를 데 없다 . 구태여 인간을 즐겁게 하려고 애쓰는 것 같지 않지만 인간 편에서 그 향기를 맡게 되면 누구나 그 신성함에 마음이 끌리게 마련이다 . 이러한 면이 있기 때문에 난초는 세상에 아부하지 않는 군자나 진실 한 우정의 상징으로 되어 있다 . 옛날 책에 “ 난초를 장식한 집에 들 어가서 오랫동안 앉아 있으면 그 향기를 잊어버리게 된다”라고 쓰여 있는데 이것은 향기가 몸에 배였기 때문이다 . 일찍이 이립옹은 난초 를 감상하는 가장 좋은 방법으로서 방마다 난초 화분을 놓지 말고 다만 한 방에만 놓고 그 방에 출입할 적마다 난초의 향기를 즐기라고 하였다 .

매화는 시인 임화정 ( 林和靖 ) 의 꽃이요 , 연꽃은 유교의 이론가 주무 숙 ( 周茂叔 ) 의 꽃이며 , 국화는 시인 도연명의 꽃이다 . 늦가을에 피는 국화는 “ 냉향 ( 冷香 ) ” 이니 “ 냉수 ( 冷秀 ) ” 니 하는 풍취를 지니고 있다 . 말하자면 화려한 모란과의 대조는 누가 보아도 쉽사리 알 수 있다 . 국화는 수백 가지 종류가 있는데 그 종류마다 매우 아름다운 이름을 붙이는 유행에 앞장선 분은 내가 아는 바로는 송의 대학자 범성대 ( 范成大 ) 가 있다 .

모양이나 빛깔이 다 같이 다채로운 것이 국화의 특징이다 . 흰색과 황색이 국화의 본바탕이며 자색과 붉은 색은 변색으로 되어 있으면 등급도 떨어진다 . 그리고 흰 빛과 누런빛은 은분 ( 銀盆 ) , 은령 ( 銀鈴 ), 금령 ( 金鈴 ) , 옥반 ( 玉盤 ) , 옥령 ( 玉鈴 ) , 옥수구 ( 玉繡球 ) 등등 여러 가지 품 종의 이름이 있다 . 그리고 양귀비 , 서시 등 유명한 미인의 이름을 따온 것도 있다 . 여자의 단발 모양을 한 것도 있고 꽃잎사귀가 물결치 는 권모 ( 捲毛 ) 비슷한 것도 있다 . 향기도 품종에 따라서 여러 가지이 지만 사향 ( 麝香 ) 이나 용뇌 ( 龍腦 ) 의 향기가 나는 것을 일품으로 친다 .

연꽃 , 즉 수련은 오직 한 가지 종류뿐이다 . 물 위에 뜨는 줄기와 잎사귀도 함께 한 포기의 꽃으로 생각하고 바라보면 꽃 중의 꽃으로 생각된다 . 그러므로 나는 근처에 연꽃이 없이는 여름을 즐길 수 없다 . 만일 주택가라 연꽃이 없으면 커다란 질그릇에 이 꽃을 옮기면 된다 . 그러나 이 경우에는 단번에 반 마일이나 연이어 피어난 연꽃 의 아름다움―대기 속에 흩어지는 그 향기며 진주 같은 물방울이 달 리는 푸른 잎사귀 하며 이것과 분명히 하나의 대조를 이루는 붉고 흰 아롱진 꽃의 아름다움은 거의 잃게 되는 것이다 . 미국의 수련 ( 水 蓮 , water-lily) 은 중국의 연꽃과는 다르다 . 송나라의 학자 주무숙은 그의 수필 『 애련설 ( 愛蓮說 ) 』 중에 연을 사랑하는 이유를 말하여 연 꽃은 군자처럼 진흙 속에 자라나면서도 더러움에 물들지 않는다고 하였다 .

이 감상법은 일반 유가의 주장과 같다 . 공리적인 견지에서 보면 연꽃에는 버릴 것이 하나도 없다 . 그 뿌리는 청량음료를 만드는 데 쓰고 잎사귀는 과일이나 음식물을 찔 때 그것을 싸는 데 사용되며 , 꽃은 그 모양과 방향에 의하여 애호되고 끝으로 연꽃 열매는 신선의 음식으로 존중되어 날것으로 먹기도 하고 말려 먹기도 하며 또는 설 탕에 담가 먹기도 한다 .

능금꽃을 닮은 해당화는 다른 꽃과 마찬가지로 시인들 사이에서 인기가 있다 . 그러나 두보만은 자기 고향 사천의 명물인 이 꽃에 대하여 한 마디 말도 남기지 않고 있다 . 그 까닭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이야기가 돌고 있으나 가장 그럴 듯한 것은 어머니의 이름이 해당 ( 海棠 ) 이었으므로 어머니에게 경의를 표하는 의미에서 언급을 피한 것이라는 이야기이다 .

향기가 좋은 점에서 난초 위에 놓고 싶은 꽃이 두 가지 있다 . 그 것은 물푸레나무와 수선화이다 . 수선도 내 고향 창주의 특산물이다 . 구근 ( 球根 ) 을 미국에 수출한 액수는 한때 수십만 달러에 올랐으나 , 미국 농무성에서 그 구근에 달려 있는 병원균의 상륙을 막기 위해 신기한 향취를 지닌 이 꽃을 미국 국민으로부터 앗아갔던 것이다 . 그러나 선녀처럼 깨끗한 수선화의 흰 구근에 병원균이 붙어 있으리라고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 그 꽃은 진흙 속에서 기르는 것이 아니고 , 유리나 도자기그릇에 작은 돌을 고이고 물을 부어 심고 주의에 주의를 다하여 길러야 하는 것이다 .

철쭉꽃은 그 아름다움에 반대하여 일반적으로 비극의 꽃으로 되어 있다 . 이 꽃은 뻐꾸기의 피눈물로 싹 튼 것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 즉 철쭉꽃은 계모의 학대로 쫓겨난 형을 찾는 소년이 변하여 피어난 꽃이라는 것이다 .

꽃을 선택하여 그 순위를 정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화병에 꽃을 꽂는 기술도 중요하다 . 이것은 적어도 11 세기 이래의 예술이다 . 19 세기 초에 쓴 『 부생지기 ( 浮生之記 ) 』 의 저자는 한정기취 ( 閑情記趣 ) 의 장에서 훌륭한 구도를 그림 비슷하게 그려가면서 꽃꽂이법을 설명하 고 있다 .

 

해마다 가을이 되면 나는 국화를 매우 사랑한다 . 국화는 화분에 심은 것보다 화병에 꽂는 것이 보기 좋다 . 그러나 화분에 기른 것을 결코 못마땅하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 다만 집에 뜰이 없어 손수 가 꿀 수 없어서 그러는 것이다 . 시장에서 사들이는 꽃은 손질을 철저히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내 취미에도 맞지 않는 것이 태반이었다 . 국화를 화병에 꽂을 때에는 꽃가지를 반드시 기수 ( 우수가 아니라 ) 로 잘라서 어느 화병이나 한 색깔의 꽃을 꽂아야 한다 . 화병의 목은 꽃을 함께 쉽사리 꽂을 만큼 넓어야 한다 . 그 꽃이 여섯 포기가 되든지 서른 포기 또는 마흔 포기가 되든지 모두 똑바로 서도록 꽂아야 한다 . 너무 많이 뭉쳐 있어도 안 되고 너무 성기게 흩어져도 안 되며 , 또 화병의 목에 쓰러지듯 기대게 되어도 안 된다 . 이렇게 위치를 정하는 것을 고근 ( 固根 ) 이라고 한다 . 꽃은 곧게 꽂혀 있을 수도 있고 여러 가지 방향으로 뻗어지는 경우도 있다 . 너무 단조롭게 보이는 것을 피하기 위해 몇 개의 꽃송이를 잘 만져서 정취가 흐르도록 약간 무질서하게 꽂는 것이 좋다 . 잎사귀가 너무 촘촘하여서는 안 되며 , 줄기가 너무 딱딱하여서도 안 된다 .

책상의 크기에 따라서 셋 혹은 일곱 개의 화병을 늘어놓는다 . 이 때에 화병의 수가 너무 많으면 조밀하여 거리에서 팔고 있는 국화의 진열대 같이 보이기 쉽다 . 화병대의 높이도 3 , 4 치 ( 寸 ) 에서 한껏 2 자 5 , 6 치쯤으로 하여 통일된 구성을 가진 그림처럼 높이가 다른 화병이 서로 균형이 맞도록 잘 연결되어 있지 않으면 안 된다 . 높은 화병을 가운데 놓고 낮은 것을 양쪽에 놓거나 낮은 화병을 앞에 놓고 높은 것을 뒤에 놓거나 , 또는 균형을 잡아 한 쌍씩 나란히 놓는 따위의 방 법은 세상에서 흔히 말하는 금회퇴 ( 錦灰堆 ) 의 폐풍이다 . 적당한 간격 을 취하여 배치하는 방법은 각자 회화적 구성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좌우된다 .

 

 

5. 장 ( 張潮 ) 에피그램

 

자연의 즐거움은 비단 시문이나 회화에만 국한된 것이 아님은 이미 서술하였다 . 자연은 인생 전반에 걸쳐 있는 것이다 . 자연은 소리요 , 색깔이요 , 형체요 , 기분이요 , 분위기이다 . 예민한 생활예술가인 인간은 우선 자연의 적당한 기분을 가려내어 그것을 자기의 기분에 조화시키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 이것은 중국의 모든 시인과 문인 들의 한결같은 태도이거니와 그 가장 훌륭한 글을 장조 ( 張潮 ) ― 17 세 기 중엽의 사람―의 저서 『 유몽영 ( 幽夢影 ) 』 속의 에피그램에서 찾아볼 수 있다 . 이 저술은 문학적인 격언을 모은 것으로 이런 종류의 격언집은 중국에 많이 있으나 그 내용에 있어서 장조의 것에 견줄 만한 책은 없다 . 안데르센의 동화가 영국의 옛이야기와 밀접한 관계 를 갖고 있으며 슈베르트의 노래가 민요와 깊은 관계가 있는 것처럼 , 이런 문학적인 격언은 일반사회의 속담과 깊은 관계를 갖고 있다 . 이 책은 많은 사람들이 애독하여 중국 학자들이 즐거운 마음으 로 격언 하나하나에 대하여 비평을 쓰기까지 하였다 . 여기에는 자연의 즐거움에 대한 가장 우수한 것을 인용하기로 한다 . 그러나 인생에 대한 격언 중에도 매우 뛰어난 것이 있어 전편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므로 몇 절을 끝에 수록하기로 한다 .

 

① 무엇이 본연의 모습인가 ?

꽃에 나비가 날아오고 , 산에 샘이 흐르고 , 바위에 이끼가 끼고 , 물에 논냉이가 있고 , 큰 나무에 기어오르는 넝쿨이 있고 , 인간에게 취미가 있는데 이것은 절대로 필요하다 .

꽃은 미인과 함께 즐길 일이요 , 달빛 아래서는 유쾌한 친구들과 술을 즐길 것이며 , 눈 ( 雪 ) 빛은 품격 높은 선비들과 즐겨야 한다 .

꽃을 심는 것은 나비를 부르기 위해서이고 바위를 쌓아두는 것은 구름을 부르기 위해서이다 . 소나무를 심는 것은 우뢰를 부르기 위해 서이며 , 못물을 채워두는 것은 푸른 부평초를 부르기 위해서이고 , 발코니를 마련하는 것은 달을 부르기 위해서이며 , 파초를 심는 것은 비를 부르기 위해서이고 , 버드나무를 심는 것은 매미를 부르기 위해서이다 .

인간은 높은 다락에서 산을 바라보고 , 성벽에서 눈을 바라보며 , 등불 아래 달을 우러러보고 , 조각배를 타고 뜬 구름을 감상하며 , 방안에서 미인을 대한다 . 정경에 따라서 정취도 다르게 마련이다 .

매화 곁에 놓인 바위는 고색이 창연한 맛이 있어야 하고 , 소나무 아래 놓인 바위는 둔중해야 하며 , 대나무를 의지한 물속의 바위는 긴장해 있어야 한다 .

맑은 물은 푸른 산에서 흘러나온다 . 물이 산 빛을 띠기 때문이다 . 명시는 맑은 술에서 우러난다 . 시흥을 술에서 받기 때문이다 .

거울이 미운 여자를 대할 때 , 보기 드문 고귀한 벼루가 비속한 사람의 손에 들어갈 때 , 명검이 평범한 장수의 손에 쥐어졌을 때 만사는 끝장이 난다 .

 

② 꽃과 여자에 대하여

꽃이 시들고 달이 기울고 미인이 박명으로 죽는 것을 보지 말라 .

꽃을 심었다가 잘 자라는 것은 보기가 좋다 . 달이 만월이 되기를 기다려 바라보는 것은 좋다 . 저술은 완성시켜 읽는 것이 좋다 . 미인 은 쾌활한 얼굴을 하고 있을 때 보는 것이 좋다 . 그렇지 못 하면 낙심천만이다 . 미인은 아침 화장을 하고 난 후에 볼 일이다 . 추한 대로 볼 만한 얼굴이 있는가 하면 추하지는 않지만 보기 싫은 얼굴도 있다 . 문법에는 맞지 않으나 애송할 만한 문장이 있는가 하면 문법에 너무 구애되어 읽기 어려운 문장도 있다 . 요즘 소식은 천박한 사람들에게는 말하기 어렵다 .

미인을 사랑하는 심정으로 꽃을 사랑하면 그 꽃의 독특한 아름다 움을 알 수 있다 . 꽃을 사랑하는 기분으로 미인을 사랑하면 그 귀엽고 사랑스러운 것을 알 수 있으리라 .

미인은 말을 할 줄 알기 때문에 꽃보다 낫고 , 꽃은 향기를 품고 있기 때문에 미인보다 낫다 . 양손에 꽃을 잡을 수 없으면 향기로운 꽃을 버리고 말하는 꽃을 잡으라 . 검붉은 색깔의 화병에 꽃을 꽂으려면 그 화병의 크기와 높이가 꽃과 균형이 맞아야 하며 화병의 빛깔과 농담이 꽃과 좋은 대조를 이루도록 해야 한다 . 요염한 아름다움을 지닌 꽃에는 흔히 향기가 없고 몇 겹씩 꽃잎이 중복되는 꽃은 대개 추하다 . 아 , 세상에 완전한 것은 드물도다 . 두 가지 다 겸비한 것은 오직 연꽃뿐이다 .

매화는 사람에게 고결한 느낌을 주고 난초는 그윽한 감을 주며 , 국화는 소박한 맛을 풍기고 , 연꽃은 지족함을 암시한다 . 봄날의 해당화는 인간의 정열을 북돋아 주며 , 모란은 용기를 , 대와 파초는 청 초함을 , 가을의 해당화는 우아한 기품을 보이고 , 소나무에는 속세를 버린 자의 감회가 서려 있으며 , 오동나무는 사람의 마음을 깨끗이 하며 , 버드나무는 사람의 감상을 북돋아 준다 .

미인이 꽃다운 얼굴 , 새의 아름다운 목소리 , 달의 혼백 , 버드나무 의 자태 , 가을 연못의 아름다움 , 옥의 뼈 , 백설 같은 살결 , 그리고 시심을 갖는다면 그 이상 더 흡족할 것이 없으리라 . 만일 이 세상에 책이 없다면 말할 거리도 없어질 것이다 . 그러나 고맙게도 책이 있으므로 읽어야 한다 . 만일 이 세상에 술이 없으면 이야기를 주고받을 재미가 없을 것이다 . 그런데 술이 있다 . 그러므로 마셔야 한다 . 만일 이 세상에 명산이 없으면 말할 재미가 없을 것이다 . 그러나 명산이 있다 . 그러므로 찾아가야 한다 . 만일 이 세상에 꽃과 달이 없으면 이야기할 재미가 없을 것이다 . 그러나 꽃과 달이 있다 . 그러므로 꽃과 달을 즐기며 놀아야 한다 . 만일 이 세상에 재사나 미인이 없다면 이야기할 재미가 없을 것이다 . 그런데 재사와 미인이 있다 . 그러므로 그들을 사랑하고 아껴야 한다 . 거울이 추녀의 적이 되지 않는 것은 거울에 감정이 없기 때문이다 . 만일 감정이 있으면 그녀는 분명히 두들겨 부셔 버릴 것이다 . 방금 사온 아름다운 화분에 심은 꽃에 대해서도 사람은 애정을 느끼는데 하물며 “ 말하는 꽃”에 대 해서랴 !

시주 ( 詩酒 ) 이 없으면 산수도 헛되이 뻗쳐 있을 뿐이고 미인이 없으면 꽃과 달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 재사로서 얼굴이 잘 생기고 미인으로서 재주가 뛰어난 사람은 장수하기 어려운 법이다 . 신이 질투할 뿐만 아니라 , 이런 사람들은 당대의 보배요 또한 만대의 보배이므로 그 신성함이 모독될까 두려워하여 조물주가 그들이 이 세상에 오래 머무는 것을 원치 않기 때문이다 .

 

③ 산수 ( 山水 ) 에 대하여

우주의 만물 중에서 가장 강하게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하 늘에 달이 있고 악기에 거문고가 있고 , 금수에 뻐꾸기가 있고 , 초목에 버드나무가 있다 .

달과 함께 구름을 걱정하고 , 책과 함께 좀벌레를 걱정하며 , 꽃과 함께 폭풍우를 걱정하고 , 재사나 미인과 함께 가혹한 운명을 걱정하 는 것은 부처님의 자비심을 지닌 자이다 .

옛날 어떤 문인은 꽃과 달과 미인이 없으면 이 세상에 태어날 필요가 없다고 말하였다 . 나는 여기에 덧붙여 이렇게 말하려고 한다 . 만일 이 세상에 필묵과 장기와 술이 없으면 세상에 인간으로 태어나 무엇하랴 . 산의 정기 , 물소리 , 달빛 , 꽃의 아름다움 , 문인의 자태 , 미인의 매력 , 모두가 마음을 미혹한다 . 이러한 것 때문에 사람은 잠을 설치며 입맛을 잃기도 한다 .

눈은 고고한 선비를 연상케 하며 , 술은 능숙한 검객을 연상케 하고 , 달은 청교 ( 淸交 ) 의 벗을 연상케 하며 , 산수는 작자 득의 ( 得意 ) 의 시문 ( 詩文 ) 을 연상케 한다 .

무릇 풍경 속에는 지상의 풍경 , 그림의 풍경 , 꿈의 풍경 , 머릿속의 풍경 등이 있다 . 이 지상의 풍경이 지닌 아름다움은 그 깊이와 생생한 윤곽에 있다 . 화면에서의 풍경의 아름다움은 화필과 색깔의 자유로운 배합과 호화로움에 있다 . 꿈에 보는 풍경의 아름다움은 괴 상한 변화에 있다 . 머릿속에 그리는 풍경의 아름다움은 모든 것이 정연히 배치되어 있는 데 있다 .

여행 중에 지나쳐 버리는 풍경을 예술적인 견지에서 추려볼 필요는 없다 . 그러나 거처를 정하여 일생을 보내려는 장소는 취미에 맞는 선택이 필요하게 된다 .

죽순은 채소의 명물 , 이기 ( 李杞 ) 는 과일의 명물 , 게는 물 속 동물 의 명물 , 술은 음식의 명물 , 달은 천계 ( 天界 ) 의 명물 , 서호 ( 西湖 ) 는 산수의 명물 , 송나라의 서정시와 명나라의 극시 ( 劇詩 ) 는 문학의 명물 이다 .

이름 높은 산수에 접하려면 행운이 있어야 한다 . 자기에게 때가 오지 않으면 설사 근처에 있다고 하여도 산수를 찾지 못한다 .

거울에 비치는 그림자에는 빛이 있다 . 그러나 달빛 아래 비치는 그림자는 펜화의 스케치에 불과하다 . 전자는 분명한 윤곽을 지닌 그 림이지만 후자는 뼈대가 없는 그림이다 . 달빛에 지는 산수의 그림자는 천계의 지리요 , 물에 비치는 별과 달의 그림자는 지상의 천문 ( 天 文 ) 이다 .

 

④ 봄과 가을에 대하여

봄은 하늘의 뜻이 자연에 따르는 계절이요 , 가을은 하늘의 뜻이 변천하는 계절이다 .

옛사람들은 겨울을 가리켜 다른 세 계절의 엑스트라 ( 휴식기 ) 라고 하였으나 , 나는 여름을 다른 세 계절의 엑스트라로 본다 . 여름 새벽 에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은 밤의 엑스트라 , 여름밤에 자리에서 일어 나 있는 것은 한낮의 엑스트라 , 낮잠은 사교의 엑스트라이다 . 옛 시인이 말한 바와 같이 나는 진심으로 긴 여름날을 사랑한다 .

사람은 가을의 정신으로 몸을 수련할 일이요 봄의 정신으로 남에게 대할 일이다 .

명문 ( 名文 ) 과 당시 ( 唐詩 ) 는 추기 ( 秋氣 ) 에 더욱 빛나며 , 송나라 서정 시와 원나라의 극시는 춘심 ( 春心 ) 에 향기롭다 .

 

⑤ 소리에 대하여

봄철의 새소리 , 여름의 매미소리 , 가을의 벌레소리 , 겨울의 눈 ( 雪 ) 소리에 귀를 기울여라 . 낮에는 장기 ( 將棋 ) 의 말소리에 , 달빛 아래서 는 피리소리에 , 산에서는 솔방울소리에 , 물가에서는 물결소리에 귀를 기울여라 . 그렇게 해야만 참으로 이 세상에 태어난 보람이 있을 것이다 . 다만 젊은 무뢰한들이 길거리에서 싸움질을 하거나 마누라가 시끄럽게 바가지를 긁을 때는 귀머거리가 되는 것이 상책이다 .

거위가 우는 소리를 들으면 남경에 와 있는 듯한 생각이 나고 , 썰매소리를 들으면 소주나 장주 , 호주에 와 있는 것 같은 생각이 난다 . 바위에 부딪치는 물결소리를 들으면 장강에 와있는 듯싶고 , 수척한 말방울소리를 들으면 서안도중 ( 西安道中 ) 에 있는 듯싶다 .

소리는 좀 떨어져서 듣는 것이 좋다 . 그러나 거문고소리만은 곁에 서 들어도 좋고 떨어져서 들어도 무방하다 . 소나무 아래서 거문고 소리를 들을 때 , 달빛 아래서 피리소리를 들을 때 , 산 여울에서 폭포소리를 들을 때 , 산 속에서 염불소리를 들을 때 , 귓가에 달콤한 향기가 감돈다 .

물소리에는 네 가지가 있다 . 폭포소리 , 샘물이 용솟음치는 소리 , 급류가 흐르는 소리 , 구렁을 흐르는 소리 . 바람소리에도 세 가지가 있다 . 송도 ( 松濤 ) 소리 , 낙엽소리 , 수면을 스쳐가는 거센 바람 소리 . 빗소리에도 두 가지가 있다 . 오동나무와 연꽃 잎사귀에 떨어지는 빗 방울소리 , 처마에서 물통에 떨어지는 빗방울소리 .

 

⑥ 비에 대하여

비는 낮을 짧게 생각하게 하고 밤을 길게 생각하게 한다 .

봄비는 영전을 알리는 칙서와 같고 , 여름비는 죄수에게 내리는 사 면장과 같으며 , 가을비는 만가 ( 挽歌 ) 와 같다 .

봄비는 독서하기에 좋고 여름비는 장기두기에 좋고 , 가을비는 가방 속이나 다락방 속을 뒤지는 데 좋으며 , 겨울비는 술 마시는 데 좋다 . 나는 우신 ( 雨神 ) 에게 편지를 띄워 이렇게 말하고자 한다 . 봄비는 정월보름 후에 내려서 청명절 ( 淸明節 ) 10 일 전까지 계속하여 내리고 , 또한 모내기 때에도 내리도록 하여 주소서 . 여름비는 달마다 초 순과 하순에 내리도록 해 주소서 ( 달구경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 가을 비는 7 월과 9 월의 첫 열흘과 나중 열흘에 내리게 해 주소서 ( 팔월 중 추에는 만월을 즐기기 위해 하루도 비를 내리지 마소서 ) . 겨울의 석 달 동안은 비가 한 방울도 내리지 않게 하여 주소서 .

 

⑦ 달과 바람과 물에 대하여

사람은 초승달이 빨리 기울어지는 것을 탓하고 새벽달이 더디 뜨는 것을 탓한다 .

달빛 아래 경 읽는 소리를 들으면 마음이 점점 세속을 벗어나고 , 달빛 아래 검술을 논하면 용기가 더욱 생기며 , 달빛 아래 시를 논하면 운치가 돌아 속세를 떠나게 되고 , 달빛 아래 미인을 보면 마음이 한없이 번거롭다 .

달을 벗하여 놀고자 하면 달빛이 밝을 때에는 낮은 곳에서 높이 쳐다보고 , 달빛이 뿌옇게 흐려 있을 때에는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것이 좋다

봄바람은 술과 같고 , 여름바람은 차와 같고 , 가을바람은 연기와 같고 , 겨울바람은 맵기가 생강과 같다 .

 

⑧ 한가와 우 정에 대하여

남들이 애쓰는 일에 애쓰지 않는 사람만이 남들이 애쓰지 않는 일에 애쓰게 된다 .

이 세상에서 한가한 시간처럼 반가운 것은 없다 . 한가하다고 해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

한가한 시간은 독서를 하도록 하고 , 명승고적을 찾게 하고 , 좋은 친구를 만나게 하고 , 술을 마시고 , 글을 쓰게 한다 . 세상에 이처럼 즐거운 일이 어디 있으랴 . 구름에 해가 비치면 채운 ( 彩雲 ) 이 되고 산여울이 낭떠러지에 걸리면 폭포가 된다 . 그 인과에 따라서 이름도 변한다 .

우정은 소중하므로 정월 보름을 축하하려면 담담한 벗과 술잔을 나누고 오월 단오를 축하하려면 선량한 친구와 술잔을 나누고 , 칠월 칠석 한 해 한 번 견우직녀가 상봉하는 것을 축하하려면 즐거운 벗들과 술잔을 나누고 , 팔월 추석의 만월을 바라보려면 어진 친구와 잔을 나눌 것이며 , 구월 구일 중앙절에 높은 산에 오를 때에는 낭만적인 친구와 함께 마실 일이다 .

박식한 친구와 이야기를 주고받으면 귀한 책을 읽는 것과 같고 , 시취 ( 詩趣 ) 를 아는 친구와 더불어 이야기를 하면 뛰어난 작가의 시문 을 읽는 것과 같고 , 진실한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면 성경이나 경전을 읽는 것 같고 , 기지에 넘치는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면 소설이나 전기를 읽는 것과 같다 .

한가한 선비에게는 반드시 몇 사람의 심우 ( 心友 ) 가 있다 . 심우란 반드시 생사를 함께 할 것을 맹세한 친구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 심우란 수천 수백 리나 떨어져 있어도 절대로 상대방을 믿어 주며 상대방의 악평을 믿지 않는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다 . 그리고 만일 친 구의 악평을 들었을 때에는 있는 힘을 다하여 옹호하여 유사시에는 “이렇게 하는 것이 좋다” , “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하고 충고하며 , 위기에 처하였을 때에는 도와주는 한편 상대방 몰래 빚을 갚아 주며 , 생각 여하에 따라서는 지나친 친절을 부린다고 할 만한 일이라도 개 의치 않고 힘이 되어 주는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다 .

마음의 벗 , 즉 자기를 알아주는 자는 처첩 ( 妻妾 ) 보다도 친구 사이 에서 찾아보기 쉽다 . 그러나 군신의 관계에서는 심우를 찾아보기가 매우 어렵다 . 명저란 선인이 일찍이 말하지 않은 것을 기록한 책이다 . 심우란 그 가정의 비밀도 알릴 수 있는 친구를 가리키는 것이다 . 시골 사람들은 좋은 친구들과 함께 살아가므로 즐거운 일이다 . 논 밭의 농작물을 식별해 주고 내일의 날씨를 알아맞히는 것밖에는 아 는 것이 없는 농민이나 나무꾼들에게는 곧 권태가 오기 쉽다 . 친구에도 여러 종류가 있다 . 시를 쓰는 친구가 제 1 이요 , 이야기와 농담 을 하는 잘 하는 친구가 제 2 요 , 화심 ( 畫 心 ) 을 지닌 친구가 제 3 이요 , 노래를 잘 부르는 친구가 제 4 요 , 술을 잘 마시는 친구가 제 5 이다 .

 

⑨ 서적과 독서에 대하여

청년으로서 글을 읽는 것은 울타리 사이로 달을 바라보는 것 같고 , 중년으로서 글을 읽는 것은 자기 집 뜰에서 달을 바라보는 것 같으며 , 늙어서 글을 읽는 것은 발코니에서 달을 바라보는 것 같다 . 독서의 깊이가 체험에 따라서 다르기 때문이다 .

글자가 없는 글 , 즉 “ 인생의 책”을 읽는 자만이 가장 오묘한 진리의 말을 할 수가 있다 . 말로 풀기 어려운 도를 해득하는 자만이 부처님의 가장 높은 예지를 이해할 수 있다 . 고금의 불멸의 문학은 다피와 눈물로 쓰인 것이다 .

『수호전 ( 水滸傳 ) 』 은 비분 ( 悲憤 ) 의 서 ( 書 ) 요 , 원숭이의 서사시 , 『 서유 기 ( 西遊記 ) 』 는 정신적 각성의 서 , 『 금병매 ( 金甁梅 ) 』 와 같은 호색소설 ( 好色小說 ) 은 정한 ( 情恨 ) 의 서다 .

문학은 탁상의 풍경이요 풍경은 지상의 문학이다 .

독서는 무엇보다도 최대의 기쁨이다 . 다만 사기 ( 史記 ) 를 읽으면 기 쁨보다 분개가 앞선다 . 그러나 분개 속에도 기쁨은 있다 .

경서 ( 經書 ) 는 겨울에 읽어야 한다 . 겨울은 마음이 집중하는 때이기 때문이다 . 사서 ( 史書 ) 는 여름에 읽어야 한다 . 여름은 여가가 많기 때 문이다 . 선철 ( 先哲 ) 의 글은 가을에 읽어야 한다 . 사상에 매력이 있기 때문이다 . 후대 ( 後代 ) 작가의 책은 봄에 읽어야 한다 . 봄은 대자연이 다시 소생되는 때이기 때문이다 .

문인의 전술론은 대개 서재 속의 병학 ( 兵學 ) 이다 . 문자 그대로 지상의 전술론 무장이 문학을 논할 때에는 대개 이학 ( 耳學 ) 이다 .

독서법의 요체 ( 要諦 ) 를 깨달으면 만물이 다 글로 변하는 것을 알 수 있다 . 산수도 글이요 , 장기도 글이요 , 술도 글이요 , 달도 꽃도 다 글이다 . 현명한 여행가는 가는 곳마다 구경할 만한 풍경이 있는 것 을 알게 된다 . 서적과 역사는 풍경이다 . 술도 시도 풍경이다 . 달도 꽃도 풍경이다 .

옛날 어느 문인은 말하였다 . 10 년 동안을 독서로 소비하고 , 10 년을 여행에 바치고 , 10 년을 독서와 여행의 보존과 정리에 쓰고자 한다고 . 그러나 나는 그 보존에 10 년을 허비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 2, 3 년으로 충분하다 . 그래도 독서와 여행의 소망을 채울까 말까이다 . 아니 그 두 배나 다섯 배라도 오히려 부족하다 . 욕심대로라 면 황구연 ( 黃九淵 ) 이 말한 바와 같이 300 세의 수명을 보존하는 이외 에 도리가 없다 .

“시는 시인이 빈곤이나 불행에 빠진 연후에야 비로소 잘 짓게 된다”라고 옛사람은 말했다 . 불행한 사람에게는 할 말이 많고 따라서 자기를 표현하기 쉽다는 생각에서 한 말일 것이다 . 부귀영화를 누리 는 사람들은 가난에 대한 한탄도 없을 것이고 불우에 대한 원망도 없이 언제나 바람과 구름과 달과 이슬의 시만 짓는다면 좋은 시가 나올 리 만무하다 . 이런 사람들이 시를 잘 짓는 유일한 방법은 나그네 길에 나서서 눈에 뜨이는 모든 것―산이나 , 들이나 , 풍속이나 , 생 활이나 , 때로는 전화 ( 戰禍 ) 나 기근으로 고생하는 백성들의 모습―어 쨌든 모든 사물을 자기 시속에 도입하는 일이다 . 자기의 노래를 위해 이렇게 남의 비애를 빌어 오면 구태여 가난뱅이가 되고 불행한 자가 되기를 기다리지 않아도 좋은 시를 쓰게 될 것이다 .

 

⑩ 생활에 대하여

번뇌는 우주의 토대를 밑받침하고 재질은 우주의 지붕을 색칠한다 .

군자에게 멸시를 받기보다는 거리의 소인들에게 욕먹는 것이 낫 다 . 유명한 학자에게 인정을 못 받기보다는 시험에서 낙제를 당하는 것이 차라리 낫다 .

인간은 한 편의 시와 같이 살아야 하며 사물을 그림처럼 보아야 한다 .

차분히 눈에 들어오지만 생각하면 서글프고 쓸쓸하기 짝이 없는 정경이 있다 . 안개나 비가 그것이다 . 시적으로 보이지만 감당하기 어려운 것이 있다 . 병이나 가난이 그것이다 . 귀여운 듯하지만 실은 야비한 목소리가 있다 . 매춘부가 유인하는 소리가 그것이다 . 나 자신은 농민이 될 수는 없다 . 기껏해야 뜰에 물을 뿌리는 일이나 할까 나는 나무꾼이 될 수는 없다 . 풀을 뜯는 일쯤이 고작일 것이다 .

한스럽고 속상하는 일이 내게는 열 가지가 있다 .

 

1.   책은 좀이 먹기 쉽고 ,

2.   여름밤은 모기 때문에 엉망이 되기 쉽고 ,

3.   망월 ( 望月 ) 때 비가 새기 쉽고 ,

4.   자칫하면 국화 잎사귀가 마르기 쉽고 ,

5.   소나무는 커다란 개미들이 떼 지어 웅성거리기 쉽고 ,

6.   대나무 잎사귀는 뚝 떨어져 땅 위에 쌓이기 쉽고 ,

7.   물푸레나무와 연꽃은 시들기 쉽고 ,

8.   담쟁이 넝쿨에는 뱀이 잘 숨고 ,

9.   담 밑의 꽃나무는 가시가 밉고 ,

10.   고슴도치에는 독이 있어 먹지 못 한다 .

 

누가 방 안에서 창지 ( 窓紙 ) 에 글자를 쓰고 있는 것을 밖에서 보면 참으로 아름답게 생각된다 . 꽃이 되려거든 망우초 ( 忘憂草 ) 가 되어라 . 새가 되어도 뻐꾸기는 되지 말라 ( 피눈물에서 철죽 꽃이 돋아날 것만 같다 ) .

태평스러운 세상에 청렴하고 공정한 군주의 다스림을 받아 산과 개울이 흐르고 호수가 있는 고장에 태어나 궁색하지 않은 집에서 자 라고 , 이해성 있는 아내를 맞아 영리한 자식을 두는 것 , 이것이야말로 나의 완전한 인생이다 .

산이나 계곡을 가슴에 그려 보라 . 사람은 도시에서 살아도 산 속에서 사는 것과 같은 생활을 할 수 있으며 , 구름에 마음을 쏟으면 지옥도 선경으로 변한다 .

고요한 밤에 홀로 앉아 달을 불러들여서 나의 슬픔을 호소할 수 있다면… . 벌레를 청하여 나의 회한을 토로했으면… .

도시에 사는 사람은 회화를 풍경으로 보고 , 화분을 정원으로 간주 하고 , 책을 친구로 삼아야 할 것이다 .

저명한 학자에게 자식의 교육을 의뢰하고 , 명산을 답사하여 시험 논문을 쓰는 방법을 연구하며 , 유명한 문인에게 대작 ( 代作 ) 을 부탁하 는 것 , 이 세 가지 일은 터무니없는 외도이다 .

승려는 술을 근신할 필요가 없다 . 다만 비속 ( 卑俗 ) 을 벗어나면 족하다 . 여자는 문학을 해득할 필요가 없다 . 다만 무엇이 예술적으로 흥미 있는가를 알면 된다 .

세리 ( 稅吏 ) 의 시달림을 받으면 지세 ( 地稅 ) 를 빨리 바쳐야 한다 . 승려와 불법을 이야기하는 것을 즐기려면 가끔 절에 희사를 해야 한다 . 명성이라는 이 하나의 유혹을 물리치면 그 밖의 모든 것은 손쉽게 얻을 수 있다 . 석 잔의 술만 있으면 세상만사가 태평이다 .

술은 차의 대용이 되지만 차는 술의 대용이 될 수 없다 . 시는 산문의 대용이 되지만 산문은 시의 대용이 될 수 없다 . 원 ( 元 ) 의 극시는 송 ( 宋 ) 의 서정시의 대용이 될 수 있으나 , 송의 서정시는 원의 극시의 대용이 될 수 없다 . 달빛은 등불의 대용이 되지만 등불은 달빛의 대용이 되지 못 한다 . 붓은 입의 대용이 되지만 입은 붓의 대용이 되지 못 한다 . 식모는 하인의 대용이 되지만 하인은 식모의 대용이 되지 못 한다 . 가슴속의 사소한 부정은 술로 씻을 수 있으나 , 천하의 부정은 검이 아니고서는 제거할 수 없다 .

분주한 사람의 뜰은 본채의 바로 곁에 있어야 한다 . 그러나 한가한 사람의 뜰은 본채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도 무방하다 .

산 속에 묻혀 사는 기쁨을 갖고 있으면서 그것을 즐길 줄 모르는 사람―어부 , 나무꾼 , 농부 , 식목인 , 승려―이 있다 . 정원과 정자와 첩을 갖는 쾌락을 알면서 그것을 즐기는 법을 모르는 사람―부유한 상인과 고관―이 있다 .

고통을 겪는 것은 쉬운 일이지만 가려움을 견디기는 어렵다 . 쓴맛을 견디기는 쉬우나 신 맛을 견디기는 어렵다 .

한인 ( 閑人 ) 의 벼루는 물론 고급품이라야 한다 . 그러나 분주한 자의 벼루도 마찬가지이다 . 향락을 위한 첩은 얼굴이 아름다워야 한다 . 그러나 혈통을 이으려는 첩도 또한 얼굴이 아름다워야 한다 .

황새는 낭만적으로 보이고 말은 용감하게 보인다 . 난초는 세속을 떠난 사람의 기쁨을 띠고 있으며 소나무는 옛사람의 장중한 품격이 나타나 있다 .

나는 언젠가는 대규모의 나체 무도회를 개최하려고 한다 . 첫째로 모든 시대의 재사들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하여 , 둘째로 모든 시대의 미인들의 영혼과 친하기 위해서이다 . 다만 참된 고승을 발견하였을 때에만 실천에 옮겨 그 고승에게 사회를 부탁하고자 한다 .

맛있는 요리를 다급히 먹고 , 훌륭한 경치를 조급히 보고 , 심각한 감정을 경솔히 나타내고 , 아름다운 하루를 먹어라 마셔라 보내고 , 재물을 호사삼매 ( 豪奢三 眛 ) 로 즐기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것이다 .

 

 

 

 

 

 

제 10 장 교양의 즐거움

 

 

 

 

 

 1. 지삭과 상식

 

교육 또는 교양의 목적은 지식 가운데 식견을 키우며 , 행실 가운데 훌륭한 덕을 쌓는 데 있다 . 교양이 있는 사람이나 또는 이상적으로 교육을 받은 사람이란 반드시 독서를 많이 한 사람이나 박식한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 사물을 옳게 받아들여서 사랑하고 올 바로 혐오하는 사람을 뜻한다 .

어떤 것을 사랑하고 어떤 것을 미워할 것인가를 아는 것은 식견이 있기 때문이다 . 역사의 연대나 여러 가지 수자로 머릿속이 꽉 차 있으며 러시아나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일어난 일들에 대하여는 잘 알 고 있지만 그 태도와 견해가 전혀 다른 사람과 어떤 회합에 함께 앉게 되는 것 같이 불유쾌한 일은 없다 . 그러한 사람들을 나는 여러 번 만난 일이 있는데 그들은 화제에 오른 어떤 일이나 다소의 사실이나 수자에 대해서는 알고 있지만 견해를 들어 보면 전혀 다르다 . 그러한 무리들은 학식은 있으나 판단력 , 즉 식견이 없는 것이다 . 지 식은 사실이나 보도의 암기에 관계되는 것이지만 식견 , 즉 판단력은 예술적인 판단이 문제되는 것이다 . 학자에 대하여 중국인은 대체로 학식 , 행위 , 식견을 구별하고 있다 .

역사가의 경우는 특히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 어떤 역사 서 적이 아무리 학문적인 양심에서 저술되었다고 하더라도 통찰과 명찰 이 결여되어 역사상의 인물과 사건의 판단이나 해석에 저자가 어떠 한 독창적인 견해나 깊은 이해력을 피력하고 있지 못 하는 경우를 흔 히 찾아볼 수 있다 . 이런 학자를 가리켜 우리는 식견이 없는 사람이 라고 말하는 것이다 . 어떤 보고에 밝다거나 사실의 자료를 수집하는 일처럼 쉬운 일은 없다 . 역사의 어느 시기에는 쉽사리 머릿속에 간직할 수 있는 사실들이 많이 있다 , 그러나 그 가운데서 중요한 일을 고르기 위해 판단을 내리는 것은 어려운 일로 그 장본인의 견해에 의거하기 마련이다 .

그러므로 유식한 사람이란 애증의 기준이 올바로 선 사람이다 . 이것을 우리는 식견이라고 부른다 . 식견에는 매력이 있다 . 이 식견 또는 올바른 판단력을 지니려면 사물을 철저히 고찰하는 능력과 판단의 독자성과 사회적 , 문학적 , 미술적 , 학구적 , 모든 면의 기만적인 위협에 굴하지 않는 꿋꿋한 태도가 필요하다 . 우리네 성년 층의 생활은 두말할 것도 없이 거짓으로 가득 차 있다 . 거짓 명성 , 거짓 재력 , 거짓 애국주의 , 거짓 정치 , 거짓 종교 , 가짜 시인 , 가짜 화가 , 가짜 독재자 , 가짜 심리학자 등등… .

식견은 용기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 오늘날 중국은 언제나 식 ( 識 ) 과 담 ( 膽 ) 을 관련시켜 생각하고 있다 . 용기가 다름 아닌 판단의 독자성이라는 사실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바이며 , 실로 보기 드문 미 덕이라고 하겠다 . 후세에 이름을 떨친 사상가나 문인들은 모두가 유 년 시대부터 지성과 용기를 아울러 지니고 그 독자성을 잃지 않았 다 . 그리하여 이들은 당대에 가장 애독되는 시인이라고 할지라도 함 부로 호의를 갖지 않았던 것이다 . 그러나 참으로 한 사람의 시인에게 쏠릴 때에는 그 이유를 분명히 공언할 수가 있었다 . 이것을 우리는 문예상의 식견이라고 한다 . 그들은 또한 남들의 애호를 받는 그림이라 할지라도 자기의 예술적인 감각에 저촉될 때에는 결단코 이를 인정하려고 들지 않았다 . 이것은 미술상의 식견이다 . 그들은 또한 유행 철학이나 시대에 영합한 이론은 아무리 그 배후에 위대한 철학자의 이름이 깔려 있더라도 결코 감동되는 일이 없었다 .

어떤 저자가 그들을 설복시키면 그 저자가 옳은 것이고 그들을 설복시키지 못 하면 그들이 옳고 저자가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 이것은 지식상의 식견이다 . 물론 이러한 지적인 용기 , 또는 판단의 독자성을 간직하려면 거기에는 소박한 어린애다운 자신이 필요하다 . 그런데 이러한 자신이 깃들어 있는 자아야 말로 우리가 사수할 수 있 는 유일한 것으로 , 만일 이 세상의 학도가 개인적인 판단의 권리를 포기하였을 경우에는 인생의 모든 기만적인 일에 대하여 눈을 감을 수밖에 없는 처지에 이르게 된다 . 공자는 사려가 없는 학식이 , 학식이 없는 사려보다 더 위험하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던 것 같다 .

그는 말하고 있다 . “배우고 생각하지 않으면 우매해지고 생각만 하고 배우지 않으면 위태로워진다 . ” 이렇게 경고한 것을 보면 공자는 그 시대의 많은 학자들이 후자의 유형에 속해 있는 것을 목격한 것 같다 . 이러한 경고는 오늘의 학계에도 절실히 요구된다 . 주지하 는 바와 같이 오늘의 교육과 학교제도는 대체로 지식을 장려하는 데 치중하여 판단력을 기르는 것을 희생시키는 경향이 있다 . 이리하여 지식을 주입하는 것을 최종의 목적으로 생각하고 지식만 있으면 인텔리라고 생각하고 있다 . 그런데 학교에서 이렇게 사색을 등한시한 것은 무슨 까닭인가 ? 즉 교육제도가 즐거운 지식의 추구를 기계적이 고 규칙적이고 획일적이고 수동적인 주입주의로 왜곡해 버린 것은 무슨 까닭인가 ? 그리고 어찌하여 사색보다도 지식을 존중하는가 ? 심 리학 , 중세역사 , 논리학에서 비롯하여 종교에 이르는 필수과목과 선 택과목을 일단 수료하였다는 이유만으로 대학 졸업생을 인텔리로 부 르게 된 것은 어찌 된 영문인가 ? 성적증명서나 졸업증명서는 무엇 때문에 있는가 ? 그리고 점수나 졸업장이 학생들의 머릿속에서 중요 한 위치를 차지하여 교육의 참된 목적을 저버리게 한 것은 무슨 까 닭인가 ?

이유는 간단하다 . 오늘의 교육이 대량생산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 그것은 공장과 동격이 되어 버렸다 . 공장 안에서는 무슨 일이든지 모두가 생명이 없는 기계적인 체계에 의하여 움직이게 마련이다 . 학교의 명예를 지키고 , 그 제품을 사회에 비싸게 팔기 위하여 학교는 졸업증명서를 발행하여 그 제품을 증명하는 것이다 . 한편 졸업증서와 함께 등수를 매길 필요가 있기 때문에 점수제도가 생긴다 . 그리고 점수를 매기려면 기억력의 테스트를 해야 된다 .

교육 전체가 완전히 논리적으로 연쇄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에 벗어날 길이 없다 . 그러나 기계적인 시험이나 고사의 결과는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치명적인 것이다 . 그것은 식견이나 판단력을 기르기보다는 오히려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얼마나 많이 기억하느냐 에 중점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 나도 선생을 하고 있기 때문에 잘 알고 있지만 , 막연한 문제에 대한 막연한 의견을 묻기보다는 역사의 연대에 대하여 일련의 문제를 제출하는 것이 훨씬 손쉽다 . 그리고 답안지에 점수를 매기기도 편하다 .

이러한 제도가 수립된 이후로 학문은 내가 말하는 식견의 계발이 라는 참된 이상에서 멀리 떠나게 되었다는 사실을 흔히 저버리고 있 다 . 아니 오늘 현재에도 점점 멀리 떠나고 있는 것이다 . 위험은 실로 여기에 있다 . 우리는 여기서 다음과 같은 공자의 말씀을 음미할 필요가 있다 .

“사실을 기억만 하여 얻은 지식만으로는 남의 스승이 될 자격이 없다 . ”

교육에 있어서 강제성을 띤 과목이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 비록 셰익스피어의 작품이라고 하더라도 반드시 읽어야 한다는 법은 없다 . 소위 교육을 받았다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알고 있어야만 하는 역사 지리의 지식이라는 것이 있으며 , 학교는 그 최소한도의 지식을 가르쳐 주는 곳이라는 어리석은 생각을 갖고 있는 것 같다 . 그러나 나는 스페인의 수도가 어딘지 잘 모르며 하바나는 쿠바 옆에 있는 섬의 이름이라고 생각한 적도 있었지만 , 그래도 꽤 인텔리로 자부하 고 있다 . 학교 당국의 사고방식에 의하면 , 필수과목을 마친 자라면 다만 마쳤다는 사실만으로 인텔리로서 알아야 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알고 있다는 것이다 . 여기에 필수과목을 정하는 위험성이 있다 . 알아야 할 것은 학교에서 다 배웠으므로 졸업만 하면 공부도 하지 않고 독서도 하지 않는 사람이 많은 것은 당연한 일이다 .

어떠한 형식으로나 인간의 지식을 시험하거나 측정할 수 있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 장자는 현명한 말을 하였다 . “나의 생애는 한 정이 있고 , 지식에는 한정이 없다 . ” 요컨대 학문의 탐구는 신대륙의 탐험이나 아나톨 프랑스의 이른바 “ 심혼의 모험”과 같은 것으로 그 탐구정신이 개척적 , 탐구적 , 호기적 , 모험적인 심정으로 일관되면 괴롭기는커녕 오히려 즐거운 것이다 . 그러므로 규칙적 , 획일적 , 수동적 인 지식의 주입주의를 적극적 , 발전적 , 개인적 즐거움으로 옮겨놓아야 한다 . 졸업증서나 점수제도가 일단 폐지되거나 또는 존속되더라도 다만 형식적인 것에 불과하게 되면 학생들은 적어도 학문연구의 목적이 무엇인가를 반성하지 않을 수 없게 될 터이므로 한결 적극적 인 자세로 나가게 된다 . 그러나 오늘날과 같은 상태에서는 학생들에 게 학문연구의 목적은 명백해졌다 . 즉 신입생은 2 년생이 되기 위하여 공부하고 , 2 년생은 3 년생이 되기 위하여 공부하는 것이다 . 그들은 이 점에 대하여 아무런 의문도 느끼지 않고 있다 . 그러나 학문을 연구하는 본래의 목적과 아무런 관계도 없는 것은 모두 일소하여야 한다 .

학술을 연구하는 것은 주로 자기 자신의 일이요 , 남의 일이 아닌 것이다 . 그런데 오늘날에 있어서 학생들은 거의가 대학의 당사자들을 위하여 , 부모를 위하여 , 또는 미래의 아내를 위하여 공부하고 있 다 . 다시 말하면 근엄하고 까다로운 스승들 앞에서 근신하기 위하여 또는 재학 중에 많은 학비를 대준 부모에게 불효자라는 말을 듣지 않기 위하여 , 혹은 학교를 졸업하여 많은 급료를 받아 가족을 부양 하기 위해 공부하고 있는 것이다 . 이러한 사고방식에는 도덕이 결핍되어 있다 . 학술연구는 누구를 위한 것이 되어서는 안 되며 오직 자기 자신의 과업이라야 한다 . 그렇게 되어야만 비로소 교육을 받는데 즐거움을 느끼고 또한 적극적으로 나갈 수 있다 .

 

 

2. 유 희로서의 예술과 품격으로서의 예술

 

예술은 창조 (creation) 인 동시에 오락 (recreation) 이다 . 나는 이 두 가지 중에서 오락 , 즉 순수한 정신적 유희로서의 예술이 한층 더 중 요하다고 생각한다 . 회화이건 , 건축이건 , 문학이건 , 불후의 명작이면 나는 모든 형식의 예술을 존중하지만 , 참된 예술정신은 굳이 불후의 걸작을 남기려 들지 않고 다수의 민중의 예술을 오락으로써 즐기게 되었을 때 비로소 더욱 일반화하여 널리 보급된다고 생각한다 .

대학에서 전국 경기에 나가는 소수의 운동선수를 기르기보다도 잘 하고 못 하고를 불문하고 학생 전체가 테니스나 또는 축구를 하는 것 이 중요한 것처럼 , 한 국가에서 한 사람의 로댕을 낳는 것보다도 국민 전체가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독자적인 창작을 즐기는 것이 소 중하다 . 극히 소수의 직업적인 예술가가 있는 것보다도 전국의 학생들에게 흙으로 조각을 만드는 법을 가르치고 모든 은행장이나 경제 전문가가 크리스마스카드를 손수 만들 수 있게 되어야 할 것이다 .

이것은 기발한 의견일지 모르지만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 즉 모든 분야에 걸쳐서 아마추어를 기르고 싶은 것이다 . 그리하여 아 마추어 철학자 , 아마추어 시인 , 아마추어 사진사 , 아마추어 요술사 , 자기 집을 손수 짓는 아마추어 건축가 , 아마추어 음악가 , 아마추어 식물학자 , 아마추어 비행가 등등이 되어야 할 것이다 . 어느 날 밤에 친구가 무턱대고 소나타를 치고 있는 것을 들으면 일류 전문가의 연 주회를 듣고 있을 때와 같은 즐거움을 느낀다 . 친구들 가운데 아마추 어 요술사가 있으면 누구나 무대에서 하는 프로 요술사의 재주보다 더 기쁨을 느끼며 부모들은 저마다 셰익스피어의 연극을 구경하기보 다 자기 자식의 아마추어 연극을 보기를 더욱 즐기는 것이다 .

아마추어 예술은 자발적인 것이다 . 예술의 올바른 정신은 오직 이 자발성에 있는 것이다 . 중국에서는 그림을 전문적인 화가만 그리는 것이 아니라 , 본래 학자들의 오락이었다는 사실을 내가 매우 중요시하는 것이 이 때문이다 . 예술의 유희적인 정신이 상실되어 있지 않을 때 비로소 상품화를 면할 수 있다 .

사람들은 이렇다 할 이유가 없이 노는 것이다 . 즉 노는 데 이유가 있어서는 안 된다 . 이것이 유희가 유희인 까닭이다 . 유희는 그 자신으로서 훌륭한 이유를 갖고 있는 것이다 . 이러한 견해는 진화론에 의하여 충분히 입증되었다 . 미란 생존경쟁의 원리로써 설명할 수 없 는 것으로 동물에게는 해로운 미의 형식도 있다 . 예컨대 지나치게 뻗은 사슴의 뿔이 그것이다 . 그것은 분명히 미일 터이지만 사슴으로 서는 귀찮은 존재이다 . 다윈은 식물계나 동물계의 미는 자연도태의 원리로 설명할 수 없음을 알고 , 자웅도태라는 2 차적인 원리를 끄집 어내야만 하였다 . 예술이란 한갓 육체적 , 정신적 에너지의 과잉으로 자유롭고 구속이 없는 그 자신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한 , 예술과 예술의 본질을 이해할 수 없다 . 이것은 비난을 많이 받고 있 는 “ 예술을 위한 예술”이라는 공식이다 .

이것이 정치가들이 관여할 수 없는 문제로 단지 일체의 예술을 창조하려는 심리적 기원에 관해 논쟁할 여지가 없는 사실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 히틀러는 여러 가지 형식의 현대예술을 부도덕하다고 해서 부정하였지만 , 내가 보기에는 강력한 지배자에게 아첨하기 위 해 미술관에 새로 장식하는 히틀러의 초상을 그리는 화가야말로 부 도덕한 자라고 생각한다 . 그런 것은 예술이 아니다 . 상업예술은 흔 히 예술적인 창조정신을 해친다고 말하거니와 정치적인 예술은 창조 정신을 죽여 버리는 것이다 . 왜냐하면 자유야말로 예술의 생명이기 때문이다 . 오늘의 독재자들은 정치적 예술을 만들어 내려고 하지만 터무니없는 소리이다 .

아무튼 예술의 본질을 이해하려면 , 에너지 과잉으로서의 육체적인 기초에까지 소급해 올라가야 한다 . 이것은 예술적 충동 또는 창조적 충동으로서 알려지고 있다 . 그런데 이것은 인스피레이션 ( 영감 ) 이라고 말하는 것을 보더라도 예술가는 충동이 어디서 오는지 거의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 그것은 과학자가 진리를 발견하려는 충동이나 탐험가가 새로운 섬을 발견하려는 충동과 마찬가지로 다만 정신적인 긴박한 상태의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 . 그러므로 상세한 설 명을 할 수는 없다 . 오늘날 생물학 덕분에 인간의 정신생활의 모든 됨됨이 여러 가지 기관과 기관을 지배하는 신경계통에 작용하는 혈액소의 호르몬의 증감과 분배에 의하여 조정된다는 사실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 분노나 공포감까지도 단지 아드레날린 (adrenalin) 의 공급의 문제에 지나지 않는다 . 따라서 천재라고 하는 것도 선분비의 과잉상태라고 볼 수 있다 .

“ 호르몬”이라는 현대적 지식을 갖고 있지 않은 중국의 어느 무명작가는 인간의 모든 활동의 원동력은 체내에 있는 벌레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하였다 . 그에 의하면 간통은 인간의 장을 깨물어 욕정을 충족시키지 않고서는 배기지 못 하는 벌레의 조작이다 . 야심이나 침 략근성이나 권세욕 같은 것도 그 야망을 이루기까지는 그 사람을 진 정시키지 않는 다른 벌레의 탓으로 일어나는 것이다 . 저술을 하는 것 , 예컨대 소설을 쓰는 것도 작자로 하여금 어쩐지 창작을 하지 않고서는 배기지 못 하게 하는 저 벌레 탓인 모양이다 . 호르몬이냐 벌레냐 ? 나는 후자의 편을 들고자 한다 . 즉 벌레의 편이 훨씬 실감이 난다 .

이 벌레가 지나치면 , 아니 보통일 때에도 인간은 무엇이고 창작을 하지 않고서는 견디지 못 한다 .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마음을 진정시킬 수 없는 것이다 . 아이들이 에너지가 넘치면 보통 걸음을 하지 않고 달리거나 뛰거나 한다 . 어른들의 에너지가 넘치면 걸음걸이가 도약이나 무도로 변한다 . 그런데 무도는 비능률적인 도보법이다 . 그 러나 여기서 비능률적이라고 함은 공리적인 견지에서 보아 에너지의 낭비가 있다는 의미이며 예술적인 견지에서 하는 말은 아니다 . 무도를 하는 사람은 어느 한 지점에 도달하는 최단 거리인 직선을 가지 않고 왈츠로 원을 그리며 나아간다 . 아닌 게 아니라 춤을 추면서 애 국자가 되려고 다짐하는 사람은 없다 . 자본주의의 이데올로기나 , 파 쇼나 프롤레타리아의 이데올로기에 따라서 춤을 추라면 춤의 유희성 과 영광스러운 저 능률의 정신을 파괴하는 것이 된다 . 코뮤니스트가 그 정치적인 목적을 달성하려고 하거나 충실한 동지가 되려고 하면 모름지기 최단 거리를 걸어갈 일이요 , 춤 같은 것을 추어서는 안 된 다 . 코뮤니스트는 노동의 신성함은 알고 있을 터이지만 유희의 신성 함은 모르고 있는 모양이다 .

예술의 본질이 유희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면 예술과 도덕의 관 계를 밝히는 데 하나의 도움이 된다 . 미란 아름다운 자태에 불과하 다 . 그리고 그 아름다운 자태는 명화나 아름다운 다리와 마찬가지로 행위 속에도 있다 . 예술은 회화 , 그림이나 음악이나 무용보다 훨씬 광범위한 것이다 . 왜냐하면 훌륭한 자태는 경기를 하는 운동선수에 게서도 찾아볼 수 있고 유년 시대에서 청년시대 , 장년시대 , 노년시 대에 걸쳐 각각 그 시기에 적합한 아름다운 생활을 한 사람들에게서 도 찾아볼 수 있다 . 또한 선거작전을 빈틈없이 하여 날로 최후의 승 리를 향해 나아가는 대통령선거에서도 아름다운 자태는 있으며 사람 의 웃는 얼굴에서도 , 침을 뱉는 태도에서도 아름다운 자태는 찾아볼 수 있다 . 중국의 늙은 관리들은 매우 조심스레 침을 뱉도록 수련을 쌓아 왔는데 이 경우가 그것이다 . 인간의 모든 행동에는 어떤 자태와 표현이 있으며 , 모든 표현형식은 예술의 범주 안에 속한다 . 그러므로 표현의 기법을 음악이나 무용이나 , 혹은 회화 등 소수의 분야로만 분류할 수는 없다 .

예술을 이렇게 넓은 의미로 해석하면 훌륭한 행위의 자태와 훌륭 한 예술의 품격은 밀접한 관계를 갖게 되어 , 다 함께 중요시된다 . 장 단이 잡힌 시의 운율처럼 우리들 신체의 운동도 여러 가지 호사스러 운 생각을 하게 마련이다 . 즉 에너지가 넘치면 반드시 침착하고 우아 한 자태에 대하여 관심을 갖게 된다 . 이 침착함과 우아함은 자기는 육체적으로 어떤 능력을 지니고 있다는 의식 , 즉 사물을 훌륭하게 처 리할 수 있다는 의식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 좀 더 추상적으로 말하면 아름다운 일을 하는 사람에게서는 반드시 이 미를 찾아볼 수 있다 . 아름다운 일 , 즉 슬기로운 일을 하려는 충동은 본래 심미적인 충동이다 . 교묘한 살인 , 쥐도 새도 모를 음모―이러한 행위는 허용될 수는 없지만 보기에 아름다운 것은 사실이다 . 좀 더 구체적인 일상생활의 자질구레한 일 속에서도 이 침착하고 우아한 능력을 찾아볼 수 있다 . 우리가 “ 생활의 즐거움”이라고 부르는 것은 모두가 이 범주에 속한다 .

언어와 생활과 풍속에 아름다움을 요구하는 경향은 중국에서는 진나라 (3, 4 세기경 ) 말기에 최고도에 이르렀다 . 당시는 청담 ( 淸談 ) 이 유 행한 시대로서 여자 옷의 장식은 극도에 도달했고 미남자라는 이유 로 이름을 떨친 자들도 많았었다 . 아름다운 수염을 기르는 풍습이 유행하였으며 , 남자는 넓적하고 긴 상의를 입고 일부러 점잔을 부리 며 길을 걸어 다녔던 것이다 . 그리고 무엇이든지 우아한 것을 소중히 여겼다 . 말꼬리 털을 단으로 뭉쳐 자루를 달고 , 모기나 파리를 쫓는 진 ( 塵 ) 이라는 것이 이야기를 주고받을 때의 중요한 도구가 되 어 있었다 . 그런 환담을 문예작품에서 진담 ( 塵談 ) 이라고 오늘날까지도 말하고 있다 . 이야기를 나누면서 진을 우아하게 돌리며 흔드는 데서 비롯된 말이다 . 부채도 또한 청담에서 하나의 우아한 아름다움 을 나타내는 몫을 하였다 . 이야기를 나누면서 그 부채를 펴기도 하고 부치기도 하고 접기도 하는 것이 보기에 매우 아름다웠던 것이다 . 마치 미국의 늙은이들이 연설을 하면서 안경을 꼈다 벗었다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 효용이라는 점에서 보면 진이나 부채가 영국 인의 무테안경보다 더 쓸모가 있을지 모르지만 결코 그런 효용을 목 적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를 주고받는 자태의 일종으로 , 지팡 이가 산책할 때에 자태의 역할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

내가 서양에서 본 가장 아름다운 취미는 프러시아의 신사들이 응접실에서 귀부인에게 인사를 할 때에 구두 뒤축을 맞추며 탁 하고 소리를 내거나 , 독일의 처녀들이 한쪽 다리를 뒤로 끌면서 인사를 하는 것이었다 . 나는 참으로 아름다운 제스처라고 생각하였는데 유 감스럽게도 이러한 풍습은 오늘날 행하여지고 있지 않다 .

교양 있는 관리의 이야기를 듣는 것도 매우 유쾌한 일이다 . 그 말은 아름다운 운율을 밟고 있다 . 음악적인 북경 발음에는 우아한 악센트가 있어 한 마디 한 마디 천천히 고상하게 발음한다 . 훌륭한 학자가 그 북경 말을 하는 것을 들으면 중국의 문학적인 어휘가 구슬처럼 흘러나온다 . 그 학자가 목소리를 내며 웃거나 침을 뱉는 것도 유심히 보아두어야 한다 . 처음의 두 박자는 숨을 들이키는 소리이며 이로써 목청을 깨끗이 하고 남은 한 박자로 뱉을 준비를 한다 . 침을 뱉는 마지막 한 박자는 빠르고 힘이 있다 . 레가토 ( 음을 연결하여 부드 럽게 낸다 ) 후에 오는 폐쇄음이라고나 할까 . 아무튼 침도 미적으로 뱉는다면 그 속에 들어 있는 세균이 공중에 뿌려진들 어떠랴 . 내 몸뚱이만 보더라도 그 따위 세균과 싸워 이길 자신이 있다 . 나는 오늘 날까지 세균의 영향은 별로 받지 않고 살아왔었다 . 관리들의 웃음에 도 장단에 맞는 예술적인 리듬이 깃들여 있다 . 우선 다소 기교를 부려서 배시시 웃다가 나중에 당당히 크게 웃는 것이다 . 흰 머리털을 한 관리라면 한결 부드러운 느낌을 주기 때문에 호감이 간다 .

중국인이 생각하고 있는 예술의 품 ( 品 ) 은 매우 흥미가 있다 . 이것 은 인품이나 품격으로도 불린다 . 가령 제 1 품 , 제 2 품의 예술가니 시 인이니 하고 말할 때에는 등급을 매기는 격이 된다 . 그리고 좋은 차를 마시거나 시음하는 것을 “ 차를 품한다”라고 말하기도 한다 . 즉 품은 일정한 행동에 나타난 개인의 인격에 관한 표현의 모든 분야가 이 말에 포함되어 있다고 보겠다 . 예컨대 질이 나뿐 노름꾼 , 즉 성 급하고 손버릇이 나쁜 노름꾼은 도품 ( 賭品 ) 이 나쁘다고 말하게 된다 . 노름꾼으로서의 사람됨이 좋지 않다는 뜻이다 . 술을 지나치게 마시고는 걸핏하면 야비한 행동을 하는 술꾼은 주품 ( 酒品 ) 이 나쁘다 , 즉 술꾼으로서의 사람됨이 좋지 않다고 한다 . 기객 ( 棋客 ) 의 좋고 나쁜 것은 기품 ( 棋品 ) 이라는 말로 표현한다 .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시의 평론은 “ 시품 ( 詩品 ) ”이라고 하여 여러 시인들의 등급을 매긴 책이다 . 물론 “ 화품 ( 畫 品 ) ” 이라고 하는 미술 평론의 책이 몇 권 나와 있는 것도 사실이다 . 이 품이라는 관념 과 관련하여 중국인 전부가 인정하는 어떤 신조가 생겨났다 . 그것은 예술가의 작품은 엄밀하게 그가 지니고 있는 품격에 의하여 규정된 다는 사고방식이다 .

이 품격은 도덕적이며 동시에 예술적인 것이기도 하다 . 그것은 인간의 오성 ( 悟性 ) 과 고결한 마음 , 존숭 ( 尊崇 ) 하고 사소한 일과 , 범용 ( 凡庸 ) , 저열 ( 低劣 ) 을 초월하고 억제력을 높이는 것이다 . 이런 의미에 서 품이란 영어의 “ manner ” 또는 “ style ” 에 가까운 뜻을 내포하고 있다고 하겠다 . 자유분방하여 낡은 풍습에 얽매이지 않는 예술가는 분방한 스타일을 나타낼 것이고 , 선량하고 다정한 사람은 그러한 스 타일 안에 다감한 마음씨와 섬세한 감정을 담을 것이며 , 고아한 대 예술가는 매너리즘 에 굴복하기를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 중국인은 어떠한 화가라도 화가 자신의 도덕적 , 미적인 품격이 위대하지 않으 면 거장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는 신념을 은연중에 인정해 온 것이 사실이다 .

그러므로 서화를 평할 경우에도 기법의 우열을 따지는 것이 아니고 예술가 자신의 품격이 높은지 낮은지에 기점을 두고 있다 . 기법은 완벽하면서도 작가의 낮은 품격을 표현한 작품이 있다 . 이와 같은 것은 소위 영어에서 말하는 뚜렷한 특징 (character) 이 없는 작품으로 취급되는 것이다 .

이리하여 우리는 모든 예술의 중심 문제에 도달한 셈이다 . 중국의 유명한 장군이요 또한 재상이기도 하였던 증국번 ( 曾國藩 ) 은 가족에게 보낸 편지에서 서도의 오직 두 가지 살아 있는 원리는 형태와 표현이라고 하였는데 당시의 일류 서예가로 꼽히던 하소기 ( 河昭基 ) 가 이 공식을 인정하여 자기의 높은 식견을 칭찬하였다고 말하고 있다 .

예술이란 모두가 구체적인 것이므로 기계적인 문제 , 즉 반드시 습 득해야 할 기법의 문제가 언제나 따르게 마련이다 . 그러나 한편 예 술은 정신의 소산이기도 하므로 모든 형식의 작품이 지니고 있는 중 요한 요소는 하나의 품격이기도 하다 . 그것은 한낱 기법을 초월한 예술가의 품격으로 작품에 있어서 없어서는 안 될 유일한 요소이다 . 저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작자의 판단과 그 표현양식과 심미감이 다 . 이 품격 , 즉 표현의 개성이 기법 때문에 말소될 위험은 언제나 있는 것이다 . 사실 그림이나 , 문학이나 , 연극이나 , 초보자에게 가장 어려운 것은 자기 개성을 발휘하는 일이다 . 이것은 초보자들이 형식 , 즉 기법에 눌리는 결과임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 그러나 이 개성적인 요소가 결핍되면 어떠한 형식도 결코 뛰어나다고 할 수 없다 .

모든 형식에는 움직임이 있다 . 이 움직임은 골프 선수가 내려치는 골프채의 움직임이든 , 로켓처럼 성공을 향해 줄달음치는 사나이의 움직임이든 , 혹은 경기장에서 공을 몰고 뛰어다니는 축구선수의 움직임이든 , 한결같이 아름다운 것이다 . 예술에는 개성적인 표현이 넘쳐 있어야 한다 . 그리고 그 표현력은 기법에 구애되지 않고 기법 속 에서 자유자재로 약동할 수 있어야 한다 . 커브를 돌아가는 기차에도 , 돛에 바람을 흠뻑 받아 전속력으로 달리는 요트에도 실로 아름다운 움직임이 있는 것이다 . 하늘을 나는 제비 , 먹이를 향해 쏜살같이 달려드는 매 , 혹은 멋진 자세로 결승점에 뛰어드는 우승한 말에게도 아름다운 움직임이 있다 .

우리는 모든 예술이 품격을 갖기를 요구한다 . 그 품격이란 예술가 의 인격이나 , 영혼이나 , 심정이나 , 또는 중국인이 말하는 생각 등을 작품이 암시하고 계시하는 것을 가리킨다 . 예술작품에 인격이나 품격이 나타나 있지 않으면 생명이 없다 . 아무리 심미안이 높아도 기법이 완벽한데 지나지 않으면 작품에 생명력을 부어 넣을 수 없는 것이다 . 즉 품격이라는 높은 개성적인 요소가 결핍되면 미 자체가 평범한 것이 되어 버린다 . 할리우드의 스타를 동경하는 많은 아가씨들이 이 이치를 모르고 마를레네 디트리히나 쟌 하로의 흉내를 내기에 급급하여 널리 인재를 구하고 있는 영화감독은 안타깝게 생각하 고 있다 . 평범한 아름다운 얼굴은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지만 개성이 있는 얼굴은 좀처럼 찾아볼 수 없다 . 그런 아가씨들은 어찌하여 마리 드레슬러의 연기를 연구하지 않을까 . 모든 예술은 하나이다 . 영화의 기법이건 , 회화이건 , 문예작품이건 , 표현이 곧 품격이라는 같 은 원리 위에 서 있는 것이다 . 마리 드레슬러 , 라이오넬 베리모어의 연기를 보면 실제로 창작 스타일의 비결을 깨달을 수 있다 . 그 인격의 매력을 기르는 것이 모든 예술의 중요한 기초이다 . 왜냐하면 예 술가가 아무리 잔재주를 부려도 그 품격은 작품 속에 반드시 나타나 기 때문이다 .

품격은 도덕적으로도 길러야 하거니와 예술적으로 길러야 하며 그 러기 위해서는 학식과 교양이 아울러 필요하다 . 교양은 취미에 가까 운 것으로 예술가에게는 자연히 갖추어지는 것이지만 , 예술작품을 보고 큰 기쁨을 느끼는 것은 오직 학식의 밑받침이 있을 경우이다 . 이것은 특히 그림과 서도에 있어서 분명히 나타나는 사실이다 . 글씨를 보면 그 서예가가 수많은 빼어난 서예이론 서적을 본 사람인지 아닌지 곧 알 수 있다 . 만일 본 사람이라면 그 학식은 서예가에게 어떤 옛 풍격을 줄 것이다 . 그러나 서예가는 나아가서 자기의 심혼 , 즉 품격을 그 서예 속에 투입시켜야 한다 . 이러한 품격은 사람에 따 라서 다르다 . 섬세하고 감상적인 사람이면 그런 품격의 서체를 나타 낼 것이며 , 억세고 용감한 사람이면 자연히 그와 같은 서체를 취할 것이다 . 그러므로 우리는 회화와 서도 , 특히 서도에 있어서 미적 특질이나 미의 여러 가지 범주를 찾아볼 수 있다 . 그리고 완성된 작품 의 아름다움과 예술가 자신의 심혼의 아름다움은 누구나 가려낼 수 있다 . 변덕스럽고 방자한 아름다움도 있을 것이요 , 사나운 힘을 과 시하는 아름다움도 있을 것이다 . 웅장하고 막힘없는 아름다움도 , 정 신적 자유의 아름다움도 , 용감하게 돌진하는 아름다움도 , 낭만적인 매력을 풍기는 아름다움도 있을 것이며 , 자제의 아름다움 , 차분히 가라앉은 우아한 아름다움 , 준엄한 아름다움 , 소박하고 둔중한 아름 다움 , 단순히 잘 정리되고 균형이 잡힌 아름다움 , 신속의 아름다움 , 그리고 경우에 따라서는 의식적으로 표현한 추악하고 괴상한 아름다 움도 있을 수 있는 것이다 . 그런데 오직 하나 실재하지 않기 때문에 불가능한 미의 형식이 있다 . 그것은 분투하고 노력하는 아름다움 , 즉 분발하는 생활의 아름다움이다 .

 

 

3. 독서에 대하여

 

책을 읽는 즐거움은 옛날부터 교양 있는 생활의 한 매력으로 생각 해 왔었다 . 그리하여 독서는 오늘날에도 책을 읽을 수 있는 특권을 좀처럼 누리지 못 하는 사람들로부터 존중되며 부러움의 대상이 되어 있다 . 독서의 즐거움은 평소에 책을 읽는 사람의 생활과 책을 읽지 않는 사람의 생활을 비교해 보면 곧 알 수 있다 . 평소에 책을 읽지 않는 사람은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자기만의 세계에 갇혀 있다 . 즉 그 생활은 어떤 틀에 박혀 있다 . 그 사람과 접촉하여 이야기를 나 누는 것은 극히 소수의 친구들에 국한되며 , 보고 듣는 것은 거의 신 변에서 일어나는 사소한 일들뿐이다 . 그리하여 그는 이 감금상태에서 벗어날 길이 없다 . 그러나 한번 책을 손에 들기만 하면 사람은 곧 별천지에 들어가게 된다 . 만일 그 책이 양서라면 독자는 곧 세계 인류의 이야기꾼의 한 사람과 만나게 되는 것이다 . 그는 독자로 하여금 먼 별천지로 , 아득한 옛날 세계로 데리고 가서 마음속의 번거로움을 덜게 해주며 , 독자가 일찍이 미처 몰랐던 인생의 여러 가지 모습에 대하여 이야기해 준다 . 고서는 유명 ( 幽明 ) 을 달리하는 세계와 독자를 연결시켜 차차 읽어나가는 동안에 저자는 어떤 얼굴을 가진 사람이었 을까 , 어떤 타입의 인물이었을까 하고 생각하게 된다 .

맹자도 중국의 대역사가였던 사마천도 같은 말을 한 적이 있다 . 하루의 두어 시간만이라도 별천지에서 그날그날의 번뇌를 끊을 수 있다면 육체적인 감옥 속에 갇혀 있는 사람들이 부러워할 만큼 특권 을 가진 것이 된다 . 이러한 환경의 변화는 심리적인 효과로 볼 때 , 여행과 같은 것이다 . 그뿐만 아니라 책을 가까이 하며 언제나 사색과 반성의 세계에 출입할 수 있다 . 비록 물리적인 현상을 서술한 책이라 하더라도 그러한 물리현상을 직접 보거나 체험하는 것과 책에서 읽고 아는 것과는 많은 차이가 있다 . 책을 읽을 경우에는 물리적 인 현상은 하나의 구경거리이며 , 따라서 독자는 하나의 구경꾼의 입 장에 서게 되는 것이다 . 가장 좋은 책은 우리들을 이런 구경꾼의 입장에서 명상적인 기분에 잠기게 하는 것으로 , 사실을 보고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다 . 이러한 견지에서 볼 때 신문을 보는 데 소모되는 막대한 시간을 독서라고 할 수 없다 . 일반 신문 독자들은 명상적인 가치가 없는 사실이나 사건의 보고에만 접하기 때문이다 .

독서란 무엇인가에 대하여 가장 적절하게 말한 사람은 내가 생각 하기에는 송나라의 시인 소동파의 친구였던 황산곡 ( 黃山谷 ) 이다 . 그 는 말하였다 . “ 선비가 사흘 동안 책을 읽지 않으면 스스로 이야기하는 말이 무미건조하게 느껴지고 거울에 비친 자기 얼굴이 미워진다 . ” 즉 그에 의하면 독서는 사람에게 매력과 정취를 주므로 이외에 달리 더 바랄 것이 없으며 이 점을 노리는 독서야말로 참된 예술 (Art) 라고 부를 수 있다는 것이다 . 정신의 향상과 같은 것은 독서의 목적이 아니다 . 독서는 정신을 향상시키기 위한 것이라는 낡은 생각을 하며 책을 읽으면 , 즐거움은 완전히 사라져버린다 .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은 필경 다음과 같은 혼잣말을 곧잘 할 것이다 . “나는 셰 익스피어와 소포클레스도 다 관심을 가져야겠다 . 그리고 엘리엇의 『 Five Foot Shelf 』를 읽고 지식을 길러야겠다 . ”

이런 사람의 학식은 결코 자기 것이 될 수 없다 . 그는 하루 저녁에 애써 『 햄릿』을 읽고 악몽에서 깨어난 듯한 얼굴을 한다 . 그러나 그가 얻은 것은 요컨대 『 햄릿』을 읽었다는 것뿐이다 . 이런 의무 관 념에서 책을 읽는 사람은 독서법을 모른다 . 독서를 사무적으로 하는 것은 상원의원이 연설을 하기 전에 서류나 보고를 훑어보는 것과 같 다 . 자료나 요목을 찾아보는 것이 독서일 수 없다 .

황산곡에 의하면 인간의 용모에 매력을 더하고 이야기에 그 풍미를 주는 것이 독서의 유일한 목적이라고 한다 . 그런데 용모의 매력 이라고 하더라도 단순한 미모와는 좀 다르다 . 황산곡의 이른바 보기 싫은 풍모란 육체적으로 추한 얼굴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 추하면 서도 사람의 마음을 끄는 얼굴도 있고 아름다워도 전혀 흥미 없는 얼굴도 있다 .

나의 중국인 친구 가운데 머리가 폭탄처럼 생긴 사나이가 있는데 , 언제 보아도 호감을 느끼게 된다 . 사진만 보고 말하자면 서양사람 중에서 제일 잘 생긴 얼굴은 G.K. 체스터튼의 얼굴일 것이다 . 코 밑 수염하며 , 안경 , 짙은 눈썹 , 주름이 잡힌 미간의 선 , 이러한 것들이 야릇하게 엉켜있다 . 이 사진을 본 사람은 아마 그 내부에 무수한 사상이 약동하고 있어 , 유난히 사람을 쏘아보는 눈에서 그 사상이 언제고 뛰쳐나올 것 같은 인상을 받게 되는데 이런 얼굴이 황산곡이 말하는 아름다운 얼굴이다 . 분이나 입술연지로 단장한 얼굴이 아니라 , 오로지 진실한 사색을 일삼음으로써 가꾸어진 얼굴이다 .

이야기의 풍격은 독서의 방법 여하에 달려 있다 . 즉 말하는 태도에 멋을 지니느냐 못 지니느냐는 독서하는 방법에서 오는 것이다 . 독자가 만일 책 속에 담겨 있는 고상한 멋을 자기 것으로 한다면 그의 이야기에 자연히 멋이 배게 되고 글에도 스스로 멋이 풍기게 마 련이다 .

그러므로 나는 멋이나 취미가 모든 독서의 열쇠라고 생각한다 . 음 식물의 기호와 마찬가지로 취미는 역시 그 사람 개인의 것이다 . 가 장 위생적인 식사법은 좋아하는 음식을 먹는 것이다 . 자기의 소화력 에 자신이 서기 때문이다 . 독서도 이와 같아서 어떤 사람에게는 살로 가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독이 될지도 모른다 . 그러므로 선생은 자신의 독서 취미를 학생들에게 강요할 수 없으며 , 부모라도 자식들 이 자기와 같은 취미를 갖기를 바라서는 안 된다 . 읽는 사람이 흥미가 없으면 독서는 시간 낭비밖에 되지 않는다 . 원중랑의 말대로 “ 즐겨 읽지 않는 책은 마땅히 동댕이쳐야 할 것이다 . 그리하여 다른 사람이나 읽게 할 일이다 . ”

그러므로 꼭 읽어야 하는 책이란 이 세상에 있을 수 없는 것이다 . 우리의 지적 감흥은 나무처럼 성장하고 강물처럼 유동한다 . 수액이 있는 동안은 나무는 성장할 것이요 , 샘이 솟아오르는 한 물은 흐르게 마련이다 . 그 물이 화강암초에 부딪치면 돌아서 흐르고 , 깊은 골짜기에 이르면 잠시 빙빙 돌고 , 깊은 산 연못에 접어들면 거기서 기 꺼이 쉬고 , 급한 낭떠러지에서는 분류 ( 奔流 ) 가 된다 . 이와 같이 아무 힘도 들이지 않고 목적도 없이 흐르지만 언제나 반드시 바다로 들어 가게 마련이다 .

만인이 반드시 읽어야 하는 책이란 세상에 없다 . 다만 어느 사람이 어느 때 어느 고장에서 어느 환경 아래서 일생의 어느 시절에 읽어야 하는 책만이 있을 수 있다 . 나는 독서란 차라리 결혼처럼 어떤 운명이나 인연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 하긴 성서와 같 은 책은 만인이 함께 읽어야 하지만 그것도 역시 읽어야 할 시기가 있다 . 사상과 체험이 걸작을 읽을 만한 정도가 아직 되지 않았는데 걸작을 읽으면 뒷맛이 쓴 법이다 . 일찍이 공자는 “ 50 이 되어서 『 역경』을 배우면 큰 실수가 없을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 그러니까 『 역경』은 40 세쯤 된 나이로는 읽어서 안 된다는 것이다 . 『 논어』에 실린 공자의 이야기는 실로 온화한 품격과 원숙한 지성이 넘쳐 있으나 , 읽는 사람의 내부세계가 충실하지 못 하면 그 진정한 맛을 모른다 .

그리고 같은 독서에 같은 책이라 하더라도 시기가 다르면 감동도 다르다 . 저자와 친히 이야기를 나눈 후거나 또는 저자의 얼굴을 사 진으로 보고 나서 읽으면 그 즐거움이 한결 더 깊고 , 저자와 사이가 나빠진 연후에 읽으면 또 다른 맛이 있다 . 40 세에 『 역경』을 읽어도 어느 정도의 풍미는 맛볼 수 있겠지만 50 세가 되어 변화무쌍한 인 생의 모습을 잘 바라본 연후에 읽으면 별다른 감동을 받게 된다 . 그래서 무릇 양서는 두 번쯤 읽어야 한다 . 그래야만 소득도 있고 또한 즐거움도 새로워진다 .

독서는 저자와 독자 사이에 이루어지는 행위이다 . 따라서 여기서 얻어지는 소득은 독자의 통찰과 체험에서 오는 것과 저자의 통찰과 체험에서 오는 것이 있다 . 송나라 유학자 정이천 ( 程伊川 ) 은 말하였다 . “ 논어의 독자는 어디나 있다 . 읽어도 아무런 감동도 느끼지 못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한두 줄에서도 환희를 느끼는 사람도 있고 , 자기도 모르게 기뻐서 덩실덩실 춤을 추는 사람도 있다 . ”

마음에 맞는 저자를 발견한다는 것은 지적 발전을 하는 데 있어서 큰 사건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 이런 때에 영혼의 친화현상이 나 타난다 . 그러므로 우리는 고금의 작가들 가운데서 그 영혼이 자기의 영혼과 가까운 분을 찾아내야 한다 . 그래야만 사람들은 독서에서 참 으로 좋은 마음의 양식을 얻을 수가 있다 . 자기가 사숙하는 스승을 찾으려면 남에게 의지해서는 안 된다 . 자기가 심취할 사람은 남이 알 바가 아닌 것이다 . 어쩌면 자기도 잘 모를지 모른다 . 그것은 이를테면 첫눈에 반하는 것과 같은 것이어서 아무개를 사랑하라고 남의 권고를 받을 성질의 것이 아니며 , 일종의 본능의 힘으로 알게 되는 법이다 . 이러한 정신적 스승을 발견한 예는 역사상에 많이 나타나 있다 . 몇 백 년을 사이에 두고 살고 있으면서도 책을 통하여 사상과 감정이 서로 통하면 , 자기 모습을 새로 찾아낸 듯이 생각될 것이다 . 중국인의 표현에 의하면 서로 이끌리는 영혼은 하나의 같은 화신인 것이다 . 즉 다시 태어난 것이다 . 소동파는 장자나 도연명의 화신이라고 하며 원중랑은 소동파의 환생으로 알려지고 있다 . 소동파는 처음으로 장자를 읽었을 때 어릴 적부터 장자와 똑같은 것을 생각하고 , 똑같은 견해를 갖고 있는 듯이 느꼈다는 것이다 .

원중랑은 어느 날 밤에 어떤 조그마한 시집을 뒤적거리다가 아직 이름도 들은 일이 없는 같은 시대의 시인 서문장을 발견하였다 . 그 는 침상에서 뛰어내려 옆에 있는 친구를 불렀다 . 그러자 그 친구도 또한 그 시집을 읽고 감탄해 마지않는 것이었다 . 그리하여 두 친구가 함께 탐독하며 감탄을 금치 못 하고 있는 것을 하인이 보고 어리둥절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다고 한다 .

조지 엘리엇도 루소를 처음 읽었을 때에 하도 감격하여 마치 전 기가 오는 것 같았다고 하였다 . 니체가 쇼펜하우어를 읽었을 때에도 그러하였다 . 그러나 쇼펜하우어는 고집이 센 스승이었고 , 니체는 격 정적인 성격을 지닌 제자였으므로 나중에 스승을 배반하였다 .

우리가 책에서 어떤 소득을 얻으려면 이런 독서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 즉 심취할 수 있는 작자를 발견해야 하는 것이다 . 그러한 작자는 애인에게 첫눈에 반하듯이 모든 것이 다 좋게만 보인다 . 이 경우에 애인의 키 , 얼굴 , 머리빛 , 목소리 , 웃음소리 모두가 잘 보인다 . 이것은 학생이 선생으로부터 배워서 아는 그런 성질의 것이 아니다 . 독서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 문체나 견해나 사고방식 등에 조금도 흠 잡을 데가 없다 . 그리하여 독자는 한 줄 , 한 귀절을 탐독하기 시작한다 . 원래 정신적 친화력으로 맺어졌으므로 모두 흡수하여 소화한다 . 작자가 주문을 외면 독자는 곧잘 그 주법에 걸리며 때로는 목소리나 거동이나 웃는 모습 , 말투까지도 작자를 닮게 된다 . 이리하여 글로 인연을 맺은 애인이 되어 그 책에서 자기 영혼을 살찌게 하는 자양분을 모조리 흡수해 버린다 . 몇 해가 지나야 비로소 걸려든 주문이 풀리고 다소 싫증이 나면 또 새로운 애인을 구한다 . 서너 번 애인을 갈아 가면서 단물을 남김없이 빨아먹은 다음에 이제는 자기 자신이 저자로 나서게 된다 . 그러나 세상에는 이런 사랑에 빠지지 않는 독자도 많다 . 그것은 마치 바람이나 피우고 다닐 뿐 아무도 사 랑하지 않는 사람과 같다 . 이런 독자는 책을 곧잘 읽기는 하지만 아무것도 얻는 것이 없다 .

독서법을 이렇게 해석해 보면 어떤 의무나 책임감에서 책을 읽으 려는 생각은 아예 말아야 한다 . 중국에서는 흔히 각고면려 ( 刻苦勉勵 ) 라고 해서 학생들을 격려하려고 한다 . 옛날에 각고면려를 한 유명한 학자가 있었는데 밤에 독서하다가 졸리면 송곳으로 다리를 찌르곤 하였다 . 또 어떤 학자는 밤중에 공부를 하는데 , 어린 종더러 옆에 있다가 졸면 불러서 깨우게 하는 것이었다 . 이것은 실로 어리석은 일이다 . 책을 읽을 때 옛 철학자가 자기에게 말을 건네어도 졸리면 곧 침상에 들어 잠을 자야 한다 . 송곳으로 다리를 찌르거나 어린 종에게 흔들어 깨우게 해서까지 책을 읽어서 무슨 소득이 있겠는가 . 이런 사람은 독서의 즐거움을 전혀 모르고 있다 . 상당히 연구열이 있는 학도라면 자자면학 ( 孜孜勉學 ) 이니 , 각고면려니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 몰라도 , 학문에 열중하면 자연히 그렇게 되어 글을 사랑하는 것이다 .

이 점을 알게 되면 독서할 때와 장소를 어떻게 택할 것인가 하는 물음에 대한 회답이 스스로 우러나게 된다 . 즉 읽고 싶으면 어디서 읽어도 무방하다 . 독서의 즐거움을 알게 되면 학교에서 읽어도 좋고 학교 밖에서 읽어도 무방하다 . 아니 학교 같은 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 학문을 하고 싶은 사람에게는 어디 가나 훌륭한 학교가 있는 법이다 .

옛날 증국번은 아우가 서울에서 제일 좋은 학교에 가고 싶다는 말에 회답하는 편지에 이렇게 써 보냈다 . 공부를 하고 싶으면 시골 학교라도 족하다 . 공부는 사막에서도 할 수 있다 . 사람들이 오가는 길거리에서도 할 수 있다 . 그리고 나무꾼이나 목동의 신분으로도 할 수 있다 . 공부할 의사가 없으면 시골 학교뿐만 아니라 조용한 시골 가정이나 심지어 신선이 사는 섬까지도 공부하기에 적당치 못 한 곳 이 되는 것이다 . 흔히 세상에서는 책을 읽을 때 으레 책상에 마주앉 아 억지로 공부하는 태도를 취하고 방안이 너무 춥거나 의자가 너무 딱딱하거나 햇빛이 너무 밝거나 하면 그 때문에 독서가 안 된다고 불평하는 사람이 있다 . 그런가 하면 글을 쓸 때 모기가 너무 덤벼드 느니 종이가 너무 반들거리느니 혹은 밖에서 너무 떠드느니 하고 짜 증을 내며 글을 쓸 수 없다는 사람도 있다 . 송나라의 대학자였던 구 양수 ( 歐陽修 ) 는 삼상 ( 三上 ) 을 가장 좋은 장소라고 하였다 . 삼상이란 침상 ( 机上 ) , 마상 ( 馬上 ) , 측상 ( 厠上 ) ―변소 마룻바닥 위―을 가리키는 것이다 . 청나라의 유명한 학자로 고천리 ( 顧千里 ) 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이분은 한여름에 벌거벗고 책을 읽는 버릇이 있어 그 소문이 자 자하였다 .

한편 책을 읽고 싶은 생각이 없을 때에는 사계절 어느 때에도 책과 가까이 하지 않는 태도도 충분히 이해가 간다 . 즉 “ 봄에 독서를 하는 것은 춘정에 거슬린다 . 여름은 그저 낮잠이나 자며 보내라 . 가을이 속절없이 지나 겨울이 오면 다음에 돌아올 봄철을 기다리라 . ” 그렇다면 참된 독서법은 무엇일까 ? 대답은 간단하다 . 즉 독서할 마음이 우러나면 책을 읽을 것 , 이것이다 .

독서를 참으로 즐기려면 어디까지나 기분에 맡겨야 한다 . 표지가 부드러운 이소 ( 離騷 ) 라든가 오마르 하이얌의 책 한 권을 손에 들고 애인과 함께 강둑으로 그 책을 읽으러 간다 . 그때 하늘에 아름다운 구름이 떠 있으면 구름을 읽고 책은 잊는 것이 좋다 . 그렇지 않으면 구름과 글을 함께 읽도록 하라 .

한 대의 담배 , 한 잔의 차가 있으면 더욱 좋다 . 흰 눈이 내리는 한밤에 화롯가에 앉아 있으면 화로 위에서 차 끓는 소리가 나고 곁에는 한 갑의 담배가 놓여 있다 . 그때 철학 , 경제학 , 시 , 자서전 등의 책을 열 두서너 권 책상 위에 쌓아놓고 한가로운 마음으로 몇 권 펴보다가 재미나는 대목을 찾게 되면 조용히 담배에 불을 붙인다 . 일찍이 김성탄은 눈 내리는 밤에 대문을 잠그고 금서를 읽는 것이 인생 최대의 즐거움이라고 하였다 .

독서의 정취는 진계유 ( 陣繼儒 ) 의 다음과 같은 말에 잘 나타나 있다 . “ 옛날 사람들은 서화를 유권 ( 柔卷 ) , 연첩 ( 軟帖 ) 이라고 하였다 . 그 러므로 책이나 화첩을 뒤적거릴 때에 가장 좋은 태도는 한가로운 마 음을 지니는 일이다 . 이러한 태도로 세상의 모든 일에 대하여 참고 견디는 끈기를 기르는 것이다 . ” 진계유는 또 이렇게도 말하였다 . “ 참된 대가는 사서 ( 史書 ) 를 읽을 때 오식 ( 誤植 ) 을 개의치 않는다 . 그것은 마치 우수한 여행가가 등산을 할 때 험한 길을 개의치 않고 , 설경을 보려는 자가 튼튼치 못 한 다리를 참고 건너며 , 전원생활을 원 하는 자가 야인 ( 野人 ) 을 피하지 않고 , 꽃을 즐기는 자가 탁주를 달게 마시는 것과 같다 . ”

책을 읽는 즐거움을 가장 아름답게 서술한 글은 중국 최대의 규 수시인 ( 閨秀詩人 ) 이청조 ( 李淸照 , 1081~1141) 의 자서전에서 찾아볼 수 있다 . 이 여사는 남편이 국립학교 학생으로 다달이 급비를 받는 날 이면 어김없이 고본 ( 古本 ) 이나 척본 ( 拓本 ) 을 팔고 있는 절에 부부가 함께 찾아가곤 했었다 . 귀로에 과일을 얼마간 사가지고 돌아와 그 과일을 깎아 먹으면서 사온 척본을 함께 살펴보며 차를 마시거나 판 본 ( 版本 ) 이 다르고 같은 점을 비교해 보기도 하였다 . 금석록 ( 金石錄 ) 의 발문 ( 跋文 ) 으로 알려져 있는 청조 여사의 자서전에는 다음과 같은 대목이 쓰여 있다 .

 

나는 기억력이 좋은 편이다 . 저녁 식사를 마치면 우리는 조용히 귀래당 ( 歸來堂 ) 에 앉아서 차를 끓여 놓고 선반 위에 쌓여 있는 책들을 가리키면서 , 어떤 구절이 어느 책 몇 권의 몇 폐이지 몇 줄에 있는가를 알아맞히기 내기를 하여 알아맞힌 편이 차를 먼저 마시기로 하였다 . 다행히 잘 맞추면 찻잔을 높이 쳐들고 소리 내어 크게 웃는 것이었다 . 너무 흥이 나 웃다가 차가 옷 에 쏟아져 마시지 못 하는 때도 있었다 . 이런 흥겨운 가운데서 우리는 만족스럽게 살며 늙어갔다 . 생활이 가난하여 슬플 때도 있었으나 우리는 도도한 기분으로 살아갔 던 것이다. 그러는 동안에 수집품이 점점 많아져서 책과 미술품이 책상 위에나 침대 위에 수북이 쌓이게 되었다 . 우리 부부는 그것을 마음속으로 즐기며 앞으로의 살림 계획을 이야기하곤 하였다 . 그것은 개나 말을 기르거나 음악을 즐기는 도락보다 훨씬 즐거운 것이었다.

 

 

4. 문 장도 ( 文章道 ) 대하여

 

문장도는 글을 짓는 기법보다 매우 광범위한 것이다 . 작가를 지망 하는 초년생에게 무엇보다도 먼저 문장의 기법에 너무 구애되지 않도록 가르쳐 줘야 한다 . 즉 기법 따위의 피상적인 문제에 얽매이지 말고 참된 문학적 인격의 함양을 모든 저술의 기초로 삼도록 하여 자기 영혼의 깊은 곳까지 파들어 가도륵 가르쳐 줘야 한다 . 참된 문학적 인격이 함양되어 토대가 튼튼히 닦이면 문체는 저절로 정비되어 기법의 사소한 문제에 이르기까지 자연히 해결이 되는 법이다 . 이리하여 그의 소질이 점점 발전되어 가기만 하면 수사나 문법에 다소 어긋나는 점이 있더라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 어느 출판사 든지 반드시 전문분야의 교정원이 있어 쉼표나 세미콜론 , 그리고 부 정법 따위에 유의하는 것이 그들의 일거리로 되어 있다 .

그런데 아무리 문법이 바르고 수식이 훌륭하여도 문학적 인격의 수양을 게을리 하여서는 작가가 될 수 없다 . 퓨퐁의 말과 같이 “ 문체는 곧 인간이다 . ” 아닌 게 아니라 문체는 방법도 아니요 , 체계도 아니요 , 문장의 수식도 아니다 . 그것은 독자에게 느껴지는 작가의 특수한 성품 , 즉 깊이가 있느냐 , 통찰력이 있느냐 , 그밖에 기지 , 유머 , 신랄한 익살 , 정다운 인간미 , 섬세한 감정 , 철저한 이해력 , 점잖은 아이러니 , 또는 건전한 상식 , 그리고 사물에 대한 일반적인 태도 , 그러한 여러 가지에서 독자가 받은 인상의 총화가 곧 문체이다 .

우리는 문장도를 깊이 파고들어야 한다 . 그 심처에 도달하는 순간 문장도에는 문학 , 사상 , 관찰법 , 사고방식 , 생활감정 및 읽고 쓰는 문제 전체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 나는 중국에서 문학 운동에 참가하여 문예 일반 특히 문장도에 관한 사견을 서술하기 위 해 계속하여 많은 논문을 발표했다 . 그리고 『 담뱃재』라는 제목으로 문학적인 에피그램도 써 보았다 . 여기 그 『 담뱃재』를 잠깐 소개하고 자 한다 .

 

 

① 기법과 인격

작문 선생이 문학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것은 목수가 미술에 대하여 운운하는 것과 같다 . 비평가가 문장의 기법을 중심으로 작품을 분석하는 것은 기술자가 컴퍼스로 태산의 높이나 구조를 측량하는 것처럼 우습기 짝이 없는 일이다 .

이 세상에 문장의 기법 같은 것은 있을 수 없다 . 다소의 가치가 인정되는 모든 중국 작가들은 저마다 그런 기법을 부인하고 있다 .

문장의 기법과 문학과의 관계는 교회와 교의의 관계와 같다 . 우매 한 인간이 쓸데없는 문제에 사로잡혀 있는 꼴이다 . 초보자는 언제나 기법에 현혹된다 . 소설 , 희곡 , 음악 , 연극의 기법에 문장의 기법이 작가가 되는 것과 관계없고 , 연극의 기법이 명우가 되는 것과 관계 없다는 것을 그는 깨닫지 못 한다 . 미술과 문학에서 성공하려면 인격 이란 토대가 있어야 함을 상상조차 못한다 .

 

② 문학의 감상

가령 지금 훌륭한 작가의 글을 많이 읽었다고 하자 . 첫 번째 작가의 글은 매우 생기가 있고 , 두 번째 작가의 글은 섬세하고 우아한 정취가 깊다 . 세 번째 작가의 글은 매우 정묘하다 . 네 번째 작가의 글은 큰 매력이 있다 . 다섯 번째 작가의 글은 고급 위스키와 같은 맛이 난다 . 여섯 번째 작가의 글은 향기로운 술과 같다고 느꼈다고 하자 . 그때 그 사람의 감상 능력이 진실하다면 그런 작가들을 좋아한다고 공언하는 것을 주저할 필요는 없다 . 이렇게 광범위한 독서의 경력을 쌓아야만 비로소 원숙 , 장엄 , 박력 , 광휘 , 신랄 , 섬세함 , 매력 등등이 어떤 것인가를 알게 된다 . 그리고 이런 풍미를 다 맛보면 문 학안내서 같은 것을 읽지 않아도 훌륭한 문학이 무엇인지 알 수 있는 것이다 .

문학을 연구하는 사람은 무엇보다도 먼저 그 여러 가지 풍미를 맛보아야 한다 . 최상의 풍미는 원숙의 맛으로 , 작가로서 이 경지에 이르기는 매우 어려운 일이다 . 원숙과 무미단조의 차이는 종이 한 장의 두께이다 .

사상에 깊이가 없고 독창성이 결핍된 작가는 쉽게 쓰려다가 결국은 무미건조한 글이 되어 버리기가 일쑤이다 . 신선한 물고기가 아니면 자기 몸에서 나는 즙으로 요리를 할 수 없다 . 신선하지 못 한 생선은 소스나 후춧가루나 겨자로 맛을 내어야 한다 . 이 경우에는 조 미료가 많을수록 맛이 좋아진다 . 그러나 우수한 작가는 분도 연지도 바르지 않고 직접 황제를 만난 양귀비의 여동생과 같다 . 그러나 후궁의 다른 미인들에게는 분이나 연지가 필요하다 . 감히 쉬운 영문 ( 英文 ) 을 쓰려는 작가가 드문 것은 이 때문이다 .

 

③ 문체와 사상

문장의 아름다움은 파이프 끝에서 피어오르는 연기처럼 , 영마루에서 솟은 구름처럼 표묘 ( 漂渺 ) 하게 나타난다 . 최상의 문체는 소동파의 글처럼 뜬 구름이 가고 여울이 흐르는 듯한 ( 行雲流水 ) 것이다 .

문체는 언어 , 사상 , 인격의 합성체이다 . 언어만으로 이루어진 문체 란 세상에 있을 수 없다 .

명료한 사상이 불명료한 언어로 표현되는 일은 거의 없다 . 반대로 불명료한 사상이 명료하게 표현되는 경우가 많다 . 그런 문체는 명료 하게 불명료하다 .

인간의 성질에는 타고난 바탕이 있다 . 문체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 이 바탕 이외의 다른 부분은 적당히 주워 맞춘 것에 불과하다 . 애호 하는 작가를 갖지 않은 사람에게 혼은 없다 . 언제까지나 무정란 ( 無精 卵 ) 이다 . 화분 ( 花粉 ) 이 생기지 않는 암술이다 . 애호하는 작가는 누구 에게나 있을 수 있다 . 없는 것은 발견하려고 애쓰지 않기 때문이다 . 서적은 인생의 그림이나 도시의 사진과 같은 것이다 . 뉴욕이나 파리의 사진은 보았으나 정말 뉴욕이나 파리를 본 적이 없는 독자가 많다 . 그러나 현자는 글과 함께 인생 자체를 읽는다 . 우주는 한 권 의 커다란 책이다 . 그리고 인생은 커다란 학교이다 .

우수한 독자는 저자를 샅샅이 뒤진다 . 마치 거지가 이를 잡으려고 뒤지듯이 .

무슨 문제든지 그것을 연구하는 최선의 방법은 우선 그 문제에 대하여 반대의 입장을 취하는 책부터 읽을 일이다 . 이렇게 하면 얼른 속아 넘어가지 않는다 . 반대 입장의 책을 읽고 찬성의 편에서 책을 읽으면 마음의 준비가 정돈되는 것이다 . 이것은 비평 정신을 기르는 방법의 하나이다 .

작가는 언제나 말을 위한 말에 본능적으로 흥미를 느끼고 있다 . 모든 말에는 사전에 실려 있지 않는 생명과 인격이 깃들어 있다 .

언어의 광산에는 두 가지가 있다 . 새 것과 낡은 것 . 낡은 광산은 책 속에 있고 새 광산은 일반용어 속에 있다 . 2 류 정도의 예술가는 낡은 광산을 채굴하지만 1 류 예술가는 새 광산을 채굴할 수 있다 . 이 낡은 광산의 광석은 이미 정련되어 있으나 새 광산의 광석은 아직 정련되어 있지 않다 .

일찍이 왕충 ( 王充 , 27~100) 은 전문가와 학자를 구별하고 작가와 사상가를 구별하였다 . 전문가는 그 지식이 넓어졌을 때 학자로 승진 하고 , 작가는 그 여지가 길어졌을 때 사상가로 승진한다 .

학자의 저술은 다른 학자의 힘을 많이 빌기 마련이다 . 그리하여 인용하는 원전이나 출전이 많을수록 학자답게 보인다 . 그러나 사상 가의 저술은 자기 뱃속의 개념으로 이루어지며 위대한 사상가일수록 자기 뱃속의 진액에 의존한다 .

학자는 입으로 먹은 것을 토하여 새끼를 기르는 큰 까마귀와 같은 자이고 , 사상가는 뽕잎을 먹고 명주실을 토해내는 누에와 같은 자이다 .

집필 전에는 관념의 임신기가 있는 법이다 . 출생 전에 태아가 자궁 안에서 임신기간을 갖는 것처럼 작가가 자기 영혼에 불을 붙여 생생한 관념의 흐름을 이룰 때 그것은 수태이다 . 그 관념이 임신기간을 다 채우지 않고 급히 글을 써 내어 인쇄하여 버리면 설사나 진통이 따른다 . 저술가가 양심을 팔아 신념에 위배되는 글을 쓰면 그것은 낙태요 , 사산이다 . 머릿속에 우레와 같은 격심한 경련을 일으키고 그 상념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동안은 마음이 초조하다가도 종이에 옮겨 쓰면 비로소 마음이 놓인다면 그것은 문학적 창조이다 . 따라서 작가는 자기 작품에 대하여 어머니가 어린애를 대하는 것과 같은 모성애를 느낀다 . 그러므로 작품은 자기 자신의 것일 경우에 우수하다 .

펜은 구두 수선공의 송곳처럼 쓸수록 날카로워지며 , 이윽고 자수 바늘처럼 예리해진다 . 이와 반대로 인간의 사상은 낮은 산에서 높은 봉우리로 오를수록 조망이 트이는 것처럼 다듬을수록 둥글어진다 .

작가가 어느 특정인에게 통렬한 반론을 폈을 때 , 만일 그 상대방의 좋은 반면 ( 半面 ) 을 간과하였다면 붓을 꺾고 근신해야 한다 . 그에 게는 아직 논란할 자격이 없기 때문이다 .

 

④ 자기표현파

16 세기 말엽에 원 형제 ( 袁兄弟 ) 세 사람의 손에 의해 창시된 성령파 ( 性靈派 ) 는 자기 표현파이다 . 성은 개성을 뜻하고 영은 인간의 영혼 또는 생명력을 의미한다 .

저술은 자기의 천성이나 품격의 표현 내지 그 생명력의 약동에 불과하다 . 이른바 천래 ( 天來 ) 의 신흥 ( 神興 ) 이란 이 생명력의 흐름에 불과하며 실제에 있어서는 혈액 중의 호르몬의 과잉이 그 원인을 이 루고 있다 . 노사 ( 老師 ) 는 접견하는 것이다 . 다시 말하면 옛 스승의 글을 읽는 것은 그 생명력의 흐름을 바라보는 데 불과하다 . 그 흐름 에 윤기가 없고 그 혼백이 비열하면 아무리 훌륭한 서화나 문장가의 작품도 정신 , 즉 생명력이 결핍되어 있는 것이다 .

이 천래의 신흥은 즐거운 꿈을 꾸면서 푹 자고 나서 아침이 되어 자연히 눈이 떴을 때 솟아나는 것이다 . 아침차를 한 잔 마시고 신문을 들여다보나 눈살을 찌푸릴 만한 기사는 별로 없다 . 조용히 서재로 발길을 옮기니 창문이 한결 밝고 책상은 깨끗이 정돈되어 있다 . 창 밖에는 맑은 햇살이 빛나고 바람은 잠잠하다 . 이런 때에 좋은 수필 , 좋은 시 좋은 편지가 쓰이고 좋은 그림이 그려진다 .

자아 ( 自我 ) 또는 인격이라고 부르는 것은 사지 , 근육 , 신경 , 이성 , 감정 , 교양 , 이해력 , 경험 , 편견 따위가 하나로 뭉쳐서 이루어진 것 이다 . 그것은 자연히 갖추어지기도 하고 수양에 의해 이루어지기도 한다 . 즉 타고난 것도 있고 , 연단 ( 鍊鍛 ) 에 의한 것도 있다 . 무릇 인간의 성질은 세상에 태어났을 때 정해져 있는 것이다 . 아니 태어나기 전에 이미 정해져 있는 것이다 . 어떤 사람은 천성이 잔인하고 비열하며 , 어떤 사람은 천성이 깨끗하고 정직하고 어질고 너그러우며 , 또 어떤 사람은 천성이 온순하고 연약하며 소심하다 . 이러한 자질은 뼛속에까지 침투되어 있으므로 아무리 훌륭한 교사나 아무리 현명한 부모일지라도 그 인격의 기본형을 고치지는 못 하는 것이다 . 한편 다 른 자질은 이 세상에 태어난 후에 교육과 경험을 통하여 얻을 수 있다 . 그러나 인간의 사상 , 관념 , 인상 등은 여러 가지 원천과 일생을 통해 각 시기와 여러 가지 영향을 받게 됨으로 관념 , 편견 , 그리고 사물에 대한 관찰법이나 사고방식은 심한 혼란과 모순을 보이게 마 련이다 . 어떤 사람은 개를 좋아하지만 고양이는 무서워한다 . 또 어떤 사람은 고양이는 좋아하지만 개는 무서워한다 . 그러므로 인격의 유형을 연구하는 것은 모든 과학 중에서도 가장 복잡한 것이다 .

자기 표현파는 자기 자신이 진실한 사상과 감정 , 즉 사랑과 증오와 공포와 취미를 솔직하게 그대로 표현할 것을 요구한다 . 따라서 좋은 것만 보이고 언짢은 것은 숨기는 따위의 조작을 하는 것은 금 물이다 . 비록 세상의 웃음거리가 되어도 두려워하지 않으며 옛 성현이나 오늘의 권위자들의 주장과 모순되어도 개의치 않고 자기 자신 을 솔직하게 표현하려는 것이다 .

중국의 정통파 문학은 옛 성현들의 마음을 명백히 표현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작가의 마음을 표현하는 것을 중요시하지 않았다 . 그러 므로 그 문학은 죽어 버렸다 . 성령파 문학은 작가의 마음을 표현하 는 것을 목표로 하고 성현의 마음을 표시하는 것을 중요시하지 않는 다 . 그러므로 그것은 살아 있다 .

이 성령파의 작가에게는 긍지와 독존의 기풍이 있다 . 그러므로 자 기 본연의 도를 떠나서 구태여 남을 놀라게 하는 말을 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 것이다 . 공자나 맹자가 그들의 견해에 동의하고 그들의 양심이 이를 용납하면 굳이 자기의 도를 떠나 성현의 뜻에 반대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 그러나 양심이 용납하지 않는다면 공자나 맹자 에 대하여도 자기 도를 결코 사양하려고 들지 않을 것이다 . 그들은 황금에 의해서도 움직여지지 않고 추방에 의해서도 의혹을 받지 않 는다 .

진정한 문학은 우주와 인생에 대한 경이에서 비롯된다 . 시력이 건전하고 분명한 사람이라면 언제나 이 경이를 느끼기 마련이다 . 그러므로 구태여 기이하게 보이기 위해 진실을 왜곡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

작가의 약점은 이 파의 비평가들이 사랑하는 바이다 . 이 파의 작 가들은 어느 누구의 모방도 기피하며 , 문학의 기법 자체를 부인한다 . 원 형제는 “ 입이나 손목은 가만히 두면 저절로 좋은 모양이 된다”라 는 것을 믿고 문학의 본질은 진실이라고 주장하였다 . 또한 이립옹은 “ 문학의 본질은 매력과 흥미”라고 믿고 있었다 . 원매 ( 袁枚 ) 는 문학에 기법이 없다고 생각했으며 , 송나라 초기의 작가 황산곡은 “ 문장의 행 ( 行 ) 이나 형 ( 型 ) 은 벌레가 먹은 나무의 구멍처럼 우연히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

 

⑤ 평이한 문체

평이한 문체의 작가는 너그러운 기분으로 이야기를 전개한다 . 그 는 자기의 약점을 사실대로 공개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 그러므로 그는 마음을 무장할 필요가 없다 .

작자와 독자의 관계는 엄격한 교장과 생도와 같은 관계여서는 안 된다 . 그것은 친구의 사이와 같아야 한다 . 그래야만 비로소 거기 따뜻한 마음씨가 우러날 수 있다 .

자기의 작품에서 자신을 쓰기를 두려워하는 작가는 결코 훌륭한 작가가 못된다 .

나는 진리를 말하는 작가보다 차라리 거짓말쟁이를 사랑한다 . 그 것도 조심스러운 거짓말쟁이보다 경솔한 거짓말쟁이가 낫다 . 작가가 경솔한 것은 독자를 사랑하고 있다는 표적이다 .

나는 경솔한 바보를 신용하고 법률가를 의심한다 . 경솔한 바보는 그 나라에서 가장 뛰어난 외교관이다 . 그는 민중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

내가 머릿속에 그리고 있는 좋은 잡지는 격주로 발행되는 잡지이 다 . 두 주일에 한 번 훌륭한 좌담가들을 작은 방에 초대하여 함께 이 야기를 하게 한다 . 그리하여 사람들에게 그 이야기를 듣게 하려는 것 이다 . 좌담회는 대체로 두어 시간쯤 걸리기 마련이다 . 그것은 마치 즐거운 야화에 정신이 팔리는 것처럼 보인다 . 이야기를 다 듣고 나서 사람들은 잠자리에 든다 . 이튿날 아침에 잠에서 깨어나 어떤 사람은 은행원으로서 어떤 사람은 서기로서 또 어떤 사람은 생도들에게 훈시 를 하는 교장으로서 각각 자기의 근무처에 나가지만 어제 저녁에 들 은 좌담의 향취가 아직도 뺨 근처에 떠도는 것처럼 느껴진다 .

금테두리를 한 거울이 있는 넓은 방에서 호화로운 연회를 베푸는 요정도 있고 , 몇몇 사람이 모여서 술을 나누는 주막집도 있다 .

나는 두서너 사람의 친구끼리 모여서 오붓한 주연을 베푸는 것을 좋아한다 . 부귀영화를 누리는 권세가들의 대주연에는 나가고 싶지 않다 . 작은 주점에서 마시고 먹고 지껄이고 농담을 하고 술잔을 뒤집어엎어서 옷 을 버리고 하는 재미는 대연회에 참석하는 사람들은 알 수 없는 것이다 . 따라서 “ 아 , 그때 이러저러한 재미있는 일이 있었지” 하는 따위의 회상도 있을 수 없다 .

세상에는 부호의 호화로운 저택과 정원이 있는가 하면 산 속에 있는 작은 오두막도 있다 . 한 마디로 오두막이라 해도 간혹 고상하고 정취 있게 지은 집도 있다 . 그 주위의 분위기는 고루거각 ( 高樓巨 閣 ) 이 호화롭게 장식되고 한때의 머슴들이 늘어선 부잣집 분위기와 는 전혀 다르다 .

안에 들어가도 충견이 짖는 소리가 들리지 않고 얌전한 문지기나 청지기들도 보이지 않는다 . 작별을 하고 나올 때에도 대문 밖에 한 쌍의 돌사자가 보이지 않는다 .

이러한 정경은 17 세기의 작가들에 의해 다채롭게 묘사되어 있다 . “ 주자 ( 周子 ), 정자 ( 程子 ), 장횡거 ( 張橫渠 ), 주자 ( 朱子 ) 등 송나라의 저명한 학자가 한 방에 모여 앉아 인사를 나누고 있는데 갑자기 소동 파와 동방삭이 버선도 신지 않고 반쯤 벗은 알몸으로 들어와서 손뼉 을 치면서 농담을 나누기 시작한다 . ” 옆에 앉아 있던 사람들은 어이가 없었을 것이다 . 그러나 두 고결한 선비의 마음은 서로 통하고 있 었다 .

 

⑥ 미에 대하여

문학의 미는 변하고 움직이는 속에서 찾아볼 수 있다 . 즉 그것은 생명위에 서 있는 것이다 . 생명이 있는 것은 언제나 변하고 움직이 며 , 변하고 움직이는 곳에는 자연히 아름다움이 있다 .

산 속에 낭떠러지 , 험한 골짜기 , 맑은 산 여울에는 인공적인 운하 따위는 미치지 못 할 분방하고 호탕한 미가 있다 . 그것은 결코 건축가의 계산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 그런즉 문장에 어찌 무슨 방법이나 규칙 같은 것을 정할 수 있겠는가 ? 성좌 ( 星座 ) 는 천문 , 즉 하늘의 문학이다 . 명산대천 ( 名山大川 ) 은 지문 , 즉 땅의 문학이다 . 바람이 불어와 구름의 형태가 변하면 , 거기 금수 ( 錦繡 ) 의 모양이 모인다 . 서리가 내려 잎이 떨어지면 거기 소슬한 추색이 보인다 . 하늘의 궤도를 돌고 있는 별들이 지상에서 인간이 관상할 것을 염두에 두고 있을까 . 대웅좌 ( 大熊座 ) 와 견우직성 ( 牽牛織星 ) 은 우연히 인간의 눈에 뜨인 것이다 . 지각 ( 地殼 ) 은 신축 자재하여 높은 산을 뽑아 올리고 , 깊은 바다를 파들어 간다 . 그런데 지구는 인간을 배례시키려고 오악 ( 五嶽 ) 을 만들었을까 ? 더구나 태화 ( 泰花 ) 나 곤륜 ( 崑崙 ) 과 같은 산은 웅장한 리듬을 갖고 높이 치솟고 옥녀 ( 玉女 ) 나 선동 ( 仙童 ) 의 봉우리 는 우리를 에워싸고 장엄하게 솟아 있어 인간의 눈을 즐겁게 하려는 것 같기도 하다 . 그러나 이러한 것은 거장인 창조주의 자유분방한 손짓에 불과하다 .

그리고 산봉우리에 솟아올라 사나운 바람의 기습을 받은 구름이 인간에게 보이기 위해 바지나 목도리를 준비할 여념이 있을까 ? 구름 은 스스로 얼굴을 바꾸어 어떤 때에는 생선 비늘이 되고 , 어떤 때에는 비단무늬가 되며 , 어떤 때는 질주하는 개의 형상이 되고 , 어떤 때에는 울부짖는 사자가 되고 , 어떤 때는 춤추는 불사조가 되고 , 어 떤 때는 홀로 돌아다니는 일각수 ( 一角獸 ) 가 된다 . 그것은 실로 시문 ( 詩文 ) 의 신품 ( 神品 ) 을 생각게 한다 . 한서 ( 寒暑 ) 의 고난과 풍상의 유 린을 몸소 체험하고 호흡을 늦추어 정력을 보존하기에 급급한 가울 나무에게 옛길을 걸어가는 나그네의 눈을 즐겁게 하려고 몸단장을 할 여가가 있을까 ? 나무는 냉정하고 적막하여 그 풍취는 왕유 ( 王維 ) 나 미불 ( 米 芾 ) 의 그림보다 낫다 .

이와 같이 우주의 만물에는 예술적인 미가 충만해 있다 . 고목에 칡넝쿨이 기어오른 미는 왕희지 ( 王羲之 ) 의 글씨보다 더 위대하다 . 깎 아지른 낭떠러지는 장맹룡 ( 張猛龍 ) 의 묘비명보다 웅혼 ( 雄渾 ) 하다 .

만물의 예술미는 그 천성에서 비롯되고 , 그 천성을 완성케 하려면 아름다운 옷 을 입어야 하는 것이다 . 그러므로 선과 형의 아름다움은 내재적인 것이지 결코 외재적인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

말발굽은 빨리 달리도록 되어 있고 호랑이의 발톱은 짐승을 휘어잡게 되어 있으며 , 두루미의 다리는 늪을 쉽사리 건너가게 되어 있고 , 곰의 발은 얼음 위를 잘 걸어다니도록 되어 있다 . 그러나 말이나 호랑이나 두루미나 곰은 형식과 균형의 미를 한 번도 생각해 본적이 없을 것이다 . 다만 생활의 기능을 다하고 , 운동에 알맞은 자세를 취하는 것이 동물의 의도이다 . 그러나 인간의 눈으로 볼 때 말발굽과 호랑이의 발 , 두루미의 다리 , 곰의 발바닥은 그 완벽한 외형이나 , 힘의 표시나 , 선이 가늘고 , 굳센 힘이나 , 산뜻한 몸놀림이나 , 또는 그 굵직한 관절에도 훌륭한 아름다움이 깃들어 있는 것이다 . 그리고 코끼리의 발은 예서 ( 隸書 ) 같고 사자의 갈기는 비백 ( 飛白 ) 같고 , 싸우는 뱀은 꾸불꾸불 뒤틀린 초서 ( 草書 ) 와 같고 , 하늘을 나는 용 ( 龍 ) 은 전서 ( 篆書 ) 와 같고 , 소의 다리는 팔분 ( 八分 ) 을 연상케 하 고 , 노루는 소해 ( 小楷 ) 와 비슷하다 .

이러한 동물의 미는 그 움직이는 자세에서 생기며 자세는 신체의 기능의 결과이다 . 그리고 이것은 또한 문장미의 비결이기도 하다 . 운동의 기세 , 즉 자세에 필요한 것은 문장에서 억제되어서는 안 되며 필요치 않은 것은 피해야 한다 . 그러므로 시문의 걸작이란 자연 그 자체의 운동과 같은 것으로 폼 ( 形 ) 이 없으면서 폼이 있고 이에 매력과 아름다움은 스스로 갖추어진다 .

 

 

 

 

 

 

 

 

 

 

 

제 11 장 신에 가까운 자

 

 

 

 

 

 1. 종 교의 부활

 

신이란 무엇인가 ? 무엇이 신의 뜻에 합당하며 무엇이 합당치 않는 가 ? 그것을 다 알고 있다고 자부하는 자들이 상당히 많다 . 내가 이 신에 대한 문제를 취급한 것을 보고 독신자니 , 예언자니 하고 비난을 할 것이다 . 대우주의 몇 억분의 1 도 못되는 작은 지구의 또 몇 억분의 1 도 못 되는 인간이라는 생물이 신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는 것이다 .

그러나 우리를 에워싼 대우주의 생명과 원만히 조화된 관계를 유지하지 않는 한 어떤 생명철학도 완벽할 수 없으며 인간의 정신생활에 관한 어떤 사고방식도 충분하다고 할 수 없다 . 물론 인간은 매우 소중한 존재이다 . 따라서 가장 중요한 연구과제가 되는 것이다 . 즉 인간의 이른바 휴머니즘의 본체이다 . 그러나 인간은 광대한 우주에 살고 있다 . 그 우주는 인간 못지않게 경탄할 만한 존재인 것이다 . 그러므로 인간을 에워싼 보다 광대한 세계의 기원과 숙명을 무시하 고는 참으로 만족스러운 생활을 할 수는 없을 것이다 .

종교의 가르침은 역사적인 발전을 계속해 오는 동안에 엄밀히 종교의 정신적 영역 밖에 놓여야 할 것 , 즉 물리학 , 지질학 , 천문학 , 범죄학 , 그리고 여성관 등과 혼합되어 버렸다 . 이것이 정통파 종교의 문제점이다 . 만일 도덕의식의 영역에 머물러 있었더라면 , 종교의 재정위 (reorientation) 의 일도 오늘처럼 거창하게 되지 않았을 것이 다 . 신의 관념을 파괴하는 것보다는 천국과 지옥의 관념을 파괴하는 것이 쉽다 .

한편 과학은 오늘의 기독교도에게 우주의 신비에 대한 새로운 깊 은 의미와 물질에 대한 새로운 개념 ( 에너지의 견지에서 ) 을 분명히 하고 신 자체에 대하여는 제임스 진즈 경 1) 도 말한 바와 같이 우주는 거대한 기계보다 거대한 사상 쪽에 가까워진 것 같다 . 수학 자체가 수학으로서는 계산할 수 없는 존재를 증명하였다 . 이리하여 종교는 과학에서 부득이 퇴장하지 않을 수 없게 되고 종전과 같이 자연과학 의 영역에 대해서까지 많은 참견을 할 수 없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 즉 과학은 종교가 관여할 바가 아니라고 깨끗이 인정하고 물러나야 할 형편에 이르렀다 .

현대생활에 적합한 종교는 각자 뜻대로 교회에서 찾아내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 무릎을 꿇고 말없이 기도를 드리고 있는 의식과 예배 의 분위기 속에 휩싸여 있으면 신학의 가르침에 대하여 다소 의문을 느끼기는 하지만 신령 앞에 무릎을 꿇고 싶은 마음은 절로 우러나게 마련이다 . 이러한 의미에서 예배는 참된 심미적인 경험이라고 할 수 있다 . 그것은 예배를 드리는 자만이 느끼는 체험으로 산 위에 늘어선 나무의 뒤로 가라앉는 석양을 바라볼 때와 비슷한 심미적인 경험이라 고 할 수 있다 . 그때 그에게 있어서 종교는 의식이 최종적인 사실을 의미한다 . 그것은 시와 매우 가까운 심미적인 체험이기 때문이다 .

그러나 오늘의 교회를 보면 누구나 환멸을 느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 생각해 보라 . 우리가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예배를 드릴만한 신이라면 우리에게 하루하루의 조그마한 은총이나 베푸는 그런 옹졸 한 신은 아닐 것이다 . 우리가 북쪽으로 항해할 때에는 북풍이 불어 오게 하고 , 남쪽으로 항해할 때에는 남풍이 불어오게 한다면 그러한 신은 하나의 난센스에 지나지 않는다 . 도대체 순풍이 불어오게 한 것을 신에게 감사드리는 것은 뻔뻔스럽기 짝이 없는 일이며 또한 매우 이기적인 처사이기도 하다 . 왜냐하면 그가 북쪽으로 항해할 때에 는 남쪽으로 항해하는 사람들에 대하여는 신이 사량하지 않음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 그러한 은총은 남의 행복을 전혀 원치 않는 자기 본위의 것이다 . 이래서야 어디 교회가 존재하는 진의를 알 수 있겠는가 ? 여기서 우리는 종교가 그동안에 이상야릇한 변질을 해 왔 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할 수 없게 된다 . 그러므로 현재의 상태를 토대로 하여 종교가 무엇인가를 정의하려고 하면 갈피를 잡을 수 없 게 된다 .

이리하여 우리 마음에 남는 것은 불만뿐이다 . 그러나 웬일로 나의 경우는 일종의 만족까지 느끼고 있다 . 나는 우리 생활 가운데서 종교 로서 남아 있는 것은 인생의 아름다움과 장대함과 신비스러움과 또한 매우 단순화된 숭배심이요 , 신학이 오랜 세월에 걸쳐서 종교의 표면 에 뒤집어씌운 공물이나 신조―그것은 정답고 기쁘게 느껴야 하는 것 으로 되어 있다―는 이미 없어져 버린 것으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 다 . 이렇게 되면 종교는 단순하다 . 그런데 현대인에게는 이것으로 족 하다 . 오늘에 와서는 중세의 정신적인 신권정치는 완전히 후퇴하고 있다 . 그리고 소위 영생문제에 대하여 말하면 이 가르침이야말로 종 교가 사람의 마음을 휘어잡은 두 번째로 큰 이유였지만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죽을 때가 돌아오면 미련 없이 죽을 각오를 하고 완전히 속세만으로 만족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

영생을 운운하는 말을 들으면 어쩐지 병적인 데가 있다 . 인간인 주제에 영생불멸을 원한다는 것은 나로서는 아무래도 납득이 가지 않는다 . 그러나 기독교의 영향이 없었던들 이렇듯 쑥스럽게 사람을 요동시키지는 않았을 것이다 . 시의 영역에 속하는 허허실실의 아름다운 명상이나 고상한 환상이라면 모르거니와 이 영생은 굉장히 진지한 문제가 되었던 것이 사실이며 , 특히 승려들에게 있어서는 죽음과 죽은 뒤의 생명이 어떻게 되느냐 하는 것이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였던 것이다 . 그러나 사실을 말하면 이 세상을 살고 있는 사람 가운데서 적어도 절반은 기독교인이건 이교도이건 죽음을 두려 워하지 않는다 . 그러므로 그들은 천국과 지옥의 위협을 받는 일도 없고 거기 대하여 별로 생각하는 일도 없다 . 하기는 자기의 묘비명 이나 비석의 설계 , 화장의 여부에 대하여 가볍게 이야기하는 사람이 있는 것을 흔히 볼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천국에 가는 것을 확신하고 있다고는 볼 수 없으며 죽으면 생명은 촛불과 같이 꺼져 버린다고 정직하게 생각하고 있는 사람이 많은 것이다 . 오늘날 가장 뛰어난 사람들은 이 영생에 대하여 불신을 표명하고 전혀 관심 을 갖지 않는다 . H.G. 웰스나 아인슈타인이나 아서 키스 , 그밖에 얼 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 그러나 죽음의 공포를 정복하는 것은 일류급의 인물이 아니라도 좋을 것이다 .

많은 사람들은 대체적인 영생의 사상 대신에 좀 더 납득할 수 있는 영생의 사상을 갖고 있는데 , 즉 인종의 영생과 행위 및 사상의 영생이 그것이다 . 우리가 죽더라도 뒤에 남겨 놓은 일이 여전히 후 세 사람들을 움직이게 하고 아무리 작은 일이라 하더라도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적인 생명 속에서 하나의 구실을 하게 된다면 그것으로 족한 것이다 . 가령 우리가 꽃잎을 뜯어서 땅에 버리더라도 그 꽃이 풍기는 미묘한 향기는 공기 속에 남아 있는 것이다 . 이러한 영생의 사상이 훨씬 영리하고 이치에도 맞을 뿐더러 이기적인 데가 없어서 좋다 . 이런 의미에서 루이 파스퇴르나 루턴 버뱅크나 토마스 에디슨이 우리들 속에 살아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육체란 필경 끊임없이 변론하는 화학성분의 결합을 추상적으로 일 반화한 것에 지나지 않으므로 육체가 없어졌기로 그것이 어쨌단 말인 가 . 인간은 점차로 자기의 일생에 영원히 흘러가는 큰 강물의 한 물 방울에 불과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 그리하여 기꺼이 생명의 대본류 속에 자기의 역할을 기탁하려고 한다 . 너무 욕심만 부리지 않는다면 그것으로 족할 것이다 .

 

 

2. 나 는 왜 이교도가 되었는가 ?

 

종교란 자기 자신의 것이다 . 그러므로 누구나 자기 자신을 위한 종교관을 갖지 않으면 안 된다 . 그것은 진지하기만 하면 결말이야 어찌 되었든 신의 뜻을 어기는 것이 아니라고 나는 생각한다 .

각자가 겪은 종교적인 경험은 모두가 다 정당하다 . 왜냐하면 이 경험은 이러니저러니 따질 성질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 그러나 종 교문제로 몹시 고민한 , 정직한 사람의 체험담은 언제나 다른 사람에 게 어떤 도움을 줄 수 있다 . 그러므로 나는 종교에 대하여 이야기할 때에는 언제나 일반론을 피하고 내 자신의 이야기를 한다 .

나는 이교도이다 . 이 말에는 기독교에 대한 반감이 포함되어 있다 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나 반감이란 너무 가혹한 말이다 . 나는 서서히 기독교로부터 멀어진 인간으로 그동안에 사랑과 경건한 생각을 가지려고 죽을힘을 다하여 여러 가지 교리에 매달려 보았으 나 유감스럽게도 그것은 모두 나에게서 도망쳐 버렸던 것이다 . 그러 므로 반역이란 말은 적당치 않은 것이다 . 즉 나에게는 기독교에 대한 증오심이 없으니 반역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

나는 목사의 집안에 태어나 한때는 선교사가 되려고 교육을 받았 었다 . 덕분에 종교적인 고투를 겪은 모든 시기를 통하여 나는 반종교적이 아니라 종교적 심정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이다 . 나는 감정과 이성의 싸움을 겪고 나서 점차로 어떤 입장에 도달하게 되어 속죄설 을 부정하기에 이르렀다 . 그것은 이교도의 입장에서 보면 간단히 설명할 수 있는 일이다 . 우주와 인생에 대한 이런 신앙상태로 말미암아 나는 내 목적인 투쟁을 할 필요도 없이 자연스럽고 편한 마음을 가질 수 있었다 . 지금도 이러한 심정에는 변함이 없다 . 이러한 심정 은 마치 어린애가 젖에서 떨어지고 익은 과일이 땅에 떨어지듯 극히 자연스럽게 갖게 되었다 . 나이든 철학가의 말을 빌면 진리대로 사는 것뿐이다 . 또한 서구인의 말투로는 자기 영혼의 불길을 따라 자기 자신과 우주에 충실한 데 불과하다 . 자기 자신에 대하여 지적으로 진실하지 못 하면 아무도 자연스럽게 살아갈 수 없으며 따라서 불행 을 면치 못 하는 법이다 . 자연스럽게 살아간다면 이미 천국에 있음을 뜻한다고 나는 믿는다 . 이교도란 나에게는 자연스러운 상태이다 .

그러나 “ 이교도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 기독교도이다”라고 말하는 것처럼 하나의 말에 지나지 않는다 . 즉 그것은 소극적인 언명에 불 과하다 . 일반 독자에게는 이교도란 기독교도가 아니라는 뜻으로 생 각될 것이다 . 그런데 기독교도이다 라는 말이 실은 대단히 막연한 말이다 . 그러므로 기독교도가 아니다 라는 말도 오해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

이교도란 종교를 믿지 않는 , 신의 존재도 믿지 않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당치 않는 생각이다 . 신이니 종교적인 태도니 하는 말은 아직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 자고로 위대한 이교도들은 자연에 대하여 언제나 매우 경건한 태도를 취해 왔었다 . 그러므로 우리는 이 말을 흔히 쓰이는 뜻으로 해석하여 단지 교회에 나가지 않는 사람 ( 다만 심미적인 영감을 얻기 위해 나가는 것은 별문제로 친다 . 그런 것이라면 지금 나도 할 수 있다 ), 따라서 기독교의 어느 교파에도 속하지 않고 정통적인 교의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이라는 정도로 간주하고자 한다 .

한편 뚜렷한 이교도로서 중국의 이교도가 있는데 , 그들은 내가 누 구보다도 친밀감을 갖고 이야기할 수 있는 유일한 이교도이다 . 그들은 이지상의 생활이야말로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생활의 전부이며 따 라서 인간이 관심을 가져야 할 전부라는 견지에서 살아가고 있다 . 즉 이 세상에서 죽는 날까지 즐겁게 살아가려는 것이다 . 그들은 인 생의 길은 슬픔을 잘 알고 이와 기꺼이 대결하며 , 인간생활의 성실 하고 아름다운 면을 대하였을 때에는 날카롭게 통찰하여 선을 행하 는 것 자체가 이미 충분한 보상을 받고 있음을 뜻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

따라서 그들은 천국에 가기 위해 선을 행하고 지옥에 떨어지지 않는다면 선을 행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종교인을 가련하게 생각하는 동시에 경멸하고 있는 것이다 . 이 점은 나도 잘 이해가 간다 . 이 말이 옳으므로 자기가 스스로 자각하는 이교도 말고도 더 많은 이교도들이 미국에도 있을 것이다 . 오늘날 자유주의적인 사상을 가진 기독교도와 이교도의 차이란 종이 한 장의 차이밖에 없다 . 다 만 다른 점이 있다면 자유주의적인 기독교도가 신에 대하여 곧잘 이 야기를 한다는 것뿐이다 . 나는 종교적인 체험이 무엇인지 그 깊이를 알고 있다고 자부한다 . 교황청 추기경인 뉴먼과 같은 신학자가 아니 더라도 이러한 체험은 맛볼 수가 있는 것이다 . 만일 그렇지 않다면 기독교는 믿을 만한 것이 못 될 것이며 이미 훨씬 전부터 큰 오해를 받아왔을 것이다 .

나는 기독교도와 이교도의 정신생활이 다른 점은 다음과 같은 데 있다고 본다 . 기독교도는 신이 지배하고 신이 보살펴 주는 세계에 살고 있으며 끊임없이 신과 교섭을 하고 있다 . 즉 자비로운 하나님 아버지께서 인도하시는 세계에 살고 있다 . 그리하여 그 행동도 때에 따라서는 신의 아들이라는 의식과 부합될 수 있는 경지까지 높여지는 수도 있다 . 물론 인간의 일이므로 전 생애를 통하여 또는 한 주 일 동안 , 혹은 단 하루도 이러한 수준의 생활을 영위한다는 것은 매 우 어려운 일이므로 그의 생활에서 보통 인간적인 입장과 참된 종교 적인 높은 경지 사이를 오르내리게 마련이다 .

한편 이교도들이 이 세상에 살아가고 있는 모습은 마치 고아와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 이들에게서는 천국에 언제나 자기를 지켜보는 이가 있으므로 기도라는 영적인 관계를 하는 든든한 마음은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 그러므로 기독교도가 살고 있는 세계와 비교해 보면 그들의 세계는 그다지 유쾌한 곳이 못되는 것이 사실이다 . 그러 나 그곳에는 고아들이 누릴 수 있는 혜택과 위엄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 즉 세상의 모든 고아들과 마찬가지로 자주적인 입장에서 자기 를 지켜나가는 방도를 알고 원숙하게 덕을 닦아나가는 것이다 .

내가 이교도로 개종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두려움에 떨게 한 것은 이지적인 신앙문제가 아니라 신의 사랑이 없는 이 세상에 내던져진 다는 느낌 이었던 것이다 . 만일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이 세상은 밑바닥이 없는 늪과 같은 것이 되어 버릴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던 것이다 . 아마도 기독교도로서 세상에 태어난 사람들은 저마다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

그러나 이교도가 도달할 수 있는 하나의 경지가 있다 . 그곳에서 기독교의 세계를 바라보면 보다 아늑하고 유쾌하게 보이기는 하지만 한편 훨씬 유치하고 미숙하다고 생각되는 면이 있다 . 기독교 세계의 환상이 깨어지지 않도록 가만히 놓아두면 살아가기에 유리하고 편한 것이 사실이지만 그것은 참된 교도의 생활태도 이상의 것도 이하의 것도 아니다 . 그리고 아름답게 장식된 세계이기는 하지만 그 때문에 진실성이 부족하며 따라서 가치가 떨어지는 세계이다 . 나는 웬일인지 무엇이든 적당히 장식이 되어 있거나 진리성이 희박하다는 의심 이 나면 치명적인 타격을 받게 된다 . 진리를 알기 위해서는 자진하여 치러야 하는 대가가 있는 것이다 .

이 경우에 그 결과가 어떻게 되든 어쩔 수 없는 것이다 . 이러한 입장은 살인자의 경우와 비슷하다 . 아니 심리적으로 조금도 다를 것 이 없다 . 즉 사람을 죽이면 다음에 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은 죄를 자 백하는 일이다 . 이교도가 되려면 약간의 용기가 필요하다고 내가 주 장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 그러나 일단 가장 큰 모험을 감행한 자에게는 더 이상 두려울 것이 없는 법이다 . 마음의 평화는 여러분이 이런 모험을 무릅썼을 때의 정신 상태를 가리키는 것이다 ( 여기 서 내가 불교나 도교의 영향을 받고 있음을 분명히 알 수 있다 ).

한편 기독교와 이교도의 세계가 다른 점을 다음과 같이 말하여도 좋을 것이다 . 즉 내 마음속에 도사리고 있는 이교도가 자기의 긍지와 겸허한 생각 때문에 , 다시 말하면 기분상의 자존심과 이지적인 겸허감 때문에 기독교를 내쫓아 버린 것이다 . 이 가운데서도 대체로 후자가 더욱 중요한 동기가 되었을 것이다 .

우선 기분상의 자존심이 어찌하여 그 동기가 되는가를 말하려고 한다 . 우리가 근엄하고 단정한 신사나 숙녀로서 행동하는 것에 있어 서 인간이라는 사실 이외에 신이라는 다른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못 마땅하였던 것이다 . 이론상 ( 여러분들이 굳이 분류하고 싶다면 말이다 ) 나의 이러한 견해를 인도주의라고 부르는 것이 좋으리라 .

다음에 겸허한 마음 , 즉 이지적으로 겸허한 생각이 기독교를 배격 하게 하는 가장 큰 동기가 되었는데 이것은 이유가 간단하다 . 즉 이 우주의 한 작은 티끌에 지나지 않는 태양계의 , 다시 한 티끌에 불과한 하잘 것 없는 지구 위에 사는 티끌만한 인간이 대 조물주의 눈에 그토록 중요하게 보인다는 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천문학의 지식으 로 미루어 보아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 이와 같이 뻔 뻔스럽기 짝이 없는 인간의 행동과 그 거드름을 피우는 교만한 태도 는 나를 크게 놀라게 하였던 것이다 . 조물주가 이룩하신 일의 백만분의 일도 잘 헤아릴 수 없는 인간의 주제인데도 불구하고 어찌 조물주의 성격이나 속성을 감히 헤아릴 수 있단 말인가 ?

개인을 소중하게 여기는 것은 기독교의 근본 교리의 하나이기는 하다 . 그러나 기독교가 일상생활에서 얼마나 우습고 또 불손하기 이 를 데 없는 행동을 하고 있는가를 다음의 몇 가지 예를 들어 이야기하려고 한다 .

나의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장례식을 치르기 사흘 전에 큰 비가 왔었다 . 칠월에 내 고향 성주 지방에서는 흔히 있는 일이지만 만일 계속해서 비가 내리면 시가지는 물바다가 되어 장례식을 할 수 없는 판이었다 . 그런데 가족의 대부분이 상해에서 와 있었기 때문에 장례 식을 연기한다는 것은 매우 곤란한 일이었다 . 마침 친척 중의 한 사 람이 기독교인이었다 . 그 부인은 나에게 자기는 하나님을 믿고 있으며 하나님은 반드시 그 자녀들을 도와주실 것이라고 말하고 나서 비 를 멎게 해 주십사 하고 기도를 드렸다 . 그러자 비는 멎었다 . 마치 조그마한 기독교 가정이 날짜를 연기하지 않고 장례식을 할 수 있도 록 하기 위하여 비가 멎는 것 같았다 . 그런데 이때 부인이 하는 말이 걸작이었다 . 우리들 한 가족이 없었더라면 상주에 사는 몇 만 명의 주민들을 홍수로 희생시켰으리라는 것이었다 . 그리고 비가 멎은 것은 상주에 살고 있는 주민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네 기독교도 한 집안을 위해서이며 예정대로 장례식을 올리고자 하오니 비를 멎게 해 달라고 기도를 드렸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

이 터무니없는 자기 본위의 생각은 나에게 커다란 충격을 안겨 주었다 . 하나님께서 이런 욕심꾸러기 자녀들에게 은총을 주시리라고 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

옛날 중국에 불교를 믿는 어머니와 믿지 않는 아들이 있었다 . 그는 학자였다 . 독실한 불교신자인 어머니는 밤낮으로 “ 나무아미타불 ( 南無阿彌陀佛 ) ” 을 몇 천 번이나 외면서 부처님의 은총을 받고자 하였다 . 그런데 이 어머니가 부처님의 이름을 외기 시작만 하면 아들은 번번이 “ 어머님 ! ” 하고 소리를 지르는 것이었다 . 어머니는 이것을 매우 딱하게 여기게 되었다 . 그러나 아들은 말을 계속하는 것이었다 . “ 어머님 , 제가 딱하시죠 ? 부처님께서도 어머님의 목소리를 들으시면 딱하게 여기신다는 것을 아셔야 해요 . ”

나의 부모님은 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었다 . 그리하여 나는 아버지께서 저녁 기도를 드리는 소리를 듣는 것만으로 충분하였다 . 나는 다감하고 믿음이 돈독한 아이였었다 . 나는 목사의 아들로서 종교교육을 착실히 받을 수 있는 혜택을 받았고 , 그러나 동시에 이것은 나에게 적지 않은 약점이 되기도 하였다 . 그러므로 나는 이 때문에 괴 로움도 겪어야만 하였다 . 그러나 나는 종교교육이 나에게 베풀어 준 은총에 대하여 언제나 고맙게 생각하고 그 약점을 오히려 하나의 힘 이 되게 전환시키고는 하였다 . 중국인의 철학에는 인생에 행운과 불 운이 따로 없는 것으로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

나는 중국 연극을 보러가는 것도 금지되었으며 , 중국 악사들이 부르는 노래를 듣는 것도 허용되지 않았고 , 위대한 중국민족의 전설이나 신화와도 완전히 외면되고 있었다 . 신학대학에 들어간 후로 아버지로부터 가르침을 받은 초보적인 중국고전 지식도 완전히 무시해 버렸다 . 하긴 이것은 나에게 오히려 이득을 주었는지도 모른다 . 그 덕분에 나는 나중에 완전히 서구식 교육을 받고 동방에 동화의 나라 를 찾아간 서양의 어린이처럼 신선하고 생생한 기쁨을 느끼면서 중국에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이다 .

사색한다는 것은 언제나 위험한 노릇이었다 . 그것은 항상 악마와 손을 잡고 있었다 . 나의 대학생 시절은 종교에 대한 관심이 가장 많은 시절이기도 하였다 . 이것도 아마 누구나 다 그럴 것이다 . 그 무렵 부터 나는 기독교적인 생활에서 오는 아름다운 감성과 무엇이든 이성 의 힘으로 사리를 밝히려는 지성의 싸움이 일어났다 . 그러나 이상하 게도 나는 톨스토이를 자살에까지 몰아넣으려고 한 고뇌나 절망에 빠 지지는 않았었다 . 어떤 위치에 놓이더라도 나는 자기 자신을 진정한 기독교도라고 생각하였으며 , 따라서 믿음에 어떤 파탄을 가져오지 않고 다만 톨스토이보다는 좀 자유적이어서 교리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 이지 않았던 것이다 . 그러나 나는 언제든지 산상수훈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 “들에 핀 백합꽃을 보라”라고 한 시구는 너무나 훌륭하 여 조금도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 나에게 힘을 부어 준 것은 이 시구 와 기독교도로서의 정신생활을 하고 있다는 자각이었다 .

그러나 교리는 나에게서 자꾸 멀어져만 갔었다 . 우선 외면적인 문 제가 나를 괴롭히기 시작하였다 . 서기 1 세기 무렵에 일어나리라고 예상된 예수의 재림이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사도들도 부활되지 않았 지만 이미 논파된 육체의 부활이 아직도 사도신경 속에 남아 있었다 . 이것이 내가 느낀 회의의 하나였다 . 신학교에 적을 두고 가장 신성한 학문을 배우게 된 후로 신조 가운데 있는 하나의 문제 , 즉 처녀 잉태가 논의의 대상이 되었는데 , 미국 신학교의 여러 교수들의 주장이 각각 다르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 기독교 신자는 세례를 받기 전에 먼저 이에 대하여 무조건 믿어야만 하는데 같은 교회에 속하는 신학자들이 이 문제를 논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는 사실이 나 를 격분시켰다 . 그것이 진실한 태도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

이윽고 “ 천국의 수문은 어디 있느냐” 하는 사소한 문제에 대한 신학적인 주석을 공부하게 된 후로 내 마음은 한결 편해져서 더 이상 진지하게 신학을 연구하고 싶은 생각은 사라져 버렸다 . 그러므로 내 성적은 별로 좋지 못 하였다 . 교수들은 내가 기독교 선교사로서 적임 자가 못 된다고 단정하였으며 장로는 내가 학교를 그만두어도 좋다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 나와 같은 자를 가르치려는 헛된 수고를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다 .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면 이것은 그 모습을 달리한 하늘의 축복이었던 것 같다 . 만일 그대로 계속하여 승복 을 걸치는 몸이 되었더라면 지금처럼 자기 자신에게 쉽사리 충실할 수 없었을 것이다 .

요즘에 와서 나는 기독교 신학자는 기독교의 적이라고 생각하게 되 었다 . 나는 아무리 애써도 두 개의 커다란 모순을 극복할 수 없었다 . 첫째 모순은 기독교의 체계가 선악과의 존재에 달려 있다고 생각하는 점이다 . 즉 만일 아담이 선악과를 먹지 않았더라면 원죄는 없을 것이요 따라서 속죄의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 선악과가 지닌 상징적인 가치는 어디 있든 간에 이것은 나에게 자명한 이치였다 . 그리고 이러한 생각이 예수의 가르침에 대하여 불충실하기 짝이 없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하였다 . 그렇지 않은가 ? 예수 자신은 원죄니 속죄니 하는 말을 한 번도 입 밖에 낸 적이 없었다 . 아무튼 나는 여 러 가지 문학을 연구하고 나서는 오늘의 모든 미국인들처럼 죄의식 을 느끼지 않았다 . 그뿐만 아니라 그것을 단순하게 믿지도 않았다 . 만일 신이 내 어머니의 절반쯤이라도 나를 사랑해 주신다면 결코 나 를 지옥에 떨어뜨리지 않으리라는 것이 내가 알고 있는 전부였다 . 즉 이것이 내가 의식하고 있는 최종적인 사실이었다 . 나는 어느 종 교에 대해서도 이 진리를 부정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

또 하나의 문제는 이것보다 한층 더 부자연스럽게 생각되었다 . 그 것은 다음과 같다 . 즉 아담과 이브는 그들의 신혼시절에 선악과를 따 먹었기 때문에 신은 크게 노하여 두 사람에게 벌을 주었다 . 그리하여 이 두 남녀의 조그마한 죄 때문에 후손인 인류는 말세에 이르기까지 죄를 짓고 고통을 받아야만 하였다 . 그런데 이 신이 벌을 준 그 후손이 신의 독생자인 그리스도를 죽였을 때 신은 크게 기뻐하여 그들을 용서하였다는 것이다 . 이에 대하여 누가 무어라고 해석하는 지 모르지만 나는 이런 얄궂은 농담을 묵인할 수 없었다 . 이것이 나를 번뇌에 몰아넣은 최후의 두통거리였다 .

그러나 나는 신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여전히 열렬한 기독교도가 되었었다 . 자진해서 북경에 있는 예수교 계통이 아닌 대학인 정화학 당의 주일학교 선생 노릇을 하여 많은 동료들을 어리둥절하게 하였 다 . 주일학교에서 맞이하는 크리스마스는 나에게 큰 고통을 안겨 주 었다 . 마음속으로는 전혀 믿고 있지 않은데 맑게 갠 한밤중에 노래 를 부르는 천사의 이야기를 중국 어린이들에게 들려주어야만 하였기 때문이다 . 그때 나는 이미 이성에 의하여 신앙 문제가 정리되어 있었다 . 나에게 남아 있는 것은 다만 사랑과 두려움뿐이었다 . 사랑이 란 나에게 행복과 평화를 느끼게 해주시는 전능하신 신에 대한 하나 의 미련이었다 . 나는 그 신의 사랑이 없이는 행복이나 평화가 있을 것 같지 않았다 . 그리고 두려움이란 말하자면 고아의 세계로 들어서 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일종의 공포감이었다 .

드디어 구원의 손길이 찾아왔다 . 나는 어느 날 동료와 토론을 하고 있었다 .

“만일 신이 없으면 인간은 선을 행하지 않고 따라서 인류 세계는 뒤죽박죽이 되지 않겠나 . ”

“천만에 ! 인간이란 원래 착한 마음을 갖고 태어난 것일세 . 그러므로 착한 생활을 하는 것이 마땅하네 . 이것이 전부요 , 이밖에 다른 이유는 없는 것일세 ” 하고 유교도인 친구는 말하였다 .

인간생활의 존엄성에 대하여 언급한 이 한 마디 말은 기독교에 대한 나의 마지막 이념의 줄을 끊어 버리고 말았다 . 그 후로 나는 이교도가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

지금은 무엇이든지 나에게 명백해졌다 . 이교의 세계는 기독교의 세계보다는 단순하다 . 기독교와는 달라서 아무것도 가정하지 않는다 . 아니 아무것도 가정하지 않게 되었다 . 바르고 착한 생활을 하는 것은 다만 바르고 착한 생활을 하고 싶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할 따름이다 . 그밖에 아무런 가설도 필요 없는 것이다 .

선행을 하는 것을 구태여 정당화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로서 선행을 보다 정당화하고 있는 것이 이교도의 세계이다 . 선은 누가 무어라고 하여도 선이기 때문이다 . 그러므로 이교에서는 구태여 사람들 에게 착한 일을 하라고 격려하지 않는다 . 예컨대 사람들에게 조그마 한 자선을 베풀게 하는데도 기독교와 같은 하나의 가설이나 가정 , 즉 원죄니 , 속죄니 , 십자가니 천국으로 축재니 , 천국에 있는 제 3 자를 위한 인간 상호간의 의무니 하면서 공연히 복잡하기만 하고 아무도 그 사실을 직접 증명할 수 없는 이야기를 꺼내는 법이 없다 . 선행은 선행이기 때문에 선행이라는 주장을 받아들이면 올바른 생활에 대한 온갖 신학상의 미끼는 도덕적인 진리의 빛을 흐리게 하는 거추장스 러운 것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 인간애는 최후의 절대적인 사실 이다 . 구태여 천국에 있는 제 3 자까지 생각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서로 얼굴을 마주보고 사랑할 수 있는 것이다 . 기독교는 도덕성을 공연히 이해하기 어렵고 복잡한 것으로 만들어 버렸다 . 그리고 죄를 매력이 있어 자연히 범하고 싶은 욕망으로 느끼도록 규정하여 버렸 다 . 이교는 종교를 신학에서 구출하여 신앙이 지닌 아름다운 순박성 과 인간이 지닌 감성의 존엄성을 되찾게 한다 .

생각해 보라 . 1, 2, 3 세기에 얼마나 신학적으로 복잡한 일이 많이 일어나 “ 산상수훈”의 단순한 진리를 어색하고 독선적인 교리로 바꾸어 결국 성직이라는 것을 고마운 제도로 만들어 버렸는가 말이다 .

나는 이제 묵시란 말 속에서 그 원인을 찾아볼 수 있으리라고 생 각한다 . 예언자에게 주어지고 사도들이 이어받아 지키는 특수한 신비 또는 신의 계획을 묵시하였다는 생각―이것은 마호메트교 , 모르몬교 , 전생활불을 숭상하는 라마교 , 에디 부인의 크리스찬 사이언스에 이 르기까지 모든 종교에 있어서 구제의 전매특허를 얻기 위하여 필요한 요구였던 것이다 . 그리하여 승려는 저마다 묵시라는 공통된 음식을 먹고 살아가게 된 것이다 . 그러므로 예수의 산상수훈에 담겨 있는 단순한 진리는 수식을 할 필요가 있었으며 , 예수가 그토록 감탄한 들에 핀 백합도 도금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 이리하여 생겨난 것이 제 1 의 아담 , 제 2 의 아담 등등인 것이다 . 초기 기독교 시대에 강한 설득력이 있어 반박하는 자가 없던 사도 바울식 논리도 그 당 시보다는 훨씬 치밀해진 현대인의 비평의식 앞에서는 이미 아무런 맥 도 쓸 수 없는 것이 되어 버렸다 . 엄격한 아시아식 귀납법과 그보다 는 탄력이 있고 정교한 현대인의 진리관 사이에 가로놓인 모순과 간 격 , 여기에 기독교적인 묵시나 그 밖의 묵시가 현대인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없는 약점이 있다고 본다 . 그러므로 이교의 세계로 돌아가 묵시를 단념하는 데서만 원시적인 ( 나로서는 보다 더 만족스러운 ) 기독교의 세계로 갈 수 있는 것이다 . 그러므로 이교도를 가리켜 무종교자라고 말하는 것은 부당하기 짝이 없다 . 다만 이러저러한 묵시 따위를 믿는 것을 거부하는 점만이 그들의 눈에는 무종교라고나 할까 . 이교 도는 언제나 신의 존재를 믿고 있다 . 다만 오해를 받을까 두려워 그런 말을 입 밖에 내지 않을 뿐이다 .

중국의 이교도는 모두가 신을 믿고 있다 . 중국 문학에 잘 등장하는 이른바 조물주의 존재를 믿고 있는 것이다 . 다만 기독교와는 달라서 중국의 이교도는 매우 정직하므로 조물주를 신비의 후광 속에 모셔놓고 마음속으로 외경하고 존숭하는 것이다 . 그들에게는 이러한 느낌을 갖는 것만으로 충분한 것이다 . 이 우주의 아름다움 , 수천만에 이르는 훌륭한 창조의 솜씨 , 별이 지닌 신비 , 하늘의 장엄 , 인간 정신의 존엄 등등은 그들도 잘 알고 있다 . 그들에게는 또한 족하다 . 그들은 괴로움과 모든 난관을 받아들이며 , 죽음도 또한 받아들인다 . 그러나 이 세상에는 생활의 즐거움도 있는 것이다 . 뜰에는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고 산 위에는 밝은 달도 떠오른다 . 인생의 명암을 적당히 받아들여 결코 불평을 하지 않는다 . 하늘의 뜻을 좇는 것이야 말로 참으로 종교적인 경건한 태도라고 생각하여 이를 “ 도 ( 道 ) 에 산다”라고 말한다 . 조물주가 70 세에 죽으라면 기꺼이 그 나이에 죽는다 . 하늘의 도는 운행하는 것이므로 이 세상에 영원한 부정 따위는 없는 것으로 믿고 있다 . 그 이상 무엇이 필요한가 .

  

 

 

 

 

 

 

 

 

제 12 장 사고방식

 

 

 

 

 1. 인간미 있는 사고를 하라

 

사고는 하나의 기술이지 결코 과학은 아니다 . 중국의 학문과 서양 의 학문은 여러 가지 점에서 좋은 대조를 이루고 있지만 , 그 가운데서 가장 현저한 예로서 다음과 같은 것을 들 수 있다 . 즉 중국인은 생활 문제에 대하여 서양 사람보다 훨씬 더 많은 관심을 갖고 있으나 전문적인 과학이 없다 . 이와 반대로 서양 사람들은 전문적인 지 식은 풍부하나 인간적인 면에 대한 지식이 빈약하다 . 서양에서는 과 학적인 사고방식이 인간 정신의 영역에까지 침투되고 있다 . 과학적인 사고방식의 특징을 학문이 고도로 전문화된 데 있다 . 따라서 과학적인 또는 과학에 준한 술어를 많이 사용하게 마련이다 .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과학적인 사고방식은 엄밀히 말해서 논리적 이요 , 또한 객관적이어서 고도로 전문화되며 그 관찰력은 원자적이라고 할 만큼 매우 세밀한 것이다 . 동양의 학문과 서양의 학문을 거 슬러 올라가보면 결국 논리와 상식의 대립에 귀착된다 . 상식을 잃은 논리는 비인간적으로 흐르며 , 논리를 잃은 상식은 대자연의 신비를 꿰뚫어 볼 수 없게 된다 .

중국 문학과 중국 철학의 세계를 훑어보면 중국에는 과학이 없고 극단적인 이론 , 즉 독단이 없으며 실제로 상반되는 철학의 큰 줄기가 없다는 것을 찾아볼 수 있다 . 상식과 양식을 존중하는 정신이 모든 이론과 모든 도그마를 분쇄하여 버렸던 것이다 . 중국의 학자는 대시인 백낙천 ( 白樂天 ) 처럼 유교로 몸을 닦고 , 불교로 마음을 다스리는 한편 산수풍월 ( 山水風月 ) 과 시가금주 ( 詩歌琴酒 ) 로 그 뜻을 즐겁 게 한다 . 그는 몸은 비록 이 세상에 있으나 정신은 저 세상에 있었던 것이다 .

중국은 백성이 머리를 짜내가며 사고하려고 하지 않는 나라이며 누구나 충실하게 생활하려고 하는 나라이다 . 중국에서는 철학까지도 매우 간단한 상식으로 취급되고 있다 . 그리하여 방대한 책에 수록해 야 할 철학체계도 가볍게 두어 줄의 시로 나타낸다 . 중국은 철학체계가 없는 나라이며 형이상학이 없는 나라이고 학구적인 술어가 없는 나라이고 독단론도 , 지적 광신도 , 추상적 술어도 , 기다란 말도 보기 드문 나라이다 . 중국에서는 어떠한 기계론적 합리주의도 통용되지 않는다 . 거기서는 논리적인 필연이란 관념은 철저히 푸대접을 받 는다 . 중국에는 사색에 심혈을 기울인 철학체계는 없고 다만 생명에 대한 치밀한 감정이 있을 뿐이다 .

중국 문학은 모두가 짧은 시와 짧은 수필로 된 사막과 같다 . 그 가치를 잘 모르는 사람에게는 사막이란 무한히 계속된 모래벌판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 실은 광야의 풍경처럼 거기에서는 변화 있는 무한 한 아름다움을 찾아볼 수 있다 . 중국에는 미국 초등학교 학생의 작문보다 더 짧은 300 자나 500 자 정도의 단문이나 수기에 인생관을 실어보려는 수필가나 서간문 작가밖에는 없다 . 이런 우연한 기회에 쓴 문장―편지 , 일기 , 감상문 , 수필 등등에는 인간의 영고성쇠를 한 탄하는 짤막한 감회가 깃들어 있기도 하고 , 이웃에서 자살한 여자에 대한 기록이 있는가 하면 , 즐거운 봄놀이나 눈 속의 향연 , 달밤의 뱃놀이 , 소낙비가 장대같이 쏟아지는 밤을 절간에서 보낸 회상 등등 이 실려 있다 . 그리고 대개의 경우 추억이 될 만한 인상적인 말들을 그 속에서 엮어가고 있는 것이다 . 그러므로 수필가이면서 시인이고 시인이면서 수필가인 사람을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 그들은 대체 로 400 자 내지 700 자 이상의 긴 글은 쓰지 않으나 , 단 한 줄 속에도 모든 인생철학이 선명하게 담겨 있다 . 그리고 자기의 사상을 엄 밀하게 체계화하지 않으려는 우화작가나 경구작가 또는 가정적인 서 한문의 필자도 있다 . 이러한 것들이 중국에서 학파와 체계의 출현을 훼방하였던 것이다 . 지성은 언제나 양식 , 즉 상식적인 판단을 존중하는 정신이나 작가의 예술가적인 감수성 뒤에 숨겨 놓고 있다 . 그리하여 지성을 진심으로 믿는 사람은 없다 .

서양 학문의 커다란 특징은 그 전문화와 지식을 절단하여 각각 다른 구획 안에 집어넣는 점이다 . 논리적인 사고방식과 전문화가 지 나치게 발달됨에 따라 용어도 전문적으로 분화된 결과 철학이 정치 나 경제보다 훨씬 하위에 물러서 있으므로 일반 사람들은 조금도 양 심에 꺼리지 않고 철학의 곁을 스쳐 버릴 수 있게 되었다 . 이것은 현대문명의 기이한 현상이라고 하겠다 . 교육을 받은 사람일지라도 대체로 철학은 있으나마나한 학과 중에서도 첫째가는 것으로 생각하 고 있다 . 이것은 분명히 현대문명의 괴상한 변태적인 현상이라고 하 지 않을 수 없다 . 왜냐하면 인간의 심리현상이나 일상생활에 가장 가까워야 할 철학이 인생으로부터 가장 멀리 떠나 버렸으니 말이다 . 인생에 관한 지식을 연구하는 것을 학자의 중요한 직분으로 알고 있 던 그리스나 로마의 고대문명에서는 그러한 현상은 찾아볼 수 없으며 , 같은 시대의 중국에서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 그런데 오늘날 철 학이 그렇게 푸대접을 받는 것은 현대인이 철학 본래의 목적인 생활 문제에 흥미를 느끼지 않게 되었거나 , 철학이 그 최초의 개념에서 너무 밀리 동떨어져 버렸거나 둘 중의 어느 하나의 결과라고 생각한 다 . 우리의 지식의 범위는 매우 확대되어 각각 전문가에 의하여 취급되는 많은 부문이 발생하게 되었으나 철학은 인간 최고의 학문이 라는 관록을 잃고 아무도 전문적으로 연구하려고 들지 않는 한 분야 로 남게 되었다 .

옛날 중국 전국시대에 황제는 여러 제후의 나라들로부터 공물을 거둬들이기는커녕 그 세력도 영토도 날로 줄어들어 , 나중에는 겨우 충성을 다하는 선량하고 굶주린 소수의 백성을 심복으로 거느리는 데 불과하였는데 이것은 남의 일이 아니다 . 지식의 왕자를 자랑하던 철학도 어느새 그와 똑같은 꼴이 된 셈이다 .

지식은 없으면서 지식의 구획만이 있는 문화의 단계에 이르렀기 때문에 이러한 현상이 일어나는 것이다 . 즉 오늘날에는 전문화는 있지만 종합이 없다 . 그러므로 전문가는 있으되 인간의 예지를 다루는 철학자가 없다 . 지나친 지식의 전문화는 중국 궁정의 요리사들 사이 에서 찾아볼 수 있는 지나친 전문화와 다를 것이 없다 .

옛날 어느 왕조가 망하였을 때 한 돈 많은 관리가 궁정 내시의 요리사로 있다가 도망쳐 온 여자를 요리사로 데려갔다 . 그는 이것이 자랑하고 싶어서 친구들에게 안내장을 보내어 궁정 내시의 요리사가 지은 음식을 맛보아 달라고 초대하였다 . 초대한 날이 가까워왔으므 로 그는 그 여인에게 궁정요리를 만들도록 일렀다 . 그런데 그 여자는 요리 같은 것은 만들 줄 모른다고 뜻밖의 대답을 하였다 .

“그러면 너는 궁중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느냐 ? ”

하고 그는 물었다 .

“네 , 저는 만두 만드는 일을 거들고 있었습니다 . ”

“그래 , 그렇다면 그날에 손님에게 내어 놓을 맛있는 만두를 만들 도록 하여라 . ”

그러나 그 여자의 대답에 그는 다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

“ 아녜요 . 저는 만두를 만들 줄 모릅니다 . 저는 황제에게 드릴 만두에 넣는 파를 써는 일만 해왔어요 . ”

이와 비슷한 현상은 오늘날 지식의 영역이나 학문의 영역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 인생과 인간성에 대해서는 극히 조금밖에 알지 못 하는 생물학자가 있는가 하면 같은 부류의 정신병학자도 있다 . 인류 의 고대역사만 알고 있는 지질학자나 , 문명인에 대하여는 알지 못 하 나 야만인의 심리라면 잘 안다는 인류학자도 있다 . 심리학자는 인간 의 행위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지식을 곧잘 제공해 주지만 , 동시에 루이스 카롤은 사디스트였다느니 닭을 실험한 결과 강렬한 소음이 닭에게 주는 영향은 심장을 뛰게 하는 데 있다는 것이 밝혀 졌느니 하는 등등의 내용을 발표하여 , 부질없이 학구적인 것만 추구할 뿐 아무 소용도 없는 일을 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경우도 많은 것 이다 .

이렇게 전문화되어 가는 반면에 종합의 과정 , 즉 모든 부문의 지식을 한 데 모아 인생의 즐거움이라는 최고의 목적에 도움이 되게 하려는 노력이 필요함을 느끼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 그런데 예일대학의 인류종합학회나 , 하버드대학 창립 300 주년 기념제의 기념식사 에서 표명된 바와 같이 , 어느 정도의 지식을 종합할 준비는 오늘날 되어있다고 생각한다 . 그러나 서양의 과학자들이 보다 단순하게 , 더 욱 비논리적인 사고방식을 갖지 않는 한 이 종합은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 인간의 예지는 단순한 전문적인 지식의 산더미가 아니며 통계적인 평균치의 연구로 얻어질 수 있는 성질의 것도 아니다 . 예지는 오직 식견에 의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이다 . 상식 , 기지 , 그리고 솔 직 미묘한 직감이 골고루 몸에 배어야만 비로소 예지에 도달할 수 있다 .

논리적인 사고와 합리적인 사고 사이에는 뚜렷한 차이가 있다 . 그 것은 학구적인 사고와 시적인 사고의 차이라고 말해도 무방할 것이다 . 오늘날 학구적인 사고의 예는 많이 찾아볼 수 있으나 시적인 사고의 예는 전혀 찾아볼 수 없다 .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라톤은 놀라울 만치 현대적이다 . 현대적인 것 은 옛날의 그리스인이 현대인과 비슷하였기 때문에 아니라 , 아리스 토텔레스에게는 인간적으로 사물을 관찰하는 눈이 있었으며 중용설 을 취한 점도 찾아볼 수 있으나 그는 분명히 현대적인 교과서의 필 자의 조상이라고 할 만한 분으로 의학 , 식물학 , 윤리학 , 정치학에 이 르기까지 지식을 많이 구분시켜 놓은 최초의 학자이기도 하였다 . 그 는 또한 부득이한 일이기는 하였을 터이지만 , 일반 사람들은 좀처럼 알 수 없는 아카데믹한 잠꼬대를 처음으로 입에 담은 학자이기도 하 였다 . 그러나 그 잠꼬대가 심하기로 말하면 도저히 오늘날 미국의 사회학자나 심리학자를 따를 수가 없었다 .

플라톤은 진정한 인간적인 통찰력을 지닌 사람이었다 . 그도 신플 라톤학파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것 같은 추상적인 관념이나 개념을 숭 상하게 한 책임자이기도 하다 . 그러므로 그에게 전혀 죄가 없다고 할 수는 없다 .

인생을 분명하게 파악하고 인생을 전체로서 바라볼 수 있는 새롭고 흥미 있는 사고방식이 오늘날 절실히 요청되는 것이다 . 제임스 하베 로빈슨 교수는 이렇게 경고하였다 .

“우리의 사상을 종전보다 훨씬 높은 수준으로 끌어 올리지 않으면 문명이 후퇴하게 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다 . 눈이 올바로 박힌 자라면 솔직하게 이러한 소신을 암암리에 말하고 있는 것이다 . ”

근대에 와서 과학적인 사고의 위력이 너무나 크기 때문에 여러모로 경고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러 가지 학구적인 사고방식은 인 간의 정신을 하수도와 마찬가지로 측정할 수 있다느니 , 인간 사상의 파동은 라디오의 전파와 마찬가지로 측정할 수 있다느니 하는 따위 의 천박한 신념을 갖고 철학의 영역으로 끊임없이 침범해 들어갔었다 . 그 때문에 우리의 평소의 사고는 얼마만큼 혼란을 가져온 데 그쳤으나 실제 정치면에 있어서는 비참한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

 

 

2. 상 식으로 돌아가자

 

중국인은 논리적인 필연이라는 말을 싫어한다 . 인간의 일에 논리적인 필연이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 중국인이 논리를 믿지 않는 것은 말을 믿지 않는 데서 오는 것이다 . 그리하여 모든 정의를 혐오하게 되고 드디어는 체계와 이론을 증오하게 되었다 . 말과 정의와 체계로 말미암아 여러 학파가 생겼기 때문이다 . 철학의 타격은 말에 몰두하는 데서 비롯되었다 . 중국의 학자 공정합 ( 龔 定盒 ) 은 말하였다 .

“성현은 말하지 않고 학자는 말하며 우자는 논한다 . ” 그런데 이렇 게 말한 그 자신은 논쟁하기를 좋아하였다니 흥미 있는 이야기이다 .

현자와 학자 사이에는 서로 차이가 있다 . 즉 현자는 몸소 체득한 인생에 대하여 말하지만 학자는 성현의 견해에 대하여 말하며 우자 는 식자의 말을 논할 따름이다 .

옛날 그리스의 궤변학자 가운데는 말을 주고받는 것 자체를 즐긴 이야기꾼이 있었다 . 지식을 사랑하는 데서 비롯된 철학이 말을 사랑하게 되어 궤변적인 경향이 짙어감에 따라 철학과 인생의 거리는 점점 멀어만 갔다 .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서 철학자는 더욱 많은 말을 사랑하고 더욱 긴 문장을 쓰기 시작하였다 . 인생을 풍자하는 경구는 문장으로 , 문장은 논증으로 , 논증은 논문으로 , 논문은 해설로 , 해설은 철학적 연구에 자리를 양보하게 되었다 . 그리고 거기 사용하는 말을 정의하고 분류하느라고 더욱 더 많은 말이 필요하게 되었으며 , 기성학파에서 떠나 색다르게 보이기 위해 더욱 더 많은 학파를 필요 로 하게 되었다 . 이러한 과정은 언제나 계속되었다 . 그리하여 생활과 직접 가까이 할 수 있는 감정이나 학식은 완전히 자취를 감추고 속인들이 오히려 “ 당신은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소 ? ” 하고 대들게 되었다 .

그러나 그 후의 괴테나 , 에머슨이나 , 사무엘 존슨이나 , 윌리엄 제임스처럼 인생 자체를 직접 체험한 몇몇 독창적인 사상가들은 저 이야기꾼들이 지껄이는 잠꼬대를 배격하고 분류의 정신에 반기를 들 었다 . 그들은 실로 인생에 있어서 산지식이 될 수 있는 철학의 의의 를 발견해준 현철 ( 賢哲 ) 이었던 것이다 . 그들은 대체로 이론을 배격하 고 경구를 쓰기로 하였으며 , 경구로 말을 할 수 없을 경우에는 짧은 글을 쓰고 , 짧은 글로 자기 의사를 분명히 표현할 수 없을 때에는 의 논을 시작하였으며 , 의논을 하여도 진의를 나타낼 수 없을 때에 비로 소 논문을 쓰기 위해 붓을 들었던 것이다 .

인간이 말을 사랑한다는 것은 무지에 빠지는 첫 걸음이며 , 정의를 사랑하는 것은 무지에 빠지는 두 번째 걸음이다 . 분석을 세밀하게 하면 정의는 더욱 많아지고 정의가 많아지면 더욱 더 논증이 어렵게 되는데도 , 이런 노력을 계속한다는 것은 무지함을 보여주는 표시에 불과하다 . 말은 사상을 나타내는 재료이므로 정의를 내릴 경우에는 여간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된다 . 소크라테스는 유럽 정의광의 시조였 다 . 위태로운 것은 정의를 내린 다음 , 그 정의에 사용된 말에 또 정 의를 내려야 하는 경우이다 . 인생을 가장 절실히 느낀 셰익스피어는 일체의 정의를 내리려고 하지 않았다 . 그러므로 그의 말에는 다른 작가에게서 찾아볼 수 없는 본질이 구비되어 있다 . 그의 언어 구사 에는 오늘의 작가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인간적인 비애와 엄숙성 이 깃들어 있다 .

언어가 사상의 표현을 훼방하는 것이라면 체계를 사랑한다는 것은 인생을 예리하게 아는 데 있어서 커다란 장애가 되는 것이다 . 체계란 진리에 대한 사팔뜨기에 불과하다 . 체계가 논리적으로 세워질수록 사팔뜨기는 더 심해진다 . 인간은 때때로 진리의 일면만을 보고 그것을 하나의 완전한 논리적인 체계로 발전시키려고 한다 . 철학이 점점 인생으로부터 멀어져 가는 운명에 놓인 이유의 하나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 진리를 말하려면 말 때문에 침해되고 , 진리를 증명하려면 그 증명 때문에 왜곡된다 . 진리에 상표를 붙이고 어떤 유파에 이름을 얹어 놓는 것은 진리를 죽이는 일이며 , 스스로 어떤 진리의 신봉자라고 자처하는 것은 진리를 땅 속에 묻어 버리는 격이다 . 독일 사람은 언제나 본질이라는 것을 자랑삼아 내세우고 , 어떤 진리를 증명하기 위해 엄청난 저술을 하지만 결국은 진리를 엉뚱하 고 애매한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 그들이야말로 진리에 대한 최악의 모독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그러나 흔히 서양의 사상가들은 이와 비슷한 법적인 사고방식을 갖고 있다 .

진리란 추상적이 되면 될수록 더욱 빗나가게 마련이다 . 이러한 비 인간적인 논리는 결과적으로 비인간적인 진리를 낳을 따름이다 . 오 늘의 철학은 인생 자체와는 더욱 거리가 먼 것이 되어 버리고 , 인생 의 의의나 실생활에 대한 지식을 가르치려는 의도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 그리하여 우리가 철학에서 가장 중요한 것으로 알고 있는 인생에 대한 친근감이나 생활인의 지혜를 잃고 만 것이다 . 오늘날 서 양철학을 인간적인 것으로 개조하려면 우선 서양논리를 인간적인 것 으로 만들지 않으면 안 된다 . 오직 정확하고 이치에 맞고 조리 있게 하는 것보다 더욱 열의를 갖고 인생과 접촉하며 무엇보다도 인간성을 중요시하는 사고방식을 가져야할 것이다 .

“나는 생각한다 .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유명한 데카르트의 명제 속에 전형적으로 나타나 있는 병적인 사고방식을 없애고 “ 나는 있다 . 이것으로 족하다” 하고 말한 휘트먼의 인간적이고 현명한 생 각으로 돌아가야 한다 . 인생은 , 다시 말해서 실체는 논리 앞에 무릎 을 꿇고 자기의 존재를 증명해 달라고 애걸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

공자는 말하였다 . “진리가 인간에게서 멀어져 있어서는 안 된다 . 그렇게 되면 진리라고 인정하지 말아야 한다 . ”

이어서 공자는 마치 윌리엄 제임스의 입에서라도 나올 법한 기지에 가득 찬 어조로 , “진리가 인간을 위대하게 만든다”라고 말하였다 . 세계는 삼단논법이나 의논이 아니라 실재인 것이다 . 우주는 말하지 않고 오직 살아 있는 존재인 것이다 . 우주는 의논을 일삼지 않고 오직 실재할 따름이다 .

서구식 논리학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약간의 겸손이다 . 그들을 구제하는 길은 오직 헤겔식 자부심을 누르는 데 달려 있다 .

 

 

3. 정 ( 情理 ) 알라

 

논리와 좋은 대조를 이루고 있는 것은 상식이다 . 상식이라기보다는 정리 ( 情理 ) 라고 하는 편이 좋을지 모른다 . 정리를 존중한다는 것은 문화가 지녀야 할 건전한 최고의 이상으로서 , 정리를 아는 사람이 으뜸가는 문화인이라고 하겠다 .

아무도 완전무결할 수는 없다 . 다만 정리를 분별하는 좋은 인간이 되려고 노력할 뿐이다 . 사실 나는 세상 사람들이 개인적인 문제나 국가적인 문제를 다루는 데 이 정신을 터득하는 시대가 오기를 고대 하고 있다 . 정리를 아는 국민은 평화로운 생활을 할 수 있고 정리를 아는 부부는 행복하게 살 수 있다 . 처녀가 신랑감을 구할 때 기준이 되는 것은 오직 상대편이 이 정리를 아는 인간이냐 모르는 인간이냐를 알아내는 데 있다 . 절대로 싸움을 하지 않는 완전한 부부란 생각 할 수 없다 . 다만 정리로 쉽사리 화해를 하는 정다운 부부라야 하는 것이다 . 정리가 있는 세상이라야 평화와 행복을 즐길 수 있다 . 정리 의 시대가 돌아오면 그때야말로 참으로 평화롭고 정답게 살 수 있는 시대가 될 것이다 .

인생에 있어서 정리를 존중하는 정신은 중국이 세계에 제공해야 할 최선의 선물이다 . 하긴 중국의 군벌들이 50 년 후의 세금을 국민들로부터 미리 요구하는 것이 정리를 분별한 정치라고 할 수는 없지 만 , 어쨌든 이 정리야말로 중국문명의 핵심이며 그 최선의 바탕이라 고 하겠다 . 나는 이 정리를 우연히 , 오랫동안 중국에 머물고 있던 두 사람의 미국인에 의하여 확인하게 되었다 . 그 중의 한 사람은 중 국에서 30 년 동안이나 살아왔으며 , 중국의 모든 사회생활이 강리 ( 講 理 , 도리를 말한다 ) 에 기초를 두고 있다고 말하였다 . 중국 사람들이 서로 싸울 때 마지막 판결을 짓는 말은 “ 이봐 , 이것이 도리에 맞는 다고 할 수 있어 ? ” 라는 말이다 . 그리고 누구나 곧잘 입 밖에 내는 가장 통탄할 만한 선언은 “ 도리를 모르는 놈” , 즉 “ 경우에 맞지 않는 놈”이라는 한 마디다 . 싸움에서 자기가 도리에 맞지 않는 짓을 하였다고 인정하면 이미 지고 마는 것이다 .

공자는 일찍이 인간의 심정과 대자연의 운행에 조화된 생활을 하 면 성인이 된다고 말하였다 . 성인이란 정리를 분간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 공자는 평이한 상식을 스스로 갖춘 사람으로 그 인간미 때문에 존경을 받고 있는 것이다 .

인간미가 있는 사고방식이란 정리를 분별하는 것을 말한다 . 논리적 인 인간은 언제나 자기가 옳다고 생각한다 . 그러므로 인간적이 못 된 다 . 그래서 틀렸다는 것이다 . 그러나 정리를 아는 사람은 혹시 자기가 잘못되지 않았나 하고 의심을 한다 . 그러므로 항상 옳은 것이다 .

편지의 추신에는 이 두 가지의 대조가 나타나는 경우가 있다 . 나는 언제나 친구가 보내 주는 추신을 좋아하며 특히 본문과 전혀 모순되는 내용을 쓴 것을 재미있게 읽는다 . 이 추신 속에는 본문을 쓰고 나서 가슴에 손을 얹고 여러 가지로 세상의 정리에 비쳐서 생각한 점이나 , 망설임이나 기지나 상식이 쓰여 있다 . 어떤 문제를 긴 논리로 설복하려 버티던 끝에 갑자기 어떤 직관에 부딪쳐 혼연히 상 식으로 돌아와 지금까지의 논조는 완전히 무시해 버리고 자기의 잘못 을 인정한다 . 이것이 온정 있는 사상가이다 . 그리고 이러한 사고 방식이 곧 내가 말하는 인간미가 있는 사고방식이다 . 편지의 본문에 는 이론적인 인간으로서 말하고 나서 그 추신에는 참된 인간적인 정신과 정리를 분별한 사람의 입장에서 말한 편지 내용을 생각해 보자 . 가령 어느 아버지가 대학에 보내 달라고 졸라대는 딸에게 편지를 쓸 경우에 딸을 대학에 보낼 수 없는 이유를 제 1, 제 2, 제 3 의 조목을 들어 누가 보아도 그럴 듯하게 나열한다 . 거기에는 빈틈없이 도리가 닿아 한 마디도 반문할 여지가 없다 . 즉 현재 오빠를 둘씩이나 대학에 보내고 있으며 , 어머니가 병상에 누워 있으니 옆에 누가 있어 주어야 하겠다든가 , 그밖에 여러 가지 사연이 있을 수 있다 . 그리고 편지 끝에 추신을 짤막하게 한 줄 적어 보낸다 . “ 쥬리아 , 그렇지만 할 수 없다 . 올 가을에 입학할 예정을 하고 준비나 하여라 . 어떻게 방법이 서겠지 . ”

혹은 아내에게 편지로 이혼할 결의를 통고하는 경우를 생각해 보 자 . 그럴 듯한 이유는 얼마든지 있는 법이다 . 첫째 그 여자는 남편에게 성실치 못 하다 . 둘째 남편이 집에 돌아왔을 때 따뜻한 음식을 별로 먹게 해준 일이 없다는 등등 , 모두가 유력한 이유들로 정당하 고도 남는다 . 만일 변호사에게 의뢰하면 논리가 타당하여 일은 한층 더 정당하게 되어 간다 . 그러나 편지를 다 쓰고 나서 홀연히 생각을 고쳐먹고 간신히 읽을 수 있는 작은 글씨로 “ 사랑하는 아내여 ! 나야 말로 너절한 인간이다 . 꽃다발 갖고 집에 돌아가마 . ” 이렇게 써 보 낸다 .

이 두 편지의 본문에 있는 내용은 논리가 정연하고 사리가 바르다 . 그러나 그 편지를 쓴 장본인은 어디까지나 한 사람의 논리적인 인간에 그친다 . 그러나 추신에서 말한 것은 참으로 인간적인 정신― 인간적인 아버지와 남편의 태도이다 .

조금만 정리를 이해하는 사람이라면 대수롭지 않은 의논 따위에 골치를 썩이지 않고 상반되는 충동과 감정과 욕구가 일변하는 바다 가운데서 건전한 키를 잡도록 해야 한다 . 그것은 인간의 의무이다 . 우리를 진실하게 만들어 주는 것이 곧 진실이라는 것이 인간계의 모습이다 . 반박의 여지가 없는 의논에는 인정이 맞서게 된다 . 그리하여 정당한 것도 애정 앞에서는 약한 법이다 . 그러므로 세상에는 확신은 가는데 도무지 논리에 맞지 않는 경우가 얼마든지 있다 . 법률까지도 그 주장하는 명분이 불완전함을 인정하고 있다 . 최고행정관에게 사면권을 주고 있는 것을 보더라도 분명히 알 수 있다 . 에이브 러햄 링컨은 어느 부인과 아들에 대하여 이 사면권을 효과적으로 행 사하였었다 .

이와 같이 정리를 존중하는 정신은 모든 사고방식을 인간적으로 하며 우리 자신이 옳다는 생각을 물리치게 한다 . 그것은 우리의 관념을 원숙하게 하고 모가 난 행위를 둥글게 한다 . 여기에 대립되는 것은 사상과 행위로 개인생활 , 국민생활 , 결혼 , 종교 , 정치에 있어서의 모든 광신과 독단이다 . 나는 감히 주장하거니와 중국에는 지적 광신과 독단론이 다른 어느 나라보다도 적다 . 중국의 폭도는 흥분하 기 쉬운 면도 있지만― 1900 년의 권비 ( 拳匪 ) 가 실례이다―정리를 분 별 하는 정신은 중국의 전제군주정치나 종교 , 또는 이른바 아내의 포악을 매우 인간미가 있는 것으로 만들어 버렸다 . 물론 이러한 일들은 모두 얼마간 조건부로 받아들여야 하지만 아무튼 틀림없는 사 실이다 .

정리라는 것이 중국에서는 황제나 신을 단순한 인간으로 끌어내려 버렸다 . 중국의 역사가는 황제란 천명에 의하여 통치하는 것이며 실 정을 하였을 때에는 천명을 잃는다는 이론을 발전시켰다 . 황제가 악 정을 할 때에는 우리는 사정없이 목을 베어 버린다 . 지난날 수없이 흥망을 거듭한 그 많은 왕조의 임금이나 황제의 목을 너무 많이 베었으므로 그들을 신성시하거나 신격화하는 일은 도저히 생각할 수 없었다 . 중국에서는 성현도 신으로 모시지 않고 오직 지식의 스승으 로서 추앙하였을 뿐이다 . 그리고 중국의 신은 완전무결한 존재가 아 니라 관리들과 마찬가지로 아첨도 통하고 뇌물도 곧잘 받아 주는 존 재로 되어 있다 .

중국에서는 정리를 떠난 자는 인간성에서 멀리 떠난 자로 낙인이 찍힌다 . 너무 성인인 체하는 완전무결한 인간은 마음속에 어떤 이상 이 있다고 해서 반역자 취급을 당하는 경우도 있었다 .

이러한 관점에서 오늘의 유럽을 살펴볼 때 정리에 의하여 통치되어 있다고 할 수 없다 . 아니 정리는커녕 이성조차 통하지 않는다 . 그것은 차라리 광신적인 정신에 의하여 지배된다고 하겠다 . 오늘날 유럽의 실정을 보면 누구나 신경과민이라는 느낌이 든다 . 국가의 계 획이나 국경문제나 식민지의 요구에 마찰이 있다든가 하는 일만이 원인이 아니다 . 그런 일들뿐이라면 이성으로 판단하여 충분히 처리할 수 있을 것이다 . 그러나 좀처럼 그렇게 되지 않는 것은 그 근원이 더 깊기 때문이다 . 즉 그것은 실로 유럽의 통치자들의 정신 상태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 비유해말하면 낮선 도시에서 택시를 잡아탔 으나 운전수를 못 믿어 불안에 사로잡힌 격이다 . 운전수가 지리에 어두워 정확한 길로 손님을 목적지까지 모시지 못 한다면 이야기가 다소 납득이 되지만 , 운전수가 중얼거리는 괴상한 말을 손님이 듣고 그 정신에 이상이 없나 하고 의심하게 되면 그야말로 난처한 일이다 . 게다가 그 운전수는 권총을 갖고 있으며 손님은 차에서 내릴 기회가 없다면 신경과민은 극도에 달한다 .

그러나 인간정신의 이러한 우스꽝스런 모습은 그 참된 모습은 아니다 . 그는 이제 온갖 나쁜 병마에 휩쓸려 들어간 것처럼 자기 자신을 불태워 버리는 단순한 정신착란증 , 즉 일시적인 발광의 단계에 있는 것이다 .

우리는 결국 인간의 정신력을 신뢰하고자 한다 . 정신의 힘은 원래 제한된 것이긴 하지만 무모한 유럽의 운전수의 지능보다는 무한히 높은 것이므로 언젠가는 평화스러운 생활을 즐길 수 있을 때가 올 것이다 . 인류는 앞으로 멀지 않아서 정리에 입각하여 사물을 생각하 는 법을 배우게 될 터이니 말이다 . 우리에게는 이렇게 믿을 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

  

 

  



가난 속에서 스스로 창조하는 기회를 찾으라

( 초청 강 연)

 

 

 

 

 

 미개 국가라기에는 미안해서 개발도상국가라고 부른다

 

대한민국 국민 여러분 !

동양인의 한 사람으로 여러분과 만나 이야기할 수 있게 된 것을 진정 기쁘게 생각합니다 . 아울러 저로서는 이 첫 번째의 한국 여행이 마지막 한국 방문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

아시아 사람들은 가지지 못 한 나라의 사람들이라고 세계에 알려져 있습니다 . 일반적으로 아시아 , 아프리카의 여러 나라들은 저개발국 가로 , 구미제국은 선진국가로 알려져 있습니다 . 그 가운데는 원시인 의 국가처럼 생각되는 저개발국가 또는 미개 국가로 부르기가 미안해서인지 개발도상국가라고 부르는 이도 있습니다 .

오늘 내가 여러분에게 말씀하고자 하는 요점은 저개발국가 , 미개 국가로 불리다가 최근 개발도상국가로 불리는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여러 나라들 , 즉 가지지 못한 나라들이 앞으로 많은 것을 가질 수 있는 위치와 시점에 놓여 있다는 점을 강조하려는 것입니다 . 여러분 이 생각하시기에 과거에는 못 가졌고 빈곤했던 나라들 , 즉 우리들이 앞으로 넉넉한 나라가 된다는 말은 아름답고 반가운 메시지가 될 것 입니다 . 그리고 우리가 앞으로 부유한 나라가 된다는 것은 모든 사 람들이 부유하게 된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

 

 

동양은 정신적이고 서양은 물질적이라 함은 애당초 잘못된 인식 이다

 

 

대체로 그동안 얘기되어온 바로는 동양의 문화는 정신적인 것이며 서양의 그것은 물질적이라는 것입니다 .

그러나 나는 이것은 잘못된 견해라고 생각합니다 . 찬란한 정신문 화와 불교의 발상지인 인도의 캘커타에 가 보면 여러분은 놀랄 만한 빈곤의 상태를 보게 될 것이며 도대체 인도의 찬란한 문화의 가치가 무엇일까 하고 스스로 묻게 될 것입니다 .

이러한 빈곤의 참상은 구태여 인도에만 국한된 일이 아닐 것입니 다 . 나도 중국에서 태어나 중국에서 자랐지만 그것은 빈곤의 밑바닥 같은 생활이었습니다 . 누더기와 먼지투성이 , 그리고 굶주림에 떨면 서 쓰레기통 같은 생활을 했습니다 . 빈곤의 밑바닥에서 헤매는 현상 , 이것은 아시아의 일반적 실정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

다시 한 번 아시아인의 한 사람으로 말씀드릴 것은 문화와 아시아의 유산에는 자랑스러운 것과 수치스러운 것이 엇갈려 있다는 점입니다 . 동양사상이 정신적인 것이요 , 서양사상이 물질적이라는 것은 무의미한 이야기 , 즉 난센스입니다 .

이것은 어떤 사람이 1 년에 한 번 목욕하면 정신적이요 , 매일 목욕 하면 물질적이라고 말하는 식의 난센스입니다 . 수세식 변소를 마련해 놓고 앉아서 편안히 용변하면 물질적이요 , 약간 향기롭지 못 한 냄새 를 맡아가며 집 뒤로 돌아가 불편하게 용변을 하면 정신적이라고 말 하는 식의 난센스입니다 .

여러분이 흔히 볼 수 있는 일로 얌전한 수녀가 자전거를 타고 거리를 달려가고 , 스님이 전화로 세속적인 얘기를 하는 모습과 같은 것입니다 .

이와 반면에 깨끗한 것이 신에 가까우며 높은 가치를 부여할 만 한 것처럼 착각하는 사고가 있습니다 . 영국 군대에서는 매일 면도를 깨끗이 해야 훌륭한 군인으로 여기는 습성이 있습니다 .

 

 

쓰레기통 같은 생활이나 햇빛은 가리지 말라

 

 

여러분도 잘 아는 아테네의 철학자 디오게네스와 알렉산더 대왕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 통 속에서 살던 디오게네스에게 알렉산더 대왕이 찾아가 무엇이든지 필요한 것을 요구하라고 말하자 , 철학자는 “ 대왕이여 , 햇빛을 가리지 말고 비켜 주십시오”라고 대답했다는 이야 기입니다 . 디오게네스는 위대한 정신적 힘의 상징입니다 . 그러나 그의 몸에서는 해묵은 때 냄새와 땀 냄새가 배어 있었을 것이며 , 옷은 누더기여서 도저히 내가 한 방에서 같이 있을 수 없는 인간이었을 것입니다 .

물론 정신적인 면과 물질적인 면을 대조시키는 이야기는 많습니다 . 영국의 유명한 시인 윌리엄 에드워드는 “ 생각은 높게 , 생활은 단순하게”라고 말했습니다 . 먼 나라 이야기만 할 게 아니라 공자의 적절한 명언을 들어 보겠습니다 . 공자는 “ 청빈은 좋다 . 청빈하면서도 자존심을 갖는 것은 더욱 좋고 , 부자로서 겸손하면 더욱더 좋다” 라 고 말했습니다 .

 

 

오늘날 나쁜 것은 전쟁과 적대감이다

 

 

오늘날의 시점에서 빈곤이라는 것은 용인할 수 없습니다 . 지금 비약적인 발전을 하고 있는 한국에서 볼 때 장래는 풍족히 가질 수 있고 부유해질 수 있는 찬란한 시점입니다 . 만일 우리가 무능하지 않다면 지금은 가장 자극적이고 찬란한 시점입니다 .

우리는 좋은 것과 나쁜 것이 공존하는 세계에 살고 있습니다 . 나쁜 것은 전쟁과 적대감정입니다 . 그런데 나는 오늘날의 가장 나쁜 것을 ABC 로 말해 보고자 합니다 . A 는 에이디즘 ( 무신론 ), B 는 비틀즈 , C 는 코뮤니즘 ( 공산주의 ) 입니다 .

물론 서양문화의 장점을 솔직히 인정해야 합니다 . 민주주의 , 평등 주의―자유의 기조가 개인의 자각에서 우러나왔고 , 하나의 인간 , 즉 개인을 위해 이러한 제도를 키워 온 서양문화를 높이 평가해야 할 것입니다 .

오늘날 우리는 참으로 우리를 흥분시키며 자극을 주고 있는 현대에 살고 있음을 절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

나는 여기서 어느 재상 아들의 이야기를 우화로서 소개하고자 합 니다 .

우리들은 가끔 어째서 이런 불행한 나라에 태어났을까 하는 생각 을 하게 됩니다 . 그러나 재상의 아들보다는 농부의 아들이 더 낫다 는 얘기를 나는 하려는 것입니다 . 빈농의 아들이 근면하고 노력해서 재상이 되었습니다 . 그런데 그 재상의 아들은 방탕한 생활만을 일삼 았습니다 .

 

 

빈농의 아들이 재상 되고 그 재상 아들은 방탕해져 … .

 

 

“너의 아버지는 일국의 재상이고 , 너의 아들도 고급 관리로 있는 데 너의 방탕한 생활이 부끄럽지도 않느냐 ? ”

아버지인재상의꾸지람을들은아들은이렇게대꾸했습니다 .

“아버지는 빈농의 아들로 태어났으니 재상의 아들인 나와는 비교 가 안 되는 일이 아닙니까 ? ”

한 나라와 한 가정의 어려움은 이를 극복해 나가야 할 도전과 기회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

가지지 않은 나라의 젊은 아들인 우리는 아버지가 돈을 대주는 것보다 자신이 스스로 창조하는 기회를 찾을 수 있다는 점에서 다행 스러운 환경으로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

서구사회를 휩쓰는 비틀즈의 존재는 재상의 아들을 상징합니다 . 재상의 아들은 자극이나 새로운 흥분제를 구할 수 없어 주어진 환경 속에서 생활에 지치고 새롭고 신선한 것을 맛볼 수 없으나 , 빈곤한 농민의 아들인 개발도상국가의 국민은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려는 새 로운 흥분과 자극에 가득 차 있습니다 .

여러분에게 감히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여러분이야말로 가장 보람을 느낄 수 있는 재미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는 포부를 지닐 자격 이 있다는 것입니다 .

 

 

일본의 굴레 벗은 독립국 , 작은 나라가 오히려 이상국

 

 

지난날 여러분의 나라는 일본 통치 하의 식민지로 있었으나 지금은 독립된 자유로운 한국을 이룩하고 있습니다 .

이제 한국이 근대 선진국이 되느냐 못 되느냐 하는 것은 오직 여러분에게 달려 있습니다 . 그 책임을 일본에 지울 때는 이미 지나간 것입니다 .

우리가 우리와 새로운 나라를 근대화하는 일은 우리들이 가진 열정으로 그 꿈을 실현해야 할 아름답고 흥분된 창조 과정입니다 .

찰스 디킨즈는 그의 작품 『 두 도시의 이야기』에서 반생을 형무소 에서 보낸 한 인간을 그리고 있습니다 . 그는 감옥생활이 습성화되어 출옥 후에도 자유인으로서 행동해야 할 바를 모릅니다 . 오랜 감옥생활에 젖어 그는 자기 능력을 어떻게 자유로이 발휘해야 할지를 망각 한 것입니다 . 우리는 지난날의 일본 통치로 인해 우리의 능력을 발휘하지 못 하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

나라가 작다는 점이 우리들의 꿈을 감퇴시키는 요인은 되지 못 합 니다 . 우리가 이상국가로 생각하는 영국이나 스위스 , 네덜란드 , 덴마 크 등도 다 작은 나라입니다 . 지금 우리는 과학과 기술의 세계에서 살고 있습니다 . 영국의 리버풀은 목화가 나지 않는 지방이지만 면방 직 공업 발전의 상징으로 되어 있습니다 . 대만도 솜이 없는 곳이지 만 면직물을 수출하고 있고 , 오스트레일리아로부터 원모를 수입해서 우수한 모직물을 홍콩 등지에 내놓아 세계 상품과 경쟁하고 있습니 다 . 페르시아 만으로부터 수입한 원유를 정유로 바꾸어 대만의 수출 고를 높이고 있습니다 . 또 화학비료의 국내 수요를 충당할 수 있는 비료공장을 가지고 있습니다 .

여기서 자원을 못 가졌다는 것이 뒤떨어진 요인이 될 수 없다는 행복한 메시지를 발견하게 됩니다 . 자원을 못 가진 작은 나라들이 과학기술로 일어서는 예를 얼마든지 찾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

 

 

길은 얼마든지 있다

 

 

이러한 가슴을 부풀게 하는 사실을 우리는 앞에 놓고 있습니다 .

뒤떨어진 곳으로 알려진 대만이 이제는 적어도 수지공업 분야에서 선진국에 못 지않은 기술 개발로 세계와의 경쟁에 나서고 있습니다 . 그러나 아직도 대만은 앞으로 해야 할 더 많은 일을 남겨 놓고 있습 니다 . 대만을 상징적으로 표현한다면 17 세의 한창 자라는 청년이 12, 3 세 때 입던 작은 옷 을 들고 나오는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

이토록 대만은 여러 면에서 시급히 성장 , 발전해 왔고 새로운 경 제국가로 건설되고 있습니다만 아직도 과학기술이 뒤떨어져 있습니 다 . 이러한 사실을 직시한 대만 정부는 지난번 예산에서 25 억 달러 를 과학기술진흥비로 투자하고 있습니다 .

조국의 근대화 작업에서 교육만큼 중요한 사업이 있을 수 없습니 다 . 대만은 장 총통의 방침으로 지금 의무교육 9 년제를 실시하고 있습니다 .

 

 

한국인의 꿈

 

 

내가 방문한 경희대학교는 그 규모나 시설 , 특히 관현악단과 합창 단 , 도서관 , 경기장 등이 인상적이었습니다 .

경희대학교의 발전을 조 총장 개인의 꿈이 실현된 것으로 본다면 이것은 한국인 전체의 꿈이 새로운 한국을 이룩할 수 있다는 하나의 증거가 됩니다 .

이런 면에서 여러분은 삶의 보람을 깊이 느낄 수 있는 흥분된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 밝고 그릇된 것을 변형 , 개조할 수 있는 능력과 기회가 여러분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

끝으로 젊은 한국 학생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여러분에게는 비틀 즈 흉내나 내고 , 록큰롤이나 고고춤을 추는 방탕한 생활을 할 시간적 여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 정열을 다해서 빈농의 아들처럼 큰 포부를 갖고 나가야 합니다 . 할일이 여러분 앞에 산적해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 그러기 위해 여러분은 오직 전진 , 전진 , 전진해 야 할 것입니다 .

 

( 고정훈 역 )

  



후 기

 

 중국의 석학 임어당 ( 林語堂 ) 은 중화민국 복건성 ( 福建省 ) 태생으로 기독교 목사인 아버지의 뜻을 좇아 교역자가 되려고 신학교를 마쳤으 나 , 신학에 회의를 느끼고 자기 앞길을 새로 개척하기 위해 미국 하 버드대학과 독일의 라이프치히 대학에서 수학하고 북경대학에서 오랫 동안 영어 강좌를 맡았었다 .

이 책은 그의 명저 The importance of living 에서 우리들의 생활감정과 너무 동떨어졌거나 납득하기 힘든 몇몇 항목을 제외하고 거의 다 우리말로 옮긴 것이다 . 이 책이 세상에 나오자 미국에서는 현대의 고전으로 길이 후세에 남을 만한 명저라는 호평을 받았으며 오늘날 유럽 각국에서도 널리 애독되고 있다 .

이 책의 주류를 이루고 있는 것은 역시 대자연에 동화된 한 분신 으로서 유유자적하는 동양정신이다 . 따라서 이 책 속에 기록된 인생 의 모든 분야―종교 , 철학을 비롯하여 우리가 평소에 잠을 자고 떠 들고 하는 시정의 다반사에 이르기까지 이 정신이 후광을 이루고 있 다 . 다만 저자가 유럽 문명이 뼛속까지 젖은 연후에 동양 세계를 다루고 있는 점이 색다른 면이라고 할까 . 그러나 핏줄은 속일 수 없어 그가 어디까지나 동양의 아들임을 글 자체가 입증해 보여주고 있다 .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 ” 하는 물음은 오늘날과 같은 각 박한 세태에서는 진부한 잠꼬대일지 모른다 .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 하는 당위가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해서든지 살아야 하는 것이 급선 무이기 때문이다 . 그런 가운데서도 이 설문에 대한 해답으로서 “ 웃으 면서 살라”라고 한다면 우리는 적극적으로 환영할 수밖에 없다 . 단 , 어떻게 하면 웃으면서 살 수 있느냐가 문제이다 . 이 책에는 이 물음에 대하여 지혜로운 답변을 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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